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精進) 수행'에 해당되는 글 89건

  1. 2021.11.27 §((233))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한 과제 / 간화선(看話禪) / 묘관(妙觀) / 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수마(睡魔) / 생력(省力)이 득력(得力).
  2. 2021.10.18 §((466)) 어떤 경계에도 집착 말고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해야 /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 구경각(究竟覺)이라야 / 처옥자쇄(妻獄子鎖).
  3. 2021.08.16 §((151)) 『논어』 첫머리에 대한 법문 /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 삼보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
  4. 2021.08.10 §((세등51)) (게송)군자하산지~ /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해 나가야 /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묵언이 되야 / (게송)거년별아여산정~.
  5. 2021.08.01 §((301))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 (게송)운변천첩장~.
  6. 2021.07.24 §((292)) (게송)한서상경방대광~ / 당인(當人)의 신심과 마음가짐에 따라 살아계신 불보살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 / 한 생각 단속하면 선방이 된다.
  7. 2021.07.21 §((217))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일대사인연 / 생사 문제를 당적하려면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게송)차신성고취~ / (게송) 천고무인문~.
  8. 2021.07.11 §((242)) 자녀 교육, 지혜로운 방편 / 불교의 포교 / 불교의 목적은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9. 2021.07.03 §((245)) 공부는 '깊은 우물 속에 눈을 져다 부어 우물을 메우려듯 해라' / 항아리 속에 자라,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다 / (게송)남북동서무정착~.
  10. 2021.06.08 §((325)) (게송)거심진속윤회업~ /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 입태(入胎) 출태(出胎) / 임종(臨終)이 대단히 중요 / 고통은 좋은 채찍 / (게송)기래긱반냉첨의~.
정진(精進) 수행2021. 11. 27. 03:59

§((233))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 / 어떠한 근기,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 /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정진)

 

 

(1) 약 16분.

 

(2) 약 16분.

 


(1)-----------------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41분39초~57분19초)




(2)----------------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7분21초~1시간1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10. 18. 02:39

§((466))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안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말고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해야.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구경의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 정진하는 데 몸을 단정히 갖되 힘을 주지 마라 / 화두를 안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결혼은 '처옥자쇄(妻獄子鎖),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 자기가 지어 논 빚은 갚으면서 참선을 해야 / 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하는 그런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그런 경계는 스스로 그것을 버려 버리고,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마음으로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한다.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가 집착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뭣고?’만 해 가야 / 영가 천도를 인연이 닿으면은 해 주시는 것도 좋은 일.

**송담스님(No.466)—1992년 동안거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 (용466) (정진,수행)

 

 

(1) 약 20분.

 

 

(2) 약 22분.

 


(1)------------------

큰 추위는 없었던 걸로 생각이 됩니다. 겨울은 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좋다고 모다 그렇게 생각되어 왔는데, 여기는 해변가가 되어서 해마다 겨울에는 강한 추운 바람이 불고 그래서 새벽에 모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 젓숫고 하는데 모다 노보살님들이 감기에도 많이 걸리시고 모다 그랬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겨울이 그렇게 춥지 않은 것이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어피차 편안하고 자유롭고 따뜻한 가정을 떠나서 이렇게 선원에 오셔서 정진하시게 되면, 아무리 고단하고 춥고 힘이 들어도 새벽에는 일어나야 하고 또 잠자리가 편틀 못하고, 눕고 싶을 때 눕지 못하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여러 가지 참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 와서 서로 다투어서 방부(房付)를 드리고 또 심지어는 인원이 차서 방부를 못 드리고 또 울고 돌아가신 분도 많이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을 무릅쓰고 이렇게 정진할라고 하신 여러 신도님네들 또 거사님 보살님, 참 갸륵하고 그 고마움을 원장으로서는 참 가슴깊이 느끼는 바입니다.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진을 해 나가는 데 처음부터 흡족하게 그렇게 수월하게 그렇게 정진이 되어가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는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자기가 지어 놓은 업(業)이 있기 때문에, 그 업이 천차만별이어서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정진을 해도 육체적으로 오는 거, 정신적으로 오는 거, 그 나타나는 경계라고 할까 그런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보면 자기가 지은 업과 현재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생각들 그런 차이로 해서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입승(立繩) 스님이 적어 온 걸로 보면 사람 따라서 나타나는 경계가 여러 가지로 있는데,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안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그러한 경계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말씀을 했지마는 그런 경계는 집착(執着)을 하면은—환한 경계가 나타난다든지, 껌껌한 이불 속에서도 환히 머리카락이 다 보일 정도로 환하다든지, 머리가 시원하고 개운함을 느낀다든지, 미래 일이 나타난다든지, 꿈속에 뭘 느꼈다든지, 꿈속에 어떤 분이 나와서 뭐라고 일러줬다든지, 사람 몸을 보면 환히 오장육부가 다 보이고 어디가 병이 들었는지 그것도 다 알 수가 있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든지, 자기 몸이 풍선처럼 가벼움을 느꼈다든지,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에 집착하면 공부가 삐뚤어져 나가는 거고, 그런 것에 전혀 생각을 두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좋다 나쁘다’ 생각을 갖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둔 채 자꾸 바른 자세로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를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잡드리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 경계가 나타났으니 내가 이거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것에 대해서 밤낮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자랑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가 지금 공부가 상당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자랑을 하고 이런 것은 진실한 수행자에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보통 이러한 철저한 신심과 법문을 들은 사람이 아니면,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스스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여. 하도 신기하니까.
그러나 그런 법문(法門)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것에 하도 신기하고 이상하고 묘하고 그러니까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그런 법문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데에 혼탁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런 것에 집착하면 벌써 사견(邪見)에 떨어진 것이고, 공부가 삿된 대로 빠져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점쟁이 같은 거, 이상한 모다 신기(神氣)가 있는 그러한 존재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탁! 놔 버려야 하거든.


그리고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몸을 단정히 갖되 몸의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정히 앉되 손을 이렇게 수계(手契)를 하는데, 여기도 너무 엄지손에 힘을 준다든지, 또는 엄지손과 (엄지)손이 떨어진다든지 이렇게 비틀어진다든지, (엄지)손으로 이렇게 손장난을 한다든지 그래서는 안 되고, (양 엄지손을) 대되 전혀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

어떤 분은 힘을 꼭 줘야 화두가 잘된 것 같이 느껴진다는 그런 분도 있는데, 그러더라도 (힘을) 꽉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요. (힘을) 꽉 주면은 나중에는 몸 전체가 그리 힘이 주어지기 때문에 공부해 나가는 데 지장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우선 힘을 주면 된 것 같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기만 하고.
또 눈에다가 힘을 주고—간절히 의심을 할라고 하면은 미간(眉間)에 ‘내 천(川)’ 자가 쓰여질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거기다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힘을 주지 말고 또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단정하면서도 어깨에도 힘을 주지 말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또 미간에도 힘을 주지 말고. 힘을 어디다가 주었다 하면 정진해 나가는 데 장애 요소가 거기서 생길 수가 있다 그거거든.

그러면 단전(丹田)에다 힘을 준 것은 어떠냐?
단전은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약간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차츰차츰 홀쭉하게 하니까 거기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질 수가 있는데 그것도 너무 힘을 많이 주어서는 안 돼. 기분상으로만 가볍게 그렇게 하는 것이지, 너무 힘을 주어서는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걸 말씀을 드리고.


그 화두를—이 화두를 하니까 잘 안되어서 저 화두를 하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했다가 ‘무자(無字)’로 했다가 또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를 했다 이러는데, 안된다고 해서 화두를 자꾸 바꿔 쌓으면, 새로 바꾸면은 된 것 같다가 나중에 얼마 지내면은 옛날 것이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것을 들어보면 또 잘되고.
그래서 화두는 아무리 안되어도 한 화두를 가지고 자꾸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나중에 언젠가는 된 때가 오는 것이지, 안된다고 해서 또 바꾸고, 또 해 봐서 안된다고 또 바꾸고, 자꾸 바꿔 버릇하면은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 절대로 화두를 안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그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고.

이미 바꿔 가지고 현재 잘 되어간다면 그분은 그냥 그것으로 해 나가십시오. 그동안에 자꾸 바꾼 것은 대단히 잘못된 거지만, 이미 바꾼 지가 오래되어 가지고 그대로 쭉 잘 되어가면 그분은 고대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면 정진하다가, 쭉 해 나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닥쳤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여.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그것을 조심을 하시고.


공부를 하다 보면 확 트인 것처럼 시원하고 개운하고 그러한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시적인 경계니까 ‘이것이 좋으네 나쁘네’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요.
'좋다 나쁘다' 생각하지 말고, 확 트인 것처럼 느끼거나 뭐 성성하거나 적적하거나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런 데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데에 '좋냐 나쁘냐?' 자꾸 그걸 가지고 싱갱이를 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둬.

좋으면 좋은 대로, 시원하면 시원한 대로, 환하면 환한 대로, 껌껌하면 껌껌한 대로 그냥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아! 사람 건강도 소화가 잘되다 안되다, 뱃속이 거북하다 설사하다가 그렇지만, 그때그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거냐 말이여.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놔두고 살아가는 거지, 그것이 무슨 큰 괴변(怪變)이나 일어난 것처럼 무슨 큰 일로 취급을 하지 말고, 하다 보면 그런 것도 있으려니 하고 그냥 고대로 놔두고 여법하게 정진만 주욱 해 나가면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가끔 말씀을 드렸지마는, 어떠한 뭐 밥을 먹다가 한다든지, 차를 마시다가 한다든지, 목욕을 하다가 한다든지, 무슨 소리를 들은 찰나에 그냥 막힘이 확 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슨 시(詩)가 나오기도 하고, 다른 공안에 대해서 그냥 의심이 하나도 막히지를 않고 그런 것을 느끼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 해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그런데 정말 바로 깨달았는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냐, 안 얻었냐’ 하는 것은 자기 혼자로서는 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고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지 혼자로서는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없고.
또 아무한테나 물어봐 가지고 옳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그것도 참 정말 바른 지혜를 갖춘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아야지, 아무한테라도 가서 받아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데 공부하다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경계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인데, 구경의 경지에 이르르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견도 그러한 경계도 깨끗이 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거듭 말씀을 드린 것은 누구나 정진하다 보면 텅 빈 경계에 들어가기도 하고, 공안에 대해서 아무 의심도 다 없어져 버리고 너무너무 머리가 개운하고 그런 경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조사(祖師)와 같은 그런 경지가 아니라면, 스스로 ‘이것이 참 깨달음이 아니다’ 한 것을 스스로 그것을 버려 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합니다.(처음~18분28초)





(2)------------------

그리고 어떤 분은 항상 자기에 영가(靈駕)가 붙어 갖고 있는데, 절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영가는 거기서 떨어져서 절에서는 떨어져 버리고 또 절에서 일 다 보고 그러고 나가면은 딱! 또 들어붙고 그런다는 분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영가가 그렇게 붙고 떨어지고 하는 거.
또 항상 영가가 눈에 보여. 남 49재 하는 데도 가서 보면은 그 49재 하는 그 영가가 눈에 다 보인다 그 말이여. 생전시에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은 어떻게 생긴 것을 환히 다 알고, 그래 갖고 재자(齋者) 보고 ‘지금 오늘 49재 지낸 분이 얼굴이 이렇게 생겼고 무슨 옷을 입고 그랬냐’ 하면, ‘그렇다’고.
그런 것이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것은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특수한 사람에게는 영가가 보일 수도 있고 또 영가가 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道)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여.

영가라 하는 것은 내나 우리는 ‘몸뚱이가 있는 영가(靈駕)’고, 영가는 ‘몸이 없는 사람’이니까, 혹 지금 이 방에도 영가가 있을 수가 있고, 법당에도 법문할 때는 우주법계의 영가를 다 초청을 하니까 다 영가가 다 들어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 이 사바세계에 사는 우리 일반 사람에게는 그런 영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이죠. 보인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고 그런데.
영가는 사람이 죽어서 49재에 딴 데로 다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떠날 수도 있고, 백일에 떠날 수도 있고, 소상(小祥)에 떠날 수도 있고, 대상(大祥)을 지내고 떠날 수도 있고, 소상 · 대상 다 지내고도 떠나지 않고 자기집에서 그냥 또 그렇게 영가가 머물러 있는 수도 있고, 50년 내지 100년간도 안 떠나고 그 집에서 머물러 있는 수도 있다고 그럽니다마는.

참 이 영가는 나는 내 눈으로는 아직 영가를 보지를 못했고, ‘몸뚱이 있는 영가’는 많이 보지마는 ‘몸뚱이 없는 영가’는 내 눈에는 잘 안 보여요.

그래도 본인이 영가가 자기에게 보이고 자기 몸에 항상 붙어 있고, 꿈에도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모다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니, 그런 분은 내 생각에는 전생에 지은 업(業)에 따라서 또 금생에 와서 지은 업에 따라서 특수한 그런 체질이라고 할까, 특수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가가 보이고 나타나고 또 몸에 항상 따라다니고 하면은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고,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그런 분은 항상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하고 심성을 착하게 곱게 써야 하고 또 백중이라든지 법보재라든지 모다 그런 때는 항상 그런 영가들을 위해서 천도(薦度)를 잘 해 줘야 하고 그렇죠.

대부분 그런 분에게 또 그런 영가가 많이 따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우주법계에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런 참 외로운 영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도를 잘 해 주고, 또 그분한테 가까이 가야만 천도를 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될 경우 그런 분한테 인연 있는 영가가 따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 밥을 잘 준다’고 소문이 나면은 팔도(八道)의 모다 걸인들이 그 집을 찾아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영가 천도를 잘 해 주고 자꾸 그런 분에게는 그런 영가들이 꿈에 와서 현몽(現夢)을 대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천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까 힘닿는 대로 잘 천도를 해 주신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밥 없는 사람 밥을 주고, 옷 없는 사람 옷을 주고, 직장이 없는 사람 직장을 알선을 해 주고, 병든 사람을 병을 치료해 주고 그러면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와서 잘 봐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또 영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영가 천도를 그런 인연이 닿으면은 또 해 주시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또 어떤 분은 염라대왕이 자기를 끌고갈라고 하는 그런 것을 느낀다고 그러는데, 염라대왕이 일부러 와서 자기를 끌고 간가 어쩐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면, 끌려가기 싫어서 안 끌려간다면 그건 잘된 일이고, 그러나 언젠가는 가게 될 테니까 너무 그걸 미리서부터 걱정하실 것은 없고.
염라대왕이 끌고 갈라고 하거나,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使者)가 와서 끌고 갈라고 하거나, 참선한 사람은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딱 챙기시면 비명(非命)에 끌려가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꼭 가게 될 인연이 되면은 조금도 두려운 생각하지 말고 ‘이뭣고?’를 하면서 갈 때 되면 가는 것이지 뭐,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안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 가게 될 때는 가더라도 ‘이뭣고?’ 하는 마음으로 가면 그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리고 한 가지 가끔 내가 듣는 소린데, 본인은 아직 시집을 안 가고 나이가 삼십을 넘고 그래도 그냥 처녀로 부처님 불법을 믿고 이렇게 정진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본인이 꼭 안 갈라 한 것은 아닐런지도 모르고 또 좋은 인연이 있으면 갈라고 하는 생각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냥 이대로 보살로서 정진하다가 시절이 돌아오면은 출가해서 스님이 될려고 하는 생각도 있는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을 하고 그러는데, 자꾸 좌우에서 “시집을 안 가고 죽으면 몽달귀신이 되니까 시집을 가라”고 자꾸 권고를 하신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시집을 가라고 권고한 것은 절대로 나쁜 마음으로 그러신 것은 아니고, 그래도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것이 뭐 당연한 것이고, '시집가서 남편과 해로하고 자녀도 낳고 그래야 나중에 늙으면 외롭지 않고 그럴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그것도 때가 있으니까 좋은 인연 있을 때 가라고 권고한 것은 좋은 마음에서 하신 것이지 절대로 뭐 해코자해서 그러신 것은 아닐 테지마는.

억지로 팔자에 시집 갈 팔자를 타고났는데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갈라고 하는 생각은 있어도 적당한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사주팔자가 되었건, 전생에 지은 인연이 되었건 간에 그런 인연이 닿지 않아서 안 가게 되고, 또 불법에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불자(佛子)로서 참선을 하고, 별로 그렇게 큰 고통이나 불편이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자꾸 몽달귀신으로 협박을 하면서 자꾸 가라고 그러실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노처녀로 있다가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서 도를 잘 닦은다면은 그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여러분들 다 시집가서 결혼해 가지고 이렇게 50년, 60년, 70년 이렇게 살아보셔서 ‘정말 나는 결혼을 해서 참 행복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이 가운데는 계시겠지만, 겪어보시면 결혼 생활이라 하는 것이 아마 출가해서 도 닦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스님이 되라’고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본인이 결혼 안 하고 이렇게 출가할 수 있는 사람을 몽달귀신 얘기를 해 갖고 공포심을 느껴서 가기 싫은 시집을 억지로 가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공부하러 오신 이 마당에는 공부에 관한 공부 생각만 해야지 다른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고 그러니까, 절대로 그 자꾸 '시집가라, 시집가라'—막 좀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 좀 할라고 하면은—자꾸 그 '시집가라'고 그래 쌓으면 마음이 헷갈리거든. '내가 시집을 가야 옳은가? 안 가야 옳은가?' 그 소리가 듣기 싫으니까 한철 나왔다가 안 나와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혹 집안에 홀아비가 있어서 '참 저 여자하고 짝을 맞춰줬으면 참 좋겠다' 싶어서 자꾸 그러실 수도 있지 않은가 싶은데, 결혼은 참 '처옥자쇄(妻獄子鎖)' 라고, 인자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래서 '처옥자쇄(妻獄子鎖)'라 그러는데.
참, 결혼 생활은 여러분도 다 겪어보셨지마는 어쩔 수 없이 다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긴 했지만 결혼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습니까.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제가 보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힘든,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공부해 나가는 데에는 대보살(大菩薩)이 아니고서는 많은 지장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 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해야 하고.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 하면서 참선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이 드시겠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 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 보살님네들은 참 너무너무 갸륵하고 훌륭하고, 참 그렇다고 생각이 됩니다.


끝으로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그런 소견(所見)이나 경계(境界)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소식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 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아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참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그래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 버리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 보름 남았는데, 또 이틀 후에 정월 초하루가 돌아와서 또 차례(茶禮) 행사도 있고 어수선하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놓치지 알고 정진하시도록 당부를 드리고, 남은 보름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잘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또 제가 말씀을 안 드린 그런 내용에 어떤 당신 나름대로 느낀 바도 있을 것이고, 물어보고자 한 그런 점을 속으로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낱낱이 여기서 다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어떠한 경계, 어떠한 느낌, 어떠한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이 아닌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조사(祖師)의 경지가 아니면 그냥 스스로 딱! 치워 버리면 그만이여.
없었던 걸로 탁! 놔 버리고, 깨끗한 초학자의 마음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조금 어디 아프다고 해서 낱낱이 병원에 쫓아다니면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낫어야 하거든.

마을에서는 병원에 자주 간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데, 그 병원이라 한 것은 물론 호미로 막아야 할 때 병원에 안 갔다가 가래로 막게 되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스스로 집착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딱! 놔 버리고 화두만 들면 낱낱이 병원에 안 가도 돼어. 그것이 기다(그렇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 거기서부터 병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 요점만을 내가 말씀을 드리면 요점만을 잊지 않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어떠한 병도 스스로 고칠 수가 있는 것이여.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가 집착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심지어는 확철대오해 가지고도 ‘나는 깨달았다’ 하는 생각을 가져도 벌써 그것이 잘못인데, 깨닫지도 못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그걸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뭐 사람 몸뚱이가 환히 보이거나, 내일이나 모레가 어떻게 되고, 사람을 척 보면 전생에 무엇이다 하는 것도 안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그런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어, 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을 속으로 딱 간직하고, 그걸 자꾸 써먹고, 남에게 자랑하고, 자기가 무슨 도통이나 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런 데에서 병이 되고 결국은 사도(邪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안 떨어지려면 집착하지 않고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뭣고?’만 해 가면 그건 괜찮다 그 말이죠.

되었습니다.(18분29초~40분15초) (끝)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8. 16. 06:36

§((151)) 『논어(論語)』 첫머리에 대한 법문 /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정진,수행)

 

 

 

약 8분.

 

 


금년도 벌써 여름이 지나고 제방(諸方) 선방(禪房)에서 모다 참선을 하시고 해제를 한 뒤에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공자님께서 그 『논어(論語)』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안 해도 그것을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가 아니냐' 이런 말씀이 있는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한 말은 '글을 배워 가지고 때때로 익힌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 닦는 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가(佛家)에 말하면 화두(話頭)를 타고 참선(參禪)하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그것을 밤낮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그 공부를 해 나가면 이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정진을 알뜰히 해 가면 처음에는 아무 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공부가 되어 가는지 안되어 가는지 도대체 멍멍하니 그러지만, 자꾸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해서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질 때가 오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일여(一如)하게 들리게 되면 그 싱그럽고 편안하고 가볍고 혼침(昏沈)도 안 오고 망상(妄想)도 없이, 그 즐겁다고 할 것인가?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자동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법(法)에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배워서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이렇게 공자님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두 번째 가서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느냐'
그 말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라든지 또는 그동안에 막걸리 친구로 사귄 그런 친구가 찾아온 거, 무슨 동창생이 찾아오고 그러한 의미에 벗을 가리키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저 먼 데에서 그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정진을 하고 해제를, 우리 불가에서 같으면 해제를 하고 그 먼 데에서 그 도반을 찾어간다던지, 선배를 찾어간다던지,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와 같이 한 목적을 향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찾아오는 거.
선배가 되었던지, 후배가 되었던지, 또는 연갑(年甲)시 되었던지,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선지식(善知識)도 도반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부처님도 우리에 선우(善友)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먼 데로부터서 찾아오게 되면 또한 그것이 즐겁지 않느냐. 속가에 부모형제가 찾아온다던지, 무슨 자기와 그런 평소에 아는 사람이 찾아온 거, 그러한 것에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방에서건, 어느 토굴에서건 그 실다웁게 도를 닦고 그리고 해제(解制)하고서 찾어온다던지, 내가 찾아간다던지, 그러다가 만나게 될 때에 그 반갑고 기쁜 뜻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이 신유년 하안거를 마치고, 제방에서 여러 도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참 아무리 이 시국이 험난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서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모든 면에서 참 불안하고 그러한 때지만, 이 정법을 믿고 실천하는 우리 도반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이 자리는 정말 이 사바세계에 이루어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이라고 말해도 조끔도 어폐(語弊)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해가 저문 빈 절에 무릎을 안고 졸다가, 소슬히 부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뜰에 가득히 딩굴고 있다」 한 경허 스님의 그 게송을 음미해 보면,
앞으로 가을철이 다가왔습니다. 이 가을철에 지나간 여름 동안 못다 한 공부를 알뜰히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8분1초~15분4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8. 10. 11:49

§((세등51)) (게송)군자하산지~ / 출가한 우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없다 /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지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한다 / (게송)거년별아여산정~.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정진)

 

 

(1) 약 15분.

 

 

(2) 약 4분.

 


(1)------------------

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무~아미타불~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한디  추색입정괴(秋色入庭槐)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그대는 어느 산으로부터서 왔는가?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는 저 황악산으로부터서 왔느니라.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하니, 서로 만나서 한번 웃으니,
추색(秋色)이 입정괴(入庭槐)로구나. 가을빛이 뜰 앞에 괴목 나무에 왔구나. 괴목 나무에 들었구나.

해제를 하고 제방(諸方) 선원에서 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해서,
'어디에서 지난 여름을 지냈는가?'
'나는 아무데서 여름을 지냈다'

'정진은 지난 여름 동안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우리 선방에서는 이러이러히 지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많지만 피차가 서로 생각 생각이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고 속으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서, 그리고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인사를 나누는데, 구태여 입을 벌려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썩하니 물어보고 대답하고 할 것이 없어.
피차 생긋이 웃는 그 미소 속에 한없이 깊은 마음에서 인사가 오고가더라 그 말이여. 그리고 도량을 둘러보니 괴목 나무에 가을 소식이 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러한 게송입니다.


갑자년 하안거를 마치고 오늘 해제 법요일을 맞이해서 이 세등선원에서 지내는 대중과 또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서 몇몇 도반(道伴)과 그 반야선원에는 겨울에는 대중스님네를 모아서 정진을 하고, 여름에는 신도 보살님네들이 십여 명 모여서 금년 여름에 지냈다고 그럽니다.
그 대중도 모다 이 자리에 참석을 했고, 또 제방에 각 선원에서 정진을 한 비구니 선객 스님들도 거기서 해제를 마치고 오늘 이 자리에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해제를 하고, 각기 자기 선원에서 해제를 하고 도반들이 팔도에서 이렇게 모이니, 그 얼굴 얼굴에 신심과 환희심과 그리고 '기어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마치고야 말겠다'고 하는 그러한 의연한 결심이 그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역력하고, 생긋이 웃는 미소 속에는 지혜와 평화와 자비가 넘쳐흐르는 모습들을 보고 나는 너무너무 감격을 했습니다. 우리 도반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불법(佛法)은 결단코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온 세계가 싸움이 일어나 불바다가 되고, 설사 종단에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우리의 도반들이 밤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는 한에 있어서는, 불법은 결정코 끊어지지를 아니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부처님의 등불이 훨훨 타올라서 온 세계를 밝게 비추고 말 것입니다.


방금 전강 대선사(田岡大禪師)에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 그리고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出家)한 우리 도반들,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렸거니 무슨 애착이 있으며, 무슨 시비가 있으며, 무슨 걸거칠 것이 있겠습니까.
앉으나 서나, 눕거나 거닐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보냐.
밥이 질면 진 대로, 밥이 되면 된 대로, 찌개가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언제 밥이 되다 질다, 찌개가 짜다 싱겁다, 그러한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묵언(默言)을 일부러 하려고 해서 묵언을 하는 것이 아니여. 묵언패(默言牌)를 목에다가 써서 붙이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뭐 글씨를 써서 문답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심으로 정진을 하다 보니까 제절로 묵언이 되어버린다. 꼭 할말이 있으면 한마디하고, 누가 부르면 대답하고, 한마디 말 끝나 버리면 바로 묵언이여. 하루 종일 지내봤자 뭐 그리 할말이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하루에 한마디하기도 하고 또는 한마디 안 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마디 하기도 하고 세 마디 하기도 하나, 그 한마디 두 마디 한다고 해서 정진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여. 꼭 할말은 하되 쓸데없는 말을 안 하게 되니까, 일부러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에 일념으로 해 나가기 때문에 제절로 그것이 묵언이여. 이것이 진짜, 선객(禪客)이 해야 할 묵언인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20대에 출가하자마자 느낀 바가 있어서 10년을 묵언을 했지마는, 나는 근기(根機)가 약해서 할말을 하면서 그냥 고대로 묵언을 한 그러한 묵언을 하지 못하고, 할말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하고 완전히 벙어리처럼 묵언을 했는데, 묵언을 한 뒤에 가만히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지금도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그렇게 썩 훌륭한 묵언을 하지를 못했어.
진짜 훌륭한 묵언은 할말 있으면 한마디 탁! 하고, 딱! 끝나자마자 바로 묵언이여. 하루에 한마디 내지 반 마디 이런 정도, 그렇게 꼭 필요한 말이 없거든. 여기에 모인 대중들도 그러한 묵언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흔히 '소승(小僧)도 묵언을 하고 싶습니다. 묵언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이러한 말들을 가끔 와서 문의를 하는 선객들을 만났는데, 나는 그러한 형식적인 벙어리 흉내낸—속으로는 온갖 분별 다 하고 시비에 참견하면서 억지로 입만 딱 다물고 벙어리 흉내내는 그러한 묵언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진짜 묵언을 해라. 할말 한마디 두 마디는, 부득이해서 해야 할 한마디 두 마디는 하되 정말 화두에 일념,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어져 버리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져 버리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처음~15분9초)





(2)------------------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일송군초수빈(今日送君楚水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디  낙화제조우잔춘(落花啼鳥又殘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년송군초수빈(今年送君楚水濱)이로구나.
거년(去年)에는 우리가 저 여산 땅 꼭대기에서 여산에서 이별을 했더니, 금년에는 그대를 초수 물가에서 보내게 되는구나.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데,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유유(悠悠)해서 서로 말이 없는데, 꽃은 지며 새는 우는데, 여름이 다 가는구나.

오늘 해제를 하고 우리 도반들이 동서남북으로 헤어져 가는데 서로 묵묵히 말이 없어. 말이 없지만 다시 다음 어느 회상(會上)에서 만나게 될는지, 어느 곳에서 서로 또 다시 만나게 될는지 만날 그때까지 서로 건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자 하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에 인사가 오고갈 것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넉 달, 몸조심하고 이 결제 동안에 그 정진한 그 정진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산철에도 보다 더 마음을 가다듬고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하고 말을 맺고자 합니다.(57분37초~61분3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8. 1. 07:08

§((301))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 (게송)운변천첩장~.

**송담스님(No.301)—1986년(병인년) 하안거 결제 (용301) (정진,수행)

 

 

 

약 8분.

 

 


학자(學者)가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되, 활구(活句)—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알아들어 갈 것이 끊어져서, 그 공안(公案)을 마치 불덩어리와 같이 생각을 해.
큰 불덩어리는 가까이 가면은 내 몸이 순식간에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덩어리라 하는 것은, 큰 무서운 큰 불덩어리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가까이만 갔다 하면은 찰나간에 옷에 불이 붙고 얼굴이 확 타버릴 테니까.

그래서 이 공안 앞에는 무불법조착지처(無佛法措着之處)여. '부처다, 법이다' 그러한 소견(所見)을 거기다 갖다가 붙일 수가 없는 것이여.
다만 알 수 없는 큰 의심!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심이 어떻게 간절(懇切)하던지 하늘에 뻗질러.

이렇게 하루하루를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 나가면, 그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그렇게 간절하게 간절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떠억 현전(現前)하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境地)가 온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중단함이 없이 딴생각 내지 말고 계속해서 알뜰히 잘 단속을 해 나가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통 밑구녘 빠진 것처럼 의단을 타파하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구(求)하지 아니해도 일찰나(一刹那) 간에 확연(廓然) 터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그렇게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증거가 낱낱이 다 분명(分明)한 것이니, 조급한 생각을 먹지 말고, 두려운 지루한 생각도 먹지 말고, '공부가 잘된다, 못 된다' 이러한 생각도 내지 말고,
조끔 잘된다고 좋아하는 마음도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답답하고 영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그렇다 하더라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해 나가서 석 달 동안이 아주 하루같이 이렇게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인댄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다.
구름 가에는 천첩(千疊), 천 겹이나 쌓인 산이요, 울타리 밖에는 한 소리 시냇물이더라.
구름이, 구름이 자욱이 낀 밖에는 천첩(千疊)이나 쌓이고 쌓인 산이 둘러싸여 있고, 담장, 울타리 담장 밖에는 한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더라.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하면, 만약 열흘이 넘도록, 열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아니했다면,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어찌 비 개인 뒤에 저 새파란 하늘을 볼 수가 있겠는가.
열흘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이 되어서 비가 와서 구름이 꽉 끼었다가 그 구름이 쏵 벗거지니까 정말 새파랗게 트인 하늘을 이렇게 감상 깊게 볼 수가 있더라.

더운 여름, 정말 애써서 정진을 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정말 알뜰히 알뜰히 정진을 하면, 석 달이 지난 뒤 7월 해제(解制)가 되어서 정말 새파란 고운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34분3초~42분1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7. 24. 05:12

 

 

§((292)) (게송)한서상경방대광~ / 당인(當人)의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 / 언제 · 어디서 · 무엇을 하시던지 딱! 한 생각 단속을 하면 선방(禪房), 도량(道場)이 된다.

**송담스님(No.292)—1986년 동안거 해제 법어(86.02.23) (용292) (정진, 수행)

 

 

(1) 약 7분.

 

 

(2) 약 6분.

 

 


(1)------------------

한서상경방대광(寒暑相更放大光)하니  막언영악조동방(莫言靈嶽照東方)하라
나무~아미타불~
일조계설대선설(一條溪舌帶宣說)헌디  하처강산부도량(何處江山不道場)고
나무~아미타불~

한서상경방대광(寒暑相更放大光)헌디, 춥고 더운 거, 겨울이 되았다 여름이 되았다 한 춥고 더운 것이 서로 바뀌되 항상 대광명(大光明)을 놓더라.
하늘에 달은 겨울이 돌아와도 밝고 여름이 돌아와도 밝고, 하늘에 해와 달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상관없이 항상 대광명을 놓더라.

그러니, 막언영악조동방(莫言靈嶽照東方)이여.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여기만 이 동방(東方)에만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다고 하지를 말아라.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해와 달은 한결같이 비추니 거기만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다고 하지를 말아라.

일조계설대선설(一條溪舌帶宣說)이여. 한 줄기 시냇물이 선명묘법(宣明妙法)이여. 잘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說)하더라 그 말이여. 시냇물 졸졸졸 흘러가는 그 시냇물을 혀로 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고 계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하처강산부도량(何處江山不道場)고. 어느 곳 어느 강산인들 도량(道場)이 아니겠느냐? 도 닦는 곳이 아니겠느냐?

이 게송은 소요(逍遙) 스님의 게송(偈頌)입니다.


오늘 을축년 삼동 결제(三冬結制) 해제일(解制日)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백일기도 회향 법요식도 함께 거행이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오늘로 끝마치고 해제를 하게 되면, 스님네는 또 다른 선지식과 도반과 도량을 찾아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떠나시게 됩니다. 물론 떠나지 않고 눌러서 정진하신 스님네도 계시겠지마는, 옛날부터서 해제를 하면 다 걸망을 지고 또 어느 곳 강산과 선지식과 도반을 따라서 떠나는 그러한 풍습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발걸음 디딘 곳마다, 걸망을 내려놓는 곳마다, 바로 그 곳이 도(道) 닦는 선방(禪房)이요, 도량이요,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듣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곳만이 제일 좋고 또 다른 곳은 좋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인(當人)의 신심과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천당을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육도법계(六道法界) 어디를 가든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어느 곳이라고 부처님의 설법(說法)이 없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라고 해서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다 중생의 시비(是非) 분별심으로 보니까 좋고 나쁜 곳이 있고 그렇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버리고 취(取)할 것이 없고, 친(親)하고 먼 것이 없는 것입니다.(처음~6분59초)





(2)------------------

해제(解制)를 했으니 이제 댁에로 돌아가시고 또 산철 결제에 방부를 들이신 분은 또 와서 두 달간 하시게 되겠습니다마는, 댁에 계시던지 절에 와서 방부를 들이시고 하시던지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고, 댁에서는 댁에서 대로, 또 오시는 차중(車中)에서는 차중에로, 이 도량에 들어서면 들어오신 대로, 댁에서도 공양을 잡술 때나, 손자를 갖다가 희롱하실 때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 어디서 · 무엇을 하시던지 딱!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신다면 바로 댁에 계신 그 댁이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한 생각이, 단속을 하면 도량(道場)이 되고, 한 생각을 방일(放逸)해 그냥 놓아 버리고 범연히 지내면은 그것이 해태굴(懈怠窟)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놓아 버리고 해태한 데에는 온갖 마구니가 그 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만큼, 그 한 생각만 단속을 하시면 거기에 뭐 마구니가 들어올 수도 없고 삼재팔난(三災八難)도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댁에서 시비와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성냄, 그러한 그 중생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우(風雨), 바람 불고 비 오는 그리고 파도치는 그러한 속에서, 떠억 앉었다 섰다 누웠다 거닐다 하는 그러한 속에서 화두(話頭)를 단속하고 그 가운데 화두가 성성(惺惺)하도록 잡드리를 하신다면,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 와서 방부를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차 소리 '뛰-' 하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바로 죽비 소리고, 손자가 '빽-' 하고 우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가 이 법문(法門)이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 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이라' 이리 생각하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두를 떠억 거각을 하신다면.
또 며느리나 딸이나 손자가 할머니 말을 잘 안 듣고 뭐라고 말대꾸를 하고 그러면 속이 상하지요. 그러지마는 속상할 겨를도 없이 터억 화두를 들고 껄껄 웃으면서 그런 데에 조끔도 마음이 동요가 되지 않고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진다면 그분이 얼마나 그 수행력(修行力)이 생긴 거냐 그 말이여.
그게 바로 자기의 수행력을 그런 데에서 시험을 해 보고, 그런 데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향상되어 가는 것을 스스로 점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비구 · 비구니 모다 여러 수좌 스님네들이 원근에서 모다 정진들을 하시다가 해제라 해서 이렇게 모다 많이 모이셨는데, 스님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산철 동안, 또는 산철 결제를 하시더라도 이 산철 동안에—이제 그 추운 겨울도 지났고, 앞으로 더운 여름도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런 좋은 계절에 정말 이 마음껏 정진을 하시되, 아까 보살님네한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규범에, 엄격한 규범에 얽매이지 아니했으되 스스로 항상 근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어느 강변을 지나시든지, 어느 산기슭을 지나시든지, 어느 들녘이나 어느 산중에 처하시게 되더라도 항상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잡드리해 가신다면, 오히려 결제 중에 꼼짝달싹 못 한 그런 규칙 속에 있는 것보다도 더 정진이 활발(活潑)하게 잘 되실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자진해서 그러한 규범에 얽매이기를 바래고, 그런 규범 속에서 모두가 함께 규칙 생활을 함으로써 스스로 항상 잠깐 동안도 방일(放逸)을 하지 않도록 그러자고 결제를 하고 이렇게 모다 방부를 들이고 그렇게 지내고는 있습니다마는, 참으로 공부에 득력(得力)을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힘을 더는 경계라면 그 동서남북 어데를 가시나 걸림이 없을 것이고,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19분53초~26분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7. 21. 09:23

§((217))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이 정진해야 /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게송)차신성고취~ / 삼계(三界)가 화택(火宅) / 무기(武器)가 순 그게 불덩어리 /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 / (게송) 천고무인문~.

**송담스님(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용217) (정진, 수행)

 

 

(1/3) 약 15분.

 

 

(2/3) 약 21분.

 

 

(3/3) 약 12분.

 


(1/3)----------------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허고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하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한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동서남북 정처가 없어. 출가해서 걸망을 지고 도반과 선지식을 찾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해서 행각을 하는 분상에는 동서남북 정착(定着)함이 없어.
생애(生涯)는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오직 주장자 하나에 온 생애를 다 맽겨버렸다 그 말이여. 주장자가 동쪽으로 행하면 동쪽으로, 금년 여름에는 동쪽에서 지내다가 겨울철에는 북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갔다 남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주장자 하나로 생애를 맽겼는데.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여.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그래 가지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천봉(千峰), 바로 천(千) 봉아리 속을 향해서 들어가고 다시 또 만(萬) 봉아리를 향해서 간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그 수없는 것을 보고, 수없는 것을 듣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들이 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이 천 봉오리고 만 봉오리다 그 말이여.
그 봉오리 봉오리 넘을 때마다 거기에서 피렴심(疲厭心)도 느끼지 아니하고, 소득심(所得心)도 갖지를 아니하고, 만족심도 갖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


오늘은 계해년 가을 산철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수행 납자(衲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감격스럽게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용화사 선방대중과 또 도봉산 원효암 대중 그리고 여러 용화사 모다 돈독히 조실 스님의 법을 믿고 정진하는 신도 여러분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히 5재 천도식을 맞이한 민병태 영가를 위해서 좋은 법문을 설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이 용화사 법보선원 이 법요식에는 사부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만년위패 법보제자 영가들도 동시에 청혼(請魂)을 해서 이 법요식에 법문을 듣도록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특히 이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해제 법문을 잘 듣고, 과거 무량겁에 지은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에 업연(業緣)이 봄눈 녹듯이 녹고, 온갖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도솔천내원궁이나 또는 극락세계에 왕생을 하고,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게 되면 다시 불법문중(佛法門中)에 귀의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일대사인연,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



 


(2/3)----------------

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體中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體中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惡知) 악각(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 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15분2초~35분50초)

 




(3/3)----------------

차신성고취(此身誠苦聚)허고  삼계진화택(三界眞火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아구출몰(汝我俱出沒)헌디  겁해종난측(劫海終難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신(此身)은 성고취(誠苦聚)요. 이 몸뚱이는 정말 이 괴로움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온갖 괴로움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몸뚱이도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여가 안 아프면 저가 아프고, 저가 안 아프면 여가 아프고, 오장육부가 다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이 걱정 아니면 저 근심, 저 근심 아니면 이 걱정, 내 일신(一身)뿐만 아니라 부모 걱정 · 자식 걱정 · 남편 걱정 · 사업 걱정 · 가정 걱정, 전체가 이 고통 고민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그리고 온 이 세계는 참으로 불집[火宅]이여. 불집! 불이 훨훨훨훨 불이 타고 있는 불집이여.
옛날 부처님께서 '이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 그러셨는데, 정말 이 말세가 되고 보니 저 온 세계가 만드느니 무기만 만들어. 무기가 순 그게 불인데, 불덩어리인데, 맨 새로 만들지 안 해도 이 삼계가 고대로 화택인데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머리 좋은 천재만을 골라 가지고 그 사람들을 시켜서 만드느니 원자탄 · 수소탄 · 레이저 무기, 그러한 무서운 불로써 온 세계를 갖다가 찰나간에 잿더미를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무기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고 또 상대방을 그 태워 죽임으로써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기를 만드는데, 결국에 가서는 그 무서운 무기로 인해서 상대방도 타 죽고 나도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찾아야만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이르를 텐데, 상대방을 죽이고 나만 살려고 나를 지킬려고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도 죽고 남도 죽게 하는 결과가 올 것이 빤합니다.
10년 후에 올 지, 20년 후에 올 지, 백 년 후에 올 지 그것은 알 수가 없지만, 현재 세계 정세의 되어 가는 껄세로 보아서는 그 시간이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언제 올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연 추측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깊은 복(福)과 인연(因緣)을 지었음인지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경행한 일이나, 이 문제는 범범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판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셨고, 과거에 모든 고조사(古祖師)들도 역시 다 그러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난 우리 근기가 약한 우리들은 과거에 불보살과 고조사에 몇십 배, 몇백 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러한 뜻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온 세계와 인류,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눈을 돌려보면 우리 조계종 종단 그리고 우리 자신, 멀리 생각하나 가까이 생각하나 우리는 시간을 아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정말 이를 악물고 다시 우리 정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천고무인문(千古無人聞)헌디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헌디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고(千古)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만산(萬山)에는 공연히 두견새만 울고 있구나.
밤새도록 두견이는 울고 있는데, 아무도 그 두견새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에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라.
목동이는 한 소리 젓대를 불면서 소를 타고 석양을 지내가는구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생존 시에 즐겨 읊으시던 게송이었습니다.

법보단에 모셔 있는 만년위패 법보제자 모든 영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오늘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속성정각(速成正覺)하시기를 바랍니다. (36분1초~48분22초) (끝)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7. 11. 09:52

§((242)) 자녀 교육, 지혜로운 방편 / 불교의 포교 / 넓게 말해서 불교의 목적은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 자기 스스로 먼저 헤엄을 칠 줄 알아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가 있다.

**송담스님(No.242)—1984년 7월 첫째일요법회(84.07.01) (용242) (정진, 수행)

 

 

약 11분.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자녀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인가?

애들은 옛날의 윤리 그런 것에는 벗어나기를 바래고, 부모는 그대로 놔둘 수는 없고, 이래 가지고 여러 가지 갈등과 애로가 생기는데, 이럴 때에 부모가 감정에 흘른다든지 그것을 수습을 못하면 완전히 자식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자녀들을 입으로 가르키려고 하지 말고, 우선 내 마음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걱정을 하고 때로는 종아리를 치고 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가 화나는 것을 부애풀이하기 위해서 종아리를 때리고 큰소리를 치고 하는 것을 우리는 왕왕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의 부애풀이를 하기 위해서, 자식에게 욕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 종아리를 때리고 하는 한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역시 스승이 제자를 가르키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다룰 때에도 학생이 공부를 안 한다든지, 숙제를 안 해온다든지, 선생님 앞에 불순(不順)한 언동을 한다든지 하면 ‘그 애를 어떻게 지도해야 이 학생을 바로 지도할 것인가? 그 학생을 지도하는 데에 어떠한 지혜가 필요하며 어떠한 방법이 필요한가?’ 여기에 생각이 집중되지를 아니하고,
“감히 저놈이 선생님 앞에, 저런 고얀 놈이 있나?” 당장 흥분을 해 가지고, 자기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귀쌈을 올려대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이래 가지고 그 학생으로 하여금 상처를 입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하는 그러한 예도 우리는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서는 세상없어도 그 스승 밑에 훌륭한 학생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갖다가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혹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든지,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나쁜 친구하고 어울린다든지, 학교의 성적이 나쁘다든지, 학교에 간다고 해 놓고 사실은 다른 나쁜 친구와 놀다가 들어온다든지 반드시 그러한 경우를 만나게 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첫째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해서, 정말 부처님 마음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써 우선 자기 자신을 수습을 하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저 애를 바로 잡을 수가 있을 것인가? 저 애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그 나후라를 훈도하듯이 그러한 지혜로운 방편을 쓰실 만한 여유를 가진다면 그 아들을 교육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다짜고짜로 뚜들어 패고 책을 찢고 욕지거리를 해서 푹 가출을 해 가지고 소식이 없어진다던지, 나가서 어떤 경우는 물에 빠져 죽어 버린다던지 자살을 해 버린다던지, 이러한 결과를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이것은 다시는 그 천추(千秋)의 한(恨)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킨다던지, 제자를 가르킨다던지 이 교육 문제는 첫째는 자기가 먼저 되어져야 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 노릇 하기가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키는 것은 말로써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로 가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가르킬 수 있는 것은 짐승은 몽둥이로 가르키고 또 먹을 것으로써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을 것과 몽둥이만 갖고는 절대로 교육을 원만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그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믿을 수 있게 해야 하고, 부모를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어떠한 애로 사항이라도 부모님 앞에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평소에 지혜와 자비로써 자녀를 상대를 해 나와야, 그 자녀가 사춘기를 맞이해서 또 어떤 중대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 털어놓고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님 앞에 의논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어려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〇불교의 포교.

넓게 말해서 불교는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외래 종교가 나날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이때에 불교(佛敎)도 포교(布敎) 사업을 잘해야 한다. 포교당을 많이 짓고 어쨌든지 스님들이 산중에만 들어가지 말고 이 도회지로 나와서 발벗고 나서서 포교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고 숭배하도록 해야지, 이대로 나가다간 전부 다 예수교나 기타 종교를 다 믿게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까지도 다른 종교에서 악착같이 끌어갈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쓰기 때문에 불교 신자들도 다 개종을 해버리지 않겠느냐.

이러한 우려를 표명해서, 모다 젊은 스님네들이 너도나도 모다 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다 대학도 가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학문과 달라서 지식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닦는, 내 '참나'를 찾는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경을 해석할 줄 알고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포교의 목적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포교(布敎)는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衆生敎化)인데, 중생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고해(苦海)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을, 그것을 그 고해로부터 건지는 것이 그것이 포교의 목적인데, 자기 스스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건질 수가 있겠어.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풍덩 뛰어들면 그 사람도 건져내지 못하면서 자기까지 빠져 죽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교를 하려면 첫째, 자기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하고,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포교가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32분9초~42분4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7. 3. 07:01

§((245)) 공부는 '깊은 우물 속에 눈을 져다 부어 우물을 메우려듯 해라' / 참선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는 확신을 가져야 / 주머니 속 물건, 항아리 속에 자라,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다.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서장(書狀)』에 대혜 스님이 누누이 말씀하시기를 '꽉! 맥혀서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한 그러한 경지야말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 도(道)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없다.

깊은 우물에 눈 퍼다 붓듯이, 해가 넘고 백천만 겁이 지내도 차고 안 차고 하는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퍼다 부을만한 그러한 끈기를 가지고 해 나간다면 어찌 안 될 것이냐. 마침내는 져다 붓는 놈이나, 우물이나, 눈이나가 전부가 다 하나가 되어서 홀연(忽然)히 어떠한 계제(階梯)를 만나면은 툭! 터져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이다.

**송담스님(No.245)—1984년(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회(84.08.11) (용245) (정진)

 

 

약 22분.

 


7월 15일 여름 안거(安居)의 해제날입니다. 이 해제날에는 석 달 동안 참선 수행하던 모다 스님네들이 해제를 하고, 또 걸망을 지고서 스승을 찾아가기도 하고 도반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러는 날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출입 왕래를 금하고 다 한군데 모여서 규칙을 지키면서 겨울 석 달, 여름 석 달을 발을 묶어 놓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하면 걸망을 지고 팔방 사방으로 나가는데, 원래 이 결제법(結制法)이라 하는 것은, 안거법(安居法)이라 하는 것은 인도에는 우기(雨期), 비가 많이 오늘 계절이 있어서 그 비를 피하기 위해서 부득불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이런 절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서 절에서 모두 모여 가지고 정진하다가, 우기(雨期)가 지나면 다시 그 절에서 떠나 가지고 숲속에 들어가서 숲속에서 자고 또 탁발해서 공양을 하고 숲속에서 밤새 정진을 하고, 그렇게 수도 생활을 하기 때문에 결제 · 해제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참선(參禪)을 해서 빠른 시일 내에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고자 할진대는—오늘 해제를 하고서 걸망을 지고 어디를 가시건 간에 가시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그게 바로 선방(禪房)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하고, 해제 하면 여기저기 걸망을 지고 다니니까 참선을 등한히 해도 되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공부! 왕래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활 속에서 가다듬고 정진하는 그 참선이야말로 힘이 있고 살아 있는 공부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할진대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마치 저 깊은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가 자꾸 부어 가지고 그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우물에다가 눈을 한 짐 져다가 붓고 또 한 짐 져다가 붓고, 수십 짐을 져다 부어도 물에 들어가면 눈이 녹아 버리고 녹아 버리고 해 가지고, 암만 수백 짐을 져다 부어도 우물이 차오르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눈을 긁어서 뭉쳐서 져다가 붓고 또 져다가 붓고 그러기를 몇백 짐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땀이 나고 그렇지만 춥고 더웁고 한 것도 상관없이 계속해서 져다 부어.
하루 종일 져다 붓고, 해가 져도 져다 붓고, 밤새도록 밤잠을 안 자고 져다 붓고, 그저 동쪽에서 져다 붓고 서쪽에서 져다 붓고, 그저 이리 져다 붓고 저리 져다 붓고, 속이 상해도 져다 붓고, 기분이 좋아도 져다 붓고, 그저 배가 불러도 져다 붓고, 배가 고파도 져다 붓고. 이리 해 가지고 1년이 넘어가, 이태가 넘어가, 백 세, 천 세가 되어 가지고 몸을 바꾸어 가면서 져다 부어.

마지막까지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단 한 시간도 등한히 지낸 일이 없이, 자나깨나 그저 눈을 어쨌든지 많이 져다가 부어서, 기어코 그 우물을 갖다가 눈으로써 가득 메울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져다 붓다가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가 눈을 퍼다 붓는다고 하는 생각도 없고, 우물 속에 눈이 올라왔나 안 올라왔나 한 것에도 그런 생각도 없고, 인제 지쳤다는 생각도 없고, 그만할려는 생각도 없고, 그저 인자 완전히 거의 아주 열중(熱中)을 하다 하다 못해 가지고 무심(無心)에 들어가 버린다 그 말이여.

조끔 몇 짐 져다 붓고 ‘인제 좀 찼나?’ 또 들여다 보고, 조끔 져다 붓고 ‘인제는 조금 더 올라왔나?’ 이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올라오고 안 오고가 문제가 없어.
그저 죽을 둥 살 둥 눈이 무겁고 가벼운 것도 따지지 말고, 차고 안 찬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져다 부은다 그 말이여. 이러한 정도에 열성(熱誠)을 가지고 참선을 해야만 된다 그 말이여.

겨우 첫 철에 와서 남 흉내 좀 내고 앉아서 해 보면 처음에는 망상이 들입대 일어나더니, 나중에 망상이 조금 잠잠하니까 또 잠이 퍼 오고, 잠이 좀 깰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고, 그렇게 조금 해 보고서 ‘아이고, 암만 참선을 해도 안 됩니다. 저는 인연이 없는 갑습니다. 옛날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부를 때는 잠도 잘 안 오고 참 좋더니, 참선이 좋다고 해서 해 보니까 맨 잠만 퍼오고 망상만 더 일어나고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이러거든.

그렇게 한 철 두 철 그나마도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순일무잡하게’—한두 철 해 보고서 ‘그렇게 안된다’고 피렴심(疲厭心)을 내고, 자기는 인연이 없느니, 근기가 약하느니,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할 마음을 낸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도업을 성취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 깊은 우물에다가 눈 몇 짐 퍼다 붓고서 ‘눈이 차오르지 않는다’고, 그 허부렁한 눈 퍼다 부어 봤자 물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 버리고 녹아 버리고 하니, 그것이 무슨 놈의 차오를 것이냐 그 말이여.

깊은 우물에 눈 퍼다 붓듯이, 해가 넘고 백천만 겁이 지내도 차고 안 차고 하는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퍼다 부을만한 그러한 끈기를 가지고 해 나간다면 어찌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마침내는 져다 붓는 놈이나, 우물이나, 눈이나가 전부가 다 하나가 되어서 홀연(忽然)히 어떠한 계제(階梯)를 만나면은 툭! 터져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지,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보증(保證)을 서셨고, 다 맹세를 하셨습니다. 기어코 되는 것이라고 보증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항아리 속에 자라를 넣어 놓은 거와 같아서, 그 자라란 놈이 아무리 버르적거려 봤자, 밤에 가봐도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낮에 가 봐도 항아리 속에 들어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나를 찾는 것이여.
오히려 보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지언정,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이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烟霞味)하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이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라.
동서남북에 정착한 곳이 없어. 동쪽으로도 가서 공부하고 서쪽으로 가서도 공부하고, 동서남북 아무데라도 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일정한 데에 정착이 없기 때문에 ‘생애(生涯)가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생애가 다못 이 주장자 · 육환장(六環杖)—다 옛날에는 스님네들이 어디 행각을 할 때에는 육환장을 짚고 댕겼던 것입니다. 다못 이 지팡이 하나에 달려 있다 그 말이여.

설두(舌頭)에 세작연하미(細嚼烟霞味)여. 혀끝으로는 무엇을 먹고 사냐 하면은 구름과 안개 연기를 먹고 살아. 산중으로 들로 다니니 자연히 좋은 공기에다가 안개 연기를 마시고 살 수밖에는 없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바로 천(千) 봉우리, 다시 만(萬) 봉우리를 향해서 들어가더라.

수행하는 것이 한때는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잘되어 가다가 성성(惺惺)하게 잘되어 가다가, 또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이 뒤틀리고 이런다 그 말이여.
그놈을 포행도 하고 단전호흡도 하고 찬물로 세수도 하고 하면서 그 고비를 어렵게 넘기고 나면 한결 정진하기가 수월해지는데, 수월해져 가지고 떠억 화두를 들면 화두가 성성하게 순일하게 잘 들리고, ‘이만했으면 참, 공부 이대로 주욱 되어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먹자마자 또 뚝! 변해 가지고 영 또 공부가 안되고.

때로는 잘되다가 때로는 안되다가, 또 안되다가 또 괜찮게 되다가, 괜찮게 되다가 또 잘 안되고, 이러기를 한 봉우리 넘으면은 또 내리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을 다 가서 보면 또 오르막길이 있고, 오르막길을 다 오르면 또 내리막길이, 이것이 마치 천 봉우리를 넘어가면 다시 또 만 봉우리가 있듯이, 이 모양이 마치 길을 가는 데에 봉우리 밖에 또 봉우리가 있고, 또 봉우리 밖에 또 봉우리가 있는 것이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 부은 것처럼 그렇다 그 말이여.

만날 해도 무엇이 얻어지거나 나타나거나 보이는 것이 없이, 만날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할 뿐이다 그 말이여. 이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것이 공부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그렇게 콱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하고 그러니까, 인연이 없어서 공부가 잘 못된 줄 알고 걱정들을 하시고, 와서 호소를 하시는데 사실은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그 경계가 공부 옳게 되어 가는 그 상태인 것입니다.

무엇이 환하고, 무엇이 얻어진 것이 있고 알아진 것이 있고 그러면은 그것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건 공부가 잘못 비뚤어져 들어가는 것이고, 어문간 데에 처박혀서—멧돼지 쫓아가다가 한눈 파는 거와 마찬가지여서 멧돼지를 잡으러 쫓아가면 한눈을 팔지 않고 계속 그 멧돼지 뒤를 따라서 잠깐도 한눈 팔지 않고 쫓아가야지, 멧돼지 잡으러 쫓아가다가 골마리를 까고 이를 잡고 있어야 되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다 보면 멧돼지는 순식간에 저 몇백 미터 도망가 버리면 멧돼지는 영영 놓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잘된다고 좋아하지 말 것이며,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 잘되어도 지혜롭게 잘 단속해 나가야 하고, 답답하고 그러더라도 조금도 짜증을 내지 말고 지혜롭게 그 고비를 심호흡, 단전호흡을 하면서 잘 넘기면 그게 공부가 한 걸음 또 수월하게 되어가는 것이니까.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이 누누이 말씀을 하시기를 '그 꽉! 맥혀서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한 그러한 경지야말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공부가 진취할 징조이다. 그러니까 그런 경계를 당하거든 짜증을 내고, 이 공부가 안될라나 보다 하고 자포자기하고 하지 말고, 그러한 고비를 어쨌든지 지혜롭게 잘 공부를 뽑아 나가도록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제를 하시고 어느 선방에를 가시던지, 다시 또 우리 용화선원에 산(散)철 결제에 들어오시던지, 또 신도 여러분들께서도 지난 석 달 동안 그 무더위 속에서 별 탈 없이 잘 정진들을 하셨습니다 오늘 해제를 하시고 댁에 가시더라도 여기서 석 달 동안 지내시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세수하시고 떠억 한 시간 두 시간씩 정진을 하시고, 낮에도 그저 손자 보면서, 가정 일 도우면서, 집에 계시거나 어디 외출을 하시거나,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라고, 또 다시 금년 겨울 결제 때가 오면은 또 와서 방부를 들이시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겨울 결제는 금년에 10월 달에 가서 윤달이 들어서 10월이 첫째 10월이 있고, 그 다음에 윤10월이 있습니다. 윤10월에 결제를 할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넉 달이라고 하는 세월이 있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는 그러한 계절인 만큼 어쨌든지—석 달 동안 애써서 여름 석 달 동안 하시다가 그냥 팽개쳐 버리고 그럭저럭 지내면 애써서 쌓아올린 탑이 다 와그르르 하니 무너져 버리거든.
10월에 가서 다시 밑에부터서 다시 쌓을라면 또 큰 힘이 들 것입니다. 그 탑을 갖다가 잘 허물어지지 않도록 간수를 하시고, 댁에 가서도 계속해서 그 탑을 쌓아올려 놓으시면 10월에 가서 그 뒷을 이어서 하신다면 훌륭한 탑을 쌓으시게 될 것입니다.

결제 때 모여서 정진하신 것은 해제 때 생활 속에서 시끄러운 속에서 잘하기 위해서 결제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도(道)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없는 것입니다. 스님네라고 해서 꼭 도를 닦아야 하고, 세속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안 닦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에 계신 분일수록에 도를 더 열심히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세속에 사시면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이리저리 얽혀서 업을 많이 짓게 되고 도 닦을 기회는 점점 희박하기 때문에, 그럴수록에 몇 배를 더 노력을 하고 애를 써야만 다소 공부가 되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내생(來生) 일을 생각하고, 장차 일을 생각해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44분46초~66분2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6. 8. 17:07

§((325)) (게송)거심진속윤회업~ /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잡드리해야 /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하기 쉽다 /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사(生死)가 있다'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아야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 화두를 놓치지 아니한다 / 임종(臨終)이 대단히 중요 / 유족은 영가와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듣고 참선해야 /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굳세게 훌륭하게 만드는 좋은 채찍이요, 계기요, 관문(關門) / (게송)기래긱반냉첨의~.

**송담스님(No.325)—1987년 동안거 해제 법회(87.02.12) (용325) (정진)

 

 

(1) 약 19분.

 

(2) 약18분.

 


(1)------------------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동념무비생사근(動念無非生死根)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마음 일으키면,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면 무슨 생각이건 다 윤회(輪廻)의 업(業)에 속하고.
착한 생각이나 악한 생각이나, 과거 · 현재 · 미래 · 선악(善惡) · 시비(是非) 일체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모두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근본이 되고.
동념(動念)이 무비생사근(無非生死根)이다. 생각이 동(動)하면 다 생사(生死)의 근원이 아닌 것이 없더라.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태허(太虛), 저 허공과 같이, 저 허공과 더불어 향배(向背)가 없고자 하거든—향배는 향(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고, 배(背)는 서로 등지는 것인데, 허공과 더불어 향하고 등지고 할 것이 없고자 하면,
일체처(一切處)에 걸림이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기를 바래거든,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덩어리 쇠 뭉텅이를 통채 삼킨 것처럼 할지니라.

음식을 먹다가 조그만한 덩어리 하나만 넘어가도 그놈이 목에 딱 걸리면 끌끌하고 종일토록 생트림이 나고 속이 답답하고 거북한데, 쇠 뭉텅이를 꿀떡 삼켜 놨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냐 그 말이여.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하고 트림을 해도 불편하고, 그것이 삭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매우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여.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것처럼 하라. 그래야 마침내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수행자가 본참공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항상 놓치지 아니하고 앉아서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요, 일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체처 일체시 희로애락(喜怒哀樂),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알 수가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병인년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解制)를 맞이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산승(山僧)이 더 거기에 덧붙여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하면 여기 용화선원 선방에 스님네나 보살님네, 그리고 또 용주사 중앙선원, 또 저기 태화산 봉곡사 태화선원, 모다 인근에 모다 선원에서 온 비구니 선객들, 여기에 모두가 다 참석을 했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하면 다시 또 걸망을 지고 또 어느 선방 또 어느 회상(會上), 어느 선지식(善知識), 어느 도반(道伴)을 찾아서 또 행각(行脚)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행각을 하는 그 걸음걸음,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그 거북한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겠느냐?
고인(古人)은 '부모상(父母喪)을 당한 상자(喪者)처럼, 깨닫기 전에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고, 깨달은 뒤에 수행도 또 부모상을 당한 초상(初喪) 그 상인(喪人)처럼, 상제(喪制)처럼 그런 마음으로 하라' 이런 말씀도 있는데, 지금 '쇠 뭉텅이, 쇳덩어리를 삼킨 사람처럼 하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지 않고서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쇠 뭉텅이를 어쩌다 꿀떡 삼켜 놨으니 무엇이 딴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맛 거북해서, 앉으나 서나 거북하고 불안하고 하듯이,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언제 전후좌우(前後左右)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고, 딴생각을 잠시도 할 겨를이 없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 그 의단(疑團)만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러한 자세,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일분일초를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라 이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 나가다가 또 얼마 안 지내면은 또 산철 결제를 하게 되고 그런데, 결제(結制) 중에는 모두 여러 도반들이 모여서 규칙적으로 시간 생활을 하니까 개인적인 일체 자유행동이 허락이 되지 아니하므로 정진(精進)을 열심히 할 수밖에는 없으나, 해제를 하면 각자 자유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 이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이 게송, 고인(古人)의 게송 한마디를 읊어드렸습니다.


'공부를,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금생에 정진을 해서 그 깨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여간한 큰 참! 이 도력, 법력(法力)과 도력(道力), 그 정진 수행력을 갖지 않고서는 '입(入)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 또 태에서 나올 때 그렇게 참 매(昧)하기가 쉽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입태 · 출태라 하는 게 우리의 현실, 꼭 이 생사(生死)를 갖다가 이 육체가 죽으면, 이 육체에다가 기준을 두어가지고 육체가 움직이지 않게 되고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고, 새로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하는 것을 생(生)이라고 보통은 그렇게 얘기하지만.
더 정밀하게 이 생사를 논(論)하자면,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바로 생(生)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생각도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멸(生滅)이 있으니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生死)인데.
이 몸뚱이 죽을 때 숨 딱! 끊어진 것을 '입적(入寂)을 했다' 그러고, 그 바로 그때를 갖다가 임종(臨終)이라 그러는데, 우리가 이 몸뚱이는 아직 죽지 않고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생각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 생각에 있어서의 기멸(起滅), 염기염멸(念起念滅)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본다면, 그러면 그 입태(入胎) · 출태(出胎)를 어떻게 볼 것이냐?

우리가 눈으로 어떠한 색상을 봄으로 해서 우리가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 이근(耳根)으로 그 성진(聲塵), 어떠한 밖에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 '아, 저게 무슨 소리다' 이렇게 해서 이식(耳識)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한 생각이 육근을 통해서, 육근 중에 어느 한 기관을 통해서 딱! 한 생각 일어나면[念起] 그것이 새로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이 염멸(念滅)이고, 그것이 죽음인데.

그 어떠한 경우를 만나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려고 한—탁! 대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접해 가지고 거기에 어떠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경과해 가지고 결국은 구체적인 생각이 동(動)하고, 또 생각이 동한 다음에는 그것이 육체적으로, 그 육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겠는데.

그 미세한 아주 정미(精微)로운 그 생각이,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 가지고 육식(六識)이 날 그 쫌(짬)이 바로 입태(入胎)고, 그것이 그 생각이 또 없어지면 인자 구체적으로 발표가 되면 그것이 인자 출태(出胎)고.
태(胎)에 나와 가지고 한평생을 사는 것은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했다가 그것이 꺼지게 되면은 다시 인자 또 입적(入寂)을 해 가지고 입태 · 출태 이렇게 되는데.

그 우리의 육체가 한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몸을 받기 이전까지의 상태가 우리 '중음신(中陰身)이라', 또는 인자 '영혼(靈魂)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다가,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는 시간이 사람에 따라서 죽자마자 태어나기도 하고, 49재를 지나 가지고 또 다른 데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백일 동안 중음신으로 있다가 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소상(小祥) · 대상(大祥)을 지나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50년 내지 백 년까지도 새로운 몸을 받아나지 못하고 중음신으로 자기 집이나 일가 친척으로 이렇게 전전해 가면서 이 허공 속에 왕래(往來)하면서 이렇게 인자 중음신으로 그렇게 있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다니다가 인연 따라서 새로운 그 숙주(宿主), 자기가 잉태할 그 모태를 찾아 가지고 거기 인자 태중(胎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태 · 출태라고 하는 것은, 그때에 입태 · 출태하기 전까지는 자기의 정신이, 이를테면은 수행한, 수행해서 깨달은 그 경지가 고대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은.
있는데, 그 출태할 그 찰나에 미(迷)해 버리고, 또 출태할 때까지도 안 미(迷)했던 사람이... 아, 입태할 때까지도 미(迷)하지 않은 사람이 출태하다가 탁 매(昧)해 버리고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앉아 있는 동안에는 다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하는데, 화두가 그렇게 고대로 의단(疑團)이 있는데, 일어서다가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또 뭔 소리가, 큰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면 그 소리 때문에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내동 여태까지 정진을 잘하다가 그렇게 해서 새로운 어떠한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새로운 육진(六塵)이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해 오면 그 육식(六識)이 일어나면서 그 화두를 놓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항상 느낄 수가 있습니다.(처음~18분29초)




(2)------------------

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그런 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그래 가지고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그래 가지고 더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그 의단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 결국은 통 밑구녘 빠지듯이 그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결국은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는데.

그 새로운 어떠한 경지, 사건이 일어날 때 흔히 우리는 화두(話頭)를 놓쳐버리는데, 그렇지 않게 되고, 앉았을 때 들었던 화두가 서도 상관이 없고, 무엇을 눈으로 보아도 그 화두가 달아나지 않고, 무엇을 들어도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생각 생각이 걸음걸음이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간다면,
이 몸뚱이를 설사 버리고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끙끙 앓다가 결국은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인자 죽게 되는데,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러한 혹독하고도 심한 그런 고통,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터억 그 화두가 독로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내가 그러한 경지, 수없이 많이 죽었다 태어났다 했겠지만 전생사(前生事)는 그저 잊어버리고 우리는 기억을 해내지를 못해서 그럽니다마는, 정말 그 마지막 숨 끊어질라고 할 때의 그 고통은 그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이라든지 몸부림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임종(臨終)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임종을, 마지막 임종을 잘하기 위해서, 정말 그때 참 잘하기 위해서 일생 동안을 공부를 한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스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종할 때에 그 수망각란(手忙脚亂)하고, 그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정신을 채리지를 못한 채 숨을 거두게 되면, 그건 물어볼 것도 없이 입태(入胎)에도 매(昧)하게 되고 입태에 매한 사람이 출태(出胎)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래서 옛날부터 다 훌륭한 그 수행인들도 임종할 때에 선지식(善知識)의 보살핌 속에서 숨을 거두기를 바래고, 또 선지식은 바래지 못하더라도 참 그 수행력(修行力) 있는 도반이 옆에서 임종을 지켜주고, 또 정신을 차리도록 일깨워 줄 수 있는 그러한 도반 만나기를 그렇게 원(願)을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무량겁을 그런 미몽(迷夢) 속에서 자기 본성(本性)을 미(迷)해 버린 상태에서 윤회를 거듭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해제를 해 가지고 산문(山門)을 나가셔서 어디 어느 산, 어느 골짜구니, 어느 도량(道場)을 가시더라도 걸음걸음이 그러한 자세, 쇠 뭉텅이를 꿀떡 삼킨 그러한 마음가짐, 그러한 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신다면, 바로 옮기신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도반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선지식(善知識)이 항상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치 해제 날에 49재 천도를 맞이한 영가(靈駕)도 몇 분이 계십니다마는, 그 영가가 일평생 동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 공부도 잘하고, 또 좋은 직장도 가지고, 한평생 악한 일 하지 아니하고, 가족을 위해서 또 자기가 소속한 회사나 직장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은 사바(娑婆)의 인연이 다해서 이승을 하직한 영가들입니다.
영가는 다행히 이 용화선원에, 법보선원에 인연이 있어서 여기에서 이 해제 날, 정진(精進)을 하시던 여러 선원(禪院)에 참 청정한 수행한 스님네들의 그 해제(解制) 법회(法會)에 49재 천도식(薦度式)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필시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법회에 그 영가의 몸으로 이 49재에 참석을 했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몸으로 참가하나 조끔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린, 참 걸림이 없는 그 영혼으로 참석을 했음으로 해서, 이 법문(法門)을 몸을 가진 사람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참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가(靈駕)는 자기가 이 생에 못다 한 한(恨)도 있을 것이고, 또 부모나 처자권속에 대한 미련도 응당 있을 터이나, 그러한 생각—자기가 못다 한 한(恨) 또는 부모자식이나 가족, 유족(遺族)에 대한 미련 이런 것은 현재 영가의 몸으로서는 추호(秋毫)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미련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의 미결(未決)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처자권속이 영가가 염려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니 만큼.

깨끗하게 다—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49재 법요식(法要式)을 받게 됨으로 해서 다 놔버리고,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이 법보단(法寶壇)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날 때까지 안주(安住)를 하시다가, 그동안에 많은 축원과 많은 법문을 듣고서 정말 무량겁 업(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청정한 몸으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유족들은 정말 그 영가가 생존시에 그분 한 분을 의지해서 다 처자권속이 다 생활을 영위해 나오다가, 그 가장(家長)을 잃어버린 슬픔을 무엇에다 비유할 수가 없겠지만, 숙세에 지은 인연이 그렇게 밖에 되지 아니한 것이라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한탄할 것도 없고, 슬퍼한다고 해도 그것이 영가를 위해서 아무 이익이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 이익이 없고, 또 자녀를 위해서도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그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집안일이라든지 또는 직장에 대한 일이라든지 자녀를 키우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반드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잘살 수 있게 될 것이고, 영가도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고 좋은 곳에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유족이 너무 슬픔에 잠겨 가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러면 영가가 어떻게 그것을 보고 차마 떠날 수가 있으며, 또 주부가 그렇게 되면은 자기에 따르는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 잃고 엄마까지 그런다면은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불법을 믿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정신을 차리고 부처님, 불법을 믿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더욱 철저하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참 우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고해(苦海) 중생을 위해서 감로수(甘露水)요, 희망이요, 등불로써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영원한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을—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또 인간적인 고통, 이런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굳세게 만들고 더욱 우리를 훌륭하게 만드는 좋은 채찍이요, 계기요, 관문(關門)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인(修行人)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부가 처음부터서 수월하게 화두 탄 날부터서 점점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려 가지고 그렇게 해서 얼마 안 가면 툭 터진, 그러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 진묵겁(塵墨劫) 전에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그래 가지고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구족하신 그러한 부처님이시지만, 출가해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6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을 겪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새벽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마는.
그러한 꼭 고행(苦行)을 해야만, 고행 자체, 고행을 위한 고행은 아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면 많은 장애를 우리는 만나게 되고 많은 고통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장애를 우리가 슬기롭게, 인내심 있게 극복을 하고 해결해 나감으로 해서 우리는 더욱 신심이 굳건해지고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수행에 도(道)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도처에 스승이 있고, 도처에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이 계시는 것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를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나무~아미타불~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한 가지를 더 입어.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여. 그것은,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두터운 옷을 입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말이여.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이 한 개의 화두가 명역력(明歷歷)하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이 화두가 현전(現前)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어떻게 눈을 번하니 뜨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 한 게송(偈頌)은 우리 수행인에게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간절한 게송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삼동안거 해제와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게송으로써 말을 맺고자 합니다. (18분30초~36분44초) (끝)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