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2025. 4. 1. 11:06

§(366) (게송)행년홀홀급여류~ / 무상한 이 몸뚱이를 받아 났지마는 이 몸뚱이 받았을 때에 발심(發心)을 해서 최상승법에 귀의해 생사해탈을 해라 /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하면은 생사해탈 길로 가는 것.
(게송)심수만경전~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심(生死心)이고,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다 / 일체처 일체시에서 염념불망(念念不忘) 화두를 거각(擧却)—의단독로—타성일편—어떠한 찰나에 그 의단이 툭 터져버리게 되는 거여. 통 밑구녁이 빠져서 그 통에 담아논 것이 확 쏟아져 나오듯이, 깨달음.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구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하다. ‘그윽하다’ 하는 것은 생사에 휩쓸려 끌려가지 아니한 것을 말하는 거여.

깨달은 사람은 바로 깨달은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우리 아직 깨닫지 못한 이 중생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잠깐 사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염념불망(念念不忘)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 (용366)(무상)

 

약 17분.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한데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차일신비아유(只此一身非我有)하니  휴휴신외갱하구(休休身外更何求)오
나무~아미타불~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한데, 흘러가는 세월이 빠르기가 흘러가는 물과 같다 그 말이여. 잠시도 머꾸지 않고 주야(晝夜)를 불철(不撤)하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끝없이 흘러가 버리는데,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다. 늙은 빛이 얼른얼른 머리 위에, 그 해가 머리 위에 올라왔다 그 말이여.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 육십, 칠십이 언제 어떻게 흘러간 줄 모르게 이렇게 흘러갔어.
마치 저 동쪽에 뜬 해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그럭저럭하다 보면 아침해가 낮이 되고 그럭저럭하다 보면 벌써 서산(西山)에 저버린다 그 말이여.

지차일신(只此一身)도 비아유(非我有)인데, 다못 이 한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여. 내 소유라고 할 수가 없어.
휴휴신외갱하구(休休身外更何求)냐. 그렇거든 이 몸 밖에 다른 무엇을 더 구할 것이 있느냐?

무상(無常)한 이 세월, 무상한 이 몸뚱이가 낳아 가지고 그럭저럭하다가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는 희끗희끗 흰머리가 나고, 허리는 아프고, 그러한 내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먹이고 입히고 잘 간수하고 한 이 몸뚱이도 ‘내 몸뚱이다, 내 것이다’ 하고 할 수가 없어.
내 것이면은 내가 마음대로 해야 할 텐데, 내가 내 몸뚱이를 아무리 먹이고 입히고 잘 애끼고 간수를 한다 해도 제멋대로 늙어버리고, 제멋대로 고장이 나고 병이 나서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소용이 없이 결국은 늙어서 병들어 죽어 버려. 이 몸뚱이도 내 몸뚱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이 몸뚱이 밖에 무엇을 더 구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재산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고, 권리를 구하고 천만 가지를 구해 봤던들 뜻대로 잘 구해지지도 않지마는 설사 뜻대로 이뤄졌다 해도 나와는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어.
그것 그렇게 구해졌다 해도 실지로 내가 행복해지냐 하면은 오히려 근심과 걱정만 더할 뿐이지 행복하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있느냐 하면은 그렇게 피땀 흘려서 벌어놓은 것이지마는, 갈 때는 한 가지도 가지고 가지 못하더라.


방금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무상한 이 몸뚱이를 받아 났지마는 이 몸뚱이 받았을 때에 발심(發心)을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고, 또 이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된 이 몸뚱이를 부모를 의탁해서, 아버지 어머니에 의탁해 가지고 그래 신세를 지고서 이 몸뚱이를 받아 났습니다.
받아 났지마는 최상승법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그저 잘 먹고 잘 입고, 명예와 권리 이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행복인 줄 알고 거기에 집착이 되어서 허대다가 본의 아니게 죄만 잔뜩 퍼짓고, 그래 가지고 결국은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서 업경대(業鏡臺) 앞에 서면은 평생 동안 지은 가지가지 죄가 거기에 다 나타나고 또 거기 염라대왕 앞에 있는 그 저울대에 떠억 달면은 그 죄를 얼마만큼 많이 지었는가, 무겁게 지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업(業)을 어떻게 짓게 되느냐 하면, 입으로 짓고, 몸뚱이로 짓고, 우리의 마음으로 짓고 이렇게 짓는데,
눈으로 무엇을 보면서 그 보는 그 상대 객체(客體)에 따라가면은 눈을 통해서 짓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은 그 듣는 그 소리로 우리의 생각이 끌려가면은 귀로 들으면서 죄를 짓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그 냄새로 끌려가면은 냄새 맡다가 죄를 짓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은 그 생각한 쪽으로 끌려가면은 생각하다가 죄를 짓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인식을 하는데, 그 인식하는 그 찰나에 그 객체(客體)로 끌려가느냐? 그 객체를 만나자마자 바로 거기서 돌이켜 가지고 화두(話頭)를 드느냐?

여기에 따라서 업을 지어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로 떨어질 수도 있고, 거기에서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하면은 생사해탈 길로 가는 것이거든. 이것이 천하 간단한 것이고 분명한 것이여.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마음이 경계(境界)를 따라서 굴러가. 마음이 일만 경계를 따라서 굴러가는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굴러가는 곳에 실로 능히 그윽하다. ‘굴러가는 곳’이라는 게 크게 말하면은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말이 되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는, 천당에 가기도 하고, 아수라가 되기도 하고, 또 인간이 되기도 하는 그 육도윤회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선 당장 우리가 금생에, 지금 이 찰나에 일념에다가 그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를 붙여서 보자면, 바로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상대하는 바로 그 찰나에다가 맞출 수가 있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심(生死心)이고,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다. 이렇게 볼 때에 육도윤회는 바로 육근이 육경을 상대하는 그 찰나찰나가 바로 육도윤회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최상승 학자는 항상 시방세계(十方世界)도 일념(一念) 속에서 봐야 하고, 육도윤회도 일념 속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생사도 바로 일념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아까 말한 눈으로 청황적백 어떠한 색상을 볼 때에 바로 그 찰나가 바로 전처(轉處)—경계를 따라 굴르는 곳인데, 그 구를 때에 어떻게 해야 능히 그윽할 수가 있느냐?
구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하다. ‘그윽하다’ 하는 것은 생사에 휩쓸려 끌려가지 아니한 것을 말하는 거여.

깨달은 사람은 바로 깨달은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우리 아직 깨닫지 못한 이 중생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잠깐 사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염념불망(念念不忘)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그렇게 일념 일념을 그렇게 단속을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 해 나가면 마침내는 화두가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낮에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다닐 때나 일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그 화두가 매(昧)하지 않도록.
처음에 잘 안되니 지어서라도, 억지로라도 지어서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다 보면 나중에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게 되고, 망상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 말이여.

설사 눈으로 무엇을 보아서 ‘저것이 산이다’ 잠깐 사이에 저게 산인 줄 보이지만 산으로 쫓아가지 안 해. ‘산이 높다, 푸르다, 저 산에 구름이 끼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보자마자 처꺽 화두를 들어버린다 그 말이여.
나중에는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사람을 봐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하늘을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다못 의단이 독로할 뿐이다 그 말이여.
눈을 뜨고 있지마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 귀를 막지 않고 열어놓고 있지마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게 되어. 그래서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인식을 못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라.

이렇게 해 나가면 밤에 자되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고,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도 오직 화두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려져 갖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렇게 가면 어떠한 찰나에 그 의단이 툭 터져버리게 되는 거여. 통 밑구녁이 빠져서 그 통에 담아논 것이 확 쏟아져 나오듯이.

이것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이 이렇게 해 가지고 다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처음~16분4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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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행년홀홀급여류~’ ;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진각국사 혜심) ‘식심게(息心偈)’ 참고.
*머꾸다 ; ‘멈추다’ ‘막히다’의 사투리.
*‘주야(晝夜)를 불철(不撤)하고’ ; 불철주야(不撤晝夜).
*불철주야(不撤晝夜 아니 불/거둘·치울·그만둘 철/낮 주/밤 야) ; 어떤 일에 몰두하여 조금도 쉴 사이 없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아니함[不]. 밤낮없이.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녹음 법문(錄音法門) ;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허대다 ; ‘나다니다(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다니다)’의 사투리.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업경대(業鏡臺) ; 지옥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죄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업경 혹은 업경륜(業鏡輪)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어 지옥에 이르면 염라대왕은 업경대 앞에 죄인을 세우고, 업경대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며, 죄의 경중이 판가름나면, 그에 따라 가야 할 지옥이 정해진다.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 · 구 · 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 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객체(客體) ; ①작용의 대상이 되는 쪽. ②주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인간의 인식과 실천의 대상.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관조(觀照 보다·관찰하다 관/비출 조) ; ①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 ②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게송)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悉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굴러가는데, 굴르는 곳마다 다 그윽하더라. 그 흐름을 따라서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성품을 봐 버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을 것이다.
[참고] 『직지(直指)』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白雲和尙 抄錄 |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생사(生死), 생멸심(生滅心)도 같은 뜻의 말.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정리.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송담스님(No.475)—1992년 6월 첫째 일요법회(92.06.07) 법문에서.(3분16초)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데 관해 요긴한 법문을 간곡히 해 주셨는데,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생사의 고해 속에서 무량겁을 이렇게 오고, 또 앞으로 무량겁을 생사고해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 할 그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 우리의 생사심(生死心).
눈으로 보고 생각이 일어나고, 귀로 듣고 중생의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이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그 생사심을 결국은 그놈을 깨뜨려 버려야 하는데, 억지로 그놈을 깨뜨리려고자 한다고 해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니거든.

그 생사심을 깨뜨릴라면은 결국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을 해라. 화두,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들고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이 생사심을 깨뜨리고, 그 마음길을 끊어버리는 가장 중요하고도 요긴하고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여.

생사심(生死心)을 억지로 그놈을 누를려고 한다든지, 억지로 끊을라고 한다든지,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여. 무슨 생사심, 무슨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즉각 ‘이뭣고?’ 또 일어나면 또 ‘이뭣고?’
자꾸 ‘이뭣고?’ 간절한 의심으로 ‘이뭣고?’를 거각(擧却)해 나가면 결국은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화두가 들리게 되고,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터억! 독로하게 된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조사관(祖師關)을 뚫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13분1초~16분17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 · 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낭연독존(朗然獨存 밝을 랑/그럴 연/홀로 독/있을 존) ; 밝게 홀로 드러나다.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염념불매(念念不昧) ; 생각 생각에 매(昧)하지 아니하다. 생각 생각에 또렸하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6분28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참고 ❸] 송담스님(No.364)—19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5분2초)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를 생각을 해,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하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하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 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 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하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생각을 좀 할려고 해도 안 되는 거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18분19초~23분18초)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매하다(昧-- 어두울 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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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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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용화선원2025. 2. 23. 15:30

§(130) 송담스님 오도송(悟道頌). 전강선사가 송담스님에게 내리신 전법게(傳法偈) / 용화사 법보전 낙성식 / 법보전 만년위패 영가(靈駕)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위대한 도움으로 불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 법보선원의 개설 의의는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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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 조실 스님께서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세수 77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시고 송담 스님께서 법좌를 이어 받으셔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계 법회를 하실 때는 법상에 오르셔서 하셨는데 일반 법회는 법상에 오르시지 않고 서서 법문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1980(경신)년 동안거 결제 및 법보전 낙성식(80.10.15.음) 법회 전에 사제이신 능파 스님께서 “이제 법상에 오르셔서 법문하시지요” 하시니 방에서는 사양하시다가, 법당에서 능파 스님께서 가사를 수하고 3배를 올리며 청법하시니까 드디어 법상에 오르셔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후 법회에 계속해서 법상에 오르셔서 법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1980(경신)년 동안거 결제 법문(No.130)이 실질적인 개당보설(開堂普說)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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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이 음질이 매우 안 좋은 것은 사중(寺中)에서 하는 녹음이 안되어서, 성천 스님이 이 법회에 참석한 고만덕성 보살님이 당시 개인 휴대용 녹음기로 녹음한 것을 어렵게 수소문해 구해 남긴 것입니다. 소음이 매우 심하고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듣기가 어렵지만 이 녹음본(錄音本)이라도 구해 남긴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송담스님(No.130)—1980(경신)년 동안거 결제 및 법보전 낙성식 법어(80.10.15.음)(용130)(용화선원)

 

약 21분.


황매산정춘설하(黃梅山庭春雪下)헌디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십년왕비력(何事十年枉費力)고  월하섬진대강류(月下蟾津大江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어떤 부질없는 중이 참선을 허다가 공연히 느낀 바가 있어서 이러헌 게송(偈頌)을 읊어봤습니다.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하사십년왕비력(何事十年枉費力)고, 무슨 일로 십 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낭비했던고, 월하섬진대강류(月下蟾津大江流)로구나, 달 아래 섬진 대강이 흐르는구나.

이러헌 게송을 부질없는 중이 한번 읊었는데, 어떤 일 없는 도인(道人)이 이것을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비법무비법(非法無非法)헌디  무법역무심(無法亦無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일추색다(此日秋色多)헌디  강송백운비(江松白雲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비법무비법(非法無非法)헌디,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무법역무심(無法亦無心)이라,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차일추색다(此日秋色多)헌디  강송백운비(江松白雲飛)로다. 이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나는구나.

이것은 한갓 일기지사(一期之事)에 지내지 못합니다. 이 일기지사에 지나지 못한 이것이 억겁을 두고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시방세계에 모든 납자(衲子)와 육도법계에 모든 곳에 원래로 일이 없는 가운데에 편안한 곳을 향해서 큰 대난을 일으키고 마는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출현허신 것도 오직 이 일기지사 때문이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는 모든 고해(苦海) 중생의 이 일기지사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용화사 법보전 준공식을 낙성식을 맞이해서 단 한 분에게도 단 한 장의 통지문도 발송을 허지 아니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신남신녀 여러분들께서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이 자리를 빛내주셔서 뭐라고 인사의 말씀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불사(佛事)가 오늘 이만큼 이루어지게 된 것은 첫째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로 이루어진 것이고, 둘째로 조실 스님께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정법도량(正法道場)에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을 허도록 자비의 씨앗을 이 주안 갯벌 가에다가 뿌려주신 그 인연으로 해서 우리가 이렇게 이런 도량을 건립허게 된 것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이 정법도량을 직접적으로 건설하는 데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가운데 건설을 해 주신 시공자 삼호주택 주식회사의 모든 직원들, 그리고 이 건물을 이러헌 훌륭한 모습으로 설계를 해주신 설계자 전 교수님 그리고 세부에 들어가서 설계를 맡아주신 삼우태양, 그 밖의 목공 미장 심지어 잡부에 이르기까지 이 일을 허는데 각기 최선을 다하신 그 공덕(功德)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헌 공사가 이루어지도록 뒷받침을 해 주신 데는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한마음 한뜻으로 정법을 아끼는 뜨거운 정성을 모은 여러 시주(施主)와 화주(化主), 신남신녀 여러분들의 정성 그리고 천지자연의 위대한 힘, 마지막으로 정말 빼놓지 못할 것은 우리 용화선원 법보전에만 계신 만년위패(萬年位牌) 법보제자 각열위 영가(靈駕)에, 우리 눈으로써는 볼 수 없지만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위대한 도움으로 이러헌 어려운 불사가 이만큼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법보제자 여러 영가는 여기에서 법문(法門)만 듣고 잘 계시려니 이렇게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이 영가 여러분은 살아계시는 여러 신남신녀 이상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매회 법회 때마다 법문을 경청한 가운데에 나날이 정진(精進)을 거듭해서 과거에 한량없는 죄업이 다 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서 인연 따라서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 다 인연 따라서 왕생(往生)하시고, 그 가운데에는 인도환생(人道還生) 허셔서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되돌아오신 많은 분들이 계실줄 나는 믿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축원을 하고, 법회 때마다 천도(薦度)를 하고, 법회 때마다 좋은 법문을 들은 그 영가가 참으로 천도되지 아니할 까닭이 없고,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이나 인도환생을 못하실 이유가 없고, 그러헌 신령스러운 영가들이 이 정법도량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가만히 앉어서 구경만 하고 계실 이유가 없고.
이 우주 법계(法界)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보다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가의 위치로 존재하는 수많은 중생이 꽉 차 있으니 우주 법계에 꽉 차 있는 영가 가운데에 여러 신남신녀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법보선원(法寶禪院)에 모셔진 이 영가는 선택된 영가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를 임시 방가루(bungalow)로 삼고 있을 뿐이지 한 생각 한숨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이 방가루는 10초도 못 가서 버글버글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던 이 주인공(主人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눈 한번 깜박헐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천년만년 미래와 과거로도 자유자재로 왔다갔다하는 이 한 물건, 이 한 물건은 살아 있을 때는 ‘마음이다, 성품이다, 정신이다’ 이렇게 말을 허지만 이 몸뚱이가 이 몸뚱이로부터 떠나는 찰라에 이름이 ‘영혼이다, 귀신이다, 영가다, 중음신(中陰身)이다’ 이렇게 이름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면 사람이라 하지만, 다른 껍데기를 뒤집어쓰면 때로는 소라 하기도하고 개라 하기도 하고 고양이라 하기도 하고 쥐라 하기도 하지만 한량없는 종류의 껍데기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무량억겁을 우리는 돌고 돌아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왔습니다.
금생에 다행히 이런 사람 몸을 받아 났을 때에 이러헌 정법을 만났을 때 나의 영혼을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몇억만 겁을 돌고 돌다가 어느새 어느 때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보장을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행히 사람 몸 받고, 불법 만나고, 이 정법 만났을 때에 최선을 다해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기 위해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이곳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을 하셨습니다.
그 씨앗이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의 노력과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와 천지자연의 보궐, 신남신녀 여러분 그리고 건축 맡아주신 여러 업자들의 정성으로 이렇게 이뤘으니 한층 깊이 믿어서 결정코 우리는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으로 다짐을 해 가지고 닦아 가시면...(처음~20분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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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황매산정춘설하(黃梅山庭春雪下)~’ ; 송담선사 오도송(悟道頌).
*부질없다 ; 대수롭지 아니하거나 쓸모가 없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황매산 ; 전남 담양군 금성면 매곡길 보광사에 있는 산.
*섬진강(蟾津江) ;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시작하여 전라남도를 거쳐 경상남도 하동을 지나 남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
*‘일 없는 도인(道人)’ ; 일 없는[閑] 도인(道人).
*한도인(閑道人) :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무애한 경지를 얻은 수행자를 말한다.
‘일 없다[閑]’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보살은 삼천 가지 위의[三千威儀]와 팔만 가지의 미세한 행실[八萬細行]과 여섯 가지 길[六度]을 닦는 데, 자기의 몸과 목숨과 재물을 다 바쳐서 중생을 건지려고 분투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몸은 무한히 분주하고 골몰하면서도, 마음은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함이 없이 하는 것[無爲而作]이 도인(道人)이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37~38 에서. (가로판 p38~39)
吾有一言하니  絶慮忘緣하고  兀然無事坐하니  春來草自靑이로다.

내가 한마디하고자 하노니, 생각을 끊고 반연을 쉬고 단정히 일 없이[無事] 앉았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절로 푸르구나.

(註解) 絶慮忘緣者는  得之於心也니  所謂閑道人也라.  於戱라, 其爲人也가  本來無緣하며  本來無事하야  飢來卽食하고  困來卽眠하며  綠水靑山에  任意逍遙하고 漁村酒肆에  自在安閑하야  年代甲子를  總不知하되 春來依舊草自靑이로다.  此는  別歎一念廻光者니라 【 將謂無人이러니  賴有一個로다

(주해) '생각을 끊고 반연을 쉰다'는 것은 마음에서 자득함을 가리킴이니, 이른바 「일 없는 도인[閑道人]」이다. 아! 그 사람됨이 본래 얽힘 없고 본래 일 없어,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자며, 녹수 청산에 마음대로 오고 가며, 어촌과 주막에 걸림 없이 지내 가리. 세월이 가나 오나 내 알 바 아니언만, 봄이 오면 예대로[依舊] 풀이 절로 푸르구나. 이것은 특별히 한 생각을 돌이켜 반조하는 자를 찬탄함이라. 【 사람 없을까 했더니 마침 하나 있구나.

*무사(無事 없을 무/일 사) ; ①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서 할 일[事]이 없는[無] 것.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여 할 일이 사라진 경지. ②일이 생기지 않음. 근본적으로 문제 또는 장애가 없다는 말. 곧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모두가 진리를 구현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추구하거나 조작할 일이 없다는 뜻. ③일말의 집착도 남아 있지 않은 궁극적인 경지.
*의구(依舊) ;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
*(게송)‘비법무비법(非法無非法)~’ ; 전강선사가 송담스님에게 내리신 전법게(傳法偈).
非法無非法(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차일추색다) 이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나는구나.

[참고] 전강선사(No.51) 현량매구, 선가귀감, 송담스님께 법좌 물려주심(신해71.02.18)
非法非非法(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 위의 두 게송은 몇 글자가 다르나, 송담스님께서 뜻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일기지사(一期之事) ; ①한 때의 일. 일시적인 일. ②당장의 일.
*억겁(億劫) ; 무한이 길고 오랜 세월.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낙성식(落成式) ;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①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중대한 부처님의 임무. ②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연. ③부처님이 정도,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편으로 이끌어, 모두 구한다고 하는 중대한 인연. 일단인연(一段因緣)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수희공덕 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화주(化主) ; ①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주(主). 부처님를 말함. ②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물건·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송담스님(No.378)—19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항상 법(法)을 전하여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어 법(法)을 듣기 어려운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도솔천 아래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게으름과 욕정(欲情)이 남아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부족한데,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도솔천에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아 미래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을 이른다. 부처님 생존시에 아일다(阿逸多, Ajita)가 도를 열심히 닦아 도솔천에 왕생하여 이 보살의 위치에 올랐다. 석가모니도 태어나기 전에 호명(護明)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살의 위치에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인도환생(人道還生 사람 인/길·세계 도/돌아오다·다시·또 환/날 생)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도(道) ; 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보선원(法寶禪院) ; 인천시 미추홀구 주염로 43에 있는 용화선원(龍華禪院)에 있는 스님 선방(禪房)의 이름.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방가루(bungalow 방갈로, 방가로) ; ①산이나 바닷가 같은 곳에 지어 여름철에 캠프용, 피서용으로 쓰는 작은 집. ②정면에 베란다가 있고 처마가 깊숙한, 풀이나 기와 따위로 지붕을 한 작은 단층 집. 본래 인도 벵골 지방의 특유한 목조 주택 양식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8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중유(中有) · 중온(中蘊)이라고도 한다. 중음신은 뜻으로 생기고 뜻으로 이루어진 의생신(意生身) 또는 의성신(意成身)이라고도 한다.
중유 또는 중음신의 기간은 불교 부파마다 다르게 설명하지만 보통 49일 동안 중음신의 상태로 머문다고 하여, 절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십구재(四十九齋)[또는 칠칠재(7·7재, 七七齋)]는 이 중음신의 기간에서 비롯되었다.

*사유(四有) ; 산스크리트어 catvāro bhavāh. 사유(死有) · 중유(中有) · 생유(生有) · 본유(本有) 등 한 번의 윤회 과정을 넷으로 나눈 것. 유(有)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바바(bhava)의 한역어(漢譯語)로 유정중생(有情衆生)의 생존을 뜻한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유정중생은 모두 사유(四有)를 갖춘다. 사유 중에서 생유(生有)와 사유(死有)의 기간은 아주 짧은 찰나이지만 중유(中有)와 본유(本有)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①사유(死有) : 죽는 찰나를 말한다.
②중유(中有)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으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에 이르는 기간이니 중음(中陰)이라고도 한다.
③생유(生有) : 태어나는 순간, 즉 모태에 탁태(托胎) · 결생(結生)하는 찰나이다.
④본유(本有) : 본시유(本時有) · 전시유(前時有) 등이라고도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으로 생유(生有)로부터 사유(死有)에 이르는 기간이다.

*무량억겁(無量億劫) ;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 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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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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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25. 2. 15. 04:40

§(411) (게송)청정법신무내외~ / '삼매(三昧 samādhi)'는 한문으로 '정(定)' / 정정(正定)과 사정(邪定) /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 /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드는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 /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음--->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증(證)한 다음에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송담스님(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용411) (아는 것과 깨달음)

 

약 20분.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하고  거래생사일진상(去來生死一眞常)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요, 청정법신(淸淨法身)에는 안과 밖이 없고,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진상(一眞常)이다. 가고 오고, 생(生)하고 사(死)하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이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一) 진상(眞常)이여, 한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진리(眞理)다.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만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無念]에 돌아가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정상(毘盧頂上)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들어보면, '일념(一念)이 무념(無念)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요, 불생(不生)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 해탈(解脫)이 곧 열반(涅槃)이다' 경전(經典)에는 다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념(無念)이 불생(不生)이요, 불생이 무심(無心)이요, 무심이 해탈(解脫)이다' 말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무념(無念)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번뇌(煩惱)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이 고대로 무기(無記) 속에 요렇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지금...' 흔히 한참 동안 멍청하게 시간 가는 중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중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한참 그렇게 그런 경지에 있다가 나와서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나왔다'고 보통 그렇게 얘기들 합니다.
그런데 그 '삼매(三昧 samādhi)'를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정(定)'인데, 그 정(定)도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 있어서, 중생이 아무 생각 없이 멍청허게 정(定)에 들어간 그런 것은 다 사정(邪定)이거든.

뱀 같은 거, 구랭이 같은 것도 가을에 개구리 잔뜩 잡아먹고, 초겨울에 잡아먹고 그리고 굴속에 들어가서 삼동(三冬)내 물 한 방울 안 먹고, 개구리 한 마리, 쥐 한 마리 안 잡아먹고 고대로 삼동을 지냈다가 그 이듬해 해동(解冬)이 되고 경첩이 지나고 그러면은 그 속에서 땅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이 삼동내 아무것도 안 먹고, 물 한 모금도 안 먹고 가만 있다 나오니까 그것이 '삼매(三昧)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꺼떡하면 혼침(昏沈)에 빠져서 있다 나와 가지고 '삼매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그러한 착각을 합니다.

무념(無念).
삼세육추(三細六麤), 세 가지 미세한 생각과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이 다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잠기는 것이고, 그 근본무명을 타파해야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우리 학자(學者)는 선지식으로부터 그 공안 하나를 간택 받아 가지고 그놈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그걸 참구(參究)를 해 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고, 말 길이 있고, 이치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이 그렇게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알 수 없어!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 그 공부가 옳게 해 가는 것이지, '이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저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아!'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면 그건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도 참 깨달음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수에서 여까지 와서 화두(話頭)를 타려고 여러분이 오셨는데, 또 앞으로 선방(禪房)에 가기 위해서 또 화두를 타려고 온 수좌(首座)도 있는데, 개별적으로 화두를 일러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올라온 김에 새로 화두를 타려고 하는 분, 또 화두를 타서 하되 아직도 어떻게 화두를 참구해야 옳게 한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치 못한 분을 위해서 간단히 화두 참구(參究)하는 법을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엇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인고?' 그래서 '이 무엇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구쳐 나가.
그러다 나중에 가서는,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더 다구쳐 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뿐이여!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이렇게만 말해도 벌써 알아듣는 분은 알아듣지만,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또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녹음법문(錄音法門),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셔서 10번, 20번, 백 번, 천 번을 들으면서 자꾸 하다 보면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일체 화두를 자꾸 들어도, 들고 있으면서도 온갖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든. 일어나되, 그 일어난다고 성화도 대지 말고, 짜증도 내지 말고, 그놈을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못 일어나게 할 것도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들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이여.
그 번뇌(煩惱)가 일어나면은 '그놈이 또 일어난다'고 성화를 대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놈을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을 치신 분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여. 그냥 놔둬 뭐. 놔 두고 '이 뭣고?' 화두(話頭)만 딱! 챙겨 버리면 그만인 것이여.

그놈이 어디서 일어나간데. 내나 자성(自性)자리에서 그놈이 일어나거든.

그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난 것이니까, 그냥 놔둬 버리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고, 화두를 들어버리면은 저절로 없어질 것을, 그놈을 없애려고 생각을 내니까, 없애려고 하는 그 또 한 새로운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자꾸 놓치면은 또 '이 뭣고?' 딴생각[別念]이 일어나도 또 '이 뭣고?'
'이 뭣고?' 만 챙겨버리면 그만인 거거던.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렇게 해 나가면 차츰차츰 번뇌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많아져.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아! 인자 공부가 잘되는구나. 아! 이것이 바로 무심(無心), 무념(無念)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내면, 그것이 벌써 무념(無念)이 아니고 벌써 망상(妄想)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지지리 애써서 공부해서 공부가 좀 익숙해질만 하면은, '하! 참 좋다. 툭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내면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석하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무심(無心). 무심도 오히려 벌써 무심(無心)이라고 할 때 천만리(千萬里)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맞히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못 꽉 맥힌 의심으로 정말 실(實)답게 참구(參究)해 나가고, 실(實)답게 정진(精進)을 해 나간 데에서 어떠한 찰나에 탁! 터지는 것이지, 정진하면서 그 공안을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렇게 따지면 맞을랑가, 저렇게 일르면 될랑가?' 이렇게 따져 가지고 공안을 보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해서... 그것은 알아지는 것이지, 알아진 것이 어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진 것이 어찌 그것이 참 깨달음이 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34분28초)

처음에는 생사 없는 도리를 믿다가—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그 말이여.

생사 없는 도리가 있는 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하지도 않을 것이여. 경(經)이나 보고, 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그러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있다고 한 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참선 안 합니다. 아무리 참선이 제일이라고 해도 절대로 하질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정진을 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믿기 까지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마는, 일단 믿었을진대는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하거던. 여법(如法)하게 해야 하거던.
큰 깨달음으로써 기약을 삼어야지, 조끔 뭔 소견난 거 그런 것은 챙피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없었던 걸로 여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알뜰히 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겨우 조끔 공부하다가 스쳐가는 그러한 경계를 가지고 '깨달랐다'고 착각하고, 또 공안을 깨달랐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공부가 다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되겄습니까.

하물며 공안을 타파하지도 못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서, 함부래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입을 함부로 벌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고, 불법(佛法)을 망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눈을 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해제날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 한마디, 한 구절 만 들어도, 한 편 만을 들어도 해제 법문은 그것으로써 충분합니다마는, 이렇게 여러 선원(禪院)에서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도반을 위해서 제가 이러한 노바심(老婆心)으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앞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할, 또 틀림없이 얻게 될 여러 도반들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게만 해 가면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것인데, 조그마한 그런 스쳐가는 소견을 가지고 '알았다'는 생각을 가짐으로 해서 공부가 거기서 사견(邪見)에 빠지고, 중도에서 중단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을 정말 가슴 깊이 명심(銘心)해 주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19분42초~39분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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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 거래생사일진상(去來生死一眞常)’ ; 불가(佛家) 장의의례(葬儀儀禮) <시다림(尸陀林)>에서 염습(殮襲)의 목욕(沐浴)에 나오는 게송.
*(게송)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야부도천(冶父道川) 스님의 게송 참고.
*청정법신(淸淨法身) ;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진상(眞常) ; 진여상주(眞如常住)라는 뜻으로, 깨달음(열반)의 경지라는 뜻.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 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無爲安樂)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8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 팔자재(八自在)라고도 함. 열반(깨달음)의 4덕(四德, 常樂我淨) 중 아(我)에 8종의 대자재(大自在)의 뜻이 있는 것을 말함.

[참고] 『열반경(涅槃經)』 제 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③(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之三)' (이운허 옮김 | 동국역경원) p514-516.
善男子 大 名不可思議 若不可思議 一切衆生所不能信 是則名爲大般涅槃 唯佛 菩薩之所見故 名大涅槃 以何因緣復名爲大 以無量因緣然後乃得 故名爲大

선남자여, 크다[大]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함이니,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일체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善男子 如世間人 以多因緣之所得者 則名爲大 涅槃亦爾 以多因緣之所得故 故名爲大
云何復名爲大涅槃 有大我故 名大涅槃 涅槃無我 大自在故 名爲大我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大)라 하나니,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大)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열반에는 내[我]가 없지만 대자재(大自在)하므로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云何名爲大自在耶 有八自在則名爲我 何等爲八
一者、能示一身以爲多身 身數大小猶如微塵 充滿十方無量世界 如來之身實非微塵 以自在故現微塵身 如是自在則爲大我 <①능시일신위다신(能示一身爲多身)>

어떤 것을 대자재(大自在)하다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八自在]가 있으므로 나[我]라 하나니,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많은 몸을 능히 보이는 것이니, 몸의 수는 마치 미진수와 같아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며, 여래의 몸은 실재로는 미진수가 아니나 자재로써 미진수의 몸을 나타낸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二者、示一塵身滿於三千大千世界 如來之身實不滿於三千大千世界 何以故 以無礙故 直以自在故 滿三千大千世界 如是自在名爲大我 <②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滿大千界)>

둘째는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나니,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 아니지만 걸림이 없는 까닭이며, 자재함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三者、能以滿此三千大千世界之身輕擧飛空 過於二十恒河沙等 諸佛世界而無障礙 如來之身實無輕重 以自在故 能爲輕重 如是自在名爲大我 <③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훨훨 날아서 이십 항하사 등의 많은 부처님 세계를 지나가도 장애가 없느니라. 여래의 몸은 가볍고 무거움이 없건만 자재한 연고로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四者、以自在故而得自在 云何自在 如來一心安住不動 所可示化無量形類各令有心 如來有時或造一事 而令衆生各各成辦 如來之身常住一土 而令他土一切悉見 如是自在名爲大我 <④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넷째는 자재한 연고로 자재를 얻는 것이다.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의 일심은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 무량한 형상을 드러내어 각각에 마음이 있게 한다. 여래는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五者、根自在故 云何名爲根自在耶 如來一根亦能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如來六根亦不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以自在故 令根自在 如是自在名爲大我 <⑤제근호유(諸根互有)>

다섯째는 근(根, 감관)이 자재한 까닭이니,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변별하고 감촉을 느끼고 법을 인식한다. 여래의 육근(六根)은 또한 색을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 않으며 냄새를 맡지 않고 맛을 구별하지 않으며 감촉을 느끼지 않고 법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재하는 까닭으로 근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고 하느니라.

六者、以自在故 得一切法 如來之心亦無得想 何以故 無所得故 若是有者 可名爲得 實無所有 云何名得 若使如來計有得想 是則諸佛不得涅槃 以無得故 名得涅槃 以自在故 得一切法 得諸法故 名爲大我 <⑥득일체법무득상(得一切法無得想)>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일체 법을 얻거니와,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나니, 왜 그런가? 얻을 바가 없는 연고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이름하려니와 실제로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모든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자재함으로써 일체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대아라 이름하느니라.

七者、說自在故 如來演說一偈之義 經無量劫義亦不盡 所謂若戒 若定 若施 若慧 如來爾時都不生念 我說 彼聽 亦復不生一偈之想 世間之人四句爲偈 隨世俗故 說名爲偈 一切法性亦無有說 以自在故 如來演說 以演說故 名爲大我 <⑦설일게의경무량겁(說一偈義經無量劫)>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무량겁을 지내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이거나 지혜 따위니라.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설하고 저가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八者、如來遍滿一切諸處 猶如虛空 虛空之性不可得見 如來亦爾 實不可見 以自在故 令一切見 如是自在名爲大我 如是大我名大涅槃 以是義故 名大涅槃 <⑧신변제처유여허공(身遍諸處猶如虛空)>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아 볼 수 없지만 자재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자재를 대아라 이름하는 것이요, 이와 같은 대아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德異本) ‘제1 오법전의(悟法傳衣, 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다)’에서.
善知識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팎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일 본심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며, 만일 해탈을 얻는다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는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何名無念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爲無念 用卽徧一切處 亦不著一切處 但淨本心 使六識 出六門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어찌하여 무념이라 이름하는가? 만일 모든 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무념이니, 작용을 일으킨 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여섯문(六門)을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감에 자유롭고 널리 쓰되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고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若百物 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善知識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그러나 만일 백가지를 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주 생각을 끊는 이것은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邊見]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無念)의 법(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느니라.
*비로정상(毘盧頂上)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경지.
*비로(毘盧)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약칭.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의인화하여 형상화한 부처님.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로, 해석하면 변일체처(遍一切處), 광명변조(光明遍照),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
진리는 어떤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므로, 진리가 곧 부처라고 하는 비로자나불의 관점에 서면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두(頭頭)가 비로(毘盧)다”는 말은 삼라만상 일체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정상(頂上) ; ①산 따위의 맨 꼭대기. ②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

*'일념(一念)이 무념(無念)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요, 불생(不生)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 해탈(解脫)이 곧 열반(涅槃)이다' 경전(經典)에는 다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념(無念)이 불생(不生)이요, 불생이 무심(無心)이요, 무심이 해탈(解脫)이다' ; 일념불생(一念不生).
*일념불생(一念不生) ;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 불생(不生).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84, p103 참고.(가로판 p88. 107~108)
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註解) 斷者는 能所也요 不生者는 無能所也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요, 번뇌가 나지 않는 것이 대열반(大涅槃)이니라.
(주해) 끊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벌어짐이요, ‘나지 않는(不生) 것’은 주체도 객체도 없느니라.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註解) 戒也定也慧也가 擧一具三이요 不是單相이니라.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을 ‘나지 않는다(不生)’고 이름하고, ‘나지 않는 것(不生)’을 무념(無念)이라 하며, 무념을 해탈(解脫)이라 하느니라.
(주해)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가, 하나를 들면 셋이 갖추어 있는 것이요, 홑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410)—1990년 2월 첫째일요법회, 신수기도회향, 입춘법회(90.02.04)(6분10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난 이후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도와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에 들어가서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三途)는 지옥·아귀·축생 삼도요. 사생(四生)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이요.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에사 모든 번뇌의 생각을 씻어 버리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스스로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게 되었구나.

우리 모든 중생들이 원래는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한 몸뚱이, 한 마음이여. 그런데 그 본심왕을 위배(違背)하고 거기서 배반을 하고 물러나왔다.
'한 생각' 동(動)하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법왕(法王)과 같이 살 수가 있을 텐데 한 생각 동(動)해 가지고, 한 생각 삐끗 어긋져 가지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가지고 육도윤회(六途輪廻)—지옥, 아귀, 삼악도(三惡途)를 몇 번이나 들어갔으며 태란습화 사생을 몇 번이나 겪었든가.

경오년 초삼일부터 오늘까지 칠일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입춘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의 법회가 오늘 겹쳤습니다.
그동안 칠 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기도(祈禱)를 봉행하는 가운데 우리 사부대중의 마음은 참회(懺悔)를 하고, 기도를 하고, 발원(發願)을 하고 그래 가지고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번뇌의 생각—그 훨훨 타오르던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염(煩惱染)이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번뇌(煩惱)가 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념(無念)이고, 무념이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여.
불생이면, 일념불생(一念不生) '한 생각 남이 없는 도리'를 봐 버리면 그것이 바로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소식이더라.(처음~6분27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 ②[산스크리트어]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을 집중 · 통일시키는 수행, 또는 그 수행으로 이르게 된 평온한 마음 상태.
*정정(正定, 바른 집중) ; 선(善)한 면에서, 마음을 더 높은 보다 더 순수한 알아차림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적인 시도의 결과로 생겨난 ‘마음이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공안(화두)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 

 


[참고]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12.22)(3분40초)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 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 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 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 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24분20초~28분)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 · 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간택(揀擇 가릴 간/가릴 택) ;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알아 선택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 무자(無字) 화두.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미륵불이 하생(下生)’ ; 미륵불(彌勒佛)은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할 것이 예정된 부처님이다. 현재 보처보살(補處菩薩)의 몸으로 도솔천 내원궁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화(成火 이룰 성/불·화 화) ; ①매우 귀찮게 졸라 댐. ②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속이 탐. 또는 그런 증세.
*묘방(妙方) ; ①기묘한 방법. ②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딴생각[別念] ;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지지리 ; ‘기껏(정도나 힘이 미치는 데까지)’의 사투리.
*지지리 애써서 공부해서 공부가 좀 익숙해질만 하면은, '하! 참 좋다. 툭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내면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석하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실답게(實-- 열매·본질·참됨·정성스러움·참으로 실) ; 다부지고 알차게. 실속 있게. 빈틈이 없이 착실하게.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생사 없는 도리’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p137~139. (가로판 p133~135)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하얀  早訪高玄하야  機味를  完轉하야  無正無偏하야  明師가  許爾어든  再入林巒하야  茅庵土洞에 苦樂을  隨緣하야  無爲蕩蕩하야  性若白蓮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증(證) ; ①산스크리트어 adhigama 또는 adhisajbodha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을 말한다. 증오(證悟) 또는 증득(證得).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를 증과(證果)라고 하며, 최종의 증과는 성불(成佛: 부처가 됨)이다.
②증(證)은, 《대승의장》 제 10권에 따르면, 지득계회(知得契會) 즉 앎 · 증득 · 계합 · 깨침을 뜻하는데, 마음이 실성(實性)에 그윽히 잠겨서[冥] 분별을 잊고 실성(實性)에 계합하고 실성(實性)을 깨쳐서 실성(實性)과 평등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퇴전(退轉 물러날 퇴/회전하다·바꾸다·넘어지다 전)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을 다른 데로 옮겨 처음보다 더 밑으로 전락(轉落)함. 퇴타(退墮), 퇴태(退怠)라고도 한다.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
전강 스님께서는 <일대기 13호> 법문에서 <용무생사가 현중현이다>라고 하심.
그리고 <체중현 도리는 자구불요(自救不了), 구중현(句中玄)은 인천위사(人天爲師), 현중현(玄中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된다>라고 하심. 삼현(三玄 현중현, 구중현, 체중현)을 『임제록』의 삼구(三句 1구, 2구, 3구)에 배대함.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법훈(法訓)」 '나를 찾는 법—참선법(參禪法)' p262. p264~265.
*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고 ❸]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참고 ❹]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참고 ❺]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가로판 p215, p219)
[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역주(譯註)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노바심(老婆心) ; 노파(老婆)가 자식 · 손자를 애지중지(愛之重之)하듯이, 스승이 수행자에게 나타내는 자비심. 친절심(親切心). 파심(婆心)이라고도 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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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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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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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