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의심-화두드는 법)'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5.12.23 •§•(277) (게송)취적기우자~ / 해 갈수록에 알 수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2. 2015.08.12 §(256) 의심관(疑心觀) / 일관(日觀)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
  3. 2015.05.07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4. 2015.04.27 §(세등24) 화두드는 법 / 최상승법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생사(生死) / 불보살,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다 / 중생심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
  5. 2015.03.30 §(118) 조심(調心), 마음을 고르는 법—화두 참구 / 의심(疑心)이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 / 의리선(義理禪), 야호선(野狐禪), 사량복탁(思量卜度)은 안됨.
  6. 2015.03.07 §(세등10)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화두의 핵심 / 화두를 들면 호흡이 되고, 호흡을 하면 화두가 들리게, 화두와 호흡이 한목 나아가도록.
  7. 2015.03.01 § 화두 드는 법.
  8. 2014.10.11 §(242) (게송)방거화쟁발~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이모 코 / ‘이것이 무엇인고?’의 『이것』은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는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
  9. 2014.09.26 §(013)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 참선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
  10. 2014.07.21 §(377) 공부는 거문고줄 고르듯이 해라 / 화두드는 법 / 염불(念佛)과 예배(禮拜) / (게송)불설일체법~.

 

 

•§•(277) (게송)취적기우자~ / 갈수록에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이뭣고?’ 그저 그전에는 들리다가 인자 하도 오래오래하니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니까 화두가 인자이뭣고?’ 자꾸 들리기는 허지. 들리기는 허지마는 들어갈수록에 모른다. ! 일체 번뇌 망념이 거기 와서는 붙도 못하지. 아는 것도 붙지. 일체 번뇌 망념이 어디 가서 붙어?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데, ‘ 들어갈수록에 모른다한다 그말이여. 말은 옳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없으면 없는 가지고—‘이뭣고?’하면이뭣고?’ 없으니까 그놈 가지고, 그저 찾고 찾고, ‘찾으면 죽는다하지마는 그와 그와 달러. 벌써 무엇을 물으면은 할라고 찾는 것과 없어서나의 진면목이, 내가 나를 참으로 몰랐으니 진면목 찾는 거와 달러. 없이이뭣고?’ 찾는다.

 

**전강선사(No.277)—달마사행론 제법부동적정문, 조실스님 출가인연(임자 72.11.04.새벽) (전277)

 

약 15분.

 

올라왔소. 용맹정진한 것을 보니 ! 내가 발심이 되었어. 발심이 수가 없어. 발심이 되어서 그래 법문할 마음이 나서 올라왔소마는 그저 그렇소. , 당초에 .. 

 

취적기우자(吹笛騎牛者)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원연우리(靑原煙雨裏)  비진기쇠의(費盡幾衰衣)

나무~아미타불~

 

소를 타고 젓대를 불면서 동서(東西) 자재(自在)하는구나.

! 그놈 보배 소를 찾아 가지고는 , 굴레 끼워서 고삐 달아서 길들여서 탔으니, 이놈이 가자 오자 해도 임자재(任自在). 마음대로 동서에 이렇게 임자재 하는구나.

 

청원연우리(靑原煙雨裏)에서, 청원(靑原) 푸른 언덕 연기 안개 속에서,

비진기쇠의(費盡幾衰衣). 얼마나 옷을 찢기며, 가시에 몸을 찔리며, 틈새기를 헤매 댕기며 무진 고생을 얼마나 했느냐?

 

비유인데, 우리 선객(禪客)들이 지금 화두 하는 법이 그려.

처음에 들어와서 화두를 하니, 그놈의 화두가 이뭣고?’하니 대체 뭐냔 말이여? ‘이뭣고?’

, ‘이뭣고?’ 분명히이뭣고?’라고 하지마는 뭐여? 깜깜하니 도무지 , 깜깜해도 분수가 있지.

 

이뭣고?’ 뭐여? 당최.

, 봐도 그렇고, 봐도 그렇고, ‘ 들어갈수록 모른다하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그러면 무엇을 것인가?

 

들어갈수록 아는 것이 나오면은 외도(外道)? 외도 참선이고, 무슨 점쟁이 참선이고, 무슨 사주쟁이처럼 아는 참선이고, 타심통 외도 참선이고, 그런 것이게? ! 분명히 그런 법문이 있지 않어?

 

그런데 아는 것을 바래 가지고 소리인가? 알어?

들어가 봐도 들어갈수록에 점점점점 이뭣고?’. ‘이뭣고?’ 점점 자주 찾아지고, 그저 하는 것이이뭣고?’뿐이기 때문에 홑으로 홑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첩첩(疊疊)으로 이놈이 되지.

 

이뭣고?’ 그저 그전에는 들리다가 인자 하도 오래오래하니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니까 화두가 인자이뭣고?’ 자꾸 들리기는 허지. 들리기는 허지마는 들어갈수록에 모른다.

 

! 일체 번뇌 망념이 거기 와서는 붙도 못하지. 아는 것도 붙지. 일체 번뇌 망념이 어디 가서 붙어?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데, ‘ 들어갈수록에 모른다한다 그말이여.

말은 옳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들어갈수록 수가 없으니깐 재미가 없어 무덤덤혀. ‘재미없어 아이고! 못하겠다, ‘ 되아 못하겠다.

에이! 참선 해봤던들 되도 하고 하니까, ‘퇴타(退墮) 수밖에 없다, 퇴타를 한다 그말이여.

 

불쌍한 인간이지.

세상에도, 갈수록에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 도무지 일점 티끌만큼도 거기에 무엇이 붙지 못한 것이 보배인지를 모르고, 이런 놈의 소리를 하고 앉았구나.

 

무엇이 붙어? 들어갈수록에 지해(知解) 상량(商量) 도무지 붙지 못혀.

그러기 때문에 고인들이 법을 물을 , “, 주장자를 여의고 일러라그런다 그말이여. 이거 아니여. 선지식 스님네가 법상에 올라가면 하는 말이지.

 

주장자(拄杖子) 명상(名相) 여의고 일러라, 이름과 () 여의고 일르는 것이 그것이 참선법인데, 이름 버리고, 이놈 모냥 여의어 버리고, 어떻게 이를까?

 

그것 () 붙이지 말고, 이름 명상(名相) 붙이지 말고 일러 보아라

뭐라고 이를까? 입만 벌리면 이름이고, ()이고 나오는데?

 

아무것도,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그래도, 죽은 ()이라 못써. “이름도 없는 것이다그래도 못쓴다 그말이여.

이름이니 ()이니 모냥이니 일체를 여의고 한번 일러 봐라그래 묻거든?

 

이치는 걸림이 없는 것이다 말이여. 이치가 걸린 법이 없어. () 걸린 법이 어디 있나?

무슨 모냥이 있어야 걸리고, 무슨 얼거리가 뭐가 있나? 무엇이 있어서 걸려?

! 그런 , 대답하기라는 것이 천하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 주장자가 본래 모냥이 없거니 무엇을 이르란 말이요?” 물어 봐도 것이고, 그렇지 않아?

주장자를 여의고 무슨 도리를 이르란 말이요?” 그래도 것이고. 별소리 있지 않어? 이치 막힐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물으면 걸리지. 찾느라고 죽어.

뭐라고 일러야 할까?’ 무슨 뭐라고 이를라고 찾느냐 말이여, ?

 

없으면 없는 가지고—‘이뭣고?’하면이뭣고?’ 없으니까 그놈 가지고, 그저 찾고 찾고. ‘찾으면 죽는다하지마는 그와 그와 달러.

 

벌써 무엇을 물으면은 할라고 찾는 것과 없어서나의 진면목이, 내가 나를 참으로 몰랐으니 진면목 찾는 거와 달러. 없이이뭣고?’ 찾는다.

 

세상에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목적이 무엇인가? 살아서 무엇 것인가? 그거. 하루 살면 하며, 살면 무엇 것인가?

! 살아보지, 무엇 것이냐?’ 싱겁기는 짝도 없지. 그날 살아봐도 그날 그것, 내나 맛이여. 살아 뭣해?

 

오직이뭣고?’ 하나를 하기 위해서 살아야겠다 그말이여. 결코 살아야 하겠다 말이여. ‘이뭣고?’

오직이뭣고?’ 학자가이뭣고?’ 찾아서 망상 속에서이뭣고?’ 어떻게 놨던지 숭칙한 망상(妄想) 제대로 뿌리가 뽑혀 버리고 아무것도 없구나. 아무것도 없어. ‘이뭣고?’ 하나뿐이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되다 보니 얼마나 청산 연우리(煙雨裏)에서 청산, 비오고 가시밭 어그러진 놈의 산속에서 그놈의 보배를, 소를 찾느라고 고행(苦行) 어쨌는가?

우리 학자들 지금 닦는 고행이 여차(如此)하다 그말이여.

 

이놈을 그래, 그러나 저러나 이놈을 하세월(何歲月)이지. 어디 무슨 하세월이지, 아무 때라도 바로 찾아 깨달을 때까장은 내가 언제 마음 놓을 있나? 일순간(一瞬間)인들 마음을 ?

 

그래 가지고서는 기운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쓰고 댕기는 삿갓도 찢기고, 옷도 찢기고, 그저 몸뚱이도 긁히고, 그저 가지고는 기필(期必) 찾아서, 이놈을 길을 들여 찾아놨구나. 보배지보배여.

 

무슨 놈의 생사(生死) 있나? 중생이라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중생이여. 아무것도 모르는 중생이여. 죄만 받는 중생이여.

죄도 무슨 죄냐? 생사죄(生死罪) 받는데, 나만 나와 가지고 죄지어 가지고 죽어 가지고 죄받고 밤낮 생사죄 짓는 , 죄지어 죄받는 중생이여. 이건 중생이란 역사도 없이 그대로 있는 놈이 중생이네.

 

, 이놈을 ! 깨달라 장부(丈夫) 되는 아닌가? 보우(寶牛) 깨달라서 탔으니 임자재(任自在). 자재하는 행이다.

 

항상 듣는 법문이지마는 법문이 어디 내놓고 있나? 듣는 법문이 어디 있어?

듣는 법문, 금강경, 밤낮 금강경, 밤낮 화엄경, 그저 법화경, 그저 원각경, 그저 무슨 , 경이지, 누가 들은 어디 있나?

 

올라왔으니깐 조금 여기 인자 , 하나 일러 있고. 그러고는 다시 시작할 테여.(처음~1519)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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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취적기우자~’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제목암(題牧庵)’ 참고.

*젓대 ; ‘(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 일상적으로 이를는 . ().

* ; 뜻밖의 일을 당하여 놀라거나 기분이 언짢을 내는 . () ①원, 세상에 ②원, 싱겁긴 ③이거 , 남이 알면 안되는데.

*선객(禪客 참선 /손님·사람 )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당최 ; 도무지(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없이 아주). .

*첩첩(疊疊) ; ①겹겹(여러 ). ②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모양.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

*퇴타(退墮 물러날 /떨어질·게으를 )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진미(眞味) ; 어떤 대상에서 느껴지는 참된 가치나 재미.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주장자(拄杖子 버틸 /지팡이 /접미사 )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 때나 설법(說法) 때에 지니는 지팡이.

*명상(名相) : 모든 물건이나 일이 이름과 형상이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름만 들으면 사물의 형상을 생각하게 되는데, 형상이란 것은 바탕과 모양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공간적으로 있는 형용과 체적(體積질량(質量)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타나는 나고 머물고 늙고 죽는 것이나, 시작되고() 진행하고() 쇠퇴하고() 파멸하는()것도 형상이며, 오관(五官)으로 감촉하게 되는 열도(熱度소리(音響(냄새(() 같은 것도 또한 형상이다.

그러나 이름이나 형상은 자체가 본래 확실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망녕된 생각이 지어낸 이름이며, 때의 인연을 따라 생겨난 거짓 형상인 것이다.

* ; ①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하는 .(), 조용히 합시다. ②남에게 어떤 행동을 권하거나 재촉할 하는 . (), 어서 뛰자. ③안타깝거나 의아한 일을 당했을 내는 . (), 이제 어쩌지?

*숭칙하다 ; ‘흉칙하다(흉하다. 보기에 민망하다)’ 사투리. *흉칙(凶칙) : 흉측(凶測, 兇測)—흉악망측(凶惡罔測 몹시 흉악함).

*고행(苦行) ; ①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여차(如此)하다 ; (일의 상태나 속성이)이와 같다.

*하세월(何歲月) ; 매우 오랜 세월.

*일순간(一瞬間 /눈깜박일 /사이 ) ; 지극히 짧은 순간.

*기필(期必 만날·약속할·결심함 /반드시·기필할 ) ; 어떤 일을 이룰 것을 때를 정하여 약속함.

*장부(丈夫)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불성(佛性) 이치를 깨달은 사람.

 

Posted by 닥공닥정

§(256) 의심관(疑心觀) / 일관(日觀)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용256)

 

약 6분.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房付)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그렇게 참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이렇게 삼위(三位)가 일체(一體)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그 이튿날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그 다음 날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인자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터얻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터억—그 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하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70분56초~76분5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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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해제끼다 ; 헤치우다. (사람이 어떤 일을)빠르고 시원스럽게 끝내다.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빽빽하게 죽 잇따라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맷방석 ; 주로 매통(벼를 넣고 갈아서 겉겨를 벗기는 데 쓰는 기구)이나 맷돌(곡식을 가는 데 쓰는 도구) 아래 깔아 곡식을 담거나 방석으로 쓰는 짚으로 만든 물건.
멍석보다 작고 둥글며 전(물건의 위쪽 가장자리가 조금 넓적하게 된 부분)이 있다.
*백골관(白骨觀) ; 시신(屍身)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없어져 백골(白骨)만 남아 있거나, 흩어져 있는 모습을 관(觀)하여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인생무상을 깨닫는 관법(觀法). 고골관(枯骨觀)이라고도 한다. 구상(九想)의 하나.
[참고] 구상(九想) ; 구상(九相)이라고도 함. 탐욕을 제거하고 혹업(惑業 무명번뇌와 업)을 멀리하기 위해 사람의 시신(屍身)에 대해 수행하는 9종류의 관상(觀相 깊이 생각에 집중하는 것). 부정관(不淨觀)의 9단계를 말한다.
①시신이 부어 팽창하는 것을 관상하는 창상(脹想).
②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쪼여 시신의 색이 변하는 것을 관하는 청어상(青瘀想).
③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관하는 괴상(壞想).
④부패를 끝내고 혈육이 땅에 스며드는 것을 관하는 혈도상(血塗想).
⑤시체에서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 낭자한 모습을 관하는 농란상(膿爛想).
⑥새나 짐승이 와서 시신을 먹는 것을 관찰하는 담상(噉想).
⑦새나 짐승에게 먹혀 근골두수(筋骨頭手)가 분열, 파산되는 것을 관하는 산상(散想).
⑧육신이 이미 다해 백골만 남게 되는 것을 관하는 골상(骨想).
⑨백골이 불에 태워져, 재로 돌아가는 것을 관하는 소상(燒想).
*관법(觀法) ; 마음의 본성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 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한 생각만 주시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는 수행.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 덩어리 단,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일관도천(一串都穿 한 일/꼬챙이 관/모두 도/꿰뚫을 천) ;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단전 호흡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1) 약 21분.

(2) 약 6분.


(1)------------------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야심경이 좋다니까 반야심경을 읽고, 천수경이 좋다니까 천수경을 냅다 틀어재끼고, 관세음보살이 좋다면 아들을 위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죽은 영감을 위해서는 지장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러다 참선이 좋다니까 앉아서 참선 흉내 좀 내고, 입춘이 되면은 또 무당집에 가서 5만원 10만원짜리 또 부작을 사고, 좋다는 데는 다 쫓아다니고, 그러다가 결국은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입니다.

이리저리 좋다는 것은 다 인연을 맺고 공덕을 지었으니까 악도(惡途)에는 떨어지지 않기를 나도 바래고, 원(願)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실 것을 나는 다같이 바래기는 하지마는 과연 그분이 극락세계에 꼭 갈 것인가? 나는 보증을 못합니다.

복을 짓고 착한 일을 한 만큼 내생에 천당에도 가고 또 사람이 되더라도 부자도 되고 인물도 잘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나도 믿습니다마는,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다른 사람에게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을 수 있도록 이것이야말로 샘이 없는 복[無漏福]이요,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라. 이 복이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남 보고 하라고만 하고 자기는 안한 사람이 있거든. 자기만 하고 남 보고는 별로 권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법이야말로 이것이 바로 대승법이요,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거와 같고, 수레에 두 수레바퀴가 있는 거와 같아서, 새가 날개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하나만 가지고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이 세등선원을 짓는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 짓는 것이요,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여러 신남신녀가 시주(施主)를 하고 화주(化主)를 하는 것도 이것 또한 자리이타를 하는 것이여.

부처님 출현하신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있어서야 원래 생사 없는 본각(本覺)자리에 계시는데 무엇이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가지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이다.

한 글자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을 설하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다.
한 글귀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역대 조사(祖師)가 많은 어록(語錄)을 남기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한 자비심에서 나오신 소식이다.

오늘 산승이 나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도 내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수행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시간도 바쁘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올라와서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언부언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부처님께서 다겁(多劫)을 두고 스스로 생사 속에서 윤회하신 그런 뼈아픈 경험이 계셨기 때문에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나오셨어.

저 자신도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 정진을 해봤기 때문에 선지식한테 들은 말씀, 나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바를 여러분에게 간곡히 말씀을 드림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정진을 잘할 수 있는, 발심하실 수 있는 채찍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하는 그러한 마음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진즉부터서 공부를 해서 이런 말을 듣지 아니하고라도 잘 정진을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처음으로 공부를 하러 오셔서 이러한 말씀이 꼭 필요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미 다 잘 알고 공부를 잘하고 계신 분은 증명을 하시면 되는 게고, 처음 와서 들으신 분은 뼈에 사무쳐서 명심해서 듣고 발심을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선배 후배 도반들의 그 돈독한 정의가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언제든지 좌선을 해서, 참선 시작할 때에는 준비 호흡으로 숨을 가득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쉬어 버리고 나서, 그렇게 2번을 하고서,
3번째는 가슴으로 들어마시지를 말고 가슴과 윗배는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불어나도록, 볼록해지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숨을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윗배와 가슴은 약간은 움직이겠지만 거의 가만히 있도록 유지를 하면서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진다.

들어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하니 아주 수월하게 들어마시는 거여.

너무 오랜 시간을 걸려서 들어마실라고 하지를 말고,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셨으면 너무 가득 들어마시지를 말고, 아까 준비 호흡을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인자 본(本) 호흡, 단전 호흡에 들어가서는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면 안된다 그말이여.

8부쯤만 들어마셔. 더 들어마실수 있지마는 8부쯤만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딱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그 홀쪽해지기 시작할 때 그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이것은 아주 초보자를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보자는 이러한 방법을 써서 하면 단전 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단전 호흡도 잘되고, ‘단전 호흡했다’하면 화두도 거기에 붙여서 함께 잘되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익숙해진 사람은 숨을 들어마시거나, 내쉬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그까짓것도 구애 없이 항시 화두의 의단(疑團)이 항시 목전(目前)에 상주해서, 눈앞에 항시 나타나서 일여(一如)하겠지만, 처음 한 사람은 ‘이뭣고?’해도, 금방 ‘이뭣고?’한 사이에 생각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어렸을 때로 날아갔다, 집으로 날아갔다, 야단이거든. 그러다 보면 화두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다시 또 챙길라면은 힘이 들거든. 그러다 억지로 ‘이뭣고?’ ‘이뭣고?’하다 보면은 모가지만 뻣뻣해 가지고 골만 빠개질라고 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안되고, 아! 이러니 할려고 마음은 내는데, 할려고 하면은 잘 안되니 그거 어떻게 하냐?
그래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여러 가지로 다 경험을 해 보고 연구를 한 결과 이 단전 호흡을 겸해서 하도록 이렇게 모다 지도를 해 오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지금 오늘 유독 결제날이기 때문에 단전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벌써 넘어서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고만 했으면’ 이러시겠지만 굶어서 돌아가시지를 않습니다. 조금 배가 고파야 말이 들어가지 잔뜩 먹고 쌕쌕거리게 되면은 졸음만 오지, 법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장한 다음에 잡숴야 밥이 맛이 있습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면서 내쉬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 어떻게 들어마시냐 하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이렇게 하지를 말고, 물론 코로는 들어가겠지만, 우리의 기분으로는 저 궁둥이 뒤에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이렇게 볼록해지도록 그런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머물렀다 내쉴 때는 코로 내쉰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쉴 때도 저리 뒤로 해서—궁둥이 뒤로 해서 저 뒤로 쑤욱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내쉬어 보시라 그말이여.
저 뒤에서 쑤욱 들어마셨다, 들어마신 호흡을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저 뒤로 쑤욱 배꼽을 뒤로 잡어당기면서 뒤로 내쉬는 거여.

그런데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하지를 말어. 너무 억지로 해 가지고는 그냥 한 두어 번만 하면 숨이 가쁘게 이렇게 하시다가 ‘아이고! 그거 되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예요.

아주 수월하게—들어마시는데 3초 걸리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한 4~5초 걸리게 조용하게 내쉬고, 이렇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거기다가—배꼽밑에 배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관심을 두고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보시라 그말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몸도 차츰 건강해지고 가벼워지고 골치 아픈 병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거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는 사람도 그게 낫고, 집안에서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가슴앓이 속병이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하면 그 병이 낫는다 그말이여.

이것을 하면서 화두까지 거기다 겸해서 하면은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이말이여. 화두는 아니하고 밤낮 고것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병을 고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 갖고는 그건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여.

거기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하고 가정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시고 낮에도 시간 있는 대로 그렇게 하시고,

이 공부는 꼭 앉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말하면서, 걸어가면서, 차 타면서, 행주좌와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 오늘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못 장소가 형편상 이 세등선원일 수도 있고, 또 보문사일 수도 있고, 군산일 수도 있고, 또 시내일 수도 있고, 조치원일 수도 있고, 청주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자리에서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 업장(業障)이 거기에서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 업장이 녹아지면은 소원성취는 거기에 있거든.(60분26초~80분55초)





(2)------------------

내가 그전에는 얼굴이 아주 시커먼 사람인데, 아! 30년을 참선을 하니까, 내 얼굴보고 검다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여.
성질이 아주 불같아 가지고 신경질을 잘내기로 아주 유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 참선을 했더니 나 보고 마음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여러분 가운데도 얼굴이 검어서 고민인 사람, 얼굴에 무엇이 많이 나서 고민인 사람, 또 신경질을 많이 내고 고집이 세다고 욕을 먹고 그러한 평판이 있는 분, 오장육부에 병이 많은—내가 또 병주머니여서 학교를 다닐 때는 1년에 한 달 내지 두 달은 꼭 결석을 했다.

그런데 출가해 가지고 참선을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그런는데, 내가 별로 약도 많이 먹지도 않고,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 죽기보다 더 싫어한 사람이어서 병원에 잘 안 가고 그러는데, 참선을 해서 이렇게 몸도 건강해 진 것 같어.

여러분들도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금방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하는 이러한 법을 명심을 해서 실천에 옮기신다면 얼굴도 예뻐질 것이고 오장육부의 병도 다 나아질 것이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평판이 있는 시어머니, 며느리, 스승, 상좌 할 것 없이 다 불보살과 같이—나는 워낙 고약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된 사람이 그만큼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금생에 불보살과 같이 될 것을 나는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늘 결제일을 기해서 여기에 모이신 출가한 스님네나 마을에 계신 신도 여러분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름 일어나듯이, 산에 구름 일어나듯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이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밝은 달은 원래로 말이 없느니라.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여러분에게 드리지를 못합니다. 이 주장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80분56초~86분1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4분 51초)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과 무루복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화주(化主) ; ①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주(主). 부처님를 말함. ②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물건·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 예로부터 석취미모(惜取眉毛, 눈썹을 아낄지어다)라고, 경(經)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설법을 하면 미모(眉毛•눈썹)가 빠진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런데 ‘한 물건(一物)’이라 표현하는 진리의 본체는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하였으니,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법을 한다'는 것은 선지식의 중생을 위한 간절한 자비심을 나타내는 뜻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체중현(337:2분48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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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체중현(282:2분19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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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체중현(466:2분26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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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2분 26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체중현(112:2분36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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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 36초)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8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2)

*병주머니 ; 갖가지 병이 많은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몽산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24) 화두드는 법 / 최상승법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생사(生死) / 불보살,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다 / 중생심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공부하다가 어려운 역경계가 나타나는 것이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의 연속이 바로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그것이 바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되고, 그것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생사의 물결 속에서 바로 생사해탈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그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또는 노여운 생각이건, 과거의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에서 ‘이뭣고?’하는 것입니다.

 

발심한 사람,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이라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고, 선지식을 바로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하면 그것이 공부인데,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왜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안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공부 안되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떠오르는 그 많은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심, 생멸심 그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성내는 놈, 슬퍼하는 놈, 기뻐하는 놈, 원망하는 놈, 아퍼하는 놈,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는 놈, 이것이 전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일어나는 한 거동이요 모습일진대, 그 거동 그 모습을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바로 그놈을 계기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 진여불성을 찾는 가장 가깝고 빠르고 묘하고 간단한 길이다.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놈을 버리고 어떠한 진여불성을 찾아서 깨달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량겁을 두고 공부를 한다해도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을 줄 알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1) 약 18분.  (2) 약 21분.

 

 

 


(1)------------------

오늘 기미년 삼동(三冬) 결제일을 맞이해서 조실 스님의 공안법(公案法)—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 공안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공안법은 이론으로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천 칠백 공안이 있습니다.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 칠백 공안인데,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을 말하자면 우주법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전체가 공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한 공안, 한 화두(話頭)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한 공안에만 철저하게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가지고,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 칠백 공안, 무량무수의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그러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승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뒤에 있는 문을 좀 잠깐 열어서 차운 공기가 들어오게 좀 하십시오. 다들 열어 주세요. 확 열어 주세요.


오늘부터서 석 달 동안 결제(結制)에 들어갑니다.
결제 동안은 부모의 부고(訃告)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놓았다가 내년 정월 15일에 해제한 뒤에사 그 부고를 본인에게 전할 만큼,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규칙이 엄격하게 출입을 금하고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면은 그래 가지고 방(榜)을 딱 짜고 정진에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인사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고, 오직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짜면 짠 대로 먹고,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먹고, 맛이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오직 의식주 문제는 인연에다 맽겨.

그리고서 밤 9시부터서 그 이튿날 새벽 3시까지 여섯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체 잠을 스스로 허락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9시부터 3시까지 정식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마는 그동안에 보면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고, 2시간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자는 체하고 누웠다가 가만히 일어나서 10시까지 11시까지 다시 일어나서 혼자 공부하는 분도 있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이 원칙이지만 2시나, 1시쯤 미리 일어나서 옆의 사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일어나서 공부하는 이도 있고, 이렇게 해서 ‘어쨌든지 금생에 결정코 대도를 성취하리라’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정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만 그럴 것이 아니라 선원 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시내의 병원에 간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간다’ 외출하는 것도, 일주문 밖에 나가는 것도 철저히 옛날에 다 그것을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
시내에 어떠한 신심 있는 단월(檀越)로부터서 공양(供養) 청장(請狀)을 받어도 결제 중에는 가지를 아니 하고,

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까지는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용될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경전이나 어록(語錄)을 읽고 보고 하는 것도 허락이 되지를 아니했습니다.

9시부터 3시까지 삼경(三更) 외에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인사로 왕래하는 일체 출입을 금하고, 또 경전 같은 것을 읽고 하는 그런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고,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다시피,
이렇게 철저하게 공부를 해서 3년을 그렇게 해서 만약에 확철대오를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혀를 빼서 쟁기로 가는 발설여경지옥(拔舌犂耕地獄)에 내가 들어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도인께서 맹서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3년을 하면 백발백중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도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참선이라 하는 것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 오직 그 한 점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하지 못하고 한 관건(關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이론으로써 교리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는 아무리 따져봤자 결론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자기 나름대로 어떤 결론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 분별심으로 얻어진 것이라 아무리 묘한 답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욱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만 치성(熾盛)하게 만든 결과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아맞추는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이요, 그것은 삿된 참선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참선을 할 바에는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열심히 염송(念誦)하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 무엇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를 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 가운데에는 조실 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받으신 분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분은 천하없는 누가 뭐라 해도 끝까지 그 판치생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할 것이고,
또 시삼마(是甚麽) ‘이 무엇고?’ 시삼마 화두를 하신 분은 시삼마 화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정전백수자,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하신 분은 조주 무자, 어느 화두를 하던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무자 화두가 더 좋고, 판치생모가 더 좋고, 시삼마가 더 좋고, 그 공안 자체에 있어서 더 좋고 나쁘고 한 것은 없어.

다못 문제는 자기가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철저히 믿어지는 선지식, 바로 깨달라서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은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그 화두를 받기만 했다면 천칠백 화두 가운데의 어느 화두를 타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화두건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 들리는 화두는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잘 들린 듯하다가 얼마 안가서 그렇게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애를 먹고 그러다가, 그 고비를 잘 넘기면서 공부를 지어가면 또 한결 수월하게 되다가, 그렇게 수월하게 계속 잘되어 갔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얼마동안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지루하고 도저히 앉어서 참을 수가 없고, 공부가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그러한 역경계(逆境界)가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에 마장(魔障)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분이 있지만,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이러한 어려운 경계가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멍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섰을 수도 없고, 화두를 놓을 수도 없고 들 수도 없고,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운 경계에 도달하거든 조금도 걱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자포자기를 하지 말고,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한 걸음 공부가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중대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런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20미터나 30미터,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놓고서 왔다갔다 한 5분 내지 10분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또 자리에 가만히 와서 앉아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서 성성하게 그리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그 마음을 써 가지고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기면 그 다음에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없고, 오직 한 생각—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오직 그 한 가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대사, 생사대사, 생사해탈(生死解脫), 경전에나 조사(祖師) 법문에 생사해탈 문제가 대단히 거론됩니다마는 대관절 그 생사(生死)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생(生)이요, ‘일어났던 그 한 생각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생사. 생멸(生滅).

그래서 우리는 ‘부모한테 몸뚱이를 받아났을 때 그것이 생(生)이고, 한평생 살다 죽은 것이 그것이 사(死)’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몸뚱이를 표준 할 때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몸뚱이를 표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나’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그놈, 지금 입을 벌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놈, 이렇게 하는 말을 들을 줄 아는 그놈, 그것에다 기준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루 동안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생사인 것입니다.


고개를 들고 산승(山僧)의 얼굴을 보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경건하게 듣는 것도 좋지만, 고개를 숙이고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 잠이 와서, 졸면서 잠을 자면 이것 재미가 없습니다.
눈을 딱 뜨고,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얼굴을 보면서 들어야 훨씬 더 잘 들리는 것입니다. 보기가 싫게 생겼지만 이 시간에는 불가불 좀 봐 주시길 바라겠습니다.(5분17초~23분16초)




(2)------------------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의 연속이 바로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그것이 바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되고, 그것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무엇이든지 어떠한 물건이 이루어지면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그것이 파괴가 되어 가지고 나중에는 없어집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해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별도 그렇고, 이 지구도 그렇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것도 영원불멸한 것은 없습니다. 다 성주괴공(成住壞空)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어머니한테 태어났다가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은 늙고, 늙으면 죽습니다. 죽으면 10분이 못 가서 10분 뒤부터서는 오장육부가 버글버글버글 썩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화장(火葬)을 하거나, 땅에다 묻는다 하더라도 한줌 흙이 되고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그 생각이 머물러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생각이 꺼져버립니다. 꺼지자마자 또 새로운 딴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발전해 가지고 결국은 또 그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기를 무량겁을 해 내려왔습니다.

이 몸뚱이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의 생각에 생주이멸, 생주이멸, 생주이멸, 생주이멸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사요, 그것이 앞으로 영겁을 두고 육도윤회 할 근원을 장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염기염멸(念起念滅), 바로 그 생사 속에서 생사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생사 속에 나를 맡겨버리면 결국은 나도 생사의 물결 속에 무량겁을 두고 윤회하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를 못할 것이고, 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생사의 물결 속에서 바로 생사해탈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그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또는 어떠한 노여운 생각이건, 과거의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없앨려고 하지 말고,
한 생각이 일어났다—여기 앉아서 지금 딸 생각이 났다. 「딸이 지금 잘 있나?」 「애기가 잘 컸나?」 그런 생각이 났다 할 때에—「아! 내가 쓸 데 없는 생각을 했구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 생각이 났을 때 ‘이뭣고?’

무엇이 금방 그 딸 생각을 했나? 이거여. 이 딸 생각하는 이놈이 뭣고?

과거에 어떤 친구로부터 배반을 당해서 불현듯 그 생각이 나 가지고 속에서 화가 탁! 치밀어 오를 때, 바로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에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하는 아주 묘한 그리고 간단한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망상이 일어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상(妄想)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바로 화두를 들기 때문에 그 망상은 바로 그것이 선지식의 한 법문이요, 경책(警策)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선지식 또는 부처님 또는 관세음보살 하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서 아주 우리가 법당에 모셔진, 탱화(幀畵)에 그려진 그러한 모습으로 계실 줄 생각하지만 마냥 그렇지를 않습니다.

불보살(佛菩薩)은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구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장자(長者)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거지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강도 도둑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문둥이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시어머니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며느리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남편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아내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로 나타나기도 하고, 친구로 나타나서 신의를 지키는 그러한 친구로만 나투는 게 아니라 배반 배신하는 그런 친구로도 나타나고,
아내로 나타나면 아주 현모양처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아주 고약한 악처(惡妻)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좋은 남편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외도를 일삼는 천하의 색마(色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내 마음에 꼭 맞는 그러한 선지식으로만 나타난다면 그 참 그런 좋을 수가 없겠지마는, 불보살은 중생을 하루라도 더 빨리 생사해탈을 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자비가 크신 까닭으로 해서 천백억 화신으로 역경계(逆境界) 순경계(順境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발심한 사람,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이라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고, 선지식을 바로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발심을 못한 사람은 선지식을 노상 코앞에 모시고 있으면서, 한 자리에 불보살을 모시고 살면서도 선지식을 알아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누군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시 더 분명히 말하자면 『불보살 아닌 사람이 없고, 불보살 아닌 것이 없고,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발심을 했느냐, 못했느냐? 진발심을 했느냐, 못했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이지, 행여나 선지식이 없을까 걱정할 것 없고, 불보살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서라도 댁에 가시거든 남편이 나한테 잘해 주건 못해 주건, 며느리가 자기한테 효도를 하건 말건,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잘해 주시건 안해 주시건, ‘바로 저분이 선지식이다. 저분이 바로 불보살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분이다’ 이리 생각하고,

오히려 더 시어머니가 자기한테 잘못할수록에 발심을 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잘못할수록에 더욱 발심을 하고, 사돈이 자기한테 섭섭하게 할수록 자기는 더 발심을 해서,
이렇게 마음을 쓰고,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행동에 옮긴다면 거기에서 자기의 과거에 어떠한 두터운 업장이라도 거기에서 다 소멸이 될 것이고, 업장소멸(業障消滅)하면 소원성취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업장이 가로막기 때문에 성취를 못하는 것이니까, 업장만 소멸한다고 하면은 소원성취는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3일 기도를 한다든지 7일 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백일기도(百日祈禱)나 천일기도(千日祈禱), 만일기도(萬日祈禱) 이렇게 합니다마는, 어째서 그렇게 사람에 따라서는 3일 기도를 하고도 소원을 성취를 하고, 백일기도를 하고도 성취를 하고, 만일기도를 하고도 성취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째서 빨리하는 사람도 있고, 더디하는 사람도 있냐?’하면은 업장이 얼마만큼 소멸이 되었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3일 기도만 하고도 마음이 맑아져서 불보살의 마음과 같이만 된다면 3일에도 소원을 성취해.

한번 가서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향 하나를 올리고 절을 하고,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리고 간절히 절하고 와서 그리고서 소원을 성취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간절히 향 하나 올리고, 물 한 그릇 올리고 소원을 할 때 그 마음,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절 한 자리 하는 사이에도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우리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은 꼭 오랜 시간만이 걸려야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생각생각마다 들고 또 들고, 앉거나 서거나 누웠거나 걸어다니거나 차를 탈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가리지 말고,
속이 상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일을 할 때나,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그 사이도,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소지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라고 ‘이뭣고?’

‘하! 공부가 안된다’고, 공부가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 자기로 하여금 공부가 안되게 하는 것이여.

“어째서 안되냐? 무엇을 안된다고 하느냐?”
“망상이 일어나서 안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하면 그것이 공부인데,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왜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안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공부 안되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화두를 타 가지고 바로 그때부터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공부가 된다면 어찌 일주일을 넘을 필요가 있느냐.

무량겁(無量劫)으로 지어온 자기의 업(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기 때문에 번뇌와 망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가만히 있어도 별별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떠오르는 그 많은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심, 생멸심 그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여불성은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래서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고,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지마는, 그놈이 너무나도 신령스럽고 신기하고 묘한 것이라, 때와 인연 따라서 천만 가지 모습으로 천만 가지 빛깔로 그놈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불보살과 같이 착한 마음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살인강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하의 대학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하의 역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 얼마나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것이라 그렇게 천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내는 놈, 슬퍼하는 놈, 기뻐하는 놈, 원망하는 놈, 아퍼하는 놈,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는 놈, 이것이 전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일어나는 한 거동이요 모습일진대, 그 거동 그 모습을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바로 그놈을 계기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 진여불성을 찾는 가장 가깝고 빠르고 묘하고 간단한 길이다.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놈을 버리고 어떠한 진여불성을 찾아서 깨달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량겁을 두고 공부를 한다해도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심은 그것이 바로 대승법,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다. 그 중생심, 번뇌 망상심 그것 때문에 육도(六途)를 윤회한다고 아까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성불(成佛)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 번뇌 망상이 우리에게는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큰 은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상승 활구참선, 이 정법을 믿고 공부한 사람에게는 그 번뇌 망상이 바로 불보살의 손이요, 불보살이 보내주신 반야용선(般若龍船)이지만,
정법을 믿지 않고 활구참선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중생심, 번뇌 망상심 이것이 큰 원수요, 나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끌고 가는 원수요 도적놈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육적(六賊)이라, 여섯 도적놈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다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생각 정법을 믿으면 여섯 도적놈이 바로 6대보살(六大菩薩)이여. 나를 극락세계로 불국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반야용선을 가지고 나를 영접하러 온 보살화신이고,
정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섯 도적놈이 되어 가지고 눈으로 귀로 코로 귀로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여섯 문을 통해서 기회만 있으면 지옥으로 끌고갈려고 엿보고 있다 그말이여.

이러한 최상승법, 활구참선법.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가지고 어떻게 해서 이러한 묘한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 나도 희유하고 감사하고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다행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로 돌려서 슬픔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노여움도 이 ‘이뭣고?’로 이겨내고, 괴로움도 이 ‘이뭣고?’로 이겨내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결정코 금생에 자아를 자각, 대도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몽산 큰스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3년을 해봐라.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성취를 못하면 내가 네 대신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제일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의 법문도 이 화두, 공안에 대한 법문을 추려서 들었고, 또 산승도 이 공안에 대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하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을 줄 알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23분17초~44분2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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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실참실수(實參實修)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부고(訃告 부고 고,알릴 고) ; 어떤 사람의 죽음을 연고자에게 알림. 또는 그러한 글.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단월(檀越) ; 시주(施主). dana-pati 의 음역.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공양(供養) 청장(請狀) ; 공양 청첩장. 재가신도가 스님들께 공양(식사)을 드리기 위하여 초청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발설여경지옥(拔舌犂耕地獄) ; 또는 발설이경지옥(拔舌犂耕地獄). 犂(밭 갈 리, 밭 갈 려).
사람의 혀를 길게 빼 늘여 놓고, 그 혓바닥을 소 쟁기로 쟁기질을 하는 지옥.
*몽산(蒙山)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관건(關鍵 빗장 관,열쇠 건) ; 어떤 일의 성패나 추이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요인.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함[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惑-業-苦 三道]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염송(念誦 생각 념,욀 송) ;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경(佛經)이나 진언(眞言) 등을 외움.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대혜(大慧) 스님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한고비 ; 어떤 일의 진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어려운 단계나 국면.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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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 책)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탱화(幀畵) ; 부처님, 보살, 성현들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 '탱(幀)'이라고도 한다.
*화신(化身) ;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변화신(變化身)•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악처(惡妻) ; 성품이나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사나운 아내.
*색마(色魔) ; 성행위나 성관계 따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을 마귀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障礙)가 사라져 없어짐.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낙인(烙印 지질 락,도장 인) ; ①다시 씻기 어려운 부끄럽고 욕된 평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불에 달구어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 진여(眞如)를 가르켜 말함. 진여의 실체.
진여가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섭한 것을 대(大)라 하고, 일미 평등(一味平等)하여 차별의 모양을 여읜 것을 총상(總相), 수행하는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법(法), 관하는 지혜가 드나드는 것을 문(門)이라 한다.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Posted by 닥공닥정

 

 

§(118) 조심(調心), 마음을 고르는 법—화두 참구 / 의심(疑心)이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 / 의리선(義理禪), 야호선(野狐禪), 사량복탁(思量卜度)은 안됨.

믿을 수 있는 스승 또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다 낙처(落處)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 의심입니다.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허공보다도 더 크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이어서 해 가면 해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아!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의 발심(發心)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어(80.03.01) (용118)

 

 

 

 

(1) 약 20분.  (2) 약 4분.


(1)------------------

이렇게 호흡을 잘 익히면서 조심(調心), 마음을 어떻게 가져 나가야 하느냐?
셋째에 가서 마음을 고르는 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화두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

화두(話頭)는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들었습니다마는 ‘화두는 자기 멋대로 어떤 책에 써 있는 대로 거기서 배워가지고 한다든지, 자기 나름대로 무슨 화두를 하나 설정해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한다든지 이래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책에 써 있는 대로 하건, 어떤 큰스님네한테 타건, 큰스님네한테 탄 사람한테 간접적으로 듣건 처음에 시작한 데에 있어서는 비슷합니다.
별 차이가 없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그러한 경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상태가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것이 바른 경계냐? 또는 잘못된 경지냐?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해 나간 사람은 그때 물어볼 스승이 없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잘못된 경지를 갖다가 ‘아! 내가 이거 공부가 잘되어 간 거구나’ 이렇게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 신기한 경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집착을 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다가 보면,
십상(十常) 열이면 열, 삿된 데에 빠지거나, 미치거나, 외도가 되거나, 점쟁이 같은 것이 되거나, 잡신 같은 것이 붙어가지고 인간 자체가 폐인이 되는 수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두는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지도를 받아가지고 그래 가지고 믿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또는 시원찮은 데서 배운 사람은 해 나가다가 항시 ‘내가 이거 옳게 하는 것이냐? 잘못하는 것이냐?’ 그 자체에 대해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해 가지고 공부가 한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하고, 어떤 경지가 일어났을 때에도 중요한 고비에 가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스승 또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을 만나 가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법을 위해서는 이 몸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자세로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일단 탔으면, 지도를 받았으면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화두를 ‘이 화두가 나쁘니까 다른 화두로 고쳐야겠다’ 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안될수록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 공부가 잘 안되니까 옆의 사람 보고 ‘당신은 무슨 화두를 허요?’
‘나는 무슨 화두를 해요’ 가만히 그 사람 화두를 조금 흉내내 가지고 해 본다. 자기 화두를 할 때는 영 안되는데 잠깐 옆의 사람 화두를 좀 흉내내 가지고 해 보니까 아주 공부가 수월하게 된 것같이 느껴져서 며칠을 그대로 해 본다.

마치 어렸을 때,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합니다마는 자기집 오곡밥은 먹어보니까 별로 맛이 없고, 다른 집에서 가져온 것은 굉장히 맛있는 것처럼 느껴진 기억이 있습니다.

화두도 자기 화두는 아무래도 잘 안되는 것 같고, 남의 화두는 아주 좋은 화두같이 느껴져 가지고 이 사람 것 조금 해 보고, 저 사람 것 조금 해 보고 이렇게 하다가 몇 달 만에 와 가지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말 안하고 혼자 할라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내 화두를 그냥 할까요 다른 화두를 할까요?” 이렇게 물어보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 또 보살님네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가끔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두는 어떠한 화두나 천칠백 화두가 다 낙처(落處)는 같은 것입니다.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화두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화두가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화두가 안되어서 다른 화두를 해 보니까 잘된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또 얼마 안 가면 그전에 했던 화두가 자꾸 밟혀쌓고, 먼저 하던 화두를 다시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좀 해 보다 저것 좀 해 보다, 이러한 사람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여.

우물을 팔라면 한 우물을 파야지, 한 길 두 길 파다가 물이 안 난다고 해서 또 장소를 옮겨서 파고,
또 한두 길 파다가 또 물이 안 나오면 또 저만큼 가서 딴 데를 파고 이러한 사람은 맛있는 좋은 물을 만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한 길 파서 안 나오면 두 길 파고, 두 길 파서 안 나오면 석 길, 넉 길, 다섯 길, 아홉 길, 열 길, 스무 길, 마지막에는 만나는 것이 큰 반석(盤石)을 만나게 됩니다.
‘인자 나는 우물 파기는 틀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반석을 다이나마이트를 사용을 해서 폭발을 하던지 또는 정으로 쪼아내던지 이렇게 해서 그 반석을 뚫기만 하면 반석 밑에서는 아무리 가물거나 아무리 장마가 져도 변함이 없이 10년 20년 30년 백 년을 두어도 변함없이 지하수가 풍풍 쏟아오를 것입니다.

하물며 무량겁으로 생사윤회를 해 온 이 몸이 금생에 화두를 타가지고 한 철 두 철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방 목마른 데에 물 마시듯이 그렇게 갈증이 잡히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얘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옛날부터서 크게 깨달은 도인들은 너무너무 공부가 안되어 가지고 목숨을 갖다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자살을 할까 이러한 정도의 극한상황에까지 이르러서 거기에서도 쉬지 아니하고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것을 각오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 끝에 죽음 직전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 예는 얼마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철 두 철에 공부가 안된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고 다못 옳은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할 따름인 것입니다.
맨 처음에 말씀드린 다섯 가지의 신심 그리고 세 가지의 법에 대해서 결함이 없도록 다져 나가되,
이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의단(疑團)입니다. 의단. 의심!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생각에 막히는 것」입니다.

‘아하! 이러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러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스스로 수긍하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엎어 보고, 분석해 보고 종합해 보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을 해다가 대조해 보고, 이러한 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도깨비 참선이요, 여우 참선, 삿된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선, 야호선(野狐禪), 이러한 도깨비 참선을 해 가지고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히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놈이 무엇인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하고 있는, '이'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계속 알 수 없는 데을 향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을 향해서 화두를 들고, 들어서 또 관조하고 이렇게 해서 조금도 옆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의단으로 몰고 나가야 돼.
이렇게 의심, 의심 또 의심, 1분 1초 한 생각도 비끌어지지 않도록 여유를 주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심으로, 의심을 밀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서 추구해 나가면, 갈수록 알 수 없을 뿐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금방 딴 생각[別念]이 침노(侵擄)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금방 저 백리 밖, 이백 리 밖의 일 또는 10년 전, 20년 전 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 밖에서 들어오는지, 나의 의식이 밖으로 나가서 헤매고 있는지, 하여간 분명 화두를 든다고 들고 있는데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왕래를 하는 것을 참선을 해 본 사람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한 시간 동안에 화두 이외의 다른 생각이 몇 번이나 들고 나갔는가를 한번 장난삼아서 세어본다면 몇천 번이 될런지, 몇만 번이 될런지, 세다가 또 세고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퍼뜩 잊어버린 줄 알면 또 「이뭣고?」
성화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사상(千思想) 만사량(萬思量)이 퍼일어난다 하드라도 그것을 성화를 내고 짜증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딴 생각이 일어난 줄 알면 동시에 「이뭣고?」 이렇게 할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해 나가다보면 그렇게 안되던 것이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책없이 퍼일어났던 망상은 어느덧 차츰차츰 그 기승이 누그러지고 화두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뭣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없는—「이뭣고?」 안 해도,  「이뭣고?」하기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있는 것입니다.
미간(眉間)에 있는지, 코끝에 있는지, 가슴 앞에 있는지, 가슴속에 있는지는 모르는데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항시 의단이 앞에가 있거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자꾸 거기다 대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는 거여.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또 딴 생각이 침노하면 그때 다시 「이뭣고?」 한 번 챙기는 거여. 가끔 한 번씩 챙겨서 그 의단이 성성(惺惺)하도록 또록또록 하도록 그놈을 단속해 나가는 것이여.

공부가 여기에 이르르면 주변이 조금 시끄러운 것도 문제가 안되고, 누가 자기한테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로 인해서 신경질이 나거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뭣한 분은 '공부가 조금 될라고 하는데 방정을 옆에서 떨어 쌓고 시끄럽게 한다'고 싸움을 하고 신경질을 내고 그러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공부가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싸움을 하거나, 어린애들이 떠들거나 그까짓 것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을 봐도 의심, 땅을 봐도 의심, 기차 소리가 나도 의심, 닭 우는 소리가 나도 의심, 걸어가도 의심, 앉아서도 의심, 밥을 먹어도 의심, 똥을 누어도 의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이렇게 현전(現前)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조끔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아! 이제 공부가 잘된다. 이러한 상태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됩니다.

화두가 어느 정도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너무 깨끗하고 편안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불법을 만났던가’ 이러한 희유한 마음이 나고 기쁜 마음이 나서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도 같고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기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탁! 정신을 차려가지고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좋은 경계(境界)가 나타나고, 천하 없는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잠깐도 그러한 일에 우리의 신경을 써서는 아니됩니다.

다못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그때 가서는 「이뭣고?」 소리도 할 필요도 없죠. 알 수 없는 의단이 나타나면 다못 그것을 묵묵히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염송(拈頌)이라든지 또는 조사어록(祖師語錄) 이라든지, 전등록(傳燈錄)이라든지, 무슨 경전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뒤적거린다던지, 이러한 조사의 언구(言句) 속에 그런 것을 가지고 사량복탁(思量卜度)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은 대금물(大禁物)인 것입니다.

한참 곡식이 잘 자라고 (이삭을) 패기 위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데다가 뜨거운 물을 찌틀어버린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갈수록 계속 한결같이 의단을 관조해 나갈 뿐, 잠깐이라도 조사의 어구에 대해서 그것을 손을 대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아까 다섯 가지 믿음에 대해서—조사의 언구는 하늘에 뻗쳐서 세워져 있는 큰 칼과 같아서 그 옆에 가기만 하면 벌써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시고, 대오(大悟)! 확철대오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허락해서는 아니됩니다.(48분49초~68분37초)

 

 

 



(2)------------------

차라리 콱 막혀서 알 수 없는 의단만을 관조하다가 죽을 한이 있더라도, 조그마한 어떤 소견(所見), 지견(知見)을 가지고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망치고 불법을 멸망으로 이끄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얻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면, 그 사람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그러한 정도에 밖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결국을 그것을 가지고 만족을 삼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불법을 갖다가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허공보다도 더 크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이어서 해 가면 해 갈수록 크고 깊고 위대해서 ‘아! 인제 이것이로구나. 인자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최초의 발심(發心)할 때, 최초에 발심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결정코 그런 조그만한 지견을 가지고 만족함으로서 공부가 중단한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해제가 되면 추웁도 더웁지도 않는 봄철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 봄철을 가장 충실하게 알차게 공부를 하시기를 다시 거듭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68분38초~72분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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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말. ②'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온 말.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낙처(落處) ; 안정된 곳. 결국의 장소. 귀착점(歸着點 최종적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결론). 요지(要旨 핵심이 되는 중요한 내용).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야호선(野狐禪 들 야/여우 호/참선 선) ; ①진실하게 올바로 참선 수행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않았는데 깨달은 것처럼 가장하여 함부로 기이한 언행을 하여 남을 속이는 사람을 들여우에 비유하여 말함.
②말이나 글로 알아 들어가고,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해 보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인용해 대조해 보는 것으로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침노하다(侵擄-- 침범할 침/노략질할 로) ; (무엇이 무엇을)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치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

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염송(拈頌) ;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고려의 혜심(慧諶) 스님이 1226년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에서 화두 1125칙(則)과 각각의 칙(則)에 대한 짤막한 해설과 게송 등을 모아 엮은 30권의 책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이라고도 한다.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전등록(傳燈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30권. 송(宋)의 법안종(法眼宗) 천태 덕소(天台德韶)의 제자 영안 도원(永安道原)이 경덕 원년(1004)에 엮음.
과거칠불(過去七佛)에서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와 동토육조(東土六祖)를 거쳐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의 제자에 이르기까지, 선종 다섯 종파의 52세, 불법(佛法)을 계속 이어 온 1,701명의 행적, 스승과 제자의 인연, 깨달음에 대한 문답, 어록을 집대성한 저술.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2)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게송) ‘금생약불종사어 후세당연한만단’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금생에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후생(後生)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10)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화두의 핵심 / 화두를 들면 호흡이 되고, 호흡을 하면 화두가 들리게, 화두와 호흡이 한목 나아가도록.

복식 심호흡이 잘된 연후에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를 지도 받아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옳게 단속해 나간다고 하면은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화두는 ‘알 수 없는 것’이 그 화두의 핵심입니다. 화두를 아무리 들되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몰록 드러나지 아니한다고 하면, ‘알 수 없는 의심’에 마음이 꽂히지 않는다고 하면은 그건 옳은 화두가 아닙니다.

 

복식 심호흡을 하면—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에는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생각을 거기에다 붙여서 해라.
그러면은 복식 심호흡을 시작하면 벌써 ‘이뭣고?’가 거기 붙어가고, ‘이뭣고?’하면 벌써 복식 심호흡이 되도록, 이 심호흡과 화두가 동시에 나아가도록.

 

천 생각, 만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을 그것을 싫어하고 성화를 대지 말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놈을 되잡아서 ‘이뭣고?’로 돌아오면 백만 번 일어났자 두려워할 것이 없다.

 

화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선지식, 또 내 자신이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간택을 받고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10)—병진년 동안거 해제 법어(77.1.17)에서. (세등10)


약 9분.


참선은 첫째, 몸을 바르게 가져라.
둘째에 호흡을 바르게 해라.
셋째에 생각을 바르게 가져라.

‘몸을 바르게 갖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 가부좌가 어려우면 반가부좌(半跏趺坐)도 상관이 없습니다.

반가부좌를 하고, 그리고서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심호흡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몸을 혈액순환을 촉진을 시켜서 몸의 노폐물을 빨리 배설을 시키고, 몸을 가볍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그러한 묘방(妙方)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데에는 복식 심호흡을 잘 그 방법을 알아 가지고 복식 심호흡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식 심호흡이 잘된 연후에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를 지도 받아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옳게 단속해 나간다고 하면은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만 명이면 만 명 다 반드시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마는 것입니다.

몸을 바르게 갖지를 못하고, 호흡을 바르게 갖지 못하고서, 화두만 열심히 들고 나간다고 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골치가 아픈 병이 생기고, 그래서 상기병(上氣病)으로 공부는 성취하기도 전에 병에 걸려서 일생을 한숨 속에서 지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고자 하면은 첫째 몸을 바르게 가지고, 둘째에 호흡을 바르게 하고, 그리고서 화두를 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는 ‘알 수 없는 것’이 그 화두의 핵심입니다.
화두를 아무리 들되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몰록 드러나지 아니한다고 하면, ‘알 수 없는 의심’에 마음이 꽂히지 않는다고 하면은 그건 옳은 화두가 아닙니다.

「화두를 의심한다」고 하는 것은 의심(疑心),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 하시는 분은 ‘이뭣고?’  ‘이~ 이뭣고 하는 놈이 뭣고?’ ‘이~?’하는 놈이 무엇이냐 말이야.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외에는 어떠한 생각도 여기에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여기에는 끌어들여서는 안됩니다. 화엄경의 말씀도 이 ‘이뭣고?’하는 데에는 끌어들여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팔만대장경을 육두 백방으로 외우고 꿴다 하더라도 ‘이뭣고?’하는 데에는 그것를 등장시켜서는 안돼.

다못 바보 천치가 되고, 멍청이가 되어 가지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무조건으로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똥누면서도 ‘이뭣고?’ 불칼 같은 신경질이 볼쏙 솟아 나올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배가 아퍼서 몸부림을 칠 때도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차를 타고 갈 때도 ‘이뭣고?’

그렇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루에 만독(萬讀)이나 십만독 채우기 위해서 염주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런 염불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뭣고~?’ 깊이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조용히 내쉬면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이 꽂히도록, 알 수 없는 생각에 눈을 박고,
그 화두를—복식 심호흡을 하면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에는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생각을 거기에다 붙여서 하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복식 심호흡을 시작하면 벌써 ‘이뭣고?’가 거기 붙어가고, ‘이뭣고?’하면 벌써 복식 심호흡이 되도록, 이 심호흡과 화두가 동시에 나아가도록.

처음에는 ‘이뭣고?’하면 호흡이 잘 안되고, 호흡을 하면 ‘이뭣고?’가 잘 안되고 이러는 수가 있지마는, 자꾸 훈련을 쌓아서 자꾸 간절히 간절히 해가다 보면은 ‘이뭣고?’하면 벌써 호흡이 되고, 복식 심호흡을 하면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화두와 호흡이 한목 나아가도록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 처음에는 ‘이뭣고?’해도 금방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지마는 딴 생각이 들어온 것을 성화대지 말고, 들어온 줄 알면 벌써 ‘이뭣고?’로 돌아오면 그뿐이여.

그래서 천 생각, 만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을 그것을 싫어하고 성화를 대지 말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놈을 되잡아서 ‘이뭣고?’로 돌아오면 백만 번 일어났자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뭣고?’ 자꾸 화두를 해 가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조용하고 그러면은 혼침(昏沈)에 떨어지기가 쉬운데 허리를 쭈욱 펴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뭣고?’하되,

그래도 잠이 달아나지 아니하면은 조용히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좀 한 5분 내지 10분을 하면은 다시 정신이 깨끗해 지면 다시 또 방석으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이뭣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화두는 어느 화두나 다 마찬가지여. 어느 화두가 좋고, 어느 화두가 나쁘고 한 것은 없지마는 화두는 간략(해야) 하고, 이런가 저런가 사리상량(邪理商量)을 붙일 수 있는 소지가 있는 화두는 좋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따질 수 있는 그런 꼬타리 붙일만한 그런 가능성이 있는 화두는 까딱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사량심(思量心)이 일어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화두는 자기 멋대로 골라잡는다든지, 올바르게 화두 간택을 해 줄 수 없을만한 사람한테 화두를 간택을 받는다고 하면은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더듬거리게 됩니다.

그러니만큼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선지식, 또 내 자신이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간택을 받고 공부를 계속해야 하고,
공부를 하다가 어떠한 이상한 경지가 나타나면 바로 그 선지식한테 가서 감정을 받어서 옳은 것이면 옳은대로, 그른 것이면 깨끗이 씻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 가야 하는 것이다.(41분3초~49분5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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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복식 호흡(腹式呼吸) ; 숨을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해서 가로막의 신축에 의하여 하는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
*묘방(妙方) ; ①기묘한 방법. ②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한가로이 뜰을 걷는 일.
*‘이뭣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사리(邪理) ; 그릇된 이치나 생각.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①상인이 물품을 판매할 때, 서로 그 가치를 재서 결정하는 것. ②따지고 헤아리는 알음알이.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Posted by 닥공닥정

§ 화두 드는 법.

**송담스님 말씀—2014(갑오)년 동안거 결제 중에.


약 3분.

 


—원장(院長) 스님, 어제 동지였는데 팥죽은 많이 드셨어요?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여쭤볼려고....

“뭣이 궁금하냐?”


—조실 스님 법문에 의심 없는 화두는 병(病)이라고 들었거든요.
제가 요즘 화두 참구(參究)하는데 의심이 들었다가, 안 들었다가 이렇게 되는데, 간절한 의심을 불러일으킬려면 어떻게 화두를 참구해야 될까요?

“「이뭣고 화두」 하냐?”

—예.


“그동안 어떻게 하고 있었냐?”

—그 전에 알려주신 대로, 제가 밖에서 ‘이뭣고?’를 불러일으키려고 했을 때, 원장 스님께서 ‘이~’하면은 거기에서 ‘이~’할 때 ‘이뭣고?’를 해라.


“ ‘이~’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오늘 아침에 방송 나가고 있던데, 지금 ‘이~’할 때 「‘이~’하는 그놈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놈이 무엇이냐’ 낱낱이 그렇게...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들은 그놈이... 그리 가지 말고. ‘듣는 이놈이 무엇인가?’ 그렇게도 하는데.

하여간 ‘이뭣고?’할 때 ‘이~’부터 하잖아!  「그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가장 가깝잖아. ‘이뭣고~?’

‘이뭣고?’하는 것은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알 수 없는 생각이 의심(疑心)이지, 의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알 수 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론적으로 분석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이뭣고~?’ 그렇게만 하는 거여.

무엇이 의심이 나면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연구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대부분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의심이 나면 그러는 것인데,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그렇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이뭣고~?’
다못 ‘이뭣고?’하는 의심, 그 간단하게 그렇게만 나가는 거여.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쉴 때 ‘이뭣고~?’  됐잖아.”

—네, 감사합니다. 스님.

Posted by 닥공닥정

 

 

§(242) (게송)방거화쟁발~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이모 코 / ‘이것이 무엇인고?’의 『이것』은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는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이 벌여 놓은, 비로자나 법신불—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가 다 비로자나 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하는 것은 참선(參禪) 공부를 하는 것이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의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42)—84년 7월 첫째 일요법회(84.07.01)에서.(용242)

 

(1) 약 6분.

 

(2) 약 12분.


(1)------------------

방거화쟁발(放去花爭發)이요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지번로배(誰知番虜輩)가  개개착피구(箇箇着皮裘)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방거화쟁발(放去花爭發)이요. 놓아 보냄에 꽃이 다투어 피고,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로구나. 거두어들임에 물이 거꾸로 흐르는구나.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별이 있고, 달이 있고, 땅에는 산과 강이 있으며, 숲과 바위와 인간과 동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잡화점을 벌려놓은 것처럼, 하늘과 땅에 큰 백화점을 벌려놓은 것처럼 온갖 것이 진열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이, 그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온갖 상품을 온 우주법계를 가게 삼아서 이렇게 벌려 놓았습니다.

그것이 해가 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밤에는 달이 뜨고 낮에는 해가 빛나.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온갖 초목이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겨울에는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며. 이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순회하는 것, 이것도 다 낱낱이 비로자나 법신불의 살림살이를 갖다가 놓아 내보낸 소식이고.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라. 거두어들임에 물이 거꾸로 흐른다. 그 물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흐르고 흘러서 전부 바다로 돌아가는데,
거두어들이는 소식은 무엇이냐 하면은 그 물을 꺼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최초에 물이 흘러 내려오는 그 수원지(水源地)에 도달할 것이다.

저 신의주 있는 데서 압록강을 거슬러서 계속 올라가면 백두산 천지(天池)로 도달하듯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바로 물을 거슬러서 꺼꾸로 올라가는 거와 마찬가지다.

산천, 하늘과 땅에 온통 벌어져 있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그놈을 거두어들이면 어디로 돌아가냐 하면은 비로자나 법신불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여(眞如)의 세계로 돌아간다.(처음~6분5초)

 




(2)------------------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듣는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처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이 벌여 놓은, 비로자나 법신불—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가 다 비로자나 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법(法)을 터득하면 일체법(一切法)이 다 한 법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한 법을 옳게 믿고 터득을 하면 교육 문제나 또는 가정 문제나, 회사 문제나, 사회 문제나, 국가 문제나, 세계 인류 문제나 모든 것이 다 한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하는 것은 참선(參禪) 공부를 하는 것이여.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이뭣고?’
이 가운데에는 너무 너무 잘 아시고 참선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시고 또 올바르게 실천을 하시는 분도 많으시지만,

절에 법회를 몇 해를 댕겼는데, “대관절 ‘이뭐꼬’라는 것이 무엇인고?  이모의 코? 이모 코가 어쨌다는 거여? 밤낮 가면 ‘이모꼬’하라고 그러는데, 이모 코가 뭣이 어쨌다는 거여.
이모 코는 어떻고 고모의 코는 어떠냐. ‘이모 코’가 좋다는데 어째서 ‘이모 코’가 도대체 무어냐?”하고 이렇게 몇 해를 당겨도 그 말을 못 알아 듣습니다.

그건 웃을 일이 아니고, 그 동안에 처음 듣는 소리이거든.
용화사 가면 좋다니까 오기는 왔는데 갈 때마다 ‘이모 코’만 찾으라고 하니까, 그거 참 '이모 코'가 별난 놈의 ‘이모 코’가 다 있다.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아하! 『이모의 코가 아니라 ‘이뭣고?’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게 무엇을 가르키는 말이냐 하면,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말이여.

‘귀가 듣지 무엇이 들어? 귀가 없으면 못 듣고, 귀를 콱 먹어 버리면 못 들으니까 귀가 듣지, 듣기는 무엇이 들어?’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여.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속에 있어. ‘귀가 듣는다’하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이고, 귀를 통해서 듣는다 그말이여.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저 밖에를 보면 창문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이여. 이러한 비유도 엄격히 따지면 폐단이 있는 말이지만, 편의상 이러한 비근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들어. ‘귀를 통해서 무엇이 들어?’ ‘마음이 듣지.’

'마음이 듣는다' 그 말이 맞는 말인데  들은 풍월(風月)로 ‘마음, 마음’하지, 실지 '그 마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다그쳐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은 풍월로 그저 어릴 때부터 ‘마음, 마음’ 그저 속상한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속상할 줄도 알고 하는 그게 마음의 작용인데, 지금 ‘이것이 무엇이냐?’하는 그 『이것』은 그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일으키는 그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을 「마음」으로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용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작용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서 「마음」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무엇이, 그리 슬퍼할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기쁠 때도, ‘기뻐할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의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뭣고?’를 찾어도 도무지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면 환히 배꼽 밑에 불이 켜지고, 따악 눈을 감고 ‘이뭣고?’를 하면 온갖 것이 환히 천상도 나타나고 지옥도 나타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환히 다 나타난다고, 그래 가지고 자기는 도통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을 하고 그러한 노 보살님이 그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용화사에서 하도 법문을 많이 들어서 그러한 것을 자랑하는 분은 없을 것이고,

설사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도 감히 챙피해서, 그런 소리만 하면은 ‘마섭(魔攝)이 되었다. 마구니에 빠졌다.’고 호통을 맞을 테니까 은근히 함부로 말은 안하고, 비밀 은근히 뒷구녘에서 그런 것을 자랑을 해 가지고 자기를 도통한 것처럼 믿게 할려고 공작을 하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참 가슴 아픈 일이라 할 것입니다.

찾아갈수록—‘이뭣고?’를 할수록 알 수가 없을 뿐이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거나, 무엇이 나타나거나, 무엇이 보이거나 이러면은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것입니다.

어쩌다가 혹 그런 것이 슬쩍 스쳐가거나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幻相)이지, 그것이 참다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부정을 해 버려야 해.
다시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도 말고,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그걸 다시 나타나기를 바랄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그것은 귀 끝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생각해 버리고 다시는 관심을 거기다가 붙이지 말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
나중에는 그냥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더 깊어지면 ‘이뭣고?’ 소리를 아니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獨露)하면,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덮치기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그때 가서 ‘이뭣고?~’ 한번 이렇게 챙겨 주면 되는 것입니다.(51분24초~63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방거화쟁발~’ ; [선문염송] (혜심 지음) ‘제10권 408칙 만법(萬法)’ 해인신(海印信) 게송 참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2)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제팔식(第八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달마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풍월(風月) ; ①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②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읊거나 노래함. 또는 그 시나 노래.
*마섭(魔攝) ; 마(魔)에 포섭(包攝)되다. 마에게 끌려들어 그의 편이 되다.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살자(殺者)•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선가귀감(용화선원刊) p64.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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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 참선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

화엄경에 있는 말씀이건, 법화경에 있는 말씀이건, 금강경에 있는 말씀이건, 그러헌 데에 써 있는 것을 보고 알거나, 남한테 듣고 아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은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는 불교를 참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실 분이 있다면은 그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공부를 성취하고자 하거든,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고 하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다못 그런 생각이 나더라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화두만 들어 버리면 저절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3)(참선법E)-76년 1월 관음재일 법문(76.01.24.음) (용013)


 

 

 약 13분.


용맹심(勇猛心), 분심(憤心), 아까 처음에 신심(信心)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심과 용맹심이 없을 수가 없고, 그것이 있어야 그 다음에 이 ‘이뭣고?’ 화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의심!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의심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하니까 처음 듣는 분은 「이뭣고」가 무엇인가? 그러시겠지마는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 뭣고(이뭐꼬)?’ 이거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자(字)지만은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거든.

'사투리'지마는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무리 서울의 본토박이라 하더라도 이 참선할 때에는 불가불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뭣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러면 「이것」이란 게 뭐냐? “엄마!” 부르면 “왜?” 하고 대답할 줄 알고, “옥자야!” 하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알고, 또 듣기 싫은 욕하면 성낼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서울 일이 환하고, 서울역을 생각하면 서울역이 환하고, 또 대전을 생각하면 대전이 환하고, 또 20년 30년 전 어릴 적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지 않습니까?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플 줄 알고, 이 몸뚱이는 차를 타야 가고 걸어가야 가고 또 비행기를 타야 갈 수가 있고 배도 타야 하지마는, 이놈은 뭘 타고 가는 것이 아니거든.
가만히 앉아서도 퍼뜩 번갯불보다도 더 빨리 갔다 올 수도 있고, 아무리 비행기가 빠르다 해도 10년 전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현재 과학으로는.

그렇지마는 이놈은 10년 전도 갔다 올라면 갔다 오고, 50년 전도 갔다 올라면 갔다 오고, 앞으로 10년 뒷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하고, 백년 뒷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놈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종횡자재(縱橫自在)입니다.

이렇게 조화(造化) 무쌍(無雙)한 놈이 우리의 몸뚱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놈이 어디에 있는가는 알 수 없지마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그러한 조화 무쌍한 그런 놈이 있어요.

그것을 보통 ‘그것이 무엇이냐? 마음이지, 그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다 대답하시겠지마는 그건 다 들은 풍월로 하시는 말씀이라, 이 참선하는 데에는 들어 가지고 아는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화엄경에 있는 말씀이건, 법화경에 있는 말씀이건, 금강경에 있는 말씀이건, 그러헌 데에 써 있는 것을 보고 알거나, 남한테 듣고 아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 참선하는 데에는 다 싹 쓸어서 다 잊어버리고, 다 버리고서 참선을 하셔야 합니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은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는 불교를 참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실 분이 있다면은 그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깨끗이 다 씻어 없애 버리고 금방 갓난애기가 아무 생각 없듯이, 그러한 갓난애기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다못 ‘이것이 무엇인고...?’ ‘이 무엇고...?’ 이렇게만 해 가셔야 됩니다.

이것을 '마음'이니 '성품'이니 그것이 '자성불'이니 그런 생각 여기다 붙여서는 안 됩니다.
일체 그러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고, 이리저리 더듬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무슨 경전에서 본 말씀을 여기다가 참조를 해서 비교해 보고, 그러한 것은 중생의 ‘알음알이’라 이 공부에는 하등의 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공부를 가로막는 병에 지내지 못합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공부를 성취하고자 하시거든,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고 하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다못 그런 생각이 나더라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화두만 들어 버리면 저절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방법이 몸에 있는 것은 자꾸 손으로 집어 던지면 되겠지만, 이것은 뭐 손으로 던질 수도 없는 것이고, 던질라고 생각냈다 하면은 벌써 던질라고 하는 망상이 하나 더 생겨날 따름입니다.

그래서 던지는 묘방은 다른 게 아니라, ‘이뭣고?’해 버리면 던져지는 거예요. 「판치생모」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이뭣고」하시는 분은 ‘이 뭣고~?’
무슨 근심스러운 생각이 나면은 바로 그 생각 버리지 말고 ‘이뭣고?’하면 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근심스러운 일이 있거나, 또는 억울한 말을 듣고 성이 나거나, 무슨 기쁜 일을 당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이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들고 또 들고 하는데, 입으로는 들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번개보다도 더 빨리 딴 생각이 침범해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들어온 줄 알면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하시다 보면은 나중에 차츰차츰 익어지게 되어서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때가 옵니다.

그런 때는 몸도 가볍고 머리도 개운해서 아주 그렇게 상쾌하고 조용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로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는 마음 내면은 벌써 그것이 기쁜 마군(魔軍)이가 쳐들어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공부가 잘 될수록에 화두를 더욱 간절히 들어야 됩니다.

마냥 한번 잘 되기 시작하면 계속 잘 되면 참 좋겠는데, 내동 어제까지 잘 되던 것이 뚝 변해 가지고 영 안 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무릎이 아프고, 몸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고, 골치가 띵하고 해서 도저히 공부가 안 됩니다. 그 안 된다고 해서 짜증을 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 몸이 무겁고 지루하고 그럴 때에는, 그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니 일어나서 밖으로 맑은 공기를 쏘이면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좀 하면은 가슴도 후련해지고 머리도 개운해지고 몸도 좀 가벼워지면, 그러면 또 가서 방석에 앉아서 또 하시고, 이렇게 해서 그 고비를 지혜스럽게 잘 달래서 그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겁고 지루하고 한 것은 마장(魔障)이 붙어서 공부가 잘 안 될라고 그런 게 아니라,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설려고 그러한 상태가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높은 산을 오를 때에,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 설 때에는 매우 다리가 아프고 답답하고 숨이 가쁘고 그러지마는 그 고비 넘겨 놓고 나면은 그 다음부터서는 수월하게 내리막길이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도 잘 되어 가다가 또 답답하고 안 되어 가다가, 그러다가 또 그 고비를 어떻게 해서 넘기면은 또 그 다음에 잘 되다 그것을 수십 번, 수백 번 그런 고비를 넘고 또 넘어야 됩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면은 나중에는 밥 먹을 때에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고, 똥 눌 때도 들어지고, 걸어가고 일할 때에도, 이 화두를 좀 그만 두고 딴 생각을 할려고 해도 화두가 나타나 가지고 딴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잠을 잘 때 꿈속에서도 이 화두가 들어지게 됩니다.

저녁에 잘 때도 눈을 감고 화두를 들고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이뭣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면서 누워 있으면은 언제 잠이 온 줄 모르게 잠이 들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아침에 눈을 딱 뜨면은 기분에는 한 10분 누웠다 일어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은 대 여섯 시간 이렇게 자져 갖고 있단 말씀이에요.

그래 아침에 눈을 딱 뜨는데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엊저녁에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 갖고 있다 그 말이에요.

이러한 지경에까지 오도록 열심히 열심히 하시면은 그 가운데에 무량겁으로 지어온 갖은 팔만사천 가지 업장(業障)은 그 속에서 다 녹아지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 육도윤회를 면하는 생사해탈(生死解脫)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믿고 고대로 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무엇 때문에 조실스님께서 팔십 고령(高齡)에 이르도록 가만히 당신 공부하시고 조용히 지내시면은 편하실 텐데, 팔십 고령에 혈압은 그렇게 200이 넘나드시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 피를 토하는 그러한 간곡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한 법문을 마지막 열반하신 날까지 그렇게 해주실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이 법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렇게 여러분들의 생사해탈하는 데에 유일한 묘방(妙方)이기 때문에 마지막 이 사바세계를 하직하신 그날까지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큰스님의 법은(法恩)을 갚는 길은 오직 여러분 자신들이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길 (법문 끊김) ...묘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31분16초~44분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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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심(勇猛心) ; 용감하고 사나운 마음.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종횡자재(縱橫自在) ; 자기 마음대로 행함.
*조화(造化) ;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신통하게 된 일. 또는 일을 꾸미는 재간.
*무쌍하다(無雙--) ; 서로 견줄 만한 짝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판치생모(板齒生毛), 무자(無字) 화두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내동 ; ‘일껏(모처럼 애써서)’의 사투리.
*포행(布行) ; 스님들이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한가로이 뜰을 걷는 일.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묘방(妙方) ; 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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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공부는 거문고줄 고르듯이 해라 / 화두드는 법 / 염불(念佛)과 예배(禮拜) / (게송)불설일체법~.

예배의 뜻은 ‘굴복무명(屈伏無明)하고 공경진성(恭敬眞性)’이거던. 무명을 굴복 받어. 무명을 굴복하고 참된 성품을 공경허는 것이 그것이 예배의 참다운 뜻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참선을 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만은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아 가지고 ‘이뭣고?’허라고 하면은 ‘이뭣고?’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송담스님(No.377) - 1989년 2월 첫째일요법회(89.2.5)에서. (용377)

 

(1) 약 21분.

 

(2) 약 4분.


(1)------------------

참선이란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허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헌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허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는 이 책은 그러헌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기가 쇠로 맨든 소 등어리에 몸뚱이 채 처박고 들어가듯이 하라, 그렇게 간절히 해라 허니까 ‘그렇다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봐야겠다. 이거 과거에 모든 불조(佛祖)가 다 허고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이 하는데 어찌 나라고 못할 것인가?’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을 한목 발(發)해 가지고, 이것을 나도 한번 해볼 수 밖에 없다.’

그래 가지고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이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자'를 아주 탁! 써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내가 금생에 결정코 이놈을 기어코 아주 해결하고야만 말겠다.’ ‘이뭣고?’를 막 해가지고는, ‘까짓거 뭐 난들 왜 못허냐?’
참 그런 용기와 신심을 내는 거, 그런 분심을 내는 건 대단히 좋은데, 이것이 문제가 있다 그말이에요.

이 공부를 허는 데에는 거문고줄 고르듯이 해라. 거문고줄을, 기타줄도 마찬가지죠.
거문고줄을 너무 팽팽하게 되게 갖다가 졸라매면, 까딱하면 그 줄이 끊어져버리거나 또 타다가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더라도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말이여. 팅팅 해 가지고.
또 너무 되게 매면은 또 끊어진다 해 가지고 겁을 먹고 너무 느슨하게 매면, 둥둥둥 해 가지고 또 제 음가가 안 난다 그말이여.

 

너무 세게 매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매도 안 되고, 반드시 그 음가에 맞춰서 적당허니 그놈을 맞춰야 훌륭한 곡을 갖다가 연주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바른 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를 떠억 허고, 허리를 쭉 펴고 턱을 갖다가 이렇게 잡아당기고 그래서 머리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 해도 안 되고 앞으로 숙여도 안 되고 또 옆으로 이렇게 기울어지지도 않게,
단정허니 하면서도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또 눈에 힘도 빼고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고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말이여.

아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 저 안에다 갖다가 혀를 꼬부려 오그린다.
눈은 편안하게 평상으로 뜨되, 평지에서 약 2m 지점에 눈을 떨구라. 2m 지점에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해서는 안 돼.

어떤 사람은 2m 지점에다 눈을 떨구라 하니까, 2m 지점에다가 까만 콩을 하나 갖다 놓고 참선할 땐 그놈을 갖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말이여. 그런 것이 아니여요.
눈을 평상으로 뜨되, 2m 지점에 떨구되, 의식적으로 본 바는 없어야한다 그말이여. 평상으로 뜨되 아무 것도 보는 바는 없어. 다맛 이 코 끄터리와 단전(丹田)이 일 수직(垂直) 상에 놓이도록 따악 그렇게 하구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 부위가 약간 볼록하게 느끼고 또 숨을 내쉴 때에는 배가 약간 홀쪽하게 해서, 숨을 내쉬고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해졌다가 홀쪽해졌다 그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여.

그래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수르르~허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함을 느끼고, 또 그렇게 들여마셨으면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쉴 때에는 조용허게 길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게 하되, 너무 홀쭉히 해 가지고 뱃가죽이 등어리에 가서 딱 붙으도록 얼굴이 벌게져서 숨이 가쁠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게 아녀요. 7부나 8부 쯤만 내쉬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그렇게 쉬는….

 

이 호흡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고, 건강에도 좋고 피로회복도 되고 또 피도 맑아지고 혈압도 내려가고 또 정신도 안정이 되고 여러 가지가 좋습니다.

그렇게 좋은데, 이것도 무리하게 억지로 잔뜩 배가 터지도록 들여마셔 가지고, 참으라 하니까는 아주 얼굴이 벌게지도록 맹꽁이 배처럼 해 가지고 억지로 그냥 참고,
또 천천히 길게 내쉬라 하니까 30초, 1분, 2분이 되도록 막 그냥 눈알이 튀겨져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요. 그렇게 했다면 참으로 큰일나는 것입니다. 병이 생겨도 큰 병이 생기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첫째 무리가 없이 해야 돼요. 30분, 1시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그러헌 일이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또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하라니까, 계속해서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하는데, 처음 시작하신 분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하지만,
한 달·두 달·석 달 또는 1년 이렇게 하다보면 ‘이뭣고?’ 한번만 들고서 숨을 몇 번을 쉬어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고대로 있는 그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떠억 그 의심만을 이렇게 관조할지언정,

자꾸 거기다, 있는 ‘이뭣고?’ 의심에다가 ‘이뭣고?’를 덮쳐서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거든.
'심지'에다 불을 댕겨서 불이 딱 붙어 있으면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호하면 그만이지, '심지'에 불이 붙었는데도 자꾸 성냥불을 켜서 자꾸 거기다가 불을 붙일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여.

불이 꺼져버리면 다시 또 불을 켜듯이, 화두(話頭)가 없어졌거나 딴 망상(妄想)이 들어오면 그때 다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가 고대로 있으면, 있는 그 ‘이뭣고?’를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그것을 갖다가 잘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돼.

덮어놓고 ‘이뭣고?’허라니까는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해 가지고 ‘오늘 내가 5만 번을 ‘이뭣고?’를 했다.’ 이 참선은 그런 것이 아니여.

염불(念佛)은 하루에 5만 독(讀) 내지 10만 독씩 이렇게 정해놓고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백일기도를 한다든지 천일기도를 한다든지 또 그런 분이 있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염불도 사실은 횟수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거든. 염도염궁무념처.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고?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이다. 마음을 부딪쳐 가지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아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이르러, 생각이 생각 없는데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에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부처님한테서 자금광이 나오거든.

부처님 몸뚱이는 자금색(紫金色) 색상이기 때문에 부처님 몸뚱이, 아미타불한테서 항상 자금광이 빛나는데 바로 우리가 염불을 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이르면은 바로 눈‧코‧입‧귀...육문(六門)에 자금광(紫金光)이 나오리라.
염불도 염도염궁무념처가 되도록 하는 것이지, 온갖 망상 잡담하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 어쨌든지 십만 독만 채울려고 작정을 하거든.

또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천 배를 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에 삼천 배.. 구천 배를 하리라’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한 자리, 두 자리, 석 자리, 넉 자리 해 가지고 그냥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해 가지고, 1초 동안에 한 자리씩 해서, 1초에 한 자리면은 1분이면 육십 자리요, 한 시간이면 뭐 삼천육백 자리... 횟수로.

 

물론 초학자는 횟수로라도 그렇게 많이 허다보면 차츰차츰 참다운 예배의 뜻을 터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횟수 위주로의 예배보단 그 예배(禮拜)의 참뜻을 알고 하고, 예배의 뜻은 ‘굴복무명(屈伏無明)하고 공경진성(恭敬眞性)’이거던. 무명을 굴복 받어. 무명을 굴복하고 참된 성품을 공경허는 것이 그것이 예배의 참다운 뜻인 것입니다.

황벽 선사(黃蘗禪師)라고, 육조 스님 밑에 남악회양 선사,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밑에 마조도일(馬祖道一), 마조도일 밑에 백장회해(百丈懷海), 백장회해 밑에 황벽선사(黃蘗禪師),
아주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아주 정통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대도인이신데, 그 황벽 선사는 평생을 시간만 있으면 법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했습니다.

뭐 그분은 천 배가 되었건 삼천 배가 되었건 그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깨달음의 경지여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예배를 허고, 예배가 곧 참선이요 참선이 곧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지, 바로 그냥 그것이 보림(保任)이고, 바로 그것이 설법이고, 그것이 중생교화여.
어떻게 평생 동안을 예배를 했던지 황벽 스님의 이마에는 주먹탱이만 혹이 붙었습니다. 여기 아주 혹이 생겼어.

그래서 예배에도, 그러한 황벽 선사가 허신 바와 같은 바로 그러헌 예배를 해야 할 것고, 염불을 하시는 분도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해서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는 그러헌 염불을 하셔야.

참선을 하는 사람도 정말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간택 받아가지고,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독로해서, 의심을 해 가고 의심을 해 와서, 들어가고 들어와.
처음에는 자꾸 반복을 해서 되풀이해서 하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헐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돼.

 

습관이 되면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그냥 산을 봐도 ‘이뭣고?’요, 해를 봐도 ‘이뭣고?’요, 물을 봐도 ‘이뭣고?’요, 나무를 봐도 ‘이뭣고?’요, 사람을 봐도 ‘이뭣고?’요, 앉아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를 헐랴고 해서가 아니라 항상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는 거여.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가지고 성성적적한 가운데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줄 몰라. 시간 가는 줄도 몰라. 그러면서도 성성적적해서 의단이 터억 타성일편이 된다 그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고대로, 의단이 고대로 독로해.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은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말이여.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그대로 있고, 목욕을 해도 그대로 있어.

그러다가 하루·이틀·사흘·닷새·엿새·이레 일주일을 이렇게 지내다보면,

어떠헌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그말이여.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허지만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헌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그래서 모든 공안에 다 맥힘이 없고 그러면, 깨달은 뒤에 보림하는 법을 다시 지시를 받어 가지고 그때에 비로서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토굴 살림을 허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서 이 장양성태(長養聖胎) 해 가지고, 고인(古人)의 모든 어록도 한번 보고, 또 나아가서는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서적도 한번 보고,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도 한번 훑어보고, 그래서 안팎으로 힘을 충족해 가지고 그래가지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나가서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참선을 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만은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아 가지고 ‘이뭣고?’허라고 하면은 ‘이뭣고?’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오늘 무진년 마지막 날이요, 또 새해를 맞이하는 이 즈음에, 그 동안에 누누히 이런 말씀을 일러드렸지만은 오늘 좀더 간곡히 말씀을 드린 것은,
정말 이번에 백일을 맞이한 최웅식 동자와 같이 우리도 그런 순일무잡하고 청정무구한 그런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새해에는 초하루 날부터서 365일을 하루와 같이 오늘 지금 이 법문을 듣는 이러헌 마음가짐으로, 정말 간절히 그리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헐 것은 이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41분3초~61분40초)

 

 

 



(2)------------------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인데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은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것을 대장경을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합니다.
그 일체경을 설하신 것을 무슨 목적으로 설하셨느냐? 일체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나의 이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체법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물에 빠진 거 건져내듯이 막 건져내고, 부자되게 해 달라니까 다 부자로 맨들어 주고 그런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정말 참다운 뜻은 우리 중생 낱낱이, 우리 자신의 일체 마음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일체 마음이 없으면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이면 내게 모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없다'고 허는 것은 마음이 공(空)해 버리면,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일체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냐?

내 마음이 온갖 생각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와 팔만사천 번뇌·망상이 들끓으니까 그 팔만사천 번뇌·망상을 제도허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내가 그런 마음이 딱 끊어져 버려. 공(空)해 버렸다면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필요한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병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 약이 필요한 것인데, 내가 모든 병이 다 나아버렸다면은 뭐하러 그렇게 쓰고 고약한 약을 계속 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다운 불법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고 끝을 맺고자 합니다.(41분3초~65분5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12에서.
(52)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게송) ‘아미타불재하방~’ ; [한가로운 도인의 길 - 나옹화상법어집] (김달진역주, 세계사刊).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보임(示諸念佛人/8首) 게송 참고. p166.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범] Amitabha Buddha :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 줄여서 미타。범본경전(梵本經典)에는 아미타바불타•아미타유사불타의 두 이름이 있다. 한역(漢譯)한 여러 경전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거니와 보통으로는 아미타불 무량수불이라 한다.
정토삼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2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하여 성불하였으니 이가 아미타불이다.
구원한 옛적에 성불한 아미타불[本佛]에 대하여 이 부처님을 10겁 전에 성불한 아미타불[迹佛]이라 한다.
*육조 스님,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을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로 좌선(坐禪) 수행을 말한다.
*예배(禮拜) ; 거룩하고 성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절을 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11 참고.
(五一)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身口意가  清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보림(保任 보임)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기연(機緣) ; 어떤 기회를 통해 맺어진 인연(因緣).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장양성태(長養聖胎) ; 성인의 태(胎)를 길러 양성함.
[참고]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眞)부처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比喩)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밑 없는 배=무저선(無底船) : ①몰저선(沒底船)·무영수(無影樹)·몰현금(沒絃琴)·무공적(無孔笛)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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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불설일체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일체경(一切經) ; 대장경(大藏經)과 같음.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