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것이 한 생(生)이 지내간 것.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 /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오직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길 밖에는 다 무상(無常)한 것 / 진짜 노잣돈은 지금 이만 할 때 열심히 참선 정진한 것 / 「이뭣고?」 많이 해 놓은 것이라야 염라대왕이 알아준다 / 한 법당에서 법을 설하고 또 같이 법을 듣고 이러한 인연은 무량겁의 인연. 모두 다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만나야.
**송담(No.101)—1979년 1월 관음재일 법문(79.01.24.음) (용101)
약 19분.
벌써 정월 보름에 해제(解制)하고 열흘이 지내 가지고 정월 관음재(觀音齋)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물 흘러가듯이 세월이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사람이 오늘 없고, 오늘 같이 담소했던 사람이 내일은 황천객(黃泉客)이 되고. 그렇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기가 맥히게 무상(無常)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작년 겨울에는 한국에 큰스님네가 몇 분 또 열반(涅槃)하시고 그렇게 해서 해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차례차례 가시게 됩니다.
어쨌든지 금생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 만났을 때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아직 죽을려면 멀었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 번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고,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 꺼지면 그것이 또 한 생(生)이 지내간 것입니다.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그 일념(一念), 한 생각 한 생각의 생사가 결국은 이 몸뚱이의 생사와 직결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하고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그 기러기 발자취는 모래 위에 남아 있구나. 사람은 황천으로 떠나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 이러한 내용의 게송(偈頌)이었습니다.
기러기가 모래밭에 강변에 놀다가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아까 그 기러기가 놀던 모래 위에는 그 기러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러기 발자취가 과연 얼마 동안 남아 있을 것인가? 바람 불고 비 오면은 금방 그 자취는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70년 내지 80년 살다가 저승으로 떠나갑니다. 떠나간 뒤에 얼마 동안 그 사람의 이름이 그 집에 남아 있습니다. '저건 아무개 집이다. 아무개 집이다. 아무개가 저 집에서 살았다' 이렇게 집에 이름만 남아 있지만 여간 훌륭한 인물이라야 역사적으로 아무개 아무개, 그것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이름을 기억한 사람이 줄어져 가는 것입니다. 보통 3년, 1년.
죽은 뒤에 며칠간 잠깐 있다가 일 년 지내면 잊어버리고, 삼 년 지내면 더 잊고, 십 년 지내면 거의 다 잊어버리고, 삼십 년 못 가서 그 사람의 이름을 물으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져.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물질적인 재산, 조끔 수준이 있는 사람은 권리나 명예를 대단히 존중을 합니다마는 그 명예라 하는 것도 모래밭에 남아 있는 기러기 발자취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 이것밖에는 모래밭에 기러기 발자취에 지내지 못하고, 재산이라든지 권리라든지 이런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꼭 필요하다고 하지마는 이러한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가지고 함부로 대들다가는 칼날, 멀금하게 든 칼날에 묻은 꿀과 같애서 그 단맛만을 생각하고 함부로 그 칼날 끝에 묻어 있는 꿀을 핥아먹다가는 혀에 상처를 입게 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재산이 필요해서 우리는 힘을 다해서 재산을 모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잘 알아서 재산을 모아야지 잘못 모이다가는 오히려 인생을 불행하게 맨드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날 끝에 묻은 꿀이나, 모래밭에 남아 있는 발자취,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필요하기는 하지마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고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십분 이해를 하시고,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공부에 대해서 정말 나에 온 정성을 쏟을 수 있을 때 인생으로서 태어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루하루 이렇게 늙어가고 있어서 지끔 사십 오십이라 하더라도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육십 칠십이 금방 돌아오는 것입니다.
관(棺) 속에 들어갈, 우리는 기어코 한 번은 관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천하 없는 사람도 그걸 면할 길이 없습니다마는 그때 관 속에 들어가서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가지고 '아! 내가 그때 열심히 공부를 좀 젊었을 때 좀 할 것을...'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지금 이만끔 건강했을 때 우리 모두 다 같이 열심히 정진을 해서 노자(路資)를 많이 벌어 놔야 되겠습니다.
어떤 이는 죽을 때 쓸려고 돈을 많이 모여 가지고, 죽은 뒤에 49재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고 하라고 돈을 모이는 할머니를 제가 봤습니다마는, 그것은 진짜 노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자기 화장(火葬)은 죽은 다음에는 누가 해 주던지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돈 한푼 남겨 놓지 안 해도 땅에 묻지 아니하면 불에다 태우게 되어 있습니다. 자손이 없어도 그것은 사실은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걱정할 것은 이 몸뚱이를 버리고 떠나는 '이 주인공, 그놈을 어떻게 닦어 놨느냐?' 그것이 진짜 노잣돈입니다. 돈을 황금으로 뭉쳐서 저승에 가기 위해서 뭉쳐 놔 봤자 그것은 염라대왕 앞에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관 속에다 넣어 주어도 그것은 관 속에 남아 있지, 그 영혼이 그것을 가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놓을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 뭣고?」 많이 해 놓은 것 그거라야 염라대왕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불법(佛法)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믿되 참선(參禪)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여러 법보제자들은 어쨌든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이 '참선을 했다'고 하는 그 한마디를 잊지 말고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수가 있느냐?
죽을 때에는 그 병 아픔을 자기가 이기지 못해서 죽게 됩니다. 이길 수만 있으면 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그것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 고통이 너무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때 화두(話頭)가 잘 들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숨이 꼴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를 한 사람이라야 염라대왕 앞에서도 떠억 「이뭣고?」를 할 수가 있고, '니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했느냐?' 물어볼 때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때 너무너무 아프고, 딸 생각 외손자 생각하다가 화두를 놓쳤다 하면은 내생(來生)에 가서 자기가 무엇을 전생(前生)에 했는가를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많은 수백 명 법보제자 계십니다마는 '전생에 자기가 무엇을 했던가?' 아마 아신 분이 계신가? 아마 계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입태(入胎) 출태(出胎) 할 때에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생에 사람이 다시 또 사람이 되았나? 개가 사람이 되았나? 무엇이 되았나?'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전생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 모르듯이 내생(來生)에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도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에도 화두를 턱! 역력(歷歷)하게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이 딸끄닥 끊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은 아까 중국에 고봉 스님처럼 공부가 되건 안 되건, 앉아서건 서서건 누어서건 아주 죽기로 이를 갈아붙이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야, 평상시에 그렇게 해 놔야만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이뭣고?」 딸깍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게 되겄습니까? 그때에도 「이뭣고?」를 할 수 있게 되려면은 밥 먹을 때도 「이뭣고?」
똥 눌 때도 「이뭣고?」
누가 나 억울한 소리를 해서 속을 박박 긁어줄 때에도 나는 「이뭣고?」
배가 아플 때도 「이뭣고?」
머리가 아플 때도 「이뭣고?」
누었을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 놔야 돼.
옆에서 조끔 문만 덜꺼덕 닫힌다고 짜증을 내고, 누가 좀 떠든다고 짜증을 내고, 밥을 빨리 안 가져 온다고 짜증을 내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고, 이래저래 화두는 다 놓쳐 버리고 이래 가지고서는 죽을 때에 화두가 들려질 까닭이 없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가 「이뭣고?」를 했단 말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스갯말 같지마는 댁에 가셔서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이 그 확실히 그럴 것이로구나' 분명 가남이 가실 줄 믿습니다.
하루 잠깐 소매만 스쳐 가는 인연도 5백 생의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한 법당에서 같이 법문을 듣고 또 법을 설하고 또 법을 듣고 이러한 인연은 몇억만 겁의, 몇억만 생의 무량겁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이러한 모임을 만남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연이 해탈로를 걸어, 인연으로 해서 해탈로를 걸어서 마지막 목적지인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만날 때까지 한 사람도 한 분도 이탈한 분이 없도록.
기왕 이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만나 가지고 여기서 물러서 가지고 '아! 참선해 봤자 되지도 않고 기도를 좀 해 보까?' 갈팡질팡하실 일이 아닙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뭔 일이 그 잘되더니 참선을 시작하면서부터서는 뭔 일이 잘 안된다' 그러한 분, 그래 가지고는 '참선을 하고 부터서는 그 장사가 잘 안된다' 이런 분을 접때 한번 봤는데,
참선을 한다고 해서 장사가 안되고, 참선을 시작했더니 장사가 잘된다고 또 좋아하시고—다 참선을 안 한 분도 장사가 잘될 수도 있고, 또 참선을 한 분도 잘될 수도 있고 또 안될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그런 일이 조끔 잘된다고 해서 금방 거기에다 붙여 갖고 좋아하고, 조끔 안된다고 해서 '아! 그 참선을 했더니 안되는가?'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실 일이 아닙니다.
잘되거나 못되거나 좀 든든하게 묵중하게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가신다고 하면 조끔 안된 듯하다가도 잘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올바른 진리를 향해서 나가는 데 어째서 뭔 일이 안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혹 '니가 정법을 믿는데 얼마만큼 철저히 믿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제석천왕(帝釋天王)이 그러한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럴 때에 시험에서 탈락이 되지 않도록—아들 대학이나 고등학교 시험 본 데만 신경을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의 이런 진리, 참선에 있어서의 시험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할머니가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멋지게 합격이 되도록 해야만 아들딸 손자손녀도 학교에 멋지게 합격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디 열심히 공부하셔서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39분30초~58분7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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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황천객(黃泉客) ; 저승[黃泉,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으로 간 나그네[客]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을 이르는 말.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 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 · 멸도(滅度) · 적멸(寂滅) · 적정(寂靜) · 적(寂) · 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금생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 ;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참고 ❶] 『선관책진(禪關策進)』 「제1 제조법어절요(諸祖法語節要 : 여러 조사의 법어 중에서 오직 공부 지어 가는 데에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요약함)」 '황룡사심신선사소참(黃龍死心新禪師小參)' 참고.
諸上座 人身難得 佛法難聞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상좌들이여!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듣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참고 ❷] 『서장(書狀)』 '답탕승상(答湯丞相)' 참고.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❷]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 번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고,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 꺼지면 그것이 또 한 생(生)이 지내간 것입니다.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그 일념(一念), 한 생각 한 생각의 생사가 결국은 이 몸뚱이의 생사와 직결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p103-104. (가로판 p101~103)
念起念滅(염기염멸)을 謂之生死(위지생사)니 當生死之際(당생사지제)하야 須盡力提起話頭(수진력제기화두)호리니 話頭(화두)가 純一(순일)하면 起滅(기멸)이 卽盡(즉진)하리라
起滅卽盡處(기멸즉진처)를 謂之寂(위지적)이라하니 寂中(적중)에 無話頭(무화두)하면 謂之無記(위지무기)요 寂中(적중)에 不昧話頭(불매화두)하면 謂之靈(위지령)이라하나니 卽此空寂(즉차공적)과 靈知(영지)가 無壞無雜(무괴무잡)하야 如是用功(여시용공)하면 不日成之(불일성지)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참고 ❷]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게송)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 ;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6(가로판 p142) 게송 참고.
*하늘갓 ; 하늘가(하늘의 끝). 천애(天涯 : 하늘의 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황천(黃泉) ; 저승(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멀금하다 ; ‘멀끔하다’의 사투리.
*멀끔하다 ; (모양이나 차림새가)훤하게 깨끗하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노자(路資 길 노(로)/재물·비용 자) ; 먼 길을 떠나 오가는 데 드는 비용.
*노잣돈(路資돈, 길 노(로)/재물·비용 자) ; ①먼 길을 오가는 데 드는 돈. ②죽은 사람이 저승길에 편히 가라고 상여 등에 꽂아 주는 돈.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것입니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송담스님(No.378)—19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입태(入胎) ; 모태(母胎)에 들어가는 것.
*출태(出胎) ; 태어나는 것.
*역력하다(歷歷-- 분명하다·뚜렷하다 력(역)) ; 분명하고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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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