'2017/04'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7.04.30 §(319) (게송)세존당입설산중~ / 백아와 종자기 / (게송)일견명성몽변회~ / 납월팔일 용맹정진 / 정중로월(井中撈月) / (게송)월마은한전성원~ / 거울 법문 / 이뭣고? 화두 / 송담스님 오도송.
  2. 2017.04.26 §(538)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해야 / 진짜 목숨 바칠 것은 ‘이뭣고?’ ..
  3. 2017.04.24 §(538) (게송)좌석학견수학청~ / 고암, 전강 두 큰스님과 도살장 견학 / 시주것 무서운 줄 알아야 /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다.
  4. 2017.04.23 §(538) 발우공양은 음식(물질) 존중, 생명(자연) 존중,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수행 의식 / 물질의 쓰레기 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쓰레기 / 법신설법 / 마음보를 바르게, 맑게, 자비롭게.
  5. 2017.04.22 §(538) (게송)승침상속의선마~ / 오욕락, 탐진치를 용감하게 놔 버려야 / 한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 / 일(一) 찰나간에 구백생멸이 있는 그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줄 알아 발심(發心)해야.
  6. 2017.04.18 §(086) (게송)작야삼경월만루~ / 바른 선지식의 지도 / 최초의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이뭣고?’ /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 이 공부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해야만 할 그러한 길.
  7. 2017.04.16 §(086) 전강 스님의 선지식 정화 / 전강 스님에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법을 쓰신 만공 스님의 지도 /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 / 사교입선(捨敎入禪).
  8. 2017.04.09 §(297) (게송)유연막축환성이~ / 만년위패 법보단은 영가와 살아있는 우리들의 생사해탈을 위해 설립 / 참선법문을 듣고 수행해야 생사문제를 해결.
  9. 2017.04.08 §(031) 이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 / 무엇이든지 극(極)하면 터지는 것 / 법회 때의 청법 질서.
  10. 2017.04.06 §(031) 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 바른 신심이어야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 / 도를 깨닫고 우는 사람, 웃는 사람.
법회(성도재)2017. 4. 30. 22:00

§(319) (게송)세존당입설산중~ / 백아와 종자기 / (게송)일견명성몽변회~ / 납월팔일 용맹정진 / 정중로월(井中撈月) / (게송)월마은한전성원~ / 거울 법문 / 이뭣고? 화두 / 송담스님 오도송.

우리가 믿되 바르게 믿고, 철저하게 믿고, 바른 스승과 바른 도반을 만나서 올바르게 노력을 한다면 결정코 그 공(功)이 헛되지 아니해서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울만 거울이 아니라, 이 삼천대천세계 이 허공계, 끝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거울인 것입니다. 그 거울에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자기인 것입니다. 그 허공으로 된 거울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바로 자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 사람의 허물은 내 허물의 그림자다. 저 사람 잘못한 것은 바로 내 허물이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그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그 회사나, 그 사회나, 그 국가나, 그 세계에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쁜 것을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와 혀와 몸뚱이와 뜻을 통해서 느꼈을 때 바로 거기에서 자기를 반성을 하고, 자기의 허물을 고치고, 나아가서는 ‘참나’로 돌아오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진정코 참다운 자기 모습을 볼 것입니다.

‘대관절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이냐?’  끊임없이 작용을 하고 있는 이놈이 무엇인가? 어떻게 그놈을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까. 잊어 버릴라야 잊어 버릴 수가 없고, 놔 버릴라야 놔 버릴 수가 없어. 갈 곳이 없어요.

미운 사람을 만날 때도, 할 것이 있습니까? 그 미운 그 사람 얼굴이 바로 자기 얼굴인데. ‘이뭣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데에다가 정신을 팔 겨를이 없습니다.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이 일 하나를 내놓고는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일 하나 충실히 하고 전력투구를 하면 정말 자기 마음이 안정이 되고, 자기 마음이 맑아지고, 자기 살아가는 데에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송담스님(No.319)—86년 병인년 성도재 법회(87.01.17) (67분) (용319)

 

(1/4) 약 20분.

 

(2/4) 약 17분.

 

(3/4) 약 12분.

 

(4/4) 약 18분.

 

 

(1/4)----------------

세존당입설산중(世尊當入雪山中)하사  인견명성운오도(因見明星云悟道)로다
나무~아미타불~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런들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나무~아미타불~

세존당입설산중(世尊當入雪山中), 우리 세존(世尊)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셔서 갖은 고행을 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인견명성운오도(因見明星云悟道)여. 납월 8일(臘月八日) 새벽별을 보시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런들, 만약 그 산중(山中)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더라면,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어찌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갔을 것인가.

‘산중(山中)에서 자기(子期)를 만난다’ 그 자기란 말은 사람 이름인데, 종자기(鐘子期)라고 하는 사람 이름인데, 그 종자기는 아주 그 거문고, 음악을 달통한 사람이여.
누가 거문고를 타거나, 무슨 음악을 하면은 그 음악 소리만 듣고서도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 버리고, 그 음악의 뜻을 알아 버리고, 아주 음악에 달통한 도인인데.

백아(伯牙)라고 하는 사람이, 참 그이도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었었는데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란 사람이 그 음악을 들으면 벌써 백아의 뜻을 알아 버려. 그래서 백아와 자기는 지음상통(知音相通)이여. 말로써 뜻을 표현하지 안 해도 벌써 음악 한가락 떠억 들으면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친구 간(間), 저 사람의 희로애락을 서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면 말로써 구체적으로 그 심중을 표현하지 안 해도 상대방의 얼굴빛만 봐도 알고, 눈 한 번만 감았다 떠도 알고, 기침만 해도 알고. 그래서 그러한 친구 간을 지기(知己)라고 그러거든.

부부간에도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부부는 남편이 눈만 떳다 감거나, 고개를 좀 들었다 놓거나, 쪼끔 손만 이리 움직여도 ‘지금 남편이 무엇을 바라고 있다. 무엇을 요구한다’ 물을 떠다 드린다든지, 무슨 책을 갖다 드린다든지, 무슨 약을 갖다가 한다든지. 또 아내가 무엇을 해도 남편이 벌써 그 아내의 뜻을 알고서 해 주고.

친구 간도 그래야 마땅하고,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한 부부간에도 서로 그렇게 통해야 할 것이고 또 스승 상좌(上佐) 간에도, 그렇게 참 도를 배우는 스승 상좌 간에도 그리되어야 할 것이고.
또 나라의 통치자와 백성도 그렇게 서로 통해야 할 것이고, 모두 공장이나 회사 노사 간에도 그렇게 서로 심지(心志)가 통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백아라고 한 사람이 거문고를 타되 아무도 그 거문고의 참뜻을 알아준 사람이 없지마는 오직 종자기 한 사람이 그걸 알아주기 때문에 거문고를 자주자주 뜯고 그러다가 종자기란 사람이 먼저 죽었습니다.
종자기가 죽어버리니까 거문고를 타 봤자 아무도 알아들은 사람이 없고, 그 참다운 뜻을 감상해 주는 사람이 없고 그러니까 다시는 거문고를 뜯지를 않았다고 하는 중국에 옛날 전설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별을 보고 깨달으신 뒤에 종자기와 같은 그러한 사람을 거기서 만나셨다면 무엇 하러 노란 이파리를 들고 산밑으로, 산아래로 내려오셨겠느냐.
노란 이파리, 황엽(黃葉)이라 하는 것은 어린애를 달래기 위해서 노란 이파리를, 그 단풍잎 빨갛고 노란 그런 이파리를 주면서 “여기 돈 있다. 여기 돈 있다” 이러면서 어린애의 울음을 달래는 것인데, 여기서 ‘노란 이파리’라 하는 것은 방편설(方便說)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중생의 근기(根機)를 맞추어서 그렇게 횡설수설(橫說竪說)하신 여러 가지 그 방편 법문을 갖다가 여기서는 ‘노란 이파리’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산중에서 자기와 같은, 정말 부처님의 깨달으신 도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만났던들 무엇 하러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갔을 것이냐.


해마다 돌아오는 납월 8일(臘月八日)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이천오백삼십일 년이 되었습니다. 이천오백삼십일 해의 납월 8일이 지내가고 또 이렇게 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 그 납월팔일 새벽별을 보시고서 그렇게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이천오백삼십 회 동안 해마다 뜨는 그 별을 보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확철대오를 했을까요?

오늘 새벽에도 그 별은 떴습니다. 하늘이 안개가 끼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별은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납월 8일이 되면 초하루부터서 8일 새벽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선방(禪房)에서 중국이나 한국, 일본 이런 불교를 믿는 절에 선방에서는 다 용맹정진(勇猛精進) 또는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우리 용화선원에서는 특별히 용맹정진을 하는 그러한 거시기을 안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개인적으로 다 일주일간을 용맹정진 하는 그 마음으로,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모두 정진을 하셨던 것입니다.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한데  천년도핵장청매(千年桃核長靑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니라
나무~아미타불~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여, 한 번 그 새벽별을 보시고서 꿈을 문득 돌이켰다 그말이여. 오랜 잠 속의 꿈을, 별을 한 번 봄으로 해서 꿈을 턱! 돌이켜서 깨달아 버렸어.
천년도핵(千年桃核)이 장청매(長靑梅)다. 천 년이나 묵은 복숭아씨에서 푸른 매화의 싹이 텃드라. 복숭아씨에서 복숭아 싹이 나지 않고, 복숭아씨는 분명히 복숭아씨인데 그 복숭아씨에서 매화의 싹이 텃드라 그말이여.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비록 그 매화를 가지고, 그 매화의 신맛을 가지고 국의 맛을 고르지는 못하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일찍이 장군에게 그 목마른 것을 그치게 했더라.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군사들이 계속 격전을 거듭을 해가지고 땀을 많이 흘렸어. 그래서 목이 말라서, 그런데 모두 준비했던 물은 다 먹어버리고 미처 물 준비를 못하고 계속 싸우면서 나아가는데, 목이 말라가지고 군인들이 병사들이 발광을 한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때에 조조가 ‘저 산너머 가면 거기에 매실(梅實)이 많이 열렸다. 저 산만 넘으면 실컷 매실을 먹을 수가 있다’ 그 매실 얘기를 하니까 병사들이 ‘매실’ 말만 듣고도 침이 지르르르 하니 입안에 가득차가지고 갈증을 면한 고사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았다’하는 말, 그 말을 듣고서 ‘별을 보고 깨달았다’ 그러니까 납월 8일 무렵만 되면 온 천하에 총림 선원에서 모두 ‘우리도 부처님처럼 고행 정진하고, 용맹정진 다못 일주일간이라도 용맹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자’ 그래가지고 하는데. 가행정진 용맹정진 중에 확철대오를 한 분도 간간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가행정진 했다고 해서 그 대중이 다 깨닫느냐 하면은 그렇지를 못해.
그래도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 또는 가행정진을 하면 그동안에 장군죽비(將軍竹篦)를 가지고 경책(警策)을 하고, 이렇게 경책을 맞으면서 7일 동안을 옆구리를 땅에다 대지 아니하고 그렇게 정진을 하는데, 그 꾸벅 졸면은 입승(立繩) 스님이 와가지고 장군죽비로 등짝을 내다 친 바람에 잠이 버쩍 버쩍 잠이 달아나고 그런데.

그 장군죽비를 안 맞으려고 어떻게 눈을 갖다가—처음에 한 3일간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사흘, 나흘이 되면은 눈 껍데기가 천근이나 되게 눌리고, 아무리 정신을 들라고 해도 금방 일 초도 못된 사이에 꺼벅한다 말이여. 또 금방 정신을 딱 차렸는데 또 꺼벅하고.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하다 보면 그때 하는 동안에는 순전히 잠을 안 자려고 싸울 따름이지만, 납월 8일을 지내고 나서 보면은 정말 정진하는 데에 자신감이 생기고 힘이 생긴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실지로 일주일 동안은 그렇게 맑은 정신이 난 것 같지 않고 오직 잠과만 싸웠지만, 지내 놓은 뒤에 한결 정진하기에 힘이 생기고, 신심도 나고 그래서 납월 8일에는 선방에서 대체적으로 가행정진도 하고 용맹정진도 해왔던 것입니다.

비록 매실을 가지고 국 맛은 고르지를 못해. 저 산너머에 있는 ‘매실이 있다’한 그걸 가지고 실지로 그 매실을 마시고, 먹을 수는 없지마는 그 말만 듣고서도 입안에 침이 주르르르 나와 가지고 입안에 고여서 갈증을 면할 수가 있더라.

이 게송(偈頌)이 함축하고 있는 뜻을 내가 설명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처음~19분24초)





(2/4)----------------

「승기율(僧祇律)」이라고 하는 경책(經冊)에 ‘정중로월(井中撈月)이다. 샘 가운데에 달을 붙잡는다. 샘 속에 들어있는 달을 건진다’하는 내용의 법문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을 향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과거 시(時)에 그 나라는 가시국(伽尸國)이라 한 나라고, 그 가시국이라 한 나라에 바라나(波羅奈)라고 하는 성(城)이 있었는데 그 성안에 숲이 있어. 아주 우거진 숲이 있는데 그 숲속에는 오백 마리의 원숭이 떼들이 있었어.

근데 오백 마리의 원숭이를 이끌고 그 원숭이의 우두머리가 오백 마리의 권속을 이끌고 그 숲속을 유행(遊行)을 해. 이 골짜구니에서 저 골짜구니로, 저 골짜구니에서 이 골짜기로 이렇게 다니다가 한 우물이 있는데, 샘이 있는데, 그 샘 속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그말이여. 환희 밝은 쟁반같이 밝은 것이 보이는데.

‘참 이상하다. 저게 분명히 저것이 달인데, 아무래도 저 달이 떨어져가지고 우물에 빠져서 죽게 되었어. 저 우물에 빠져서 죽게 된 달을 건져야지 만약에 저 달을 건지지 아니하면 온 세계에 암흑세계가 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다행히 우리가 저 달을 발견했으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우리가 보지를 않았던들 영원히 저 샘 속에 빠져서 없어져버리면 하늘에는 영원히 암흑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저것을 못 봤으면 모르되 보고서 그냥 둘 수가 있느냐’

그래서 여러 가지로 오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연구를 한 결과 그 우두머리가 좋은 꾀를 하나 발견을 했습니다.
우물가에 있는 나뭇가지를 자기가 붙잡고, 자기 다음 원숭이는 우두머리의 꼬리를 붙잡고 또 그다음 우두머리는 그 앞에 꼬리를 붙잡고 해서 차츰차츰해서 꼬리에 꼬리를 붙잡고 우물 속으로 늘어져 들어가 가지고 마지막 원숭이가 달을 건져내면 되겠다.

거 참 좋은 꾀다. 그래가지고 하는데 오백 마리나 되는 원숭이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붙잡고 늘어져 놓으니 너무 무거워가지고 우두머리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렸습니다. 부러져가지고 오백 마리나 되는 원숭이가 우물 속에 다 빠져서 죽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셔가지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또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이 세계에 전하시고서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자아 면목(面目)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고서 열반에 드셨는데,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는데,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부처님의 법을 계계승승(繼繼承承)해서 그렇게 전해 내려오고 또 그 법이 많은 신남신녀와 모든 재가 출가의 모다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이 그 법을 믿고 부처님과 조사들의 득도(得道) 인연을 본받고 그래가지고 모두 경을 읽는다, 염불을 한다, 주력을 한다, 기도를 한다, 또 참선을 한다, 이래가지고 모두 발심(發心)하고 분심(憤心)을 내어가지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장한 일이요, 기특한 일이요, 고마운 일이요, 뭐라고 칭찬을 한다 하더라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참 훌륭한 일이나, 그 원숭이 우두머리가 잡은 그 나뭇가지가 뚝! 부러진 날이면 오백 마리의 잔나비가 일시에 달을 건지려고 하다가 우물에 다 빠져 죽어 버린 거와 같은 현상이 있을 수가 있다 이거거든.

제마다 모두 자기의 근기에 따라서 온갖 노력을 하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 붙잡은 가지가 그것이 약한 가지, 뿌리가 얕이 백혔다든지 또는 나뭇가지가 약해가지고 뚝 부러진 날이면 어떻게 되느냐?

그래서 우리가 자기 딴은 신심을 내서 노력을 하지만 그 공부해 나가는, 자기가 믿는 법이라든지, 자기가 의지하는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선지식이라든지, 큰스님네라든지, 그런 것들이 뿌리가 약하거나, 가지가 약한 것을 붙잡고 하다가 뚝 부러져가지고 우물에 빠져 버린 거와 같은 현상이 우리가 수행해 나가는 데에 그런 현상이 있을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기도를 자기 나름대로 아들을 낳고자 원을 해서 무슨 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부자가 되고자 해서 무슨 염불을 한다든지 또는 깨닫고자 해가지고 화두(話頭)를 타가지고 참선(參禪)을 한다든지, 각기 자기의 근기와 원에 따라서 하는데,
그것이 자기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아니 해 가지고 잘못 잡아가지고 손이 미끄러져서 빠진다든지 또 꽉 붙잡아도 약한 가지를 붙잡았다든지, 뿌리가 약한 것을 붙잡았다든지, 또 같이 모다 이렇게 잡고 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손이 빠져도 뚝 떨어질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각기 ‘자기의 종파(宗派)의 법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주장을 하고 또 이렇게 공부를 하고,
또 같은 참선을 하되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에 따라서 ‘자기가 믿는 선지식이 지도하고 가르키시는 법이 옳다’고 주장을 하고, 자기가 믿지 않는 선지식을 비방을 하고 모다 이래가지고 저마다 ‘자기 것은 옳고 남의 것은 옳지 못하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서로 파가 갈라지고, 시기와 질투를 하고 모다 그러는데.

참, 더욱이 요새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참선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고, 대단히 참 좋은 현상이기는 하나 행여나 잘못 붙잡거나, 약하고 뿌리가 옅은 그런 나무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결국은 손이 빠지거나, 뿌리가 뽑히거나, 가지가 부러지거나 하면 달은 건지지를 못하고 우물에 빠져 죽고야만 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리고 가르킬라야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도 없는 그 한 물건을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정진을 하고 집안일을 갖다가 뒤로 미루고 이 한 일을 위해서 애를 쓰고.
또 일생에 안 태어난 셈치고 가정과 자기의 청춘과 인생을 다 바쳐서 출가해가지고 도(道)를 닦고 그러는데.

이 원숭이가 만약에 튼튼한 나무를 붙잡고 달을 건질라고 애를 쓰다가 나뭇가지만 부러지지 아니했다면 몇 번이고 건질라고 시도를 하면은, 물에다가 손을 넣으면은 달이 흩어져버리고 또 한참 손을 빼고 기다리고 있으면 그 흩어졌던 달이 다시 또 온전해지면 또 가만히 건질라고 하면 빠지고,
누차 애쓰다 보면 ‘아! 이것이 물속에 있는 달이 아니고 이 달이 바로 저 하늘에 있다. 저 하늘의 달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하늘의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고 원래 그 달은 하늘에 휘황창 밝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되 바르게 믿고, 철저하게 믿고, 바른 스승과 바른 도반을 만나서 올바르게 노력을 한다면 결정코 그 공(功)이 헛되지 아니해서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한데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하되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요, 달이 저 하늘에 돌고 도는 가운데에 점점 둥글어져.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그 밝고 밝은 달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는구나.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이나, 원숭이들이 팔에 팔을 연결을 해가지고 부질없이 그 우물 속에 달을 건지려고 하나,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하늘에 떠있는 그 둥근달은 본래 푸른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더라.

우리가 불법을 믿되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원(願)이 있어서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절에를 오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처음에는 작은 원, 가까운 원, 자기 나름대로 모두 원을 가지고 와서 차츰 절에 다니고, 다니면서 법문(法門)을 듣고 하다 보면 차츰차츰 인연이 도래(到來)하면 인자 바르게 믿게 되는데.

자기가 애당초에 잘못 믿어가지고, 기도를 해도 아들을 낳기 위해서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고 시주(施主)를 하되 아들을 못 낳으면 ‘에이, 그까짓 거 기도 해봤자 소용이 없다’
또 부자가 된다고 그래서 기도를 해봤지마는 별로 부자도 되지도 않고 ‘에이, 그까짓 것 불법 믿어봤자 소용이 없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불공을 하고 시주를 했는데 ‘그 해봤자 그까짓 것 소용이 없다’

그러자 마치 다른 종교에서 ‘이 종교 와서 기도를 하면은 그 병도 고칠 수가 있고 부자도 된다’고 끈질기게 와서 졸라대고 유혹을 하면 솔깃이 그리 기울어져가지고 그런 데에 가서 개종(改宗)을 하기도 하고. 참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불교가 아무리 정법이고 최상승법이라 하더라도 잘못 믿으면 그렇게 되기가 십상팔구(十常八九)인 것입니다.

옳게 믿으면 처음에는 옅은 데로 들어갔다가 그 믿음이 간절하고 한결같으면 차츰차츰 좋은 인연을 만나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법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절에 갔다가 결국은 ‘참나’를 깨닫고 영원한 보배를 얻을 수 있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쓰고도 쓰고 남을 그러한 영원한 보배를 얻은 데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19분30초~36분46초)





(3/4)----------------

어떤 사람이 남편이 중국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좋은 거울을 사가지고 와서 선사를 했습니다. 그 아내가 남편이 갖다 준 것을 보고 이리 들여다보니까 아주 이쁘게 생긴 미인이 하나가 들어있거든.

옛날에는 거울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중국에 가 가지고 거울을 가지고 오니까 거울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남편이 ‘이거 참 좋은 것 가지고 왔으니까 이거 가지라’고 줬는데 요리 들여다보니까 이쁜 미인이 들어와 있어.
‘중국 갔다가 오더니 어디서 아주 새파란 젊은 년을 갖다가 데리고 왔다’고 아주 그냥 남편한테 눈을 흘기고 막하고. 그래서 ‘아니 그것이 아니라고, 내가 무슨 여자를 데리고 왔느냐?’고. ‘요 속에 들어 있지 않느냐’고 한참 싸우다가 결국은 시어머니한테 그것을 보였습니다.

시어머니가 그 거울을 이리 들여다보니까 ‘젊은 여편네라더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지 않느냐’ 그래가지고 ‘너는 왜 눈이 젊은 것이 그렇게 눈이 시원찮으냐. 이거 봐라 이것이 늙은 년이지 젊은 년이냐?’ 그러다가 한참 둘이 인자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시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뭔 소리를 그렇게 시끄럽게 그래싼고?’

‘아들이 중국에서 젊은 년을 데리고 왔다고 며느리가 그래서 보니까 젊은 년이 아니고 늙은 년을 데리고 왔구료’ 그러니까, 영감이 들여다보니까 ‘늙은 년켕이는 늙은 놉을 데리고 왔지 않느냐?’
이래가지고 결국은 거울이 무엇인 줄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 거울이라는 것은 그 앞에 있는 고대로 비추는 것이어서, 늙은 사람이 들여다보면은 늙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고, 젊은 사람이 들여다보면 젊은 사람 얼굴이 나타나는 거여.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눈을 통해서 보는 모든 것이 다 이 거울에 나타나는 자기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이 나타난 줄을 모르고 거울 속에 젊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둥, 늙은이가 나타났다는 둥 이래가지고 거울 속에 있는 그 모습을 그것을 가지고 마음을 일으켜서 성을 내고, 원망을 하고, 그 탓을 갖다가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는 바로 그것이 자기의 얼굴인 것입니다. 

중국에서 가져온 거울만이 거울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울만 거울이 아니라, 이 삼천대천세계 이 허공계, 끝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거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울은 동서남북이 평면으로 된 거울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된 거울이여. 동서남북도 없고 상하가 없어. 어디서 보나 다 보이는 것인데. 이 거울은 물체만 그 안에 보이고 또 거울에 나타난 모습은 눈을 통해서만 볼 수가 있는데.

이 허공의 거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색상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도 그 허공의 거울에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코를 통해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도 그 거울에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혀를 통해서 맛볼 수 있는 모든 맛도 그 거울에는 나타날 수가 있고, 몸뚱이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도 거기에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법도 그 허공의 거울에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거울을 입체적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입체적이라 하면은 겨우 삼차원(三次元) 밖에는 안 되는 것인데, 허공으로 된 이 거울은 최소한도로 육차원(六次元)으로 된 거울이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상대가 그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육차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거울에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자기인 것입니다. 그 허공으로 된 거울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바로 자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자기의 모습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음성이요. 코로 맡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내음이요. 혀로 맛볼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맛이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몸이고, 뜻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나타나는 것은 바로 자기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허공으로 된 거울의 뜻을 잘 이해만 한다면 어디에서나 언제라도 자기의 모습을 볼 수가 있고, 자기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자기의 내음을 맡을 수가 있고, 자기의 맛을 알 수가 있고, 자기의 몸을 촉감 할 수가 있고, 자기의 마음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거기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거울에 나타난 자기의 모습을 보고서 ‘더럽게 생겼다’고 욕을 퍼붓고 심지어 그 거울 속에 그런 것이 들었다고 거울을 부실려고 달라들고 그러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울에 나타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꼽이 끼었으면 눈을 닦고,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그것을 닦고 그리고 그 얼굴에 예쁘게 단장을 하면은 될 것을 어찌 거기에 나타난 모습이 미웁다고 그것을 원망하고, 탓하고, 성을 내면 그 거울에는 점점 보기 싫은 모습이 나타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허물은 내 허물의 그림자다. 저 사람 잘못한 것은 바로 내 허물이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그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그 회사나, 그 사회나, 그 국가나, 그 세계에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쁜 것을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와 혀와 몸뚱이와 뜻을 통해서 느꼈을 때 바로 거기에서 자기를 반성을 하고, 자기의 허물을 고치고, 나아가서는 ‘참나’로 돌아오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진정코 참다운 자기 모습을 볼 것입니다.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엇을 맡을 때나, 무엇을 먹을 때나, 무슨 생각이 나거나 바로 그 찰나 찰나가 자기가 자기의 모습을 보고서 그 잘못된 곳을 고쳐 나갈 수 있는, 그리고 자기를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거울로 잘 사용을 해 나간다면 우리는 나날이 아름다워지고, 나날이 향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는 곳은 그 집안은 항상 몸도 아름답고 예쁘고,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선방에서 모두가 다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모든 시비는 다 끊어질 것이고, 선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법(法)의 기쁨과 선(禪)의 즐거움으로 가득찰 것이며 모든 대중은 서로서로 좋은 도반(道伴)이 되어주고, 서로서로 좋은 선지식이 되어 줄 것입니다.

내 거울을 통해서 저 사람이 예뻐지고, 저 사람 거울을 통해서 내가 예뻐 질 것입니다.
물속에 떨어진 그 달을 건지려고 애를 쓰다가 하늘에 떠 있는 참 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36분50초~48분22초)





(4/4)----------------

‘이뭣고?’  ‘이뭣고?’하면 좋다고 하니까 모두 ‘이뭣고?’
‘이뭣고?’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그저 ‘이뭣고?’. 무조건하고 ‘이뭣고?’만 하라 하니까, 무조건하고 ‘이뭣고?’

몇 해를 하다가 “아, 스님 ‘이뭣고’가 무엇입니까? 대관절”
정말 ‘이뭣고?’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이뭣고?’를 여러 해를 하고 있는 그런 할머니도 계십니다. “이뭣고가 영어요?”

‘이뭣고?’란 게 대관절 도대체 ‘이뭣고?’ 소리가—경상도 사시는 분은 ‘이뭣고?’가 바로 ‘이것이 무엇인고?’하는 말이라는 것을 대번 아시겠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모르는 사람은 “‘이뭣고’가 이모꼰가? 이뭐꼰가? 이 뭐꼰가? 도시 이뭣고란 것이 어디 말이냐?’고 물어봅니다.

‘알 수 없어야 옳게 한다’고 그러니까는 알 수 없으니까 자기가 지금 옳게 해 가는 줄 알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모르면은 ‘이뭣고?’를 해야 결국은 스스로 깨닫게 된다 하니까 ‘이뭣고?’가 영어인지, 한국말인지 그것도 모르면서 그저 ‘이뭣고?’만 하다 하다가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으니까 참다 참다 못해가지고 “대관절 ‘이뭣고?’란 게 무엇입니까?”

참 그쯤 천진하고, 참 웃음이 나올 정도로 천진한 할머니지만 나는 그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참 갸륵하게 느꼈습니다.
정말 저런 정도로 천진하고, 무조건하고 좋다고 하니까 그저 자나깨나 ‘이뭣고?’만 한 그 할머니의 그 믿은 자세가 틀림없이 이 할머니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저만큼 마음의 때가 없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그러니 저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정말 고통 없이 공양 잘 자시고 이야기하시다가 스르르르 하니 미소를 띠면서 숨을 거두실 것이다.
어찌 보면 바보스럽고, 참 어찌 보면은 천진하고, 그러한 단순하고도 천진한 마음이 참 너무너무 나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었습니다.

이 무엇고?
‘이 무엇고?’는 ‘이것이 무엇인고?’하는 경상도 말로 ‘이뭣고?’ 이뭣고인데.
지금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말을 들을 줄 알고, 성도 낼 줄 알고, 또 기뻐할 줄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집을 생각하면 집이 환하고, 한 20년, 30년 전에 어렸을 때 일도 생각하면 환하거든.

몸뚱이는 문을 잠가 놓으면 밖을 나갈 수가 없지만 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가 놔도 그놈은 맘대로 출입을 해. 집에도 갔다 오려면 갔다 오고, 서울역도 갔다 오려면 갔다 오고, 미국도 갔다 오려면 갔다 오고, 10년 20년 전도 시간도 막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삼천년 전으로 갔다 올 수 있고.
지금 삼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부처님께서 도를 닦으시던 설산도 갔다 오려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갔다 올 수가 있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걸림이 없이 왔다갔다하는 놈이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대관절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을 줄 알고, 혀를 통해서 쓰다 달다 짜다 다 알 수 있고, 몸뚱이를 통해서 춥다 덥다 부드럽다 까끄럽다 다 알 수 있고, 생각을 통해서 이것은 좋다 나쁘다 그르다 다 알 수가 있어.

눈은 색상밖에는 볼 수가 없는데, 이놈은 색상도 보고,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고, 맛도 보고, 몸뚱이로 모든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판단을 하고. 이렇게 여섯 가지의 관능(官能)을 자유자재로 해.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이냐? 그거거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놓칠라야 놓칠 수가 없습니다.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 때문에 화두를 놓쳐버린다 그러는데 사실은 놓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갈 곳이 없어요.

지가 눈을 통해서 보지 아니하면 귀를 통해서 듣고, 그렇지 않으면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그렇지 않으면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하고, 몸뚱이로 춥고 덥고를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거침없이 돌아다니면서 다 작용을 하는데,
눈은 감으면 볼 수가 없지만 이놈은 눈을 감거나, 귀를 막거나, 조끔도 상관이 없이 활동을 하고 작용을 하거든. 심지어 잘 때에는 꿈을 통해서 이놈이 작용을 합니다. 이 몸뚱이가 죽어도 영혼이 되어가지고 육도(六途)를 왕래를 합니다.

‘대관절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이냐?’  끊임없이 작용을 하고 있는 이놈이 무엇인가?
어떻게 그놈을 잊어 버릴 수가 있습니까. 잊어 버릴라야 잊어 버릴 수가 없고, 놔 버릴라야 놔 버릴 수가 없어.

어떤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사람이 부처님을 보기가 싫어서 집으로 도망가 가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리고서 이불 속에서 열 손가락으로 눈을 가렸는데, 열 손가락 사이마다 부처님 얼굴이 보여. 그러한 설화가 있습니다마는 ‘이뭣고?’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안 보려고 눈을 감아도 환하고,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도 환하고, 냄새 안 맡으려고 코를 막아도 그놈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별별 짓을 다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화두를 잊어 버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지 안 잊어 버리기는 그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가 보지 아니하면 듣고, 듣지 아니하면 맡고, 여섯 구녁을 통해서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놈이 작용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놈을 안 볼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뭣고?’  ‘이~하는 이놈이 뭣고?’ 잊어 버렸다고 한탄하지 말고 자꾸 챙기는 것뿐인 것입니다.
무엇을 볼 때에도 ‘이뭣고?’ 무슨 소리가 들려도 ‘이뭣고?’ 시끄럽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운 줄 아는 놈이 있는데 어떻게 그놈을 시끄러운 것이 문제가 되냐 그말이여.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챙기고 또 챙기고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턱! 나타나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경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조사와 모든 고인(古人)들이 몸소 행해서 다 증험을 한 것인 것입니다.

미운 사람을 만날 때도, 할 것이 있습니까? 그 미운 그 사람 얼굴이 바로 자기 얼굴인데. ‘이뭣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데에다가 정신을 팔 겨를이 없습니다.

시어머니가 야속하고, 남편이 야속하고, 동기간이 야속하고... 야속할 겨를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 야속한 그 상대가 바로 자기의 모습이고, 자기의 얼굴이고, 자기의 마음인 것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이 일 하나를 내놓고는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일 하나 충실히 하고 전력투구를 하면 정말 자기 마음이 안정이 되고, 자기 마음이 맑아지고, 자기 살아가는 데에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옛날에 그렇게 밉고 원망스러웠던 사람이 하나도 미운 생각이 없어지고, 정말 고맙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납월팔일 부처님이 성도하신 성도재(成道齋) 날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살아 있는 그 법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알뜰하게 정진을 할 것을 다짐합시다.

선방에 계신 스님네나 또 보살님네, 또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시는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장소가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생활 현장이 살아 있는 수도장(修道場)이요, 선방인 것입니다.

교육대학에 모다 다니는 학생들이 국민학교 모다 그런 데 나가서 실지로 그 학생들에게 가르키는 그런 기간이 있습니다마는, 자기 학교에서 계속 이론적으로만 배운 것 보단 실지로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가르켜 봐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살아 있는 공부인 것입니다.

선방에 오셔서 공부하시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이지만 여러분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 생활 현장에서 시부모를 상대할 때, 남편과 아내를 상대할 때, 또 자식과 며느리를 상대할 때, 또 직장에서 모든 사람을 상대하고,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바로 그 속에서 속이 상할 때, 기쁘고 슬플 때, 바로 그때 그 찰나 찰나를 잘 살려서 즉시즉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화두로 돌이키면서 바로 그 자기의 흔들릴 뻔하는 그 생각을 바로잡고, 끌려갈 뻔한 그 자기 생각을 딱 중심을 잡아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찰나 찰나를 그렇게 사시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사시고, 일 년을 또 그렇게 사신다면 우리는 결정코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과거의 모든 선지식들이 우리를 속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분 따라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들도 바로 이 결제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탐심 진심 치심 이 삼독심..(녹음 끊김)


황매산정(黃梅山庭)에 춘설하(春雪下)한데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십년왕비력(何事十年枉費力)고  월하섬진대강류(月下蟾津大江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황매산정(黃梅山庭)에 춘설하(春雪下)한데, 황매산 뜰에 봄눈이 내렸는데,
한안(寒雁)이 여천향북비(唳天向北飛)로구나. 차운 기러기가 하늘에서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 구나.

하사(何事)로 십년왕비력(十年枉費力)고, 무슨 일로 십 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가.
월하섬진대강류(月下蟾津大江流)로구나. 달 아래 섬진 대강이 흐르는구나.(48분23초~66분39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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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世尊當入雪山中  因見明星云悟道’ ; 「순당(巡堂)」 의식에 있는 ‘입산게(入山偈)’ 참고.
[참고] 입산게(入山偈)
世尊當入雪山中  一坐不知經六年  因見明星云悟道  言詮消息遍三千
세존께서 설산에 들어가셔서  한 번 앉음에 여섯 해 지남을 알지 못했네.  새벽별을 보시고서 깨달으시니  그 말씀 그 소식 삼천세계에 가득하여라.
*순당(巡堂) ; 예불 후의 의식으로 모든 대중이 순당 의식에 있는 게송을 창화(唱和)하며, 게송의 내용으로 각자의 수행하는 마음을 점검하며, 예불을 행한 당내(堂內)를 한 바퀴 도는 것을 말한다.
*(게송) ‘若也山中逢子期  豈將黃葉下山下’ ; [태고집(太古集)] (雪栖 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석가 출산상(釋迦出山相)' p229 참고.
*세존(世尊) : [범]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로가나타(路迦那他)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샛별이 뜰 무렵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하(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한다. 일명 성도재일(成道齋日).
*새벽별 ; 샛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지기(知己 알 지/자기 기) ; 자기(自己)의 속마음을 잘 알아주는[知] 참다운 벗. 지기지우(知己之友).
*백년해로(百年偕老 일백 백/해 년/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되어 한평생 오랜 세월[百年] 잘 살면서 함께[偕] 늙음[老].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심지(心志) ; 마음속에 품은 뜻.
*황엽(黃葉) ; 버드나무의 누런 잎을 금(金)이라 하여 어린이에게 주어서 울음을 그치게 한 것. 부처님이 천상의 낙과(樂果)를 설하여 인간의 악을 그치게 함에 비유한 것.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曇無讖 譯) 제20권. 제9 영아행품(嬰兒行品).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횡설수설(橫說竪說 가로 횡/말씀 설/세로 수/말씀 설) ; 두서(頭緖)없이 이것저것 되는대로 지껄임.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게송) ‘일견명성몽변회~’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권 3칙 '오도(悟道)' 취암종(翠嵓宗) 게송 참고.
[참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있는 내용으로,
조조(曺操)가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 행군 도중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고통이 아주 심했는데, 이때 조조가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저 앞에는 넓은 매실나무 숲이 있는데, 그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잠시만 참고 힘을 내자.”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고 입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게 되었다 한다.

육조 시대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있는 내용으로,
진(晉)을 세운 사마 염(司馬炎)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 길을 잘못 들어 헤매어 식수가 바닥이 났고,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병사들은 갈증이 심하여 더 이상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염은 문득 꾀를 내어 말하기를 “여러분 조금만 참고 가면 저 언덕 너머에 매화 숲이 있소. 그 곳에 가면 매실이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려 있소.” 매실이란 말을 들은 병사들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잊었다.
*장군죽비(將軍竹篦) ; 보통 죽비(竹篦)는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약 2m의 큰 죽비.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 책)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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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기율(僧祗律) ;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 동진(東晉)의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법현(法顯) 공역.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 곧 대중부(大衆部)의 율장(律藏). 1권에서 35권까지는 비구계이고, 후반의 5권은 비구니계이다. 대중율(大衆律)이라고도 약칭한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8, p34에서.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説者는  爲教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教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教門)이 되었다。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教)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教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가  皆是教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教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教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삼처전심(三處傳心) ; 세존이 가섭(迦葉)존자에게 마음-선(禪)의 등불을 따로 전했다는 세 곳.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영산회상거염화 靈山會上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사라쌍수하곽시쌍부 沙羅雙樹下槨示雙趺)이 세째이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
다자탑(pahuputraka)은 중인도 비사리(毘舍離Vaisali)성 서북쪽에 있다。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떤 장자(長者)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이룬 뒤에, 그 아들 딸 육십 명이 아버지가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그 곳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를 낮보았다。이에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를 나누어 두 분이 함께 앉으셨다 한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사라쌍수하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 :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
부처님께서 북부 인도의 구시라(拘尸羅 Kusinagara)성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그리하여 학의 숲(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몸은 금으로 만든 관에 모시고 다시 구리로 지은 덧곽에 모셔 두었는데, 먼 곳에 갔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7일 만에 당도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3번 돌고 3번 절하매, 관곽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계계승승하다(繼繼承承-- 이을 계/받들·이을 승) ; ①(자손이)여러 대를 이어 가다. ②(다른 사람이)먼저 사람이 하던 일을 이어받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득도(得道) ; 득도(得度). ①불교의 진리[道]를 체득(體得)하는 것. 깨달음. 깨달음을 이룸. ②제도(濟度)함을 얻는[得] 것.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감[度]. 또는 다른 사람을 이끌어서 건네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종파(宗派) ; 한 종교에서 교리나 의식의 차이로 나뉜 큰 갈래.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게송) ‘월마은한전성원~’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舒펼(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십상팔구(十常八九) ; 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3/4)

* ; ①‘머슴(이전에,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대가를 받는 사내)’의 사투리. ②그날그날 품삭과 음식을 받고 일을 하는 품팔이 일꾼.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4/4)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관능(官能 지각하는 기관 관/능할 능) ; ①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器官)의 기능(機能). ②오관(五官 눈,귀,코,혀,피부) 및 감각의 작용.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게송) ‘황매산정춘설하~’ ; 송담 스님 오도송(悟道頌).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17. 4. 26. 10:23

§(538)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 진짜 목숨 바칠 것은 이뭣고?’ 밖에 없다.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알려면 사무실에서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물론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도 가서  듣다 보면은 그 속에 좋은 법문이 많이 나오지만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참선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수없이 들어야 .

 

화두는 이뭣고?’ 알  없는 의심. 이 세상에 사람이 나와서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여. 정말 목숨 바쳐서  것은 이것밖에 없어. 다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직업, 위치에서 모든 것을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538)—94 11 첫째일요법회 (용538)

 

약 7분.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이 많으신데 스님네나 또 신도님네들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화두, 천칠백 공안이 있습니다.

화두라고도 하고,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화두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화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눈으로   알고 귀로 들을  알고 무엇을 생각할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그럴  아는 놈이  안에 있다 그말이여.

눈으로는 볼라야  수도 없고 손으로는 잡을래야 잡히지도 않지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우리를 이렇게 운전하고 있어.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이    없는   물건으로부터 나오는데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를 줄여서 말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숨이 나갔으면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거든.

 

이것은 지식이나 이론적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그놈을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無條件)하고 이뭣고?’ 그렇게만 의심을 하는 거여.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처음에는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하지마는 이뭣고?’한  끝에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다시 거기다 이뭣고?’ 안 해도 .

  없는 의심을 타악~ 관조(觀照)하거든. 숨을   쉬어도 고대로 있으면 고대로 관(觀)하고, 숨을     다섯 번을 들어마셨다 내쉬어도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고대로 이뭣고?’ 다시 안 해도 있는  의심을 관하는 거여.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거나   의심이 없어지면 그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다시 이뭣고?’ 다시  챙기는 거여.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져 있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일을  때도 고대로 있고, 걸어갈 때도 고대로 있고, 화장실에 가서도 고대로 있고, 잘라고 누워서도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어. 있는 그대로,  빨리 잘라고 생각할 것도 없어.

 

   없는 의심,  화두만 들고 잠이 언제   모르게 오면은 그대로...  꿈에서도 하게 되고  이튿날 새벽에 눈을 뜨면은 어제 저녁에 들던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때 새로 화두 들 것도 없이  들어 있는  화두, 들려 있는 화두 고대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이런 상태로 일주일이  가서  터지게 된다 그말이여.  터지게 되면은 그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빨리 깨달을라고  벼락 신심을  가지고 어거지로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앉는 자세와 호흡하는  그리고 화두를 드는 법도화두도 눈탱이를 찡그리고서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면 그러면 골치만 아프고 머리만 뽀개질라고 해서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여.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알려면 사무실에서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물론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도 가서  듣다 보면은 그 속에 좋은 법문이 많이 나오지만 우선초학자(初學者)는 「참선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수없이 들어야 .

 

듣다 보면,   들어 갖고는 별로 어려운 말이 있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앉는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라면은 여러 번 들으면서 떠억 자세도 가다듬고 호흡법도 가다듬고 화두 드는 법도 떠억해서 자연히 공부하는 법을 옳게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은  모르고 그래가지고 욕심만 앞질러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좁은 구녁에다가 송아지 몰아 넣듯이 그러면 안되거든.

 

모든 것은 바른 방법이 있는 것이고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지, 바른 방법을 모르고 열심히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그렇게 아시고.

 

화두는 이뭣고?’

  없는 의심.

 

 세상에 사람이 나와서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여. 정말 목숨 바쳐서  것은 이것밖에 없어.

다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모든 것을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6753~7448)()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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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 의미하는 .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리(事理)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바가 아니다」라고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말씀  말씀이 마치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 바란들 어찌 가히   있으랴?

 

做工夫호대 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活路] 찾는 것같이 할지니,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 ②지()로써 (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 (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 ()하여 바르게 아는 .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하여 체성(體性) 없음이 마치 물에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功行]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 () 앞에 나타나 ()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벼락 신심 ; 빨리 깨달음을 구하고자 벼락치듯이 몹시 빠르고 세차게 일으키는 신심. 그런데 수행 정진은 올바른 방법을 모르고 욕심만 앞질러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하다 보면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반드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 ;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 스님께서 하신 모든 법문은 참선법을 핵심으로 설하신 법문입니다.  가운데 참선법 A~E’라고 하여 처음 참선하는 분을 위해 5개를 선정하여 놓은 법문입니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우격다짐 ; 억지로 우겨 내몰거나 강요함.

 

Posted by 닥공닥정
하심 팔풍 경계대처2017. 4. 24. 15:04

§(538) (게송)좌석학견수학청~ / 고암, 전강 두 큰스님과 도살장 견학 / 시주것 무서운 줄 알아야 /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다.

 

우리는 배울 것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만 배우고 절에 오면 스님네한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자연 현상에서 잠시 동안도 배우지 아니하고선 안돼.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아. 그래서 돌을 보면 견고한 것을 배우고, 물을 보면은 맑음을 배우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보면은 곧은 절개를 배우고, 달을 보면 밝음을 배운다.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남의 모든 허물이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살 화현이 저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송담스님(No.538)—94 11 첫째일요법회 (용538)

 

약 11분.

 

좌석학견수학청(坐石學堅水學淸)하고  대송사직월사명(對松思直月思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언만상개사우(無言萬像皆師友)한데  수독산림주반성(雖獨山林主伴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좌석학견수학청(坐石學堅水學淸)이요, 돌에 걸터앉으면은  돌한테 견고한 것을 배우고, 우리가 물을 보거나 물속에 들어가고 물을 사용할 때에는 청정한 것을 배워야 . 

대송사직월사명(對松思直月思明)이다. 소나무를 떠억 보면은 소나무의  곧은 절개를 거기서 배우고, 환하게 밝은 달을 보면은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는  밝음을 배워야 한다 그거여.

 

우리는 보고 듣고 일상 생활에 대하는 자연이라든지 상대가  많은데 그런 것을 대할  바로 그것을 배울 바가 있어야 한다 그말이여.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는 정부를 탓하고 업자를 탓하고  탓하는데 그치지 말고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 무엇인가 거기서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해.

하물며 정부나 관공서에서는 업자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업자를 몰아대고, 업자는 자기가 잘못이 아니라 정부가 잘못이고 무슨 설계가 잘못이고, 서로 미룰 일이 아니거든.

 

각자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을 하고, 자기가 잘못에 대한 것은 참회(懺悔)를 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하려니와 우리 일반 시민들은 그것을 몰아댄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여.

우리 시민은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 그리고서 자기가 당하는 일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실수가 없도록 거기서 깨달아야 한다 그말이여.

 

우리는 배울 것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만 배우고 절에 오면 스님네한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자연 현상에서 잠시 동안도 배우지 아니하고선 안돼.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아.

그래서 돌을 보면 견고한 것을 배우고, 물을 보면은 맑음을 배우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보면은 곧은 절개를 배우고, 달을 보면 밝음을 배운다.

 

불과  돌과 물과 소나무와 , 네 가지를 예로 들었지만 어찌 그러한 좋은 것만 보고 깨달을 것인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소와 말이 쏟아 놓는 오물을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도둑질 하는 범죄인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모든 개나 소나 짐승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연전(年前)에 종정(宗正)을 지내시고 열반하신 고암 큰스님과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쯤 된가?  여기 전강 조실 스님  큰스님을 모시고 여기 어디 도살장(屠殺場)을 한번 견학을 갔습니다.

 

죽기 위해서 끌려가는  소도 자기 죽을 것을 슬퍼하는지 눈물이 글썽한 것처럼 보이는  끌려가는 소와 거기서 죽어 가지고  고기 한 짐씩 되도록 고기를 잘라서 운반을 하고 그것을 걸어 놓는 그런 모습.

그런 도저히   없는 참혹한 그런 광경을 보고 정말 그때 평생에 잊지 못할 마음의 발심(發心)을 했다고 할까.

 

부처님 말씀에  소를 봐라.  소는 전생(前生)에 중이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닦지 아니해서  시주(施主)의 은혜를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 소로 태어났다.  소는 전생에 중이니라 이런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과연  소를 잡는 도살장에 가서 보고 정말 무서운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독사도 아니고 ,  시주것 함부로 먹는 것이  무서운 것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죽어가는 도살장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위가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것을 배우고,

부정부패해서 세무서 직원, 구청 직원 모다 부정하다가 뇌물 받고 하다가 쇠고랑 차는 그런 사람  살인 강도 하다가 잡혀가는 범죄인,  그것도 우리에게 충격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고 대발심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는 보살 화현(化現) 일런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반성하고 깨닫고 분심(憤心)을 내서 발심을 한다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보살 화현이 되는 것이고, 그걸 보고 강건너  보듯이 죽일 놈들! 저런 놈들은 당장 저놈 찢어 죽여야 한다. 사형을 해야 한다 그러고 말아 버린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사람도 본래는 그런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탐진치(貪瞋癡)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들도  생각 잘못 먹고 감정에 휩싸이다 보면은 언제 그런 실수를 할는지도 모르는 것이여.  우리의 자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라야 하고, 저런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라야 하거든.

 

무언만상개사우(無言萬像皆師友)여, 말없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우리의 스승이고 도반(道伴)이더라 그말이거든.

수독산림주반성(雖獨山林主伴成)이여, 비록 산속에 홀로 지내더라도  산에 있는 모든 나무며 바위며 풀이며 구름이며 비며 개천이며 모든 것이 ,  스승이요 벗이더라 그거거든.

 

우리가 금방 읊어 드리는  게송(偈頌)을 정말 깊이 음미하고  뜻을 우리가 명심한다면 남의 허물을  겨를도 없고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남의 모든 허물이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살 화현이 저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렇게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나날이 향상되어  것이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자비심(慈悲心)으로 상대하게  것이고 모든 사람을  존경할  있는 마음가짐이  것입니다.(3932~5008)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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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좌석학견수학청~’ ; 『환성시집(喚惺詩集)』 (門人 聖訥編錄) ‘시학도(示學徒)’ 참고.

*참회(懺悔 뉘우칠 /뉘우칠 )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70)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부끄러워할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改過自新),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罪隨心滅).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心本空寂),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罪業無寄).

*연전(年前) ; 여러  .

*종정(宗正 마루·우두머리 /바를·우두머리 ) ; ①불교  종단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받들어 모시는 스님. ②한 문중의 가장 높은 어른.

*도살장(屠殺場 잡을·가축을 잡거나 사람을 죽임·가를·칼로 베어 끊음 /죽일· /마당· ) ; 고기를 얻기 위해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도살(짐승을 잡아 죽임)하는 .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시주(施主 베풀 /주인 )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 준말.

bodhi 깨달음, sattva 살아 있는 존재,  중생을 뜻하므로 -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 .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 이타(利他) 행하는 .  보살승(菩薩乘) 준말. 수행자.  고승(高僧) 대한 존칭.  여자 신도를 일컫는 .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 ; 자기의 뜻에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하나.

*()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 ; 인과(因果)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

*게송(偈頌) ; (), () ()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

*자비(慈悲) ; () 우정 · 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 () 연민 · 동정 원의(原義),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을 불쌍히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17. 4. 23. 21:41

§(538) 발우공양은 음식(물질) 존중, 생명(자연) 존중,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수행 의식 / 물질의 쓰레기 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쓰레기 / 법신설법 / 마음보를 바르게, 맑게, 자비롭게.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마구잽이 밖으로 쏟아내지는 법이 없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돌이켜서 ‘이뭣고?’ 자기의 그 생각 일어나는 뿌리로 그 생각을 회귀(回歸)를 하는 거여.

 

물질도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정신 작용이야말로 물질 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소중한 것이다. 그 한 생각을 잘쓰면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고 천당에도 갈 수가 있고 극락에도 갈 수가 있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잘못하면 저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치고 급기야는 지옥에 가 질밖에는 없는 것이다.

 

산승(山僧)이 여기에 올라와서 두서없이 되지 않는 소리로—나는 이것을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법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법문은 ‘법신설법(法身說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법문이거든. 이 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다 그것이 비로자나법신(毘盧遮那法身) 체(體)고, 낱낱이 다 설법을 하고 있거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참선(參禪)을 하게 되면 그 법신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538)—94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용538)

 

(1) 약 17분.

 

(2) 약 17분.

 

(1)------------------

 

요새 그린스카우트니, 무슨 자연보호니 전국적으로 바람이 일어서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모다 쓰레기를, 학생으로부터서 관공리(官公吏)와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모두 동원이 되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만시지탄(晚時之歎)이 있지마는 대단히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연이 오염이 되고, 강물이 오염이 되고, 산이나 바다가 오염이 되면은 그 손해를 누가 봐야 하냐 하면은 인간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구잽이 지각(知覺)없이 버린 쓰레기로 인해서 해(害)를 누가 봐야 하냐 하면 인간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심코 버리는데, 해(害)는 무심코 지나가지를 않고 인간의 생명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큰 모다 공장에서 나오는 산업 쓰레기며 공장 폐수(廢水)도 중대하지마는 각 가정에서 나가는 쓰레기와 생활 폐수 그런 것들이 마구 살기 위해서 무심코 버리고 하수구로 나가는 폐수들이 강물로 들어가 가지고 강의 고기들이 다 죽고.

그 강이 결국은 그 강물을 수도(水道)로 또 해서 가정으로 공급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남은 물은 바다로 들어가서 바다의 조개와 바다의 모든 미역 김, 모두 바다에 사는 고기들이 모두 죽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고기를 사람이 먹고 사람이 또 암이 걸리고 온갖 무서운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동안에는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비교적 엄하게 단속을 안 하는 사이에 이미 이렇게 모두가 병이 들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많이 살 만큼 살게 되었으니,

법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면 몇만 원, 쓰레기를 버리면 몇만 원 벌금으로, 물론 법을 엄격히 해서 그걸 단속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우리가 어찌 벌금 물기 싫어서, 벌금 무는 것이 아까우니까 담배꽁초를 버릴라다가 관두고 쓰레기를 버릴라다가 안 버리고 이쯤되면 그건 하등 인간이여.

 

벌금이야 물건, 안 물건 ‘내가 버린 이 쓰레기가 결국은 자연을 손괴(損壞)하고 우리가 사는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쓰레기장으로 만든다’ 그런 지각이 있다면 어찌 산에 놀러 가고 바다에 놀러 가서 함부로 쓰레기를 버릴 수가 있냐 그말이여. 숟갈로 밥 먹는 인간이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느냐.

 

우리는 스스로 자각(自覺)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삼천년 이래로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면은 자기 먹을 만큼 딱 이렇게 덜어서 먹고, 그것을 숭늉으로 또 깨끗이 가셔 먹고 또 그래가지고 천수(千手)물로 깨끗이 헹궈서 그 바리때 네 개를 씻고 나오는 천수물이 말갛다 말이여. 조금도 탁하거나 찌끄러기가 안 섞여 있다 그말이여.

 

여러분 가운데에는 선원(禪院)에서 그런 발우공양을 하신 분이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발우공양을 그렇게 한번 누구든지 다 해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삼천년 전부터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자연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산에서, 그 산중에 천 명 천오백 명 이천 명 이렇게 많은 대중스님네가 수도(修道) 생활을 하시고 해도 그 흘러가는 물이 강물이 조금도 오염이 안된다 그말이여. 저 밑에서도 얼마든지 그 물을 떠먹어도 괜찮을 만큼 깨끗했다 그말이여.

 

이것은 뭐 설거지, 발우 씻은 물을 우리 선망부모(先亡父母)인 아귀(餓鬼)가 그 물을 먹고서 갈증을 가시니까 그 발우 씻은 물속에 찌끄러기가 없도록 하라. 이렇게 법문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귀는 어떠한 물도 어떠한 맛있는 것도 먹을 수가 없어. 먹으면 그것이 바로 불이 되어가지고 타 죽으니까 못 먹고, 그 발우공양 하고서 나오는 그 천수물만이 목으로 넘어가거던. 그런데 거기에 찌끄러기가 있으면 목이 맥혀서 또 불이 나기 때문에 우리 선망부모를 위해서 발우 씻은 물이 깨끗하도록 해라.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데.

 

오늘날 그것을 잘 해석을 하면 음식을 깨끗이 먹어야 한다고 하는 ‘음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도 거기에 들어 있고, 더러운 설거지 물이 더럽게 나가면은 강물이 오염이 되니까 ‘자연을 오염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러한 뜻도 거기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아귀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뜻이 깊지마는 현실적으로는 ‘자연을 손괴해서는 안된다’ ‘음식물을 아껴야 한다’고 하는 뜻으로 오늘날은 해석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상에다 이렇게 차려놓고 마구잽이 먹고, 먹고 남은 것은 쓰레기통에다 막 버리고 하수구에다 막 버리고 그러실 것이 아니라,

큰 그릇에다가 반찬이고 무얼 딱 떠다 놓고 각기 빈 그릇을 자기 앞에 밥그릇, 국그릇, 또는 찬그릇 이렇게 빈 그릇을 갖다 놓고 자기가 먹을 만큼 밥도 덜고, 찬도 먹을 만큼 고루고루 조금씩 덜어서 일단 덜어온 것은 깨끗이 먹고, 먹은 그릇을 숭늉으로 잘 이렇게 헹궈서 깨끗이 먹고, 설거지 해 봤자 별로 찌끄러기가 나오지 않도록 각 가정에서도 요새 말하면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시면은,

 

남은 음식이 먹고 남은 찌끄러기가 아니고 덜어서 먹었기 때문에 그 음식을 냉장고에나 잘 요렇게 간수했다 그다음 끼니에 먹더라도 변질이 안 되고 또 얼마든지 깨끗하게 기분 좋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 식구가 숟갈이 입으로 들어갔다 반찬으로 들어갔다 또 저분이 입으로 들어갔다 들랑날랑하는 가운데에 입에 침이 음식으로 섞여져 가지고 금방 그 음식이 변질이 되고, 두었다가 다음에 먹을수가 없습니다.

 

시간상 가족들이 동시에 같이 식사하기가 어렵고 바쁜 사람은 먼저 먹고 가더라도 깨끗이 덜어 먹고 갔으니까 다음 사람이 또 와서 먹어도 하나도 기분 나쁠 것이 없고 이렇게 해서 가정에서도 발우공양, 현대식으로 말하면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시면은 참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음식 반찬이나 밥이나 쓰레기로 마구잽이 들어가는 일이 없어서 강물도 오염이 안 되고 또 음식물도 아껴서 먹게 되고 위생적으로도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족 가운데 혹 모르는 사이에 간염이 걸려 있거나 또는 감기 독감 같은 것이 걸리거나 전염성 질환이 혹 모르는 사이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가족에 옮겨지지 않아서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에게 그 발우공양을 절에서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고, 부페식으로 그렇게 하시면은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권고를 하는 바입니다.

 

내가 지금 강과 산과 바다와 이 자연을 오염하지 않는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사실상은 꼭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눈에 보이는 쓰레기도 대단히 지금 중대한 국가적인 문제, 세계적인 문제로 지금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우리의 건강과 생명이 직결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연이 오염이 되면 이 세계는 하늘과 땅이 다 병들어서 식물, 동물, 인간도 살 수 없는 세계가 머지않아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손자, 증손자 저 후손들에게 우리 보다도 훨씬 더 살 수 없는 이 지구를 만들어서 남겨놓고 우리는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방 산승(山僧)이 말씀한 대로 그렇게 명심을 하고 음식도 아끼고 자연도 더럽히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산이나 들에 가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거기 가서 남은 쓰레기는 집으로 가지고 와 가지고 분류해서 이렇게 처리하도록 한다면 산도 깨끗하고 강물도 깨끗하고 바다도 깨끗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도 살기 좋으려니와 우리의 후손도 살기 좋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명도 유지하고 자기의 후손도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행위는 자기도 죽고, 후손도 죽게 만드는 그러한 몰지각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러한 지혜를 부처님이나 스님한테 여태까지도 배우지를 못했던가?

 

눈에 보이는 쓰레기보다도 더 무서운 쓰레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경계(境界)를 당하면은—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슨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접촉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그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이렇게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육식(六識)이 발동을 해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말로도 표현이 되고, 얼굴에도 표현이 되고, 나중에는 행동으로도 마침내는 표현이 됩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좋게 표현하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나쁘게 표현이 되는데, 그 표현된 것이 자기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해를 끼치고, 이웃에게도 해를 끼치고, 직장이나 관공서 회사에 가서도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마구잽이 밖으로 쏟아내지는 법이 없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돌이켜서 ‘이뭣고?’ 자기의 그 생각 일어나는 뿌리로 그 생각을 회귀(回歸)를 하는 거여.

 

무슨 생각이 불쑥 나거든. 나면은 공연히 기분 나쁘면은 가족들에게 그것을 쏴붙이고 아내한테도 쏴붙이고, 남편한테도 쏴붙이고, 자녀한테도 쏴붙이고 직장에서 표현을 하게 된다.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즉각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즉각 ‘이뭣고?’ 따악 자기로 돌아오는 수행을 쌓아 나가거든.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계속해서 올바르게 이렇게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자기의 본성(本性)을 이렇게 참구(參究)하면, 그 생각이 정당한 생각이면은 말로 표현을 하고, 정당치 못하면 즉각 거기서 되돌려 버리니까 쓰레기가 밖으로 함부로 버려지지를 않아.

 

진짜, 물질도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정신 작용이야말로 물질 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소중한 것이다 그말이여.

그 한 생각을 잘쓰면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고 천당에도 갈 수가 있고 극락에도 갈 수가 있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잘못하면 저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치고 급기야는 지옥에 가 질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오늘날 이 쓰레기니, 무슨 폐수니 그런 것을 단속을 법적으로도 단속을 해야겠지마는 정말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은 저절로 자연을 아름답게 자연을 청정하게 가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22분11초~39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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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은 설사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잠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안에서 얻어지는 것은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재산이니 명예니 권리니, 다 그 지식이니, 공부해 가지고 돈 들여서 대학 갈려고 한 것이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은 여자들은 좋은 신랑감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 또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

남자들도 대학을 가야 좋은 색시를 얻을 수 있고 좋은 데에 취직을 해야 월급도 많이 받는다. 그리고 대학 교수도 되고 박사도 되고 사업가도 될라면은 대학 안 나오고는 어디다 명함도 못 내놓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잘살라면은 대학을 가야 한다.

 

그래서 대학을 갈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대학에 간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여. 마음먹은 대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데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행복하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거든.

 

진짜 행복이라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야. 자기의 안에서 구해야 하는 거야.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많으면 행복한 것 같이 느껴지는데, 돈 많은 사람은 하나도 행복 안 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그런 명예나 권리나 재산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고, 재산이 없고 별로 권리도 없고 해도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고 막일을 하고 살아도 ‘참, 나는 행복하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행복한 거여.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 권리가 많고 그래도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행해.

 

그래서 진짜 행복하고 싶으면 ‘나는 행복하다’하는 글자를 떠억 방에다 도처에다 써 놓고 하루에 몇백 번씩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하고 자꾸 생각해 보시라 말이여. 이거 장난말 같지마는 절대로 장난말이 아니거든.

 

‘나는 행복하다. 왜 행복하냐?’ 가끔 한 번씩은 ‘왜 행복하냐?’하는 것을 생각해 봐.

 

‘이만큼 살고 있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이렇게 이만큼 그래도 괜찮은 남편을 얻었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그래도 이만큼 무던한 아내를 얻었으니까 행복하다’ ‘자식도 이만하면 괜찮으니 그래서 행복하다’ ‘이만큼 먹고 살면 그만이지 그렇게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다’

좋은 점만을 생각하고 자꾸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루에 천 번씩만 해 보라 그말이야. 나중에는 진짜 얼굴이 입이 옆으로 쫘악 찢어지면서 뭐 하는 일이 잘되고 짜증낼 것도 없고 그런대로 괜찮다 그말이여. 그러다보니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다.

 

제법 먹고살고 좋은 차도 있고 돈도 있고 괜찮은 사람이 ‘나는 불행해’

자꾸 다른 사람 좋은 사람만 건너다 보고서 ‘왜 나는 왜 저렇게 이쁜 마누라를 못 얻었을까’ 괜히 저 길가에서 ‘나는 왜 저런 남편을 못 얻었을까’ 자꾸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 가지고 ‘왜 나는 우리 남편 돈 좀 더 잘 버는 남편을 못 얻었을까’

 

그래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나는 불행해. 참, 나는 불행해. 우리 엄마는 왜 저런 사람을 신랑감을 만나게 해 줬을까’ 부모 원망 심지어는 중매쟁이 원망 그래가지고 생각해 볼수록 속에서 부글부글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말이여.

그러니 남편이 와도 본체만체하고. 조금만 늦게 오면 ‘뭣하고 인제 왔냐?’고. 그러니 남편이 좋아라 할 거냐 그말이여.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가시면 흰 종이에다 ‘나는 행복하다’

처음에는 좀 챙피하면 안 보이는 데다 딱 써 붙여.(웃음) 그러다가 조금 잘 보면 보이고 그런 데다가 써 붙이다가 나중에 그 괜찮은 성 싶으면 버젓하게 크게 써붙여.

 

그래서 식구대로 하루에 몇 번씩 ‘나는 행복하다’ 따악 하고서 밥을 먹고. 밥을 먹고도 ‘나는 행복하다’—기독교 믿는 분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앉으면은 하느님께 기도 올리고 밥을 먹고 ‘오늘 이와같이 좋은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참 좋은 일이고.

 

또 불교 믿는 이들도 합장을 하고 이 밥을 저 농사지어서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또 남편이 돈을 벌어다 줘서 이 먹게 해 줘서 남편을 고맙다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가 또 이렇게 해서 잘 차려 줘서 고맙다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그렇게 낱낱이 따져서 말은 않지마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밥상을 대하면은 이렇게 합장을 하고 먹는 것이 참 좋은 일인데, 해필 꼭 밥먹을 때만 그럴 거냐 그말이여.

 

똥 눌 때도 이렇게 똥을 누게 해 줘서...(웃음) 먹는 것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두 끼니 굶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배설하는 구녁이 맥혀 놓으면... 그건 참말로 대단히 중요한 거다 그말이여.

 

먹는 음식을 장만한 것도 중요하지만 먹고 남은 그것을 잘 쓰레기를 처리하고, 하수구가 맥혀서는 안 되거든.

그 하수구에는 항상 설거지 하는 물도 찌끄러기는 탁 받아서 찌그러기가 나온 것은 화단에다가 화분에다가 살며시 묻어 놓으면 그놈이 썩어서 꽃이 아름답게 피는 거고.

 

그 찌그러기를 막 하수구에다가 막—그 하수구에 걸르는 얼개미가 있는데 그것에 걸려서 잘 안 내려가니까 차라리 빼 버리고 막 집어 넣어. 그래서야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 조그만한 마음씨가 결국은 그 사람이 돈 좀 벌어서 큰 공장을 하면은 공장 폐수(廢水)가 막 나와 가지고 한강 낙동강이 막 썩어 문드러져서 고기가 다 죽고, 그 물이 바다로 내려가면은 바다의 모든 고기와 김과 조개와 모다 그런 것들이 다 폐사(斃死)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정말 우리는 한 생각 돌이키는 최상법을 믿음으로 해서 나중에는 자연을 아름답게 (이게 그만하라 그러는데) 자연을 아름답게 해서 이 세계가 정말 금수강산(錦繡江山)이 되도록 하고.

그러한 마음씨 갖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번지면 모두가 다 좋은 도반(道伴)이요, 좋은 스승이요, 모두가 다 불보살(佛菩薩)로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상대가 되도록.

 

 

이 산승(山僧)이 여기에 올라와서 두서없이 되지 않는 소리로—나는 이것을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법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법문은 ‘법신설법(法身說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법문이거든.

이 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다 그것이 비로자나법신(毘盧遮那法身) 체(體)고, 낱낱이 다 설법을 하고 있거든.

 

나무가 설한 법문을 바위가 듣고, 바위가 설하는 법문은 나무가 듣고, 큰 나무가 설한 법문은 작은 나무가 듣고, 작은 나무 조그만한 풀포기 하나도 다 법을 설하고 있는 거여. 조그만한 벌레도 다 그 나름대로 무상설법(無上說法)을 하고 있는 거여.

그래서 법을 설하고 또 설한 법을 듣고, 피차(彼此) 설하고 피차 듣는 거여. 그 법신설법을 들을 줄 알아야 진짜 법문을 듣는 거여.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참선(參禪)을 하게 되면 그 법신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까 바위에 앉아서는 굳은 것을 배우고, 물을 상대하게 되면은 맑은 것을 배우니 그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서 나는 법(法)을 설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일요일 날 놀러갈 때도 많고 하실 일도 많고 그런데 이 복잡한 교통 속에서 아침부터 와 가지고 오셨으니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대사자후(大獅子吼) 법문은 들었지만, 입가심으로—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입가심 하잖아요.

입가심으로 내가 한마디 해 드린 것이니까 이것도 잘만 들으면 ‘그 속에 그 말은 괜찮하다’ 그런 말도 한마디쯤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참으로 잘 듣는 사람은 차츰차츰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서 가시는 걸음걸음 법문을 또 진짜 법문을 들으시게 됩니다.

 

이 법상(法床)에서 들은 것은, 이 조실 스님 법문은 굉장히 고준(高峻)해서 한두 번 들어 갖고는 잘 모르실 것이고 녹음 테이프(tape)를 사무실에서 구해가지고 가서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을 들으시면은, 들으시면서 참선을 하시면은 참선을 옳게 하시게 되고, 옳게 하시게 되면은 반드시 깨달음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 조실 스님 법문을 옳게 들으시는 방법을 일러드리기 위해서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고 있다’고 그렇게 핀잔하시지 말고 잘 들으신다면은, 음식이라는 게 꼭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먹어서는 못쓰는 거고 밥상에 놓여진 음식은 짠 것도 있고 싱거운 것도 있고, 신 것도 있고 떱떨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다 말이여.

 

파란 것도 있고 노른 것도 있고 흰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는데 고루고루 덜어다가 부페식으로 빈 접시에다 고루고루 덜어서 놓고 먹을 만큼 덜어다가,

밥 한 숟갈 떠 넣고 맨입으로 한 오십 번 씹은 다음에 그 다음에 반찬을 입에다 넣고 한 오십 번 씹어서 그 먹은 음식이 곱게 갈리고 저작(咀嚼)이 되어서 그놈이 속에 들어가면 위장이 큰 부담이 없이 소화가 잘되도록. 그러고 나서 또 국물 한번 떠먹고. 그렇게 해서 씹으면서 ‘이뭣고?’하면서 공양을 해보시라 그말이여.

 

처음에는 씹다 보면은 고소한 것을 느끼게 되고, 고소해도 계속 씹다 보면은 달콤해지게 될 거다 그말이여.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뭣고?’를 하니 세상에 이런 좋은 수행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렇게 식사를 하시면 위장병, 소화제 안 먹어도 위장병도 다 낫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이 소화도 잘되고 흡수도 완전히 다 흡수가 돼. 그러니 얼굴도 고와지고.

 

얼굴 여기 째서 잡아당겨 봤자 그거 주름살, 나중에 늘그막에는 아주 추하게 늙게 되는 것입니다. 이뻐질라고 뭐 요리 째고 잡아당길라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음식을 잘 씹어서 잡수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들어가면서 소화가 잘 되니까 뱃속에 나쁜 가스가 채이지를 않아. 나쁜 가스가 채어 가지고 그놈이 돌고 돌아서 삭신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얼굴에 두들두들한 것도 나고 그래가지고 영 아무리 칠하고 바르고 토닥거려 봤자 별로 안 이뻐지거든.

 

내가 내 얘기를 해서 안 되었지마는 난 별로 얼굴에 바르는 걸  좋아하지 않고 그래도 어디가서 얼굴 추접하게 생겼다는 말은 안 들었어. 그것이 음식을 잘 씹어 먹고, 많이 먹지는 않되 잘 씹어 먹는 거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음식도 피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마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

항상 감사한 마음,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생각을 항상 가지면은 자연히 얼굴은 이뻐집니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다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 정말 이뻐질라면은 마음보를 고쳐. 마음보를 고치고 음식을 잘 씹어서 먹고. 그러면은 나이들어 가면 늙어지기 마련이지 어쩔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내가 칠십 살 먹었다면 별로 사람들이 곧이 잘 안 듣고 한 십 년쯤은 젊게 보이는데, 젊어져 봤자지 뭐 별것은 없으나 마음보를 바르게 쓰고 맑게 쓰고 자비롭게 쓰면은 확실히 얼굴도 고와지고.

 

또 몸에 병도 심장병, 간장병이 속이 바글바글 끓고 속상하고 성내는 데에서 온갖 병이 자꾸 악화가 되는 것은 여러분도 충분히 인식하고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면 마음도 고와지고, 자연히 식사도 천천히 잘 저작을 해서 잘 잡수게 되고 모든 음식도 애껴 먹게 되고, 모든 쓰레기도 적절히 잘 처리해서 분류해서 쓰레기가 적게 나가도록 하시고.

그렇게 하면은 우리 개인도 이뻐지고 젊어지고, 가정도 편안하고 행복해지고, 이웃도 서로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아끼는 마음으로 상대하게 되니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갈 것은 아주 걱정을 놓으시라고요.(50분09초~67분1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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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리(官公吏 벼슬·관청 관/공적 공/관리 리) ; 관리(官吏 : 봉급을 받고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의 사무를 보는 사람)와 공리(公吏 : 관리가 아니면서 공무를 맡아보는 사람)를 아울러 이르는 말.

*만시지탄(晚時之歎 늦을·저물 만/때 시/어조사 지/탄식할 탄) ; 어떤 일에 알맞은 때[時]가 늦었음[晚]을 안타까워하는 탄식(歎息).

*지각(知覺)없다 ; 사물의 이치나 도리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다.

*무심코(無心-) ; 아무런 뜻이나 생각이 없이.

*폐수(廢水 폐할·버릴 폐/ 물 수) ; 불순물이나 화학 물질 따위로 더럽혀져 버리는[廢] 물[水].

*손괴하다(損壞-- 덜·해칠·상하게 할 손/무너질·무너뜨릴 괴) ; (사람이 물건을)상하거나 부서지게 하다.

*금수강산(錦繡江山 비단 금/수놓을 수/강 강/뫼 산) ; 비단(緋緞)에 수(繡)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삼천 리(三千里)가 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발우공양(鉢盂供養) ;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발우(鉢盂)라고 하여, 발우공양은 ‘스님들이 하는 식사’를 말한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小心經)》이라는 경전을 외운다.

이 공양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아 신과 인간의 공양 받기를 원하는 ‘하발게(下鉢偈)’, 부처님 일생의 중요한 4대 성지를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삼륜(三輪)이 공적함을 생각하는 ‘전발게(展鉢偈)’

그리고 위로는 부처님, 성인 아래로는 일체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봉반게(奉飯偈)’ 음식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오관게(五觀偈)’

그리고 생반게(生飯偈), 정식게(淨食偈), 삼시게(三匙偈), 절수게(絶水偈), 해탈주(解脫呪)를 하면서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며 공양하는 수행 의식이다.

*천수물(千手물) ; 청수(淸水)물.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발우공양)한 후, 발우(鉢盂)를 씻는(씻은) 물. 이 물을 모은 천수통(千手桶, 청수통, 퇴수통)을 공양방 가운데 두고 절수게(節水偈)를 외우는데, 공양방 가운데 천장에 붙여 놓은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깨끗하므로 천수물이라 한다.

절수게(節水偈)는 ‘내 이 발우 씻은 물은(我此洗鉢水) 하늘나라 감로수의 맛과 같다(如天甘露味) 아귀들에게 베푸니(施與餓鬼衆) 받아 마셔 모두 배불러지이다(皆令得飽滿)’

이 천수물을 굶주림과 기갈에 고통 받는 아귀들에게 베푸는데, 찌꺼기가 있으면 아귀의 바늘구멍만한 목구멍에 걸려 고통을 일으키므로, 천수통에 부을 때 맑은 물만 붓고, 혹 남은 찌꺼기는 자신이 마신다.

*천수통(千手桶) ;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발우공양)을 한 후, 발우(鉢盂)를 씻은 물을 거두는 동이. 청수통, 퇴수통이라고도 한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과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부페 ; 뷔페(buffet). 여러 가지 음식을 식탁에 차려놓고 손님이 스스로 골라 덜어 먹도록 한 식당.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쏴붙이다 ; 쏘아붙이다(감정이 상할 정도로 매섭고 날카롭게 말을 내뱉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2)

 

*얼개미 ; ‘어레미(밑바닥의 구멍이 굵고 큰 체)’의 사투리.

*폐사(斃死) ;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음.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원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른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신설법(法身說法) ; 법신(法身)이 설법(說法)한다는 말. 진리로서의 법 그 자체가 설법하고 있는 것. 육신(肉身)의 부처님은 때 · 장소 · 사람에 의해 가르침의 일부를 설했으나, 법신불은 그와 같은 것에 상관없이 삼세에 걸쳐 영원히 항상 모든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깨달은 것을 설하지만 미혹된 범부는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무상설법(無上說法) ; 진리를 깨닫게 하는 최고의 가르침.

*전강선사 ; 분류‘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고준하다(高峻-- 높을 고/높을·험할 준) ; 높고 험준하다.

*녹음 테이프(tape) ;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마음보 ; 마음을 쓰는 속 바탕.

 

Posted by 닥공닥정
발심 자신(自信)2017. 4. 22. 13:07

 

 

§(538) (게송)승침상속의선마~ / 오욕락, 탐진치를 용감하게 놔 버려야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 / 일(一) 찰나간에 구백생멸이 있는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알아 발심(發心)해야.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추구해 봤자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뜻대로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어졌다 해도 오랫동안  욕심껏 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얻고 유지하고 누리다가는 결국은 지옥의 삼악도 밖에는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을 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버릴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일(一) 찰나간에 구백 생멸이 있는  문제를 해결할려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은 어느 겨를에 탐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진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생각[別念]을  수가 있겠습니까.

 

**송담스님(No.538)—94 11 첫째일요법회 (용538)

 

(1) 약 9분.

 

(2) 약 6분.

 

(1)------------------

 

승침상속의선마(昇沈相續蟻旋磨)하고  증애교전상익니(憎愛交纏象溺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미긍현애친살수(未肯懸崖親撒手)하면  부지신고대하시(不知辛苦待何時)리요

나무~아미타불~

 

승침상속의선마(昇沈相續蟻旋磨), 지은 업에 따라서, 선업(善業)을 지으면 좋은 곳으로 올라가고 악업(惡業)을 지으면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거여. 올라갔다 잠겼다 끝없는 승침(昇沈), 윤회를 하는 것이 개미가 마치 쳇바퀴를 돌듯이 끝없이 돌고 돌되 그칠 날이 없는 거여.

 

증애교전상익니(憎愛交纏象溺泥)다. 미워해. 자기 뜻에 맞지 아니하면 미워하고, 자기 뜻에 맞으면 사랑하고 좋아하고. 미워했다 좋아했다 하는 것이, 그러한 정이 얽히고설켜서 심하면 보복도 하고 보복을 당하면 그다음에 당한 사람이  보복을 하고,

그런 증애(憎愛)가 얽히고설킨 것이  육중한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가지고 간신히  발을 들면은 다른  발이 진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빠졌던 다리를 다시 들면 다른 다리가  빠지고, 도저히 진흙 수렁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거와 같다 이거거든.

 

무량겁 이래로 우리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거듭하면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받는 것이 마치 개미 수레바퀴 도는 거와 같고 쳇바퀴 도는 거와 같고,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거와 같더라.

 

어떻게 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미워했다 사랑했다 하는 것이 그렇게 얽히고설켜서 헤어나지를 못하냐?

 원인은, 마치 절벽에서 매달려 가지고 손을 놓으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아주 즉사(卽死)할  같은 그러한 상황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팔은 빠질려고 하고 도저히 놓기만 놓으면은 죽을  같고, 그렇게 바둥바둥하는 그런 상황이여.

 

(), (), (), (), ()—재산, 이성, 명예 권리, 맛있는  먹는 ,  편안하게 안락을 취하는  그런 오욕락(五欲樂) 빠져서  재산이 없어도 못살  같고, 이성이 없어도 못살  같고, 명예나 권리가 없어도 못살  같고, 편안하게 안락하게 잠자고 그렇게 지내는 것도 없어서는 못살  같으니까,

 오욕락이 없어서는 그것을  버리고서는 도저히  수가 없을  같으니까  오욕락에 매달려 가지고 그것을 획득을 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갖은 발버둥을 치는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 매달려서  놓으면 떨어져 죽을  같은 그러한 상황이다 그말이여.

 

 낭떠러지에서 직접  용기를  가지고 손을 놔버려야지,  손을 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시 살아날 기약은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부지신고대하시(不知辛苦待何時)냐? 쓰고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이냐? 떨어지면 죽을  같은  생각을 버리고 용감하게  손을  놔버려야 하거든.

 

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이런 것들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마치 코끼리에 쫓겨가지고 간신히  구렁에 피해다가 칡덩굴을 붙잡고 꿀을 받아먹고 있는 사람이 손을 놓으면은 독룡 독사가 굴속에서 기다리고 있고,  쥐와 검은 쥐는 계속해서  칡덩굴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먹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거기서 살아날 수가 있느냐?

 

이러한 긴박하고도 절박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항상 헛헛증을 면치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의 생활이다.

 

용감하게,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추구해 봤자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뜻대로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어졌다 해도 오랫동안  욕심껏 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얻고 유지하고 누리다가는 결국은 지옥의 삼악도 밖에는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을 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버릴  알아야 합니다.

 

탐심과 자기 마음껏 그걸 누릴려고 하는 탐욕심(貪欲心)과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은 진심(瞋心) 내고,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그것을 수없이 되풀이해 나가고, 용감하게  버릴  모르는 것이 그것이 어리석음이거든.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   가지 독한 마음으로 인해서 끝없는 삼악도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처음~916)

 

 

 

 

 

(2)------------------

 

요새 여기서 저기서, 하늘에서 바다에서 모다 자꾸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러는데 그래서 한강에 16개인가 있는 다리를 지나다닐라면은 만일  다리가 꺼졌을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바람이 들어있는 구명조끼를 입고 건너가야 한다고 그런 말도 들었습니다마는.

 다리 지나간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는 거고, 비행기가   떨어졌다고 해서 비행기  사람마다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타고 가면 교통사고로 사람이  많이 죽지만   사람마다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데 다리 지나가다가 죽고,  타다가 죽고, 기차 타다가 죽고, 비행기 타다 죽고 그렇게 죽는 수는 사실은  사고로 죽은 사람, 병으로 죽은 사람, 죽은 사람 가운데 불과  0.01 프로도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사고로  죽더라도, 언제 죽더라도 우리는 한번 태어난 사람은 죽음을 면치를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죽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면은 기차 타다, 배 타다, 다리 건너다 죽을 것을 걱정하지 말고 우리의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거기에 그것이 내생(來生)이다고 그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리 안 지나가고, 기차 안 타고, 자동차 안 타고, 비행기 안 타면은 천세 만세 살겠습니까? 그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말하고 듣고  먹고 잠자고 해도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게 내생이여. 그래서 오늘  시간 이내에, 오늘 하루 내에, 오늘밤에, 내일에 언제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올란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생(生)이요  죽음이 생멸(生滅)인 것입니다.

 

생사가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을 생(生)이라고 그러고,  몸이 숨을 거두고 죽으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참선하는 사람은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고  생각이 꺼지면 그것이 사(死)입니다.

 

일(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구백 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구백 번을 생사 생사 생사가 있는 것입니다. 구백 생멸이 끝없이 계속해서 한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마치 전기불이 우리 눈에는 환히 계속해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사실은 수없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이 너무 빨리 연속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계속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일(一) 찰나간(刹那間)에 구백 생멸이 있는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사를, 생사 문제를 긴박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알면  몸뚱이 살다가 육칠십 , 칠팔십  살다가 죽은 것은 하나도 겁낼 것이 없고, 다리 건너다 꺼지고 비행기 타다 떨어져 죽은 것을  까짓 것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불법(佛法)은 애당초에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서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불법을 믿고 불법을 닦고 그것을 통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일(一) 찰나간에 구백 생멸이 있는  문제를 해결할려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은 어느 겨를에 탐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진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생각[別念]을  수가 있겠습니까.(1648~229)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승침상속의선마~’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峯和尙廣錄卷第二十九'에서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 ; ()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 말한다. 그리고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3가지 () ··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 따라 ①선심(善心)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 ②악심(惡心)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 과보를 받는다.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소리,향기,,감촉(色聲香味觸)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 사바세계이다.

*안수정등(岸樹井藤) ;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다가 성난 코끼리  마리를 만났다.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이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 안으로 뻗어 내려간 칡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있었다. 그러나  곳에는  마리의 뱀들이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고,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노려보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그는 칡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칡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바로 때였다.  코앞의 칡넝쿨에 벌집이 있었는데,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 입에 들어왔다. 순간 그는 모든 위험을 잊고  꿀을 맛있게 핥아 먹었다.

 

여기서 사람은 범부를, 코끼리는 무상(無常), 우물은 사람의 몸을, 칡넝쿨은 생명줄을, 뱀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四大) 요소(地水火風),  쥐는 , 검은 쥐는 ,  흘러가는 세월을 뜻하고, 독사는 악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고통의 세계를, 꿀은 사람을 현혹하는 욕망을 뜻한다.<잡보장경>

*헛헛증 ; ①뱃속이 몹시  듯한 느낌. ②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증세.

*() ; 자기의 뜻에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번뇌] 하나.

*()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 ; 인과(因果)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2)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하는 미래의 .

*호흡지간(呼吸之間) ;   내쉬고() 들이쉬고()  사이()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

*찰나간(刹那間 ·짧은시간 /어찌 /사이 )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구백생멸(九百生滅) ; 《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2 관공품觀空品) '九十剎那爲一念 一念中一剎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생각이 되고,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 부처님의 가르침.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89(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 생각 일어날  새로 태어난 것이고,  번뇌가 꺼질   죽는 ,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것이 바로 생사(生死)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생각이 일어날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 ,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단계로 나눈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이른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 ( : 의지에 기초한 행위)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 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한다.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가리킴. 생사와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해탈(解脫) : [] Vimoksa ; Vimukta ; mukti  []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해탈이라고도   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있으면 고인이 말한  「잡독(雜毒)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없느니라.”

 

余云別念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생각[別念]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외에는, 불법(佛法) 온갖 좋은 일이라도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것이요, 묻는 사람이 친히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17. 4. 18. 09:54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24분 29초부터 시작됩니다>

 

 

§(086) (게송)작야삼경월만루~ / 바른 선지식의 지도 / 최초의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이뭣고?’ /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  공부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해야만  그러한 .

 

분명 숨은 코로 들어갔다 코로 나오겠지마는, 우리 의식으로는 코로 들어마신다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궁뎅이 뒤에서 쑤욱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에는  궁뎅이 뒤로 쑤욱 나가는 그러한 기분으로 숨을 쉬어라.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건전해져서 참선하는 데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단전호흡법입니다.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인 것입니다. ‘이뭣고?’ 바로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어릴 때부터서  ‘이뭣고?’대한「대관절  인생이란  무엇이냐? ‘내’라는  무엇이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을 바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시심마(是甚麽)’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메겡이로 메쳐서  간장독이 !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을과 국가와 민족을 잊어야 하고 그렇게 잊음으로써 진리를 체달(體達)하게 되고, 진리를 체달한 사람은 인류와 국가와 민족과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86)—78 7 관음재일 법회(78.08.27) (용086)

 

(1) 약 20분.

 

(2) 약 16분.

 

(1)------------------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헌데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허니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게송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견성(見性)을 하시고 오도송(悟道頌)으로 읊으신 게송(偈頌)입니다.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 어젯밤 삼경에 달이 다락에 가득했는데, 누각에 달빛이 가득히 비추었는데,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 옛집 창밖에는 갈대꽃이 허옇게  가을이로구나.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헌데, 부처와 조사가 여기에 이르러서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 바위 밑에 흐르는 물은 다리로 지나오는구나.

 

 게송은 조실 스님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고대로 읊으신 것입니다.

 

조실 스님은 글을 많이 배우신 문장가도 아니시고, 그러시면서 23살의 젊은 어리신 몸으로 경을 쪼끔 배우시다가 너무너무 사랑한 정든 친구가 비명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상을 보시고 너무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달으신 나머지 책을 던져버리고 선방(禪房)으로 가셔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시다가 23살의 어린나이로 대도를 깨치셨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읊으신 게송이 바로  게송입니다.

 

 게송은 어떠한 시인 문장가도  게송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각자 깨달은 분은 깨달은 분만이  게송이 내포하고 있는 참뜻을 속으로 느낄 뿐이고  깨닫지 못했을망정 참선 공부를 하시는 분은  게송을 접하므로 해서 뭐라고 표현할  없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정진함으로 해서  게송의 참뜻을 직접적으로 깊이 계합(契合)이  날이 오기를 바라고, 우리 자신도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이러한 진리의 게송을 읊음으로 해서 많은 후인들에게 감명을   있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리에는 처음 오신 거사님도 계시고, 보살님도 계신만큼 참선을 해 가는 데에 구체적인 그리고 기초적인 것을 지도해 달라고 말씀을 하신 분이 여러분이 계셔서 한 분, 한 분에게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법회를 통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선은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것은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고.

첫째는 몸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둘째는 호흡을, 단전호흡(丹田呼吸)을 바르게 해야 한다. 셋째는 화두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가지고 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한다.

 

 

첫째, 몸을 바르게 갖는 것은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해라. 오른발목을 왼다리 무릎에다가 구부려 올려놓고, 왼발목은 오른다리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아라.

그리고 허리는  펴고 그리고  발 위에다가 오른손을 얹어놓고  위에다 왼손을 포개서 올려놓은 다음, 엄지손은 서로 배끼리 이렇게  맞대서 세워라. 그래가지고  손을 배꼽  앞에다가 갖다가  대라. 배꼽 앞에 발 위에다 얹어 놔라.

 

그리고 어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갖다 대라.

 귀는  어깨 위에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하고, 코끝은 배꼽 밑에 단전과 수직상에 놓이도록 해라. 이렇게 하면 몸이 단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몸을 단정하게  다음에는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한가운데에다가  안정을 시켜라.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서 앉은 자리에서 3미터 지점에다 떨구어라. 3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떠한  점을 응시(凝視)해서는 아니되고, 의식적으론 아무것도  바가 없이 그저 평상으로만 떠라. 이렇게 자세를 갖는 것이 몸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그다음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는데, 아랫배로 호흡을 해라.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앞으로 불룩하니 나오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 홀쪽하게 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그리고 길게 내쉬어라.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코로 들어마시고 코로 내쉬되 코로 들어마신다 코로 내쉰다’는 생각은 전혀 갖지를 말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궁뎅이 뒤에서,  뒤에서 쑤욱 궁뎅이를 통해서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로 가득히 들어오도록 이러한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호흡은  3 동안 정지 상태로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뒤로, 쑤욱  뒤로 내보내는 기분으로 내쉬어라.

 

분명 숨은 코로 들어갔다 코로 나오겠지마는, 우리 의식으로는 코로 들어마신다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궁뎅이 뒤에서 쑤욱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에는  궁뎅이 뒤로 쑤욱 나가는 그러한 기분으로 숨을 쉬어라.

 

들어마신 시간은  3 동안에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  3초 동안, 내쉴 때는  4 ,5 걸려서 내쉬도록. 이렇게 해서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기를  10 내지 11 이러한 정도로 시간을 잡어서 하되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시간을 오래 머무르려 하지 말고, 너무 호흡을 배가 가뜩 들어마시지 말어라.

들어마실 때는  8부(八部) 정도만 들어마셔.  들어마실  있지마는 8부쯤 해서 숨을 멈추고 3 동안 머물렀다 조용하니 내쉬는 이것이 바로 단전호흡입니다.

 

이 단전호흡을 하면은 혈액 순환이 잘되어서 몸안에 머물러 있는 많은 노폐물, 피로의 원인이 되는 독소를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통해서 코로 그리고 혈액 순환을 통해서 밖으로 전부 다 배설하게 됩니다.

그래서 피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져서 오장육부 기능이 활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정이 되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러한 상태에서 참선을 해 나가게 되면은 공부가 잘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건전해져서 참선하는 데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단전호흡법입니다.

 

이러한 호흡법을 모르고서 무턱대고 화두만을 파고들게 되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골이 아프고 상기병(上氣病)에 걸려서 도저히 참선을 더이상 계속할  없게 되는 것이고, 소화불량 내지 온갖 오장육부에 부작용이 생겨나서 도업은 성취하기도 전에  먼저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옛날부터 수식관(數息觀),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을 권장을 하셨고, 대대로 조사(祖師)들이 내려오시면서  단전호흡을 통해서 더위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추위도  단전호흡으로 이겨내고 나아가서는  오는 , 혼침(昏沈)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산란심(散亂心)도  단전호흡으로써  제어를 해가지고 나아가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에 가장 편리하도록 그렇게 지도를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단전호흡에 대해서도 직접 하시면서  열흘,  ,  , 직접 해보시면 다시  문의해 보고 싶을 때에 다시  와서 물어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몸을 바르게 하고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다음에는 화두(話頭)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

 

화두 가운데는 천칠백(千七百) 화두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문헌에 오른 것만이고,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공안, 이 우주세계에 가득찬 것이 바로 공안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선지식으로부터 주어진 화두  하나만을 철저히 참구를 해서  화두를 여지없이 통과를 해서 타파(打破)를 하게 되면은 천칠백 공안도 동시에  통과를 하게 되는 것이고, 천칠백 공안이 통과가 되면은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공안을 현성(現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으로부터  하나의 화두만을 받아가지고 철저하게 참구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어떤 화두 하나를 잡아가지고 이리저리 해본다든지  화두  해봤다,  화두  해봤다, 이렇게 해서 그러한 사람은 도저히 바르게 깨달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허송(虛送) 생활을 하게 되고,  안타까운 신세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인 것입니다.

‘이뭣고?’ 바로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어릴 때부터서  ‘이뭣고?’ 대한「대관절  인생이란  무엇이냐? ‘내’라는  무엇이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을 바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시심마(是甚麽)’ 화두인 것입니다.

 

부처님 출현하시기 이전에부터  시심마 화두는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출현하시기 이전 몇억만 년 이전부터서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서 우주 자체가 바로  「이뭣고?」의 뭉텡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불법(佛法)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그러한 사람 가운데에 대관절  인생이라는  무엇이냐?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철학을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 시나 소설이나 또는 예술, 과학 모든 자기의 분야에 있어서 결국은 그러한 분야를 통해서 「이뭣고?」라고 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빨리 인생 문제를 해결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이요,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철저하게 참선을 해 나가는 길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냐?

 

삼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오직  문제 하나만을 위해서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와 가족을 버리고 청춘과 인생을  버리고서 오직   문제만을 전문적으로 참구해 왔었던 것입니다.

목숨 바쳐 참구를 해서  일대사(一大事)를 통달하셔 가지고 그것을  제자에게 전하시고,  제자는   제자를 전해서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77 조사(祖師)가 바로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이십니다.

 

이러한 분명한 법통(法統)을 이어받으신 그런 어른으로부터 참선 지도를 받고 화두를 타고 공부를 해야만  자신도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른 안목을 갖지 못하고서 남을 바르게 가르킬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  목적지에까지 가보지도 않고서 남을  목적지에까지 올바르게 인도할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번도 가보지도 아니하고 그러한 안내자 없이 올바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있다고 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적을 바래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실(實)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아야지, 요행(僥行)을 바랜다든지 기적을 바래고서야 대도를 성취할 가망성은 없는 것입니다.(23분29~4318)

 

 

 

 

(2)------------------

 

‘이뭣고?’

대관절 지금 여러분들이  더위를 무릅쓰고 수백 리 밖에서, 수십 리 밖에서 이렇게 참석을 하셨는데 무엇이 왔느냐?”

내가 왔다

 

내가 누구냐?”

 아무개다

 

 아무개가 누구요?”

나여

 

내가 누구여?”

 아무개여

이러한 대답은 바른 대답이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아무개’지, 전생에는  아무개었을런지 모르고. 금생에 김팔봉’이 이름을 칠봉이라고 지으면 칠봉이고, 삼봉이라고 지으면 삼봉이지, 이름이야 수천 , 수만 개라도 새로 갈아붙일 수가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지 그것은 나’가 아니여.

 

“이 몸뚱이가 나’다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四大)가 뭉쳐져서 임시로 건립되어 있는,  나’가 살고 있는 임시 주택이요,  벌의 옷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이것은 나’가 아니다.

 

 나’는  몸뚱이를 운전하고  몸뚱이를 주재하는 주인공(主人公), 그것은 수십 수백 가지의 이름이 있지마는  이름 붙이기 이전에  참모습이 무엇이냐? 참면목(面目)이 무엇이냐?

이것은 우리의 희고, 검고 하는 것을 보는 눈으로는  수가 없는 것이고, 새소리 닭소리를 듣는  귀로서는 아무리 들을라고 해도 들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메겡이로 메쳐서  간장독이 !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칠백 공안은 우리가 나를 깨닫기 위한 나침판이요, 지팡이요, 등불이며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도 화두를 떠나서는 우리의 공부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화두는 우리의 앞에 역력(歷歷)하고 또록또록하게 나타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싱겁고 맛없는 한마디 말이지마는 계속 들고  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생각한다’고 하면은 조금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 나가는 데에는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못   없는 의심에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이것을 생각이라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라 하면 이리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인데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더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하는 그런 이론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관(觀)’이라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 ()’.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 ()’. “관(觀)하라 이렇게 본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없는 것이고, 재미없는 말이지마는 자꾸 하고  하고 하는 가운.... 또 생각하고  생각해 나가면...(녹음 끊김)

큰방살이가 작은방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언제가 수백억만 년 옛날에는 참나’가 나의 주인공이였었고, 번뇌 망상은 그때 작은방살이였었습니다.

 

그것이 아는 동안에 차츰...(녹음 끊김) 조국을 찾자는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조국에 모여가지고 모래 위에 흙을 퍼다가 붓고 모래 속에다가 수도 시설을 해가지고 모래땅을 옥토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 유학을  있는 학생들도 조국에 싸움이 일어났다 큰일이 일어났다 하면은 조국에서 부르기 전에 서로 앞을 다투어 조국으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조국을 잃어  사람이 아니면 조국이 얼마나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36년간이라고... (녹음 끊김) 근자에 와서 세계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놀랄 만큼 오히려 선진국들이 우리를 경계하지 아니하고서는 안될 만큼 그러한 수준에 지금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 경제면에서 세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녹음 끊김) 그러한 내가 참나를 찾는 진리를 탐구하는 그러한 (녹음 끊김) 자칫하면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한다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나라들이 한때 물질면에서 경제면에서 그렇게 (녹음 끊김 )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해서 조끔도 안일에 빠질 수도 없고, 허리띠를 늦출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검박하게 살면서 우리는  물질 이상으로  정신면에 있어서 우리 정신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정신력 강화가 바로 참선법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나를 찾는  수행이야말로 부처님을 믿는 신도에 국한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도  참선은 해야만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도 참선법만은 바로 배워 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참나를 찾는...(녹음 끊김) 

 

누차 말씀을 드리는 바이지만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다. 경전에 씌어진 어떠한 경전의 말씀도 ‘이뭣고?’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다 이것입니다. 다못 바보가 되어서 ‘이뭣고?’  번이고  번이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 머물렀다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는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호흡과 화두가 함께 잘되어 가는 단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그것에도 구애받을 것이 없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워서나 일을  때나, 차를  때나  먹을 때나 그러한 것에도 조끔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 인자 되었다. ! 잘되었다 이러한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아니 되고,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가더라도 계속 화두만을 더욱 간절하게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가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변해가지고  화두가   들리고, 졸음이 퍼오거나 망상심이  일어나거나 화두가 도저히 잘  들리는 경우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조끔도 번뇌심이나 짜증을 내지 마시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뭣고?’를 계속 들어나간다면 얼마 안 가서 어려운 고비를 넘게 됩니다.  고비를 지혜스럽게 참을성 있게  넘기고 나면 그때 가서는  한결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이르른 것입니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이 「서장(書狀)」에 말씀하시기를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화두가   들리고 이러한 경지가 절대로 나쁜, 공부가  안되는 마장(魔障)의 경지가 아니라 참으로 한 걸음 올라설  있는 좋은 중요한 계기니까 그것을 놓치지 말고  정신을 차려서 지혜롭게  고비를  넘기도록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해야만  그러한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안을 위해서는  몸을 버려야 하고  몸을 잊어야 하고, 마을을 위해서는 집안을 잊어야 하고,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는 마을을 잊어야 한다. 진리를 위해서 도를 위해서는 몸과 집안과 마을과 나라까지도 버려야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참선하는 사람은 집안이고  국가도  버려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참선이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나라 삼천오백만 민족이 전부 참선을 하게 되면 나라는 누가 지킬 것이냐?’ 혹 이러한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이뭣고?’하는 동안에는 정말 나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이거늘 목숨 없는 곳에 나라 생각, 민족 생각이 거기에 떠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바칠 , 모든 것을  잊어버릴 때에 도(道)의 문(門)에 들어갈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존재냐?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과 국가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중생을 위해서  사람의 모든 것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을과 국가와 민족을 잊어야 하고 그렇게 잊음으로써 진리를 체달(體達)하게 되고, 진리를 체달한 사람은 인류와 국가와 민족과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우리는  읽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참뜻을 옳게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한문(漢文)에 통달한 사람은 무슨 경전이든지 맥힐 것이 없다 이렇게 보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참선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야만 어떠한 경전의 쉬운  글귀라도 바로  수가있는 것입니다.

 

부디 덥다 핑계대지 말고, 춥다 핑계대지 말고 아직도 나는  일이 많다. 아들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일이 많다. 집안을 위해서  일이 많다 그러한 핑계대지 말고,

1분 1초라도  생각을 돌려서 화두를 참구하심으로 해서   이만큼 건강할  반드시 참나를 깨닫도록  자리를 통해서 다짐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4315~5853)()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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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작야삼경월만루~’ ; 전강 선사 오도송(悟道頌). 원래는 이렇게 7언이었으나 후에 5언으로 만드심.

〇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

*전강 조실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견성(見性) : ‘성품() 본다()’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 일치하는 정각(正覺)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오도송(悟道頌) ; 불도(佛道) 진리를 깨닫고  경지 또는  기쁨을 나타낸 게송.

*게송(偈頌) ; (), () ()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 조건()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 없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 ②선원(禪院).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계합(契合 맺을 /합할 ) ;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들어맞음.

*도업(道業) ; () 깨달음. ()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 수행. 진리의 실천.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줄임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 :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

*응시(凝視 엉길 /보일 )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팔부(八部)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복식 호흡(腹式呼吸) ; 숨을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해서 가로막의 신축에 의하여 하는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

*상기병(上氣病 오를 /기운 / )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 머리에 치밀게()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수식관(數息觀) ;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조사(祖師) : 1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 깨달아서이를 전하는 () () 상응(相應)하는 도인.

*혼침(昏沈 어두울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어지러울 ) ; 혼침(昏沈)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 마음이 어지러운 .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 삶과 죽음,  생사(生死) .

①부처님이 중생 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법통(法統 부처님의 가르침 /거느릴·벼리·혈통) ; 불법(佛法) 물려받음. 또는 대대로 불법을 계승하는 계통. 법맥(法脈) 같은 .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법통(法統)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2)

 

*사대(四大) ; ①지() · () · () · () 말함. () 원소란 .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 가지 원소().

(1)지대(地大) : 굳고 단단한() 것을 ()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負載) 있고,  질애()하는 바탕. 질애()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 (2)수대(水大) : 습윤(濕潤) 성으로 하고, 모든 () 포용(包容)하는 바탕. (3)화대(火大) : () 성으로 하고, () 성숙(成熟)시키는 바탕. (4)풍대(風大) : () 성으로 하고 ()성장케 하는 바탕.

②신체를 말함. 원래, 신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함.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 주인옹(主人翁).

*면목(面目  / ) :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로써 (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 (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 ()하여 바르게 아는 .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하여 체성(體性) 없음이 마치 물에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功行]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 () 앞에 나타나 ()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분별식(分別識) ; 팔식(八識) 가운데 6 의식(意識) 말한다.  의식은 차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칠통(漆桶  / ) ; ①옻칠을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본래면목(本來面目  / / / )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역력(歷歷 겪을·지낼·수를 ·가릴 ) ; ①뚜렷한 모양. 분명한 모양. 똑똑한 모양. ②사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양.

*어폐(語弊 말씀 /해어질·쓰러질 )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있는 .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 · 『대혜서(大慧書) · 『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마장(魔障 마귀 /장애 )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 [참고]헤살;남의 일이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한역. ().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방법. ③무상(無上)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체달(體達) ;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086) 전강 스님의 선지식 정화 / 전강 스님에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법을 쓰신 만공 스님의 지도 /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 / 사교입선(捨敎入禪).

 

원래 참선(參禪)은 처음 시작할 때에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가지신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참선을 시작해야 하고  그러한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정진을 해야 하고 정진을  끝에 무슨 소견이 나거나 얻은 바가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런 바른 정법(正法)을 갖으신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공안, 화두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통해서 갖은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파고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결국은 밝혀내야  것이겠지마는, 이것은 보통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리의 수수께끼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간다’고 하는 고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 모든 이론을 깨끗이 버려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선지식의 지시에 따라야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있는 사람이라야 빨리 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86)—78 7 관음재일 법회(78.08.27) (용086)

 

(1) 약 20분.

 

(2) 약 4분.

 

(1)------------------

 

입추(入秋)가 지나고 처서(處暑)가 지났는데 아직도 잔서(殘暑)가 혹심(酷甚)해서 대단히 더웁고 훈증(薰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오늘 7 관음재(觀音齋)에 여기 사부대중께서 많이 법회에 참석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모다 제방(諸方)에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동안  더위를 이겨내면서 용맹, 가(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시고 해제를 마치고 오신 모다 납자(衲子) 스님네 그동안 정진하시느라고 대단히 노고가 많으셨을  생각합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의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으신 내용에 대해서 법문이 계셨습니다.

 

원래 참선(參禪)은 처음 시작할 때에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가지신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참선을 시작해야 하고  그러한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정진을 해야 하고 정진을  끝에 무슨 소견이 나거나 얻은 바가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런 바른 정법(正法)을 갖으신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摩)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가다가  갈래  갈래 길이 나오면은 반드시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만 자기의 목적지에 어김없이 도착할 수가 있거든,

 

하물며 눈으로 보이지 아니한 마음으로 가는  (), 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선각자(先覺者)의 바른 지시 없이 자기 마음대로 공부를 지어간다든지,

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한 그러한 분에게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명이면  ,  명이면  , 중간에 가다가 주저앉거나 또는 곁길에 빠져서 헤매거나, 삿된 길에 떨어져서 영원히 자기 신세를 망치고 남을 망치고 그리고 불법(佛法)을 망하게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전생에 얼마나 도를 많이 닦으셨는지, 아마도 전생에 불보살(佛菩薩)이나 위대한 조사(祖師) 스님네가 말세(末世)의 정법을 선양하기 위해서 화현(化現)으로 나타나신 그러한 성현이신, 필시 그러한 어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23살의 젊은 연세로 견성(見性)을 하셔서 한국의 여섯 분의  선지식으로부터 차례차례 인가를  맡으시고,

거의 지리산, 태백산을 위시(爲始)한 명산대찰에 선지식들을 차례차례  만나시고 강사가 되었건, 선사가 되었건 조실로 계신 분은 닥치는 대로 법(法)을 거량(擧揚)을 해서 거의, 확철대오 하지 못하고 선지식 노릇하고 계신 그러한 분들 모조리  색출을 해서 소탕을 해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 태백산에 8 도인(道人)이라 해가지고 태백산 골짝 골짜구니마다 도인이라 해가지고 도인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가짜 도인들을 전부   법문답(法問答)을 통해서  스스로 도인의 감투를 벗어버리고 조실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는 없도록 그렇게 하셔서 노상  금봉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식 정화(淨化)를 전강 스님이 하셨다”고 이렇게 노상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봉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님은, 전강 스님은 일생동안을 차라리 조실 자리에 앉지 말고 납자의 위치에서 일생을 지내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하고 여쭤 봤더니 “납자의 위치에 있으면 얼마든지 어떠한 선지식이라도 가서 법거량(法擧揚)을 해가지고 정화를  수가 있는데, 스스로 조실(祖室)의 위치에 앉게  뒤에는 조실의 체모(體貌)가 있어서 그렇게  수가 없는 것이다.

 

근자에 와서 선지식의 인가도 없이 절절이 많은 조실들이 지금 한국에 수십 명의 조실 스님이 계십니다. 이럴 때에 정말 확철대오 했고  선지식으로부터 분명히 인가를 받은 그러한 조실이라야 정말 학자(學者)를 바로 제접(提接)해서 정법을 유통해 나갈 것이어늘, 자기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선지식의 분명한 인가도 없이 조실의 책임을 띄고서 많은 후배들을 그르치고 있지 않느냐.

 

이럴 때에 전강 스님이 그러한 정화를 다시 한번 해주어야만 말세의 정법이, 불법이 바른 것과 삿된 것이 깨끗이 가려질텐데 전강 스님이 조실의 명예를 띄고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제 선지식 정화를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이러한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6대 선지식으로부터 차례차례  인가를 받고서 마지막 판에 만공(滿空) 스님 회상(會上)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서 떠억 절을 하시니까 “십마물(什麽物)고?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와서 절을 허는고?” 다시 한번 일어서서 떠억 절을 하시니까 “무슨 물건이여?”  물으신다 말씀이여.

그래 조실 스님께서는 주먹을 들어서 만공 스님 앞에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허! 습기를 버리지를 못했구나 만공 스님께서 그렇게 점검을 하셨던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자신(自信)이 만만(滿滿)해서 쪼끔도 막힐 바가 없고, 의심이 없으셨건마는 그날 이후로 계속 만공 스님 회상에 머물러 계시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전강 조실 스님의 하시는 말씀, 하시는 거동에 대해서 만공 스님께서는 인증을 하시지 아니하고, 사사건건이 전강 조실 스님을 비웃고, 놀려 대고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뭐라고 입만 벌리시면 “자네보다는 나어 도대체 입을 벌리지도 못하게 하시고 비웃고, 조롱하고 해서 그러니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열흘을 지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절대로 선지식이 학자를 조롱하실 리도 없고, 속일 리도 없고, 아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시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정신을 재차 가다듬어서 철봉대(鐵棒臺)를 붙잡고 서서 밤을 지새기를 몇날 며칠, 한 달,  , 이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던 것입니다.

 

결단코 선지식이 나를 조롱할 까닭도 없고 속이실 리가 없다. 반드시 까닭이 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다 이리 생각하시고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하는 화두를 들고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만공 스님을 최후로 만나지 못하셨던들, 만공 스님의  쓰시는 것을 정말 깊이 믿지 아니 하셨던들, 조실 스님께서는 꼭지가  떨어진 채로 선지식 노릇을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정말 학자로 하여금 정말 조끔도 의심 없는 경지에까지 들어가도록 이렇게 대자비를 가지시고 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참선을 올바르게 하고자  때에는 그러한 만공 스님과 같은 그러한 훌륭한 선지식의 지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재삼(再三) 느끼게 됩니다.

 

만공 스님 말고 용성 스님이라든지, 한암 스님이라든지 혜월 스님이라든지 혜봉 스님이라든지, 그러한 선지식들도  만공 스님 만큼 그렇게 훌륭한 선지식이셨고, 각기  선지식마다 특이한 좋은 점을 장점을 가지고 계셔서 그러한 선지식들도  학자로서는 두루  찾아뵈어야 하고 지도도 받아야 하지마는,

 여러 선지식 가운데에도 특별히 만공 스님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학자의 마지막 중요한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그러한 밝고도 밝은 그러한 안목을 갖으셨던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혜봉 스님께서 “거년 가난은 비가난이요 무입추지지(無立錐之地)러니, 금년 가난이 시가난이라 추야무(錐也無)로다.  공안에 있어서 어떻게 일러야 조사선(祖師禪)을 보았다고 하겠느냐?” 조실 스님께서는 거침없이 “능각이 뾰족하고 뽀족해서 저와 같지 않습니다[稜角尖尖不似他]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쪼끔도 의심이 없으셨지마는,

후일에 그때 혜봉 스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은 것을 인가해 주신 걸로 알았었던 것을 후에사 그것이 아니라, ‘분명히 내가 그것을 잘못 일른 것이고 혜봉 스님께서 인가해 주신 것이 아니다 것을 스스로 깨달으시고  용화사에서 연전(年前)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雲集)한 가운데에 그것을 대중 앞에 공포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은 우리의 정진도 일기지사(一期之事)로 느낀 바가 있다든지, 얻은 바가 있다든지, 어떠한  분의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해서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만한 것을 얻은 것으로써 만족을 삼을 일이 결단코 아니라고  것을 다시  뼈아프게 느끼게 됩니다.

 

진리는 한(限)이 없이 높고 크고 깊은 것이어서 우리가 정진하는 가운데에 조그마한 쪼끔 느낀 바가 있고, 어떤 공안에 맥힌 바가 한두 공안에 통과한 바가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족(足)함을 삼고 살림을 삼고 주저앉아서는 아니될  생각합니다.

 

옳다! 인자 되었다!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할   사람은 기껏 옳게 공부를 해 가다가 거기서부터 비뚤어 가는 것이 되는 것이고, 계속 정진을 해 나가다가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되는 것이고,

좋은 제호(), 우유로 만들어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바로 제호라고 하는 음식인데, ‘ 좋은 맛있는 제호상미(醐上味) 변질케 해서 독약으로 만드는 격이 된다’고 고인이 말씀하신 뜻이 얼마나 뼈아프고 소중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운데에 스님이 되었건 또는 거사가 되었건 또는 청신녀가 되었건 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자 하신다면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올바른 지도하에 공부를 하실 것이고,

공부하시다가 어떠한 종류의 얻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눈밝은 선지식의 점검을 통해서 씻어버릴 것은 씻어버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다시 올라서야  사람은 다시 올라서도록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처음~206)

 

 

 

 

 

(2)------------------

 

6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으실 때에는 전부  공안을 통해서, 공안 문답을 통해서 점검을 받게 됩니다.  공안, 화두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통해서 갖은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파고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결국은 밝혀내야  것이겠지마는, 이것은 보통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리의 수수께끼다

 

진리는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실다웁게 닦고, 참다웁게 깨달라서, 깨달라서  몸에 체달(體達)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갈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알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참선 공부는 어떠한 학자라도, 어떠한 강사라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걸림이 없이  해명을 하고,  해설을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으로 공안을 타파(打破)할 수는 없는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지식이 오히려 참선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간다’고 하는 고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 모든 이론을 깨끗이 버려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선지식의 지시에 따라야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있는 사람이라야 빨리 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고인들이 그러한 , 이론, 지식 이러한 것들이 속에 가뜩 차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를 얻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던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보고 듣고 생각해서 얻은 바는 빨리 버릴수록 도(道)에는 유익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2010~2326)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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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는 . 이십사절기의 하나. 양력으로 8 23경이며,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며 벼가 익는 시기이다.

*잔서(殘暑 남을 /더울·더위 ) ; 늦여름의 한풀 꺾인 마지막 남은[] 더위[].

*혹심(酷甚 독할·심할 /심할 ) ; ①정도가 가혹(苛酷)하고 (). ②매우 지나침.

*훈증(薰蒸 불피움·태울 / ) ; ①불피워 태우고[] []. ②찌는 듯이 무더움.

*관음재(觀音齋) ; 관음재일(觀音齋日). 매월 음력 24.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 3(身口意 三業)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해제(解制  /만들·법도 ) ; (안거)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납자(衲子) :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인가(印可 도장 /옳을·인정할 )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정법안장(正法眼藏) ; 부처님의 바른 교법이라는 .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간직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깨달음을 뜻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 상속하는 .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한역. ().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방법. ③무상(無上)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 () 불타(佛陀) 준말. 각자(覺者)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조사(祖師) : 1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 깨달아서이를 전하는 () () 상응(相應)하는 도인.

*말세(末世  /세상 )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 세상,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세상,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 꿰뚫어 보아[]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법거량(法擧揚  / /나타낼·밝힐 ) ;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 대한 문답.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 따라 수행하는 사람.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 사이에 주고받는 () 대한 문답.

*정화(淨化) ;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체모(體貌  /얼굴 ) ; 체면(體面). 남을 대하기에 번듯하고 떳떳한 입장이나 면모.

*학자(學者) ; 학인(學人). 도학자(道學者).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 성자.  수행승. () 닦는 수행승.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제접(提接 이끌 /응대할·가까이할 )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장소. 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 했을까?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연전(年前) ; 여러  .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 있는  가지 제자.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upasaka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upasika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운집(雲集 구름 /모일 ) ; 구름[]처럼 모인다[]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일기지사(一期之事) ; ①한 때의 . 일시적인 . ②당장의 .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제호() : 옛날 인도에서 우유로써 만드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맛이 제일 좋고, 열병(熱病) 귀중한 약품도 되는 것이 제호다。이것은 히말라야 산에 있는 비니라는 풀만을 먹은 소의 젖으로 만든 것이 더욱 좋다고 한다.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74~75.

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생각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이 바른가를 결택 받아야 하느니라。

    

註解(주해)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須生慚愧(수생참괴)하야사  始得(시득)다  道如大海(도여대해)하야  轉入轉深(전입전심)하니  愼勿得小爲足(신물득소위족)하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則(약불견인즉)  *醐上味(제호상미)가  翻成毒藥(번성독약)하리라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 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 대도정법(大道正法) 명맥(命脈). ②법신(法身)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

 

 

 

 

 

------------------(2)

 

*체달(體達) ;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화두(話頭)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막힌 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12~)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 [ ‘참선법 A’ 에서]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법보재)2017. 4. 9. 17:23

 

 

§(297) (게송)유연막축환성이~ / 만년위패 법보단은 영가와 살아있는 우리들의 생사해탈을 위해 설립 / 참선법문을 듣고 수행해야 생사문제를 해결.

 

열반하신 전강 선사(田岡禪師)께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시고, 또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해서 살아있는 사람은 결제(結制)를 해서 참선을 하고 또 법문을 듣고 부지런히 닦아서 생사해탈하게 하고, 우리의 선망부모는 위패단에 이렇게 모시고 조석으로 축원해 드리고 명절에는 차례를 젓숩고, 또 이렇게 3월 16일이나 4월 15일 그 밖에 법회 때 천도를 해 드리고, 법회 때마다 돌아가신 분이나 산 사람이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듣고서 바르게 실천을 해서 생사해탈하게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날 때에 그놈도 같이 왔고, 이 몸뚱이가 죽어도 그놈은 없어지는 법이 없이 다시 또 새 옷을 갈아입어. 생사(生死)에 걸림이 없어, 그놈은.
밤낮 옷을 갈아입지마는 그놈은 생할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는 것이니 그놈을 깨달아야지, 그놈을 깨닫는 것이 불법(佛法)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그 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이요, 그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거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는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생사윤회를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부모님을 법보단 만년위패에 모신 그 인연으로 해서 산승(山僧)도 작고하신 부모의 위패를 여기다 모셨고, 또 여러분들께서도 부모님과 조상과 자매질손, 제형숙백, 원근친척의 인연 있는 모든 영가를 여기다가 모셔서, 이 정법문중 법의 집안에 있어서 한 가족의 인연을 이렇게 맺게 되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의 문중에서 우리는 또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세세생생에 다시는 우리는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송담스님(No.297)—86년 법보재 법회(86.03.16.음) (57분) (용297)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16분.

 


(1/3)----------------

유연막축환성이(有緣莫逐還成易)로되  공인교타물주난(空忍敎他勿住難)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난이양두구참단(難易兩頭俱斬斷)인데  조정의구불상간(祖庭依舊不相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유연막축환성이(有緣莫逐還成易)로되, 인연(因緣)이 있어. 있는 인연을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도리어 쉬워. 인연을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도리어 쉽거니와.
공인교타물주난(空忍敎他勿住難)이다. 공(空)한 이치, 공(空)한 도리에 머물르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렵더라.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거니와, 마음이 공(空)한 경지에 집착하지 않기는 오히려 어렵더라.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을 해 가면서 망상(妄想)이 다 쉬어지고, 일체 경계(境界)가 다 자취가 없어서 이 몸뚱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그 사실까지도 다 망각을 해 버려. 이 바로 경계와 나의 생각이 다 공(空)한 경계인데, 경지(境地)인데, 그 공(空)했을 때에 그 공(空)한 경지에 머무르지 않기가 참으로 더 어렵더라.

공(空)해 가지고 ‘아! 내가 편안하다, 너무너무 고요하구나, 너무너무 깨끗하구나,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 공(空)한 경지에 다 집착을 하고 거기에서 지각심(知覺心)을 내고, 그래가지고 공부가 지지리 애써서 고비를 넘을라고 할 때에 찰나간에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는데.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있는 인연을 따라가지도 말고, 또 공(空)한 경지에도 집착을 하지 아니해.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쉬웁고, 공(空)한 경지에 머무르지 않기는 어려운데, 이 어렵고 쉬운 것, 이 두 가지를 다 끊어버리면(難易兩頭俱斬斷),
조정의구불상간(祖庭依舊不相干)이여. 우리 활구참선(活句參禪) 조사문중(祖師門中)에 있어서 예나 다름없이 상관을 하지 않더라, 상관을 하지 않는다. 쉬운 데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어려운 데에도 떨어지지 아니한데, 그 두 쉬웁고 어려운 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정진(精進)을 해 들어가야 한다 그말이여.


오늘 병인년 3월 16일 법보재(法寶齋)를 맞이해서 원근 각지 방방곡곡에서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이셨습니다.
여러분께서 보신 바와 같이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 전강 조실 스님 영정과 오른쪽에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그리고 그 좌우에 9천이나 되는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위패(位牌)가 꽉차게 모셔져 있습니다. 한 위패에 두 분 내지 세 분씩 모신 데도 있고 보면 수만의 영가(靈駕)가 여기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위패는 선망부모(先亡父母), 한 말로 말하면은 다생겁래(多生劫來) 선망부모지만 자상하게 말하면 부모님 · 조부모 · 증조부 · 고조부 그리고 남편 · 아내 또 먼저 간 아들딸 · 숙부 · 숙모 · 원근 친척, 심지어는 집안에서 기르던 개가 죽어서 그 개의 영혼을 천도(薦度)하기 위해서 모신 이도 있고, 이웃집 아이가 내 집에 놀러왔다가 비명에 다쳐서 죽은 그런 영가도 모셔져 있고, 그래서 모두 합해서 다 숙세(宿世)의 우리의 부모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비명에 간—차 사고로 죽은 이, 물에 빠져 죽은 이, 또 자살을 한 이, 병고에 죽은 이, 여러 가지 한을 다 풀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한 수많은 영가들이 꽉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고 천년만년(千年萬年)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약을 먹고 몸을 잘 봉양을 한다 해도 불과 백세 미만에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됩니다. 조금 앞서가고 뒤서가고 한 차등만 있지, 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다 마침내는 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갈 것을, 한을 다 풀지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갈 것을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우리는 태어났겠습니까?
차라리 그럴 바에는 태어나지 아니했으면은 나을 것을 무엇하러 태어나 가지고 단 하루도 사는가 싶이, 산다 싶이 살아 보지도 못하고 몸부림치다가 마침내는 떠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고 싶어서 마음대로 오고, 가고 싶어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와지기 때문에 온 것이고, 또 가지기 때문에 간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한 부처님이나 보살들 그러한 성현은 중생 교화를 하기 위해서 그 법력(法力)과 도력(道力)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왔다갔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생사에 자유하지 못한 우리 중생은 세상없이도 마음대로 올 수도 없고, 마음대로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기는 마음대로 못 와도 가기는 마음대로 하지 않는냐. 뭐 자살을 해 버리면 가는 것이지, 지가 안 가고 배기느냐’하지만, 그 자살을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옷 껍데기만 벗었지, 껍데기만 벗었지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그 업(業)에 따라서 천상에 태어나거나, 지옥에 가거나, 마냥 헌옷 벗어버리고 또 다른 옷 입고—노랑 옷 입었다가, 파랑 옷 입었다가, 검은 옷 입었다, 흰옷 입었다, 옷만 갈아입었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괴롭다고 해서 자살을 하고 그런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 고(苦)를 받을 업(業)을 지어 가지고 고(苦)를 받는데, 차라리 깨끗이 그 고(苦)를 받고 업(業)을, 빚을 갚아 버려야 다음 생에는 또 좋은 곳에 태어나지, 빚 안 갚고 억지로 자살했다고 해서 지어놓은 빚이 삭감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남의 빚 쓰고 도망친다고 해서 그 빚이 갚아지겠습니까? 점점 이자와 죄까지 다 가산이 되어서 더 많은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짓고 받은 마당에는 철저하게 갚아 버려야 하는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괴로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면할 것이냐?
왜 우리는 생로병사의 구렁텅이를 면하지를 못하고 무량겁(無量劫)을 거치고 돌고 해서 오늘 이 자리까지 왔느냐? 순전히 우리 자신이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렇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짓느냐? 우리의 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무량겁을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을 잘 잡드리를 못하고, 그 한 생각으로 온갖 업(業)을 지어 가지고, 받기는 무량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성냥 한 개비를 탁! 해서 그 불을 조심을 아니해 가지고 집을 다 태우고, 이웃집을 다 태우고, 온 도시도 다 태우고, 온 들판에 곡식을 다 태우고, 산에 붙으면은 온 그 숲을 다 태우듯이. 그 무서운 불이 최초에는 성냥불이나 담뱃불, 그 아주 참 조그마한 불로 인해서 그렇게 무서운 재난(災難)으로 번져 가는데, 우리 육도윤회(六途輪廻)도 원인은 우리의 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한 생각 딱! 일어났을 때 그것을 탁! 돌이켜서 잡드리를 해 버리면 그 업을 짓지 않고 생사윤회도 벌어지지 아니할 텐데, 그 한 생각을 잡드리를 아니해 가지고 그 한 생각이 차츰차츰 번지고 발전을 해서, 그것이 육체로 행동으로 옮겨져서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쉬운 이치입니다. 한 생각을 잘못 먹어 가지고 그 무서운 고(苦)를 받는 사실에 우리가 눈을 뜬다면, 우리는 여태까지는 비록 무량겁을 생사윤회 속에서 왔지만 오늘 이 시간부터서는 자기의 무량겁 그 여행, 고해(苦海)의 그 여행을 갖다가 반대 방향으로, 해탈의 방향으로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오늘 이 법보재(法寶齋)! 법보단에 모셔진 이 만년위패(萬年位牌)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그 원한에 사무치는 영가들로 하여금 해탈도로 가게 하고, 동시에 살아있는 우리들!
우리 살아있는 법보제자(法寶弟子)들로 하여금 영가가 되어서 이 위패단에 모셔지기 전에 살아 있을 때에 법(法)을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에 이 만년위패 법보단의 설립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열반하신 전강 선사(田岡禪師)께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시고, 또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해서 살아있는 사람은 결제(結制)를 해서 참선을 하고 또 법문을 듣고 부지런히 닦아서 생사해탈하게 하고, 우리의 선망부모는 위패단에 이렇게 모시고 조석으로 축원해 드리고 명절에는 차례를 젓숩고, 또 이렇게 3월 16일이나 4월 15일 그 밖에 법회 때 천도를 해 드리고, 법회 때마다 돌아가신 분이나 산 사람이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듣고서 바르게 실천을 해서 생사해탈하게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산 사람은 귀가 있어 법문을 듣지마는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을 것인가?’ 혹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산 사람이나 돌아가신 분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다맛 산 사람은 『몸뚱이가 있는 영가』고, 돌아가신 분은 『몸뚱이가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 귀로 생각이 헷갈리고, 코로 생각이 헷갈리고, 입으로 헷갈리고, 몸뚱이로 헷갈리고, 이리저리 헷갈려서 말을 일심으로 듣기가 어렵지만, 돌아가신 영가는이 몸뚱이가 없기 때문에 정신이 헷갈리지 아니해서 오히려 살아 계신 분보다 더 법문을 잘 듣는 것입니다.(처음~20분23초)

 

 

 

 

 

(2/3)----------------

영가가 생존 시에 불법(佛法)을 잘 믿고 실천을 하신 그러한 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생존 시에 불법을 믿지 아니하고, 불법이 무엇인 중도 모른다 할지라도 이 위패단에 모셔 놓으면 안 들을라야 안 들을 수가 없어.
언제든지 법회에 법문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우리의 선망부모, 이 위패단에 모신 여러 영가들로 하여금 법문을 들으실 수 있도록 정식으로 초청을 해서 법문을 들으시도록 이렇게 법으로 그렇게 거량(擧揚)을 해서 하기 때문에 참 편안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법문을 들으시게 됩니다.

수없는 법문을 법회 때마다 듣고 또 듣고 하기 때문에 이 위패단에 모셔진 영가는 인자 ‘법문 귀’가 열려서 아무리 어려운 법문, 최상승 법문을 듣는다 해도 다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생존 시에 가졌던 모든 그 원한심, 생존 시에 풀지 못한 어떠한 업연(業緣)의 원한이라 할지라도 다 봄눈 녹듯이 다 녹아져서, 업이 녹기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시는데 아무 장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곳으로 떠나지 못한 것은 그 업의 쇠사슬에 걸려서 그래서 못 가는 것입니다.
산 사람이 몸뚱이나 발목을 갖다가 쇠줄로 묶어 놓으면 가고 싶은 데 가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것이나, 죽은 사람도 ‘업(業)의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업의 쇠사슬’이라는 게 원한심, 미워하는 마음 또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 재산에 대해 집착심, 사람에 대한 집착심, 무엇이든지 집착하고 탐착하고 애착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쇠사슬입니다.

차라리 쇠로 만든 쇠사슬은 강한 쇠 자르는 기계로 자르면은 뚝딱 잘라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애착심 · 집착심 · 탐착심 이러한 쇠사슬은 자를라야 자를 길이 없어. 본인 스스로 업이 녹아져야만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산 사람은 법문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감동이 되고 계합이 되어서 업이 스르르 녹아져 버리면은 거기서 집착이 툭툭 끊어지고 애착이 끊어지고 원한심이 끊어지고, 동시에 돌아가신 분도 그런 생전에 얽히고설킨 그런 탐착 · 애착 · 집착 그런 것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다 녹아져 버린다면 그 영가가 천상이면 천상, 극락이면 극락, 또 이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으면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화사 법보전에 모셔진 이 수만의 영가들은 다행히 신심 있는 또 효심 있는 자손과 유족들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렇게 참 좋은 도량에 봉안이 되어서 이렇게 법문을 듣고 업을 소멸해서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게 되었습니다.

또 그 영가를 여기에다 모신 그 인연으로 또 그 유족들이 불법을 믿게 된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원한에 사무쳐서 돌아가시고, 비명(非命)에 가신 그 영가가 있으신 분은 집안에 우환이 끓고, 되는 일이 없고 자꾸 그러니까 ‘용화사 법보전에 모시면은 좋다’ 그 말을 듣고 불교도 믿지 않고 심지어는 다른 종교를 믿는 분까지도 여기다가 위패를 모시고서, 그 위패를 모신 그 인연으로 차츰차츰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승(殊勝) 인연이라 하는 것이여.

세속의 인연은 좋은 인연이나, 악한 인연이나 모두가 마침내는 생사의 쇠사슬 밖에는 안 되는 것인데 이 법으로 맺어진 인연! 이 법의 인연은 이것이 수승한 인연이라,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피차가 업이 소멸이 되고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의 인연은 좋은 인연으로 얽혀져도 마침내는 그것이 원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악한 인연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참 좋은 것인데 그 좋은 인연이 결국은 악연으로 변하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의 게송에도 ‘막약다생(莫若多生)에 불식인(不識人)이다.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인데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이다’
다겁생래(多劫生來)로 원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느니. 절대로 친하지 아니한 데에서는 원수가 생길 까닭이 없어. 아지 못하는데 무슨 원수가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반드시 서로 알고 지내고 친하게 지내다가 결국은 거기에서 원수가 되는 것인데, ‘막약다생(莫若多生)에 불식인(不識人)이여’ 그렇고 보면 차라리 사람을 아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게 되는 데에서 원수가 생기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데 이 불법은,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선인(善因), 친한 인연도 해탈로 가는 도반이고, 설사 본의 아니게 맺어졌던 악한 인연도 결국은 이 정법문중에 들어오면 해탈 인연으로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최상승 법문을 듣고, 자꾸 수행을 해 나가면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을 이뻐하고 무엇을 친하고 무엇을 원수처럼 상대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게도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나를 욕하고 비방하고 미워하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미워한 그러한 거기에서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인연의 그 뿌리를 관찰을 하고서 화두를 들고 ‘참나’로 돌아오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을 보고도 나는 배워 나가고, 악한 사람을 보고도 나는 거기서 법의 이익을 얻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상대하고, 모든 일을 그렇게 상대해 나갈 때에 우리는 일취월장, 날로 달로 자꾸 승화되고 향상되어 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건경해수(老蚌吸乾鯨海水)하니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요. 능(能)으로 인해서 소(所)가 생겨나고, 소(所)로 인해서 능(能)이 생겨난다. 능(能)이라 하는 것은 주체, 주관이고, 소(所)라고 하는 것은 객체, 객관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내’라고 한 이 능(能), 주체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모든 바깥 경계가 인식되어 지는 것이고, 또 객관 세계—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그것으로 인해서 주체심(主體心)이 동(動)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경계를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거든.
그 식(識)이 없다면 경계를 봐도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안 해. 식(識)이 없으면 경계가 있다 해도 일어날 것이 없고, 경계(境界)가 없다면은 식(識)이 있어도 발생할 계기를 갖지를 못해. 그래서 육식(六識)과 육진(六塵)은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여.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여. 그래서 능(能)과 소(所)가 함께 없어져 버리면,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공(空)해 버리면 생(生)하되 생(生)할 것이 없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여. 뻑뻑이 머무른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항상 이 주관과 객체가 서로 어울리고 서로 얽히고 서로 뒤범벅이 되어서, 이놈이 어린애들 싸우는데 한 놈이 위에서 누르고 밑에 눌렸던 놈이 또 위로 뒤집어지고 그래가지고 위에서 누르다가 또 밑으로 깔리고 하듯이, 그 작업으로 인해서 무량겁(無量劫)토록 생사고해(生死苦海)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인데.
노방흡건경해수(老蚌吸乾鯨海水)여. 큰 조개! 조개가 있어서 온 바닷물을 한 입에 다 들어 마셔 버려. 그래가지고 바닷물이 바짝 마르도록 바닷물을 다 들어 마셔 버리면.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여. 바다 밑에 그 아름답고 찬란한 산호 가지가 삼경(三更) 달에 빛이 나더라.

여기서 이 노방(老蚌)이라고 하는 게, 늙은 조개가 얼마나 크면 그 한없이 깊은 그 넓고 깊은 그 바닷물을 쫘악 다 들어 마셔 버릴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는 이 크고도 큰 늙은 조개, 인자 조개 새끼 쬐그만 것이 아니라 몇억 겁을 갖다가 커서 커 가지고 한번 쭉 들어 마셔 버리면 바닷물이 그 조개 속으로 쏴악 다 들어가 버릴 만큼 그러한 늙은 조개가 어디에 있느냐?
비단 여기서는 바닷물을 둘러 마신다고 했지만 바닷물뿐만이 아니라 이 시방(十方)에 가득차 있는 무한대(無限大)한 이 허공, 해와 달과 저 끝없는 하늘나라에 있는 수많은 별까지라도 한목 다 둘러 삼킬 수 있는 그러한 무서운 조개, 고조 할아버지보다도 참 더 무서운 조개가 우리 이 몸뚱이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조개는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히지도 않고,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으면서 우리의 콧구녁으로도 들락거리고, 우리의 눈으로도 드나들고, 우리의 귀로도 드나들고, 팔만사천 모공으로 드나들고 항상 우리의 눈앞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다 그말이여.
그놈이 형투리가 있는 놈 같으면, 모양과 빛깔이 있는 놈 같으면 제 아무리 큰들 한도가 있는 것이지만, 이놈은 빛깔과 모양이 없는 것이라 이것이 ‘크다’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

크고 작은 것을 떠나. 크기로 말하면은 우주를 다 둘러 삼키고도 한이 없고, 작기로 말하면은 바늘 꽂을 땅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이것이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무량겁 이전에 생겨난 때가 없이, 무량겁 미래에도 없어질 때가 없어. 그러한 물건을 우리는 이 똥주머니 속에, 이 가죽푸대 속에 항상 그놈이 살아 있다 그말이여.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날 때에 그놈도 같이 왔고, 이 몸뚱이가 죽어도 그놈은 없어지는 법이 없이 다시 또 새 옷을 갈아입어. 생사(生死)에 걸림이 없어, 그놈은.
밤낮 옷을 갈아입지마는 그놈은 생할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는 것이니 그놈을 깨달아야지, 그놈을 깨닫는 것이 불법(佛法)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그 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이요, 그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거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는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생사윤회를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위패에다가 이름을 써서 벽에다 거는 것이야 어디다 못 걸겠습니까? 한국에 수천 개 사찰이 있으니 사찰에 법당에 아무데라도 걸 수가 있고, 새로 절을 지어서 걸 수도 있고, 여러분 가정에다도 뭐 얼마든지 걸 수가 있어.
이름을 써서 거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렇게 위패로 모셔진 영가나 법문을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로 우리의 그 늙은 조개를 갖다가 바로 깨달아야 되거든. 바로 깨닫는 참선 법문을 듣고, 참선 수행을 해야만 이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20분24초~41분2초)

 

 

 

 

 

(3/3)----------------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이 법보단을 창설을 하시고, 조실 스님 자신께서 먼저 부모님의 위패를 여기다 모셨습니다. 1번, 만년위패 제 1번이 조실 스님의 어머님, 아버님의 위패고, 조실 스님 아버님의 제삿날이 바로 3월 16일인데 그날로 법보재일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부모님으로 인해서 조실 스님이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셨고, 그 부모님이 이 몸뚱이를 낳아주셨기에 출가를 하셔서 정법을 만나서 참선을 해 가지고 견성을 하시게 되었어.
그러니 깨닫고 보니 부처님과 불보살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은혜도 한이 없지만 그 이치를 깨닫도록 해 주신 이 몸뚱이를 낳아주신 그 부모님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그 부모님을 여기 만년위패 1번에 모시고 부모님의 돌아가신 날짜로 법보재일을 지정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 인연으로, 또 조실 스님의 부모님의 그 인연으로 해서 산승(山僧)도 작고하신 부모의 위패를 여기다 모셨고, 또 여러분들께서도 부모님과 조상과 자매질손, 제형숙백, 원근친척의 인연 있는 모든 영가를 여기다가 모셔서 이 정법문중에 있어서, 법의 집안에 있어서 한 가족의 인연을 이렇게 맺게 되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의 문중에서 우리는 또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세세생생에 다시는 우리는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한 사람도 낙오자가 없이, 한 사람도 떨어진 일이 없이 부처님 회상(會上)에 다시 만나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 마칠 때까지 우리는 항상 형제자매요, 도반이요, 한 가족으로서 우리는 나날이 향상되어 가고, 다달이 도업(道業)이 나아가서 결정코 생사해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이요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하면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빛과 그림자는 등불로 인해서 나타나. 누구든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등불이 켜짐으로써 그 등불로 인해서 빛이 나고, 그 빛으로 인해서 모든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여.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다. 파도는 어디서 일어났냐 하면은 물로 인해서 일어났다. 물이 없으면은 파도가 어떻게 일어날 것이여. 물결은 반드시 물 때문에 물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났다한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 것입니다.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이여. 등불만 꺼져버리면 그림자도 동시에 없어질 것이고, 물만 없애 버리면 파도는 동시에 없어질 것이다 그말이여.
아까 주관이 공(空)해 버리면은 외부 경계, 객체도 따라서 없어지고. 그래서 객체니 주관이니 한 그러한 것을 둘 다 잊어버려야 한다.


늙은 조개가 온 바닷물을 둘러 마시듯이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마음자리 그놈 하나를 바로 깨달아 버림으로써 능소(能所)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가 거기에서 끊어져 버려.
바다 밑에 그 곱고 아름다운 산호가 달빛에 찬란히 빛나듯이, 생사가 변해서 바로 열반이요, 생사고해가 바로 극락정토로 변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꺼지고 물이 없어져 버리면 그림자도 없어지고 파도도 없어져서, 그렇게 되어야 문 밖의 오등(烏藤)채를 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등(烏藤)이라 하는 것은 채, 나물인데, 한약으로도 쓰이는 나물인데 맛이 쓰고 독은 없지만 기운이 허약하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그것을 소화를 잘 시키지를 못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맛이 썩 좋고 향그러운 나물이지만 그것을 능히 먹을라면은 그 맛이 있는 쌉쓰름 하면서도 맛이 있는 그 오등채를 능히 먹고 소화를 시킬라면 첫째, 기력이 허약하지 아니하고 비위가 튼튼해야 그 오등나물을 먹을 수가 있다.


오늘 법보재를 맞이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모든 인연 있는 영가를 여기에 모시게 된 법보단의 설립 의의와 이 법보단을 모신 우리의 법보제자들이 어떻게 닦아가야 하느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법보제자가 전국에 수만 명인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수천 명인 것 같습니다마는 전부 모이신다면은 이 도량에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컨대 법보단에 모신 영가들이 떠억 그 신령스러운 눈으로 이 법당 안과 밖을 관찰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의 유족들이 오늘 왔나 안 왔나? 아들과 딸 · 손주 · 손녀 · 며느리 · 아내와 남편 그 유족들이 오늘 이 법보재에 참석하시면 그 영가들도 얼마나 흐뭇하고 참, 이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다른 영가들의 유족들은 모두가 참석을 해서 경건하게 동참을 하고 향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자기의 유족은 아무리 찾아봐도 오지를 않으면 그 영가가 얼마나 섭섭하시겠느냐 그말이여. 그 영가를 어쨌든지 마음을 편안하게 즐겁게 해 드릴라면 이런 법보재라든지, 또 백중이라든지 그러한 대(大)천도재가 있을 때에는 꼭 참석을 하셔야 할 것이고.

또 참석을 하시나 안 하시나 이 영가가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이 살아있을 때 못다한 참선 공부, 불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하는 그 공부, 그것을 당신의 유족들이 열심히 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유족들이 법회 때 빠지지 아니하고 참석을 해서 법문을 잘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하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온갖 잘못된 고집과 잘못된 성격과 잘못된 행실을 고쳐서 자꾸 향상되어 가면서... 따라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함으로써 자꾸 향상되어 가고 승화되어 가.
그렇게 해서 한 가정이 화평하고 모든 사람이 화목하고, 이렇게 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면서 이미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산 사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되어 진다면 그것이 영가로서 가장 바랜 바고 기뻐하는 바고, 영가가 마음 놓고 해탈길로 떠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법보재자 여러분, 앞으로 법회 때 꼭 빠지지 말고 나오시고, 다음해에 법보재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이 도량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약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 그 일체법(一切法)을 설하신 것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내 마음을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모든 법을 설하셨는데.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내게 모든 마음이 없는데, 내 마음이 공(空)해서 무심(無心)해 버렸는데,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일체법(一切法)을 어디에 쓸 것이냐.(41분3초~57분14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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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유연막축환성이~’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莫逐有緣 勿住空忍’ p6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지각심(知覺心) : ①바로 이 경계로구나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 그런 마음。 ②빨리 깨달으려는 마음。누가 깨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을 수행하는 집안.
*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와 법보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년)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위패(位牌) ; 죽은 사람의 위(位)를 모시는 나무패.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인 법보전(法寶殿) 안에 위패를 모신 단(壇).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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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량(擧揚) ; ①설법할 때에,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르는 일. ②화두, 공안(公案)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를 말하는 것.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수승(殊勝 특히·유달리 수/뛰어날·훌륭할 승) ; ①가장 뛰어난 일. ②[불교] 세상에 희유하리만큼 아주 뛰어남.
*(게송) ‘多生怨債起於親  莫若多生不識人’ ;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大愚集述) 제13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 게송 참고(한국불교전서 제11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게송) ‘인능생소구생능~’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境由能境 能由境能’ p11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과 같음.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억겁다생(億劫多生) ;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태어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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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게송) ‘공지광영인등현~’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能隨境滅 境逐能沈’ p107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게송) ‘불설일체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7. 4. 8. 05:36

§(031) 이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 / 무엇이든지 ()하면 터지는 것 / 법회 때의 청법 질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있는 요소는 잠시도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진리,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뭣고?’하는 그놈을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의심이 더이상 커지지 못하고 더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을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의심은 타파(打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전강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전강 스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용화선원에 상주해 계시는 것이고, 언제나 여러분이 ‘이뭣고?’ 드는  찰나에 여러분의 가슴속에 전강 조실 스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우리는 전강 스님과  몸이 아니요,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과  몸이 아닌 것입니다.

 

**송담스님(No.031)—1976 12 관음재일 법문(76.12.24.) (용031)

 

약 20분.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염불을 하기를 주장을 하고, 주문을 외우기를 주장을 하고, 경을 읽기를 주장을 하고, 기도를 하기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참선을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참선이 좋기는  좋지마는 그것은 상근기(上根機)라야   있는 것이지 하근기(下根機),  말세(末世)에 태어난 하근기는 죄가 많고 업이 두터워서 해봤자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 분수를 알아서 염불을 하는 것이 좋다, 경을 읽는 것이 좋다, 죄가 많으니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참선을 해봐라 어디 되더냐? 잠이 퍼오고 글안으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고민이 일어나고 해서  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그것을 해봤자 시간 낭비고 까딱하면 미친다. 그러니 참선을 하지 말고 기도를 하면 당장 해보면 알텐데

 

그래서 이리저리 꾀수아 가지고  어디 성지(聖地)로 끌고가서 기도를 시키는데,  시간  시간을 목탁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하고 나니까,

앞에 있던 촛불이 둘로 보였다, 셋으로 보였다 또는 하나로 보였다,  가지고 나한테 다가왔다, 그러면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부처님이 떠억 손을 내밀면서 이마를 만져준 것을 느끼기도 하고,  그냥 금방 꺼졌다.

 

이래 가지고는 ! 그러한 것을  번을 맛보고서는 과연 기도가 좋다. 하고 나니까 밥맛도 좋고 잠이  오고 ! 그것  시간씩 큰소리를 치고 났으니 밥맛 있고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기도해야지 참선은 안되겄다. 기도가 해보니까 정말 기분이 좋고 신심이 나고 좋더라. 참선은 암만 해봐도 이것이 골치만 아프고, 답답하기만 하고, 양다리는 저리고 쑤시고, 어깻죽지는 아프고 도저히 그것은  짓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 미끄러져 버린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참선은 아무리 그것이 쉬웁고 좋다고 해도, 쉽고 좋다고 해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할라고 하면 할라고  만큼 그것을 가로막는 많은 마장(魔障)을 당하게 됩니다.

 마장은 나를, 겉으로는 나를 해롭게   같지마는 내가 바른 신심(信心)과 용맹심(勇猛心)으로 열심히 정진으로 밀고 나가면은 그러한 장애들은 오히려 나를 해롭게 하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보다  빨리 보다  크게 대도(大道)를 성취허겄게 해주는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 하는 것을 막는 남편이나 시부모나 가족이나 그러한 분들은  공부하는 것을 방해를 치면 칠수록 속으로는     그분을 향해서 절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마운 은혜로써 남편에게는 자기의 모든 성의를 다해서  받들어야 하고, 자식에게는 훌륭한 부모로서  사랑을 해주어야 하고, 가정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주부로서 가장으로서 성의를 다하는 가운데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뭣고?’

어디를 가나 괴롭고 외롭거나 ‘이뭣고?  ‘이뭣고?’ 그놈을 앞세워서 나간다고 하면은 캄캄한 칠야삼경(漆夜三更)에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걷는 거와 같을 것이고,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는 일엽편주(一葉片舟)로 항해를 하는데 나침반을 얻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를 가지고 일생을 노력을 한다고 하면은 나를 깨닫는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있는 요소는 잠시도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진리,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뭣고?’하는 그놈을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참선이나 또는 마음이다, 불성이다, 불교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마는,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것을 알았다 하드라도, 아무리 깊은 진리를 알았다 해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진 것이요,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의 결과요, 중생심의 결과는 계속 중생의 업(業)만을 더욱 조장한 것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정도(正道) 들어서서 나를 깨달을  있는 시간을 단축할려면은 알라고 하는 생각을 돌이켜서  맥히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고 하면은 깨달음은 바로 ‘이뭣고?’   순간에도 있는 것입니다.

 

   번을 말씀을 드려도  맥혀서  수가 없는 , 처음에는 재미도 없고 별로 그렇게 의심(疑心)이 깊이 백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계속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의 의심을 관조(觀照) 하게 되면은 그 의심이 차츰차츰 의심이 돈독(敦篤)해지고 깊어지고  커져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되어서 자기의 마음속에도 의심으로 가득 차고, 생활 주변에 모든 것에서도  의심뿐이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나무를 보나 물을 보나 일체 사물을 대할  다못   의심으로 가득차게  ,

 

의심이 더이상 커지지 못하고 더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을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의심은 타파(打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에, 그때부터서 이미 조실 스님께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참선하신 분은 더욱 신심이 돈독해지시고,  뒤로 많은 신도분들이 여기서 저기서 새로 많이 오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듣지를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나마 듣고서 신심을 내신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좋은 도반 좋은 형제자매를 만난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도리가 없습니다.

 

원래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백 년, 이백 년 살아 계실  알고 효도 한번 못했다가,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부모가 그리웁고 간절한 것을 흔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도 우리가 조실 스님의 은혜를 갚을 길은 얼마든지 있고, 효도를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조실 스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용화선원에 상주해 계시는 것이고, 언제나 여러분이 ‘이뭣고?’ 드는  찰나에 여러분의 가슴속에 조실 스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우리는 조실 스님과  몸이 아니요,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과  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이 무량겁을 두고 얼마나  정법의 인연을, 좋은 인연을 맺었기에 금생에   법당에서 이렇게 최상승(最上乘)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같이 듣고 같이 공부할  있게 되었겠습니까.

이런 좋은 인연을 절대로 헛되이 놓치지 마시고 금생에   받았을 때에 백만사를  발판으로 하고 그놈을 밑거름으로 해서 열심히 도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해마지 않습니다.

 

 

이 다음에 법회는 앞으로  일주일 뒤에는 정월 초사흗날부터서 초아흐레까지 일주일 동안 신수기도를 봉행하게 되겠습니다.

원래  법보선원에서는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기도니 불공이니 온갖 의식이 다못 조실 스님 법문 듣고 참선하는  속에 전부를 망라(網羅)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하기 때문에 참선은  본마음으로는 참선을 하지마는, 집안일도 잘되어야겠고 남편도 잘되어야겠고 아들딸들도 잘되어야겠고 집안이 화목하게  살아야겠고 국가도 잘되어야겠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들이 원만히 잘되는 것을 바래는 뜻으로,  그러한 것들이 잘되어야 우리가 마음놓고 공부도   있기 때문에, 1년에 한번 정초에 신수기도를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봉행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께서도  기도에 성의를 다해서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 용화사에서 거행되는, 1 동안에 거행되는 법회 종류와   법회 일자 그리고 음력과 양력 그리고  법회가 열리는 요일과 시간에 대해서   동안에 열리는  30회에 걸친 법회를 낱낱이 인쇄를 했습니다.

그날을  망각하고  오신 ,  그날이 법회인줄 모르고 다른 부득이한 약속을 하신 그런 일들이 있어서 법회에 참석을 못하신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종이에다 인쇄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다른 약속을 하실 때라도 언제라도  용화사 법회 날짜를 감안해서 하루 밀리기도 하고 댕기기도 하고 해서,   있으면  법회에 빠지시지 말고 다같이 모여서 다시 조실스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한번 우리 수행해 나가는 데에 채찍을 가하고 그동안에 닦아온 것을 반성을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어 나가는 좋은 기회를 갖도록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가지 말씀을 드릴 것은 이렇게 법당이 점점 점점  법회에 참석하신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많아지셔서 법당이 비좁습니다. 그러나 비좁은 대로 우리는 당분간 이렇게 법회를 진행할 수밖에는 없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비좁은 만큼   있으면은 질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처음에 오신 분은   있으면  앞으로 앞줄에서부터 차례차례차례 요렇게  나가도록.

그동안에 보니까 먼저 오신 분은 한사코 꽁무니를 뒤로 빼고 저리 뒤로만 자꾸 앉으실랴고 그러고, 나중에 오신 분은 앉을 데가 없으니까 부득이해서 차례차례차례 해서  나중에 오신 분이  복잡한 사이를 뚫고 나가서 앞에  앉으시게 된다 그말이여.

 

이것은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법이 없어도   있는 최고의 법을 수행하는 우리 법보선원의 법보제자(法寶弟子)의 청법(聽法) 질서라고는  수가 없겠습니다.

처음에 오신 분은 차례차례 앞에서부터서 질서 있게   채워서 줄을 잡어서 앉으시면은 나중에 오신 분은 오시는 대로 차츰 차츰 차츰 뒤로 이렇게 앉으시도록. 다음에 오실  앉으실 곳을 뒤에다 남겨놓고 앞으로 앉으신  마음가짐이라야 참선을 옳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뒤에만 앉을려고 그러고 앞에를 앉기를 싫어하시느냐? 아마 앞은 이쁘게 생겼어도 뒤에가 조끔  이쁘게 생겨서 뒤통수를 안 보일라고 뒤로 빠지신가 어쩐가 모르겠으나,  참선을 하시는 분은 앞보다도 뒤가  이쁜 법입니다.

 

그리고  법회에 오시면은  30분 일찍 오셨거나,  시간 일찍 오셨거나 들어오시면은 방석을 깔고 떠억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이뭣고?’를 하고 조용히 법회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아셔야 되겠습니다.

물론   만에 만났으니까 무슨 문안도 해야 되겠고,  오신데 대해서 반가워서 여러 말씀도 하시고 싶고 하실 말씀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각기 그렇게 해서 쑤군덕쑤군덕하게 되면은  법회장의 엄숙한 분위기가 깨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법당에 들어오시면은 떠억 부처님께 절하고  꽂고 절하시고서  자리에 가서 앉으시되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앉으시고, 한번  자리잡고 앉으셨다 하면은 가부좌를 하고 떠억 손을 이렇게 하고서 30분도 좋고 20분도 좋고 1시간도 좋고 정말 조용하니 엄숙히 정진을 하시는,

그렇게 해서 뒤에 오신 분도 자연히  들어오자마자 엄숙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절하고  앉을  있도록, 이만한 질서는 우리 법보제자는 갖추어져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제가 이런 말씀을   동안 별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법문을 듣고  듣고 하면은 그러한 조그마한 일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지리라 하고 그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모다 엄숙하니 잘하시고 뒤에 오신 분을 서로서로 자리를 비키면서 앉으라고 권고하고 그러한 많은 정겨운 상황을  왔습니다.

 

 구태여 조그만한 얘기로 말씀하신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장소가 벌써 집에서 나오실 때부터서 여기에 오시고, 오셔 가지고 법문 시작할 때까지,  법문 듣고 공양하시고, 공양하시고 집에 돌아가실 때까지 고대로 그날 하루는 특별 수행일로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차타고 오실 때도 염염(念念)으로 화두를 들고 오시고, 걸어서 오시는 길에도 그러시고, 공양 잡수면서도 그렇게 하시고 해서,

 

처음 오신 분들이 용화사에 오시면 ‘아하!  여기 용화사 신도들은  이상한 분들이로구나  보기만 하고서 대번에 자기도 엄숙해져서 여기가 바로 내가  닦을 곳이로구나 이렇게 신심이 나도록 그렇게들 주의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종이는 지금 노나 드리기보다는 앞으로  법요식이 끝나고 나가실 때에 양쪽 문에서  장씩을 노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법요식(法要式) 진행하겠습니다.(3827~5747)()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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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있는 사람이면,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말세(末世  /세상 )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 세상,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 세상,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성지(聖地 성스러울 / ) ; ①성()스럽게 여기는 []. ②성인(聖人)이나 ()들과 관련된 신성한 지역. ③성인의 지위. 불보살(佛菩薩) 신성한 경지. 범부지(凡夫地) 상대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마장(魔障 마귀 /장애 )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 [참고]헤살 : 남의 일이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소소영령(昭昭靈靈)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있다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생사도 없고, 버려야  번뇌도 없다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한역. ().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방법. ③무상(無上)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근원. 바른 규범.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칠야삼경(漆夜三更 옻·검다 칠/한밤중 야/석 삼/밤 시각 경) ; 캄캄하게 어두운 한밤중.

*삼경(三更  / 시각 )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열한 시에서 새벽   사이이다.

*일엽편주(一葉片舟  / /얇은 조각 / ) ; [] [] 크기의 얇은 조각[] []라는 뜻으로 자그마한  척의 .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돈독하다(敦篤-- 도타울 /도타울 )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믿음성이 있고 진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전강 조실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 음사. (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상태라는 .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있습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 대한 존칭.

여래(如來) 부처님 10(十號)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 ()이다. () 진여(眞如) 뜻이니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 .

 여거여래(如去如來)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망라(網羅 그물 /그물 ) ; 물고기나 새를 잡는 그물이라는 뜻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 널려 있는 것들을 모두 모아서 포함시킴을 이르는 .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

*청법(聽法) ; 불보살(佛菩薩)이나 스승이 설법하는 것을 경건하게 경청함.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줄임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법요식(法要式) ; 불사(佛事 : ,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   행하는 의식.

 

Posted by 닥공닥정
상(相)없이2017. 4. 6. 05:32

§(031) 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 바른 신심이어야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 도를 깨닫고 우는 사람, 웃는 사람.

 

부처님께서도 분명히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한다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한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법(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마음가짐이 되어있다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라도 선지식과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을 우리는 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삿된 생각으로 보면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지는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때도 있고, 사마외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지는 훌륭한 보살의 화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으로 되어져 있어야 정법을 만나고 바른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31)—76 12 관음재일 법문(76.12.24.) (용031)

 

약 9분.

 

그리고  다음에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큰스님으로서, 조실 스님으로서 도(道)를 지도하는 지도 노선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기에는 큰스님이라 하면은  마음가짐이나  말씨나  행동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때에 수긍이 가고 존경할 만한 그러한 그렇게 하시리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 하신 분이 있다면은  앞에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그렇게 하신 분의 말씀이라고 하면은 고대로 부처님 말씀처럼 믿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도인(道人)들은 일향(一向)으로 여러분의 비위에만  맞는 그러한 그렇게 나투시기만은  것은 아닙니다.

화엄경을 보시는 분은  아시겠지마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 성(一百十城)을 넘어가면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한량없는 법문을 듣고서 마침내 대도를 성취했습니다.

 

 오십삼 선지식이 우리가 생각한 거와 같은 전부가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하고 모든 사람의 모범이 ,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만 보인 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창녀도 있었고, 미치광이도 있었고, 도저히 우리가 납득할  없을 만한 그러한 기행(奇行)을 하는 분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재동자는  분도 불신(不信)을 하거나 의심을 하는 일이 없이 차례차례로 몸과 목숨을 바쳐서  설해주신 법문을 귀담아 듣고 뼛속에 새겨서 그것으로 해서 차츰차츰 마지막 깨달음에 도달하게  것입니다.

 

선지식이 학자(學者)를 제접(提接)할 때에 자세가 그렇거든, 배우는 사람의 입장은 모양으로 선지식을 믿지를 말아라.

부처님께서도 분명히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한다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한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색()으로써 나를 본다’고 하는 것은 내가 ‘32(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  갖추어서 그렇게 거룩하고 위대하게 생겼기 때문에  부처님이시다. 그러니까 나는 부처님으로 존경을 한다 이렇게 보거나.

 

부처님께서는 원음(原音)이시라 한 가지로 말씀을 하셔도 모든 십육군생(十六群生) 각기 자기대로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법문을 잘하시고 변재(辯才)가 거리낌이 없으시고 법을  설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음성이 그렇게 곱고 원만하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을 나는 믿는다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구하고 믿는다면은 벌써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겉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리고서 아하! 그러니까 훌륭하다. 그러니까 나는 믿어야겠다 이러한 식으로 부처님을 믿는다든지 선지식을 믿는다든지 하는 것은 이미 마음 자체가 바르지를 못하다 이것입니다.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삿되었다 이것입니다. 삿된 마음으로 닦는 수행이 바른 수행이 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법(法)에 의지 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아라’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 선지식 설하신 ,  법이 옳으면은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도를 닦을지언정, 겉으로 보고 뜬소문으로 돌아다니는 말을 듣고 ‘아유! 나는 큰스님인줄 알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래 가지고 스스로 물러서는 그러한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정법(正法)의 제자가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마음가짐이 되어가지고 있다고 하면은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라도 선지식을 친견할  있습니다.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도 우리는 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삿된 생각으로 보면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지는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때도 있고, 사마외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지는 훌륭한 보살의 화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으로 되어져 있어야 정법을 만나고 바른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도를 깨닫고 나서는 우는 사람도 있고 웃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깨닫고  뒷이야기는 아직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겠습니다마는 어째서 깨닫고  다음에 우느냐?

하근기(下根機) 깨닫고  다음에 울고, 중근기(中根機) 깨닫고서 춤을 추고 웃고, 상근기(上根機) 깨닫고 나서도 담담하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내가 무량겁을 두고 어째서 여태까지 깨닫지 못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뼈아픈 고통을 받어 왔던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배고프면  먹을  알고 때리면 아픈  아는 바로 여기에 있거든, 어째서 그렇게 바짝 자기와 같이 있으면서 그것을 보지 못했던가? 무엇하느라고 그것을 보지 못했던가?

 

구할 것도 없이 있는 것을 무엇 때문에 구하느라고   이십  내지 일생을 고생을 했던가? 너무나도 지나간 과거가 뼈아프게 사무쳐지기 때문에 하근기로서는 울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중근기는 이미 그동안에 닦아온 것이 하근기만큼 그렇게 뼈아픈 수행을 가까이하지 안 했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천하 허망한 것이로구나!’ 그래서 기쁘다기보다는 기가 맥혀서 춤을 추고 웃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근기야  것도 없고 웃을 것도 없겠지요?(17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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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한역. ().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방법. ③무상(無上)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일향(一向) ; 언제나 한결같이.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문수 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들은 선지식.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학자(學者) ; 학인(學人).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 성자.  수행승. ()닦는 수행승.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제접(提接 이끌 /응대할·가까이할 )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 () () 진여(眞如) 뜻이니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 뜻。  여거여래(如去如來)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눈썹 사이에  털이 있다, 발바닥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등등.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 어긋남이없다는 뜻이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군생(群生 무리 ,  ) ; 살아 있는 많은 존재,  중생을 말함.

*변재(辨才  잘할 /재주 ) ; 말을 잘하는[] 능력과 재주(才操).

*() : [] dharma []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 그른 (), 참된 (), 거짓된 () 모두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 () 불타(佛陀) 준말. 각자(覺者)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사마외도(邪魔外道) ; 불법(佛法) 어긋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외도. ‘사마 삿된 마구니라는 뜻으로 불도(佛道)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장애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인데, 외도  삿된 견해로써 불도 수행자를 어지럽히는 자를 사마외도라 한다.

*외도(外道 바깥 / ) ; ①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 가르침. 또는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