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구참선 최상승법2024. 3. 18. 09:19

§(340) (게송)화소산전설천기~ / 참선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 임제 선사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 (게송)삼가촌리형형례~.

**송담(No.340)—1987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용340)

 

(1) 약 14분.

 

(2) 약 5분.


(1)------------------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하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꽃이 산전(山前)에 웃으니, 꽃이 산 앞에 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無生)을 말함이로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꽃이 피고, 또 가을에 오면 가을꽃들이 산에 모다 피는데, 그 울긋불긋 그 피는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그 진리(眞理)를 바로 누설(漏洩)한 것이다.
새가 숲속, 숲 밖에서 그 갖은 목소리로 모다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生]이 없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낱낱이—꽃이 피는 것, 온갖 색깔의 꽃이 피는 그 낱낱이 그 그것이, 크고 작고 노랗고 빨간 온갖 새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들이 낱낱이 스스로 무궁(無窮)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무엇을 잡아 오건—꽃을 한 송이의 꽃을 들거나, 한 곡조(曲調)의 새의 노래를 붙잡거나 무엇을 얻어 오더라도 다 그 근본진리(根本眞理) 아닌 것이 없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0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심우송(尋牛頌) 법문(法門)을 경청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앞부분만을 들었습니다마는, 바닷물을, 그 넓고 끝없는 그 바닷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바닷가에서 조끔만 손고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라도 ‘바닷물이 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만을 한 30분간에 걸쳐서 들었지마는, 그 30분 동안에 설(說)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 속에 ‘우리가 참나를 어떻게 닦으며, 어디에서 찾으며, 왜 그것을 찾어야 한가’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인데 참나, 나의 불성(佛性), 그 ‘참나’ 그것을—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그놈은 생겨난 때가 없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윤회(輪廻)하면서 항상 그와 더불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윤회를 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같이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놈을 자각(自覺)을 하지 못하고 전혀 그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렸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놈을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려 봤자 코밑에서, 콧속에서 뱅뱅 돈다’ 이러한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알기 쉽고 평범한 표현을 하셨지만,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코밑에서 뱅뱅 돌아’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낯, 얼굴을 통해서 낯바닥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그랬습니다.
눈 · 코 ‧ 입 ‧ 귀 모다 이런 것들이 붙어 있는 부분이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그 중심이 코지요? 그 면문(面門)을 통해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위(位) 없는 참사람이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이렇게 임제 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전강 조실 스님은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로써 가장 뚜렷한 것은 ‘숨쉬는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알아볼려면 콧속에 콧김이 들랑날랑한가 안 한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콧속에 숨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숨이 딱 끊어지면 벌써 그것은 죽었다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도는 그 들랑거리는, ‘그렇게 말하면 그러면 콧속에 콧구녁으로 들랑날랑하는 그 공기가 그러면은 참나냐?’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참, 말도 안되지만.

하여간 눈을 통해서 모든 색깔을 판단하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알아보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알아보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분별하고, 몸뚱이를 통해서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느끼고, 생각을 통해서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고, 그러한 놈.
그러한 놈인데, 설사 눈으로는 아주 의식(意識)을 잃어서 빛깔을 판단하지를 못하고, 귀를 통해서도 누구 말인지 뭣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생각이 몽롱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콧구멍으로 쪼끔이라도 가는 숨이 드나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그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처음~13분18초)





(2)------------------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로되  호리유차유천리(毫釐有差謬千里)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요, 저 삼거리 마을 속에 서로 ‘형님, 형님’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다. 저 시끄러운 장바닥에 그 가게 앞에서 그 ‘아자씨, 아자씨’, ‘아부지, 아부지’ 하고 서로 알고 인사하는데.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다. 한 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곧 여기에 있더라.
아무, 불법(佛法)이 뭣인지, 참선(參禪)이 뭣인지, 뭐 깨달음이 뭣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저 거리에 사람들. ‘형님, 형님’ ‘아우, 아우’ 하고는 아주 평범한 그 무식한 그런 사람들 서로 인사할 줄 아는 그놈, 또 시끄러운 장바닥에 모다 가게 앞에서 모다 서로 주고받고 서로 그러한 사람들도 서로 다 안다 그 말이여.
근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모르지마는 다 그 사람들이 낱낱이 다 가지고 있고, 날로 그놈을 쓰고 있고 그놈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꿈에도 아지를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1시간6분17초~1시간11분12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누설(漏泄·漏洩 샐 루/샐 설) ; ①비밀이 남에게 은밀히 알려짐. ②기체나 액체 따위가 밖으로 새어 나감.
*무생(無生) ; ①생겨남[生]이 없는 것[無]. 일체법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도 자성적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멸하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
②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의 한역어. 삼계의 번뇌를 여의어 다시 삼계에 목숨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무생이라고 한다.
*무궁(無窮 없을 무/다할·끝날 궁) ; 끝이 없음.
*심우송(尋牛頌) ; 십우송(十牛頌). 우리의 마음자리를 '소'에다가 비유해서, 소를 찾아서 길들이는 과정을, 수행자가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해 가지고 견성(見性)해서 보림(保任)을 다 완성을 한 다음에 중생을 교화하러 나가는 데까지 10단계로 구분하여 게송으로 읊은 것.

또 그림으로 그린 것을 심우도(尋牛圖) · 십우도(十牛圖) · 목우도(牧牛圖)라 한다. 이 심우도(십우도)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보명(普明) 선사의 목우도(牧牛圖)와 곽암(廓庵) 선사의 십우도이고, 송(宋) 나라 때의 청거(淸居) 선사의 십이목우도(十二牧牛圖), 불국유백(佛國惟白) 선사의 팔목우도(八牧牛圖)가 있다. 곽암 선사의 십우도는 청거 선사의 십이목우도를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위진인(無位眞人) ; '무위(無位)'란 상하 · 귀천 · 범성 · 미오 등 어떤 지위나 차별도 없다는 말. 또는 지위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오간다는 뜻. 곧 '무위진인'이란 궁극적인 경지를 깨달아 모든 지위에 얽매이지 않게 된 참사람(절대자유인)을 가리킨다.


[참고] 송담스님(No.321)—1987년 2월 첫째 일요법회(87.02.01)  (6분9초)
임제 스님은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체계화한 대도사이십니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육조 스님, 육조 스님으로부터 이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이 활구참선을 체계화한 대도인인데.

임제 스님께서 대중에서 법을 설하시기를, "유일무위진인(有一無位眞人)하니, 한 위가 없는—지위(地位)! 지위가 없는, 계급이 없는—지위가 없는 참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상종여등제인(常從汝等諸人) 면문출입(面門出入)하되, 항상 너희들 여러 사람의 면문(面門)으로조차 출입을 해" 들랑거린다 그말이여.
면문(面門)이라 하는 게, 너희들 눈 ・ 코 ・ 입 ・ 귀 이게 면문(面門)이거든. 너희들 얼굴 면문으로부터 그 무위진인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그말이여.

그러니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을 확실히 증거(證據)치 못한 자는, 확실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간간(看看)하라. 잘 살펴볼지니라. 어떠한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인가 잘 살펴보란 말이야.
여러 대중 낱낱이 무위진인이 있는데, 그 무위진인이 어디로 드나드냐 하면은 각자의 얼굴 문으로부터 면문(面門)으로부터 드나든다 이거거든.

그렇게 설법을 하시니까, 그때 한 승(僧)이 나와서 묻기를 "여하시무위진인(如何是無位眞人)잇꼬?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하고 그 (임제) 스님한테 터억 질문을 했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법상에서 터억 내려와 가지고, 그 질문한 스님의 멱사리를 턱! 거머쥐고서 "도도(道道)하라. 일러라" 그러니까. 그 스님이 뭐라고 이를려고 머뭇머뭇 그러니까, 냅다 갖다가 멱사리를 놓으면서 미트러 처내버리면서 이르기를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시심마(是甚麽)오? 무위진인이 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물으시고서 "간시궐(乾屎橛)이니라.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 마른 똥막대기, 이것도 하나의 공안입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나, 무자(無字)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마찬가지로, 이 마른 똥막대기니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고?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렇게 자문자답을 하셨습니다.

그 게송에 대해서 고인(古人)이 게송을 읊으시기를, 면문출입견환난(面門出入見還難)이요, 면문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기가 어렵다. 면문으로 출입하는데 면문으로 출입한 그 무위진인을 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말이여.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지척간(咫尺間)이니라. 그렇게 볼라야 볼 수 없지마는 그 무위진인이 지척간(咫尺間)이여. 바로 거기에 있다 그말이여.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말이여.

거로일신경사엽(去路一身輕似葉)이요, 가는 길에는 한 몸뚱이가 이파리처럼 가벼운데, 고명천고중여산(高名千古重如山)이다. 그 높은 이름은 천고(千古)에 무겁기가 산과 같도다.
이렇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법상에 올라와서 맨 처음에 읊은 게송(偈頌)이 바로 이 게송입니다.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 간시궐(乾屎橛)이다’ 이것은 무서운 공안으로써 오늘 여러분께 말씀을 드린 것은 이 공안을 가지고 천착(穿鑿)을 하고 분별심으로 따지라는 것이 아니고, 이 공안에 콱 맥혀서 알 수가 없거든 이 공안은 그냥 놔두고.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계신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계신 그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서 간절히 거각(擧却)을 하고 의심을 해서 공부에 박차를 가해 간다면, 어느 때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될 때 이 공안도 의심 없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50분27초~56분35초)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 (9분10초)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❶]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❷]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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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贈松源宗長老僧(송원종 장로에게 주다)’ 게송 참고.
*호리(毫釐 털·붓 끝·척도 또는 분량의 단위 호/아주 작은 수·척도 또는 무게의 단위 리) ; ①자 또는 저울 눈금의 호(毫)와 이(釐)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②더할 수 없는 정도로 적은 분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진다’
[참고] 『신심명(信心銘)』 -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하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없으면 툭 트이어 명백하리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지니 도(道)가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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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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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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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자세 호흡)2024. 3. 16. 09:00

§(195) 참선 자세, 준비호흡, 본호흡 / (게송)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 /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그걸 깨달으려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야 한다.

그 한 물건, 그놈이 항상 육근(六根)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왕래(往來)를 하는데, 그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놈을 찾으면 자최가 없어. 그것을 깨달으는 법이 이 공안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95)—1983년 3월 첫째일요법회(용195)

 

약 10분.


오늘은 일요 법회(法會)입니다.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앉으십시오.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자세(姿勢)를 바르게 허리를 쭈욱 펴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고, 흔들다가 한 가운데에다 딱 중심(中心)을 잡으세요.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몸은 단정하게 갖되 어깨나 목이나 눈에다가 힘을 주지 말고 편안하게 긴장을 다 풀고 편안하게 가지세요.

처음에 준비호흡을 세 번을 하는데,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이 벅차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코로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한참 참었다가 입으로 '후-' 하고 내뿜으세요. 가슴을 아주 짜면서 다 내뿜었으면 또 한번 들어마시세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3초고 5초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머물렀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뿜으세요.
다 내뿜었으면 또 한번 들어마시고, 정지했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또 '후-' 하고 다 내뿜으세요. 이것이 준비호흡이어요.

그다음에 인자 본호흡(本呼吸)으로 들어가는데, 이제는 가슴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숨은 코로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 단전(丹田)이라 하면 불두던 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두던 위가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셔요.
물론 코로 들어마시지만 '코로 들어마신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저 뒤에 궁뎅이로 들어마신다' 이러한 기분으로 숨을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하복부(下腹部)가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도록 그러한 느낌으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셔요. 팔부쯤 들어마셨으면 그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딱! 정지(停止)를 해요. 3초 동안 정지를 했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 할 때는 입으로 내쉬었지만 지금은 코로 내쉬는데, '코로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궁뎅이를 통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내보내요. 그러면서 아랫배는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렇게 맨드세요. 그렇게 느끼시면서 숨을 내쉬세요.

계속해서 그렇게 호흡을 하는 겁니다.
준비호흡은 처음에 3번만 딱 하고, 네 번째부터서는 본호흡으로 하는데,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쉬는 거예요.

죽비(竹篦)를 쳐. (죽비 세 번)


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헌데  추이불급홀연래(追而不及忽然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행독좌무구계(獨行獨坐無拘繫)허고  득관회처차관회(得寬懷處且寬懷)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하고, 아침에는 저 남악(南嶽)이라고 하는 산에서 놀더니, 모천태(暮天台)라, 해 저물게는 벌써 천태산에 가 있어.
추이불급홀연래(追而不及忽然來)로구나, 아무리 쫓아가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홀연히 앞에 와 있다 그 말이여.

남악(南嶽)과 천태산(天台山)은 수천 리 수백 리 길인데, 아침에 벌써 남악에서 놀더니 번떡 한 사이에 벌써 천태산에 가서 있어. 몇백 리 밖에 천태산에 가서 있어. 아무리 그것을, 그 사람을, 그이를 따라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저절로 앞에 와서 딱 있더라 그 말이여.

독행독좌무구계(獨行獨坐無拘繫)헌데, 홀로 행하고 홀로 앉었고, 자기가 앉고 싶으면 앉고, 가고 싶으면 가고,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 말이여.
득관회처차관회(得寬懷處且寬懷)로구나. 관회(寬懷)를 얻은 곳에 또한 관회롭다.

'관회(寬懷)'라는 것은 '너그러울 관(寬)' 자, '생각 회(懷)' 자. 조끔도 옹색함이 없이 그 회포(懷抱)가 너그럽다 그 말이여.
천태산이고 남악이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눈 한번 번쩍하면 천태 가 있다, 눈 한번 번쩍하면 남악에 가 있다.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아까 '누진통(漏盡通)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그걸 깨달으려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야 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한 물건을—찾으면 자최가 없지마는, 그놈이 항상 육근(六根)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왕래(往來)를 하는데, 그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놈을 찾으면 자최가 없어. 그것을 깨달으는 법이 이 공안을 타파하는 것입니다.(45분43초~55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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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法會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모이다·모임·만나다 회) ; 불교 의식의 하나.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등의 행사 모임을 가리킨다. 본래 부처님께서 불법을 설하시거나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모임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불두던 ; 불두덩(남녀의 바깥 생식기 주위에 볼록하게 솟은 부분)의 사투리.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게송) ‘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회포(懷抱 품을 회/안을 포) ;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情).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迷惑)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①신족통(神足通) ②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④타심통(他心通) ⑤숙명통(宿命通) ⑥누진통(漏盡通)-이 있는데,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미혹(迷惑 미혹하다·헷갈리다 미/미혹하다·번뇌 혹) ;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미(迷), 미망(迷妄), 미집(迷執)이라고도 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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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95) (게송)원앙수출종군간(鴛鴦繡出從君看)~ / 오신통(五神通)과 육신통(六神通) / 소소영령한 '한 물건'을 깨닫는 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 활구참선법으로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 / 달마혈맥론에, 불급심사(不急尋師) 공과일생(空過一生).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 만중희유(萬中希有).

쇠로 된 못을 박을 때에 맨 처음에 정확히 박아야 하는 것처럼, 참선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 / 선지식 밑에서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 /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

아무리 맑고 깨끗한 경계라도 화두를 놓치고 그 경계에 취해 빠지게 되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한다 / 도인(道人) 행세, 아는 소리를 하지 말라 / 참선은 최고의 수행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송담스님(No.195)—1983년 3월 첫째일요법회(용195)

 

(1/3) 약 16분.

 

(2/3) 약 19분.

 

(3/3) 약 12분.


(1/3)----------------

원앙수출(鴛鴦繡出)은 종군간(從君看)이어니와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지난 임술(壬戌) 동안거 해제(解制)를 지낸 뒤에 처음으로 갖게 되는 법회(法會) 날입니다.

제방(諸方)에서 모다 해제를 하고 그리고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얼굴을 서로 상면(相面)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수행인이 제일 반가운 것은 한 철 두 철 같이 지내던 도반(道伴)이 또 다른 선방(禪房)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해제를 하면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동안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서 마음에 증처(證處)가 있으면 더욱 다행하고 더욱 반가운 일이거니와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만큼 그러한 증처가 없다 하더라도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집을 떠나서 출가(出家) 생활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고향에 친지(親知)를 만난 것보다도 훨씬 더 반가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재물과 색(色)을 멀리 여의고, 명예와 권리를 멀리하고, 그 마음과 행동을 청정히 해서 목숨 바쳐서 도(道)를 닦아서 지혜(智慧)의 달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염불(念佛)이나 또는 주력(呪力)이나, 기도(祈禱)나 또는 참선(參禪)을 해서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신통(神通)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신선도(神仙道)에도 다섯 가지가 있고 오신통(五神通)이 있고, 우리 불법(佛法)에는 육신통(六神通)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오신통이란 게 무엇 무엇 해서 다섯 가지 신통이냐?

첫째, 천안통(天眼通). '하늘 천(天)' 자, '눈 안(眼)' 자, 천안통.
원근(遠近)에 관계없이—산이 맥혔거나, 집이 맥혔거나, 수 천리만리(千里萬里) 밖에 일이라도 어떠한 상태를 내가 보고자 한 마음을 내면 이 자리에서 당장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입니다.
여기서 청와대든지, 서울역이든지 또는 경복궁이든지, 부산이든지, 일본이든지, 미국이든지, 볼려면은 여그 앉아서 찰나간(刹那間)에 그 보고자 한 장면을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천안통.

그다음에 천이통(天耳通). '하늘 천(天)' 자, '귀 이(耳)' 자 천이통은, 여기서 과학적인 어떤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무선기(無線機) 같은 그런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천 리 수만 리 밖에 어떠한 소리를 듣고자 할 때에는 즉시(卽時)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이통이고.

그다음에 신족통(神足通). 비행기나 로케트나 그러한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기서 몇백 리고, 몇천 리고 가고자 한 생각을 내면, 그 생각을 갖자마자 그 가고자 한 목적지에 몸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족통, 또는 신경통(神境通)이라 하는 것이여.
요새 축지법(縮地法)이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이 신족통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족통이여.

그다음에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환히 알아 버리는 것이여. 이것이 타심통이여.

그다음에는 숙명통(宿命通).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에 모든 일을, 모든 사람에 인과(因果), 모든 사물에 생성 과정과 장래에 사태에 대해서 환히 다 보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숙명통입니다.
어떠한 사람을 보면 과거에 저 사람이 무엇을 하다가 금생(今生)에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금생에는 저렇게 살지만 내생(來生)에는 무엇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숙명(宿命)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超能力)입니다. 이걸 숙명통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상 천안통 ‧ 천이통 ‧ 신족통 ‧ 타심통 또 숙명통, 이 다섯 가지를 오신통(五神通)이라 하는데, 이 다섯 가지는 불교(佛敎)가 아닌 저 신선도, 도교(道敎) 신선도(神仙道)에서도 이 다섯 가지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신통 밖에 또 한 통(通)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신통. '샐 루(漏)' 자, '다할 진(盡)' 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통(通)은 어떠한 능력이냐 하면,
내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항상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쓰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그놈을 동용(動用) 중(中)에 찾어보면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분명 소소영령한데 찾어보면 자최가 없는 그러한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버리는 거여.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는 것이여.

어떻게 하면 이것을 볼 수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가 있느냐?
'메아리 없는 골짜기'와 '뿌리 없는 나무'와 '밑 없는 배'와 '구멍 없는 젓대'를 고인(古人)들은 바로 이 '한 물건[一物]'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 공안)를 간택(揀擇)을 받아서 그 간택 받은 공안(公案)을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쓰지 아니하고 이 공안을 참구(參究)를 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를 하면, 이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26초)





(2/3)----------------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어떻게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하는가?' 참구할 때에 마음가짐과 몸가짐과 호흡하는 법, 그러한 기본적인 것을 말씀을 드렸고, 이 공부를 해 나갈 때에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더라도 그 경계에 집착(執着)을 하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참구해 나갈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공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指導) 없이는 백에 하나, 만에 하나도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지 아니할 때에 목적지에 바로 도달하기란 바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처음 가는 길은 가다가 두 갈래 길, 세 갈래 길, 네 갈래 다섯 갈래 길이 나올 때에 길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거나, 길 아는 사람에게 묻지 않고서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바로 가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 닦아 가는 길,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공부의 길은 두 갈래 · 세 갈래 · 다섯 갈래 정도의 길이 아니라, 수천 수억만 개의 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많은 길을 어떻게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 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라' 하시고,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이 얻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부를 바로 지어가기 위해서는 스승의 지도와 간택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20분16초)


여러분이 쇠로 된 못을 벽이나, 어떠한 나무나, 그런 데에 박을 때에 맨 처음에 박을 때에 정확한 자리에다가 옳게 박아서 제자리에 들어가야지, 처음에 박을 때에 조끔 비켜서 어문 구녁에다가 박아 놓으면 그놈을 빼서 다시 정확하게 박을려고 해도 아까 잘못 들어갔던 구녁으로 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 박았던 데로는 안 박고 그 옆에다가 정확하게 박으려고 망치질을 해도 몇 번 박다 보면은 아까 그 뚫어진 잘못된 구녁으로 못이 잘못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지식(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지, 바른 지도 없이 잘못하면 잘못된 경계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잘못된 경계에 빠지게 되고, 그 잘못된 경계를 스스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경계가 항시 나타나게 되고, 그 경계에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처음 발심(發心)한 사람이 공부를 보다 더 알뜰하게, 보다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저 산중(山中)에 토굴(土窟)이나, 한적하고 사람 오지 아니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밤잠을 안 자고 먹을 것을 굶어가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을 하면서 피나는 고행(苦行)을 해 보았으면, 죽든지 살든지 내가 한바탕 해 봤으면' 이러한 간절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대단히 갸륵한 생각이고 기특한 생각이지만.
고인(古人)네들이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인가(印可)를 맡은 다음에 다시 보림(保任)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깊은 산중에 토굴로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깊은 산중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리 밑에나, 그렇지 않으면 시장(市場) 바닥이나,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얼마든지 혼자 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화두를 선지식한테 타거나, 책을 통해서 자기가 적당히 하나를 골라잡거나 별것이 없습니다.
별것이 없으나 차츰차츰 세월이 가면서 어떠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공안(公案) 참구(參究)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거나, 소견(所見)이 생겼을 때에 자기가 철저하게 믿는 선지식(善知識) 없이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할 때에 그러한 경계에 대해서 문의할 데가 없고, 그것을 갖다가 간택 받을 데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잘못 되어 가도 옳게 되어 간 줄 착각하기가 쉽고, 옳게 되어가도 이것이 잘되어 가는지 못되어 가는지 스스로 의심이 나고, 그래서 중대한 고비에서 공부가 중단되거나 후퇴하거나 갈팡질팡해서 불안하고 초조한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 뒤에 어디 어느 분한테 가서 이것을 간택을 받을까 하고 이리저리 찾아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말을 하고—때로는 '옳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그르다' 그러고, 어떤 분은 '큰일났다' 그러고, 어떤 분은 '공부가 잘 되어 간다' 그러고, 도대체 점점 여기저기 물어볼수록에 점점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고 어찌 해볼 수가 없는 그러한 심경(心境)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먼저 스승을 찾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이,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혼자 하면 제일 먼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함정이 무엇이냐 하면,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한 철 두 철을 못 가서 맨 처음에 맛보게 된 경계가, 망상(妄想)이, 그렇게 퍼일어나던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서 화두(話頭)에 대한 간절한 의심(疑心)이 북받쳐 오르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그렇게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녹음 끊김)....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를 못하고,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내갔는지 두 시간이 지내갔는지 세 시간이 지내갔는지 시간이 지내가는 것조차도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여.
캄캄한 밤에 있어도 어두운 줄을 모르고, 혼자 있어도 심심한 줄을 모르고, 하늘을 보나 산을 보나 땅을 보나 모든 것이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다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할 뿐입니다.
이러한 경계에서 그 경계가 너무 깨끗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편안해서 그 싱그럽고 묘(妙)한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편안을 하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좋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기쁘다' 해도 맞지 아니하고,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그러한 경계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너무 싱그럽고 너무 맑고 깨끗하니까, 자칫하면 그 맑고 깨끗한 경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話頭)를 놓치는 순간이 공부가 잘못 비끄러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묘한 경계에 들어가서 너무너무—그것을 법희(法喜)라고 할까? 법열(法悅)이라고 할까? 선열(禪悅)이라고 할까?—맑고 깨끗하다 못해서 너무 싱그럽고 묘해서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린다면, 더군다나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맛들여서 그 경계에 빠지게 되면, 그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15분30초~34분17초)





(3/3)----------------

자기의 육신(肉身)이 이 세상에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그 자리에서는 선악(善惡)도 없고, 밝고 어두운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고, 지옥(地獄)과 천당(天堂)도 없고, 부처와 중생(衆生)도 없는 그러한 경계에서, '하! 바로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의 경계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眞空)이요 묘유(妙有)로구나!'
고조사(古祖師)가 설하신 어록(語錄)도 뒤져 봐도 하나도 맥힐 것이 없이 환한 것 같고, 어떠한 경전(經典)을 떠들어 봐도 모두가 이러한 경계를 두고 말씀하신 것 같고, 어떠한 경계, 공안(公案)을 봐도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안 나고, '하!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것이로구나' 아! 이래 가지고 자기도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경계에 취해서 그러한 경계를 계속해서 그 경계를 지켜 나간다?

지켜 나가면, 무엇이 알아지기도 하고, 캄캄한 밤에도 환하게 뭣이 다 바늘 떨어진 것도 다 보이기도 하고, 벽 문을 닫어 놓고 방안에 앉아서도 벽 밖에 것이 환히 보이기도 하고, '내일은 누가 찾아오겠다' 그런 것도 알아지기도 하고.
'아! 그 이것이 바로 신통(神通)이로구나! 내가 견성(見性)만 한 것이 아니라 신통까지 났구나!' 이러한 경계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누구에게 이것을 얘기하며 누구에게 이 소식을 말할 수가 있을까?

모든 사람을 봐도 모두가 다 불쌍하게 보이고, 도 닦고 있는 모든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을 봐도 어문 다리를 긁으며 헛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철이 안 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스승 없이 깨달랐다' 경(經)을 봐도 맥힘이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공안(公案)을 봐도 맥힘이 없다 이거여.

그러니 신통까지 났겠다, 다른 사람에게 법문(法門)을 하면, 다른 사람은 역시 모르니까 그이가 인물도 좋고 말도 잘하고, 더군다나 유식해서 경(經)도 잘 설(說)하고, 이럴 경우는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그이를 만나게 되면은 다 훌륭한 선지식이요, 도인이라고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본인도 도인이요 '신통이 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도 틀림없는 도인으로 보여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차츰차츰 자연히 도인(道人) 행세를 하게 되고, 아는 소리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만(自慢)이 생기면 계행(戒行)도 해이(解弛)해지게 되고, 수행(修行)도 해이해지게 되어서 차츰차츰 옛날에 그 계율을 지키면서 산중에서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할 때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해이해지고 따라서 탁(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탁한 생활이 시작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맑고 그랬던 경계는 간 곳이 없고, 따라서 과거에 무엇을 훤히 알고 어떠한 신통력을 행하고 했던 것이 둔해지고 무디어져서 뭘 봐도 벽 밖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고, '오늘 누가 올 거다' 한 것도 잘 몰라지고 그렇게 된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지만 자기를 추종(追從)하는 제자와 신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줄 알고 계속 따라오고 있고, 자기는 속으로는 다 그런 신통력이 없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없어져 버렸지만 모두가 다 자기를 훤히 알고 있는 걸로 알고 추종을 하는데 모른다고 하면 챙피하고, 그러니까 계속 아는 척은 해야겄고, 이러다가 결국은 모든 것이 백일하(白日下)에 다 폭로(暴露)가 되고.
막행막식을 하고, 말을 함부러 하되 법도(法度)에 맞지 아니하고, 이렇게 될 때에 자기를 과거에 항상 따르고 보호해 주던 선신(善神)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악신(惡神)과 마귀(魔鬼)가 자기를 침범하게 되는 것입니다.(41분45초)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열심히 도를 닦으면 반드시 선신(善神)이 자기를, 그이를 옹호(擁護)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하면, 선신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삿된 귀신과 악한 신이 자기를 침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도 망신을 하고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도 망신을 하게 되고. 만일의 경우 법에 저촉이 되는 행동을 했다면 영락없이 국가의 법에서도 그이를 구속(拘束)해서 가두기도 하고 또는 사형(死刑)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능엄경(楞嚴經)』 속에, 오십삼변마장(五十辨魔障)에 소상하게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예를 가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이 참선(參禪) 공부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고(最高)에 수행(修行) 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정신병자가 되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끊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머리빡을 바위나 벼람박에다 부딪혀서 유혈(流血)이 낭자하다가 피를 흘리고 죽게 되기도 하고, 그 마(魔)에 섭(攝)해 가지고 일어나는 현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라 이것입니다. 물이 한번 엎질어 버린 다음에는 다시 쓸어 담기가 어렵듯이, 이 공부도 한 번 잘못되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이여. 그러니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이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이 참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에 참선은 반드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34분18초~45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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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원앙수출종교간(鴛鴦繡出從敎看)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度與人) ;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거니와 금침(金針)은 그대에게 건네줄 수가 없다’
[참고 ❶]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아까 시작할 때에 읊은 “원앙수출(鴛鴦繡出)은 종교간(從敎看)이어니와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度與人)이라. 원앙새 수놓은 것은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지마는 원앙새 수놓은 그 바늘은 여러분에게 줄 수는 없다” 이러한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에게 얘기해 드릴 수 있지마는 그 깨달음 그 자체는 여러분에게 줄 수가 없다. 그 깨달음은 여러분 자신이 깨달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은 부처님으로서도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것을 실천을 통해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1시간27분36초~1시간28분49초)

[참고 ❷]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칙 ‘주행(周行)’ p27. p40~41.
世尊初生下時 周行七步 目顧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云 天上天下唯我獨尊[雲門偃拈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

세존께서 처음 탄생하실 때,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며 한 손으론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론 땅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圓通璣 上堂擧此話云 可謂欺視三界 傍若無人 最好是雲門 出來道 至天下大平 然 此二古聖 於建化門中 善則善矣 美則美矣 若於本分事中 檢點將來 猶欠一着在 敢問大衆 作麽生是本分事 良久云 鴛鴦繡出從敎看 莫把金針度與人

원통기(圓通璣)가 상당하여 이야기를 들어 말하였다. “가히 삼계(三界)를 속이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짓이구나. 가장 좋은 것은 운문(雲門)이 나와서 말하기를 ‘천하의 태평이나 도모했을 것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성인이 건화문(建化門)에서 볼 때엔 좋기는 좋고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만약 본분(本分)에서 장래를 점검해 보면 그래도 하나가 모자란다. 삼가 대중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본분의 일이라 하는가?”
그리고는 양구했다가 말하였다.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거니와 금침(金針)은 그대에게 건네줄 수가 없다”

*운문 선사의 방(棒) :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의 내용을 말함. 『선문염송(禪門拈頌)』 제2칙 '주행(周行)‘ 참고.
[참고]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 ; 석가여래께서 출생하면서 바로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가장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여러 조사 스님들이 해석도 하고 칭송도 한 바가 많지마는,
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선지식들은 『아! 운문이야말로 참으로 「유아독존」의 뜻을 잘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답다』하고 모두 칭찬하였다.
*계해년(癸亥年) ; 1983년.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색(色) ; ①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 ②육체. ③집착 또는 색욕.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주력(呪力) ;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의 효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통력(神通力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힘 력) :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通] 초인간적인[神] 능력[力].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숙명(宿命 미리·본디 숙/운수 명) ;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19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화두 게문

 


이 자(字)는 ‘보일 시(示)’ 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 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간택(揀擇 가릴 간/가릴 택) ;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알아 선택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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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산스크리트어]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불급심사 공과일생(不急尋師空過一生) ;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는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에 있는 말씀.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혈맥론(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不急尋師 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 萬中希有 若自己 以緣會合 得聖人意 卽不用參善知識 此卽是生而知之勝學也 若未悟解 須勤苦參學 因敎方得悟 若自明了 不學亦得 不同迷人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만약 자기가 인연을 만나 성인의 뜻을 얻었다면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之] 정말 뛰어난 학인이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부지런히 애써 선지식을 찾아가 배우라. 스승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만일 스스로 분명히 알았다면 배우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과는 다르다.
*어문 ; '딴', '다른', '엉뚱한'의 사투리.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7~139. (가로판 p133~135)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하얀  早訪高玄하야  機味를  完轉하야  無正無偏하야  明師가  許爾어든  再入林巒하야  茅庵土洞에 苦樂을  隨緣하야  無爲蕩蕩하야  性若白蓮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회중(會中) ; 설법의 자리에 모인 사람들. 수행자의 집단.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소견(所見 도리道理·사리事理 소/생각·견해 견)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❶]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❷]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법열(法悅 부처님의 가르침 법/기쁠 열) ; ①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거나 배우고 따르는 기쁨[悅]. ②진리[法]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기쁨[悅]. 법희(法喜), 법락(法樂) 등과 같은 뜻이다.
*선열(禪悅) ; ①선정(禪定)에 드는 기쁨. ②참선할 때 가슴에 잔잔히 사무치는 기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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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묘유(眞空妙有) ; 일체를 공(空)이라 하여 부정했을 때, 갖가지 사물은 그대로 긍정되어 묘유(妙有)라고 하는 것. 또 진리 내지는 진여(眞如)가 일체의 망상을 떠나 증가하지도 줄지도 않는, 집착을 떠난 모습을 진공(眞空)이라 칭하며, 상주불변(常住不變)하고 더욱이 현실을 성립시키는 진실의 유(有)인 점을 묘유(妙有)라 함. 본래, 진실의 공은 묘한 현실의 생성, 전개가 되는 것임을 말한 것.
*진공(眞空) ; ①아트만(산스크리트어 ātman)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②소승불교에서 설하는 열반을 가리켜 말함. 허위가 아니므로 진(眞)이라 하며, 일체의 상(相 : 특성)을 떠나 있는 까닭에 공(空)이라 함. ③유가 아닌 유인 묘유(妙有)에 대하여 공이 아닌 공을 말함. 이것이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임. 진실의 공.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막행막식(막行막食) ; 수행자의 분에 맞지 않게, 행동이나 음식을 막 행(行)하고 가리지 않고 막 먹는 것.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옹호(擁護 안을·지킬 옹/보호할 호) ; 어떤 대상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킴.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마(魔)에 섭(攝)해 가지고’ ; 마섭(魔攝).
*마섭(魔攝) ; 마(魔)에 포섭(包攝)되다. 마에게 끌려들어 그의 편이 되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몽매지간(夢寐之間) ; 잠을 자며 꿈을 꾸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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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