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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게송)농계유식탕와근~ /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 불자는 철저하게 인과의 진리를 믿어야 / 어리석음과 삿된 견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뭣고?’ / (게송)호향차시명자기~.
(1) 약 20분.
(2) 약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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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게송)농계유식탕와근~ /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 불자는 철저하게 인과의 진리를 믿어야 / 어리석음과 삿된 견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뭣고?’ / (게송)호향차시명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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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게송)묵좌허회독엄문~ / 도의 낙(樂) / 활구참선이란? / 『몽산법어』 / (게송)심사학도별무타~ / 탐진치(貪瞋痴) 삼독심 / ‘참 부처님’이란?
〇도의 낙(樂)은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받을 수도 없고, 스스로 도를 닦음으로 해서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라 이것은 영원한 낙(樂)이라 할 수가 있어. 이 도의 낙은 말로써는 어떻다 표현할 수가 없어.
〇활구참선(活句參禪)은 말 길[語路]도 끊어지고, 이치 길[理路]도 끊어져. 사량분별도 다 끊어져.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화두의 의심(疑心) ‘이뭣고?’한 그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 가지고, 앞도 끊어지고 뒤도 끊어지고, 알아 들어갈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더듬을 것도 없고,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이렇게 공부를 지어 가면 이것이 활구참선인데. 이 활구참선을 해야 결국은 마음 길[心路]이 끊어져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이여.
〇몽산법어(蒙山法語)를 한 구절씩—항상 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떠억 보시면은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〇항상 법문을 듣고, 항상 정진한 사람은 탐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욕이 없어져 버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을 낼 줄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지가 다 달아나 버려.
〇참 부처는 업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정말 가행정진(加行精進)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해서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할 때에 여러분은 눈을 감아도 전체가 부처요, 눈을 떠도 전체가 부처인 것이다.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86.05.04) (용299)
(1) 약 16분.
(2) 약 12분.
(1)------------------
묵좌허회독엄문(黙坐虛懷獨掩門)한데 일성춘조벽산운(一聲春鳥碧山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하잉득한중취(煙霞剩得閒中趣)한데 지자희이부증군(只自熙怡不贈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묵좌허회독엄문(黙坐虛懷獨掩門)이라. 묵묵히 말없이 앉았어. 회포(懷抱)를 비우고, 생각을 다 비워 버리고 홀로 문을 닫고 앉았으니,
일성춘조벽산운(一聲春鳥碧山雲)이로구나. 봄 새 한 소리에 푸른 산에 구름이더라. 푸른 산에는 구름이 자욱히 끼었는데 한 소리 봄 새가 울더라.
연하잉득한중취(煙霞剩得閒中趣)인데, 이 푸른 산중에 한가한 가운데에 그 정취(情趣)가, 구름과 연기 안개 끼어 있는 산중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취미(趣味), 정취를,
지자희이(只自熙怡)언정 부증군(不贈君)이다. 다못 스스로 그 한가한 가운데의 그 정취를 즐길지언정 이것을 어떻게 그대에게 보내 줄 수가 있겠는가.
도(道)를 닦아 가면 그 도의 낙(樂)이 있는데, 이 도의 낙이라 하는 것은—세속의 무슨 바둑을 둔다든지, 화투를 친다든지, 장기를 둔다, 무슨 사회 생활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이 있어.
또 낙(樂)이 돈 버는 낙도 있고, 명예와 권리를 누리는 낙도 있고, 그밖에 무슨 주색을 가까이 하는 낙도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낙, 그런 게 있지만.
세속의 낙(樂)이라 하는 것은 전부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낙이라, 언젠가는 또 내게로부터서 그 낙이 떠나가 버리게 되고, 떠나게 되면은 참 못 견디게 자기의 몸과 마음을 가누지를 못해.
너무너무 허전해서 가누지를 못해서 또 그것을 또 가까이 하고, 가까이 하고 나면 허전하고 도저히 자기를 수습을 못하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라 정말 깊이깊이 그 낙을 즐길 만한 것이 못되고, 결국은 오래오래 그러한 세속적인 낙을 즐기다 보면 건강도 나빠지고 무상함만이 치밀어와서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도(道)의 낙(樂)은 밖에서 얻어지는 낙이 아니고, 도를 닦음으로 해서 업장(業障)이 다 소멸하고, 구할 것도 없고, 탐착할 것도 없고, 누가 이것을 빼앗아 갈까봐 두려워할 것도 없고,
이 도의 낙은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받을 수도 없고, 스스로 도를 닦음으로 해서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라 이것은 영원한 낙(樂)이라 할 수가 있어. 이 도의 낙은 말로써는 어떻다 표현 할 수가 없어.
산중에, 이 푸른 산에 구름과 안개는 자욱히 끼었는데 봄 새가 울고, 그러한 청정한 맑은 공기와 맑은 바람 그리고 흐르는 시내, 그 사이에 봄 새가 노래를 하는 그 가운데에 떠억! 도의 낙이라 하는 것은 무어라고 표현 할 수가 없다. 다맛 스스로 이것을 즐길지언정 그대에게 보내줄 수가 없노라.
이러한 부휴(浮休) 선사의 도시(道詩)입니다.
여러분은 5월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경청을 했습니다. 언제 법문을 들어도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평생 동안 거량(擧揚)하시고 모든 설법이 활구참선법이 그 근간이 되어 있습니다.
이 활구참선이란, 대관절 활구참선이란 게 무엇이냐?
여러분 가운데 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참선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이렇게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는 거여.
이런 것은 전부 깨달을 수 없는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만을 더 치성(熾盛)하게 만들어 가지고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생사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들어가는 참선이기 때문에 이것은 ‘죽은 참선’이다. 그래서 사구참선이라 그러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말 길[語路]도 끊어지고, 이치 길[理路]도 끊어져. 사량분별도 다 끊어져.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화두의 의심(疑心) ‘이뭣고?’
‘이뭣고?’한 그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 가지고, 앞도 끊어지고 뒤도 끊어지고, 알아 들어갈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더듬을 것도 없고,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이렇게 공부를 지어 가면 이것이 활구참선인데.
이 활구참선을 해야 결국은 마음 길[心路]이 끊어져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것은 ‘산 참선’이다. 그래서 이것을 활구참선이라 그러는데. 또 다른 말로는 참구(參句)라 하기도 하고.
이 활구참선을 참구(參句)—‘구(句)를 참(參)한다’ ‘말 길도 끊어지고, 이치 길도 끊어진 그 글귀를 갖다가 참상(參祥)을 한다’ 그래서 이것을 참구라 그러고.
이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참의구(參意句)라 그러는데. ‘뜻이 있는 구(句)를, 글귀를 갖다가 참상을 한다’
‘그것이 이래서 그랬나?’ ‘이러이러한 말은 이러이러한 뜻으로 그런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교리・이론・사량분별을 붙여 가지고 이리저리 뜻으로 더듬어 들어가면서 공부해 나가는 이것을 참의구라 그러는데. 이 참의구(參意句)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
그러고 이 활구선(活句禪)은 참구(參句)거든. 밑도 끝도 없이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무(無)?’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면 ‘이뭣고?’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고, 다못 캄캄한 밤중에 벼람박에 이마를 탁! 부딪칠 그 찰나처럼—그저 앞도 끊어져 버리고 뒤도 끊어지고, 이치 길도 끊어지고, 사량분별도 끊어져 버린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거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인데.
풍선을 불 때에 풍선의 어느 곳에 바늘구멍만한 구멍만 뚫어져 있어도 아무리 불어도 그 풍선이 커지지를 못하고, 입으로 아무리 힘을 들여서 불어도 그 바늘구녁 뚫어진 데로 헛짐이 새기 때문에 풍선이 불어나지를 않어.
사구참선, 사구참선이란 게 바로 그런 거여. 아무리 불어도 커지지를 않고, 커지지를 않기 때문에 터지지를 못하거든.
그런데 구녁이 꽉 막혀서, 입으로 부는 구녁만 있지 다른 구녁은 완전히 헛짐 새는 곳이 없는 풍선이라야 분 쪽쪽 점점 커져 가지고, 더이상 커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불어대면 결국은 그놈이 팡! 하고 폭음을 내면서 그 풍선이 터지는 거여.
화두도 사량분별이 없이 전후(前後)가 제단(際斷)해. 심로(心路), 마음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의단(疑團)만을 계속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의단을 거각(擧却)해서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고 이렇게 해 가면 결국은 더이상 의심이 커질라야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라야 간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화두를 들라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 가지고 항상 의단이 현전(現前)하면, 그래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지경에 이르르면 결국은 그 의심이 툭!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 이 『몽산법어(蒙山法語)』를 여러분에게 법공양(法供養)을 했는데, 아마 대부분 다 한 권씩을 받아서 가지고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몽산법어는 이 활구참선법! 활구참선 하는 데에 관한 법문만을 여기에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를 받아서 첫째 서문을 읽어보시면 이 몽산법어라는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여러분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蒙山法語)를 한 구절씩—항상 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떠억 보시면은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금방 조실 스님 녹음법문도 이 몽산법어를 설(說)하셨습니다마는 이 몽산법어를 가끔가끔 보시고—몽산법어를 보지 안 해도 의단이 독로하고 순수무잡해서 타성일편 지경에 들어간다면 구태여 또 몽산법어도 볼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공부를 하다 보면 뭣 한 때는 참 단전호흡(丹田呼吸)도 잘되고, 화두도 잘 들려서 의단이 순일무잡하게 들릴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뚝 변해 가지고 영판 단전호흡도 잘 안되고, 또 정신도 청쾌하지를 못하고 의심도 잘 나지를 안 해 가지고 그렇게 답답하고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억지로 앉아서 시간만을 채울려고 하시지를 말고 가볍게 포행을 하고 와서 또 정진을 하실 수도 있고,
여러분 댁에서 공부하실 때에는 이 몽산법어도 한 편씩 떠억 보시고서, 이게 한글로 다 음(音)을 달고 또 그것을 번역을 하고, 거기 어려운 말에 대해서는 역주(譯註)를 붙여서 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보시면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처음~16분18초)
(2)------------------
심사학도별무타(尋師學道別無他)라 지재기우자도가(只在騎牛自到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척간두능활보(百尺竿頭能闊步)하면 항사제불안전화(恒沙諸佛眼前花)니라
나무~아미타불~
심사학도(尋師學道)가 별무타(別無他)여. 스승을 찾아서 법문을 듣고 도를 배우는 것이 다른 일이 아니여.
지재기우자도가(只在騎牛自到家)니라. 다못 소를 타고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소는 무슨 소? 지금 뭐 황소나 무슨 우유를 짜는 소? 그게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 소’를 타고서 자기의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더라.
마음 소!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억울한 소리를 하면 분(憤)이 나고, 칭찬해 주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그게 바로 ‘마음 소’의 그림자거든. 마음 소 그림자 있는 곳에 왜 소가 없겠느냐 그말이여.
그 마음 소 그림자를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하면 그게 자기의 마음 소를 찾을 수 있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어. 그 마음 소를 찾아서 타고 자기의 마음 고향, 마음 부처, 마음의 극락으로 돌아가는 길이여.
어떻게 해야 그 ‘마음 소’를 타고 고향에 돌아갈 수가 있겠느냐? 백척간두(百尺竿頭)에 한 걸음을 나아가야 한다.(百尺竿頭能闊步)
백척간두에 올라가 가지고 떨어져 죽을까 봐서 그놈을 콱! 붙잡고 벌벌벌벌 떨고 있어. 내 재산, 내 명예, 내 권리, 내 자식, 꽉! 그놈을 붙잡고 그래 가지고 행여나 그놈을 놓칠까 벌벌벌벌 떨고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그러한 탐착심으로 인해서 눈이 가리워졌는데 어떻게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겠느냐?
도(道)의 장애는 탐심(貪心), 진심(瞋心)이거든. 탐진치(貪瞋痴)여.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 그 탐진치 삼독심에 얽매어 가지고 결국은 내 마음 소를 찾지를 못해.
무엇이 탐심(貪心)이냐? 꼭 재산에 관한 것만이 아니에요.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보고서—재산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권리가 되었건, 무슨 사상이 되었건, 무엇이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보고 그릇된 생각을 갖는 것이 그것이 탐욕이여.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보고 거기서부터 그릇된 생각을 내.
진심(瞋心)은 무엇이냐?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보고서 그릇된 생각을 내는 거여.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보고도 거기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터억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보고 당하고 하더라도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끌려가면 진심(瞋心)이 나게 되는 것이니까,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당하더라도 거기에서 퍼뜩 돌이켜서 화두를 떠억 들어 버리고 그래야 할 텐데, 전부 그리 끌려가 버리거든.
내 마음에 드는 일을 보고서 거기에 그릇된 생각을 내서 화두를 들을 줄을 모르고 끌려가면—그놈을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보고 ‘저건 내 것을 삼아야겠다’ 벌써 그게 바로 그릇된 생각을 내는 거거든.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보면 퍼뜩!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야 할 텐데, 그걸 보고 그릇된 생각을 내면 그것이 바로 진심(瞋心)이여.
그 다음에 치심(痴心)은 뭐냐? 무지(無知)로 말미암아서 ‘해야 할 일’과 ‘안 해야 할 일’을 분간을 못하면 이것이 어리석은 거여. 그래서 법문을 항상 들은 사람은 자연히 이 지혜!—내가 해야 할 일과 안 해야 할 일, 이것을 자연히 다 판단이 나게 되는 거여.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을 판단이 안 선 것은 법문을 듣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일을 당해도 그것이 분간을 바로 못하고, 무슨 말을 들어도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분간을 못하거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거여.
그래서 항상 법문을 듣고, 항상 정진한 사람은 탐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욕이 없어져 버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을 낼 줄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지가 다 달아나 버려.
그래서 항상 계율을 지킬려고 안 해도 계율을 지키게 되고, 마음은 항상 안정이 되고, 항상 지혜로운 마음이 딱!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각이 바르고, 그 사람의 말이 바르고, 그 사람의 행동이 바르고,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이 바르게 되게.
그래서 이 참선을 하는,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모든 생활이 자연히 다 바로 잡아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탐착심(貪着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痴心)으로부터서 해방이 되야 해.
그래서 오직 화두로써 눈을 삼고, 화두로써 귀를 삼고, 화두로써 입을 삼고, 육근(六根) 육식(六識)이 전부 활구참선으로 무장을 할 때에 무엇에 집착할 것이 있겠느냐 그말이여.
명예를 집착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명예가 올 것이요, 권리를 탐착을 하지 안 해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면 권리도 이르른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시커먼 마음으로 탐심 낸다고 모든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탐착심을 버려 버리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살아가면 자연히 업장이 소멸이 되기 때문에 장애가 없어지고, 장애가 없어짐으로 해서 선신(善神)이 옹호(擁護)하고 제석천왕(帝釋天王)이 항상 보호를 하시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면 구하지 아니해도 자연히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면 자연히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을 스스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 극락에 갈려고 하지 안 해도 이미 살아서 불보살(佛菩薩)을 친견하고, 살아서 불보살과 더불어 생활하게 되니,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바로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되는 것이여.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능히 활보(闊步)를 해야 항사제불(恒沙諸佛)이 바로 안전화(眼前花)야, 눈앞에 꽃이여.
‘부처님, 부처님’하지마는 우리는 극락세계만 가야 부처님을 뵈옵고, 도솔천 내원궁에만 가야 부처님을 뵈옵고, 부처님은 저 하늘나라나 그런 오색 구름 속에 휩싸여 계신 걸로 생각하고 그렇지만, 그것은 중생의 마음으로 맨들어낸 중생의 허망한 부처라고 하는 허상에 지내지 못한 것이여.
참 부처님은 여기에 계시고, 저기에 계신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이 법계(法界)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참 부처님인 것이고.
안 볼라야 안 볼 수 없는 것이 참 부처님이요, 볼라야 볼 수 없는 것이 참 부처님인 것입니다. 중생의 업(業), 업의 눈으로 보인 것이 그것이 참 부처일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그러한 부처는 헛된 망상의 부처님이여.
참 부처는 업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정말 가행정진(加行精進)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해서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할 때에 여러분은 눈을 감아도 전체가 부처요, 눈을 떠도 전체가 부처인 것이다.(39분57초~51분51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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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묵좌허회독엄문~’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암(巖) 선백(禪伯)에게(贈巖禪伯)’ 참고.
*회포(懷抱 품을 회/안을 포) ;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情).
*자욱히 ; 자욱이. 자옥이. 연기나 안개 따위가 잔뜩 끼어 흐릿하게.
*정취(情趣 뜻·정취 정/뜻·취향·멋 취) ; 심미(審美 아름다움을 살펴 알다)에 바탕을 둔 깊은 정서(情緖)를 자아내는 흥취(興趣 흥과 취미).
*취미(趣味 뜻·취향·멋 취/맛·마음에 느끼는 멋 미) ; 감흥을 느끼어 마음에 일어나는 멋.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량(擧揚 들 거/나타낼·밝힐 량) ; 화두, 공안(公案)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를 말하는 것.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참상(參祥) ; 참구(參究)와 같음.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헛짐 ; 헛김(딴 데로 새어 나오는 김).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惺惺]한 상태.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하였다.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법공양(法供養)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베풂. ②불서(佛書)를 사람들에게 베풂. ③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찬탄함. 경전에 꽃·향 등을 바침.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역주(譯註 번역·뜻을 풀이함 역/주해·뜻을 풀어 밝힘 주) ; ①번역한 사람이 붙인 주석(註釋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함. 또는 그 글). ②번역과 주석을 아울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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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심사학도별무타~’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어느 선자(禪子)에게(贈某禪子)’ 참고.
*백척간두능활보(百尺竿頭能闊步)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나아간다는 뜻.
①이미 연구를 쌓을 만큼 쌓은 위에,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시 더 연구를 계속하여 노력한다는 말.
②백척간두는 높은 장대 위에 섰다는 말로서, 막다른 매우 위험한 지경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죽을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크게 살아나게 된다는 말.
③깨달음을 얻었더라도 더욱 그 깨달음을 넘어서 절대의 살아 움직이는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함을 말한다.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 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옹호하다(擁護-- 안을 옹/보호할 호) ; 어떤 대상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키다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 신[天神]들의 제왕[帝]인 샤크라〔釋〕라는 뜻.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는 성(姓)씨이며 ‘능(能)이라 한역하고, ‘제바’는 ‘천(天)’이라 한역하며, ‘인달라’는 ‘제(帝)’라 한역하니 곧 ‘능천제(能天帝)’라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중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에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활보(闊步 넓을 활/걸을·걸음 보) ; 발자국을 크게 떼며 거침없이 힘차고 당당하게 걸음. 또는 그 걸음.
*항사(恒沙) ; 항하사(恒河沙). 인도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항사제불(恒沙諸佛) ; 무수히 많은[恒沙] 모든 부처님.
*법계(法界) : [범] dharmadhatu dharma 곧 법은 온갖 유형 무형의 물질과 모든 일과 어떤 이치이거나를 다 들어 말하고 dhatu는 경계(境界) 또는 범위(範圍)란 말이다。그러므로 온갖 것(萬有)을 총괄하여 하는 말이니, 우주의 전체와 진리의 전체, 법 성품(法性)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34분 9초부터 시작됩니다>
§(574) 아자방 부목의 소금 장수, 머슴살이 / 실참실오(實參實悟) / 고인친증처(古人親證處)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한다.
〇진실한 깨달음,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것은 그건 자기 스스로 그걸 인증을 해선 안 됩니다. 정말 자기의 깨달음이 고조사(古祖師)의 경지가 아니면 스스로 그것을 여지없이 내팽개쳐 버려야 하는 것이여.
〇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우선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온 법계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차게 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는 것이 그것이 수행해 가는 목적인데, 가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남 앞에 뽐내면 그거 어디다 쓰겠습니까?
**송담스님(No.574)—96년 하안거 해제 법회(96.08.28) (용574)
약 17분.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위봉사나 위봉선원, 세등선원 기타 여기저기서 수행하고 있는 도반들이 많이 해제 법요식에 참석을 했고 또 법보전(法寶殿)에 만년위패(萬年位牌)를 모신 여러 법보가족(法寶家族)들도 많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사 문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소금 장수 얘기를 잠깐 비추셨는데, 그 소금 장수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어느 큰 저 칠불(七佛) 아자방(亞字房)에 옛날에 큰 선원이 있었는데, 그 아자방에 부목(負木)으로 있던 사람이 그 여름에 더울 때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공양 짓는 나무를 대고 그런데,
스님네는 서늘한 방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해다 준 밥에 편안하게 밥 먹고 저렇게 백판 놀고 있으니, 참 그걸 은연중(隱然中) 비방을 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그러다가,
어떤 스님이 “그렇게 나무하기가 힘들고 그러면 오늘부터서 나하고 바꿔서 내가 나무를 해 댈 테니 부목이 선방에 와서 참선을 좀 해 봐라”
“아, 그까짓 것 내가 못하냐”고, “밥 먹여 주는데 앉아서 끼니때 되면 밥 갖다 주면 먹고, 터억 앉았다가 졸리면 꾸벅꾸벅 졸면 점심때 되면 또 밥 갖다 주는데 그거 못할 것 없다”고, “나도 한다”고.
그래서 갖다가 앉혀 놓으니 평생 앉아보들 않은 사람이 가부좌, 반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니 주리를 틀어서 도저히 다리가 저려서 견딜 수도 없고, 처음에 한나절은 좌우로 꾸벅꾸벅 조는 스님네 구경이나 하고 그럭저럭 견딜 만하더니 그 이튿날은 영판 못해 먹겠어. 삼일째는 정말 힘들고, 나흘째 닷새째는 견딜 수가 없어. 오금이 펴지도 않고, 변소에 가도 오줌도 잘 안 나와.
그래 가지고는 못하겠다는 말도 못하고—어지간히 스님네 흉을 봤어야지—그래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도망가 가지고, 갑자기 나가니 해먹을 게 있어야지. 그래서 저 염전에 가서 소금을 짊어지고 그 산을 넘어 다니면서 산너머에다가, 요새는 교통수단이 좋지만 옛날에는 낱낱이 사람의 등으로 소금을 날라다가 팔았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지리산이라든지, 전국 방방곡곡에 산을 넘어 다니면서 소금짐을 짊어지고 넘어가는데, 비지땀을 흘리면서 넘어가는데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그 직업이 여러 가지가 많은데 하필 이 소금을 짊어지고 이 더위에 빈 몸으로도 올라가기가 힘드는데, 소금 가마니를 짊어지고 이 높은 재를 넘어가다니 그 얼마나 힘이 드냐”하니까, “말 마십시오. 선방에서 참선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세상에 못해 먹을 지서리는 참선입니다”
소금 장수를 하다하다 못하게 생겼으니까, 이제 들에 내려가서 남의 부잣집의 머슴살이를 해. 쟁기를 가지고 논밭을 가는데, 소도 힘이 드니까 말을 잘 안 들어. 후려 때리면서 “이놈의 소새끼, 선방에다가 참선을 시키리”
사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그러한 고비고비를 다 넘겨서 이제는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앉아도 다 견딜 만하고 대부분 다 그러시겠지만, 처음 첫 철에 나가서는 여간 견디기가 힘든 거 아닙니다. 두고두고 그렇게 힘든다면은 누구라도 소금 장수를 하거나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마는.
처음에는 힘들지마는 한 철, 두 철, 세 철 하면 장좌불와(長坐不臥)도 하고, 3년 결사도 하고, 앉아서 터억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대안락지묘문(大安樂之妙門)이여. ‘정말 큰 안락한 묘문’이라고 고인(古人)은 표현을 했습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침(昏沈)과 산란(散亂)도 다 떨어져 버리고—처음에는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하겠다 그러고, 그 다음에는 망상이 좀 잘 만하면 혼침이 와서 못 견디고, 그래도 끊임없이 중단하지 않고 해 나가면 다리 절인 것도 없어지고, 허리 아픈 것도 없어지고,
번뇌와 망상도 그냥 스쳐가는 바람처럼 스쳐간 채로 놔두고,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고 의단(疑團)을 거각을 하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해서 이 몸이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맛 이 속이나 온 밖이 화두 일념, 의단이 꽉 차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처음부터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어. 수없는 애를 써야 언제 오더라도 결코 그런 경계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러한 이 공부를 해 가면 다맛 다리만 저리고 허리만 아프고, 번뇌 망상만 일고 혼침만 오는 게 아니라, 많은 병고(病苦)의 장애도 일어날 수가 있고 인간의 장애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나쁜 도반을 가까이하면 사도(邪道)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선지식을 잘못 만나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데도, 일과성(一過性)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경계를 바로 깨달았다고 인가(印可)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한 깨달음,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것은 그건 자기 스스로 그걸 인증을 해선 안 됩니다. 정말 자기의 깨달음이 고조사(古祖師)의 경지가 아니면 스스로 그것을 여지없이 내팽개쳐 버려야 하는 것이여.
‘옳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오역여시(吾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그렇다’ 섣불리 남을 그렇게 인가해 가지고.....
그 사람의 그러한 일과성의 경계를 여지없이 쳐부숴 버려야, 그리고서 실참실오(實參實悟)을 하도록 몰아줘야 그것이 참다운 선지식이고, 진실한 도반이 아니겠습니까.
한소식 했느니, 초견성 했느니, 무슨 지견이 났느니 해 가지고 자기도 얻었다는 생각을 갖고, 자기도 깨달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리고 남 앞에 뽐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새 세상은 가짜가 하도 많아서 보석, 참 많은 돈을 주고 사 놓고 보면 대부분 다 가짜 보석입니다. 가짜 보석은 위조지폐(僞造紙幣)처럼 가짜도 진짜인 줄 알고 서로 주고받고, 팔고사고 하면 가짜가 진짜 노릇을 얼마 동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재수없는 사람은 걸려 가지고 쇠고랑을 차게 되는 거여.
그러나 참 깨달음이 아닌 가짜 깨달음은 어디다 그것을 쓰겠습니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우선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온 법계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차게 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는 것이 그것이 수행해 가는 목적인데, 가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남 앞에 뽐내면 그거 어디다 쓰겠습니까?
원래 가짜 보석이라 하는 것은 남 앞에 과시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짜 보석을 함부로 가지고 다니다가는 잃어버리기도 쉽고 도둑맞기도 쉬우니까, 진짜 보석은 깊이 잘 간수해 놓고 비슷하게 생긴 가짜 보석을 귀에다도 걸고 목에도 걸고 손가락에다도 꽂아서 그런 사용으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재산이 될 수도 없고 팔아서 값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짜 깨달음은 장식용으로 쓰겠습니까? 명예를 얻기 위해서 쓰겠습니까? 자기 신세도 망쳐서 자기도 지옥에 가고, 그것을 함부로 인가해 가지고 큰 마음 먹고 도 닦는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고 사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불법(佛法)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은, 여러분도 사집(四集)에 서장(書狀)을 배운신 분은 기억이 나시겠지만,
‘불오즉이(不悟則已)어니와 깨닫지 못하면 말거니와, 깨달은 즉은 모름지기 직도고인친증처(直到古人親證處)—고인(古人)이라 하면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포함이 될 것입니다—고인이 친히 증득한 그 경지에 가야만 대휴헐지지(大休歇之地)를 삼을까 하노이다. 그래야만 나의 깨달음을 그렇게 삼고자 한다’ 그거거든.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자나깨나 아미타불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눈을 감아도 아미타불을 부르고, 눈을 떠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일 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속이 상할 때도 아미타불을 부르고, 슬플 때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몸이 아플 때도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터억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영접을 하러 오신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딱! 있다 그말이여. 그 경을 고지식하게 고대로 믿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참선을 한답시고 참선을 하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아니 하고, 의리선(義理禪)으로 따져서 공안을 이러저리 해석을 하고, 그래 가지고는 몇 공안을 나름대로 통과했다고 해서 자기도 한소식 했느니, 견성을 했느니 해 가지고 그런 것을 자기의 깨달음을 삼아서 되겠느냐 이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들은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많이 들으시고, 벌써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열심히 수행하는 도반들이라 이러한 노바심절(老婆心切)에서 나온 말은 필요 없을는지 모릅니다마는, 이 문제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간곡히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30분45초~47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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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법보가족(法寶家族)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아자방(亞字房) ; 방고래(방의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길)를 아(亞) 자 모양으로 놓은 방. 지리산 칠불사(七佛寺) 아자방이 대표적이다.
*부목(負木) ; 절에서 땔나무를 채취하거나 불을 지피는 소임. 불목한·화목한(火木漢)·화대(火臺) 등이라고도 한다. 주로 일반 일꾼이 이 소임을 담당했다.
*백판 ;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책없이’ 등의 뜻의 사투리.
*은연중(隱然中) ; 남이 모르는 가운데.
*주리(周牢)를 틀다 ; 주리 틀다. 예전에, 죄인을 심문할 때 주리(죄인의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긴 막대기를 끼워 비틀던 형벌)의 형벌을 주다.
*영판 ; 아주.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짓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
*장좌불와(長坐不臥) ; 밤이 되어도 눕지 않고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惺惺]한 상태.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일과성(一過性) ; 어떤 현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참고]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〇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위조지폐(僞造紙幣 거짓 위/지을 조/종이 지/화폐 폐) ; 지정된 발권 은행이 아닌 곳에서 만들어 낸 가짜 지폐(돈).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정법(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사집(四集) ; 사찰에 있는 강원(講院)의 사집과(四集科)에서 배우는 네 과목, 곧 규봉 종밀 스님의 <도서(都序)>, 대혜 스님의 <서장(書狀)>, 보조 지눌 스님의 <절요(節要)>, 고봉 원묘 스님의 <선요(禪要)>를 말한다.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휴헐지지(休歇之地) ; 모든 사량분별을 끊어 불성(佛性)을 깨닫고 생사의 속박을 벗어난 자리.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노바심절(老婆心切) ; 노파(老婆)가 자식·손자를 애지중지 하듯이, 스승이 수행자에게 나타내는 자비심으로 지극히 친절(親切)하다는 뜻.
§(779) (게송)석화광음주~ / ‘나의 참마음’을 찾는 활구참선법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 / 만년위패 설치 목적—선망부모 영가의 해탈을 위해.
〇무상(無常)한 세계에 태어났지마는, 이 자리에 모이신 청신사 · 청신녀 · 비구 · 비구니 여러 도반들은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을 수 있는 그러한 발심(發心)을 하고, 그러한 이 세계 오십 억이 넘는 인간 속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〇‘이 뭣고?’ 속이 상하는 일을 보거나 듣더라도 그리 떨어지지 말고 ‘이뭣고?’ 그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앉을 때는 앉으면서 ‘이뭣고?’ 설 때는 서면서 ‘이뭣고?’ 걸어갈 때는 걸어가면서 ‘이뭣고?’ 돌에 발이 채여서 깜짝 놀랠 때에도 그 아픈 데에만 떨어지지 말고 그 찰나를 퍼뜩 ‘이뭣고?’를 찾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진짜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야말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을 찾은 사람이고, 이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도 윤회의 수레바퀴에 걸려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면서도 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
〇불법(佛法)이라 하니까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다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불법은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마음을 찾는 ‘마음 부처’를 깨닫는 것이 그것이 불법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779)—2016(병신년) 법보재(4.22) (용779)
(1) 약 13분.
(2) 약 11분.
(1)-------------------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한데 홍안진백두(紅顔盡白頭)로구나
나무~ 아미타불~
인간백년몽(人間百年夢)이 부유일생사(蜉蝣一生事)로구나
나무~ 아미타불~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하고 홍안진백두(紅顔盡白頭)다. 이 시간, 세월이 빨리 흘러서 가는 것이 돌과 돌을 세게 부딪치면 거기서 불이 번쩍 나자마자 꺼져 버리는데, 젊었을 때 그 얼굴이 어느새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흰머리가 하나둘 생기다가 결국은 머리가 허예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이여.
인간 백년(人間百年)이라고 하는 것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이것이 백 년 동안 잠깐 꿈꾼 것에 비유될 수 밖에는 없는데,
하루살이가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은 물에서 빨간 애벌레가 꿈틀꿈틀 에스(S)자를 계속 이랬썼다저랬썼다 하다가 거기서 모기가 되어 가지고 나와서 짐승 피도 빨고, 사람 피도 빨아먹고 살다가 결국은 사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죽어가는 것과 무엇이 그렇게 크게 다를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러한 허망한 세계!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사람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정(情), 마음의 움직임은 희로애락과 생주이멸이 있는데.
부모한테서 태어날 때 갓난아기가 그럭저럭하다 보면 칠팔 세가 되어 학교 다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하고 그러다가 일생을 살다가 결국은 늙어서 저승길로 가는데.
길다고 보면 백 년이지마는 그 백 년이라고 해봤자 울다가 웃다가 성내다가 하다 보면은 하루하루가 지내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러한 무상(無常)한 세계에 태어났지마는, 이 자리에 모이신 청신사 · 청신녀 · 비구 · 비구니 여러 도반들은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을 수 있는 그러한 발심(發心)을 하고, 그러한 이 세계 오십 억이 넘는 인간 속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이 그렇게 멀고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쁜 일을 보면 웃고, 슬픈 일을 보면 울고, 속상한 일을 보면은 성을 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데 그러한 속에서—성낼 줄 알고,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착하게 마음 먹으면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낼 수도 있고, 악하게 먹으면은 아귀나 지옥 중생들과 같은 그러한 양상(樣相)을 띨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도법계(六道法界)—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육도법계 중에서 천상보다도 인간세계를 더 좋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천상이 좋다고 해 봤자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일만 있어 봤자 그래 봤자 인연이 다하면 또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고 또 지옥에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면 비록 빈부귀천도 있고 여러 가지 양상으로, 여러 가지 조건하에 놓여지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우리는 다행히도 불법(佛法)을 만나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갈 수 있는 정법(正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하고 행복하고 우리는 선택된 존재들인가를 우리는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찾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이 있으니 무엇을 볼 수도 있고, 코가 있으니 냄새도 맡을 수가 있고, 귀가 있으니 무슨 소리를 듣고 알 수도 있고.
그 속에서 그냥 기뻐하다 말고, 맛있으면 맛있는 데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그때가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나의 참마음’ ‘나의 부처님’을 찾는 바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은 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나 가지고도 그럭저럭 철저한 발심을 하지 못한다면은 정말 안타깝고 딱하고 불쌍하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고, 몸이 아무리 장사처럼 건강하다고 한들 또 복이 많아 가지고 억만장자가 된들 그럭저럭 살다보면은 생로병사 속에 휘말려서 결국은 그 아까운 인간으로 태어난 계기를 놓쳐 버리고 허망하게 다시 윤회(輪廻)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輪廻)의 길이란 것은 아무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지은 대로 받고, 지은 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아무도 면할 수는 없으나,
다행히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듣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거기에 바로 그 찰나찰나가 ‘참나’를 찾는 발판이요, 진짜 참 부처님의 법을 믿는 것이고, 참 부처님의 법을 옳게 믿고 실천만 해 나가면 우리가 얼굴이 이쁘게 생겼거나 안 이쁘게 생겼거나, 지식이 있거나 지식이 없거나 그거 전혀 따질 것이 없습니다.
‘이 뭣고?’ 속이 상하는 일을 보거나 듣더라도 그리 떨어지지 말고 ‘이뭣고?’
그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앉을 때는 앉으면서 ‘이뭣고?’ 설 때는 서면서 ‘이뭣고?’ 걸어갈 때는 걸어가면서 ‘이뭣고?’ 돌에 발이 채여서 깜짝 놀랠 때에도 그 아픈 데에만 떨어지지 말고 그 찰나를 퍼뜩 ‘이뭣고?’를 찾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진짜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야말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을 찾은 사람이고,
이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도 윤회의 수레바퀴에 걸려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면서도 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있으니 그것을 가로되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구십이 되어 가지고 이 법상에 올라와서 여러분께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결집해 논 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데 그것을 다 읽고 해석할 줄 안다 해도 자기가 자기 마음을 찾는 ‘이뭣고?’을 아니하면 글을 외워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면 그 공덕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름대로 다 공덕(功德)이 있습니다마는 그 경(經)의 뜻을 옳게 이해한다면 바로 ‘이뭣고?’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찾고, 자기를 찾아야 팔만대장경의 뜻을 정말 옳게 소화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처음~13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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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병신년 법보재(法寶齋)를 맞이해서, 이 법보전(法寶殿)을 전강 조실스님께서 창설하신 것은 우리 살아있는 사람도 중요하지마는 우주 법계에는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조상들의 영가(靈駕)가 몇천억만 명인줄 알 수가 없습니다.
수없이 몸을 받아서 태어나서 살다가 또 몸을 바꾸고 몸을 바꾸고 그랬는데, 지금 용화사 법보전에는 우리의 선망부모이신 영가 위패번호가 101,682위의 영가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위패번호는 101,682번까지 나갔지마는 그 위패에 모신 영가의 수는 158,632위입니다.
그 영가(靈駕)가 좋은 자손을 두지 않았으면 그냥 우주 법계에 떠돌이 영가로서 정처없이 헤매다가 어디서 재사 지내면 음식 냄새 맡고 혹여 무엇이라도 얻어먹을까 헤매고, 지옥·아귀·축생 육도를 윤회를 하면서 그렇게 처량한 영가의 신세로 떠돌이 귀신이 되고 말 텐데,
다행히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과 원력(願力)으로 법보전을 지으시고 만년위패(萬年位牌) 제도를 신설을 해서 정처없이 떠도는 우리의 선망부모의 영가를 편안하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이 법보전에 만년위패로 봉안(奉安)을 하게 되면은 아침마다 예불할 때 그 영가를 위해서 축원(祝願)하고, 마지(摩旨)를 올린 뒤끝에는 반드시 영가들도 다 배고픔을 면할 수 있도록 다 공양(供養)을 들게 하고,
법회 때마다 좋은 법문을 들려서 그 영가들의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어서 영가로부터서 해탈을 해 가지고 극락세계나 천상에 가서 태어나거나 인연에 따라서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하실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설립하신 이 법보전의 만년위패 제도는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정법을 믿게 하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지마는 우주 법계의 억만 영가들, 우리의 선망부모들의 영가들을 위해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과 같은 큰 자비심으로 환히 육도법계를 다 관찰을 하시고 이 법보전을 창설을 하고 만년위패 제도를 설치를 한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이만큼 건강해서 살고 있지마는 우리도 10년 20년 30년 많아 봤자 100년, 결국은 우리도 이 육체를 버리고 또 다른 세계로 태어나거나 영가의 신세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손이 효심이 있어서 우리를 잘해 줄 수도 있겠지마는 자손들이 만년위패를 해 주고, 천도(薦度)를 해 주기를 바래지 말고 우리가 이만큼 살아있을 때 조실 스님의 법문을 열심히 들으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자손들의 신세를 안 지고도 우리는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무엇을 보면 ‘크다, 작다, 빨갛다, 누렇다, 까맣다’ 알고, 귀로 뭔 소리를 들으면 ‘저건 누구의 말소리다, 저건 개 짓는 소리다, 저건 새가 지저귀는 소리다’ 알게 되고, 입으로 음식을 먹으면 ‘쓰다, 달다, 맵다, 맛있다, 맛이 없다’ 알게 됩니다.
바로 그 찰나찰나—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그때그때 그 찰나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됩니다. 바로 그때가 ‘참나’를 찾는 발판이고, 나의 부처를 찾는 최고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 찰나찰나, 하루의 시간으로는 24시간이라고 그러지마는 찰나찰나로 찾으면은 수억만 찰나가 되겠는데, 그 찰나찰나가 바로 내가 나의 부처를 찾는 발판이고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정법을 믿는 사람이고, 인생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라 하니까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다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불법은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마음을 찾는 ‘마음 부처’를 깨닫는 것이 그것이 불법인 것입니다.
산승이 지금 구십이지마는 며칠을 갈런지 몇 달을 갈런지 언제 죽을런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결국은 죽기는 언제 죽더라도 죽게 될 것입니다마는,
죽는 것을 진짜 죽음이 두렵다면 이만큼 살아있을 때 시간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나의 부처 찾는, 참나를 찾는 그 시간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앉아서나 서서나 ‘이뭣고?’ 속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이렇게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이요,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듣고도 실천을 안 한 사람은 좋은 약을 두고도 안 먹고 꿍꿍 앓고 있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약이 있으면 먹어야—의사의 말을 듣고 그 병에 맞는 약을 실지로 먹어야 약 효험을 받아서 병이 낫고 건강을 찾을 수가 있는 것처럼,
내가 목 아프게 이렇게 여러분께 간절히 말씀을 드린 이 말씀을 정말 뼛속 깊이 명심을 하고, 오늘부터는 새로 태어난 셈치고 정말 행주좌와 어묵동정, 희로애락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서 사람 몸 받았을 때 정말 최상승법 불제자(佛弟子)가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박수)
박수를 치신 뜻은 ‘그렇게 철저히 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산승(山僧)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한 시간 두 시간 하루종일이라도 말씀을 드리고 싶지마는 또 다음 시간을 미루고 다 못다한 말을 이 주장자(拄杖子)에게 맽기고 내려가겠습니다.(13분39초~24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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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西山 休靜) ‘탄세(嘆世, 세상을 탄식함)’ 게송 참고.(石火光陰走 紅顔盡白頭 山中十年夢 人世是蜉蝣)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양상(樣相 모양·형태·상태 양/서로·모양·바탕 상) ;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이나 상태.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화두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결집(結集) ;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함께 외어 기억하는 형식으로 모아서 정리한 것. 인도에서는 붓다의 입멸 후부터 2세기경까지 4차례의 결집이 있었고, 그 후 현대에 오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여러 차례의 대장경(大藏經) 결집이 있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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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와 법보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년)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〇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佛菩薩)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원력(願力) : 원(願)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 숙원력(宿願力), 대원업력(大願業力), 서원(誓願), 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봉안(奉安) ;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나 화상(畵像)을 모시어 둠.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님이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사시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마지 올린다’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摩指, 摩旨, 磨旨) ‘손으로 만들어 올린다 혹은 정성스럽게 만든 공양을 올리오니 제 뜻을 감읍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777) (게송)일종위배본심왕~ / 최상승법(最上乘法) / 내가 나의 마음의 부처를 찾는 일보다는 더 급하고 요긴한 일은 없다 / (게송)약인정좌일수유~.
〇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데로 쫓아가지 않고, 귀로 무슨 말을 듣더라도 듣는 데에 끌려가지 않고, 코로 냄새를 맡거나, 음식을 먹거나, 속이 상할 때나 기쁠 때나 언제 어디서,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항상 그 자리를 발판으로 해서 바로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〇부처님은 원래 부처님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혀를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줄 아는 그놈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요, 우리의 마음의 부처인 것입니다.
〇이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만 하면 반드시!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유식이나 무식도 상관이 없고, 얼굴이 이쁘고 미운 것도 상관이 없고, 여자나 남자나 전혀 그런 것도 가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나의 마음의 부처를 찾는 일보다는 더 급하고 요긴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〇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는 공덕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부처님이 되기 위한 계단을 밟아가는 것이여. 우리가 말세에 태어났어도 이 최상승법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송담스님(No.777)—2016 동안거 해제(16.2.22) (용777)
(1) 약 18분.
(2) 약 9분.
(1)------------------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 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 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나와서 몇 번이나 삼도(三途)와 사생(四生)을 겪어왔던가!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오늘날 번뇌의 모든 생각을 씻어버리고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스스로 본고향에 돌아왔구나.
이 고인의 게송을 음미해 보면, 이 고인의 게송이지마는 현대 우리 낱낱에게 해당이 되는 게송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본래, 본래 부처님이었었고 불보살로서 그렇게 지내다가 어떻게 한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이 말세에 사람의 몸을 받아났습니다.
이 사람의 몸을 받아날 때까지 그 동안에 지옥 아귀 축생과 사람 축생 아귀 그런 생사 윤회를 겪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과거는 태어날 때부터서 다 잊어버리고 모르지마는 육신통(六神通)이 난 불보살은 과거 몇 겁 이전의 일도 환히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 말세에 태어났지마는 좋은 부모를 만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고, 부모로 인해서 교육을 받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다행히 불법을 만나 가지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불교에는 소승, 중승, 대승이 있는데 이 최상승(最上乘)이라 하는 것은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유식무식(有識無識)을 막론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입으로 먹고, 때로는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게 되고 오늘날 이렇게 불법을 만나서,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이 몸을 가지고 이 몸속에 있는 자성(自性)의 부처를 깨닫는 것입니다.
밖에 팔만대장경을 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한 것은—그것도 중요한 불교의 한 부분이지마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시청언동(視聽言動)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자기의 부처를 찾는 것이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데로 쫓아가지 않고, 귀로 무슨 말을 듣더라도 듣는 데에 끌려가지 않고, 코로 냄새를 맡거나, 음식을 먹거나, 속이 상할 때나 기쁠 때나 언제 어디서,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항상 그 자리를 발판으로 해서 바로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은 가장 쉽고 간단한 문제고,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누구라도 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특히 이 말세는 과학이 발달해서 살기에는 편리하지마는 보통 ‘참나’를 찾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점점 줄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 속에 있는 나의 부처님을 찾는 것보다 더 급하고 요긴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밖으로 지식이 많거나, 재산이 많거나, 권리가 많거나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것 가지고는 우리 생사(生死)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속이 상할 때나, 앉아서나 누워서나 항상 자기를 찾는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가운데 최상승법이요, 가장 깊고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도 아니고, 권리가 많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살아가는 데 일시적인 일에 지나지 못하고, 잘못하면 그런 것을 누리다가 죄를 짓고 또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행히 이 말세지마는 사람 몸을 받아났고 또 불교를 믿게 되고 오늘 산승(山僧)과 같이 이 최상승법, 자기가 자기 마음의 부처를 찾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을 나는 대단히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많이 살아봤자 팔구십, 백세 살고 대부분 그 안에 육칠십에 죽기도 하고, 뱃속에서 죽기도 하고, 낳다가 죽기도 하고, 이십 세 안에 죽기도 하고, 삼십 안에 죽기도 합니다.
언제 죽을 줄 모르는 그러한 허망하고도 무상한 몸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이렇게 내가 내 마음의 부처님을 찾는 이야기를 하게 된 인연을 나는 대단히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이러한 모임을 자주 갖고,
세속에서 살면서—세속에서는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여의고 살 수가 없습니다. 흥망성쇠와 빈부귀천은 그 어느 것엔가는 얽매여서 살고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기도 하는데, 바로 사바세계라는 것은 그런 세계지마는,
그러한 속에서 내 마음의 부처를 찾게 된 이 최상승법을 이야기하는 이런 도반(道伴)이 된 것을 대단히 다행하고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래 부처님이시면서 어떻게 한 생각을 잘못해 가지고 본심(本心)의 왕(王), 본심의 부처를 망각하고 이렇게 오늘날까지 왔는데 그 안에 겪어온 일은 우리가 상상 이외의 중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불법을 만나지 않았고 내가 내 마음의 부처를 찾는 공부를 모른다면은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도 또 윤회를 하고 지은 업에 따라서 지옥에도 가고 축생도 되고, 흥망성쇠 속에서 한없는 여행을 하면서 마지막에 이 지구가 없어지게 되고 그럴 때에는 우리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금생에 이렇게 사람 몸을 받아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온 것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고 다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이뭣고?’를 놓치지 않고 자기 마음의 부처 찾는 일밖에 그밖에 일은 다음다음 일이고,
앉아서나 서서나, 밥 먹을 때나,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이뭣고?’를 도반으로 삼고, ‘이뭣고?’를 자기의 본(本) 직업으로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산다면 비록 이 말세에 태어났다 하더라고 지금이 바로 정법(正法)의 시대요,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원래 부처님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혀를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줄 아는 그놈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요, 우리의 마음의 부처인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망각하고 모르고 산다면은 축생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육도(六途) 중생 가운데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나서 불교를 믿고 최상승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하고 듣게 된 것을 항상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1분 1초도 화두를 놓치지 않고 화두를 항상 챙기고, 화두를 망각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의 부처를 놓고 지낸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보통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이뭣고?’ 귀로 무엇을 듣더라도 그리 쫓아가지 않고 ‘이뭣고?’ 슬플 때도 슬픈 데에만 빠져 가지고 자꾸 슬픈 일만 생각하면 점점 슬퍼지는 거고, 속이 상하는 일을 보고나 듣거나 느끼더라도 그것을 따라가면 점점 속이 상하고 슬퍼지고 자기 마음은 점점 황폐해지고 건강도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한번 따라서 해 보세요.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뭣고?’라 하는 것은 ‘이것이 무엇인고?’한 말이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뭐꼬(이뭣고)?’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는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서 ‘이뭣고?’ 옛날부터서 그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할 때에 그 알 수 없는 의심!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이리저리 이론적으로 따지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이뭣고?’하고 의문, 의심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고 불교 교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그것은 참선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그러겠지마는 참선은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리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도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코 앞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뿐만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다 보면 모든 번뇌도 망상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하게 되고, 그래 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자기의 마음 부처를 깨닫게 되는 때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만 하면 반드시!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유식이나 무식도 상관이 없고, 얼굴이 이쁘고 미운 것도 상관이 없고, 여자나 남자나 전혀 그런 것도 가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나의 마음의 부처를 찾는 일보다는 더 급하고 요긴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병신년(丙申年) 1월 15일 해제날인데 그동안에 선방에서 또는 가정에서 정진하던 도반들이 이렇게 나왔으니 내가 정말 마음속으로 여러 도반들에게 해주고 싶고, 같이 이 얘기에 대해서 깊이 마음속에 새기고자 해서 말씀을 드린 것이니,
그동안에도 열심히 나름대로 정진을 하셨겠지마는 오늘부터서는 정말 새로운 마음으로 그동안에 좀 그럭저럭 그냥 살아오고 지내왔다 하더라도 오늘부터서는 정말 새로운 마음으로 최상승법의 도반으로서 앞으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17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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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보탑필경쇄위진(寶塔畢竟碎爲塵)이나 일념정좌성정각(一念靜坐成正覺)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다.
만약 사람이 고요히 앉아서 잠깐 동안 참선을 하면 항하사(恒河沙) 칠보탑을 조성해서 모신 것보다도 그 공덕이 더 수승하다 이말이여.
왜 그러느냐? 보탑(寶塔)은 필경쇄위진(畢竟碎爲塵)이나 일념정진(一念精進)은 성정각(成正覺)이다.
보배로 칠보탑을 조성한 공덕도 대단히 큰 공덕이 되지마는 물질로 이루어진 보탑이라, (보탑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티끌이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생각’ 돌이켜서 정진을 하고 ‘이뭣고?’를 하면 그 공덕으로 정각(正覺)을 이루기 때문이다. 정각은 ‘깨달음을 이루어서 부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는 공덕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부처님이 되기 위한 계단을 밟아가는 것이여.
우리가 말세에 태어났어도 이 최상승법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계 65억 인구가 있다 하지마는 이 최상승법 참선법을 믿고 수행한 사람은 그 몇천만분의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몸을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해서, 불법을 믿게 되게 해 주신 부모와 스승에 대해서 하루하루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서 효심(孝心)을 일으키고 부모님을 잘 받들면서 자기가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아들과 딸과 며느리들도 여러분의 그 믿음과 사상을 따라서 다 불법을 믿고 착한 사람이 되고, 사람의 모범이 되고 이 말세에 태어났어도 반드시 지옥 아귀 축생의 삼도(三途)에 떨어지지 않고, 가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도 무상(無上) 깨달음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또 해제 기간이 되는데 그 석 달 동안을 가정에서, 각각 자기 처소에서 오늘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부탁한 말씀을 항상 잊지 말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되,
‘이뭣고?’를 하는 데는 자세를 바르게 해서 가부좌를 하면 좋고, 반가부좌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침대에 비겨서 그럭저럭 지내거나 그러지 말고, 항상 앉았다 하면은 방석을 깔고 딱! 반가부좌를 하면서 복식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항상 그것이 아주 습관화가 되도록 그렇게 하면서 생활을 해 나가야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고 잘못된 생각을 안 하고 살게 되고, 저절로 몸과 마음이 부처님 제자로서 말세에 태어난 정법학자로서 인생으로 태어난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해제 기간이니까 여행을 하리라’ 그런 생각을 갖게 되고, 때로는 ‘결제 동안에 정진하느라고 애썼으니까 좀 자유롭게 지내자’ 여행도 하고, 불규칙한 생활도 하고, 까닥 잘못하면은 해태하고 잡담으로 그럭저럭 아까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산승과 같이 이 말하고 듣는 이 기념(紀念)으로 해제 동안에도 결제 동안에 정진하던 그 정신과 그 수행을 해제 동안에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더욱 잘 단속을 하면서 수행을 해야 또 다음철 여름 결제 때에도 또 정진하는 데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이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이니다
나무~ 아미타불~ (17분52초~26분1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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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종위배본심왕~’ ; [석문의범(釋門儀範)] 관욕(灌浴) 입실게(入室偈) 참고.
*본심왕(本心王) ;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삼도(三途•三塗)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 지옥•아귀•축생의 생존.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흥망성쇠(興亡盛衰) ; 흥하고 망함과 성하고 쇠함. 곧 어떤 사물·현상이 생겨나서 소멸하는 전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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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인정좌일수유~’ ; 보조 지눌(普照知訥) 스님의 [진심직설(眞心直說] 진심공덕(眞心功德) 장(章)에서 ‘古頌’으로 인용한 게송 참고.
*항하사(恒河沙) ; [불교]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비기다 ; (무엇에) 비스듬하게 기대다.
*기념(紀念, 記念) ;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사건 등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게송)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 ‘원하옵건대 법계의 모든 중생이 같이, 저희 모두 다 동시에 성불하여지이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779) (게송)석화광음주~ / ‘나의 참마음’을 찾는 활구참선법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 / 만년위패 설치 목적—선망부모 영가의 해탈을 위해. (0) | 2016.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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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 구족계 수계 법문 / (게송)분골쇄신미족수(粉骨碎身未足酬)~ / (게송)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 (0) | 2016.04.04 |
§(776) 전강선사 41주기 추모재. (0) | 2016.01.13 |
§(775) (게송)산월투창백~ / 활구참선 요점은 의단(疑團) / 의심(疑心)의 관(觀) / 무상 속에서, 생노병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 / (게송)백년지시잠시간~. (0) | 2015.11.28 |
§(774) (게송)약인정좌일수유~ / 화두, 불명, 십선계. (0) | 2015.06.03 |
§(523) (게송)일파재동만파수~ / 석가모니 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 / 諸佛說弓 祖師說絃 / (게송)참선수투조사관~ / 성도재(成道齋)의 의의(意義).
〇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한량없는 법을 설하시고서도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도록 단 한 글자도,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시고도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한 바로 거기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〇조사관을 뚫을라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서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어야 조사관을 뚫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게 아니여. 백년을 두고 따져 봤자, 그럴싸한 해답을얻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〇부처님께서 몸소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올바르게 공부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여. 바로 깨달음을 여실(如實)히 보여 주시는 것이 바로 이 성도재(成道齋)의 의의(意義)다. 부처님이 그렇게 확철대오 하는 그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서 그것을 믿고 거기에서 용기를 가지고 우리도 청춘을 버리고 인간의 모든 욕락을 버리고 도를 닦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말이여.
**송담스님(No.523)—93년(계유년) 성도재 법회(93.12.08.음) (용523)
약 22분.
일파재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한데 사의순환기료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나무~아미타불~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하면 방호출신장부아(方號出身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재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 한 물결이 일어나자마자 일 만 물결이 따르더라.
사의순환기료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개미가 쳇바퀴를 돌듯이 끝없이 돌고 돌아서 언제 끝날 때가 있을까 보냐?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하면, 오늘 그대와 더불어 옴막 잘라서 끊어버려야사만,
방호출신장부아(方號出身丈夫兒)다. 바야흐로 몸을 뛰쳐나온 대장부(大丈夫)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삼천 년 전에 중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싯달(siddhartha) 태자’라고 하는 태자로서 탄생을 하셨어.
그래 가지고 16세에 야수다라와 결혼을 하시고 29세에 출가를 하셔서 설산에 들어가서 6년 동안을 하루에 일마일속(一麻一粟), 삼씨 하나와 곡식 알 하나를 그것을 잡숫고 무서운 고행을 하셨다.
그때 당시 인도에는 부처님께서 탄생하기 전부터, 출가해 가지고 산에 들어가서 고행(苦行)을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는 그러한 외도(外道)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도를 닦는다’ 하면은 고행이여. 고행이 바로 수행의 전부였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행—도저히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무서운—육체를 괴롭히는 그러한 고행을 했습니다. 가시 위에 뒹굴기도 하고, 불 속에 왔다갔다 하면서 그 뜨거운 것을 참기도 하고, 굶는 거.
부처님께서도 설산에 들어가셔서 일마일속(一麻一粟)을 잡숫고서 그 무서운—여러분도 사진을 통해서 보셨겠지마는 뼈가 완전히 드러나는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그러한 고행하시는 모습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행을 하셨는데, 이 고행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해탈도를 증득하는 바른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서 니련선하(尼連禪河)에 가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Sujata)라고 하는 처녀가 갖다 바치는 유미죽(乳糜粥)을 받아서 잡쉈습니다. 그래 가지고 기력을 챙기셨습니다.
정각산(正覺山) 보리수(菩提樹) 하에 앉아서 『정각(正覺)을 얻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시고서 49일 동안을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 49일째 날이 바로 12월 8일, 납월팔일(臘月八日) 새벽에 밝은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그때가 35세였습니다.
그런 뒤에 바라나국 녹야원(鹿野苑)에 가서 6년 동안을 같이 고행하던 교진여 등 오비구(五比丘)를 제도하시고, 삼가섭(三迦葉)을 제도하시고, 그런 뒤에 마갈타국 빈바사라왕 또 사리불, 목련 존자를 제도하시고,
성도(成道) 후 3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부왕(父王)을 제도하시고, 아란·난타·라후라 등을 차례로 다 제도하시고, 그 이후로 갠지스 강 남북 마갈타국, 코살라국, 비사리 등지를 왕래하시면서 보수 80세에 이르시도록 팔만사천(八萬四千) 무량법문을 설하셨습니다.
49년 동안 설하시고서, 한량없는 법을 설하시고서도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도록 단 한 글자도,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시고도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한 바로 거기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49년 동안 설하신 교설(敎說)은 활등과 같고, 활등은 이래 굽어 가지고 돌아가는 거고, 활줄은 직선이다. 교설은 활등과 같고 활구참선법은 활줄과 같이 바로 설하신 것이다’ 이런 말씀 하셨는데,
교학은 가르킬 수가 있고, 배울 수가 있고, 자꾸 배우고 익히고 해서 알아 들어가고 이렇게 하는 건데, 참선법은 가르켜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이여.
참선하는 방법은 일러 줄지언정 바로 깨닫는 것은 자기가 깨달라야지, 가르켜서 깨닫게는 못하는 거여.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것이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 끊어진 것을 요하느니라.
조사관, 우리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공안을 타파(打破)해야만 해.
‘이뭣고?’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건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이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의단(疑團)!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하고 꽉 막혀야... 그래서 의관(疑觀)이거든. 의심관(疑心觀)이여.
처음에는 자꾸 들 때만 화두가 있다가 금방 딴 생각이 일어나고, 딴 생각이 일어나서 한참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때사 정신을 차리고 다시 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하는 사람은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 ‘이뭣고?’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챙기고 또 챙기고 하다 보면 나중에는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 때가 온다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더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그 의단이 클 수가 없어.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기연(機緣)에 툭! 터져 버리는 거다 그말이여. 그게 바로 조사관을 뚫는 거다.
조사관을 뚫을라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서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어야 조사관을 뚫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게 아니여. 백년을 두고 따져 봤자, 그럴싸한 해답을얻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맛이 없고, 몇 번이나 ‘그만둘까? 이거 해 가지고 참으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내가 이거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차라리 머리를 기둥이나 벼람박에다 부딪쳐서 차라리 죽어버려야 할까?’ 다리를 뻗고 고인은통곡을 하는 이도 있고,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조사(祖師)를 믿기 때문에 숙세에 정법의 인연을 심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잠시, 떨쳐 버리고 다시 분심(憤心)을 일으키고 화두를 거각(擧却)해.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다그쳐 나감으로 해서결국은 타성일편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해. 목적지를 찾아서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데 이제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니 물도 다 끊어지고 산도 콱 막혀서 인자 더이상 갈 곳이 없구나. 내가 갈 곳은 어디냐?
이렇게 물도 끊어지고 산도 콱 막혀서 이제 길이 콱 끊어졌으니 ‘이제는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그러나 거기서 쉬지 않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서 한 고개를 넘어가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파란 버들은 그윽히 휘늘어지고 밝은 꽃은 환하니 핀 또 한 마을이 거기에 있구나.
참선이 어찌 수월할까 보냐 그말이여.
무량겁을 두고 한 생각 미(迷)한 그 원인으로 해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 속에서 업(業)을 짓고, 그 업으로 인(因)해서 점점 더 깊은 업을 짓고, 그래 가지고 삼악도(三惡道)를 돌고 돌아 육도(六途)를 윤회해 오늘에 이르렀는데 어찌 확철대오 하는 길이 그렇게 쉬울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어려운 것이 당연하고 힘든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우리 부처님께서는 사실은 진묵겁(塵墨劫) 전에 다 확철대오해서 성불한 그러한 부처님이 중생 교화를 하기 위해서 진즉(趁卽) 원(願)을 세워 가지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왕궁에 태어나 가지고 출가하셔서 6년 고행 끝에 결국은확철대오 하셨는데,
‘왜 6년 고행을 하셨느냐?’하면은 ‘고행(苦行)을 해야만 도를 얻을 수가 있다’고 사람들이 모두가 다 믿고 있는데, 고행을 위한 고행은 정말 참다운 바른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말이여.
열심히 수행하다 보니 맛있는 것 찾을 겨를이 없고, 좋은 옷을 입을 겨를도 없고, 부귀영화 언제 그런데 한눈 팔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이지 ‘몸뚱이를 괴롭히는 것으로써 그러한 고행을 하는 것이 바로 참다운 수행이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 몸소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올바르게 공부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여. 바로 깨달음을 여실(如實)히 보여 주시는 것이 바로 이 성도재(成道齋)의 의의(意義)다 그말이여.
부처님이 그렇게 확철대오 하는 그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서 그것을 믿고 거기에서 용기를 가지고 우리도 청춘을 버리고 인간의 모든 욕락을 버리고 도를 닦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말이여.(처음~21분3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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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파재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옴막 ; '전부(全部)'의 사투리.
*대장부(大丈夫)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음역어는 ‘실다(悉多)’, ‘실달(悉達)’, ‘실달다(悉達多)’이다.
*고행(苦行) ; 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외도(外道) ;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피골상접(皮骨相接) ; 살가죽[皮]과 뼈[骨]가 맞붙을[相接]정도로 바짝 마름.
*니련선하(尼連禪河) ; 네란자라(nerañjarā) 강. 중인도 마갈타국 가야성의 동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항하(恒河, 갠지스 강)의 한 지류
*유미죽(乳糜粥 젖 유/죽 미/죽 죽) ; 우유에 쌀을 넣어 만든 죽.
*보리수(菩提樹) ; 산스크리트어 bodhi-vṛkṣa 원래 이름은 아설타(阿說他, 산스크리트어 aśvattha)이며, 그 열매를 필발라(畢鉢羅, 산스크리트어 pippala)라고 하는 데서 이 나무를 필발라수(畢鉢羅樹)라고도 하고, 붓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였으므로 보리수라고 함. 상록 교목으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함.
*정각(正覺) ; ①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 바른 깨달음. 진리를 깨닫는 것. ②부처님. 여래(如來). 진리를 깨달은 사람.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샛별이 뜰 무렵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하(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한다. 일명 성도재일(成道齋日).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녹야원(鹿野苑)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붓다 buddha)이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강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의 터. 사슴동산(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200㎞가 된다. 탄생(誕生:룸비니) · 성도(成道:붓다가야) · 입멸(入滅:쿠시나가라)하신 곳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
*오비구(五比丘)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붓다 buddha)이 깨달음을 성취한 후, 처음으로 교화한 다섯 비구. 붓다가 출가하던 때 부왕(父王, 정반왕)의 명으로 이들은 우루벨라(uruvelā)에서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했으나 그가 네란자라(nerañjarā) 강에서 목욕하고 또 수자타에게 우유죽을 얻어 먹는 것을 보고 타락했다고 하여, 그곳을 떠나 녹야원(鹿野苑)에서 고행하고 있었는데,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그들을 찾아가 설한 사제(四諦)의 가르침을 듣고 최초의 제자가 됨.
①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 팔리어 aññā-koṇḍañña의 음사(音寫). 요본제(了本際)·지본제(知本際)라고 번역. 아야(阿若)는 이름, 교진여(憍陳如)는 성(姓).
②아설시(阿說示) : 팔리어 assaji의 음사. 마사(馬師)·마승(馬勝)이라 번역. 사리불(舍利弗)이 왕사성(王舍城)에서 아설시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목건련(目犍連)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③마하남(摩訶男) : 팔리어 mahānāma의 음사. 대명(大名)·대호(大號)라고 번역.
④바제(婆提) : 팔리어 bhaddiya의 음사. 인현(仁賢)·소현(小賢)·현선(賢善)이라 번역.
⑤바부(婆敷) : 팔리어 vappa의 음사. 기식(氣息)·장기(長氣)라고 번역.
*삼가섭(三迦葉)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붓다 buddha)의 제자인 3형제.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 팔리어 uruvelā-kassapa)과 나제가섭(那提迦葉, 팔리어 nadī-kassapa)과 가야가섭(伽耶迦葉, 팔리어 gayā-kassapa). 모두불을 숭상하는 사화외도(事火外道)였으나 붓다의 성도(成道) 후, 큰형 우루빈라가섭이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오백 명의 제자와 함께 그에게 귀의하자, 두 동생도 각각 삼백 명과 이백 명의 제자와 함께 붓다에게 귀의함.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도록 단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노라’ ; 서산대사의 『선교석(禪敎釋)』(淸虛 休靜撰)에서.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 智度論’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49년 동안 설하신 교설(敎說)은 활등과 같고 ~ 활구참선법은 활줄과 같이 바로 설하신 것이다’ ;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43~45 참고.
〇諸佛(제불)은 説弓(설궁)하시고 祖師(조사)는 説絃(설현)하시니 佛説無碍之法(불설무애지법)은 方歸*一味(방귀일미)어니와 拂此一味之迹(불차일미지적)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방현조사소시일심)이니 故(고)로 云(운), 庭前栢樹子話(정전백수자화)는 龍藏所未有底(용장소미유저)라 하시니라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한맛에 돌아가거니와, 이 한맛의 자취마저 털어 버려야 바야흐로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을 드러내게 된다。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고 한 화두는 용궁의 장경[龍藏]에도 없다고 하시니라.
〇註解(주해)
説弓(설궁)은 曲也(곡야)요 説絃(설현)은 直也(직야)며 龍藏(용장)은 龍宮之藏經也(용궁지장경야)라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하되 如何是*祖師西來意(여하시조사서래의)닛고 州答云(주답운),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라 하시니 此(차)는 所謂*格外禪旨也(소위격외선지야)라
【 魚行水濁(어행수탁)이요 鳥飛毛落(조비모락)이니라
활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굽다’는 뜻이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다’는 뜻이며, 용궁의 장경이란 것은 용궁에 모셔 둔 대장경이다。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조사가 서(西)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뜰 앞에 잣나무이니라’하시니, 이것이 이른바 격 밖의 선지[格外禪旨]이다.
【 고기가 놀면 물이 흐리고 새가 날면 깃이 떨어지느니라.
〇역주(譯註)
①일미(一味) : 만법(萬法) 곧 온갖 일과 모든 물질들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낱낱이 다른듯 하지마는 실상은 절대 평등하여 다르지 않고(不二) 똑 같은 것(眞如)이다.
②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을 배우려고 하였다。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③격외선지(格外禪旨) : 참선의 도리는 보통 사람의 범상한 소견에 벗어난 것이어서 있는 마음으로나, 없는 마음으로나 다 알지 못하는 것(有心無心俱透不得)이다.
*(게송)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무문 혜개 스님의 [무문관(無門關)]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 참고. *絶=絕(끊을 절).
*(게송)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 중국 남송 세대의 시인, 육유(陸遊)의 시 《遊山西村》 참고.
莫笑農家臘酒渾,豐年留客足雞豚。山重水復疑無路,柳暗花明又一村。
簫鼓追隨春社近,衣冠簡樸古風存。從今若許閑乘月,拄杖無時夜叩門。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이뭣고?’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 ; 분류 ‘이뭣고 화두’ ‘화두(공안)’ 참고.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 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결같은 마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진즉(趁卽 좇을·뒤쫓아 따라붙을 진/곧·즉시 즉) ; 과거의 어느 때에 이미.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고행(苦行) ; 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여실(如實)히 ; 사실과 꼭 같게.
*성도재(成道齋) ; 매년 12월 8일(납월 팔일 臘月八日),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한 날에 행하는 법회.
§(422) (게송)정종소식몰자미~ / 마조(馬祖) 스님의 깨달음 / 마조스님과 양좌주 / 어째서 의심만을 일으키라고 하느냐? / 묘관(妙觀), 의심관(疑心觀).
〇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을 부딪힐 때,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그 여섯 가지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하자마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疑心)을 거각(擧却)하는 것이다.
〇‘이뭣고?’ 한번 드는 데에서 눈으로 무엇을 보되 본 바가 끊어져 버리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되 들은 바가 끊어져 버리고, 무슨 지나간 생각, 미래 생각, 현재 부딪히는 생각이 일어나되, 바로 그 생각 일어나는 데에 집착한 바가 없이 ‘이뭣고?’ 의심을 들어 버리니 무슨 재미날 것이 있으며, 무엇이 알아질 것이 있으며, 무엇이 얻어질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〇과거의 모든 도인들이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다 그런 경전을 다 통달하고도 남는 그러한 대도인들이 말세의 우리 중생들도 그러한 방편설(方便說)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근기가 약한 하근기(下根機)로서도 철저히 이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이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간화선(看話禪),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〇마음을 한군데 모이서, 하나만 똑 한군데에다가 모이고 그놈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망상도 차츰 없어지고, 차츰 마음이 고요해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기는 어려워.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조용하게 마음을 공(空)한 자리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거 깨달은 것이 아니여.
신선도나 외도들은 마음을 공(空)하게 해 가지고 공(空)한 자리에 떠억 머물러 있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데, 그렇게 하면 오신통(五神通)은 나는 수가 있으나 누진통(漏盡通)은 못 얻는 거여. 누진통은 탁! 깨쳐야지, 고요한 경계를 지켜 나간다고 해서 깨달라지는 것은 아니여.
〇참선을 해 나갈 때 의심을 하는 것도 그 묘관(妙觀)이라야 돼. 불급불완(不急不緩)—너무 급하고 조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늘어져 처지지도 말게, 불급불완한 그 묘(妙)한 관(觀)이라야 되거던. 묘관(妙觀)! 의심관(疑心觀)이거든.
**송담스님(No.422)—90년 7월 첫째일요법회(90.07.01) (용422)
(1) 약 22분.
(2) 약 11분.
(1)------------------
정종소식(正宗消息)은 몰자미(沒滋味)허되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종소식(正宗消息)은 몰자미(沒滋味)여.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내가 나의 면목(面目)을 봐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은 재미가 없어.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다.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따지지 말어라.
세속의 모든 학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해서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또 적용하고, 그래 가지고 ‘아하! 그러므로 이렇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고 결론을 내리는데,
이 활구참선법은 여하약하를 따지는 것이 아니여.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여. 다만 은산철벽과 같은 대의단(大疑團)을 타파(打破)해 갈 뿐이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다맛 꽉 맥힌 의심으로—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혀로 무엇을 맛을 볼 때나, 몸뚱이로 차웁고 더운 것을 느낄 때나, 생각으로 좋고 나쁜 것이 느껴질 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을 부딪힐 때,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그 여섯 가지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하자마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疑心)을 거각(擧却)하는 것이다.
별 재미가 없어. 무엇이 아는 것이 있고, 알아지는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마음에 합당한 것이 있어야 재미가 있을 텐데,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드는 데에서 눈으로 무엇을 보되 본 바가 끊어져 버리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되 들은 바가 끊어져 버리고,
생각에—무슨 지나간 생각, 미래 생각, 현재 부딪히는 생각이 일어나되, 바로 그 생각 일어나는 데에 집착한 바가 없이 ‘이뭣고?’ 의심을 들어 버리니 무슨 재미날 것이 있으며, 무엇이 알아질 것이 있으며, 무엇이 얻어질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아무 재미없는 가운데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의심을 자꾸 일으켜서 화두를 들려고 해도 그렇게 끊어져 버리고 달아나 버리고 하던 것이, 놓쳤다 하면 또 들고, 놓쳤다 하면 또 들고 자꾸 챙기면, 그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어느새 그것이 길이 들고 습관이 들어서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현전(現前)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렇게 조용하고 편안하고 맑고 깨끗해. 그렇게 편안하고 맑고 깨끗해지면 화두를 들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화두를 들면 오히려 그 고요해진 마음이 흔들릴까 두렵고, 화두를 들면 오히려 그 맑은 것이 흐려질까 봐 화두를 들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수가 있다.
아무리 깨끗하고 맑고 고요하다 하더라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맹~ 하니 있으면 그것을 무기(無記)라 그러는데, 무기의 상태는 지극히 편안하고 맑고 고요하기는 할지언정 무기(無記)의 공(空)에 떨어져 있는 한에는 확철대오는 없어.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그런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이르렀을 때 화두를 잘 거각해야 하는 거여.
그 고요한 가운데에도 화두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언젠가는 그 화두가 툭! 터지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생사대해(生死大海)를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건너뛰는 것이여.
오늘 경오년 칠월 초하루 첫째 일요일을 맞이해서 조실 스님의 활구참선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날씨는 차츰 더워져서 장마철에 접어들고 또 삼복더위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라 모처럼 그동안에 비가 좀 개고 일요일이 돌아왔으니 산으로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 많이 있으시겠지만, 그런 데에 놀러가는 것을 그만두고 이렇게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과연 법보제자(法寶弟子)로서 신심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서 매우 반갑고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당나라 때 마조(馬祖) 스님이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라고 하는 큰 도인이 계셨는데, 육조 스님 다음에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남악회양 선사 다음에 마조도일 선사, 그 마조도일 선사 밑에 여러 도인들이 백삼십 명이라고 하는 도인들이 그 밑에서 배출하셨는데,
그 가운데에도 조주(趙州) 스님이라든지 백장(百丈) 선사, 대매(大梅) 선사, 염관(鹽官) 선사, 또 조주 스님의 법사이신 남전(南泉) 스님과 같은 그러한 대도인이 나셨고, 그 밖에도 백삼십 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도인들이 거기서 배출하셨어.
그래서 저 인도에서 온 지리와 모든 것을 몇백 년, 몇천 년 후 일을 환히 내다보는 그러한 분이 나와서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다. 망아지 새끼가 천하인을 밟아 죽일 것이다’고 하는 예언을 하셨는데, 바로 이 마조 스님을 두고 그런 천하인의 혀끝을 끊고 천하인을 밟아 죽이는 그런 망아지 새끼라고 그렇게 비유를 해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 마조 스님은 과연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어쨌든지 좌선, 앉아서 좌선을 많이 해야 확철대오 할 수 있을 것이다’해 가지고 한 숟갈 먹으면은 앉아서 아주 방석이 몇십 개가 구녕이 나도록 그렇게 좌선을 열심히 하셨어.
그때 남악회양 선사, 육조(六祖)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남악회양 선사가 마조 스님이 그렇게 열심히 좌선하는 것을 보고서 그 마조 스님 좌선하는 집 앞에 가서 기왓장을 숫돌에다가 벅벅 문질렀다.
아침부터 낮에까지, 낮부터 저녁까지 시간만 있으면 가서 기왓장을 갖다가 숫돌에다 갈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무슨 필요가 있어서 기왓장을 가는가 보다’ 이리 생각했는데, 아! 종일토록 갈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아니, 뭐 헐라고 기왓장을 가십니까?” 여쭤보니까,
“거울을 만들라고 그런다”
“아, 그 기왓장을 갈아 가지고 무슨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대는 앉아서 무엇을 하는고?”
“예, 앉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라고 이렇게 앉았습니다”
“기왓장을 갈아 가지고 거울을 맨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어디서 그렇게 앉아 가지고 부처될라고 한단 말이냐?”
“아, 참선을 할라면 앉아서 요렇게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좌선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견성성불 하는 것인데, 그러면 앉았지 않고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래. 그렇다면 사람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갈 때에 수레를 쳐야 하겠는가? 소를 쳐야 하겠는가?”
아! 그렇게 묻는데, 마조 스님이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소를 쳐야 하느냐? 수레를 쳐야 하느냐?’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공안(公案)을 중생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셨어.
여러분은 사람이 소 수레를 타고 갈 때에 소가 안 가거든 수레를 쳐야 하느냐? 소를 쳐야 하느냐? 여러분 나름대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리저리 생각이 드시겠지만 ‘소를 쳐야 한다’는 둥, ‘수레를 쳐야 한다’는 둥, 중생의 사량분별로 대답해 봤자 어디까지나 분별에 지내지 못한 것이여.
이 마조 스님이 계시는 회상(會上)에 어느 날 서산(西山)에 양좌주(亮座主)라고 하는 대강사(大講師)가 마조 스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마조 스님이 그 양좌주라고 하는 강사에게 묻기를—그 좌주는, 그 강사는 이십사본경,
이십사본경(二十四本經)이니,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이니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의 아주 대표가 될 만한 경전을 일컬어서 한 말이여.
지금 우리가 알기 쉽게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금강경, 모다 그런 등등의 그러한 중요한 경전 이십사본의 경전을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강의를 할 만큼 그 경에 통달한 강사인데.
그 양좌주 보고 “당신이 그런 여러 가지 경을 잘 설한다며?” 이렇게 물어보니까, 양좌주가 “천만의 말씀입니다[不敢]” 그렇게 겸손해서 대답을 했는데,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런 말과 같은 말인데,
감히 큰스님 앞에서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으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겸손의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강(講)을 하는고?” 그렇게 마조 스님이 물으니까, 양좌주가 대답하기를 “마음을 가지고 강(講)을 하지요” 그렇게 대답을 하니까,
마조 스님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공기아(工伎兒)여. 마치 인형극을 막 뒤에서 줄 가지고 이렇게 조종을 하는 사람과 같은 것이고, 또 뜻[意]이라 하는 것은 그 조수와 같은 것[和伎者]인데 어떻게 마음이 경을 설할 수가 있단 말인고?” 그렇게 물으니까,
양좌주가 대답하기를 “마음이 강(講)을 설할 줄 모른다면 그렇다면 허공이 경을 설한 거 아닙니까?”하고 이렇게 물었다 그말이여.
“그렇다. 허공이 강(講)을 설한 것이다.” 이렇게 마조 스님이 말씀을 하시니까, 양좌주가 불끈 일어서서 소매를 흔들면서 밖으로 나가.
나가는 그 뒤에다 대고 마조 스님이 “양좌주!”하고 부르니까 양좌주가 휘뜩 돌아보니까 “시십마(是什麽)오?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마조 스님이 물으셨어. 거기에서 양좌주가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양좌주는 다시 돌아와서 마조 스님 앞에 터억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했어.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이 얼간이 같은 놈이 절을 해서 뭘 하는고?” 그 말에 양좌주가 온몸에 땀이 주루룩 흘렀어.
아무 말도 못하고 그길로 자기 절로 돌아가서 자기가 가르키는 학인들을 모아 놓고 “내가 평생 동안 경(經)을 공부를 해 가지고 감히 이 땅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마조 스님의 한마디에 내가 아주 묵사발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에 내가 자신만만했던 강(講)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말을 하고서 학인들을 전부 다 흩어 버렸습니다.
“다 가거라. 너희들 갈 데로 다 가거라.” 흩어 버리고 서산 깊숙이 들어가서 일생 동안을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이요, 활구선(活句禪)의 한 면목인 것입니다.(처음~21분46초)
(2)------------------
여러분 가운데에는 화엄경도 읽어 보고, 법화경도 읽고 외우고, 금강경도 외우고, 좋은 경전을 많이 읽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상당히 참 많이 알고 있는 분이 계실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경 공부를 할려고 하는 분이 적지 아니 할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어느 경 하나 훌륭하지 아니한 경이 있으리오마는, 경(經)을 통해서 해석을 하고, 알고 외우고 그러면 내생에 머리가 좋은 총명을 얻는다고는 했습니다마는, 경(經)을 중생의 사량분별로 따져서 외우고 해석한다고 해서 ‘참나’를 깨닫는 바른 길이라고 할 수가 없어.
과거의 모든 도인들이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다 그런 경전을 다 통달하고도 남는 그러한 대도인들이 말세의 우리 중생들도 그러한 방편설(方便說)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근기가 약한 하근기(下根機)로서도 철저히 이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이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간화선(看話禪),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양좌주가 마조 스님과 같은 도인을 만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경이나 가르치고, 경이나 읽고 있었다면 어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이뭣고?’가 재미가 없고 맛이 없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서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따지지 말고, 자기가 무식하건, 남자 건 여자 건, 나이가 많고 적건 그런 걸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똥 누고 오줌 눌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의심(疑心)만을 일으켜 관(觀)해 나간다면 어찌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어째서 의심만을 일으키라고 하느냐? 아무 것이고 하나만 딱 생각하고 거기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하면, 일심으로 집중하면 깨달을 수가 있지, 꼭 의심만 거각(擧却)해야 하느냐?’ 그러한 질문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한군데 모이서, 하나만 똑 한군데에다가 모이고 그놈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망상도 차츰 없어지고, 차츰 마음이 고요해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기는 어려워.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조용하게 마음을 공(空)한 자리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거 깨달은 것이 아니여.
신선도나 외도들은 마음을 공(空)하게 해 가지고 공(空)한 자리에 떠억 머물러 있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데, 그렇게 하면 오신통(五神通)은 나는 수가 있으나 누진통(漏盡通)은 못 얻는 거여.
누진통은 탁! 깨쳐야지, 고요한 경계를 지켜 나간다고 해서 깨달라지는 것은 아니여.
마치 풍선은 계속해서 부는데 풍선에 바늘 구녕만한 쬐그만 구녁이 있어도 그 풍선은 터지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분 족족 뚫어진 구녁으로 바람이 빠져나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은 마치 풍선에 구녁 뚫어진 것과 같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따진다든지, 또는 텅 빈 곳을 이렇게 그놈을 지키고 있다든지, 이런 것은 전부 구녁 뚫어진 풍선을 불고 있는 거와 같고,
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고요한 경계만 지켜 나간 것은 불지는 않고 풍선에다 입만 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여. 그래 가지고서야 풍선이 어찌 터질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풍선은 반드시 맥혀야 해! 그러듯이 의심으로써 탁 맥혀야지, 꽉 맥히지 않고 무엇인가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따져 들어가는 이치가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들어서 알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참구선(參句禪)이 아니여.
참의구(參意句),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의리선(義理禪), 참의구(參意句)라 그래 가지고,
참의구는 백천만 겁을 따져서 공안마다 그럴싸한 결론을 내려 가지고 환히 다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어 봤자, 그것은 흑산(黑山) 밑에 귀굴(鬼窟) 속에서 귀신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 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해봤자 확철대오는 못하는 거여. 정각(正覺)은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여.
아무리 재미가 없고, 무엇이 되어간 것 같지 않더라도 철저한 신심과 분심으로써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다고 해서 너무 조급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막 용을 쓰면서 이마에다가 ‘내 천(川)’자를 써 가지고 막 ‘이뭣고? 이뭣고?’ 막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이건 지나치게 용을 쓰면 이것은 깨닫기도 전에—풍선이 크기도 전에 처음에 느닷없이 되게 불어 버리면 찢어져 버려.
그놈이 불어날 대로 잘 불 때는 조심스럽게 불어야 하거든. 그래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이만큼 커져 가지고 거기서도 계속 조심스럽게 잘 불어가야 그놈이 커질 대로 커진 다음에 펑! 터져야 그놈이 재미가 있지, 쬐끔 요만큼 커질라다 픽 찢어져 봐. 그거 무슨 풍선 부는 맛이 있는가?
이 참선을 해 나갈 때 의심을 하는 것도 그 묘관(妙觀)이라야 돼.
불급불완(不急不緩)—너무 급하고 조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늘어져 처지지도 말게, 불급불완한 그 묘(妙)한 관(觀)이라야 되거던. 묘관(妙觀)! 의심관(疑心觀)이거든.
알 수 없는 의심관을 불급불완하게 딱 관(觀)해 나갈 때—‘뭐, 옛날 사람은 칠일(七日)에도 깨달랐다 하니까 나도 칠일 안에 이것을 해 마쳐야겠다’해 가지고, 밥도 굶고 잠도 안 자고 막 그냥 이를 악물고 이레 동안을 해 보라 그말이여. 그런 게 아니여.
뭐 『소한(小限)은 칠일(七日)이요 대한(大限)은 구순(九旬)이라』 그러니까, 자기 생각해 보니 몸도 튼튼하고 이만하면 나도, ‘그까짓 거 고인(古人)이 했는데 나라고 못할까! 칠일로 해 가지고 해 마쳐야겠다’
그래 가지고 밤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막 이를 악물고 칠일 동안 하니까, 골치만 뽀개질라고 아퍼. 눈만 벌거니 생 살조개 까 놓은 것처럼 되어 가지고 골치만 더럭더럭 아퍼. ‘그 참선 아무짝에도 못쓴다고’ 그 안되거든.
그런 것이 아니여. 사소한 것도 선배의 지시를 받고 해 나가야 실수 없이 해 나가는 거고,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먼저 가 본 사람의 안내를 받던지, 잘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지.
그런데 눈으로 보일 수도 없는 이 마음공부를 갖다가 어거지로 그렇게 막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마구잽이로 한다고 그것이 될 리가 있겠느냐.(21분47초~32분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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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6) '贈淳長老' 사명대사 게송 참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 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생사대해(生死大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육조 스님, 남악회양 선사, 마조도일 선사, 조주 선사, 백장 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구녕, 구녁 ; ‘구멍’의 사투리.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좌주(座主) ; 학덕이 뛰어나, 어느 자리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사람을 말함.
*강사(講師) ; 경론(經論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을 가르치는 스님.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
*불감(不敢) ; ①감히(敢히, 자신의 신분이나 능력 따위를 넘어섯 주제넘게) 하지 못함. 감(敢)히 할 수 없음. ②상대편이 베풀어주는 대우(待遇)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고 황송(惶悚)함.
*오체투지(五體投地) ; 불교 신자가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께 큰절을 올려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절. 먼저 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륜투지(五輪投地)ㆍ오륜착지(五輪着地)ㆍ거신투지(擧身投地)ㆍ투지례(投地禮)라고도 한다.
*묵사발 되다 ; 상대방에게 완전히 패하다. -묵사발 : ①심한 타격이나 충격을 받아 뭉개진 상태를 이르는 말. ②여지없이 패망항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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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하근기(下根機 아래 하/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나 근성,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 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도 말씀하신다.
*막론하다(莫論--) ; 이것저것 따지고 가려 말하지 아니하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한군데 ; 어떤 일정한 곳.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
〇“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흑산(黑山) : 인도의 전설에 대철위산(大鐵圍山)과 소철위산 사이에 음양(陰陽)이 이르지 못하는 암흑처가 있으니 이곳을 흑산이라고 하며 이곳은 악귀(惡鬼)가 서식한다고 한다.
*흑산하귀굴리작활계(黑山下鬼窟裏作活計) ; 귀굴리작활계(鬼窟裏作活計). 수행자가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고요한 것만 취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혼혼(昏昏)한 경계에 취해서 묵조(默照)나 정식분별(情識分別)에 잠겨 있는 상태를 비유한 말.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 선경어(博山無異禪師 禪警語)’p168~169 참고.
〇做工夫(주공부)호대 不可避喧向寂(불가피훤향적)하야 瞑目合眼(명목합안)하고 坐在*鬼窟裏作活計(좌재귀굴리작활계)니 古所謂(고소위) *黑山下坐死水浸(흑산하좌사수침)이라하니 齊得甚麼邊事(재득심마변사)리요 只要在境緣上做得去(지요재경연상주득거)하야사 始是得力處(시시득력처)니라
一句話頭(일구화두)를 頓起在眉睫上(돈기재미첩상)하야 行裏坐裏(행리좌리)와 着衣吃飯裏(착의흘반리)와 迎賓送客裏(영빈송객리)에 只要明這一句話頭落處(지요명자일구화두낙처)니 一朝洗面時(일조세면시)에 摸着鼻孔(모착비공)하야 原來太近(원래태근)이니라
공부를 짓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하야 눈을 감고 귀신 굴 속에 앉아 살림살이를 하지 말지니, 고인이 말하기를 「흑산 밑에 앉아 썩은 물에 잠겼다」하니 무슨 일을 이루리오?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 가야 비로소 이것이 힘을 얻는 곳이니라.
한 귀절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고서 다닐 때와 앉을 때와 옷 입고 밥 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이 일구(一句) 화두의 낙처(落處)를 밝힐지니, 하루아침에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듯 원래로 너무 가까왔느니라.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정각(正覺) ; 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 바른 깨달음. 우주의 대진리를 깨닫는 것.
*묘관(妙觀) ; 묘한 관(觀).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한(小限)은 칠일(七日)이요 대한(大限)은 구순(九旬)이라’ ; ‘공부하는 기간은 짧게 잡으면 칠 일이요, 길게 잡아야 구십 일이다’ [선요(禪要)] (고봉원묘) ‘結制示衆(其四)’ 참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 ①예기치 못한 말이나 행동을 불쑥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갑자기 뜻밖의 일을 당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같은 속담] 어두운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홍두깨 ; 예전에, 옷이나 옷감 따위를 방망이로 두드려 깔깔하지 않고 윤기가 나도록 매끄럽게 하는 다듬이질을 할 때에 쓰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도구(방망이).
§(661) 전강선사 27주기 추모재.
**송담스님(No.661)—전강선사 27주기 추모재(02.01.14)(20분) (용661)
약 20분.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무술년 11월 16일에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탄생을 하셨습니다.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셔 가지고, 같이 공부하던 도반이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보고 무상을 뼈아프게 느끼시고서 직지사 선방으로 그 어린 나이로 가셨습니다.
어떻게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던지 23세에 견성(見性)을 하시고, 전국 6대선지식을 찾아가서 다 인가를 맡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25세에 만공 대선사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으셨습니다.
그 뒤로 60세가 되도록 전국 유명한 선원에 조실(祖室)로 추대를 받아 가지고 학자 제접(提接)을 하셨습니다. 63세에 여기 인천 주안 용화사—조그만한 토굴인데—여기에 ‘법보선원’이라고 하는 선원을 개설을 하시고 학자 제접을 하셨습니다. 72세에 용주사 중앙선원을 개설하시고 학자 제접을 하셨습니다.
그 뒤로 인연 따라서 찾아오는 선객(禪客)들을 제접하시고, 77세에 갑인년 12월 초이튿날 열반하실 때까지 한결같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제창을 하시고 열반을 하셨습니다.
열반하신 그날도 법상에 올라가셔서 설법을 하시고 점심 공양을 드시고서 열반(涅槃)에 드셨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어려서부터서 출가하시고, 출가하셔 가지고 평생 동안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선원을 개설해서 학자 제접을 하시면서도 철저하게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지어서 가난하게 사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때에 경제 사정이 퍽 어려웠었고 전국에 수좌(首座) 스님네들도 모두가 다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속에서 정진을 했었습니다.
정화(淨化) 후로 수좌 스님네들이 모다 여기저기 절도 맡고 그래서 많이 스님네의 생활이 옛날에 비해서는 윤택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원래 부처님께서 출가할 이는 바리때 하나와 소가사, 중가사, 대가사—가사(袈裟) 세 벌로 일생 동안을 나무 밑이나 바위 위에서 지내고, 걸식(乞食)을 하면서 하루에 한끼씩만 먹고 수행을 하되, 병이 나면은 황룡탕(黃龍湯)을—자기 오줌을 또 도반의 오줌을 받아서 먹으면서 그것으로써 병을 고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를 의지해서 수행하는 것을 바로 성인이 될 종자라 해서 ‘성종(聖種)’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그것이 바로 철저하게 가난하게 사는 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比丘)다, 비구니(比丘尼)다’하는 ‘비구’란 말은 인도 말로 ‘얻어먹는 사람이다, 걸사(乞士)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은 얻어서 먹고, 법(法)은 선지식(善知識)한테 법을 듣고 법을 빌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철저하게 무소유로 일생을 살도록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가르키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걸식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그렇게는 못하나마 부처님의 그러한 무소유의 가난한 생활을 정신적으로는 항상 잊지 않는 가운데에 수행을 해 가는 것이 우리의 본분(本分)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정말 실천하신 분이 바로 전강 대종사이셨습니다. 열반을 하셨을 때 옷 한 벌 성한 것이 없었고, 학자를 제접을 하시면서도 그렇게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식량도 넉넉허지 못하고 김장할 때도 김장할 거리가 없었고, 장을 담을 때에도 메주를 쓸 콩도 없었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여기저기서 법문을 청하면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절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청하는 대로 가셔서 법문을 하시고 거기서 여비(旅費)를 봉하면은 그걸 가지고 와서 살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우리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우리가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고 수행할 수 있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러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열반하실 때까지 십년 계속해서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일생 동안 수행하신 것과 선지식과 법담(法談)을 해서 인가를 받은 것과 모든 그런 일대기 법문, 그리고 인연 따라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 새벽마다 어떤 신도가 녹음기를 기증을 해서 그것을 녹음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 녹음해 놓으신 테이프(reel tape)가 지금은 시디(CD)로 해서 잡음도 안 나고 잘 들을 수 있게 되았습니다마는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테이프를 사 가지고 그 녹음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열반하신지 27년이 되었지마는 그 녹음 법문(錄音法門)에 의해서 ‘우리는 어떻게 공부를 해 가야 바르게 하는 것인가?’ ‘수행인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구구절절이 간곡한 법문을 남겨주신 것이 비록 열반을 허셨어도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그리고 우리의 도량에 조실 스님이 살아 계신 걸로 알고 수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때 여기 용화선원은 주안 염전 가에 조그마한, 한국에 그렇게 작은 절은 지금은 찾기가 되려 어려울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절에서 용화선원을 개설해 가지고 학자 제접을 시작을 하셔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정진하고 법문 들을 수 있는 이러한 도량이 되도록 다 해 놓으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조실 스님의 그런 유지를 받들어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이렇게 이런 도량이 된 것뿐이고,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에 의해서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이 법보전(法寶殿) 안에 만년위패(萬年位牌) 제도를 창설하셨습니다.
용화사 법보선원을 지어서 스님네와 신도님네들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만년위패 제도를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제도할 수 있는—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서 왕생(往生)하실 때까지 편안한 영가(靈駕)의 안주처를 맨들어 주시고.
여기에 만년위패를 모시면은 영가들이 여기에서 행해지는 모든 법요식에 직접 참석을 하시고 법문에 의지해서 영가의 몸으로서 마음을 닦아 가다가 그러다가 인연이 도래(到來)하면은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왕생하시도록 그러한 제도를 여기에 마련해 주셨습니다.
선망부모를 좋은 곳으로 천도해 드리려는 여러 신도님네들의 정성에 의해서 그래서 이 용화선원은 오늘도 이렇게 큰 부족함이 없이 이렇게 선원을 운영해 나가고 정법(正法)을 선양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는 일생 동안을 ‘어떠헌 법을 가지고 제창(提唱)을 하셨느냐?’하면은 거두절미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한결같이 제창을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은 많은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들으시고 또 테이프를 소장하고 계신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어느 법문을 들으나 그 요점은 ‘활구참선’입니다.
요새 참선법이 많이 전국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선양이 되고 있습니다마는 진정한 의미의 활구참선법은 듣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근자에 비파사나다 또 뭐 제3 수행법이다 해 가지고 동남아 모다 그런 데에서 그런 수행법이 흘러들어 와 가지고 많은 신도들 그리고 스님네 가운데에도 그런 데에 눈을 팔고 있는 분이 있단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여러분이 금강경을 보신 분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불 앞에서 얻은 바가 있어서 내가 석가모니불로 출세하리라고 하는 수기(授記)를 받았느냐?” 수보리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이 여러분은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연등불소(燃燈佛所)에서 얻은 바가 있었다면 석가모니불로 출세할 수 있다고 수기를 주시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요새 비파사나니 무슨 제삼 수행법이니 한 것은 자꾸 해 가다 보면 보이는 것이 있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진취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깨달을 때까지 보이는 것이 있을 수가 없고, 나타난 것이 있을 수가 없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을 수가 없고, 얻어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얻을 것이 있고, 보일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도(邪道)라고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엄격한 규정을 하셨고, 역대조사(歷代祖師)도 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제3 수행법이니, 제4 수행법이니 해 가지고, 보이는 것이 있고, 나타난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정법(正法)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을 증명으로 모시고 강력하게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 까닭은 그렇게 해서 설사 무엇이 얻어지고 알아지고 보이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조실 스님의 추모재를 맞이해서 이런 말을 언급하게 된 것은 심지어 각 선방에도 그러한 풍조가 직접 간접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정법을 망가트리고, 정법을 좀먹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강경하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실 스님께서 일생 동안 선양하신 활구참선과 직접 관련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의 추모재를 기해서 이런 말씀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23세의 어린 나이로 확철대오를 하시고 33세의 그 어린 청년의 몸으로 양산 통도사 선원에 조실로 추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한 선지식인데도 일생 동안을 몸이 불편하시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저녁 공양을 드신 뒤에로는 잠깐 쉬었다가 11시 경이 되면은 그때부터서 예불(禮佛)할 때까지 계속 ‘밤 정진’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는 조실 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봉하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조실 스님 열반하신지 27년의 세월이 지냈고 또 앞으로 세월이 하루하루 가다 보면 오십 년이 되고 백 년이 되고 오백 년이 돌아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무슨 정진하다가 무슨 소견이 나거나, 보인 바가 있거나, 얻어진 바가 있거나 그러한 것은 바로 삿된 소견이요 잘못된 일시적인 경계일뿐,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법요식이 거행이 되고 분향이 끝나고 나면 점심 공양이 간략히 마련이 되어 있으니 조금 바쁘시더라도 전부 다 점심 공양을 드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숙세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법보 가족(法寶家族)이 되었습니다. 법보 가족은 정법을 믿고 오직 정법에 의지해서 살고, 정법을 실천하고 정법에 의해서 바른 수행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19분45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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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非命) ; 제 목숨대로 다 살지 못함.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견성(見性) : ‘성품을 본다’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만공 대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정화(淨化) ; 한국불교 정화운동.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1911년 일제는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승단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불교계를 혁신하고 한국불교에 남아있는 식민주의 불교, 왜색불교를 청산하기 위해 1954년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일어난 한국불교 정화운동.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라고도 한다.
*가사(袈裟) : [범] kasaya 범어를 음대로 쓴 것인데, 뜻대로 번역하면 잡색(雜色) • 염색(染色) 곧 순색이 아닌 옷을 말한다。인도는 더운 곳이므로 속인(俗人)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출가한 이는 그 옷을 달리하기 위하여 염색하되 검박한 빛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품질이 좋은 새 옷감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을 주워 모아서 누더기같이 만들었는데, 크고 작은 세 가지(三衣)가 있어서, 다섯 폭으로 된 것(五條)은 일할 때에 입고, 일곱 폭으로 된 것(七條)은 보통 때에 입고, 아홉 폭(九條)으로부터 스물 다섯 폭(二十五條)까지는 법회와 예식에 입게 된다。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이 세 가지밖에 다른 옷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기후 풍토와 인정 풍속이 같지 아니한 여러 지방에 전파되면서, 가사의 빛도 황색 또는 적색의 보기 좋은 빛으로 변하게 되고, 바탕도 비단으로 하게까지 되었다。그 모양도 온갖 복덕이 이 법복(法服)으로 말미암아 심어지고 성숙(成熟)되는 것이라 하여, 복을 심는 밭(福田)을 상징(象徵)해서 규모가 반듯하고 법다운 밭두렁과 같은 것으로 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불교를 신앙하는 여러 나라와 그 종파에 따라 모양도 달리 한다.
또한 북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추운 곳이기 때문에, 보통 입는 의복 위에 장삼(長衫)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가사를 입게 되므로, 가사와 장삼이 함께 법복이 된다.
*걸식(乞食 빌·구할·청할 걸/밥·음식 식)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것.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본분(本分 근본 본/분수·신분·뜻·마음가짐·몫 분) ; ①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 ②사람이 저마다 가진 본래의 신분.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시디(CD) ; 콤팩트디스크(compact disk). 광신호(光信號)로 기록된 소리나 영상 따위의 정보를 재생하는 재생 기기.
*되려 ; ‘도리어(예상이나 기대 또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거나 다르게)’의 사투리.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〇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제창(提唱 이끌 제/부를 창) ; 대의(大義)나 요점을 드러냄.
*비파사나(팔리어 vipassanā,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 비바사나(毘婆舍那)·비발사나(毘鉢舍那)로 음역. 능견(能見)·정견(正見)·관찰(觀察)·관(觀)이라 번역.
비파사나(위빳사나)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ā’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유위제법(有爲諸法)—오온(五薀),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고 관찰하여 법(法)의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인 특성을 통찰하는 수행.
비파사나는 마음[心]·마음부수[心所]·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비파사나의 힘으로 탐·진·치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비파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초기불교 이해]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참고.
*수기(授記) ;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함. 또는 그 교설(敎說).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좀먹다 ; ①눈에 뜨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자꾸 해(害)를 입히다. ②좀이 슬어 여기저기 구멍이 나다. '좀'은 옷이나 나무, 곡식, 종이 따위를 못쓰게 만드는 조그마한 벌레.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밤 정진 ; 보통 저녁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잠자는 시간인데, 이때 잠을 자지 않고 하는 정진.
§(725) 전강선사 34주기 추모재 / 전강스님의 녹음법문을 들으면서 철저히 정진한다면 누구라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 영원을 사는 수행자. (0) | 2022.1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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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 전강선사 30주기 추모재 / 광주 경양 방죽가 하꼬방 장사 시절의 수행. (0) | 2016.10.14 |
§(157) 전강선사 7주기 추모재. (0) | 2016.01.01 |
§(134) 전강선사 6주기 추모재 / 법신(法身)은 불멸(不滅) / 조실 스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금생에 참나를 깨달아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야. (0) | 2015.12.30 |
§(461) 전강선사 17주기 추모재. (0) | 2015.01.20 |
§(775) (게송)산월투창백~ / 활구참선 요점은 의단(疑團) / 의심(疑心)의 관(觀) / 무상 속에서, 생노병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 / (게송)백년지시잠시간~.
〇참선하면은 아무나 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면 참선이지마는 그것은 형식만 본따서 하고 있는 것이지, 진짜 살아있는 그것을—그 참선을 통해서 바른 길, 깨달음의 길로 바로 가는 길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의 요점은 의단(疑團)입니다.
〇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의심(疑心)의 관(觀)’이라야 돼. 간절(懇切)한 의심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참선이요, 그 간절한 의심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의단이 독로(獨露)해야만 살아 있는 참선이고, 그 살아 있는 참선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것입니다.
〇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먹고 입고 일도 하고 그러는데 분 따라서 일을 하고 살면서 항상 그 속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타성일편이 되도록 잡드리한 사람은 무상 속에서도 바로 살아계신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고, 이 우주법계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 가득 우주법계에 차 계시는데, 활구참선을 한 사람은 비로자나 법신불을 항상 모시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75)—2015년(을미년) 동안거 결제(2015.11.26) (용775)
(1) 약 21분.
(2) 약 8분.
(1)-----------------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다
나무~ 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산월(山月)이 투창백(投窓白)이요, 계성(溪聲)이 입호명(入戶鳴)이다.
저 산 위에 떠있는 달은 창에까지 환히 비추어 주고 있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는 방안에까지 들리는구나.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달마 스님이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하시고 면벽관심(面壁觀心)하신 뜻은 모름지기 이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
산월이 창에 비추어 희고, 시냇물이 방안에까지 촐촐촐촐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거기에서 달마스님께서 9년 동안 묵무언하시는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은 을미년(乙未年)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14개의 선방! 인천 용화사, 광주 용화사, 용주사, 망월사, 약사암, 복전암, 위봉사, 세등선원, 원효사, 승련사, 회룡사, 도덕사, 대륜선원 14개 선방에서 200명의 납자(衲子)들이 방부를 들이고 동안거에 들어가는데,
오늘 그 결제날 용화사에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함께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이렇게 산승이 여러분께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연(因緣)은 우주 세계가 생겨난 56억년 이래로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무량겁(無量劫)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을미년 동안거에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된 그 인연!
정말 이 인연으로 인해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불법문중에서 정법문중에서 또 만나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종자를 심게 된 것입니다.
방금 전강대종사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법문의 골자는 활구참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 무엇이냐?
참선하면은 가부좌, 반가부좌를 하고 떠억 앉아서 눈을 아래로 뜨고서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을 누구든지 다 듣고 알고, 보고 알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선인데, 활구(活句)를 왜 활구라고 하냐? ‘살아있는 글귀’다.
활구참선의 반대는 사구(死句) ‘죽을 사(死)’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인데 사구참선과 활구참선의 분간을 조실 스님은 오늘 법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실히 일러주신 것입니다.
참선하면은 아무나 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면 참선이지마는 그것은 형식만 본따서 하고 있는 것이지, 진짜 살아있는 그것을—그 참선을 통해서 바른 길, 깨달음의 길로 바로 가는 길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것입니다.
활구참선의 요점은 의단(疑團)입니다. 막연하게 조용히 앉아만 있어 갖고는 백만 겁을 앉아 있어 봤자 바른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의단입니다. 의단(疑團)!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보통 천칠백 공안 가운데 그 근본이 시삼마(是甚麼) 화두!—‘이뭣고?’ 화두인데, ‘이뭣고?’도 ‘이것이 무엇이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이고~?’ 했을 때 끄트리 ‘?’ 의문표가 그것이 의심(疑心)의 표시인데,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어야 바로 살아있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이뭣고 하고 이뭣고, 이뭣고 한다고 그것은 죽은 참선인 것입니다. 맨날 해 봤자 소용이 없어.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의심(疑心)의 관(觀)’이라야 돼.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간절(懇切)한 의심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참선이요, 그 간절한 의심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의단이 독로(獨露)해야만 살아 있는 참선이고, 그 살아 있는 참선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것입니다.
불법(佛法)은 팔만대장경 경서가 있어서 그 경을 화엄경으로부터서 법화경, 금강경 많은 경전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해인사에 봉안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번역이 되고 발간이 되어서 책으로 나와 있는 것도 있습니다마는 그것 읽는 것도 좋고, 외우는 것도 좋고, 해석하는 것도 그것도 좋은 공덕이 될 것이나,
그 경전을 진짜 옳게 알게 되면은 ‘참나’를 찾는 공부로 들어가야만 경전의 뜻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 무엇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천칠백 화두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화두로 조금 해보고 또 잘 안되면 또 저 화두로 해보고 자꾸 화두를 바꿔샀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올바르게 해 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화두를 자기가 책을 통해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으나, 자기가 선택을 하면 자기가 언제든지 바꿀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겠으나,
반드시 믿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딱! 하나를 지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아까 조실 스님 법문 속에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마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어야 올바르게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분석을 하거나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나중에는 의관(疑觀)이 되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 없어졌다 이런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그 의심 덩어리가 거가 있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 타성일편이 되어야 합니다.
금방 되었다 안되었다, 이 생각이 들어왔다 저 생각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갔다 이것은 초기에 있어서는 그럴 수가 있으나 열심히 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의심이 한 뭉텅이가 되어 가지고 출입과 기멸(起滅)이 없는 것입니다.
들랑날랑하고 있다없다 이러면, 초단계 처음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나, 자꾸 하다 보면 타성일편이—쳐서 한 뭉텅이가 되아. 알 수 없는 의심!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번뇌 망상이 들어오지를 못하고,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도록 몸을 단정히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렇게 하고.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갈 때도 하고, 일을 할 때도 하고, 밥 먹을 때도 딱~ 그 의심 덩어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유지되면서 밥을 먹고, 걸어갈 때도 의심이 흩어지지 않도록, 잊어버리면 퍼뜩 챙겨서 ‘이뭣고?’
눈이 있으니 무엇인가 보게 되는데 보면 그리 쫓아가지 말고, 산을 보면 ‘산이 푸르다 단풍이 졌다’ 그리 쫓아가지 말고 산을 보게 되면은 바로 거기서 ‘이뭣고?’로 돌아와야 해.
누가 나 보고 욕을 하더라도 욕하는 말로 쫓아가지 말아. 쫓아가지 말고 나는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화두가 딱 자리가 잡혀서 자꾸 하다 보면 저절로 눈으로 무엇을 봐도 화두가 들리고, 귀로 무슨 말을 들어도 화두가 들리고.
행주좌와—걸어갈 때나, 머물러 서 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항상 일체처 일체시에 외부 경계를 접촉할 때 그리 신경을 쓰지 말고 나는 항상 ‘이뭣고?’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바로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 조주(趙州)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 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철저하게 해 나가면,
바로 이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성주괴공이 있어서 춘하추동 계절이 있고 꽃이 피기도 하고 단풍이 지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 있으면서도 정법을 믿고 자기의 본참화두에 충실한 사람은 생사 속에서,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남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여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유식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고, 잘생긴 사람도 있고 조금 잘 못생긴 사람도있을 수가 있으나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안 해.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그러한 흥망성쇠와 빈부귀천과 생로병사, 이 무상한 속에서 바로 ‘이뭣고?’ 자기를 찾는 참선 공부를 한 사람은 흥망성쇠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생로병사도 여기에서 그리 끄달리지 않고, 사람은 늙어서 언젠가는 죽는데 그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어!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죽을 때에도 ‘아이고 내 재산 어떻게 하나? 내 자식, 내 손자는 어떻게 하나?’ 이런 것 걱정할 겨를이 없어.
바로 숨 꼴딱 넘어갈 때까지도 ‘이뭣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 땅에다 묻지 않으면 화장을 할 것이고, 육체야 죽으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겠으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몸만 또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당에도 가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하기도 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축생이 되기도 하고, 아주 최고로 못된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도 가겠으나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한 사람은 그것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어.
숨 꼴딱 쉬면서도 ‘이뭣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 금방 또 사람의 몸을 받아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 몸을 받아나거나 또는 천당에 가서 태어나거나 그래겠으나 정법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천당에 갔다고 해서 그 천당에 안주하지를 않고 천당에도 반드시 정법이 있을 것입니다.
인도환생을 해서 사람 몸을 받아가지고 또 불법을 만나 가지고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 해서 부처님이 되면 영원히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이 이 육체는 생로병사가 있으나 그것은 도를 깨달았어도 육체를 일단 받아난 사람은 늙어서 언젠가는 또 이 몸을 버리게 되는데,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한 사람은—가을 되었다 봄 되었다 계절 따라서 기후가 변하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다 죽는 것도 아니고 계절 따라서 옷을 갈아 입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입고 겨울에는 뜨시게 입으면 그만이듯이 참선을 하고 열심히 ‘이뭣고?’를 한 사람은 모든 것은 인연에다 다 맡겨 버려.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가도 ‘이뭣고?’ 혹 병이 나더라도 ‘이뭣고?’
사업을 하다 보면은 흥망성쇠가 있을 것이나 재수가 있으면 돈이 잘 벌리기도 하고, 재수가 없으면 손해도 보게 되나, 그거 큰 문제가 아니야. 그 속에서도 ‘이 무엇고?’
이렇게 살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고, 생로병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21분2초)
(2)------------------
‘산승(山僧)의 말이 참 좋은 말이다. 나도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 진짜 인생으로써 정성을 들여서 살아갈 길은 오직 이 활구참선이 최고로구나’ 그렇게 믿어지는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되었습니다. 이렇게 손을 들으신 분은 앞으로도 열심히 이것을 해서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다시 또 인도환생을 하시게 되고, 혹 천당에 가더라도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부처님과 같이 사시게 될 것입니다.
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라 막파광음당등한(莫把光陰當等閒)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요불경염노안(若要不經閻老案)인댄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요. 인간이 오래 살아봤자 백 살 사는데 그 백년 이라는 게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말이야.
막파광음(莫把光陰)을 당등한(當等閒)이라. 광음(光陰)을 등한히 지내지 말라.
시간은 잠깐도 쉴 사이 없이 똑딱똑딱똑딱 1초 1초가 지나가고, 1시간 1시간이 지나고, 퍼뜩 하다보면 별로 한 것 없이 하루 24시간이 지나가는 거고, 그렇게 1년 2년 이렇게 지내다 보면 금년 10년이 지나가고, 그래저래 하다 보면은 주름살이 생기고 흰머리가 나게 되는 거야.
그러니 그렇게 쉴 사이없이 흘러가고 무상한 이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생전에 살면서 지은 크고 작은 죄업으로 인해서 무서운 심판을 받아 가지고 지옥으로 갈 사람, 축생이 될 사람, 인도로 올라올 사람, 천당에 갈 사람 다 거기서 심판을받게 되는데,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그런 무서운 고초와 심판을 안 받을라거든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이다. 모름지기 조사관을 참투할지니다.
조사관(祖師關)이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입니다.
활구참선을 해서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깨달으면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봤자 두려울 것이 없어.
떳떳하고 당당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믿고, 생사 없는 도리를 실천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면 인연 따라서 구십 세 살 사람, 백 세 살 사람, 혹 백 살을 넘어서 살 사람 그까짓 것도 큰 문제가 아니고 인연이 있는 만큼 살다가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숨을 거두면 금방 염라대왕의 무서운 고초를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활구참선을 한 사람은 염라대왕 무서워 할 것이 없어.
왜 안 무서우냐? 생사 없는 진리를 믿고, 생사 없는 진리를 실천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니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을 터득을 했기 때문에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지혜롭게 건강 관리는 하되죽음에 대해서 무서워 할 것이 없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먹고 입고 일도 하고 그러는데 분 따라서 일을 하고 살면서 항상 그 속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타성일편이 되도록 잡드리한 사람은 무상 속에서도 바로 살아계신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고,
이 우주법계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 가득 우주법계에 차 계시는데 활구참선을 한 사람은 비로자나 법신불을 항상 모시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을미년 동안거 결제일이라 여러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 남녀노소 여러 도반들에게 두서없는 말이지마는 정말 여러분 가슴속에 새겨 드리고 싶고, 여러분과 같이 이 무상한 속에서 영원한 진리 속에서같이 살고자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입으로써 못다한 말을 이 주장자한테 부탁을 합니다.(21분3초~29분1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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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무제(無題)’ 게송 참고.
*납자(衲子 옷을 꿰맴 납, 사람 자) ; 남이 버린 헌 옷이나 베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구선(死句禪) ; 사구참선(死句參禪).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기멸(起滅) ; 생(生)하고 멸(滅)하는 것. 생겨남과 없어짐. 즉 인연이 화합하면 생하고, 인연이 이산(離散)하면 멸한다는 뜻.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 칠백 공안 중의 하나.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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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게송) ‘백년지시잠시간~’ ; [한가로운 도인의 길—나옹화상법어집](김달진 역주,세계사) p185에 있는 ‘警世-세상을 경계함’ 참고.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 곧 화두(공안)을 말함.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778) 구족계 수계 법문 / (게송)분골쇄신미족수(粉骨碎身未足酬)~ / (게송)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 (0) | 2016.0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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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게송)일종위배본심왕~ / 최상승법(最上乘法) / 내가 나의 마음의 부처를 찾는 일보다는 더 급하고 요긴한 일은 없다 / (게송)약인정좌일수유~. (0) | 2016.02.23 |
§(776) 전강선사 41주기 추모재. (0) | 2016.01.13 |
§(774) (게송)약인정좌일수유~ / 화두, 불명, 십선계. (0) | 2015.06.03 |
§(773) (게송)일념정좌수유간~ / 한 생각 돌이켜 ‘이뭣고?’하면 이 사바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 / (게송)화불능소수불닉~ / 법보전을 지은 까닭 / 생사 호흡지간. (0) | 2015.05.05 |
§(세등59) (게송)노종평처험~ / 자신을 조복(調伏) / (게송)잉풍기랑낭생구~ / 이 도(道)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 / 첫째 아상(我相)을 없애라.
〇조용한 데를 만나면 조용한 대로 좋고, 시끄러운 데를 만나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변화무쌍한 그러한 복잡한 경계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더 성성(惺惺)하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도록 우리는 공부를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〇새로 이제 출가한 젊은 스님네들, 어쨌든지 이 도를 성취헐라면 바른 선지식을 찾고, 바른 선지식에게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잊어버려. ‘몸을 잊는다’하는 것은—자기의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치(我癡)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 자기는 많이 배웠다는 생각, 내로라하는 그 아만심(我慢心), 자존심 이러헌 것이 꽉 속에 차 있어 가지고—정말 법을 위해서 자기가 알고있는 모든 것,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모든 것을 갖다가 깨끗이 비워버리는 거여.
〇다생겁래(多生劫來)로 익힌 모든 선업(善業), 악업(惡業), 일체 업도 다 비우려니와 법견(法見), 불견(佛見)까지라도 다 비워버려야 돼. 비우는 데에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지, 비우지 않고서는 점점 깨달음으로부터서는 멀어져 가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야. 그래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금강경에 이 사상(四相)을 말씀하셨지마는, 그 첫째 그 아상이 문제거든. 아상(我相) 하나만 무너져버리면은 다른 나머지기 3상(相)도 문제가 없는 것이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59)—병인년 하안거 결제 법어(86.04.17) (세등59)
(1) 약 20분.
(2) 약 12분.
(1)------------------
노종평처험(路從平處險)하고 인향정중망(人向靜中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멱화화란득(覓火和爛得)하고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노종평처험(路從平處險)하고 인향정중망(人向靜中忙)이다.
길은 평평한 곳으로부터 험악해지고, 사람은 고요한 곳을 향해서 바빠지더라. 평평한, 평탄한 곳이 있기 때문에 험악한 험난한 길이 있지, 본래 평탄한 길이 없었다면 험악한 길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나차운 데가 있으니까 높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으니까 또 나차운 데가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서 전부가 높다면 구태여 험(險)하다고 할 것이 없어.
평탄한 평지가 있기 때문에 이 평지를 걸어 가다가 길이 험악해지니까 ‘아! 이 길이 험악해졌구나’하고 느끼는 것이지, 평탄할 것도 없고 본래 저 높은 고지에서만 있다면은 어디가 험악하다는 소리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고요한 가운데에 있다가, 고요한 데에 집착해 가지고 고요한 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바빠지고 시끄럽고 그런 것이지, 본래 고요한 데에 있지 아니하고, 고요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면 구태여 시끄럽고 바쁘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사람이 살아가는 데 처음부터서 고생을 하고 산 사람은 구태여 ‘고생이다, 고생스럽다’한 것을 느끼지 않지만, 처음에 호강을 하고 살던 사람이 조금 형세가 어려워지면 그 곤란한 것을 배(倍)나 느끼고 그 곤란한 것을 견디기가 심히어려운 법이고,
공부도 처음부터서 시끄러운 속에서 공부를 익히고, 생활하는 속에서 공부를 익힌 사람은 좀 주변이 시끄럽고 일을 하고 복잡한 환경을 만나더라도, 공부가 ‘그것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한 것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밤낮 고요한 데에만 집착해 가지고 고요한 데에서만 공부를 익힌 사람은 조금 누가 발걸음 소리만 나고, 문 열었다 닫었다 하는 소리만 나고, 옆에서 무슨 말하는 소리 또는 차 지내가는 소리, 비행기 다니는 소리, 이런 소리만 좀 나도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신경질이 나면서 공부가 안된다고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평지라고 평탄한 것만을 좋아하고, 고요한 것만을 좋아해서 그런 데에서만 생활을 하고, 그런 속에서만 공부를 익힌 사람은 그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공부를 하기가 어려운 거여.
화초도 밤낮 온실에서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와 적당한 광선만을 쬐면서 자란 화초는 밖에다 내다 놓면 조금 햇빛이 따가우면은 시들어버리고, 조금 바람이 세고 그러면은 견디지를 못하고 얼어죽고 이러는 것입니다.
공부라는 것이 꼭 고요한 데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어떠한 경계 속에서도 흔들림을 받지 아니하고,
희로애락과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떠한 경계를 만나더라도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경계에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조용한 데를 만나면 조용한 대로 좋고, 시끄러운 데를 만나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변화무쌍한 그러한 복잡한 경계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더 성성(惺惺)하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도록 우리는 공부를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멱화화란득(覓火和爛得)이요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다.
불을 찾음에 데기를 쉽고, 불을 찾아서 불을 가까이 하면은 옷을 태우거나 살을 데거나, 불을 가까이 하면 델 경우가 많고,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여. 물을, 샘을 짊어지면 달을 띠고 돌아가. 물을 떠 가지고 가면은 달이 그 물에 비추니까 달도 따라온다 그말이여.
제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불을 가까이 하고 항상 불 속에서 불을 가까이 하게 되면은 옷을 태우거나 살을 데거나 까딱하면 타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고,
물을 가까이 하면은 항상 물 있는 곳에는 달이 비치기 마련이니까 샘 가까이 있으면은 달도 거기에 따라 있는 것이다.
불이라는 게 무엇인가? 탐진치 삼독심(三毒心), 오욕락(五欲樂) 이런 것들이 모다 불과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면 반드시 그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구렁텅이에 빠지기가 쉬운 것이고,
물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윤택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씻어서 깨끗이 하는 것이니까 선지식(善知識), 좋은 도반, 그리고 법문(法門),
그리고 항상 염불을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우리 참선하는 대중은 항상 선지식과 도반을 가까이 하고, 청정도량을 여의지 아니하고, 대중처(大衆處)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리고 항상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하면 ‘달이 거기에 따라온다’는 것은 ‘깨달음이 내게 돌아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승단(僧團) 제도를 맨들어서 발심한 사람이 출가해 가지고 좋은 도반들과 함께 도를 닦도록 하신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은 병인년 4월 17일 세등선원 하안거 결제 법요식을 맞이했습니다. 방금 사부대중이 전강(田岡) 대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었습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화두를 들고 참선해 나가는 데 요긴한 법문을 들었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그리고 화두를 거각(擧却)하되 사량분별을 쓰지 말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져, 일체 사량분별이 끊어져, 끊어진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하도록 화두를 단속해 나가는 그 활구참선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석 달 동안 대중이 방(榜)을 짜고 이렇게 인자 왕래를 금(禁)하고, 이렇게 결제를 하게 되는데,
선방(禪房)마다 그 선방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고 가풍이 있어서, 경상도에 있는 선방에는 거기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고, 또 여기에 오면 여기의 규범이 있어.
그러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공통하지만, 조금씩 다른 점이 있는 것은 그것이 참 오히려 더 좋은 것이다 그말이여. 전부가 다 똑같다면 그게 별로 좋을 것 같지마는 재미가 없는 것이여.
밤낮 똑같은—옷도 똑같은 옷만 입는다든지, 음식도 밤낮 똑같은 것만 먹는다든지, 그러면은 그게 재미가 없는 것이고,
계절도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변화가 있어야지, 밤낮 여름만 있다든지 밤낮 겨울만 있다든지 한다면 그건 세계에는 그런 곳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게 다 좋은 것이 아니여.
계절도 변화가 있어야 하고 또 기상도 변화가 있어야 하고, 해가 뜨기도 허고, 비가 오기도 허고, 구름이 끼기도 허고, 바람이 불기도 허고 해야지,
밤낮 햇빛만 쨍쨍 난다든지, 밤낮 비만 온다든지, 밤낮 눈만 온다든지 허면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여. 농사도 잘 되지도 아니하고, 건강도 좋지 못하고, 인간성도 좋지를 못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선방도 여러 선방들이 있는데, 선방 나름대로 규범이 다르고 법도가 다르고 가풍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른 것은 그것이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 대단히 좋은 것이지, 그것이 하나도 나쁠 것이 없는 것이여. 여기는 여기대로의 독특한 가풍(家風)이 있어야 하는 것이여.
그런데 혹자는 ‘다른 데 선방에는 안 그런데 여기는 이런다’고, 그래 가지고 그것을 삭이지를 못해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벌써 수행인으로서의 바탕이 덜된 사람이여.
여기에 오면은 여기의 법도에 따르면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또 다른 선방에 가면 거기 선방의 규범에 따라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자기의 뜻에 좀 안 맞더라도 그놈을 잘 인욕(忍辱)을 하면서 잘 그놈을 소화를 시키면서 순응허면서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공부가 잘되도록.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이기는 법이고, 자기를 갖다가 조복(調伏)을 받는 것이거든.
눈이 오는 겨울이 오면은 그 겨울에도 잘 적응을 하고, 또 여름에 삼복더위가 오더라도 그 더위도 이겨낼 수 있어야 그 사람의 건강이 정상적인 것이지, 여름은 잘 견디는데 겨울만 돌아오면은 견디지를 못한다면 그 사람의 건강이온당한 사람이 아니거든.
특히 이 도 닦는 데 있어서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희로애락, 일체처 일체시에 맥힘이 없어야 하고 걸림이 없어야, 그래야 그 사람이 정진하는 데 힘을 얻은 사람이고,
앞으로 그러한 자세로 공부를 지어 가는 사람이라야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육도법계 중생을 제도할 만한 그러한 도인이 되고 성현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
밤낮 조용한 것만 좋아하고 손발 까딱 안 하고 앉아서만 하기만을 좋아하고, 이렇게 처음부터서 공부를 익혀 나간 사람은 벌써 큰 그릇 되기는 틀려 버린 사람이거든.
그 사람이 어쩌다가 설사 한 소식을 해서 깨달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보나마나 그 별 볼일 없는 사람이거든.
『잘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그런 속담이 있지마는, 우리는 최상승법을 닦는 도학자여.
그래서 불법(佛法)에는 소승법도 있고 중승법, 대승법도 있는데, 우리 활구참선 하는 우리 선객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여.
왜 최상승법이라 하냐 하면은 최상승법에서는 소승, 중승, 대승도 전부 그 안에 다 녹여서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린 거여. 그렇기 때문에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최고의 불법이거든.
조용한 것만 좋아하고, 조금 시끄러우면 못 견디는 것은 그런 것은 소승(小乘)의 경지여. 소승에 의지해서 닦아 가는 그런 사람이거든.
그건 부처님 말씀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할지언정 소승심을 발하지 말아라’ 그러셨거든.
소승심! 소승심이라는 게 사상 자체가 그것은 못쓰는 거여. 소승심을 내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설사 소승법의 구경(究竟)에 도달을 해 봤자 그것은 못쓰는 것이다 그말이여.
마음가짐이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여.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짐으로써 사상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마음가짐이 잘못되면 사상이 비틀어지기 때문에 사상이 비틀어져 버리면 그것이 온갖 행동이 거기에 따라서 비틀어지는 것이고, 행동이 비틀어지면은 그 도(道) 수행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은 삿된 데에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여.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또 청춘을 버리고, 사람으로서 태어나서 온갖 것을 다 버리고 출가한 우리들이 기왕이면은 바른 사상으로 바른 목표를 향해서 수행을 해 가지고 바른 도를 깨달라야지,
그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고 출가해 가지고서 기껏 한다는 것이 삿된 데에 떨어지고, 별 볼일 없는 곳을 향해서 일생을 닦아간다면 그 아니 안타깝고 가련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처음~19분51초)
(2)------------------
잉풍기랑낭생구(仍風起浪浪生漚)한대 참괴청평해상부(慚愧淸平海上浮)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일홀연풍랑식(今日忽然風浪息)허니 징명원시일강추(澄明元是一江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잉풍기랑낭생구(仍風起浪浪生漚)요. 바람으로 인해서 물결이 일어났고, 물결로 인해서 버큼(거품)이 일어났더라.
참괴청평해상부(慚愧淸平海上浮)여. 그 맑고 평평한 바다 위에 그 버큼이 떠있는 것이 부끄럽구나.
바람으로 인해서 물결이 일어났고, 물결로 인해서 버큼이 일어나 가지고, 그 더러운 버큼이 그 맑고 평평한 깨끗한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니 그 얼마나 추악하고 그 부끄러울 일이냐 그말이여.
금일홀연풍랑식(今日忽然風浪息)하니, 오늘 홀연히 그 바람과 물결이 쉬어 버리니,
징명원시일강추(澄明元是一江秋)여. 맑고 밝은 원래 그대로의 한 강(江)의 가을이더라.
가을이 돌아와 이 하늘은 맑고 공기도 맑은데, 바람과 물결이 잔잔히 가라앉어 버리니까, 그 맑고 밝은 강이 본래 그대로더라 그거죠.
출가해서 10년, 20년 내지 평생을 참선을 한다고 했건마는 확철대오를 못하고,
어제도 이럭저럭 오늘도 이럭저럭 이렇게 늙어간다면, 그것은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거나, 바른 선지식을 만났으되 용기가 부족했거나, 용기를 가지고 했으되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이 틀렸거나,
또는 금생에는 자기 나름대로 선지식을 만났고 또 용기도 가졌고 또 바른 방법으로 했건마는, 전생에 워낙 닦아 놓은 것이 없거나,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이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새로 이제 출가한 젊은 스님네들, 어쨌든지 이 도를 성취헐라면 바른 선지식을 찾고, 바른 선지식에게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잊어버려.
‘몸을 잊는다’하는 것은—자기의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치(我癡)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 자기는 많이 배웠다는 생각, 내로라하는 그 아만심(我慢心), 자존심 이러헌 것이 꽉 속에 차 있어 가지고—정말 법을 위해서 자기가 알고있는 모든 것,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모든 것을 갖다가 깨끗이 비워버리는 거여.
말하자면은 어떠한 좋은 깨끗한 물을 담을라면은 그 그릇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비워버려야 되거든.
그 안에 들어있는 무슨 음식이 되었건, 음식 찌꺼기가 되었건, 기름기가 묻었건, 뭐 반찬 냄새가 묻었건, 일단 깨끗한 물을 담을랴면 그 안에 어떠한 맛있는 물건이라도 다 버려 버리고 깨끗이 한 다음에라야 그 맑은 물을 담을 수가있는 것이지,
거기에 본래 어떠한 것이 담어져 있는 상태에다가 아무리 맑은 물을 부어 봤자 그 물은 구정물이 되고 말아 버리는 것이다.
이 도(道)는 그러한 음식과도 또 달라서, 음식은 다른 것이 담아 있어도 그 옆에다 또 곁들여서 담어서 두 가지 세 가지도 담을 수 있지만, 도(道)는 영판 안 돼.
천하 없는 경전에 있는 말씀이라도 속에 담어져 있으면 그것은 안 되는 거여. 팔만대장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다 풀이를 헐 줄 알아도, 그 생각이 속에 들어있으면은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여.
천하 없이 십계, 십중대계, 48경계와 비구 250계, 비구니 500계를 낱낱이 다 실천을 해서 청정하기가 말로 할 수 없다 하드라도, 그 청정한 데에 맥혀 갖고 있으면 도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이여.
심지어 그 보다 더한 것이 속에 있다 하드라도 얻은 바가 있다 하드라도 그러한 것이 체(滯)해 갖고 있으면은 도는 통할 수가 없는 것이여.
아라한과를 증득했으되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하는 생각을 가지면 벌써 아라한이 아니고, 보살도를 증득했으되 ‘내가 보살도를 증득했다’하면은 벌써 그것이 보살이 아니여.
깨달았으되 ‘깨달았다’는 생각에 체(滯)해 있으면은 그 깨달음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그렇거든 이제 공부하려는 사람이 선지식을 구할 때에 내로라는 생각을 속에 가지고 있어 가지고 그 선지식이 믿어지냐 하면 믿어지지도 않는 것이고, 선지식으로부터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봤자 그 법문은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것이여.
그래서 이 도(道)는 무엇을 많이 알고, 많이 속에다가 쌓는 공부가 아니고 비우는 공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익힌 모든 선업(善業), 악업(惡業), 일체 업도 다 비우려니와 법견(法見), 불견(佛見)까지라도 다 비워버려야 돼.
비우는 데에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지, 비우지 않고서는 점점 깨달음으로부터서는 멀어져 가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야.
그래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금강경에 이 사상(四相)을 말씀하셨지마는, 그 첫째 그 아상이 문제거든.
아상(我相) 하나만 무너져버리면은 다른 나머지기 3상(相)도 문제가 없는 것이여.
이 아상(我相), ‘내’라고 하는 이놈 하나 때문에 결국은 무량겁 생사윤회도 거기에서 원인이 되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도 거기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육도법계(六道法界)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온갖 이 태란습화(胎卵濕化)도 그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웬수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내’라는 놈이 없다면은 남하고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고, 내라는 놈이 없다면은 탐진치(貪瞋痴)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대중생활 하는 데에도 ‘내’라 하는 생각 있는 데에서 온갖 불평이 일어나고, 온갖 서로 다툼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장애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이 도량에 들어오면은 첫째 아상을 무너뜨려 버리고, 내 주장을 버려 버리고, 이 선원의 규칙대로 순종을 하고 적응을 하도록 그렇게 한다면은 석 달 동안 장애 없이 공부할 수가 있어.
아무 장애 없이 석 달 동안을 정말 온전히 알차게 짬지게 석 달 동안을 정진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20분3초~31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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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路從平處險 人向靜中忙’ ; 卍新纂續藏經 제 71책 《요당유일선사어록(了堂惟一禪師語錄)》 권2 참고. 大正藏 《철옹화상어록(徹翁和尙語錄)》 상권 참고.
*(게송) ‘覓火和爛得 擔泉帶月歸’ ; 大正藏 제 47책 《허당화상어록(虛堂和尙語錄)》 1권 참고.
*나찹다 ; ‘낮다’의 사투리.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조복(調伏) ; ①산스크리트어 nigraha 몸과 마음을 조절하여 온갖 악행을 다스림. ②산스크리트어 vinaya출가자가 지켜야 하는 규정. 곧 율(侓)을 말함. ③온갖 장애를 굴복시킴.
*큰 그릇 ; 큰일을 할 만한 뛰어난 인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버큼 ; ‘거품’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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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잉풍기랑낭생구~’ ; 《허응당집(虛應堂集)》 (허응당 보우) ‘시부상인(示膚上人)’ 참고.
*내로라하다 ; (주로 ‘내로라하는’ 꼴로 쓰여) 어떤 분야에서 두드러지거나 대표할 만하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사상(四相) ;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
①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자의식.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②인상(人相) ;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③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④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생각. 생명체라는 관념·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태란습화(胎卵濕化) ; 사생(四生).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 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짬지다 ; 일하는 솜씨가 여물고 깐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