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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12 §(229)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기도를 하여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면 소원을 성취한다 / 제일 먼저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해야 / (게송)송백천년취~. 2
  2. 2024.03.11 §(229) 중병(重病)을 앓는 장로 비구의 과거 인연 『법구비유경』 /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방편으로 바른 법을 표현 / 자기 허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성현(聖賢). 1
  3. 2024.03.10 §(229) 변화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 / 최상승법에 깊은 인연을 심은 우리나라 / 자작자수(自作自受) / 지구 사람들이 진리에 의해서 참나를 찾고,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원(願)의 기도를 하셔야.
  4. 2024.03.07 §(229) 사바세계보다도 천당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천당에 간 것이 영원한 것이 못되고 복이 다하면 떨어진다 / 사바세계는 무상해서 발심하기 좋다 / 변화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 2
  5. 2024.03.06 §(287) (게송)대지촬래여립미~ / 교외별전 선지 / 풍선 법문 / 쥐가 쥐 잡아먹는 법문 / 의심관 /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 / 체중현 현중현 / 오후보림. 3
  6. 2024.03.05 §(229) (게송)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 / 전강스님께서 중생 근기를 감안해서 용화선원에서 신수기도를 봉행 / 모든 법요식이 일대사를 위한 방편 / 부처님께서도 방편으로 교화하심. 10
  7. 2024.03.01 §(170)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무상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을 깨달라야 / 소승과 대승 /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도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참선공부 / 오조 홍인과 몽산스님의 극언. 1
  8. 2024.02.29 §(423) 무자(無字) 화두 / (게송)수행수시용심진~ /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로 들어라 / 전제 · 단제 · 근제. 2
  9. 2024.02.28 §(170) 선방에서 결제 또는 가정 속에서 결제 / 기본자세인 좌선을 충실히 해야 생활 속에서도 공부가 잘된다 / 대중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 인욕해야 / 수도 생활의 목적은 생사해탈. 2
  10. 2024.02.27 §(170) (게송)등한식득동풍면~ /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 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생활속 정진(요중선)2024. 3. 12. 14:02

§(229)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기도를 하여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면 소원을 성취한다 / 제일 먼저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해야 / (게송)송백천년취~.

내 자신을 먼저 바로잡고,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서 그렇게 하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들에게, 이렇게 해서 그것이 차츰차츰 멀리 멀리 뻗쳐 나가면 이웃과 모든 이 우리의 동포와 인류에게까지 그 성스러운 마음씨가 번져 나가도록.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평화(平和)로 향하게 하고 이 지구의 멸망을 막아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그러한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1) 약 8분.

 

(2) 약 11분.


(1)------------------

신수(身數)기도, 일주일간 인자 신수기도를 열심히 하셔야지요. 정성(精誠)껏 일주일 동안을 기도를 하셔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만 정성껏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마음속이 그뜩해 가지고 생각마다 고약한 생각, 말마다 고약한 소리, 행동을 고약한 행동을 하면, 일주일 기도를 아무리 정성껏 했기로서니 어떻게 그 사람에게 한량없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냐 그 말이여.

해마다 정월(正月)에는 그 해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좋다' 하는, 어떠한 해는 「마음보를 고치자」 그러한 말씀도 내가 했고, 작년에는 「썽을 내지 말자」 이런 말씀을 했는데, 금년에도 「썽을 내지 말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내게 하지 말자」
다른 사람 속을 이리저리 속상하게 만들어 놓고 "너 금년에는 썽을 안 내는 해여" 이래 해 가지고 약을 올리고, 「자기도 썽을 안 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게 하자」 금년에는 이렇게 나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썽 안 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복(福)을 짓는 것은 남에게 모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베푸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남의 마음을 어떠한 내가 충격을 가해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게 하는 거, 속상하게 하는 거—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짓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그것이 복을 짓는 데에 보다 더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 열 가지 한 것 보단 남 못할 일 한 가지 안 하는 것이 더 좋다' 하는 그러한 옛날의 말씀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남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하면서 가끔 말을 갖다가 박(薄)하게 해 가지고 남의 오장(五臟)을 활딱 뒤집어놓는 성미(性味)가 있단 말이여.
하는 일마다 본받을 일이 많고 아흔아홉 가지를 다 잘하는데, 가끔 그 말 한마디를 잘못해 가지고 남을 갖다가 오장을 쑤시는 그러한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것 참 아흔아홉 가지 공을 공(功)들여서 탑을 99층 탑을 쌓아 가지고, 한마디 그 독(毒)한 말로써 그 99층 탑을 때려부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그러한 분들을 잘 보살펴드리고 또 그러한 스님네를 잘 공양을 하는 것 대단히 좋고 그건 반드시 실천을 하되, 돈 안 들고 힘 안 들이고 공덕(功德)을 쌓을 수 있는 길.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같은 말이라도 남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줘.
그래서 부처님은 '망어(妄語)나 기어(綺語)나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하지 아니할뿐만 아니라, 따듯한 말, 부드러운 말, 자비(慈悲)스러운 말, 사랑하는 말로써 모든 어른과 친구와 아랫사람 이웃 사람에게 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 큰 복(福)을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내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말 한마디 비끗 잘못해 가지고 내가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행동의 중간에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이것이 삼업(三業)인데, 마음에 뭔 생각[意]이 나면 결국은 말[口]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身]으로써 그것이 실천이 되는데.
마음에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난 것은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밖으로 표현이 되고, 그다음에는 행동으로써 그것이 구체화(具體化)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떠오르기만 하고 밖으로 표현이 안 되면 자기의 문제로서 끝나지만, 말로써 이미 표현이 되어 버리면 긁어 담지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행동으로 실천을 해 버린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말, 불쑥 말이 나오기가 쉬운데, 한번 나가 버리면 그때 입을 탁! 막아 봤자 이미 소용이 없어요. 돈 안 들이고, 힘 안 들이고 사람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그러한 좋은 길.

그 말 한마디,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야만 사람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불쑥 잘못해 가지고 참 집안에 모든 시비(是非)도 일어나고, 친구 간에 의(義)도 상하게 되고, 그 대중(大衆)도 소란하게 맨들고,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제일조(第一條)에 그 '말을 적게 하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이 전해온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35분52초~43분23초)





(2)------------------

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하시되, '참 기도(祈禱)'는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어.
성현(聖賢)의 마음은 언제나 허공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면 내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면 바로 성현(聖賢)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여.
3일 기도나 일주일 기도 또는 백일 기도를 그렇게 그 열심히 하는 거, 오대산(五臺山)이나 강화(江華) 보문이나 저 홍련암이나 남해 보리암, 그런 성지(聖地)에 가서 그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은 '내 마음을 허공(虛空)과 같이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를 하는 거다' 그 말이여. 허공과 같이 하면은 바로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성현의 마음이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그저 속으로는 이 고약한 마음을 가뜩 품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가뜩차 가지고 잘되게만 해 달라고 막 빌어 대는데, 빌어 대다 보면은 천번 만번 백만번 천만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나 또는 그런 성현의 명호(名號)를 부르는데, 부르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져 가지고 성현의 마음과 같이 되니까 거기에서 원을 성취하게 되는 거여.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설사 성현의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이 청정해지니까 그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잠깐 한마디 원(願)을, 크고 작은 원을 세워도 바로 그 원이 성취가 잘되는 도리(道理)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가 끝난 뒤에 항시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실 것, 평상시(平常時)에 열심히 하실 것이며, 아까 말한 늙고 병들고 약하고 외로운 노인, 저 백리 밖에 사는 남의 노인도 그런 노인이 있으면 잘 돌봐주어야 할 텐데,
하물며 자기 집안에 계신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무리 말이 많고 성질이 괴팍하고 며느리를 별로 이뻐하지 않는 그러한 시어머니 시아버지라 할지라도, 정말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참다운 마음으로 부처님 받들듯이 잘 받들어 모시면 그러한 아주 고약한 성미를 가지신 어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감동이 되어 가지고,
'정말 내 며느리가 이 세상에서는 제일 착하고 이쁘고 좋은 며느리로구나. 아, 내가 저런 좋은 며느리를 너무 내가 볶아 대고 고약하게 굴었구나'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을 하고, 자기 마음을 그 며느리로 인해서 마음보를 고치고, 그래 가지고 정말 착하고 고운 마음씨가 된 그러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 여생(餘生)을 마치게 되고, 그래야만 그 할아버지 할머니도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성미가 괴팍하고 아주 인정머리 없고, 일평생 동안 며느리를 이뻐하지 아니하고 볶아 댔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저 늙은이가 빨리 죽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저 늙은이를 어디로 내보내 버릴 것인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미워하고 원망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점점 더 미워하게 되고 나중에는 노망하게 되면 며느리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저년이 내 집구석 망해 먹을라고 들어온 년이다' 그래 가지고 이를 갈아붙이고 '이년, 이년' 하고 계속 저주를 하다가 눈을 감게 되면, 그 노인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못하고 계속 그 집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며느리와 그 며느리 뱃속에서 나온 아들딸들을, 이놈에가 붙었다 저놈에 가 붙었다 하면서 계속 못살게 굴어 가지고 결국은 그 집안은 재앙(災殃)이 끊일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데부터서 잘해야 혀.
그러면 누가 제일 가까우냐? 내가, 나 자신이 제일 가깝거든.

그래서 내 자신을 먼저 바로잡고,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서 그렇게 하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들에게, 이렇게 해서 그것이 차츰차츰 멀리 멀리 뻗쳐 나가면 이웃과 모든 이 우리의 동포와 인류에게까지 그 성스러운 마음씨가 번져 나가도록.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평화(平和)로 향하게 하고 이 지구의 멸망을 막아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그러한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하고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牧丹一日紅)허되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허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라.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세상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를 안 해요. 그냥 ‘소나무 푸르거니’ 하고 별로 소나무를 그렇게 이뻐할 줄을 모른다 그 말이여.

그런데 목단(牧丹)은 하룻동안 빨갛게 이쁘게 피었다가 져 버리는데,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 아름답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무량(無量)의 복락(福樂)을 얻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법은 세상 사람들이 시드르르 하게 생각하고,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은 내 뜻대로 되어 봤자 잠깐 쌈빡하다 말아버린 것이고, 그 뒤끝은 천하 허망(虛妄)하고 한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은 재산과 색과 명예와 권리에는 모두가 거기에는 빠져 가지고 헤어날 줄을 모르는구나.(58분28초~68분46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마음보 ; 마음을 쓰는 속 바탕.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박하다(薄-- 엷다·얇다·적다·야박하다 박) ; ①(마음 씀씀이나 태도가) 너그럽거나 푼푼하지 못하여 야멸치고 쌀쌀하다. ②(이익이나 소득이) 많지 않아 보잘것없다. ③(무엇이) 두께가 얇다. ④(물건의 품질이) 변변하지 못하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망어(妄語) ; 거짓말이나 헛된 말.
*기어(綺語) ;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양설(兩舌) ; 이간질하는 말.
*악구(惡口) ;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자비(慈悲) : [산스크리트어] maitri  자비는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네 가지 끝없는 마음[四無量心] 가운데 두 가지이다. 모든 중생에게 실제로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慈能與樂), 중생의 고통을 실제로 덜어 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 걱정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 내어 주는 것을 「비(悲)」라고 한다(悲能拔苦).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 이것이 삼업이다.





------------------(2)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지극정성(至極精誠 이를·매우·궁극·극진히 할·깊을 지/극·다할·막다른 지경·매우 극/깨끗하다·정성스럽다 정/정성·진실 성)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 · 관세음(觀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나반존자(那畔尊者) ; 나반존자는 우리나라에서 말세의 복밭이라고 신앙하는 나한(羅漢).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獨] 수행(修行)한 성자(聖者)의 뜻으로 독성(獨聖) · 독수성(獨修聖)이라고도 한다.
이 존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일을 꿰뚫어 알고 있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준다고 함.
*명호(名號) ; 명자(名字), 명(名)이라고도 함. 이름. 주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기에 존호(尊號), 가호(嘉號)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명호(名號)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 커다란 작용이 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등의 행(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게송)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묘지곽(妙智廓) 게송 참고.
*목단(牧丹 치다·기르다 목/붉다·모란 단(란)) ; 모란(牡丹).
*모란(牡丹 수컷·양성 모/붉다·모란 단(란)) ; ① 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털이 없으며, 잎은 크다. 늦봄에 붉고 큰 꽃이 피는데 꽃빛은 보통 붉으나 개량 품종에 따라 흰색, 붉은 보라색, 검은 자주색, 누런색, 복숭앗빛을 띤 흰색 따위의 여러가지가 있다. ② ‘①’의 꽃.
‘丹’의 경우 본음은 ‘단’이나 ‘牡丹’의 경우, 속음인 ‘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여 ‘모란’으로 적는다.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량(無量 없을 무/헤아릴 량) ; ①헤아릴[量] 수 없이[無] 많음. ②[불교] 가히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화엄경》에 나오는 백이십 수(數) 중 한 수의 이름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쌈빡하다 ; ‘산뜻하다’의 사투리.
*산뜻하다 ; 기분이나 느낌이 깨끗하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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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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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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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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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인과 인연 비유2024. 3. 11. 12:27

§(229) 중병(重病)을 앓는 장로 비구의 과거 인연(因緣)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18. 도장품(刀仗品) /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방편(方便)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바른 법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 / 인과 방편설로써 자기의 마음가짐 · 말씨 · 인간성 · 행동거지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어야 / 자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을 성현(聖賢)이라 하는 것.

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내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말 한마디 비끗 잘못해 가지고 내가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행동의 중간에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이것이 삼업(三業)인데, 마음에 뭔 생각[意]이 나면 결국은 말[口]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身]으로써 그것이 실천이 되는데.
마음에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난 것은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밖으로 표현이 되고, 그다음에는 행동으로써 그것이 구체화(具體化)되는 것입니다.

'성현(聖賢)도 자기 허물을 보기가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자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을 성현이라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평생 남의 허물만 보고 자기 허물을 못 보는 것이고, 성현(聖賢)이라야 남의 허물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거여. 남의 허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허물을 보게 되고, 남의 허물이 바로 자기 허물인 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바로 성현이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1) 약 13분.

 

(2) 약 15분.


(1)------------------

부처님 당시에 현제국(賢提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 아주 그 노스님, 아주 장로(長老) 비구(比丘)인데, 연세는 많고 그런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대단히 중병(重病)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여러 달을 씻지도 않고 옷도 빨아 입지도 않고 그래 가지고는 이 노스님이 앓고 있는 그 방에는 그 근처에도 사람이 지내갈 수가 없습니다. 똥 냄새에다, 오줌 냄새에다가, 피고름이 썩어 문드러진 냄새에다, 땀에다 모다 섞어져 가지고 도대체 그 근처만 가도 창자가 거꾸로 뒤집어질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나서 아무도 그 간호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 부처님께서 떠억 정중(定中)에 관(觀)을 해 보시고 그 늙으신 비구가 그런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아시고서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그 현제국에 있는 그 노비구(老比丘) 있는 곳을 가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제자들에게 명(命)해서 차례차례로 그 간병(看病)을 하도록 명을 했습니다.
근데 이 부처님께서 명을 하시니까 마지못해서 간호를 한 척하고, 뭐 왔다갔다하고 어쩌고 그러지만, 그 가기만 가면 비위가 상하고 창자가 뒤집어질라 그러고, 한번만 갔다 오면은 도대체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그래서 형식적으로 거짓으로 그저 간호를 한 척하고 그랬는데, 부처님이 왜 그것을 모르시겠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그것을 아시고서 당신이 손수 더운물을 데워 가지고 가서 그 환자를 옷을 다 벗겨서 다 빨고 몸을 다 깨끗이 씻겨서 씻고, 그 방에 깔아져 있는 마른 풀은—돼지 그 우리 안에 돼지 똥과 오줌이 범벅이 쳐진 것 같이 그 풀이 썩어서 마치 퇴비처럼 되어 있는 것을 쏵 다 손수 다 그것을 걷어내고서 풀을 비어다가 말려서 마른 풀을 깨끗이 다 깔아 놓고, 옷을 빨아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이렇게 해서 딱 해 놓으니까 그 다른 제자들이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

그리고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을 향해서 법(法)을 설하시기를, "여래(如來)가 이 땅에 온 것은 병(病)들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고 한 외롭고 약한 노인(老人)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여래는 이 땅에 왔느니라.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이러한 외롭고 병들고 가난한 노인이나 또는 수행자, 수행하시는 스님들을 잘 약(藥)을 공양(供養)을 하고 의복을 공양을 하고 이 병든 스님을 잘 공양을 올려서 간호를 해드리고 하면은, 그 복은 여래(如來)를 공양하는 복(福)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느니라. 그래서 그 복이 무량(無量)해서 자기 원하는 바를 성취치 못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신수기도, 일주일간 인자 신수기도를 열심히 하셔야지요. 정성(精誠)껏 일주일 동안을 기도를 하셔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만 정성껏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마음속이 그뜩해 가지고 생각마다 고약한 생각, 말마다 고약한 소리, 행동을 고약한 행동을 하면, 일주일 기도를 아무리 정성껏 했기로서니 어떻게 그 사람에게 한량없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냐 그 말이여.

해마다 정월(正月)에는 그 해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좋다' 하는, 어떠한 해는 「마음보를 고치자」 그러한 말씀도 내가 했고, 작년에는 「썽을 내지 말자」 이런 말씀을 했는데, 금년에도 「썽을 내지 말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내게 하지 말자」
다른 사람 속을 이리저리 속상하게 만들어 놓고 "너 금년에는 썽을 안 내는 해여" 이래 해 가지고 약을 올리고, 「자기도 썽을 안 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게 하자」 금년에는 이렇게 나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썽 안 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복을 짓는 것은 남에게 모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베푸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남의 마음을 어떠한 내가 충격을 가해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게 하는 거, 속상하게 하는 거—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짓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그것이 복을 짓는 데에 보다 더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 열 가지 한 것 보단 남 못할 일 한 가지 안 하는 것이 더 좋다' 하는 그러한 옛날의 말씀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남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하면서 가끔 말을 갖다가 박(薄)하게 해 가지고 남의 오장(五臟)을 활딱 뒤집어놓는 성미(性味)가 있단 말이여.
하는 일마다 본받을 일이 많고 아흔아홉 가지를 다 잘하는데, 가끔 그 말 한마디를 잘못해 가지고 남을 갖다가 오장을 쑤시는 그러한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것 참 아흔아홉 가지 공을 공(功)들여서 탑을 99층 탑을 쌓아 가지고, 한마디 그 독(毒)한 말로써 그 99층 탑을 때려부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그러한 분들을 잘 보살펴드리고 또 그러한 스님네를 잘 공양을 하는 것 대단히 좋고 그건 반드시 실천을 하되, 돈 안 들고 힘 안 들이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길.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같은 말이라도 남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줘.
그래서 부처님은 '망어(妄語)나 기어(綺語)나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하지 아니할뿐만 아니라, 따듯한 말, 부드러운 말, 자비(慈悲)스러운 말, 사랑하는 말로써 모든 어른과 친구와 아랫사람 이웃 사람에게 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 큰 복(福)을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내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말 한마디 비끗 잘못해 가지고 내가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행동의 중간에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이것이 삼업(三業)인데, 마음에 뭔 생각[意]이 나면 결국은 말[口]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身]으로써 그것이 실천이 되는데.
마음에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난 것은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밖으로 표현이 되고, 그다음에는 행동으로써 그것이 구체화(具體化)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떠오르기만 하고 밖으로 표현이 안 되면 자기의 문제로서 끝나지만, 말로써 이미 표현이 되어 버리면 긁어 담지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행동으로 실천을 해 버린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말, 불쑥 말이 나오기가 쉬운데, 한번 나가 버리면 그때 입을 탁! 막아 봤자 이미 소용이 없어요. 돈 안 들이고, 힘 안 들이고 사람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그러한 좋은 길.

그 말 한마디,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야만 사람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불쑥 잘못해 가지고 참 집안에 모든 시비(是非)도 일어나고, 친구 간에 의(義)도 상하게 되고, 그 대중(大衆)도 소란하게 맨들고,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제일조(第一條)에 그 '말을 적게 하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이 전해온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31분2초~43분24초)





(2)------------------

그때 그 부처님께서 그 대중을 향해서 병(病)든 그 비구, 병들고 늙고 약하고 한 그러한 노인을 갖다가 간호를 잘하면 그 복이 한량이 없고, 무슨 원(願)이고 마음먹은 대로 성취가 되는데,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인도(印度)에 있는 다섯 개의 큰 강(江)이 흘르고 흘러서 다 바다에 들어가듯이, 모든 복(福)은 그 사람한테로 다 모여든다' 이것이거든. 그래 가지고 '그 공덕(功德)이 점점점점 원만(圓滿)해 가지고 마침내는 성불(成佛)까지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는데.

그때 그 현생국에 왕(王)이 "부처님, 저 노비구는 과거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금생에 저렇게 병고(病苦)에 시달리되 아무도 간병(看病)하는 사람이 없다가, 세상에 부처님 세존(世尊)께서 손수 더운물을 데워서 목욕을 해 주시고 빨래를 해서 갈아입히시고 풀을 뜯어다가 말려서 자리를 깔아 주시고, 어떻게 해서 저 노비구는 어찌 보면은 이 세상에서 제일 박복(薄福)한 사람 같았는데, 오늘 보니까 이 세상에서는 제일 복을 많이 지은 사람 같습니다. 과거(過去)에 무슨 업(業)으로 그렇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 과거에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악행왕(惡行王)이라 한 임금이 있었는데, 그 임금은 어떻게 포악(暴惡)하고, 우리나라에 연산군(燕山君)이나 모다 그러한 고약한 왕보다도 더 고약했던지 말로 할 수가 없어. 어떻게 법(法)을 갖다가 일 년이면 몇 번씩 뜯어고쳐 가지고 ‘어떻게 하면 백성을 갖다가 피를 빨아먹으며 어떻게 하면 백성을 괴롭힐까?’ 오직 자나깨나 그것만 연구하는 임금이여.

그래 가지고 법을 어떻게 자주 뜯어고쳐 가지고 백성을 못살게 굴고 그러니 백성이 아무리 그 법을 따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 자꾸 법을 고쳐 가지고는 도저히 실천할라야 할 수 없도록 그렇게 고약한 짓만 하면서, 또 그 천하에 장사(壯士)는 전부 뽑아다가 놓고, 임금에 명(命)에 조끔이라도 어겼다 하면은 쇠심줄로 맨든 그 채찍을 가지고 무섭게 매질을 하고 때리는데, 그 매질하는 장사도 아주 물리가 나 가지고 자기한테 은근히 뇌물을 갖다 바치면 아프게 때린 척하면서 안 아프게 때리고, 자기한테 뇌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주 살이 쭉쭉 째져서 피가 쏟아지도록 그렇게 무섭게 후려치고 그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아주 백성들이 살라야 살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세상이 그렇게 되면 무고(誣告)로 모략중상(謀略中傷)을 하는 풍조가 천하에 아주 유행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법(法)은 차츰차츰 간단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 성현이 나라를 다스리면 약법삼장이라 해 가지고 법을 간략히 해 가지고 삼장(三章)으로 된다 그 말이여. 법이 아주 간단해. 그래 가지고는 그렇게 법을 미세하게 엄하게 맨들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백성들이 모다 자연히 봄이 돌아오면은 날이 따뜻해지면은 얼음이 다 녹고, 땅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면서 여기저기서 온갖 산천초목에서는 새싹이 돋으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기저기에 모든 산새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시냇물은 노래를 부르면서 졸졸 흘러내리고, 강산(江山)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어서 사람들은 그 겨울에는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밖에를 나오지를 못하다가 봄이 오면은 문을 다 열어제끼고 모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논으로 모다 나와서 활동을 하게 되는 거와 같애.
성현이 이 나라를 다스리면은 자연히 인심(人心)이 순화(純化)가 되어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모략하고 무고로 하고 그러한 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 이 남을 조끔 수만 틀렸다면 터무니없는 이 모략(謀略)을 해 가지고는 사람을 갖다가 잡혀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도록 맨들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아주 그 정법(正法)을 믿는 그러한 아주 선량(善良)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갖다가 오해를 해 가지고 모략을 무고를 해 가지고 그 사람이 잡혀갔습니다. 잡혀가서 참 죽도록 뚜르러 맞을 판인데, 그 사람이 그 장사(壯士)한테 빌기를 "참, 나는 참 정법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절대로 그러한 악한 일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건 어떤 사람이 오해를 해 가지고 이렇게 이 무고로 이렇게 한 것이니 나를 용서를 해 달라"고, "나를 용서를 해 주고 조사를 해 보면 알지 않겠느냐"고.

이렇게 아주 정법을 믿는 선량한 사람이 간곡히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 포악한 장사도 한 점 눈물이 있었던지, 그 '정법을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에 아프게 때리지를 않고, 그 채찍이 그 사람 몸에 닿지 않도록 엄포만 놓고서 안 아프게 때려 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다행히 죽지를 않고, 혹독하게 매를 맞지 않고 잘 풀려났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매질을 혹독히 한 그 장사(壯士)가 죽어 가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습니다. 지옥에 들어가서 그 무서운 고(苦)를 다 받고, 몇백 생(生)을 받았는지 몇 겁(劫)을 받았는지 받고서 겨우 풀려났는데, 뭣이 되었냐 하면은 축생(畜生)이 되었습니다.
축생이 되어 가지고 참 수없이 육백 생(生) 동안을 축생이 되어 가지고 매를 맞았습니다. 이 소 쟁기질을 못한다고 밤낮 후려치고, 또는 말이 되어 가지고 빨리 안 달린다고 뚜드러 패고, 그래 가지고 수없는 참 육백 생 동안을 축생이 되어 가지고 그 혹독한 매질을 당하다가, 겨우 그 자기가 매질한 만큼 몇백 배를 이자까지 쳐서 그 보(報)를 다 받고 난 다음에사 겨우 사람이 되었는데, 평생 동안을 병고(病苦)를 앓게 되었다.

"그때 그 전생에 그 매질을 한 장사(壯士)가 금생(今生)에 태어나 가지고 저 늙은 비구(比丘)가 되었느니라. 그리고 그때 선량(善良)한 백성이, 무고로 잡혀 들어가 가지고 그때 그 장사한테 풀려난 사람이 바로 오늘 나다.
그때 그 장사가 내가 '정법(正法)을 믿는다'고 애원(哀願)을 한 그 한마디로 어떻게 마음을 돌이켜 가지고 나를 매질을 아니하고 잘 풀어준 그 공덕(功德)으로, 그 인연으로 오늘날 내가 손수 저 늙은, 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저 늙은 비구를 내가 오늘 손수 더운물을 데어서 간호를 하고 이 빨래를 해 주고 하게 되었느니라. 한번 지은 죄(罪)는 생을 바꾸더라도 면(免)하지를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대중을 위해서 전생(前生)의 인과(因果)를 설하셨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생사(生死)를 초월(超越)을 하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이 천칠백 공안(公案), 공안 법문이나 필요하지 인과설(因果說)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거 뭐 인과설, 잔소리만 많이 하고 무슨 그런 소리가 필요하냐?'

'어떠한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하니,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한데,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 의지(意旨)를 일러봐라!'

'이러한 등등(等等)의 법문, 간단한 법문(法門) 한마디면 족하지, 무슨 그런 너저분한 인과설(因果說)을 하느냐?'

이렇게 이 공격을 하고 나를 갖다가 비난을 하는, 나에게 충고(忠告)를 하는 그러한 분이 계셔서, 내 마음으로 "참 옳은 말씀이요. 나한테 직접 그런 말을 해 주어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서, "참 그 좋은 말씀을 내가 깊이 참작(參酌)을 하겠습니다" 했는데, 하고서도 나는 또 오늘 올라와서 또 이런 인과설을 말하게 됩니다.
나한테 충고를 해 준 그분한테는 내가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방편(方便)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바른 법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울을 보지 아니하면 내가 내 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여. 내 눈은 청황적백(靑黃赤白) 온갖 것을 다 보지만, 눈 자체(自體)는 눈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볼 수가 없어. 거울이나 거울의 대용품을 가자(假藉)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심(發心)을 해서 수행을 하고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나의 모습을 보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 부처님 경전(經典)에 나오는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의 그 방편설(方便說)을 가끔 하나씩을 들어서 그것을 살펴봄으로써 자기의 마음가짐과 자기의 말씨와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인간성과 자기의 행동거지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機會)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집 며느리는 이웃집, 담 너머 이웃집 며느리 하는 것을 보고 거기서 자기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經典)에 있는 이런 방편설을 하나씩을 보면은 참, 자기를 반성(反省)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현(聖賢)도 자기 허물을 보기가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자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을 성현이라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평생 남의 허물만 보고 자기 허물을 못 보는 것이고, 성현(聖賢)이라야 남의 허물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거여. 남의 허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허물을 보게 되고, 남의 허물이 바로 자기 허물인 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바로 성현이라 하는 것입니다.(43분28초~58분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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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長老) ; ①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②(불교) 덕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스님을 높여 이르는 말.
*비구(比丘) : 산스크리트어 bhikṣu 팔리어 bhikkhu의 음사. 걸사(乞士) · 파번뇌(破煩惱) · 파악(破惡) · 포마(怖魔) · 제근(除饉) 등으로 번역. 남자가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십 세 이상 된 때에 250계 되는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뒤에라야 비구라고 부른다.
비구에 다섯 가지 뜻이 있는데  ①사유 재산을 모아 두지 않고 걸식하며 지내는 것. ②번뇌 망상을 깨뜨려 버리는 것. ③탐욕과 분노와 우치가 불붙는 번뇌의 집에서 뛰어나는 것. ④부처님의 계율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 ⑤외도와 악마가 무서워하는 것 등이다. 여승(女僧)은 비구니(比丘尼 bhikkuni)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남승과 같고, 오직 348계 되는 비구니계를 지켜야 한다.
*정(定) :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 ②[산스크리트어]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산스크리트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박하다(薄-- 엷다·얇다·적다·야박하다 박) ; ①(마음 씀씀이나 태도가) 너그럽거나 푼푼하지 못하여 야멸치고 쌀쌀하다. ②(이익이나 소득이) 많지 않아 보잘것없다. ③(무엇이) 두께가 얇다. ④(물건의 품질이) 변변하지 못하다.
*망어(妄語) ; 거짓말이나 헛된 말.
*기어(綺語) ;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양설(兩舌) ; 이간질하는 말.
*악구(惡口) ;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 이것이 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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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❶]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참고 ❷]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대정장11, p.346c3)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간병(看病) ; 환자를 간호(看護)하는 것.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세존(世尊) : [산스크리트어]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 로가나타(路迦那他) ·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박복(薄福 엷을·적을 박/복 복) ; 복이 별로 없음. 또는 팔자(八字, 사람의 타고난 운수나 분수)가 사나움.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 : 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포악(暴惡 사나울 포/악할 악) ; 사납고 악독함.
*장사(壯士 장壯하다·굳세다·씩씩하다 장/선비·사내·남자 사) ; 기개와 힘이 아주 굳센[壯] 사람[士].
*쇠심줄 ; 소의 힘줄.
*무고(誣告 속이다·왜곡하다 무/고하다·알리다 고) ; 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미어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일.
*모략중상(謀略中傷 꾀·계략 모/꾀·경영하다 략/마음·심중 중/해치다·상하다 상) ; 남을 해롭게 하는 모략(謀略)과 남을 헐뜯어 명예를 손상(損傷)함. 또는 그런 일.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겁(劫) ; (산스크리트어)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 • 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보(報) ; 과보(果報),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애원(哀願 슬프게·애처로이 애/원하다·빌다 원) ; 소원이니 요구 따위를 들어 달라고 애처롭게[哀] 사정하여 간절히 바람[願].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가자(假藉 임시·일시/깔다·빌리다 자) ; 임시로 빌림. ‘藉’는 ‘借(차, 적)’의 본자.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佛)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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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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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원(願) 발원2024. 3. 10. 13:12

§(229) 변화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 / 불법(佛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에 깊은 인연을 심은 우리나라 / 자작자수(自作自受) / 지구 사람들이 진리에 의해서 참나를 찾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애끼며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러한 원(願)을 가지고 기도를 하셔야 한다.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약 14분.

 

 

'변화(變化)'라고 하는 것은 참 무상(無常)한 것이요 대단히 안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변화야말로 참으로 그 소중한 것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중생(衆生)은 영원히 중생이지 성불(成佛)할 기약(期約)이 없는 것입니다.
밤이 되었다 낮이 되었다, 또 낮이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이 되고,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또 그 지난 겨울 동안 대단히 강추위를 했지만, 내일이면 또 입춘이 되어서 다시 또 새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가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좋고, 이 사바세계 가운데에도 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이야말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사시(四時)가 분명해서 이 세계에서는 제일 좋은 나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도 제일 좋은 사바세계에 태어났고, 사바세계에서도 제일 좋은 이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을 퍽 다행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도 일 년 내 겨울만 있는 데도 있고, 일 년 내 여름만 되는 데도 있고, 또 밤이 대단히 긴 곳이 있는가 하면은 계속 밤이 없고 낮만 있는 데도 있고, 참 그 변화가 없어서 그런 데는 박복중생(薄福衆生)들이 떨어져서 사는 곳입니다.
이 대한민국은 봄은 봄대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은 삼복(三伏)더위가 있어서 그렇게 뜨겁고 하나, 그 가운데에 봄에 심어 놨던 모든 곡식이 그 뜨거운 계절을 만나서 무성하게 자라 가지고, 가을이 되면 서늘바람이 부는데 그 서늘바람 속에서 그 여름에 자랐던 모든 곡식이 누렇게 결실을 해서 익게 됩니다. 겨울이 되면은 눈이 내려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얼음이 어는데, 그때 모든 산천초목은 낙엽이 져서 엉성하게 나무가지가 되지만 그 나무의 모든 기운은 열매를 맺어서 씨로 갈무리고 또 뿌리로 기운을 보내서 월동(越冬)을 하게 됩니다. 그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이용해서 모든 이 더러운 것이 다 살균(殺菌)이 되고, 그래 가지고 입춘(立春)이 돌아오면 다시 새싹이 나게 됩니다.

이러한 나라에 태어난 우리는 참 숙세(宿世)의 많은 복(福)을 심고 닦았기 때문에 이러한 좋은 나라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 참 5천년의 역사를, 문화와 역사를 가진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민족입니다.
워낙 나라가 좀 좁고, 워낙 민심(民心)이 모다 선량(善良)하고, 또 그러지만 모든 풍토(風土)가 너무 좋다 보니 이웃나라에 욕심 많은 사람들이 항시 우리를 욕심을 내고 짓밟고 노략질을 하고 그러한 못된 나라들이 있어서 5천년을 두고 많은 괴로움과 시련을 받아왔지만, 우리는 그러한 시련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민족성(民族性)을 잃지 아니하고 결국은 오늘날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런 좋은 나라가 아니면 6 ‧ 25 동란(動亂)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세계에 16개국의 나라 병정(兵丁)들이 와 가지고 그 우리나라의 난리를 평정(平定)을 시키고 우리를 다시 이렇게 잘살 수 있겄게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은 정말 이 불법(佛法)에, 불법 가운데에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깊은 인연을 심은 그러한 나라요 민족이기 때문에 참, 불보살(佛菩薩)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이 항시 가호(加護)를 해 주셔서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말세(末世)가 차츰차츰 깊어지면, 동해(東海)는 차츰차츰 물에 잠기고 이 서해 쪽으로는 육지가 차츰차츰 바다가 육지로 변하게 되고, 또 앞으로 이 세계의 예언가들이나 점성가들이나 역술가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2천년 초에 가면 세계 인류의 70프로가 다 이 몰살을 당할런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현재 모든 이 사람들이 세계에 모든 나라들이 하는 꼴을 보면 그러한 재난을 당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모든 재난(災難)과 업(業)은 다 자작자수(自作自受)인 것입니다. 자기가 지어 가지고 자기가 받는 것이여. 인류의 멸망도 인류 자신들이 망할 짓을 해 가지고 그러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어길 수 없는 이것은 천리(天理)인 것입니다.
스스로 복을 받을 짓을 하면 복을 받게 되고, 재앙을 받을 짓을 하면 재앙을 받는 것은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서로 제 나라 욕심만 챙겨 가지고 이웃나라를 침공(侵攻)을 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게 되더라도 자기만 살려고 그러고, 다른 업체는 다 망해도 자기 업체만 살려고 그러고, 나라는 망해도 자기는 자기만 살려고 그러고, 모든 다른 사람들은 다 망해도 자기 한 사람만 잘살려고 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은 다 망하고 자기만 살기커녕은 자기까지 합해서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 일 뿐만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사이도 그렇고, 온 이 세계가 다 마찬가지고, 이 지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는 태양계(太陽系)와 같은 그러한 세계가 동서남북 시방세계(十方世界)로 무한대(無限大)로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지구와 같은, 지구보다도 더 발달된 세계가 이 하늘 우주세계에는 몇천만 개가 있을런지도 알 수가 없고, 지구와 비슷한 세계, 지구보단 못한 덜 발달된 세계, 모두 다 해서 백억만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많이 발달이 되어서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 과연 틀림이 없다고 인증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우주에 지구와 같은 많은 세계들이 있을 때에, 각기 그 세계는 그 세계대로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세계도 역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끔 우주과학이 발달이 되어서 계속 달나라도 갔다 오고, 다른 별나라를 끊임없이 연구를 하고, 우주 정거장을 맨들어 가지고 우주여행을 머지않아서 모다 인류가 하게 되는데, 지구상에 살면서 지구에 사람들이 서로 이 진리(眞理)에 귀의(歸依)해서, 진리에 의해서 참나를 찾고 진리에 의지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애끼고, 그렇게 해서 서로 화합(和合)하고 그렇게 해야만 이 지구는 멸망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도 함께 다 멸망하게 되고, 동물만 멸망한 게 아니라 모든 식물도 다 타 죽고, 그런 이 방사 낙진(放射性 落塵)으로 인해서 다 병(病)들어서 오랫동안 이 땅에서는 식물과 모든 동물, 생물이 서식하기가 어려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수기도를 하되 자기의 욕심(欲心)만을 충족(充足)하기 위한 그러한 원(願)을 가질 것이 아니라, 불같은 욕심으로 부자만 될려고 그러고 자기의 이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하기 위한 그러한 졸렬(拙劣)한 원을 세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기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 진정한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있고 그러한 원을 세워야 원을 성취를 하게 되고 그래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17분43초~30분5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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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박복(薄福 엷을·적을 박/복 복) ; 복이 별로 없음. 또는 팔자(八字, 사람의 타고난 운수나 분수)가 사나움.
*삼복(三伏)더위 ; 삼복(三伏 : 초복初伏 · 중복中伏 ·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무렵의 몹시 심한 더위.
伏자는 '엎드리다'나 '굴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人(사람 인)자와 犬(개 견)자가 결합한 伏자는 개가 사람 옆에 바짝 엎드려 복종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 伏날은 엎어질 듯이 매우 더운 날이라는 뜻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 신[天神]들의 제왕[帝]인 샤크라〔釋〕라는 뜻.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는 성(姓)씨이며 ‘능(能)이라 한역하고, ‘제바’는 ‘천(天)’이라 한역하며, ‘인달라’는 ‘제(帝)’라 한역하니 곧 ‘능천제(能天帝)’라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중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 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에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천지신명(天地神明) ; 하늘과 땅의 조화를 주재하는 온갖 신령.
*가호(加護 더할·베풀 가/돕다·지키다·보호하다 호) ; 가피(加被).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자작자수(自作自受) ; 자기(自己)가 지어서[作] 자기가 받음[受].
과거, 전생의 선악(善惡)의 인연에 따라 뒷날 길흉화복(吉凶禍福)의 갚음을 받게 된다는 뜻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뜻도 들어 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업자박(自業自縛)도 같은 뜻이다.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방사성 낙진(放射性 落塵) ; 핵폭발에 의하여 생겨나 주변의 땅 위에 떨어지는 방사성 물질. 생물이나 생태계를 파멸시키거나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므로 흔히 ‘죽음의 재’라 부른다.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졸렬하다(拙劣-- 옹졸할 졸/어느 정도에 미치지 않는다·낮다·적다 렬(열)) ; (사람이나 그 언행이) 옹졸하고 보잘것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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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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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무상(無常)2024. 3. 7. 08:42

§(229) 사바세계보다도 천당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천당에 간 것이 영원한 것이 못되고 복(福)이 다하면 떨어진다[福盡墮落] / 사바세계는 무상(無常)해서 발심하기 좋다 / 변화(變化)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

천당에 가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다 내 뜻대로 되니까 참 좋을 것 같지만, 거기서는 참나를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길이 없습니다. 너무 편안하고 좋고 내 맘대로만 되니까 그 편안한 것을 즐기느라 나 자신을 깨달을 필요도 없고 깨달라야 할 생각도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천당에서 살아 버리면 구태어 생사해탈(生死解脫)할 것도 없겠지만, 자기가 지은 복(福), 자기가 지은 복을 받을 만큼 다 받어 버리면 다시 축생에도 떨어지고 또 인간 세상에도 떨어지고 또 과거에 지어 놓은 죄가 많으면 지옥에도 떨어진다.

'변화(變化)'라고 하는 것은 참 무상(無常)한 것이요 대단히 안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변화야말로 참으로 그 소중한 것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중생(衆生)은 영원히 중생이지 성불(成佛)할 기약(期約)이 없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무상)

 

약 11분.


이 신수(身數)기도는 정초(正初)에 3일이나 또는 일주일, 이렇게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기도를 올림으로 해서 금년 일 년 동안 무장무애(無障無礙)하고 모든 소원을 뜻과 같이 이루기를 비는 그러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저 천당(天堂)과도 다르고 지옥(地獄)이나 축생계(畜生界)와도 달라서, 천당은 뭣이던지 내가 생각만 먹었다 하면은 생각 먹은 찰나(刹那)에 이미 내 원하는 바가 눈앞에 현실적으로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밥이 먹고 싶다' 하면 금방 배가 불러지고, '뭘 보고 싶다' 하면 보고 싶은 그것이 찰나간(刹那間)에 눈앞에 나타나 있고, 내가 '어디를 가고 싶다' 하면 가고 싶다는 생각을 먹자마자 내 몸뚱이가 그 목적지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도 괴로운 것이 없어. 내 뜻에 어긋난 일이 없고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고 원(願)대로 되고 그래서 하나에서 백까지 기쁘고 편안하고 좋은 일만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축생계(畜生界)나 저 지옥(地獄)은 백만사(百萬事)가 내 뜻대로 안 되아. 배고파서 물을 먹으면, 물이나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에서 불이 되어 가지고 불이 훨훨 타고, 도대체가 내 뜻대로 된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 사바세계는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이 섞여 있고, 내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 그 말이여.
어떠한 사람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많은 사람도 더러는 있고, 내 뜻대로, 사사건건(事事件件)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얼마 동안은 내 뜻대로 안 되다가 또 세월이 지내가면 또 내 뜻대로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내 뜻대로 무엇이던지 잘되다가 중간에 가서 내 뜻대로 안 되기도 하고, 일생 동안 모든 일이 내 뜻대로만 잘되는 사람도 몇백만 명 속에는 혹 한 사람이나 있을란가, 거의 내 뜻대로 백만사(百萬事)가 다 된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은 40프로나 3-40프로, 그리고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6-70프로,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보면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바세계보다도 저 천당(天堂)에 가면, 하늘나라에 가면 참 좋겠다' 다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이 불법(佛法)에서는 천당을 그렇게 좋게 생각을 아니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천당에 가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다 내 뜻대로 되니까 참 좋을 것 같지만, 거기서는 참나를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길이 없습니다. 너무 편안하고 좋고 내 맘대로만 되니까 그 편안한 것을 즐기느라 나 자신을 깨달을 필요도 없고 깨달라야 할 생각도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천당에서 살아 버리면 구태어 생사해탈(生死解脫)할 것도 없겠지만, 자기가 지은 복(福), 자기가 지은 복을 받을 만큼 다 받어 버리면 다시 축생에도 떨어지고 또 인간 세상에도 떨어지고 또 과거에 지어 놓은 죄가 많으면 지옥에도 떨어진다 그 말이여.
은행에다 예금을 아무리 많이 해 놔도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곶감 빼 먹듯이 자꾸 빼 먹으면, 그 쓰기에 따라서는 일 년 동안에 통장이 다 바닥이 날 수도 있고, 아무리 많아도 한 10여 년간 계속 내다 쓰다보면 결국은 바닥이 나는 것처럼, 과거에 복(福)을 많이 짓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다행히 천당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받어 버리면 다시 또 떨어지기 때문에 천당에 간 것이 그렇게 영원한 것이 못되고, 올라가 봤자 복 받느라고 이 나를 깨달라서 견성성불한 법이 없기 때문에 이 불법을 믿는, 특히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천당을 그렇게 좋게 안 생각하고, 제일 좋은 세계가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苦)와 낙(樂)이 섞여 있어서 모든 것이 무상(無常)해서 거기에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좋은 동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잘살다가 사업이 여의치 못해서 그 사업이 망하고 집안이 기울어지면 거기에서도 발심을 할 수가 있고, 또 가난에 쪼들려서 너무너무 고통이 심해도 그 고통 속에서 자기를 반성하고 거기서 용기와 지혜(智慧)를 얻어서 향상(向上)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變化)'라고 하는 것은 참 무상(無常)한 것이요 대단히 안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변화야말로 참으로 그 소중한 것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중생(衆生)은 영원히 중생이지 성불(成佛)할 기약(期約)이 없는 것입니다.
밤이 되었다 낮이 되었다, 또 낮이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이 되고,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또 그 지난 겨울 동안 대단히 강추위를 했지만, 내일이면 또 입춘이 되어서 다시 또 새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가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는 좋고, 이 사바세계 가운데에도 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이야말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사시(四時)가 분명해서 이 세계에서는 제일 좋은 나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도 제일 좋은 사바세계에 태어났고,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도 제일 좋은 이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을 퍽 다행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도 일 년 내 겨울만 있는 데도 있고, 일 년 내 여름만 되는 데도 있고, 또 밤이 대단히 긴 곳이 있는가 하면은 계속 밤이 없고 낮만 있는 데도 있고, 참 그 변화가 없어서 그런 데는 박복중생(薄福衆生)들이 떨어져서 사는 곳입니다.

이 대한민국은 봄은 봄대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은 삼복(三伏)더위가 있어서 그렇게 뜨겁고 하나, 그 가운데에 봄에 심어 놨던 모든 곡식이 그 뜨거운 계절을 만나서 무성하게 자라 가지고, 가을이 되면 서늘바람이 부는데 그 서늘바람 속에서 그 여름에 자랐던 모든 곡식이 누렇게 결실(結實)을 해서 익게 됩니다.

겨울이 되면은 눈이 내려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얼음이 어는데, 그때 모든 산천초목은 낙엽이 져서 엉성하게 나무가지가 되지만 그 나무의 모든 기운은 열매를 맺어서 씨로 갈무리고 또 뿌리로 기운을 보내서 월동(越冬)을 하게 됩니다. 그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이용해서 모든 이 더러운 것이 다 살균(殺菌)이 되고, 그래 가지고 입춘(立春)이 돌아오면 다시 새싹이 나게 됩니다.(10분23초~21분2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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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정초(正初 정월 정/처음 초) ; 정월(正月 음력으로 일 년 중의 첫째 달)의 초승(初生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부터 처음 며칠 동안). 한 해의 처음.
*지극정성(至極精誠)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 · 방해가 없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지옥(地獄 땅 지/감옥 옥) :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죄업으로 말미암아 그 과보로 사후(死後)에 가서 나게 되는, 고통이 극한 지하의 감옥을 말한다. 그러나 육신의 사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우리의 마음속에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이다.
*축생계(畜生界 짐승 축/나다·살다·삶 생/세계 계) ; 십계(十界)의 하나. 삼악도(三惡道) 또는 육도(六道)의 하나로, 죄업 때문에 죽은 뒤에 짐승[畜]으로 태어나[生] 괴로움을 받는 세계(世界).
*십계(十界) ; 십법계(十法界 열 가지 법계)라고도 한다. 십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佛) 10가지로 중생의 미혹과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분류한 것. 중생의 심리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십법계 중 앞의 6계는 삼악도(三惡道 : 지옥, 아귀, 축생)와 삼선도(三善道 : 수라, 인간, 천상)로 모두 미혹의 세계인 범부(凡夫)의 세계이다. 뒤의 4계(성문, 연각, 보살, 불)는 깨달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모두 깨달음의 세계인 성인(聖人)의 세계이다. 양쪽을 합하여 '6범4성'(六凡四聖)이라 한다.
이를 4취(四趣) · 인천(人天) · 2승(二乘) · 보살 · 불(佛)로 분류하거나, 3악도(三惡道) · 3선도 · 2승 · 보살 · 불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앞의 6계는 고통으로 가득차 업에 의해 윤회전생하는 세계이므로 보통 '육도윤회(六道輪廻)'라 한다.

[참고] 『마하지관(摩訶止觀)』 (隋天台智者大師說 | 門人灌頂記) 제5권(上)
夫一心具十法界 一法界又具十法界百法界 一界具三十種世間 百法界卽具三千種世間 此三千 在一念心 若無心而已 介爾有心卽具三千

일심이 십법계를 갖추고, 하나의 법계에는 또한 십법계를 갖추어 백법계가 되며, 백법계 중 하나의 법계가 각각 30종류의 세간(五陰 · 衆生 · 國土 등 3세간에 각각 十如是가 갖추어져 있어 30세간이 된다)을 갖추므로 백법계는 3천종의 세간(世間)을 갖춘다. 이 삼천세간이 한 생각하는 찰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삼천세계를 갖춘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백만사(百萬事) ; 모든 일.
*‘배고파서 물을 먹으면, 물이나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에서 불이 되어 가지고 불이 훨훨 타고’ ; 아귀(餓鬼).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박복(薄福 엷을·적을 박/복 복) ; 복이 별로 없음. 또는 팔자(八字, 사람의 타고난 운수나 분수)가 사나움.
*삼복(三伏)더위 ; 삼복(三伏 : 초복初伏 · 중복中伏 ·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무렵의 몹시 심한 더위.
伏자는 '엎드리다'나 '굴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人(사람 인)자와 犬(개 견)자가 결합한 伏자는 개가 사람 옆에 바짝 엎드려 복종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 伏날은 엎어질 듯이 매우 더운 날이라는 뜻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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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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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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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87) (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가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 / 육조 스님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하택신회, 남악회양 /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쥐가 쥐 잡아먹는 법문 /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 / 의심관(疑心觀) /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 /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인가(印可) / 활구참선을 듣게된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

생사해탈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 일념 단속하는 가운데에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최상승법 / 오후보림(悟後保任) / 다맛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그것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송담스님(No.287)—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 (용287) (의심 화두드는 법)

 

(1/3) 약 20분.

 

(2/3) 약 19분.

 

(3/3) 약 18분.


(1/3)----------------

대지촬래여립미(大地撮來如粒米)하야  당양타고대가간(當陽打鼓大家看)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안중약미제금설(眼中若未除金屑)인댄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2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사부대중이 잘 들었습니다.
활구참선법.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조실 스님 생존시, 조실 스님께서 15년간을 이곳에 머무르시면서 많은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시면서 항상 활구참선법, 최상승법을 선양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성불(成佛)을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는데, 그 팔만사천 법문을 교(敎)라 한다면 그 교(敎) 밖에 따로 마음을 전하신 것이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 교외별전 선지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는 ‘화두(話頭)’라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마는.
물론 그러한 체계화된 간화선(看話禪)은 없었지만, 부처님 때부터서 그 부처님의 설법과 중생을 교화하는 그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 그 법(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세상이 흐름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根機)가 차츰 약해지고 또 사량분별심이 점점 영리한 마음은 점점 늘어나 가지고 순박성을 잃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차츰차츰 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을 중생 근기 따라서 마련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안 했지마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이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바로 그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하택신회 선사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저 하택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라야 그릴 수도 없는데 어찌 네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그것이 벌써 이름이 아니냐? 이름이 없다고 그랬는데 왜 이름을 붙이느냐?’ 이렇게 꾸짖으시고서, ‘네가 나중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 밖에는 되지 못하겠구나. 사량(思量)으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는 강사와 같은 그러한 무리 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렇게 점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을 뵈러 와서는 절을 하니까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물으셨는데, 남악회양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일부러 ‘이뭣고?’ ‘이뭣고?’ 형식적으로 하고, 또 할 때는 잠시 알 수 없는 생각이 있다가 금방 돌아서면 의심이 없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육조 스님의 그 물음 뒤끝에 꽉 막힌 그 의심이 잊어버릴라야 잊어버릴 수 없고, 안 할라야 안 할 수 없고, 저절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꽉 막힌 그 의심이 차오르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8년 동안을 그러한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던 것입니다.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던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뭘 이리저리 좀 하다가 무슨 어떠구라한 무슨 경계가 나타난다고 ‘아! 알았다. 내가 알았다’ 이런 생각을 내고서 무슨 공안을 갖다가 자기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뭐라고 이를라고 하고. 그러헌....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나 애써서 한 철 두 철 하면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일체다. 전체가 바로 나요, 나 밖에 이 세계가 어디가 있느냐.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산을 보나 들을 보나 돌을 보나 그것이 모두가 딴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내 면목(面目)이다’ 이러한 체중현(體中玄)의 그런 공견(空見)이라 하는 것은 한 철 아니면 두 철이면 누구나 그러한 경계는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所見)을 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떠억 지어간다면 그 사람은 조그만한 그릇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자기 그릇으로 평생을 수용하다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그분은 우리나라 6.25동란 때 전쟁고아로서 미국에 양자를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해 가지고 그 사진을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이가 한번 어느 분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이 참선에 대해서 항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참선이란 게 대관절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참선을 해 가지고 구경(究竟)으로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겨우 자기 이름만을 한글로 서투르게 쓸 정도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갔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통역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참선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도 어렵고 그래서 풍선을 하나의 예로써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꼭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지마는 그 사진을 찍고, 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씨를 쓰고, 또 쇠를 만드는 그러한 그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쇠를 녹여서 좋은 쇠를 만드는 그 가운데, 또 백정이 소를 잡는 데에는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풍선을 불고 있다.

누가 가장 큰 풍선을 불며, 금방 그 풍선을 잘못 불면 처음에 조금 훅 불다가 어문 가운데에서 툭 터져 가지고 실패해 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당히 클 때까지 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개중에는 이 우주의 법계에 가득찰 만큼 그러한 큰 풍선을 불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 가지고 터트릴 수 있는, 그렇게 풍선을 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우주, 동서고금에 가장 크고도 좋은 풍선을 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지금 우리는 승려로서 우리 나름대로에 가장 좋은 풍선을 불려고 목숨을 바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사진작가로서 당신의 풍선을 잘 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예술가도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런 도(道)나 법(法)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이해를 잘 하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달 후에 그이가 인편에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지금도 풍선을 열심히 불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그 전단을 보내왔었습니다.

'참선을 꼭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화두를 타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 고정된, 참선에 관한 고정된 관념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런 고정된 생각을 가지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지루한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못하고 시간이 없으면 못하고 어떠한 특별히 혜택 받은 사람이 아니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참선 자체를 경원시(敬遠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려고 하니까 지루하고, 발이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고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으니까, ‘하! 이거 화두가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이냐?’ 또는 '내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나는 이 참선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내 근기가 참선을 할 만큼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차라리 이렇게 아무리 해 봤자 재미도 없고 별 성과도 없는 참선을 이렇게 한다고 해 봤자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경을 읽어 볼까? 염불을 할까? 주력을 할까?'
그래 가지고 경을 읽다가 염불을 하다, 주력을 하다, 그러다가 보면 또 다시 참선을 하고 싶어서 또 참선을 하다가 말다가, 참 이러한 분을 상당히 많이 겪어 봤습니다.

이 참선은, 초학자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그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하는데,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한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또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참선을 잘할 수도 있는 그러한 면도 있는 것입니다.(처음~20분18초)





(2/3)----------------

어떤 사람이 그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이 들끓든지, 그 쥐를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별별 약을 다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다 갖다 놓기도 하고 그러되, 오히려 더 약을 놓아 가지고 몇십 마리 잡아봤자 며칠 안 있으면은 더 쥐가 성해 가지고 더 야단을 치고 더 번성을 하고 하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를 갖다 놔봤자 몇 마리 잡아서 찢어발겨 놓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쥐가 없어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부엌이나 창고나 다락이나 천정이나 수채구녁 할 것 없이 뭐 집안에 있는 걸 잡아도 이웃집에서 오고 또 산중에서 내려오고 들에서 오고 이렇게 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연구한 끝에.

쥐를 갖다가 잡아서, 새끼 때 그 쥐구녁을 파 가지고 그 새끼를 잡아 가지고는 살살 그 쥐를 꽁댕이를 잘라버리고서 그 쥐를 갖다가 키웠는데. 주로 무엇을 먹여서 키우냐 하면은 쥐를 덫을 놓아서 잡아 가지고, 쥐 고기를 썰어 가지고 새끼 때부터 먹였던 것입니다.
쥐의 고기를 먹여서 차츰차츰 크면서, 쥐를 잡아서 큰 쥐도 넣어주면 배가 고프니까 그 쥐를 막 깨물라 먹고 해서, 인자 그 육식을 하니까 쥐가 굉장히 빨리 잘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쥐가 쥐 고기를 참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놓으니까 그 쥐란 놈이 천장이고 부엌이고 쥐구녕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쥐란 쥐는 다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를 시켜봤자 쥐구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나절씩 쥐구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오면 잡아먹을지언정 쥐구녁에 딱 들어가 갖고 안 나오면 잡아먹지를 못하는데,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내 놓으니까 구녁구녁이 다 드나들면서 싹 다 잡아먹어.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그 쥐는 사람에게 잘 길이 들어져서, 저를 갖다 마지막에 그놈을 잡어가지고 ‘니가 그동안에 모든 쥐를 잘 잡은 공로를 크게 치하를 하고, 그러나 미안하지마는 너도 너 갈 데를 가거라’ 이렇게 해서 처단을 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쥐 때문에 곡식을 많이 먹고 모든 물건을 다 쏠고 그래서 그렇게 쥐 때문에 피해가 많은,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쥐가 1년에 먹는 양곡이 수십만 수백만 석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쥐를 잡게 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드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일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이 화두! 이론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 가지고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법문 하신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참구하는 것이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과도 비교해서 ‘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따진다든지, 조사의 어록이나 다른 공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 보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도 꽉 막히고 뒤도 막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관, ‘이뭣고~?’
또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글귀나, 어떠한 물건이나, 어떠한 일을 갖다가 그것만 밤낮 생각해 가지고 생각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고 그 생각만 하도록, 그러면은 애인을 이별한 사람이 밤낮 애인 사진만 놓고 애인만 들여다보고 애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참선이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죽은 자식을 생각해 가지고 밤낮 죽은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나깨나 생각 안 할라고 아무리 떨쳐 버릴려고 해도 그 자식 얼굴이 환히 나타나면서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꿈에서도 자식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자식 생각, 누구 청년 학생들을 봐도 자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그러면 참선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왜 아니냐 하면, 그 한 일에 생각이 집중된다고 한 점에서는 그 점 하나는 혹 공통점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생사해탈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하는 이 참선은 알 수 없는 의심! 의심으로 그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관이라야 하는데, 의심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한 것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뭣고?’를 하라니까, ‘이뭣고?’ 소리를 잊어버리고서 ‘이웃집 영감, 이웃집 영감’ 며칠을 하다가 와서 ‘이웃집 영감’을 많이 찾아도 잘 안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어떤 노인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집에 가서는 자나깨나 큰소리를 지르면서 ‘전강 스님! 전강 스님!’ 자꾸 전강 스님을 불러싸서, 그 며느님과 손녀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와 가지고 ‘원장 스님이 전강 스님을 자꾸 부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전강 스님을 불러싸니 정말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가서 밤새도록 전강 스님만 불러싼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일러 드려가지고 얼마 동안을 그 노보살님이 잘 하시다가 지금은 인자 저승으로 가셔서 극락세계를 가셨거나 다시 몸 바꿔 나셨지 않은가 그리 생각이 됩니다마는.

이 한 자리에서 같이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 각기 달리 듣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이해를 해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법회 때마다 이 참선 하는 법,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은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오신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가끔 한 번씩 ‘이뭣고?’ 소리는 듣지만 '대관절 이뭣고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그러한 분들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전강 스님'을 불러싸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 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해 가다보면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갖다가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고 무엇이고 간에 그것을 소반 위에 있는 쌀이나 곡식을 갖다가 거머쥐듯이[大地撮來如粒米], 온 삼천대천세계도 한 손으로 쏵 휘어잡아서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참, 기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온 태양과 별, 뭐 달까지라도 한 손에 거머쥐어다가 밝은 데다 갖다 놓고서, 그걸 갖다가 손바닥에다 놓고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걸림 없는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當陽打鼓大家看].
그러면 제도 받을 중생이 어디가 있으며, 제도를 할 부처가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천당과 지옥이 무엇이며, 중생과 부처가 무슨 차별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러나 안중(眼中)에 약미제금설(若未除金屑)이면, 눈 가운데 만약 금싸래기를 제거, 빼 내지 못하면,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다. 어떤 것이 누르고 어떤 것이 검은 것을 가려내기는 크게 어려운 것이다.

겨우 공견(空見),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가 일념(一念) 속에 있고, 육도법계가 바로 이 일념 속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걸릴 것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막힐 것이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현중현(玄中玄), 공안에 있어서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마치 눈 가운데에 금싸래기를 빼내지 못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겨우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그래 봤자 그것은 체중현(體中玄)의 경계라, 체중현의 경계는 공(空)의 이치거든.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인데, 진공의 이치도 이렇게 옅은 분별심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확철대오해서 그렇게 크게 봐 버리면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활구(活句) 문중에, 이 조사(祖師) 문중에 있어서는 체중현 도리 보는 그러한 것을 깨달랐다고 인증(認證)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체중현 도리를 보는 것으로서 인가를 해 주면 그 각견(覺見)을 벗어 버리지를 못하고, 이치(理致)로는 짐작을 하지마는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는 부처가 와도 한 방맹이, 조사가 와도 한 방맹이, 그래서 뭐 거침이 없을 것 같은 그러한 횡행자재(橫行自在)한 그러한 생각을 갖지만, 이치로 그럴지언정 사(事)에 막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인가를 해 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공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해서, 법(法)을 설하되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것이고, 현(顯)과 밀(密)이 있는데 현밀(顯密)을 가리지를 못해 가지고 함부로 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기가 막힌 도인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정말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해 줄 말이 있고 안 해 줄 말이 있는 것이며,
때에 따라서 인과법이라든지 모든 방편설이 다 적재적소에 쓰면은 좋은 약이 되려니와, 그것을 함부로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쓰게 되면, 법도 못쓰게 만들고 또 중생도 못쓰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중대한 과오를 범해서 용서받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보단 훨씬 나은 사람에게 인가를 해 주고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해야지, 자기와 같은 정도의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인가를 해 주면, 인가 받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반 밖에 못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20분26초~39분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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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서는 활구참선을 하시되—이 불법(佛法)을 10년 20년 믿지마는 참선이 무엇인지, 활구참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그저 부지런히 시주하고, 염불하고, 부처님께 공을 들이고, 그러한 것이 불법인줄 알고 일생을 지극정성으로 믿고서 스스로도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도 '참, 그분이 신심이 있다. 참, 공덕이 장하다.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가셨을 것이다' 이러한 칭송을 듣고 그러면서 일생을 마친 분들도 참 많습니다마는, 활구참선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기에까지 이르른 사람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여러 해 되시고, 또 법문도 많이 들으시고, 경책(經冊)도 많이 보신 그런 분도 계시고, 여러 절을 거치고 거쳐서 오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처음 오신 것이 바로 여기에 오신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자리에 법회에 참석하셔서 활구참선을 들으시게 된 인연(因緣), 이것은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시고 그리고서 그 49년 동안 설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듣기도 어렵고, 들어도 믿기 어렵고, 이렇게 듣고 믿어도 직접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다른 공부는 하면 한 만큼 알아진 것이 있고,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무엇이 얻어진 것이 있고 그래서 하면 재미가 있고 보람을 느끼는데, 이 활구참선은 무엇이 알아진 것도 없고 나타난 것도 없고 맨날 해봤자 이게 죽 떠먹은 자리고. 그러니 이거 재미 붙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지만, 확철대오 하기 전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건강이 좋아진다든지 또는 자기의 모든 나쁜 성격이 완화가 되고, 예를 들자면은 신경질을 내는 거, 사소한 일에 싸우고 모다 그런 것이 이 참선을 함으로써 차츰차츰 그런 신경질을 안 내게 되고 또 감정에 끄달리지 않게 되고 또 자기의 감정을 자기의 힘으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러한 것은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열심히 하다보면 누구나 그런 효과를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인간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좋은 것이고, 모든 가족들에게 직장에서 사회에서 존경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옅으고, 힘이 세고 약하고 간에 대부분 자기 감정을 자기가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이 일어나지 아니할 때는 참 훌륭한 분이라고 다 하는데, 한번 어디를 건드려 가지고 감정이 폭발했다 하면 뭐 박사고 교수고 장관이고 장군이고 간에 한번 속이 뒤집어졌다 하면은 여간 자기가 자기 감정을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평소에 이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극기(克己)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자기가 자기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백만 군사를 호령을 해서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가 자기를 이기기는 어려우니라.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대장부(大丈夫)니라’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힘은 억지로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참선을 조석으로 한 시간씩 하고 낮에도 생활 속에서 항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참구하고 이럼으로써 그것이 참선이 생활화 될 때에 무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내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찰나적으로 무슨 기분 나쁜 생각이 탁! 속에서 뭉클 일어날라가도 떠억 ‘이뭣고?’해 버리면 간단하게 없어지고, 그 일어나는 성나는 마음이 금방 화두로 돌이켜져 버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성을 낼라면 내고 안 낼라면 안 내고, 슬퍼할라면 하고 슬퍼 안 할라면 안 하고, 미워할라면 미워하고 또 안 미워할라면 안 미워하고. 그까짓 것 뭐 희로애락이 자유자재해.

이것이, '자유자재다, 해탈이다'하는 것이 다른 데에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生死)에 자유자재, 또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이고, 일념을 잘 단련을 하고 일념을 갖다가 돌이켜서 그놈을 갖다가 단속을 하는 가운데에 생사 자유의 이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의 수도(修道)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해서 잘 보림(保任) 공부를 해서,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게 되어야 그래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깨달라 가지고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안 하고 등한(等閒)히 하나, 더디 깨달라도 깨달을 때까지 그 공력을 들여서 정진을 해 놓은 사람은 깨달은 뒤에 오후보림 공부가 벌써 깨닫기 전에 많이 다 숙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라.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께서도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조급한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내 가지고 빨리 깨달을려고 급한 생각 낸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생각만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의사량처불상간(擬思量處不相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명예와 권리를 구하는 젊을 때에는 공자님을 섬기다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뜻을 착(着)해 가지고 구해야 할 것인가?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다가 금생에 태어나서는 유교를 믿고 제 부모의, 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나라 모든 생활이 대부분 다 이조(李朝) 동안에 유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종교가 없는 사람은 대부분 다 유교를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공자님을 믿고 삼강과 오륜을 지키면서 그렇게 공자님을 믿어 오다가 늘그막에사,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친하게 되었다. 이제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말 그것을 똑바로 알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뉘기 짜서 이리저리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 무엇을 찾고 알려고 하면, 벌써 그것은 이 최상승법에는 어긋나 버린 것이다[擬思量處不相干] 그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생각하면 벌써 그것 자체가 중생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그 화두, 공안 모다 그런 것에 대해서 책이 나오기도 하고, 또 일본 책도 나오기도 하고 해서 그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밤낮 ‘이뭣고?만 하라' 그러고 하니까,
일본말을 아는 사람은 일본 책을 사서 이리저리 읽어 보면 공안에 대해서 이리저리 해설도 되어 있고, 또 천착(穿鑿)이 되어 있고, 파설(破說)도 되어 있고 해서, 썩 그것을 보면은 재미가 있고, 그것 얼마동안 지내면은 자기도 다른 공안도 요리 보면은 가늠이 가고 하니까, 그 버썩 재미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 식으로 공안을 천착을 하고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봤자 그것은 생사해탈과는 영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알 수 없는 의심, 지금 이렇게 설교를 듣고 하더라도 이 들은 가운데에도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그 의심이 있어야. 그 의심 속에서 말을 들어야 하거든.
그 법문을 들을수록에 의심이 더 간절하고 돈발(頓發)을 해야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고. 걸음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질 때마다, 자기의 본참화두에 충실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올바르게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9분25초~57분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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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166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칠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28, p34. 가로판 p29, p35.
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是故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敎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敎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선지(禪旨) : [범]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 타연나(駄衍那)라 쓰고, 줄여서 선(禪)이라고만 한다。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 등으로 번역한다。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가섭존자가 전한 선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교법만이 유포되었었는데, 달마대사(達摩大師)가 건너온 뒤로부터 선법이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 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 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 육 세로써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신회선사(神會禪師) : (686 ~ 760) 또는 하택선사(荷澤禪師)라고도 한다. 호북성(湖北省) 양양부(襄陽府) 고(高)씨의 집에서 났다. 어려서 유교(儒敎)와 도교(道敎)의 글에 정통하였는데 <후한서(後漢書)>를 보다가 불교의 묘한 이치를 알고 출가하여 경을 많이 숭상하였다.
처음엔 형주(荊州)의 옥천사(玉泉寺)에 가서 삼 년 동안이나 신수(神秀)대사를 모시고 있다가, 그가 칙천 황후(則天皇后)의 청을 받고 서울로 가게 되자 그의 지시로 육조의 법회로 갔다.  그 때의 나이가 열 세 살이라기도 하고 마흔 넷이었다고도한다.

육조의 법을 받은 뒤에 남양(南陽)의 용흥사(龍興寺)와 낙양(洛陽)의 하택사에 있으면서, 육조의 종지를 크게 드날려서 신수의 종지가 쓰러지게 되었다. 어사(御史) 노혁(盧奕)의 무고(誣告)로 여러 해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에는 군비와 군수품을 많이 모집하여 나라에 바쳤다.
저술로는 <현종기(顯宗記)> 1권, <신회어록(神會語錄)> 3권, <하택미결(荷澤微決)> 1권이 있다. 그의 문하에 유능한 이가 많아서 한동안(150년 가량) 하택종이 큰 세력을 떨쳤다.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禪師) ; 『육조단경(六祖壇經)』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에서.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麼物 恁麼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회양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 숭산의 혜안 국사를 뵈니 혜안 국사는 조계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양 스님이 찾아뵙고 예배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어디에서 왔느냐?[甚處來]”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嵩山]”

(육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회양)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 “도리어 닦아 증득할 수 있느냐?[還可修證否]”
(회양)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 讖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讓豁然契會 遂執侍左右一十五載 日臻玄奥 後往南嶽 大闡禪宗 敕諡大慧禪師

(육조) “다만 오염되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護念)하는 바이라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너의 발 아래 한 망아지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예언을 하셨으니 네 마음속에 두고 모름지기 함부로 말하지 말라.

회양이 훤칠하게 깨우치고는 육조 스님을 15년 동안 모시면서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졌다. 뒷날 남악으로 가서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다. 왕이 대혜선사라 호를 내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송담 스님

 

[참고] 송담스님(No.306) - 19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지해종도(知解宗徒)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사람.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남악회양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 '망조(罔措)라가 지팔년(至八年)에사,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2. (가로판 p14)에 나오는 문구.
*망조(罔措) ; 망지소조(罔知所措 그물·근심할·없을 망/알 지/ 바·방법 소/둘·처리할·조처할 조). 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에서.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禪師)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麼物 恁麼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회양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 숭산의 혜안 국사를 뵈니 혜안 국사는 조계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양 스님이 찾아뵙고 예배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어디에서 왔느냐?[甚處來]”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嵩山]”

(육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회양)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 “도리어 닦아 증득할 수 있느냐?[還可修證否]”
(회양)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 讖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讓豁然契會 遂執侍左右一十五載 日臻玄奥 後往南嶽 大闡禪宗 敕諡大慧禪師

(육조) “다만 오염되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護念)하는 바이라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너의 발 아래 한 망아지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예언을 하셨으니 네 마음속에 두고 모름지기 함부로 말하지 말라. 회양이 훤칠하게 깨우치고는 육조 스님을 15년 동안 모시면서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졌다. 뒷날 남악으로 가서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다. 왕이 대혜선사라 호를 내렸다.

[참고 ❸]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종조본) (육조혜능선사 술 | 학담 해의 | 큰수레) p413에서.
필자가 출가 초기에 보던 단경 판본에는 혜능선사와 회양선사의 문답에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라고 묻자 회양이 '어쩔 줄 모르다 팔년이 지나서야[罔知所措 經八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발간된 단경 판본에는 이 구절이 모두 빠져 있다. 그러나 두 선사의 문답에 대해서는 『불조정전고금첩록(佛祖正傳古今捷錄)』과 『남악단전기(南嶽單傳記)』에 자세하게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불조정전고금첩록(佛祖正傳古今捷錄, 속장경 제146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조가 말했다.'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祖曰 甚麼物恁麼來]
회양이 말이 없다가 8년이 지나서 홀연히 깨닫고는 조사에게 아뢰었다.[師無語 遂經八載 忽然有省 乃白祖曰]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某甲有箇會處]
육조가 말했다. '어떠한가?'[祖曰 作麼生]
회양이 말했다. '한 물건과 같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師曰 說似一物卽不中]

남악단전기(南嶽單傳記, 속장경 제146권)에서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혜능이 말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能曰 什麼物恁麼來]
회양이 말이 없다가 8년이 지나서 홀연히 깨닫고 혜능선사에게 아뢰었다.[師無語 經八載 忽然悟 乃白能曰]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某甲有個會處]
'어떠한가'[能曰 作麼生]
회향선사가 말했다. '한 물건과 같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師曰 說似一物卽不中]

[참고 ❹] 『불조정전고금첩록(佛祖正傳古今捷錄)』 淸 果性集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笫 86冊 No.1595)

第一世南嶽懷讓禪師
高宗儀鳳三秊佛誕日生 感異瑞應於玄象 太史奏聞 帝敕親慰其家 十五得度受具 同坦然謁安國師 安令詣曹溪見六祖 祖問 甚處來 曰嵩山來 祖曰 甚麼物恁麼來 師無語 <遂經八載> 忽然有省 乃白祖曰 某甲有箇會處 祖曰 作麼生 師曰 說似一物卽不中 祖曰 還可修證否 師曰 修證卽不無 染汚卽不得 祖曰 祇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讖 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民 不宜速說佛法 師得法後 侍祖復十五秊 先天二秊 往衡嶽 居般若寺 開元中 得沙門道一付法 示寂於唐玄宗天寶三秊八月十一日 諡曰大慧 嗣法九人 頌

甚麼物也恁麼來  天運違和花不開
寒到一回徹骨處  春風拖綠上莓苔

[참고 ❺] 『남악단전기(南嶽單傳記)』 淸 弘儲表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笫 86冊 No.1596)

第三十四祖南嶽懷讓禪師
金州杜氏子 唐儀鳳二年四月八日 降生 有白氣上屬天 太史奏之高宗 高宗問 是何祥乎 對曰 國之法器 不染世榮 高宗敕金州太守韓 偕親往存慰 年十歲惟樂佛書 有玄靜三藏 告師父母曰 此子若出家 必獲上乘 廣度衆生 至垂拱三年 年十五 依荊州玉泉寺弘景律師 出家 通天二年 受戒 習毗尼藏 一日歎曰 夫出家者 當爲無爲法 天上人間 無有勝者 遇同學坦然 相與謁嵩山安 安啟發 乃直詣曹溪 禮能大師 能曰 何處來 師曰嵩山 能曰 什麼物恁麼來 師無語 <經八載> 忽然悟 乃白能曰 某甲有個會處 能曰 作麼生 師曰 說似一物卽不中 能曰 還可修證否 師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能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讖 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師旣得法 侍能復十五年 先天二年 往衡嶽 居般若寺 示衆曰 一切萬法 皆從心生 心無所生 法無能住 若達心地 所作無礙 非遇上根 宜愼辭哉 僧問 如鏡鑄 像像成後 光歸何處 師云 如大德未出家時 相狀一向什麼處去 僧云 成後爲什麼不鑑照 師曰 雖然不鑑照 謾他一點不得

表曰 十八女兒不繫裙 難得入地獄如箭 堯封潛曰 判官手裏筆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 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2분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19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2분26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19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36초)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어문 ; '딴', '다른', '엉뚱한'의 사투리.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경원시하다(敬遠視--) ;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하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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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관(觀)한다(관하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1분59초)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금싸래기 ; 금싸라기(①금의 잔부스러기. ②아주 드물고 귀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싸래기는 '싸라기(①부스러진 쌀알. ②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서 쌀알처럼 되어 떨어지는 눈)'의 사투리.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을 수행하는 집안.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사(事) ; ①구체성. 현상. 나타나는 현상. ②개별적 현상. 차별의 상(相)의 하나하나. 구체적, 차별적인 것. 이(理)의 반대. 현실.
*방맹이(방망이) ; 방(棒).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棒)은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횡행자재(橫行自在 가로 횡/갈 행/스스로 자/있을 재)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현밀(顯密 나타나다·분명함 현/은밀할·숨길 밀) ; ①뚜렷함과 은밀함. ②현교(顯敎)와 밀교(密敎). 현로(顯露)한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 드러나는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의 의미.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종사(宗師) ; 정법(正法)이나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여 대중의 존숭(尊崇)을 받는 스님.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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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오후보림(悟後保任), 장양성태(長養聖胎).

[참고] 보조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고인(古人)께서도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19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 항아리 속 자라.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의 비유.
[법문] 송담스님(No.245)—1984년(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회(84.08.11)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지,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보증(保證)을 서셨고, 다 맹세를 하셨습니다. 기어코 되는 것이라고 보증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항아리 속에 자라를 넣어 놓은 거와 같아서, 그 자라란 놈이 아무리 버르적거려 봤자, 밤에 가봐도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낮에 가 봐도 항아리 속에 들어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나를 찾는 것이여.
오히려 보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지언정,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게송)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學佛吟’에서.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163. (가로판 p169, 171)
*불상간(不相干) ;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로 관계가 없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파설(破說) ; 설파(說破).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Posted by 닥공닥정
용화선원2024. 3. 5. 07:23

§(229) (게송)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 / 전강스님께서 중생의 근기를 감안하셔서 용화선원에서 신수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심 / 일체 법요식이 모두 일대사를 위한 방편 / 부처님께서도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하심.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약 11분.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하야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만리나 되는 넓고 넓은 허공(虛空)에 비가 갰는데, 계속 작달비가 쏟아지다가 그 비가 활짝 갰어. 개니,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로구나.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온 천지(天地)를 환히 비추는구나.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하야, 그런데 뜬구름 한 점이 그 달을 가리워 가지고 천 사람의 눈을 그 달을 보지 못하게 했더라 말이여. 한 점에 뜬구름이 천 사람의 눈을 가리워 버려.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항아(姮娥)의 얼굴을 본 자가 드물구나.

이 '항아(姮娥)'는 옛날에 중국에 그 '예(羿)'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예'라고 한 사람이 서왕모(西王母)한테 빌어 가지고 불사약(不死藥)을 얻었는데, 불사약은 그 약을 먹으면 죽지 않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그러한 약을 얻었다 말이여.
그런데 그 예(羿)라고 한 사람에 부인, 항아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그 불사약을 훔쳐 가지고 저 달 속으로 도망을 쳐 버렸어. 그래서 그 달을 갖다가 '항아(姮娥)'라고 한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아무리 새카만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구름 위로 올라가서 보면 달은 휘황창 밝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름이 꽉 하늘에 끼어 있으면은 전혀 달도 보지 못하고 달빛도 보지 못하는데, 그 구름이 활짝 개 버리면 비가 개고 구름이 벗거지면 그 밝은 달이 온 세계를 낮과 같이 그렇게 환히 그렇게 비추는데.
구름 한 점이 떠와 가지고 딱 중간을 가로막아 버리면 모든 사람이 그 달을 볼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그 구름 한 점 때문에 사람들이 그 달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하는 게송(偈頌)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을 두고, 또는 일평생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재산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데, 한 덩어리 구름으로 인해서 달을 보지 못하듯이 한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한 생각을 미(迷)해 가지고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쓰고도 쓰고 남아서 남을 주고 또 주어도 무진장(無盡藏)으로 풍족한 그런 재산을 가지고서도 일생 동안을 가난뱅이 신세를 면(免)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불법(佛法)을 비유해서 보아도 맞는 말이고, 세속(世俗)에 빈부귀천(貧富貴賤)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다가 비유를 하더라도 맞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入齋) 날인데, 해마다 연례행사로 정월 초삼일에 입재(入齋)를 해 가지고 초아흐렛날 회향(廻向)을 합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도량(法寶道場)에서 무슨 신수기도를 하는가?'
신심(信心)이 철저한,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철저히 믿는 입장에서 보면, '신수기도를 한다. 뭐 입춘기도를 한다’ 하는 것이 다 우습게 보여지는 그러한 분도 있겠습니다마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인 것을 감안하셔서 정월에는 이렇게 일주일간 신수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백천방편(百千方便)이 개위차야(皆爲此也)여. 천 가지 만 가지 방편(方便)이 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다 그거거든.

정초(正初)에 신수기도를 한 것이나, 입춘에 입춘기도를 하는 것이나, 칠석에 칠석기도를 하고, 백중에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고, 동지에 팥죽차례를 올리고, 일체 법요식(法要式)이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그 근본을 살펴볼 것 같으면은 모두가 다 이 일대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자유자재로 통달하신 그러한 세존(世尊)께서도 방편(方便)을 쓰지 않고서는 중생을 교화(敎化)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수기도는 정초(正初)에 3일이나 또는 일주일, 이렇게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기도를 올림으로 해서 금년 일 년 동안 무장무애(無障無礙)하고 모든 소원을 뜻과 같이 이루기를 비는 그러한 기도입니다.(처음~11분)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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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불감근(佛鑑勤) 게송 참고.
*작달비 ; 장대비. 굵직하고 거세게 좍좍 쏟아지는 비.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무진장(無盡藏 없을 무/다할 진/감출·곳집 장) ; ①다함이 없는[無盡] 창고[藏]라는 뜻으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불교에서는 덕(德)이 광대하여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배우고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 ③무한량으로 많은 재물.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갑자년(甲子年) ; 1984년.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 내 마음 닦는 참선하는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계도사(三界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삼계(三界) : [범] trayo-dhā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세존(世尊) : [범어]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 로가나타(路迦那他) ·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지극정성(至極精誠)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 · 방해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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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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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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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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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24. 3. 1. 11:53

§(170)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무상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 /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는 ‘떨어진 꽃[落花]’ /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을 해야 /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삿된 것을 버릴려는 생각,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된다 /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도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참선(參禪) 공부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다 / 오조 홍인대사와 몽산스님의 극언 / 정말 여법하게 철두철미하게 정진을 해야.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0)—1982년(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5.음) (용170)

 

(1) 약 14분.

 

(2) 약 11분.


(1)------------------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요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허고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전부귀(生前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살아생전에 부귀(富貴), 재산이 많고, 높은 벼슬을 하고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하는 것은 풀 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풀 끝에 이슬이 맺히면 아침 태양빛에 그 이슬이 반짝거리기가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그 말이여. 반짝반짝반짝. 바람 한번 휙 불어 버리면 우시시 떨어져 버리면 간 곳이 없어.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이 그것이 내 몸에 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어디를 가나 거침이 없고 살기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좋은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느냐 하면 운수(運數)가 불길(不吉)하면 하루아침에 재산이 날라가기도 하고, 그 높은 벼슬도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그런 높은 벼슬을 하다가도 스스로 쇠고랑을 차기도 하고, 틀림없이 풀 끝에 반짝거리는 이슬방울과 조끔도 다름이 없다 이 말씀이여.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학덕이 높았다, 권리가 높았다, 명예가 있다, 또는 재산이 많았다,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 죽은 뒤에 그이의 자랑스러운 그런 이 명예도 백상화(陌上花)여. 그 언덕에 곱게 핀 한 떨기 꽃에 지내지 못하더라 그 말이여.
언덕바지에 그 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는데, 그 꽃이 본 사람마다 다 쳐다보고 다 아름답다 그러고, 모두가 좋아하고 칭찬을 하지만, 비 한번 오고 바람 한번 불어 버리면 우시시 다 져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여, 세상의 모든 인연—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 재산과 명예와 권리와 모든 인연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세상 뜬세상을 가벼이 여겨 버렸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 헌신짝 같이 버려 버렸다 그 말이여.
마치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듯이, 여기에 공부하러 오신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녹음 끊김)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느끼고, 비록 세속에 몸은 담아 있지만 그 마음은 스님네의 마음과 조끔도 차이가 없는 분들입니다.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여. 한 성품 한결같은—비록 이 세상에 모든 현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잠시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변질이 되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성 깨닫기 위해서 신심(信心)을—'그 영원성 있는 것을 기어코 나도 깨달라야겠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심이요. 그것을 위해서 분심(憤心)을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다 떨어진 꽃을 보는 거와 같애.
한참 곱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서도, 한참 지금 사람이 등왕(登王)을 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높은 벼슬을 가지고 권리를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거기에서 '떨어진 꽃[落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발심(發心)해서 도(道) 닦은 사람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이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가 '떨어진 꽃[落花]'을 보는 거와 같다 이 말씀이여.

아무리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다 꽂아 놓으면 불과 이삼 일이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낸다면 수행자에게는 그것도 또한 좋은 법문(法門)이 될 것이고,
좋은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그 업식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읽고,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최상승 학자(最上乘學者)라 하는 것입니다. 대승 학자(大乘學者)요, 최상승 학자라 하는 것입니다.
소승 학자(小乘學者)는 그 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피해서 피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대승 학자요 최상승 학자는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법(佛法)은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승심(小乘心)이라 하는 것은 집착한, 세속에 허망한 것을 집착한 사람에게 집착심을 띠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方便說)이지, 불교의 구경법(究竟法)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애, 화택(火宅) 속에서 노는데 팔려 가지고, 노는데 팔려 있는 어린애를 그 불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레, 그 장난감 수레를 가지고 어린애들을 그 불 속에서 빨리 달려나오게 하기 위하는 것이 바로 이 소승법(小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그 불이 타 들어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내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그 어린애를 불이 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는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가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가 끄는 큰 수레에다가 어린애를 실어 가지고 위험하지 아니한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라 하는 것이고.
편안한 데로 옮겨간 뒤에는 참나를 깨닫는 바른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25분2초~38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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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바로 이 최상승법을 믿고 그것을 직접 실천하려는, 실천하고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이 최상승 학자는 버리고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삿된 것을 버리는 생각, 그리고 참된 것을 구하는 생각—버릴려는 생각도 이것이 삿된 것이고,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도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입니다.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느냐?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좋은 것을 보아도 '이뭣고?' 악한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버리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여.
기쁜 것을 보면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데에 무슨 버리는 것이 있으며, 무슨 취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이 없어.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參禪) 공부다 이 말이여.

'공부가 안 된다. 영 공부가 진취가 없다'
많은 분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지마는, 사실은 그 고민한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이뭣고?'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밥이 질 때에도 '이뭣고?'
밥이 될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좋을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안 좋을 때에도 '이뭣고?'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잘될 때에도 '이뭣고?'
내 비위에 안 맞을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공부는 극일성지(克日成之)입니다. 극일성지. 머지않아서 득력(得力)을 하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극언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이 큰스님께서 그렇게 극언을 하신 까닭은 너무 조끔도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증을 하신 표현인 것입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우리 중생을 애끼신 뜻이 간절하시면 입에 담기조차도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로인 이런 극언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런한 말씀을 통해서 콧등이 찡하고 눈뚜껑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사 스님의 간절한 법문을 듣고 '한 번 해보자. 내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며 내가 이 도량에 와서 고행(苦行)을 하겠다고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면 내가 왜 그렇게 안 할 까닭이 무엇이냐?'

죽비(竹篦) 치면 형식적으로 앉아서 하고, 방선(放禪)하면 둘씩 셋씩 모여서 잡담하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고 한화잡담(閑話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정진을 한 것 같지마는, 실지 내용으로는 발심이 약하고 분심이 약하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정진을 하기 때문에 3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10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생긴 것은 눈치로 눈치만 늘어 가지고 무슨 법담을 하면 눈치로 '뭐라고 뭐라고...'
그런 것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치로 무슨 공안은 어떻고, 무슨 법담은 어떻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의 일신상의 생사(生死) 문제도 아무 교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에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기왕 출가를 하고, 기왕 이 참선을 하려면 정말 여법하게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할 것이다.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후생(後生)이라 하니까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 후가 아니라, 한 생각 뒤가 바로 후생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정말 여법하게 정진(精進)을 해서 나도 성취를 하고, 다른 사람도 성취를 하도록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38분49초~49분48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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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 ; 소식(蘇軾, 소동파)의 '陌上花(三首)' 참고.
*(게송)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 ;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45권(卍新纂大日本續藏經), 寶峰雲庵眞淨禪師 偈頌 「萬緣脫去輕浮世 一性常來看落花」
*운수(運數) ;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 하늘이 정한 운수)과 기수(氣數 저절로 오가고 한다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언덕바지 ; 언덕의 꼭대기. 또는 언덕의 가파르게 비탈진 곳.
*뜬세상[浮世 뜨다·떠다니다·덧없다 부/세상 세] ; 헛되고 덧없는 세상(世上).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成],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住], 쇠퇴하여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壞], 모든 것이 괴멸되어 허공만 있는 과정(상태)[空]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4~135. (가로판 p139~141)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이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살라 버린다」하시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하시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하시니,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할지어다.

註解(주해) 身有生老病死하고  界有*成住壞空하고  心有生住異滅하니  此無常苦火가 四面俱焚者也라
【謹白參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하라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는 이루어지고 지속되고 파괴되고 없어져 버리는 것이 있으며, 마음에는 일어나고 머물고 변해 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덧없는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부디 광음을 아껴 헛되이 보내지 말라.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原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등왕(登王 오르다·나가다 등/임금 왕) ; 등왕정(登王廷). 등왕조(登王朝). 조정(朝廷)에 나가다. 벼슬길에 오르다.
왕정(王廷) : 임금이 친히 다스리는 조정(朝廷).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무명업식(無明業識) ;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참모습을 직관하지 못하고 그릇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차별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나게 하는 근본번뇌,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작용[業識].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상주설법(常住說法) ; 우주 대자연의 운행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말.
흐르는 물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 모두 그대로가 부처님이 출세하신 모습이요, 쉴 사이 없이 하는 설법이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대승교(大乘敎) : [범어] Mahayana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한다. 큰 원(願)과 큰 뜻을 세워서 나를 희생하여 모든 중생을 즐겁고 편안하게 건져 주겠다는 보살심(菩薩心) 있는 이들을 위하여,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닦아 가도록 깊은 이치를 말씀하신 법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같은 것들이다.

이 법문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 온갖 물질과 일[森羅萬象]이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現象) 그대로 비어 없는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다 평등하여 열반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에나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
소승의 열반이 소극적이며 작고 옅은 것이라면 대승의 열반은 적극적이며 크고 참된 것이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제도한 뒤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소원이야말로 대승의 보살심인 것이다.
*소승교(小乘敎) : [범어] Hinayana 소승(小乘)이란 작은 수레란 뜻이다. 수레는 사람을 태워서 험한 곳을 지나 안전한 곳에 가게 하는 것인데, 작은 수레는 아이들이나 타게 되며, 옅은 물이나 건널 수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양의 수레」와 「사슴의 수레」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처음 인천교(人天敎)를 말씀하신 다음으로 옅고 낮은 이치의 길을 가르쳐, 생각을 끊고 마음을 비게 하여 열반(涅槃)의 고요한 즐거움을 얻도록 하셨다. 그 속에는 사제법(四諦法)을 깨치면 아라한(阿羅漢)이 되고, 십이 인연법(十二因緣法)을 깨치면 연각(綠覺)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승에도 두 가지 길이 있으므로 이승(二乘)이라고도 한다.
소승법을 말씀한 대표적 경전은 <아함경(阿含經)> <구사론(俱舍論)> <성실론(成實論)> <사분승계본(四分僧戒本)> <사분비구니계본(四分比丘尼戒本)> 등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법(究竟法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진리 법) ; 그 위에 더 없는 최고의 가르침. 궁극의 진리
*화택(火宅) 속에서 노는데 팔려 가지고, 노는데 팔려 있는 어린애를 그 불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레, 그 장난감 수레를 가지고 어린애들을 그 불 속에서 빨리 달려나오게 하기 위하는 것이 바로 이 소승법(小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그 불이 타 들어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내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그 어린애를 불이 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는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가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가 끄는 큰 수레에다가 어린애를 실어 가지고 위험하지 아니한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라 하는 것이고 ;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있는 말. 어떤 장자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 불이 났는데, 어린아이들은 철모르고 그 집안에 놀고만 있었다. 아무리 나오라고 불러도 듣지 않으므로, 양의 수레[羊車]와 사슴의 수레[鹿車] 같은 장난감으로 꾀어 대문 밖으로 이끌어 내고는, 온갖 보배를 실은 흰 황소의 큰 수레[白牛大車)] 태워 가지고 좋은 곳으로 이사를 시켰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번뇌의 불집 속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처음에는 이승(二乘 = 두가지 수레), 곧 소승(小乘 = 작은 수레) 법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대승(大乘 = 큰 수레) 법으로 가르쳐서 열반의 저쪽 언덕에 인도함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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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취(進趣 나아가다·오르다 진/달리다·향하다·재촉하다 취) ; (정진해) 나아가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p97-99. (가로판 p95~97)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7-99. (가로판 p95~97)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3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오조(五祖) 홍인(弘忍)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최상승론(最上乘論) ; 1권. 5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저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본래청정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분별이 없음을 알아 그 근본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이 수도(修道)의 요점이라고 설명한 저술. 내제(內題 본문 첫머리의 제목)는 범취성도오해진종수심요론(凡趣聖道悟解眞宗修心要論)이다.

14개조의 문답 방식으로 자심본래청정(自心本來淸淨) · 자심본래불생불멸(自心本來不生不滅) · 자심위본사(自心爲本師) · 자심승념피불(自心勝念彼佛) · 중생여불진체기동(衆生與佛眞體旣同) · 진여법성동일무이(眞如法性同一無二) · 수본진심시열반지근본(守本眞心是涅槃之根本) · 수본진심시입도지요문(守本眞心是入道之要門) · 수본진심시십이부경지종(守本眞心是十二部經之宗) · 수본진심시삼세제불지조(守本眞心是三世諸佛之祖) · 무기심(無記心) · 아소심(我所心) · 득도무여열반(得到無餘涅槃) 등을 논하고 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 
若有人依文行者卽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눈뚜껑 ; ‘눈꺼플’의 사투리.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한화잡담(閑話雜談) ; 심심풀이로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거나[閑話],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雜談].
*죽 떠먹은 자리 ; 죽(粥)은 곡식을 오래 끓여 알갱이가 무르게 되어 거의 액체화되어서, 한 숟갈 떠먹어도 금방 떠먹은 자리가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조금 덜어 내어도 흔적이 나지 아니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죽 떠먹은 자리’라고 말한다.
*맹서(盟誓 맹세 맹/맹세할 서) ; '맹세(盟誓 임무나 약속을 꼭 실행하거나 목표를 꼭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함. 또는 그 다짐)'의 원래 말.
*철두철미(徹頭徹尾 통하다·꿰뚫다 철/처음 두/통하다·꿰뚫다 철/꼬리·끝 미) ; 처음[頭]부터 끝[尾]까지 빈틈없고 철저(徹底)하게.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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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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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23) 무자(無字) 화두 / (게송)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 /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라.

**송담스님(No.423)—1990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용423)

 

약 19분.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미오이도단재아(迷悟二途端在我)하고  시비이자막수인(是非二字莫隨人)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은 수시용심진(須是用心眞)하라. 수행해 나가는 데는 모름지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진실하게 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마음이 만약 참되다면 도(道)는 친하기 쉬우니라.

아까 전강(田岡) 조실 스님 법문에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하셨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한다’
간택(揀擇), 간택은 이리저리 가리는 거여. 가리고 이것저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리는 것이 간택인데, “그 '간택을 혐의한다'고 한 말이 무서운 간택이라”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 도를 수행을 해 나가는데 그 마음 씀을 참되게 해라. 그 마음 씀이 참되면은 도는 친하기가 가깝다. 바로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마음 쓴다’고 하는 표현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화두를 들어 나갈 때에—그 화두(話頭), 화두는 다른 말로 하면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그 공안은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고 분석하고 더듬어 들어가고 이런 것이 제일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데에 주의할 것이 바로 이 따지는 것이거든.

공안을 분석하고 따져서 아무리 따지고 따져서 들어가 봤자, 그렇게 따져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천하 없는 그럴싸한 결론을 얻어서 수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라 그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어쨌든지 화두는 ‘이뭣고?’ 화두를 하던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던지, 조주의 무자(無字)를 하던지,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 되는 거여.
‘이뭣고?’ 다못 ‘이뭣고?’ 그 의심뿐이여.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이것이 옳게 하는가 그르게 하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끊어져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또 조주(趙州) 무자(無字),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뿐이지,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은가, 어째서 무라고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한 생각도 거기에는 붙어서는 안 돼.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런데 무자(無字) 화두는 자고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화두여. 논란이 많지마는 그 무자 화두에 옳게 참(參)해 가지고 참구를 바르게만 하면 그 무자 화두를 타파(打破)함으로써 많은 큰 깨달음을 얻은 도인(道人)들이 배출을 하는 것입니다.

몽산 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이라고 하는 법어도 설하시고 또 『몽산법어(蒙山法語)』에는 무자 화두가 많이 거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무자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 무자 화두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몽산 스님의 그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단제(單提)와 전제(全提)가 있는데, (단제는) 그냥 ‘무(無)~~~’ 거기는 전혀 의심을 붙이지 않고 ‘무(無)~~~’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저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까, 조주 스님이 ‘무(無)’ 그러셨단 말이여.
조주 스님이 ‘무(無)’라 그랬으니 ‘무(無)~~~’, 그냥 ‘무(無)~~~’ 하고,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거나 ‘무(無)~~~’ 항상 무자(無字)가 끊어지지 않도록. 앉아서도 ‘무(無)’, 서서도 '무(無)’, 밥 먹으면서도 ‘무(無)’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러지 않는 거여, 단제(單提)는. 그냥 ‘무(無)~~~’ 하고 무자(無字)만을 항상 생각하고, 무자(無字)만을 들어서 ‘무(無)~~~’ 해 가지고 그 ‘무(無)’를 관하는 거여. 이것이 단제인데.
전제(全提)는 조주의 뜻,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거여.

그러면 단제(單提)는 어떠한 이익이 있느냐 하면은 항상 ‘무(無)~~~’ 하는 무자에다가만 자꾸 정신집중을 하기 때문에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 없어. 그리고 비교적 무(無)에 정신집중을 하기가 무난해 그저, 초학자로서.
그런데 그 무자(無字)를 하는 데 생각을 한군데다 딱 집중하는 데에는 참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그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 하니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 말이여.

왜 혼침에 빠지기 쉽냐 하면은 정신집중이 잘된 반면에 생각이 조용한 데 이렇게 빠져 가지고 스르르 하니 잠이 들어버려. 계속 또 잠이 들다가 또 일어나서 또 ‘무(無)~~~’ 하면, 평생 동안 무(無)하면 정신집중은 비교적 잘되고,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무(無)’ 하나만을 생각하니까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일어나고 좋은데,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분이 없어. 그저 조용하니 조용한 데에만 집중만 해서 혹 오신통(五神通)까지도 날 수가 있어.
조용하고 고요하고 고요한 데에 집중을 하다 보면 저절로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주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혹 오신통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全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간절히 의심을 들다 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아.
그런데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이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성질이 급하고 그런 양성(陽性)을 가진,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말씀을 하셨나 하면은, 초학자(初學者)는 단제로써 공부를 지어 나가라. 다맛 ‘무(無)~~~’ 하고 단제로 공부를 해 나가면, 그걸 일구월심(日久月深)해 나가면 생각도 가라앉고 망상도 가라앉고, 좀 자리가 잡혀.

더군다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무(無)~~~’ 무(無)를 길게 이렇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 말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무~~~’ 이렇게 단제로 그렇게 일구월심 얼마 동안 정진을 해 나가면 순숙(純熟)해져서 망상도 다 가라앉아 버리고 이렇게 된 다음에 전제(全提)로 들어가라 이거여.

단제로 계속하다 보면 너무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고 좋으니까 계속해서 단제로만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망상도 가라앉고 그래서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무(無), 무(無)~~~’가 아니라 ‘무(無)? 어째서 무(無)?’ 그때 가서 ‘어째서?’에다가 의심(疑心)의 초점을 두어 가지고 의심으로 들어가라 이거거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까지 처음에는 다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무(無)’라고 한 소리까지 안 하고 ‘어째서?’ 그렇게만 해도 벌써 의단(疑團)이 딱 나중에는 드러나게 된다 그 말이여.
의단이 드러나면, ‘어째서?’ 소리도 안 해도 떠억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한 그 의단이 드러나게 된다면, 뭐 자꾸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런 소리를 자꾸 뜰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처음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해서 자꾸 의심이 끊어지면 또 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그렇게 길게 여러 글자를 안 하더라도 의심이 들리면, 다못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해 나가도 된다 그 말이여. 이 초학자가 단제로써 기초를 다져 가지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무(無)?’ ‘무(無)라니?’ 이렇게만 해도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면 ‘어째서?’ 하고 용을 쓰고 이마에다가 힘을 들여서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기초도 되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어째서?’ 하고 어거지로 힘을 쓰고 한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해 가지고 상기가 일어나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화두도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몽산법어집을 낸 그 몽산 스님의 무자 화두를 관하는 법에는 이렇게까지 참 자상하게 말씀을 해놓으셨고, 또 그렇게 해 나가되 그래도 정진하다 보면 이렇게 겨울에 문을 닫고 정진을 하면은 30분만 지나면은 사람 콧구멍에서 나오는 모다 탄산가스로 인해서 공기가 탁해지고 방안 온도가 높아지면 아무리 성성하게 잡드리를 해도 혼침에 들기가 쉽고, 또 요새처럼 여름에 날씨가 더웁고 그러면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꺼벅꺼벅 졸음이 온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는 전제(全提)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전제(全提)로 단속을 하고 또 그렇게 하다가도 워낙 산란심(散亂心)이 많으면 그때는 또 단제로 화두를 들어 보라 그 말이여. ‘무(無)’ 단제로 한 번 해 보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 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혼침 올 때는 전제(全提)로 들어 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에는 단제로 한번 대체를 해 보고, 자꾸 화두가 끊어져싸면 근제, ‘부지런할 근(勤)’ 자 근제로 단속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서 혼침과 산란과 간단(間斷)을 단절되는 것을 대처해 나가는, 스스로 그걸 잘 방편을 써서 단속을 해 나가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14분51초~33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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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二十九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전강대종사 법어 「언하대오(言下大悟)」》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혐의(嫌疑 싫어할 혐/의심할·괴이히 여길·두려워할·의심스러울 의) ; 꺼리고 싫어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몽산(蒙山) : 남송과 원(元)대의 임제종 양기파 스님, (1231 ~ 1298 또는 1308)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 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 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있어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을 말함.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은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에 있어서 본참공안에 대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 참구를 하지 않고, 사량분별 · 알음알이로 공부를 삼는 잘못된 병폐를 10가지로 정리하여 그 병폐를 알고 극복해 올바른 활구참선을 하기 위한 몽산 스님의 법문.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의심을 붙이지 않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관하는 것.
*전제(全提) ; 전(全) 부분이 들고 일어남(全分提起)의 뜻. 본래 그대로 나타냄. 전부를 그대로 나타내 보임.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 ·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육단심(肉團心) : [범어] Hrdaya. 흘리다야(紇利陀耶)는 번역해 육단심(肉團心)이며 약칭이 육심(肉心)이다. 4심(四心)의 하나. 사람 육신의 오장(五臟) 중의 심장(心臟)이다. 그 형태가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이루어졌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탄산가스(炭酸gas) ;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가스. 대기 중에 소량 존재하는 무색 무취의 기체로 공기보다 약 1.5배 무겁다. 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물질이 탈 때나 동물이 호흡할 때 생기며 식물의 광합성에 사용된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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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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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대중 생활2024. 2. 28. 09:14

§(170) 선방에 와서 결제 또는 가정 생활 속에서 결제 / 기본자세인 좌선을 충실히 해야 생활 속에서도 공부가 잘된다 / 대중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인욕해야 / 수도 생활은 배부르고 편안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에는 편의상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실정진(實精進)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와 자세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0)—1982(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5.음) (용170)

 

약 18분.

 


오늘은 임술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오늘 결제(結制)에 들어가면 윤달이 안 들었으면 음력 7월 보름날 해제를 하게 됩니다마는 4월에 윤달이 들어서 음력 6월 15일에 해제(解制)를 하기로 했습니다.
석 달 동안 방부(房付)를 들인 스님네와 방부를 들인 보살님네가 이 법보선원에서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역시 이 결제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이 선방에 와서 입방선(入放禪)을 안 하신다 하더라도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결제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이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다른 법회 때보단 수효가 많이 줄어진 것 같습니다마는 꼭 오실 분이 오셨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백일(百日) 동안 결제 대중만 알맹이로만 딱 뽑아서 이렇게 오신 걸로 생각을 합니다.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에는 편의상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실정진(實精進)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와 자세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기본자세이기는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은 항상 '기본자세에 충실한 것은 대단히 득력(得力)을 하는 데에 요긴(要緊)하다'고 고인(古人)네도 말씀을 하셨고 실지로도 경험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좌선 이외의 다니면서 하는 정진, 일하면서 하는 정진, 차를 타면서 하는 정진은 정진이 아니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기본자세를 충실히 익히는 것은 응용(應用)에 응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입니다.

좌선(坐禪)을 새벽으로 한 시간 두 시간, 가정에서도 이렇게 착실히 해 놓으시면 그날 하루 동안 살림하면서, 차를 타시면서, 시장에 가시면서 또는 대인잡화(對人雜話)하면서 그런 행동하는 속에서 공부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본자세를 충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이 꼭 절에 와서 결제(結制)만 해야만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스님이 되고 모든 사람이 절에 와서 결제를 할려고 한다면 용화사(龍華寺)와 같은 이런 절이 수십만 개가 생겨도 다 못 당해 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도 난리가 나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생활하면서 충실히 정진을 할 수 있게 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불법(佛法)이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그렇게 될 때에 이 불법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장엄(莊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머리를 깎고 오직 정진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스님네가 계셔야 하고 또 머리는 안 깎았지만 이렇게 절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결제를 하면서 알뜰히 정진을 하는 그러한 보살님도 많이 계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왕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하는 마당에는 대중(大衆)에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 규칙은 형식상으로 볼 때에 대중의 각자의 행동을 구속(拘束)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을 받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방부를 들이고 여기에 모이신 것입니다.
그러한 구속(拘束)이 싫다면 구태여 여기에 방부를 들일 필요가 없고 이 도량(道場)에 모이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방부를 들이고 여기 모여서 사는 데에는 그 구속을 스스로 원해서 오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부를 들이시면 대중의 규칙을 아무리 자기 개인적으로는 마땅치 않다 하더라도 대중을 위해서, 선방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크고 작은 모든 규칙을 신심(信心)으로 환희심으로 자발적으로 그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하고 솔선해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대중이 조용해지고 정말 공부하는 데에 아무 시비와 지장(支障)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각자가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 공부 잘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에 공부에도 제일 먼저 도움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앉아서 시비(是非)를 하고 물의(物議)를 일으키고, 이렇게 될 때에 대중 전체가 소란해지고 공연히 속이 상하고 물의가 일어나면 화두(話頭)도 간 곳이 없고, 속을 상하고 기분이 나빠서 정진도 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려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는 선방(禪房)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여기저기 선방이 중간에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선방이 깨지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결제 안거 도중에 몇 사람이 떠나게도 되고, 이렇게 해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도 안거 동안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하는 낙인(烙印)을 찍히게 되고, 한 번 낙인을 찍히게 되면 간 곳마다 '저 사람이 저이는 아무 데 선방에 지내다가 중간에 보따리 싸 짊어진 사람이다' 이리해서 낙인이 딱! 찍히게 되어서 다른 선방에 가도 방부를 받기를 꺼리게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좋으나 궂으나 한 번 방부를 들였으면 인욕(忍辱)을 하고 '내가 여기를 무슨 목적으로 여기를 왔는가? 무슨 편안하고 배부르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는가? 또는 무슨 명예나 권리를 위해서 여기를 왔는가?'
명예를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요, 무슨 이끗을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요, 배부르고 편안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면 무엇을 위해서 내가 여기를 왔어?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각자 가정에서 지내면 누가 뭐라고 그래. 고행(苦行)을 사서 하기 위해서 모두 여기에 모이신 것이다 그 말이여.
고행을 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고단하거나 할 때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예불(禮佛) 젓수고, 참회하고 축원하고 그리고 정진하고. 하루 이틀이라면 모르지만 석 달 동안을 계속해서 그러한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이 고행을 극복하고 정진해서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
만약에 이걸 전혀 할 생각 없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다가 이런 이 수도(修道) 생활을 시킨다고 하면 정말 이것은 감옥살이에 조끔도 뒤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가고 싶은 데 마음대로 갈 수가 있나, 먹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먹을 수가 있느냐,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가 있나, 하나에서 백까지 규칙에 순응해야 하고, 조끔만 어기면 대중에 지적을 받고 공사(公事)를 당하고 심할 때에는 추방, 쫓겨 축출까지 당하게 된다 그 말씀이여.

그런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자발적으로 할 때에는 그러한 구속과 고행이 조끔도 불편하지를 않고 조끔도 괴롭지 않고, 아무 불평불만이 없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너무 보람을 느끼고 너무 기쁘고 다행할 수가 없다 그 말이여.

문제는 당인(當人)이 얼마만큼 발심을 했으며, 얼마만큼 신심을 냈으며, 얼마만큼 바르게 정진을 하고 있는가?
발심을 션찮게 했고, 신심 돈발(頓發)이 약하고, 정진에 바른 법을 아지를 못하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고 아무렇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긁어서 부스럼을 내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고, 공부에 맛을 모르니까 오히려 좋은 일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아서 풍파를 일으켜서, 자기는 어피차 공부가 하기 싫고 공부 맛도 없고, 아무리 억지로 좀 하려고 해도 되지도 않고 그러니까 공연히 시비를 일으켜 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버리는 식으로 내가 공부 안 되니까 남까지 못하게 이리하고, 심한 경우에는 선방을 중간에 깨 가지고 대중을 파괴를 하는 그러한 경우도 있다 이 말씀이여.

죄(罪) 가운데에 무슨 죄가 제일 크냐 하면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 또 하나는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죄, 깨닫지 못하고 깨달랐다고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 증(證)했다고 하는 죄, 이러한 죄가 대역죄(大逆罪)라, 죄 가운데에는 최고의 대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 가운데에는 그러한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고, 오직 자발적으로 자기도 공부 잘하고 자기가 공부 잘함으로써 남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그런 모범적인 스님네와 그러한 훌륭한 신도 여러분만이 모이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구태여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지만, 이러한 말씀을 함으로써 각자 명심을 해서 더욱 정진을 잘하시기를 바래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7분50초~25분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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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해서’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대중(大衆)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mahā-samgha, mahā-sabhā. 음역하면 마하승가(摩訶僧伽)이다. 많은 사람의 모임이란 뜻으로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모임 또는 일반적으로 법문을 청하여 듣는 사부대중(四部大衆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을 일컫는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 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인욕(忍辱 참을 인/욕되다·수치스럽다 욕) : [산스크리트어] Kṣānti  욕(辱)되는—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것을 견디어 참는 것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
무슨 곤란이나 역경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그 고통과 곤란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기꺼이 받으며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다. 참음으로써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평안하게 하여 자기의 본래면목을 밝혀 해탈에 이른다.

역경(逆境)뿐만 아니라, 중생이 만나는 경계에는 순경(順境)이 있는데, 순경에 대해서도 삼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순경계 · 역경계를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 팔풍(八風)인데, 팔풍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여 중생의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므로 오직 참음으로써 이겨내야 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7-108. (가로판 p112)
若無忍行하면  萬行不成이니라

만약 참는 행이 없다면 만 가지 행이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註解) 行門이  雖無量이나  慈忍이  爲根源이니라  古德云,  忍心은  如幻夢이요 辱境은  若龜毛라 하시니라

수행하는 길이 한량없지만 자비와 인욕이 근본이 되느니라. 고덕이 이르되 「참는 마음이 꼭둑각시의 꿈이라면, 욕보는 현실은 거북의 털 같으리라」 하시니라.

[참고 ❷] 『대지도론(大智度論)』 (용수보살 造 | 구마라즙 漢譯 | 석법성 韓譯, 운주사 p338) 제6권, '大智度初品中意無礙釋論(초품 중에 의무애 설명)'
復次有二種忍 生忍法忍 生忍名衆生中忍 如恒河沙劫等 衆生種種加惡心不瞋恚 種種恭敬供養心不歡喜

또한 두 종류의 인(忍)이 있으니, 생인(生忍)과 법인(法忍)이다. 생인은 중생들 속에서 인욕하는 것을 말하니,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의 겁 동안 중생들이 여러 가지의 악을 가해도 마음은 성냄이 없고, 여러 가지의 공경과 공양을 해도 마음은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復次觀衆生無初 若有初則無因緣 若有因緣則無初若無初亦應無後 何以故初後相待故 若無初後中亦應無

또한 중생을 관해 보면 처음이 없나니, 만약 처음이 있다면 즉 인연이 없는 것이고, 만약 인연이 있다면 즉 처음이 없는 것이다. 만약 처음이 없다면 또한 응당 후(뒤)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과 후(뒤)가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과 후(뒤)가 없다면 중간도 또한 없어야 한다.

如是觀時不墮常斷二邊 用安隱道觀衆生不生邪見 是名生忍 甚深法中心無罣礙 是名法忍

이와 같이 관(觀)할 때 상(常) · 단(斷)의 두 극단에 빠지지 않고, 안온한 도를 사용하여 중생을 관(觀)하고 삿된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 이를 생인이라 한다. 심심법(甚深法 12인연법 혹은 진법)에서 마음은 걸림이 없나니, 이를 법인이라 한다.

*팔풍(八風) : 팔경(八境). 팔풍경계(八風境界). 팔풍은 세상에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바로서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므로 팔풍(八風)이라 함.
—이쇠(利衰 이로울 리/약할 쇠) : 내 뜻에 맞고(利) 내 뜻에 어기는 것(衰).
—예훼(譽毀 기릴 예/비방할 훼) : 나 안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것(譽), 나 안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것(毀).
—칭기(稱譏 일컬을 칭/나무랄 기) : 면전에서 찬미하는 것(稱),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譏).
—고락(苦樂 괴로울 고/즐거울 락) :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苦),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樂).
『몽산법어』 (용화선원 刊) p155 (가로판 p148)

*팔풍, 팔세법(八世法, attha lokadhamma) : 세간(世間, 중생의 세계) 특유의 여덟가지 어려움. 이득과 손실(利衰),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譽毀), 칭찬과 비난(稱譏), 고통과 행복(苦樂)<칠각지 p57, 고요한소리 刊> 팔풍경계를 요약하면 결국 역순경계(逆順境界).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 ·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禮拜)하는 의식.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를 이르던 말. 잡수다-->‘먹다’의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것. ③(사람이 제사를) 차려 올리다.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사(公事) ; 대중공사(大衆公事).
*대중공사(大衆公事) ; 사찰에서, 사찰 운영이나 공지 사항 또는 스님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문책 등이 있을 때, 사찰에 있는 모든 스님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일.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당인(當人 맡다·주관하다 당/사람 인) ;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그 사람.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깨닫지 못하고 깨달랐다고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 증(證)했다고 하는 죄’ ; 미득위득(未得謂得) 미증위증(未證謂證). 얻음[得]이 없는데 얻었다고 말하고, 증(證)한 것이 아닌데 증했다 말하는 것.
*대역죄(大逆罪 큰 대/거스를 역/죄 죄) ; 예전에, 국가와 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크게[大] 거스르는[逆] 일을 저지른 죄(罪). 왕권을 범하거나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는 큰 죄를 이르던 말. 불교에서는 오역죄(五逆罪)에 해당한다.
*오역죄(五逆罪) ; 다섯 가지 지극히 무거운 죄. 다섯 가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음.
①아버지를 죽임. ②어머니를 죽임. ③아라한을 죽임. ④승가의 화합을 깨뜨림. ⑤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함. 이 다섯 가지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지극히 악한 행위이므로 오무간업(五無間業)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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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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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4. 2. 27. 13:36

§(170) (게송)등한식득동풍면~ /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 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송담스님(No.170)—1982년(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5.음) (용170)

 

약 8분.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헌디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디  치인환작본래인(痴人喚作本來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 등한히 봄바람이 얼굴에 스쳐가는 것을 식득(識得)을 했어. 느꼈다 그 말이여. 무심히 앉았는데 봄바람이 솔솔 얼굴을 스쳐가.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일만 붉은 것과 천 가지 빨간 울긋불긋한 가지가지 꽃이 피는데 그것들이 모두가 다 이 봄이더라 그 말이지.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을, 비롯함이 없이 저 무량겁래로 오면서 마치 봄이 되면 천 가지, 만 가지 초목이 싹이 트고 잎이 피고 꽃이 피듯이 천사량(千思量) 만사상(萬思想)이—좋은 생각, 악한 생각, 좋지도 악하지도 않은 생각, 별별 생각이 햇볕에 문지 일어난 것이 보이듯이 그렇게 무명업식(無明業識)이 그렇게 동요, 생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거 그 생사(生死)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갖다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본래인(本來人), '참 자기'로 착각을 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고, 푸르고 붉고 노랗고 희고 울긋불긋하게 온갖 꽃이 피는데, 그것들을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봄이라 그런다 그 말이여. 그러면 빨간 꽃 하나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 할 수는 없어.
빨간 꽃,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리고 얼굴을 스쳐가는 시원한 봄바람,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합해서 봄이라고는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스쳐간 그 바람을 가지고 봄이라 할 수 없고, 노란 꽃 한 송이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말이여.

우리 중생에 천 가지 만 가지 희로애락, 탐진치 삼독, 팔만사천 번뇌 망상, 육도법계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법계(法界)라 그러고, 그걸 갖다가 실상(實相)이라 이러는데, 그렇다고 해서 번뇌 망상 하나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그것을 진여(眞如)라 말할 수 없고.
전체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멩이 하나를 가리켜서 법신(法身)이라 말할 수가 없어. 우리 일어나는 번뇌 망상 하나를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그런데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것들을 여의고 봄을 찾을 수도 없더라.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 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도 여기에 있고, 그르쳐 빠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7분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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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 ; 주희(朱熹 1130~1200)의 시(詩) ‘춘일(春日)’ 「勝日尋芳泗水濱 無邊光景一時新 等閑識得東風面 萬紫千紅總是春」
*(게송)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  치인환작본래인(痴人喚作本來人)’ ; 
[참고 ❶] 『벽암록(碧巖錄)』 제99칙 '본칙평창(本則評唱)'
長沙云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前認識神 無量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人 如今人 只認得箇昭昭靈靈 便瞠眼努目 弄精魂 有什麼交涉

장사경잠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법신으로)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식신은 무량겁으로부터 이어 온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이 단지 또렷또렷하고 신령한[昭昭靈靈] 그것을 진실이라 오인하여 눈을 치켜뜨고 그 헛것과 놀아나지만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참고 ❷] 『선문염송·염송설화 5』 (동국역경원刊) 제495칙 본명(本命)' p36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 게송 참고.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來認識神 無始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身

 


[참고 ❸] 송담스님(No.258)—1985년 신수기도 입재(85.02.22).(7분45초)
학도지인불식진(學道之人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로구나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대  치인환작본래신(癡人喚作本來身)이로구나

학도지인(學道之人)이 불식진(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된 것을, 참 이치를 아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삼어, 식신을 가지고 자기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그렇게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그말이여.

그 식신(識神),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눈으로 무얼 보면 청·황·적·백을 분별을 하고 크고 작은 것을 알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은 ‘저거 좋은 향내다’ ‘저것은 독한 가스 냄새다’ 그 향내를 분별하고,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면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생각으로—무슨 말을 들으면 ‘저것은 좋은 일이다, 저것은 나쁜 일이다’ ‘저것은 예쁘다 밉다’ 그런 것을 분별을 하고. 이러한 것이 모두 우리의 식신(識神)의 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 식신(識神)이라 하는 것은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생사본(生死本)이여. 저 비롯함이 없는 저 무량겁 이전으로부터서 오는 낳다 죽었다, 낳다 죽었다하는 생사윤회의 근본인데.
치인(癡人)은 환작본래신(喚作本來身)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이 생사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불러 가지고 본래신(本來身)이라 하더라 그말입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은 '바로 이 눈으로 무얼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줄 아는 이놈을 내놓고 어디가 마음이라 하는 것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 나의 면목이다'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깨달은 분상에 보면은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그놈을 여의고 본래신(本來身)이 없겠지마는,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바로 그놈이 바로 부처다. 그놈이 진여다. 그것이 바로 나의 참 면목이다. 이놈을 여의고 무엇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다’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 생각 낼 때에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과 거의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마는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일 수 있으나 또 한 사람은 영원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사(生死)의 근본을 그릇 인식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아, 이것이로구나’ 그 생각이, 살생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음행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하셨지만, 산목숨을 죽이면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행히 영겁 뒤에 사람의 몸을 받아 난다 하더라고 단명보(短命報)를 받거나, 평생에 병고(病苦)를 받는다 하셨습니다.

살생(殺生)이 그렇게 무서운 죄지만 식신(識神), 생사윤회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나의 본래의 부처라고 착각하는 그 죄는 영원한 생사(生死), 다시는 헤어나기 어려운—불조(佛祖)가 출세(出世)하셔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세하셔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러한 무서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생하는 죄는 참회(懺悔)를 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지마는, 생사의 근본인 알음알이를 ‘참나’의 면목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은 참회할 길이 없고 구제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착각에 빠진 사람은 남에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식신(識神)을 갖다가 자기의 본래신(本來身)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24분24초~32분8초)

*등한히(等閒- 같을 등/한가하다·등한하다 한)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무시겁래(無始劫來 없을 무/처음·시초 시/가장 긴 시간 겁/이래·그 이후로 래(내)) ; 시작(始作)을 알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 이래(以來).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劫과 刧는 동자(同字).
*무량겁래(無量劫來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이래·그 이후로 래(내))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 이래(以來). 劫과 刧는 동자(同字).
*문지 ; ‘먼지’의 사투리.
*무명업식(無明業識) ;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참모습을 직관하지 못하고 그릇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차별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나게 하는 근본번뇌,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작용[業識].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본래인(本來人) ; 본래의 사람. 본래면목 또는 본래의 자아. 본분인(本分人)과 같은 말.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두두물물(頭頭物物) ; ‘두(頭)‘는 사물이나 사람의 단위. ‘각각의 존재[頭頭]와 모든 사물[物物]’이라는 말. 곧 모든 것을 가리킨다.
*법계(法界) : [산스크리트어] dharmadhatu  dharma 곧 법은 온갖 유형 무형의 물질과 모든 일과 어떤 이치이거나를 다 들어 말하고  dhatu는 경계(境界) 또는 범위(範圍)란 말이다. 그러므로 온갖 것[萬有]을 총괄하여 하는 말이니, 우주의 전체와 진리의 전체, 법 성품(法性)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눈을 박다 ; ①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②생각의 초점(焦點)을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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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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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