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27)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단을 일으켜라 / 공안은 의리(義理), 분별심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반기이파(飯器已破) 공안 / 이 깨달음은 자기가 참되게 깨달아야 / 차라리 꽉 맥힌 바보로 일생을 마칠지언정 조그만한 경지를 가지고 만족함을 삼지 마라.
‘화두를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진짜 참선 / 단전호흡은 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고, 그 안에는 보통 호흡으로 하면서 화두를 들어야 / 공부가 잘되어 갈수록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오직 화두만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해 나가라.
**송담스님(세등선원No.27)—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80.04.17.음)(세등27)
(1) 약 11분.
(2) 약 7분.
(1)------------------
어떠한 공안(公案)을 큰스님네로부터 물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되지 못한 소리를 이를 까닭도 없는 것이고, 다른 고인(古人)들이 답(答)한 흉내를 낸다든지, 어떠한 행동으로써 옛날 스님네가 한 흉을 내서 보인다든지, 이러한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대죄(大罪)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금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의 분상(分上)으로서는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일으킬 따름인 것이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단을 일으킬 따름인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괴밥을,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한 공안(公案)에 대해서 일부러 의리(義理)로 따져서 설파(說破)를 해 주셨습니다.
따질 수 있는 것이고, 또 따져서 이해가 안 가는 데까지만 말씀을 하셨고, 설사 의리(義理)로 따져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설파를 해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해(害)를 입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해 주신 걸로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혹, 「쥐는 바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사니까 쥐는 바로 고양이 밥이다. 그런데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것은 '쥐가 쥐를 먹었다'는 말이다. 중생이 번뇌 망상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생인데, 그 중생인 '나'가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졌으니까, 바로 번뇌(煩惱)가 번뇌를 다 잡아먹고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사람과 경계(境界)가 다 몰록 공(空)한 것이고 산이 다하고 물이 다했다는 그런 경계다」
이렇게 그런 식으로, 혹 다른 공안을 접했을 때에도 그러한 식으로 공안을 분석해서 알아맞추려는 그러한 생각을 낸다면, 이것은 조실 스님의 참뜻을 바로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삼근(麻三斤)이다'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가 무엇이냐?'
'마삼근(麻三斤)이다' 이렇게 대답했으니,
'불법(佛法)은 이 우주법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진신체(眞身體)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돌맹이도 비로자나불이요, 산도 비로자나불이요, 흘러가는 물도 비로자나불이요, 거지도 비로자나불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삼[麻]도, 삼 뭉탱이도 그것도 비로자나불이다. 그러니 그 마삼근(麻三斤)이라는 게 그것이 아니냐'
이러한 식으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자기도 '한 소식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한 죄(罪)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떨어져 들어갈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공안은 절대로 그러한 의리(義理) · 분별심(分別心) · 이론(理論)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公案)은 그렇게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대답하니까,
'미지(未知)하니 갱도(更道)하라. 틀렸으니 다시 일러라'
다시 대답하기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옳다, 옳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셨던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한 데에 대해서 인가를 아니하고, '밥그릇은 이미 깨졌다'고 대답한 데에 인가를 했습니다.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의리로 따져볼 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는데 무슨 밥그릇이 깨졌나?' '밥그릇이 깨졌다'고 하는 대목에 가서는 우리는 아무리 분별심으로 따져 보려고 해도 거기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가 받지도 못할 것을 따져 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 따져서 공안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바른 공부에 노선(路線)을 버리고 그릇된 데에 빠져서 허매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차라리 아니헐지언정—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무슨 경(經)이나 읽고 그럴지언정, 참선(參禪)을 한다고 할진대에는 결단코 분별심으로, 의리(義理)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삿된 그릇된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서 조실 스님께서는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거듭거듭 강조를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내가 해야 하고, 오직 내 공부는 내 자신이 함으로써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는 것이니 만큼, 남 봄에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것을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도 무슨 공부를 해서 한소식 했다고 하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전연(全然) 자기 일신상(一身上)의 문제일 따름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만이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고, 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교화(敎化)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두철미(徹頭徹尾) 참되게 닦아서 참되게 깨닫지 않는 한은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아무리 학식(學識)이 높고, 아무리 언변(言辯)이 좋고, 아무리 많은 사람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남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선전을 하고 과대 선전을 해 가지고 널리 사람에게 알려서, 그래 가지고 어떠한 효과를 또는 이익을 얻어낼 수가 있지만, 이 깨달음만은 자기가 참되게 깨닫고, 참되게 남[生]이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남이 따르고 남이 알아주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내가 조그만한 것을, 조그만한 무슨 경계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고,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인증(認證) 받기를 바래고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위해서, 불법을 위해서 대단히 가련하고 불쌍한 신세(身世)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꽉 맥힌 바보와 같은 그러한 수행인(修行人)으로서 일생을 마칠지언정, 결정코 그러한 조그만한 경지를 가지고 만족함을 삼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거듭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20분42초~31분21초)
(2)------------------
<화두 의심>
그다음에는 '생각을 어떻게 가져 나가느냐? 화두(話頭)를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 문제인 것이여.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 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숨이 다 나갔으면 또 숨을 들어마시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두 시간 이내에는 이 단전호흡을 아니하는 것이 좋습니다. 밥에다 숭늉에다 국에다 가뜩 먹고서 배가 부른 데다가, 숨을 들어마시고 아랫배에다 숨을 밀어넣으면 위가 늘어나고 위하수 같은 그런 병(病)이 생기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되면, 밥이 다 삭아서 배가 꺼지니까 두 시간 뒤부터서 하고, 그렇다고 해서 두 시간 이내에는 낮잠이나 자고 공부를 아니해도 되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단전호흡만을 하지 말고 그냥 호흡을 보통 호흡(呼吸)으로, 그냥 예사 호흡으로 하면서 화두(話頭)는 역력(歷歷)히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할 것,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할 것,
셋째, 화두를 바르게 드는데, 호흡을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써억~ 들어마실 때에도 지금 '이 뭣고?~~' 한 끄터리가 지금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꼬리가 지금도 지금 계속 요렇게 나가고 있는 거여.
3초 머무를 때에 까지도 그 아까 들었던 그 화두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여운(餘韻)이 그때까지 오는 거여.
그래 가지고 새로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머무를 때까지 그 여운이 갔다가, 내쉴 때 또 '이 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그러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만 하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고,
나중에는 숨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또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세 번 할 때까지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여운'이 있으면은 새로 안 해도 괜찮어요.
아침에 들었던 화두(話頭)가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눈앞에 있으면은 자꾸 거기다가 '이 뭣고? 이 뭣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익숙해지면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때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때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 가운데에는 반드시 그런 경지를 맛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에까지, 저녁에 들었던 화두가 아침에 그 이튿날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몸이 가볍고 편안하고, 그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하고 그 경계는 뭐라고 이게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 편안하고 좋구나'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 누가 이런 때 누가 툭!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으면...'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천길만길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에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여.
공부가 잘되어 갈수록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오직 화두만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團束)해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되고, 가슴이 미어지고 시간이 지루하기를 5분이 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때가 있고 몸부림이 쳐질 때가 있지만, 조끔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를 말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 것입니다.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하지만, 가만히 일어서서 나가서 포행(布行)을 한 5분 내지 10분을 하고 정신이 깨끗해지면 또 자리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그 대중처소에서는 참 그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해서 그런 것도 지혜 있게 도반(道伴) 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 가는 것이 대중처소에서는 제일 조심(操心)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말 간절(懇切)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1시간16분31초~1시간22분48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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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흉 ; ‘흉내(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기는 짓)’의 사투리.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 반기이파(飯器已破) ;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참고 ❶] 『속지월록(續指月錄)』 8권.
六祖下二十四世
臨濟宗
婺州烏傷伏龍無明千巖元長禪師
蕭山人 族姓董 年十九 薙髮受具 會行丞相府飯僧 師隨眾入 中峰本和尙適在座 遙見師呼而問曰 汝日用若何 師曰 念佛 本曰 佛今何在 師擬議 本厲聲叱之 師作禮求示法要 本以狗子無佛性話授之 縛茅靈隱 脅不沾席者三年 一日聞雀聲有省 亟往見本 具陳悟由 本復叱之 師憤然歸 中夜忽鼠翻食貓器 墮地作聲 恍然開悟 卽往質本 本曰 趙州何故云無 師曰 鼠餐貓食 本曰 未也 師曰 飯器破矣 本曰 破後如何 師曰 築碎方甓 本乃微笑 囑曰 善自護持 時節若至 其理自彰
[참고 ❷] 『천암화상어록(千巖和尙語錄)』
附錄 「佛慧圓明廣照無邊普利大禪師塔銘」
本公亦在座遙見師即呼謂曰汝日用何如師曰唯念佛耳公曰佛今何在師方擬議公厲聲叱之師遂胡跪作禮求示法要公以狗子無佛性之語授之繼往縛茆靈隱山中雪庭傅公召師掌內記師下筆成章五采交粲見者嘆服俄棄歸法門隨順世緣殆將十載一旦忽喟然曰生平氣志充塞乾坤乃今作罋裏醯雞耶復造靈隱跏趺危坐脅不沾席者三年因往望亭聞鵲聲有省亟見本公具陳悟因公復斥之師憤然來歸夜將寂忽鼠翻食貓之器墮地有聲恍然開悟覺身躍起數丈如蟬蛻汙濁之中浮游玄間上天下地一時清朗被衣待旦復往質於公
公問曰趙州何故云無 師曰鼠食貓飯 公曰未也 師曰飯器破矣 公曰破後云何 曰築碎方甓 公乃微笑祝 師曰汝宜善自護持 棲遯巖穴時節若至 其理自彰
[참고 ❸] 송담스님(세등선원No.24) - 1979(기미)년 동안거결제 법문(79.10.17)에서.(4분18초)
〇‘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67분13초~71분33초)
*의리(義理) ; ①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 ②'의(義)'에는 실제가 아닌 인위적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리(理)'란 그 속에 관통하는 규칙 또는 논리를 말한다. 실상(實相)을 설명하기 위한 인위적인 규칙이라는 뜻. --『선문수경(禪文手鏡)』 (백파 긍선 | 신규탁 옮김)의 주(註)에서. p112.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71. (가로판 p179)
本分宗師의 全提此句는 如木人唱拍하며 紅爐點雪이요 亦如石火電光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니라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이요 只重先師不爲我說破라 하시니라
본분 종사가 이 구를 온전히 들어 보이심이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 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니 배우는 자가 참으로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니라.
[참고 ❷]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白雲景閑和尙 抄錄 | 원조각성 번역 · 주해 | 현음사) p533~534.
洞山良价禪師가 問雲嵓和尙호대 百年後에 忽有人이 問호대 還邈得師眞不아 하면 如何祗對닛고 嵓이 良久云只這是니라 師가 佇思어늘 嵓이 云承當者个事인댄 大須審細니라
동산 양개 선사가 운암 화상에게 묻기를 “백년 후에 문득 어떤 사람이 묻기를 ‘운암 스님의 모습을 그려서 얻을 수 있느냐?’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운암 화상이 양구하고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이것이니라” 양개 화상이 머뭇거려서 생각하거늘 운암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일을 알아차릴진댄 크게 모름지기 자세하게 알아야 될 것이니라”
師가 猶涉疑러니 後에 因過水覩影하고 大悟前旨하야 乃有偈曰 切忌從他覓이니 迢迢與我踈라 我今獨自往에 處處得逢渠라 渠今正是我요 我今不是渠라 應須恁麽會하야사 方得契如如니라
양개 화상이 오히려 의심이 있었더니 그 후에 물을 건너다가 그림자를 보고 앞에서 운암 스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크게 깨달아서 이에 게송을 하셨다.
간절히 딴데서 찾지 말 것이니 그러면 멀고 멀어서 나와 소원하네. 내가 지금 혼자 스스로 감에 곳곳마다 저를 만나게 된다. 저것이 지금 바로 나이고 나는 지금 바로 저것 아니네. 모름지기 이렇게 알아야만 비로소 여여한 도리에 계합하리라.
[참고 ❸]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 · 拈頌說話)』 제17권 (혜심 · 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ㅣ 동국역경원) 제682칙. ‘지시(指示)‘ p222~223.
洞山이 爲雲嵓諱旦하야 設齋陞座어늘 時有僧이 問하되 和尙이 在雲嵓處하야 得何指示닛고한대 師云하되 雖在彼中이나 不蒙指示로다하니 進云하되 旣不蒙指示인댄 何故爲佗設齋닛고한대 師云하되 爭敢違背佗리요하다 進云하되 和尙이 旣發足南泉이어늘 何故로 爲雲嵓設齋닛고한대 師云하되 我不重先師道德이며 亦不爲佛法이요 只重佗當時에 不爲我說破로다
동산이 운암의 기일(忌日)에 공양을 마련하고 법상(法床)에 올랐는데 어떤 스님이 나와서 말하였다.
“화상께서 운암의 처소에 계실 때 어떤 지시를 받았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비록 거기에 있기는 했었지만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다면 어째서 그를 위해 재를 마련하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그를 배반할 수는 없지 않는가?”
다시 물었다. “ 화상은 이미 남전(南泉)에게서 발심했는데 어째서 운암의 재를 차렸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선사(先師)의 도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며,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때 나에게 설파(說破)해 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니라”
[참고 ❹]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80-181) (가로판 p171~172)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참고 ❺]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에서.
학자(學者)에게, 참선(參禪)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일어나기가 틀린 것입니다.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57분59초~59분25초)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 하였다.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 ; 불법(佛法)의 적적(的的)한 대의(大意). 불법의 분명하고도 분명한 뜻.
*적적(的的 과녁·참·진실·밝다·적실하다·분명하다 적) ; ①밝고 고운 모양. ②확실한 모양.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
*청정법신(淸淨法身) ;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 ; 전신(全身)은 '본질 그대로' '여래진신(如來眞身)'의 뜻으로 ‘비로자나 전신체’는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 스님 법문 275번 참고)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한 죄(罪)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떨어져 들어갈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 무간업(無間業)을 부르지 않고자 할진댄,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 – 713) 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 나오는 구절.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가로판 P149~151)
〇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〇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〇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이빨이 들어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 설명(주장)이 되어질 수 없다. 설명(주장)하려고 하나 되어지질 않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남[生]이 없는’ ; 무생(無生).
*무생(無生) ; ①생멸(生滅)을 벗어난 절대의 진리. 생멸(生滅)이 없는 도리. 곧 불생불멸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알고 거기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함. 무생법인(無生法忍). ②아라한(阿羅漢) 또는 열반(涅槃)의 번역어. 번뇌를 없앤 경지를 말함.
*무생법인(無生法忍) ; 일체법이 공하여 그 자체 고유한 성질을 갖지 않고, 생멸변화를 넘어서 있음을 깨달아 그 진리에 편안하게 머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무생인(無生忍) · 무생인법(無生忍法) · 수습무생인(修習無生忍) 등이라고도 한다. 인(忍)은 ‘참다, 견디어 내다’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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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역력히(歷歷- 분명하다·뚜렷하다 력·역) ; 분명하고 또렷하게.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아, 누가 이런 때 누가 툭!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으면...'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천길만길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에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여 ; 대오선(待悟禪)이라고 해서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은 화두를 참구하는 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 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19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공부가 잘되어 갈수록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 환희마(歡喜魔).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工夫가 未得入手라도 莫生煩惱니 恐煩惱魔가 入心이니라. 若覺省力이라도 不可生歡喜니 恐歡喜魔가 入心이니라.
공부가 순일하지 못하더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지니, 번뇌마(煩惱魔)가 마음에 들어올까 두려우니라. 만약 힘덞을 느낄지라도 환희심을 내지 말지니, 환희마(歡喜魔)가 마음에 들어올까 두려우니라.
*마(魔) :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 · 업 · 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공부가 좀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되고, 가슴이 미어지고 시간이 지루하기를 5분이 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때가 있고 몸부림이 쳐질 때가 있지만, 조끔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를 말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 것입니다 ;
[참고 ❶] 송담스님(No.232)—1984년 동안거해제 법어(84.02.16)(6분27초)
공부는 ‘자기가 하는 것’이고 또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을 위하고 다른 사람이 해줄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공부가 잘되고 안되고를 따질 것이 없이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리게 되면 그럴수록에 더 알뜰하게 잘 단속을 해 나가야 할 것이고, 영 화두가 산만해서 집중력이 없이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영 정진이 잡히지를 않는다 할지라도 그럴수록에 지혜롭게 그 고비를 단속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가 순일해서 잘 들릴 때도 대단히 그러한 경계를 잘 유지해 나가도록 주의를 해 나가야 되겠지만,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먹먹하고 영 애를 먹고 그럴 때에, 정말 그럴 때일수록 그 고비를 지혜롭게 잘 넘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대혜 스님의 『서장(書狀)』에 보면, 그 공부가 잘 안되고 지루하고 답답하고 뒤틀리고 먹먹하고, 영 애를 먹을 때 그때가 가장 중요한 때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중요하다고 하냐 하면, 그게 공부가 잘 못되어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그동안 공부해 가지고 한 고비 넘어갈려고 할 때에 그러한 경계를 만나게 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렇게 되면은, 그런 경계를 만나면 “하! 내가 이 업장(業障)이 두터워 가지고 영 공부가 안 되고, 이거.... ” 그래 가지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고 한탄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인제 내가 이 고비를 잘 넘김으로써 공부가 한 계단 더 높이 올라간다. 그러한 중요할 때를 만났다’ 이렇게 생각을 함직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계를 만나면 절대로 짜증을 낼 일이 아니라 지혜롭게 그것을 대처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그것을 대처를 하는 것이 되느냐?
첫째, 짜증을 내지를 말 것이고, 둘째는 그러헐 때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해서 그 고비를 넘기고.
또 혼침이 와 가지고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가지고 일직선으로 한 50미터나 30미터쯤 이렇게 직선으로 적당한 장소를 딱 정해 가지고 꼭 그 직선상으로만 왔다갔다하면서, 한 10분 이렇게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에 화두를 들도록.
그러면 혼침도 없어지고 또 가슴이 그렇게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그런 것도 다 없어지고 그래서 상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에 와서 정진을 하고, 또 정진을 하되 한 얼마 동안 괜찮으면 괜찮을 때까지 고대로 쪽 정진을 하고.
또 답답하고 못 견디면 또 단전호흡을 해서 얼마 동안 그놈을 단속을 해서 고비를 넘기다가, 그래도 영 답답하고 골이 아프고 먹먹하고 지루하고 해서 잘 안되면, 또 가만히 또 나와서 포행을 하고. 이렇게 해서 그 고비를 넘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하다 보면 다시 깨끗하게 성성적적하게 화두가 현전(現前)하고, 순일하게 정진이 되어 가는데, 그전에 보단 훨씬 공부가 수월하게, 화두를 들려고 애를 쓰지 아니해도 화두가 일상생활 속에서 순일하게 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한한 공력을 들이고, 무던히 끈기 있게 이 고비를 넘기기를 수없이 이렇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30분11초~36분37초)
[참고 ❷]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5분41초)
이 참선(參禪)해 나가는 데 있어서 주의할 것은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정말 재미가 없어. 재미가 없어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도저히 그 한 5분 10분이 한 시간보다도 더 지루하게 느껴지고, 어디 뭐 벼람박이나 기둥에다가 이마빡을 갖다가 한번 그냥 피가 나오도록 받아버리고 싶은 그렇게 참 답답하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가 올 때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아라’거든.
사실은 그러한 경지가 온 것이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그러한 것이 아니고, 공부가 한 걸음 더 나아갈려고 할 때에 그러한 단계에 이르르면 그 직전에 그렇게 공부가 그러한 답답하고 잘 안되게 느껴지는 그런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모르는 분은 ‘아! 이거 내가 마장(魔障)이 들어서 그런가?’ ‘공부를 잘못해서 이런가?’ 그래 가지고 거기서 번뇌심을 내고, 그리고 퇴보심(退步心)을 내고, ‘이거 공부를 그만 둘까?’ ‘이러다가 병이 나면 어쩌나?’ ‘이거 이 공부가 잘 안될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냐?’해 가지고 갈팡질팡을 하게 되는데, 사실은 바로 그때가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쳐야 할 때다. 왜 그러냐?
공부가 한 걸음 진보할려고 할 때에, 한 계단 올라서려고 할 때에 그러한 경계(境界)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떠한 사업, 어떠한 학문, 어떠한 서도(書道)나 그림 또는 음악, 어떠한 공부를 하더라도 반드시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참 잘된다’고 느껴지고, ‘참 이렇게만 되어간다면은 내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겠다!’ 하고 참 그렇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영판 공부가 암만해도 되지를 않고, 전혀 진전하는 기미가 없고, 그래 가지고 ‘공부, 이것 차라리 그만두어 버릴까?’ 하는 그런 생각까지도 나는데.
그러한 때에 중단하지 아니하고, 물러서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참을성 있게 지혜롭게 차근차근 공부를 해 나가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를 넘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계단 진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고비를 넘기지를 못하고 번뇌심을 내고 퇴보심을 내고 중단해 버리고 이러면, 지지리 산봉우리 가까이까지 갔다가 그냥 상봉(上峯)에까지 올라가지 아니하고 거기서 그냥 되돌아 내려온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애기를 길러 본 경험이 있으신 어머니들은 아시겠지만 잘 자라다가 설사한다든지, 머리가 열이 있다든지, 밥을 잘 못 먹는다든지 이러한 병치레를 하게 된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병치레를 하고 나서는 안 하던 재롱을 떨게 되고 귀여움을 부리게 되고, 그러고 말도 전혀 한마디도 못한 애기가 병치레를 하고 난 다음에는 그냥 말도 한마디씩 하게 되고, 또 그 병치레하고 나면 살은 조금 빠진 듯하지만 한 5센치 이상이 푹 자란 것처럼 자라 버리고, 백만사(百萬事)가 다 그런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갈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런 경우가 있는 것이니까, 이 참선할 때에도 역시 그런 것이여. 그럴 때를 잘 극복하고 지혜롭게 공부를 해 나가면, 그전에 보다도 훨씬 공부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니 그런 것을 다 주의를 하시고.(16분21초~22분)
[참고 ❸] 송담스님(No.524)—19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3분35초)
‘왜 이렇게 참선(參禪)이 안되는지 답답하다. 도대체 될 건지 안될 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공부가 잘될까?’
이건 정진하려고 애쓴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서 모든 것이 잘되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잘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안된다'고 답답하고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운—공연히 부처님을 원망하고, 모다 조주 스님을 원망하고, 조사(祖師)를 원망하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원망스럽고, 이런 생각하다 보면 한이 없습니다.
안되는 것은 당연해.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업(業)을 지어서 업을 받고 또 업을 지어서 업을 받으면서, 물 흘러가듯이 이렇게 생사윤회(生死輪迴)의 흐름 속에 살아오다가 ‘이뭣고?’를 챙긴 것은 그 흐름을 거스르는 거여. 거슬러 가지고 그 뿌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거든 이게. 그러니까 힘이 들 수 밖에 없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업(業)으로 인해서 새로운 과보를 받아서 또 그렇게 살아가면, 울다가 웃다가, 좋아하다가 괴로워하다가 그렇게 그냥 살아가면 별일이 없어. 지옥에 가면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천당에 가면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지은 업대로 받으면 그냥 별일이 아닌데.
이것을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해서 영원히 생사윤회를 해 가지고서는 끝이 없으니까 이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가지고 근본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로 돌아가려 하니까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여.
힘이 들고 어렵지마는, 이것을 해야만 영원한 생사윤회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믿고 조사의 법문을 믿고서 우리가 참선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화두(話頭)를 들고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계속해서 하다 보면 결국은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망상(妄想)을 물리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순일무잡하게 될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것은 본인이 그런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중단하지 않고 게으름부리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거거든.
'앞으로 잘될 거냐 안될 거냐? 내가 견성을 할 거냐 못할 거냐? 확철대오를 하냐 안 하냐?' 그런 것을 지금 따지고 앉았을 시간이 없다 그 말이여.(19분39초~23분12초)
*대중처소(大衆處所) ; 많은 스님, 또는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절(도량)을 말한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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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