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전강선사의 송담스님 소개. ‘송담스님은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묵언을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이 설법 좌(座)를 송담스님한테로 넘긴다’ /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 번뇌망상이 화두를 거각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보는 놈, 듣는 놈,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 /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송담스님이 묵언하며 참선하기 10년째, 전강선사의 물음에 아침 식전까지 깜깜하니 있다가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일렀다. “내(전강선사)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전강선사((No.280))—1972(임자)년 동지 법문(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임자72.11.17) (전280)(용화선원)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1) 약 16분.
(2) 약 17분.
(1)------------------
이 스님이 이름이, 저 당호(堂號)가 호가 송담(松潭) 스님인데. [앉어 그만, 뭣이든 가만히 앉었어] 송담 스님인데, 송담이라는 그 이름은 절에 들어와서 인자 참 도(道)를 얻어야 도를 깨달라 얻어야 호를 해주는 이름이여. 그 이름, 제일 높은 이름이, 당호 이름이 송담이다 그 말씀이여.
그런데 송담이라고 하면 몰라. 아무도 몰라. [그만 앉어 계셔. 그대로 앉어 계셔] 묵언(默言) 스님이라고 해야 안다 그 말이여. 어찌 묵언인고 하니 10년 동안을 말을 안 했어. 세상에, 귀 뚫어지고 벙어리가 없어. 환허니 들으면서 10년 동안을 묵언을 했는디, 나이 올해 근 오십 되었습니다. 오십 되었는데 지금 어디 오십 되아 보이요, 오십도 안 돼 보이제.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10년을 딱 정허고 묵언을 따악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도(道)를 통했다 그 소리여. 내가 이런 말허면 ‘내 권속 내 제자’ 이런 게 아녀. 나 그런 말은 뭐 내 부모라도 일없고. 전국에 다 아는 분이여. 전국에서 ‘묵언수좌(默言首座)’ 허면 다 안다 그 말씀이여.
여가 이 자리가 이래 뵈도 누가 올라와요? 못 올라와. 하나도 이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 여그서 내가 10년 동안 설법을 했는디 올라간 사람 없어. 묵언 스님 자리밖에 내 안된다 그 말이여. 내가 고리 넹겨서 아조 여그 원장(院長)이 되았습니다. 여 원장 스님, 나 죽으면 조실(祖室)이 되지, 시방 죽기 전에는 조실 못 되오. 원장만 되지.
아, 조실 스님이 나이 팔십이 되았으니, 인자 칠십도 못 올라가거든. 아 그래 너무 체면없이 팔십 살까장 올려 보낼라고 허니 될 것이요? 그래서 인자 이 원장 스님한테로 이 좌(座)를 넹겨서 오늘 올러가서 인자 마음대로 설법헐 텐게 잘허던지 못허던지 그만 도(道)는 한국에서 젊은이로는 송담 스님밖에 없다 그 말이여. 다 압니다. 아 그 뭐 누구라고 허면 모르는 이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믿고.
스승 하나 옳게 믿으면 그만이제. 스승을 보고 절에 댕겨야지, 절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디나 부처님은 똑같다고 모도 이러드구만, 말헐 때 들으면. 그것 소용 하나 없는 것이여. 옳은 스승을 찾아서 댕겨야 옳은 법을 듣고 그러제. 아무때나 또 그러면 아무때나 가 놓으면 무당도 뭐 뭐 부적케니 범연히 알아서 해? 잠깐 간단히 말씀해 마칩니다. 설법 잘 들으십시오. 옷을 뚱뚱허니 입고 두어야 인자 듣고 나오네. 조그만, 인자 나와서 허라는 대로 혀!
<송담스님 법문>
조실 스님께서 너무 올라가기를 강경히 명령을 하시기 때문에 부득이 올라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法)을 설(說)한다’고 허는 것은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허신 바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법을 설하면은 그 설하는 사람은 마구니의 왕이 되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의 법을 듣는 대중은 마구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허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 자리에 함부로 올라올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헌 사람이 능히 법을 설헐 수가 있느냐?’ 하면은, 한 말도 설하지 아니하되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한구석에도 들리지 아니한 곳이 없을 만큼 또 단 일분일초 동안이라도 그 설법이 근친 바가 없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꽉 차는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허면 입을 열지 아니허되 그 설법이 끊이지 않고 대사자후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종일 일평생토록 법을 설허되 한 말도 설헌 바가 없는 사람, 능히 이러헌 사람만이 감히 법을 설헌다고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헐 때에 본인으로서는 감히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큰스님의 강경한 그 명령으로 올라오기는 했습니다마는 감히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아무 헐 말씀도 없고 법을 설헌다고 헐 수 없습니다.
이걸 법이라고 생각허시지 말고, 또 저도 법을 설헌다고 그런 생각으로 여기를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점을 먼저 다짐을 드리고서 옛날 조사(祖師) 스님께서 우리에게 공부를 어떻게 허라고 경책(警策)해 주신 말씀 한마디를 소개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다 참선의 그 바람이 일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다 ‘불교’ 허면 참선, 그 참선을 모다 좋아하고 모다 헐려고 애를 쓰고, 그러고 있는 것은 대단히 좋은 현상이라고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바르게 허지를 못하기 때문에 3년 10년 내지 일생을 해도 정말 화두(話頭) 하나를 바르게 들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참선할려면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아니해야 그 참선을 잘허는 것이고, 번뇌와 망상, 중생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참선이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앉어서 어쨌던지 그 망상이 안 일어나기를 바래고, 망상이 일어나면은 그 공부가 잘 안된다고 이리 생각해 가지고 고민을 허고 번민을 허고 한탄을 허고, 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마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헌다고 하는 것은 벌써 목석(木石)이나 죽은 사람은 아무리 번뇌를 일으킬라고 해도 일어나지 아니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증거로써, 우리가 불성(佛性)이 있다고 허는 그 증거로써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 것이니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고 허는 것은 그것을 미워허고 싫어허고 한탄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 우리도 깨달을 수 있는 분명히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허는 증거로써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기에 따라서는 아주 다행한 일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그놈과 더불어 일생을 살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고 해도 능히 세속 사람은 살 수가 있고 아들딸도 날 수도 있고 형편 따라서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는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와 권속을 다 버리고 독신으로서 산중에서 못 먹고 못 입고 이 고생을 허며, 신도님들도 집에서 그저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허면서 그저 형편따라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다달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바쁜 틈을 타서 이렇게 오셔 가지고 큰스님네 법문을 듣고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시느냐?
우리가 먹고 입고 배불리 먹고 편허게 잠자는 것으로써만이 우리의 인생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루아침에 다시 불행으로 뒤바꿔질 우려성이 다분히 있는 위험한 생활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려고 이 불법(佛法)을 찾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공부허는 과정에 있어서 그 번뇌(煩惱)를 없이 하고 어떠한 청정(淸淨)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고 무한히 애를 씁니다마는, 그 마음 자세가 제가 생각기에는 또는 옛날 부처님과 조사와 큰스님네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본다면은 그 번뇌를 없이 하고 어떤 청정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면서 공부를 헌다고 허는 것은 마음 자세가 틀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번뇌 그놈을 없이 헐려고 허는 디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번뇌」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을 아지 못하고, 거기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그 생각’ 일어나는 것을 꺼려하고 한탄하는 그 생각」 때문에 화두 한번 드는 것이 늦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놓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지나간 일이 되었건, 현실에 닥쳐 있는 일이 되었건 또는 미래에 자기 앞에 돌아올 어떤 사건에 관한 일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다 할 때에 그 일어나는 그 마음에 즉(卽)해서, 바로 그 마음으로 조실 스님께서 일러주신 그 화두(話頭)를 터억 들으신다고 허면은 일어나는 그 번뇌 망상이 우리의 깨달음을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그러헌 상대가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화두를 거각(擧却)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헐 때에 번뇌가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화두를 들게 되는 것이고, 만 번 일어나면 만 번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면 그것이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그렇게 여법(如法)히 공부해 나간다면은 어찌 깨닫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볼 때에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사람일수록 화두를 더 잘헐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하나는 우산 장수를 허고 하나는 세탁소를 경영을 했는데, 비가 오면은 그 세탁업을 허는 아들이 빨래를 말리지 못해서 장사가 잘 안되겠다고 한심 걱정을 허고, 또 비가 안 오면은 우산 장수 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안 되겠다고 이렇게 걱정헌, 일평생을 걱정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헌 할머니가 계셨다고 합니다.
생각기에 따라서는 비가 오면은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비가 안 오면은 빨래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잘되리라고 이렇게 참 재미스럽게 생각헐 수 있을 텐데, 그놈을 까꾸로 생각해 가지고 비가 오나 안 오나 걱정을 허게 된다면은 그 할머니는 비가 오던지 안 오던지 재미있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을 잘못 먹었기 때문에 일평생을 자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불행 속에 사는 할머니와 같은 그러헌 식의 공부는 우리는 지양(止揚)을 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헌 종류의 번뇌가 일어나드라도 그 번뇌로 인해서 정진을 다시 다잽이허고, 어떠헌 몸에 병이 생기고 뜻에 어긋나는 어떤 사건들이 우리 앞에 제출이 되드라도 그러헌 것을 계기로 해서 생각생각이 단속을 허고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은 우리는 설사 금년에 또는 이태 삼 년에 견성(見性)을 못하드라도, 마지막 죽을 때까지 설사 큰스님의 인가(印可)를 못 받는다 하드라도 조금도 한탄할 일이 아니라 그럴수록에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하면서 정진을 한다면은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한 도인(道人), 자리가 완전히 잡힌 수행자라고 존경을 해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과거에 큰스님네 법문을 보고 듣고 그래서 속으로 느낀 바도 있고 그래서 참고로 말씀을 드리고, 참으로 훌륭한 법문을 조실 스님께서 허실 테니 그걸 잘 들으시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15분35초)
(2)------------------
<전강선사 법문>
(주장자를 들으시고) 다 보시었제? 이걸 이걸 못 봐? (주장자를 내리시고 ‘쿵’) 잘 보고 잘 들었지요.
그 보는 놈. 이 주장자(柱杖子), 보는 주장자 그만두고 보는 놈, 그놈. 그 참 신령하제. 보는 놈이 그놈이 그 무슨 물건이여? 소리 ‘땅’ 듣는 놈은 또 무슨 물건이여? 보는 놈이 다르고, 듣는 놈이 다른 게 아니여. 보는 놈이나 듣는 놈이나 똑같지. 그 뭐가 보고 뭐가 듣냐 그 말이여.
아 그놈이 낱낱이 우리가 낸디, 내가 낸디, 아 그놈을 모르다니. 이것 참 엄청난 일이지. 그놈을 몰라 놓고 깜깜 칠통(漆桶). 그 내가 낸디, 내가 나를 몰라 놓고, 사람이라고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고 돌아댕기면서 살았다고 돌아댕기면서, 기가 찰 일이지. 이것 하나 깨달아 아는 것,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參禪法)이여.
참선법이,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깨달라 가지고는 여태까지 이 사바세계 오탁악세(五濁惡世)에다가 그 죄만 퍼짓는, 죄 퍼짓고 죄 받는 중생한테 그렇게 가르켜줄라고 49년 동안이나 설법을 해서 ‘어쨌든지 그놈의 죄, 숭악헌 중생 죄, 인생 죄, 그놈의 죄에만 파묻히지 말고 깨달라라, 깨달라라.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輪廻)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그 자리에 해탈이 있다. 헌데 그저 한번 깨달으면 깨달은 그 각전지(覺田地)에 그대로가 해탈이다. 아무 고통도 없고’ 이렇게 일러주고 이렇게 말해줬는데 이렇게 깜깜혀.
아, 나도 여기 와서 10년 동안을 늘 이 말뿐인데, 아 이렇게 깜깜혀. 천하에 쉬운 것은, 천하에 참선보담 더 쉬운 법이 있다면 말을 해 봐.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선, 내가 나 깨달은, 그 뭐여, 손을 뒤집었다 이랬다 허고, 그만큼 가깝다고 할 수가 있나? 그것도 멀제. 틈도 없어, 틈도. 나를 깨달을 그 깨달른 동안이, 어느 때 깨달을런지 또 시간도 없어. 안 해서 못하고, 믿지 안 해서 안 하고,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여태까장 또 얼마 동안을 내가 안 허다가 그전에 헌 그 홍인대사(弘忍大師) 법문 한마디 또 해야겠구만. 왜 그러냐? 그 법문을 들은 분들이 몇 분이 부탁을 또 해싸. ‘한 번만 더 들었으면은 알겠다’고. ‘그때 그 송구(頌句)를 잘 모르겠다’고 쌓고 이러니깐, 또 좋고 괜찮허고 해서 시간은 좀 걸리지마는 잠깐 헐터니깐 잘 들어 두십시오.
꼭 듣고 설법을 듣고 ‘꼭 해야겄구나’ 그 마음이 나도록 들으란 말씀이여.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깐. 안 믿은 사람이 큰일이제, 한번 옳게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부처님이 설산 속에 들어가서 여섯 해 만에 깨달랐지. 6년 만에 깨달랐지. 햇수는 6년 만이지마는 턱 깨달을 때는 그것, 시간도 암것도 없어. 그렇게 쉽게 깨달은 시간만 말하자면 그 6년이니, 뭐 여섯 시간이니, 무슨 뭐 6분이니 붙일 것도 없어.
여섯 해 동안은 어떻게 참선을 했는지 그 망상만 퍼일어나고 그 모도 공상만 퍼일어나고 안 되다가 되다가 야단쳤제. 부처님만 그런 것이요? 다 그랬제. 그동안 치지 말고, 그놈의 망상 번뇌 퍼일어나는 그때는 그만두고 확철대오(廓徹大悟)헐 때만, 탁 깨달을 때만 그 시간을 따져 보자면 당초에 분단(分段)도 없는 거여, 시간도 없고. 금방까장 미(迷)했다가 툭 깨버렸단 말이여. 내가 거짓말을 혀? 내가 바로 혀. 내가 당해 놓고 직접 대해서 내가 얘기헌디 거짓말을 혀?
아, 식전에 아침에 10년을 묵언헌 날이 오늘이여. 오늘 마지막이여. “10년을 묵언할 때에는 참선 한바탕해서 견성헌다고 중이 되아 가지고 묵언했지? 10년을 묵언허고 나서 오늘이 10년인데, 오늘 이까장 깜깜허고 있어? 한마디도 못 이르고 깜깜혀?” 아 내가 그러고는 들어왔네. 들어왔는데, 밥 먹고 나서 또 물은게 웬일이여? 그 참 이상혀. 밥 먹고 나서.
아니 글쎄 어째서 그 원 아무리 둔재(鈍才)라고 원 10년이나 말까장 않고, 그 한 이십 시절 청춘에 10년을 그대로—어머니 아버지한테도, 가다가 수레에 떨어져서 수레 타다가 떨어져서 말 못헌다고 그래 가지고는 거짓말까장 해 놓고서는 나허고는 밤중마다, 밤중에 나허고는 말을 했으니깐 꼭 정밤중이면. 내가 뭐 요만큼 하나 틀린 말혀?
그 10년을 그렇게 해 놓고 나서는 ‘오늘이 마지막 가는 날이니 어떻게 혀?’ 내가 통탄을 했다 그 말이여.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이르는데 거참 환장, 기가 멕히제. 환장 아니라 그만.
아 이런, 말 들으면 아니까. 딴 공안을 물어보니 차! 그대로 했어. 그 공안 일러 봤던들, ‘이뭣고?’를 일러 봤던들 무슨 별다른 것이 뭣이 있어? 뭐 뻘건 것이 있어, 무슨 허연 것이 있어? 거기에 무슨 뭔 광명이 나와, 무슨 뭣이 나와? 뭐가 있냔 말이여? 아무것도 없제. 원 싱겁기를 참 천하에 짝이 없제.
이즉돈오(理卽頓悟)다, 이치는 몰록 깼다. 아무리 이즉돈오(理卽頓悟)지마는, 이치는 몰록 깼지마는 사비돈제(事非頓除)여. 똥 싸고 오줌 싸고 똑같어. 사상사(事象事)가 똑같지, 다른 법 없어. 다른 법이 있다면 외도(外道)여. 모르는 것을 아는 것도 외도여. 뭐 별 이상스런 것이 하나 깨달았은게 코빼기라도 붙으면 마구니 외도여. 참선법은 그런 거여.
이즉돈오여. 이치는 몰록 깼다. 이치는, 생사 없는 이치 바로 봐 버리는 것이여. 죽고 사는 생사, 생사 이치가 없는데 거가 뭐가 있으리요.
그렇게 깨 가지고, 오! 인자 그 깬 그때부텀 지끔 또 치면은 몇 해나 된지 모르겄오마는 자최를 감촤버려. 인자 겨우 나타났오. 아! 자취 한번 감춰버리더니 그만이여. 아, 그만큼 깼으니 깨달았으니 인자 어디 가서 산중에 들어가던지, 아무디를 가던지, 말을 맥여주던지, 어디 가서 수연득묘(隨緣得妙)해라. 인연을 따라서 지내라 했더니 한번 간 뒤에는 그만이여. 아, 그랬더니 노동판 그런 디 가서 그만 그 보(洑) 막는디, 무슨 개 막는디 이런 디 가서 일을 허다가 허리를 그만 다쳐 가지고는 그 허리가 아파서 또 댕김서 고생하고. 참 이런 묵언 스님이 송담(松潭) 스님입니다.
내가 묵언 스님, 송담 스님이 없다면은 내가 여그 와서 아무리 있으라고 해도 내가 여그 와서 있을 사람은 아니었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지내든지 그래도 정전강(鄭田岡)하면, 한국에 정전강, 다 ‘정전강 스님이 우리를 가르킬만한 도인(道人)이다’ 다 그 마음, 불법(佛法) 신심을 가진 이는 다 그거 있습니다. 여기 학자(學者)들이 다 모였지만 그 생각이 없으면 오들 안 헐 학자여. 여기에 수십 명이 지나갔지마는 전부 전강 스님한테 한철 지내기를 원해 가지고 왔었습니다. 허지마는 다 방부(房付)도 못 받고. 내 힘이 뻗질러야제.
큰 대본산, 수천 석을 받는 수백 석을 받는 디도 아 선객(禪客) 한 몇십 명 기르자면은 한량없는 금액이 들어가고, 경제가 모자라서 못허고 헌디, 아 여그다가 뻘건 이런 무슨 저 터 하나, 빈터 하나 남은 디다가서 절을 이만큼 이걸 어떻게 아무때나 하꼬방처럼 건설했어도 건축을 허고, 아 여그서 한 사오십 명씩 지내기도 하고, 한 20여 명 30명 이렇게 지내오기를 한 10년 동안 되았습니다.
그런디 내가 건축을 이만큼 허고 저 솔밭 저짝에다 인자 천 평을 하나 만들아 놓고, 또 그 말 허게 됩니다마는 집도 또 저 아래 한 채 사서 이백이십오 원짜리인가 하나 사놓고, 또 거다가 기밀비로 내가 똑 두고 세상없이도 그건 손도 안 대고 그 두었던 놈 기밀비 백만 원허고 다해서 묶아 가지고 도장허고 딱 해서, 어제 내 생일날인디 어제 내가 다 인계 넹기고 오늘은 법좌(法座)에 올라가서 설법해 달라고 그렇게 해야 올라왔습니다.
허나 ‘지끔 조실 스님 계신 동안에는 내가 법상(法床)에 올라올 수 없습니다’ 허고 그래 쌓는 것을, 내가 못헌디 어쩔 것이냐? 이 말이여. ‘내가 설법상에 올라가서 설법허는 것이 아닙니다’ 허니 나만은 노인 대접도 하고 또 법사 스님 대접도 하고 그래 올라간다고 해서 오늘 와서 첫 때 했습니다.
그런디 내가 이 부처님 앉어 계신 사자좌(獅子座)를 아무나 올려놓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는 전강은 어찌 여그 자꾸 이 자리를 올라오느냐?
여그 학자(學者)들이 다 인증합니다. 학자들이 인증 못허면 인준 안 허면 나는 못 올라오는 것이고, 나는 학자들이 인준 없는데 올라와서 설법을 이렇게 헌다면은 죽은 물건입니다. 그거 썩은 물건이여. 학자들이 여지없이 인증을 해주기 땀세 내가 여기에 올라와서 설법을 허고 그동안에도 주욱 설법을 해 나온 것입니다.
왜 학자들이 인증하느냐? 뻘로 인증해 될 것입니까? 나도 과거에 한국 선지식이,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계셨는데 그 6대 선지식이 한목 날 인가(印可)를 다 했습니다. ‘옳다. 바로 공안을 바로 본 정영신(鄭永信)이다’고 해주어서 내가 인가 가지고 다 올라와서 여그 와서 했제, 인가 없이 내가 여그 와 했다면 여러분을 속였고 여러분을 속인 것보담도 죽은 놈입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허면, 내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올라온 사람이니깐 의심할 것 하나 없으니 차후는 어쩠든지 대중이 송담 스님한테 여기 원장 스님한테 설법 잘 들으시고.
인자 나 죽은 뒤에는 조실노릇을 할 것이요마는 내가 있을 동안까장은 조실이란 말은 안 할 것이요. 그 성격이 죽어도. 내 설법 대신으로, 할 수 없어, ‘전강 스님이 나이 많아서 설법을 할 수 없으니까 부득이 내가 대로 합니다’ 시방 이겝니다. 허니 다 그러신 줄 알고.
아주 살아 나갈 길이란 건 참선밖에 없으니 참말로 살아 나가실라거든 꼭 참례(參禮)해서 설법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인천 주안 용화사 용화선원, 중앙선원입니다. 유명헌 선원이니깐 인자 그리 알으시고 꼭 그렇게 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15분38초~32분2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당호(堂號 집 당/이름 호) ; 당호(幢號)라고도 한다. 출가한 스님으로서 사미나 소비구(小比丘 : 젊은 비구) 시절에는 휘(諱)인 법명(法名)을 사용하지만, 법랍(法臘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부터의 햇수)과 도덕이 높아지면 남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피(忌避 : 諱)한다.
그러므로 종사(宗師)와 법을 거량(擧揚)하여 종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그를 법사로 하여 입실건당(入室建幢)의 전법식을 가질 적에 당호와 가사, 장삼, 전법게(傳法偈) 등을 받는다.
당호란 주로 그가 살고 있는 절 이름, 또는 지명, 그가 거처하던 집 이름 등을 취하여 호를 삼는 예가 많았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묵언(默言) 스님 ; 송담(松潭) 스님의 별명. 10년간 묵언을 하며 수행을 해서 '묵언스님‘, ’묵언수좌'라는 별명이 생김.
*일없다 ; ①필요가 없다. ②걱정하거나 꺼릴 것이 없다.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달마대사(達摩大師, 達磨大師)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dharma.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는 보리달마(菩提達摩 ·菩提達磨)의 생략형이다.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 · 달마다라(達磨多羅) · 보리다라(菩提多羅) 등이라고도 하나 보통 달마라고 한다.
달마의 생몰연대는 ?~495, ?~436, 346~495, ?~528, ?~536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종의 전등(傳燈) 계보상 인도로부터는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이어 제28조이며,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달마의 전기를 살펴보면, 달마의 출신지는 파사국(波斯國) · 향지국(香至國) · 바라문국(婆羅門國) ·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받고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광주 자사가 예를 갖추어 영접하였으며, 표(表)를 올려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가 표를 읽고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득도시키기를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 有何功德]”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並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何以無功德]”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雖有非實]”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如何是眞功德]”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淨智妙圓體自空寂 如是功德不以世求]”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廓然)해서 거룩함[聖]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對朕者誰]”
“모르겠습니다[不識]“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가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후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는데, 석굴에서 면벽(面壁)하고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달마 대사에게 가서 아침저녁으로 섬기고 물었으나, 대사는 늘 단정히 앉아서 벽을 바라볼 뿐이어서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마침내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의 앞에 놓으니, 대사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서 말했다. “부처님들이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꿔 주자, 신광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諸佛法印可得聞乎]”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諸佛法印匪從人得]”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我心未寧 乞師與安]”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將心來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我與汝安心竟]”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소림사(小林寺)를 떠나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흠모를 하면서 예물을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게 사양하면서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단호해지자 대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받았다.
다시 9년이 지나자, 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가고자 해서 제자[門人]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제가 본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의 작용을 삼는 것입니다[如我所見 不執文字不離文字而爲道用]”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汝得吾皮]”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지금 이해한 바로는 아난(阿難)이 아촉불국(阿閦佛國)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我今所解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更不再見]”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汝得吾肉]”
도육(道育)이 말했다.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四大本空五陰非有 而我見處無一法可得]”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汝得吾骨]”
마지막에 혜가가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자,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最後慧可禮拜後依位而立 師曰 汝得吾髓]
이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혜가에게 부촉하고 가사(袈裟)를 전해서 법의 신표로 삼았으며,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당시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 삼장(菩提流支三藏)은 대사가 현묘한 교화의 바람을 널리 떨치고 법의 비를 두루 뿌리자, 그들의 치우치고 옹색한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서, 앞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주 독약(毒藥)을 음식에 넣었다. 그 일이 여섯 차례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교화의 인연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으므로, 더 이상 독약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니,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그 뒤 3년 후에 위(魏)의 사신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맨발 벗고, 손에는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고 있었다. 사신이 묻기를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대답하기를 ‘서천(西天)으로 간다. 그리고 그대의 임금은 벌써 세상을 뜨셨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하여 부지런히 동으로 가서 국왕께 복명(復命)하니, 명제(明帝)는 이미 승하하고 효장제(孝莊帝)가 등극해 있었다. 사명을 받들어 위의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황제가 무덤을 열어 보게 했는데, 빈 관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8조 보리달마」 p154~p183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종입二種入(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 『심경송(心經頌)』 · 『파상론(破相論)』 · 『안심법문(安心法門)』 · 『오성론(悟性論)』 · 『혈맥론(血脈論)』 등 여섯 법문(法門)으로 이루어진 『소실육문(小室六門)』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때 간행한 『선문촬요(禪門撮要)』 가운데 『혈맥론』 · 『관심론(觀心論)』 · 『사행론(四行論)』 등이 들어 있다. 『파상론(破相論)』과 『관심론(觀心論)』은 중복되며 달마대사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북종 신수(神秀)의 저술로 보고 있다.
달마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낙양가람기(落陽伽藍記)』(574년 성립),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담림(曇林)의 「서문」(600년경), 『당고승전唐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649년), 『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경),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년),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경), 『보림전(寶林傳)』(801년), 『조당집(祖堂集)』(952년) 등이 있다.
『보림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과 『전법정종기(傳法正宗紀)』(1061년)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819년)와 신회(神會)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732년) · 『문답잡징의(問答雜徵義)』, 종밀(宗密)의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 · 『도서(都序)』 ·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上 혈맥론(血脈論)』 (경허성우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범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煩惱)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도고마성道高魔盛]’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벽극풍동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심극마침心隙魔侵]’고 하시니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 • 중천 • 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사자후(獅子吼 사자 사/아들 자/울부짖을 후)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조사(祖師) : ①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②선가(禪家)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참고 ❶] 『소실육문(小室六門)』 제3문(第三門) 이종입(二種入)에서.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明佛心宗 等無差誤 行解相應 名之曰祖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 마음이 장벽(牆壁)과 같으면 가히 도(道)에 들어가리라. 부처님 마음의 종지(宗旨)를 밝히면 평등하여 어긋나거나 그릇됨[差誤]이 없어, 행(行 : 실천)과 해(解 : 앎)가 상응(相應)한 이를 이름하여 조사라 한다.
제4문 안심법문(安心法門)에서.
心心心 難可尋 寬時遍法界 窄也不容針
亦不覩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智而近愚 亦不抱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마음 마음 마음이여, 진실로 찾기가 어렵다. 넓을 때는 법계(法界)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악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도 없고, 또한 선을 보고서도 부지런히 닦지도 아니하고, 또한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을 가까이하지도 아니하며, 또한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네.
대도(大道)를 통달하여 헤아림[量]에서 벗어나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여 법도에서 벗어나네. 범부에도 성인에도 똑같이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것을 이름하여 조사라 하네.
[참고 ❷] 『조당집(祖堂集) 1』 제2권. 제28조 보리달마화상(菩提達摩和尙).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51~152.
爾時達摩領衆雲往禹門千聖寺 止得三日 時有期成太守楊衍問師曰 西國五天 師承爲祖 未曉此意 其義云何 師曰 明佛心宗 寸無差誤 行解相應 名之曰祖 又問曰 唯此一等 更有別耶 師答曰 須明他心 知其古今 不猒有無 亦非取故 不賢不愚 無迷無悟 若能是解 亦名爲祖
그때에 달마가 구름 같은 대중을 이끌고 우문(禹門)의 천성사(千聖寺)로 가서 사흘을 머물렀다. 이때 그 고을의 태수인 양연(楊衍)이 조사에게 물었다. “서천의 다섯 나라에서는 스승의 법을 이어받고는 조사(祖師)라 한다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부처님의 심법을 밝히매 한 치 어긋남이 없고, 해(解 : 교리)와 행(行 : 실천수행)이 서로 상응(相應)하는 자를 조사라 합니다”
다시 물었다. “그 한 종류뿐인가요, 또 다른 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반드시 타심통에 밝고, 고금을 통달하고, 유무(有無)를 싫어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도 않아서 어리석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으며, 미혹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나니, 이렇게 아는 이를 또한 조사라 합니다”
楊衍又問曰 弟子久在惡業 不近知識 勤生恭敬 被小智慧而生纏縛 卻成愚惑 不得悟道而致於此 伏願師指示大道 通達佛心 修行用心 何名法祖
양연이 다시 말했다. “제자는 오랫동안 악업(惡業)에 끄달려서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공경히 섬기지 못하고, 조그마한 지혜에 사로잡혀 꼼짝달싹 못하여, 어리석고 미혹된 채로 도를 깨닫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라옵건대 스승께서는 대도(大道)를 지시해 주십시오.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고 수행하고 마음 쓰는 이를 어째서 법(法)의 조사라 합니까?”
師以偈答曰 亦不睹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愚而近賢 亦不拋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조사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악(惡)을 보아도 미운 생각이 없고, 선(善)을 보아도 부지런히 닦지 않는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어진 이를 따르지 않고 미혹을 등지고 깨달음을 향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도를 깨달음에 한량없고,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여 법도를 넘어섰네. 범부도 성인도 뒤따르지 않고 초연한 이를 일러 조사라 한다.
[참고 ❸] 『전등록(傳燈錄) 1』 제3권.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78~179.
有期城太守揚衒之早慕佛乘 問師曰 西天五印 師承爲祖 其道如何 師曰 明佛心宗 行解相應 名之曰祖 又問 此外如何 師曰 須明他心知其今古 不厭有無於法無取 不賢不愚 無迷無悟 若能是解 故稱爲祖
며칠 후에 그 고을 태수 양현지(揚衒之)가 일찍부터 불법을 사모했다고 하면서 대사에게 물었다. “서역의 천축에서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으면 조사(祖師)라고 한다는데, 그 도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불심(佛心)의 종지(宗旨)를 밝혀서 행(行)과 해(解)가 서로 응하는 것을 조사라고 하오”
“그밖에는 어떠합니까?”
“모름지기 다른 이의 마음을 밝히고, 그 고금(今古)을 알고, 있음과 없음을 싫어하지 않고, 법을 취함이 없으며,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고, 미혹도 깨달음도 없나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사라고 칭하오”
又曰 弟子歸心三寶亦有年矣 而智慧昏蒙尙迷眞理 適聽師言罔知收措 願師慈悲開示宗旨
“제자가 삼보(三寶)에 귀의한 지도 몇 해가 되건만, 지혜가 혼몽(昏蒙)하여 오히려 진리를 미혹하고 있었는데,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종지를 열어 보여 주소서”
師知懇到 卽說偈曰 亦不覩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智而近愚 亦不拋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대사는 그의 정성이 간절함을 알고 즉시 게송을 말했다.
악을 보고서도 싫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선을 보고서도 부지런히 하려고 하지 않으며, 지혜를 버리고서 어리석음에 다가가지도 않고,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네.
대도(大道)를 통달함이여, 한량을 초월하고, 부처의 마음을 통달함이여, 한도를 넘어서네. 범부에도 성인에도 똑같이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것을 이름하여 조사라 하네.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회초리 책) : ①좌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사람을 깨우치는데[警] 사용하는 막대기[策]. ②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 깨우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참선법(參禪法).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 참선법(參禪法).
[참고 ❶]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2분26초)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53분35초~55분59초)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법훈(法訓)」 (개정 증보판. 2024년 11월 30일 발행 | 불광출판사) p299~314.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妄我)는 진아(眞我)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六畜)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 앞길)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 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業)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나를 찾는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이 탄생 시에 산석(產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부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 한 정력(精力)이라도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의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全宇宙)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 - 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 참선)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禪房)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惡),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때는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 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51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甕]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바탕]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 육도(六道)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이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〇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 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 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 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6분28초)
〇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〇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참고 ❸] 송담스님(No.364)—19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5분2초)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를 생각을 해,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하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하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 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 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하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생각을 좀 할려고 해도 안 되는 거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18분19초~23분18초)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염념(念念 생각·잠깐·극히 짧은 시간 념(염)) ; [산스크리트어] pratikșaņa, praticitta-kșaņa. 찰나찰나. 찰나마다. 한 찰나 한 찰나. 생각생각. 극히 짧은 순간들을 말함.
‘염(念)’은 본래 ‘찰나(刹那)’의 뜻이며, ‘염념(念念)’은 짧은 시간에도 늘 잊지 아니하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범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한 생각 단속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심입명(安心立命) ;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도 한다.
*안신입명(安身立命) ; 몸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세우다.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하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 생사를 벗어나 심신(心身)이 편안해졌음을 표현한 말이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2)
*주장자(柱杖子 기둥·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이 갖는 긴 지팡이. 설법(說法)할 때나, 외출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주장자(拄杖子)와 같음.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부처님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 · 능유(能儒)라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삼계화택(三界火宅) ; 화택(火宅). 세상의 쾌락에만 깊이 집착해 지혜롭지 못하여, 온갖 번뇌 · 생로병사 · 우환의 고통을 받는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세상[三界]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온갖 번뇌와 고통, 생로병사의 사나운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무서운 세계.
[참고] 『법화경』 제2권 '제3 비유품(譬喩品)'에서.
一切衆生 皆是吾子 深著世樂 無有慧心 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 常有生老 病死憂患 如是等火 熾然不息
모든 중생이 다 나[如來]의 자식이건만 그들은 세상의 쾌락에 깊이 빠져 지혜롭지 못하며, 삼계(三界)는 편치 않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아 온갖 고통이 가득차 심히 두려우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우환의 그러한 불길이 사납게 타올라 꺼지지 않고 있다.
*윤회(輪廻 바퀴 윤(륜)/돌 회) ; ①수레바퀴[輪]가 끊임없이 구르는[廻]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전지(田地 밭·경작지 전/땅·논밭 지) ; 논과 밭. 전하여 고향, 마음밭 등의 뜻으로 쓴다.
*‘생사(生死) 없는 법’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홍인대사(弘忍大師) ; 오조(五祖) 홍인(弘忍).
*오조(五祖) 홍인(弘忍)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분단(分段) ; [산스크리트어] pariccheda, kavadī-kāra. ①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 또는 그렇게 나눈 부분을 일컫는 말. ②내용에 따라 문단을 몇 단락으로 나눔. 또는 그 단락. ③분단생사(分段生死)의 줄임 말. 분단생사란 육도(六道) 윤회하는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받게 되는 목숨의 길고 짧음의 분한(分限)과 신체의 크고 작음, 가늘고 굵음의 형단(形段)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분단생사라 한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한바탕하다 ; ①어떠한 일을 크게 한번 벌이다. ②크게 한번 싸우다.
*정밤중(正밤中) ; 힌밤중(한밤中 : 깊은 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이즉돈오(理卽頓悟) 사비돈제(事非頓除) ; ‘이치는 몰록 깼다마는 사(事)는 몰록 제(除)할 수 없다’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
〇夫入道多門 以要言之 不出頓悟 漸修兩門耳 雖曰 頓悟頓修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于今生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 後修之機也
대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그 문이 많지마는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최상의 근기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生) 동안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한꺼번에 모두 마치는 것이니 실로 말하면 이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인 것이다.
則而此頓漸兩門 是千聖軌轍也 則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所言神通變化 依悟而修 漸熏所現 非謂悟時 卽發現也 如經云 理卽頓悟 乘悟倂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두 성인의 길로서,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하여 증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서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에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이치인즉 돈오이어서 깨달음과 아울러 모든 의심이 없어지거니와 일[事]은 곧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인하여 다한다’고 하셨다.
故 圭峯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 借陽氣以鎔消 悟凡夫而卽佛 資法力以熏修 氷消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應現通光之用 是知事上神通變化 非一日之能成 乃漸熏而發現也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붙은 못이 순전히 물[水]인 줄은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바로 부처인 줄은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빌려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잘 흘러야 물을 대고 씻는 공덕을 나타내고, 망념이 다하여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야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하셨다. 이로써 실제에 있어서 신통 변화는 하루아침에 능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익힘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〇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사상(事象 일 사/모양 상) ;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事物)과 현상(現象).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수연득묘(隨緣得妙) ; 수류득묘(隨流得妙).
*수류득묘(隨流得妙) ; '흐름[流]을 따르면서[隨] 미묘한 도[妙]를 터득한다[得]'는 말. 변화의 흐름에 맡겨두고 그대로 따르지만 언제나 근본 이치에 들어맞음. 모든 경계와 인연에 따르되 집착함이 없고 자유자재함.
*묘(妙) ; 묘법(妙法).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참고 ❶] 『진심직설(眞心直說)』 「진심묘용(眞心妙用)」 (보조지눌)
眞心妙體 本來不動 安靜眞常 眞常體上妙用現前 不妨隨流得妙 故祖師頌云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참마음의 미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하다.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미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미묘함을 얻음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摩拏羅)가 게송으로 읊었다.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그윽하다. 흐름에 따라 성품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참고 ❷] 『몽산법어(蒙山法語)』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용화선원刊) p140. (가로판 p135~136)
時至出山하야 駕無底船하야 隨流得妙하야 廣度人天하야 俱登覺岸하야 同證金仙이니라
시절이 이르거든 산에서 나와 밑 없는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묘를 얻어,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하야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 함께 부처를 증득할지니라.
[참고 ❸] 전강선사(No.252) - 고담화상 법어 4 (72.06.05)[몽산법어 부록 07-2](3분3초)
시지출산(時至出山)해라. 그렇게 되거들랑 그때 가서는 때가 되었으니,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했으니 출세(出世)해서, 세상에 나와서 중생(衆生)을 교화해라. 너만 그렇게, 그렇게 깨달라서 생사 하나 없은께 네 마음대로 너만 생사안락, 생사 없는 낙(樂)만 받고 있을 테냐? 시지출산(時至出山)해라. 때가 되거들란 어서 속히 나오니라.
가무저선(駕無底船)해라. 밑구녁 없는 배를 타라. 밑구녁이 없는 배, 그 밑구녁 없는 배를 어떻게 탈 것인고?
밑구녁 없는 배다. 그 무슨 놈의 뭐 밑구녁 없는 배가 걸릴 것 뭐 있나?
수류득묘(隨流得妙)해라. 그 모도 유(流)를 따라서 묘(妙)를 얻어라. 그 인연 따라서 모도 묘(妙)를 얻어서 한량없는 방편(方便)을 모두 가설해서, 모두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저 중생 봐라. 저 중생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게 꽉 매(昧)해 가지고는 다시 저를 찾을 줄 모르고, 그저 점점 무량 천만 겁 중에 오면서 여태까장 퍼지어온 죄업 위에다가 날마다 더 짓고, 때마다 더 짓고, 자꾸자꾸 짓기만 하니, 어쩔 것이냐? 내비둬 버리면 어쩔 것이냐, 그거?
광도인천(廣度人天)해라. 그래서 널리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해라.
그 인천이 누구냐? 모두 타인이 아니여.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여.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고 키워 주든 다생부모(多生父母)요, 과거 부모요. 여태까장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한 가운데 서로서로 그렇게 인연이 걸려 있어. 부모여.
어디 금생 부모만 부모냐? 전생 부모는 부모 아닌가? 아! 금생 부모는 좀 더허고, 전생 부모는 덜헌가? 전부가 다 그 부모 아니냐!
허니 구등각안(俱登覺岸)케 해라. 한 가지 각안(覺岸)에 오르게 맨들어라. 한 가지 모두 생사 없는 해탈 각안에 모두 올라가게 이렇게 원력(願力)을 세워라.
그래서 동증금선(同證金仙)해라. 영원히 금선, 우리 부처님이 금선(金仙)인데, 한 가지 금선을 증(證)해라. 꼭 부처님이 되게 이렇게 해라.(27분37초~31분2초)
*보(洑 보 보) ;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의 하나.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이다.
*개 ; 강이나 하천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정전강(鄭田岡) ; 전강선사(田岡禪師). 영신(永信)은 법명.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대본산(大本山) ; 대본사(大本寺 총본사 아래에 있거나 독립적으로 같은 종지宗旨의 작은 말사를 통할하는 큰 절).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하꼬방 ; 판잣집(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 箱房. 箱(상자)의 일본어 훈독 ‘ばこ(하꼬)’+방(房)이 결합된 말.
*법좌(法座 부처님의 가르침 법/자리 좌) ; [산스크리트어] dharma-āsana, [팔리어] dhamma-sabhā. 설법하는 자리. 설법할 때 사용하는 높은 상좌(上座). 고좌(高座) · 수미좌(須彌座) · 법상(法床)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람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덕이 있어 마치 동물의 왕인 사자의 지위에 비유하여 사자좌(獅子座) 또는 예좌(猊座)라고도 한다.
*상좌(上座) ; ①가장 높은 사람이 앉도록 정면에 설치한 자리[高座]. ②절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사무를 맡아보는 주지(住持)나, 수행이 깊고 덕이 높은 원로(元老), 선사(禪師), 강사(講師)가 앉는 자리.
*법상(法床 부처님의 가르침 법/평상 상) ; [산스크리트어] dharma-āsana, dharmāsana. 법을 설하는 자리. 부처님의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床). 사자좌(獅子座) 또는 법좌(法座)라고도 한다.
*사자좌(獅子座 사자 사/아들 자/자리 좌) ; [산스크리트어] simhāsana, [팔리어] sīhāsana. 부처님이 앉으시는 자리 즉, 상좌(牀座)를 사자좌라 한다. 부처님은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로,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여 부처님의 좌석은 무엇이 되었거나 모두 사자좌라 한다. 후세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의 대좌(臺座)와 설법할 때 앉는 자리[法座]나 장로대덕(長老大德)의 좌석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사자상(師子床) · 사자좌(師子座) · 예좌(猊座) 등이라고도 한다.
*상좌(牀座 평상平牀·平床 상/자리 좌) ; 평상자리. 침상자리. 상좌(床座)라고도 쓴다.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정영신(鄭永信) ; 전강선사(田岡禪師). 영신(永信)은 법명.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차사(此事) ; 이[此] 일[事]. 본분사(本分事). 본래자기를 깨닫는 일.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事].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本來)의 모습[身分]으로 되돌아가는 일[事].
납승(衲僧 참선 수행승)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일이므로 납승본분사(衲僧本分事) 또는 납승분상사(衲僧分上事) 등이라고도 한다. 일대사(一大事)와 같은 말.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참례(參禮) ; 예식, 제사, 전쟁 따위에 참가하여 관여함.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 다운로드.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 다운로드.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