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문2015. 11. 28. 14:08

 

 

 

§(775) (게송)산월투창백~ / 활구참선 요점은 의단(疑團) / 의심(疑心) () / 무상 속에서, 생노병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 (게송)백년지시잠시간~.

 

참선하면은 아무나 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면 참선이지마는 그것은 형식만 본따서 하고 있는 것이지, 진짜 살아있는 그것을 참선을 통해서 바른 , 깨달음의 길로 바로 가는 길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의 요점은 의단(疑團)입니다.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없는 의심이 의심(疑心) ()’이라야 돼. 간절(懇切) 의심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참선이요,  간절한 의심이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서 의단이 독로(獨露)해야만 살아 있는 참선이고,  살아 있는 참선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먹고 입고 일도 하고 그러는데  따라서 일을 하고 살면서 항상  속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타성일편이 되도록 잡드리한 사람은 무상 속에서도 바로 살아계신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고, 이 우주법계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가득 우주법계에  계시는데, 활구참선을  사람은 비로자나 법신불을 항상 모시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75)—2015(을미년) 동안거 결제(2015.11.26) (용775)

 

(1) 약 21분.

(2) 약 8분.

 

(1)-----------------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다

나무~ 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산월(山月) 투창백(投窓白)이요, 계성(溪聲) 입호명(入戶鳴)이다.

  위에 떠있는 달은 창에까지 환히 비추어 주고 있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는 방안에까지 들리는구나.

 

욕지구년묵(欲知九年)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달마 스님이 9 동안 묵무언(默無言)하시고 면벽관심(面壁觀心)하신 뜻은 모름지기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

 

산월이 창에 비추어 희고, 시냇물이 방안에까지 촐촐촐촐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거기에서 달마스님께서 9 동안 묵무언하시는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은 을미년(乙未年)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14개의 선방! 인천 용화사, 광주 용화사, 용주사, 망월사, 약사암, 복전암, 위봉사, 세등선원, 원효사, 승련사, 회룡사, 도덕사, 대륜선원 14 선방에서 200명의 납자(衲子)들이 방부를 들이고 동안거에 들어가는데,

 

오늘  결제날 용화사에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함께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렇게 산승이 여러분께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연(因緣) 우주 세계가 생겨난 56억년 이래로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무량겁(無量劫)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을미년 동안거에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인연!

정말  인연으로 인해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  불법문중에서 정법문중에서  만나서 활구참선(活句參禪)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  있는 종자를 심게  것입니다.

 

방금 전강대종사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법문의 골자는 활구참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무엇이냐?

참선하면은 가부좌, 반가부좌를 하고 떠억 앉아서 눈을 아래로 뜨고서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을 누구든지  듣고 알고, 보고 알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선인데, 활구(活句)를  활구라고 하냐? ‘살아있는 글귀’다.

활구참선의 반대는 사구(死句) ‘죽을 ()’ 사구참선(死句參禪)인데 사구참선과 활구참선의 분간을 조실 스님은 오늘 법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실히 일러주신 것입니다.

 

참선하면은 아무나 가부좌를 하고 앉았으면 참선이지마는 그것은 형식만 본따서 하고 있는 것이지, 진짜 살아있는 그것을 참선을 통해서 바른 , 깨달음의 길로 바로 가는 길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것입니다.

 

활구참선의 요점은 의단(疑團)입니다. 막연하게 조용히 앉아만 있어 갖고는  백만 겁을 앉아 있어 봤자 바른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의단입니다. 의단(疑團)!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보통 천칠백 공안 가운데  근본이 시삼마(是甚) 화두!—‘이뭣고?’ 화두인데, ‘이뭣고?’도 이것이 무엇이고?’ 이뭣고하는 글자  자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이고~?’ 했을  끄트리 ‘?’ 의문표가 그것이 의심(疑心) 표시인데,   없는 의심이 있어야 바로 살아있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이뭣고 하고 이뭣고, 이뭣고 한다고 그것은 죽은 참선인 것입니다. 맨날  봤자 소용이 없어.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없는 의심이 의심(疑心) ()’이라야 .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간절(懇切) 의심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참선이요,  간절한 의심이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서 의단이 독로(獨露)해야만 살아 있는 참선이고,  살아 있는 참선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것입니다.

 

불법(佛法)은 팔만대장경 경서가 있어서  경을 화엄경으로부터서 법화경, 금강경 많은 경전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한문으로  경전을 해인사에 봉안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번역이 되고 발간이 되어서 책으로 나와 있는 것도 있습니다마는 그것 읽는 것도 좋고, 외우는 것도 좋고, 해석하는 것도 그것도 좋은 공덕이  것이나,

 

 경전을 진짜 옳게 알게 되면은 참나 찾는 공부로 들어가야만 경전의 뜻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   없는 의심이 있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무엇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천칠백 화두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화두로 조금 해보고   안되면   화두로 해보고 자꾸 화두를 바꿔샀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올바르게  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화두를 자기가 책을 통해서 선택을  수도 있겠으나, 자기가 선택을 하면 자기가 언제든지 바꿀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겠으나,

반드시 믿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딱! 하나를 지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아까 조실 스님 법문 속에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마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라고 하는    없는 의심이 있어야 올바르게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분석을 하거나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없는 의심!  의심이 나중에는 의관(疑觀) 되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 없어졌다 이런 것이 아니고   없는 의심이 ~ 배꼽 밑에 단전(丹田)  의심 덩어리가 거가 있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없는 의심의 관(觀)이 타성일편이 되어야 합니다.

 

금방 되었다 안되었다,  생각이 들어왔다  생각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갔다 이것은 초기에 있어서는 그럴 수가 있으나 열심히 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의심이  뭉텅이가 되어 가지고 출입과 기멸(起滅) 없는 것입니다.

 

들랑날랑하고 있다없다 이러면, 초단계 처음 하는 사람은 어쩔  없이 그렇게 하나, 자꾸 하다 보면 타성일편이쳐서  뭉텅이가 되아.   없는 의심!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번뇌 망상이 들어오지를 못하고,  갈수록   없는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도록 몸을 단정히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렇게 하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갈 때도 하고, 일을  때도 하고,  먹을 때도 ~  의심 덩어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유지되면서 밥을 먹고, 걸어갈 때도 의심이  흩어지지 않도록, 잊어버리면 퍼뜩 챙겨서 이뭣고?’ 

 

눈이 있으니 무엇인가 보게 되는데 보면 그리 쫓아가지 말고, 산을 보면 산이 푸르다 단풍이 졌다 그리 쫓아가지 말고 산을 보게 되면은 바로 거기서 이뭣고?’ 돌아와야 .

누가  보고 욕을 하더라도 욕하는 말로 쫓아가지 말아. 쫓아가지 말고 나는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가  자리가 잡혀서 자꾸 하다 보면 저절로 눈으로 무엇을 봐도 화두가 들리고, 귀로 무슨 말을 들어도 화두가 들리고.

 

행주좌와걸어갈 때나, 머물러 서 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항상 일체처 일체시에 외부 경계를 접촉할  그리 신경을 쓰지 말고 나는 항상 이뭣고?’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바로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조주(趙州)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 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철저하게  나가면,

바로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성주괴공이 있어서 춘하추동 계절이 있고 꽃이 피기도 하고 단풍이 지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나,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 있으면서도 정법을 믿고 자기의 본참화두에 충실한 사람은 생사 속에서,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남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여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유식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고, 잘생긴 사람도 있고 조금  못생긴 사람도있을 수가 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안 해.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열심히  사람은그러한 흥망성쇠와 빈부귀천과 생로병사,  무상한 속에서 바로 이뭣고?’ 자기를 찾는 참선 공부를  사람은 흥망성쇠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생로병사도 여기에서 그리 끄달리지 않고, 사람은 늙어서 언젠가는 죽는데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어!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사람은 죽을 때에도 아이고  재산 어떻게 하나?  자식,  손자는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할 겨를이 없어.

바로  꼴딱 넘어갈 때까지도 이뭣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 땅에다 묻지 않으면 화장을  것이고, 육체야 죽으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겠으나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몸만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당에도 가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하기도 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축생이 되기도 하고, 아주 최고로 못된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도 가겠으나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사람은 그것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어.

 

 꼴딱 쉬면서도 이뭣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 금방  사람의 몸을 받아나게  것입니다.

사람 몸을 받아나거나 또는 천당에 가서 태어나거나 그래겠으나 정법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천당에 갔다고 해서  천당에 안주하지를 않고 천당에도 반드시 정법이 있을 것입니다.

 

인도환생을 해서 사람 몸을 받아가지고  불법을 만나 가지고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 해서 부처님이 되면 영원히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이  육체는 생로병사가 있으나 그것은 도를 깨달았어도 육체를 일단 받아난 사람은 늙어서 언젠가는   몸을 버리게 되는데,

 

정법을 믿고 참선을  사람은가을 되었다  되었다 계절 따라서 기후가 변하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계절 따라서 옷을 갈아 입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입고 겨울에는 뜨시게 입으면 그만이듯이 참선을 하고 열심히 이뭣고?’  사람은 모든 것은 인연에다  맡겨 버려.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가도 이뭣고?’  병이 나더라도 이뭣고?’ 

사업을 하다 보면은 흥망성쇠가 있을 것이나 재수가 있으면 돈이  벌리기도 하고, 재수가 없으면 손해도 보게 되나, 그거  문제가 아니야.  속에서도  무엇고?’

 

이렇게 살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고, 생로병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212)

 

 

 

 

 

(2)------------------

 

‘산승(山僧)의 말이  좋은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진짜 인생으로써 정성을 들여서 살아갈 길은 오직  활구참선이 최고로구나 그렇게 믿어지는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되었습니다. 이렇게 손을 들으신 분은 앞으로도 열심히 이것을 해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다시  인도환생을 하시게 되고,  천당에 가더라도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부처님과 같이 사시게  것입니다.

 

 

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라  막파광음당등한(莫把光陰當等閒)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요불경염노안(若要不經閻老案)인댄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요. 인간이 오래 살아봤자   사는데  백년 이라는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말이야. 

막파광음(莫把光陰) 당등한(當等閒)이라. 광음(光陰)을 등한히 지내지 말라.

 

시간은 잠깐도  사이 없이 똑딱똑딱똑딱 1 1초가 지나가고, 1시간 1시간이 지나고, 퍼뜩 하다보면 별로   없이 하루 24시간이 지나가는 거고, 그렇게 1 2 이렇게 지내다 보면 금년 10년이 지나가고, 그래저래 하다 보면은 주름살이 생기고 흰머리가 나게 되는 거야.

 

그러니 그렇게  사이없이 흘러가고 무상한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생전에 살면서 지은 크고 작은 죄업으로 인해서 무서운 심판을 받아 가지고 지옥으로  사람, 축생이  사람, 인도로 올라올 사람, 천당에  사람  거기서 심판을받게 되는데,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그런 무서운 고초와 심판을  받을라거든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이다. 모름지기 조사관을 참투할지니다.

 

조사관(祖師關)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입니다.

활구참선을 해서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깨달으면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봤자 두려울 것이 없어.

 

떳떳하고 당당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믿고, 생사 없는 도리를 실천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면 인연 따라서 구십   사람,    사람,   살을 넘어서  사람 그까짓 것도  문제가 아니고 인연이 있는 만큼 살다가 마지막  거둘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숨을 거두면 금방 염라대왕의 무서운 고초를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활구참선을  사람은 염라대왕 무서워  것이 없어.

  무서우냐? 생사 없는 진리를 믿고, 생사 없는 진리를 실천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니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을 터득을 했기 때문에 이뭣고?’ 열심히  사람은 지혜롭게 건강 관리는 하되죽음에 대해서 무서워  것이 없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먹고 입고 일도 하고 그러는데  따라서 일을 하고 살면서 항상  속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타성일편이 되도록 잡드리한 사람은 무상 속에서도 바로 살아계신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고,

 

이 우주법계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가득 우주법계에  계시는데 활구참선을  사람은 비로자나 법신불을 항상 모시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을미년 동안거 결제일이라 여러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 남녀노소 여러 도반들에게 두서없는 말이지마는 정말 여러분 가슴속에 새겨 드리고 싶고, 여러분과 같이  무상한 속에서 영원한 진리 속에서같이 살고자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입으로써 못다한 말을  주장자한테 부탁을 합니다.(213~2913)()

 

 

 

 

 

------------------(1)

 

*(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 무제(無題)’ 게송 참고.

*납자(衲子 옷을 꿰맴 , 사람 ) ; 남이 버린  옷이나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 자신을 가리킬  사용.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 () 아울러 이르는 .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동자(同字).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成佛].

*사구선(死句禪) ; 사구참선(死句參禪).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단(疑團 의심할 ,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 했을까?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의심(疑心) :   없는 생각에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정성스런·절박할 )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 삼푼 되는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 () 뜻하며, '단전'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기멸(起滅) ; ()하고 ()하는 . 생겨남과 없어짐.  인연이 화합하면 생하고, 인연이 이산(離散)하면 멸한다는 .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답하되 「무()」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참구(叅究)하는  칠백 공안 중의 하나.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그렇게 된다。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데,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없이 일어났다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2)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꼭대기에서 12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56 7천만  뒤에)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 뜻은 지족(知足).

*(게송) 백년지시잠시간~’ ; [한가로운 도인의 나옹화상법어집](김달진 역주,세계사) p185 있는 警世-세상을 경계함 참고.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  화두(공안) 말함.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 .

①진리  자체인 법신(法身) 형상화한 . ②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음.

Posted by 닥공닥정

 

 

§(118) 조심(調心), 마음을 고르는 법—화두 참구 / 의심(疑心)이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 / 의리선(義理禪), 야호선(野狐禪), 사량복탁(思量卜度)은 안됨.

믿을 수 있는 스승 또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다 낙처(落處)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 의심입니다.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허공보다도 더 크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이어서 해 가면 해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아!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의 발심(發心)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어(80.03.01) (용118)

 

 

 

 

(1) 약 20분.  (2) 약 4분.


(1)------------------

이렇게 호흡을 잘 익히면서 조심(調心), 마음을 어떻게 가져 나가야 하느냐?
셋째에 가서 마음을 고르는 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화두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

화두(話頭)는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들었습니다마는 ‘화두는 자기 멋대로 어떤 책에 써 있는 대로 거기서 배워가지고 한다든지, 자기 나름대로 무슨 화두를 하나 설정해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한다든지 이래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책에 써 있는 대로 하건, 어떤 큰스님네한테 타건, 큰스님네한테 탄 사람한테 간접적으로 듣건 처음에 시작한 데에 있어서는 비슷합니다.
별 차이가 없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그러한 경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상태가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것이 바른 경계냐? 또는 잘못된 경지냐?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해 나간 사람은 그때 물어볼 스승이 없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잘못된 경지를 갖다가 ‘아! 내가 이거 공부가 잘되어 간 거구나’ 이렇게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 신기한 경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집착을 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다가 보면,
십상(十常) 열이면 열, 삿된 데에 빠지거나, 미치거나, 외도가 되거나, 점쟁이 같은 것이 되거나, 잡신 같은 것이 붙어가지고 인간 자체가 폐인이 되는 수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두는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지도를 받아가지고 그래 가지고 믿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또는 시원찮은 데서 배운 사람은 해 나가다가 항시 ‘내가 이거 옳게 하는 것이냐? 잘못하는 것이냐?’ 그 자체에 대해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해 가지고 공부가 한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하고, 어떤 경지가 일어났을 때에도 중요한 고비에 가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스승 또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일단 탔으면, 지도를 받았으면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화두를 ‘이 화두가 나쁘니까 다른 화두로 고쳐야겠다’ 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안될수록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 공부가 잘 안되니까 옆의 사람 보고 ‘당신은 무슨 화두를 허요?’
‘나는 무슨 화두를 해요’ 가만히 그 사람 화두를 조금 흉내내 가지고 해 본다. 자기 화두를 할 때는 영 안되는데 잠깐 옆의 사람 화두를 좀 흉내내 가지고 해 보니까 아주 공부가 수월하게 된 것같이 느껴져서 며칠을 그대로 해 본다.

마치 어렸을 때,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합니다마는 자기집 오곡밥은 먹어보니까 별로 맛이 없고, 다른 집에서 가져온 것은 굉장히 맛있는 것처럼 느껴진 기억이 있습니다.

화두도 자기 화두는 아무래도 잘 안되는 것 같고, 남의 화두는 아주 좋은 화두같이 느껴져 가지고 이 사람 것 조금 해 보고, 저 사람 것 조금 해 보고 이렇게 하다가 몇 달 만에 와 가지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말 안하고 혼자 할라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내 화두를 그냥 할까요 다른 화두를 할까요?” 이렇게 물어보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 또 보살님네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가끔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다 낙처(落處)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화두가 안되어서 다른 화두를 해 보니까 잘된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또 얼마 안 가면 그전에 했던 화두가 자꾸 밟혀쌓고, 먼저 하던 화두를 다시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좀 해 보다 저것 좀 해 보다, 이러한 사람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여.

우물을 팔라면 한 우물을 파야지, 한 길 두 길 파다가 물이 안 난다고 해서 또 장소를 옮겨서 파고,
또 한두 길 파다가 또 물이 안 나오면 또 저만큼 가서 딴 데를 파고 이러한 사람은 맛있는 좋은 물을 만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한 길 파서 안 나오면 두 길 파고, 두 길 파서 안 나오면 석 길, 넉 길, 다섯 길, 아홉 길, 열 길, 스무 길, 마지막에는 만나는 것이 큰 반석(盤石)을 만나게 됩니다.
‘인자 나는 우물 파기는 틀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반석을 다이나마이트를 사용을 해서 폭발을 하던지 또는 정으로 쪼아내던지 이렇게 해서 그 반석을 뚫기만 하면 반석 밑에서는 아무리 가물거나 아무리 장마가 져도 변함이 없이 10년 20년 30년 백 년을 두어도 변함없이 지하수가 풍풍 쏟아오를 것입니다.

하물며 무량겁으로 생사윤회를 해 온 이 몸이 금생에 화두를 타가지고 한 철 두 철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방 목마른 데에 물 마시듯이 그렇게 갈증이 잡히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얘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옛날부터서 크게 깨달은 도인들은 너무너무 공부가 안되어 가지고 목숨을 갖다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자살을 할까 이러한 정도의 극한상황에까지 이르러서 거기에서도 쉬지 아니하고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것을 각오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 끝에 죽음 직전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 예는 얼마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철 두 철에 공부가 안된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고 다못 옳은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할 따름인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말씀드린 다섯 가지의 신심 그리고 세 가지의 법에 대해서 결함이 없도록 다져 나가되,
이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입니다. 의단. 의심!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아하! 이러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러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스스로 수긍하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엎어 보고, 분석해 보고 종합해 보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해다가 대조해 보고, 이러한 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도깨비 참선이요, 여우 참선, 삿된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선, 야호선(野狐禪), 이러한 도깨비 참선을 해 가지고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놈이 무엇인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하고 있는, '이'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계속 알 수 없는 데을 향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을 향해서 화두를 들고, 들어서 또 관조하고 이렇게 해서 조금도 옆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의단으로 몰고 나가야 돼.
이렇게 의심, 의심 또 의심, 1분 1초 한 생각도 비끌어지지 않도록 여유를 주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심으로, 의심을 밀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서 추구해 나가면, 갈수록 알 수 없을 뿐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금방 딴 생각[別念]이 침노(侵擄)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금방 저 백리 밖, 이백 리 밖의 일 또는 10년 전, 20년 전 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 밖에서 들어오는지, 나의 의식이 밖으로 나가서 헤매고 있는지, 하여간 분명 화두를 든다고 들고 있는데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왕래를 하는 것을 참선을 해 본 사람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한 시간 동안에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 몇 번이나 들고 나갔는가를 한번 장난삼아서 세어본다면 몇천 번이 될런지, 몇만 번이 될런지, 세다가 또 세고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퍼뜩 잊어버린 줄 알면 또 「이뭣고?」
성화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사상(千思想) 만사량(萬思量)이 퍼일어난다 하드라도 그것을 성화를 내고 짜증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딴 생각이 일어난 줄 알면 동시에 「이뭣고?」 이렇게 할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해 나가다보면 그렇게 안되던 것이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책없이 퍼일어났던 망상은 어느덧 차츰차츰 그 기승이 누그러지고 화두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뭣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없는—「이뭣고?」 안 해도,  「이뭣고?」하기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있는 것입니다.
미간(眉間)에 있는지, 코끝에 있는지, 가슴 앞에 있는지, 가슴속에 있는지는 모르는데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항시 의단이 앞에가 있거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자꾸 거기다 대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는 거여.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또 딴 생각이 침노하면 그때 다시 「이뭣고?」 한 번 챙기는 거여. 가끔 한 번씩 챙겨서 그 의단이 성성(惺惺)하도록 또록또록 하도록 그놈을 단속해 나가는 것이여.

공부가 여기에 이르르면 주변이 조금 시끄러운 것도 문제가 안되고, 누가 자기한테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로 인해서 신경질이 나거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뭣한 분은 '공부가 조금 될라고 하는데 방정을 옆에서 떨어 쌓고 시끄럽게 한다'고 싸움을 하고 신경질을 내고 그러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공부가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싸움을 하거나, 어린애들이 떠들거나 그까짓 것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을 봐도 의심, 땅을 봐도 의심, 기차 소리가 나도 의심, 닭 우는 소리가 나도 의심, 걸어가도 의심, 앉아서도 의심, 밥을 먹어도 의심, 똥을 누어도 의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이렇게 현전(現前)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조끔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아! 이제 공부가 잘된다. 이러한 상태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화두가 어느 정도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너무 깨끗하고 편안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불법을 만났던가’ 이러한 희유한 마음이 나고 기쁜 마음이 나서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도 같고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기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탁! 정신을 차려가지고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좋은 경계(境界)가 나타나고, 천하 없는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잠깐도 그러한 일에 우리의 신경을 써서는 아니됩니다.

다못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그때 가서는 「이뭣고?」 소리도 할 필요도 없죠. 알 수 없는 의단이 나타나면 다못 그것을 묵묵히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염송(拈頌)이라든지 또는 조사어록(祖師語錄) 이라든지, 전등록(傳燈錄)이라든지, 무슨 경전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뒤적거린다던지, 이러한 조사의 언구(言句) 속에 그런 것을 가지고 사량복탁(思量卜度)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은 대금물(大禁物)인 것입니다.

한참 곡식이 잘 자라고 (이삭을) 패기 위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데다가 뜨거운 물을 찌틀어버린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갈수록 계속 한결같이 의단을 관조해 나갈 뿐, 잠깐이라도 조사의 어구에 대해서 그것을 손을 대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아까 다섯 가지 믿음에 대해서—조사의 언구는 하늘에 뻗쳐서 세워져 있는 큰 칼과 같아서 그 옆에 가기만 하면 벌써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시고, 대오(大悟)! 확철대오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허락해서는 아니됩니다.(48분49초~68분37초)

 

 

 



(2)------------------

차라리 콱 막혀서 알 수 없는 의단만을 관조하다가 죽을 한이 있더라도, 조그마한 어떤 소견(所見), 지견(知見)을 가지고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망치고 불법을 멸망으로 이끄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얻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면, 그 사람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그러한 정도에 밖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결국을 그것을 가지고 만족을 삼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불법을 갖다가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허공보다도 더 크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이어서 해 가면 해 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아!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의 발심(發心)할 때, 최초에 발심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해제가 되면 추웁도 더웁지도 않는 봄철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 봄철을 가장 충실하게 알차게 공부를 하시기를 다시 거듭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68분38초~72분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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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말. ②'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온 말.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낙처(落處) ; 안정된 곳. 결국의 장소. 귀착점(歸着點 최종적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결론). 요지(要旨 핵심이 되는 중요한 내용).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야호선(野狐禪 들 야/여우 호/참선 선) ; ①진실하게 올바로 참선 수행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않았는데 깨달은 것처럼 가장하여 함부로 기이한 언행을 하여 남을 속이는 사람을 들여우에 비유하여 말함.
②말이나 글로 알아 들어가고,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 대조해 보는 것으로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침노하다(侵擄-- 침범할 침/노략질할 로) ; (무엇이 무엇을)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치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

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염송(拈頌) ;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고려의 혜심(慧諶) 스님이 1226년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에서 화두 1125칙(則)과 각각의 칙(則)에 대한 짤막한 해설과 게송 등을 모아 엮은 30권의 책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이라고도 한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전등록(傳燈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30권. 송(宋)의 법안종(法眼宗) 천태 덕소(天台德韶)의 제자 영안 도원(永安道原)이 경덕 원년(1004)에 엮음.
과거칠불(過去七佛)에서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와 동토육조(東土六祖)를 거쳐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의 제자에 이르기까지, 선종 다섯 종파의 52세, 불법(佛法)을 계속 이어 온 1,701명의 행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 깨달음에 대한 문답, 어록을 집대성한 저술.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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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게송) ‘금생약불종사어 후세당연한만단’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금생에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후생(後生)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