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개금불사의 목적,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 무주상(無住相)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하고 한량없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〇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우리 불자(佛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오직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요,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도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와 지혜로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는 목적도 구경(究竟)에는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자비를 증득허겄게 하는 그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개금불사에 동참(同參)하신 설판재자(說辦齋者)와 동참하신 모든 불자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까지라도 이 개금불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하루라도 빨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정법에 귀의해서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이 불상(佛像)을 하는데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대들보를 시주하고, 누가 기둥을 시주하고, 누가 주춧돌을 시주하고, 누가 이 계단을 시주를 하고, 누가 이 종을 시주했다고 크게 돌에다 새겨서 그 층계마다 이름을 새겨 논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불사를 성취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이름을 새기는 뜻을 잘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그러한 방편은 일찌감치 졸업을 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학생에게는 유치원 학생에게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학생에게는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에게도 유치원 학생에게 일러주는 말과 같은 말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 설하게 되고,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유(有)를 설하게 되고,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비유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유시무(是有是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때로는 유(有)라 설하고, 때로는 무(無)라 설하고, 때로는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하고, 때로는 시유시무(是有是無)라 설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법(法)의 진리(眞理)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유, 때에 따라서는 무, 때에 따라서는 비유비무, 때에 따라서는 시유시무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法)을 설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유나 무 또는 그 중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말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相)을 통해서 상 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 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사(佛事)요, 법(法)인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팔만사천 법문이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무주상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한 것이요, 한량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는 어떠한 큰 불사를 하더라도 그 불사에 많은 시주(施主)를 한 사람이나, 정성으로 조끔 시주를 한 사람이나,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나 그 간절(懇切)한 정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천만 원도 하고, 백만 원도 하고, 십만 원도 하고, 만 원도 하고, 오천 원도 하고,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부처님께 간절히 절 한 자리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사를 해도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아무개 보체’ 하고 그렇게 낱낱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축원(祝願)을 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름을 어디다 써서 붙이거나, 이름을 대중 앞에 공개를 하게 되면 이미 한 상(相)이 나타난지라 무주상(無住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 무주상의 뜻을 여러분께 깊이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그때 당시에, ‘아! 아무개가 그렇게 했구나. 아! 내가 한 것을 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그때 찰나는 조끔 흐뭇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써 화면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듯이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듯이 아무 실다운 것이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것을 여러분은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내 이제 이 길상수(吉祥水), 이 감로수(甘露水)를 가지고,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이다. 일체중생,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여러분 이마에 전부 뿌려 드렸습니다.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 이 물방울, 감로수를 여러분께 뿌려서 여러분의 무량겁으로 지어 온 모든 생사(生死)의 진로(塵勞)와 모든 업(業)과 뜨거운 번뇌(煩惱)와 이런 것들이 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이라. 이 불사(佛事)에 동참하신 분이나 설판재자(說辦齋者)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과 이 육도 법계(六途法界)에 있는 모든 중생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가 다 법왕(法王)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어지이다.(44분10초~59분30초)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어(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개금불사(改金佛事)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과 그때 행하는 의식.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설판재자(說辦齋者) ; 법회나 불사(佛事)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비용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스님 또는 신도를 말한다. 설(說)은 '법회, 불사' 판(辦)은 '힘들이다, 주관하다'의 뜻. *재자(齋者) ; 절에 재(齋)를 올리거나 불공(佛供)하러 온 사람.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귀의(歸依 돌아가다·돌아오다·몸을 의탁하다 귀/의지하다·믿다·따르다 의)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참고] 『치문경훈(緇門警訓)』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의 ‘팔일성해탈문(八溢聖解脫門)’에 나오는 구절. 實際理地 不受一塵 佛事門中 不捨一法
實際理地는(眞如자리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으나,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범종(梵鐘 부처·불경 범/종·쇠북 종) ;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는 의식을 행하고자 할 때 쓰이는 종(鐘)을 말한다. 법구사물(法具四物) -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 의 하나. 사물(四物)은 『일용작법(日用作法)』의 식시시사물연기(食時時四物緣記)에 따르면 범종각(梵鐘閣) 또는 범종루(梵鐘樓)에 함께 설치된다.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치고, 법고는 축생(또는 세간대중世間大衆)을 제도하기 위해서 치며, 운판은 허공계의 중생(또는 무주고혼無住孤魂)을 위해서 치고, 목어는 수중(水中)의 어족(魚族)을 제도하기 위해서 친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단 하나 크나큰 일로서의 인연. ①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중대한 부처님의 임무. ②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연. ③부처님이 정도,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편으로 이끌어, 모두 구한다고 하는 중대한 인연. 일단대사인연(一段大事因緣) · 일단대사(一段大事) · 일단인연(一段因緣) · 일단사(一段事) · 일대사(一大事)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자각(自覺) ; ①자신의 형편이나 처지, 본분 따위를 스스로 깨달음. ②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상태. ③자신의 생각과 언행에 대하여 그것이 진리성과 성실성이 있는지 자신을 반성하는 일. ④[불교] 삼각(三覺)의 하나. 스스로 깨달아 증득(證得)해 알지 못함이 없는 것 또는 중생이 자신의 미망(迷忘)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리를 깨달음을 이른다. *각타(覺他) ; 부처님의 3각(三覺 : 自覺 · 覺他 · 覺滿) 중의 하나. 자각(自覺)의 상대어. 다른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8권. (담무참曇無讖 역) 「범행품(梵行品)」 第八之四. 云何爲佛 佛者名覺 旣自覺悟 復能覺他
무엇을 불(佛)이라고 하는가. 불(佛)이란 각(覺)이라고 이름한다. 이미 스스로 깨달았으니, 다시 능히 타인을 깨닫게 한다. *각만(覺滿) ; 깨달음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 곧 자기자신과 중생이 모두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 각행원만(覺行圓滿) 또는 각행궁만(覺行窮滿) 등이라고도 한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20권(末) (遠法師 撰) 『십호의(十號義)』 旣能自覺 復能覺他 覺行窮滿 故名爲佛
이미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고 다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과 행위가 궁극적이고 원만하니 그러므로 부처님이라 한다.
[참고] 송담스님(No.196)—1983년 부처님 개금불사 점안식(83.03.10)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自覺],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覺他], 그래 가지고 이 우주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覺滿]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佛事) 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46분30초~48분47초)
*삼각(三覺) ; 부처님의 깨침[覺]이 갖는 세 가지 양상[三相]으로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 : 覺滿) 등을 말한다. [참고] 『묘법연화경현찬(妙法蓮華經玄贊)』 제1권 (末). (窺基 撰) 梵云佛陀 此略云佛 有慧之主 唐言覺者 覺有三義 一 自覺 勝凡夫 凡夫不自覺故 二 覺他 勝二乘 彼不覺他故 三 覺行圓滿 勝諸菩薩 菩薩雖復修於二 覺行未滿故
범어 불타(佛陀)의 줄임말이 불(佛)이니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고, 각자(覺者)라고 한역한다. 각(覺)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자각(自覺)으로 범부중생보다 뛰어남을 말하는데 범부중생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각타(覺他)로 이승보다 뛰어남을 일컫는데 이승은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각행원만(覺行圓滿)으로 여러 보살보다 뛰어남을 뜻하는데 보살이 비록 자각과 각타를 행하지만 그것이 원만구족하지 못하기 떼문이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보시(布施) : [범어(산스크리트어)]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비유비무(非有非無)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이치. 연기법을 나타내는 중도(中道)의 형식 중 하나이다. 비유비공(非有非空)과 같은 맥락이다. 주관의 인식으로 본다면 유(有)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무(無)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서 양자에 모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객관의 존재로 본다면 연기(緣起)상의 유(有)는 유에 머물지 않고 무(無)도 무에 머물지 않아서 상호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비유와 비무라는 부정을 거쳐 고양된 형식의 존재가 된다. 다양한 인연에 의존하여 생멸하는 존재이면서 결정된 본질을 지닌 자성(自性)의 유가 아니므로 비유라 하고, 항상 인연을 통하여 생멸하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비무라 한다. 따라서 이 비유비무는 연기법으로서 묘유묘무(妙有妙無)와 통하고, 공(空)이면서 중도의 지표가 된다.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에 집착하면 공견(空見) 외도(外道)에 속하며, 어리석은 외도라고도 한다. 지금과 같이 다만 부처라는 견해나 열반 등의 견해를 짓지 않으면, 일체의 유 · 무 등과 같은 견해가 모두 없을 것이며, 또한 견해가 없다는 생각도 없을 것이다. 이것을 바른 견해[正見]라고 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낭연독존(朗然獨存 밝을 랑/그럴 연/홀로 독/있을 존) ; 밝게 홀로 드러나다.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마정수기(摩頂授記 문지를·쓰다듬을 마/정수리·이마 정/줄 수/기록함·기억함 기) ; 마정기(摩頂記), 마정수기별(摩頂授記莂)이라고도 한다. 손으로 정수리(이마)를 만져주면서 기별을 주는 것. 어떤 사람이 수행을 철저히 하거나, 염불 또는 기도를 정성스럽게 봉행하거나, 남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간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일을 하였을 때, 불보살(佛菩薩) 또는 천지신명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정수리(이마)를 만져 주면서 ‘훌륭한 일을 하였다. 그대는 이 공덕으로 성불을 성취하리니, 그때 얻은 결과는 이러이러 하리라’고 예언해 주는 것을 말한다. *보체(保體 보전할·지킬 보/몸 체) ; 몸[體]을 보호(保護)한다는 뜻. 축원문에 적힌 살아 있는 사람의 성명 밑에 붙이는 축원(祝願)의 뜻이다. *축원(祝願 빌·기원할 축/원할·바랄 원)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 시수게(施水偈 물을 베푸는 게송). *감로수(甘露水 달다·맛 좋다 감/이슬·진액津液 로/물·액체 수) ; 감로(甘露). 산스크리트어 amṛta. 팔리어 amata. ①신들(諸天)이 상용하는 음료. 이것을 마시면 불로불사(不老不死)가 된다고 한다. 신약(神藥). 불사의 영약. 도리천(忉利天)에 있다는 감미로운 영액(靈液). 장수하고 죽은 이를 환생시킨다고 함. 최고의 자미(滋味)에 비유함. ②맛은 달고, 마시면 죽지 않는다라고 일컬어지던 것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③불사(不死). 영원의 생(生)을 의미. ④최대의 경지. 깨달음. 열반(nirvana)과 같은 뜻. ⑤정갈하고 감미로운 물.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업(業) ; (산스크리트어: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법왕(法王) : [범어(산스크리트어)]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 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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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557) 환경 오염 / 신토불이(身土不二).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 자기가 지은 과보(果報) / (게송)전단목주중생상~ / 마음보를 바로잡는 십선계, 참선 / 생활에 즉(卽)해서 '이뭣고?'
〇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은, 우리의 몸도 우리가 과거에 지은 업(業)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받아난 것이여. 우리가 의지하여 살고 있는 세계(世界)와 국토(國土)도 우리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이러한 세계, 국토를 만나게 된 것이여. 그래서 우리의 심식(心識)을 통해서 지은 과보(果報)로 이러한 몸도 받아난 것이여.
〇화두(話頭)는 '이 뭣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이 뭣고?' 화두를 탔습니다. '이 뭣고?' '이 뭣고?' 처음에는 별로 재미도 없고 맛도 없지만, 법문을 자주 듣고, 녹음법문을 자주 들으면서 자꾸 그 법문대로 '이 뭣고?'를 열심히 하면, 차츰차츰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 뭣고?~~~'만 추켜 들어라 그 말이여. 그러면 번뇌 망상은 원래 뿌리가 없는 것이라 제절로 없어지는 거고,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으면 오후(悟後)에 공부해 나가는 법을 지도를 받을 것이요,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닐 때에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이에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도 늦은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산에는, 들에는 여기저기 오곡백과(五穀百果)가 익고, 들에는 벼가 익어서 누렇게 금파(金波)가 물결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일향(一向)으로 자연을 예찬(禮讚)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아름다운 산에 골짜구니는 등산객들로 인해서 물을 마실 수가 없는 형편이고, 그 공장 폐수다 생활 폐수다 그러한 것이 흘르고 흘르고 흘러서 한강 · 금강 · 영산강 · 낙동강 · 섬진강, 우리나라에 큰 강들이 그냥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강에서 살고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고기들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에 이르면 바닷물이 뿌옇게 오염이 되고, 바다 밑에는 그런 독한 물질들이 가라앉어서 바다 밑은 참 무서운 독약으로 쌓이고 쌓여서, 해일이 일어나고 태풍이 불면 그 바다 밑에 가라앉었던 물이 뒤집어지면 그것이 바로 적조 현상(赤潮現象)이라 하는 거여. 바닷물이 벌게져 가지고, 옛날에는 부분적으로 쪼끔 일다가 말았는데 지금은 그 적조 현상이 일어나 가지고 남해로부터 동해로 막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수억 마리의 고기떼들이 다 죽고, 조개들이 다 죽고, 미역 해조류(海藻類)가 다 썩어 문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재지변(天災地變)도 아닙니다. 인간들이 어리석어 가지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몰지각(沒知覺)한 인간들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 그 넓고 넓어서 맑은 물이 물결치던 저 바다가 오염(汚染)이 된 것입니다. 자연이, 산과 강과 바다가 오염이 되면 결국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미역이다, 다시마다, 김, 그리고 많은 생선들 안 먹어버리면 그만이다' 하겠지만, 어민들은 그것에 생계를 유지하고, 모든 국민들은 해산물을 먹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김이나 미역이나 고기들이 병들고 변질되고 그 많은 해변가에 조개들이 모다 썩어 문드러지는데, 아직 안 죽었다 하더라도 독(毒)한 물질로 전부가 병(病)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게 되면은 신경통이 생기고, 암이 생기고, 심장병이 생기고, 골수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공기는 오염이 되어서 밤이면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가을 하늘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것인데, 지금은 하늘이 파랗지를 않습니다. 언제나 시커먼 구름이 끼어 있어서... 이것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煤煙),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 먼지와 매연에 의해서 하늘이, 푸른 하늘이 없어진 것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도 먹지 못하고, 또 들에는 독한 농약을 함부로 써서, 유기 비료(有機肥料)를 쓰지 아니하고 화학 비료만을 냅대 쓰고 농약을 처대가지고 곡식도 마음놓고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으니 그나마도 그걸 먹게 되니, 옛날에 그렇게 별로 구경하기조차 어렵던 각종 암(癌) 병이 여기서 저기서 우리의 가족들이 친지들이 암으로 모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을 거리에 나가면 여기저기 모다 쓰여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어라. 외국산 먹지 말고 국산을 먹어라' 그러한 말로 널리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신(身), 몸뚱이와 땅[土]은 둘이 아니여[不二]. 그러니 둘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을 먹어야 한다. 그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나, 앞으로 외국 쌀이 값싸게 들어오고 맛이 좋으면, 농약에 쩔은 국산 쌀, 그리고 비싸고 한 국산 쌀 안 먹을 것입니다. 너도나도 외국 쌀을 사먹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값도 싸고 크고 안전하고 멋있으면 다투어서 외국차를 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애국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것이 좋지 못하고 비싸기만 하면 누가 우리나라 것을 애용하겠습니까?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 설득력이 없을 것입니다. 외제보다 값이 싸고 튼튼하고 멋있고 또 맛도 좋고 몸에 좋아야만 국산품을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나왔으니, 그 본뜻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정(有情), 우리 모든 중생들이 과보(果報)에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 중생에 몸과 마음은 이것을 정보(正報)라 해. 정(正), 바른 과보(果報)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 밖에 세계(世界)와 국토(國土), 산과 강,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입고 있는 옷,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기구들은 이것을 '의지할 의(依)' 자, 의보(依報)라 하는 것입니다.
정보(正報)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의탁(依託)하는 환경, 이것이 '의지할 의(依)'자, 의보(依報)인데,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다시 말해서 신토, 신토(身土)—신(身)은 정보(正報)고, 토(土)는 의보(依報)다 그 말이여. 이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2가지는 이것은 2가지가 아니여, 바로 하나다 그 말이거든.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은, 우리의 몸도 우리가 과거에 지은 업(業)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받아난 것이여. 우리가 의지하여 살고 있는 세계(世界)와 국토(國土)도 우리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이러한 세계, 국토를 만나게 된 것이여. 그래서 우리의 심식, 심식(心識)을 통해서 지은 과보(果報)로 이러한 몸도 받아난 것이여.
인간(人間)이라 하면, 저 위에 대통령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인간이여. 그렇지만 지혜, 머리, 지혜도 영리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있고, 우리의 상호(相好)도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아주 멋있게 잘생긴 사람도 있는가 하면은 아주 뵈기 싫고 흉하게 생긴 사람도 있어. 또 복록(福祿)이, 진진(津津)한 복(福)이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은 아주 박복(薄福)한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이것이 다 자기가 무량겁으로부터 자기가 지은 업(業)으로 인(因)해서 각각 그렇게 다르게 태어난 것이여.(36분15초)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다 지구(地球)지마는, 각 나라마다 산과 강과 바다와 들, 다 다르다 그 말이여. 자기가 지은, 과거에 지은 과보(果報)에 의해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 아프리카 저런 대단히 살기 힘든, 사람으로서는 살기 어려운 그러한 곳도 있다 그 말이여. 한 나라 안에서도 또 다르다 그 말이여. 이것도 자기가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에 태어나고, 물도 흔하고 토실도 비옥하고 바다도 맑아서 산에서 좋은 물이 흘러내리고, 들에는 오곡이 잘 익고, 바다에는 좋은 해산물이 많이 나와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그러한 곳을 만나게 된 것은 자기가 과거에 그만큼 잘 지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태어나는 것이여.
다행히 우리 대한민국은 비록 나라는 조그마하지마는, 산 좋고 들 좋고 물 좋은 그러한 옛날부터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이름할 만큼 대단히 좋은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좋은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그만큼 잘 지었기 때문에 그런 좋은 나라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좋은 나라, 좋은 국토에 태어나 가지고 그러한 아름다운 산, 산에 놀러가면 쓰레기를 버리고 마구잽이 함부로 해 가지고 오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강물을 마구잽이 공장 폐수, 생활 폐수, 쓰레기를 마구 버려 가지고 그 강물이 우리가 마실 수 없는 그러한 독한 고약한 강물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의 발이 지나가기만 하면 산이고 강이고 바다고 온통 오염이 되고 난장판이 되냐 이거여.
우리의 조상들은 수천 년을 이 땅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산과 강과 바다가, 공기가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자연(自然)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단군(檀君) 이래로 오천년을 내려오면서 우리의 많은 조상들이 이 강산(江山)에서 살다 가셨지만 우리에게 아름다운 산, 맑은 물, 맑은 바다를 고대로 우리에 전해 주신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되어서 우리는 옛날을 '미개(未開)한 시대(時代)'라 이렇게 말하고, 우리는 아주 발달한 '문명(文明)의 시대(時代)'라 해 가지고 뽐내지만, 우리는 어리석기가 곰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인간들은 잘살기 위해 사업을 하고 나라를 부국(富國)을 만들기 위해서 갖은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이 파손이 되고, 강물이 오염이 되고, 바다가 온통 고기도 살 수가 없고, 미역도 자랄 수가 없고, 김도 자랄 수가 없는 그러한 황폐한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돈은 좀 벌고 외화 획득을 해서는 차도 좋은 차도 타고 살기에 퍽 편리하게는 되었지만, 우리는 병들어 가고 있고 미래의 우리의 후손들도 마음놓고 살 수 없는 지옥(地獄)보다도 더 고약한 곳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地獄), 지옥은 차라리 하룻낮 하룻밤에 만 번을 죽고 만 번을 살리고 하는 그런 무서운 고문과 고통을 받는 곳이지만, 자기가 살생(殺生)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옥에 갔어. 자기가 지은 과보로 지옥에 갔다 그 말이여. 그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그 고통을 받으면서 뼈에 사무치는 정말 참회(懺悔)를 할 것입니다. 저절로 참회진언(懺悔眞言)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지내다가 언젠가는 그 지옥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린 것이 우리 중생들인 것입니다.(23분24초~43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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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조끔만 지혜가 있으면, 미리 참회(懺悔)를 하고 그랬으면 지옥에도 안 가게 될 것이고, 조끔만 우리가 앞을 내다보고 지혜(智慧)를 썼으면 산이 저렇게 망가지고, 강이 저렇게 더러워지고, 바다가 저렇게 더러워지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우리는 지옥보다도 더 고약한 못된 강토(江土)를 만들어서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그것을 남겨주고 가게 되었습니다. 좋은 공기도 못 마시고, 좋은 물도 마시지 못하고, 맛있는 김도 미역도 해물도 못 먹고 살아야 하는, 이대로 가다간 우리의 후손들은 소아마비와 심장병과 기형아가 많이 태어나게 될 것이고, 차라리 안 태어난 것만도 못한 그런 애들이 점점 많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기와 물과 온갖 식품과 약품 이런 물질적인 오염의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은 삐뚤어지고 꼬이고 전도(顚倒)된 인간의 마음보, 그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오장육부와 체내에 흐르고 있는 피가 오염이 된데다, 마음보까지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썩어 문드러진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 태어난 우리의 후세가 어찌 온전하게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속담에, 「종기(腫氣)가 크면 고름이 많이 나고, 이다불대(泥多佛大)라, 진흙 덩어리가 많으면 불상(佛像)이 크게 조성이 된다」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인데 이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쬐끄맣게 뽀드락지가 난 것은 그 짜봤자 고름이 조끔 밖에 안 날 거고, 종기가 이만이나 하니 등창이 났다든지 허벅지에 났다면 그놈을 짜면 고름이 많이 쏟아지게 될 것이여. 불상(佛像)을 진흙으로 조성하는 데 진흙을 많이 갖다가 그놈을 잘 이겨서 그걸 그 많은 진흙으로 불상을 조성하면 큰 부처님이 조성이 될 것이여. 진흙을 조끔 갖다가 빚어서 불상을 맨들면 쬐끄만 불상 밖에는 못 만들 것이다 그 말이여.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전단 향나무로 중생의 모냥을 조각을 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다, 부처님 상호와 보살 상호를 또 조각을 한다 그 말이여.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중생의 모습도 갖가지로 조성을 하고, 부처님 모습도 각각으로 조성을 하고, 보살(菩薩)의 모습도 각각으로 조성을 하고, 소나 돼지나 말의 모습도 갖가지로 조각을 했다 그 말이여. 그 모냥이 다 각각 다르지마는,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내음을 맡어 보면, 부처님 상을 조상한 것도 맡어 보면 전단향(栴檀香) 냄새가 나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상(像)을 조각한 것도 맡어 보면 전단향(栴檀香) 냄새가 나고, 중생의 갖은 모습을 조각을 한 것도 맡어 보면 전단향 향내 냄새는 마찬가지다. 왜 그러냐 하면 그 근본이 전단향으로 조성을 했기 때문에 비록 모냥은 달라도 향내는 일반(一般)이다 이거거든.
좋은 공기, 좋은 물, 좋은 음식을 먹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합해서 그 사이에서 애기를 나면 아름답고 착하고 멋진 아기를 낳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말이여. 건강(健康)한 육체와 건전(健全)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정치를 해도 바른 정치를 할 것이고, 경제를 해도, 사업을 해도 올바른 사업을 할 것이고, 교육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더라도 올바른 교육자가 되고, 올바른 농사꾼이 되고, 올바른 장사가 되고, 올바른 판검사가 될 것이다 그 말이여.(51분56초)
삐뚤어진 정신을 가진 사람이 공장 하는데, 공장을 하는 데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깊이 100m 이상 깊이 뽐뿌를 박아 가지고, 빠이프(pipe)를 박아 가지고 거기서 물을 뽑아서 쓰는데 몇천만 톤 뽑아 쓰면은 물도 한계가 있어서 안 나오거든. 그러면 공장에서 쓰고 남은 독한 약품이 섞여 있는 공장 폐수를 그 100m 이상 깊은—물이 인자 떨어져서 안 나오는—그 물구녁에다가 공장 폐수를 거기다 집어넣는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100m 이상 깊은 우물 속으로 공장 폐수를 집어넣으면, 지하의 수맥(水脈)이 있는데 그 수맥으로 그 공장 폐수가 나가면 근처나 멀고 가까운 데에 우물을 파면 그 공장 폐수로 인해서 오염이 된 물이 솟아나옵니다. 저 100m, 1000m 밖에 흘러나오는 물이 바로 공장 폐수가 나오는 그 물을 사람이 먹으면 뭣이 되겠느냐.
자기도 잘살아야 하지만, 자기가 잘살려고 남에게 해를 끼쳐선 안 되는 거여. 자연을 오염을 시키고 자연을 파손을 해선 안 된다 그 말이여. 자기가 좀 돈 좀 벌려고 사업을 한답시고 자연을 파손하고 지하수를 갖다가 오염을 시켜 놓으면, 그러한 마음씨를 가지고 큰 부자 되겄습니까? 그러한 삐뚤어진 마음씨, 불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어떻게 큰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이거여. 그러한 마음으로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봤자, 부모를 죽이는 폐륜아 밖에는 그 속에서 태어나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요새 '환경을 보호하자!' 이러한 말이 자꾸 드높여지고 있습니다. 법(法)을 엄하게 제정을 해서 감시를 철저히 하고 벌칙을 강화를 하는 것,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민간 환경을 정화하는 그런 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적으로 확대 전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선행(先行)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돈도 안 들고 시간도 안 걸리고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보를 고치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의 몸은 '정보(正報)'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세계 국토와 가옥과 의복과 음식 기구 이런 것은 '의지할 의(依)' 자, '의보(依報)'라 했습니다마는, 그 정보(正報) 가운데에 진짜 이 '마음보'라 하는 거, 이것이 정보(正報) 의보(依報)를 진짜 바로잡는 것이 우리 마음보입니다. '마음보' 하나를 바로잡으면 몸도, 이 세계도 영원토록 우리가 살 수 있는 좋은 극락국토(極樂國土)를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보 고치는 데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보를 고치는데 아까 받은 십선계(十善戒)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말이여. 십선계를 잘 지키면서, 막연하게 십선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건 사실상 이 어려운 일이여.
'이 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5년, 10년 내지 30년을 '이 뭣고?'를 해도 여전히 마음보를 고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여. 자녀를 기르는 데 맛있는 음식과 고기를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면 그것이 자식을 잘 기른 것이 아니고, 목동이 소나 말이나 돼지를 길르는데 사료만 배가 터지도록 잔뜩 맥인다고 해서 좋은 목동이 아니여. 책상에 밤낮 붙어 있는다고 해서 그 학생이 공부 잘한 것이 아니여.
참선(參禪)도 마찬가지여. 제대로 참선을 하면은 첫째, 우리 마음보가 바로잡아지거든. 마음보가 바로잡어지고 안 잡아지고 한 것은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은 몸으로 하는 행동을 보고, 입을 통해서 하는 말을 들어보고, 마음씨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마음보가 고쳐졌느냐 안 고쳐졌느냐, 알 수가 있는 거여. 밤낮 참선한다고 해도 썽을 잘 내고 탐욕심이 아주 시커먼 탐욕심을 내고, 심술(心術)궂고 그리고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거짓말한다면, 그거 어떻게 그 사람이 바로 참선을 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이거여.
말과 행동과 마음 씀, 그것에 즉(卽)해서 '이 뭣고?'를 해야 돼. '이 뭣고?'를 앉어서나 서서나 걸어가면서나, 일할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 뭣고?'를 하 자연히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반영이 되고, 생활 속에서 '이뭣고?'가, 생활에 즉(卽)해서 '이 뭣고?'를 자꾸 챙기게 해서 참선과 생활이 둘이 아니여. 바로 '신토불이'가 거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거거든.
'외국산 먹지 말고 한국산 먹자'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뜻이 어찌 그렇게 값없이 해석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신토불이(身土不二)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과 이 세계가 둘이 아니다」 이거거든. 그러니 마음보를 고침으로 해서 몸도 건강하고 우리의 주변 환경도 아름다워지고 좋아져서, 그렇게 해서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자 이거거든. 이것이 바로 신토불이의 참뜻이다 이거거든.
오늘 이 법회(法會)에 참석하고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고 화두(話頭)를 탄, 그리고 불명(佛名)을 탄 이 공덕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우리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세세생생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화두(話頭)는 '이 뭣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이 뭣고?' 화두를 탔습니다. '이 뭣고?' '이 뭣고?' 처음에는 별로 재미도 없고 맛도 없지만, 법문을 자주 듣고, 녹음법문을 자주 들으면서 자꾸 그 법문대로 '이 뭣고?'를 열심히 하면, 차츰차츰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 뭣고?~~~'만 추켜 들어라 그 말이여. 그러면 번뇌 망상은 원래 뿌리가 없는 것이라 제절로 없어지는 거고,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으면 오후(悟後)에 공부해 나가는 법을 지도를 받을 것이요,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닐 때에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해 가야 할 것입니다.(43분36초~62분59초)
*금수강산(錦繡江山 비단 금/수놓을 수/강 강/뫼 산) ; 비단(緋緞)에 수(繡)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3,000리가 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향(一向 하나의·한결같은 일/향할 향) ; 언제나 한결같이. *몰지각하다(沒知覺-- 빠지다·어둡다 몰/알 지/깨닫다·깨우치다 각) ; (사람이나 그 행동이) 깨달아 인식하거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유정(有情) ; [산스크리트어] sattva.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생(生)이 있는 것.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것. 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옛날에는 중생(衆生)이라 번역하고, 현장(玄裝)이후의 새로운 해석에서는 유정(有情)이라 한역함. 정(情)은 마음이라는 뜻. 일체 살아 있는 것의 총칭. *과보(果報 열매 과/갚을 보)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 · 구 · 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 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심식(心識) ; 심과 식. ①식신(識神). 영혼. ②식(識). ③차별에 대한 인식. 분별의식(分別意識). *복록(福祿 복 복/복 록) ; 타고난 복과 벼슬아치의 녹봉(祿俸 예전에,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벼슬살이에 대한 보수로 주던 곡식이나 베, 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뜻에서, 복되고 영화로운 삶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진진하다(津津-- 나루터·진액·넘치다·윤택하다 진) ; ①입에 착착 달라붙을 정도로 맛이 좋다. ②물건 따위가 풍성하게 많다. ③재미 따위가 매우 있다.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단군(檀君) ; 우리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 단군 신화에 따르면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경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 즉 단국(檀國)을 세워 약 2천 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지옥은 차라리 하룻낮 하룻밤에 만 번을 죽고 만 번을 살리고 하는 그런 무서운 고문과 고통을 받는 곳’ ; 만사만생(萬死萬生). *만사만생(萬死萬生) ;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 하루 밤과 낮에 만번 죽고 만번 다시 태어난다’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죽었다가 바로 살아나고 또 고통으로 죽었다가 바로 살아나기를... 하루 밤낮에 만번이나 겪는다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표현한 말.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 성냄 ·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참회진언(懺悔眞言) ; 죄업(罪業)을 참회하는 진언.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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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顚倒 정수리·머리·근본·미혹하다·넘어지다·뒤집히다 전/넘어지다·거꾸로 되다·거꾸로 도) ; ①바른 견해 · 본연의 상태의 반대인 것. 우리들의 미혹하여 있는 견해. 진리에 어긋나는 것. 거꾸로 된 생각. 그릇된 생각. ②사전도(四顚倒). 일체 세간의 무상(無常), 고(苦), 부정(不淨), 무아(無我)인 진리와 배반(背反)한 견해를 취하는 것. ③넘어지는 것. 뒤집히는 것. *(게송)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删補集)』 (中 < 佛像點眼作法 < 禮八金剛四菩薩) (해동사문海東沙門 지환智還 집集) *상호(相好) ; ①얼굴의 생긴 모양. ②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 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일반(一般) ; ①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 ②서로 다를 바가 없는 마찬가지의 상태.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십선계(十善戒) ;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십악(十惡) ; 나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惡)한 행위.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십악업(十惡業) · 십불선업(十不善業) · 십악업도(十惡業道) · 십흑악(十黑惡) 등이라고도 한다 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 邪行). 말[口]로 짓는 네 가지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생각[뜻, 意]으로 짓는 세 가지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또는 치암(癡暗 어리석음). *계(戒) ; 불교에 귀의한 자가 선(善)을 쌓기 위해 지켜야 할 규범.
[참고] 송담스님(No.340)—1987년 10월 첫째 일요법회.(2분3초)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계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안정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을 하지 않고서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道)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14분31초~16분33초) *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〇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 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19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번뇌 망상 다스리는 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두고, 즉각 자기 본참공안을 들고 나간다.
[참고] 송담스님(No.531)—1994년 5월 첫째일요법회. 처음에는 암만 망상을 안 할려고 해도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아무리 화두를 간단없이 들려고 해도 1분도 안 가서 딴생각[別念]이 들어오고 끊어지고, 그러지만 끊어지면 또 들고, 끊어지면 또 들고,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둬 버려. 내버려 두는 것이 망상을 다스리는 법이여. 지나간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냥 일어난 그 찰나에 그냥 고대로 놔두어 버리고 자기 본참공안을 터억 거각을 해 나가. 「이뭣고?」(18분26초~19분18초)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선지식(善知識) ; [산스크리트어] kalyāņa-mitra. [팔리어] kalyāņa-mitta.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라밀(迦羅蜜) • 가리야낭밀달라(迦里也曩蜜怛羅)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 • 시우(時友) 등이라고도 한역한다. 반대로 악도(惡道)로써 이끄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이라고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으면 오후(悟後)에 공부해 나가는 법을 지도를 받을 것이요’ ; 오후보림(悟後保任).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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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280) 전강선사의 송담스님 소개. ‘송담스님은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묵언을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이 설법 좌(座)를 송담스님한테로 넘긴다’ /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 번뇌망상이 화두를 거각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보는 놈, 듣는 놈,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 /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송담스님이 묵언하며 참선하기 10년째, 전강선사의 물음에 아침 식전까지 깜깜하니 있다가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일렀다. “내(전강선사)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전강선사((No.280))—1972(임자)년 동지 법문(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임자72.11.17) (전280)(용화선원)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이 스님이 이름이, 저 당호(堂號)가 호가 송담(松潭) 스님인데. [앉어 그만, 뭣이든 가만히 앉었어] 송담 스님인데, 송담이라는 그 이름은 절에 들어와서 인자 참 도(道)를 얻어야 도를 깨달라 얻어야 호를 해주는 이름이여. 그 이름, 제일 높은 이름이, 당호 이름이 송담이다 그 말씀이여.
그런데 송담이라고 하면 몰라. 아무도 몰라. [그만 앉어 계셔. 그대로 앉어 계셔] 묵언(默言) 스님이라고 해야 안다 그 말이여. 어찌 묵언인고 하니 10년 동안을 말을 안 했어. 세상에, 귀 뚫어지고 벙어리가 없어. 환허니 들으면서 10년 동안을 묵언을 했는디, 나이 올해 근 오십 되었습니다. 오십 되었는데 지금 어디 오십 되아 보이요, 오십도 안 돼 보이제.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10년을 딱 정허고 묵언을 따악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도(道)를 통했다 그 소리여. 내가 이런 말허면 ‘내 권속 내 제자’ 이런 게 아녀. 나 그런 말은 뭐 내 부모라도 일없고. 전국에 다 아는 분이여. 전국에서 ‘묵언수좌(默言首座)’ 허면 다 안다 그 말씀이여.
여가 이 자리가 이래 뵈도 누가 올라와요? 못 올라와. 하나도 이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 여그서 내가 10년 동안 설법을 했는디 올라간 사람 없어. 묵언 스님 자리밖에 내 안된다 그 말이여. 내가 고리 넹겨서 아조 여그 원장(院長)이 되았습니다. 여 원장 스님, 나 죽으면 조실(祖室)이 되지, 시방 죽기 전에는 조실 못 되오. 원장만 되지.
아, 조실 스님이 나이 팔십이 되았으니, 인자 칠십도 못 올라가거든. 아 그래 너무 체면없이 팔십 살까장 올려 보낼라고 허니 될 것이요? 그래서 인자 이 원장 스님한테로 이 좌(座)를 넹겨서 오늘 올러가서 인자 마음대로 설법헐 텐게 잘허던지 못허던지 그만 도(道)는 한국에서 젊은이로는 송담 스님밖에 없다 그 말이여. 다 압니다. 아 그 뭐 누구라고 허면 모르는 이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믿고.
스승 하나 옳게 믿으면 그만이제. 스승을 보고 절에 댕겨야지, 절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디나 부처님은 똑같다고 모도 이러드구만, 말헐 때 들으면. 그것 소용 하나 없는 것이여. 옳은 스승을 찾아서 댕겨야 옳은 법을 듣고 그러제. 아무때나 또 그러면 아무때나 가 놓으면 무당도 뭐 뭐 부적케니 범연히 알아서 해? 잠깐 간단히 말씀해 마칩니다. 설법 잘 들으십시오. 옷을 뚱뚱허니 입고 두어야 인자 듣고 나오네. 조그만, 인자 나와서 허라는 대로 혀!
<송담스님 법문>
조실 스님께서 너무 올라가기를 강경히 명령을 하시기 때문에 부득이 올라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法)을 설(說)한다’고 허는 것은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허신 바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법을 설하면은 그 설하는 사람은 마구니의 왕이 되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의 법을 듣는 대중은 마구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허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 자리에 함부로 올라올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헌 사람이 능히 법을 설헐 수가 있느냐?’ 하면은, 한 말도 설하지 아니하되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한구석에도 들리지 아니한 곳이 없을 만큼 또 단 일분일초 동안이라도 그 설법이 근친 바가 없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꽉 차는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허면 입을 열지 아니허되 그 설법이 끊이지 않고 대사자후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종일 일평생토록 법을 설허되 한 말도 설헌 바가 없는 사람, 능히 이러헌 사람만이 감히 법을 설헌다고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헐 때에 본인으로서는 감히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큰스님의 강경한 그 명령으로 올라오기는 했습니다마는 감히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아무 헐 말씀도 없고 법을 설헌다고 헐 수 없습니다. 이걸 법이라고 생각허시지 말고, 또 저도 법을 설헌다고 그런 생각으로 여기를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점을 먼저 다짐을 드리고서 옛날 조사(祖師) 스님께서 우리에게 공부를 어떻게 허라고 경책(警策)해 주신 말씀 한마디를 소개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다 참선의 그 바람이 일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다 ‘불교’ 허면 참선, 그 참선을 모다 좋아하고 모다 헐려고 애를 쓰고, 그러고 있는 것은 대단히 좋은 현상이라고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바르게 허지를 못하기 때문에 3년 10년 내지 일생을 해도 정말 화두(話頭) 하나를 바르게 들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참선할려면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아니해야 그 참선을 잘허는 것이고, 번뇌와 망상, 중생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참선이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앉어서 어쨌던지 그 망상이 안 일어나기를 바래고, 망상이 일어나면은 그 공부가 잘 안된다고 이리 생각해 가지고 고민을 허고 번민을 허고 한탄을 허고, 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마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헌다고 하는 것은 벌써 목석(木石)이나 죽은 사람은 아무리 번뇌를 일으킬라고 해도 일어나지 아니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증거로써, 우리가 불성(佛性)이 있다고 허는 그 증거로써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 것이니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고 허는 것은 그것을 미워허고 싫어허고 한탄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 우리도 깨달을 수 있는 분명히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허는 증거로써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기에 따라서는 아주 다행한 일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그놈과 더불어 일생을 살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고 해도 능히 세속 사람은 살 수가 있고 아들딸도 날 수도 있고 형편 따라서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는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와 권속을 다 버리고 독신으로서 산중에서 못 먹고 못 입고 이 고생을 허며, 신도님들도 집에서 그저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허면서 그저 형편따라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다달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바쁜 틈을 타서 이렇게 오셔 가지고 큰스님네 법문을 듣고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시느냐? 우리가 먹고 입고 배불리 먹고 편허게 잠자는 것으로써만이 우리의 인생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루아침에 다시 불행으로 뒤바꿔질 우려성이 다분히 있는 위험한 생활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려고 이 불법(佛法)을 찾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공부허는 과정에 있어서 그 번뇌(煩惱)를 없이 하고 어떠한 청정(淸淨)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고 무한히 애를 씁니다마는, 그 마음 자세가 제가 생각기에는 또는 옛날 부처님과 조사와 큰스님네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본다면은 그 번뇌를 없이 하고 어떤 청정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면서 공부를 헌다고 허는 것은 마음 자세가 틀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번뇌 그놈을 없이 헐려고 허는 디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번뇌」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을 아지 못하고, 거기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그 생각’ 일어나는 것을 꺼려하고 한탄하는 그 생각」 때문에 화두 한번 드는 것이 늦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놓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지나간 일이 되었건, 현실에 닥쳐 있는 일이 되었건 또는 미래에 자기 앞에 돌아올 어떤 사건에 관한 일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다 할 때에 그 일어나는 그 마음에 즉(卽)해서, 바로 그 마음으로 조실 스님께서 일러주신 그 화두(話頭)를 터억 들으신다고 허면은 일어나는 그 번뇌 망상이 우리의 깨달음을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그러헌 상대가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화두를 거각(擧却)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헐 때에 번뇌가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화두를 들게 되는 것이고, 만 번 일어나면 만 번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면 그것이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그렇게 여법(如法)히 공부해 나간다면은 어찌 깨닫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볼 때에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사람일수록 화두를 더 잘헐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하나는 우산 장수를 허고 하나는 세탁소를 경영을 했는데, 비가 오면은 그 세탁업을 허는 아들이 빨래를 말리지 못해서 장사가 잘 안되겠다고 한심 걱정을 허고, 또 비가 안 오면은 우산 장수 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안 되겠다고 이렇게 걱정헌, 일평생을 걱정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헌 할머니가 계셨다고 합니다. 생각기에 따라서는 비가 오면은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비가 안 오면은 빨래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잘되리라고 이렇게 참 재미스럽게 생각헐 수 있을 텐데, 그놈을 까꾸로 생각해 가지고 비가 오나 안 오나 걱정을 허게 된다면은 그 할머니는 비가 오던지 안 오던지 재미있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을 잘못 먹었기 때문에 일평생을 자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불행 속에 사는 할머니와 같은 그러헌 식의 공부는 우리는 지양(止揚)을 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헌 종류의 번뇌가 일어나드라도 그 번뇌로 인해서 정진을 다시 다잽이허고, 어떠헌 몸에 병이 생기고 뜻에 어긋나는 어떤 사건들이 우리 앞에 제출이 되드라도 그러헌 것을 계기로 해서 생각생각이 단속을 허고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은 우리는 설사 금년에 또는 이태 삼 년에 견성(見性)을 못하드라도, 마지막 죽을 때까지 설사 큰스님의 인가(印可)를 못 받는다 하드라도 조금도 한탄할 일이 아니라 그럴수록에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하면서 정진을 한다면은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한 도인(道人), 자리가 완전히 잡힌 수행자라고 존경을 해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과거에 큰스님네 법문을 보고 듣고 그래서 속으로 느낀 바도 있고 그래서 참고로 말씀을 드리고, 참으로 훌륭한 법문을 조실 스님께서 허실 테니 그걸 잘 들으시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15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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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법문>
(주장자를 들으시고) 다 보시었제? 이걸 이걸 못 봐? (주장자를 내리시고 ‘쿵’) 잘 보고 잘 들었지요.
그 보는 놈. 이 주장자(柱杖子), 보는 주장자 그만두고 보는 놈, 그놈. 그 참 신령하제. 보는 놈이 그놈이 그 무슨 물건이여? 소리 ‘땅’ 듣는 놈은 또 무슨 물건이여? 보는 놈이 다르고, 듣는 놈이 다른 게 아니여. 보는 놈이나 듣는 놈이나 똑같지. 그 뭐가 보고 뭐가 듣냐 그 말이여.
아 그놈이 낱낱이 우리가 낸디, 내가 낸디, 아 그놈을 모르다니. 이것 참 엄청난 일이지. 그놈을 몰라 놓고 깜깜 칠통(漆桶). 그 내가 낸디, 내가 나를 몰라 놓고, 사람이라고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고 돌아댕기면서 살았다고 돌아댕기면서, 기가 찰 일이지. 이것 하나 깨달아 아는 것,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參禪法)이여.
참선법이,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깨달라 가지고는 여태까지 이 사바세계 오탁악세(五濁惡世)에다가 그 죄만 퍼짓는, 죄 퍼짓고 죄 받는 중생한테 그렇게 가르켜줄라고 49년 동안이나 설법을 해서 ‘어쨌든지 그놈의 죄, 숭악헌 중생 죄, 인생 죄, 그놈의 죄에만 파묻히지 말고 깨달라라, 깨달라라.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輪廻)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그 자리에 해탈이 있다. 헌데 그저 한번 깨달으면 깨달은 그 각전지(覺田地)에 그대로가 해탈이다. 아무 고통도 없고’ 이렇게 일러주고 이렇게 말해줬는데 이렇게 깜깜혀.
아, 나도 여기 와서 10년 동안을 늘 이 말뿐인데, 아 이렇게 깜깜혀. 천하에 쉬운 것은, 천하에 참선보담 더 쉬운 법이 있다면 말을 해 봐.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선, 내가 나 깨달은, 그 뭐여, 손을 뒤집었다 이랬다 허고, 그만큼 가깝다고 할 수가 있나? 그것도 멀제. 틈도 없어, 틈도. 나를 깨달을 그 깨달른 동안이, 어느 때 깨달을런지 또 시간도 없어. 안 해서 못하고, 믿지 안 해서 안 하고,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여태까장 또 얼마 동안을 내가 안 허다가 그전에 헌 그 홍인대사(弘忍大師) 법문 한마디 또 해야겠구만. 왜 그러냐? 그 법문을 들은 분들이 몇 분이 부탁을 또 해싸. ‘한 번만 더 들었으면은 알겠다’고. ‘그때 그 송구(頌句)를 잘 모르겠다’고 쌓고 이러니깐, 또 좋고 괜찮허고 해서 시간은 좀 걸리지마는 잠깐 헐터니깐 잘 들어 두십시오. 꼭 듣고 설법을 듣고 ‘꼭 해야겄구나’ 그 마음이 나도록 들으란 말씀이여.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깐. 안 믿은 사람이 큰일이제, 한번 옳게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부처님이 설산 속에 들어가서 여섯 해 만에 깨달랐지. 6년 만에 깨달랐지. 햇수는 6년 만이지마는 턱 깨달을 때는 그것, 시간도 암것도 없어. 그렇게 쉽게 깨달은 시간만 말하자면 그 6년이니, 뭐 여섯 시간이니, 무슨 뭐 6분이니 붙일 것도 없어. 여섯 해 동안은 어떻게 참선을 했는지 그 망상만 퍼일어나고 그 모도 공상만 퍼일어나고 안 되다가 되다가 야단쳤제. 부처님만 그런 것이요? 다 그랬제. 그동안 치지 말고, 그놈의 망상 번뇌 퍼일어나는 그때는 그만두고 확철대오(廓徹大悟)헐 때만, 탁 깨달을 때만 그 시간을 따져 보자면 당초에 분단(分段)도 없는 거여, 시간도 없고. 금방까장 미(迷)했다가 툭 깨버렸단 말이여. 내가 거짓말을 혀? 내가 바로 혀. 내가 당해 놓고 직접 대해서 내가 얘기헌디 거짓말을 혀?
아, 식전에 아침에 10년을 묵언헌 날이 오늘이여. 오늘 마지막이여. “10년을 묵언할 때에는 참선 한바탕해서 견성헌다고 중이 되아 가지고 묵언했지? 10년을 묵언허고 나서 오늘이 10년인데, 오늘 이까장 깜깜허고 있어? 한마디도 못 이르고 깜깜혀?” 아 내가 그러고는 들어왔네. 들어왔는데, 밥 먹고 나서 또 물은게 웬일이여? 그 참 이상혀. 밥 먹고 나서.
아니 글쎄 어째서 그 원 아무리 둔재(鈍才)라고 원 10년이나 말까장 않고, 그 한 이십 시절 청춘에 10년을 그대로—어머니 아버지한테도, 가다가 수레에 떨어져서 수레 타다가 떨어져서 말 못헌다고 그래 가지고는 거짓말까장 해 놓고서는 나허고는 밤중마다, 밤중에 나허고는 말을 했으니깐 꼭 정밤중이면. 내가 뭐 요만큼 하나 틀린 말혀?
그 10년을 그렇게 해 놓고 나서는 ‘오늘이 마지막 가는 날이니 어떻게 혀?’ 내가 통탄을 했다 그 말이여.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이르는데 거참 환장, 기가 멕히제. 환장 아니라 그만. 아 이런, 말 들으면 아니까. 딴 공안을 물어보니 차! 그대로 했어. 그 공안 일러 봤던들, ‘이뭣고?’를 일러 봤던들 무슨 별다른 것이 뭣이 있어? 뭐 뻘건 것이 있어, 무슨 허연 것이 있어? 거기에 무슨 뭔 광명이 나와, 무슨 뭣이 나와? 뭐가 있냔 말이여? 아무것도 없제. 원 싱겁기를 참 천하에 짝이 없제.
이즉돈오(理卽頓悟)다, 이치는 몰록 깼다. 아무리 이즉돈오(理卽頓悟)지마는, 이치는 몰록 깼지마는 사비돈제(事非頓除)여. 똥 싸고 오줌 싸고 똑같어. 사상사(事象事)가 똑같지, 다른 법 없어. 다른 법이 있다면 외도(外道)여. 모르는 것을 아는 것도 외도여. 뭐 별 이상스런 것이 하나 깨달았은게 코빼기라도 붙으면 마구니 외도여. 참선법은 그런 거여. 이즉돈오여. 이치는 몰록 깼다. 이치는, 생사 없는 이치 바로 봐 버리는 것이여. 죽고 사는 생사, 생사 이치가 없는데 거가 뭐가 있으리요.
그렇게 깨 가지고, 오! 인자 그 깬 그때부텀 지끔 또 치면은 몇 해나 된지 모르겄오마는 자최를 감촤버려. 인자 겨우 나타났오. 아! 자취 한번 감춰버리더니 그만이여. 아, 그만큼 깼으니 깨달았으니 인자 어디 가서 산중에 들어가던지, 아무디를 가던지, 말을 맥여주던지, 어디 가서 수연득묘(隨緣得妙)해라. 인연을 따라서 지내라 했더니 한번 간 뒤에는 그만이여. 아, 그랬더니 노동판 그런 디 가서 그만 그 보(洑) 막는디, 무슨 개 막는디 이런 디 가서 일을 허다가 허리를 그만 다쳐 가지고는 그 허리가 아파서 또 댕김서 고생하고. 참 이런 묵언 스님이 송담(松潭) 스님입니다.
내가 묵언 스님, 송담 스님이 없다면은 내가 여그 와서 아무리 있으라고 해도 내가 여그 와서 있을 사람은 아니었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지내든지 그래도 정전강(鄭田岡)하면, 한국에 정전강, 다 ‘정전강 스님이 우리를 가르킬만한 도인(道人)이다’ 다 그 마음, 불법(佛法) 신심을 가진 이는 다 그거 있습니다. 여기 학자(學者)들이 다 모였지만 그 생각이 없으면 오들 안 헐 학자여. 여기에 수십 명이 지나갔지마는 전부 전강 스님한테 한철 지내기를 원해 가지고 왔었습니다. 허지마는 다 방부(房付)도 못 받고. 내 힘이 뻗질러야제.
큰 대본산, 수천 석을 받는 수백 석을 받는 디도 아 선객(禪客) 한 몇십 명 기르자면은 한량없는 금액이 들어가고, 경제가 모자라서 못허고 헌디, 아 여그다가 뻘건 이런 무슨 저 터 하나, 빈터 하나 남은 디다가서 절을 이만큼 이걸 어떻게 아무때나 하꼬방처럼 건설했어도 건축을 허고, 아 여그서 한 사오십 명씩 지내기도 하고, 한 20여 명 30명 이렇게 지내오기를 한 10년 동안 되았습니다. 그런디 내가 건축을 이만큼 허고 저 솔밭 저짝에다 인자 천 평을 하나 만들아 놓고, 또 그 말 허게 됩니다마는 집도 또 저 아래 한 채 사서 이백이십오 원짜리인가 하나 사놓고, 또 거다가 기밀비로 내가 똑 두고 세상없이도 그건 손도 안 대고 그 두었던 놈 기밀비 백만 원허고 다해서 묶아 가지고 도장허고 딱 해서, 어제 내 생일날인디 어제 내가 다 인계 넹기고 오늘은 법좌(法座)에 올라가서 설법해 달라고 그렇게 해야 올라왔습니다.
허나 ‘지끔 조실 스님 계신 동안에는 내가 법상(法床)에 올라올 수 없습니다’ 허고 그래 쌓는 것을, 내가 못헌디 어쩔 것이냐? 이 말이여. ‘내가 설법상에 올라가서 설법허는 것이 아닙니다’ 허니 나만은 노인 대접도 하고 또 법사 스님 대접도 하고 그래 올라간다고 해서 오늘 와서 첫 때 했습니다.
그런디 내가 이 부처님 앉어 계신 사자좌(獅子座)를 아무나 올려놓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는 전강은 어찌 여그 자꾸 이 자리를 올라오느냐? 여그 학자(學者)들이 다 인증합니다. 학자들이 인증 못허면 인준 안 허면 나는 못 올라오는 것이고, 나는 학자들이 인준 없는데 올라와서 설법을 이렇게 헌다면은 죽은 물건입니다. 그거 썩은 물건이여. 학자들이 여지없이 인증을 해주기 땀세 내가 여기에 올라와서 설법을 허고 그동안에도 주욱 설법을 해 나온 것입니다.
왜 학자들이 인증하느냐? 뻘로 인증해 될 것입니까? 나도 과거에 한국 선지식이,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계셨는데 그 6대 선지식이 한목 날 인가(印可)를 다 했습니다. ‘옳다. 바로 공안을 바로 본 정영신(鄭永信)이다’고 해주어서 내가 인가 가지고 다 올라와서 여그 와서 했제, 인가 없이 내가 여그 와 했다면 여러분을 속였고 여러분을 속인 것보담도 죽은 놈입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허면, 내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올라온 사람이니깐 의심할 것 하나 없으니 차후는 어쩠든지 대중이 송담 스님한테 여기 원장 스님한테 설법 잘 들으시고.
인자 나 죽은 뒤에는 조실노릇을 할 것이요마는 내가 있을 동안까장은 조실이란 말은 안 할 것이요. 그 성격이 죽어도. 내 설법 대신으로, 할 수 없어, ‘전강 스님이 나이 많아서 설법을 할 수 없으니까 부득이 내가 대로 합니다’ 시방 이겝니다. 허니 다 그러신 줄 알고.
아주 살아 나갈 길이란 건 참선밖에 없으니 참말로 살아 나가실라거든 꼭 참례(參禮)해서 설법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인천 주안 용화사 용화선원, 중앙선원입니다. 유명헌 선원이니깐 인자 그리 알으시고 꼭 그렇게 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15분38초~32분27초)
*당호(堂號 집 당/이름 호) ; 당호(幢號)라고도 한다. 출가한 스님으로서 사미나 소비구(小比丘 : 젊은 비구) 시절에는 휘(諱)인 법명(法名)을 사용하지만, 법랍(法臘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부터의 햇수)과 도덕이 높아지면 남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피(忌避 : 諱)한다. 그러므로 종사(宗師)와 법을 거량(擧揚)하여 종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그를 법사로 하여 입실건당(入室建幢)의 전법식을 가질 적에 당호와 가사, 장삼, 전법게(傳法偈) 등을 받는다. 당호란 주로 그가 살고 있는 절 이름, 또는 지명, 그가 거처하던 집 이름 등을 취하여 호를 삼는 예가 많았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묵언(默言) 스님 ; 송담(松潭) 스님의 별명. 10년간 묵언을 하며 수행을 해서 '묵언스님‘, ’묵언수좌'라는 별명이 생김. *일없다 ; ①필요가 없다. ②걱정하거나 꺼릴 것이 없다.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달마대사(達摩大師, 達磨大師)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dharma.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는 보리달마(菩提達摩 ·菩提達磨)의 생략형이다.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 · 달마다라(達磨多羅) · 보리다라(菩提多羅) 등이라고도 하나 보통 달마라고 한다. 달마의 생몰연대는 ?~495, ?~436, 346~495, ?~528, ?~536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종의 전등(傳燈) 계보상 인도로부터는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이어 제28조이며,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달마의 전기를 살펴보면, 달마의 출신지는 파사국(波斯國) · 향지국(香至國) · 바라문국(婆羅門國) ·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받고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광주 자사가 예를 갖추어 영접하였으며, 표(表)를 올려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가 표를 읽고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득도시키기를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 有何功德]”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並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何以無功德]”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雖有非實]”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如何是眞功德]”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淨智妙圓體自空寂 如是功德不以世求]”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廓然)해서 거룩함[聖]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對朕者誰]” “모르겠습니다[不識]“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가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후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는데, 석굴에서 면벽(面壁)하고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달마 대사에게 가서 아침저녁으로 섬기고 물었으나, 대사는 늘 단정히 앉아서 벽을 바라볼 뿐이어서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마침내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의 앞에 놓으니, 대사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서 말했다. “부처님들이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꿔 주자, 신광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諸佛法印可得聞乎]”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諸佛法印匪從人得]”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我心未寧 乞師與安]”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將心來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我與汝安心竟]”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소림사(小林寺)를 떠나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흠모를 하면서 예물을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게 사양하면서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단호해지자 대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받았다.
다시 9년이 지나자, 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가고자 해서 제자[門人]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제가 본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의 작용을 삼는 것입니다[如我所見 不執文字不離文字而爲道用]”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汝得吾皮]”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지금 이해한 바로는 아난(阿難)이 아촉불국(阿閦佛國)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我今所解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更不再見]”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汝得吾肉]”
도육(道育)이 말했다.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四大本空五陰非有 而我見處無一法可得]”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汝得吾骨]”
마지막에 혜가가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자,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最後慧可禮拜後依位而立 師曰 汝得吾髓]
이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혜가에게 부촉하고 가사(袈裟)를 전해서 법의 신표로 삼았으며,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당시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 삼장(菩提流支三藏)은 대사가 현묘한 교화의 바람을 널리 떨치고 법의 비를 두루 뿌리자, 그들의 치우치고 옹색한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서, 앞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주 독약(毒藥)을 음식에 넣었다. 그 일이 여섯 차례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교화의 인연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으므로, 더 이상 독약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니,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그 뒤 3년 후에 위(魏)의 사신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맨발 벗고, 손에는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고 있었다. 사신이 묻기를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대답하기를 ‘서천(西天)으로 간다. 그리고 그대의 임금은 벌써 세상을 뜨셨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하여 부지런히 동으로 가서 국왕께 복명(復命)하니, 명제(明帝)는 이미 승하하고 효장제(孝莊帝)가 등극해 있었다. 사명을 받들어 위의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황제가 무덤을 열어 보게 했는데, 빈 관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8조 보리달마」 p154~p183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종입二種入(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 『심경송(心經頌)』 · 『파상론(破相論)』 · 『안심법문(安心法門)』 · 『오성론(悟性論)』 · 『혈맥론(血脈論)』 등 여섯 법문(法門)으로 이루어진 『소실육문(小室六門)』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때 간행한 『선문촬요(禪門撮要)』 가운데 『혈맥론』 · 『관심론(觀心論)』 · 『사행론(四行論)』 등이 들어 있다. 『파상론(破相論)』과 『관심론(觀心論)』은 중복되며 달마대사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북종 신수(神秀)의 저술로 보고 있다.
달마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낙양가람기(落陽伽藍記)』(574년 성립),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담림(曇林)의 「서문」(600년경), 『당고승전唐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649년), 『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경),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년),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경), 『보림전(寶林傳)』(801년), 『조당집(祖堂集)』(952년) 등이 있다. 『보림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과 『전법정종기(傳法正宗紀)』(1061년)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819년)와 신회(神會)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732년) · 『문답잡징의(問答雜徵義)』, 종밀(宗密)의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 · 『도서(都序)』 ·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上 혈맥론(血脈論)』 (경허성우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범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煩惱)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도고마성道高魔盛]’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벽극풍동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심극마침心隙魔侵]’고 하시니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 • 중천 • 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사자후(獅子吼 사자 사/아들 자/울부짖을 후)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조사(祖師) : ①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②선가(禪家)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 마음이 장벽(牆壁)과 같으면 가히 도(道)에 들어가리라. 부처님 마음의 종지(宗旨)를 밝히면 평등하여 어긋나거나 그릇됨[差誤]이 없어, 행(行 : 실천)과 해(解 : 앎)가 상응(相應)한 이를 이름하여 조사라 한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진실로 찾기가 어렵다. 넓을 때는 법계(法界)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악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도 없고, 또한 선을 보고서도 부지런히 닦지도 아니하고, 또한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을 가까이하지도 아니하며, 또한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네. 대도(大道)를 통달하여 헤아림[量]에서 벗어나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여 법도에서 벗어나네. 범부에도 성인에도 똑같이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것을 이름하여 조사라 하네.
그때에 달마가 구름 같은 대중을 이끌고 우문(禹門)의 천성사(千聖寺)로 가서 사흘을 머물렀다. 이때 그 고을의 태수인 양연(楊衍)이 조사에게 물었다. “서천의 다섯 나라에서는 스승의 법을 이어받고는 조사(祖師)라 한다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부처님의 심법을 밝히매 한 치 어긋남이 없고, 해(解 : 교리)와 행(行 : 실천수행)이 서로 상응(相應)하는 자를 조사라 합니다”
다시 물었다. “그 한 종류뿐인가요, 또 다른 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반드시 타심통에 밝고, 고금을 통달하고, 유무(有無)를 싫어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도 않아서 어리석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으며, 미혹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나니, 이렇게 아는 이를 또한 조사라 합니다”
양연이 다시 말했다. “제자는 오랫동안 악업(惡業)에 끄달려서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공경히 섬기지 못하고, 조그마한 지혜에 사로잡혀 꼼짝달싹 못하여, 어리석고 미혹된 채로 도를 깨닫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라옵건대 스승께서는 대도(大道)를 지시해 주십시오.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고 수행하고 마음 쓰는 이를 어째서 법(法)의 조사라 합니까?”
조사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악(惡)을 보아도 미운 생각이 없고, 선(善)을 보아도 부지런히 닦지 않는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어진 이를 따르지 않고 미혹을 등지고 깨달음을 향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도를 깨달음에 한량없고,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여 법도를 넘어섰네. 범부도 성인도 뒤따르지 않고 초연한 이를 일러 조사라 한다.
며칠 후에 그 고을 태수 양현지(揚衒之)가 일찍부터 불법을 사모했다고 하면서 대사에게 물었다. “서역의 천축에서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으면 조사(祖師)라고 한다는데, 그 도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불심(佛心)의 종지(宗旨)를 밝혀서 행(行)과 해(解)가 서로 응하는 것을 조사라고 하오”
“그밖에는 어떠합니까?” “모름지기 다른 이의 마음을 밝히고, 그 고금(今古)을 알고, 있음과 없음을 싫어하지 않고, 법을 취함이 없으며,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고, 미혹도 깨달음도 없나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사라고 칭하오”
又曰 弟子歸心三寶亦有年矣 而智慧昏蒙尙迷眞理 適聽師言罔知收措 願師慈悲開示宗旨
“제자가 삼보(三寶)에 귀의한 지도 몇 해가 되건만, 지혜가 혼몽(昏蒙)하여 오히려 진리를 미혹하고 있었는데,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종지를 열어 보여 주소서”
대사는 그의 정성이 간절함을 알고 즉시 게송을 말했다. 악을 보고서도 싫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선을 보고서도 부지런히 하려고 하지 않으며, 지혜를 버리고서 어리석음에 다가가지도 않고,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네. 대도(大道)를 통달함이여, 한량을 초월하고, 부처의 마음을 통달함이여, 한도를 넘어서네. 범부에도 성인에도 똑같이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것을 이름하여 조사라 하네.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회초리 책) : ①좌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사람을 깨우치는데[警] 사용하는 막대기[策]. ②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 깨우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참선법(參禪法).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 참선법(參禪法).
[참고 ❶]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2분26초)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53분35초~55분59초)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법훈(法訓)」 (개정 증보판. 2024년 11월 30일 발행 | 불광출판사) p299~314.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妄我)는 진아(眞我)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六畜)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 앞길)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 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業)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나를 찾는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이 탄생 시에 산석(產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부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 한 정력(精力)이라도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의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全宇宙)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 - 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 참선)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禪房)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惡),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때는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 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51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甕]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바탕]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 육도(六道)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이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〇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 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 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 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6분28초) 〇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〇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참고 ❸] 송담스님(No.364)—19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5분2초)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를 생각을 해,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하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하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 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 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하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생각을 좀 할려고 해도 안 되는 거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18분19초~23분18초)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염념(念念 생각·잠깐·극히 짧은 시간 념(염)) ; [산스크리트어] pratikșaņa, praticitta-kșaņa. 찰나찰나. 찰나마다. 한 찰나 한 찰나. 생각생각. 극히 짧은 순간들을 말함. ‘염(念)’은 본래 ‘찰나(刹那)’의 뜻이며, ‘염념(念念)’은 짧은 시간에도 늘 잊지 아니하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범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한 생각 단속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심입명(安心立命) ;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도 한다. *안신입명(安身立命) ; 몸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세우다.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하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 생사를 벗어나 심신(心身)이 편안해졌음을 표현한 말이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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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柱杖子 기둥·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이 갖는 긴 지팡이. 설법(說法)할 때나, 외출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주장자(拄杖子)와 같음.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부처님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 · 능유(能儒)라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삼계화택(三界火宅) ; 화택(火宅). 세상의 쾌락에만 깊이 집착해 지혜롭지 못하여, 온갖 번뇌 · 생로병사 · 우환의 고통을 받는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세상[三界]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온갖 번뇌와 고통, 생로병사의 사나운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무서운 세계. [참고] 『법화경』 제2권 '제3 비유품(譬喩品)'에서. 一切衆生 皆是吾子 深著世樂 無有慧心 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 常有生老 病死憂患 如是等火 熾然不息
모든 중생이 다 나[如來]의 자식이건만 그들은 세상의 쾌락에 깊이 빠져 지혜롭지 못하며, 삼계(三界)는 편치 않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아 온갖 고통이 가득차 심히 두려우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우환의 그러한 불길이 사납게 타올라 꺼지지 않고 있다. *윤회(輪廻 바퀴 윤(륜)/돌 회) ; ①수레바퀴[輪]가 끊임없이 구르는[廻]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전지(田地 밭·경작지 전/땅·논밭 지) ; 논과 밭. 전하여 고향, 마음밭 등의 뜻으로 쓴다. *‘생사(生死) 없는 법’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홍인대사(弘忍大師) ; 오조(五祖) 홍인(弘忍). *오조(五祖) 홍인(弘忍)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분단(分段) ; [산스크리트어] pariccheda, kavadī-kāra. ①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 또는 그렇게 나눈 부분을 일컫는 말. ②내용에 따라 문단을 몇 단락으로 나눔. 또는 그 단락. ③분단생사(分段生死)의 줄임 말. 분단생사란 육도(六道) 윤회하는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받게 되는 목숨의 길고 짧음의 분한(分限)과 신체의 크고 작음, 가늘고 굵음의 형단(形段)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분단생사라 한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한바탕하다 ; ①어떠한 일을 크게 한번 벌이다. ②크게 한번 싸우다. *정밤중(正밤中) ; 힌밤중(한밤中 : 깊은 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이즉돈오(理卽頓悟) 사비돈제(事非頓除) ; ‘이치는 몰록 깼다마는 사(事)는 몰록 제(除)할 수 없다’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 〇夫入道多門 以要言之 不出頓悟 漸修兩門耳 雖曰 頓悟頓修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于今生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 後修之機也
대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그 문이 많지마는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최상의 근기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生) 동안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한꺼번에 모두 마치는 것이니 실로 말하면 이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두 성인의 길로서,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하여 증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서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에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이치인즉 돈오이어서 깨달음과 아울러 모든 의심이 없어지거니와 일[事]은 곧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인하여 다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붙은 못이 순전히 물[水]인 줄은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바로 부처인 줄은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빌려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잘 흘러야 물을 대고 씻는 공덕을 나타내고, 망념이 다하여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야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하셨다. 이로써 실제에 있어서 신통 변화는 하루아침에 능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익힘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사상(事象 일 사/모양 상) ;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事物)과 현상(現象).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수연득묘(隨緣得妙) ; 수류득묘(隨流得妙). *수류득묘(隨流得妙) ; '흐름[流]을 따르면서[隨] 미묘한 도[妙]를 터득한다[得]'는 말. 변화의 흐름에 맡겨두고 그대로 따르지만 언제나 근본 이치에 들어맞음. 모든 경계와 인연에 따르되 집착함이 없고 자유자재함. *묘(妙) ; 묘법(妙法).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참마음의 미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하다.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미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미묘함을 얻음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摩拏羅)가 게송으로 읊었다.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그윽하다. 흐름에 따라 성품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참고 ❸] 전강선사(No.252) - 고담화상 법어 4 (72.06.05)[몽산법어 부록 07-2](3분3초) 시지출산(時至出山)해라. 그렇게 되거들랑 그때 가서는 때가 되었으니,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했으니 출세(出世)해서, 세상에 나와서 중생(衆生)을 교화해라. 너만 그렇게, 그렇게 깨달라서 생사 하나 없은께 네 마음대로 너만 생사안락, 생사 없는 낙(樂)만 받고 있을 테냐? 시지출산(時至出山)해라. 때가 되거들란 어서 속히 나오니라.
가무저선(駕無底船)해라. 밑구녁 없는 배를 타라. 밑구녁이 없는 배, 그 밑구녁 없는 배를 어떻게 탈 것인고? 밑구녁 없는 배다. 그 무슨 놈의 뭐 밑구녁 없는 배가 걸릴 것 뭐 있나?
수류득묘(隨流得妙)해라. 그 모도 유(流)를 따라서 묘(妙)를 얻어라. 그 인연 따라서 모도 묘(妙)를 얻어서 한량없는 방편(方便)을 모두 가설해서, 모두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저 중생 봐라. 저 중생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게 꽉 매(昧)해 가지고는 다시 저를 찾을 줄 모르고, 그저 점점 무량 천만 겁 중에 오면서 여태까장 퍼지어온 죄업 위에다가 날마다 더 짓고, 때마다 더 짓고, 자꾸자꾸 짓기만 하니, 어쩔 것이냐? 내비둬 버리면 어쩔 것이냐, 그거?
광도인천(廣度人天)해라. 그래서 널리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해라. 그 인천이 누구냐? 모두 타인이 아니여.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여.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고 키워 주든 다생부모(多生父母)요, 과거 부모요. 여태까장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한 가운데 서로서로 그렇게 인연이 걸려 있어. 부모여. 어디 금생 부모만 부모냐? 전생 부모는 부모 아닌가? 아! 금생 부모는 좀 더허고, 전생 부모는 덜헌가? 전부가 다 그 부모 아니냐!
허니 구등각안(俱登覺岸)케 해라. 한 가지 각안(覺岸)에 오르게 맨들어라. 한 가지 모두 생사 없는 해탈 각안에 모두 올라가게 이렇게 원력(願力)을 세워라. 그래서 동증금선(同證金仙)해라. 영원히 금선, 우리 부처님이 금선(金仙)인데, 한 가지 금선을 증(證)해라. 꼭 부처님이 되게 이렇게 해라.(27분37초~31분2초)
*보(洑 보 보) ;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의 하나.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이다. *개 ; 강이나 하천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정전강(鄭田岡) ; 전강선사(田岡禪師). 영신(永信)은 법명.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대본산(大本山) ; 대본사(大本寺 총본사 아래에 있거나 독립적으로 같은 종지宗旨의 작은 말사를 통할하는 큰 절).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하꼬방 ; 판잣집(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 箱房. 箱(상자)의 일본어 훈독 ‘ばこ(하꼬)’+방(房)이 결합된 말. *법좌(法座 부처님의 가르침 법/자리 좌) ; [산스크리트어] dharma-āsana, [팔리어] dhamma-sabhā. 설법하는 자리. 설법할 때 사용하는 높은 상좌(上座). 고좌(高座) · 수미좌(須彌座) · 법상(法床)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람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덕이 있어 마치 동물의 왕인 사자의 지위에 비유하여 사자좌(獅子座) 또는 예좌(猊座)라고도 한다. *상좌(上座) ; ①가장 높은 사람이 앉도록 정면에 설치한 자리[高座]. ②절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사무를 맡아보는 주지(住持)나, 수행이 깊고 덕이 높은 원로(元老), 선사(禪師), 강사(講師)가 앉는 자리. *법상(法床 부처님의 가르침 법/평상 상) ; [산스크리트어] dharma-āsana, dharmāsana. 법을 설하는 자리. 부처님의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床). 사자좌(獅子座) 또는 법좌(法座)라고도 한다. *사자좌(獅子座 사자 사/아들 자/자리 좌) ; [산스크리트어] simhāsana, [팔리어] sīhāsana. 부처님이 앉으시는 자리 즉, 상좌(牀座)를 사자좌라 한다. 부처님은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로,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여 부처님의 좌석은 무엇이 되었거나 모두 사자좌라 한다. 후세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의 대좌(臺座)와 설법할 때 앉는 자리[法座]나 장로대덕(長老大德)의 좌석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사자상(師子床) · 사자좌(師子座) · 예좌(猊座) 등이라고도 한다. *상좌(牀座 평상平牀·平床 상/자리 좌) ; 평상자리. 침상자리. 상좌(床座)라고도 쓴다.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정영신(鄭永信) ; 전강선사(田岡禪師). 영신(永信)은 법명.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차사(此事) ; 이[此] 일[事]. 본분사(本分事). 본래자기를 깨닫는 일.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事].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本來)의 모습[身分]으로 되돌아가는 일[事]. 납승(衲僧 참선 수행승)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일이므로 납승본분사(衲僧本分事) 또는 납승분상사(衲僧分上事) 등이라고도 한다. 일대사(一大事)와 같은 말.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참례(參禮) ; 예식, 제사, 전쟁 따위에 참가하여 관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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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