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相)없이2021. 1. 15. 08:05

§((054)) 정법은 근본적인 것, 나무뿌리, 실다운 것. 사법은 지엽적인 것, 끝 가지, 허망한 것. 팔만사천 법문(法門), 모두가 다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선(善)방편과 악(惡)방편.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면 선방편. 방편에 얽어매 두면 악방편 /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 수행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활구(活句)참선이 정법(正法), 사구(死句)참선은 사법(邪法).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

착상구불(着相求佛),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상(相)에 착(着)한 수행은 방편에 얽매인 것 /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송담스님(No.054)—1977년 9월 관음재일(77.09.24) (용054)

 

(1) 약 14분.

 

 

(2) 약 11분.

 

(1) 약 14분. (2) 약 11분.

(1)------------------

 

정법(正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볼 때에 파랗게 잎이 피고, 빨갛고 누렇게 꽃이 핀 그리에만 눈을 주기가 쉽고, 땅속에 묻혀 있는 나무에 뿌리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몸뚱이나, 가지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가 전부 그 뿌리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데에는 도저히 가지가 뻗을 수가 없고, 잎도 필 수가 없고, 꽃도,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사법에 의지한 사람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얻어진 것 같고, 재미가 있고 곧 크게 소원을 성취할 것 같지마는 해가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허망한 삿된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법에 빠진 사람은 곧, 당장 무슨 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기도 혹해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이웃 · 친구 · 일가친척을 전부 끌어들여 가지고, 거기 장에 사람이 모이듯 사람을 끌고 들어가서 미쳐서 어쩔 줄 모르지마는 머지아니해서 거기에는 실망과 낙망과 후회의 눈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법문중, 불법문중에 있어서 선방편(善方便)과 그러한 외도에 사법(邪法)과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점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서 전연 방편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고 대뜸 첫걸음부터서 정법문중에 귀의한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하지마는, 그러한 사람은 극소수,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있을 정도고, 대부분은 방편문에 의지해서 걸려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4년 절에 다니고 법문을 듣고 하다가 차츰차츰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 정법을 믿고 정법에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방편에 의지해서 일단 불법문중에 들어왔다가 그래 가지고 차츰 좋은 도반(道伴), 좋은 스승을 의지해서 정법으로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서 49년 동안을 꼭! 이 정법만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법문이 방편설이 참 많은 것입니다. 방편이 아니면은 중생을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부가 방편에 의해서 전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 자체가 악(惡)하고 선(善)하다고 하기보다는 그 방편을 쓰는 법사, 스승, 선배에 첫째 문제가 있고, 둘째에 가서는 그 방편에 걸려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성이 삿되고 바르지를 못해 가지고 그러한 악방편만 솔깃하게 생겨 가지고 혹해서 미쳐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 방편을 쓰는 편에서 그 법사나, 승려나, 선배가 일시적으로 그러한 방편을 사용하되, 적당한 기회에 그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지를 못하고, 계속 어떠한 이권에 욕심을 가지고 그 방편을 계속 사용해 가지고 신도를 꼼짝 못하게 방편으로 얽어매 두는 그러한 스승을 만나 가지고 일생을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그런 방편법, 악방편에 얽매여 가지고 불교 신도 노릇을 하다가 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동안에 어떻게 불법을 믿었던지 간에 또는 과거에 어떠한 숙연이 있던지 간에 오늘날 우리는 이 법보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정법에 관한 법문을 설하신 것을 녹음을 통해서 듣고, 그 설법에 의지해서 참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 우리의 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다행할 길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고서 그리고서 실천에 옮기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좋은, 아주 좋은 약을 만병통치(萬病通治)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좋은 약을 만나 가지고서도 그 약을 먹지 아니하고 팽가친 채 병고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겨서 열심히 시간을 아끼고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일초일초, 일분일분을 철저히 실천 수행하므로 해서 우리의 무량겁으로부터서 걸려 가지고 신음해 오던 그 중생의 고질병을 금생에 뿌럭지를 뽑아서 근치(根治)를 해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살 활(活)' 자, 활구참선. '죽을 사(死)' 자, 죽은 사구참선, 활구참선은—이론과 어떠한 이로(理路), 어로(語路),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러한 참선은 이것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한다 해도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이 아니고 사구참선입니다.

사구참선은 죽을 때까지 무량겁을 해도,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세하실 때까지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다 해도 그것은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단 일 분을 하고,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참선을 할 바에는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자기가 아무리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모든 경전을 종횡으로 육두 백판으로 외우고 교리적으로 환히 안다 해도 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그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 상식 그러한 것을 이 참선에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이용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것을 동원해 가지고 이 화두를 이리저리 분석해 보고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래가지고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러한 뜻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 이론 따지는 그것을 놔 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화두 '이뭣고?'

'이뭣고?'면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 화두, 또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화두로 타신 분은 그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무슨 화두가 되었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가운데에 한 가지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화두 하나만을 다못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13분48초~27분42초)

 

 

 

 

(2)------------------

 

비단 앉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걸어 다닐 때, 밥 먹을 때, 똥 눌 때, 소지할 때, 빨래할 때, 또는 차를 탈 때,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슬픈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기쁜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불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올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어떤 꽃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또는 사람이 지나간 것을 보거나, 산을 보거나, 구름을 보거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또는 귀를 통해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거나, 어린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우는 소리를 듣거나, 어떠한 것을 보건 듣던 간에 그때 그때마다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참선 수행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당장 그 보는 데에 따라갑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귀로 뭣을 들으면은 그 듣는 일로 해서 바로 나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듣는 그 건으로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10년 전으로 올라갔다가, 5년 전으로 내려왔다가 그러다가 공연히 속이 활딱 뒤집어졌다가, 혼자 웃었다가, 썽났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그러한 식으로 망상(妄想) 위에다가 또 망상의 가지를 피우고 그 망상 위에 또 망상의 꽃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그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골냈다가 웃었다가 그러다가 그 지나간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생각 한 생각했던 그것이 하나도 딴 데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차곡차곡 우리의 마음자리, 제팔식(第八識) 속에 고대로 녹음(錄音)이 되는 것입니다.

 

녹음이 되고, 그 저장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종자(種子)가 되고 원인(原因)이 되어서 앞으로 무량겁 윤회가 그 종자로부터서 그 원인으로부터서 윤회(輪廻)가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한 행동으로 표현이 되고, 한 행동으로 해서 다시 또 생각이 거기에 이어지고, 생각과 행동이 서로—새끼가 왼손에 쥐었던 짚이 오른손으로 건너가고, 오른손에 잡았던 짚이 왼손으로 건너가고 그래서 이렇게 그 손이 움직여짐에 따라서 새끼가 꽈지듯이,

한 생각이 행동으로, 행동에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참선을 하지 아니한 범부 중생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무엇인가 봐야 하고, 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듣기 마련이고, 보고 들음으로 해서 무엇인가 느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사람은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이 법을 충실히 이 법을 본업(本業)으로 해서 열심히 살아간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일, 또는 염불을 하는 일 또는 주문(呪文)을 외우든, 또는 기도를 하건, 어떤 경전을 반야심경을 외우건 또는 천수를 하건, 그 밖에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건, 또는 오후불식이나 일종을 하건, 또는 방생을 하건, 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공덕을 하건, 또는 노인이나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가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좋은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닦는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정법을 닦지 아니하고 계행(戒行)만을 위주해서 닦음으로써 일생 수행을 삼는다던지, 염불을 해 가지고 극락 가기만을 바래 가지고 일생을 염불만을 한다던지, 또는 어떤 주문을 외워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기 위해서, 주문에 의지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전전긍긍을 한다던지, 기도를 해 가지고 아들딸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래고 그러한 물질적인 것, 모냥이 있는 것에 얽매어 가지고 계속 기도에 미쳐 가지고 돌아댕기는 그런 분.

 

절을 많이 하면은 업장이 소멸하고, 소원이 성취된다 해 가지고 삼천배, 사천배 절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하루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면은 세세생생에 부자로 살고, 업장이 소멸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니까 평생에 오후불식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일종(一種)을 하면 좋다니까 일종을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이렇게 해서 그러한 모냥이 있는 착상구불(着相求佛), 착상 수행, 상(相)에 착(着)해 가지고, 모냥에 착해 가지고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그러한 불법을 믿는 사람, 이것은 모두가 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방편의 올개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에 의지한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똑같이 계율을 지키고, 똑같이 염불을 하고, 똑같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보시 공덕을 쌓고 방생을 한다 하더라도 정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 사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염불을 하지 말아라. 천수를 외우지 말아라. 『반야심경』을 외우지 말아라. 『금강경』을 독송하지 말아라. 방생을 하지 말아라.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하지 말아라. 또는 노인에 보시 공덕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형편 닿는 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하시라는 겁니다.

하되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서 하는 그 마음으로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뻑뻑이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일체 보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하는 그 자체는 남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마는, 그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다 같이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27분43초~38분3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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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