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법망구'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0.11.28 §((558))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강아지, 송아지, 도야지 / 구정선사 / 선지식의 한마디, 위법망구 / 참선이라는 것은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2. 2019.03.28 §(세등41) (게송)무한심중사~ / 소요 스님의 위법망구 / 진발심(眞發心),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을 일시에 돈발(頓發)하라 / 공양하는 법.
  3. 2015.11.04 §(세등59) (게송)노종평처험~ / 자신을 조복(調伏) / (게송)잉풍기랑낭생구~ / 이 도(道)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 / 첫째 아상(我相)을 없애라.
  4. 2015.04.13 §(세등26) 여종 욱면의 신심 / 공부하는데 핑계 대지 말라 / 부처님의 수행에 대한 거문고 줄 비유 / (게송)서왕한래춘부추~.
  5. 2015.04.11 §(세등26) (게송)일휘상인참춘풍~ / 혜가대사의 위법망구 / 바른 스승의 중요성 / (게송)일생장환주인공~ / 화두는 가깝게 들어야 한다.
  6. 2015.04.04 §(280) 『열반경』 ‘용기’에 관한 말씀 /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 의심, 의단이 거기에 갖추어진다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것 / (게송)시비해리횡신입~.
  7. 2015.03.30 §(118) 조심(調心), 마음을 고르는 법—화두 참구 / 의심(疑心)이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 / 의리선(義理禪), 야호선(野狐禪), 사량복탁(思量卜度)은 안됨.
  8. 2015.02.20 §(320) 설산동자의 설화 / 기도는 청정하고 간절하고 일여한 신심으로 소원성취를 하고, 거기에 그치지 말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해야 한다.
  9. 2015.02.17 §(324) (게송)조화무사부사력~ / 기도는 정성이 제일 / (게송)송백천년취~ / 참선, 기도가 둘이 아니다 / 의심관(疑心觀) / ‘관세음보살’하는 자기 음성을 자기가 관(觀)해.
  10. 2015.01.22 §(062) 부처님의 위대함—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 주심 / 『부처님께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신다』는 말의 뜻.
신심(삼요)2020. 11. 28. 15:47

§((558))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강아지(가하지 家下地), 송아지(송하지 松下地), 도야지(도하지 道下地, 도 밑에서 피난을 해라) / 구정선사 / 선지식의 한마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 / 참선이라는 것은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가하지(家下地)는, 강아지는 집 아래에서 피난을 해라. 송아지[松下地]는 소나무 밑에서 피난을 해라. 되아지(돼지)[道下地]는 '길 도(道)'자, 도 밑에서 피난을 해라.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바른 선지식의 한마디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그것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

'몸을 잊은다'는 것은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 몸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장래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다 거기다 바쳐 버려야, 그리고 오직 한마디 말씀에 의지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위법망구의 정신이 되어야 끝장이 나는 거여

 

**송담스님(No.558)—1995년 11월 일요법회 및 추계산철해제(95.11.05) (용558)

 

약 17분.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여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헌데, 당당(堂堂)한 대도(大道)가 밝고 분명(分明)하다 그말이여.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낱낱이 다, 뚜렷이 다, 원만히 다 성취되어 있더라 그말이여.

부처님이나 우리 중생이나 조금도 차별이 없고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어. 진묵겁(塵墨劫) 전에 원만히 다 성취해서, 새로 성불(成佛)할 것이 없이 구족하게 다 갖추어져 이루어져 있다 그말이여.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그 탓으로 해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다. 영겁을 두고 만 가지 모냥을 현출(現出)을 하고 있더라.

당초에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놈을 단속을 못 해가지고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이니라.

 

 

오늘은 을해년 11월 첫째 일요법회 날이고, 아울러서 을해년 가을철 산철 해제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금봉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와 조실 스님께서 그 임종게에 화답하는 만사(輓詞), 만시(輓詩)에 대한 말씀도 있었고, 생사해탈하는 최상승법에 대한 법문을 우리는 경청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단히 민족적인 문제에 부딪쳐 있습니다.

고인이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요, 눈이 온 뒤에라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에 절개를 알 수가 있고, 일이 어려워진 일을 당해 봐야 장부에 마음을 볼 수가 있다(事難方見丈夫心)」 그런 시가 있는데.

눈이 오기 전에는 소나무나 잣나무나 무슨 다른 모든 나무가 다 똑같이 다 푸르르니까 다 똑같이 보이지만,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온 뒤에라사 정말 소나무와 잣나무에 서리와 눈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변치 않는 그 송백(松柏)에 지조(志操)를 알 수가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 전에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같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어려운 일을 딱! 당해 놓고 보면 비로소 그 사람의 인격을 볼 수가 있다 이거거든.

 

옛날에 '가산난리라고 하는 난리(亂離)가 온다'고 모다 예언으로 그렇게 전해 내려왔는데, 그러자 '난리가 왔다!'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소리소리 지르고, 피난 가야 한다고 야단이다 그말이여. 우리나라도 6.25동란 때 모다 그러한 난리 소동을 보았습니다마는.

그때는 가하지(家下地), 강.. 가하지, 잘 붙여 보면 강아지가 되는데, '강아지라야 그 난리를 피할 수가 있다' 그다음에 임진왜란 때에는 송하지다. 송하지(松下地)라고 하는, '송아지의 뜻을 알아야 난리를 피할 수가 있다' 그러고 6.25동란이나 또는 앞으로는 도하지(道下地), 도하지는 잘 붙이면 돼지, 도하지 · 돼지 · 도야지가 되는데.

 

가하지는, 강아지는 집 아래에서 피난을 해라.

송아지는 소나무 밑에서 피난을 해라.

되아지(돼지)는 '길 도(道)'자, 도 밑에서 피난을 해라.

 

그런데 그 '강아지'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가하지(家下地)라는 게—그래서 아무도 그 가하지 뜻을 몰라. 모르고 있는데,

어느 날 그 마을에 두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난리가 났을 때 우리들 가족을 무난히 피난을 시킬 수가 있는가?' 그것을 서로 의논 끝에 한 집이 '그러면 미리 훈련을 시켜야겠다'해 가지고, 한 집에서는 온 집안 식구들을 마당으로 모이게 해 가지고, "집에서 키우는 소를 저 사다리를 사용하고 뭐 무슨 방법을 사용하던지 지붕 위에다가 끌어올리라" 그렇게 명령을 했어.

그러니까 집안 식구, 아들이고 손자고 며느리고 딸이고 할 것 없이 심지어는 할멈까지도 "미쳤다고 소를 갖다가 지붕 위로 끌어올리느냐, 그러다가 잘못하면 소 다리나 부러지고 사람까지 다치고 할 텐데, 무엇 때문에 지붕 위로 끌어올리느냐"고 온 집안 식구가 전부가 반대하고.

 

"그래도 내가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한번 들으라"고 강요를 해 가지고 하니까, 마지못해서 사다리도 갖다 놓고, 사다리 위에다가 나무때기도 걸치고 그저 이리 해 가지고는 끌어올리는데, 마음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지 서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불평과 불만, 서로 마음이 합해지지 아니하니까,

'끌어올리라'고 영감은, 할아버지는 소리소리 지르고, 그냥 억지로 하다가 소 다리가 사다리 사이로 빠져가지고는 잘못해 가지고 송아지 다리만 부질러 버리고 또 그러다가 또 해 가지고는 온 집안 식구들은 결국은 소를 올리지 못하고 소 다리만 부러 버리고 말아버리고, '할아버지는 죽을라고 노망했다'고 그러고, 온 집안 식구들은 야단이여.

 

그리고는 또 다른 할아버지가 "그러면 우리집에 가서 한번 해 보세"

집안 식구를 전부 모이라 해가지고, "이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려야겠는데 어디 한번 해 봐라" 그러니까, 온 집안 식구가 집에 있는 사다리도 가져 오고, 이웃집에 있는 사다리도 빌려 오고, 사다리를 2중 3중으로 이어대고 포개고, 그 위에다가 멍석을 갖다가 덮고, 판대기를 덮고, 새끼로 엮고 해 가지고, 그 소를 목을 짬매고, 몸뚱이를 짬매고 해 가지고, 먼저 사람이 올라가서 끌어올리고 밑에서 밀고 그래가지고는 아! 너끈히 지붕 위에다 소를 끌어올렸다 그말이여.

 

그래 좀 쉬어가지고 "다시 끌어내리자"

끌어내리기가 올리기보다도 더 어렵다 그말이여. 그래도 '이것이 하면 되지, 안 되겠나?'해 가지고, 그걸 위에서 여러 사람이 소를 잡고서 서서히 해 가지고는 또 끌어내렸다 그말이여.

"자네는 되었네" 그렇게 인자 훈련을 했는데.

 

난리가, 가산난리는 무슨 난리냐 하면은 갑자기 폭설이 쏟아져 가지고 눈이 무릎으로, 허리로, 어깨로, 머리 위로 해서 지붕까지 눈이 쌓였어.

그 가산이란 지방이 강원도인지, 함경도인지 내 확실히 모르겠는데, 눈이 많이 와가지고 난리인데, "난리야! 피난가자!" 온 마을 사람들이 하니까, 전부 집안 밖으로 뛰쳐나갔어.

 

그 갑이란 할아버지하고, 을이란 할아버지는 "나가지 말라. 여기 집에 있으라"고 암만 처질러 봤자 "피난 다 가는데 우리만 안 가면 되냐?"고, 소 다리 부지른 집에서는 전 식구가 다 도망가고 손자 하나만 할아버지 손을 잡고 안 죽고.

그 한 할아버지는 미리 줄을 각 사람 몸에 집안 식구대로 줄을 다 묶고 매고, "절대로 이 줄에서 빠져나가지 말고 내가 앞장서서 갈 테니 내 오는 데로만 따라오너라" 그래가지고는 한 시간, 두 시간을 돌다가 "인자 그만 좀 쉬어 가자"

 

그런데 폭설이 와 가지고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졌어. 그 칠흑같이 어두워져 버리고 해도 넘어가고 그래 어두워졌는데, 눈이 지붕 있는 데까지 차올랐는데, 그 할아버지는 그 앞장서서 자기집 처마밑으로만 수십 바퀴를 돈 거여. 돌다 보니 눈은 지붕 위에까지 쌓아 올라갔어.

그래가지고 "우리 쉬어가자" 해가지고 들어가서 찬찬히 보니까 자기집이여. 자기집 부엌으로 들어가고 "우리가 밥을 해서 먹자"해 가지고 밥을 해서 다 먹고 밖을 보니까 눈이 그렇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가산난리를 무사히 그 집안은 피난을 하고, 한 집 뿐만이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눈 속에 들로 산으로 나가 가지고는 눈 속에서 다 얼어 죽었어. 수천수만 명이 다 얼어 죽은 거야.

 

지금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냐 하면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구정선사(九鼎禪師)에 말씀을 하셨고, 96종 공안에 막혀가지고 그런 말씀도 잠깐 비치셨는데,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바른 선지식의 한마디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그것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

 

'몸을 잊은다'는 것은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 몸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장래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다 거기다 바쳐 버려야, 그리고 오직 한마디 말씀에 의지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위법망구의 정신이 되어야 끝장이 나는 거여.

자기의 소견이 붙어 있고, 자기의 사량복탁(思量卜度)이 붙어 있고, 이래저래 의심하고 따지고 그래가지고서는 이 문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

 

배워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어. 참선이라는 것은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한 신심(信心) 하나로써 오직 꽉 막힌 의심(疑心)으로 나아간 데에서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가르켜 갖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 그래서 이것은 믿음이 없으면 백날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거든.

 

구정선사가, 그 선지식이 '솥을 걸어라' 하는데, 애를 써서 걸어 놨는데 '이따위로 걸었냐'고 확 뒤집어 버리고 '새로 걸어라' 그래. '뭐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으니까 이렇게 고치라' 그게 아니어. 무조건하고 잘못되었다고, 한나절 내 공력을 들여서 솥을 걸어 놨는데 확 뒤집어 버리고 '다시 걸어라'고.

또 해 놓으면 또 그러고 해서, 아홉 번까지 해도 불평불만이 없이 한결같은 신심으로 더욱 정성을 들여서 했다 그말이여. 그만한 끈기와 그만한 인내와 그만한 신심이 아니면은 안 된다 그거거든.

 

할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온 집안 식구가 불평불만을 하고, 그 집안 식구는 그렇게 해서 가족이 거의가 다 죽고,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린 사람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가산난리를 무난히 피난을 했다 말이여.(처음~17분1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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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9. 3. 28. 10:59

 

 

§(세등41) (게송)무한심중사~ / 소요 스님의 위법망구 / 진발심(眞發心),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을 일시에 돈발(頓發)하라 / 공양하는 법.

 

**송담스님(세등선원No.41)—임술년 동안거 결제 법어(82.10.17) (세등41)

 

(1) 약 18분.

(2) 약 20분.

 

(1)------------------

 

무한심중사(無限心中事)를  평생설향수(平生說向誰)오

나무~아미타불~

양춘탄일곡(陽春彈一曲)한디  송월만창시(松月滿窓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한심중사(無限心中事)를  평생설향수(平生說向誰)오. 한없는 마음 가운데 일을 평생에 누구를 향해 설할꼬?

양춘(陽春)에 탄일곡(彈一曲)하니, 양춘(陽春)에 한 곡조를 타는데,

송월(松月)이 만창시(滿窓時)로구나.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창에 가득한 때로구나.

 

 

오늘은 임술년 10월 17일 세등선원 동안거(冬安居) 결제일입니다. 세등선원 삼동 결제뿐만이 아니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 동안거 결제도 이 자리에서 동시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 먼 데에서 대중과 신도님네들이 이 법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 고(故)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혜가(慧可) 대사가 달마(達摩) 스님을 찾아가서 눈 속에, 눈이 허리까지 찰 때까지 달마 스님 계신 굴 앞에서 달마 스님의 법(法)을 듣기 위해서 서 있다가 마침내는 신(信)을 보이기 위해서 팔을, 자기 손으로 자기의 팔을 잘라서 바쳤습니다.

 

그래 가지고 달마 스님의 법(法)을 이은 법문과 또 우리나라 이조 때 서산(西山) 큰스님 밑에 소요(逍遙) 스님이 대강사로 삼 년 동안을 능엄경 한 토씩을 배우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서산 스님 밑에 수행을 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서산 스님을 하직하고 떠날 때에 서산 스님이 주신 때묻은 공책 하나를 가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대관절 그 공책에 무슨 글이 쓰여 있기에 이것을 주셨나?'

 

3년을 위법망구적으로 서산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참선(參禪)은 가리켜 주지도 않고, 화두(話頭) 한마디도 일러주지 아니하고, 다 알고 있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능엄경을 하루에 글자 넉 자씩만 배우라 하니 삼 년이란 세월이 너무 지루하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법(法)인가 보다. 이렇게 하다 보면은, 내가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반드시 나에게 화두도 일러주실 것이고, 참선하는 법을 가리켜 주실 것이다' 이리 생각을 하고, 다 알고 있는 거지만 참고 참으면서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지냈습니다.

3년이 지낸 뒤에는 도저히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퇴태심(退怠心)이 나 가지고, 말하자면 반감이라고 할까, 배신이라고 할까, 퇴태심이 나 가지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공책을 열어 보니,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그 게송을 읊으시기만 하고 그 게송의 뜻은 해설을 해 주시지 아니했기 때문에 간단히 그 게송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 우습구나, 소를 탄 자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로구나. 소를 타고서 소를 찾고 있구나.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야 소진수중구(銷盡水中漚)니라.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버큼을 녹일지니라.

 

허허 참 우습구나.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고 있구나.

'내 소가 어디가 있는가?'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고 있구나.

그것은 여러분들도 '아! 그 무슨 뜻이로구나' 상식적으로 가남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는 것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년 동안을 위법망구적으로, 저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러한 신심으로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서산 스님 밑에서 능엄경 넉 자씩을 배우면서 그 일심으로 지낸 그러한 신심 끝에 그 글을 보니까 소요 스님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처음부터 그 글을 봤다고 해서 터질 리가 없습니다.

 

소요 스님은 그 글을 보고 천칠백 공안을 타파(打破)해 버리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골수를 깨달라 버렸지만, 우리가 그 글을 아무리 해석할 줄을 알고 상식적으로 무슨 뜻이다 하고 아는 것 가지고는 깨닫게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句)에 가서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야 소진수중구(銷盡水中漚)니라. 그림자 없는 나무를 찍어다가, 베어다가 물 가운데 버큼을 다할지니라. 물 가운데 버큼을 녹여 다할지니라' 그 무슨 말씀이여?

이것은 사량심(思量心)으로, 상식적으로, 분별심으로도 따져서 알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만이 이 글의 뜻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세등선원 삼동안거(三冬安居) 대중이 오십여 명이나 됩니다. 또 흥천사 반야선원 대중도 십여 명이고, 그리고 여기 각처에서 오신 여러 스님네와 신남신녀도 몇백 명이 오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법문을 들어서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자」 그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가운데에는 10년 20년 내지, 30년 40년을 참선을 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금년에 처음으로 선방에 나온 그러한 수좌(首座)도 있을 것입니다.

소요 스님은 3년 만에 글 한 수(首)를 보고서 확철대오를 했는데, 오늘 이 대중 가운데에는 이 서산 스님이 주신 이 게송,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 소진수중구(銷盡水中漚)」라. 이 게송을 듣고서 과연 확철대오한 사람이 있느냐 말이여.

 

왜 고인(古人)은 이 한 수의 게송을 보고 확철대오를 했는데, 어째서 나는 그 게송을 듣고도 확철대오를 못하는가? 과연 법을 위해서 내 몸과 목숨을 바쳤는가?

 

법을 위해서 참으로 내 몸과 목숨을 바쳐 버린 사람은 이것이 바로 진발심(眞發心)인데,

진발심을 한 사람은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이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는 것이고, 하늘을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고, 땅을 봐도 땅이 보이지를 아니하는 것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오직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단(疑團)뿐인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저절로 의단이 돈발해서 번뇌 망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아니하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만이 현전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양치질을 할 때나, 방선(放禪)을 하거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화두 하나만이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서 일부러 화두를 들 것이 없어. 저절로 화두가 독로(獨露)해.

 

이렇게 해서 이러한 경계,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화두가 현전(現前)을 하게 되는 거여. 이렇게 나가면 일주일이 못 가서 확철대오를 하는 것이여. 이것은 과거에 여러 도인(道人)들이 다 증험을 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여.

 

'혼침이 와서 못한다. 잡념이 일어나서 못한다. 상기(上氣)가 되어서 못한다. 소화가 안되어서 못한다' 이건 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 삼요(三要)가 갖추지를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인 것이여.

 

오늘은 결제날이라, 삼동에 지내 가는데 있어서 대중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갈 것인가?

삼요(三要)!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단이 몰록 발(發)하면 여러 가지 잔소리가 필요가 없습니다. 규칙에 대한 말도 필요가 없고, '이렇게 공부를 하고 저렇게 공부를 해라' 그런 말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처음~17분44초)

 

 

 

 

 

(2)------------------

 

참선은 첫째, 신심(信心)이요.

 

무슨 신심? 무엇이 신심이냐?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대중 외호(外護)를 잘하고, 불사를 많이 하고, 보시를 많이 하고,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고, 이런 것도 신심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신심이지만 이 종문(宗門) 중에 있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의 참다운 신심이라 하는 것은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정진만 하면 나도 결정코 확철대오 할 수가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대신심인 것입니다.

 

「나는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나는 여자니까, 나는 무식하니까, 나는 병이 들었으니까, 참선한들 무슨 확철대오가 있을 것인가? 그저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생각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여.

 

남녀노소도 불구하고, 말세도 불구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나도 결정코 견성성불 할 수가 있다」고 믿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신심인 것입니다. 참선은 그러한 마음 없이 참선해 가지고는 되덜 않습니다. 그 생각이 아주 철저해야 합니다.

「이건 내가 양보할 수가 없다. 나도 기어코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바쳐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해.

 

그 다음에는 대분심(大憤心).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확철대오를 못하고 생사해탈을 못했던가」 그것이 분해 가지고 그 분심(憤心)이 솟구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 분심이 있어야 혼침(昏沈)도 물러가고, 산란심(散亂心)도 물러가고, 저절로 신심이 일어나는 법이고, 사소한 시비에 내가 걸려들 까닭도 없고, 사소한 불평불만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 신심과 분심이 약하기 때문에 혼침이 일어나고, 산란심이 일어나고, 사소한 시비에 걸려들고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시비가 일어나는 법이지,

밥이 맛이 있니, 지니 되니, 짜니 싱거우니 일어나고, 누가 뭔 말을 하면은 사소한 일에 진심(瞋心)이 일어나고 그러지, 참으로 신심과 분심이 돈발했다면 무슨 시비가 그 앞에 있어?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시간이 가는지를 모르고, 칭찬했다고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누가 나보고 잘못했다고 억울한 소리를 해도 성이 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서는 대의심(大疑心)이여.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뭣고?' 조주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앉아서도 화두, 서서도 화두, 밥을 먹으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밥을 떠 넣으면서도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그 생각뿐이여.

세수를 하면서, 양치질을 하면서, 똥을 누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 있느냐 이 말이여.

 

 

선방(禪房)에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면, 선방이나 강원이나 발우공양만 하면 쫓기는 사람처럼 막 국에다 반찬에다 밥에다가서 비벼 가지고 그냥, 당장 난리라도 몰아온 것처럼 그냥 후닥닥 긁어 넣는데, 그래 가지고 먹고 나면 가슴이 쓰리고, 트림이 나오고, 소화가 안되고.

 

금년에 반야선원이나 이 세등선원 대중은 특별히 주의할 것이 공양을 잘 씹어서, 한 숟가락을 입에다 떠 넣으면, 밥만 떠 넣고 반찬은 아직은 넣지 아니한 채 50번을 씹어.

50번을 씹은 다음에 그때사 반찬을 집어 넣고 한 20번을 씹어. 그래 가지고 최소한도로 7~80번을 씹어 가지고 따악 삼키라 그말이여. 그렇게 삼키고 또 국을 한 숟갈 떠먹어.

 

또 맨밥을 떠 넣고 한 50번을 씹다가, 완전히 입안에서 밥이 미음(米飮)이 되도록 씹어 가지고 거기다 또 반찬을 또 집어 넣고 한 2~30번을 씹어. 그리고는 그놈을 삼키고 또 국 한 번을 떠먹어.

이렇게 해서 최소한도로 30분간에 걸쳐서 공양을 하라. 먹는 시간만 한 30분을 잡으라.

 

밥 먹는 것도 정진인데, 빨리 밥 먹고 참선 할라고?

그것은 벌써 정신이 틀려 버린 거여. 밥 먹은 것은 정진이 아닌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빨리 밥을 먹고 소화가 안되고, 그런데다 또 무슨 간식을 하고 무슨... 일평생을 끌끌.

 

그 사람은 정진을 바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여. 선방을 몇십 년을 당겨도 그 사람은 벌써 공부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밥도 제대로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참선을 하냐 그말이여.

 

밥이 그것이 이 몸뚱이, 법당을 잘 간수하는 그 불사(佛事)인데,

첫째, 그 법당을 잘 간수해야 부처님을 잘 모시게 되는 것인데, 법당 하나를 잘 간수를 못한 사람이 무슨 부처님을 옳게 모실 수가 있겠느냐.

 

입승(立繩) 스님이 단단히 알아서 죽비(竹篦)를 천천히 치고.

첫째, 어간(御間)에 앉은 구참 스님들이 느긋하게 공양을 들어야 돼. 그래야 저 탁자(卓子) 밑에서 그 진지를 하는 대중, 진지하고 들어가서 밥을 먹고 또 숭늉을 돌려야 하고 그러니 시간이 없다 그말이여.

 

어간에서 일찌감치 먹고 쳐다보고 있으니 밥을 빨리 먹을 수밖에 없고, 그 빨리 먹어놓으니 소화가 안되고, 그리고 또 넉넉히 먹을 수도 없고 그러니 첫째, 어간에서 천천히 먹어줘야 그래야 그것이 자비고.

 

우리가 무슨 영양을 취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밥이라도 잘 소화를 시켜야 하거든. 또 넉넉히 먹어줘야 하고. 그리고 간식을 안 하는 것이 좋아요.

밥을 넉넉히 잘 먹고, 그놈을 흡족하게 완전히 흡수를 해서 뱃속이 편안해야 화두가 잘 들리지, 소화가 안되면은 영 호흡도 잘 안되고 화두도 잘 안 들립니다. 소화가 안되면은 또 영양을 흡수를 못하기 때문에 건강도 좋지를 못하는 것이고.

 

그러한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일이 전국 남녀를 막론하고 선방에서 제대로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30여 년을 겪어봐서 너무나도 이 평범한 일이, 가장 기본적인 일이 잘못되어 가지고 선객(禪客)들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깊이 명심을 해서 이것을 실천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양을 그렇게 50번을 씹는 동안에 무엇을 생각할거냐 그말이여. 그때 화두를 들어 보라 그말이여. 혼침은, 누가 밥 먹다 조는 사람은 없거든. 그러니 혼침은 두려워할 것이 없고.

그 딱딱딱딱 씹으면서 화두를 떠억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화두를 그놈을 관조를 하면서 공양을 들어 보라 말이여. 어떻게 신심이 저절로 나거든.

 

밥을 먹고 나면은 그 밥 먹는 시간이 정말 정진이 옳게 되어 가는 시간이여. 그 시간이 정진이 잘되고, 그때 먹은 그 밥이 소화가 잘되고 흡수가 잘되고 그래.

 

밥 먹을 때 제대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또 세수할 때도 해야 하거든. 여러분이 세수할 때 화두를 들어 봐. 양치질 할 때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 있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들어 있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말이여.

변소에 가서 똥을 눌 때에도 화두가 터억 들어져 있고, 똥을 누고 나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또 들어 있어야 될 것이다 그말이여.

 

잠을 잘 때 자리에 들어서도 화두가 터억 들어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말이여. 그래야 잠을 자면서 꿈에서도 화두가 들어질 것이 아니냐 그말이여.

설사 꿈에는 안 들어지더라도, 마지막 잠이 딱 들 때까지도 화두가 떠억 들어 있는 상태에서 잠이 들면, 그 이튿날 아침에 딱 눈을 떴을 때 화두를 새로 들지 안 해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저절로 딱 들어 있어야 된다 그말이여.

 

이렇게 석 달을 지내 봐요. 정말 수행이란 것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할 것이고.

 

누구를 위한 참선이여? 누구한테 자랑을 하기 위해서 참선을 한 거여?

 

애들은, 유치원에 댕기는 애는 짜증이 나면, '나, 밥 안 먹는다'고. 밥을 안 먹으면 엄마가 제일 걱정을 하거든. 그러니까 엄마 애 태우고 엄마를 이기기 위해서 뭔 데모할 일이 있으면, '나, 밥 안 먹는다'고 떼를 쓰거든.

그건 어릴 때는 그것이 통해서 밥을 안 먹으면 '아나, 돈 줄께 밥 먹어라' '아, 너 뭐 좋은 것 공책 사 줄께 밥 먹어라' 이렇게 달래겠지만, 우리 수좌(首座)는 정진 안 한다고 떼장 놔봤자 저만 불쌍하고 생사윤회 하지, 별 수가 없어.

 

어린아이는 우는 것이 자기 힘을 과시하고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여자는 남편 앞에 골을 부리는 것이 자기 어떤 요구사항을 관철하는 방법이여. 돈을 울궈낼라면 골낸 척 해 가지고 신경질을 내면 남편이 돈을 줘. 이건 경전에 있는 말이여.

 

『치문(緇門)』을 보니까 '치문사기(緇門私記)'에 그런 말이 쓰여 있더라 그말이여.

어린애는 우는 것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여자는 성내는 것으로써 남편 앞에 힘을 과시하고, 임금은 교만을 부리는 것으로써 신하들 백성들 앞에 힘을 과시하고, 수행인은 정진을 잘하는 것으로써 힘을 과시해라 그랬단 말이여.

 

속가에서 '머슴, 일꾼을 부리는 주인이 일꾼을 잡을라면은 잘 먹이는 것으로써 일꾼을 휘어잡고, 머슴은 일을 잘하는 것으로써 주인을 휘어잡으라' 이런 속담이 있는데, 우리 수좌는 정진 잘하는 것으로써 나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진을 잘하는 거여?

잠을 안 자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는 것이냐? 묵언을 하고 말을 안 하는 것이 정진을 잘하는 것이냐?

 

물론 묵언을 하면서 정진을 애를 쓰는 것도 정진 잘하는 하나 방법이 될 것이고.

또 단식을 한다든지 일종(一種)을 한다든지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다든지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공부에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되게 하자. 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그것도 정진의 한 방편(方便)이 될 것이고.

 

'내가 대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장좌불와를 해서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리라' 또는 '내가 세 시간 이상은 잠을 안 자고 정진하리라' 이러한 것도 또한 수행을 애써서 하는 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묵언을 해서 내가 견성성불 하기 전에는 내가 말을 아니하리라' 또는 '내가 한 소식 하기 전에는 내가 말을 아니하리라' 이렇게 해서 묵언을 하는 것도 발심한 사람의 수행하는 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 안 한 것이 정진에 전부가 아닐 것이요,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한 것이 정진에 전부가 아닐 것이요, 밥을 안 먹는 것이 정진에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말 안 한 것이 정진에 제일가는 수단이라면 어릴 때부터 벙어리는 뱃속에서부터 도통(道通)해 나와야 할 것이고, 장좌불와 한 것만이 정진에 전부라면은 앉은뱅이는 참선 안 하고도 도통을 할 것이고, 밥을 안 먹는 것이 정진에 전부라면은 목구녕에 병이 있거나 위장병이 걸려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공부가 아주 잘될 것 같지만 그렇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한 방편 하나는 될지라도 그것만이 정진에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말이여.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단이 독로해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져.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에 성성해. 일념만년(一念萬年) 회광반조(廻光返照) 하는 이렇게 정진이 되어 가야 해.

 

그렇다면은 앉아서도 정진이요, 서서도 정진이요, 누워서도 정진이요, 밥을 먹을 때도 정진이요.

하루 세 때 먹어. 잠도 5시간 내지 6시간 자. 자되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자라 그말이여. 대신심과 대의단과 대분심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잔다면 잠도 정진이요. 삼시 세 때를 먹되 먹는 것도 정진이요.

 

아까 그대로 먹어봐. 그것이 그대로 정진이여.

꼭 두 끼만 먹을라고 할 것이 없어.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밥을 먹으면 세끼를 먹으되 소화가 잘돼. 그리고 속도 편안하고. 먹은 밥이 그대로 흡수가 잘돼.

 

그러니 한 숟갈 떠먹는 그 자체가 정진이요,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정진이요,

구태여 자리에 눕자마자 잘라고 할 것이 없거든. 잠이 올 때까지는 떠억 화두를 들어.

자리에 누워서도 10분 20분 30분 1시간 내에 잠이 안 들어도 상관이 없는 거여. 안 들면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면서 누웠어. 그러다 언제 든 줄 모르게 들으면 그때부터 잠을 자겠지.

 

잠을 자되 아침에 눈을 딱 뜨면, 내가 한 십분도 안 잔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은 한 너댓 시간이 잘 자졌다 그말이여. 하! 그런데 화두는 엊저녁에 들었던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거든. 그렇게 정신이 맑고 몸이 가벼워.

 

이렇게 정진을 해 가면 구태여 옆구리를 땅에 안 댈 것도 없다 그말이여. 구태여 밥을 억지로 안 먹을라고 할 것도 없다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하면 몸도 건강하고 정진도 잘되고 어느 사람이 도(道)를 못 통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번 석 달 동안을 그렇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30분7초~49분4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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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무한심중사~'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사김신사래방(謝金信士來訪 김신사의 내방을 감사함)' 참고.

*양춘(陽春 볕·따뜻하다 양/봄 춘) ; 따뜻한 봄.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무영수(無影樹 없을 무/그림자 영/나무 수) ; 그림자 없는 나무.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밑바닥이 없는 배)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2)

 

*외호(外護) ;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힘이 되도록 수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신(身)·구(口)·의(意)를 보호하는 것을 내호(內護)라고 한다. 내호와 외호를 합하여 이호(二護)라고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발우공양(鉢盂供養) ;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발우(鉢盂)라고 하여, 발우공양은 ‘스님들이 하는 식사’를 말한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小心經)》이라는 경전을 외운다.

이 공양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아 신과 인간의 공양 받기를 원하는 ‘하발게(下鉢偈)’, 부처님 일생의 중요한 4대 성지를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삼륜(三輪)이 공적함을 생각하는 ‘전발게(展鉢偈)’

그리고 위로는 부처님, 성인 아래로는 일체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봉반게(奉飯偈)’ 음식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오관게(五觀偈)’

그리고 생반게(生飯偈), 정식게(淨食偈), 삼시게(三匙偈), 절수게(絶水偈), 해탈주(解脫呪)를 하면서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며 공양하는 수행 의식이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어간(御間 거느릴·다스릴 어/사이 간) ; 절의 법당이나 큰방 한복판에 있는 칸.

*탁자(卓子) ; ①물건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 모양으로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②불상(佛像) 앞에 붙박이로 만들어 두고, 공양물(供養物) · 다기(茶器) 따위를 차려 놓는 상.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 ; 비위에 거슬리거나 언짢은 일을 당하여 벌컥 내는 화.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치문(緇門 검다·검은 옷·스님 치/문·집안·문벌 문) ; 치문경훈(緇門警訓). 불문(佛門)에 처음 든 어린 사미(沙彌)가 공부하는 데 경책(警策)과 교훈(敎訓)으로 삼을 만한 중국 역대 고승(高僧)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

치문(緇門)은 치의(緇衣 : 스님이 입는, 회색에 가까운 괴색의 색깔로 물들인 옷)를 입은 스님의 일문(一門)이라는 뜻으로 불문(佛門)을 말한다.

*치문사기(緇門私記) ; 조선 후기의 태선(太先) 스님이 『치문경훈(緇門警訓)』을 주석한 책.

사기(私記)란 경론이나 어록 또는 중요 저술 등의 깊은 뜻을 개인 견해로 풀이하여 기록한 것. 사집(私集)이라고도 한다. 사사로운 견해를 덧붙인다는 뜻이 있지만, 구절이나 대의를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놓은 주석서 혹은 참고서로서 조선 시대 이후에 많이 썼다.

*장좌불와(長坐不臥) ; 밤이 되어도 눕지 않고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연연히(娟娟- 예쁘다·아름답다·맑고 밝은 모양) ; ①빛이 엷고 산뜻하며 곱게. ②아름답고 어여쁘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하심 팔풍 경계대처2015. 11. 4. 13:15

 

 

§(세등59) (게송)노종평처험~ / 자신을 조복(調伏) / (게송)잉풍기랑낭생구~ / 이 도(道)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 / 첫째 아상(我相)을 없애라.

 

조용한 데를 만나면 조용한 대로 좋고, 시끄러운 데를 만나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변화무쌍한 그러한 복잡한 경계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성성(惺惺)하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도록 우리는 공부를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 이제 출가한 젊은 스님네들, 어쨌든지  도를 성취헐라면 바른 선지식을 찾고, 바른 선지식에게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려. ‘몸을 잊는다하는 것은자기의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치(我癡)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 자기는 많이 배웠다는 생각, 내로라하는  아만심(我慢心), 자존심 이러헌 것이  속에  있어 가지고—정말 법을 위해서 자기가 알고있는 모든 ,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모든 것을 갖다가 깨끗이 비워버리는 거여.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익힌 모든 선업(善業), 악업(惡業), 일체 업도  비우려니와 법견(法見), 불견(佛見)까지라도  비워버려야 . 비우는 데에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보는 것이지, 비우지 않고서는 점점 깨달음으로부터서는 멀어져 가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야. 그래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금강경에  사상(四相) 말씀하셨지마는,  첫째  아상이 문제거든. 아상(我相) 하나만 무너져버리면은 다른 나머지기 3상() 문제가 없는 것이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59)—병인년 하안거 결제 법어(86.04.17) (세등59)

 

(1) 약 20분.

(2) 약 12분.

 

(1)------------------

 

노종평처험(路從平處險)하고   인향정중망(人向靜中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멱화화란득(覓火和爛得)하고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노종평처험(路從平處險)하고  인향정중망(人向靜中忙)이다.

길은 평평한 곳으로부터 험악해지고, 사람은 고요한 곳을 향해서 바빠지더라. 평평한, 평탄한 곳이 있기 때문에 험악한 험난한 길이 있지, 본래 평탄한 길이 없었다면 험악한 길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나차운 데가 있으니까 높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으니까  나차운 데가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서 전부가 높다면 구태여 험(險)하다고  것이 없어.

 

평탄한 평지가 있기 때문에  평지를 걸어 가다가 길이 험악해지니까 !  길이 험악해졌구나하고 느끼는 것이지, 평탄할 것도 없고 본래  높은 고지에서만 있다면은 어디가 험악하다는 소리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요한 가운데에 있다가, 고요한 데에 집착해 가지고 고요한 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바빠지고 시끄럽고 그런 것이지, 본래 고요한 데에 있지 아니하고, 고요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면 구태여 시끄럽고 바쁘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사람이 살아가는 데 처음부터서 고생을 하고  사람은 구태여 고생이다, 고생스럽다’한 것을 느끼지 않지만, 처음에 호강을 하고 살던 사람이 조금 형세가 어려워지면  곤란한 것을 배(倍)나 느끼고  곤란한 것을 견디기가 심히어려운 법이고,

 

공부도 처음부터서 시끄러운 속에서 공부를 익히고, 생활하는 속에서 공부를 익힌 사람은  주변이 시끄럽고 일을 하고 복잡한 환경을 만나더라도, 공부가 그것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것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밤낮 고요한 데에만 집착해 가지고 고요한 데에서만 공부를 익힌 사람은 조금 누가 발걸음 소리만 나고,  열었다 닫었다 하는 소리만 나고, 옆에서 무슨 말하는 소리 또는  지내가는 소리, 비행기 다니는 소리, 이런 소리만  나도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신경질이 나면서 공부가 안된다고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평지라고 평탄한 것만을 좋아하고, 고요한 것만을 좋아해서 그런 데에서만 생활을 하고, 그런 속에서만 공부를 익힌 사람은 그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공부를 하기가 어려운 거여.

 

화초도 밤낮 온실에서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와 적당한 광선만을 쬐면서 자란 화초는 밖에다 내다 놓면 조금 햇빛이 따가우면은 시들어버리고, 조금 바람이 세고 그러면은 견디지를 못하고 얼어죽고 이러는 것입니다.

 

공부라는 것이  고요한 데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黙動靜) 간에 어떠한 경계 속에서도 흔들림을 받지 아니하고,

희로애락과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떠한 경계를 만나더라도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경계에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조용한 데를 만나면 조용한 대로 좋고, 시끄러운 데를 만나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변화무쌍한 그러한 복잡한 경계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성성(惺惺)하고, 이렇게 공부가 되어 가도록 우리는 공부를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멱화화란득(覓火和爛得)이요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

불을 찾음에 데기를 쉽고, 불을 찾아서 불을 가까이 하면은 옷을 태우거나 살을 데거나, 불을 가까이 하면  경우가 많고,

담천대월귀(擔泉帶月歸). 물을, 샘을 짊어지면 달을 띠고 돌아가. 물을 떠 가지고 가면은 달이  물에 비추니까 달도 따라온다 그말이여.

 

제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불을 가까이 하고 항상  속에서 불을 가까이 하게 되면은 옷을 태우거나 살을 데거나 까딱하면 타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고,

물을 가까이 하면은 항상  있는 곳에는 달이 비치기 마련이니까  가까이 있으면은 달도 거기에 따라 있는 것이다.

 

불이라는  무엇인가? 탐진치 삼독심(三毒心), 오욕락(五欲樂) 이런 것들이 모다 불과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면 반드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구렁텅이에 빠지기가 쉬운 것이고,

 

물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윤택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씻어서 깨끗이 하는 것이니까 선지식(善知識), 좋은 도반, 그리고 법문(法門),

그리고 항상 염불을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우리 참선하는 대중은 항상 선지식과 도반을 가까이 하고, 청정도량을 여의지 아니하고, 대중처(大衆處)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리고 항상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하면 달이 거기에 따라온다’는 것은 깨달음이 내게 돌아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승단(僧團) 제도를 맨들어서 발심한 사람이 출가해 가지고 좋은 도반들과 함께 도를 닦도록 하신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은 병인년 4 17 세등선원 하안거 결제 법요식을 맞이했습니다. 방금 사부대중이 전강(田岡) 대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었습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화두를 들고 참선해 나가는 데 요긴한 법문을 들었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그리고 화두를 거각(擧却)하되 사량분별을 쓰지 말고, 다맛   없는 의심,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져, 일체 사량분별이 끊어져, 끊어진 상태에서   없는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하도록 화두를 단속해 나가는  활구참선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동안 대중이 방(榜)을 짜고 이렇게 인자 왕래를 ()하고, 이렇게 결제를 하게 되는데,

선방(禪房)마다  선방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고 가풍이 있어서, 경상도에 있는 선방에는 거기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고,  여기에 오면 여기의 규범이 있어.

 

그러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공통하지만, 조금씩 다른 점이 있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다 그말이여. 전부가  똑같다면 그게 별로 좋을  같지마는 재미가 없는 것이여.

 

밤낮 똑같은옷도 똑같은 옷만 입는다든지, 음식도 밤낮 똑같은 것만 먹는다든지, 그러면은 그게 재미가 없는 것이고,

계절도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변화가 있어야지, 밤낮 여름만 있다든지 밤낮 겨울만 있다든지 한다면 그건 세계에는 그런 곳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게  좋은 것이 아니여.

 

계절도 변화가 있어야 하고  기상도 변화가 있어야 하고, 해가 뜨기도 허고, 비가 오기도 허고, 구름이 끼기도 허고, 바람이 불기도 허고 해야지,

밤낮 햇빛만 쨍쨍 난다든지, 밤낮 비만 온다든지, 밤낮 눈만 온다든지 허면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여. 농사도  되지도 아니하고, 건강도 좋지 못하고, 인간성도 좋지를 못하는 것이여.

 

그래서  선방도 여러 선방들이 있는데, 선방 나름대로 규범이 다르고 법도가 다르고 가풍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른 것은 그것이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 대단히 좋은 것이지, 그것이 하나도 나쁠 것이 없는 것이여. 여기는 여기대로의 독특한 가풍(家風)이 있어야 하는 것이여.

 

그런데 혹자는 다른  선방에는  그런데 여기는 이런다’고, 그래 가지고 그것을 삭이지를 못해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이 벌써 수행인으로서의 바탕이 덜된 사람이여.

 

여기에 오면은 여기의 법도에 따르면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다른 선방에 가면 거기 선방의 규범에 따라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자기의 뜻에   맞더라도 그놈을  인욕(忍辱)을 하면서  그놈을 소화를 시키면서 순응허면서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공부가 잘되도록.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이기는 법이고, 자기를 갖다가 조복(調伏) 받는 것이거든.

 

눈이 오는 겨울이 오면은  겨울에도  적응을 하고,  여름에 삼복더위가 오더라도  더위도 이겨낼  있어야  사람의 건강이 정상적인 것이지, 여름은  견디는데 겨울만 돌아오면은 견디지를 못한다면  사람의 건강이온당한 사람이 아니거든.

 

특히   닦는 데 있어서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희로애락, 일체처 일체시에 맥힘이 없어야 하고 걸림이 없어야, 그래야  사람이 정진하는 데 힘을 얻은 사람이고,

앞으로 그러한 자세로 공부를 지어 가는 사람이라야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육도법계 중생을 제도할 만한 그러한 도인이 되고 성현이  수가 있는 것이지,

 

밤낮 조용한 것만 좋아하고 손발 까딱 안 하고 앉아서만 하기만을 좋아하고, 이렇게 처음부터서 공부를 익혀 나간 사람은 벌써  그릇 되기는 틀려 버린 사람이거든.

 사람이 어쩌다가 설사  소식을 해서 깨달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보나마나   볼일 없는 사람이거든.

 

『잘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그런 속담이 있지마는, 우리는 최상승법을 닦는 도학자여.

 

그래서 불법(佛法)에는 소승법도 있고 중승법, 대승법도 있는데, 우리 활구참선 하는 우리 선객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냐 하면은 최상승법에서는 소승, 중승, 대승도 전부  안에  녹여서  속에  포함되어 버린 거여. 그렇기 때문에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최고의 불법이거든.

 

조용한 것만 좋아하고, 조금 시끄러우면  견디는 것은 그런 것은 소승(小乘)의 경지여. 소승에 의지해서 닦아 가는 그런 사람이거든.

그건 부처님 말씀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할지언정 소승심을 발하지 말아라 그러셨거든.

 

소승심! 소승심이라는  사상 자체가 그것은 못쓰는 거여. 소승심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설사 소승법의 구경(究竟)에 도달을  봤자 그것은 못쓰는 것이다 그말이여.

 

마음가짐이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여.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짐으로써 사상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마음가짐이 잘못되면 사상이 비틀어지기 때문에 사상이 비틀어져 버리면 그것이 온갖 행동이 거기에 따라서 비틀어지는 것이고, 행동이 비틀어지면은  도(道) 수행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은 삿된 데에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여.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사람으로서 태어나서 온갖 것을  버리고 출가한 우리들이 기왕이면은 바른 사상으로 바른 목표를 향해서 수행을  가지고 바른 도를 깨달라야지,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고 출가해 가지고서 기껏 한다는 것이 삿된 데에 떨어지고,  볼일 없는 곳을 향해서 일생을 닦아간다면  아니 안타깝고 가련할 수가 있겠느냐  말씀이여.(처음~1951)

 

 

 

 

(2)------------------

 

잉풍기랑낭생구(仍風起浪浪生)한대   참괴청평해상부(慚愧淸平海上)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일홀연풍랑식(今日忽然風浪息)허니   징명원시일강추(澄明元是一江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잉풍기랑낭생구(仍風起浪浪生). 바람으로 인해서 물결이 일어났고, 물결로 인해서 버큼(거품)이 일어났더라.

참괴청평해상부(慚愧淸平海上).  맑고 평평한 바다 위에  버큼이 떠있는 것이 부끄럽구나.

 

바람으로 인해서 물결이 일어났고, 물결로 인해서 버큼이 일어나 가지고,  더러운 버큼이  맑고 평평한 깨끗한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니  얼마나 추악하고  부끄러울 일이냐 그말이여.

 

금일홀연풍랑식(今日忽然風浪息)하니, 오늘 홀연히  바람과 물결이 쉬어 버리니,

징명원시일강추(澄明元是一江秋). 맑고 밝은 원래 그대로의  강(江)의 가을이더라.

가을이 돌아와  하늘은 맑고 공기도 맑은데, 바람과 물결이 잔잔히 가라앉어 버리니까,  맑고 밝은 강이 본래 그대로더라 그거죠.

 

출가해서 10, 20 내지 평생을 참선을 한다고 했건마는 확철대오를 못하고,

어제도 이럭저럭 오늘도 이럭저럭 이렇게 늙어간다면, 그것은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거나, 바른 선지식을 만났으되 용기가 부족했거나, 용기를 가지고 했으되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이 틀렸거나,

 

또는 금생에는 자기 나름대로 선지식을 만났고  용기도 가졌고  바른 방법으로 했건마는, 전생에 워낙 닦아 놓은 것이 없거나,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도업(道業) 성취를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새로 이제 출가한 젊은 스님네들, 어쨌든지  도를 성취헐라면 바른 선지식을 찾고, 바른 선지식에게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려.

 

‘몸을 잊는다하는 것은자기의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치(我癡)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 자기는 많이 배웠다는 생각, 내로라하는  아만심(我慢心), 자존심 이러헌 것이  속에  있어 가지고—정말 법을 위해서 자기가 알고있는 모든 ,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모든 것을 갖다가 깨끗이 비워버리는 거여.

 

말하자면은 어떠한 좋은 깨끗한 물을 담을라면은  그릇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비워버려야 되거든.

 

 안에 들어있는 무슨 음식이 되었건, 음식 찌꺼기가 되었건, 기름기가 묻었건,  반찬 냄새가 묻었건, 일단 깨끗한 물을 담을랴면  안에 어떠한 맛있는 물건이라도  버려 버리고 깨끗이  다음에라야  맑은 물을 담을 수가있는 것이지,

거기에 본래 어떠한 것이 담어져 있는 상태에다가 아무리 맑은 물을 부어 봤자  물은 구정물이 되고 말아 버리는 것이다.

 

 () 그러한 음식과도  달라서, 음식은 다른 것이 담아 있어도  옆에다  곁들여서 담어서  가지  가지도 담을  있지만, () 영판  .

 

천하 없는 경전에 있는 말씀이라도 속에 담어져 있으면 그것은  되는 거여. 팔만대장경을 육두로  외우고,  풀이를   알아도,  생각이 속에 들어있으면은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여.

천하 없이 십계, 십중대계, 48경계와 비구 250계, 비구니 500계를 낱낱이  실천을 해서 청정하기가 말로   없다 하드라도,  청정한 데에 맥혀 갖고 있으면 도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이여.

 

심지어  보다 더한 것이 속에 있다 하드라도 얻은 바가 있다 하드라도 그러한 것이 () 갖고 있으면은 도는 통할 수가 없는 것이여.

아라한과를 증득했으되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하는 생각을 가지면 벌써 아라한이 아니고, 보살도를 증득했으되 내가 보살도를 증득했다하면은 벌써 그것이 보살이 아니여.

 

깨달았으되 깨달았다’는 생각에 () 있으면은  깨달음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그렇거든 이제 공부하려는 사람이 선지식을 구할 때에 내로라는 생각을 속에 가지고 있어 가지고  선지식이 믿어지냐 하면 믿어지지도 않는 것이고, 선지식으로부터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봤자  법문은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것이여.

 

그래서  () 무엇을 많이 알고, 많이 속에다가 쌓는 공부가 아니고 비우는 공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익힌 모든 선업(善業), 악업(惡業), 일체 업도  비우려니와 법견(法見), 불견(佛見)까지라도  비워버려야 .

 

비우는 데에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보는 것이지, 비우지 않고서는 점점 깨달음으로부터서는 멀어져 가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야.

 

그래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금강경에  사상(四相) 말씀하셨지마는,  첫째  아상이 문제거든.

아상(我相) 하나만 무너져버리면은 다른 나머지기 3상() 문제가 없는 것이여.

 

 아상(我相), ‘내’라고 하는 이놈 하나 때문에 결국은 무량겁 생사윤회도 거기에서 원인이 되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도 거기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육도법계(六道法界)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온갖  태란습화(胎卵濕化) 그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웬수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내’라는 놈이 없다면은 남하고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고, 내라는 놈이 없다면은 탐진치(貪瞋痴)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대중생활 하는 데에도 내’라 하는 생각 있는 데에서 온갖 불평이 일어나고, 온갖 서로 다툼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장애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도량에 들어오면은 첫째 아상을 무너뜨려 버리고,  주장을 버려 버리고,  선원의 규칙대로 순종을 하고 적응을 하도록 그렇게 한다면은   동안 장애 없이 공부할 수가 있어.

아무 장애 없이   동안을 정말 온전히 알차게 짬지게   동안을 정진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203~3122)

 

 

 

 

------------------(1)

 

*(게송) '路從平處險  人向靜中忙’ ; 卍新纂續藏經 제 71책 《요당유일선사어록(了堂惟一禪師語錄)》 권2 참고. 大正藏 《철옹화상어록(徹翁和尙語錄)》 상권 참고.

*(게송) ‘覓火和爛得  擔泉帶月歸’ ; 大正藏 제 47책 《허당화상어록(虛堂和尙語錄)》 1권 참고.

*나찹다 ; ‘낮다’의 사투리.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 ; 용상방(龍象榜)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것이다.

*조복(調伏) ; ①산스크리트어 nigraha 몸과 마음을 조절하여 온갖 악행을 다스림. ②산스크리트어 vinaya출가자가 지켜야 하는 규정.  () 말함. ③온갖 장애를 굴복시킴.

* 그릇 ; 큰일을  만한 뛰어난 인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버큼 ; ‘거품 사투리.

 

 

 

 

------------------(2)

 

*(게송) 잉풍기랑낭생구~’ ; 《허응당집(虛應堂集) (허응당 보우) ‘시부상인(示膚上人)’ 참고.

*내로라하다 ; (주로 내로라하는 꼴로 쓰여) 어떤 분야에서 두드러지거나 대표할 만하다.

*본래면목(本來面目  / / / )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사상(四相) ;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가지 분별심.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자의식.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인상(人相) ;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생각. 생명체라는 관념·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태란습화(胎卵濕化) ; 사생(四生).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가지 (),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이른다.

*짬지다 일하는 솜씨가 여물고 깐깐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4. 13. 12:38

 

 

§(세등26) 여종 욱면의 신심 / 공부하는데 핑계 대지 말라 / 부처님의 수행에 대한 거문고 줄 비유 / (게송)서왕한래춘부추~.

방아 찧고 절에 가면 밤은 벌써 이경(二更)이라, 한 소리 염불마다 부처되기 원하더니, 육신등공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였네, 일 많다 핑계 말고 욱면처럼 정진하소.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세상에서 사업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집안 살림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몸이 아퍼서 못한다’고 이러쿵 저러쿵 온갖 핑계를 대고,
‘병이 나으면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살림이 좀 나아지면 하리라’ 이렇게 핑계를 대시지 말고, 당장 이 자리부터서, 이 시간부터서 한 생각 한 생각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이뭣고?’


도 닦는 것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니라. 너무 거문고 줄을 세게 매지도 아니하고, 너무 느슨하게 매지도 아니하고, 가장 알맞게 거문고 줄을 매야만 정말 아름다운 곡을 탈 수가 있듯이, 이 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6)—기미년 동안거 해제 법어(80.01.17) (세등26)

 

(1) 약 20분.

(2) 약 11분.


(1)------------------

신라(新羅) 경덕왕 때, 지금 진주에 아간(阿干) 귀진(貴珍)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큰부자라 많은 종들을 두고 살았는데,
여러 수십 명의 친구들과 계(契)를 모아 가지고 그 계로 모여진 돈으로써 미타사(彌陀寺)라고 하는 절을 하나를 딱 지었다 그말이여.

절을 지어 놓고는 스님네를 모셔다가 놓고 법문도 듣고, 또 자기 계꾼들도 그 절에 매일 가서 염불을 하는데,
그 귀진이라고 하는 집에 여자 종이 하나 있었는데, 종의 이름은 욱면(郁面)이다 그말이여.

욱면이라고 하는 여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인을 따라서 자기도 따라가 가지고 염불을 하는데,
자기는 종이라나서 법당에를 들어가지를 못하고, 주인과 스님네는 법당에 들어가서 정근(精勤)을 하는데, 자기는 마당에 선 채 정근을 한다.

어떻게 열심히 하던지 마당에 서서 밤이 새도록 정근을 하는데,
그 주인이 그 욱면이를 보고, 종의 신분으로서 건방지게 따라와서 염불한다고 ‘당장 집으로 가라!’ 그리고는 그 이튿날부터서는 곡식을 두 섬씩을 줘 가지고 ‘너, 밤새 이 곡식을 방아를 찧어라’

그렇게 절에 못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일을 시켰는데, 욱면이는 초저녁부터서 어떻게 열심히 방아를 찧던지 두 섬 곡식을 다 찧어 놓으면 이경(二更)이 되었다 그말이여.

이경이 지난 뒤에 달음박질을 해서 절로 쫓아와 가지고 절에 와서 정근을 하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 12시까지 그 곡식 두 섬을 다 찧어 놨으니 몸이 피로할대로 피로하기 때문에 정근을 하다가 졸음이 와 가지고 까딱하면 넘어질라고 그러고, 넘어졌다 다시 쓰러지고.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서는 마당에다가 말뚝을 두 개를 박어 놓고는, 자기 손바닥에다가 송곳으로 구녁을 뚫어서 노끈으로 손을 묶어 가지고 딱 말뚝 위에다 올려 놓고, 쩜매 놓고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무서운 정근을 했다 이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하고, 이틀을 그렇게 하고, 한 달을 그렇게 하고, 두 달을 그렇게 하고 해서 9년 동안을 그렇게 무섭게 정근을 했어.

무슨 원(願)을 세웠든가? '금생에 결정코 불신(佛身)을 이루리라. 성불(成佛)을 하리라' 이렇게 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정근을 해가지고 9년만에 확철대오를 했는데,
가만히 ‘내가 과연 전생에 무엇이었길래 금생에 이렇게 남의 집 종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9년만에사 이렇게 도를 통했는가’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전생에 자기도 중이였었다 그말이여.

중이였었는데 그때 천수백 명의 대중과 더불어 ‘현생(現生)에 불신을 얻으리라’하고, 그렇게 맹세를 하고 같이 모다 도를 닦다가—자기도 따라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차츰 타락을 해가지고 안일(安逸)하기를 기다리고, 편안하기를 바래고, 그럭저럭 세월을 지내면서 파계(破戒)를 하고 그러면서 그 무서운 시주것을 많이 소모를 했다.

그래 가지고 죽어서—자기가 그때 도를 닦던 절이 어디냐 하면은 부석사, 영주에 가면 지금도 부석사가 있어서 그 무량수전이 국보에 잡혀 있지만—그 영주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 절 소가 되어 가지고 십수년간을 참,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말이여.

짐은 무겁고 힘은 모자라서 어물어물하면 수없이 모진 매를 맞고, 그렇게 십수년을 고생을 하다가,
하루에는 절에서 절로 경전을 큰 수레에다가 실어서 불경(佛經)을 운반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자기 마음이 후련하면서 눈물이 나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말이여. 그러다가 그날 저녁에 그 소가 죽었어. 그 소가 소의 몸을 벗었다 그말이여.

벗고서 그 다음에 어디에 태어났냐 하면은 이 진주 땅에 아간 귀진이라고 하는 그 사람 집에 태어났다.
그 귀진이란 사람은 전생에도 부자로서 그 영주 부석사에 많은 곡식과 의복과 약과 모다 그런 것을 많이 시주를 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귀진이라고 하는 신도가 전생에 시주한 그 시주것을 이 욱면이라고 하는 사람이 전생에 부석사 중으로 있으면서 그 시주것을 많이 받아먹었다 그말이여.
그 많이 받아먹고 도를 끝까지 잘 닦아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면 그 빚이 다 갚아졌을 텐데,

그놈을 잘 먹고, 잘 입고 그러면서 도는 철저히 닦지 않고 방일을 하고, 그럭저럭 잘못했기 때문에 소가 되어서 부석사 일을 한량없이 하고 수없는 매를 맞다가, 마지막에 그나마 경전을 실어다가 준 그 공덕으로 소의 몸을 벗고 귀진이 집에 종으로 태어났다 그말이여. 전생의 빚을 갚기 위해서 그 종으로 태어났어.

그랬다가 금생에 그 미타사 절에 가서 손바닥에 구녁을 뚫어 가지고 말뚝 머리에다가 짬매 놓고, 그 9년 동안을 피나는 고생을 하고,
낮에는 주인네 일하고, 밤에는 방아를 찧고, 그리고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끌고 가서 말뚝끝에다가 손을 짬매 놓고 그 9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피나는 정근을 했다 그말이여.

그랬던 일이 다 생각이 나는데, 그런 생각이 머리에 딱 떠오르면서 그 전생에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니까 너무 부끄러워서, 부끄러운 생각 속에 잠겨 있는데,

하늘에서 ‘욱면 낭자(娘子)는 법당 안으로 들어가시오.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염불을 하라’ 이런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거든.
그 소리를 듣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던 스님이 나와 가지고, 마당에서 정근을 하는 욱면이를 법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말이여.

들어가서 부처님 앞에 수없이 절을 하는데 법당 안, 법당 밖 도량에 이상한 향내가 풍기면서 하늘에는 장엄한 음악 소리가 풍겼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욱면이는 계속해서 절을 하더니, 느닷없이 몸이 솟구쳐 천장으로 올라가서 법당 천장을 뚫고 저 하늘 높이 솟아올라갔다.

그래서 대중이 모다 그 뚫어진 구녁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밖으로 나가서 이상한 음악 소리가 울리고 그 향내가 진동하는데, 아! 그래 놀래고 이상스럽게 생각했는데,
며칠 있다가 보니까 그 산의 중턱에 욱면이가 신던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어. 또 얼마 있다 보니까 산기슭에 욱면이의 몸이 내려와 가지고 앉아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욱면이의 신발이 떨어진 자리에는 보리사(菩提寺)란 절을 짓고, 욱면이가 몸뚱이 떡 앉아 있는 산기슭에는 제이보리사(第二菩提寺)란 절을 지어서, 그것이 지금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일자무식(一字無識)인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따라서 절에 가 가지고 그 우연히 그런 신심이 나 가지고,
방아를 찧으라고 하니까 그 방아를 저녁내 찧어 가지고 놓고는 새벽길로 절로 쫓아가 가지고 정근을 하는데, 잠이 오니까 손바닥에 구녁을 뚫어 가지고 그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다.

우리는 혜가대사가 팔을 끊어서 달마대사 앞에 바치고 법을 배우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모습을 들었고,
욱면이라고 하는 일자무식의 종이 손바닥에 구녁을 뚫어 가지고 9년 동안을 용맹정진을 해가지고, 육신(肉身)으로 등공(騰空)한 그러한 영험담(靈驗談)을 들었습니다.


방아 찧고 절에 가면 밤은 벌써 이경(二更)이라, 한 소리 염불마다 부처되기 원하더니,
육신등공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였네, 일 많다 핑계 말고 욱면처럼 정진하소.
나무~아미타불~

이 자리에 계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비구니 수좌 여러분.
여러분도 혜가대사처럼 위법망구하고, 여자 종 욱면이처럼 그러한 신심과 분심(憤心)과 견고한 뜻을 가지고 정진을 하신다면, 결정코 금생에 대도를 성취할 것을 나는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보증을 하겠습니다.

옛날 도인(道人)도 ‘그렇게 열심히 해서 3년을 해가지고 칠통(漆桶)을 타파(打破)를 하고 견성(見性)을 못한다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리라’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세상에서 사업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집안 살림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몸이 아퍼서 못한다’고 이러쿵 저러쿵 온갖 핑계를 대고,
‘병이 나으면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살림이 좀 나아지면 하리라’ 이렇게 핑계를 대시지 말고,

당장 이 자리부터서, 이 시간부터서 한 생각 한 생각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아무리 일이 많다 해도 남의 집 종노릇을 하고 있는 욱면이라고 하느 여종만큼은 일이 더 많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세등선원에서 한철 동안을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한 대중 여러분!  그리고 제방(諸方)에서 해제를 마치고 여기에 참례(參禮)하신 수좌(首座) 여러분!
신심있는 단월(檀越)들이 바친 곡석과 의복, 자기의 공부도 뒤로 미루고 우리를 외호해 주신 이 본방...(녹음 끊김)...용맹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신라 때 욱면만큼의 고생에는 미치지 못했지 않은가 싶습니다.

우리의 신심, 우리의 용맹정진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전부 다 손바닥에다가 구녁을 뚫으라는 말씀도 아니고, 모두 다 칼로써 왼팔을 끊으라고 권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분들이 한 그 목숨을 바칠 만한 그 신심!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고,
법을 위해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 무서운 정진, 그 굳은 9년 동안을 하루같이 한 그 철썩 같은 뜻!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소신연비(燒身燃臂)를 하지 아니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어렵다’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당장 손가락에다 불을 지르고, 몸을 갖다가 장작을 쌓아 놓고 몸을 태우고, 이렇게 경전의 말씀을 받아들여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것을 참고 이길 만한 그 참을성 있는,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는 그런 굳은 뜻을 우리는 배워야 하고, 몸을 갖다가 태울 만한, 몸을 헌신짝같이 버릴 만한 위법망구적인 그러한 정성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형식적인 것을 배워 가지고 손가락을 태우고, 형식적인 것을 배워 가지고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태우고, 도끼를 가지고 손가락을 짜르고, 이러한 어리석은—물론 그 신심은 물론 찬양할만 하지만,
그 신심이 어떻게 신심을 내느냐? 지혜로운 신심,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 알맹이 신심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28분3초~48분3초)

 

 

 



(2)------------------

부처님 당시에 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일생 동안에 너무 호강을 하고 귀염을 받아서, 한번도 그 발로 땅을 디디지 않았기 때문에 발바닥에 털이 안났습니다.
그래서 발바닥에 털 안난 사람이 있다해 가지고, 인근 마을 사람은 물론 저 멀리 사는 사람까지 그 소문을 듣고, 발바닥에 털 안난 사람을 구경하기 위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소문이 퍼지고 퍼지고 해가지고, 부처님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처님과 인연이 있어서 그 사람은 출가를 해서 부처님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떻게 용맹정진을 했던지 몸에 병이 났습니다.

몸에 병이 나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불법에 인연이 없어서 병만 나고 도는 이루지를 못하고, 차라리 내가 이렇게 병이 걸려 가지고 고생을 하다가 도(道)도 이루지 못하고 죽을 바에는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편히 먹고, 편히 자고,
그러면서 내게 한량없는 많은 재산이 있으니, 이 재산을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에 공양도 올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도 하고 또 사회복지를 위해서 희사도 하고 이러면서 내가 복을 지으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퇴속(退俗)할 마음을 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만히 정중에 살펴보니 제자 하나가 퇴속할 마음을 낸 것을 아시고, 그 제자에게 가서 “네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엇을 잘했느냐?”
제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거문고를 잘 뜯고, 거문고에 취미와 소질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냐. 그러면 그 거문고 줄을 되게 세게 매면 소리가 어떻드냐?”
“너무 세게 매면 소리가 제 음가가 나오지를 아니하고 까딱하면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 그러면 느슨하게 매면 어떻드냐?”
“너무 느슨하게 매면 소리가 제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곡을 탈 수가 없습니다”

“그래, 도 닦는 것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니라. 너무 거문고 줄을 세게 매지도 아니하고, 너무 느슨하게 매지도 아니하고, 가장 알맞게 거문고 줄을 매야만 정말 아름다운 곡을 탈 수가 있듯이, 이 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게으름을 부리고, 너무 배불리 먹고, 너무 편안하게 잠만 자고, 해태에 빠져도 도를 이룰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고행을 지나치게 하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것이라, 도는 얻기도 전에 병 먼저 나가지고 결국은 퇴타(退墮)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내가 출가해 가지고 온갖 설산 안에 있는 많은 신선들을 찾아다니면서 한 것이 무엇이었더냐. 불 속에도 들어가고, 가시덤불 위에도 걸어다니고, 밥도 굶고 잠도 안 자고, 갖은 고행을 누구 못지않게 했지만 나는 도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나친 환락에 빠진 것도 도에 장애요, 지나친 고행도 도에 장애다. 모두가 성스러운 수행이 되지를 못한다. 그것을 내가 깨달았드니라.
네가 어찌 나의 제자로서 나의 잘못된 과거를 네가 다시 밟을 수가 있단 말이냐”

그 제자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을 듣고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여법(如法)하게 도를 닦아 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혜가대사의 말씀, 또 이 욱면이라고 하는 신라 때 종의 말씀을 듣고,
‘옳다! 내가 오늘 저녁부터서는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자지 아니하고 용맹정진을 하리라’ 이러한 마음을 내신 분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혜롭게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도로 필요한 만큼은 먹어줘야 하고, 최소한도로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난다든지 그러한 퇴타의 인연이 없이 결정코 금생에 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닦으면 반드시 장애가 일어나 가지고 도를 얻기 전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최소한도로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재워 주고, 재워 주어야 그 이튿날 눈을 떴을 때 맑은 정신이 있어서 성성(惺惺)하게 도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밥도 너무 잘 먹고 너무 기름지게 먹은 것은 그것도 재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안 먹어도 못쓰는 것이여.

 

적당히 먹어 주고, 적당히 재워 주고, 적당히 입혀 줘야, 장애가 없이 도를 얻는 것이니 만큼 이 도는 지혜롭게 닦아야지, 신심과 용맹과 지혜가 있어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여.
바른 스승을 만나야만 신심이 나고, 바른 신심이 나야만 분심이 나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어리석게 닦기 때문에 도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바른 지도를 받고 한 사람이 어찌 퇴타하며, 어찌 마장(魔障)이 생기며, 어찌 도를 이룰 수가 없겠습니까.


서왕한래춘부추(暑往寒來春復秋)하고  석양서거수동류(夕陽西去水東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더위가 가고 추위가 오는구나. 봄이 지나면 다시 또 가을이 오는구나. 석양에는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는구나.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나개친증도지두(那箇親曾到地頭)오
나무~아미타불~

이 망망(茫茫)한 우주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개친증도지두(那箇親曾到地頭)냐, 그 가운데 몇 사람이 친히 대도를 성취할 사람이 나올 것이냐.(48분4초~59분49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욱면 이야기 ; [삼국유사(三國遺事)] 감통편(感通篇), ‘郁面婢念佛西昇(여종 욱면이 염불하여 서쪽 하늘로 올라가다)’
*아간(阿干) ; 신라 때, 십칠 관등(十七官等) 가운데 여섯째 등급(等級)의 벼슬을 이르던 말. 육두품이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관등이다.
*정근(精勤) ; ①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이나 공부에 아주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힘써 일하는 것. ②기도를 할 때 별념(別念)이 없이 일심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염불하는 것.
*이경(二更) : 하룻밤을 五경으로 나눈 둘째이니, 밤 9시~ 11시를 말함.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일자무식(一字無識) ;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음. 또는 그런 사람.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등공(騰空 오를 등,하늘 공) ; 승천(昇天). 하늘에 오름.
*영험담(靈驗談 신령할 영,증험 험,이야기 담) ; 기원(祈願)이나 신앙에 대하여, 신불(神佛)의 불가사의한 감응(感應)이 있는 것을 말한 이야기.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견성(見性) : 성품을 본다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참례(參禮) ; 예식, 제사, 전쟁 따위에 참가하여 관여함.
*수좌(首座)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단월(檀越) ; 시주(施主). dana-pati 의 음역.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소신연비(燒身燃臂) ; 소신공양(燒身供養). 자기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바침. 또는 그런 일.
*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난행(難行) ; ①행하기 어려움. ②고된 수행.

 

 

 



------------------(2)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성성(惺惺) ; 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게송) ‘서왕한래춘부추~’ ; 卍新纂續藏經 제65책 <禪宗頌古聯珠通集 36권> 설암조흠(雪巖祖欽) 스님 게송.
*망망하다(茫茫-- 아득할 망) ; 넓고 멀어 아득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4. 11. 15:42

 

 

§(세등26) (게송)일휘상인참춘풍~ / 혜가대사의 위법망구 / 바른 스승의 중요성 / (게송)일생장환주인공~ / 화두는 가깝게 들어야 한다.

법(法)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남에게 이것을 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란 얼마든지 동서남북으로 찾고 또 찾아서 찾을 수가 있겠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여.


바른 스승을 만나서 철저히 믿고 여지없이 자기의 선입관을 다 버리고 오직 지도한 대로만 여법(如法)하게 닦아 간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혜의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참선법은 저 멀리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뭣고?’한 바로 그놈을 찾는 것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뭣고?’하는 놈」을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송담스님(세등선원No.26)—기미년 동안거 해제 법어(80.01.17) (세등26)

 

(1) 약 20분.

(2) 약 8분.


(1)------------------

일휘상인참춘풍(一揮霜刃斬春風)헌데  설만공정낙엽홍(雪滿空庭落葉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리시비재변료(這裏是非才辨了)인댄  반륜한월침서봉(半輪寒月枕西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휘상인참춘풍(一揮霜刃斬春風)이다. 서릿발치는 칼을 한번 휘두르니 봄바람을 비는 거와 같고,
설만공정(雪滿空庭)에 낙엽홍(落葉紅)이라. 눈이 가득한 빈 뜰에는 이파리가 떨어져서 붉다.

자리시비(這裏是非)를 재변료(才辨了)인댄  반륜한월침서봉(半輪寒月枕西峰)이니라.
이 속에 옳고 그른 도리를 알겠느냐? 반바퀴 차운 달이 서쪽 봉우리에 벼개 했느니라.


부처님으로부터서 28조(二十八祖) 달마대사는 중국에 건너오셔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셨습니다. 일백사십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 가지고 중국에 오셨습니다.
중국에 오셔서 맨 처음에 양무제(梁武帝)를 만났습니다. 양무제가 사신을 보내서 달마스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달마대사를 친견한 양무제는 중국 역대 천자 가운데에 가장 신심이 돈독한 그러한 천자였습니다. 어떻게 신심이 장했던지 자기도 몸소 가사를 수하고, 많은 절을 짓고, 불경을 인포하고 스님네를 많이 외호를 했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뵙자마자 “짐(朕)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했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되오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시기를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廓然)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달마 스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짐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대사가 대답하시기를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달마대사의 뜻을 양무제는 알지를 못하고 달마대사를 푸대접을 했습니다.

그길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벽을 향하야 가부좌를 하고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했습니다.
9년 동안을 묵무언(默無言)하신 채 면벽관심을 하고 계시는데, 그때 신광(神光)대사라고 하는 한 승려가 ‘인도로부터서 대도인이 오셔서 소림굴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는데 그때가 12월 초아흐레경 엄동설한이라 초저녁부터서 눈이 내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굴 밖에 서서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서 있었는데, 밤새 눈이 퍼붓어 가지고 허리까지 눈이 차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광대사는 조끔도 움직이지 안했습니다.

밤이 깊어서 삼경을 지나고 새벽이 가까웠습니다.
달마대사가 너무 측은하게 생각을 하시고 “네가 그 눈 속에 밤새도록 서 있어 무엇을 구하느냐?”
신광대사가 대답하기를 “오직 큰스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널리 감로(甘露)의 법문을 열어 가지고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한 도리는 무량겁을 두고 용맹정진을 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음으로써 얻어지거늘,
어찌 너와 같은 소덕소지(小德小智), 적은 덕과 적은 지혜로 가벼운 마음과 건방진 마음으로 어찌 참불법의 도리를 바랜단 말이냐. 공연히 그러한 마음으로 헛되이 수고를 해봤자 소용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광대사가 그 말씀을 듣고 살며시 허리춤에 찼던 칼을 뽑아 들고, 자기의 왼팔을 탁! 쳐 가지고 스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때 칼로 왼팔을 치니까, 눈 속에서 새파란 파초(芭蕉) 이파리가 쑤욱 솟아올라 가지고 땅에 떨어지려는 팔을 받아 냈습니다. 파초에 받쳐진 팔을 들어서 달마스님 앞에 바쳤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달마 스님께서 ‘음, 그만하면 도를 닦을 수가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을 하시고,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해서 몸을 바쳤느니라. 네가 이제 내 앞에 팔을 끊었으니 그만하면 법을 구할 수가 있겠다. 네 이름을 신광이라 하지 말고 혜가(慧可)라고 해라”
‘그만했으면은 법을 구해 가지고 가히 지혜를 얻을만 하다’해서 혜가라고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혜가대사는 달마대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을 가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진리법을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니라”

혜가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제자의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너의 마음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네 마음을 편안케 해 주마”

혜가대사가 가로되 “아무리 마음을 찾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해서 너의 마음을 다 편안해 마쳤느니라”

2조 혜가대사가 달마 스님께 법을 구할 때 밤새도록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서 있어서 눈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대사는 ‘너와 같은 소지소덕(小智小德)과 경심만심(輕心慢心)으로 무슨 법을 구한단 말이냐?’
여기에서 팔을 꺾어서 올리고 비로소 달마대사는 ‘과연 그만했으면 법을 구할만 하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남에게 이것을 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스승으로부터 얻을 것은 없지만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희유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스승을 인(因)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느냐?
왜 스승으로부터 얻을 것도 없고, 스승이 줄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없이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던가?

이것은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란 얼마든지 동서남북으로 찾고 또 찾아서 찾을 수가 있겠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여.

마치 자기의 눈으로 온갖 세상의 것을 다 볼 수 있지만, 자기가 자기 눈은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눈은 거울을 빌리지 아니하면 자기의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거울 없이 자기 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여.

어째서 자기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보고, 희고 검고 붉고 누르고 한 것을 다 보면서 자기의 눈은 볼 수가 없느냐?
거울을 가자해서만이 자기의 눈을 볼 수가 있는데,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자기의 눈은 자기의 눈의 그림자일 뿐 참 자기의 눈도 아니다 이거거든.
거울에 비친 자기의 눈은 자기의 눈의 영상이요, 자기의 눈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지 자기 눈은 아니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있는 그 주인공은 하늘을 보고 파란 줄을 알고, 산을 보고 높고 낮차운 것을 알고, 물을 보고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소리를 듣고 새 소리다, 개 소리다, 차 소리다 온갖 소리를 다 분간하고,
냄새를 맡고 냄새가 구수하다, 구리다, 온갖 냄새를 다 코를 통해서 알고, 혀로써 온갖 맛을 짜고 싱거운 것을 알고, 몸으로써 춥고 더운 것을 알고, 생각으로써 슬프고 외롭고 성낼 줄을 알면서,

 

성낼 줄 알고, 희고 검은 줄을 알고, 짜고 싱거운 것을 아는 그놈은 과연 무엇으로써 보며, 무엇으로써 들으며, 무엇으로써 맛보며, 무엇으로서 냄새를 맡으며, 무엇으로써 만져 볼 수가 있는가?

눈으로 아무리 볼래야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아무리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고, 코로 냄새를 맡을래야 맡을 수 없고, 혀로 맛볼래야 맛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 없는 그놈을 보고 깨닫는 이것이기 때문에,
스승 없이는 아무리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피를 백 번을 토한다고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여.

바른 스승의 지도가 없이 이것을 깨달을라고 몸부림을 쳐봤자 애를 쓰면 쓸수록 빨리 미치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스승 없이 자기 혼자 산중에 들어가 가지고 토굴에 들어가서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밤잠을 안 자고 곡식을 끊고 풀 이파리와 나무 열매를 가지고 연명을 하면서 고행을 해봤자,
조금 식(識)이 맑아져서 겨우 된 것이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아니되고, 잘못되면 미치거나 삿된 종자가 되고 마는 것이여.

바른 스승만 만나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만 한다면 결정코 자기를 깨닫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처음~20분12초)

 

 



(2)------------------

어렵다 어렵다하지만 사실은 무엇이 깊이 숨어갔고 있고, 먼 데가 있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깝고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 쉽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멀고 깊고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른 스승만 만나고 위법망구적으로만 한다면 마치 목마른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 대주면 그 소는 꿀꺽꿀꺽 물만 마시면 갈증이 풀리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끌고 가는데 싫다고 뒤로 버틴다든지, 끌어다 갖다 대주어도 그 물이 독이 섞여 있나? 이리 의심을 하고 안 먹는다든지 이러면 그 소는 갈증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철저히 믿고 여지없이 자기의 선입관을 다 버리고 오직 지도한 대로만 여법(如法)하게 닦아 간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혜의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생장환주인공(一生長喚主人公)한데  불수인만회불문(不受人謾回不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일성성하처거(今日惺惺何處去)오  만산송백기비풍(滿山松柏起悲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생 동안을 ‘주인공(主人公)아! 주인공아!’ 이렇게 길이 불러서, 불수인만회불문(不受人謾回不問)이라.
어떤 도인(道人)이 일생 동안을 방에 들어가서 ‘주인공아!’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사람에게 속지 말어라’
‘아무개야!’ ‘예!’ 자기가 자기를 불러 놓고 대답을 하고서 ‘사람에게 속지를 말어라’ 이렇게 일생 동안을 공부를 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금일성성하처거(今日惺惺何處去)오. 오늘 성성(惺惺)한데 어느 곳을 향해서 가느냐?
만산송백기비풍(滿山松柏起悲風)이라. 만산(滿山)에 소나무와 잣나무에 슬픈 바람이 일어나는구나.
‘만산 송백에 슬픈 바람 소리가 일어난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소식입니다.

이 도리는, 참선법은 저 멀리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뭣고?’한 바로 그놈을 찾는 것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뭣고?’하는 놈」을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저 부모한테 나기 전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하니까, 30년 된 사람은 ‘30년 전에 부모 배에 태어나기 전에 그놈이 무엇이냐?’ 무량겁을 윤회를 해 왔는데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기 전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이렇게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지금 당장 ‘이뭣고?’한 거기에서 찾아야, 가깝게 찾아야 한다.

‘이뭣고?’  ‘지금 '이'하는 이놈이 무엇고?’ 언제라도 바로 이 ‘이뭣고?’한 여기에서 찾어라.
‘이뭣고?’ 알 수 없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곳에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 그놈을 묵묵히 관조(觀照)해야 한다 그말이여.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빨리 깨달을라고, 깨닫기를 기다리고, 깨닫기를 바래고, 누가 나를 깨닫게 해주기를 바라는데,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다.(20분13초~28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일휘상인참춘풍~’ ; [청매집(靑梅集)] (청매인오 스님) 상권 ‘少林斷臂’ 참고.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달마대사, 혜가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확연(廓然)하다 ; 넓게 텅 비어 있다.
*감로(甘露) ;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그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인(法印) ; ①묘법(妙法)의 인(印). 진리의 표시. 부처님의 가르침의 표시. 3법인(三法印)·4법인(四法印) 등이 있음. ②이치.
*경심(輕心) ; 경솔(輕率 말이나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움)한 마음.
*만심(慢心) ; 근본 번뇌의 하나.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자랑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깔보는 마음. 우쭐거리는 마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부처님의 가르침. ④본성.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식(識) ; ①인식작용. 식별작용. 대상을 다르게 아는 마음의 작용. ②마음·뜻과 같음. 마음.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2)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게송) ‘일생장환주인공~’ ; 卍新纂續藏經 제65책 <禪宗頌古聯珠通集 31권> 불국백(佛國白) 스님 게송 참고.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이뭣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 분류 ‘화두(공안)’ 참고.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5. 4. 4. 14:29

§(280) 『열반경』 ‘용기’에 관한 말씀 /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 의심, 의단이 거기에 갖추어진다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것 / (게송)시비해리횡신입~.

도를 닦는데 있어서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생사 문제, 육신의 생명을 바치고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 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비록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댁에 계실지언정,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생활 그것이 선방(禪房)이요, 가족이 도반이요, 이웃이 도반이라 생각하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부처님이요,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요, 선지식의 법문이다.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장소는 선방이요 그 시간은 입선 시간이다’ 이리 생각하고, 선방에 방부들인 여러 대중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신다면 오히려 가정에 계시고, 속세에 계신 분이 더 힘있고 철저한 정진을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송담스님(No.280)—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 (용280)

 

(1) 약 18분.

(2) 약 5분.


(1)------------------

『열반경(涅槃經)』에 나온 말씀인데,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共同墓地), 묘지 곁에다가 집을 짓고 사는 데 밤에 어디서 소리가 들리기를 자꾸 자기 이름을 불러 싸.

‘어디서 들리는고?’하고 가만히 귀를 쫑그리고 그 소리 나는 쪽을 가 보니까 무덤 묘지 속에서 소리가 난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포심이 발칵 나면서 그냥 거기서 물러나왔어.
그 다음날 저녁에도 밤만 깊어지면 무덤 속에서 또 자기를 불러. 그래서 또 겁이 잔뜩 났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 이튿날 날이 새 가지고 그 마을에 담력(膽力)이 센 사람, 용기가 있는 사람한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아! 밤만 되면 무덤 속에서 소리가 나고 나를 불러 싸니 이것 참 무서워서 혼이 났다” 그러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한번 오늘 저녁에는 가봐야겠다” 그 무덤 옆의 집에 가 가지고 그날 저녁에 가만히 그 무덤 옆에 가까이 가서 있으니까, 아! 소리가 난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소리 나는 무덤 있는 데로 가니까 그 속에서 말을 하기를 “나는 이 땅속에 묻혀 있는 황금 덩어리다. 그러니 내가 이 황금 덩어리를 너에게 주고자 하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집안 소지(掃地)를 깨끗이 하고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그리고서 그 방에다가 맑은 물을 여덟 그릇을 떠다놓고 또 죽을 잘 쒀서 여덟 그릇을 갖다가 놓고서 기다려라.
그러면 먹물 옷 입은 스님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 스님을 너의 방으로 모셔 들여 가지고 물과 죽을 대접을 해라. 공양을 해라.

그러면 그 스님들이 그 물과 죽을 맛있게 잡술 테니 그러고 난 다음에 방을 여덟 개의 칸으로 막아 가지고 한 칸 한 칸에다가 그 스님을 딱 모셔라.
모시고서 문을 딱 잠가 놓으면 그 스님들이 바로 황금으로 변해 가지고, 항아리 속에 황금이 가뜩 담아진 것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인자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 이튿날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사시(巳時)가 되니까 스님네들이 주욱 여덟 분이 오는데 준비해 놓은 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죽 공양을 다 잡숫고 물을 잡숫고 난 다음에 여덟 칸 방에다가 한 칸, 한 칸 안내를 해서 모셔놓고 문을 딱 잠갔는데,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스님은 간 곳이 없고 칸칸이 항아리 속에 황금이 담뿍담뿍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을 사람이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마치 흥부가 제비 다리를 짬매서 날려보내 가지고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놀부가 성한 제비를 뚜드려 잡아 가지고 그 부자가 되려고 하듯이,

그 어리석은 사람이 집에다가 죽을 쒀서 여덟 그릇을 해놓고 물을 뜨고 해놓고는 며칠을 기다리니까,
마치 탁발(托鉢)하는 스님이 여덟 분이 오니까 그분을 초청을 해서 그 죽과 물을 공양(供養)을 올리고는 다짜고짜로 여덟 칸에다 갖다가 넣고 문을 잠가 놓으니까,

그 스님은 뭣도 모르고 죽을 먹고서 강제로 구금(拘禁)을 당해서 아무리 문을 따달라고 해도 문을 따주지 않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문을 박차고 나오고 하는 바람에 그래가지고는 관가에 까지 알려져 가지고,
그 사람이 성스러운 스님을 갖다가 이유 없이 감금을 시켰다하는 죄목으로 엄하게 취조를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그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살던 그 사람도 ‘그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또 그렇게 해서 스님을 여덟 분을 초청을 해다가 죽 공양을 올리고 또 칸칸이 여덟 분을 가둬놓고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아! 항아리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요리 내다보니까, 아! 혀를 널름널름 하는 큰 구렁이가 항아리마다 들어있어 가지고 노려보면서 물라고 달라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도망을 쳤는데.

이러한 소식이 그 나라 임금님한테 들려 가지고, 임금님이 불법(佛法)을 믿는 그러한 훌륭한 임금이었던지 거기서 죄인들을 불러다 놓고 또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다 불러다 놓고 그리고서 훈계(訓戒)를 했습니다.

“목욕재계를 하고 죽과 물을 떠다가 스님네를 갖다가 공양을 올리고 또 별실에다가 모신 외면상의 행동은 세 사람이 다 똑같았지만,

맨 처음에 그 사람은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없고 겁약한 사람이 욕심만 있었기 때문에 자기는 그 황금을 얻지를 못했고.
다음에사 욕심만 치성해 가지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남의 본(本)을 따 가지고 황금만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렁이한테 물리게 되고,

중간 사람은 분(分)에 없는—다른 용기 있는 사람이 그 황금을 얻은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지고 멀쩡한 스님을 갖다가 죽 한 그릇 먹여서 때려 가둬 가지고 황금을 얻으려고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벌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다.

용기를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목적 달성을 하기 위해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저렇게 황금을 얻었다.

도를 닦는 데에 있어서도,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은 어느 사람이 그것이 없겠느냐.
첫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생사 문제, 육신의 생명을 바치고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의 말씀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낱낱이 다 ‘불법을 믿고 참선 수행을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리라’ 그러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법망구적인 그런 대용맹지(大勇猛志)가 없어가지고서는 이 일은 성취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한 생각 진실하다’면 성도 다르고, 연령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팔도에서 운집(雲集)한 선객(禪客) 스님네나 보살선방의 여러 보살님네들은 하등에 걸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성격을 가진 분 하고도 아무 장애가 없이, 간격이 없이 화합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적응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더 발심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 분심을 낼 수가 있을 것이고, 더 철저한 간절한 의단이 독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다는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큰 사업을 이룬 사업가들도 그러한 수많은 역경계를 굴복함으로서 그러한 대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간 날씨는 엄동설한 움츠려들고, 그 추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禮佛)하고, 십악참회(十惡懺悔)하고 그리고 입선(入禪)을 하고 또 각기 소임에 따라서 소임을 맡아서 행할 때에 문자 그대로 고행(苦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는 허락이 되지를 않습니다. 선원의 규칙에 따라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 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결제에 들어가면 앞으로 석 달간 아무 장애 없이 하루같이, 알뜰하게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비록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댁에 계실지언정,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생활 그것이 선방(禪房)이요, 가족이 도반(道伴)이요, 이웃이 도반이라 생각하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부처님이요,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요, 선지식의 법문이다.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장소는 선방이요 그 시간은 입선 시간이다’ 이리 생각하고,
선방에 방부들인 여러 대중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신다면 오히려 가정에 계시고, 밖에 속세에 계신 분이 더 힘있고 철저한 정진을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27분53초~45분50초)

 

 



(2)------------------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하고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하라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시비해리(是非海裏)에 횡신입(橫身入)이다. 시비(是非)—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그러한 온갖 시비의 바다 속에, 전체가 중생 사는 데는 시비 아닌 것이 없고 전체가 다 시비요 차별이기 때문에 ‘바다’라 하는 거여.
그 시비의 바다 속에 몸을 비켜서 들어가. 사람이 많이 꽉 들어찰 때에는 이렇게 정면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몸을 이렇게 비끼고, 이렇게 삐지고 들어가듯이 시비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삐지고 들어가며,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여. 표범과 범이 떼를 이루고 있는 그 속을 갖다가 그 가운데를 자재하게 나아간다 그말이여.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하고 내가 못한다,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곳은 밝고 저곳은 어둡다, 이것은 짜고 저것은 싱겁다’
전부가 다 중생의 인아(人我)로 인한, 인아—‘너와 나’라고 하는 그런 시비의 바다 속에, 그 시비가 바로 그것이 호랑이요 표범인 것입니다.

그 속에 그것을 피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몸을 삐지고 적극적으로 그 속을 향해서 간다.

시비를 잡아서 나에게 와서 가리지를 말아라.(莫把是非來辨我) 나한테는 그까짓 시비를, 이러쿵저러쿵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말이여.
나는 그까짓 시비를 평생 천착(穿鑿)을 하지 않노라.(平生穿鑿不相關) 그건 내가 따지지 않는다.

시비 속에 마구 들어가서 시비를 막 잡아서 내가 막 요리를 해버리고, 시비를 여의지 않고 시비 속에서 바로 화두의 의단을 가지고 막 삐지고 들어가는데 시비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러한 기개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셔서 일생동안 여태까지 정진한 가운데,
‘금년 삼동(三冬)이 가장 뜻 있는, 가장 보람 있는 한철이 되고, 금년 삼동에 정말 일대사를 갖다가 해결하고야만 말리라’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부탁을 드리고 맺고자 합니다.(45분52초~50분4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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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경(涅槃經) : [범] Mahaparinirvana-sutra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어서, 소승부에 속한 것이 세 가지나 되고, 대승부에 속한 것이 남본(南本)과 북본(北本)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는 것은 북본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인데, 13품 40권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석가여래께서 팔십 년의 한 세상을 마칠 때의 설법과 자세한 사연이 적혀 있으며, 특히 부처님의 금강신(金剛身)은 늘 계시어서(常住不滅) 죽음이 없으며, 부처님의 참 수명은  끝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소승의 <열반경>은 주로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써, 입멸 전후에 걸쳐 유행(遊行) • 발병(發病) • 순타(純陀)의 공양 • 최후의 유훈 • 멸후의 비탄 • 사리 팔분(舍利八分)등을 주요한 것으로 하고, 대승의 <열반경>은 교리를 주로 하여, 열반이란 사실에 불타론(佛陀論)의 종국과 불교의 이상을 말하였다.
*담력(膽力 기백 담,힘 력) ; 겁이 없고 용감한 기운.
*소지(掃地) ; ①마당(땅)을 쓸다. ②청소.
*목욕재계(沐浴齋戒) ; 제사나 중요한 일 따위를 앞두고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을 피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일.
*사시(巳時) ; ①지난날에 쓰던 십이시(十二時)가운데 여섯 번째 시(時). 오전 9시부터 11까지를 말한다. ②지난날에 쓰던 이십사시(二十四時)가운데 열한 번째 시(時). 오전 9시 반부터 10시 반까지를 말한다.
*짬매다 ; ‘동이다(따로 흩어지거나 떨어지지 못하도록 한데 묶다)’의 사투리.
*탁발(托鉢 맡길 탁, 바리때 발) ; 도를 닦는 스님이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음.
수행자의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동시에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다고 하여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행하였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혼비백산(魂飛魄散)하다 ; (사람이)매우 놀라거나 혼이 나서 넋을 잃다.
*만조백관(滿朝百官) ; 조정(朝廷,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고 집행하는 곳, 또는 그런 기구)의 모든 벼슬아치.
*훈계(訓戒 가르칠 훈,경계할 계) ; 잘못하지 않도록 타일러 주의시킴. 또는 그런 말.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퇴전(退轉) ; 불교를 믿는 마음을 다른 데로 옮겨 처음보다 더 밑으로 전락(轉落)함.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승우(勝友)라고도 함.
*승사(承嗣 받들 승,이을 사) ; 후임자나 후대가 선임자나 선대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걸거치다 ; ‘거치적거리다(거추장스럽게 자꾸 여기저기 걸리거나 닿다)’의 사투리.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대사(大事) ; 일대사(一大事).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불교]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십악참회(十惡懺悔) ;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지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고행(苦行) ; ①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
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 하기도 한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2)

*(게송) ‘시비해리행신입~’ ; [선문염송] (혜심 지음) ‘제1권 1칙 도솔(兜率)’ 죽암규(竹庵珪) 게송 참고.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Posted by 닥공닥정

 

 

§(118) 조심(調心), 마음을 고르는 법—화두 참구 / 의심(疑心)이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 / 의리선(義理禪), 야호선(野狐禪), 사량복탁(思量卜度)은 안됨.

믿을 수 있는 스승 또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다 낙처(落處)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 의심입니다.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허공보다도 더 크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이어서 해 가면 해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아!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의 발심(發心)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어(80.03.01) (용118)

 

 

 

 

(1) 약 20분.  (2) 약 4분.


(1)------------------

이렇게 호흡을 잘 익히면서 조심(調心), 마음을 어떻게 가져 나가야 하느냐?
셋째에 가서 마음을 고르는 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화두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

화두(話頭)는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들었습니다마는 ‘화두는 자기 멋대로 어떤 책에 써 있는 대로 거기서 배워가지고 한다든지, 자기 나름대로 무슨 화두를 하나 설정해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한다든지 이래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책에 써 있는 대로 하건, 어떤 큰스님네한테 타건, 큰스님네한테 탄 사람한테 간접적으로 듣건 처음에 시작한 데에 있어서는 비슷합니다.
별 차이가 없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그러한 경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상태가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것이 바른 경계냐? 또는 잘못된 경지냐?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해 나간 사람은 그때 물어볼 스승이 없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잘못된 경지를 갖다가 ‘아! 내가 이거 공부가 잘되어 간 거구나’ 이렇게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 신기한 경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집착을 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다가 보면,
십상(十常) 열이면 열, 삿된 데에 빠지거나, 미치거나, 외도가 되거나, 점쟁이 같은 것이 되거나, 잡신 같은 것이 붙어가지고 인간 자체가 폐인이 되는 수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두는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지도를 받아가지고 그래 가지고 믿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또는 시원찮은 데서 배운 사람은 해 나가다가 항시 ‘내가 이거 옳게 하는 것이냐? 잘못하는 것이냐?’ 그 자체에 대해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해 가지고 공부가 한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하고, 어떤 경지가 일어났을 때에도 중요한 고비에 가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스승 또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일단 탔으면, 지도를 받았으면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화두를 ‘이 화두가 나쁘니까 다른 화두로 고쳐야겠다’ 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안될수록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 공부가 잘 안되니까 옆의 사람 보고 ‘당신은 무슨 화두를 허요?’
‘나는 무슨 화두를 해요’ 가만히 그 사람 화두를 조금 흉내내 가지고 해 본다. 자기 화두를 할 때는 영 안되는데 잠깐 옆의 사람 화두를 좀 흉내내 가지고 해 보니까 아주 공부가 수월하게 된 것같이 느껴져서 며칠을 그대로 해 본다.

마치 어렸을 때,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합니다마는 자기집 오곡밥은 먹어보니까 별로 맛이 없고, 다른 집에서 가져온 것은 굉장히 맛있는 것처럼 느껴진 기억이 있습니다.

화두도 자기 화두는 아무래도 잘 안되는 것 같고, 남의 화두는 아주 좋은 화두같이 느껴져 가지고 이 사람 것 조금 해 보고, 저 사람 것 조금 해 보고 이렇게 하다가 몇 달 만에 와 가지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말 안하고 혼자 할라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내 화두를 그냥 할까요 다른 화두를 할까요?” 이렇게 물어보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 또 보살님네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가끔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다 낙처(落處)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화두가 안되어서 다른 화두를 해 보니까 잘된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또 얼마 안 가면 그전에 했던 화두가 자꾸 밟혀쌓고, 먼저 하던 화두를 다시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좀 해 보다 저것 좀 해 보다, 이러한 사람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여.

우물을 팔라면 한 우물을 파야지, 한 길 두 길 파다가 물이 안 난다고 해서 또 장소를 옮겨서 파고,
또 한두 길 파다가 또 물이 안 나오면 또 저만큼 가서 딴 데를 파고 이러한 사람은 맛있는 좋은 물을 만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한 길 파서 안 나오면 두 길 파고, 두 길 파서 안 나오면 석 길, 넉 길, 다섯 길, 아홉 길, 열 길, 스무 길, 마지막에는 만나는 것이 큰 반석(盤石)을 만나게 됩니다.
‘인자 나는 우물 파기는 틀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반석을 다이나마이트를 사용을 해서 폭발을 하던지 또는 정으로 쪼아내던지 이렇게 해서 그 반석을 뚫기만 하면 반석 밑에서는 아무리 가물거나 아무리 장마가 져도 변함이 없이 10년 20년 30년 백 년을 두어도 변함없이 지하수가 풍풍 쏟아오를 것입니다.

하물며 무량겁으로 생사윤회를 해 온 이 몸이 금생에 화두를 타가지고 한 철 두 철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방 목마른 데에 물 마시듯이 그렇게 갈증이 잡히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얘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옛날부터서 크게 깨달은 도인들은 너무너무 공부가 안되어 가지고 목숨을 갖다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자살을 할까 이러한 정도의 극한상황에까지 이르러서 거기에서도 쉬지 아니하고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것을 각오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 끝에 죽음 직전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 예는 얼마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철 두 철에 공부가 안된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고 다못 옳은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할 따름인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말씀드린 다섯 가지의 신심 그리고 세 가지의 법에 대해서 결함이 없도록 다져 나가되,
이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입니다. 의단. 의심!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아하! 이러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러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스스로 수긍하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엎어 보고, 분석해 보고 종합해 보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해다가 대조해 보고, 이러한 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도깨비 참선이요, 여우 참선, 삿된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선, 야호선(野狐禪), 이러한 도깨비 참선을 해 가지고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놈이 무엇인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하고 있는, '이'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계속 알 수 없는 데을 향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을 향해서 화두를 들고, 들어서 또 관조하고 이렇게 해서 조금도 옆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의단으로 몰고 나가야 돼.
이렇게 의심, 의심 또 의심, 1분 1초 한 생각도 비끌어지지 않도록 여유를 주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심으로, 의심을 밀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서 추구해 나가면, 갈수록 알 수 없을 뿐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금방 딴 생각[別念]이 침노(侵擄)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금방 저 백리 밖, 이백 리 밖의 일 또는 10년 전, 20년 전 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 밖에서 들어오는지, 나의 의식이 밖으로 나가서 헤매고 있는지, 하여간 분명 화두를 든다고 들고 있는데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왕래를 하는 것을 참선을 해 본 사람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한 시간 동안에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 몇 번이나 들고 나갔는가를 한번 장난삼아서 세어본다면 몇천 번이 될런지, 몇만 번이 될런지, 세다가 또 세고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퍼뜩 잊어버린 줄 알면 또 「이뭣고?」
성화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사상(千思想) 만사량(萬思量)이 퍼일어난다 하드라도 그것을 성화를 내고 짜증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딴 생각이 일어난 줄 알면 동시에 「이뭣고?」 이렇게 할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해 나가다보면 그렇게 안되던 것이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책없이 퍼일어났던 망상은 어느덧 차츰차츰 그 기승이 누그러지고 화두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뭣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없는—「이뭣고?」 안 해도,  「이뭣고?」하기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있는 것입니다.
미간(眉間)에 있는지, 코끝에 있는지, 가슴 앞에 있는지, 가슴속에 있는지는 모르는데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항시 의단이 앞에가 있거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자꾸 거기다 대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는 거여.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또 딴 생각이 침노하면 그때 다시 「이뭣고?」 한 번 챙기는 거여. 가끔 한 번씩 챙겨서 그 의단이 성성(惺惺)하도록 또록또록 하도록 그놈을 단속해 나가는 것이여.

공부가 여기에 이르르면 주변이 조금 시끄러운 것도 문제가 안되고, 누가 자기한테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로 인해서 신경질이 나거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뭣한 분은 '공부가 조금 될라고 하는데 방정을 옆에서 떨어 쌓고 시끄럽게 한다'고 싸움을 하고 신경질을 내고 그러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공부가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싸움을 하거나, 어린애들이 떠들거나 그까짓 것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을 봐도 의심, 땅을 봐도 의심, 기차 소리가 나도 의심, 닭 우는 소리가 나도 의심, 걸어가도 의심, 앉아서도 의심, 밥을 먹어도 의심, 똥을 누어도 의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이렇게 현전(現前)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조끔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아! 이제 공부가 잘된다. 이러한 상태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화두가 어느 정도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너무 깨끗하고 편안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불법을 만났던가’ 이러한 희유한 마음이 나고 기쁜 마음이 나서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도 같고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기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탁! 정신을 차려가지고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좋은 경계(境界)가 나타나고, 천하 없는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잠깐도 그러한 일에 우리의 신경을 써서는 아니됩니다.

다못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그때 가서는 「이뭣고?」 소리도 할 필요도 없죠. 알 수 없는 의단이 나타나면 다못 그것을 묵묵히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염송(拈頌)이라든지 또는 조사어록(祖師語錄) 이라든지, 전등록(傳燈錄)이라든지, 무슨 경전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뒤적거린다던지, 이러한 조사의 언구(言句) 속에 그런 것을 가지고 사량복탁(思量卜度)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은 대금물(大禁物)인 것입니다.

한참 곡식이 잘 자라고 (이삭을) 패기 위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데다가 뜨거운 물을 찌틀어버린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갈수록 계속 한결같이 의단을 관조해 나갈 뿐, 잠깐이라도 조사의 어구에 대해서 그것을 손을 대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아까 다섯 가지 믿음에 대해서—조사의 언구는 하늘에 뻗쳐서 세워져 있는 큰 칼과 같아서 그 옆에 가기만 하면 벌써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시고, 대오(大悟)! 확철대오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허락해서는 아니됩니다.(48분49초~68분37초)

 

 

 



(2)------------------

차라리 콱 막혀서 알 수 없는 의단만을 관조하다가 죽을 한이 있더라도, 조그마한 어떤 소견(所見), 지견(知見)을 가지고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망치고 불법을 멸망으로 이끄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얻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면, 그 사람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그러한 정도에 밖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결국을 그것을 가지고 만족을 삼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불법을 갖다가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허공보다도 더 크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이어서 해 가면 해 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아!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의 발심(發心)할 때, 최초에 발심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해제가 되면 추웁도 더웁지도 않는 봄철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 봄철을 가장 충실하게 알차게 공부를 하시기를 다시 거듭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68분38초~72분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말. ②'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온 말.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낙처(落處) ; 안정된 곳. 결국의 장소. 귀착점(歸着點 최종적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결론). 요지(要旨 핵심이 되는 중요한 내용).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야호선(野狐禪 들 야/여우 호/참선 선) ; ①진실하게 올바로 참선 수행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않았는데 깨달은 것처럼 가장하여 함부로 기이한 언행을 하여 남을 속이는 사람을 들여우에 비유하여 말함.
②말이나 글로 알아 들어가고,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 대조해 보는 것으로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침노하다(侵擄-- 침범할 침/노략질할 로) ; (무엇이 무엇을)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치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

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염송(拈頌) ;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고려의 혜심(慧諶) 스님이 1226년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에서 화두 1125칙(則)과 각각의 칙(則)에 대한 짤막한 해설과 게송 등을 모아 엮은 30권의 책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이라고도 한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전등록(傳燈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30권. 송(宋)의 법안종(法眼宗) 천태 덕소(天台德韶)의 제자 영안 도원(永安道原)이 경덕 원년(1004)에 엮음.
과거칠불(過去七佛)에서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와 동토육조(東土六祖)를 거쳐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의 제자에 이르기까지, 선종 다섯 종파의 52세, 불법(佛法)을 계속 이어 온 1,701명의 행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 깨달음에 대한 문답, 어록을 집대성한 저술.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2)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게송) ‘금생약불종사어 후세당연한만단’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금생에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후생(後生)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신수기도)2015. 2. 20. 16:10

 

 

§(320) 설산동자의 설화 / 기도는 청정하고 간절하고 일여한 신심으로 소원성취를 하고, 거기에 그치지 말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해야 한다.

 

기도를 오늘부터서 시작을 하는데 ‘기도하는데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되느냐?’하면 신심(信心)입니다. 간절한 신심, 철저한 신심, 깨끗한 신심, 한결같은 신심, 이것이 합해져야 그것을 정성(精誠)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7일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도 성취하고, 그 기도 성취하는데 그치지 말고 내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생사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이러한 기도 법회도 여는 것이고 이 기도 법회에 동참한 사람은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송담스님(No.320)—87년 정묘년 신수기도 입재(87.01.31) (용320)

 

약 11분.

 

 

정묘년 신수기도 입재를 맞이해서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정말 감동 깊은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법문 가운데에 설산동자(雪山童子), 부처님께서 인행(因行) 때에 설산에 들어가서 수행하시면서 그 나찰(羅刹) 귀신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신 그 설산동자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설산동자가 고행(苦行) 정진을 하고 있을 때에 어디서 게송(偈頌)이 들려오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고 이것은 나왔다 죽었다 하는 생멸법(生滅法)이다” 이러한 뜻의 게송이 들려왔습니다.

 

그 게송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엄숙해서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러한 엄숙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만한 그러한 상대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저만치 살펴보니 뿔이 돋치고 어금니가 튀겨져 나온 사람을 생으로 막 잡아먹는 무서운 나찰 귀신이 보였습니다.

 

설마 저 나찰 귀신의 입에서 저런 소리는 나올 리가 없겠지만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나찰 귀신에게, “방금 그 게송을 그대가 읊었느냐? 그대가 읊었다면 그 다음 구절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 다음 구절을 일러다오” 이렇게 간절히 청했습니다.

 

나찰 귀신은 시치미를 뚝 따면서 “행자(行者)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지금 배가 고파서 죽겠습니다” 전혀 대꾸를 아니 합니다.

“그래, 배가 고프면 내 몸뚱이를 너에게 줄 테니 그 나머지기 게송을 나에게 들려다오”

 

“나는 배가 고파서 우선 먹고 봐야지 배가 고파서 일러줄 수가 없다”

“그러면 내 몸뚱이를 네 입에다 넣고 귀만 남겨놓고 일러다오”

 

그러니까 나찰 귀신이 그 나머지기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생멸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적멸이 최고의 낙이 되느니라” 이 게송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게송의 한마디를 듣고서 설산동자는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 게송을 자기만 알고 깨닫고서 나찰 귀신에게 먹혀 버리면 다시는 다른 중생들이 어떻게 그 게송을 들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무에다가, 바위에다가 닥치는 대로 그것을 긁어서 그 게송을 써 놓고서 나무에서 나찰 귀신을 향해서 몸을 날렸습니다.

 

삽시간에 온 허공에서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나찰 귀신은 순간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몸으로 변해 가지고 공경스럽게 그 설산동자를 받들어 모셨습니다.

 

이것이 간략한 설산동자의 설화인데,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바친 가장 대표적인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오늘부터서 시작을 하는데 ‘기도하는데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되느냐?’하면 신심(信心)입니다.

간절한 신심, 철저한 신심, 깨끗한 신심, 한결같은 신심, 이것이 합해져야 그것을 정성(精誠)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정성을 드린다’ ‘치성(誠)을 드린다’ ‘공(功)을 드린다’ 이렇게 말들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의 청정, 그리고 간절(懇切)한,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여(始終一如)한, 최선을 다한, 여지없이 믿어버리는 의심없는 그러한 마음가짐, 이것이 법을 위해서 내 몸과 목숨을 바치는 신심이라 할 것입니다.

 

이 철저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기도는 성취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청정하고 간절하고 일여한 그러한 신심으로 기도를 봉행할 때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간절한 신심은 인간의 조그마한 소원—부자가 되는 원이라든지, 아들을 낳기 바라는 원이라든지 또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원이라든지, 좋은 사위나 좋은 며느리를 얻으려는 원이던지,

무슨 가정에 환자가 병을 낳기를 바라는 원이라든지 여러 가지 종류의 각각 다른 그런 원이 있을 수가 있으나 그러한 원은 말할 것도 없이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조실 스님의 법문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러한 원을 이루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성취하는 그러한 데에 그쳐서야 되겠느냐.

 

우리는 7일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도 성취하고, 그까짓 일 성취하는데 그치지 말고 내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생사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이러한 기도 법회도 여는 것이고 이 기도 법회에 동참한 사람은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는 요지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기도 성취는 몸을 깨끗이 하고 또 마음을 깨끗이 하고 또 간절한 마음, 최선을 다하는 마음 그리고 시종이 일관된 일여한 마음.

‘일여(一如)하다’는 말은 내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일 기도, 7일 기도, 백일기도 여러 날을 두고 간절히 기도를 하다보면,

자기의 마음이 깨끗해져서 그래가지고 부처님의 깨끗한 마음과 하나가 될 때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의심 없는 일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쨌든지 7일 동안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해 주시기를 바라고, 여러분이 소원한 바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되시기를 바라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처음~10분4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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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설산동자(雪山童子) ;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과거세에 설산(雪山)에서 도(道)를 닦을 때를 가리켜 부르는 명칭.
《열반경(涅槃經)》 제14권에 기록된 석가모니의 전생담에 나오는 말로, 석가모니는 설산동자로써 도를 닦으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의 두 글귀를 듣고, 나머지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두 글귀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나찰(羅刹)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하였음.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고행(苦行) ; ①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시치미를 떼다[따다] ; (사람이) 매를 훔친 사람이 시치미를 떼어 내고 자기 매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하고도 짐짓 하지 않은 체하거나 알고도 모르는 체하다.
'시치미'는 매의 주인를 밝히기 위해 주소를 적어서 매의 꽁지 털 속에 매어 둔 네모난 뿔을 이르는 말.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나머지기 ; 나머지.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 지키는 수호신. [天神]들의 제왕[] 샤크라〔釋〕라는 .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 ()씨이며 ()이라 한역하고, ‘제바 ()’이라 한역하며, ‘인달라 ()’ 한역하니  능천제(能天帝)’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32() 통솔하면서 불법(佛法)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  손에 금강저(金剛杵)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신수기도)2015. 2. 17. 10:52

§(324) (게송)조화무사부사력~ / 기도는 정성이 제일 / (게송)송백천년취~ / 참선, 기도가 둘이 아니다 / 의심관(疑心觀) / ‘관세음보살’하는 자기 음성을 자기가 관(觀)해.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청정하고 정성스러우면 기도 시작할 때 이미 목적은 달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타함이 없이 방심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것을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송담스님(No.324)—87년 신수기도 회향(87.02.06) (용324)

 

 

(1) 약21분.

 

(2) 약 21분.

 

 

(1)------------------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장단대소재목전(長短大小在目前)한데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자연의 조화, 천지의 조화가 사사로움이 없어. 사사로움이 없는 그 부사의력(不思議力)이다 그말이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알 수 없는 그런 위대한 힘이,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다.  낱낱이 푸르고 푸르러서 세한(歲寒)의 빛이여. 누가 사람의 인조(人造)로 인력(人力)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무도 인공(人工)으로 손을 대지 아니하는데, 자연의 이법(法)에 의해서, 불가사의한 그 힘에 의해서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도 푸르고, 산천에 초목이 각자 그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투는데,

 

장단대소(長短大小)가 재목전(在目前)하건만,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아서 형형색색으로 우리의 눈앞에 조금도 숨김없이 펼쳐져 있건마는,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다. 우습다, 모든 사람들이 그 숨김없는 적나라(裸)한 그 도리를 알지를 못하는구나.

 

 

오늘은 정묘년 정월 초아흐레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께서는 7일 동안을 정말 정성껏 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직접 기도에 참석을 하셔서 정성을 다해서 목이 쉬도록 정근(精勤)을 하셨습니다. 

 

기도 입재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도는 정성(誠)이 제일인데, 정성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이러 이렇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첫째,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그리고 한결같아야 하고, 그리고 참된 그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청정하고 정성스러우면 시작할 때 이미 목적은 달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3일이라든지 7일이라든지 또는 백일이라든지 천일기도, 만일기도 그렇게 기도 날짜를 많이 잡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억지로라도 참고 견디면서 노력을 하다보면 그 어느 땐가는 청정하고 일여하고 참된 생각에 부합(合)이, 계합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自古)로 기도를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간절히 해서 성취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어려운 일을 당해서, 중대한 일을 당해서 많은 분들이 기도를 여기서 저기서 모다 하시지만 기도했다고 해서 자기가 바라는 만큼 그때에 바로 성취 되냐 하면은 혹 된 사람도 있고, 안된 사람도 있고 혹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고,

그 사람과 그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모다 그런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 되지를 않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는데 기도가 성취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느냐?

첫째는 자기의 정성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냐,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또 정성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차라리 안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자기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오히려 안된 것보다 더 해로울 때에는 그 기도 성취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또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기커녕은 생각지도 않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통이 한목 몰아닥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금생, 내생, 저 내생까지 계속해서 그 좋지 못한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말하자면 전생에 그러한 업(業)으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있는 삼생(三生)에 걸쳐서 받을 죄를,

금생에 신심껏 기도를 하고 그 공덕으로, 기도를 한 공덕으로 삼생에 걸쳐서 받을 것을 금생 일생 동안에 다 몰아서 다 받아 버리고 그리고서 이 다음 생에는 정말 큰 원을 성취하도록 그렇게 될 경우에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코앞에 조그만한 원(願)을 세워서 목이 쉬도록 기도를 했다가 그것이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그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 나도 기도해 봤지만 그거 이루지도 못하더라’ 이러한 반감심(感心)을 갖고 불신을 하고 퇴타심(退墮心)을 낸다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정성스러운 그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였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만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원했다가 큰 것을 바라지도 안 했는데 성취되는 수도 있고, 큰 것을 원했는데 조그만한 것이 우선 코앞에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코앞에 전혀 이루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니 별로 소원을 이룬 것 같지도 않은데, 살아가면서 점점 신심이 돈독하고 모든 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 풀려나가고 그러한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서,

 

그래서 이 기도라 하는 것은 청정한 몸과 마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가 회향(廻向)을 했다고 해서 인자 빨리 자기 목적한 것이 돌아오기만을 급급하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스러운 행동,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정성스러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 성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로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牡丹一日紅)한대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하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요, 세상 사람들의 뜻에는 들지를 안 해. 별로 그렇게 소나무, 잣나무 그렇게 '좋다'고 '아름답다'고 별로 안 그런다 그말이여.

 

목단(牧丹), 모란(牡丹)은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는 하루 동안 밖에는 붉지를 않는데,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요.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이 꽃 가운데 왕이라고 그렇게 모다 좋아하고 칭찬을 하고 거기에 모다 반하더라 그말이지.

 

송백은 무루법(無漏法), 무루복(無漏福), 영원한 복에다가 비유한 것이고, 모란은 유루복(有漏福)에다가 비유한 게송(偈頌)입니다.

 

영원한 우리 생사해탈법은 한번 깊이 믿고 실천을 하면 당장 금생에부터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참 좋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지를 안 해.

 

물론 특수한 신심이 있는 사람은 모르되,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그것에 관심이 없고,

유루복(有漏福)—당장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벼슬자리 벼슬을 한다든지, 부귀영화 모다 이런 해봤자 별 수 없고 또 뜻대로 얻어진다고 해도 영원성이 없는 그런 재산이나 명예, 권리 모다 그런 것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못 얻어서 야단이고 그것을 얻으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과연 무루(無漏)의 복(福)을 원하셨는가? 또는 영원성이 없는 유루복만을 목적에다 두고 기도를 하셨는가?

또 저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에다 두되, 우선 당장 급해서 그래서 유루복에 원도 세우시고 하시는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것은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재산이요, 명예요, 권리요, 가족의 행복이요, 아들딸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요, 아무리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참선을 한다 해도 당장 코앞에 그 문제가 절박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절대로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1년에 한 번 있는 신수기도에 동참을 해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 것도 참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는 참선 밖에는 모르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못한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고, 또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의 학교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고, 우선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우선 대학에는 들어가 놓고 봐야 하는 것이고, 그놈이 대학엘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기도를 일주일 동안 목이 쇠도록 그렇게—그 날씨가 상당히 강추위 했는데 그 눈을 뒤집어쓰면서 새벽기도부터서 모다 참석을 하시고, 대단히 참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처음~21분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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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타함이 없이 방심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 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일 년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 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하는 데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한결같은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선도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한데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저 만 리나 된 넓고도 긴 저 하늘에 비가 갰어.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다.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빛나는데, 비가 오고 운무가 끼었을 때에는 그 달이 떠도 보이지를 않고 컴컴하니 그러다가 비가 쫙 개 가지고 그 새파란 하늘에 밝은 달이 휘영청 밝았다 그말이여.

 

부운엄단천리목(浮雲掩斷千人目)이여. 뜬구름이 한덩어리가 날아와 가지고 달을 가리워 버리니까, 모든 사람의 눈에 그 밝고 맑은 달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 구름이 가리워 버리니까 그 달을 보기가 어렵더라.

 

사실은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둘이 아니어.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하고 원해도 잘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일념(一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참된 마음과 그 어두운 부정적인 생각에 가로막혀서 장애를 받아가지고 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만 없으면 바로 원하는 대로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장벽만 없다면 몇백 미터고 저 앞을 다 볼 수 있지만 앞에 종이 한 장만 가로막혀 있어도 밖이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도와 참선 공부가 내나 서로 상통한 것이고 둘이 아니라’하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기도를 목이 쇠도록 큰 소리로 정근만 하면 그것이 정성을 다한 것이냐?

참, 기도가 쉬운 거 같아도 정말 이 기도가 참선과 똑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목청을 돋아서 한 시간, 두 시간 내지 네 시간을 불러대면 되냐?

 

어떻게 해야 기도를 참 정말 훌륭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냐?

 

‘관세음보살’ 부르면서도,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부르고 목이 터지도록 부르면서, 그렇게 부르는 속에도 우리의 생각은 계속 집안일도 생각하고, 과거 일도 생각하고, 어릴 적 일도 생각하고, 이일 저일 할 것은 다 합니다.

그 ‘관세음보살’ 부를 때는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불러야 되겠는데,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외치면서 속으로는 온갖 잡념 망상이 조금도 거침없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거든. 기도를 해 보면서 가만히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관조해 보면 알 수가 있고, 그것을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를 하면서 탁자 위에 촛불이라든지, 향이라든지 또는 청수 그릇이라든지 또는 탁자 위에 모신 부처님 눈, 코, 입이라든지 이런걸 보면서, 입으로는 외치면서도 그 눈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에 계속 우리의 생각이 그런 데로 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촛불이 크게도 보였다, 작게도 보였다, 자기 앞으로 가까이도 보였다, 멀리도 보였다, 부처님 얼굴도 이렇게 우러러 보면서 정근을 하면 부처님 얼굴이 이리 변했다, 저리 변했다, 가까이 왔다, 멀어졌다 야단이거든. 단 1분 1초도 정말 망상이 없이, 번뇌가 없이 깨끗하게 정진이 되어 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눈으로 보이는 부처님 얼굴에다가 집중을 하는 것이 좋으냐? 훨훨훨 타고 있는 촛불에다가 눈을 대고 하는 것이 옳으냐? 무엇을 어디다가 우리의 눈을 고정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대단히 이것도 참선할 때에 덮어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을 그 참선을 잘한다고 할 것이냐?

‘참선을 어떻게 해 나가야 올바르게 하느냐?’한 것과 똑같이, ‘기도도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은 그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아주 그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를 계속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고, 물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밖에는 없고 그렇다고 하되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을 가면서는 그렇게 화두를 염불하듯이 그렇게 자꾸 들먹이는 것이 아니에요.

 

‘이뭣고?’한 그 알 수 없는, ‘이뭣고?’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있을 때에는 그 의심을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해 나가야지,

거기다 대고 이미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있는데도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래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린애, 애기 잠재울 때 잠 막 잘라고 한 놈을 더 잘 자라고 가슴을 턱! 턱! 때리는 거와 마찬가지거든 그게.

 

그러니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것을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그 관(觀)이, 의심관(疑心觀)이 그것이 공부해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여. 

 

이 관세음보살도 목이 터지도록 막 부를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음성으로,

물론 여기서 목탁을 치면서 여러 사람이 정근할 때에는 자기도 소리를 내어서 같이 그 음성과 음성이, 내 음성과 다른 사람 음성이 혼연일치(致)가 되어서 전체 동참 대중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거든.

자기 혼자 어디 가서 한 것 보단 여러 사람이 모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정성도 하나요, 그 정근하는 음성도 그 목탁에 맞춰서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

 

어떤 사람은 (음을 아주 낮게)‘관세음보살’하는데, 어떤 사람은 (음을 고음으로)‘관세음보살’ 이래 가지고 한 사람은 크게 하고 작게 하고, 한 사람은 더디게 하는데, 한 사람은 늘어져 쳐지게 하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되거든.

목탁을 치면은 그 목탁 소리에 저 법당에 가득한 그 동참제자가 한마음 한뜻이 되고, 음성도 같이 이렇게 나가야 되거든.

 

우리가 남북통일을 바라는데 한 사람이 바란 것 보다는 전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치가 될 때에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고 나라에 대한 충성도 달라지고 모든 면에서 다 나날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마침내 통일 성업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칠일 동안의 기도도 모든 점에 있어서 전 동참재자가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재 법요식도 하고 또 시간도 맞추고 또 병법(秉法) 스님이 나서서 목탁도 치면서 같이 하고, 이것이 바로 전 동참제자로 하여금 한결같은 마음, 한덩어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구태여 추운 새벽같이 오시지 않고 집에서 해도 기도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근에서 그 바쁘고, 춥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나오신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마음을 합해서 하는 데에서 몇백 배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눈은 눈 앞으로 보는 데에 제멋대로 요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목소리만 크게 불렀지 조금도 그것이 경건성이 없이 부른 것은 그 목만 쉬었지 정말 기도의 참된 경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목소리를 참 경건하고 엄숙한 저 뱃속에서 부터서 울려 나오는 그 정성스러운 음성 소리로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목소리를 자기가 관(觀) 해.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고 ‘아이고, 저 사람 목소리도 되게 크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지 말고, 자기의 음성을 들어야 되요.

자기의 음성을 들으면서 ‘관세음보살’하면 눈을 떴으되 딴 것이 보이지를 않고, 귀가 열렸으되 다른 소리가 들리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한결같이 한다면 가장 여법(如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탁은 너무 늘어지게 쳐도 힘이 들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빨리 쳐도 숨이 가빠서 따라갈 수가 없고, 그런데 처음에는 느릿느릿 쳐도 점점 10분, 20분, 30분 이렇게 해 가다보면 열기가 올라가지고 약간은 빨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빨리 하는 것은 너무 숨이 가쁘고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 대체적으로 한결같은 것이 좋은데, 하다보면 좀 빨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여간 일주일 동안을 내가 법당에 올라와서 참석은 안 했지만 계속해서 나도 그 기도에 참석을 했고, 기도 정근하는 소리와 목탁 소리를 계속 나도 거기에 마음을 합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기도가 얼마만큼 정성스럽게 잘 진행이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반드시 크고, 작은 여러분 각자의 소원이 성취가 되실 것이고, 또 그런 유루의 복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무루의 대원(大願)까지 연결이 되어서 기도 성취는 정말 원만히 성취가 되시리라고 나는 확신(信)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확신을 하십시오. 그 원이 빨리 이루어지고 더디 이루어지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정월 대보름이 한 오륙일 남았습니다. 대보름에 해제 법요식과 백일기도 회향 법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분은 기도를 하시고 또 참선기도 하시는 분은 참선을 열심히 하셔서 백일기도 회향 때 또 해제 법회도 참석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21분15초~42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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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조화무사부사력~’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진정문(眞淨文) 게송 참고.

*부사의(不思議) ; 불가사의(不可思議). 불보살의 해탈, 지혜, 신통력이 헤아릴 수 없다는 말.

*불가사의(不可思議)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세한(歲寒) ;  전후  추위라는 으로 심한 한겨울 추위 이르는 .

*적나라(裸)하다(실상이나 감정)있는 그대로  드러나 더이상 숨김 없다.

*정근(精勤) ; ①쉬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이나 공부 아주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힘써 일하는 것. ②기도를 할 때 별념(別念)이 없이 일심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염불하는 것.

*자고(自古)로로부터 내려오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이뭣고(是甚麼)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게송) ‘송백천년취~’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묘지곽(妙智廓) 게송 참고.

*모란(牡丹)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이 없으며은 크다.

늦봄에 붉고  이 피는데 꽃빛은 보통 붉으나 개량 품종에 따라 흰색붉은 보라색검은 자주색누런복숭앗빛을  흰색 따위의 여러가지가 있다.

*목단(牧丹) ; 모란(牡丹).

*무루법(無漏法) ;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 사제(四諦) 가운데 깨달음의 결과인 멸제(滅諦)와 그 원인인 도제(道諦)에 해당하는 모든 현상.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써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저력(底力)으로 간직하고 있는 밑바탕 든든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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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 ;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불보살의 자비)를 받들어 재앙을 피하고, 복(福)을 더하도록 기도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력(呪力) ;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의 효과.

*(게송) ‘만리장공우제시~’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불감근(佛鑑勤) 게송 참고.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일념(一念) ; 

*번뇌(煩惱)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혼연일치(致)완전히 하나 일치함.

*병법(秉法 잡을 병,법 법)사찰에서 의식의 진행을 담당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확신( 굳을 확,믿을 신) ;  믿음또는 그러 신념.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성도재)2015. 1. 22. 12:38

§(062) 부처님의 위대함—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 주심 / 『부처님께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신다』는 말의 뜻.

내가 닦지 아니하고, 내가 선지식을 믿지 아니하고, 법문을 들으면서도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서 부처님께서 나를 제도해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은 영원토록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참선 공부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은 모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모든 원수가 은인(恩人)으로 변하고 다정한 벗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조그마한 일로 해서 두고두고 큰 원수를 맺게 되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큰 원수도 나의 잊지 못할 은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62)—77년(정사년) 성도재 법문(77.12.08.음) (용062)

 

약 12분.


5천년 이래로, 단군(檀君) 성군께서 우리나라를 최초로 세우신 이래로 많은 위대한 임금님과 위대한 장군과 위대한 학자들을 우리는 위로 모시고 받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분들은 우리 민족에 국한(局限)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분들입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한 민족에게만 존경을 받을 만한 그러한 지도자가 아니신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이 싸움을 잘하거나, 정치를 잘하시거나, 무슨 특수한 민족에게 그러한 혜택을 주셨거나, 그러한 것도 아니시면서,
무엇 때문에 온 세계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허공계에 모든 중생들의, 그리고 영원을 통해서 영원한 무량겁을 통해서 존경받을 수밖에는 없고 숭배할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성인(聖人)이시냐?

우리는 그 원인을 분명히 알고서 존경을 해야 되겠습니다.

겨우 선영(先塋)의 제사를 지내면서 ‘좋은 곳으로 극락세계로 가도록 해주십시오. 우리 아들 학교에 합격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남편이 사업이 잘되게 해주십시오.’ 이러한 정도로 와서 복을 빌기 위한 그러한 상대로서의 존경에 그친다면은,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신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 저 머리카락 끄터리나 새끼발고락 끄터리 하나가 잘 생겼으니까 거기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그러한 정도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온 세계에, 온 법계에 모든 중생이 다 한마음으로 존경할 수가 있다. 그리고 100년이나 200년 일시적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그런 분이 아니라 영원토록 존경을 하고도 모자랄 만큼 위대한 분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우리 중생들은 과거 무량겁 이래로 오늘날까지, 오늘로부터서 영원한 미래까지 생사(生死)의 괴로움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요,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그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주신데에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만 주어서 요기(療飢)를 시켜주어도 그 사람은 대단히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일생 동안에 그 고마움을 간직할 경우가 많습니다. 옷 한 벌, 돈 몇만 원에도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물며 이 목숨, 꼭 죽게 될 수밖에는 없을 때 나를 구제해 준 분, 그때 병으로 도저히 병을 치료할 수 없을 때 그 병을 낫어 준 의원이나 나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그런 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일시적으로 잠깐 갈증을 면하게 해준다든지, 배고픔을 면하게 해준다든지 또는 몸의 아픔을 면해 준다든지 그러한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고해(苦海) 속에서 빠져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우리들을, 무량 중생을 그 괴로움으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데 대해서, 우리는 이 목숨을 몇억만 번을 바꾸어 나면서 그 은혜에 감사드린다 해도 그 천만 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그것을 ‘중생을 제도(濟度)해 주셨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제도, 제도’하지마는 부처님이 마치 큰물이 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을 이렇게 건져주듯이, 그렇게 건져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러한 법력(法力)과 도력(道力)이 있으시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셔서 마음대로 고해에 빠진 중생을 다 건져 주실 수 있다면 지금 이 법계(法界)에 한 중생도 남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건져주신 것이 아니라, 다못 부처님의 힘으로도 건져 주실 수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 부처님이 직접 건져 주실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우리 자신이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서 해결지어야만 내가 나 자신을 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제도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 선지식의 지도하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정진, 정진, 가행·용맹정진(加行·勇猛精進) 함으로써만이 내가 나를 괴로움으로부터서 해탈(解脫)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닦지 아니하고, 내가 선지식을 믿지 아니하고, 법문을 들으면서도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서 부처님께서 나를 제도해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은 영원토록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참선 공부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은 모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모든 원수가 은인(恩人)으로 변하고 다정한 벗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조그마한 일로 해서 두고두고 큰 원수를 맺게 되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큰 원수도 나의 잊지 못할 은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멀고 가까운 데에 원수가 많은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방법으로 해서 원수를 착한 벗을 만들고 은인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해서 가장 가까운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을 영원한 원수로 만들고 있지 않겠습니까?

활구참선(活句參禪), 이 활구참선에 철저하게 참(參)함으로 해서 나를 죽일려고 하는 원수도 착한 벗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한다면은 이 법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끼쳐주신 위대한 법인 것입니다.(10분54초~22분1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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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 ; 우리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 단군 신화에 따르면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경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 즉 단국(檀國)을 세워 약 2천 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국한(局限) ; 어떤 사물이나 일, 현상 등의 범위를 일정한 부분이나 측면으로 제한하거나 한정함.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선영(先塋 조상 선,무덤 영) ; 조상의 무덤. 또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
*끄터리 ; '끄트머리(맨 끝 부분)'의 사투리.
*발고락 ; '발가락'의 사투리.
*요기(療飢 병고칠 료,주릴 기) ; 적은 양의 음식으로 겨우 시장기를 면함.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큰물 ; ①비가 많이 와서 강이나 개천에 갑자기 크게 불어난 물. ②사람이 활동하는 무대가 크고 넓은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 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參) ; ①수행자가 친밀하게 사가(師家, 깨달음의 인가를 받은 지도자, 선禪의 지도자)에 접하여 수행하는 것.
②선문(禪門)에서 사람을 모아, 좌선·설법·염송하는 것을 말함. 이른 아침 하는 것을 조참(早參), 해질 녘에 하는 것을 만참(晚參), 수시로 하는 것을 소참(小參)이라고 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