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선원2026. 9. 28. 16:43

•§•(280) 전강선사의 송담스님 소개. ‘송담스님은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묵언을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이 설법 좌(座)를 송담스님한테로 넘긴다’ /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 번뇌망상이 화두를 거각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보는 놈, 듣는 놈,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 /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송담스님이 묵언하며 참선하기 10년째, 전강선사의 물음에 아침 식전까지 깜깜하니 있다가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일렀다. “내(전강선사)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전강선사((No.280))—1972(임자)년 동지 법문(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임자72.11.17) (전280)(용화선원)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1) 약 16분.

280-1(전강선사+송담스님:1972임자년 동지 법문:임자72.11.17:약16분).mp3
14.52MB



(2) 약 17분.

280-2(전강선사+송담스님:1972임자년 동지 법문:임자72.11.17:약17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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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스님이 이름이, 저 당호(堂號)가 호가 송담(松潭) 스님인데. [앉어 그만, 뭣이든 가만히 앉었어] 송담 스님인데, 송담이라는 그 이름은 절에 들어와서 인자 참 도(道)를 얻어야 도를 깨달라 얻어야 호를 해주는 이름이여. 그 이름, 제일 높은 이름이, 당호 이름이 송담이다 그 말씀이여.

그런데 송담이라고 하면 몰라. 아무도 몰라. [그만 앉어 계셔. 그대로 앉어 계셔] 묵언(默言) 스님이라고 해야 안다 그 말이여. 어찌 묵언인고 하니 10년 동안을 말을 안 했어. 세상에, 귀 뚫어지고 벙어리가 없어. 환허니 들으면서 10년 동안을 묵언을 했는디, 나이 올해 근 오십 되었습니다. 오십 되었는데 지금 어디 오십 되아 보이요, 오십도 안 돼 보이제.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10년을 딱 정허고 묵언을 따악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도(道)를 통했다 그 소리여. 내가 이런 말허면 ‘내 권속 내 제자’ 이런 게 아녀. 나 그런 말은 뭐 내 부모라도 일없고. 전국에 다 아는 분이여. 전국에서 ‘묵언수좌(默言首座)’ 허면 다 안다 그 말씀이여.

여가 이 자리가 이래 뵈도 누가 올라와요? 못 올라와. 하나도 이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 여그서 내가 10년 동안 설법을 했는디 올라간 사람 없어. 묵언 스님 자리밖에 내 안된다 그 말이여. 내가 고리 넹겨서 아조 여그 원장(院長)이 되았습니다. 여 원장 스님, 나 죽으면 조실(祖室)이 되지, 시방 죽기 전에는 조실 못 되오. 원장만 되지.

아, 조실 스님이 나이 팔십이 되았으니, 인자 칠십도 못 올라가거든. 아 그래 너무 체면없이 팔십 살까장 올려 보낼라고 허니 될 것이요? 그래서 인자 이 원장 스님한테로 이 좌(座)를 넹겨서 오늘 올러가서 인자 마음대로 설법헐 텐게 잘허던지 못허던지 그만 도(道)는 한국에서 젊은이로는 송담 스님밖에 없다 그 말이여. 다 압니다. 아 그 뭐 누구라고 허면 모르는 이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믿고.

스승 하나 옳게 믿으면 그만이제. 스승을 보고 절에 댕겨야지, 절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디나 부처님은 똑같다고 모도 이러드구만, 말헐 때 들으면. 그것 소용 하나 없는 것이여. 옳은 스승을 찾아서 댕겨야 옳은 법을 듣고 그러제. 아무때나 또 그러면 아무때나 가 놓으면 무당도 뭐 뭐 부적케니 범연히 알아서 해? 잠깐 간단히 말씀해 마칩니다. 설법 잘 들으십시오. 옷을 뚱뚱허니 입고 두어야 인자 듣고 나오네. 조그만, 인자 나와서 허라는 대로 혀!


<송담스님 법문>

조실 스님께서 너무 올라가기를 강경히 명령을 하시기 때문에 부득이 올라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法)을 설(說)한다’고 허는 것은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허신 바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법을 설하면은 그 설하는 사람은 마구니의 왕이 되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의 법을 듣는 대중은 마구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허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 자리에 함부로 올라올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헌 사람이 능히 법을 설헐 수가 있느냐?’ 하면은, 한 말도 설하지 아니하되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한구석에도 들리지 아니한 곳이 없을 만큼 또 단 일분일초 동안이라도 그 설법이 근친 바가 없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꽉 차는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허면 입을 열지 아니허되 그 설법이 끊이지 않고 대사자후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종일 일평생토록 법을 설허되 한 말도 설헌 바가 없는 사람, 능히 이러헌 사람만이 감히 법을 설헌다고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헐 때에 본인으로서는 감히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큰스님의 강경한 그 명령으로 올라오기는 했습니다마는 감히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아무 헐 말씀도 없고 법을 설헌다고 헐 수 없습니다.
이걸 법이라고 생각허시지 말고, 또 저도 법을 설헌다고 그런 생각으로 여기를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점을 먼저 다짐을 드리고서 옛날 조사(祖師) 스님께서 우리에게 공부를 어떻게 허라고 경책(警策)해 주신 말씀 한마디를 소개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다 참선의 그 바람이 일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다 ‘불교’ 허면 참선, 그 참선을 모다 좋아하고 모다 헐려고 애를 쓰고, 그러고 있는 것은 대단히 좋은 현상이라고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바르게 허지를 못하기 때문에 3년 10년 내지 일생을 해도 정말 화두(話頭) 하나를 바르게 들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참선할려면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아니해야 그 참선을 잘허는 것이고, 번뇌와 망상, 중생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참선이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앉어서 어쨌던지 그 망상이 안 일어나기를 바래고, 망상이 일어나면은 그 공부가 잘 안된다고 이리 생각해 가지고 고민을 허고 번민을 허고 한탄을 허고, 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마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헌다고 하는 것은 벌써 목석(木石)이나 죽은 사람은 아무리 번뇌를 일으킬라고 해도 일어나지 아니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증거로써, 우리가 불성(佛性)이 있다고 허는 그 증거로써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 것이니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고 허는 것은 그것을 미워허고 싫어허고 한탄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 우리도 깨달을 수 있는 분명히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허는 증거로써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기에 따라서는 아주 다행한 일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그놈과 더불어 일생을 살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고 해도 능히 세속 사람은 살 수가 있고 아들딸도 날 수도 있고 형편 따라서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는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와 권속을 다 버리고 독신으로서 산중에서 못 먹고 못 입고 이 고생을 허며, 신도님들도 집에서 그저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허면서 그저 형편따라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다달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바쁜 틈을 타서 이렇게 오셔 가지고 큰스님네 법문을 듣고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시느냐?
우리가 먹고 입고 배불리 먹고 편허게 잠자는 것으로써만이 우리의 인생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루아침에 다시 불행으로 뒤바꿔질 우려성이 다분히 있는 위험한 생활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려고 이 불법(佛法)을 찾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공부허는 과정에 있어서 그 번뇌(煩惱)를 없이 하고 어떠한 청정(淸淨)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고 무한히 애를 씁니다마는, 그 마음 자세가 제가 생각기에는 또는 옛날 부처님과 조사와 큰스님네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본다면은 그 번뇌를 없이 하고 어떤 청정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면서 공부를 헌다고 허는 것은 마음 자세가 틀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번뇌 그놈을 없이 헐려고 허는 디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번뇌」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을 아지 못하고, 거기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그 생각’ 일어나는 것을 꺼려하고 한탄하는 그 생각」 때문에 화두 한번 드는 것이 늦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놓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지나간 일이 되었건, 현실에 닥쳐 있는 일이 되었건 또는 미래에 자기 앞에 돌아올 어떤 사건에 관한 일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다 할 때에 그 일어나는 그 마음에 즉(卽)해서, 바로 그 마음으로 조실 스님께서 일러주신 그 화두(話頭)를 터억 들으신다고 허면은 일어나는 그 번뇌 망상이 우리의 깨달음을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그러헌 상대가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화두를 거각(擧却)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헐 때에 번뇌가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화두를 들게 되는 것이고, 만 번 일어나면 만 번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면 그것이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그렇게 여법(如法)히 공부해 나간다면은 어찌 깨닫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볼 때에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사람일수록 화두를 더 잘헐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하나는 우산 장수를 허고 하나는 세탁소를 경영을 했는데, 비가 오면은 그 세탁업을 허는 아들이 빨래를 말리지 못해서 장사가 잘 안되겠다고 한심 걱정을 허고, 또 비가 안 오면은 우산 장수 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안 되겠다고 이렇게 걱정헌, 일평생을 걱정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헌 할머니가 계셨다고 합니다.
생각기에 따라서는 비가 오면은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비가 안 오면은 빨래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잘되리라고 이렇게 참 재미스럽게 생각헐 수 있을 텐데, 그놈을 까꾸로 생각해 가지고 비가 오나 안 오나 걱정을 허게 된다면은 그 할머니는 비가 오던지 안 오던지 재미있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을 잘못 먹었기 때문에 일평생을 자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불행 속에 사는 할머니와 같은 그러헌 식의 공부는 우리는 지양(止揚)을 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헌 종류의 번뇌가 일어나드라도 그 번뇌로 인해서 정진을 다시 다잽이허고, 어떠헌 몸에 병이 생기고 뜻에 어긋나는 어떤 사건들이 우리 앞에 제출이 되드라도 그러헌 것을 계기로 해서 생각생각이 단속을 허고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은 우리는 설사 금년에 또는 이태 삼 년에 견성(見性)을 못하드라도, 마지막 죽을 때까지 설사 큰스님의 인가(印可)를 못 받는다 하드라도 조금도 한탄할 일이 아니라 그럴수록에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하면서 정진을 한다면은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한 도인(道人), 자리가 완전히 잡힌 수행자라고 존경을 해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과거에 큰스님네 법문을 보고 듣고 그래서 속으로 느낀 바도 있고 그래서 참고로 말씀을 드리고, 참으로 훌륭한 법문을 조실 스님께서 허실 테니 그걸 잘 들으시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15분35초)





(2)------------------

<전강선사 법문>

(주장자를 들으시고) 다 보시었제? 이걸 이걸 못 봐? (주장자를 내리시고 ‘쿵’) 잘 보고 잘 들었지요.

그 보는 놈. 이 주장자(柱杖子), 보는 주장자 그만두고 보는 놈, 그놈. 그 참 신령하제. 보는 놈이 그놈이 그 무슨 물건이여? 소리 ‘땅’ 듣는 놈은 또 무슨 물건이여? 보는 놈이 다르고, 듣는 놈이 다른 게 아니여. 보는 놈이나 듣는 놈이나 똑같지. 그 뭐가 보고 뭐가 듣냐 그 말이여.

아 그놈이 낱낱이 우리가 낸디, 내가 낸디, 아 그놈을 모르다니. 이것 참 엄청난 일이지. 그놈을 몰라 놓고 깜깜 칠통(漆桶). 그 내가 낸디, 내가 나를 몰라 놓고, 사람이라고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고 돌아댕기면서 살았다고 돌아댕기면서, 기가 찰 일이지. 이것 하나 깨달아 아는 것,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參禪法)이여.

참선법이,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깨달라 가지고는 여태까지 이 사바세계 오탁악세(五濁惡世)에다가 그 죄만 퍼짓는, 죄 퍼짓고 죄 받는 중생한테 그렇게 가르켜줄라고 49년 동안이나 설법을 해서 ‘어쨌든지 그놈의 죄, 숭악헌 중생 죄, 인생 죄, 그놈의 죄에만 파묻히지 말고 깨달라라, 깨달라라.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輪廻)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그 자리에 해탈이 있다. 헌데 그저 한번 깨달으면 깨달은 그 각전지(覺田地)에 그대로가 해탈이다. 아무 고통도 없고’ 이렇게 일러주고 이렇게 말해줬는데 이렇게 깜깜혀.

아, 나도 여기 와서 10년 동안을 늘 이 말뿐인데, 아 이렇게 깜깜혀. 천하에 쉬운 것은, 천하에 참선보담 더 쉬운 법이 있다면 말을 해 봐.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선, 내가 나 깨달은, 그 뭐여, 손을 뒤집었다 이랬다 허고, 그만큼 가깝다고 할 수가 있나? 그것도 멀제. 틈도 없어, 틈도. 나를 깨달을 그 깨달른 동안이, 어느 때 깨달을런지 또 시간도 없어. 안 해서 못하고, 믿지 안 해서 안 하고,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여태까장 또 얼마 동안을 내가 안 허다가 그전에 헌 그 홍인대사(弘忍大師) 법문 한마디 또 해야겠구만. 왜 그러냐? 그 법문을 들은 분들이 몇 분이 부탁을 또 해싸. ‘한 번만 더 들었으면은 알겠다’고. ‘그때 그 송구(頌句)를 잘 모르겠다’고 쌓고 이러니깐, 또 좋고 괜찮허고 해서 시간은 좀 걸리지마는 잠깐 헐터니깐 잘 들어 두십시오.
꼭 듣고 설법을 듣고 ‘꼭 해야겄구나’ 그 마음이 나도록 들으란 말씀이여.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깐. 안 믿은 사람이 큰일이제, 한번 옳게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부처님이 설산 속에 들어가서 여섯 해 만에 깨달랐지. 6년 만에 깨달랐지. 햇수는 6년 만이지마는 턱 깨달을 때는 그것, 시간도 암것도 없어. 그렇게 쉽게 깨달은 시간만 말하자면 그 6년이니, 뭐 여섯 시간이니, 무슨 뭐 6분이니 붙일 것도 없어.
여섯 해 동안은 어떻게 참선을 했는지 그 망상만 퍼일어나고 그 모도 공상만 퍼일어나고 안 되다가 되다가 야단쳤제. 부처님만 그런 것이요? 다 그랬제. 그동안 치지 말고, 그놈의 망상 번뇌 퍼일어나는 그때는 그만두고 확철대오(廓徹大悟)헐 때만, 탁 깨달을 때만 그 시간을 따져 보자면 당초에 분단(分段)도 없는 거여, 시간도 없고. 금방까장 미(迷)했다가 툭 깨버렸단 말이여. 내가 거짓말을 혀? 내가 바로 혀. 내가 당해 놓고 직접 대해서 내가 얘기헌디 거짓말을 혀?

아, 식전에 아침에 10년을 묵언헌 날이 오늘이여. 오늘 마지막이여. “10년을 묵언할 때에는 참선 한바탕해서 견성헌다고 중이 되아 가지고 묵언했지? 10년을 묵언허고 나서 오늘이 10년인데, 오늘 이까장 깜깜허고 있어? 한마디도 못 이르고 깜깜혀?” 아 내가 그러고는 들어왔네. 들어왔는데, 밥 먹고 나서 또 물은게 웬일이여? 그 참 이상혀. 밥 먹고 나서.

아니 글쎄 어째서 그 원 아무리 둔재(鈍才)라고 원 10년이나 말까장 않고, 그 한 이십 시절 청춘에 10년을 그대로—어머니 아버지한테도, 가다가 수레에 떨어져서 수레 타다가 떨어져서 말 못헌다고 그래 가지고는 거짓말까장 해 놓고서는 나허고는 밤중마다, 밤중에 나허고는 말을 했으니깐 꼭 정밤중이면. 내가 뭐 요만큼 하나 틀린 말혀?

그 10년을 그렇게 해 놓고 나서는 ‘오늘이 마지막 가는 날이니 어떻게 혀?’ 내가 통탄을 했다 그 말이여.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이르는데 거참 환장, 기가 멕히제. 환장 아니라 그만.
아 이런, 말 들으면 아니까. 딴 공안을 물어보니 차! 그대로 했어. 그 공안 일러 봤던들, ‘이뭣고?’를 일러 봤던들 무슨 별다른 것이 뭣이 있어? 뭐 뻘건 것이 있어, 무슨 허연 것이 있어? 거기에 무슨 뭔 광명이 나와, 무슨 뭣이 나와? 뭐가 있냔 말이여? 아무것도 없제. 원 싱겁기를 참 천하에 짝이 없제.

이즉돈오(理卽頓悟)다, 이치는 몰록 깼다. 아무리 이즉돈오(理卽頓悟)지마는, 이치는 몰록 깼지마는 사비돈제(事非頓除)여. 똥 싸고 오줌 싸고 똑같어. 사상사(事象事)가 똑같지, 다른 법 없어. 다른 법이 있다면 외도(外道)여. 모르는 것을 아는 것도 외도여. 뭐 별 이상스런 것이 하나 깨달았은게 코빼기라도 붙으면 마구니 외도여. 참선법은 그런 거여.
이즉돈오여. 이치는 몰록 깼다. 이치는, 생사 없는 이치 바로 봐 버리는 것이여. 죽고 사는 생사, 생사 이치가 없는데 거가 뭐가 있으리요.

그렇게 깨 가지고, 오! 인자 그 깬 그때부텀 지끔 또 치면은 몇 해나 된지 모르겄오마는 자최를 감촤버려. 인자 겨우 나타났오. 아! 자취 한번 감춰버리더니 그만이여. 아, 그만큼 깼으니 깨달았으니 인자 어디 가서 산중에 들어가던지, 아무디를 가던지, 말을 맥여주던지, 어디 가서 수연득묘(隨緣得妙)해라. 인연을 따라서 지내라 했더니 한번 간 뒤에는 그만이여. 아, 그랬더니 노동판 그런 디 가서 그만 그 보(洑) 막는디, 무슨 개 막는디 이런 디 가서 일을 허다가 허리를 그만 다쳐 가지고는 그 허리가 아파서 또 댕김서 고생하고. 참 이런 묵언 스님이 송담(松潭) 스님입니다.

내가 묵언 스님, 송담 스님이 없다면은 내가 여그 와서 아무리 있으라고 해도 내가 여그 와서 있을 사람은 아니었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지내든지 그래도 정전강(鄭田岡)하면, 한국에 정전강, 다 ‘정전강 스님이 우리를 가르킬만한 도인(道人)이다’ 다 그 마음, 불법(佛法) 신심을 가진 이는 다 그거 있습니다. 여기 학자(學者)들이 다 모였지만 그 생각이 없으면 오들 안 헐 학자여. 여기에 수십 명이 지나갔지마는 전부 전강 스님한테 한철 지내기를 원해 가지고 왔었습니다. 허지마는 다 방부(房付)도 못 받고. 내 힘이 뻗질러야제.

큰 대본산, 수천 석을 받는 수백 석을 받는 디도 아 선객(禪客) 한 몇십 명 기르자면은 한량없는 금액이 들어가고, 경제가 모자라서 못허고 헌디, 아 여그다가 뻘건 이런 무슨 저 터 하나, 빈터 하나 남은 디다가서 절을 이만큼 이걸 어떻게 아무때나 하꼬방처럼 건설했어도 건축을 허고, 아 여그서 한 사오십 명씩 지내기도 하고, 한 20여 명 30명 이렇게 지내오기를 한 10년 동안 되았습니다.
그런디 내가 건축을 이만큼 허고 저 솔밭 저짝에다 인자 천 평을 하나 만들아 놓고, 또 그 말 허게 됩니다마는 집도 또 저 아래 한 채 사서 이백이십오 원짜리인가 하나 사놓고, 또 거다가 기밀비로 내가 똑 두고 세상없이도 그건 손도 안 대고 그 두었던 놈 기밀비 백만 원허고 다해서 묶아 가지고 도장허고 딱 해서, 어제 내 생일날인디 어제 내가 다 인계 넹기고 오늘은 법좌(法座)에 올라가서 설법해 달라고 그렇게 해야 올라왔습니다.

허나 ‘지끔 조실 스님 계신 동안에는 내가 법상(法床)에 올라올 수 없습니다’ 허고 그래 쌓는 것을, 내가 못헌디 어쩔 것이냐? 이 말이여. ‘내가 설법상에 올라가서 설법허는 것이 아닙니다’ 허니 나만은 노인 대접도 하고 또 법사 스님 대접도 하고 그래 올라간다고 해서 오늘 와서 첫 때 했습니다.

그런디 내가 이 부처님 앉어 계신 사자좌(獅子座)를 아무나 올려놓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는 전강은 어찌 여그 자꾸 이 자리를 올라오느냐?
여그 학자(學者)들이 다 인증합니다. 학자들이 인증 못허면 인준 안 허면 나는 못 올라오는 것이고, 나는 학자들이 인준 없는데 올라와서 설법을 이렇게 헌다면은 죽은 물건입니다. 그거 썩은 물건이여. 학자들이 여지없이 인증을 해주기 땀세 내가 여기에 올라와서 설법을 허고 그동안에도 주욱 설법을 해 나온 것입니다.

왜 학자들이 인증하느냐? 뻘로 인증해 될 것입니까? 나도 과거에 한국 선지식이,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계셨는데 그 6대 선지식이 한목 날 인가(印可)를 다 했습니다. ‘옳다. 바로 공안을 바로 본 정영신(鄭永信)이다’고 해주어서 내가 인가 가지고 다 올라와서 여그 와서 했제, 인가 없이 내가 여그 와 했다면 여러분을 속였고 여러분을 속인 것보담도 죽은 놈입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허면, 내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올라온 사람이니깐 의심할 것 하나 없으니 차후는 어쩠든지 대중이 송담 스님한테 여기 원장 스님한테 설법 잘 들으시고.

인자 나 죽은 뒤에는 조실노릇을 할 것이요마는 내가 있을 동안까장은 조실이란 말은 안 할 것이요. 그 성격이 죽어도. 내 설법 대신으로, 할 수 없어, ‘전강 스님이 나이 많아서 설법을 할 수 없으니까 부득이 내가 대로 합니다’ 시방 이겝니다. 허니 다 그러신 줄 알고.

아주 살아 나갈 길이란 건 참선밖에 없으니 참말로 살아 나가실라거든 꼭 참례(參禮)해서 설법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인천 주안 용화사 용화선원, 중앙선원입니다. 유명헌 선원이니깐 인자 그리 알으시고 꼭 그렇게 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15분38초~32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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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호(堂號 집 당/이름 호) ; 당호(幢號)라고도 한다. 출가한 스님으로서 사미나 소비구(小比丘 : 젊은 비구) 시절에는 휘(諱)인 법명(法名)을 사용하지만, 법랍(法臘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부터의 햇수)과 도덕이 높아지면 남들이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피(忌避 : 諱)한다.
그러므로 종사(宗師)와 법을 거량(擧揚)하여 종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그를 법사로 하여 입실건당(入室建幢)의 전법식을 가질 적에 당호와 가사, 장삼, 전법게(傳法偈) 등을 받는다.
당호란 주로 그가 살고 있는 절 이름, 또는 지명, 그가 거처하던 집 이름 등을 취하여 호를 삼는 예가 많았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묵언(默言) 스님 ; 송담(松潭) 스님의 별명. 10년간 묵언을 하며 수행을 해서 '묵언스님‘, ’묵언수좌'라는 별명이 생김.
*일없다 ; ①필요가 없다. ②걱정하거나 꺼릴 것이 없다.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달마대사(達摩大師, 達磨大師)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dharma.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는 보리달마(菩提達摩 ·菩提達磨)의 생략형이다.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 · 달마다라(達磨多羅) · 보리다라(菩提多羅) 등이라고도 하나 보통 달마라고 한다.
달마의 생몰연대는 ?~495, ?~436, 346~495, ?~528, ?~536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종의 전등(傳燈) 계보상 인도로부터는 제27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이어 제28조이며,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달마의 전기를 살펴보면, 달마의 출신지는 파사국(波斯國) · 향지국(香至國) · 바라문국(婆羅門國) · 남천축국(南天竺國) 등이라고 하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을 받고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건너가 3년이 지나서야,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광주 자사가 예를 갖추어 영접하였으며, 표(表)를 올려 무제에게 아뢰자 무제가 표를 읽고는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10월 1일에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을 득도시키기를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朕卽位已來 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 有何功德]”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並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何以無功德]”
“이는 다만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답지가 않습니다[此但人天小果有漏之因 如影隨形雖有非實]”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오?[如何是眞功德]”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해서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淨智妙圓體自空寂 如是功德不以世求]”

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가는 뜻[第一義]이오?[如何是聖諦第一義]”
“확연(廓然)해서 거룩함[聖]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對朕者誰]”
“모르겠습니다[不識]“
무제가 알아듣지 못하자, 대사는 근기가 계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후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는데, 석굴에서 면벽(面壁)하고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달마 대사에게 가서 아침저녁으로 섬기고 물었으나, 대사는 늘 단정히 앉아서 벽을 바라볼 뿐이어서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마침내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서 대사의 앞에 놓으니, 대사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서 말했다. “부처님들이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법을 위해 몸을 잊었다. 네가 이제 내 앞에서 팔을 끊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대사가 그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꿔 주자, 신광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諸佛法印可得聞乎]”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니라[諸佛法印匪從人得]”

“제 마음이 아직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주소서[我心未寧 乞師與安]”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편안케 해주리라[將心來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끝내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我與汝安心竟]”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대사는 끝내 소림사(小林寺)를 떠나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더 흠모를 하면서 예물을 하사했으나 대사는 굳게 사양하면서 세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이 더욱 단호해지자 대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받았다.

다시 9년이 지나자, 대사는 서쪽의 천축으로 돌아가고자 해서 제자[門人]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제가 본 바로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의 작용을 삼는 것입니다[如我所見 不執文字不離文字而爲道用]”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汝得吾皮]”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지금 이해한 바로는 아난(阿難)이 아촉불국(阿閦佛國)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我今所解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更不再見]”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汝得吾肉]”

도육(道育)이 말했다.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四大本空五陰非有 而我見處無一法可得]”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汝得吾骨]”

마지막에 혜가가 절을 한 뒤에 제자리에 서 있자, 대사가 말했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最後慧可禮拜後依位而立 師曰 汝得吾髓]

이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혜가에게 부촉하고 가사(袈裟)를 전해서 법의 신표로 삼았으며,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당시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 삼장(菩提流支三藏)은 대사가 현묘한 교화의 바람을 널리 떨치고 법의 비를 두루 뿌리자, 그들의 치우치고 옹색한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서, 앞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켜 자주 독약(毒藥)을 음식에 넣었다. 그 일이 여섯 차례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교화의 인연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으므로, 더 이상 독약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니,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그 뒤 3년 후에 위(魏)의 사신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맨발 벗고, 손에는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고 있었다. 사신이 묻기를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대답하기를 ‘서천(西天)으로 간다. 그리고 그대의 임금은 벌써 세상을 뜨셨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하여 부지런히 동으로 가서 국왕께 복명(復命)하니, 명제(明帝)는 이미 승하하고 효장제(孝莊帝)가 등극해 있었다. 사명을 받들어 위의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황제가 무덤을 열어 보게 했는데, 빈 관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8조 보리달마」 p154~p183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종입二種入(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 『심경송(心經頌)』 · 『파상론(破相論)』 · 『안심법문(安心法門)』 · 『오성론(悟性論)』 · 『혈맥론(血脈論)』 등 여섯 법문(法門)으로 이루어진 『소실육문(小室六門)』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때 간행한 『선문촬요(禪門撮要)』 가운데 『혈맥론』 · 『관심론(觀心論)』 · 『사행론(四行論)』 등이 들어 있다. 『파상론(破相論)』과 『관심론(觀心論)』은 중복되며 달마대사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북종 신수(神秀)의 저술로 보고 있다.

달마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낙양가람기(落陽伽藍記)』(574년 성립),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담림(曇林)의 「서문」(600년경), 『당고승전唐高僧傳(속고승전續高僧傳)』(649년), 『전법보기(傳法寶紀)』(712년경),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년),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년경), 『보림전(寶林傳)』(801년), 『조당집(祖堂集)』(952년) 등이 있다.
『보림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과 『전법정종기(傳法正宗紀)』(1061년)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819년)와 신회(神會)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732년) · 『문답잡징의(問答雜徵義)』, 종밀(宗密)의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 · 『도서(都序)』 ·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등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上 혈맥론(血脈論)』 (경허성우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범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煩惱)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도고마성道高魔盛]’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벽극풍동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심극마침心隙魔侵]’고 하시니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 • 중천 • 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사자후(獅子吼 사자 사/아들 자/울부짖을 후)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조사(祖師) : ①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②선가(禪家)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참고 ❶] 『소실육문(小室六門)』 제3문(第三門) 이종입(二種入)에서.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 明佛心宗 等無差誤 行解相應 名之曰祖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 마음이 장벽(牆壁)과 같으면 가히 도(道)에 들어가리라. 부처님 마음의 종지(宗旨)를 밝히면 평등하여 어긋나거나 그릇됨[差誤]이 없어, 행(行 : 실천)과 해(解 : 앎)가 상응(相應)한 이를 이름하여 조사라 한다.

제4문 안심법문(安心法門)에서.
心心心 難可尋 寬時遍法界 窄也不容針
亦不覩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智而近愚 亦不抱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마음 마음 마음이여, 진실로 찾기가 어렵다. 넓을 때는 법계(法界)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악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도 없고, 또한 선을 보고서도 부지런히 닦지도 아니하고, 또한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을 가까이하지도 아니하며, 또한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네.
대도(大道)를 통달하여 헤아림[量]에서 벗어나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여 법도에서 벗어나네. 범부에도 성인에도 똑같이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것을 이름하여 조사라 하네.

[참고 ❷] 『조당집(祖堂集) 1』 제2권. 제28조 보리달마화상(菩提達摩和尙).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51~152.
爾時達摩領衆雲往禹門千聖寺 止得三日 時有期成太守楊衍問師曰 西國五天 師承爲祖 未曉此意 其義云何 師曰 明佛心宗 寸無差誤 行解相應 名之曰祖 又問曰 唯此一等 更有別耶 師答曰 須明他心 知其古今 不猒有無 亦非取故 不賢不愚 無迷無悟 若能是解 亦名爲祖

그때에 달마가 구름 같은 대중을 이끌고 우문(禹門)의 천성사(千聖寺)로 가서 사흘을 머물렀다. 이때 그 고을의 태수인 양연(楊衍)이 조사에게 물었다. “서천의 다섯 나라에서는 스승의 법을 이어받고는 조사(祖師)라 한다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부처님의 심법을 밝히매 한 치 어긋남이 없고, 해(解 : 교리)와 행(行 : 실천수행)이 서로 상응(相應)하는 자를 조사라 합니다”

다시 물었다. “그 한 종류뿐인가요, 또 다른 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조사가 대답했다. “반드시 타심통에 밝고, 고금을 통달하고, 유무(有無)를 싫어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도 않아서 어리석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으며, 미혹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나니, 이렇게 아는 이를 또한 조사라 합니다”

楊衍又問曰 弟子久在惡業 不近知識 勤生恭敬 被小智慧而生纏縛 卻成愚惑 不得悟道而致於此 伏願師指示大道 通達佛心 修行用心 何名法祖

양연이 다시 말했다. “제자는 오랫동안 악업(惡業)에 끄달려서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공경히 섬기지 못하고, 조그마한 지혜에 사로잡혀 꼼짝달싹 못하여, 어리석고 미혹된 채로 도를 깨닫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라옵건대 스승께서는 대도(大道)를 지시해 주십시오.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고 수행하고 마음 쓰는 이를 어째서 법(法)의 조사라 합니까?”

師以偈答曰 亦不睹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愚而近賢 亦不拋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조사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악(惡)을 보아도 미운 생각이 없고, 선(善)을 보아도 부지런히 닦지 않는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어진 이를 따르지 않고 미혹을 등지고 깨달음을 향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도를 깨달음에 한량없고, 부처의 마음을 통달하여 법도를 넘어섰네. 범부도 성인도 뒤따르지 않고 초연한 이를 일러 조사라 한다.

[참고 ❸] 『전등록(傳燈錄) 1』 제3권.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78~179.
有期城太守揚衒之早慕佛乘 問師曰 西天五印 師承爲祖 其道如何 師曰 明佛心宗 行解相應 名之曰祖 又問 此外如何 師曰 須明他心知其今古 不厭有無於法無取 不賢不愚 無迷無悟 若能是解 故稱爲祖

며칠 후에 그 고을 태수 양현지(揚衒之)가 일찍부터 불법을 사모했다고 하면서 대사에게 물었다. “서역의 천축에서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으면 조사(祖師)라고 한다는데, 그 도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불심(佛心)의 종지(宗旨)를 밝혀서 행(行)과 해(解)가 서로 응하는 것을 조사라고 하오”

“그밖에는 어떠합니까?”
“모름지기 다른 이의 마음을 밝히고, 그 고금(今古)을 알고, 있음과 없음을 싫어하지 않고, 법을 취함이 없으며, 현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고, 미혹도 깨달음도 없나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조사라고 칭하오”

又曰 弟子歸心三寶亦有年矣 而智慧昏蒙尙迷眞理 適聽師言罔知收措 願師慈悲開示宗旨

“제자가 삼보(三寶)에 귀의한 지도 몇 해가 되건만, 지혜가 혼몽(昏蒙)하여 오히려 진리를 미혹하고 있었는데,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종지를 열어 보여 주소서”

師知懇到 卽說偈曰 亦不覩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智而近愚 亦不拋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대사는 그의 정성이 간절함을 알고 즉시 게송을 말했다.
악을 보고서도 싫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선을 보고서도 부지런히 하려고 하지 않으며, 지혜를 버리고서 어리석음에 다가가지도 않고,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도 않네.
대도(大道)를 통달함이여, 한량을 초월하고, 부처의 마음을 통달함이여, 한도를 넘어서네. 범부에도 성인에도 똑같이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것을 이름하여 조사라 하네.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회초리 책) : ①좌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사람을 깨우치는데[警] 사용하는 막대기[策]. ②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 깨우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참선법(參禪法).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 참선법(參禪法).

 

(6-1)내가나를깨닫는공부(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2분26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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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2분26초)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53분35초~55분59초)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법훈(法訓)」 (개정 증보판. 2024년 11월 30일 발행 | 불광출판사) p299~314.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妄我)는 진아(眞我)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六畜)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 앞길)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生死)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 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業)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나를 찾는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이 탄생 시에 산석(產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부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 한 정력(精力)이라도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 · 업신(業身) ·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生死) 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의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全宇宙)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 - 참선법>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 참선)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禪房)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惡),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때는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 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일(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 끊어짐)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51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甕]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바탕]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 육도(六道)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이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43)즉해서(434:91년2월:9분10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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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〇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 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 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0)거각1(세등09:197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4분21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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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 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0)거각2(106-1+2:1979년 7월 관음재일:6분28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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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6분28초)
〇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〇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0)거각3(364:1988년 8월 첫째일요법회:5분2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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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❸] 송담스님(No.364)—19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5분2초)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를 생각을 해,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하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하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 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 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하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생각을 좀 할려고 해도 안 되는 거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18분19초~23분18초)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염념(念念 생각·잠깐·극히 짧은 시간 념(염)) ; [산스크리트어] pratikșaņa, praticitta-kșaņa. 찰나찰나. 찰나마다. 한 찰나 한 찰나. 생각생각. 극히 짧은 순간들을 말함.
‘염(念)’은 본래 ‘찰나(刹那)’의 뜻이며, ‘염념(念念)’은 짧은 시간에도 늘 잊지 아니하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범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한 생각 단속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심입명(安心立命) ;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도 한다.
*안신입명(安身立命) ; 몸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세우다.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하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 생사를 벗어나 심신(心身)이 편안해졌음을 표현한 말이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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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柱杖子 기둥·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이 갖는 긴 지팡이. 설법(說法)할 때나, 외출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주장자(拄杖子)와 같음.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부처님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 · 능유(能儒)라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hā-loka-dhātu.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현실세계. 사바(산스크리트어 sahā)란 사하(沙訶) · 사가(娑呵) · 삭하(索訶)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이 세계의 중생들은 십악(十惡)에 안주하면서도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번뇌, 고뇌를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뜻에서 인(忍) · 감인(堪忍) · 능인(能忍) · 인토(忍土) 등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는 한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영토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삼계화택(三界火宅) ; 화택(火宅). 세상의 쾌락에만 깊이 집착해 지혜롭지 못하여, 온갖 번뇌 · 생로병사 · 우환의 고통을 받는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세상[三界]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온갖 번뇌와 고통, 생로병사의 사나운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무서운 세계.
[참고] 『법화경』 제2권 '제3 비유품(譬喩品)'에서.
一切衆生 皆是吾子 深著世樂 無有慧心 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 常有生老 病死憂患 如是等火 熾然不息

모든 중생이 다 나[如來]의 자식이건만 그들은 세상의 쾌락에 깊이 빠져 지혜롭지 못하며, 삼계(三界)는 편치 않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아 온갖 고통이 가득차 심히 두려우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우환의 그러한 불길이 사납게 타올라 꺼지지 않고 있다.
*윤회(輪廻 바퀴 윤(륜)/돌 회) ; ①수레바퀴[輪]가 끊임없이 구르는[廻]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전지(田地 밭·경작지 전/땅·논밭 지) ; 논과 밭. 전하여 고향, 마음밭 등의 뜻으로 쓴다.
*‘생사(生死) 없는 법’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홍인대사(弘忍大師) ; 오조(五祖) 홍인(弘忍).
*오조(五祖) 홍인(弘忍)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분단(分段) ; [산스크리트어] pariccheda, kavadī-kāra. ①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 또는 그렇게 나눈 부분을 일컫는 말. ②내용에 따라 문단을 몇 단락으로 나눔. 또는 그 단락. ③분단생사(分段生死)의 줄임 말. 분단생사란 육도(六道) 윤회하는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받게 되는 목숨의 길고 짧음의 분한(分限)과 신체의 크고 작음, 가늘고 굵음의 형단(形段)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분단생사라 한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한바탕하다 ; ①어떠한 일을 크게 한번 벌이다. ②크게 한번 싸우다.
*정밤중(正밤中) ; 힌밤중(한밤中 : 깊은 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부처님,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이즉돈오(理卽頓悟) 사비돈제(事非頓除) ; ‘이치는 몰록 깼다마는 사(事)는 몰록 제(除)할 수 없다’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
〇夫入道多門 以要言之 不出頓悟 漸修兩門耳 雖曰 頓悟頓修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于今生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 後修之機也

대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그 문이 많지마는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최상의 근기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生) 동안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한꺼번에 모두 마치는 것이니 실로 말하면 이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인 것이다.

則而此頓漸兩門 是千聖軌轍也 則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所言神通變化 依悟而修 漸熏所現 非謂悟時 卽發現也 如經云 理卽頓悟 乘悟倂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두 성인의 길로서,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에 의하여 증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서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에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이치인즉 돈오이어서 깨달음과 아울러 모든 의심이 없어지거니와 일[事]은 곧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인하여 다한다’고 하셨다.

故 圭峯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 借陽氣以鎔消 悟凡夫而卽佛 資法力以熏修 氷消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應現通光之用 是知事上神通變化 非一日之能成 乃漸熏而發現也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붙은 못이 순전히 물[水]인 줄은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바로 부처인 줄은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빌려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잘 흘러야 물을 대고 씻는 공덕을 나타내고, 망념이 다하여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야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하셨다. 이로써 실제에 있어서 신통 변화는 하루아침에 능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익힘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〇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사상(事象 일 사/모양 상) ;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事物)과 현상(現象).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수연득묘(隨緣得妙) ; 수류득묘(隨流得妙).
*수류득묘(隨流得妙) ; '흐름[流]을 따르면서[隨] 미묘한 도[妙]를 터득한다[得]'는 말. 변화의 흐름에 맡겨두고 그대로 따르지만 언제나 근본 이치에 들어맞음. 모든 경계와 인연에 따르되 집착함이 없고 자유자재함.
*묘(妙) ; 묘법(妙法).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참고 ❶] 『진심직설(眞心直說)』 「진심묘용(眞心妙用)」 (보조지눌)
眞心妙體 本來不動 安靜眞常 眞常體上妙用現前 不妨隨流得妙 故祖師頌云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참마음의 미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하다.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미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미묘함을 얻음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摩拏羅)가 게송으로 읊었다.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그윽하다. 흐름에 따라 성품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참고 ❷] 『몽산법어(蒙山法語)』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용화선원刊) p140. (가로판 p135~136)
時至出山하야  駕無底船하야  隨流得妙하야 廣度人天하야  俱登覺岸하야  同證金仙이니라

시절이 이르거든 산에서 나와 밑 없는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묘를 얻어,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하야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 함께 부처를 증득할지니라.

 

(22)수류득묘(전강선사252:고담화상법어4:72.06.05:몽산법어부록7-2:3분3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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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❸] 전강선사(No.252) - 고담화상 법어 4 (72.06.05)[몽산법어 부록 07-2](3분3초)
시지출산(時至出山)해라. 그렇게 되거들랑 그때 가서는 때가 되었으니,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했으니 출세(出世)해서, 세상에 나와서 중생(衆生)을 교화해라. 너만 그렇게, 그렇게 깨달라서 생사 하나 없은께 네 마음대로 너만 생사안락, 생사 없는 낙(樂)만 받고 있을 테냐? 시지출산(時至出山)해라. 때가 되거들란 어서 속히 나오니라.

가무저선(駕無底船)해라. 밑구녁 없는 배를 타라. 밑구녁이 없는 배, 그 밑구녁 없는 배를 어떻게 탈 것인고?
밑구녁 없는 배다. 그 무슨 놈의 뭐 밑구녁 없는 배가 걸릴 것 뭐 있나?

수류득묘(隨流得妙)해라. 그 모도 유(流)를 따라서 묘(妙)를 얻어라. 그 인연 따라서 모도 묘(妙)를 얻어서 한량없는 방편(方便)을 모두 가설해서, 모두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저 중생 봐라. 저 중생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게 꽉 매(昧)해 가지고는 다시 저를 찾을 줄 모르고, 그저 점점 무량 천만 겁 중에 오면서 여태까장 퍼지어온 죄업 위에다가 날마다 더 짓고, 때마다 더 짓고, 자꾸자꾸 짓기만 하니, 어쩔 것이냐? 내비둬 버리면 어쩔 것이냐, 그거?

광도인천(廣度人天)해라. 그래서 널리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해라.
그 인천이 누구냐? 모두 타인이 아니여.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여.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고 키워 주든 다생부모(多生父母)요, 과거 부모요. 여태까장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한 가운데 서로서로 그렇게 인연이 걸려 있어. 부모여.
어디 금생 부모만 부모냐? 전생 부모는 부모 아닌가? 아! 금생 부모는 좀 더허고, 전생 부모는 덜헌가? 전부가 다 그 부모 아니냐!

허니 구등각안(俱登覺岸)케 해라. 한 가지 각안(覺岸)에 오르게 맨들어라. 한 가지 모두 생사 없는 해탈 각안에 모두 올라가게 이렇게 원력(願力)을 세워라.
그래서 동증금선(同證金仙)해라. 영원히 금선, 우리 부처님이 금선(金仙)인데, 한 가지 금선을 증(證)해라. 꼭 부처님이 되게 이렇게 해라.(27분37초~31분2초)

*보(洑 보 보) ;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의 하나.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이다.
*개 ; 강이나 하천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정전강(鄭田岡) ; 전강선사(田岡禪師). 영신(永信)은 법명.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대본산(大本山) ; 대본사(大本寺 총본사 아래에 있거나 독립적으로 같은 종지宗旨의 작은 말사를 통할하는 큰 절).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하꼬방 ; 판잣집(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 箱房. 箱(상자)의 일본어 훈독 ‘ばこ(하꼬)’+방(房)이 결합된 말.
*법좌(法座 부처님의 가르침 법/자리 좌) ; [산스크리트어] dharma-āsana, [팔리어] dhamma-sabhā. 설법하는 자리.  설법할 때 사용하는 높은 상좌(上座).  고좌(高座) · 수미좌(須彌座) · 법상(法床)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람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덕이 있어 마치 동물의 왕인 사자의 지위에 비유하여 사자좌(獅子座) 또는 예좌(猊座)라고도 한다.
*상좌(上座) ; ①가장 높은 사람이 앉도록 정면에 설치한 자리[高座]. ②절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사무를 맡아보는 주지(住持)나, 수행이 깊고 덕이 높은 원로(元老), 선사(禪師), 강사(講師)가 앉는 자리.
*법상(法床 부처님의 가르침 법/평상 상) ; [산스크리트어] dharma-āsana, dharmāsana. 법을 설하는 자리. 부처님의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床). 사자좌(獅子座) 또는 법좌(法座)라고도 한다.
*사자좌(獅子座 사자 사/아들 자/자리 좌) ; [산스크리트어] simhāsana, [팔리어] sīhāsana. 부처님이 앉으시는 자리 즉, 상좌(牀座)를 사자좌라 한다. 부처님은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로,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여 부처님의 좌석은 무엇이 되었거나 모두 사자좌라 한다. 후세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의 대좌(臺座)와 설법할 때 앉는 자리[法座]나 장로대덕(長老大德)의 좌석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사자상(師子床) · 사자좌(師子座) · 예좌(猊座) 등이라고도 한다.
*상좌(牀座 평상平牀·平床 상/자리 좌) ; 평상자리. 침상자리. 상좌(床座)라고도 쓴다.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정영신(鄭永信) ; 전강선사(田岡禪師). 영신(永信)은 법명. 전강(田岡)은 법호(法號).
*차사(此事) ; 이[此] 일[事]. 본분사(本分事). 본래자기를 깨닫는 일.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事].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本來)의 모습[身分]으로 되돌아가는 일[事].
납승(衲僧 참선 수행승)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일이므로 납승본분사(衲僧本分事) 또는 납승분상사(衲僧分上事) 등이라고도 한다. 일대사(一大事)와 같은 말.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참례(參禮) ; 예식, 제사, 전쟁 따위에 참가하여 관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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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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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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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용화선원2026. 8. 16. 15:14

•§•(275)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 / 화엄경,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삼라만상 전부 / 화엄경을 교향악으로 비유하면 비로자나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 낱낱 여러분 가운데 바로 그 비로자나불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 신심 / 조실스님 계실 때 조끔이라도 더 철저히 공부를 합시다.


(게송)주중야문적~ /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 / 직지사에서 조실스님의 첫 설법.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 만공선사의 인가, 전법게 / 포구발심(怖懼發心).

**전강선사(No.275)—1972(임자)년 동안거 결제(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72.10.15)(전275)(용화선원)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1) 약 21분.

275-1(전강선사+송담스님:약21분).mp3
9.60MB



(2) 약 22분.

275-2(전강선사+송담스님:약22분).mp3
9.89MB



(1)------------------

이 묵언(默言) 스님이 인자 호(號)가 송담(松潭)인데, 송담 스님을 10년 전부터 “네가 법상에를 올라다니면서 여러분들 설법 좀 해 주고 교화해라. 법(法)을 알아 가지고 포교를 중생을 교화(敎化) 안 허면은 그 법을 애끼는 것도 그것이 돈 간탐(慳貪)과 부귀 간탐보다도 더헌 것이다. 법을 가지고, 좋은 법을 가지고 여러분 설법을 해 드려서 아! 도(道)를 깨게 맨들아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허게 해야지, 일체중생이 같이 생사 없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증(證)해야지, 나 혼자만 해 가지고, 안 해 쓰겄느냐?”

오늘은 내가 송담한테 다가서 “내가 인가(印可)해서 법위(法位)를 전해주니 그리 알라”고.
아! 내가 게송(偈頌—傳法偈)까장 잘 지어서 그래줬더니 죽어도 마다하고, “이름은 그대로 가지겄습니다마는 저는 교화 못 허겄습니다”
“왜 못 허겄느냐?”
“언변(言辯)도 없고 또 당최 헐 마음도 없고 못 허겄습니다”
“그러면 고인(古人)도 대도(大道)를 통해 가지고도 보림(保任)을 헐라면은 포교고 뭣이고 그만 저 무인절도(無人絶島)에 들어가서 보림허는 법이 있으니 보림을 잘해라. 그러면 네 대로 가거라”

10년을 내 밑에 있다가—10년을 묵언허고 10년만에 너는 바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바로 깨달라 나한테 대답을 했으니, 그래 내가 그것 하나 대답한다고 되아?
이 공안 저 공안, 공안(公案)을 모두 탁마(琢磨)를 해본 즉 아! 주욱 꿴다 그 말이여. 허! 세상에 기특헌 일이다.

나는 어찌 이렇게 내가 그 인가(印可)하는 무슨 그런 자격이 있으리요마는 그것은 한국의 과거에 6대 도인이 있었으니, 6대 선지식이 있었으니 6대 선지식의 인가가 내게 없으면 내가 어떻게 인가를 해 주리요.
허지마는 과거에 6대 선지식이 인가헌 것은 조르르르 내 설법에도 다 나와 있지마는 구참선객(久參禪客)은 다 알고 있으며, 그러고 틀림없이 다 듣고 아는 이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는데, 아무리 해야 안되아. 인자는 나이 80이니 곧 오늘내일이여. 오늘내일이니깐, 내가 하도 권허니깐 오늘은 설법헐라고—저를 설법허라고 허니께 겨우 아무 말도 안해. “예. 허겄습니다” 허고 나를 가만히 봐.
그만, 설법허라고 허니까 그만 얼굴이 이만해 가지고 미안헌 생각만 잔뜩 가지고 있어. 말도 않고. “그래도 헐 수 없어” 했더니 인자 올라가서 설법을 헐 것입니다.

헌디 ‘나보다 설법을 더 잘 헌다’ 그건 믿지 말라 그 말씀이여. 나는 50년 동안 설법했어. 아직 50년은 다 못 되었소마는 아! 인자 처음 설법헌 사람이 무슨 설법을 헐 것이여?
아 그렇게 확철대오한 보월 스님은 법상에 올라와서 설법허라고 하니까, 젠장 설법을 거꾸로 헌단 말이여. 설법 거꾸로 허는데 안 봤어? 다 설법허고 마지막 내려오면서 하는, 꺼꾸로 그 꽁댕이를 하면서 그나마 설법도 ‘웬굉~’ 운단 말이여. 울어. 설법하면서 울어버렸어.

대중이 그만 그 많은 대중이 ‘아, 그 보월 스님, 대도를 깨달은 스님이 설법을 허니 얼마나 장하랴’ 야단치고 듣는데,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라’ 이 노래를 못 하고는.

만공 스님 항상 하는 소리 들었거든.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라 허고 내려오면 그 소리가 구수허게 좋으니까 자기도 올라가면 그렇게 헐 줄 알고, (몸집은) 이만헌 이가 목은 찌끄만하게 (가는 목소리로) ‘아, 이사람아!  아, 그 사람 참 별 사람이네’ 이런다 그 말이여.
헌디 ‘웬굉~벱계~제중생~~’ 아! 그러고 운다 그 말이여. 세상에 그렇게 우는 걸 보고 안 웃는 이가 없네. 다 웃네. 그중 앞에는 조카상좌라고 이만 허니 또 그렇게 뚱뚱헌 사람이 있는데, 고것 쳐다보고는 ‘아이고! 죽겄다’고 웃는다 그 말이여. 웃음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 뭔 법문을 잘 헐 것이요? 허지마는 인자 불가불 이 절 원장(院長)이요, 이 절 조실(祖室)이요, 이 절을 어떻게 헐 거여? 아무리 허기 싫어도, 나 혼자만 깨닫고 나 혼자만 생사해탈하고 말 것이여?
대전이 아무리 좋고 대전에다 큰 절 하나 지어놓고—참 나 가본게 터가 참 우리 절터보다 좋단 말이여. 허지마는 여그는 아주 내 본사(本寺)고, 여그는 아주 조실이고, 거그도 부속 선원으로 댕기면서 인자 봐주고 이렇게 되았습니다.

그러신 줄 아시고 오늘 설법상(說法床)에 올라가서 보월 스님처럼 또 그렇게 울런지, 히히 헐란지 알 수 없소마는 ‘잘 허리라’ 생각은 말란 말이여. 그저 인자 한번 올라가면 차츰차츰 인자 설법이 설통(說通)이 나와. 그렇게 알고 잘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잠깐 허고 내려오면 또 내가 또 올라가서 설법을 헐테니 또 잘 들으십시오.

“올라와. 어서 와. 헐 수 없어”


< 송담스님 법문 >

부처님 49년 설(說)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방등경 8년, 그리고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21년 동안을 반야경을 설하시고,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마지막에 법화경을 8년 동안을 설허셔서 그걸 합하면은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그 49년 동안에 왜 아함경 12년부터서 말을 하고, 맨 처음에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신 『화엄경(華嚴經)』은 그 49년 동안에 빼놓고 얘기를 허게 됩니다.
그것은 아함경 설하시기 전에 21일 동안에 걸쳐서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49년 속에 계산을 넣지 않고 얘기를 허게 됩니다.

그러면은 이 화엄경은 그 화엄세계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교주(敎主)로 계시는데 그 비로자나불은 입을 열지 않고, 한마디도 비로자나불의 법문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보살들이 각기 자기가 느끼고 깨달고 보는 바를 그렇게 각기 많은 보살들이 번갈라가면서 설해 놓은 것이 모아 놓은 것이 그게 화엄경이예요.
결국은 그 보살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네들 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로자나불의 뒷받침에 의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자나불의 법문을 많은 보살들의 입을 통해서 설해졌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많은 화엄경을 하나의 큰 교향악(交響樂)으로 비유해서 본다면은 그 많은 위대한 대교향악의 총지휘자는 바로 비로자나불이고, 그 대관혁악의 악단은 그 화엄경에 나타난 많은 불보살들이 전부 그 교향악단의 악사(樂士)라고 말할 수가 있고, 아울러서 그 화엄경이 우리가 보는 그 책으로 된 그것만이 화엄경이 아니라,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위대한 화엄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정(有情) · 무정(無情)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낱낱이 우리도 그 대관현악(大管絃樂)의 한 단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가는 것, 그 가운데에 자기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눈 한번 깜짝이고 손 한번 움직이고 발 한번 움직이고 웃고 울고 헌 그것들이 그 대관현악의 악단으로서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그 악단을 지휘하는 비로자나불 바로 그분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이십니다. 그러면은 이렇게 말허면은 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떠헌 상호(相好)를 가지고 또 계신 걸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비로자나불은 지금 산승(山僧)이 말허는 말을 듣고 계신 낱낱 여러분 가운데 바로 그 비로자나불이 계신 겁니다.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배고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아는 그 속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계신 것을 그것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과 쌀과 모다 그 떡과 그런 것을 많이 차려 놓고 절만 많이 허고 그런다고 그것이 신심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 낼 줄 알고 진심 낼 줄 아는 그 우리의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善知識)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계발(啓發)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헌다면 나도 성불(成佛)헐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외도(外道)들이 말한 바와 같이 우상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기어이 났으니 어떻게 살다가 가야 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머지않아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나 한번은 또 가게 됩니다. 갈 때에 어떻게 가야 허느냐?’ 이러헌 중대 문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헌 중대한 문제를 우리는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이러헌 삼독심(三毒心)으로 말미암아 그런 데에 눈을 팔다 결국은 그런 중대사를 망각하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에 하룻날 숨 한번 내쉬었던 숨을 들어마시지 못하면은 우리는 이 받기 어려운 몸을 버리고 또 어느 곳을 헤매게 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뚱이를 받았고, 사람 몸을 받어 가지고서도 그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들어오기 어려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들어왔습니다.
불법 문중에 들어와서도 그 많은 절이 있고 많은 스님네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정법(正法)을 전해 이어받으신 (전강) 조실 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참불법'을 듣고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이 한결같이 다행한 일이요, 희유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들어오기 어려운 정법 문중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형식에 얽매여서 ‘결제니까 절에 가야겠다, 7일 날이니까 절에 가야겠다, 또는 관음재니까 절에 가야겄다’ 이것이 하나의 의식화 되아서 그 의식화된 가운데에 절에 왔다갔다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큰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아! 내가 쫌 열심히 화두(話頭)를 듣고 공부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불꽃같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벌써 집에 돌아가서 아들 손자 며느리 만나서 살림 걱정하는 소리 듣고 어쩌고 허다 보면은 금방 절에서 그 불꽃같이 일어난 신심은 간 곳 없고 다시 사회의 그 오욕락(五欲樂)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아버립니다.

비단 보살님들 뿐만 아니라 출가한 스님네도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권속을 다 여의고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철저히 수행할 것을 명심하고 각오한 지가 한두 번이 아니지마는, 또 하룻밤 자고 이틀밤 자고 사흘 나흘 엿새 가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그 굳었던 결심이 스르르 녹아지고 그래 가지고 또 다시 또 자기를 참회(懺悔)하고 반성하고 해서 또 결심을 해 가지고 또 정진을 애쓰고.
이렇게 애는 쓰고 있지마는 10년 20년 30년 이렇게 절에서 정진을 한답시고 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못한 것은 그 결심이, 한 생각이 만년을 가지 못하고 또 풀어졌다 또 세웠다 이러기 때문에—물에 잠긴 돌이, 물이 채이면은 물속에 쟁기고, 물이 빠지면 또 돌 꼭대기가 물위로 솟았다, 또 물이 채이면 또 가라앉았다, 밤낮 이래가지고 끝장을 조매 보지 못하고 한 세상을 또 마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마치 비로자나불이 한 대관현악에 지휘자가 되셔서 그 지휘자의 지휘봉에 의해서 많은 악사들이 느리게 또는 빨리, 뭣헌 데는 격하게 또 뭣헌 데는 조용허게 이렇게 해서 그 무량수의 그 악사들이 한 분의 지휘봉에 의해서 관혁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이 중생 교화하는 데 있어서도 그 부처님이 하나의 위대한 그 각본을 저술한 작가이시요 또 지휘자이시고 또 감독이시고 연출이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실 스님이 이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 교화하신 것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은 청정법신 비로자불의 지휘 · 감독 · 연출에 의해서 일생을 스스로 닦아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하시고 나아가서 80 고령에 이르시도록 설법을 해서 많은 제자를 교화하신 것도 하나의 연극, 그 대관현악의 한 부분이라고 말헐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올라온 것은 멀리는 비로자나불의, 가깝게는 (전강) 조실 스님의 지휘에 의해서 하나의 배우로서 또는 악사로서, 다시 비근(卑近)허게 말허면 꼭두각시로서 여기에 올라왔다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출가해서 근 30년이 되었습니다마는 본래 근기(根機)가 우둔하고 발심(發心)이 철저허지를 못해서 노상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투철한 공부를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출가할 때의 그 마음가짐으로 조실 스님의 지도하에 정진허고 있는 하나의 수행인에 지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은 ‘조실 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하루 한 시간, 일분일초라도 시간을 애끼고 챙겨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셔서 조실 스님의 철저한 지도 아래 다문 조끔이라도 더 철저히 공부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같이 공부를 하십시다’ 이러한 권고의 말씀을 드릴 이외에는 아무 말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처음~21분2초)





(2)------------------

그리고 조실 스님께서 이 용화사에 주석(駐錫)하신 지가 벌써 10여년 입니다마는, 그동안에 많은 광장설(廣長舌)로써 그 경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헌 최상 법(法)을 여러분의 근기에 맞도록 그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시고 참 훌륭하신 법문(法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 그늘 잔영(殘影)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녹음기에 녹음이 다 되어 있고 그것이 낱낱이 조실 스님의 시자의 노고에 의해서 원고가 결집이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그 원고를 정리허고 교정해서 그것이 하나의 설법집으로 간행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헌 녹음기나 또는 설법집에 의해서 여러분이 공부허는 데에 좋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것보다는 조실 스님 몸이 살아계실 그동안에 여러분께서 공부를 허셔서—여러분이 공부허신 만큼 밖에는 조실 스님이 어떻게 더 이상 지도를 못 허십니다. 자기가 열 근을 들을 만한 힘이 있는 사람에게 열 근의 무게를 주어지고 짐을 줄 수가 있습니다. 열 근 밖에 들 수 없는 사람에게 스무 근 내지 백 근의 그런 무거운 짐을 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를 허느냐에 따라서 조실 스님의 법문도 여러분의 근기에 설해지게 되고 조실 스님의 지도 방법도 여러분의 근기에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실 스님이 가지고 계신 그 능력을 전부 그리고 철저하게 지도를 받을려면 여러분이 그만큼 철저히 정진을 허심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어보면은 청법(聽法) 대중이 모다 구참납자(久參衲子)요, 철저히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정진허는 그런 납자들이 터억 앞에 자리를 잡고 앉어 계시고, 또 신도님들도 철저한 신심 있는 분들이 법당에 꽉 들어차서 위법망구적으로 발심헌 마음으로 들어주실 때에 조실 스님은 30년을 모시고 있어도 듣지 못한 그런 법문을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토하신 것을 저는 종종 보았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아무리 정정허시고 건강하시다 하더라도 사람의 몸은 하나의 기계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기계라고 하는 것은 그 한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설사 조실 스님의 법력과 도력에 의해서 백 년 내지 이백 년을 사실 수 있는 그런 신통력과 법력이 계시다 하드라도, 부처님께서 그런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갖추신 무량삼매를 갖추신 그런 부처님도 79세에 열반(涅槃)을 보이셨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도 언제 어떻게 그 열반을 보이실는지 그것은 우리는 모릅니다. 그날이 반드시 있을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이 돌아오기 전에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께서는 정말 이를 악물고 대분발을 해서 철저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말씀드리고 입을 다물겠습니다.(24분55초)


< 전강선사 법문 >

주중야문적(舟中夜聞笛)하고  하처숙어옹(何處宿漁翁)고
나무~아미타불~
일출무인견(日出無人見)하니  조제화자홍(鳥啼花自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저 참 망망창해(茫茫滄海) 저 섬 중에서 도를 닦는데, ‘이뭣고?’ 참선을 허고 있는데 어디서 젓대소리가 나. 잘 부는 젓대소리가 처억 난다 그 말이여.
그 하처숙어옹(何處宿漁翁)고? 그 어느 곳에서 어옹(漁翁)이 있어서, 고기 잡는 그 어옹이 있어서 이런 젓대를 부는가? 그 젓대가 활연대오(豁然大悟)하는 젓대여. 젓대소리를 듣고 툭 깨 버렸어.

아까 그 송담 스님이 여기 원장(院長) 스님이 또 올라와서 설법할 때, 그 비로자나가 설법을 했는데 입 하나 뗀 법이 없이 설법했는데 보살들이 백만 천만 억만 보살들이 설했자 설할 수가 없어. 만년을 설했자 역사를 넣을 수 없어. 그러니 49년 설법에 보탤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그 말이여. 그러니 본래면목 우리의 본래면목, 그 언제든지 가르켜 줄 스승은 있지마는, 옳은 스승을 만나야만 깨닫지마는, 오(悟)는 자기가 깨닫지 부처가 깨달아 주지 못혀. 그 비로자나 전신체, 생사 없는 몸뚱이.

그러고 화엄경은 그렇게 81권이니—81권 뿐이여? 81권이 화엄경이여?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 화엄경인데, 미진수품(微塵數品) 화엄경이 그것이 내 본래면목, 비로자나 전신체.
그 비로자나 전신체가 내 마음인데 내 본래면목인데, 그 본래면목이 별별 놈의 소리를 다허고, 별별 놈의 못할 소리가 없고, 뭐 말 한마디를 가지고 천만 가지를 맨들수 있고, 이것이 비로자나불이여.
이 비로자나불이 이렇게도 별말 다하지마는 그 근본 자체, 비로자나불 근본면목 속에 들어가서 사견(邪見)도 없고 상견(相見)도 없고 유(有)도 무(無)도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없는데, 무엇으로 뭣을 나투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놔? 못혀. 입 뿐이지, 입으로만 뿐이지, 하덜 못혀.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아까 그 설법이여.

설법을 허되 첫 설법에 올라가서 우세나 하고 보월 스님 울고 내려오데끼 그럴 줄 알았더니 그 대의(大意)가 참 분명허단 말이여. 꼭 그렇지.
그런데 나는 스물세 살 먹어서, 세상에 내가 그때 주전도 없지. 허지마는 한번 올라갈 용기가 있어서 첫 설법을 청하길래 좋아서, 아! 대중이 한 7-80명 대중이 직지사 선원에서 모여서 법문해 달라고 청한다 그 말이여.
그때도 그래도 뭔 좀 소견이 났다고 헐 때인데, 그래도 내가 체면상 못 올라갈 텐데, 그때 다 통쾌한 선지식한테 다 내가 말을 들었기 따문에 한번 올라간 것인데, 올라가서 첫 설법을 허는데 내 첫 설법 좀 들어 보시오.

아주 올라가서 얼마나 허고 싶던지 ‘내가 올라가면 한바탕하리라’고. 아, 올라가 놓으니깐, 법상에 올라가 놓으니깐 떨려. 떨릴 것이 하나도 없는디 속에는 아무 일 없는디, 아따! 그래서 ‘에이 그까짓 것 떨 것도 없다. 모도 그만 모도 개미같이 봐라’ 너무 황송한 미안한 말이지만, 개미떼같이 그냥 속으로 그냥 생각을 해 버렸다 말이여.

내가 그러고는 설법을 허되, 주장자를 들었다고, 날 봐!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입만 열면 그르쳐.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且置)하고 여하시차사(如何是此事)냐?”
일러. 일러! 왜 못 일러? 한번 일러 봐? 어디 우리 또 대중도 남녀가 있나? 남녀상(男女相)이 없는 게 법인데. 내 첫 설법에 헌 거여, 이게.

그때도 물었어. 대중에 물었어.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입만 열면 그르쳐.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아무도 대답이 없어.


〇 만공 스님의 인가, 전법게.

그래서 만공 큰스님한테—만공 큰스님 십답, 한암 스님과 열 가지 문답(問答)이 있는데—‘열 가지 문답 가운데에 다 물어 주십시오’ 문답을 다 물어서 대답 내가 다했다.

(대답)허고 마지막 나올 때 “저는 스님 하직합니다” 스님 밑에 있어 뭣 할 것이여? 나도 스님 법 내가 다 탁마(琢磨)해서 내가 다 가졌는데, 나도 인자 가서 중생 교화해야 할 것 아니여.
“갑니다” 허고 절을 허니까, “어이 가소. 저그 저 별이 있는데 저 하늘에 별이 있는데, 저 별—부처님 깨달은 별은 저 별 새벽별인데, 그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깼지마는 자네는 깨달은 별이 무슨 별인가? 어떤 별에 깨달았는가?”

(내가) 땅을 허부적 허부적.
“선재(善哉) 선재(善哉)로구나” 선재란 건, ‘착할 선(善)’ 자는 ‘착하다’는 말이 아니여. ‘옳다. 옳다’ 그 말이여.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인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헌디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 내가 그렇게 “자네 별은 어떤 별인가?” (만공스님 묻는 말에 내가) 땅을, 왜 땅을 파? 왜?
“선재 선재다. 착하고 착하다”

불조(佛祖)도 미증전(未曾傳)인디, 불조도 일찍이 전(傳)허들 못했는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일세. 나도 또한 얻은 바가 없네.
차일(此日)에 추색모(秋色暮)인데, 오늘날에 추색(秋色)이 저문데, 이 가을날이여. 가을날이 저물었는데,
원소(猿嘯)는 재후봉(在後峰)일세. 원숭이 휘파람은 뒷봉에서 우네.

그러헌 인가(印可)가 어디 있냐 이 말이여.
만공집(滿空集)에도 있어. 만공 큰스님 집(集)에 있는 것도 내가 갖다 내가 고승집에 이리 내놨어. 왜 어찌 거짓말을 허냐 그 말이여. 어떻게 거짓말을 해. 거다가 어떻게 뻘소리를 붙여 놓냐 그 말이여.

인가(印可) 없이 '인가 있다'고, 인가 없이 나와서 조실(祖室) 노릇허고 있어? 차라리 지옥 귀신이 되어 가지고 귀신 노릇하면서 ‘아이고 나 죽겠다’ 소리를 허지, 인가 없이 주뎅이를 벌려 조실 노릇혀? 못허는 법이다 그 말이여.
내가 그러고 나왔으니, 직지사에 올라와서 설법 한번 헐 마음이 나지 않나? 불끈 난다 그 말이여, 속에서는.

아, 그래 올라가서 설법을 헌 것이 ‘입만 열면 그르치니, 그르치고 그르치지 않는 걸’ 물은 게 아니여?
「차사(此事)는 착(錯) 불착(不錯)이니 이 일은 입만 열면 그르치니, 그르치고 그르치지 않는 건 그만두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대답이 없어.

“촛불이 밝다” 병율이야, “촛불이 밝다” 그래.
“이놈아! 촛불 밝은 걸 내가 물었어? 차사(此事)를 물었지”
별 것 다했자 소용 없어. 그래 이른 거 아니여. 이른 것은 바로 일러야 이른 것이지, 그깟은 놈의 소리를 불청허고 소용도 없고.

대번 했기 따문에 등당으로 인자 나와 했기 따문에 만공 큰스님한테 내가 법문을, 『소승이 영신(永信)이가 법상에 올라가 설법을 했는데 큰스님한테 불가불 점검을 받어야 허겠습니다. 설법을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를 들어 대중을 보이고,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니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물었는데, 답이 없어 큰스님께 보내니 답해 줍소사』

그랬더니 만공 큰스님이 답을 해서 보내되, 요만한 종이에다가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그림이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그렸어. 요렇게 그려놨어. 아니 그렇게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이 요렇게 요렇게 꼬부라게, 요렇게 꼬부라게 그려놨어. 이 위에서 꼬부래. 아니 이놈이 꼬부라졌어, 밑으로.
거 무슨 도리일까? 아시겠어? 그 꼬부랑을 그려놨다 그 말이여. 뭐여? 그 무슨 그림이여? 만공 큰스님 답이여, 이게.
알겠어? 견성(見性) 못허면은 헐 수가 없어. 잘 보면, 문제가 다른 문제 아무것도 없고 견성 문제여.

우리 모도 모아서 견성, ‘이뭣고?’ ‘이뭣고?’ 잘해서 같이 생사해탈하자. 너 허고 나는 안 허고는 어떻게 될 것이냐? 지옥 귀신이 되고 말 것이냐?
우리가 지금 지옥 귀신 면한 줄 아시오? 아이고, 생각해 보면 큰일나. 생각을 못허고 이러고 있으니 그렇지, 역사 없는 우리가 과거에 지옥고(地獄苦)를 얼마를 받았어. 

포구발심(怖懼發心)이여. 무서운 발심. 무서워서 죄 안 짓고, 무서워서 도 닦는 것이여. 한번 또 들어가면 언제 나와?
지금 우리가 나왔단 말이여. 요까짓 것 나와서 잠깐 나왔지마는 또 죄를 퍼지어 간다 그 말이여, 틀림없이. 지옥은 안 가고는 못 견뎌.
참선(參禪)이 아니면 못 견뎌. 과연 우리 이렇게 모아 참선 법문 배우라고, 참선 설법 들으라고, 우리 설판재주(說辦齋主)가 터억 나와 가지고 이 설판을 해서 이리 지어 놓으니깐 이렇게 많이 나왔네.(21분3초~42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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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默言) 스님 ; 송담(松潭) 스님의 별명. 10년간 묵언을 하며 수행을 해서 '묵언스님‘, ’묵언수좌'라는 별명이 생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교화(敎化) ; 가르쳐 이끌다. 사람을 일깨워 고통받는 자를 편안히 하고, 의심하는 자를 믿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함. 설교. 교도감화(敎導感化)의 준말.
*간탐하다(慳貪-- 아낄·인색할 간/탐할 탐) ; 몹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범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산스크리트어] nitya-sukha-ātma-śubha.
❶ 대승의 열반(涅槃)과 부처님의 법신(法身) 및 법계(法界) · 진여(眞如) 등이 지닌 네 가지 덕. 열반사덕(涅槃四德) · 법신사덕(法身四德) 등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사덕(四德)이라고도 한다.
영원하여 변하지 않는 것을 상(常), 고통이 없고 안락한 것을 락(樂), 자유자재하여 어떤 구속도 없는 것을 아(我), 번뇌에 의해 물들지 않은 것을 정(淨)이라 한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 제2권. 북량(北涼) 천축삼장(天竺三藏) 담무참(曇無讖) 한역(漢譯)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수명품(壽命品第一之二)
爾時 佛告諸比丘 諦聽 諦聽 汝向所引醉人喩者 但知文字 未達其義 何等爲義 如彼醉人見上日月 實非迴轉 生迴轉想

그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너희가 말한 술 취한 사람의 비유는 글만 알고 이치[義]는 모르는 것이다. 이치는 무엇인가? 그 취한 사람이 해와 달 따위를 볼 때에 돌지 않는 것을 도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衆生亦爾 爲諸煩惱 無明所覆 生顚倒心 我計無我 常計無常 淨計不淨 樂計爲苦 以爲煩惱之所覆故 雖生此想 不達其義 如彼醉人於非轉處而生轉想

중생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煩惱)와 무명(無明)에 가려져서 뒤바뀐 마음[顚倒心]을 낼 때에, 나에 대하여 '내가 없다[無我]' 생각하고, 항상한 것을 무상(無常)하다 생각하고, 깨끗한 것[淨]을 부정(不淨)하다 생각하고, 즐거운 것[樂]을 괴롭다[苦] 생각하는 것이다. 번뇌에 가렸으므로 그러한 생각을 내는 것이니, 그 이치를 요달하지 못하므로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돌지 않는 것을 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我者 卽是佛義 常者 是法身義 樂者 是涅槃義 淨者 是法義 汝等比丘云何而言 有我想者憍慢貢高 流轉生死 汝等若言我亦修習無常 苦 無我等想 是三種修無有實義

나[我]란 것은 곧 부처[佛]라는 뜻이고, 항상하다[常]는 것은 법신(法身)이라는 뜻이고, 즐겁다[樂]는 것은 열반(涅槃)이란 뜻이고, 깨끗하다[淨]는 것은 법(法)이란 뜻이다. 너희 비구들은 어찌하여 나[我]란 생각[想]이 있으면 교만하고 잘난 체하여 생사에 헤맨다고 하느냐? 너희들이 말하기를 '우리도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의 생각들을 닦는다'고 하지만 그 세 가지를 닦는다는 것이 진실한 뜻은 아니다.

我今當說勝三修法 苦者計樂 樂者計苦 是顚倒法 無常計常 常計無常 是顚倒法 無我計我 我計無我 是顚倒法 不淨計淨 淨計不淨 是顚倒法 有如是等四顚倒法 是人不知正修諸法

내가 지금 세 가지 뛰어나게[勝] 닦는 법을 말하겠다. 괴로운 것[苦]에 즐겁다[樂]는 생각을 내고, 즐거운 것[樂]에 괴롭다[苦]는 생각을 내는 것이 뒤바뀐[顚倒] 법이며, 무상한 것에 항상하다는 생각을 내고, 항상한 것에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는 것도 뒤바뀐[顚倒] 법이다. 내가 없는 것[無我]에 나[我]라는 생각을 내고, 나[我]에게 내가 없다[無我]는 생각을 내는 것도 뒤바뀐[顚倒] 법이며, 부정(不淨)한 것에 깨끗하다[淨]는 생각을 내고, 깨끗한 것[淨]에 부정(不淨)하다는 생각을 내는 것도 뒤바뀐[顚倒] 법이다. 이렇게 네 가지 뒤바뀐[顚倒] 법이 있으므로 사람이 법을 옳게 닦을 줄 모르는 것이다.

汝諸比丘於苦法中生於樂想 於無常中生於常想 於無我中生於我想 於不淨中生於淨想

너희 모든 비구들이 괴로운[苦] 법에서 즐겁다[樂]는 생각[想]을 내고, 무상함 속에서 항상하다는 생각을 내고, 내가 없는[無我] 속에서 나[我]라는 생각을 내고, 부정(不淨)함 속에서 깨끗하다[淨]는 생각을 내는 것이다.

世閒亦有常樂我淨 出世亦有常樂我淨 世閒法者 有字無義 出世閒者 有字有義 何以故 世閒之法有四顚倒故 不知義

세간에도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있고, 출세간에도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있지만 세간법은 글자[字]만 있고 뜻[義]이 없는 것이며, 출세간법은 글자도 있고 뜻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법에는 네 가지 뒤바뀜[顚倒]이 있으므로 뜻[義]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所以者何 有想顚倒 心倒 見倒 以三倒故 世閒之人樂中見苦 常見無常 我見無我 淨見不淨 是名顚倒 以顚倒故 世閒知字而不知義

무슨 까닭인가? 생각이[有想] 뒤바뀌고 마음[心]이 뒤바뀌고 소견[見]이 뒤바뀜이 있는 탓이니, 세 가지가 뒤바뀐[顚倒] 까닭에 세간 사람들은 즐거운 데[樂]서 괴로움[苦]을 보고, 항상한 데서 무상을 보고, 나[我]에 대하여 내가 없음[無我]을 보고, 깨끗한 데[淨]서 부정(不淨)함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바뀌었다[顚倒] 이름하고, 뒤바뀐 까닭에 세간 사람은 글자[字]만 알고 이치[義]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何等爲義 無我者名爲生死 我者名爲如來 無常者聲聞 緣覺 常者如來法身 苦者一切外道 樂者卽是涅槃 不淨者卽有爲法 淨者諸佛菩薩所有正法 是名不顚倒 以不倒故 知字知義 若欲遠離四顚倒者 應知如是常樂我淨

무엇을 이치[義]라고 하는가? 내가 없는[無我] 것은 생사윤회하는 중생이며, 나[我]라는 것은 여래(如來)이다.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성문(聲聞) · 연각(緣覺)이며, 항상한 것은 여래의 법신(法身)이다. 괴로운[苦] 것은 모든 외도(外道)들이며, 즐거운[樂] 것은 열반(涅槃)이다. 부정(不淨)한 것은 '함이 있는 법[有爲法]'이며 깨끗한[淨]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가지는 바른 법[正法]이다. 이것은 뒤바뀌지[顚倒] 않은 것이니, 뒤바뀌지 않았으므로 글자도 알고 이치[義]도 안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멀리 여의려거든 마땅히 여래의 '항상하고 · 즐겁고 · 나이고 · 깨끗함[常樂我淨]'을 알아야 한다"

❷ 범부가 자신과 세계의 참된 모습이 본래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 · 부정(不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일으키는 네 가지 잘못된 견해.
인간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常), 인생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락(樂), 자아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我),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淨)이라고 한다.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 · 부정(不淨)인 것에 대해 그와 전혀 반대되는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이라는 견해를 일으켜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도(四顚倒)라고 한다.

이러한 사전도(四顚倒)를 대치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몸의 부정(不淨)함을 관찰하고, 감수작용(受)의 고통스러움을 관찰하며, 마음[心]의 무상(無常)함을 관찰하고, 법(法)의 무아(無我)를 관찰하는 사념처(四念處, 四念住)가 제시된다.

*증(證) ; [산스크리트어] adhigama. 또는 adhisajbodha.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을 말한다. 증오(證悟) 또는 증득(證得).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를 증과(證果)라고 하며, 최종의 증과는 성불(成佛: 부처가 됨)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10권. (慧遠法師 撰) 同相三道義兩門分別(釋名一 辨體二)
證是知得契會之義 心冥實性亡於分別契會平等 名之爲證

증(證)은 지득계회(知得契會) 즉 앎 · 증득 · 계합 · 깨침을 뜻하는데, 마음이 실성(實性)에 그윽히 잠겨서[冥] 분별을 잊고 실성(實性)에 계합하고 실성(實性)을 깨쳐서 실성(實性)과 평등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전강선사가 송담스님에게 내리신 전법게(傳法偈).
<1> 전강선사(No.51) 현량매구, 선가귀감, 송담스님께 법좌 물려주심(신해71.02.18)
非法非非法(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2> 송담스님(No.130) 1980(경신)년 동안거 결제 및 법보전 낙성식(80.10.15.음)
非法無非法(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차일추색다) 이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나는구나.

--- 위의 두 게송은 몇 글자가 다르나, 송담스님께서 뜻은 같다고 하셨습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7~139. (가로판 p133~135)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하얀  早訪高玄하야  機味를  完轉하야  無正無偏하야  明師가  許爾어든  再入林巒하야  茅庵土洞에 苦樂을  隨緣하야  無爲蕩蕩하야  性若白蓮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무인절도(無人絶島) ; 사람이 살지 않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8)마조원상공안(282:2분19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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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No.282) - 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19초)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黃花翠竹) 앵음연어(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구참선객(久參禪客)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구참(久參 오랠 구/참구할·참여할 참)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것. 오랫동안 선(禪)을 닦은 것.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에 귀의한지 오래 되는 것. 초학(初學)의 상대어.
*보월 선사(寶月禪師) ; 보월성인(寶月性印 1884-1924). 만공 선사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다.
*수법제자(受法弟子) ; 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인가(印可) 받은 제자.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 ‘원하옵건대 법계의 모든 중생이 같이, 저희 모두 다 동시에 성불하여지이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본사(本寺) ; 본산(本山). ①처음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 절. ②그 종파에 딸린 여러 절을 총괄하는 한 종(宗)의 근본 도량(절).
*설법상(說法床) ;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설통(說通) ; 대중 앞에서 막힘이 없이 유창하고 당당하게 설법을 잘함.
*부처님 49년 설(說)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방등경 8년, 그리고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21년 동안을 반야경을 설하시고,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마지막에 법화경을 8년 동안을 설허셔서 그걸 합하면은 49년이 됩니다 ; 수(隋)나라 때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스님이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을 설한 순서에 따라 분류[五時]한 것. 천태종의 교판(敎判, 교상판석敎相判釋).
①화엄시(華嚴時) :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직후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시고(화엄최초삼칠일 華嚴最初三七日),
②녹원시(鹿苑時), ③방등시(方等時) : 12년간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8년간 유마경등의 대승경전을 설하시고(아함십이방등팔 阿含十二方等八)
④반야시(般若時) : 21년간 여러 반야경을 설하시고(이십일재담반야 二十一載談般若),
⑤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 8년간 법화경을, 입멸 때 1일간 열반경을 설하셨다(종담법화우팔년 終談法華又八年).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참고]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 · 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교주(敎主) ; 어떤 종교나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교향악(交響樂) ; 교향곡, 교향시, 교향 모음곡 등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사천하(四天下) ; 고대인도의 세계관 및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 주위를 일곱 개의 산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둘러싸고 있으며, 일곱 번째 산의 바깥에 있는 큰 바다에 사방으로 네 개의 대륙이 있는데, 이 네 개의 대륙을 사천하라 한다. 사주(四洲) · 사대주(四大洲) · 사대부주(四大部洲) · 수미산주(須彌山洲)라고도 한다.

 

(38)일사천하미진수품-1(일대기8호:3분24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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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8호(경술년 12월 13일)(1971년 1월 9일)(3분24초)
그 참선 공부, 세상에 참선 공부 같이 쉬운 것은 없어.
그렇게 쉽건마는, 낯 씻다가 코 만지기요. 얼굴 씻글 때 코 안 만져지나? 그대로 코 만져지는 것인디. 얼굴 씻글 때 코 만지는 것이여. 허! 그것 참!

천하에 그렇게 쉬웁건마는 어째도 그렇게 모도 안 된다고 야단들이고, 망상 따문에 못 허겄다고 야단이고.  망상 그놈 따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고, 망상 따문에 화두가 그놈이 있는 것이지, 망상 없으면 무슨 화두가 있나? 화두가 없어. 망상 그놈 따문에 화두가 따악 그놈이 인자 있지.

그래서 화두 그놈은 망상을 다루는 놈이여. 망상을 잡드리하는 놈이여. 화두 그놈이 아니면은 망(妄)을 대체 주체할 수가 없어. 일어나는 전체가 망이니까. 깨달지 못했으니 망(妄)이지. 깨달랐으면 전부 그놈이 각(覺)인디.
깨달으면은 망이 없는 것이 아니여, 망(妄) 그놈이 각(覺)이여 그만! 낱낱이 각(覺)이지, 조끔도 뭐 여읠 것도 없고.
망상을 여의고 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 자체가 각이여! 그대로가 각(覺)이여.

수은(水銀)을 한 뭉치 내던졌다. 이놈이 천 쪼가리, 그놈이 조그만한 덩어리가 모도 갈라져서 만 덩어리가 되고 몇만 덩어리가 되아. 쓸어 모으면은 한 덩이여.
망(妄) 역시 그 깨달지 못해 중생 때에는 전부 망(妄)이더니, 깨달라 놓고 보니 그놈이 낱낱이 다 각(覺)이다, 하나도. 그러니깐 미진수(微塵數) 법계(法界)지. 가는 티끌 수 법계라. 화엄경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지! 화엄경 품수(品數)가 일사천하미진수품이여. 화엄이란 화엄도리는 다 각인데, 낱낱이 각이여.(2분2초~5분24초)

 

(38)일사천하미진수품-2(일대기8호:13분50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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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8호(경술년 12월 13일)(1971년 1월 9일)(13분50초)
직지사에서 며칠 쉬고서는, 동래온천이나 가서 온천을 좀 허고—이렇게 피는 올라와서, 여가서 뭉쳐 있으니깐 ‘온천이 좋다’ 하고. 간뎅이 같은 것이 푹푹 올라오면 비린내가 나 쌓고 살 수가 있나. 그래 인자 동래 온천을 내려갔지. 가서, 금정사를 들어갔더니 기인벽이가 그 사람이 유담인데, 유담이 반가와 혀. 아주 반가와험서 오! 참 반가와 혀.
사방서 선지식 스님, 큰스님 찾아다니면서 인가 다 맞고 만공 큰스님한테까장 다 돌아서 왔다는 것 다 알고. 뭐 그러니깐 뭐, 대접헐 건 사실이지 뭐. 오히려 그 조실 큰스님네 오신 것보담도 더 반갑지. 새로 그렇게 인자 참, 학자로써서 아! 그렇게 모도 인가 맞고, 아! 그랬다고 인자 사방 가면 그 대접허는 것이 너무 과했제.

그런디 이번에 금정사에 들어가서는 너무 지나쳤지.
척 들어가니까 유담이 그때 감원(監院)을 허고 있는데, 그 만찬을 해 가지고는 적을 굽고 다시마를 잘 모도 굽고 그래 잘해서, 부꾸미 떡도 부치고 뭐 혀 가지고는 좋은 술을, 참! 좋은 술 일등주를 받아 가지고 와서, “아! 신 수좌(信首座)님, 참 내 뜻대로 내가 한번 이런 걸 차렸으니 잘 잡솨 주십시오. 내 어떻게 했으면 더 잘 좀 대접헐까 싶고, 얼마나 내가 좀더 잘 만족스럽게 헐까 싶고, 정성이 부족합니다. 좀 많이 잡솨 주십시오” 아! 출출헌 판에 참 좋드구만.

뭐, 그때쯤 인자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 무약가요(無藥可療)여! “약으로 낫을 수 없으니 자연치료를 해라” 자연치료를 허라고 떡 허니 의사가 그래 주어.

“그 어떻게 헌 것이 자연치료입니까?”
“뭐든지 그저 먹고 싶은 건 마음대로 먹고, 그저 어디 가서 놀고 싶으면 마음대로 놀고. 내 마음을 활발스럽게 펴놓고, 그저 임산임수(臨山臨水)에 물을 대하나 산을 대하나 어떠헌 그 노는 경계를 대허나 구김살이 없이 활발스럽게 아주 이렇게 놀고 그러면은, 그 마음이 활발발(活潑潑)허면은 병이 나을 수 있으니” 아! 그러고는 ‘약으로는 못 낫우겄다’고 나를 갖다가 턱 퇴병(退病)을 혀.

그래서 그 말을 듣고는, 인자 대체 그렇게 되었어. 공부허다가 나온 놈의 피가 그것이 어디 그쳐져야제. 인자는 하도 나오다 나올 것이 없으니까 목구녁 가슴속에 가서 간뎅이처럼, 묵 어리데끼 어렸어. 그려 가지고 콱 뱉으면은 뎅이 하나씩 나와. 인자 줄줄 흘리든 않고. 그러면은 그만 비린내가 들입대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제.
그래 그만 인자는 뭐, 인자 이렇게 좀 돌아댕기는데, 여그도 갔다 저그 돌아댕기는데 속마음으로는 인자 자연생활을 헐 판이여. 자연치료를 헐 판이여.

인자는 욕을 먹던지 누가 찬성을 허던지 그런 데 얽힐 것 없고, 중옷을 입고 돌아댕김서 막행막식헐 수 없고. 첫째, 고기를 얻어먹어야 허겄으니, 고기도 맘대로 먹고, 술도 맘대로 그저 먹고, 춤출 디 있으면 내 멋대로 춤도 좀 춰 보고 이렇게 활발스럽게 인자 지낼 판인디, 속으로는 딱 작정해 놨지마는 그동안에 선방에 댕기면서 지낸 숙습(熟習)이 있어서, 그렇게 어떻게 당장에 태도를 행동을 고칠 수는 없고. 그래도 인자 어디 가면 대접헌다고, 날 대접헌다고 허면은 받아먹지, 뭐 어쩌?
아직 그때는 안 헐 때인디, 아! 안 헐 때고 잘 그저 옷 입고 그러고 거그를 들어갔는데, 인벽 수좌가—요런 놈 다 넣어야제. 거 넣어서 허제, 별수 있나?—대접헌다고 그래 내놨네.

뭘 빼고 좋은 것만 넣으면 쓸 수가 있나? 그런 것 저런 것 다 넣어야지. 술도 먹었다고 허면은 거, 술 먹은 중이라고 허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계를 파(破)헌 중이라고 하지마는 안 넣을 수가 있나? 넣을 건 넣어 버려야지.

술을 따라 주는데, 안주 좀 먹고 술을 한잔 척 받아서 막 부을라 하니까, 병에 붓떼끼 때려 부을라 하니까—경명 스님이 일대 강사(講師)여! 강사라도 이만저만헌 강사여. 그만 저 안에 선방에 계시다가, 어째 누가 일렀는가 어쨌는가, 이짝 방에서—저짝 방은 선방이고, 내가 선방에 들어가서는 안 먹고 이짝 방에서, 주지실에서 먹는디.

누가 일렀든고 일러, “저 수좌가 와서, 정영신(鄭永信)이가 와서 막 술을 먹는디, 잔뜩 뭐 채려놓고 술 먹는디 거, 스님께서 좀 혼을 내시요” 인자, 수좌가 어째 그랬든가 부여.
그러니 쫓아 나왔어. 와서는 착 들어오더니 “여그가 어디라고 술을 먹어! 에이! 술이 뭐여? 에이!” 아, 이러면서 그만 노장이 입이 그냥 덜덜 떨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들어와.

그것 참! 나보담 나이 많으시고—나이 그 어른은 근 오십 되고, 나는 인자 뭐 스물서너 살 인자 되았는데. 아! 이거 참, 죄송도 허고, 일대 강사고. 아, 그것 참 ‘이놈의 술잔을 내던지고 그냥 나올까, 달아나 버릴까? 그냥 빌어먹을 먹어 버릴까?’ 쳐다 보고는. 그러다가는 ‘에이 이놈의 것’

“내가 기이 든 술잔입니다. 좀 가라앉히시고, 심로(心勞)허시고 들어 보십시오” 술잔 들고.
“화엄경이, 상본(上本) 화엄경이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니” 상본, 중본, 하본, 약본(略本) 그렇거든, 화엄경이.
“화엄경이, 상본 화엄이 일사천하(一四天下)에 미진수품(微塵數品)이라고 했으니, 이 술잔 이건 화엄 몇째 품입니까?” 이거 법, 무서운 법이여. 보살님들 다 알란 말이여. 여 술값 내는 것이여.

“이거, 화엄경 몇째 품입니까? 이거 좀,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고함을 내, 더 크게 질러 버렸어. “화엄 몇째 품입니까?”
아! 일사천하미진수품이니, 뭔 안 든 것 있나? 중생(衆生) 환화(幻化)가 다 들었지. 추어망담(醜語妄談)도 다 들었지.

아! 그러니깐 경봉 스님도 물 대다가, 논에 물 대다가 막 견성했다고 해 가지고 들어와서는 그만, 막 들입대 그만 이러고 앉어서 그만—거그 그 인자 참, 한번 봐 노니까 아마 그러든 것이지. 그만 이래 가지고는.
양산서, 언양서, 여자가 모도 올라왔다 그 말이여. 경봉 스님 견성했다고 헌게 모도 와서 친견을 허고 절을 허니께, 이러고 앉어서 “네, 이년들! 응!” 아! 욕을 냅대 퍼붓고. “이게 화엄 도리지! 이게 화엄경이지!”(21분23초)

욕을 해도 이만저만헌 욕을 해 놨어. 내, 그 욕은 안 혀!
뭐 욕이, 그 욕이 화엄 도리라고 헌 것이여, 그게. 일대 강사인디 또 견성을 해 가지고 보니깐 틀림없거든! 추어망담(醜語妄談)이, 추헌 말과 거짓말이 어디 무슨 하나나 무슨 뭐, 어디 어김이 있나? 십삼천대천세계(十三千大千世界)에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촉촉이 다 딱딱 들어맞는 거여, 법에.

그러나 그 법은 그건 체중현(體中玄) 법밖에는 안 되는 것이여! 조사 공안은 안 되아. 공안이라는 것은 그런 법 없어! 공안이라 하는 것은 그건 안 될 말이고.
그래 그만 들입대 욕을 막 드리 퍼붓고는 “이게 화엄경이야, 화엄경이여!” 아! 이러고 있었어. 그러니 뭐, 무엇이 도무지 무슨 뭐 일사천하미진수품 속에 안 들어갔어?

“이 술은 화엄경 몇째 품이냐?” 고함을 지르며 “몇째 품입니까?” 묻는디, 입이 딱 붙어 버렸네, 입이. 응! 아, 그렇게 고함을 질러 “술을 먹느냐?”고 허더니 입이 그냥... 어림도 없네. 내가 참, 기운이 나대! 아, 이런 놈의 것.

그래 가지고 대듬서, 여기를 잡고 막 대듬서 멱살이나 쥐고 “나가라 이놈!” 허면 큰일날 텐디, 그냥 거기 쩔려 가지고. 강사는 강사인디, 화엄경 바로 분명히 있거든! 그런게 뭐 꼭 물을 말이지, 뭐.
‘몇째 품이냐?’고 묻는데, 딸싹 못했네. 허! 그것 참. 아무리 글을 잘해도 글 가지고는 못혀.

그만 암말도 않고 이리 쳐다보고 있는디, 술을 들고는 쭈욱 마셨어. 쭉 들어마시고서는, 안주 턱 한 점 먹고 입을 싹 닦고는,

니우(泥牛)는 입해성룡거(入海成龍去)헌디  파별의전입망라(破鼈依前入網羅)니라
나무~아미타불~

니우(泥牛)는 입해(入海)하야 성룡거(成龍去)헌디,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 용이 되아 갔는데, 파별의전입망라(破鼈依前入網羅)로구나. 다리 뿌러진 자라는 앞을 의지해서 그물에 들어갔구나.
아, 이렇게 점검을 탕! 해 버렸제. 딸싹 혀?

술 잘 먹고, 그 잘 채려 논 놈 배(아주) 그거 잘 먹고, 나 그러고 오래 안 있었구만. 또 그러고 그냥 나오제 뭐 그렇게, 처억 한번 나온 일이 있고.(33분13초~47분2초)

*삼라만상(森羅萬象 수풀·빽빽이 들어선 모양 삼/망라하다·늘어서다 라/많다·매우 많은 만/모양·형상 상) ; 만상삼라(萬象森羅). 천지 사이에 빈틈없이 나열되어 있는 만물. 갖가지 천차만별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삼라(森羅)는 빽빽한 숲의 나무처럼 늘어서 있는 만물의 형상. 만상(萬象)은 온갖 사물의 형상.
*유정(有情) ;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생(生)이 있는 것.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것.
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옛날에는 중생(衆生)이라 번역하고, 현장(玄裝)이후의 새로운 해석에서는 유정(有情)이라 한역함. 정(情)은 마음이라는 뜻. 일체 살아있는 것의 총칭.
*무정(無情) ; 감정이 없는 초목 · 산하 · 대지 등을 말함.
*관현악(管絃樂) ; 여러 가지의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를 조화시킨 큰 규모의 합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 ‘손 한 번 들고 발 한 번 옮긴다’는 뜻으로, 크고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이르는 말.
*청정법신(淸淨法身) ;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상호(相好 형상·얼굴 상/훌륭하다·아름답다 호) ; 부처님의 몸에 있는 뛰어난 형상. 상(相)은 큰 특징으로, 분명하게 드러나 보기 쉬운 것을 서른두 가지로 나누어 32상(相) 또는 32대인상(大人相)이라 하며, 호(好)는 작은 특징으로, 미세하여  보기 어려운 것을 여든 가지로 나누어 80종호(種好) 또는 80수형호(隨形好)라고 한다. 이 둘을 합쳐 상호라고 한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선지식(善知識) ; [산스크리트어] kalyāņa-mitra. [팔리어] kalyāņa-mitta.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가라밀(迦羅蜜) • 가리야낭밀달라(迦里也曩蜜怛羅)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 • 시우(時友) 등이라고도 한역한다. 반대로 악도(惡道)로써 이끄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이라고 한다.
*계발하다(啓發-- 열다·열리다·일깨우다 계/(꽃이)피다·일어나다·나타나다·밝히다·계발하다 발) ; ①일깨우고[啓] 밝혀주다[發]. ②(사람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정신을) 깨우쳐 열리게 하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하룻날 숨 한번 내쉬었던 숨을 들어마시지 못하면은’ ;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다행히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뚱이를 받았고’ ; 인신난득(人身難得).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❷]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 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한 생각이 만년을’ ; 일념만년(一念萬年).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조매 ; ‘좀처럼’의 사투리.
*견성오도(見性悟道) : ‘본성(本性)을 보아[見] 진리[道]를 깨친다[悟]’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 견성오도라 한다.
*비근하다(卑近-- 낮다·가깝다·알기 쉽다 비/가깝다 근) ; 우리 주위에서 흔하고[卑] 가깝다[近].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 중근기 ·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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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駐錫 머무를 주/석장 석) ; ①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석장(錫杖)이라 하는데, ‘석장(錫杖)을 머무르게 한다(駐)’는 뜻으로, 스님이 한 곳에 머무름을 일컫는 말. ②스님이 한때 어떤 지역에 포교(布敎)를 하기 위하여 머무는 일.
*광장설(廣長舌 넓을 광/길 장/혀 설) ; 광장설상(廣長舌相). 장광설(長廣舌). ①길고 줄기차게 잘하는 말솜씨. ②부처님의 설법.
*광장설상(廣長舌相) ; [산스크리트어] prabhūtajihvatā, prabhūta-tanu-jihvatā. [팔리어] pahuta-jivha. 32상(相)의 하나. 광장륜상(廣長輪相) · 광장설(廣長舌) · 대설상(大舌相) · 장설상(長舌相) · 설상(舌相) 등이라고도 한다. 혀가 넓고 길고 유연하며 붉고 엷어서 능히 얼굴을 덮고 머리카락 끝까지 이르는 부처님의 혀를 말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는 진실된 말을 하며 변설(辯舌)이 다함이 없어서 누구도 당할 자가 없음을 나타낸다. 뜻이 변하여 말을 잘하는 것, 아주 오랫동안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苦]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청법(聽法) ; 불보살(佛菩薩)이나 스승이 설법하는 것을 경건하게 경청함.
*구참납자(久參衲子)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사자후(獅子吼 사자 사/아들 자/울부짖을 후)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삼계(三界) ; [산스크리트어] trayo-dhātavah.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①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②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③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④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⑤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 • 금생 • 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⑥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 · 멸도(滅度) · 적멸(寂滅) · 적정(寂靜) · 적(寂) · 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게송) ‘주중야문적(舟中夜聞笛)~’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동호 야박(東湖夜泊)’ 게송 참고.
*망망창해(茫茫滄海 아득하다·드넓다 망/푸를 창/바다 해) ; 넓고 멀어 아득한[茫茫] 푸른[滄] 바다[海].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젓대 ; ‘저(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일상적으로 이를는 말. 적(笛).
*어옹(漁翁 고기잡이·고기를 잡다 어/늙은이 옹) ; 고기잡이하는 늙은이.
*활연대오(豁然大悟) ; 환하게 막힘이 없이 탁 트인 큰 깨달음.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활연(豁然 열리다·달達하다·탁 트인 골짜기 활/그러할 연) ; ①앞이 탁 트여[豁] 시원스러운 그러한[然] 모양. ②의문이 갑자기 풀려 막힘이 없이 밝게 깨달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 ; 전신(全身)은 '본질 그대로' '여래진신(如來眞身)'의 뜻으로 ‘비로자나 전신체’는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14)비로자나전신체-1(전강선사275:72임자년 동안거결제:72.10.15:5분25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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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전강선사(No.275)—임자년 동안거결제(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72.10.15)(5분25초)
**아래 송담스님 법문은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입니다.

<송담스님 법문>

부처님 49년 설(說)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방등경 8년, 그리고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21년 동안을 반야경을 설하시고,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마지막에 법화경을 8년 동안을 설하셔서 그걸 합하면은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그 49년 동안에 왜 아함경 12년부터서 말을 하고, 맨 처음에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신 화엄경(華嚴經)은 그 49년 동안에 빼놓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함경 설하시기 전에 21일 동안에 걸쳐서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49년 속에 계산을 넣지 않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은 이 화엄경은 그 화엄세계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교주(敎主)로 계시는데 그 비로자나불은 입을 열지 않고, 한마디도 비로자나불의 법문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보살들이 각기 자기가 느끼고 깨달고 보는 바를 그렇게 각기 많은 보살들이 번갈라가면서 설해 놓은 것이 모아 놓은 것이 그게 화엄경이예요.
결국은 그 보살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네들 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로자나불의 뒷받침에 의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자나불의 법문을 많은 보살들의 입을 통해서 설해졌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많은 화엄경을 하나의 큰 교향악(交響樂)으로 비유해서 본다면은 그 많은 위대한 대교향악의 총지휘자는 바로 비로자나불이고, 그 대관혁악의 악단은 그 화엄경에 나타난 많은 불보살들이 전부 그 교향악단의 악사라고 말할 수가 있고, 아울러서 그 화엄경이 우리가 보는 그 책으로 된 그것만이 화엄경이 아니라,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위대한 화엄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정(有情) 무정(無情)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낱낱이 우리도 그 대관현악(大管絃樂)의 한 단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가는 것, 그 가운데 자기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눈 한번 깜짝이고 손 한번 움직이고 발 한번 움직이고 웃고 울고 한 것 그것들이 그 대관현악의 악단으로서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그 악단을 지휘하는 비로자나불 바로 그분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이십니다.
그러면은 이렇게 말하면은 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떠한 상호(相好)를 가지고 또 계신 걸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비로자나불은 지금 산승이 말하는 말을 듣고 계신 여러분이 낱낱 여러분 가운데 바로 그 비로자나불이 계신 겁니다.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배고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아는 그 속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계신 것을 그것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과 쌀과 모다 그 떡과 그런 것을 많이 차려놓고 절만 많이 하고 그런다고 그것이 신심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 낼 줄 알고 진심 낼 줄 아는 그 우리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개발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한다면 나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8분4초~13분29초)

 

(14)비로자나전신체-2(전강선사275:72임자년 동안거결제:72.10.15:3분10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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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전강선사(No.275)—임자년 동안거결제(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72.10.15)(3분10초)
아까 그 송담 스님이, 여기 원장(院長) 스님이 또 올라와서 설법할 때—아 그 비로자나가 설법을 했는데, 입 하나 뗀 법이 없이 설법했는데 보살들이 백만 천만 억만 보살들이 설했자 설할 수가 없어. 만년을 설했자 역사를 넣을 수 없어. 그러니 49년 설법에 보탤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그 말이여.
어디 우리의 본래면목, 그 언제든지 가르쳐 줄 스승은 있지마는, 옳은 스승을 만나야만 깨닫지마는, 오(悟)는 자기가 깨닫지 부처가 깨달아 주지 못해. 그 비로자나 전신체, 생사 없는 몸뚱이.

그러고 화엄경은 그렇게 81권이니, 81권 뿐이여? 81권이 화엄경이여?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 화엄경인데.
미진수품(微塵數品) 화엄경이 그것이 내 본래면목, 비로자나 전신체, 그 비로자나 전신체가 내 마음인데 내 본래면목인데, 그 본래면목이 별별 놈의 소리를 다허고, 별별 놈의 못할 소리가 없고, 뭐 말 한마디를 가지고 천만 가지를 맨들수 있고, 이것이 비로자나불이여.

이 비로자나불이 이렇게도 별말 다하지마는 그 근본 자체, 비로자나불 근본면목 속에 들어가서 사견(邪見)도 없고 상견(相見)도 없고 유(有)도 무(無)도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없는데, 무엇으로 뭣을 나투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놔? 못혀. 입 뿐이지. 입으로만 뿐이지, 허덜 못혀.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아까 그 설법이여.

설법을 허되 첫 설법에 올라가서 우세나 하고 보월 스님 울고 내려오데끼 그럴 줄 알았더니 그 대의(大意)가 참 분명허단 말이여. 꼭 그렇지.(27분45초~30분55초)

 

(14)비로자나전신체-3(일대기8호:3분24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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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❸] 전강선사(No.018)—전강선사 일대기 8호(경술년 12월 13일)(1971년 1월 9일)(3분24초)
그 참선 공부, 세상에 참선 공부 같이 쉬운 것은 없어.
그렇게 쉽건마는, 낯 씻다가 코 만지기요. 얼굴 씻글 때 코 안 만져지나? 그대로 코 만져지는 것인디. 얼굴 씻글 때 코 만지는 것이여. 허! 그것 참!

천하에 그렇게 쉬웁건마는 어째도 그렇게 모도 안 된다고 야단들이고, 망상 따문에 못 허겄다고 야단이고.
망상 그놈 따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고, 망상 따문에 화두가 그놈이 있는 것이지, 망상 없으면 무슨 화두가 있나? 화두가 없어. 망상 그놈 따문에 화두가 따악 그놈이 인자 있지.

그래서 화두 그놈은 망상을 다루는 놈이여. 망상을 잡드리하는 놈이여.
화두 그놈이 아니면은 망(妄)을 대체 주체할 수가 없어. 일어나는 전체가 망이니까.
깨달지 못했으니 망(妄)이지. 깨달랐으면 전부 그놈이 각(覺)인디.

깨달으면은 망이 없는 것이 아니여, 망(妄) 그놈이 각(覺)이여 그만! 낱낱이 각(覺)이지, 조끔도 뭐 여읠 것도 없고.
망상을 여의고 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 자체가 각이여! 그대로가 각(覺)이여.

수은(水銀)을 한 뭉치 내던졌다. 이놈이 천 쪼가리, 그놈이 조그만한 덩어리가 모도 갈라져서 만 덩어리가 되고 몇만 덩어리가 되아. 쓸어 모으면은 한 덩이여.

망(妄) 역시 그 깨달지 못해 중생 때에는 전부 망(妄)이더니, 깨달라 놓고 보니 그놈이 낱낱이 다 각(覺)이다, 하나도. 그러니깐 미진수(微塵數) 법계(法界)지. 가는 티끌 수 법계라.
화엄경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지! 화엄경 품수(品數)가 일사천하미진수품이여. 화엄이란 화엄도리는 다 각인데, 낱낱이 각이여.(2분2초~5분24초)

*진대지(盡大地 모든·전부의 진/클 대/땅 지) ; 모든 대지. 이 땅 전체를 가리키는 말.
*차치(且置 또·또한·우선·잠시·얼마간 차/두다·내버려두다·버리다 치) ; 잠시[且] 내버려둠[置].
*차사(此事) ; 이[此] 일[事]. 본분사(本分事). 본래자기를 깨닫는 일.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事].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本來)의 모습[身分]으로 되돌아가는 일[事].
납승(衲僧 참선 수행승)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일이므로 납승본분사(衲僧本分事) 또는 납승분상사(衲僧分上事) 등이라고도 한다. 일대사(一大事)와 같은 말.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만공 큰스님 십답, 한암 스님과 열 가지 문답(問答)’ ; 만공 · 한암 스님 서신문답[십대문답].
*만공 · 한암 스님 서신문답[십대문답].
[참고 ❶] 송담 스님 정리.
만공 :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이로구나.(漢岩到金剛雪上加霜) 지장도량 내에 업경대가 있으니 업이 얼마나 되느냐?(地藏道場內有業鏡臺業多少麽)
한암 : 묻기 전에 삼십방을 놨느니라.(故問此問以前合喫三十棒)

만공 : 방맹이를 씹힌 뒤에는 어떻게 할테냐?(喫後如何)
한암 : 잣서리 때가 좋으니 잣서리허러 올라오십시오.(此時好時節速來)

만공 : 암두(巖頭) 잣서리 때는 원하지마는 덕산(德山) 잣서리 때는 원치 않는다.
한암 : 암두와 덕산 이름은 알았다마는 성(姓)이 무어냐?

만공 : 도둑놈이 삼천리 밖에 지나갔는디(賊過後三千里), 문전행인(門前行人)의 성 물어 뭣할테냐?
한암 : 금선대에 보배관이여, 금과 옥으로 가히 비유할 수가 없구나.(金仙臺裏寶花冠金玉難可比)

만공 스님께서 백지를 네모반듯하게 잘라가지고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원상 하나 그려 보냈습니다.

*만공 스님은 덕숭산 정혜사 아래 금선대에 계시고, 한암 스님은 금강산 지장암에 계실 때의 서신문답.

[참고 ❷]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편찬 | 수덕사 능인선원) p99~100.
서신 문답 — 한암 스님이 금강산에 있을 때
만공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눈 위에 서리까지 겹쳤도다. 지장 도량(地藏道場)에 업경대(業鏡臺)가 있으니, 허물이 얼마나 되오?』 師云 『漢岩 到金剛 雪上加霜. 地藏道場 有業鏡臺 所作罪業 多少麽?』
한암 『묻기 전과 물은 후를 합하여 30방을 맞았읍니다.』 岩云 『故問以前 此問以後 合喫了三十棒也』

만공 『맞은 뒷 소식은 어떠하시오?』 師云 『喫後消息以爲如何』
한암 『지금 곧 잣서리가 한창이니, 이 때를 놓지지 말고 오셔서 같이 먹으면 어떻겠습니까?』 岩云 『今當栢子燒喫時 勿失時機來相遊 亦不樂乎?』

만공 『암두의 잣서리 늦은 것은 원통하지만, 덕산의 잣서리 늦은 것은 원통하지 않소』 師云 『唯恨岩頭栢失時 不怨德山栢子遲』
한암 『암두와 덕산이라는 이름은 알았으나, 그들의 성은 무엇이라 합니까?』 岩云 『旣知岩頭德山名 未審其姓 是甚麼?』

만공 『도둑놈이 벌써 천리는 도망갔을 터인데 문전 나그네여, 성은 물어 무엇하겠소?』 師云 『賊過去已千里後 來問姓名門前客 問姓作甚麼?』
한암 『금선대(金仙臺) 안에 보배 화관이여! 금 · 은 · 옥 · 백으로 견주기 어렵도다』 岩云 『金仙臺裡 寶貨冠 金銀玉帛 難可比』

만공 스님은 최후로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려서 보냈다. 師 最後 (그림) 記畵如是(백지 네모반듯하게 잘라가지고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원상 하나 그려보냈읍니다)

[참고 ❸] 『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 (한암문도회 | 오대산 월정사) p436~437.
만공스님이 한암스님에게 이르되,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지장 도량에 업경대가 있으니 지은 죄업이 얼마나 되는가.” 師云 漢岩이 到金剛하니 雪上加霜이라 地藏道場에 有業鏡臺하니 所作罪業이 多少麽아
한암스님이 답하기를,
“이 질문하기 전과 질문한 뒤를 합하여 30방망이를 맞아야겠다.” 岩云 姑問以前과 此問以後에 合喫了三十棒也로다

만공 — “맞은 뒤의 소식은 어떠한가.” 師云 喫後消息은 以爲如何오
한암 — “지금은 잣서리 할 때라. 때를 잃지 않고 와서 서로 놀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岩云 今當栢子燒喫時에 勿失時機來相遊가 亦不樂乎아

만공 — “암두(岩頭)의 잣서리 할 때를 놓침은 한스럽지만 덕산(德山)의 잣서리에 늦음은 원망하지 않노라.” 師云 唯恨岩頭栢失時나 不怨德山栢子遲로다
한암 — “암두와 덕산의 이름을 알지만 그 성은 무엇인가.” 岩云 旣知岩頭德山名이니 未審其姓은 是甚麼오

만공 — “도둑이 이미 지나간 지 천리가 넘었거늘, 문앞에 지나가는 길손이 성을 물어서 무엇하랴.” 師云 賊過去已千里後라 來問姓名門前客이니 問姓에 作甚麼오
한암 — “금선대 속에 보화관이여, 금은 옥백으로 비교하기 어렵도다.” 岩云 金仙臺裡에 寶貨冠이요 金銀玉帛 難可比라

만공스님이 최후로 백지에 이렇게 그려 보내다. 師 最後에 記畵如是하다(백지 네모반듯하게 잘라가지고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원상 하나 그려보내다)

*이 문답은 한암선사께서 금강산 지장암 업경대에 계실 때 일이다.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새벽별 ; 샛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샛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게송) ‘불조미증전~’ ; 만공선사께서 전강선사에게 내려 주신 전법게(傳法偈).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111 참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려워할 포/두려워할 구/일어날 발/마음 심) : 끝없이 되풀이 되는 육도윤회(六途輪廻)에서 받을 생사(生死)가 정말 무섭구나. 그 생사의 고통을 매우 두려워[怖懼]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판재주(說辦齋主) ; 설판재자(說辦齋者). 법회나 불사(佛事)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비용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스님 또는 신도를 말한다. 설(說)은 '법회, 불사'  판(辦)은 '힘들이다, 주관하다'의 뜻.
*설판(說辦 말씀 설/준비하다·주관하다 판) ; 법회나 불사(佛事)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비용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것. 설(說)은 '법회, 불사'  판(辦)은 '힘들이다, 주관(主管)하다'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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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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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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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대중 생활2026. 8. 13. 08:54

§(314)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 /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라 /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천천히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하셔야 / 수면은 최소한도 5시간 정도는 푹 자야 /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설하신 '중도법(中道法)' / 고행을 위한 고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 /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〇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14)—1986년(병인년) 동안거 결제(86.11.16)(용314)(대중생활)

 

약 20분.

314(1986병인년 동안거 결제:약20분).mp3
18.05MB


한 철, 백 일이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인생이 많이 살면 칠팔십 사는데, 사실 우리의 생명은 오늘 하루를 모르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무상한 이 생사 속에 이미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와 마찬가지여.
언제 죽을는지 모른 그런 무상(無常)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무상한 속에서 이 석 달이라고 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석 달 동안에 우리의 이 생명이 유지가 될는지, 그 안에 이 세상을 뜰런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무상한 이 석 달 동안에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게 되는데, 그 각오가, 그 석 달 결제에 들어가는 우리의 그 마음의 가짐이 경건하고 그 엄숙하고, 마치 어떠한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는 그러한 그 병사(兵士)와 같은 마음, 그것에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참, 그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사(死)' 자를 터억! 이마 미간(眉間)에다가 써 붙이고,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생활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父母)가 돌아가셨다고 부고(訃告)가 와도 해제(解制)할 때까지는 본인에게 알려주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그 각오(覺悟)가 비장했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어도 본인에게 알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스님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보살선방에 여러분들도 석 달 동안을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 원근(遠近)에 있는 여러 비구니 수좌(首座)님네들도, 항상 이 도량(道場)에서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리고 이 한 회상(會上)에서 지낸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 또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정진을 하신 여러 스님네들도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계신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렇게 산다고 하는, 정진한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철을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예불 젓숩고, 그리고 정진하고 또 아침 공양을 하시고, 또 오전 정진을 하고 또 사시공양을 하시고, 오후 정진 그리고 저녁공양을 하고, 밤 정진 그리고 취침을 하시고, 그 하나하나가 스스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그 선방에 어떤,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지 말자, 특별한 허가(許可)가 없이는 외출을 하지 말자, 큰방에서 잡담을 하지 말자' 뭐 그 여러 가지 선방(禪房)에 규칙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규칙에 얽매어 가지고 그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뭐 얼마든지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그런다 하더라도, 스스로 턱! 자기가 자기 규칙(規則)을 세워서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

그래서 나갈 겨를도 없고, 떠들 일도 없고, 시비(是非)할 건덕지도 없고, 저절로 한 분 한 분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할 때에 규칙을 특별히 만들지 안 해도 제절로 규칙이 서서, 한 철을 정말 일생일대(一生一大)에, '그때 참! 정진다웁게 했다, 그 한 철이야말로 나에 일생을 결정짓는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그런 한 철이었었다' 그러한 한 철이 되도록 그렇게 정진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이 지낼 때에 그 가운데 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부처님 당시에는 사시공양(巳時供養) 한 번만 했지마는, 지금은 다 특별한 분을 제외하고는 다 삼시(三時)를 공양(供養)을 하시게 되는데, 공양 문제는 대단히 평범한 생활 가운데에 일부지만 대단히,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인 것보다도 그것 못지않게 중대한 정진인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전국 선방이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시게 되면 너무 시간이 빨러서 그저 뭐 금방 5분도 안 되어서 뚝딱 공양이 끝나버리는데, 이건 대단히 잘못된 흐름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느긋한 마음으로 충분히 시간을 가져서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供養)을 하셔야 합니다.
저작을 잘 하시면은 공양한 그 모든 것이 잘 소화(消化)가 되어 가지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營養)을 완전히 흡수를 하게 되지만, 저작을 잘 아니한 채 침도 섞지도 아니하고 우물우물해서 그냥 막 꿀떡꿀떡 삼키게 되면, 뱃속이 공양하고 난 뒤에도 뱃속이 더부룩하니 편틀 못하고, 또 소화가 잘 안되고, 따라서 흡수가 되지 아니한 채 다 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놈을 그 아까운 음식을 먹느라고 애쓰고, 그러고 그놈이 입을 통해서 위장으로 소장 대장을 거치는 동안에 애만 썼지,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애만 썼지 실지로 영양 흡수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건 건강에 좋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정진(精進)에도 대단히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소화가 잘되서 위장이 편하고 흡수가 잘 되어야 정신(精神)도 맑고, 배도 편안해야만 정진이 잘되지, 자꾸 더부룩해 가지고 트림만 해 쌓고 소화가 잘 안되고 흡수가 안되면, 영판 정신도 안정이 안되고 호흡(呼吸)도 잘 안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죽비를 치는 스님은 잘 맞춰서 넉넉하게 죽비를 쳐서 공양을 진행을 하시도록 부탁을 드리고.

수면(睡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다리를 뻗고 실컷 잠을 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最小限)도 5시간 정도는 푹 자 주고, 그 대신 새벽에 눈 떠서 취침할 때까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죽비를 치는 입선(入禪) 시간이나 또 방선(放禪) 시간이나 그날 하루 무엇을 하거나 간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터억 추켜들어 단속(團束)을 해서 화두(話頭)가 독로(獨露) 하도록 그렇게 알뜰히 잡드리를 해 가면,
저녁에 잘 때에 터억 누워서 잠이 탁 언제 들었는가는 모르지만 들을 때까지 그 화두를 떠억 들고서 잠이 들도록. 그러면 잠 속에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도록.

새벽에 목탁 소리 ‘딱 딱’ 목탁을 칠 때 눈을 딱 떠도, 떴을 때 바로 엊저녁에 그 잘 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도록. 새로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던 화두가 고대로 터억 들려져 있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알뜰히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몸도 건강하고, 정진을 애써서 할수록에 더욱 신심(信心)이 나고, 정말 참, 도(道) 닦아가는 그 참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게 정진을 하면 공부에 바른 길은 얻지 못하고서 몸에 병(病) 먼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처음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말뚝신심이 나 가지고, 공부하는 길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뭐 잠을 안 잔다, 말을 아니하고 묵언(默言)을 한다, 또 무슨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무슨 생식(生食)을 하고, 무슨 단식(斷食)을 하고, 뭐 이래 가지고 자꾸 몸뚱이 들볶는 것을 위주로 정진을 해 가게 됩니다. 이것은 바른 수행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간을 그렇게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와 같이 그렇게 무서운 고행(苦行)을 하셨어. 잡숫는 것을 아주 제한해 버리고, 잠도 제한해 버리고, 그래 가지고는 그 몸뚱이 들볶는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그래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을 해 가지고 그렇게 6년을 고행을 하셨는데, 마침내는 그 강(江)에 가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처녀가 갖다가 바치는 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절대로 뭘 먹지를 말자' 그렇게 약속을 교진여들 오비구와 같이 약속을 해 놓고는 아! 죽을 떠억 받아 잡수니까,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들이 '고따마(Gotama)가 배고픔을 참지를 못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결심이 무너져 가지고 그렇게 타락(墮落)을 했다.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떠나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것이 없고, 당신은 목욕을 하고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죽을 받아 잡수니까 그렇게 새로운 정신이 나며 기운이 나. 기운이 나며 새로운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때 다시 떠억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 가서 정좌를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정신으로 정진을 해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내가 누구를 먼저 제도(濟度)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맨 처음에 설법(說法)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신 결과 그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교진여들 그 다섯 비구—같이 수행을 하다가 버리고 떠났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제도를 해야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가셨습니다.
가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 사제법을 설하시기 전에 맨 먼저 하신 법문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해서는 그것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 지나치게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또 지나치게 안락을 위하고 호강을 하는 그러한 생활도 그것도 올바른 수행이 아니니라. 수행은 으레히 고행(苦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편하고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호화롭게 사는 것도 옳지를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행을 위한 고행, 쓸데없이 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해 가지고 육체를 들볶는, 그러한 수행도 올바르지 못하느니라"
그러한 말씀을 하셔서 그 교진여들로 하여금, 자기는 타락했다고 그래 가지고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먼저 그 말씀을 해서 그러한 오해(誤解)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깨달라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인식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교진여들 다섯 사람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누구라도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이 중도법은 적용이 되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에도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 동안을 건강을 망쳐서 도(道)를 닦지 못하게 된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34분50초~54분3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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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죽을 사(死)' 자를 터억! 이마 미간(眉間)에다가 써 붙이고,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생활인 것입니다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p119~120. (가로판 p117~118)
大凡行脚(대범행각)은  須以此道(수이차도)로  爲懷(위회)호리니  不可受現成供養了(불가수현성공양료)하고  等閒過日(등한과일)이니라

대저 행각할 때에는 모름지기 이 도(道)로써 회포(懷抱)를 삼을지니, 현성(現成)한 공양을 먹고 등한히 날을 보내지 말지니라.

須是將生死二字(수시장생사이자)하야  釘在額上(정재액상)하야  十二時中(십이시중)에  裂轉面皮(열전면피)하고  討箇分曉(토개분효)하야사  始得(시득)이니라

모름지기 이 생사(生死) 두 글자를 가져, 이마에 두어 열두 때 가운데에 면피(面皮)를 열전(裂轉)하고 이것을 찾아 분명히 알아야사 비로소 옳으니라.

*부고(訃告 부고·죽음을 알리는 통지通知 부/고할 고) ; 어떤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통지[訃]를 보내 연고자에게 알림[告]. 또는 그러한 글. 부음(訃音).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수좌(首座 머리·우두머리·첫째·으뜸 수/자리·지위 좌)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坐禪)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조실(祖室 할아버지·조상·개조 조/집·방·거처·몸 실) ; ①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②조사(祖師)가 머무는 방. 또는 선문(禪門)의 사원에서 가장 어른이신 스님이나 스님이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를 이르던 말. 잡수다-->‘먹다’의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것. ③(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사시공양(巳時供養) ; 절에서 평소 하루에 딱 한번 오전 중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하는 공양(식사)을 말한다.
*자가철주(自家鐵柱) ; 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을 쇠기둥[鐵柱]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이, 움직임 없이 지켜 나감을 이르는 말.
*일주문(一柱門) ;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음.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붓다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一心)으로 붓다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발우공양(鉢盂供養) ;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발우(鉢盂)라고 하여, 발우공양은 ‘스님들이 하는 식사’를 말한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小心經)》이라는 경전을 외운다.
이 공양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아 신과 인간의 공양 받기를 원하는 ‘하발게(下鉢偈)’, 부처님 일생의 중요한 4대 성지를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 보시하는 사람, 보시 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삼륜(三輪)이 공적함을 생각하는 ‘전발게(展鉢偈)’
그리고 위로는 부처님 · 성인, 아래로는 일체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봉반게(奉飯偈)’, 음식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오관게(五觀偈)’
그리고 생반게(生飯偈), 정식게(淨食偈), 삼시게(三匙偈), 절수게(絶水偈), 해탈주(解脫呪)를 하면서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며 공양하는 수행 의식이다.
*발우(鉢盂 바리때 발/바리•사발 우) ; '발(鉢)'은 [산스크리트어] patra의  음역어인 발다라(鉢多羅)의 준말로 '음식 그릇', '우(盂)'는 그릇을 뜻함. 음역어와 번역어의 합성어로, 수행승들의 식기(食器)를 일컬음.
나무를 그릇처럼 깎아서 칠을 한 스님의 공양(供養, 식사) 그릇. 보통 발우 한 벌은 4개의 그릇으로 이루어지고, 4개의 그릇이 포개져서 하나의 그릇처럼 보관하며, 공양(식사)할 때 4개의 그릇을 펼쳐 놓는다.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말뚝신심 ; 말뚝은 보기에는 견고해 보이나 뿌리가 없어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리거나 썩어 버린다. 이것에 비유하여 보기에는 열심인 듯하나, 꾸준하지 않고 잠깐 일어난 신심을 '말뚝 신심'이라 한다.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오전에만 걸식(乞食)으로 공양하도록 하고, 오후에는 씹을 수 있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오비구(五比丘)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붓다 buddha)이 깨달음을 성취한 후, 처음으로 교화한 다섯 비구. 붓다가 출가하던 때 부왕(父王, 정반왕)의 명으로 이들은 우루벨라(uruvelā)에서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했으나 그가 네란자라(nerañjarā) 강에서 목욕하고 또 수자타에게 우유죽을 얻어 먹는 것을 보고 타락했다고 하여, 그곳을 떠나 녹야원(鹿野苑)에서 고행하고 있었는데,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그들을 찾아가 설한 사제(四諦)의 가르침을 듣고 최초의 제자가 됨.
①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 팔리어 aññā-koṇḍañña의 음사(音寫). 요본제(了本際) · 지본제(知本際)라고 번역. 아야(阿若)는 이름, 교진여(憍陳如)는 성(姓).
②아설시(阿說示) : 팔리어 assaji의 음사. 마사(馬師) · 마승(馬勝)이라 번역. 사리불(舍利弗)이 왕사성(王舍城)에서 아설시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목건련(目犍連)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③마하남(摩訶男) : 팔리어 mahānāma의 음사. 대명(大名) · 대호(大號)라고 번역.
④바제(婆提) : 팔리어 bhaddiya의 음사. 인현(仁賢) · 소현(小賢) · 현선(賢善)이라 번역.
⑤바부(婆敷) : 팔리어 vappa의 음사. 기식(氣息) · 장기(長氣)라고 번역.
*피골상접(皮骨相接) ; 살가죽[皮]과 뼈[骨]가 맞붙을[相接] 정도로 바짝 마름.
*수자타(Sujātā)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을 중단하고, 항하(恒河, 갠지스 강)의 한 지류인 중인도 마갈타국 가야성의 동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 니련선하(尼連禪河 nerañjarā)에서 목욕을 하실 때 우유죽을 보시한 여인.
부처님께서는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드시고 붓다가야(Buddha-Gayā)로 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49일 동안을 정진을 하셔 성도하였다.
*고타마(Gotama) ; 인도의 크샤트리야 계급에 속하는 여러 성(姓)가운데 하나. 석가모니의 성(姓). 구담(瞿曇)이라 음역.
*녹야원(鹿野苑)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붓다 buddha)이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강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의 터. 사슴동산(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200㎞가 된다. 탄생(誕生:룸비니) · 성도(成道:붓다가야) · 입멸(入滅:쿠시나가라)하신 곳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
*보리수(菩提樹) ; [산스크리트어] bodhi-vṛkṣa.  원래 이름은 아설타(阿說他, 산스크리트어 aśvattha)이며, 그 열매를 필발라(畢鉢羅, 산스크리트어 pippala)라고 하는 데서 이 나무를 필발라수(畢鉢羅樹)라고도 하고, 붓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였으므로 보리수라고 함. 상록 교목으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함.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사제(四諦) ; 사성제(四聖諦). 제(諦)는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를 뜻함. 고(苦, 괴로움)를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함.
①고제(苦諦, 苦聖諦) : ‘고(苦, 괴로움)’라는 성스러운 진리.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 • 비탄 • 괴로움 • 근심 • 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고다”(상응부)
②집제(集諦, 集聖諦) : ‘고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진리.
③멸제(滅諦, 滅聖諦) :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됨으로써 고(苦, 괴로움)가 소멸되어 고의 끝남,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
④도제(道諦, 道聖諦) :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 바른 이해)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 정어(正語, 바른 말) · 정업(正業, 바른 행위) · 정명(正命, 바른 생계) ·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 정정(正定, 바른 집중)—는 갈애를 소멸시켜,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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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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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