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精進) 수행'에 해당되는 글 95건

  1. 2024.11.29 §(366) (게송)행년홀홀급여류~ /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이켜 화두 들면 생사해탈 길 / 공화(空花) / ‘내가 바로 부처다. 생사는 본래 없다’는 믿음 / 전식득지(轉識得智). 1
  2. 2024.08.21 §(185)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거각해야 참으로 용맹정진하는 사람 / 참선은 최고의 수행 방법 / 한 납자의 법거량 / (게송)보취산왕산막궁~ / 활구참선법은 비약적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1
  3. 2024.08.12 §(161) (게송)철수화개별시춘~ / 본래성불 / 바른 법을 실천하면 업장소멸, 소원성취 / 입춘법회 의의 / 참마음 깨닫는 가르침이 정법 최상승법 / 함경도 사람의 좁쌀공양 / 어려울수록 더 발심해야. 1
  4. 2024.07.30 §(195) (게송)원앙수출종군간(鴛鴦繡出從君看)~ / '한 물건' 깨닫는 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 밖에서 구하지 말라 / 도인행세, 아는 소리 하지 말라 / 바른 스승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해야.
  5. 2024.07.29 §(170) 삿된 것을 버릴려는 생각,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된다 /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참선 공부. 1
  6. 2024.05.24 §(324) (게송)송백천년취~ / 기도의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無漏福) / 참선의 기도.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다 /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1
  7. 2024.05.04 §(101)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참선도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보리과를 증득할 수 있다 / 혼침, 산란 / 고봉스님의 수행 / 선용기심(善用其心) / 화두는 보리과를 성취하는 열쇠요 관문.
  8. 2024.04.22 §(102) 어떻게 혼침을 이겨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하냐? /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설은 것은 익어진다 / 반복—>습관—>체질화. 2
  9. 2024.04.16 §(106) 대기만성(大器晩成) / 구경(究竟)의 깨달음 / (게송)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 / '목숨을 바치고라도 기어코 내가 칠통을 타파해야겠다' 이만한 각오가 있어야. 1
  10. 2024.03.24 §(164) (게송)신재해중휴멱수~ / 진각국사 좌우명 / 고봉선사의 수행담 / 고봉스님, 전강 조실스님처럼 간절한 분심, 신심이어야 대의단이 일어난다 / 자가철주(自家鐵柱) / (게송)망회타귀굴~. 1
정진(精進) 수행2024. 11. 29. 16:01

§(366) (게송)행년홀홀급여류~ / 무상(無常)한 이 세월, 이 몸뚱이 /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하면은 생사해탈 길로 가는 것 / 생사도 바로 일념에서 봐야 / 통 밑구녁이 빠져서 그 통에 담아논 것이 확 쏟아져 나오듯이, 깨달음.
공화(空花) / 믿음 ‘내가 바로 부처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 (게송)광명적조변하사~, 단제번뇌중증병~ /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成佛)을 하는 것.


‘무상한 이 몸뚱이를 받아났지마는 이 몸뚱이 받았을 때에 발심(發心)을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해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심(生死心)이고,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다. 이렇게 볼 때에 육도윤회는 바로 육근이 육경을 상대하는 그 찰나찰나가 바로 육도윤회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최상승 학자는 항상 시방세계도 일념(一念) 속에서 봐야 하고, 육도윤회도 일념 속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생사도 바로 일념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구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하다. ‘그윽하다’ 하는 것은 생사에 휩쓸려 끌려가지 아니한 것을 말하는 거여.

깨달은 사람은 바로 깨달은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우리 아직 깨닫지 못한 이 중생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잠깐 사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염념불망(念念不忘)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믿는다면 ‘맨 처음에 무엇을 믿느냐’하면은 『내가 바로 부처다.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한테 무슨 생사(生死)가 있어?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요달(了達)한 분이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한테는 번뇌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내가 바로 부처다』 그렇게 딱 믿고 대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도 없는 것이다.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번뇌 다스리는 법을 아까 말씀을 드렸죠? 번뇌는 끊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진여불성은 우리가 그놈을 찾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여. 번뇌는 끊을려고 하지 말고 화두를 들고, 진여를 찾을려고 하지 말고 화두를 들어.
화두를 염염불망으로 들어서 타성일편이 되어서 그놈을 타파(打破)하면 거기에서 번뇌는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거기에서 끊어져 버리고, 진여는 찾을려고 하지 안 해도 본래면목 진여불성은 찰나간에 드러나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생사라고 해서 두려워하고, 열반이라고 해서 그놈을 좋아라고 그놈을 쫓아가는 그러한 자세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영원히 생사는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열반은 얻어지지를 않는 것이여. 바로 ‘생사다, 열반이다’하는 두 가지 소견을 제도해 버리면 바로 그것이 생사해탈이요, 바로 그것이 적적열반(寂寂涅槃)에 계합(契合)이 되는 것이다.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 (용366)(정진)

(1) 약 22분.



(2) 약 22분.



(1)------------------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한데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차일신비아유(只此一身非我有)하니  휴휴신외갱하구(休休身外更何求)오
나무~아미타불~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한데, 흘러가는 세월이 빠르기가 흘러가는 물과 같다 그 말이여. 잠시도 머꾸지 않고 주야(晝夜)를 불철(不撤)하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끝없이 흘러가 버리는데,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다. 늙은 빛이 얼른얼른 머리 위에, 그 해가 머리 위에 올라왔다 그 말이여.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 육십, 칠십이 언제 어떻게 흘러간 줄 모르게 이렇게 흘러갔어.
마치 저 동쪽에 뜬 해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그럭저럭하다 보면 아침해가 낮이 되고 그럭저럭하다 보면 벌써 서산(西山)에 저버린다 그 말이여.

지차일신(只此一身)도 비아유(非我有)인데, 다못 이 한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여. 내 소유라고 할 수가 없어.
휴휴신외갱하구(休休身外更何求)냐. 그렇거든 이 몸 밖에 다른 무엇을 더 구할 것이 있느냐?

무상(無常)한 이 세월, 무상한 이 몸뚱이가 낳아 가지고 그럭저럭하다가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는 희끗희끗 흰머리가 나고, 허리는 아프고, 그러한 내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먹이고 입히고 잘 간수하고 한 이 몸뚱이도 ‘내 몸뚱이다, 내 것이다’ 하고 할 수가 없어.
내 것이면은 내가 마음대로 해야 할 텐데, 내가 내 몸뚱이를 아무리 먹이고 입히고 잘 애끼고 간수를 한다 해도 제멋대로 늙어버리고, 제멋대로 고장이 나고 병이 나서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소용이 없이 결국은 늙어서 병들어 죽어 버려. 이 몸뚱이도 내 몸뚱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이 몸뚱이 밖에 무엇을 더 구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재산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고, 권리를 구하고 천만 가지를 구해 봤던들 뜻대로 잘 구해지지도 않지마는 설사 뜻대로 이뤄졌다 해도 나와는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어.
그것 그렇게 구해졌다 해도 실지로 내가 행복해지냐 하면은 오히려 근심과 걱정만 더할 뿐이지 행복하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있느냐 하면은 그렇게 피땀 흘려서 벌어놓은 것이지마는, 갈 때는 한 가지도 가지고 가지 못하더라.


방금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무상한 이 몸뚱이를 받아 났지마는 이 몸뚱이 받았을 때에 발심(發心)을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고, 또 이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된 이 몸뚱이를 부모를 의탁해서, 아버지 어머니에 의탁해 가지고 그래 신세를 지고서 이 몸뚱이를 받아 났습니다.
받아 났지마는 최상승법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그저 잘 먹고 잘 입고, 명예와 권리 이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행복인 줄 알고 거기에 집착이 되어서 허대다가 본의 아니게 죄만 잔뜩 퍼짓고, 그래 가지고 결국은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서 업경대(業鏡臺) 앞에 서면은 평생 동안 지은 가지가지 죄가 거기에 다 나타나고 또 거기 염라대왕 앞에 있는 그 저울대에 떠억 달면은 그 죄를 얼마만큼 많이 지었는가, 무겁게 지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업(業)을 어떻게 짓게 되느냐 하면, 입으로 짓고, 몸뚱이로 짓고, 우리의 마음으로 짓고 이렇게 짓는데,
눈으로 무엇을 보면서 그 보는 그 상대 객체(客體)에 따라가면은 눈을 통해서 짓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은 그 듣는 그 소리로 우리의 생각이 끌려가면은 귀로 들으면서 죄를 짓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그 냄새로 끌려가면은 냄새 맡다가 죄를 짓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은 그 생각한 쪽으로 끌려가면은 생각하다가 죄를 짓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인식을 하는데, 그 인식하는 그 찰나에 그 객체(客體)로 끌려가느냐? 그 객체를 만나자마자 바로 거기서 돌이켜 가지고 화두(話頭)를 드느냐?

여기에 따라서 업을 지어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로 떨어질 수도 있고, 거기에서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하면은 생사해탈 길로 가는 것이거든. 이것이 천하 간단한 것이고 분명한 것이여.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마음이 경계(境界)를 따라서 굴러가. 마음이 일만 경계를 따라서 굴러가는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굴러가는 곳에 실로 능히 그윽하다. ‘굴러가는 곳’이라는 게 크게 말하면은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말이 되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는, 천당에 가기도 하고, 아수라가 되기도 하고, 또 인간이 되기도 하는 그 육도윤회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선 당장 우리가 금생에, 지금 이 찰나에 일념에다가 그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를 붙여서 보자면, 바로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상대하는 바로 그 찰나에다가 맞출 수가 있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심(生死心)이고,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다. 이렇게 볼 때에 육도윤회는 바로 육근이 육경을 상대하는 그 찰나찰나가 바로 육도윤회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최상승 학자는 항상 시방세계(十方世界)도 일념(一念) 속에서 봐야 하고, 육도윤회도 일념 속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생사도 바로 일념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아까 말한 눈으로 청황적백 어떠한 색상을 볼 때에 바로 그 찰나가 바로 전처(轉處)—경계를 따라 굴르는 곳인데, 그 구를 때에 어떻게 해야 능히 그윽할 수가 있느냐?
구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하다. ‘그윽하다’ 하는 것은 생사에 휩쓸려 끌려가지 아니한 것을 말하는 거여.

깨달은 사람은 바로 깨달은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우리 아직 깨닫지 못한 이 중생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잠깐 사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염념불망(念念不忘)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게 일념 일념을 그렇게 단속을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 해 나가면 마침내는 화두가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낮에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다닐 때나 일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그 화두가 매(昧)하지 않도록.
처음에 잘 안되니 지어서라도, 억지로라도 지어서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다 보면 나중에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게 되고, 망상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 말이여.

설사 눈으로 무엇을 보아서 ‘저것이 산이다’ 잠깐 사이에 저게 산인 줄 보이지만 산으로 쫓아가지 안 해. ‘산이 높다, 푸르다, 저 산에 구름이 끼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보자마자 처꺽 화두를 들어버린다 그 말이여.
나중에는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사람을 봐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하늘을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다못 의단이 독로할 뿐이다 그 말이여.
눈을 뜨고 있지마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 귀를 막지 않고 열어놓고 있지마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게 되어. 그래서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인식을 못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라.

이렇게 해 나가면 밤에 자되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고,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도 오직 화두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려져 갖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렇게 가면 어떠한 찰나에 그 의단이 툭 터져버리게 되는 거여. 통 밑구녁이 빠져서 그 통에 담아논 것이 확 쏟아져 나오듯이.

이것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이 이렇게 해 가지고 다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망상(妄想)을 끊을려고 해서는 아니되는 거여. 망상을 끊을려고 하면 ‘끊을려고 하는 그 생각’이 바로 망상이 되기 때문에 망상을 끊을려고 해서는 아니되는 거여.
마치 일어나는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꾸 손으로나, 판때기로 그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그 물을 누른다든지,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이리저리 친다든지, 이래봤자 그 파도가 없어지기 커녕은 오히려 새로운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소승(小乘)은 공부하는 법이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없앨려고 한다 그 말이여.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인증을 하고 그 망상을 없앨려고 무한히 노력을 하고, 또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서 그 생사를 없애기 위해서 무한히 노력을 해.
심지어는 ‘낳다 죽었다’ 그 생사가 싫으니까, 그 생사를 없게 하기 위해서 태중(胎中)에 들어가기를 꺼린다 그 말이여.
사람이나 짐승의 뱃속에 태중에 들어가면은 낳게 되고, 낳으면은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되니까, 늙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그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받지 않기 위해서 태중에 안 들어가. 태중에 들어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한다 그 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태중에 안 들어갈려면은 어떻게 해야 안 들어가냐?
우리의 중생의 번뇌(煩惱)를 끊어야 한다. 번뇌가 바로 생사심이고 그 생사심 때문에 태(胎)에 들어가게 되고, 태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낳게 되고, 낳음으로써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
그 생사(生死)에 안 들어갈라면은 태(胎)에 안 들어가야 하고, 태에 안 들어갈라면은 우리의 번뇌 망상을 끊어야 한다. 그래서 그 번뇌 망상을 끊기 위해서 한량없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승들의 수행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대승법, 최상승법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아무리 최상승법을 믿고 이렇게 참선을 한다고 해도 한량없는 번뇌와 망상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보면은 보는 데에서 일어나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듣는 데에서 일어나고, 무엇을 맛보면 맛난 데에서 '쓰다 달다 맛있다 맛이 없다' 끊임없이 밥을 먹으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코로 무슨 냄새를 맡으면은 '아! 이거 무슨 기름 냄새가 난다, 무슨 고약한 시궁창 냄새가 난다. 무슨 좋은 향 냄새가 난다, 아! 이거 무슨 향내냐? 무슨 화장품 냄새냐?' 이래 가지고 코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런데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 하고 그렇게 딱! 믿어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처음~21분35초)






(2)------------------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 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그 말이여.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 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 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 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 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어려서는 하차잖은 것을 보고도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실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는데 굉장히 무서워 해.
‘귀신 나온다, 에비 나온다’ 해 가지고 어린애들 갖다 울면은 그 못 울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몇 번 하면은 나중에는 ‘에비 나온다’ 그러면은 울다가도 깜짝 놀랜다 그 말이여.

호랑이란 놈이 배가 고파서 마을로 내려 왔는데 가만히 그 집에 기어 들어갔다 그 말이여.
애기가 막 울어. ‘호랑이가 나온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고,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여기 곶감 있다’ 그러니까, 아! '곶감 있다'고 하면서 나중에 쓰기 위해서 깊이 둔 곶감을 한 개를 내서 주니까 어린애가 울음을 딱 그쳤다 그 말이여.

호랑이란 놈이 문 밖에서 가만히 그 종초지말(從初至末)을 다 들어보니까 아! 호랑이, 이 세상에서 자기만큼 제일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왔다'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고, 뭐 '귀신이 왔다'고 해도 그치지 아니하는데 아! '곶감 있다' 그러니까 울음을 딱 그친다 그 말이여.

문을 닫아놓으니까 그 상황은 알 수가 없으나, ‘도대체 그 곶감이란 놈은 귀신보다도 더 무섭고,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로구나.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는 그 곶감한테 잡히면은 영락없이 죽게 되겠다’ 이리 생각을 하고 아주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해 가지고 다시는 그 곶감 있는 집에는 가지를 안했다. 그런 얘기가 있는데.

그 호랑이란 놈은 이 곶감을 보지 못했지만 ‘그 곶감이란 놈이 그렇게 참 호랑이보다도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하고 그렇게 딱 믿고는 다시는 그 집에 안 가듯이, 우리가 탁! 믿을 수만 있으면, 탁! 믿어버리기만 하면 참 무서운 그 힘이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미신을 믿고 그 무당이나 만신이나 또는 무꾸리 점쟁이 그런 말을 믿는 사람은 그 점쟁이의 한마디, 그 무당의 한마디를 참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몇백만 원을 들여서라도 굿을 하라고 하면 굿을 하고,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라고 하면은 그걸 다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무당이나 만신의 말을 믿기 때문에 그 몇백만 원, 몇십만 원 돈도 아까운 줄을 모르고 그 엄청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당이나 만신이나 미신의 말은 아! 그렇게 잘 믿어.

아! 대학을 졸업하고 그러한 참 최고 학부를 졸업한 그런 지성인들이 어째서 그렇게 무당이나 점쟁이 말은 그렇게 여지없이 믿으면서, 그 부처님 말씀, 선지식의 말은 잘 안 믿는다. 믿는다 해도 껍데기로만 믿고 속속들이는 잘 안 믿는 것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와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끊어야 할 번뇌는 없고 해탈해야 할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귀에 따깽이가 앉도록 일어주어도 그런 줄 그 상식 그냥 지식으로 알음알이로 그렇게 알기는 알아도, 그렇게 무당이나 점쟁이 말 믿듯이 그렇게 속속들이는 잘 안 믿는다 그 말이여.

그 십분의 일만 믿어도, 당장 이 최상승법을 믿고 바로 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도록, 머지않아서 그렇게 될 텐데 아! 그것을 속속들이 안 믿는다.

우리가 정말 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믿는다면 ‘맨 처음에 무엇을 믿느냐’ 하면은 『내가 바로 부처다.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한테 무슨 생사(生死)가 있어?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요달(了達)한 분이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한테는 번뇌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내가 바로 부처다』 그렇게 딱! 믿고 대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도 없는 것이다.

지금 그러면 우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는 무엇이며, 어머니한테 받아난 이 육체로 해서 생이 있고, 늙음이 있고, 병이 있고 마침내는 육칠십 살다가 결국은 죽는데, 그 죽음이 있는데 이 있는 죽음,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매(昧)했기 때문에, 매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은 우선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확실히 조리 있게 알면 그것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서 화두를 들어야 한 번을 들어도 여지없이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그놈을 들어 나가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버리고, 우리의 중생의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없는 생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생사일망정 바로 거기서 생사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광명적조변하사(光明寂照徧河沙)하면  범성함령공아가(凡聖含靈共我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불생전체현(一念不生全體現)이라  육근자동피운차(六根纔動被雲遮)니라
나무~아미타불~

광명적조변하사(光明寂照徧河沙)요  범성함령공아가(凡聖含靈共我家)다.
광명이 적적(寂寂)이 비추니, 온 항하사(恒河沙)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그 광명이 고요히 비치는데, 범성함령(凡聖含靈)이 공아가(共我家)다. 범부, 성현 일체 중생이 다 나의 집이더라. 바로 그 참나의 면목(面目)이더라.

일념불생전체현(一念不生全體現)이요, 한 생각 남이 없으면 전체에 드러나. 일념불생(一念不生), 한 생각 일어남이 없어. 일념불생하면 전체가 나타나, 전체현(全體現)이다. 부처님의 면목이 바로 드러난다 그 말이여.
육근(六根)이 자동(纔動)하면은 피운차(被雲遮)여. 벌써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한 생각이 움직이면은 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환히 비쳤던 데에 거기에 벌써 구름이 가리워져서 그 광명을 가리게 된다 이거거든.

이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단속을 하면은 삼천대천세계가 이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의 대광명이 온 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이 되는 거고,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육근(六根)을 통해서 동(動)하면 벌써 그 광명에 구름이 가리워져서 그 광명을 덮는 것이 된다 그거거든.


단제번뇌중증병(斷除煩惱重增病)이요  취향진여역시사(趣向眞如亦是邪)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순세간무가애(隨順世間無罣碍)하면  열반생사등공화(涅槃生死等空花)니라
나무~아미타불~

단제번뇌중증병(斷除煩惱重增病)이요, 그러면 우리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끊임없이 퍼일어나는 그 번뇌 망상을 끊어서 없앨려고 하면은 거듭 그 병통을 더 증가시키는 것이 된다. 더 번뇌를 치성하게 하는 것이 되고.
취향진여역시사(趣向眞如亦是邪)다. 진여(眞如)를 향해서 나아갈려고 마음을 먹으면은 또한 이것도 삿된 것이다.

번뇌, 그 번뇌 다스리는 법을 아까 말씀을 드렸죠?

번뇌는 끊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진여불성은 우리가 그놈을 찾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여. 번뇌는 끊을려고 하지 말고 화두를 들고, 진여를 찾을려고 하지 말고 화두를 들어.
화두를 염념불망으로 들어서 타성일편이 되어서 그놈을 타파(打破)하면 거기에서 번뇌는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거기에서 끊어져 버리고, 진여는 찾을려고 하지 안 해도 본래면목 진여불성은 찰나간에 드러나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수순세간무가애(隨順世間無罣碍)여. 세간(世間)에 수순(隨順)을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엄마는 엄마로서, 딸은 딸로서, 아들은 아들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하면서, 바로 그 가운데에서 기쁜 일을 당해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속상하는 일을 당해도 ‘이뭣고?’

그 당하는 일을 ‘좋다’고 그놈을 탐착을 하고, ‘싫다’고 해서 없앨라고 피할라고 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자기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그놈을 화두를 들고서 화두 드는 마음으로 그놈을 척척척척 해결을 해 나가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걸림이 없게 하라 그 말이여.
버리고 취할 것이 없이, 닥치는 대로 자기의 입장에서 가장 적절히 모든 일을 처리를 해 나가. 그럴라면은 그놈을 싫어서 피하지도 말고 좋아서 탐착하지도 마라.

어떻게 하면은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이 없느냐? 화두를 들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해 나가는 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걸림이 없이 되면 ‘열반이다, 생사다’ 하는 것이 바로 허공의 꽃과 같이 되어버린다 그 말이여.(涅槃生死等空花) 허공의 꽃[空花]이 무엇이던가? 본래 없는 것이거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실 때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나오신 것이 아니여. 중생의 ‘생사다, 열반이다’ 하는 그 두 가지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나오신 것이다.
생사라고 해서 두려워하고, 열반이라고 해서 그놈을 좋아라고 그놈을 쫓아가는 그러한 자세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영원히 생사는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열반은 얻어지지를 않는 것이여.

바로 ‘생사다, 열반이다’ 하는 그 두 가지 소견을 제도해 버리면 바로 그것이 생사해탈이요, 바로 그것이 적적열반(寂寂涅槃)에 계합(契合)이 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21분36초~43분1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행년홀홀급여류~’ ;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진각국사 혜심) ‘식심게(息心偈)’ 참고.
*머꾸다 ; ‘멈추다’ ‘막히다’의 사투리.
*‘주야(晝夜)를 불철(不撤)하고’ ; 불철주야(不撤晝夜).
*불철주야(不撤晝夜 아니 불/거둘·치울·그만둘 철/낮 주/밤 야) ; 어떤 일에 몰두하여 조금도 쉴 사이 없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아니함[不]. 밤낮없이.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녹음 법문(錄音法門) ;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허대다 ; ‘나다니다(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다니다)’의 사투리.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업경대(業鏡臺) ; 지옥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죄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업경 혹은 업경륜(業鏡輪)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어 지옥에 이르면 염라대왕은 업경대 앞에 죄인을 세우고, 업경대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며, 죄의 경중이 판가름나면, 그에 따라 가야 할 지옥이 정해진다.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객체(客體) ; ①작용의 대상이 되는 쪽. ②주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대상.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관조(觀照 보다·관찰하다 관/비출 조) ; ①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 ②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게송)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悉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굴러가는데, 굴르는 곳마다 다 그윽하더라. 그 흐름을 따라서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성품을 봐 버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을 것이다.
[참고] 『직지(直指)』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白雲和尙 抄錄 |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생사(生死), 생멸심(生滅心)도 같은 뜻의 말.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정리.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송담스님(No.475)—1992년 6월 첫째 일요법회(92.06.07) 법문에서.(3분16초)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데 관해 요긴한 법문을 간곡히 해 주셨는데,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생사의 고해 속에서 무량겁을 이렇게 오고, 또 앞으로 무량겁을 생사고해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 할 그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 우리의 생사심(生死心).
눈으로 보고 생각이 일어나고, 귀로 듣고 중생의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이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그 생사심을 결국은 그놈을 깨뜨려 버려야 하는데, 억지로 그놈을 깨뜨리려고자 한다고 해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니거든.

그 생사심을 깨뜨릴라면은 결국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을 해라. 화두,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들고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이 생사심을 깨뜨리고, 그 마음길을 끊어버리는 가장 중요하고도 요긴하고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여.

생사심(生死心)을 억지로 그놈을 누를려고 한다든지, 억지로 끊을라고 한다든지,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여. 무슨 생사심, 무슨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즉각 ‘이뭣고?’ 또 일어나면 또 ‘이뭣고?’
자꾸 ‘이뭣고?’ 간절한 의심으로 ‘이뭣고?’를 거각(擧却)해 나가면 결국은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화두가 들리게 되고,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터억! 독로하게 된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조사관(祖師關)을 뚫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13분1초~16분17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 · 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낭연독존(朗然獨存 밝을 랑/그럴 연/홀로 독/있을 존) ; 밝게 홀로 드러나다.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염념불매(念念不昧) ; 생각 생각에 매(昧)하지 아니하다. 생각 생각에 또렸하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3분57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참고 ❸]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2분28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매하다(昧-- 어두울 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2)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에비 ; ①아이들에게 무서운 가상적인 존재나 물건. ②(감탄사) 아이들에게 어떤 일(위험한 것이나 더러운 것 따위를 만지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무서운 것이라는 뜻으로 내는 소리.
*종초지말(從初至末 부터 종/처음 초/이를 지/끝 말) ;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 깊은 속까지 샅샅이.
*따깽이 ; 따껭이. ‘딱지’의 사투리.
*딱지 ; 헌데나 상처에서 피, 고름, 진물 따위가 나와 말라붙어 생긴 껍질.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 - 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무명(無明) : [산스크리트어]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전오식(前五識) ;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말한다.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의식(意識) ; 팔식(八識) 가운데 제6 의식을 말한다. 육식(六識)의 하나.
①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 인식하는 마음 작용. ②알고 사고하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의식은 과거, 미래에의 대상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즉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상할 수가 있다.
6식설(六識說)에서는 의식(意識)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남.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말나식의 본질적인 성질인 사량(思量)은 전의(轉依: 질적 전환)를 득하지 못한 상태, 즉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염오식(染汚識)으로서의 말나식에서 사량은 오염된 자아의식 즉 자기중심주의로 나타나고,
반면 전의를 득한 상태 즉 번뇌가 정화된 상태의 청정식(淸淨識)으로서의 말나식에서 사량은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평등심(平等心)과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나타난다.

전의(轉依)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는 소의이전(所依已轉) 또는 변주(變住)라고도 하는데, 소의이전(所依已轉)은 소의(所依)가 이미 변형되었다는 뜻이고 변주(變住)는 변형이 완료되어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音寫)로, 거주지 · 저장 · 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십팔경계(十八界) ; 십팔계(十八界). 계(界, 산스크리트어 dhātu)는 요소를 뜻함. 인식을 성립시키는 열여덟 가지 요소.
불교에서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존재 속의 인식작용을 18가지 범주로 나눈 것.
육근(六根) · 육경(六境) · 육식(六識)을 합한 것이다. 육식(六識)을 제외한 12가지를 12처(處)라고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지(智) ; ①산스크리트어 jñāna  팔리어 ñāṇa  모든 현상의 이치를 명료하게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이해. 지식.
②산스크리트어 jñāna  깨달음. 깨달은 부분의 지혜. 완전히 아는 것. ③팔리어 paññā  지혜. 혜(慧).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전식득지(轉識得智) ;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 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 - 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 열반)의 청정한 지혜, 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무생(無生) ; 생겨남[生]이 없는 것[無]. 일체법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도 자성적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멸하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게송) ‘광명적조변하사 ~ 열반생사등공화’ ; 장졸수재(張拙秀才) 거사(居士)의 오도송(悟道頌) 참고.
*항하사(恒河沙) ;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 · 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신(法身) : [산스크리트어]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화두를 염염불망으로 들어서 타성일편이 되어서 그놈을 타파(打破)하면’ ; 화두(話頭) 타파(打破).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송담스님(No.0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 · 변화 · 흐른다’는 시간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가운데 · 간격 · 틈새’라는 공간의 뜻이 있다.
①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생물들의 세계. ③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세상. 이 세상. 세속. ⑤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허공의 꽃[空花] ; 공화(空花, 空華).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無生]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3분44초)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 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 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 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 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 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 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 말이여.(20분22초~24분7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8. 21. 11:00

§(185) 일상생활을 하되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를 올바르게 거각을 해 나가야 참으로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사람 / 일상생활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장소 / 참선은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번뇌망상(煩惱妄想) 이놈을 돌이켜서 자기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하면서도 최고의 수행 방법 / 한 납자(衲子)의 법거량 / (게송)보취산왕산막궁~.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방법이 바로 활구참선법 / 활구참선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 /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농사법 약방문(藥方文)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 약을 먹는 것,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송담스님(No.185)—1982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용185) (정진)

 

(1) 약 19분.

(2) 약 13분.


(1)-----------------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밤잠을 덜 자고, 말을 적게 하고, 쓸데없이 외출을 하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데에도 있는 것도 아니요, 밥을 안 먹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그러한 것들이 수행하는데 마땅히 좋은 수행자로서 다 주의해야 할 점이고 지켜야 할 점인데 또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여.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평생 동안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는, 그런다고만 해서 '그것이 가장 도(道)를 잘 닦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평생 동안 묵언(默言)을 하고 벙어리 노릇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도(道)를 가장 잘 닦는다 할 수도 없는 것이여.
만약에 눕지 않는 것으로써 제일가는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는 금방 도(道)를 이룰 것이고, 말을 아니한 것으로써 가장 훌륭한 도를 닦는 것으로 여긴다면 벙어리는 일찌감치 도를 통할 것이고, 뭘 듣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는 것으로써 도를 삼는다면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제일 먼저 도를 툭! 통하고 말 것이겠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먹고, 자고, 듣고, 보고, 말하고, 걷고, 그러하면서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눈이라 하는 것은 '보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보고, 귀라 하는 것은 '들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듣고, 입은 '말하고 밥 먹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밥 먹을 때는 밥 먹고 말할 때는 말을 하고, 밤이 오면 '자라'고, 쉬는 시간이니까 쉴 때는 쉬되 거기에 착(着)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 나간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사람이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이다.

묵언을 한답시고 말은 아니하면서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參見)하고 온갖 참견을 다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다고 밤 잘 때 옆구리는 땅에 대지 아니하면서 종일토록 혼침(昏沈)에 떨어져서 꾸벅꾸벅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해 가지고 무슨 도(道)에 보탬이 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편행외도(遍行外道)는 하루에 공양(供養)을 한 끼밖에는 아니하고 장좌불와를 하고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고행(苦行)을 다 해도 그것이 참으로 바른 도를 깨닫지를 못했고, 밥 먹을 때 먹되 과식을 하지 아니하고, 말을, 할 말을 하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되 대도(大道)를 성취한 선지식(善知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평상시(平常時), 말하고 듣고 보고 걸어가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하는 이 평상(平常)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이는 것, 그리고 하루에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시간 생활을 한 것도 대단히 필요한 것이고 그렇되, 참으로 공부를 알차게 하려면 입선할 때뿐만이 아니라 방선(放禪) 시간, 결제 때뿐만이 아니라 산철에, 또 앉어 있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걸어 다닐 때나, 똥을 눌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바로 그때, 그 시간 그 장소 그 일에 있어서 경계(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해 나가는 이러한 수행자라야 도를 빨리 그리고 바르게 성취할 것입니다.

사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복잡하고 이상스럽고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중생에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이것을 돌이켜서 자기(自己)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입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화두를) 들고, 글안으면 경계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낸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彌勒)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닦어도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다고 과거에 모든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평상심(平常心),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 그 점에 대해서 강조를 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스님) "일광(日光)이 풀 위에 떨어져 삼라만상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디를 향해 법(法)을 설(說)합니까? 이 분상(分上)에서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송담 스님) "뭘 물어보나? 뭘 물어봤어?"

(어떤 스님)"일광이 풀 위에 떨어져 삼라만상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디를 향해 법을 설하십니까?"
(송담 스님) "다 물어봤으면 물러가. 물러가 있어"


보취산왕산막궁(寶聚山王算莫窮)허되  환여앙전사허공(還如仰箭射虛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통명일구초삼제(洞明一句超三際)하면  절승승지만배공(絶勝僧祇萬倍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보취산왕산막궁(寶聚山王算莫窮)이요, 보배가, 보배 무데기가 태산(泰山)과 같이 그렇게 많이 보배를 모여서 쌓아 놨다. 쌓아 놔서 얼마나 많은 보배인가 도대체 헤아릴 수가 없어. 세속에 돈을 많이 벌어서 복을 많이 짓고 또 보배를 그렇게 많이 쌓아 놨다 하더라도,
환여앙전사허공(還如仰箭射虛空)이라. 저 하늘에다가 활을 쏘면 그 하늘이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가는 다시 그 올라가는 기운(氣運)이 다 떨어지면은 땅으로 도로 떨어진 거와 같다.

오늘 이 법회에 한 납자(衲子)가 나와서, "설할 바 없는... 한 법(法)도 설(說)할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무슨 설법을 어디다 대고 하느냐?" 이러한 뜻으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했습니다.

하늘에다 대고 침을 밭으면 제 얼굴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설(說)할 바 없는 법을 설(說)하는 사람이나, 설(說)할 바 없는 법을 어디다 대고 설(說)하느냐고 묻는 사람이나, 바람을 거슬러서 문지(먼지)를 날리면은 그 문지가 자기 얼굴과 자기 몸에 온통 엉기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법회(法會)가 있으면 눈 밝은 납자(衲子)는, 또 정진을 애써서 하는 납자는 선지식(善知識)에 법을 묻기도 하고 또 답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참, 탁마(琢磨)를 해 온 준례(準例)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처음 보신 분은 어리둥절해서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시겠지만, 이러한 법(法)을 거량(擧揚)하는 것은 대단히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분발(奮發)을 하게 하고, 침체(沈滯)했던 사람에게 채찍을 가하고, 졸고 있는 사람에 정신을 바짝 채리게 하는, 그러한 참 좋은 선불장(選佛場)에 하나의 양상(樣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으면, 조실 스님이 법을 설하실 때에도 가끔 어떤 납자들이 나와서 법거량(法擧揚)을 하고 모다 그러한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마는, 참으로 눈을 갖춘 분은 점검(點檢)을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17분48초~36분57초)




(2)------------------

통명일구초삼제(洞明一句超三際)하면, 일구(一句)를 통명(洞明)을 해서 삼제(三際)를 뛰어넘으면, 과거 현재... 시간을 초월을 해 버리면,
절승승지만배공(絶勝僧祇萬倍功)이라. 아승지겁을—아승지겁(阿僧祗劫)이라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이란 말인데, 그 아승지겁 동안 쌓은 공덕(功德)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이다.

불법(佛法)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가 아니거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여, 한 말씀 아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그 방법이 바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할 때에 일구(一句)를 통명(洞明)하게 되고 무량겁 닦은 공(功)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공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여. 계속해서 해 가지고 차츰차츰 나아져 가는 것인데,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거든.

만날 화두(話頭)를 들고 애를 쓰고 정진을 하되, 무엇이 조끔도 알아진 것이 없고 나아가는 것이 없어. 해 갈수록 답답하고 아무것도 얻어진 것이 없고 내놓을 것이 없어.
그러지만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뭣이 공부가 잘되어 간 것 같지도 않고, 그렇지만 물러서지 아니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徹底)하게 단속(團束)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이여.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똥을 눌 때도 화두가 그대로, 일을 하거나 걸어가거나 소지를 하거나 누웠어도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현전(現前)을 하고, 심지어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그 화두(話頭)가 현전(現前)을 하게 되면, 그땐 공부가 순숙(純熟)해져서 깨달음이 멀지 않다 하셨습니다.

이 공부, 이 법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면 모르되, 듣고 믿은 이상은 이것 밖에는 인생으로서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 하나 함으로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날마다 종횡으로 외운 공덕보다도 이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약방문(藥方文)을 읽은 거와 같고, 농사짓는 법을 외우는 거와 같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이요, 약을 먹는 것이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여.

그러니 농사짓는 법을 공부 열심히 읽기만 하고, 실지로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짓는다면 한 알갱이의 한 톨의 곡식도 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밥을 지어서 먹는다면,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야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배고픔을 면한 거와 마찬가지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여. 그러니 어찌 이것을 듣고 믿으면서도 이것을 등한(等閑)히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설할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어디를 향해서 무슨 법을 설하느냐?'
설할 곳 없는 곳을 향해서—분명히 설할 것이 없지만, 설할 곳 없는 곳을 향해서 설해야만 되고,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어야 하고.

본분납승(本分衲僧)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와 조사(祖師)도 본분납승에 방(棒)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부처에게도 방(棒)을 내리고, 조사에게도 방(棒)을 내릴 만한 그러한 하늘을 찌르는 장부(丈夫)에 기상(氣像)을 가진 납자가 많이 출현(出現)해야만 불교에 중흥(中興)을 이룰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히 화두를 들어서,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 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뼈에 사무치도록 되게 강추위를 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냐.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칠 수가 있겠느냐.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매화꽃이 향내가 진동을 하는 법이여. 겨울에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날씨가 너무 푹하면, 그럴 때에, 그런 뒤끝에 매화꽃이 피어 봤자 별 향내가 없어.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香臭)가 진동(振動)하는 법이다.

금년(今年)도 봄도 다 가고 또 이렇게 가을도 다 가고 머지않아서 또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이렇게 또 일 년이 이렇게 다 지내가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은 없으면서 세월(歲月)은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나를 위해서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아니하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음력 10월 15일이 또 겨울 석 달 동안 안거 결제(結制)날이니, 그때 법회에 모다 참석을 하셔서 석 달 동안 선방(禪房)에 나와서 방부(房付)를 들이실 분은 방부를 들이시고 또 댁에서 하실 분은 댁에서 또 결제를 하시는 그러한 마음으로 음력 10월 15일 결제 법요식(法要式)에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37분~49분42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 ; 밤이 되어도 눕지 않고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착(着 붙다·달라붙다 착) ; 집착(執着).
*집착(執着, 執著 잡을 집/붙을 착)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사물이나 도리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3분57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참고 ❸]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2분28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편행외도(遍行外道) ; 출가 외도(外道)의 한 종류.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사분정진(四分精進) ;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네 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씩 시간을 정해 정진하는 것.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글안으면 ; ‘그렇지 않으면’의 사투리.
*미륵하생(彌勒下生) : 미륵은 범어로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이다.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기약(期約 때·기회 기/약속할 약) ; 때[期]를 정하여 약속(約束)함.
*평상심(平常心) ; 평상시(平常時)와 같은 마음.
*평상시(平常時) ; 평상(平常).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게송) ‘보취산왕산막궁(寶聚山王算莫窮)~ ; 『소석금강경과의(銷釋金剛經科儀)』 제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참고.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법(法)을 거량(擧揚) ; 법거량(法擧揚).
*법거량(法擧揚 법 법/들 거/나타낼•밝힐 량) ;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❶]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❷]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눈[眼] ; 눈[眼]은 법안(法眼)을 가리킨다. 지혜(智慧)의 안광(眼光). 법안(法眼)은 불법(佛法)의 바른 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
안광(眼光) ; 눈빛. 시선(視線). 관찰하는 능력. 눈동자 또는 시력. 만법을 밝게 꿰뚫어보는 깨달음의 본성을 비유한다.

[참고 ❶] 전강선사(No.012)—전강선사 일대기 제5호(경술1970년 12월 8일 새벽.음)
사자굴중(獅子窟中)에 무이수(無異獸)요. 사자굴 가운데에는 다른 짐승이 범틀 못헌 법이고. 불입호혈(不入虎穴)이면 쟁득호자(爭得虎子)제. 호랭이 구럭에 들지 아니허면 호랭이 새끼를 어떻게 얻을 것이냐? 선(禪)의 도리라는 것은 헐 수가 없드라 그 말이여.

그런 바른 눈[正眼]이 있을 것 같으면 큰스님 앞에 별도리라도 쓸 수 있어! 허지마는 눈[眼]도 없는 것이 그따구 짓 했다가는 어째? 참말로 못된 것이고, 참말로 건방진 것이고, 참말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활살같이 떨어지는 법이여. 못허고, 또 허들 못혀!
뭔, 내가 그러면은 ‘나는 그런 눈[眼]이 있어서 그랬다’ 그 말 같지마는, 눈[眼]이 있으면은 그 말 같다고 해서, 내가 거기에 무슨 뭐 뭣을 내가 두고 머물거릴 것이여? 뭐 거그서는 한번 아주 건방질 수도 있는 것이고, 막 들어서는 자리다 그 말이여. 안 헐 수 있어? 아무리 큰스님네지마는, 흙탕 속에 바로 떨어진 것 아닌가 말이여! (17분24초~18분47초)

[참고 ❷]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76. (가로판 p79~80)
古德이  云,  只貴子眼正이언정  不貴汝行履處라 하시니라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眼正]만 귀하게 여길지언정, 자네의 행실은 귀히 여기지 않노라」 하시니라.

註解(주해) 昔에  仰山이  答潙山問云,  涅槃經四十卷이  總是魔說이니다 하니 此가  仰山之正眼也라  仰山이  又問行履處한대  潙山이  答曰, 只貴子眼正云云하시니  此所以先開正眼而後에  說行履也라 故로  云,  若欲修行인댄  先須頓悟라 하시니라

옛날 앙산이 위산스님의 물음에 답하기를 「열반경 사십 권이 모두 마군의 말입니다」 하니, 이것이 앙산의 바른 눈[正眼]이다. 앙산이 다시 행실에 대하여 묻자, 위산스님이 대답하기를 「자네의 눈 바른 것[眼正]만 귀하게 여길 뿐이다. 운운」 하시니 이것이 바른 눈[正眼]을 뜬 뒤에 행실을 말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려면 먼저 모름지기 몰록 깨쳐야 한다」 하시니라.





------------------(2)

*일구(一句) ; 진리를 표시하는 한 구절. 상대적 언어를 넘어선 한마디의 말이나 글.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다. 일구도득(一句道得), 말후일구(末後一句), 투관일구(透關一句) 등을 말함.
*통명(洞明 밝다·꿰뚫다·통달하다 통/밝다·밝게·확실하게 명) ; 환하게 깨닫다. 통달하다.
*삼제(三際) ;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전세(前世), 현세(現世), 내세(來世)를 아울러 이르는 말.
*아승지겁(阿僧祇劫) ; 아승지(阿僧祇)는 산수(算數)로 나타낼 수 없는 가장 큰 수 중의 하나이고, 겁(劫)은 연•월•일로써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함. 보살(菩薩)이 발심(發心)한 뒤 부처가 될 때까지의 수행의 기간.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겁(劫) ; (산스크리트어)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 • 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①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②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일언지하(一言之下) ; 한마디 말 끝에.
*돈망생사(頓忘生死 갑자기 돈/잊다·버리다 망/날 생/죽을 사) ; 몰록 생사를 잊다(버리다). 몰록 생사가 다하다. 단박에 생사가 사라지다.
*몰록 ; 단박(에). 그 자리에서 바로 곧.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점진적(漸進的 점점 점/나아갈 진/조사 적) ; ①점차로 조금씩 나아가는. ②점차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비약적(飛躍的 날 비/뛸 약/조사 적) ; ①단계를 껑충 뛰어 아주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 향상하는. 정상적인 단계를 차례로 밟지 않는. ②단계를 껑충 뛰어 아주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 향상하는 것. 정상적인 단계를 차례로 밟지 않는 것.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노정기(路程記 길 노(로)/길 정/기록 기) ; 여행할 때 여행의 경로(經路)나 일정(日程) 따위를 적은 글[記].
*약방문(藥方文 약 약/처방 방/글·문장 문) ; 약을 짓기 위하여 약 이름과 약의 분량을 적은 종이.
*등한히(等閒- 같을 등/한가하다·등한하다 한)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본분납승(本分衲僧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옷을 꿰맴 납/중 승) ; 본분산승(本分山僧), 본색납자(本色衲子)과 같은 말.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堅持)하는 납승. 또는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도리를 깨닫기 위한 수행을 하는 스님.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납승(衲僧 옷을 꿰맴 납/중 승) ; 납자(衲子). 남이 버린 헌 옷이나 베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방(棒) ;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장부(丈夫 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8. 12. 11:13

§(161) (게송)철수화개별시춘~ /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 / 진실하고 참된 마음을 가져야 업장(業障)이 소멸 / 입춘법회의 의의 / 탐진치, 오욕락을 비우고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하는 가르침이 정법이고 최상승법.

바른 법을 참되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면 자연히 업장소멸이 되어 소원성취를 이룬다 / 함경도 사람의 좁쌀 공양(供養) / '사바세계' 뜻은 '참는 세계' / 어려운 고통, 난관에 부딪칠수록에 거기에서 더 발심해야 / 끝까지 쉬지 않고 공부하면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

**송담스님(No.161)—1982년 입춘 법회(82.02.04) (용161) (정진)

 

(1) 약 21분.

 

(2) 약 21분.


(1)------------------

철수화개별시춘(鐵樹花開別時春)이요  사해향풍종차기(四海香風從此起)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래성불비타득(本來成佛非他得)이요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是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철수화개별시춘(鐵樹花開別時春)이요, 쇠나무, 쇠로 된 나무에, 고목(枯木)나무에 꽃이 피니 별단(別段) 이 봄이요, 차디찬 쇠로 된 고목나무에 꽃이 피니 이 특별한 이 봄이다.
사해향풍(四海香風)이 종차기(從此起)로구나. 동해, 동서남북 사해(四海)에 향기로운 바람이 이로부터서 일어나는구나.

오늘은 임술년(壬戌年) 입춘일(立春日), 날입니다. 벌써 임술년 정월 초하루가 지내간 지 열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춘은 오늘 오시(午時)에 입춘(立春)이 들었습니다. 오늘 오시부터 정식으로 임술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지나간 열흘 동안은 신유년(辛酉年)의 절후(節候)가 먹은 것이고 오늘부터서 정식으로 임술년(壬戌年)이 된 것입니다.

지난 삼동(三冬)에 소한(小寒) 대한(大寒)에 그 강추위가 오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천하 없이 추운 겨울이라 하더라도 입춘부터서는 맥을 추리지를 못하고, 하루하루 조끔 추웠다 더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보름이 지나가면, 15일간이 지나가면 또 우수(雨水)가 돌아와서 따듯한 봄날이 되고 여기저기서 꽃이 피게 됩니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 비타득(非他得)이여.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고향(故鄕)을 떠나서 타관(他官)살이를 했는데, 그 타관살이 하는 것이 마치 자기 따뜻한 자기 고향에 자기집을 여의고, 춥고 배고픈 세월을 보낸 것이 그동안에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지낸 거와 같애.
그런데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 고향을 잃고 방황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자기 고향을 한 걸음도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을 보물을 몸뚱이 안에, 옷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춥고 배고픈 그러한 거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망각(忘却)하고 오늘날까지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성불한 도리를 어떻게 하면은 깨달을 수가 있느냐?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是道易親)이다. 마음 하나 참되면 이것이 바로 도(道)와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조석지변(朝夕之變)이여. 아침 먹었던 마음 다르고 벌써 낮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이제는 내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철저하게 이 참선(參禪)을 하리라' 법문(法門) 들을 때에는 그렇게 결심(決心)을 하고, 해 놓고서도 법문이 끝나고 문밖에 나가면 벌써 딴생각이 들어오고.
법문 들을 때에는 '다시는 내가 딴생각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이 정법(正法)만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살아가리라' 그렇게 굳게굳게 결심을 하고서도 집에 가면 누가 뭐라고 뭐라 하고, '어디를 가면 좋은 아주 기가 맥히게 잘 맞추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 가서 부작(符作) 하나만 가지면은 백사(百事) 소원(所願)을 성취한다' 그 말 한마디만 들으면 금방 귀가 솔깃해 가지고 당장 따라나서.

만약에 부작 한 장을 어디 가서 얻어 가지고 그 부작 하나로 해서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소원이 성취된다면 무엇을 이 세상에 걱정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부작으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부작으로써 소원을 성취하고, 부작으로써 남편의 바람피우는 것을 막고, 아들 대학을 합격을 하고, 부작 한 장으로써 그러한 무서운 위력(威力)을 낼 수가 있다면, 만신이나 무당이나 점쟁이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고 앉었겠느냐 그 말이여.
먼저 자기부터 팔자를 고쳐서 자기 자식이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만석꾼이도 되고 하지, 자기는 왜 그 짓 해서 먹고살면서 남에게 써준 것은 그렇게 되고, 자기는 그렇게 안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이냐 그 말이여.

마음이 참되지를 못하고 요망(妖妄)하고 삿되고 경박(輕薄)해서, 참된 말, 진리(眞理)의 말, 최상승법을 일러주면은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간사(奸詐)한 말을 들으면은 그 말이 그렇게 고소하고 쏙쏙 마음에 들어가요.

오늘은 입춘날이라 인 · 오 · 술(寅午戌), 범해에 난 사람, 말해에 난 사람, 또 개해에... 개띠, 이 세 가지 띠를 가진 사람은 오늘이 삼재(三災)가 나가는, 금년(今年)이 나가는 해입니다. 그 '날삼재'라 해서, 그러께는 '들삼재', 작년에는 '앉은삼재', 금년이 인자 '날삼재'인데,
'날삼재가 진짜 조심을 해야 한다. 날삼재 일 년간을 잘 넘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 신령스러운 부작을 꼭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유혹을 하는데, 들삼재 · 앉은삼재 · 날삼재, 그런 삼재에 안 들은 사람도 뜻밖에 재난(災難)을 만날 수도 있고, 삼재가 든 사람도 그런 부작을 지니지 아니해도 별 탈 없이 지낸 사람도 있고 그러한 것이지, 삼재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좋지 않는 일이 있고, 그 부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꼭 면(免)한 것이 아니거든.

어디 교통사고가 나서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서 그 여러 가지 부적(符籍)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연전(年前)에 내 신문에서 본 일이 있는데, 부작(符作)에다가 의지를 하지 말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자기 마음을 진실(眞實)하게 갖고 참되게 마음을 가져 나감으로써 마음속에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해야 모든 재난(災難)을 면할 수가 있고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고요할 때에 생각해 보면 누구나 납득이 갈 수 있는 얘깁니다.


해마다 입춘(立春)이 되면 입춘 법요식(法要式)을 갖고 법문(法門)을 하고 또 공양(供養)을 올리고 축원(祝願)을 하고 이럽니다마는, 왜 입춘에 삼재(三災)풀이를 하고 또 입춘에 이 법요식을 갖느냐 하면, 입춘 날부터 새해의 절후(節候)가 정식으로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날짜로는 정월 초하루가 그 해의 시작하는 첫날이지만,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일 년을 스물네 가지 절후로 나눌 때,
절후로 따질 때에는 입춘일이 그 해의 첫날이 되기 때문에, 첫날에 지나간 한 해를 반성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일 년간을 장애 없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뜻있는 한 해가 되도록 각오를 하고 마음을 다지는 그러한 날로 기념하기 위해서 절절이 입춘에 법요식을 갖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고, 집을 하나를 지을 때에도 기공식(起工式)이라 하는 게 있고, 그 집을 다 짓게 되면 낙성식(落成式)을 하듯이, 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처음 탄생할 때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해마다 그 생일을 축하하고, 또 마지막 일평생을 살다가 하직한 날을 갖다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서 돌아가신 날을 추모(追慕)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일 년이 시작하는 날과 일 년이 끝나는 날은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을 하고 참회(懺悔)하고 새로이 뜻을 다져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떠한 목적지를 향해서 여행(旅行)을 떠날 때에도 처음 한 발 내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북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출발을 남쪽을 향해서 출발을 하면 천리만리 엉뚱한 데로 가게 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라고 하는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그 한 걸음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宗敎)를 믿을 때에도 맨 처음에 어느 종교 어느 종파(宗派)에 발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평생의 종교와 신앙(信仰)이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부처님을 모시면 다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어느 절이나 한 부처님이다' 만신 집에 가도 부처님은 모셔져 있고, 무당집에 가도 부처님은 모셔 있고, 유사 종교(類似宗敎) 단체에도 가면 부처님이 다 모셔져 있어서, 부처님은 다 한 부처님인 줄 알고 지성(至誠)으로 다니지만,
다, 물론 말로는 한 부처님이고 같은 부처님이지만, 그 같은 부처님을 '어떻게 받들어 모시고 어떻게 실천해 나가느냐'는 절마다 다르고, 무당 다르고, 만신 다르고, 점쟁이 다르고, 다 다른 것입니다. 이름은 다 불교라 하지마는 그 종파에 따라서 그 '부처님의 법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용화사(龍華寺)는 참선법(參禪法)을 선양(宣揚)하고 최상승법이여. 용화사가 제일이고 다른 절은 못쓴다'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 그 정법(正法)이고 또는 방편 사법(邪法)이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각자가 보고 들어보면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사법(邪法)이고, 정법(正法)이냐?

그것은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欲樂)을 조장(助長)을 시키는 그러한 종교는 바른 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삼독심을 버리고, 오욕락을 버리고, 버린다기보다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비움으로 해서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指導)하고, 그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그러한 가르침은 그것을 정법(正法)이라 하는 것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종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 그 종교를 믿으면은 부자가 된다. 그 종교를 믿으면 아들을 난다. 그 종교를 믿으면 중생의 어떠한 욕구를 충족을 시켜준다' 이러한 식으로 선전을 하고 그러한 달콤한 낚숫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종파는 물어볼 것도 없이 삿된 종파다. 삿된 종교라고 결정을 해도, 판단을 해도 추호도 어김이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48초)




(2)------------------

'그러면 다른 종교 다른 종파에 가면 부자도 되고, 아들도 되고, 모든 소원을 성취된다 하고, 용화사는 가 봤자 그러면 그런 것은 소용이 없고 이뭣고? 만 하지, 그러면 부자도 안 되고, 만날 해 봤자 소원도 이루지 않단 말이냐?'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러한 것을 그 신앙의 목적을 삼고, 자기가 그 종교를 실천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면 벌써 믿는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 올바른 실천으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면, 자연히 마음속에 업장이 소멸이 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큰 목적을 설정을 해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와 신심(信心)으로 여법하게 도를 닦아 나가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재산이건 권리건 명예건 건강이건 제절로 이루어진다면 그 이상 바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명색이 종교를 믿는다면서 미신(迷信)으로 종교를 믿는다면, 어디다가 내놓고 '나는 종교를 믿는다'고. '나는 무슨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무당집이나 다니고, 만신집이나 다니고, 점이나 치러 다니고, 그래 가지고 어디 가서 '나는 만신을 믿고 산다. 나는 무당을 믿고 산다. 그랬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았다'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나 딸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친구 앞에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의 바른 법을 참되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해야만 자기도 떳떳하고 남편 앞에도 떳떳하고—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 몰래 만신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하고, 만신한테 비밀리 왕래를 하고 그러지, 떳떳하다면 왜 말을 할 수가 없습니까?
얼마든지 남편과 같이 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같이 와서 참선(參禪)을 하고, 같이 참선을 도반(道伴)으로서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입춘에 좋은 부작(符作) 한 장 주지 아니하고, 할 말 없으니까 공연히 마음 닦으면 죄가 소멸이 되고 소원을 이룬다' 이렇게 생각하실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저 옛날에 함경도 사람이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향해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가자니 그것도 중간에 도적(盜賊)을 만날까 걱정이 되고, 또 그 머나먼 길을 가 가지고 또 과거에 합격이 안 되면 안 되겠다 해서 좁쌀을 한 되를 싸 가지고 그 부처님 모셔져 있는 절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 앞에 좁쌀을 떠억 올려놓고서, 담뱃대를 손에 든 담뱃대를 들고 부처님 앞에 꺼떡꺼떡하면서, "부텨!" 그 함경도 사람은 부처를 '부텨'라고.
"부텨! 내 말 좀 잘 듣게. 내가 오늘 과거를 보러 가는데, 이번에 꼭 과거에 붙게만 해 주면 이다음에 이밥도 내가 갖다—그 쌀밥을 '이밥'이라 그러거든—이밥도 내가 갖다가 또 올릴 테니까 이번에 내가 꼭 과거에 붙게만 해 주게"

몇 번을 그 담뱃대를 흔들면서 간곡히 부탁을 하고 그리고서 과거를 보러 올라갔다가, 물어볼 것도 없이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과거에 떨어졌는데, 떨어지자마자 인자 고향으로 내려와 가지고 다시 그 절에 찾아가서,
"내가 그 귀한 좁쌀을 갖다가 올려놓고 그렇게 내가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 내 좁쌀만 똑! 따 먹고 얼굴만 노래져 갖고 앉어서, 내 말대로 과거만 합격해 주었으면 내가 쌀밥을 갖다가 올렸을 텐데 다 틀렸다"고, "'부텨, 부텨' 해서 영험(靈驗)이 있는 줄 알았더니 영판 점쟁이만 못하다"고.
"점쟁이는 다 과거에 붙고 떨어질 것도 알고, 잘하면 푸닥거리만 해도 병도 낫고 그러는데,  꺼먹꺼먹 우둑허니 앉어서 좁쌀만 똑 따 먹고, 무당만 영판 못하다”고 아주 큰 기침을 하고 나갔다고 그럽니다.


오늘 입춘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동참(同參)을 하셨는데, '입춘에 동참을 하고, 모처럼 이제 금년부터서는 무당이나 만신집이 부적 사러 가지 아니하고 한번 시험을 한번 해 보자'
그러다가 무슨 조그만 뭣이 뜻대로 안되면, 함경도 사람처럼 '그 입춘에 동참해 봤자 별 수 없고, 그 내년부터서는 그래도 무당한테 가서 부작(符作)을 꼭 사야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함경도 사람만 조끔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부작을 사거나 입춘에 동참을 하거나 또는 참선을 하거나, 쇠털 같은 많은 날에 혹 뜻대로 안 되는 수도 있고 또 뜻대로 되는 수도 있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는 데는—이 사바(娑婆)란 말이 인도 말인데, '인내(忍耐)', '감인(堪忍)', 인내, '참는다'는 말이거든. '사바세계' 하면은 '참는 세계'라.

여덟 가지 고(苦)—생(生) · 로(老) · 병(病) · 사(死)의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은 이별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또 미운 사람은 만나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또 구(求)하면 마음대로 얻어지지 아니한 구부득고(求不得苦), 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성고(五陰盛苦), 이 여덟 가지 고(苦)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중생(衆生)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러한 고해(苦海)에 왜 우리가 태어났느냐? 과거에 우리가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다 이 말씀이여.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으면서도 이만큼 살게 된 것, 이만큼 잘 사는 것도 이것도 다 참 천만다행(千萬多幸)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러기 때문에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살면서 이만큼 산다고 감사하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엇이 뜻대로 안되면 거기에서 오히려 더 발심(發心)을 하고, '무엇인가 내게에 참회해야 할 일이 있구나' 이리 생각하고 자기의 내면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다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신심을 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이렇게 다져 나가야만 불법을 믿는 사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이요 바른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가 발전해 나가려면 견디기 어려운 난관(難關)을 만나서 그것을 극복해야만 그 나라도 발전을 하는 것이지, 너무 편안하고 일없으면 그 편안하고 살기 좋은 데에 도취(陶醉)가 되어 가지고 자연히 해태(懈怠)해지고,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국력이 쇠퇴해서 모든 국민이 게을러빠지고 사치에만 흘러서, 그러는 동안에 이웃나라가 반드시 그러한 틈을 타서 침범을 해 들어오고 마는 것입니다. 백제(百濟)가 망할 때에도 역시 그랬었고, 신라가, 그 꽃피었던 그 신라(新羅)가 망할 때에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월이 몇십 년, 몇백 년 지나다 보면 결국은 그 나라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맹자(孟子)』에도 '하늘이 장차 훌륭한 인재(人材)를 낼 때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갖은 고통과 시험을 주어서 그 사람을 단련(鍛鍊)을 시킴으로써 위대한 사람을 만든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잘 다스리도록 한다' 그런 말이 있고.
'나라에도 계속 그 충고하는, 나라의 정치와 통치자의 잘못을 힐난하게 비판하고 그 상소(上疏) 올리고 그러한 입바른 그러한 선비가 있어야 하고, 또 이웃나라에서 호시탐탐 그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적성 국가(敵性國家)가 있어야만 그 나라는 계속 튼튼하고 나라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다' 이러한 내용에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역사를 통해서 역력히 볼 수가 있는 바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정(大疑情)으로 도(道)를 닦아서 도업(道業)을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 난관에 부딪혀서 거기에서 대분심과 대신심이 불타올라야만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 조그마한 사업(事業)을 하나 하더라도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갖은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나의 사업을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실패하면 또 일어서고 두 번 실패하면 또 일어서고, 곧 기업체가 쓰러지고 '내가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 한, 그러한 참 참기 어려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수없이 겪으면서 그러면서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버텨 나가야만 사업을 마침내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해탈도(解脫道)요, 대안락(大安樂), 큰 안락의 법문(法門)이라 하지만, 이 참선을 시작을 해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으로도 팔 다리 허리가 쑤시고 아프고 저리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 골치가 아픈 사람, 정신적으로도 온갖 번뇌(煩惱)와 망상(妄想)과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퍼일어나 가지고, 조끔 공부하려면은 '가정에 뭔 일이 있다' 그래 가지고 잠시도 편할 날이 없이 이 일 저 일 구름 일어나듯이 일어납니다마는,
그러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착실히 다져 나감으로써 그렇게 백방(百方)으로 공부를 방해치는 그러한 사건들이 하나씩 둘씩 차츰차츰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는 그러한 일들이 내 공부해 나가는 데에 박차를 가해 줄지언정 그것이 나를 공부 못하게 하는 마침내 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오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익힌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과 오욕락(五欲樂)으로 익혀 왔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다 되어져. 마치 잡초(雜草)는 그렇게 뽑아 내버리고 약을 치고 해서 그것을 못 자라게 해도 잡초는 저절로 그렇게 잘 자라고. 곡식(穀食)은 거름을 주고 그렇게 잘 가꾸려고 해도 영 잘 안 자라는 거와 같애서,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있어 번뇌망상(煩惱妄想) 사량분별심은 그렇게 안 하려고 그러고, 쫓아내려고 그러고, 못 일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잘 퍼일어나고, 화두(話頭)는 그렇게 생각 생각이 추켜들고 하려고 해도 그것은 잘 잊어버리고 안 되지요.

그러나 사불범정(邪不犯正)이여. 또 마침내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제아무리 무성(茂盛)했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노력을 하면 그 잡초를 제거하고 마침내 우리가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처럼, 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쉬지 않고 공부를 다져 나가면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를 항복받아서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이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요, 팔만사천 보살(菩薩)님네들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여실(如實)히 보여주신 것입니다.(20분49초~41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본래성불비타득(本來成佛非他得)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是道易親)’ ; 중봉명본(中峰明本)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제29권 ‘寄同參十首’ 참고.
*별단(別段 다르다·따로 달리 별/층계·구분 단) ; ①보통과 다름. ②보통의 것과 특별히 다르게.
*임술년(壬戌年) ; 1982년.
*신유년(辛酉年) ; 1981년.
*절후(節候 철 절/철·절기·기후 후) ;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기후의 표준점. 15일 내지 16일에 한 번씩 돌아온다.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타관(他官)살이 ; 자기 고향이 아닌 다른 고장에서 삶.
*타관(他官 다르다·다른 곳 타/마을 관) ; 제가 나서 자란 곳이 아닌 다른 지역이나 고장.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을 보물을 몸뚱이 안에, 옷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춥고 배고픈 그러한 거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 의주유(衣珠喩).
*의주유(衣珠喩) ; 『법화경(法華經)』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에 나오는 비유.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매다’는 비유로 계주유(繫珠喩), 또는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라고도 한다.
가난한 사람이 친구 집에 갔다가 술에 취해 자고 있는데, 친구가 급한 볼일이 있어 그의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매달아 주고 밖으로 나가니, 그런 사실을 모르는 그는 술이 깨자 그 집을 나와 방황하면서 음식을 구하느라 갖은 고생을 하는데, 훗날 우연히 만난 친구는 그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매달아 주었던 사실을 말한다는 내용. 여기서 가난한 자는 중생을 상징하고, 친구는 부처님을, 보배 구슬은 불성(佛性)을 상징한다.

누구나 이처럼 귀중한 보배[佛性]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한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설하고 있으며, 선종(禪宗)에서 자가보장(自家寶藏)이라는 용어로 널리 활용된다.
*자가보장(自家寶藏) ; '자기집[自家] 보배 창고[寶藏]' 중생이 각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가리킴.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만석꾼(萬石꾼) ; 곡식 만 섬을 거두어들일 정도의 논밭을 가진 큰부자.
*만석(萬石 일 만·매우 많은 만/섬·10말 석) ; ①아주 많은 곡식. ②곡식 일만 섬(10말).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❶] 송담스님(No.258)—1985년(을축년) 신수기도입재(1985.02.22) 법문에서.
삼재가 들으신 분뿐만이 아니라, 삼재가 안 들으신 모든 사부대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앙(災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닥아 올 수가 있고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재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그 근본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삼재가 붙을 수가 없고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터 끊임없는 파도가 파도치고 있기 때문에 삼재가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삼재라고 하는 것이 왜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있는 것이냐?
태어난 해에 따라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삼재가 오느냐 하는 것은, 이것은 음양오행의 술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옛날부터서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재가 든 사람은 항시 불보살과 성현께 기도를 하고, 또 항시 3년 동안 근신을 하고,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각별히 조심을 해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근신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있게 그렇게 조심을 해 나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은 여전히 해 가되 ‘어떻게 근신을 하고 어떻게 조심을 하느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불법을 믿고 항시 염불을 하는 이는 염불을 열심히 하고, 경을 독송하는 이는 경을 열심히 독송하고, 또 참선법을 믿고 실천하는 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화두를 들며 참구를 한다면 어느 틈에 있어서 삼재가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삼재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우리의 마음의 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마음에 틈이 없다면 들어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삼재가 우리의 마음의 틈을 타서 들어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을 하고 삼재에 걸린 분. 또 앞으로 삼재를 맞이할 분들은 각별히 마음의 문—마음의 문은 눈이 바로 마음의 문이요. 귀가 마음의 문이요. 코와 입이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몸뚱이가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의 문인 것입니다.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 육문(六門)이 바로 삼재가 들어오는 문이 것입니다.
그 문단속을 잘 하는 것으로 모든 도적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삼재를 막아내는, 비단 삼재라고 했습니다마는 더 널리 말을 한다면 육적(六賊)이 될 것이고, 더 방대하게 말한다면 팔만사천 마군(八萬四千魔軍)이 될 것입니다.

그 팔만사천 마군이를 ‘한 생각’에 막을 수도 있고, 도적을 불러 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비끗 잘못하면 바로 삼재와 육적과 팔만사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 ‘한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해서 끊임없이 생사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 ‘한 생각’만 잘 단속해 나간다면 신수기도는 정말 옳게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❷] 송담스님(No.336)—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에서. (6분7초)
그러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고 한 그러한 재난은 사실은 큰 재난이라고 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재(水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재(火災)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팔풍(八風)의 그 풍재(風災), 이러한 재난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수재가 일어나서 육백 명이라고 하는 인명(人命)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참혹하고 무서운 재난은 우리 낱낱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재난,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몰아넣는 그러한 무서운 재난인 것입니다.

비가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어서 얻은 재난은 재산을 앗아갑니다. 재산은 또 부지런히 벌면 보충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설사 그러한 수재로 인해서 생명을 잃었다 하드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지옥에 가란 법은 없습니다.
몸을 바꿔서 좋은 데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지마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화재로 일어난 그 재난은 영락없이 우리를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귀(餓鬼)나 지옥(地獄)으로 우리를 밀어붙이고 마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마음속에 그 수재와 화재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그 탐진치 삼독, 오욕락(五欲樂), 팔풍경계에 우리는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지금 이 폭풍이나 태풍 이런 것은 여름 한때 장마철에 지나가 버리고 며칠간 그러다가 그치면 또 조용합니다. 또 내년에 이맘때 되면은 또 그러한 것이 오겠습니다마는, 그래도 1년에 한 번 정도 오는 거야 우리가 미리미리 취약지구에 대한 대처를 해 나가고 모다 댐이라든지 그런 것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잘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큰 피해를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건 온 나라의 여러 국민들이 모다 합심을 해서 모다 의연금품을 내고 나라에서도 모다 구제를 하고 그러면 어느 정도 또 상처를 또 아물게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태풍과 폭풍, 폭우 모다 그런 것은 아무도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을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고, 부모형제라 하더라도 어찌 해볼 수가 없고, 오직 나 자신의 마음의 수재와 화재와 풍재는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이, 활구참선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대단히 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재와 화재 또는 수재 이런 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번에 지나간 그러한 폭풍이 유(類)가 아닌 것입니다. 폭우가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고대로 놔둔 채,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자신을 갖다가 지옥구덩이에 갖다가 처박기도 하고, 축생의 뱃속에—이 사람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독사가 되기도 하고,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또 아귀와 그런 악마가 되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것입니다.

순전히 ‘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한 생각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 가지고 그러한 육도(六途)를 찰나간(刹那間)에 윤회(輪廻)를 하면서 백 년의 꿈을 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사법(邪法) ; 삿된 법. 이치에 맞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부정한 가르침. 외도(外道)의 가르침.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낚숫밥 ; ‘낚싯밥’의 사투리.





------------------(2)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오음(五陰) ; 오온(五蘊)의 구역(舊譯).
*오온(五蘊) ; 온(蘊)은 무더기 · 모임 · 집합 · 더미를 뜻함. 생멸 · 변화하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오음(五陰) · 오중(五衆) · 오취(五聚) 등이라고도 한다.
①색온(色蘊) : 지 · 수 · 화 · 풍 사대(四大)와 사대로 만들어진 형질의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苦] · 즐거움[樂] · 불고불락(不苦不樂) 등의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 · 관념의 무더기.(경계에 대하여 갖가지 차별상을 취하는 것)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 · 충동 · 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대상경계를 분명하게 분별하는 것이 본성인 마음)

오온은 유루(有漏) · 무루(無漏) 등과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 등 삼성(三性)에 통하며, 특히 유루의 오온은 오취온(五聚蘊)이라 하는데 이때 취(聚)는 번뇌의 뜻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는 물질과 정신의 전체를 통괄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으로 실다운 것인 줄 착각한 것일 뿐이다. 실지는 다 인연 따라 꿈같이 나타나는 빈 것이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19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 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도취(陶醉 기뻐하다·즐거워하다 도/취하다·빠지다·지나치게 좋아하다·탐닉耽溺하다 취) ; ①마음이 기뻐하고[陶] 지나치게 좋아하다[醉]. ②어떠한 것에 마음이 즐거워하고 취하다.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입바르다 ; (주로 ‘입바른’ 꼴로 쓰여) 바른말을 하는 데 거침이 없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무량겁래(無量劫來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이래·그 이후로 래(내))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 이래(以來).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불범정(邪不犯正 간사할 사/아닐 불/범할 범/바를 정) ; 바르지 못한 것, 삿된 것이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함.
*사필귀정(事必歸正) ;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 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여실(如實)히 ; 사실과 꼭 같게.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7. 30. 12:45

§(195) (게송)원앙수출종군간(鴛鴦繡出從君看)~ / 오신통(五神通)과 육신통(六神通) / 소소영령한 '한 물건'을 깨닫는 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 활구참선법으로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 / 달마혈맥론에, 불급심사(不急尋師) 공과일생(空過一生).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 만중희유(萬中希有).

쇠로 된 못을 박을 때에 맨 처음에 정확히 박아야 하는 것처럼, 참선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 / 선지식 밑에서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 /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

아무리 맑고 깨끗한 경계라도 화두를 놓치고 그 경계에 취해 빠지게 되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한다 / 도인(道人) 행세, 아는 소리를 하지 말라 / 참선은 최고의 수행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송담스님(No.195)—1983년 3월 첫째일요법회(용195)

 

(1/3) 약 16분.

 

(2/3) 약 19분.

 

(3/3) 약 12분.

 


(1/3)----------------

원앙수출(鴛鴦繡出)은 종군간(從君看)이어니와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지난 임술(壬戌) 동안거 해제(解制)를 지낸 뒤에 처음으로 갖게 되는 법회(法會) 날입니다.

제방(諸方)에서 모다 해제(解制)를 하고 그리고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얼굴을 서로 상면(相面)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수행인이 제일 반가운 것은 한 철 두 철 같이 지내던 도반(道伴)이 또 다른 선방(禪房)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해제를 하면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동안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서 마음에 증처(證處)가 있으면 더욱 다행하고 더욱 반가운 일이거니와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만큼 그러한 증처가 없다 하더라도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집을 떠나서 출가(出家) 생활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고향에 친지(親知)를 만난 것보다도 훨씬 더 반가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재물과 색(色)을 멀리 여의고, 명예와 권리를 멀리하고, 그 마음과 행동을 청정히 해서 목숨 바쳐서 도(道)를 닦아서 지혜(智慧)의 달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염불(念佛)이나 또는 주력(呪力)이나, 기도(祈禱)나 또는 참선(參禪)을 해서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신통(神通)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신선도(神仙道)에도 다섯 가지가 있고 오신통(五神通)이 있고, 우리 불법(佛法)에는 육신통(六神通)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오신통이란 게 무엇 무엇 해서 다섯 가지 신통이냐?

첫째, 천안통(天眼通). '하늘 천(天)' 자, '눈 안(眼)' 자, 천안통.
원근(遠近)에 관계없이—산이 맥혔거나, 집이 맥혔거나, 수 천리만리(千里萬里) 밖에 일이라도 어떠한 상태를 내가 보고자 한 마음을 내면 이 자리에서 당장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입니다.
여기서 청와대든지, 서울역이든지 또는 경복궁이든지, 부산이든지, 일본이든지, 미국이든지, 볼려면은 여그 앉아서 찰나간(刹那間)에 그 보고자 한 장면을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천안통.

그다음에 천이통(天耳通). '하늘 천(天)' 자, '귀 이(耳)' 자 천이통은, 여기서 과학적인 어떤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무선기(無線機) 같은 그런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천 리 수만 리 밖에 어떠한 소리를 듣고자 할 때에는 즉시(卽時)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이통이고.

그다음에 신족통(神足通). 비행기나 로케트나 그러한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기서 몇백 리고, 몇천 리고 가고자 한 생각을 내면, 그 생각을 갖자마자 그 가고자 한 목적지에 몸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족통, 또는 신경통(神境通)이라 하는 것이여.
요새 축지법(縮地法)이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이 신족통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족통이여.

그다음에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환히 알아 버리는 것이여. 이것이 타심통이여.

그다음에는 숙명통(宿命通).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에 모든 일을, 모든 사람에 인과(因果), 모든 사물에 생성 과정과 장래에 사태에 대해서 환히 다 보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숙명통입니다.
어떠한 사람을 보면 과거에 저 사람이 무엇을 하다가 금생(今生)에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금생에는 저렇게 살지만 내생(來生)에는 무엇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숙명(宿命)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超能力)입니다. 이걸 숙명통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상 천안통 ‧ 천이통 ‧ 신족통 ‧ 타심통 또 숙명통, 이 다섯 가지를 오신통(五神通)이라 하는데, 이 다섯 가지는 불교(佛敎)가 아닌 저 신선도, 도교(道敎) 신선도(神仙道)에서도 이 다섯 가지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신통 밖에 또 한 통(通)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신통. '샐 루(漏)' 자, '다할 진(盡)' 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통(通)은 어떠한 능력이냐 하면,
내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항상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쓰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그놈을 동용(動用) 중(中)에 찾어보면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분명 소소영령한데 찾어보면 자최가 없는 그러한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버리는 거여.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는 것이여.

어떻게 하면 이것을 볼 수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가 있느냐?
'메아리 없는 골짜기'와 '뿌리 없는 나무'와 '밑 없는 배'와 '구멍 없는 젓대'를 고인(古人)들은 바로 이 '한 물건[一物]'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 공안)를 간택(揀擇)을 받아서 그 간택 받은 공안(公案)을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쓰지 아니하고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를 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를 하면, 이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26초)





(2/3)----------------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어떻게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하는가?' 참구할 때에 마음가짐과 몸가짐과 호흡하는 법, 그러한 기본적인 것을 말씀을 드렸고, 이 공부를 해 나갈 때에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더라도 그 경계에 집착(執着)을 하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참구해 나갈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공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直接的)인 지도(指導) 없이는 백에 하나, 만에 하나도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지 아니할 때에 목적지에 바로 도달하기란 바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처음 가는 길은 가다가 두 갈래 길, 세 갈래 길, 네 갈래 다섯 갈래 길이 나올 때에 길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거나, 길 아는 사람에게 묻지 않고서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바로 가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 닦아 가는 길,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공부의 길은 두 갈래 · 세 갈래 · 다섯 갈래 정도의 길이 아니라, 수천 수억만 개의 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많은 길을 어떻게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 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라' 하시고,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이 얻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부를 바로 지어가기 위해서는 스승의 지도(指導)와 간택(揀擇)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20분16초)


여러분이 쇠로 된 못을 벽이나, 어떠한 나무나, 그런 데에 박을 때에 맨 처음에 박을 때에 정확한 자리에다가 옳게 박아서 제자리에 들어가야지, 처음에 박을 때에 조끔 비켜서 어문 구녁에다가 박아 놓으면 그놈을 빼서 다시 정확하게 박을려고 해도 아까 잘못 들어갔던 구녁으로 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 박았던 데로는 안 박고 그 옆에다가 정확하게 박으려고 망치질을 해도 몇 번 박다 보면은 아까 그 뚫어진 잘못된 구녁으로 못이 잘못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지식(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지, 바른 지도 없이 잘못하면 잘못된 경계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잘못된 경계에 빠지게 되고, 그 잘못된 경계를 스스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경계가 항시 나타나게 되고, 그 경계에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처음 발심(發心)한 사람이 공부를 보다 더 알뜰하게, 보다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저 산중(山中)에 토굴(土窟)이나, 한적하고 사람 오지 아니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밤잠을 안 자고 먹을 것을 굶어가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을 하면서 피나는 고행(苦行)을 해 보았으면, 죽든지 살든지 내가 한바탕 해 봤으면' 이러한 간절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대단히 갸륵한 생각이고 기특한 생각이지만.
고인(古人)네들이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인가(印可)를 맡은 다음에 다시 보림(保任)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깊은 산중에 토굴로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깊은 산중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리 밑에나, 그렇지 않으면 시장(市場) 바닥이나,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얼마든지 혼자 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화두를 선지식한테 타거나, 책을 통해서 자기가 적당히 하나를 골라잡거나 별것이 없습니다.
별것이 없으나 차츰차츰 세월이 가면서 어떠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공안(公案) 참구(參究)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거나, 소견(所見)이 생겼을 때에 자기가 철저하게 믿는 선지식(善知識) 없이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할 때에 그러한 경계에 대해서 문의할 데가 없고, 그것을 갖다가 간택 받을 데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잘못 되어 가도 옳게 되어 간 줄 착각하기가 쉽고, 옳게 되어가도 이것이 잘되어 가는지 못되어 가는지 스스로 의심이 나고, 그래서 중대한 고비에서 공부가 중단되거나 후퇴하거나 갈팡질팡해서 불안하고 초조한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 뒤에 어디 어느 분한테 가서 이것을 간택을 받을까 하고 이리저리 찾아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말을 하고—때로는 '옳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그르다' 그러고, 어떤 분은 '큰일났다' 그러고, 어떤 분은 '공부가 잘 되어 간다' 그러고, 도대체 점점 여기저기 물어볼수록에 점점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고 어찌 해볼 수가 없는 그러한 심경(心境)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먼저 스승을 찾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이,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혼자 하면 제일 먼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함정이 무엇이냐 하면,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한 철 두 철을 못 가서 맨 처음에 맛보게 된 경계가, 망상(妄想)이, 그렇게 퍼일어나던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서 화두(話頭)에 대한 간절한 의심(疑心)이 북받쳐 오르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그렇게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녹음 끊김)....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를 못하고,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내갔는지 두 시간이 지내갔는지 세 시간이 지내갔는지 시간이 지내가는 것조차도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여.
캄캄한 밤에 있어도 어두운 줄을 모르고, 혼자 있어도 심심한 줄을 모르고, 하늘을 보나 산을 보나 땅을 보나 모든 것이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다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할 뿐입니다.
이러한 경계에서 그 경계가 너무 깨끗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편안해서 그 싱그럽고 묘(妙)한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편안을 하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좋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기쁘다' 해도 맞지 아니하고,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그러한 경계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너무 싱그럽고 너무 맑고 깨끗하니까, 자칫하면 그 맑고 깨끗한 경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話頭)를 놓치는 순간이 공부가 잘못 비끄러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묘한 경계에 들어가서 너무너무—그것을 법희(法喜)라고 할까? 법열(法悅)이라고 할까? 선열(禪悅)이라고 할까?—맑고 깨끗하다 못해서 너무 싱그럽고 묘해서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린다면, 더군다나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맛들여서 그 경계에 빠지게 되면, 그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15분30초~34분17초)





(3/3)----------------

자기의 육신(肉身)이 이 세상에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그 자리에서는 선악(善惡)도 없고, 밝고 어두운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고, 지옥(地獄)과 천당(天堂)도 없고, 부처와 중생(衆生)도 없는 그러한 경계에서, '하! 바로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의 경계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眞空)이요 묘유(妙有)로구나!'
고조사(古祖師)가 설하신 어록(語錄)도 뒤져 봐도 하나도 맥힐 것이 없이 환한 것 같고, 어떠한 경전(經典)을 떠들어 봐도 모두가 이러한 경계를 두고 말씀하신 것 같고, 어떠한 경계, 공안(公案)을 봐도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안 나고, '하!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것이로구나' 아! 이래 가지고 자기도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경계에 취해서 그러한 경계를 계속해서 그 경계를 지켜 나간다?

지켜 나가면, 무엇이 알아지기도 하고, 캄캄한 밤에도 환하게 뭣이 다 바늘 떨어진 것도 다 보이기도 하고, 벽 문을 닫어 놓고 방안에 앉아서도 벽 밖에 것이 환히 보이기도 하고, '내일은 누가 찾아오겠다' 그런 것도 알아지기도 하고.
'아! 그 이것이 바로 신통(神通)이로구나! 내가 견성(見性)만 한 것이 아니라 신통까지 났구나!' 이러한 경계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누구에게 이것을 얘기하며 누구에게 이 소식을 말할 수가 있을까?

모든 사람을 봐도 모두가 다 불쌍하게 보이고, 도 닦고 있는 모든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을 봐도 어문다리를 긁으며 헛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철이 안 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스승 없이 깨달랐다' 경(經)을 봐도 맥힘이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공안(公案)을 봐도 맥힘이 없다 이거여.

그러니 신통까지 났겠다, 다른 사람에게 법문(法門)을 하면, 다른 사람은 역시 모르니까 그이가 인물도 좋고 말도 잘하고, 더군다나 유식해서 경(經)도 잘 설(說)하고, 이럴 경우는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그이를 만나게 되면은 다 훌륭한 선지식이요, 도인이라고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본인도 도인이요 '신통이 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도 틀림없는 도인으로 보여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차츰차츰 자연히 도인(道人) 행세를 하게 되고, 아는 소리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만(自慢)이 생기면 계행(戒行)도 해이(解弛)해지게 되고, 수행(修行)도 해이해지게 되어서 차츰차츰 옛날에 그 계율을 지키면서 산중에서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할 때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해이해지고 따라서 탁(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탁한 생활이 시작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맑고 그랬던 경계는 간 곳이 없고, 따라서 과거에 무엇을 훤히 알고 어떠한 신통력을 행하고 했던 것이 둔해지고 무디어져서 뭘 봐도 벽 밖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고, '오늘 누가 올 거다' 한 것도 잘 몰라지고 그렇게 된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지만 자기를 추종(追從)하는 제자와 신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줄 알고 계속 따라오고 있고, 자기는 속으로는 다 그런 신통력이 없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없어져 버렸지만 모두가 다 자기를 훤히 알고 있는 걸로 알고 추종을 하는데 모른다고 하면 챙피하고, 그러니까 계속 아는 척은 해야겄고, 이러다가 결국은 모든 것이 백일하(白日下)에 다 폭로(暴露)가 되고.
막행막식을 하고, 말을 함부러 하되 법도(法度)에 맞지 아니하고, 이렇게 될 때에 자기를 과거에 항상 따르고 보호해 주던 선신(善神)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악신(惡神)과 마귀(魔鬼)가 자기를 침범하게 되는 것입니다.(41분45초)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열심히 도를 닦으면 반드시 선신(善神)이 자기를, 그이를 옹호(擁護)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하면, 선신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삿된 귀신과 악한 신이 자기를 침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도 망신을 하고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도 망신을 하게 되고. 만일의 경우 법에 저촉이 되는 행동을 했다면 영락없이 국가의 법에서도 그이를 구속(拘束)해서 가두기도 하고 또는 사형(死刑)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능엄경(楞嚴經)』 속에, 오십삼변마장(五十辨魔障)에 소상하게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예를 가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이 참선(參禪) 공부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고(最高)에 수행(修行) 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정신병자가 되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끊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머리빡을 바위나 벼람박에다 부딪혀서 유혈(流血)이 낭자하다가 피를 흘리고 죽게 되기도 하고, 그 마(魔)에 섭(攝)해 가지고 일어나는 현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라 이것입니다. 물이 한번 엎질어 버린 다음에는 다시 쓸어 담기가 어렵듯이, 이 공부도 한 번 잘못되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이여. 그러니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이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이 참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에 참선은 반드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34분18초~45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3)

*원앙수출종교간(鴛鴦繡出從敎看)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度與人) ;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거니와 금침(金針)은 그대에게 건네줄 수가 없다’
[참고 ❶]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아까 시작할 때에 읊은 “원앙수출(鴛鴦繡出)은 종교간(從敎看)이어니와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度與人)이라. 원앙새 수놓은 것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지마는 원앙새 수놓은 그 바늘은 여러분에게 줄 수는 없다” 이러한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에게 얘기해 드릴 수 있지마는 그 깨달음 그 자체는 여러분에게 줄 수가 없다. 그 깨달음은 여러분 자신이 깨달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은 부처님으로서도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것을 실천을 통해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1시간27분36초~1시간28분49초)

[참고 ❷]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칙 ‘주행(周行)’ p27. p40~41.
世尊初生下時 周行七步 目顧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云 天上天下唯我獨尊[雲門偃拈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

세존께서 처음 탄생하실 때,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며 한 손으론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론 땅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圓通璣 上堂擧此話云 可謂欺視三界 傍若無人 最好是雲門 出來道 至天下大平 然 此二古聖 於建化門中 善則善矣 美則美矣 若於本分事中 檢點將來 猶欠一着在 敢問大衆 作麽生是本分事 良久云 鴛鴦繡出從敎看 莫把金針度與人

원통기(圓通璣)가 상당하여 이야기를 들어 말하였다. “가히 삼계(三界)를 속이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짓이구나. 가장 좋은 것은 운문(雲門)이 나와서 말하기를 ‘천하의 태평이나 도모했을 것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성인이 건화문(建化門)에서 볼 때엔 좋기는 좋고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만약 본분(本分)에서 장래를 점검해 보면 그래도 하나가 모자란다. 삼가 대중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본분의 일이라 하는가?”
그리고는 양구했다가 말하였다.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거니와 금침(金針)은 그대에게 건네줄 수가 없다”

*운문 선사의 방(棒) :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의 내용을 말함. 『선문염송(禪門拈頌)』 제2칙 '주행(周行)‘ 참고.
[참고]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 ; 석가여래께서 출생하면서 바로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가장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여러 조사 스님들이 해석도 하고 칭송도 한 바가 많지마는,
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선지식들은 『아! 운문이야말로 참으로 「유아독존」의 뜻을 잘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답다』하고 모두 칭찬하였다.
*계해년(癸亥年) ; 1983년.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색(色) ; ①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 ②육체. ③집착 또는 색욕.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주력(呪力) ;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의 효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통력(神通力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힘 력) :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通] 초인간적인[神] 능력[力].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숙명(宿命 미리·본디 숙/운수 명) ;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19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화두 게문(송담스님 글씨)


이 자(字)는 ‘보일 시(示)’ 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 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간택(揀擇 가릴 간/가릴 택) ;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알아 선택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2/3)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산스크리트어]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불급심사 공과일생(不急尋師空過一生) ;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는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에 있는 말씀.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혈맥론(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若自己 以緣會合 得聖人意 卽不用參善知識 此卽是生而知之勝學也 若未悟解 須勤苦參學 因敎方得悟 若自明了 不學亦得 不同迷人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만약 자기가 인연을 만나 성인의 뜻을 얻었다면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之] 정말 뛰어난 학인이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부지런히 애써 선지식을 찾아가 배우라. 스승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만일 스스로 분명히 알았다면 배우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과는 다르다.
*어문 ; '딴', '다른', '엉뚱한'의 사투리.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p137~139. (가로판 p133~135)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하얀  早訪高玄하야  機味를  完轉하야  無正無偏하야  明師가  許爾어든  再入林巒하야  茅庵土洞에 苦樂을  隨緣하야  無爲蕩蕩하야  性若白蓮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회중(會中) ; 설법의 자리에 모인 사람들. 수행자의 집단.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소견(所見 도리道理·사리事理 소/생각·견해 견)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❶]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❷]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법열(法悅 부처님의 가르침 법/기쁠 열) ; ①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거나 배우고 따르는 기쁨[悅]. ②진리[法]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기쁨[悅]. 법희(法喜), 법락(法樂) 등과 같은 뜻이다.
*선열(禪悅) ; ①선정(禪定)에 드는 기쁨. ②참선할 때 가슴에 잔잔히 사무치는 기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3/3)

*진공묘유(眞空妙有) ; 일체를 공(空)이라 하여 부정했을 때, 갖가지 사물은 그대로 긍정되어 묘유(妙有)라고 하는 것. 또 진리 내지는 진여(眞如)가 일체의 망상을 떠나 증가하지도 줄지도 않는, 집착을 떠난 모습을 진공(眞空)이라 칭하며, 상주불변(常住不變)하고 더욱이 현실을 성립시키는 진실의 유(有)인 점을 묘유(妙有)라 함. 본래, 진실의 공은 묘한 현실의 생성, 전개가 되는 것임을 말한 것.
*진공(眞空) ; ①아트만(산스크리트어 ātman)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②소승불교에서 설하는 열반을 가리켜 말함. 허위가 아니므로 진(眞)이라 하며, 일체의 상(相 : 특성)을 떠나 있는 까닭에 공(空)이라 함. ③유가 아닌 유인 묘유(妙有)에 대하여 공이 아닌 공을 말함. 이것이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임. 진실의 공.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막행막식(막行막食) ; 수행자의 분에 맞지 않게, 행동이나 음식을 막 행(行)하고 가리지 않고 막 먹는 것.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옹호(擁護 안을·지킬 옹/보호할 호) ; 어떤 대상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킴.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 -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마(魔)에 섭(攝)해 가지고’ ; 마섭(魔攝).
*마섭(魔攝) ; 마(魔)에 포섭(包攝)되다. 마에게 끌려들어 그의 편이 되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몽매지간(夢寐之間) ; 잠을 자며 꿈을 꾸는 동안.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7. 29. 11:29

§(170) 삿된 것을 버릴려는 생각,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된다 /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참선(參禪) 공부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다 / 오조 홍인대사와 몽산스님의 극언 / 정말 여법하게 철두철미하게 정진을 해야.

**송담스님(No.170)—1982년(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5.음) (용170)

 

약 11분.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것을 직접 실천하려는, 실천하고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이 최상승 학자는 버리고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삿된 것을 버리는 생각, 그리고 참된 것을 구하는 생각—버릴려는 생각도 이것이 삿된 것이고,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도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입니다.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느냐?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좋은 것을 보아도 '이뭣고?' 악한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버리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여.
기쁜 것을 보면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데에 무슨 버리는 것이 있으며, 무슨 취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이 없어.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參禪) 공부다 이 말이여.

'공부가 안 된다. 영 공부가 진취가 없다'
많은 분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지마는, 사실은 그 고민한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이뭣고?'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밥이 질 때에도 '이뭣고?'
밥이 될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좋을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안 좋을 때에도 '이뭣고?'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잘될 때에도 '이뭣고?'
내 비위에 안 맞을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공부는 극일성지(克日成之)입니다. 극일성지. 머지않아서 득력(得力)을 하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극언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이 큰스님께서 그렇게 극언을 하신 까닭은 너무 조끔도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증을 하신 표현인 것입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우리 중생을 애끼신 뜻이 간절하시면 입에 담기조차도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로인 이런 극언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런한 말씀을 통해서 콧등이 찡하고 눈뚜껑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사 스님의 간절한 법문을 듣고 '한 번 해보자. 내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며 내가 이 도량(道場)에 와서 고행을 하겠다고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면 내가 왜 그렇게 안 할 까닭이 무엇이냐?'

죽비(竹篦) 치면 형식적으로 앉아서 하고, 방선(放禪)하면 둘씩 셋씩 모여서 잡담하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고 한화잡담(閑話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정진을 한 것 같지마는, 실지 내용으로는 발심(發心)이 약하고 분심(憤心)이 약하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정진을 하기 때문에 3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10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생긴 것은 눈치로 눈치만 늘어 가지고 무슨 법담을 하면 눈치로 '뭐라고 뭐라고...'
그런 것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치로 무슨 공안은 어떻고, 무슨 법담은 어떻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의 일신상의 생사(生死) 문제도 아무 교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에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기왕 출가를 하고, 기왕 이 참선을 하려면 정말 여법하게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할 것이다.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후생(後生)이라 하니까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 후가 아니라, 한 생각 뒤가 바로 후생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정말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나도 성취를 하고, 다른 사람도 성취를 하도록 알뜰히 정진(精進)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38분49초~49분48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취(進趣 나아가다·오르다 진/달리다·향하다·재촉하다 취) ; (정진해) 나아가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 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p97-99. (가로판 p95~97)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7-99. (가로판 p95~97)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3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오조(五祖) 홍인(弘忍)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최상승론(最上乘論) ; 1권. 5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저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본래청정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분별이 없음을 알아 그 근본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이 수도(修道)의 요점이라고 설명한 저술. 내제(內題 본문 첫머리의 제목)는 범취성도오해진종수심요론(凡趣聖道悟解眞宗修心要論)이다.

14개조의 문답 방식으로 자심본래청정(自心本來淸淨) · 자심본래불생불멸(自心本來不生不滅) · 자심위본사(自心爲本師) · 자심승념피불(自心勝念彼佛) · 중생여불진체기동(衆生與佛眞體旣同) · 진여법성동일무이(眞如法性同一無二) · 수본진심시열반지근본(守本眞心是涅槃之根本) · 수본진심시입도지요문(守本眞心是入道之要門) · 수본진심시십이부경지종(守本眞心是十二部經之宗) · 수본진심시삼세제불지조(守本眞心是三世諸佛之祖) · 무기심(無記心) · 아소심(我所心) · 득도무여열반(得到無餘涅槃) 등을 논하고 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 
若有人依文行者卽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눈뚜껑 ; ‘눈꺼플’의 사투리.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한화잡담(閑話雜談) ; 심심풀이로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거나[閑話],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雜談].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죽 떠먹은 자리 ; 죽(粥)은 곡식을 오래 끓여 알갱이가 무르게 되어 거의 액체화되어서, 한 숟갈 떠먹어도 금방 떠먹은 자리가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조금 덜어 내어도 흔적이 나지 아니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죽 떠먹은 자리’라고 말한다.
*맹서(盟誓 맹세 맹/맹세할 서) ; '맹세(盟誓 임무나 약속을 꼭 실행하거나 목표를 꼭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함. 또는 그 다짐)'의 원래 말.
*소식(消息 줄어들다·사라지다·없애다 소/불어나다·살다·번식하다·호흡하다 식) ; ① 산스크리트어 vārttā. 소장(消長) · 증감(增減) · 성쇠(盛衰) 등의 변화. 때에 따라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변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가하는 측면만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 깨달음의 결정적인 단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갖가지 실마리. 또는 깨달은 경계 자체.
[참고]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翁翁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消息)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철두철미(徹頭徹尾 통하다·꿰뚫다 철/처음 두/통하다·꿰뚫다 철/꼬리·끝 미) ; 처음[頭]부터 끝[尾]까지 빈틈없고 철저(徹底)하게.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5. 24. 17:33

§(324) (게송)송백천년취~ / 기도의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無漏福) / 그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다 /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타함이 없이 방심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24)—1987년 신수기도 회향(87.02.06)(용324)(정진)

 

약 11분.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로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牡丹一日紅)한대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하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요, 세상 사람들의 뜻에는 들지를 안 해. 별로 그렇게 소나무, 잣나무 그렇게 뭐 '좋다'고 '아름답다'고 별로 안 그런다 그 말이여.



목단(牧丹), 모란(牡丹)은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는 하루 동안밖에는 붉지를 않는데,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요.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이 꽃 가운데 왕이라고 그렇게 모다 좋아하고 칭찬을 하고 거기에 모다 반하더라 그 말이지.



송백은 무루법(無漏法), 무루복(無漏福), 영원한 복에다가 비유한 것이고, 모란은 유루복(有漏福)에다가 비유한 게송(偈頌)입니다.

영원한 우리 생사해탈법은 한번 깊이 믿고 실천을 하면 당장 금생에부터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참 좋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지를 안 해.



물론 특수한 신심이 있는 사람은 모르되,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그것에 관심이 없고, 유루복(有漏福)—당장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벼슬자리 벼슬을 한다든지, 부귀영화, 모다 이런 해봤자 별수 없고 또 뜻대로 얻어진다고 해도 영원성이 없는 그러한 재산이나 명예, 권리 모다 그런 것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못 얻어서 야단이고 그것을 얻으면은 거기에 빠져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과연 무루(無漏)의 복(福)을 원하셨는가? 또는 영원성이 없는 유루복만을 목적에다 두고 기도를 하셨는가? 또는 저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에다 두되, 우선 당장 급해서 그래서 유루복에 원(願)도 세우시고 하시는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데에는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재산이요, 명예요, 권리요, 가족의 행복이요, 아들딸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요. 아무리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참선(參禪)을 한다 해도 당장 코앞에 그 문제가 절박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절대로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1년에 한 번 있는 신수기도에 동참을 해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 것도 참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는 참선 밖에는 모르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못한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고, 또 할머니 · 어머니 ·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의 학교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고, 우선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우선 대학에는 들어가 놓고 봐야 하는 것이고, 그놈이 대학엘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기도를 참 일주일 동안 목이 쇠도록 그렇게—그 날씨가 상당히 강추위 했는데 그 눈을 뒤집어쓰면서 새벽기도부터서 모다 참석을 하시고, 대단히 참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부디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태함이 없이 방심(放心)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1년 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 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하는 데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한결같은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선도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 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13분22초~23분4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묘지곽(妙智廓) 게송 참고.
*목단(牧丹 치다·기르다 목/붉다·모란 단(란)) ; 모란(牡丹).
*모란(牡丹 수컷·양성 모/붉다·모란 단(란)) ; ① 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털이 없으며, 잎은 크다. 늦봄에 붉고 큰 꽃이 피는데 꽃빛은 보통 붉으나 개량 품종에 따라 흰색, 붉은 보라색, 검은 자주색, 누런색, 복숭앗빛을 띤 흰색 따위의 여러가지가 있다. ② ‘①’의 꽃.
‘丹’의 경우 본음은 ‘단’이나 ‘牡丹’의 경우, 속음인 ‘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여 ‘모란’으로 적는다.
*무루법(無漏法) ; 번뇌를 끝낸 것. 누(漏)는 누설(漏泄)의 준말로 번뇌를 뜻한다.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 사제(四諦) 가운데 깨달음의 결과인 멸제(滅諦)와 그 원인인 도제(道諦)에 해당하는 모든 현상.
범부의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 하는 데 비하여 도를 이룬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無漏智)라 한다.
*무루복(無漏福 없을 무/새다·번뇌 루/복 복) ; 번뇌[漏]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 있을 유/새다·번뇌 루/복 복)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은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漏]이 있는, 번뇌[漏]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4분53초)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 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15분50초~20분41초)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身] · 말[口] · 생각[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주력(呪力) ;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의 효과.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5. 4. 20:16

§(101)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참선도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할 수 있다 / 혼침(昏沈), 산란(散亂) / 고봉스님의 수행 / 공부가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정진해라.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 / 화두는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과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요 관문.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101)—1979년 1월 관음재일 법문(79.01.24.음) (용101)(정진)

 

(1) 약 15분.

 

(2) 약 12분.


(1)------------------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긴히, 긴밀히 꽉!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라. 승두(繩頭)는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話頭), 화두를 놓치지 말고 단단히 거각(擧却)을 해서 공부를 잡드리를 해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 향기가 진동을 하는 것입니다. 추운 강추위가 없이 겨울 날씨가 뜨뜻, 마냥 이상(異常) 기온으로 뜨뜻해서 매화꽃이 싱겁게 피어 놓으면 그 매화는 향기가 진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는데,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데 영 순일(純一)하지를 못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않고, 그래 어떻게 했으면 화두가 잘 들리며, 어떻게 했으면 이 발심(發心)이 되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잘 들려서 공부를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종종 문의를 받습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하려고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생각이 맹렬하지를 못하고, 들어도 한 번 두 번 들면 들을 때만 잠깐 있다가, 돌아서 일 분도 못 가서 또 화두가 안 들리고.
이리해서 '이거 공부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냐? 화두가 나한테 맞지를 않아서 그런 것이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저 또 딴 큰스님네한테 가서 화두를 새로 타 가지고 또 해 보니, 새 화두를 가지고 해 보니 뜬금없이 그전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었던 화두가, 묵은 화두가 생각이 나고, '이것 새 화두는 그만두고 또 묵은 화두를 들고 한바탕해 보까?' 그러니 또 새 화두가 또 생각이 나고.

이리해서 갈팡질팡 이 화두 조끔 들어보다 저 화두 좀 들어보다가, '아! 이것이 그 잘 안되는 것이 업장(業障)이 많아서 그러나? 이 업장소멸(業障消滅)하기 위해서 기도를 좀 해 보까?'
마치 어떤 사람이 월급만 받아 가지고는 살림이 도저히 꾸려 나갈 수가 없으니까 '무슨 계(契)를 좀 해 보자. 계를 하려니 무슨 장사를 조끔 해 보까? 밀수 장사를 좀 해 보까? 화장품 장사를 좀 해 보까?' 이것 쫌 해 보다, 저것 쫌 해 보다, 마냥 집에 붙어 있는 겨를이 없이 밖으로 밖으로만 돌아댕기다가 살림도 엉망이고 곗돈도 띠이고, 화장품 장시하다가 들켜 가지고 들통이 나고 이리해서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하는 그러한 사람이 신문에도 가끔 납니다마는 참선(參禪) 공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팔지니라. 몇 자 파다가 물이 안 나온다고 또 저만큼 옮겨서 끌쩍끌쩍, 조끔 파보다 안 나오면 또 저그 가서 끌쩍끌쩍, 그 사람은 종래 물을, 좋은 우물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열 자를 팠는데, 나는 열 자를 파도 안 나오면 스무 자를 파고, 스무 자를 파서 안 나오면 삼십 자를 파고, 기어코 바위가 나오면 그 바위를 떨어내고 이리해서 다른 사람 집 우물보다도 훨씬 맛이 좋은, 가물 때나 장마 때나 변함이 없이 솟아오르는 진짜 생수를 지하수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물을 만날려면은 다른 사람보다도 몇 배를 더 파고 들어가고, 바위까지 뚫고 들어갈 만한 그러한 끈기와 용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그만한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이 무량겁으로 얽히고 얽힌 생사업(生死業)을 뽑아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은 열 자 파는데, 자기는 겨우 서너 자 파고 그때부터서 물이 안 나온다고 짜증을 내고, '이것 우물 자리가 좋지 못해서 이러냐?'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해 가지고 자꾸 화두를 바꿔 쌓고, 그래 가지고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약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실지로 닦아 가는 실참실오(實參實悟)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법당 공기가 너무 혼탁한 탓인지 모두 조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냥 보통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면은 멀쩡하니 눈이 반짝거리고 잠이 안 오다가, 참선 법문만 시작했다 하면은 또 죽비(竹篦) 치고 「이뭣고?」만 했다 하면 눈이 스르르르 감겨 가지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웬수 만난 듯이 이를 갈아붙인다 해도 또 스르르르...
죽비를 안 치고 이야기를 하고 앉었으면 잠이 안 오는데, 왜 죽비를 치고 「이뭣고?」를 하면 잠이 오냐? 이것이 대단히 이건 참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어떤 노장님이 하루는 찾어와서 참선을, 출가하신 지가 그분도 근 20년이 된 분인데 비구니 스님인데, "참선을 새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조실 스님께 계(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타고 그래서 중이 되었는데 인자 조실 스님 돌아가셨으니 천상 원장(院長, 송담스님) 스님을 의지해서 참선을 해야겄으니 공부를 새로 좀 가리켜 주십시요"
"아니 그동안에 20년이란 세월을 선방으로 다니시면서 했는데 무슨 공부를 새로 한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저기 경상도 어떤 큰스님을 만나 뵈옵고 어떻게 해야 도(道)를 빨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쭤봤더니 "어쨌든지 앉아서 많이 졸으라"고, "그저 많이 졸라야지 많이 졸라야 하느니라" 이리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앉아서 가만히 옆에 사람 모다 10년 20년 공부한 구참(久參) 스님네 가만히 보니까 전판 죽비를 치니, 치고 나서 5분도 못 되아서부터서 졸기 시작하는데 방선(放禪)할 때까지 그렇게 맛있게 자고 있단 말이여.
'아하! 저분들은 참 공부가 참 깊이든 분들이로구나. 에이! 나도 한바탕 자 봐야겄다' 앉아서 아무리 잠을 자려고, 기를 쓰고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애를 먹었다고 그럽니다. 한 달 두 달 어떻게 해야 이것이 잠이 오나 하고 아무리 공을 들여 봤자 점점 잠이 안 오거든.

그래 가지고 옆에 사람 '누가 저 공부를 잘하나?' 아하 확실히 금방 된 시작한 사람은 잠을 안 자고, 오래된 사람일수록 잠을 잘 자거든.
그것참, 그래서 그 일 년, 이태, 사오 년 내지 십 년을 걸려서 자오는 연습을 해 가지고 이제 겨우 잠을 나도 참 어디다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자랑삼아서 그 새로 된 사람 선배 후배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떠억 꺼내서 자랑을 했더니 "아! 노스님, 공부 그것이 아니에요. 잠자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 니가 모르는 소리다. 내가 큰스님한테 내가 들었는데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니 그 옆에 있는 구참들도 모다 그렇지 않다고 그러거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 또 다른 스님네한테 가서 또 물어보니까 역시 '존 것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확실히 그 존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이제사 왔습니다. 입맛 나자 노수 떨어진다고 이제 겨우 질나서 잘 좀 자게 되었는데 이제사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라 하니 이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몸은 늙고 신경통으로 무릎은 쑤시고 하니 이거 큰일났습니다"

큰스님 한마디는 '그 많이 졸라야 한다'는 말씀은 농(弄)이 좀 들어 있는 말씀이지마는, '어쨌든지 앉아서 「이뭣고?」를 열심히 해라' 아마 이러한 뜻으로 하신 말씀을 조끔 농적으로 표현을 하셨던 모냥인데, 그 말을 아주 고지식하게 듣고서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알고, 그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십 년 적공(積功)을 들여서 질을 냈다고 그럽니다.(처음~14분42초)





(2)------------------

그만큼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 산란 아니면 혼침,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라고 한 큰스님도 '내가 3년 동안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내가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으리라' 이래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서 참선을 시작했는데, 겨우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 있을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잠이 퍼일어났습니다.
잠이 퍼일어나면 일어서서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하다가 잠이 깨지면 다시 또 포단 위에 올라가서 정진을 하는데, 앉으면 이 생각 저 생각 산란심(散亂心)이 퍼일어나고 산란심이 조끔 가라앉을 만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고 이리해서.

그리고 화두를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어느 곳으로부터서 어데로부터서 내가 왔으며, 죽으면 내가 어느 곳으로 가는고?」 화두를 이렇게 하라고 그 지도를 받아 가지고 아! 그렇게 화두를 하는데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졌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데서 왔으며, 이 세상을 살고 죽으면은 어느 곳으로 가는고?' 아 이렇게 두 갈래 길로—생각도 이렇게 간추려 지지를 아니하고, 앉았다 하면은 혼침 아니면 산란, 산란 아니면 혼침,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 지낸 것이 어느덧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가고 며칠 안 가면 마지막 3년 기한이 차서 그날이 지내가면 천상 자살을 해 버리려고 했던 그날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착잡하기가 말할 수 없고, 초조하고 불안하기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황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하룻저녁에는 꿈에 단교(斷橋) 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이 화두를 해라' 아 꿈에 화두를 탔는데, 꿈을 깨서 보니 그 꿈속에서 탄 그 화두가 그렇게 성성(惺惺)하게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제절로 들려.

밥 먹을 때도 건성, 똥 눌 때도 건성, 대중생활 속에서 생활을 해 나가는데 일체 건성이고, 오직 「만법귀일(萬法歸一)이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데 기가 맥혀.
하루 이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저녁까지 밤새 잠 뭐,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해 볼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 독로(獨露)—하늘을 쳐다봐도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땅을 봐도 화두, 하늘을 봐도 화두, 사람을 뭐 수백 명 사람 모인 데에 있어도 그 화두뿐이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6일,  엿샛날이 돌아간, 엿샛날 채웠는데 그때 달마 스님 제삿날을 맞이해서 탑전(塔前)에 제사를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를 올리러 갔다가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영탱화(影幀畵)에 그 찬(讚)이 있는데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백 년이면 삼만육천 일이죠. '백 년, 삼만육천 일에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로구나' 한 아! 그 게송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3년 동안 사한(死限)을 해 가지고, 3년 해서 되지 아니하면 죽을 기한을 한 사람이 공부야 되건 안 되건 등한히 지내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안 들리고, 아무리 혼침에 떨어져도 단 일 분, 단 일 초도 등한히 지내지를 안 하고 계속 최선을 다해서, 앉아서 잠이 오면 서서 거닐면서 화두를 들고 쪼옥, 졸음이 나가면 다시 와서 앉고 하기를 3년을 되건 안 되건 한결같이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잘된다'고 생각이 된다고 해서 잘된 것도 아니고, '잘 못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그 공부가 잘 못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화두가 제법 잘 들리고 성성하다고 '아! 화두가 참 잘 들리는구나. 이런 상태로 주욱 나갔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공부가 잘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아! 화두가 잘 들리는구나. 참 이렇게 좀 쭉 나갔으면' 고 생각이 벌써 화두를 놓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게 공부 옳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여.
잘되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를 들고 나가는 것뿐인 것이여.

또 그렇게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그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그런 때가 또 옵니다. 그러나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야말로 내가 한 계단 힘을 얻을 수 있는, 올라서려고 하는 그러한 고비가, 바로 그 공부가 잘 안되고 뒤틀리고 지루하고 몸부림쳐 지고 한 때가 그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것을 잘 아시고, 조끔도 짜증을 내지 말고 허리를 주욱 펴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이뭣고?」 하면서 이렇게 내쉬어.

참 앉아서 뒤틀리고, 답답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고 이럴 때에는 조용히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한 일(一)' 자로 떠억 노선을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고, 가슴이 좀 시원해지고 혼침이 없어지면 다시 또 자리에 가서 하고.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잘 지혜스럽게 그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조끔도 한 생각도 후퇴하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하면은 한 걸음, 한 고동,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로써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고비요 거기서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14분44초~26분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계(契) ;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옛날부터 전해 오는 상부상조의 민간 협동 조직.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업(生死業) ;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일으키는 업(業).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을 말한다.
*보리과(菩提果) ; 깨달음.
*보리(菩提) : [산스크리트어]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果 열매·결과 과) ; ①열매를 맺음. 또는 그 열매. 원인으로부터 생긴 결말의 상태. ②원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체의 법(결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참고 ❶]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서답(書答)」 ‘답노상서(答盧尙書 노상서에게 답함)’에서.
所以古德云 路途之樂 終未到家 見解入微 不名見道 參須實參 悟須實悟 閰羅大王 不怕多語 若要實參實悟 須是從前坐禪處得底 經敎上得底 古人語錄上得底 宗師口頭下得底 有滋味寶悟處 一時掃向他方世界 好字細看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고 ❷]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公(翁?)公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厓?)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참고 ❸]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에서.
若也眞實參學者 參須實參 悟須實悟 始得 且作麽生是實參實悟耶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以生死大事爲念 離心意識 參出凡聖路 學以無心無爲 綿密養之 常常無念 常常不昧 了無依倚 到冥然地 自然合道 不見古人云 無心方見本來人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갈아붙이다 ; (사람이 이를) 모질고 독한 마음으로 바짝 갈다.
*노장(老長 늙을 로/길·맏·어른·우두머리 장) ; ①노장 스님의 줄임 말. ②노스님(나이 많은 스님)의 존칭. 나이가 많고[老] 덕행이 높은[長] 스님.
*비구니(比丘尼) ; 출가하여 불교의 구족계(具足戒)인 348계(戒)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 스님. 팔리어 bhikkuni  걸사녀(乞士女)라고도 한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19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구참(久參 오랠 구/참구할·참여할 참)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것. 오랫동안 선(禪)을 닦은 것.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에 귀의한지 오래 되는 것. 초학(初學)의 상대어.
*전판(全판) ; 하나도 남김이 없는 전부.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입맛 나자 노수(路需) 떨어진다 ;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던 사람이 입맛이 나게 되자 여비(旅費)가 떨어져서 사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일이 공교롭게도 서로 어긋나며 틀어지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질나다 ; ‘길나다’의 사투리.
*길나다 ; ①버릇이나 습관이 되어 익숙해지다. ②(연장이)윤기가 나거나 쓰기 좋게 되다. (연장이)다루기가 좋게 되다.
*농(弄 희롱하다·놀다·실없이 놀리다 롱(농)) ; 실없는 장난. 또는 장난으로 하는 말.
*적공(積功 쌓다·많다 적/공로·일·업적 공) ; ①공(功)을 쌓음[積]. ②어떤 일에 많은 힘을 들이며 애를 씀.





------------------(2)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라고 한 큰스님도 '내가 3년 동안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내가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으리라' 이래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서 참선을 시작했는데~ ; 
[참고] 고봉스님의 수행에 대한 법문.
① 『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② 『선요禪要』 2. 시중(示衆).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포행(布行 펴다·흩어지다 포/다니다·가다·길 행)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포단(蒲團 부들 포/둥글 단) ; ①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方席). ②부들풀로 만든 둥근 방석. 근래에는 이 포단 대신 '좌복(坐服)'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님이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사시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마지 올린다’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摩指, 摩旨, 磨旨) ‘손으로 만들어 올린다 혹은 정성스럽게 만든 공양을 올리오니 제 뜻을 감읍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조 법연(五祖法演) : (? – 1104) 속성은 등(鄧)씨. 사천성 면주부(綿州府) 파서(巴西)에서 났다. 35세에 출가하여, 처음엔 강당에서 <백법(百法)> <유식론(唯識論)> 같은 것을 공부하였다.
뒤에 백운 수단(白雲守端)선사의 회상에 가서 있을 때,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 화상의 「마니주 화두」에 대하여 묻는데, 백운선사가 크게 꾸짖는 것을 듣고 곧 깨치어 온 몸에 땀을 흘리면서 아래와 같은 게송을 지어 바쳤다.

『저 산 밑에 한뙈기 묵은 밭, 왜 즐기노 노인에게 물었더니, 몇 번 팔고 또 산건, 대숲과 소나무에 맑은 바람 온다고(山前一片閑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隣松竹引淸風)』 이에 백운선사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을 이어서 서주(舒州) 사면산(四面山)에서 출세하였다.
다시 백운산, 그 다음에는 태평산(太平山), 마지막으로 기주(蘄州) 오조산 동선사(五祖山東禪寺)에서 크게 교화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불안 청원(佛眼清遠) • 태평 혜근(太平慧懃) • 원오 극근(圜悟克勤)은 오조 문하의 세 부처라고 하였다.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에 80여 세로써 입적하였다.

마니주(摩尼珠) 화두란, 사조(師祖)라 하는 이가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에 있는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의 귀절을 끌어다가 남전에게 묻기를 『마니주를 세상에서 모르는데, 여래장 속에서 찾아 냈구나 하였으니, 어떤 것이 여래장이오니까?』 남전이 대답하기를 『내가 너하고 같이 다니는 것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은?』
『그도 또한 그것이지』

『마니주는 어떤 것이오니까?』
『가거라! 네가 내 말을 모른다』 하는 데서 사조가 깨쳤다.

*영탱(影幀 그림자 영/그림 족자 탱, 그림 족자 정) ; 불교 종파의 조사나 고승을 그린 그림으로 진영(眞影), 영정(影幀), 정상(頂相), 조사도(祖師圖)라고도 불리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등한히(等閒- 같을 등/한가하다·등한하다 한)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3분57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참고 ❸]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2분28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 환희마(歡喜魔), 환희(歡喜)의 마구니[魔], 환희라는 번뇌. 번뇌마(煩惱魔).
*환희마(歡喜魔) ; 환희(歡喜)의 마구니[魔]. 환희라는 번뇌. 참선 수행자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은 번뇌, 망념이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p127. (가로판 p124)
工夫가  未得入手라도  莫生煩惱니  恐煩惱魔가  入心이니라.  若覺省力이라도  不可生歡喜니  恐歡喜魔가  入心이니라.

공부가 순일하지 못하더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지니, 번뇌마(煩惱魔)가 마음에 들어올까 두려우니라. 만약 힘덞을 느낄지라도 환희심을 내지 말지니, 환희마(歡喜魔)가 마음에 들어올까 두려우니라.

*마(魔) : [산스크리트어]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고동 ;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나 계기.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대혜종고(大慧宗杲) : (1089 – 1163) 경산 종고(徑山宗杲). 법명은 종고,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묘희(妙喜)이며, 속성은 해(奚)씨. 안휘성(安徽省)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에서 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선주의 명교(明敎)선사에게 가서, 깨친 바가 있은 뒤, 조동종의 장로들께 많이 찾아다니다가 변경(汴京)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원오선사의 법을 받아 가지고, 경산의 능인사(能仁寺)에서 크게 교화하였다.

그 때 나라의 정사를 비평하였다는 혐의로, 형주(衡州)에 귀양갔다가 또 얼마 뒤에 매주(梅州)로 옮기게 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백여 명의 제자 가운데 반수 이상이 그 지방의 풍토병으로 죽었다.
17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경산과 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廣利寺)와 전당(錢塘)의 영지사(靈芝寺), 건강(建康)의 보령사(保寧寺) 같은 여러 곳에 있다가, 송나라 효종(孝宗) 융흥(隆興) 1년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대혜보각 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5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등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0여 명이 있었다.
그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애쓴 것은 천동 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부수어 버리고 활구(活句)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 ; 선용기심(善用其心).
*선용기심(善用其心) ; ‘잘 그 마음을 쓴다’는 뜻으로, 정진할 때 역순경계(逆順境界)에 닥쳐 경계에 휘둘리지 않게 그 마음을 잘 단속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정진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가 안 들리고, 답답하고 애를 먹을 때 선용기심(善用其心), 그 마음을 잘 잡도리해서 그러한 고비를 잘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고 힘을 얻게 된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省力]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得力] 곳입니다.

*보리(菩提) : [산스크리트어]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4. 22. 14:32

§(102) 어떻게 하면 혼침을 이겨낼 수 있느냐? 가벼운 혼침은 허리를 쭉 펴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 무거운 혼침은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포행을 하거나, 찬물에 세수를 한다 /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하냐? 일어나는 생각을 버릴려고 누를려고 쫓을려고 하지 말고, 다못 고대로 놔둔 채 화두만 든다. 이것이 가장 지혜스럽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해 버리는 방법.

고인(古人)은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생(生)해지고, 생한 것은 익어진다'--->아주 익어 있던 번뇌 망상은 생소해지고, 참선은 우선은 생소하지만 애써 해 나가다 보면 익숙해져서 저절로 되어진다 / 반복—>습관—>체질화.

**송담스님(No.102)—1979년 하안거결제 법회(79.06.09) (용102)

 

약 13분.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원래 우리가 갖추어 있는 진여불성, 본래 생사 없는 그 해탈 도리, 어째서 우리는 미(迷)했나? 왜 미(迷)해 가지고 이렇게 생사윤회를 하고 있나? 어떻게 하면 본래 가지고 있는 진여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간곡한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석 달 동안 하안거(夏安居) 정진(精進)이 시작이 됩니다. 여름 석 달은 비가 오고, 너무 더웁고 해서 행각(行脚)을 하면서 수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름 석 달 동안, 그리고 겨울 석 달은 너무 춥고 그래서 또 숲속이나 산에서 도를 닦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이러한 선원(禪院)에 모여서, 정사(精舍)에 모여서 정진을 하도록 마련된 것이 하안거, 동안거입니다.

오늘부터서 하안거가 시작됩니다마는 날씨는 더워서 찌고, 죽비(竹篦)를 치고 앉았다 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땀이 등으로 줄줄줄줄줄 흘러내려서 궁딩이가 척척하니 젖는 날이 계속이 될 것입니다. 궁딩이에는 땀띠가 더덩캥이가 지고,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한 생각 놓칠 새라 칼끝을 턱 밑에다 괴우듯이, 그런 이를 갈아붙이고 정진을 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혼침(昏沈)에 빠지고, 혼침에서 겨우 깨어날 만하면 천 사량(思量), 만 가지 망상(妄想)이 퍼일어나서 산란(散亂) 속에서 살림을 하다가 또 그 생각이 겨우 가라앉을 만하면 또 혼침에 빠지고, '어떻게 했으면 이런 혼침과 산란 속에서 여일(如一)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가?' 이것이 오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숙제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혼침 속에서 혼침을 이겨낼 수 있느냐?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코스를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5분 내지 10분 동안 포행(布行)을 하면 혼침도 달아나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후련해지고, 다시 또 그 자리에 가서 또 정진을 할 것이여.
정진을 하다가 또 혼침이 오면 허리를 쭉 펴고—혼침이 올 때에는 언제든지 허리가 꾸부러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허리가 꾸부러지므로 해서 혼침이 오는 것이고, 혼침이 왔다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허리가 꼬부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벼운 혼침은 허리를 쭉 척량골(脊梁骨)을 버티고, 정신을 바짝 차림으로 해서 달아나지만, 워낙 혼침이 무거운 놈이 오면은 천상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포행을 하거나, 찬물에 세수를 하거나, 이렇게 해서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일어나기가 수선스럽다 해서 앉아서 계속 코를 골면서 혼침 속에서 한 시간 두 시간을 지낸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또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이겨나야 하냐?

일어나는 생각을 안 할려고 하고, 누를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방법입니다. 일어나는 생각, 그 생각은 별별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내간 이야기, 어렸을 때 이야기, 지금 집에 애가 학교서 왔냐, 안 왔냐? 출장간 남편이 돌아왔냐, 안 왔냐?' 별별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차츰차츰 생각 따라서 파고 들어가다 보면 정말 재미가 꽤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차츰 차츰 차츰 더듬어 들어가다 보면 정말 시간이 10분, 20분은 어떻게 간 중 모르게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퍼뜩 정말 그 생각을 그만두기가 아까울 정도로 지나간 자미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퍼뜩 '아! 내가 또 속았구나' 한 생각도 할 겨를도 없이 허리를 쭉 펴고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떠억 하면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쫓을려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은 고대로 그냥 놔두고 화두만 척! 추켜든다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버릴려고 하지 말고, 누를려고 하지 말고, 다못 고대로 놔둔 채 화두만 든다고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지혜스럽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해 버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참선 중에 지나간 인상 깊었던 일이 생각난 것은 차라리 어떨런지 모르지만, 지나갔던 아주 기분 나빴던 고약한 사건들이 떠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도 척량골을, 등뼈를 쭉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혼침도 거기에는 붙지 못할 것이고, 아까 일어났던 그러한 생각들도 자취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어도 그러한 생각들이 잘 물러가지를 않고 집요하게 그런 생각이 퍼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자꾸자꾸 한 달, 두 달, 일 년, 삼 년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진지하게 정진을 계속해 나가면 간단하게 화두가 거각이 되면서 그러한 산란심, 망상심, 번뇌심은 쉽게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함으로 해서 거기서 습관이 되고, 습관이 장차는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무의식 속에 되어지게까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기술도 역시 마찬가지고, 운동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생활상에 있어서의 습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되어지게끔 되는 것입니다.

역시 참선(參禪)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어도 금방 화두는 간 곳이 없고 온갖 생각이 퍼일어나고, 또 들어도 또 그렇고 이렇지마는 차츰차츰 오랜 세월 동안 해 나가면 반드시 제절로 되어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이것을 말하기를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생(生)해지고, 생한 것은 익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 익은 것이 생(生)해지냐?
무량겁으로 익혀 온 번뇌 망상은 익어 있는 것이고, 지끔 시작해서 하는 참선 화두는 설어 있다 그 말이여. 생(生)해 있다. 생소(生疏)하다 이 말이여.
그 아주 익어 있던 번뇌 망상은 차츰차츰 안 해지게 되니까 생소해지고, 지끔 시작한 참선은 우선은 생소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애써 나가다 보면 차츰차츰 익숙해진다 이것입니다. 익숙해지면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단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처음 시작할 때처럼 그렇게 답답하고, 맛없고, 못 견디게 괴로운 것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안락(安樂)의 묘문(妙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해 가면서 차츰차츰 습관이 되고, 그래서 체질화가 되면 할려고 안 해도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어지고, 화두가 성성적적하게 들어지므로 해서 번뇌와 망상도 자취 없이 수그러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몸도 가벼워지고, 오랜 만성병(慢性病)도 약도 별로 먹지도 아니했는데 언제 낫은 중 모르게 차츰차츰 낫어지게 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18분24초~30분4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본래 생사 없는 그 해탈 도리’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행각(行脚) : ①수행자가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스승이나 벗을 구하여, 자기의 수행이나 교화를 위해 곳곳을 편력하는 것. ②스승의 슬하(膝下)를 떠나서 선(禪)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좋은 벗을 구하여, 마치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이 발길 닿는 대로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 이것을 행하는 자를 행각승(行脚僧) 또는 운수(雲水)라고 함.
*정사(精舍) ; vihara. 수행승들이 머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집. 사원. 절.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더덩캥이 ; 더뎅이(부스럼 딱지나 때 따위가 거듭 붙어서 된 조각).
*갈아붙이다 ; (사람이 이를) 모질고 독한 마음으로 바짝 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여일(如一)하다 ; (사람의 언행이)처음부터 끝까지 꼭 같거나 변하지 아니하다.
*포행(布行 펴다·흩어지다 포/다니다·가다·길 행)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척량(脊梁 등마루 척/대들보 량) ; 등마루의 거죽 부분.
*등마루 ; 등골뼈가 있어서 울룩불룩하게 줄진 등의 가운데 부분.
*주마등(走馬燈 달릴 주/말 마/등 등) ; ①중국 고대부터 정월 보름날에 다는 여러 종류의 등(燈) 가운데 하나이다.  두 겹으로 된 틀의 안쪽에 말[馬]이 달리는[走] 그림을 붙여 놓고, 밑에서 등 촛불을 밝히면 등 내부의 공기가 대류 현상을 일으켜 틀이 돌게 하는데, 마치 말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마등이라고 불렀다. ②무엇이 빨리 지나감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3분57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참고 ❸]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2분28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고인(古人)은 이것을 말하기를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생(生)해지고, 생한 것은 익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생처방교숙(生處放敎熟) 숙처방교생(熟處放敎生),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하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은 익게 하고, 익은 곳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생소하다(生疏-- 서투르다·날것 생/멀다·서투르다·거칠다 소) ; ①어떤 대상이 친숙하지 못하고 낯이 설다. ②익숙하지 못하고 서투르다.
*안락(安樂) ; 근심, 걱정이 없이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움.
*묘문(妙門) ; 열반의 경지에 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문.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4. 16. 11:32

§(106)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 / 구경(究竟)의 깨달음 / (게송)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 / '목숨을 바치고라도 기어코 내가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해야겠다' 이만한 각오가 있으면 그렇게 정진이 또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정진)

 

약 7분.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잠을 안 자고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쳐도, 밥을 굶으면서 몸부림을 쳐도, 묵언을 하며 말을 아니하면서 몸부림을 쳐도, 이건 정말 애써 본 사람이 아니면 그 죽어버릴 수도 없고, 기둥에다가 머리빡을 짓쪄서 유혈이 낭자하게 맨들을 수도 없고,
어찌해 볼 수가 없을 만큼 이것은 정말 어찌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공부를 애당초에 알았던가? 차라리 이러한 것이 있는 줄을 몰랐으면 그저 배불리 먹고 편안히 잠자고 내생에야 지옥을 가건 말건 죽어 봐야 아는 것이고, 어째서 금생에 그러한 것을 알아 가지고 내가 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대골통을 짓쪄서 꺼꾸러질 수도 없고 이런 법을 알았는가?'
정진(精進)하다가 적삼을 벗어서 방바닥에다 후려치면서 부처님과 조사 스님네를 원망하고 욕을 하는 그러한 납자(衲子) 스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괴롭게 구해라. 고행을 해라'

금생에 이 정진을 해 나가는 데 여름에 더웁고 겨울에는 춥고, 몸뚱이는 뒤틀리고 때로는 골이 아프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이러한 가운데에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가. 공부가 안될수록에 더욱 침착하게 여법(如法)하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간절히 화두를 들고 나간다면 많은 어려움, 많은 괴로움을 겪을수록에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격언에도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 이런 말도 있습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얼핏허면 한 소식했다고 아는 척을 하고, 그 아는 것을 남에게 보일려고 그러고,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짓인 것입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해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백만 명이 알아준댔자 자기 본분사(本分事)에는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지루하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대자유와 대해탈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하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방초(芳草) 길, 잎도 피고 꽃도 피고 하는 그러한 방초(芳草)가 우거진 길을 걸어가지 아니하면,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지 못하니라. 저 아름다운 꽃이 지고 피고 하는 그러한 마을에 가려면은 향기로운 풀이 우거진 그러한 오솔길을 걸어서 지나가야만 한다.

무량겁(無量劫) 업장(業障)을, 산보다도 더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무량겁 업장을 그놈을 녹이고서 그놈을 씻어내고서 본바탕 자기 마음을 보는데, 그렇게 그것이 수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괴로움 어떠한 장애라도 기어코 내가 디디고 넘어서야 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만한 각오, '목숨을 바치고라도 기어코 내가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해야겠다' 이만한 각오가 있어 가지고 정진을 해 나가면 실상은 그렇게 정진이 또 어려운 것만도 아닌 것입니다.(6분27초~13분2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참고]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짓찧다 ; (무엇을) 아주 세게 마구 내리치거나 부딪다.
*대골통 ; ‘대갈통’의 사투리.
*대갈통 ; ‘머리통’을 속되게 이르는 말.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적삼 ; 윗도리에 입는 홑옷. 모양은 저고리와 같다.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 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게송)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 ; ‘우거진 풀밭길 걷지 않으면 꽃이 지는 마을에 가긴 어려워.’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66 (가로판 p174) 참고.
*방초(芳草 꽃답다·향기풀·향기·현자·아름답고 좋다 방/풀·풀숲 초) ; 우거진 풀밭. 무성한 풀밭.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身] · 말[口] · 생각[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4. 3. 24. 13:36

§(164) (게송)신재해중휴멱수~ / 산철결제 / 진각국사(眞覺國師) 좌우명(座右銘) / 중국 고봉선사의 수행담 /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 / 고봉스님 3년 공부가 진취가 없었던 까닭은? 화두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고봉스님, 전강 조실스님처럼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 / 자가철주(自家鐵柱) / (게송)망회타귀굴~, 수임방원기~ /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과연 어떻게 일용(日用)을 수용(受用)을 해 갈 것인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송담스님(No.164)—1982(임술년) 춘계산철 결제 법어(82.02.24) (용164)

 

(1) 약 19분.

 

(2) 약 16분.


(1)------------------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하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가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하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몸이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물 찾기를 쉬어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날마다 재를 넘어 다니니 산을 찾지 말아라.
바닷속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있으면서 '물이 어디가 있는가?' 하고 물을 찾지 말고, 날마다 재를 넘어 다니면서 '산이 어디가 있는가?' 하고 산을 찾지 말아라.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백 년이면, 일 년이 삼백육십 일이니까 백년이면 삼만육천 일인데,
백년(百年) 삼만육천조(三萬六千朝)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니라. 백 년 삼만육천 일 반복하는 놈이—엎쳤다 뒤쳤다, 앉았다 일어났다, 오고가고,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더라.


오늘은 임술년(壬戌年) 2월 초하루, 반살림 결제(結制)날입니다.
그전에는 전강 조실(祖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쭈욱 해제(解制) 동안에도 스님네가 해제했다고 해서 이렇다 할 꼭 갈 곳도 없으면서 모다 걸망을 지고 불불이 나가서 여기저기 동서남북으로 그럭저럭 다니면서 다음 철 결제까지 기다리느라고 정처(定處)없이 모다 행각(行脚)도 하고, 모다 이리 가서 쉬기도 하고 약(藥)도 먹고 모다 그랬는데,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이 도량(道場)에서 결제 때와 똑같이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면서 정진을 하는 것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해서, 산철에도 가시지 말고 여기서 공부를 하시기를 바래서, 그렇게 해서 스님네가 이 산철에도 정진을 쭈욱 해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今年)부터서는—옛날에 그렇게 산철에 정진을 했지만, 뭐 '산철결제'라 하고 무슨 결제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 그러지는 안 했습니다.
금년에는 이렇게 새로 선방(禪房)도 짓고 이렇게 법당(法堂)도 짓고 그랬으니, 기왕 산철에 결제를, 안거(安居)를 하기로 한다면 간략히 결제 법요식을 갖는 것이 우리의 신심(信心)을 굳건히 하고 여러 가지 분위기를 엄숙히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이리해서 여러 스님네의 뜻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간략히 법요식을 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다 신도님한테는 '산철 결제 법요식에 참석하시라'는 구체적인 발표는 하지 안 했는데, 이렇게 특별히 신심(信心)이 있는, 또 인연(因緣)이 있는 몇 분의 신도님네들이 참석을 해 주셔서 이것도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因緣)의 소치(所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각국사(眞覺國師)에 좌우명(座右銘)」이 있는데, 그 좌우명을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우리 정진(精進)을 해 나가는 출가(出家) 납승(衲僧)으로서 뜻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니라.
보살이여, 보살의 자식이여, 보살이여. 우리가 모다 보살의 자식이요, 새끼보살이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여. 항상 스스로 자기 머리를 어루만져 보라 그 말이여. 깊은 씀[有]이 있으리라, 깊은 의의(意義)가 있으리라.

마두인득심사량(摩頭因得審思量)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냐.
머리를, 자기 머리를 자기가 떠억 어루만지면서 깊은 사량(思量)을, 생각한 바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여. '부처님이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져 준다'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가 자기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여.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냐, 출가(出家)한 본뜻이, 목적이 무슨 일을 목적으로 해서 출가를 했느냐?

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이요, 모냥은 분명히 중에 모냥을 하고 있는데, 그 마음은 속인(俗人)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참으로 여법(如法)한 출가인(出家人)으로서의 몸과 마음을 다 갖추었느냐.
가불참천이괴지(可不慚天而愧地)니라. 가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고, 땅을 내려다보고 부끄럽지 않느냐.

추행광언임여위(麤行狂言任汝爲)요  확탕노탄하회피(鑊湯爐炭何回避)리요.
머트러운 행동과 미치광이 같은 말을 니 멋대로 행하고, 니 멋대로 지껄이다가 확탕노탄(鑊湯爐炭)을 하회피(何回避)냐, 확탕(鑊湯)지옥과 노탄(爐炭)지옥을 어떻게 회피할 수가 있겠느냐.

이건 진각국사(眞覺國師)가 항시 자기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던 글입니다. 이 글은 바로 출가 납승으로서는 누구나 이러한 좌우명으로써 자기(自己)의 좌우명(座右銘)을 삼는다 해도 조끔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이 좌우명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 가운데에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있는 법문을 해 주셨는데,
네 가지의 은혜(恩惠)가 중(重)한 것을 잊지 않았느냐?
사대(四大) 오온(五蘊)이 생각 생각이 일 초 일 초 늙어가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안 했느냐?

너의 목숨이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달려 있는 것을 잊지 안 했느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와 조사(祖師)를 만났느냐?
이러한 등(等)의 여러 가지 그 법문을 해 주셨는데, 그러한 말씀도 우리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그런 중대(重大)한 법문(法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출가한 선객(禪客)이 무엇이 제일 고민(苦悶)이냐?
옷이 없는 것도 고민이 아니요, 먹을 것이 없는 것도 고민이 아니요, 건강이 좋고 나쁜 것도 그것도 큰 고민이 아니고, 오직 큰 고민은 '정진(精進)이 순일(純一)하게 되냐, 안 되느냐?' 오직 이 하나의 고민이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중국에 고봉선사(高峰禪師), 『선요(禪要)』 법문을 하신 그 고봉선사께서도 처음에 출가해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參禪)을 하는데, 어떻게 잠이 퍼오던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포단(蒲團) 위에 앉어 있을 수가 없었어. 부득이 밥을 먹을 때에만 방석에 앉어서 밥을 먹고는 그밖에는 방석에 앉어 있을 수가 없어. 앉었기만 하면 혼침(昏沈)이 와서 졸음이 오기 때문에 앉지를 못하고.

금방 앉으려고 하면은 잠이 퍼와 가지고는 꾸뻑 (졸면) 일어나 가지고 밖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는데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 먹을 때까지 그래 가지고 왔다갔다하면서 잠을 깨 가지고, 잠이 깨져서 막 좀 가서 방석에 가서 앉으려고 하면은 또 잠이 오고.
잠이 깨면은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 잠이 오고 이랬는데, 처음에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결심을 하기를 '3년 동안 정진을 해 가지고 3년이 되어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면 죽어 버릴 각오'를 하고 공부를 시작을 했는데, 3년이 거의 다 되도록 조끔도 공부가 진취(進趣)가 없었어. 죽을 날은 얼마 안 남았는데, 기한은 얼마 안 남었는데 공부가 전혀 진취가 없어.

이 세상에 무엇이고 3년 동안 적공(積功)을 들이면 숙달이 되어서 많이 진취가 있는 것인데, 어찌된 셈인지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아무리 고단해도 자리에 눕지를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데 3년이 되도록 조끔도 진취가 없어. 혼침과 산란, 두 가지로 완전히 24시간이 점철(點綴)이 되어. 혼침 아니면 산란, 산란 아니면 혼침.
아무리 곤(困)해도 자리에 눕지를 않고, 낮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밤새도록 잠을 안 자려고 도량에 나가서 왔다갔다. 밥 한 그릇 먹는 그 잠깐 동안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지를 아니했어.

그리다가 마지막에 가서 달마(達摩) 스님 기일(忌日)에, 달마 스님 모셔진 영각(影閣)에 올라가서 그 제사를 지내는데, 그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 진영(眞影)에 쓰여 있는 글에,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그 영찬(影讚)을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는데.(처음~19분)




(2)------------------

그 확철대오 하기 전 일주일 전에 꿈에 단교화상(斷橋和尙)이 보이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그 화두(話頭)를 꿈에 받고서 꿈을 깼는데,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밥을 먹어도 의심이요 똥을 누어도 의심이요, 산을 봐도 의심이요 물을 봐도 의심이요, 대중 가운데 있어도 대중은 한 사람도 보이지도 않고 오직 의단만이 독로해서 밥도 건성으로 먹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하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이 독로를 했다.

그 전에는 화두를 아무리 들려고 해도 들을 때뿐이지, 금방 산란심(散亂心)이 들어와 버리고 그랬었는데, 꿈에 단교화상 '만법귀일' 화두를 받은 이후로는 제절로 그렇게 되었더라.
그래 가지고 이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가 일주일을 고대로 가는데, 마침내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 이란 영찬(影讚)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는데.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애를 썼어도 공부가 일호(一毫) 진취(進趣)가 없었느냐?’
그 원인을 캐 보니까, 다른 데에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정상(疑情上)에서 공부를 짓지 아니한 데 있더라. 화두만을 자꾸 거각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공부가 잘 안 된다', '의심이 잘 안 든다' 많은 수행승(修行僧)들이 이 년, 삼 년 내지 십 년을 선방으로 다니면서 공부를 해도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못하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가끔 "어떻게 하면 의정이 돈발하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다정한 도반(道伴)이 무상(無常)하게 죽은 것을 보고, 그 도반이 죽어서 사십구재(四十九齋)날 김응애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들어오셔서 그 용맹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하셨습니다마는.
그러한 특별한 발심(發心) 기연(機緣)이 있거나, 스스로 그렇지 못하면 이 고봉 스님의 경우와 같이 되고 안 되고 할 것도 따지지 말고, 아주 죽기로 맹서(盟誓)를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1년 2년 3년, 이렇게 피나는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공부가 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모기가 마치 쇠로 된 소에 입부리를 박듯이—모기가, 그 약하디 약한 모기가 어떻게 쇠로 지어 붓어진 소 몸에다가 그 입부리를 박은들 들어갈... 상식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들어갈 것이다, 안 들어갈 거다'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몸뚱이 채 쇠로 된 소 몸에다 뚫고 들어가는 것이여. 입부리와 자기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거나 말거나,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한 것을 전혀 따지지 아니하고 몸뚱이 채 아주 육탄(肉彈)으로 소를 향해서 몸을 던진다 이 말인데.

이러한 대용맹심, 조실 스님께서도 도반의 죽음으로 해서 무상함을 깨달라서 발심을 하셔 가지고 대중의 사분정진에 구애(拘礙) 받지 아니하고,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하나 깔아 놓고 거기서 앉아서 정진을 하다가 졸으면 또 포행(布行)을 하고 또 졸음이 나가면 정진을 하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이 모여서 방(榜)을 짜서 정진을 하게 되니까 대중(大衆)의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되겠지만, 대중의 규칙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철저한 자기 규칙,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고봉 스님처럼 전강 조실 스님처럼 그러한 철저한 가행정진을 해서 기어코 이번 철에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망회타귀굴(忘懷墮鬼窟)이요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갱의제이병(更擬除二病)하면  미면야호정(未免野狐精)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망회(忘懷)에 타귀굴(墮鬼窟)이요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라.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생각을 자꾸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하면, 망회(忘懷)를 잊어버리면, 회포(懷抱)를 생각을 잊어버리면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에 떨어지고,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다. 뜻을 착(着)하면,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무슨 생각이 되었건, 벌써 뜻을 착(着)하면 잔나비의 뜻에 놀아난 것이다.

갱의제이병(更擬除二病)하면, 생각을 잊으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뜻을 부딪치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이 두 가지 병[二病]을 없애려고 뉘기 짜면,
미면야호정(未免野狐精)이다. 야호에 정, 야호정(野狐精), 야호(野狐)는 여우, 여우에 정(精)을 면틀 못할 것이다.


수임방원기(水任方圓器)허고  경수호한형(鏡隨胡漢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요이마거(直饒伊麽去)라도  유교환롱맹(猶較患聾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생각을 잊어버리면 귀신굴(鬼神窟)에 떨어지고, 뜻을 부딪히면, 착(着)하면 원숭이의 정(情)에 놀아나고, 이 두 가지 병(病)을 없애려고 하면 야호(野狐)의 정(精)을 면틀 못한다. 

그렇다면 물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따르듯이, 둥근 그릇에다 담으면 물도 둥그렇게 담아지고, 모난 그릇에다 담으면 물도 모나게 담아지고,
경수호환형(鏡隨胡漢形)이다. 거울은 검은 것이 거울 앞에 나타나면 검은 것이 거울 속에 비추고, 흰 것이 나타나면 흰 영상(影像)이 거울 속에 드러나듯이.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가져가면 어떻겠느냐.
유교환롱맹(猶較患聾盲)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마치 귀먹은 벙어리와 눈이 먼 장님에다가 비유할 수밖에는 없느니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아 가는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과연 어떻게 일용(日用)을 써 가겠는가, 수용(受用)을 해 갈 것인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19분1초~35분23초) (끝)





------------------(1)

*(게송)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게송)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 ; ‘백 년 삼만육천 일에 반복하는 놈이,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왔다갔다하는 이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다’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진영(眞影) 찬(讚) 끝에 있는 두 글귀.
[참고] 『고봉화상 선요(高峰和尙 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通仰山老和尙疑嗣書(其二八)—앙산 노화상께 사법(嗣法) 의심함을 풀어주는 글’ p168~169. p173~174 참고.
忽於次月十六夜夢中에  忽憶斷橋和尙이  室中所擧萬法歸一一歸何處話하니  自此疑情頓發하야  打成一片하야  直得東西不辨하며  寢食俱忘이라

어느덧 다음 달 16일 밤이었습니다. 꿈속에서 홀연히 단교화상이 방장실(方丈室)에서 일러 주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는 화두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로부터 의심이 단박 생겨 일념을 이루어서 동과 서를 잊었으며,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至第六日하야  辰巳間에  在廊下行이라가  見衆僧堂內出하고  不覺에  輥於隊中하야  至三塔閣上하야  諷經이라가  擡頭忽睹五祖演和尙의  眞讚末後兩句에 云  百年三萬六千朝  返覆元來是這漢하고  日前被老和尙의  所問拖死屍句子를  驀然打破하니  直得魂飛膽喪하야  絶後再甦이라  何啻如放下百二十斤擔子리잇고  乃是辛酉三月廿二少林忌日也러이다  其年이  恰廿四歲요

그러한지 6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 사이에 행랑(行廊) 아래서 거닐다가 대중 스님들이 승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대열에 섞여 삼탑각에 올라갔습니다. 경을 외우면서 머리를 들어 문득 오조법연 화상의 진찬(眞讚)의 끝 두 글귀에 “백년 3만 6천 일을 반복(返覆)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 한 것을 보자, 전에 스님께서 다그쳐 물으시던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라는 화두를 확연히 깨달으니 곧 혼이 나가고 담이 없어진 듯하고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듯하였습니다. 어찌 백이십 근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과 같을 뿐이었겠습니까.
그때가 바로 신유(辛酉)년 3월 22일 달마 대사 기일(忌日)이었고 제 나이 24세가 되었습니다.
*임술년(壬戌年) ; 1982년.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걸망(乞網 빌다·구걸하다 걸/그물·싸다 망) ; 망태기처럼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바랑). 또는 동냥할 때 매고 다니는 베낭(배낭背囊)을 말한다.
*불불이 ; 부랴부랴(매우 급하게 서두르는 모양).
*행각(行脚) ; 스님이 일정한 거처를 가지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의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곳을 편력하는 것. 운수(雲水)와 같은 의미.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사분정진(四分精進) ;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네 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씩 시간을 정해 정진하는 것.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산철(散철) ; 본철(本철 - 하안거, 동안거)가 아닌 시기.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소치(所致 것·바 소/이르다·도달하다 치) ; (주로 '~의 소치'의 구성으로 쓰여) 어떠한 까닭으로 일어난[致] 바[所].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
*진각국사(眞覺國師) 좌우명(座右銘) ;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353.
菩薩子 菩薩子 常自摩頭深有以 摩頭因得審思量 出家本意圖何事

보살님이여, 보살님이여. 항상 머리를 만지는 것 깊은 까닭이 있네. 머리를 만지며 깊이 생각하나니 '출가한 본의가 무엇이었던가?'

僧其相貌俗其心 可不慚天而愧地 麤行狂言任汝爲 鑊湯爐炭何廻避

겉모양은 승려로서 그 마음은 속심(俗心)이라면,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느냐. 거친 행동과 미친 소리를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쇳물이 끓는 솥에 삶기는 고통과 숯불에 달구어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을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느냐.

*좌우명(座右銘 자리 좌/오른쪽 우/새길 명) ; 늘 자리[座] 옆[右]에 새겨[銘]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
*출가(出家) : [산스크리트어] pravrajyā 또는 pravrajita '집[家]에서 나온다[出]'는 말이다. 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2~133. (가로판 p139)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납승(衲僧 옷을 꿰맴 납/중 승) ; 납자(衲子). 남이 버린 헌 옷이나 베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 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속인(俗人 속인·평범하다·대중적이다 속/사람 인) ; ①세속(世俗)의 사람[人]. ②불가(佛家)에서 스님이 아닌 일반 사람을 이르는 말.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확탕노탄(鑊湯爐炭) 지옥 ; 확탕(鑊湯)과 노탄(爐炭). 쇳물이 끓는 솥에 삶기는 고통과 숯불에 달구어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손색(遜色 못하다·뒤지다·뒤떨어지다 손/모양·상태 색) ; (주로 ‘없다’와  함께 쓰여) 다른 것과 비교해 보아서 못한 점.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선가귀감(禪家龜鑑) ;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될—선종(禪宗)을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선가귀감’이 있다.
*‘네 가지의 은혜(恩惠)가 중(重)한 것을 잊지 않았느냐? 사대(四大) 오온(五蘊)이 생각 생각이 일 초 일 초 늙어가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안 했느냐? 너의 목숨이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달려 있는 것을 잊지 안 했느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와 조사(祖師)를 만났느냐?’ ; 일용점검(日用點檢), 참선 수행인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스스로 점검해야 할 도리.
*일용점검(日用點檢) ; 참선 수행인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스스로 점검해야 할 도리.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8~72 참고.
大抵參禪者(대저참선자)는 還知四恩(환지사은)이 深厚麼(심후마)아, 대저 참선하는 이는 네 가지의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
還知*四大醜身(환지사대추신)이 念念衰朽麼(염염쇠후마)아,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더러운 이 몸[四大醜身]이 찰나 찰나 썩어 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還知人命(환지인명)이 在呼吸麼(재호흡마)아,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生來値遇佛祖麼(생래치우불조마)아, 살아오매 부처님이나 조사를 만나 뵈었는가?
及聞無上法(급문무상법)하고 生希有心麼(생희유심마)아, 위없는 법문을 듣고 희유한 마음을 냈는가?

不離僧堂(불리승당)하고 守節麼(수절마)아, 승당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不與隣單(불여인단)으로 雜話麼(잡화마)아, 곁에 있는 사람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지내지 않는가?
切忌鼓扇是非麼(절기고선시비마)아, 분주하게 시비를 일삼고 있지나 않는가?

話頭(화두)가 *十二時中(십이시중)에 明明不昧麼(명명불매마)아, 화두가 십이시(十二時) 중 어느 때나 또렷또렷 매(昧)하지 않는가?
對人接話時(대안접화시)에 無間斷麼(무간단마)아,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見聞覺知時(견문각지시)에 打成一片麼(타성일편마)아,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때에도 한 조각을 이루고[打成一片] 있는가?

返觀自己(반관자기)하야 捉敗佛祖麼(착패불조마)아, 자기의 본래면목을 보아서 불조의 허물을 잡아냈는가?
今生(금생)에 決定續佛慧命麼(결정속불혜명마)아, 금생에 결정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을 수 있겠는가?

起坐便宜時(기좌편의시)에 還思地獄苦麼(환사지옥고마)아, 앉고 눕고 편안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此一報身(차일보신)이 定脫輪㢠麼(정탈윤회마)아, 이 육신으로 반드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當*八風境(당팔풍경)하야 心不動麼(심부동마)아,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 불어올 때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此是參禪人(차시참선인)의 日用中點檢底道理(일용중점검저도리)니 古人云(고인운), 此身不向今生度(차신불향금생도)하면 更待何生度此身(갱대하생도차신)고 하시니라,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니,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다시 언제 건질 것인가!’ 하시니라.

〇주해(註解)와 평(評)
四恩者(사은자)는 父母君師施主恩也(부모군사시주은야)요 四大醜身者(사대추신자)는 父之精一滴(부지정일적)과 母之血一滴者(모지혈일적자)니 水大之濕也(수대지습야)요 精爲骨(정위골)이요 血爲皮者(혈위피자)는 地大之堅也(지대지견야)요 精血一塊不腐不爛者(정혈일괴불부불란자)는 火大之暖也(화대지난야)요 鼻孔先成(비공선성)하야 通出入息者(통출입식자)는 風大之動也(풍대지동야)라 阿難曰(아난왈), 欲氣麁濁(욕기추탁)하야 腥臊交遘(성조교구)라 하시니 此所以醜身也(차소이추신야)라

네 가지 은혜란 부모, 임금, 스승, 시주의 은혜요,  네 가지로 된 더러운 몸[四大醜身]이란 아버지의 정수[精]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血] 한 방울이니, 물의 젖은 기운[水大之濕]이요, 정수는 뼈[骨]가 되고 피가 가죽[皮]이 된 것은 땅의 단단한 기운[地大之堅]이며, 정기[精]와 피[血]의 한 덩이가 썩지 않고 녹아버리지도 않는 것은 불의 더운 기운[火大之暖]이요, 콧구멍이 먼저 뚫려 숨이 통하는 것은 바람의 움직임[風大之動]이다. 아난존자가 말하기를 ‘정욕이 거칠고 흐려서 더럽고 비린 것이 어울려 뭉쳐진다’ 하시니 더러운 몸[醜身]이라 부른 것이다.

念念衰朽者(염염쇠후자)는 頭上光陰(두상광음)이 剎那不停(찰라부정)하니 面自皺而髪自白(면자추이발자백)이라 如云(여운), 今旣不如昔(금기불여석)이요 後當不如今(후당불여금)이니 此無常之體也(차무상지체야)라 然(연)이나 無常之鬼(무상지귀)가 以殺爲戱(이살위희)하니 實念念可畏也(실념념가외야)라 呼者(호자)는 出息之火也(출식지화야)요 吸者(흡자)는 入息之風也(입식지풍야)라 人命寄托(인명기탁)이 只在出入息也(지재출입식야)라

‘생각 생각 썩어 간다’는 것은 세월이 잠시도 쉬지 않아, 얼굴은 저절로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도 저절로 희어가니, 옛말에 「지금 이미 옛 모습 아니네, 뒷날에 어찌 지금 같을까」 한 바와 같이 과연 덧없는 몸이 아닌가! 덧없는 귀신[無常之鬼]이란 죽이는 것으로 놀이를 삼으므로, 참으로 생각 생각이 무서울 뿐이다. 날숨[呼]은 불 기운이요 들숨[吸]은 바람 기운이라, 사람의 목숨은 오로지 들이쉬고 내쉬는 한숨에 달린 것이다.

八風者(팔풍자)는 順逆二境也(순역이경야)요 地獄苦者(지옥고자)는 人間六十*劫(인간육십겁)이 *泥犂一晝夜(니려일주야)니 鑊湯爐炭(확탕노탄)과 釼樹刀山之苦(검수도산지고)를 口不可形言也(구불가형언야)라 人身難得(인신난득)이 甚於海中之鍼故(심어해중지침고)로 於此(어차)에 愍而警之(민이경지)하노라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란 대체로 마음에 맞는[順] 것과 거슬리는[逆] 두 가지 경계요, 지옥의 고통이란 인간의 60겁(劫)이 지옥의 하루가 되는데, 쇳물이 끓고 숯불이 튀고 칼산과 창숲에 끌려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란, 마치 바다에 떨어진 바늘을 찾기보다도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어 일깨우노라.

評曰
上來法語(상래법어)는 如人飮水(여인음수)에 冷暖自知(냉난자지)라 聰明(총명)이 不能敵業(불능적업)이요 *乾慧(간혜)가 未免苦輪(미면고륜)이니 各須察念(각수찰념)하야 勿以自謾(물이자만)이어다

평해 가로되(評曰),
위에 말한 법문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고 더운 것은 제 스스로 알 뿐이므로, 총명(聰明)이 능히 업(業)의 힘을 막지 못하고, 마른 지혜[乾慧]가 고(苦)의 윤회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각자 살피고 생각하여 스스로 속지 말지어다.

〇譯註(역주)
①사대색신(四大色身) : 중국에서 금(金) • 목(木) • 수(水) • 화(火) • 토 (土)의 오행(五行)을 말하듯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의 사대(四大)로써 자연계(自然界)의 온갖 것에 대한 구성요소(構成要素)로 말하였다。
②십이시(十二時) : 하루 24시간을 말함。지금 쓰고 있는 이십사시(二十四時)를 예전에는 십이시(十二時)로 썼다。
③팔풍(八風) :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는 여덟 가지 현상을 말한다。내 뜻에 맞고(利), 내 뜻에 어기는 것(衰), 나 안 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것(譽), 나 안 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것(毀), 면전에서 찬미하는 것(稱),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譏),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苦),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樂) 등이다。
④겁(劫) : [범]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인데, 자세한 숫자는 여러 글에 일정하게 쓰이지 않았으나, 한 세계가 생겼다가 아주 없어지는 동안을 대겁(大劫)이라 하며, 그 사이가 팔십 소겁(小劫)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⑤니려(泥犂•泥黎•泥梨) : 범어로써 지옥을 말함。그 뜻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기쁘고 즐거운 것이 도무지 없다는 뜻。십계(十界) 중 가장 하열한 곳。무간 아비지옥。
⑥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乾 = 하늘 건, 마를 간)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오온(五蘊) : 온(蘊)은 무더기 • 모임 • 집합 • 더미를 뜻함.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①색온(色蘊) : 몸이라는 무더기. 몸의 감각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이나 즐거움등,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 • 관념의 무더기.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 • 충동 • 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
*‘너의 목숨이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달려 있는 것을 잊지 안 했느냐?’ ;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옛날에 중국에 고봉선사(高峰禪師), 『선요(禪要)』 법문을 하신 그 고봉선사께서도 처음에 출가해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參禪)을 하는데’ ; 
[참고] 고봉 스님께서 자신의 수행에 대해 하신 법문.
① 『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앙산 노화상께 사법(嗣法) 의심함을 풀어주는 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② 『선요禪要』 2. 시중(示衆).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포단(蒲團 부들 포/둥글 단) ; ①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方席). ②부들풀로 만든 둥근 방석. 근래에는 이 포단 대신 '좌복(坐服)'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진취(進趣 나아가다·오르다 진/달리다·향하다·재촉하다 취) ; (정진해) 나아가다.
*적공(積功 쌓다·많다 적/공로·일·업적 공) ; ①공(功)을 쌓음[積]. ②어떤 일에 많은 힘을 들이며 애를 씀.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점철(點綴 점 점/엮다·잇다·연결하다·꿰매다 철) ; ①흐트러진 여러 점이 서로 이어짐. 또는 그것들을 서로 이음. ②관련이 있는 상황이나 사실 따위가 서로 이어짐. 또는 그것들을 서로 이음.
*달마대사(達摩大師) : [산스크리트어]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기일(忌日 꺼리다·기일忌日 기/날 일) ; ①해마다 돌아오는 제삿날. ②불길(不吉)하다 하여 꺼리는 날.
*영각(影閣 그림자·초상肖像 영/집 각) ; 고승(高僧)의 초상(肖像)을 모신 전각(殿閣).
*오조 법연(五祖法演) : (? – 1104) 속성은 등(鄧)씨. 사천성 면주부(綿州府) 파서(巴西)에서 났다. 35세에 출가하여, 처음엔 강당에서 <백법(百法)> <유식론(唯識論)> 같은 것을 공부하였다.

뒤에 백운 수단(白雲守端)선사의 회상에 가서 있을 때,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 화상의 「마니주 화두」에 대하여 묻는데, 백운선사가 크게 꾸짖는 것을 듣고 곧 깨치어 온 몸에 땀을 흘리면서 아래와 같은 게송을 지어 바쳤다.

 

『저 산 밑에 한뙈기 묵은 밭, 왜 즐기노 노인에게 물었더니, 몇 번 팔고 또 산건, 대숲과 소나무에 맑은 바람 온다고(山前一片閑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隣松竹引淸風)』 이에 백운선사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을 이어서 서주(舒州) 사면산(四面山)에서 출세하였다.

다시 백운산, 그 다음에는 태평산(太平山), 마지막으로 기주(蘄州) 오조산 동선사(五祖山東禪寺)에서 크게 교화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불안 청원(佛眼清遠) • 태평 혜근(太平慧懃) • 원오 극근(圜悟克勤)은 오조 문하의 세 부처라고 하였다.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에 80여 세로써 입적하였다.

 

마니주(摩尼珠) 화두란, 사조(師祖)라 하는 이가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에 있는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의 귀절을 끌어다가 남전에게 묻기를 『마니주를 세상에서 모르는데, 여래장 속에서 찾아 냈구나 하였으니, 어떤 것이 여래장이오니까?』 남전이 대답하기를 『내가 너하고 같이 다니는 것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은?』

『그도 또한 그것이지』

 

『마니주는 어떤 것이오니까?』

『가거라! 네가 내 말을 모른다』 하는 데서 사조가 깨쳤다.


*진영(眞影) ; 주로 얼굴을 그린 초상화(肖像畫)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 ‘백 년 삼만육천 일에 반복하는 놈이,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왔다갔다하는 이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다’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진영(眞影) 찬(讚) 끝에 있는 두 글귀.

 

[참고] 『고봉화상 선요(高峰和尙 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通仰山老和尙疑嗣書(其二八)—앙산 노화상께 사법(嗣法) 의심함을 풀어주는 글’ p168~169. p173~174 참고.

忽於次月十六夜夢中에  忽憶斷橋和尙이  室中所擧萬法歸一一歸何處話하니  自此疑情頓發하야  打成一片하야  直得東西不辨하며  寢食俱忘이라

 

어느덧 다음 달 16일 밤이었습니다. 꿈속에서 홀연히 단교화상이 방장실(方丈室)에서 일러 주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는 화두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로부터 의심이 단박 생겨 일념을 이루어서 동과 서를 잊었으며,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至第六日하야  辰巳間에  在廊下行이라가  見衆僧堂內出하고  不覺에  輥於隊中하야  至三塔閣上하야  諷經이라가  擡頭忽睹五祖演和尙의  眞讚末後兩句에 云  百年三萬六千朝  返覆元來是這漢하고  日前被老和尙의  所問拖死屍句子를  驀然打破하니  直得魂飛膽喪하야  絶後再甦이라  何啻如放下百二十斤擔子리잇고  乃是辛酉三月廿二少林忌日也러이다  其年이  恰廿四歲요

 

그러한지 6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 사이에 행랑(行廊) 아래서 거닐다가 대중 스님들이 승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대열에 섞여 삼탑각에 올라갔습니다. 경을 외우면서 머리를 들어 문득 오조법연 화상의 진찬(眞讚)의 끝 두 글귀에 “백년 3만 6천 일을 반복(返覆)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 한 것을 보자, 전에 스님께서 다그쳐 물으시던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라는 화두를 확연히 깨달으니 곧 혼이 나가고 담이 없어진 듯하고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듯하였습니다. 어찌 백이십 근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과 같을 뿐이었겠습니까.

그때가 바로 신유(辛酉)년 3월 22일 달마 대사 기일(忌日)이었고 제 나이 24세가 되었습니다.

*영찬(影讚) ;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보고 찬양하여 지은 글.





------------------(2)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云 老僧在靑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전등록(傳燈錄)』 제10권. 조주선사.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벽암록(碧巖錄)』 제45칙.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일호(一毫) ; '한 가닥의 털'이라는 뜻으로 극히 작은 정도를 이르는 말.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다정한 도반(道伴)이 무상(無常)하게 죽은 것을 보고, 그 도반이 죽어서 사십구재(四十九齋)날 김응애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들어오셔서 그 용맹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하셨습니다마는’ ; 

 


[참고] 전강선사(No.002)—전강선사 일대기 제1호(경술1970년 11월 20일.음)(19분10초)
내가 참 처음에 참선문에 들어와서, 합천 해인사 들어가서 중이 되아 가지고서는 한 1년 동안, 그저 한 1년 동안 있었지. 사미(沙彌)로 한 1년 동안 있는데. 나허고, 김봉윤이허고, 이삼릉이허고, 행자(行者)가 서인디. 봉윤이란 아이가 참, 사람이―사미가 서이 들어와서 공부, 어른 시봉질을 허고 있으되―제일 착허고 얌전허고 글도 제일 잘허고, 속가에서 글허다 들어온 사람인디, 우등이여. 그 원청 학식이 있으니깐, 우등이여.

아, 그런 사람인데, 똑똑허고 잘난 사람은 아마 그런 말, 그 무슨 듣건댄 ‘염라국(閻羅國)에서도 쓸 사람을 데려간다’ 그런 말이 있드구만. 아이가 원청 잘나고, 글도 잘하고. 아, 그런 사람인데 같이 있다가, 같이 한 서너 달 살다가 뜻밖의 병이 들어 죽대, 이상스러운 병이 들어 죽었다 그 말이여.

나이 그때에 가가 무슨 뭐 그렇게 많지도 못허고, 나보담 그저 한 두어 살 더 먹었고. 나는 그때에 열여섯 살 먹어서 들어왔는데, 열여덟 살이나 먹었을 것이여. 아, 인자 그때쯤 18세면은, 한 17세, 18세, 20세 이내에 다 장가를 들어야지, 20세 이내에 장가를 들지 못허면은 노총각이락 햐. 열아홉 살만 먹고 스무 살만 먹어서 장가들어도 노총각이락 햐.

법문(法門)이, 오늘 아침 법문이 이상스럽게 나온 법문이라, 그렇게 들으셔야지. 영가(靈駕) 법문인데, 영가 법문이라도 이런 법문이래야 되지. 지장경 법문이나 그런 무슨 교(敎) 법문이 아니여. 선(禪) 법문을 꼭 들으셔야 하지.

김군수. 반야행. 대법성. 대법성, 내가 진 이름이여, 인자 떡 보니까. 아, 이런 참. 이런 인연이 닥쳐온 것을 내가 참 오늘 아침에 무척 감상이 깊구만. 여기에 정각행 보살님도 내가 서울 와서 불명(佛名)을 드렸어. 인연 때문에 그런 거여. 그러더니 여기에 기가 맥힌 신도, 말로 헐 수 없는 지금 여그 중대한 참 인연이 있는 신도님이시여. 내가 뒤에 간단히 좀 말할 요량하고.

아, 그래 그 이상스런 병이 나. 인자 한 18세쯤 되았으니깐 그때 한참 장가들 때인디, 와서 중이 되아 가지고 있는데.
대구서 서도간이라고 허는… 시대, ‘현대 여성’, 그때 ‘현대 여성’이면은 그 참 드물어. 머리를 저 가르매를 타되 옆 가르매를 타고, 한복판으로 안 타고는―지금은 뭐 옆 가르매니, 뭔 가르매니 그거 뭐 동서남북으로 막 타도 상관없드구마는―옆 가르매를 터억 타 가지고는 머리를 탁 쪽지고. 그때는 뾰쪽구두가 참 드물 때여. 그 불란서 식으로 뾰쪽구두를 턱 해서 신고, 흰 치마를 입고, 그러고 척 들어오면은 이상스럽게 모도 볼 때거든. “아따! 여자가 저 히사시가미(챙머리)” 라고 이러고. 모도 손가락질허고, 뒤로 보고 앞으로 보고 이럴 때인디.

아, 서도간이라고 허는 여자가 척 들어와서 여름에 수양(修養)을 허는디. 아, 그 수양허는 그 신여성(新女性), 서도간이라는 여성이 대구서 와 가지고는 서로 피차간 그 몇 번 이렇게 대하고, 사람이 잘나고 똑똑허니깐, 장가들만 해서 열칠팔 살 되아 놓으니깐, 서로 인자 어떻게 그 장경각 구경도 시켜 주고, 큰 법당 구경도 시켜 주고, 어떻게 이렇게 어떻게 지내다가는 즈그끼리 그 연애가 걸렸든가, 원 그 속으로 어쨌든가는 몰라도.
서도간이가 그러면 그 그렇게 인자 합천 해인사 들어와서 수양헐 동안에 그 어디 이리저리 구경도 시켜 주고 어쩌고 서로 상대허고 몇 번 이러다가는, 좀 말이든지 무엇이든지 정들게 했고 어떻게 했든지 그건 알 수가 없지마는.

아, 이 봉윤이라고 허는 사미, 그 사람이 서도간이 자는 방에 가만히 몰리 저녁에 들어가서 그 서도간이 자는 방, 이불을 딱 덮고 누워 잔다. 서도간이는 밤에 놀러 어디 간 사이에. 아, 서도간이가 잘 때 밤에 이렇게 척 들어오니깐 이불 속에 무엇이 있거든.
아! 깜짝 놀라서 그만 “아이고메!” 허고 고함을 질러 버렸단 말이여. 아, 그러니께 그만 사중(寺中)에서 모도 그만 놀래 가지고 이거 웬 일인가 싶어 가지고 들어와 보니께, 그 봉윤이라는 사미승이 그 속에 따악 누워서 있거든.
아, 그래서사 인자 그 서도간이도 그저 ‘그 사람인갑다. 봉윤이, 아는 사람이로구나’ 그렇게 알아 번지고서는. 그러나저러나 무슨 그러헌 무슨 아무 일도 없는데 아, 그런 사람이 와서 그렇게 누웠으니깐 그저 가슴만 두근거리고 그저 그러다 저러다 말았는데.

아, 그 뒤에 그만 봉윤이라는 아이가 병이 들었다 그 말이여. 병이 들었는데, 무슨 병이 들었냐 하면은 미친병이 들었네!
그래 가지고는 헌다 소리가 “둔다, 둔다, 둔다, 둔다, 둔다, 둔다” 그런 소리여. 그러면서 그만 “솔잎상투, 솔잎상투” 그놈의 솔잎상투는 왜 그렇게 부르는고 “솔잎상투, 솔잎상투” 하면서, 아 그만 미쳐 가지고는 나중에는 헐수할수없어, 미쳐서 뛰어싸서. 그릇, 장꼬방(장독)도 때려 부수고, 뭣을 막 드리 뚜드러 부수게 되아서 그래서 갖다가 그만 묶어서, 뒤로 딱 묶어서 손질을 못허게 해 가지고는 그래 놓았다 그 말이여. 뭐, 가만 일시라도 놔둘 수가 있어야지.

아, 그 지경 되았는디, 서도간이란 여자 따문에 미쳤다고 해서 서도간이한테다 그런 말을 해 봤던들 아! 서도간이는 신여성이라도 그때 당시의 신여성, 유명헌 신여성인데, 아 어디 그 여성이 그렇게 쉽게 무슨 뭐 산중의 중, 사미중허고 몸을 섞어서 내외간(內外間) 될 리도 만무허고, 그런 사이에 뭔 말을 했자, 발써 그 미쳐 버렸는디 어떻게 헐 재간도 없고.

그래 가지고 서도간이는 대구로 나가 버린 뒤에 이 아이는 그만, 그렇게 그만 미쳐 가지고는 훌훌 뛰면서 그 야단을 쳐서, 꽉 묶어 놓고는 그만 뭐 치료를 해봐도 안되고 침을 놓아 봐도 안되고, 별별 짓을 다 해봐도 안되았습니다. 그러다가 죽었제. 별 수가 없제. 안 죽을래야 안 죽을 수도 없제. 놓아 내놓을 수도 없고, 끌러 놓을 수도 없고. 그건 죽기로 마련이라.

지둥(기둥) 나무에다 매 놓으면은 지둥 나무는 뭐, 큰 지둥 나무니 어쩔 수 없으니까, 찬바람에 매 놓으면은 어떻게 그 손발을 매 놨으니 뗄 수도 끊을 수도 없고는, 고함만 지르고! 나중에는 죽을 때 얼굴을 본즉 그 얼굴이 기가 맥히지! 세상에, 볼 수가 없어! 아, 유혈(流血)도 모도 그대로 맺혀져 나와서 모도 밖으로 핑겨서 기가 맥혀! 같이 그 참, 사미로 있다가 그렇게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죽어서, 갖다가 그 합천 해인사에는 허덕이 평전(平田)을 거쳐 건너 들어가서 말정이라고 올라가는 그 산꼴짜구니에다가서 화장(火葬)을 허는디, 화장터가 거긴디, 화장을 다 해 가지고는 태와 버린 연기가, 화장터 그 송장 타는 연기가 빙빙 돌아. 그 뭉테기로 돌아 가지고 공중에 가서 흩어지들 않고 아, 이놈이 그만 얼마 동안을 배회를 혀.
그렇게 화장해 버린 뒤에는 그 인자 그런 불쌍허게 어린아이가 죽었으니까 초재(初齋)를 지낸다고, 선왕(善往)인가 무슨 재(齋)인가 재를 지내는디, 하여간 즈그 부모한테 기별했더니 부모가 와서 그 통곡을 허고 우는 거…

그래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허시는데, 그때 어떤 어른이 법문을 허셨든고 하니 김응해 스님께서 법문을 허신다. 법문을 허시는데, 게송이여.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신일실기시환(人身一失幾時還)이면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도를 닦을라매, 수행은 도(道)거든. 도를 닦을라매 머리터럭 희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머리 벌써 희기 시작허면 늙는 거 아닌가. 머리터럭 희기를 기다리지 말어라. 하나씩 둘씩 흰다 그 말이여.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다. 쑥대 속에 새 무덤이는 소년 무덤을 했느니라. 쑥대 우북헌 데 가 봐라. 거, 어린것 죽은 거 모도 묻은 애장이다.

인신일실(人身一失)인디 기시환(幾時還)고? 사람의 몸뚱이 한번 잃어버리면―받기는 얻어 나왔지. 이 몸 얻어 나왔으니까 쉬운 것 같지. 무척 어려운 것이다. 그 받은 몸뚱이 잃어버리면 언제 돌아올 것이냐? 언제 다시 받을 것이냐?
지옥시장(地獄時長)이다 기등한(豈等閑)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 목숨 내번지면은 가는 곳이 삼악도(三惡途)니라. 삼악도는 어디를 삼악도라고 하나? 지옥이요, 아귀요, 축생이다. 지옥 악도에 가는 법이니라.

이놈 몸뚱이 얻어 가지고는 복 짓는 것이 그렇게 없어. 그렇게도 복 짓기가 어려와. 전부 죄밖에는 짓는 것이 없드란 말이여. 다행히도 어떻게 이 몸뚱이 얻어 가지고 도문(道門)에 들어와서 도학자(道學者)가 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쌀에 뉘니라. 뉘! 기가 맥히다!

그런 가운데에도 이렇게 불전(佛前)에다가, 부처님 정법문중에다가 인연을 턱 걸어 이렇게 영가(靈駕)를 모셔 놓고 이렇게 등촉(燈燭) 장엄 속에서 이렇게 도 닦는, 도만 닦는 도학자의 회상(會上)에, 다시 말허면은 그 참, 선지식(善知識) 회상에, 거다가서 부모라도 형제라도 이렇게 어떤 분이라 헐지라도 그 천도(薦度)를 모셔 드려. 세상에 이러헌 공덕, 이러헌 대복, 해탈복은 천하에 없는 법이여.
헌디, 어디 그렇게 되나? 그만 그대로 소년 몸뚱이 잃어버리면은 가는 길이 악도(惡道)니라. 악도만 갔지―누가 거다가서 불법이 무엇인지, 복이 무엇인지―죄만 짓고 죄만 가지고 뿐이제, 뭐가 있어.

아, 이 삼일 선왕재 법문에 응해 스님이 이 법문을 척 허시는디, 내 법문은 뭐 아무것도 아니여. 그 어른은 지식이 훌륭헌 어른인데, 올라가서 참 그 어른도 그때 나이가 칠십은 다 못 되았어도 그래도 근 칠십 된 어른이 설법을 떠억 그 봉윤이 어린아 목숨 잃어버린 데 대해서 이 게송을 해 주는데 발심(發心)이 되아 버렸습니다. 내가 거그서 발심을 했어. 그 게송 하나 읊어 주는데 발심을 했어.

해 놓고는 그 대문, 그다음 한참 내려오다가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까지, 일찍이 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그 진리 법문을 척! 해 주시는데, 내가 법문을 듣고 ‘대체 남[生]도 없고 멸(滅)함도 없다면 역사가 없는 낸디, 역사가 없는 내가 나를 그렇게도 유래(留來)로 깨달지 못허고 와? 깨달지 못허고 이때까장 와? 금생까장 왔어? 내가 금생에 똑! 찾지 못허고 깨달지 못허고 그대로 내가 목숨을 잃어버려?’(5분27초~24분37초)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모기가 마치 쇠로 된 소에 입부리를 박듯이’ 화신투입(和身透入).
[참고 ❶]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0~112 참고.
若論參禪之要 不可執蒲團爲工夫 墮於昏沈散亂中 落在輕安寂靜裏 總皆不覺不知 非唯虛喪光陰 難消施主供養 一朝眼光落地之時 畢竟將何所靠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山僧昔年在衆 除二時粥飯 不曾上蒲團 只是從朝至暮 東行西行 步步不離 心心無間 如是經及三載 曾無一念懈怠心 一日驀然踏著自家底 元來寸步不曾移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昏沈掉擧 喜怒哀樂 卽是眞如佛性 智慧解脫 只緣不遇斯人 醍醐上味 飜成毒藥 靈利漢 假饒直下知非 全身擔荷 正好朝打三千 暮打八百 何故 豈不見道 知之一字 衆禍之門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참고 ❷]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0~61 (가로판 p62~63)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嘴不得處에  棄命一攅하야  和身透入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들듯이, 다시 여하약하를 묻지 말고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 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구애(拘礙 잡다·거리끼다 구/거리끼다·장애가 되다 애) ; 거리끼거나 얽매임.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용상(龍象)은 발심해서 불도(佛道)를 닦는 훌륭한 수행자를 용(龍)과 코끼리[象]에 비유하여 말함. 방(榜, 牓)은 대중에게 알리는 게시판.
*자가철주(自家鐵柱) ; 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을 쇠기둥[鐵柱]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이, 움직임 없이 지켜 나감을 이르는 말.
*(게송) ‘망회타귀굴(忘懷墮鬼窟)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 갱의제이병(更擬除二病) 미면야호정(未免野狐精) 수임방원기(水任方圓器) 경수호한형(鏡隨胡漢形) 직요이마거(直饒伊麽去) 유교환롱맹(猶較患聾盲)’ ;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하권 (한국불교전서) 「담령상인구육잠(湛靈上人求六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서 '의(意)' 게송.
[참고]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김달진 역주 | 세계사) 「담령상인(湛靈上人)이 육잠(六箴)을 구하다」 에서 '뜻' p334.

*회포(懷抱 품을 회/안을 포) ;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情).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 ; '시커먼 산아래[黑山下] 귀신(鬼神)이 사는 굴속[窟裏]'
수행자가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고요한 것만 취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혼혼(昏昏)한 경계에 취해서 묵조(默照)나 정식분별(情識分別)에 잠겨 있는 상태를 비유한 말.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8~170. (가로판 p161~162)
做工夫(주공부)호대 不可避喧向寂(불가피훤향적)하야 瞑目合眼(명목합안)하고 坐在鬼窟裏作活計(좌재귀굴리작활계)니 古所謂(고소위) *黑山下坐死水浸(흑산하좌사수침)이라하니 齊得甚麼邊事(재득심마변사)리요 只要在境緣上做得去(지요재경연상주득거)하야사 始是得力處(시시득력처)니라

공부를 짓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하야 눈을 감고 귀신 굴 속에 앉아 살림살이를 하지 말지니, 고인이 말하기를 「흑산 밑에 앉아 썩은 물에 잠겼다」 하니 무슨 일을 이루리오?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 가야 비로소 이것이 힘을 얻는 곳이니라.

一句話頭(일구화두)를 頓起在眉睫上(돈기재미첩상)하야 行裏坐裏(행리좌리)와 着衣吃飯裏(착의흘반리)와 迎賓送客裏(영빈송객리)에 只要明這一句話頭落處(지요명자일구화두낙처)니 一朝洗面時(일조세면시)에 摸着鼻孔(모착비공)하야 原來太近(원래태근)이니라

한 귀절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고서 다닐 때와 앉을 때와 옷 입고 밥 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이 일구(一句) 화두의 낙처(落處)를 밝힐지니, 하루아침에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듯 원래로 너무 가까왔느니라.

*흑산(黑山) : 인도의 전설에 대철위산(大鐵圍山)과 소철위산 사이에 음양(陰陽)이 이르지 못하는 암흑처가 있으니 이곳을 흑산이라고 하며 이곳은 악귀(惡鬼)가 서식한다고 한다.
*착의(着意 붙다·나타나다 착/뜻·생각 의) ; ①어떤 일에 마음을 붙임. 또는 그 마음. ②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오름. ③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둠.
*정(精 정기精氣·정신·정령·도깨비 정) ; 정령(精靈). 애니미즘에서, 인간 이외의 생물과 무생물에 머무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참선객(參禪客)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