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의심-화두드는 법)'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9.10.27 §(122) '판치생모' 화두드는 법 /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 / 불교의 목적은 바로 나의 근본,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을 깨닫는 것.
  2. 2019.04.09 §(513)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자기기 믿는, 믿어지는 스님으로부터 지정을 받는 것이 좋다 /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이뭣고?' / 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3. 2017.10.07 §(364) ‘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 머리털에 붙은 불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4. 2017.06.30 §(715) 전강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라도 자주 듣다 보면 공부해 나가다가 문제점이 있는 것이 바로 잡아진다 /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의심(疑心)입니다 / (게송)군금욕식무위리~.
  5. 2017.02.03 §(539) 참선자세. 단전호흡(준비호흡, 본호흡) / 의심이 화두의 핵심. 의심관(疑心觀) / 大疑之下 必有大悟 / 참의심[眞疑] / 우리의 본업(本業)은 이뭣고?
  6. 2016.04.11 §(480) (게송)직하본래무일사~ / 싸움 속에서 싸움 없는 삶을 산다 /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 화두지, 알 수 없는 거 내놓고 의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님.
  7. 2016.03.25 §(081) 마음이란? / 나의 주인공 단속 아니한 죄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하게 된다 / 내가 나를 찾는 공부 / (게송)생사해탈사비상(生死解脫事非常)~
  8. 2015.12.23 •§•(277) (게송)취적기우자~ / 해 갈수록에 알 수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9. 2015.08.12 §(256) 의심관(疑心觀) / 일관(日觀)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
  10. 2015.05.07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122) '판치생모' 화두드는 법 /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 / 불교의 목적은 바로 나의 근본,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을 깨닫는 것.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 (용122)

 

약 15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판치생모라고 하는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안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하면 조주 스님께 어떤 스님이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서래의,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달마 스님이 무엇하러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근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나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은 있어서는 같은 뜻인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참선법을 가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기 위해서 달마 스님이 오셨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은데, 그러한 대답을 하시지 아니하고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판치에 털이나?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자 이빨 위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의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됩니다. 천칠백이 넘는 것입니다.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수없이 많고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이나 되는데, 그러면 그 많은 공안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 것이냐?

 

일본에서는 의리선(義理禪)이라 해가지고 이 공안을 하나씩 스승으로부터 받아가지고 그 하나를 며칠 동안에 걸쳐서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해서 온갖 방법,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가지고 그 스승한테 가서 딱 이릅니다. 이르면 '되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하나의 공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 개 이상의 공안을 통과를 하면 '너는 조실이 될 자격이 있다. 너의 제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하고 자격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에서부터서 쭉 내려오는 정통적인 활구참선법에 있어서는 공안을 애당초부터 이론을 사용하지 말도록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을 가지고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이리 해가지고 어떠한 결론을 얻은 것은 설사 그 결론이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 그럴싸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공안에 바른 답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이론, 우리가 아무리 체계 있는 이론을 세웠다 해도 깨달음 앞에서는 일종에 분별심(分別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가르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10년 20년을 세월을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을 애쓸 필요가 없이 그 공안에 대한 답을 다 가르켜서 알겄게만 하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것을 애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 말씀이여.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분별심을 가지고 공안을 천착(穿鑿)을 하지를 말아라. 따지고 분석하지 말아라.

 

분별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이것을 바로 '죽을 사(死)'자, '글귀 구(句)'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여.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 이론과 일체 말 길과 일체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버릇을 버리고서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또는 '어떻게 하면 병도 깨지 않고 오리도 다치지 않고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다못 그렇게만 다구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살 활(活)'자, '글귀 구(句)'자, 활구참선(活句參禪), 사구참선의 반대 활구참선.

 

활구참선! 이 활구참선을 해야만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수수께끼 하나를 여러분에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데 많이 먹으면 죽는다. 그런데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없다.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공기다, 물이다' 별별 소리 합니다마는 다 맞지 않는 소리고, 그것은 '나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아무리 먹어봤자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이 먹으면 지가 안 죽고 못 배깁니다.

그런데 그건, 다른 것은 안 먹을라면 안 먹을 수가 있는데 나이는 아무리 안 먹을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떡국을 보지도 않고 되돌아서도 나이는 먹어지는 것입니다.

 

또 수수께끼 하나를 말하겠습니다.

「눈은 희고 배는 둥근 것이 무엇이냐?」

 

'눈은 희어? 눈은 희고... 그래 사람 눈이 희지. 흰창이 희니까. 사람, 배는 둥글어? 아닌데. 사람 눈이 희다고만 할 수가 없고 가운데 검은창이 있어서 그게 안 맞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도저히 분별심으로 따져 갖고는 알게 되아 있지를 않습니다. 이건 수수께끼는 수수께낀데 따질수록에 점점 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눈이 희고 배는 둥근 거... 북극에 가면 흰곰이 있다는데 흰곰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그건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안이 아니고 수수께끼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설파(說破)를 해 드리는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학자(學者)에게, 참선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틀린 것입니다, 일어나기가.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설파를 한다고 한 것은 공안이 아니라 수수께낀데 쪼끔 이상한 수수께끼여. 「눈은 희고 배는 둥근 것이 무엇이냐?」 '하늘에서 내린 눈은 희고, 우리가 먹는 과일 배는 둥글다' 이 말이예요.

이것을 갖다가 눈과 배를 결부(結付)를, 한 몸뚱이에다 붙여놓고 그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동물을 아무리 생각해봤자 알 수가 없거든. '하늘에서 내린 눈은 희고 깎아 먹는 배는 둥글다' 이렇게 볼 때에는 여지없이 이거 들어맞거든.

 

화두를 그런 식으로 '판치생모?' 판치(板齒)와 생모(生毛)를 함께 붙이니까 모르니까, 둘로 띄어 갖고 '그럼 판치가 무엇이냐? 생모가 무엇이냐?'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그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를 따져서 알아맞춘 것이 아니고 '조주가, 조주 스님이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느냐?' 그 조주, 판치생모라고 한 그 뜻을 우리는 참구(參究)를 해야 하는 것이여.

 

그것도 이론을 가지고 따져서 알아맞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그 「어째서」에다가 우리의 의심(疑心)의 눈을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왜? 왜 조주는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생모가 무엇인고'가 아니에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조주가 판치생모라고 한 그 조주의 뜻을 우리는 참구를 해야 하는 거여.

 

참구를 한다고는 하되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이러해서 그랬는가? 저래저래해서 그랬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어째서」에다가 우리의 의심의 눈을 박아야 한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이여. 활구참선을 하는 요령이여.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그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나기는 틀림없이 만났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지어 가야 공부를 다져 나가야 되는 것이여.(47분25초~62분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달마(達摩)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흰창 ; '흰자위(눈알의 흰 부분)'의 사투리.

*검은창 ; '검은자위(눈알의 검은 부분)'의 사투리.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사구선(死句禪) ; 사구참선(死句參禪).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병근(病根 병 병/뿌리 근) ; 병(病)이 생겨난 뿌리[根], 근본적(根本的)인 원인.

*결부(結付 맺을묶을 결/붙일의지할 부) ; 일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연관시켜[結] 붙임[付].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Posted by 닥공닥정

§(513)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자기기 믿는, 믿어지는 스님으로부터 지정을 받는 것이 좋다 /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이뭣고?' / 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천칠백 화두가 있지마는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그놈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시삼마(是甚麽)화두여. “시삼마”를 우리말로는 '이 · 뭣 · 고?'거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송담스님(No.513)—93년 9월 첫째일요법회(93.09.06) (용513)

 

약 14분.

 

화두를, 개별적으로 화두(話頭)를 신청하는 분이 있어서 시간 관계로 개별적으로 화두를 설해 주지 못하고 이 법상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간단하게 화두 드는 법을 일러드리겠습니다.

이미 화두를 타신 분은 화두를 들고서 떠억 들으시고, 화두를 안 타신 분은 이럴 때에 정식으로 화두 드는 법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참선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제여. 과제라고 하면 좀 어폐(語弊)가 있지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그냥 처음에 화두를 타기 전에는 다만 그렇게만 주욱 해 나가지만 본격적으로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자기기 믿는,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딱 지정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책에는 화두 드는 법이 얼마든지 있어서 책을 보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책을 보고 자기가 화두를 간택을 하면 문제가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고 하니 조금 하다 잘 안되면은 이거 화두가 자기한테 안 맞아서 그런가보다. 다른 화두를 또 가지고 하고. 이 화두 저 화두, 세 개, 네 개, 다섯 개, 몇 개를 자꾸 바꿔간다 그말이여.

 

그리고 공부가 잘 안될 때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화두를 잘못 드는지 스스로 자꾸 그런 것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서 공부를 순일하게 할 수가 없어.

그래서 화두는 자기가 스스로 간택하기보다는, 물론 스스로 간택해서도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어요. 있을 수가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기보다는 믿는 선배한테 탁! 지적을 받아서 해야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간에 그 화두를 자꾸 바꾸려고 하는 그런 가벼운 생각이 안 나는 거다 그말이여.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면 누구나 처음부터 잘된 사람은 없어.

처음에는 곧잘 잘된 것 같은데 한 며칠 지나가나 몇 달 지나면 뚝 변해 갔고 영 안되고, 한 일 년 지나면 또 되다가 안되다가 자꾸 그런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법문을 자주 듣고 좋은 도반들과 같이 애를 써야 흔들림을 받지 않고 서로서로 울타리가 되어서 중단하거나 퇴태(退怠)하지 않게 되는 것이여.

 

 

천칠백 화두가 있지마는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그놈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시삼마(是甚麽)화두여. “시삼마”

 

“시삼마”를 우리말로는 '이 · 뭣 · 고?'거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이것이 무엇인고?'인데, 그것을 경상도 말로는 '이 뭣 고'거든.

'이 것 이 무 엇 인 고' 일곱 자인데,  '이 뭣 고'하면 석 자로 간단해서 옛날부터 화두를 들 때에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래서 나쁠 것은 없으나 다 옛날부터 '이뭣고?' 선지식들이 다 그렇게 가르치셨어.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뭣고?' 그래도 괜찮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그래도 되고.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몸뚱이고 저 몸뚱이 따질 것 없고 그냥 '이뭣고?' 그렇게만 해도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뭣고?' 그 뜻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여. 그동안에 많이 했기 때문에.

 

'이뭣고?'

 

'이뭣고?'하는, 나중에 가서 또 한 걸음 더 다그쳐 들어가려면 지금 '이뭣고?'해 놓고 '지금 이뭣고?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다그쳐 들어가고.

 

'이뭣고?'할 때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으로 '이뭣고?~' 이렇게만 하는 거야.

 

처음에는 화두를 '이뭣고?'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을 동안에는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이뭣고?'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화두를 새로 안 들어도 되어요. 알 수 없는 의심을 따악 이렇게 관(觀)하거든.

 

그러다가 뭔 소리가 들리거나, 무엇이 눈에 띄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그 의심이 없어져 버리면 그때 다시 '이뭣고?~' 이렇게 챙기는 거여. 자꾸 챙기고 놓치면 챙기고, 놓치면 챙기고.

하도 잊어버려 싸니까, 이놈이 안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이놈을 잠시 일초 동안도 틈을 안 주기 위해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런 게 아니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따악 반가부좌를 하고서 허리를 쭈욱 펴고, 허리를 펴라니까 너무 또 뒤에로 자지바지해서 이렇게 하면 못쓰는 거여. 단정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그리고서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

 

눈을 너무 잠이 오니까 눈을 뒤집어 까고 그래 못쓰는 거고. 또 눈을 뜨고 이것저것이 보여 싸니까 '아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편하겠다' 해 가지고 눈을 감고 하면 안 돼.

눈을 감으면 좀 조용한 것 같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눈을 감고 하면은 나중에 차츰차츰 생각이 조용해 지다 보면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혼침에 떨어진 줄 모르게 혼침에 빠져 갔고 자기 딴에는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삼매하고 혼침하고는 다른 거여.

 

그래서 눈은 평상으로 뜨고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상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이놈을 다루어 나가야 하는 거여.

 

참선을 하려면, '집에서 참선을 하려면 뭔 전화가 오고 애들이 뭐라고 하니까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얼마든지 전화 오면 전화도 받고, 애들이 와서 응석을 하면 투덕투덕 하면서 그러면서도 자기가 흔들리지만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여.

 

봄에 시원할 때는 바람이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면 아 바람 분다고 공부를 못하며, 산중에서 하다 보면 시냇물이 줄줄줄 흘러가는데 그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공부 못한다고 그건 말이 안 돼.

시냇물 소리는 시냇물 소리대로 그것이 다 법문(法門)이고, 새 우는 소리는 새 우는 소리 고대로 그냥 법문으로 들어. 그 소리 들으면서 터억 화두를 챙겨보라 말이여.

 

그렇게 하다가 자동차 소리는 또 뭐냐 그말이여. 자동차 소리가 붕붕 뻥~ 하니, 붕붕 뻥~ '이뭣고?' 딱 하면 그만인 거란 말이여. 그것 때문에 공부 못한다 소리는 그거 참선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거여.

 

이제부터서는 자동차 소리는 자동차 소리대로 놔 둬. 기차 소리는 기차 소리대로 놔 둬. 비행기는 비행기, 연전에 용주사에서 들었는데 입선 시간에 그 젯트기가 무엇이 어떻게 머리 위로 지나가면서 부르릉~ 정말 그건 안 좋드만 안 좋아.

안 좋아도 그 처음에는 대단히 귀에 거슬리고 안 좋더니 그러거나 말거나 졸다가 그 소리 나서 깨니까 아주 그 소리가 고맙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가정에서 살라면은 가정에도 여러 가지 식구끼리 모다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이뭣고?'를 한 사람은 그런 소리를 무던히 그냥 적당히 받아들이고, '예, 예,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탁 '이뭣고?'

 

시천장 뭔 말하면 요리 돌아서 가지고 그러면 그건 골낸 것이 당장 드러나니 '저것이 배 째라고 저런다'고 그럴 거 아니냐 그말이여.

그러지 말고 뭔 말하면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화평한 얼굴로 속으로는 따악 '이뭣고?'하면서 '예,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을 왜 요리 둘러서고 모른 척하냐 그말이여.

 

'이뭣고?'라 하는 것은 참 최상승법(最上乘法)이기 때문에 보살의 육바라밀(六波羅蜜), 십바라밀, 팔만사천 묘방편(妙方便)이 다 '이뭣고?'하는데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다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뭣고?' 하나만 법문을 들으면서 열심히 하고, 법회에 한 달에 한두 번 갖고 안되면은 전강 조실 스님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서 항상 틀어놓고 들으면서 공부를 해라 말이여. 잠도 안 오고 공부하는데 좋은 채찍질이 될 것이다.

 

앞으로 석 달, 또 산철 결제가 있으니까 산철에 방부(房付) 들이고 공부하실 분은 하고 또 가정에서 계실 분은 가정에서, 가정에서 자기가 떠억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해 보시면 참 좋을 것이다 그말이여.

직장에서 한 분은 직장에서 죽비는 못 치고 마음의 죽비를 딱! 치고, 쉬는 시간에도 떠억 일하면서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산다면은 세상이 살기가 힘이 드는 세상도 그런대로 살 만하는 거고.

 

세상이 살기가 어렵더라도 어려운 대로—보살이 수행해 나가는 데에 많은 어려운 지경에 일부러 들어가서 그 어려운 것을 이겨내면서 공부하려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자동으로 세속에서 이 일 저 일이 일어난다면야 아 그런대로 그놈을 잘 적응을 해서 살아간다면 신심이 저절로 솟구치고 환희심이 일어나고, 자기를 와서 예쁘다고 해 준 사람이나, 자기를 와서 몽둥이로 때린 사람이나, 얼굴에다 더러운 것을 발라 주거나 향수를 쳐 주거나 다 똑같은 거여, 그게.

 

받아들이는 마음에 달려서는 좋게 해 줘도 진심(瞋心)을 낼 수도 있고, 자기를 해롭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도 오히려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부가 자기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거여.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정치를 원망하기보다는 그런 여러 가지 상황 속에 자기가 적응할 수 있도록 자기를 단련을 하고 그러한 경험에서 더 신심(信心)을 내고 분심(憤心)을 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라.

 

그러면서도 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남편에 대한 빚, 아내에 대한 빚, 자식에 대한 빚, 부모에 대한 빚, 사회에 대한 빚, 국가에 대한 빚, 모든 중생에 대한 빚, 불보살에 대한 은혜는 다 갚으면서 한평생을 이 짧은—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도.

인자 내일 모레 죽게 될는지 언젠지 모르지만 다 마찬가지입니다. 늙고 젊고가 없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이 서늘한 가을을 정말 알뜰하게 잘 지내시기를 다짐하면서 법상에서 내려가겠습니다.(49분13초~63분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천칠백 화두.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대정장47, p.502a)에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으며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지 않는다. 다름 아닌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이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爾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Posted by 닥공닥정

<핸드폰에서는, 아래 법문이 위 유튜브에서 19분 23초부터 시작됩니다>

 

§(364) ‘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 머리털에 붙은 불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도학자(道學者)는 사량복탁 하는, 사량분별심으로 공안을 따지는 것을 부모를 죽인 웬수처럼 알아 여겨야 헌다. 사량복탁을 아주 부모 죽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잠깐 동안도 사량복탁을 허지를 말어라.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

 

**송담스님(No.364)—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 (용364)

 

약 15분.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화두를 이 생각을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허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허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허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허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 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허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 생각을 좀 헐려고 해도 안 되는 것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니,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도 여의지 못할 것이니, 가히 여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니라’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도라고 허는 것은 잠깐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여. 여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여.

화두도 의심이 잠깐 있다가 없다가 밤낮 그러면은 그것은 참다운 의심이 아니여. 진의(眞疑)가 아니여. 그것은 주작(做作)이여. 억지로 지어서 들 때는 잠시 있고 금방 의심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은 그것은 참의심[眞疑]이 아니여.

 

어떻게 허면 참의심[眞疑]이 돈발(頓發)허냐? 신심. 신심(信心)과 분심(憤心). 분심이 밑바탕이 되어야 거기에서 참다운 큰 의심이 거기서 나는 것이여.

 

그래서 어떻게 허면은 그 신심과 분심이 일어나냐 하면은, 마치 이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또 머리털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을 때처럼.

눈썹에 불이 타고, 불이 머리에 붙어 덩겨 가지고 불이 훨훨훨 타고 있는데, 그런 경우를 만나서 어떤 사람이 그 머리와 눈썹이 타고 있는 것을 놔두고 다른 급한 일을 있다 해 가지고 다른 데에다 생각을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 하더라도 곧 죽는다 해도, 지금 곧 저 방에서 죽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머리에 붙은 불버텀 훽 꺼버리고 끄고서 그리 쫓아가지, 자기 불이 훨훨 타는 것을 놔두고 ‘아들 죽을라고 하는 데 먼저 가보자’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어.

 

도를 닦는 것이, 우리가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할 때에 있어서 마치 눈썹에 불이 덩기고 머리털에 불이 덩근 것처럼 그것을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언제 어디서라도 화두를 들어! 화두를 들고서,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를 들고서 남편도 생각하고 아들도 생각하고 살림도 생각하고 사업도 생각을 해야 해. 일차적으로 자기 머리털에 불부텀 끄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허드라도 화두부터 들고 따져라 이거거든.

이렇게 허지 않고서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자기를 이 생사(生死)의 불구덩이에서 구제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허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해태(懈怠)허지 말 것이니, 중국에 자명초원(慈明楚圓) 선사는 저녁에 잠이 오면은 송곳으로써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와 정진을 하고, ‘고인(古人)네는 도를 위해서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대관절 나는 이 무슨 사람이냐?’

‘과거에 모든 선지식(善知識)과 불보살은 진즉 이 생사 문제를 요달해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대관절 어떠한 인간이기에 무엇이길래 오늘날까지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자기를 꾸짖고 고인에 견주어서 용맹심을 내면서 정진을 했어.

 

이러헌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를 단속해 나가고 1시간 1시간을 단속해 나간다면 어찌 신심이 돈발하지 아니하며, 어찌 분심이 돈발하지 아니하며, 어찌 대의정(大疑情)이 돈발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매우 더워서, 여러분은—모두 다 바다로도 가고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는데—이 더위에 이렇게 일요법회에 이렇게 많이 법회에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구태여 이러헌 경책의 말씀을 누누이 해 드릴 필요도 없이 진정 여러분은 이 법당 안에 더운 속에서 더운 줄도 모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부터 들을 것도 없는 소리를 그래도 열심히 듣고 계십니다. 그러헌 신심이면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부를 지어 가는 데 있어서 의근하복탁사유(意根下卜度思惟), 사량 분별심으로 이리저리 공안을 따지고 이치를 따지고 이러헌 것을 허지 말어라.

중생심으로 아무리 이리저리 따져 봤자 그래 가지고 따져 가지고 아무리 그럴싸한 어떠헌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침내 중생의 소견(所見)이지 참다운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량복탁(思量卜度), 공안을 따져.

자꾸 이 선지식이 “일러라!" 어떤 공안을 내놓고 “한마디 일러라! 당장 앉은자리에서 해결을 해야 해. 바로 일러야지, 이르기 전에는 잠도 자지 말어라” 이렇게 막 다그치니까, ‘이걸 한번 이것을 내가 한마디 이르고야 말겠다!’해 가지고 밤새 잠을 안 자면서 사량분별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그렇게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되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알아질 수는 있을런가 몰라도, 알아진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 소견이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이 생사 문제가 급허고 이 공안 타파가 급하다 하드라도 급할수록에 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를 해나가야지, 중생의 사량분별 사량복탁으로써 이것을 따져 가지고 무슨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따져 가지고서는 공부가 조끔도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참다운 의정도 거기서는 나지도 아니한 것이여. 참다운 의정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유복탁(思惟卜度)하는 이 네 글자는 바른 신심을 막아버리고, 바른 수행을 막아버리고 겸해서 도(道)의 눈[眼]까지도 가리워 버리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도학자(道學者)는 사량복탁 하는, 사량분별심으로 공안을 따지는 것을 부모를 죽인 웬수처럼 알아 여겨야 헌다 그거거든. 사량복탁을 아주 부모 죽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잠깐 동안도 사량복탁을 허지를 말어라. 탁!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 ‘이뭣고?’ ‘이뭣고?’(18분19초~33분3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무진장(無盡藏 없을 무/다할 진/감출·곳집 장) ; ①다함이 없는[無盡] 창고[藏]라는 뜻으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불교에서는 덕(德)이 광대하여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배우고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 ③무한량으로 많은 재물.

*‘번뇌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

[참고]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구마라집鳩摩羅什 역) 제8 불도품(佛道品)

是故當知  一切煩惱爲如來種  譬如  不下巨海  不能得無價寶珠  如是不入煩惱大海  則不能得一切智寶

이와 같이 모든 번뇌야말로 여래가 되는 씨앗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넓은 바다 밑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무가(無價)의 보주(寶珠)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곧 일체지의 보배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현장玄奘 역) 제8 보리분품(菩提分品)

又善男子  譬如有人  不入大海  終不能得  吠琉璃等無價珍寶  不入生死煩惱大海  終不能發無價珍寶一切智心  是故當知  一切生死煩惱種性  是如來種性

또 선남자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폐유리 등의 무가(無價)의 진보(珍寶)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의 번뇌라는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끝내 무가의 진보인 일체지에 대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생사 번뇌의 종성(種性)이 여래의 종성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 ·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니,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도 여의지 못할 것이니, 가히 여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니라’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74~175.

道不可須臾離(도불가수유리)니  可離(가리)면  非道也(비도야)요  工夫(공부)를  不可須臾間斷(불가수유간단)이니  可間斷(가간단)이면  非工夫也(비공부야)니라  眞正叅究人(진정참구인)은  如火燒眉毛上(여화소미모상)하며  又如救頭然(우여구두연)하나니  何暇(하가)에  爲他事動念耶(위타사동념야)리요

古德(고덕)이  云(운)호대  如一人(여일인)이  與萬人敵(여만인적)하야  覿面(적면)에  那容眨眼看(나용잡안간)이리요하니  此語(차어)가  做工夫(주공부)에  最要(최요)라  不可不知(불가부지)니라

 

도는 잠시도 여의지 못할지니, 가히 여의면 도가 아니요。 공부를 잠시라도 끊이지 못할지니,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 참구하는 사람은 마치 불이 눈썹을 태우는 듯하며, 또한 머리에 붙은 불끄듯 할지니, 어느 겨를에 딴 일을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리오?

옛 어른이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만 사람으로 더불어 싸운다면 마주 보고 어찌 눈인들 깜짝임을 용납하리요」하니, 이 말이 공부 지어 가는 데 가장 요긴한지라 몰라서는 안되느니라.

*진의(眞疑) ; 화두에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고원상인(蒙山和尙示古原上人)’에서.

話頭上(화두상)에  有疑不斷(유의부단)하면  是名眞疑(시명진의)니  若疑一上少時(약의일상소시)하고  又無疑者(우무의자)이면  非眞心發疑(비진심발의)라  屬做作(속주작)하니라  是故(시고)로  昏沈掉舉(혼침도거)가  皆入作得(개입작득)하리라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면 이 이름이 참의심[眞疑]이니, 만약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주작(做作)에 속하느니라。이런 연고로 혼침과 잡념이 다 마음에 들게 되느니라.

*주작(做作 지을 주/지을 작)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화두를 들 때 무상(無常)을 느껴 발심(發心)을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버텀 ; ‘부터’의 사투리.

*덩그다 ; '불이 붙다'의 사투리.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자명초원(慈明楚圓) : (九八七 – 一0四0) 속성은 이(李)씨。광서성(廣西省) 계림부(桂林府) 전주(全州)에서 났다。22세에 출가하여 멀리 분양 선소(汾陽善昭)선사의 회상에 갔었다。분양은 욕설과 세속의 더러운 말만 할 뿐이므로 하루는 정성을 다하여 간 하였더니, 크게 성내어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하고 내쫓았다。초원이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데, 분양이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그 바람에 크게 깨쳤다.

뒤에 석상산 숭승사(石霜山崇勝寺)와 담주 흥화사(潭州興化寺) 같은 여러 곳에서 교화하니, 법을 이은 제자가 50인이나 되었다。자명(慈明)은 54세로써 입적한 뒤의 시호(諡號)이고, 석상화상(石霜和尙)이라고도 한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공부를 지어 가는 데 있어서 의근하복탁사유(意根下卜度思惟), 사량 분별심으로 이리저리 공안을 따지고 이치를 따지고 이러헌 것을 허지 말어라’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77.

做工夫(주공부)호대  不得向意根下卜度思惟(부득향의근하복탁사유)니  使工夫(사공부)로  不得成片(부득성편)하며  不能發得起疑情(불능발득기의정)이니  思惟卜度四字(사유복탁사자)는  障正信(장정신)하며  障正行(장정행)하며  兼障道眼(겸장도안)이니  學者(학자)가  於彼(어피)에  如生寃家相似(여생원가상사)하야사  乃可耳(내가이)니라

 

공부를 짓되 의근(意根)을 향하야 헤아리고 따지지 말 것이니, 공부로 하여금 한 조각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의정(疑情)이 일어날 수 없게 하나니, 사유복탁(思惟卜度) 네 자는 바른 믿음을 막고 바른 행을 막는 것이며 겸하야 도의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이것을 마치 원수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Posted by 닥공닥정

§(715) 전강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라도 자주 듣다 보면 공부해 나가다가 문제점이 있는 것이 바로 잡아진다 /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의심(疑心)입니다 / (게송)군금욕식무위리~.

 

이뭣고?’하는 것은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한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버리고 찾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면 천차만별이 바로 조사(祖師)의 설법이고, 부처님의 설법이 되고, 선배의 채찍질이 것입니다.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모든 것이 우리의 한마음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드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요,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에 끄달린 사람은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속에 비추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용715)

 

약 10분.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그다음에 화두(話頭)가 정말 참선(參禪)하는 데에 껌껌한 밤에 가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화두를 자기가 정말 믿는 선지식(善知識)한테 화두를 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냐 하면, 자기가 책을 보고 화두를 간택할 수도 있고  아무한테라도 화두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냐? 화두 자체는 별것이 아니나,  나가다가 잘못되면 자기가 믿는 선지식이 아니면 가다가  바꾸게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화두는 자꾸 바꿔싸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른 것은 마음에  맞으면 바꿀 수가 있으나 화두는 잘되거나 못되거나  화두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화두 가지고 하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다가 보면은  화두가   들리기도 하고 영판 그럴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 하나를  잡드리해 나가는데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녹음법문을 듣다 보면 공부해 나가다가 애로점, 문제점이 있는 것이 그때 가서 바로 잡아지는 것입니다.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    없는 의심,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의심을 떠억 ()하는 것입니다. ‘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初學者)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이뭣고?’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없는 의심이 단전에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단지공월낙담심(但知空月落潭心)  쟁사치원왕노형(爭似癡猿枉勞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다.

여러분이 무위(無爲) 이치를 깨닫고자 할진대는 천차만별 가운데를 여의지 말지어다.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 하는 것은 육체가 처해 있는 모든 상황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리고 마음으로는 희로애락, 육체적인 정신적인 모든 상황이 천차만별인 것입니다.  천차만별 중을 여의지 말아라.

눈으로 무엇을 들어도 이뭣고?’ 코로 무슨 냄새를 맡어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바로 그놈을 여의고 찾을 것이 아니라, 무슨 소리가 들리면  소리에 즉(卽)해서 이뭣고?’

 

버리고 찾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떠억 거각(擧却)을 하면 천차만별이 바로 조사(祖師)의 설법이고, 부처님의 설법이 되고, 선배의 채찍질이  것입니다.

 

단지공월낙담심(但知空月落潭心)하라. 다못 허공에 달이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여. 어리석은 원숭이가  속에 떨어져 있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설화를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원숭이는  속에 달이 비치니까  하늘에 있는 달이 떨어졌다고 수백 마리의 원숭이가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달을 건질라고 하다가 빠져 죽은 설화가 있습니다. 달은 못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여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뇌나 망상이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세계의 흥망성쇠나 생로병사가  우리의 한마음의 나타남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모든 것이 우리의 한마음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드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요,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에 끄달린 사람은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속에 비추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니 경제니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마는 고구려나 고려 ・ 이조 ・ 신라 · 백제나 해방되어 가지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은 적고 걱정스러운 일들은 끊임없이 옛날과 다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런 것들이 꿈속에 일어나는 일이요,  중생(衆生)의 지은 업(業)으로 일어나서 일어나는 일이니, 설사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이라도 참으로 그런 것들이 걱정이 되면 우리로서는 화두를 단속하고 정진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너무 말을 많이   같습니다.  철을 오늘 이러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지내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3719~4733)()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잡드리 ; ‘잡도리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대책.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있습니다.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혼침(昏沈 어두울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 삼푼 되는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 () 뜻하며, '단전'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상기(上氣) ; [한의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발한두통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무심(無心) ; ①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 ②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

*(게송) ‘군금욕식무위리~’ ; [금강경오가해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함허득통 설의(說誼참고.

*무위(無爲)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무위(無爲) 조작(造作: 만들다)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②온갖 분별이 끊어진 마음 상태.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삼독(三毒) 소멸된 열반의 상태.

*즉해서(-- ·즉시 ) ; .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당장에 ).

*거각(擧却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丹田]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없는 생각 ()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조사선법(祖師禪法)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 같다.

*어리석은 원숭이가  속에 떨어져 있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설화 ; 정중로월(井中撈月 우물 정/가운데·속 중/잡을·건질 로/달 월)  ‘우물 속에 있는 달을 건진다’

 

[참고]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7 (東晉天竺三藏佛陀跋陀羅共法顯譯) ‘明僧殘戒之餘

佛告諸比丘  過去世時  有城名波羅奈  國名伽尸  於空閑處有五百獼猴  遊行林中  到一尼俱律樹  樹下有井  井中有月影現  獼猴主見是月影  語諸伴言  月今日死  落在井中  當共出之  莫令世間長夜闇冥  共作議言  云何能出  獼猴主言  我知出法  我捉樹枝  汝捉我尾  展轉相連  乃可出之  時諸獼猴卽如主語  展轉相捉  小未至水  獼猴重  樹弱枝折  一切獼猴墮井水中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가시(伽尸)라는 나라에 파라나(波羅奈)라는 성이 있었다. 한적한 곳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었는데 숲속을 유행 중에  니구율나무 밑에 이르렀을 , 나무 밑에 있는 우물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이때 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우물   그림자를 보고 무리들에게 말했다. “지금 달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게 꺼내줘야 하겠다 함께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꺼낼  있을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내가 꺼내는 방법을 안다. 내가 나뭇가지를 잡고 너는  꼬리를 잡고 그렇게 서로 이어서 늘어뜨리면 꺼낼  있다 원숭이 무리가 우두머리의 말에 따라 서로의 꼬리를 잡고 늘어뜨렸는데 물에 이르기 전에 이어진 원숭이들이 너무 무거워 나뭇가지가 부려져 모두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중생(衆生) :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정식(情識)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 : [] karma []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 업이라 한다。개인은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 윤회(輪廻)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539) 참선자세. 단전호흡(준비호흡, 본호흡) / 의심이 화두의 핵심. 의심관(疑心觀) / 大疑之下 必有大悟 / 참의심[眞疑] / 우리의 본업(本業)은 이뭣고?

 

단전호흡은 절대로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기 체질에 맞도록  시간 하고  시간을 해도 조금도 피로하거나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되, 주의할 것은 공양을 하고  시간 이내에는 하지 말어라.

식사를 하면은 위장 속에 음식물이 들어있는데 그놈을 호흡에 따라서 배를 내밀었다 홀쪽했다 하면은 위장에 무리가  가지고 위가 늘어나면 위하수(胃下垂) 같은 병이 걸리기가 쉬우니까 절대로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단전호흡을 하지 말고 그냥 평상으로 숨을 쉬어.

 

호흡을   해도 고대로   없는 의심이 터억 있으면    없는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이뭣고?’하는 뒤끝에   없는 의심이 있잖아. 의심을 터억 관하는 거여. 그래서 그것이 의심관(疑心觀)이거든.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없는 의심(疑心)이 그것이 화두의 핵심이여. 그래서   없는 의심이 있으면 ‘이뭣고 자꾸 입으로 ‘이뭣고 이뭣고  해도 상관이 없는 거여.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공부가  안된다고 번뇌심을 내고 그러지도 말고, 오직 내가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과 모든 성현들도 오직  법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니 난들  해서   리가 있느냐.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있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해가라.

 

**송담스님(No.539)—94년(갑술년) 동안거결제 백일기도 입재(94.11.17) (용539)

 

약 17분.

 

오늘 갑술년 음력 10 15 삼동결제(三冬結制) 날인데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충분히 우리는 결제 법문을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기왕 여기에 올라왔으니 아직 화두(話頭)를 타지 않고, 참선(參禪)을 하고자 방부(房付)는 들였고  선방에는 가야겠는데 아직 화두를 안 타신 분을 위해서 간단히 화두 드는 법을 () 드리겠습니다.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방법인데 첫째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자세는 가부좌가 되면은 온가부좌(온跏趺坐)를 하고 온가부좌가  안되면 반가부좌(半跏趺坐)만 해도 됩니다.

 

가부좌는 허리를  펴고 오른발을 왼발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왼발은 오른발 위에다 올려놓고 하면은 이것이 온가부좌고, 반가부좌는  다리만을 올려놓으면 됩니다. 왼쪽 다리만 올려놓고 하거나  다리가 저리고 아프면은  다리를 바꿔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손은  발목 위에다가 오른손을 먼저 놓고  다음에 왼손을 위에다 이렇게 포개고,

 다음에 양쪽 엄지손가락  끄터리를 이렇게  마주치게 하되 너무 힘을 주어서 위로 올라가게 하지도 말고 요렇게 비끄러져서 이렇게 손장난을 해도  되고, 단정하되 너무 힘을 주지도 말고 떨어지지도 않도록. 이렇게 해서  위에다 놓되 아랫배 배꼽 앞으로 다가서 이렇게 하고.

 

어깨는 몸은 앞으로 기울지도 말고, 뒤에로 자지바지 하니 뒤로 기울어지지도 않고,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정하니 이렇게 하되, 단정하면서도 어깨나 목에 힘을  빼는 거여. 그렇게 해서 고개는  어깨 위에 단정히 올려놓되 눈은 평상(平常)으로 .

 

눈을 너무 ! 부릅뜨지도 말고 감지도 말고 너무 가늘게 뜰라 하지도 말고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자리로부터서  2미터나 3미터 정도가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그러되  2미터나 3미터 지점에다 특별한 무슨 콩을 갖다 놓던지, 거기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놓고 그거를 응시(凝視)하라는 것이 아니고, 볼라고 하면 거기가 보일 정도로 눈을 뜨되 실지로는 아무것도  바가 없어야 한다.

 

 바가 없어야 하는데 처음 하는 사람은 자꾸 거기에 무엇이 보여 싼다 말이여. 장판이나 또는 벽에 있는 어떤 무늬나 그림이나   자죽 같은 것이 자꾸 눈에 얼씬거려 가지고 암만  볼라고 해도 자꾸 보여.

그래 가지고 사람처럼 보였다가 개처럼 보였다가 고양이처럼 보였다가 그것이 점점 가까와 왔다가 멀리 갔다가 없어졌다  생겼다, 그렇지만 일부러 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꾸  화두를 드는데.

 

화두를 들되 자세를 바르게 했으면 인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이 대단히 쉬운 것인데 처음에 하는 사람은 대단히 힘이 들고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그러냐 하면은 너무 무리하게 할려고 하기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렵다 그말이여.

 

조금도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되 ' 호흡'을 들어가기 전에 '준비 호흡'을 먼저 해야 하거든.

 

준비 호흡은 속에 있는 가슴속에 들어있는 공기를 완전히  내뿜어요. 배를 홀쪽히 하고 가슴도 홀쪽히 하면서 완전히  내뿜고, 내뿜은 다음에는 스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되 가슴이 아주 미어지도록 들어마셔. 더이상 들어마실  없을 만큼 들어마신 상태에서  참는 거여.

얼굴이  벌거질 때까지 참았다가  입을 조금 벌리고 ~’하고 내뿜는데 가슴을 홀쪽히 하면서 조이면서 가슴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내뿜어.

 

 내뿜었으면 입은 다물고 코로  스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가슴을 약간 드는  하면서 가뜩 들어마셔. 들어마신 호흡을  들어마셨으면 참아. 참았다가 입을 조금 벌리고  내뿜어. 이러기를   내지  번 정도로 하는 거여.

이렇게는 뭐   이상 허도 못하고  그렇게  필요도 없고, 2,3번 그렇게 함으로 해서 가슴속에 있는 가슴 허파 속에 구석구석에 있는 묵은 공기를 완전히  씻어 내는 방법이여.

 

그리고 오장육부 사지에 모든 혈관과 모든 신경에 새로운 긴장을 주는 것도 되어서, 이래서  준비 호흡을  다음에는 정식으로  단전호흡에 들어가는데,

 

아까 준비 호흡은 코로 들어마셨다가 입으로 내뿜었지만  호흡은 코로 들어마셨다가 코로 내쉬되 가뜩 들어마신  아니라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아까 준비 호흡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슴으로 쉬었지만 정식 단전호흡은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단전(丹田), 배꼽 밑에 아랫배로 하는 거여.

 

스르르르 하니 조용허니 들어마시면서 배꼽 밑에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되 가뜩 들어마신  아니라 7부나 8 정도만 들어마셔.  들어마실  있지만 가뜩하지 말고 78 정도만 들어마셨다가 잠시  상태로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코로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완전히  내뱉을라고 하지 말고 8부쯤만 내보내.

 

내보낸 상태에서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시는 시간이  3, 들어마셨다가 머무르는 시간이  3, 내쉬는 시간이  4,5초. 다 내쉰 다음에  스르르르 들어마셔.

그래서 숨은 코로 들어가고 코로 나오되, 몸안에 움직이는 것은 아랫배만 볼록해졌다가 잠시 고대로 있다가  차츰차츰 홀쪽해졌다, 아랫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그런데 약 3, 3, 45초면은 한번 호흡을 하는데 10 정도 걸리는데 누구라도 그런 정도는  수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3초가 길면 2초도 상관이 없지만 3 정도 하면 누구라도  수가 있고.

 

이렇게 해서  ,  ,  ,   이렇게 하다보면 나중엔 5초에 들어마셔 가지고, 5 머물렀다가, 5초나 6초에 내쉬고 호흡이 차츰차츰 길어지는 법이여.

나중에  이태 삼년 하다 보면 들어마신 시간이 10, 머무르는 시간이 10, 내쉬는 시간이 10 해서, 30초에 숨을 한 번 호흡을  수가 있게 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되어져야지, 억지로 이렇게 늘릴라고 하면 무리가 가서 얼마 못해 가지고 ~’  이렇게 헛숨을 쉬게 되는데, 무리하게 하면 부작용이 일어나요.

 

그래서 절대로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기 체질에 맞도록  시간 하고  시간을 해도 조금도 피로하거나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되, 주의할 것은 공양을 하고  시간 이내에는 하지 말어라 그말이여.

식사를 하면은 위장 속에 음식물이 들어있는데 그놈을 호흡에 따라서 배를 내밀었다 홀쪽했다 하면은 위장에 무리가  가지고 위가 늘어나면 위하수(胃下垂) 같은 병이 걸리기가 쉬우니까 절대로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단전호흡을 하지 말고 그냥 평상으로 숨을 쉬어.

 

그러다  시간쯤 지난 뒤에는 정식으로 인자 준비 호흡을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은 조금도 무리가 없이 위장병도 낫게 되고 혈압도 내려가고, 무리하게 하면 혈압이 올라갈 수가 있지만 절대로 무리하게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는 거야.

처음부터  시간씩 할려고 하지 말고, 처음에는  10 20 30 차츰차츰 요것도 늘려나가야 하는 거다 그말이여.

 

 

그런데 화두는 언제 드느냐?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쉴  이뭣고~?’ 이렇게.  나가면은 스르르르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그래서 숨을 내쉴  ‘이뭣고?’를 허라 그말이여. 나중에 차츰 익숙해지면 숨이야  번을 쉬거나 ‘이뭣고?’ 뒤끝에 남은 알  없는 의심이 있으면 계속해서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해도 상관이 없어.

 

호흡을   해도 고대로   없는 의심이 터억 있으면    없는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이뭣고?’하는 뒤끝에   없는 의심이 있잖아.  의심을 터억 관하는 거여. 그래서 그것이 의심관(疑心觀)이거든.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없는 의심(疑心)이 그것이 화두의 핵심이여. 그래서   없는 의심이 있으면 ‘이뭣고 자꾸 입으로 ‘이뭣고 이뭣고  해도 상관이 없는 거여.

 

 먹을 때는  먹으면서도 알  없는 의심이 터억 있고, 변소에 가서도   없는 의심이 있으면 고대로 있지,

자꾸 ‘이뭣고, 이뭣고...’—‘관세음보살 하루에   한다, 또는 아미타불을 하루에 오만 번씩 한다 그렇게 결정을 해놓고 계속 염주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타불 타불 타불 타불...’ 이렇게 하는데, 오만  채운 것을 목표로 10 20 내지 평생을 하는 분도 내가 알고 있는데, 그분은 그런 대로 염불 참선이여 그저.

 

염불 하니까 그분 나쁘다고   없고, 우리가 본격적으로 참선을 할려면은 ‘이뭣고?’거든.   없는 의심을 관하는 거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의심이 크면 크게 깨닫는 거고, 의심이 작으면 작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 거여. 의심이 있어야!

 

의심이 점점, 처음에는 화두  때는 있다가 금방 의심이 없어지는데 자꾸 ‘이것밖에는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하면 화두를 들지 않아도 항상   없는 의심이 있거든.  의심을 항상 관(觀)해 나가. ‘이뭣고?’

  없는 의심이 차츰차츰 커지면은 의단(疑團)이 되는데 하늘을 봐도 ‘이뭣고?’요, 땅을 봐도 ‘이뭣고?’요,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요, 화장실에 가도 ‘이뭣고?’,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항상 의심이 있는 거여 그냥. 간단(間斷) 없어. 간단히 없으면 그것이 의단이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됩니다.

 

애를 쓰면  만큼, 그런데 내동 잘되어 가다 ! 변해갔고  화두가  들리는 경우도 있어. ‘이뭣고?’해도 ‘이뭣고?’뿐이지 진짜 참의심[眞疑]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그거 번뇌심(煩惱心)  필요가 없어. 서서히 단전호흡을 하면서 꾸준히 포기하지 말고 챙기고.

 

가슴이 너무 미어질라고 하고 답답하고 숨도  가슴이   가지고 호흡도  안되고 그럴 때도 있거든. 그런 때는 조용히 일어나서 법당 뒤나 한가한 데에 가서 30미터나 50미터  정해놓고 왔다갔다 하면서 서서히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가슴 답답한 것도 없어지고 혼침(昏沈)이 오는 것도 가라앉고 머리가 쾌청해지면 다시 와서  앉아서 떠억 해서.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공부가  안된다고 번뇌심을 내고 그러지도 말고,

오직 내가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과 모든 성현들도 오직  법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니 난들  해서   리가 있느냐.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있다’고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터억 해가라 그말이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녀노소의 해야   직분이 있고 직업이 있으나 그것은 그것대로 허되  가운데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직업, 본업(本業)은 이뭣고?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것을 단속을  가시라 그말이여.(14분5초~31분1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 겨울철의  )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 음력 10 15부터 다음해 1 15일까지) 말한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방부(房付)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 참가하다.

*온가부좌(온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자지바지 ; 좌선(坐禪)  몸에 너무 힘을 주어,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때는 몸을 단정(端正)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

*응시(凝視 엉길 /보일 )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 삼푼 되는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 () 뜻하며, '단전'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헛숨 ; 아무 까닭 없이 내쉬는 .

*위하수(胃下垂) ; ‘위 처짐(위가 정상 위치보다 처지는 증세)’ 위의 충만과 중압감, 구역질, 식욕 이상, 불면, 기억력 감퇴 따위의 증상을 보인다.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모르는 사람은 힘을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밖에는 없지만,

 ,  ,   이렇게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해도 화두가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걸랑,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 하는 거여.   없는 의심의 ()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일은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 () 긴완(緊緩) 득기중(得其中) 해야 . 그것이 묘한()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아는 사람은 바로 ()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 의심(疑心) ()’으로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관해 나가면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의심의 ()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 막론하고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나갈 줄만 알면어디를 가거나  선불장(選佛場)이요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공부처(工夫處)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 2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  , 3, 5, 10년을 해도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하고, 고대로 하면서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묘한 의관(疑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조정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의심관, ()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 의심(疑心)의 이라야 .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 서산에 지려고  ,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때에,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    빨갛고 아름다운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수가 없는데해가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해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떨어져서  보일 때까지  시간 내지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때까지 관찰하고서,  다음에는 밤새  눈을 감으나 뜨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다시   관을 해서,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밤새 관하고,  이튿날 관하고     관하고 해서 평생동안을 그렇게 관을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일관이라든지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 있는데,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해도   없는 의심이해가   봐두었던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 .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역대조사(歷代祖師)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 의심 끝에 반드시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當於本叅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叅上(어본참상)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  二六時中(이륙시중)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의심 끝에 반드시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 아울러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버리고 사위의(四威儀) 열두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간단(間斷 ·사이 /끊을 ) ; 계속되던 것이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하나 /없을 /섞일 ) ; 대상  자체가 순일(純一)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 없음[].

*내동 ; ‘일껏(모처럼 애써서)’ 사투리.

* ; (주로 ‘없다’, ‘않다’, ‘못하다’ 따위의 부정어와 함께 쓰여)아무리 애를  봐도 도무지. ②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또는 아주 심하게.

*진의(眞疑) ; 화두에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고원상인(蒙山和尙示古原上人)’에서.

〇話頭上(화두상)에  有疑不斷(유의부단)하면  是名眞疑(시명진의)니  若疑一上少時(약의일상소시)하고  又無疑者(우무의자)이면  非眞心發疑(비진심발의)라  *做作(속주작)하니라  是故(시고)로  *昏沈*舉(혼침도거)가  皆入作得(개입작득)하리라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면  이름이 참의심[眞疑]이니, 만약 의심을   잠깐하고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주작(做作) 속하느니라。이런 연고로 혼침과 잡념이  마음에 들게 되느니라。

*주작(做作 지을 /지을 )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

화두를   무상(無常) 느껴 발심(發心)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잠깐하고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혼침(昏沈 어두울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도거() : 혼침의 반대인데 산란(散亂)이라고도 한다. 정신을 머트럽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마음작용.

*번뇌심(煩惱心)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나, 이곳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을 말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 이르기까지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

Posted by 닥공닥정

 

 

§(480) (게송)직하본래무일사~ / 싸움 속에서 싸움 없는 삶을 산다 /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 화두지, 없는 내놓고 의심이 따로 있는 아님.

 

오탁악세에 나와 가지고도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런 오탁악세가 발심(發心)하기에 더욱 좋고, 공부하는 데에 더욱 유익한 유리한 그러한 조건이 되어 것입니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라 하는 것은이뭣고?’했을 앞과 뒤가 거기에서 끊어지거든. 없는 생각 이외의 다른 생각은 거기서 끊어져야 화두를 옳게 드는 것이여.

 

화두를 가지고 일심으로공부가 잘되거나 안되거나, 잘된다고 생각 되건, 안된다고 생각이 되건, 때로는 혼침이 일건, 때로는 산란심이 일건 그것도 묻지를 말고, 산란심이 일어도이뭣고?’, 혼침이 와도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앞뒤가 끊어진 의심 하나로만 계속 잡드리를 나갈 뿐이다.

 

**송담스님(No.480)—92 9 첫째일요법회(92.09.06) (용480)

 

약 15분.

 

직하본래무일사(直下本來無一事)한데  위언무사조상기(謂言無事早相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견인천성적적(筧引泉聲滴滴)한데  송창래월영지지(松窓來月影遲遲)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직하본래무일사(直下本來無一事)한데  위언무사조상기(謂言無事早相欺)로다.

바로 본래 일도 없어. 화두(話頭)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의심(疑心) 클라야 수가 없고, 간절할래야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고. 그래서 타성일편이 되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보게 되고, 자기의 불성(佛性) 보게 된다 그말이여.

대장부(大丈夫), 일대사(一大事) 마친 도인(道人) 경계는 더이상 배울 것이 없고 더이상 것이 없다.

 

일도 없다[無一事]’ 그래도 벌써 일도 없다하는 놈이 있기 때문에 벌써 스스로 속는 것이다 그거거든.(謂言無事早相欺) 참으로 일이 없으면일이 없다 생각도 없어야지, 아무 일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면 일이 벌써 하나가 있는 것이다.

 

죽견인천성적적(筧引泉聲滴滴)한데, 대를 쪼개 가지고 홈대를 만들어서 샘에서 물을 받아내는데산중 절에 가면 대나무로 홈대를 만들어서 샘물을 끌어다가 먹는데, 대나무 홈대로 물을 받아서 그놈이 졸졸졸 흘러 내려오는 소리가 새벽부터 하루종일, 밤중에 고요할 때면은 물소리가 들린다 그말이여.

송창래월영지지(松窓來月影遲遲). 창에 달빛이 비추는데 그늘이 더디고 더뎌. 이건 산중에, 산사(山寺) 적적하고 맑은 공기 속에서 생활하는 도인의 산사 생활을 읊은 게송입니다.

 

 

오늘은 임신년 9 6 첫째 일요법회날인데 온통 세상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몹시 복잡하고 어려운 때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법보제자,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속에도 이렇게 날씨는 아직 내일이 백로(白露)라고는 해도 잔서(殘暑) 삼복(三伏) 못지않게 이렇게 따갑고 더운 데도 불구하고 일요법회에 이렇게 많이 참석을 하셨어.

세상이 어렵고 복잡할수록에 우리 불자들은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서 신심을 돈독히 해서 법문도 열심히 듣고, 법문(法門) 의지해서 착실하게 정진을 다가가야 한다는 그러한 뜻으로 도인의 산사 생활을 읊은 게송을 읊어 드렸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께서는 신해년(辛亥年), 열반하시기 4 갑인년(甲寅年) 열반하셨으니까 신해년은 4 전인데, 4 전에 설하신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법문의 요지는 여러분이 들으신 바와 같이 우리 오탁악세(五濁惡世)!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년은 정법시대(正法時代) 그러고, 다음 년은 상법시대(像法時代) 그러고, 다음 이후를계법(戒法) 말년이라 이렇게 일컫는데, 우리는 말법시대(末法時代) 지금 태어났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 무슨 정법·상법·말법을 말할 것은 없지마는 그래도 일반적으로 말법시대는 투쟁견고(鬪諍堅固) 시대다. 싸움을 일삼는 그런 시대다. 과연 세계가 정치적으로 싸우고, 사상으로 싸우고, 경제적으로 싸우고 온갖 가지가지 종류의 싸움판이 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지면 나라는 망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분야에서 싸워 가지고 지지 않도록 노력을 밖에 없는 그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싸움 속에서싸움 없는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것입니다.

어떻게 싸움 속에서 나도 같이 싸워야지, ‘싸움 속에서 싸움 없는 삶을 산다 말이 무슨 말이냐?

 

싸움을 버리고 포기하고, 사업이고 무엇이고 팽개치고 산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고, 속에서 자기가 맡은 책임을 성실히 하면서도 정말 마음속으로는 정법(正法) 믿고참나 찾는 공부에 몰두하면싸움 속에서 싸움 없는 영위하는 길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탁악세에 나와 가지고도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런 오탁악세가 발심(發心)하기에 더욱 좋고, 공부하는 데에 더욱 유익한 유리한 그러한 조건이 되어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법문 가운데 가장 중점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는 , 화두에 대한 의심, 의심이라는 없는 바로 그것이 의심(疑心)이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 이놈이 무엇인가?’ 없는 생각,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 화두지, 없는 내놓고 의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심이라 하는 것은, 화두에 대한 의심이라 하는 것은이뭣고?’했을 앞과 뒤가 거기에서 끊어지거든. 없는 생각 이외의 다른 생각은 거기서 끊어져야 화두를 옳게 드는 것이여.

 

흔히 문헌상에 나타난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것을 사량분별(思量分別) 의리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공안을 타파한다 가지고 그러한 식의 공부는 그것을 의리선(義理禪)이라 가지고 죽은 참선이여, 사구선(死句禪)인데.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주장하신 공부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거든. 화두를 여러 개를 하나씩 하나씩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하고 해서 그렇게 참구를 나간 것이 아니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화두를 다맛 길도 끊어지고, 이치 길도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가지도 말고, 다못 앞뒤가 끊어져 없는 의심으로 () 가는 것인데.

 

화두를 들므로써 어떤 이치가 차츰차츰 나타나고, 무엇이 알아지고 드러나고, 이러면은 가는 맛도 있고 재미도 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천칠백 공안을 그런 식으로 날마다 따지고 날마다 분석해서 가봤자 점점 사량분별만 늘어가고 깨달음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고 일심으로공부가 잘되거나 안되거나, 잘된다고 생각 되건, 안된다고 생각이 되건, 때로는 혼침이 일건, 때로는 산란심이 일건 그것도 묻지를 말고,

산란심이 일어도이뭣고?’, 혼침이 와도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앞뒤가 끊어진 의심 하나로만 계속 잡드리를 나갈 뿐이다.

 

그렇게 나가다가 보면은 화두를 들라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때가 오고 마는 것이다.(처음~1456)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직하본래무일사~’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峯和尙廣錄(卷第二十九)'에서 '送禪者歸鄕二首'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어째서 () 했는고?’ 또는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 / / )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 이르기까지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대장부(大丈夫 ·훌륭할 /어른·존칭 /사내·일꾼 )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 이치를 깨달은 사람.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 완성.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 따라 수행하는 사람.

*홈대 ; 홈통(홈桶, 물이 흐르거나 타고 내리도록 하는 쓰는 . 오목하게 골이 있거나 대롱을 만들어 쓴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흐릴 /악할 /세상 )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계법(戒法) ; 부처님이 정한 계율(戒律) . 오계(五戒), 팔계, 십계, 구족계(具足戒), 삼취정계(三聚淨戒), 십중계(十重戒) 등의 율법을 모두 계법이라고 한다.

*말법(末法) : 부처님의 교법이 세상에 전하여 가면서 중생을 교화하는데 대하여 부처님께서 예언한 바가 있다。처음 오백 동안은 정법(正法) 시기가 되어,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 얻게 되지마는, 다음 동안은 상법(像法) 정법에 비슷한 시기가 되어,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다음 동안은 말법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이 남아 있는 시기가 되어, 수행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고 하였다。그러나 이것은 인도만을 표준한 말인 듯하다。인도의 불교사는 과연 그대로 되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대답하여 예언하기를, 불교가 중인도에서는 차츰 쇠미하게 되겠으나, 변지(邊地) 외국에 널리 전파되어 점점 융성하게 되리라고 하였다。과연 불교의 중심이 중인도로부터 북부인도와 세일론으로 옮기었고, 다시 중앙아세아로, 북부아세아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한국일본에 불교가 왕성하고 많은 도인(道人) 것도 부처님이 열반한  천오백  이후의 일이었다。다시 말하면, 말법이라는 시기가 시작된 뒤의 일이다。그러므로 세계적으로 불교 교단 전체를 통하여 때에는 말법시기가 일정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파리어(巴利語)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 • () • () • () 사염주(四念住)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소멸하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説修行) 반드시 견성 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학(邪學) 외도(外道) 번성한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Posted by 닥공닥정

§(081) 마음이란? / 나의 주인공 단속 아니한 죄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하게 된다 / 내가 나를 찾는 공부 / (게송)생사해탈사비상(生死解脫事非常)~

 

다못 들은 풍월(風月)마음이다하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빛깔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놈이 바로 나의 주인이요, 그놈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으며, 그놈 때문에 세상을 버리고 어딘가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놈이입니다.

 

끌고다니는 나의 주인공 단속 아니하면은 지옥·아귀·축생 삼악도(三惡道)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이것을 단속을 해서 금생부터서 마음속에 삼악도를 돌려서 극락세계(極樂世界) 맨들고, 몸이 담아져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 오탁악세(五濁惡世) 극락세계를 맨드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생각이 그렇게 우리의 육도윤회(六途輪廻)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아서 격분했을 , 슬플 , 외로울 , 괴로울 이럴 생각을 퍼뜩 돌이켜서이뭣고?’ 이것이 바로 지옥의 문전(門前) 직전에서 극락세계로 돌아오는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이뭣고?’ 하는 것이 팔만대장경을 전부 읽어 마친 공덕보다도 수승하다고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육백만 부른 만큼의 공덕이이뭣고?’ 번하는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정을 가지고 과거의 모든 죄를 소멸을 하고 앞으로 새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이러한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나아가서는 내가 나를 깨달을 있게까지 되는 방법, 이것이 참선법입니다.

 

생각 생각이 모여서 하루하루가 되고, 하루하루가 모여서 일생이 되고, 생이 모여서 무량겁이 되는 만큼, 무량겁 생사 문제를 해결 지을려면은 생각 생각을 지혜롭게 단속(團束)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81)—78 4 관음재일 법어(78.04.24.) (용081)

 

(1) 약 19분.

 

(2) 약 8분.

 

(1)------------------

 

몸을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다음, 생각은 무엇을 하느냐? 이것이 인자 진짜 참선이 되겠습니다.

숨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3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이뭣고~?’

숨이 나갔으면 들어마셔서 3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이뭣고?’ 이렇게 , , , 10 20 30, 시간 이렇게 공부를 나가는 것입니다.

몸은 앉았거나 누웠거나 걸어가거나 상관없이 숨은 단전호흡(丹田呼吸) 해야 하고, 단전호흡하면서 들어마셨다가 3 머물렀다 내쉬면서이뭣고~?’ 이렇게만 나가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뭣고?’ 무엇이냐?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다. 무엇이 듣고 있습니까? “귀가 듣고 있지

귀가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놈이 따로 있습니다.

 

귀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법당에 앉아 계시면서도 생각으로아휴! 내가 캐비넷 쇳대를 내가 잠그지 않고 왔는데 ! 그거 큰일났다빨리 내가 밥도 먹고 쫓아가봐야지 되겠다이러한 생각을 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계신 동안만은 말씀을 알아듣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앉아 계시면서 귀는 계속 열어 놓고 있으면서도! 그때 내가 조계사에서 어떤 스님이 법문을 하실 저런 말씀을 들었는데, 스님은 지금 어디로 가셨나? 스님이 그때 ! 생겼고 법문도 잘하시는데 어디로 가셨나?’ 이러한 생각을 1 동안 만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생각 하신 동안에는 저의 말씀을 완전히 까먹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귀가 듣고 있지 아니하고,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놈이 따로 있다하는 것을 우리는 금방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 그게 무엇이냐?

그게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대번에 방에 앉으신 , 분도 빼놓지 않고 마음이 듣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번도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잡아 사람, 눈으로 사람 없습니다.

마음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귀로 소리를 들어 사람도 없고, 마음이라 놈에서 대관절 무슨 냄새가 나는지 냄새를 맡아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이라 하는 놈이 어떠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 손으로 만져 사람도 사람도 계실 것입니다.

 

다못 들은 풍월(風月)마음이다하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빛깔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놈이 바로 나의 주인이요, 그놈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으며, 그놈 때문에 세상을 버리고 어딘가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놈이입니다.

몸뚱이는 그놈이 담아져 있는 임시 하숙집에 지내지 못하고, 잠깐 줏어 입은부모한테 빌려서 입은 벌의 옷에 지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벌의 옷을 벗어 내던질 밖에는 없는 것이고, 하숙집! 집을 언젠가는 버려 버리고 정처없이 떠날 밖에는 없는 우리의 신세인 것입니다.

 

몸뚱이를 끌고 다니고, 몸뚱이 속에서 일생 동안을 몸뚱이를 주재하면서 몸뚱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데 눈을 통해서 그놈이 드나들고, 귀를 통해서 드나들고,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입을 통해서 드나들고, 그놈이 손을 조정해 가지고 온갖 일을 하고, 손을 조정해서 입에다가 집어넣습니다.

 

그놈은 먹어야 배도 부르지 않건만 집을 관리를 해야 하죠. 비가 새도록 기와도 손봐야 하고, 빛깔이 보기 싫으면 페인트 칠도 해야 하고.

이거 아무리 좋은 분을 바르고 향수를 발라봤자 썩어 문드러 것인데 여기다가는 좋다는 화장품 처바르고, 가짜라도 미제는 사서 바를려고 하고 모다 그런데 결국은 뭄뚱이는 금방 썩어서 문드러지고.

 

몸뚱이에 담아져 있던 그놈은 번도 그것에다가는 무엇을 먹여 주지도 않고, 입혀 주지도 않고, 괄세를 제멋대로자기집 강아지 송아지는, 병아리는 잠깐만 눈에 보여도 집안을 뒤고 찾고 야단인데, 몸뚱이에 살고 있는참나나의 주인공은 눈을 통해서 어디를 가서 돌아다니거나 말거나, 귀를 통해서 어디를 한데 돌아다니거나 말거나, 다시는 찾자 생각을 합니다.

 

남편이 어디 갔다가 온다는 시간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잠을 잡니다. 부애가 하늘까지 처올라가지고 왔다 하면 그날 저녁에는 바가지를 긁고 그러는데,

자기 몸뚱이의 주인은 일생 동안에 번도 그놈을 찾아보지도 아니하고, 무엇을 먹일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입힐려 하지도 아니하고, 그놈은 돌아다니면서 온갖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오욕락(五慾樂), 그러한 말로써 형언할 없는 그러한 죄를 퍼짓고 돌아다녀도 그놈 단속을 줄을 모릅니다.

 

그놈 단속 아니한 죄로 무량겁(無量劫) 생사윤회(生死輪廻)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병아리나 강아지 그런 것을 단속 아니 하면은 결국은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끌고다니는 나의 주인공 단속 아니하면은 지옥·아귀·축생 삼악도(三惡道)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이것을 단속을 해서 금생부터서 마음속에 삼악도를 돌려서 극락세계(極樂世界) 맨들고, 몸이 담아져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 오탁악세(五濁惡世) 극락세계를 맨드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삼계(三界) 대도사(大導師), 사생(四生) 자부(慈父)이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법을 가르켜 주시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습니다.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 같이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12년의 피나는 고행을 하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방법을 지금 팔만대장경 속에서, 팔만대장경에 담아있지 아니한 최고의 수행 방법을 간추려서 지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몸을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 복식 심호흡을 하면서이뭣고?’

앉아서도이뭣고?’ 서서도이뭣고?’  누워서도이뭣고?’ 걸어가면서도이뭣고?’ 차를 타면서도이뭣고?’ 소지하고 빨래하고 일하면서도이뭣고?’

 

제일 정신차려서 공부를 해야 때는 언제냐? 지옥, 축생, 아귀, 삼악도에 떨어질려고 하는 찰나, 그때 걸음 삐끗하면 삼악도에 떨어질 찰나에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평지를 걸어갈 때는 눈을 감고 걸어가거나, 한눈을 팔고 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마는 위태로운 절벽 그러한 데를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잠깐 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면은 삐끗한 사이에 수십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몸이 박살이 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너무 억울한 말을 들어 가지고 울화(鬱火) 치밀었을 찰나(剎那), 정신적으로 가다듬을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아 가지고 격분했을 그런 찰나, 너무 슬픈 그러한 찰나, 너무 괴로운 그러한 찰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러한 찰나 찰나야말로 우리가이뭣고?’—허리를 펴면서 심호흡을 가지고 내쉬면서이뭣고~?’ 이렇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러한 충격을 받아 가지고 스스로 수습하기 어려울만한 그러한 충격을 받았을 찰나가 바로 지옥에 떨어질 1 직전인 것입니다.

거기에서이뭣고?’ 하지 아니하고 격분 나는 대로 말을 하고, 나는 대로 행동으로 옮겨 버렸다 하면은 벌써 사람은 지옥 한가운데 ! 떨어져 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내생에는 축생 아니면 아귀, 지옥의 찌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 성내는 것으로 해서 홍도 비구는 수행을 잘해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 코앞에 있을 만큼 그렇게 수행이 잘되어 가는 상태에서 독사(毒蛇)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화는 오늘은 시간 관계로 말씀을 드릴 없습니다마는,

우리의 생각 생각이 그렇게 우리의 육도윤회(六途輪廻)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아서 격분했을 , 슬플 , 외로울 , 괴로울 이럴 생각을 퍼뜩 돌이켜서이뭣고?’ 이것이 바로 지옥의 문전(門前) 직전에서 극락세계로 돌아오는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이뭣고?’ 하는 것이 팔만대장경을 전부 읽어 마친 공덕보다도 수승하다고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육백만 부른 만큼의 공덕이이뭣고?’ 번하는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방법을 가르켜 주시기 위해서 사십구 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 근기(根機) 천차만별인 만큼 모든 사람에게 근기에 맞춰서 말씀을 하시다가 차츰차츰 나중에 가서는 참선법(參禪法) 설하십니다.

 

설하신 참선법! 내가 나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정을 가지고 과거의 모든 죄를 소멸을 하고 앞으로 새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이러한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나아가서는 내가 나를 깨달을 있게까지 되는 방법, 이것이 참선법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에, “그러면 허리만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이뭣고?’ 하면 그러면 되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했지마는 나가는데 있어서는 중생은 들은 대로 하지 아니하고 어문 생각하다가 말을 잘못 듣고 가서 잘못합니다.

 

오랫동안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진실한 신도 분이 계셨는데, 이뭣고?’ ‘이뭣고?’하라고 가르켜 드렸는데, 하루는 며느님과 따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모시고 와서할머니가 요새 참선을 이상하게 하셔서 그렇게 참선하냐?’ 했더니, 용화사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 했다.

어떻게 참선을 했냐?” 그러니까,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전강스님! 전강스님! 전강스님! 전강스님! , 이렇게 참선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보고아니, 누가 그렇게 참선을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돌아가신 전강스님을 그렇게 부르라고 했더냐?” 그러니까,

, 스님이 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 이런단 말씀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렇게 하라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노보살님은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고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납득을 시키는데 굉장히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서그러면 그렇게 하겠다 가지고이뭣고?’ ‘이뭣고?’ 열심히 하시고 마지막 숨을 ! 거둘 이뭣고~?’하면서 숨이 딸끄닥! 끈치고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이분은 너무너무 법을 깊이 믿고 정말 정성스럽게 열심히 공부를 하셨습니다. 하셨지마는 연세가 너무 많으셔 가지고 무슨 말씀을 조금 잘못 들으셔 가지고 중간에전강스님 부르시다가 가셨어도 그래도 우리에게 정법(正法) 가르쳐 주신 생불(生佛) 같으신 그런 도인의 이름을 부르셨으니까, 공덕으로 결단코 악도(惡道)에는 떨어지지 아니하셨을 것이고,

마지막 숨을 거두실 마지막 찰나까지이뭣고?’하시면서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할머니는 금생에 비록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도업(道業) 완전히 성취는 못하셨다 하더라도 금방 몸을 바꿔 나서, 좋은 몸으로 태어나서 내생에는 정말 공부하기에 가장 알맞는 그런 여건으로 몸을 받아나셔서 일찌감치 젊어서 대도를 성취할 있으리라고 나는 깊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엇이고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귀로 무엇을 듣든지, 생각으로 무엇이 생각이 나든지, 희로애락! 기쁜 일을 당하거나 노여운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즐거운 일을 당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없는 생각으로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은 우리는내가 나를 찾는 공부이기 때문에, 언제나 나와 더불어 있는 그놈을 내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챙기면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4947~6819)

 

 

 

 

 

(2)------------------

 

생각 생각이 모여서 하루하루가 되고, 하루하루가 모여서 일생이 되고, 생이 모여서 무량겁이 되는 만큼, 무량겁 문제를 해결 지을려면은 생각 생각을 지혜롭게 단속(團束)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원이 모여서 원이 되고, 원이 모여서 억대(億臺)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잔돈을 같이 여기지 아니하고 무시를 하고 함부로 풀풀 씁니다마는 참으로 부자는 잔돈을 피나오게 아끼는 것입니다. 잔돈이 모여서 큰돈이 되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돈이 귀여운 아는 사람은 잔돈푼 아껴서 목돈 만들어 가지고, 목돈을 유용하게 ! 목돈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소중한 모르는 사람은 잔돈을 풀풀풀풀 가지고 큰돈 필요할 때는 밤낮 남의 집으로 꾸러 댕기다 볼일을 보는 것입니다.

 

무량겁이 생각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이 된다 하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그런 지혜 있는 사람은 생각 생각을 지혜롭게 단속을 나가는 법입니다.

가장 생각 생각을 지혜롭게 단속해 나가는 분이 누구냐 하면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은 일찍 지혜로운 마음으로 무상(無常) 것을 깨달으시고, 일어나는 생각 생각을 단속해 가지고 일찍 대도를 성취를 하셔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하셔 가지고, 법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신 !

 

그러고 나서 삼천 년이 지냈습니다마는 그동안에 우리가 몇백 번을 사람 몸을 받았났겠습니다마는 아직도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한 지금 중생(衆生)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그동안 여러 생을 두고 불법을 만나서 좋은 법문을 듣고 듣고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 다행히 불법을 믿어 가지고 오늘 자리에서 조실 스님의 없는 최상승 활구참선법(最上乘 活句參禪法) 들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늦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자리에서부터 정신차려서이뭣고?’

이건 아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따지지 말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리저리 더듬어 찾아 들어갈려 하지 말고, 다못 바보처럼이뭣고?’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성이 때나이뭣고?’ 앉아서도이뭣고?’ 서서도이뭣고?’

이렇게 나가면 그리고 법회 빠지지 말고 자주자주 오셔서 참선에 대한 말씀을 듣고, 밑거름을 삼고 채찍을 삼으면서 열심히 하신다면 금생에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달아서 인격을 완성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인격 완성이 바로 자아를 자각하는 일이요, 그것이 생사해탈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생사해탈사비상(生死解脫事非常)!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히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갈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번 것이 뼈에 사무치지 아니할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야. 어찌 매화꽃이 코를 치는 향기를 얻을 수가 있겠느냐?

 

되게 강추위를 해야 강추위 뒤끝에 송이의 매화꽃에서 그렇게도 진동(振動) 향취가 나는 것입니다. 강추위를 하지 아니하고 겨울 날씨가 뜨뜻한 뒤끝에 매화가 싱겁게 피어 놓으면 꽃은 허옇게 피었지마는 향취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코를 ! 치는 매운 향기를 진동하게 하는 그러한 매화가 필려면은, 되게 강추위가 뼛골에 사무치는 그런 강추위 뒤끝에 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참선 공부가 아주 쉬운 것이고, 누구나 있는 것이고, 언제 어디서라도 있는 것이다이렇게 말씀을 했지마는 생각 생각을 정신을 바짝 차려서 정말 간절(懇切) 마음으로 열심히 하셔야지,

쪼금 하다가 말다가 생각나면 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쪼금 하고, 속이 상할 때는 버리고 이렇게 그렁저렁 가지고서는 어느 세월에 내가 나를 깨달라야 되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때와 장소, 가장 중요한 그때 그때를 놓치지 말고 야무지게 단속을 해서 간절히 간절히 공부를 지어 가십시오. 그렇게 뒤끝에라야 정말 확철대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6820~7619)()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풍월(風月) ; ①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②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읊거나 노래함. 또는 시나 노래.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소리,향기,,감촉(色聲香味觸)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동자(同字).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 죽어서 간다는 가지 괴로운 세계.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자기[] 저지른 일의 결과[] 스스로[] 돌려받음[]. ‘스스로 저지른 결과 뜻으로 많이 쓴다. 과거, 전생의 선악(善惡) 인연에 따라 뒷날 길흉화복(吉凶禍福) 갚음을 받게 된다는 뜻의 인과응보(因果應報)에도 자업자득의 뜻이 들어 있다자작자수(自作自受), 자업자박(自業自縛) 같은 뜻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 사바세계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흐릴 /악할 /세상 )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삼계(三界) : [] trayo-dha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amadha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upadha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arupadhatu) :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 • () • () 삼독심(三毒心) 경중(輕重)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삼계도사(三界導師) : 삼계(三界) 중생을 열반(涅槃)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 ; '(길이의 단위 길은 여덟  또는  자로  2.4미터 또는 3미터에 해당 또는 사람의  정도의 길이)' 사투리.

*울화(鬱火 답답할 / ) ;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일어나는 (,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생기는 노엽고 답답한 감정).

*찰나(剎那 ·짧은시간 /어찌 )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成佛].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어문 ; '', '다른', '엉뚱한' 사투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생불(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 찬미하는 호칭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도업(道業) ; () 깨달음. ()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 수행. 진리의 실천.

 

 

 

 

 

------------------(2)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억대(億臺) ; 억으로 헤아릴 만큼 아주 많음. 또는 금액.

*피나오다 ; 피나다(몹시 고생스럽거나 힘들여서 하다).

*잔돈푼 ; ①얼마 되는 . ②자질구레하게 쓰이는 .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 조건()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 없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중생(衆生) :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정식(情識)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게송) 생사해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승두(繩頭) : ()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 벌이는 ). 한판 크게.

*진동하다(振動-- 떨칠 /움직일 ) ; ①흔들려 움직이다. (어떤 곳에 냄새 따위가)널리 퍼지다. (어떤 곳이 냄새 따위로)가득 메워진 상태로 되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정성스런·절박할 )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Posted by 닥공닥정

 

 

•§•(277) (게송)취적기우자~ / 갈수록에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이뭣고?’ 그저 그전에는 들리다가 인자 하도 오래오래하니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니까 화두가 인자이뭣고?’ 자꾸 들리기는 허지. 들리기는 허지마는 들어갈수록에 모른다. ! 일체 번뇌 망념이 거기 와서는 붙도 못하지. 아는 것도 붙지. 일체 번뇌 망념이 어디 가서 붙어?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데, ‘ 들어갈수록에 모른다한다 그말이여. 말은 옳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없으면 없는 가지고—‘이뭣고?’하면이뭣고?’ 없으니까 그놈 가지고, 그저 찾고 찾고, ‘찾으면 죽는다하지마는 그와 그와 달러. 벌써 무엇을 물으면은 할라고 찾는 것과 없어서나의 진면목이, 내가 나를 참으로 몰랐으니 진면목 찾는 거와 달러. 없이이뭣고?’ 찾는다.

 

**전강선사(No.277)—달마사행론 제법부동적정문, 조실스님 출가인연(임자 72.11.04.새벽) (전277)

 

약 15분.

 

올라왔소. 용맹정진한 것을 보니 ! 내가 발심이 되었어. 발심이 수가 없어. 발심이 되어서 그래 법문할 마음이 나서 올라왔소마는 그저 그렇소. , 당초에 .. 

 

취적기우자(吹笛騎牛者)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원연우리(靑原煙雨裏)  비진기쇠의(費盡幾衰衣)

나무~아미타불~

 

소를 타고 젓대를 불면서 동서(東西) 자재(自在)하는구나.

! 그놈 보배 소를 찾아 가지고는 , 굴레 끼워서 고삐 달아서 길들여서 탔으니, 이놈이 가자 오자 해도 임자재(任自在). 마음대로 동서에 이렇게 임자재 하는구나.

 

청원연우리(靑原煙雨裏)에서, 청원(靑原) 푸른 언덕 연기 안개 속에서,

비진기쇠의(費盡幾衰衣). 얼마나 옷을 찢기며, 가시에 몸을 찔리며, 틈새기를 헤매 댕기며 무진 고생을 얼마나 했느냐?

 

비유인데, 우리 선객(禪客)들이 지금 화두 하는 법이 그려.

처음에 들어와서 화두를 하니, 그놈의 화두가 이뭣고?’하니 대체 뭐냔 말이여? ‘이뭣고?’

, ‘이뭣고?’ 분명히이뭣고?’라고 하지마는 뭐여? 깜깜하니 도무지 , 깜깜해도 분수가 있지.

 

이뭣고?’ 뭐여? 당최.

, 봐도 그렇고, 봐도 그렇고, ‘ 들어갈수록 모른다하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그러면 무엇을 것인가?

 

들어갈수록 아는 것이 나오면은 외도(外道)? 외도 참선이고, 무슨 점쟁이 참선이고, 무슨 사주쟁이처럼 아는 참선이고, 타심통 외도 참선이고, 그런 것이게? ! 분명히 그런 법문이 있지 않어?

 

그런데 아는 것을 바래 가지고 소리인가? 알어?

들어가 봐도 들어갈수록에 점점점점 이뭣고?’. ‘이뭣고?’ 점점 자주 찾아지고, 그저 하는 것이이뭣고?’뿐이기 때문에 홑으로 홑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첩첩(疊疊)으로 이놈이 되지.

 

이뭣고?’ 그저 그전에는 들리다가 인자 하도 오래오래하니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니까 화두가 인자이뭣고?’ 자꾸 들리기는 허지. 들리기는 허지마는 들어갈수록에 모른다.

 

! 일체 번뇌 망념이 거기 와서는 붙도 못하지. 아는 것도 붙지. 일체 번뇌 망념이 어디 가서 붙어?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데, ‘ 들어갈수록에 모른다한다 그말이여.

말은 옳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들어갈수록 수가 없으니깐 재미가 없어 무덤덤혀. ‘재미없어 아이고! 못하겠다, ‘ 되아 못하겠다.

에이! 참선 해봤던들 되도 하고 하니까, ‘퇴타(退墮) 수밖에 없다, 퇴타를 한다 그말이여.

 

불쌍한 인간이지.

세상에도, 갈수록에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 도무지 일점 티끌만큼도 거기에 무엇이 붙지 못한 것이 보배인지를 모르고, 이런 놈의 소리를 하고 앉았구나.

 

무엇이 붙어? 들어갈수록에 지해(知解) 상량(商量) 도무지 붙지 못혀.

그러기 때문에 고인들이 법을 물을 , “, 주장자를 여의고 일러라그런다 그말이여. 이거 아니여. 선지식 스님네가 법상에 올라가면 하는 말이지.

 

주장자(拄杖子) 명상(名相) 여의고 일러라, 이름과 () 여의고 일르는 것이 그것이 참선법인데, 이름 버리고, 이놈 모냥 여의어 버리고, 어떻게 이를까?

 

그것 () 붙이지 말고, 이름 명상(名相) 붙이지 말고 일러 보아라

뭐라고 이를까? 입만 벌리면 이름이고, ()이고 나오는데?

 

아무것도,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그래도, 죽은 ()이라 못써. “이름도 없는 것이다그래도 못쓴다 그말이여.

이름이니 ()이니 모냥이니 일체를 여의고 한번 일러 봐라그래 묻거든?

 

이치는 걸림이 없는 것이다 말이여. 이치가 걸린 법이 없어. () 걸린 법이 어디 있나?

무슨 모냥이 있어야 걸리고, 무슨 얼거리가 뭐가 있나? 무엇이 있어서 걸려?

! 그런 , 대답하기라는 것이 천하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 주장자가 본래 모냥이 없거니 무엇을 이르란 말이요?” 물어 봐도 것이고, 그렇지 않아?

주장자를 여의고 무슨 도리를 이르란 말이요?” 그래도 것이고. 별소리 있지 않어? 이치 막힐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물으면 걸리지. 찾느라고 죽어.

뭐라고 일러야 할까?’ 무슨 뭐라고 이를라고 찾느냐 말이여, ?

 

없으면 없는 가지고—‘이뭣고?’하면이뭣고?’ 없으니까 그놈 가지고, 그저 찾고 찾고. ‘찾으면 죽는다하지마는 그와 그와 달러.

 

벌써 무엇을 물으면은 할라고 찾는 것과 없어서나의 진면목이, 내가 나를 참으로 몰랐으니 진면목 찾는 거와 달러. 없이이뭣고?’ 찾는다.

 

세상에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목적이 무엇인가? 살아서 무엇 것인가? 그거. 하루 살면 하며, 살면 무엇 것인가?

! 살아보지, 무엇 것이냐?’ 싱겁기는 짝도 없지. 그날 살아봐도 그날 그것, 내나 맛이여. 살아 뭣해?

 

오직이뭣고?’ 하나를 하기 위해서 살아야겠다 그말이여. 결코 살아야 하겠다 말이여. ‘이뭣고?’

오직이뭣고?’ 학자가이뭣고?’ 찾아서 망상 속에서이뭣고?’ 어떻게 놨던지 숭칙한 망상(妄想) 제대로 뿌리가 뽑혀 버리고 아무것도 없구나. 아무것도 없어. ‘이뭣고?’ 하나뿐이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되다 보니 얼마나 청산 연우리(煙雨裏)에서 청산, 비오고 가시밭 어그러진 놈의 산속에서 그놈의 보배를, 소를 찾느라고 고행(苦行) 어쨌는가?

우리 학자들 지금 닦는 고행이 여차(如此)하다 그말이여.

 

이놈을 그래, 그러나 저러나 이놈을 하세월(何歲月)이지. 어디 무슨 하세월이지, 아무 때라도 바로 찾아 깨달을 때까장은 내가 언제 마음 놓을 있나? 일순간(一瞬間)인들 마음을 ?

 

그래 가지고서는 기운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쓰고 댕기는 삿갓도 찢기고, 옷도 찢기고, 그저 몸뚱이도 긁히고, 그저 가지고는 기필(期必) 찾아서, 이놈을 길을 들여 찾아놨구나. 보배지보배여.

 

무슨 놈의 생사(生死) 있나? 중생이라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중생이여. 아무것도 모르는 중생이여. 죄만 받는 중생이여.

죄도 무슨 죄냐? 생사죄(生死罪) 받는데, 나만 나와 가지고 죄지어 가지고 죽어 가지고 죄받고 밤낮 생사죄 짓는 , 죄지어 죄받는 중생이여. 이건 중생이란 역사도 없이 그대로 있는 놈이 중생이네.

 

, 이놈을 ! 깨달라 장부(丈夫) 되는 아닌가? 보우(寶牛) 깨달라서 탔으니 임자재(任自在). 자재하는 행이다.

 

항상 듣는 법문이지마는 법문이 어디 내놓고 있나? 듣는 법문이 어디 있어?

듣는 법문, 금강경, 밤낮 금강경, 밤낮 화엄경, 그저 법화경, 그저 원각경, 그저 무슨 , 경이지, 누가 들은 어디 있나?

 

올라왔으니깐 조금 여기 인자 , 하나 일러 있고. 그러고는 다시 시작할 테여.(처음~1519)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취적기우자~’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제목암(題牧庵)’ 참고.

*젓대 ; ‘(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 일상적으로 이를는 . ().

* ; 뜻밖의 일을 당하여 놀라거나 기분이 언짢을 내는 . () ①원, 세상에 ②원, 싱겁긴 ③이거 , 남이 알면 안되는데.

*선객(禪客 참선 /손님·사람 )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당최 ; 도무지(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없이 아주). .

*첩첩(疊疊) ; ①겹겹(여러 ). ②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모양.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

*퇴타(退墮 물러날 /떨어질·게으를 )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진미(眞味) ; 어떤 대상에서 느껴지는 참된 가치나 재미.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주장자(拄杖子 버틸 /지팡이 /접미사 )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 때나 설법(說法) 때에 지니는 지팡이.

*명상(名相) : 모든 물건이나 일이 이름과 형상이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름만 들으면 사물의 형상을 생각하게 되는데, 형상이란 것은 바탕과 모양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공간적으로 있는 형용과 체적(體積질량(質量)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타나는 나고 머물고 늙고 죽는 것이나, 시작되고() 진행하고() 쇠퇴하고() 파멸하는()것도 형상이며, 오관(五官)으로 감촉하게 되는 열도(熱度소리(音響(냄새(() 같은 것도 또한 형상이다.

그러나 이름이나 형상은 자체가 본래 확실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망녕된 생각이 지어낸 이름이며, 때의 인연을 따라 생겨난 거짓 형상인 것이다.

* ; ①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하는 .(), 조용히 합시다. ②남에게 어떤 행동을 권하거나 재촉할 하는 . (), 어서 뛰자. ③안타깝거나 의아한 일을 당했을 내는 . (), 이제 어쩌지?

*숭칙하다 ; ‘흉칙하다(흉하다. 보기에 민망하다)’ 사투리. *흉칙(凶칙) : 흉측(凶測, 兇測)—흉악망측(凶惡罔測 몹시 흉악함).

*고행(苦行) ; ①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여차(如此)하다 ; (일의 상태나 속성이)이와 같다.

*하세월(何歲月) ; 매우 오랜 세월.

*일순간(一瞬間 /눈깜박일 /사이 ) ; 지극히 짧은 순간.

*기필(期必 만날·약속할·결심함 /반드시·기필할 ) ; 어떤 일을 이룰 것을 때를 정하여 약속함.

*장부(丈夫)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불성(佛性) 이치를 깨달은 사람.

 

Posted by 닥공닥정

§(256) 의심관(疑心觀) / 일관(日觀)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용256)

 

약 6분.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房付)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그렇게 참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이렇게 삼위(三位)가 일체(一體)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그 이튿날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그 다음 날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인자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터얻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터억—그 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하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70분56초~76분5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해제끼다 ; 헤치우다. (사람이 어떤 일을)빠르고 시원스럽게 끝내다.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빽빽하게 죽 잇따라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맷방석 ; 주로 매통(벼를 넣고 갈아서 겉겨를 벗기는 데 쓰는 기구)이나 맷돌(곡식을 가는 데 쓰는 도구) 아래 깔아 곡식을 담거나 방석으로 쓰는 짚으로 만든 물건.
멍석보다 작고 둥글며 전(물건의 위쪽 가장자리가 조금 넓적하게 된 부분)이 있다.
*백골관(白骨觀) ; 시신(屍身)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없어져 백골(白骨)만 남아 있거나, 흩어져 있는 모습을 관(觀)하여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인생무상을 깨닫는 관법(觀法). 고골관(枯骨觀)이라고도 한다. 구상(九想)의 하나.
[참고] 구상(九想) ; 구상(九相)이라고도 함. 탐욕을 제거하고 혹업(惑業 무명번뇌와 업)을 멀리하기 위해 사람의 시신(屍身)에 대해 수행하는 9종류의 관상(觀相 깊이 생각에 집중하는 것). 부정관(不淨觀)의 9단계를 말한다.
①시신이 부어 팽창하는 것을 관상하는 창상(脹想).
②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쪼여 시신의 색이 변하는 것을 관하는 청어상(青瘀想).
③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관하는 괴상(壞想).
④부패를 끝내고 혈육이 땅에 스며드는 것을 관하는 혈도상(血塗想).
⑤시체에서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 낭자한 모습을 관하는 농란상(膿爛想).
⑥새나 짐승이 와서 시신을 먹는 것을 관찰하는 담상(噉想).
⑦새나 짐승에게 먹혀 근골두수(筋骨頭手)가 분열, 파산되는 것을 관하는 산상(散想).
⑧육신이 이미 다해 백골만 남게 되는 것을 관하는 골상(骨想).
⑨백골이 불에 태워져, 재로 돌아가는 것을 관하는 소상(燒想).
*관법(觀法) ; 마음의 본성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 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한 생각만 주시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는 수행.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 덩어리 단,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일관도천(一串都穿 한 일/꼬챙이 관/모두 도/꿰뚫을 천) ;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단전 호흡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1) 약 21분.

(2) 약 6분.


(1)------------------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야심경이 좋다니까 반야심경을 읽고, 천수경이 좋다니까 천수경을 냅다 틀어재끼고, 관세음보살이 좋다면 아들을 위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죽은 영감을 위해서는 지장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러다 참선이 좋다니까 앉아서 참선 흉내 좀 내고, 입춘이 되면은 또 무당집에 가서 5만원 10만원짜리 또 부작을 사고, 좋다는 데는 다 쫓아다니고, 그러다가 결국은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입니다.

이리저리 좋다는 것은 다 인연을 맺고 공덕을 지었으니까 악도(惡途)에는 떨어지지 않기를 나도 바래고, 원(願)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실 것을 나는 다같이 바래기는 하지마는 과연 그분이 극락세계에 꼭 갈 것인가? 나는 보증을 못합니다.

복을 짓고 착한 일을 한 만큼 내생에 천당에도 가고 또 사람이 되더라도 부자도 되고 인물도 잘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나도 믿습니다마는,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다른 사람에게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을 수 있도록 이것이야말로 샘이 없는 복[無漏福]이요,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라. 이 복이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남 보고 하라고만 하고 자기는 안한 사람이 있거든. 자기만 하고 남 보고는 별로 권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법이야말로 이것이 바로 대승법이요,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거와 같고, 수레에 두 수레바퀴가 있는 거와 같아서, 새가 날개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하나만 가지고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이 세등선원을 짓는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 짓는 것이요,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여러 신남신녀가 시주(施主)를 하고 화주(化主)를 하는 것도 이것 또한 자리이타를 하는 것이여.

부처님 출현하신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있어서야 원래 생사 없는 본각(本覺)자리에 계시는데 무엇이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가지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이다.

한 글자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을 설하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다.
한 글귀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역대 조사(祖師)가 많은 어록(語錄)을 남기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한 자비심에서 나오신 소식이다.

오늘 산승이 나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도 내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수행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시간도 바쁘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올라와서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언부언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부처님께서 다겁(多劫)을 두고 스스로 생사 속에서 윤회하신 그런 뼈아픈 경험이 계셨기 때문에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나오셨어.

저 자신도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 정진을 해봤기 때문에 선지식한테 들은 말씀, 나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바를 여러분에게 간곡히 말씀을 드림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정진을 잘할 수 있는, 발심하실 수 있는 채찍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하는 그러한 마음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진즉부터서 공부를 해서 이런 말을 듣지 아니하고라도 잘 정진을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처음으로 공부를 하러 오셔서 이러한 말씀이 꼭 필요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미 다 잘 알고 공부를 잘하고 계신 분은 증명을 하시면 되는 게고, 처음 와서 들으신 분은 뼈에 사무쳐서 명심해서 듣고 발심을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선배 후배 도반들의 그 돈독한 정의가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언제든지 좌선을 해서, 참선 시작할 때에는 준비 호흡으로 숨을 가득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쉬어 버리고 나서, 그렇게 2번을 하고서,
3번째는 가슴으로 들어마시지를 말고 가슴과 윗배는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불어나도록, 볼록해지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숨을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윗배와 가슴은 약간은 움직이겠지만 거의 가만히 있도록 유지를 하면서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진다.

들어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하니 아주 수월하게 들어마시는 거여.

너무 오랜 시간을 걸려서 들어마실라고 하지를 말고,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셨으면 너무 가득 들어마시지를 말고, 아까 준비 호흡을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인자 본(本) 호흡, 단전 호흡에 들어가서는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면 안된다 그말이여.

8부쯤만 들어마셔. 더 들어마실수 있지마는 8부쯤만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딱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그 홀쪽해지기 시작할 때 그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이것은 아주 초보자를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보자는 이러한 방법을 써서 하면 단전 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단전 호흡도 잘되고, ‘단전 호흡했다’하면 화두도 거기에 붙여서 함께 잘되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익숙해진 사람은 숨을 들어마시거나, 내쉬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그까짓것도 구애 없이 항시 화두의 의단(疑團)이 항시 목전(目前)에 상주해서, 눈앞에 항시 나타나서 일여(一如)하겠지만, 처음 한 사람은 ‘이뭣고?’해도, 금방 ‘이뭣고?’한 사이에 생각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어렸을 때로 날아갔다, 집으로 날아갔다, 야단이거든. 그러다 보면 화두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다시 또 챙길라면은 힘이 들거든. 그러다 억지로 ‘이뭣고?’ ‘이뭣고?’하다 보면은 모가지만 뻣뻣해 가지고 골만 빠개질라고 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안되고, 아! 이러니 할려고 마음은 내는데, 할려고 하면은 잘 안되니 그거 어떻게 하냐?
그래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여러 가지로 다 경험을 해 보고 연구를 한 결과 이 단전 호흡을 겸해서 하도록 이렇게 모다 지도를 해 오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지금 오늘 유독 결제날이기 때문에 단전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벌써 넘어서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고만 했으면’ 이러시겠지만 굶어서 돌아가시지를 않습니다. 조금 배가 고파야 말이 들어가지 잔뜩 먹고 쌕쌕거리게 되면은 졸음만 오지, 법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장한 다음에 잡숴야 밥이 맛이 있습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면서 내쉬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 어떻게 들어마시냐 하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이렇게 하지를 말고, 물론 코로는 들어가겠지만, 우리의 기분으로는 저 궁둥이 뒤에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이렇게 볼록해지도록 그런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머물렀다 내쉴 때는 코로 내쉰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쉴 때도 저리 뒤로 해서—궁둥이 뒤로 해서 저 뒤로 쑤욱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내쉬어 보시라 그말이여.
저 뒤에서 쑤욱 들어마셨다, 들어마신 호흡을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저 뒤로 쑤욱 배꼽을 뒤로 잡어당기면서 뒤로 내쉬는 거여.

그런데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하지를 말어. 너무 억지로 해 가지고는 그냥 한 두어 번만 하면 숨이 가쁘게 이렇게 하시다가 ‘아이고! 그거 되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예요.

아주 수월하게—들어마시는데 3초 걸리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한 4~5초 걸리게 조용하게 내쉬고, 이렇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거기다가—배꼽밑에 배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관심을 두고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보시라 그말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몸도 차츰 건강해지고 가벼워지고 골치 아픈 병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거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는 사람도 그게 낫고, 집안에서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가슴앓이 속병이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하면 그 병이 낫는다 그말이여.

이것을 하면서 화두까지 거기다 겸해서 하면은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이말이여. 화두는 아니하고 밤낮 고것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병을 고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 갖고는 그건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여.

거기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하고 가정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시고 낮에도 시간 있는 대로 그렇게 하시고,

이 공부는 꼭 앉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말하면서, 걸어가면서, 차 타면서, 행주좌와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 오늘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못 장소가 형편상 이 세등선원일 수도 있고, 또 보문사일 수도 있고, 군산일 수도 있고, 또 시내일 수도 있고, 조치원일 수도 있고, 청주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자리에서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 업장(業障)이 거기에서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 업장이 녹아지면은 소원성취는 거기에 있거든.(60분26초~80분55초)





(2)------------------

내가 그전에는 얼굴이 아주 시커먼 사람인데, 아! 30년을 참선을 하니까, 내 얼굴보고 검다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여.
성질이 아주 불같아 가지고 신경질을 잘내기로 아주 유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 참선을 했더니 나 보고 마음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여러분 가운데도 얼굴이 검어서 고민인 사람, 얼굴에 무엇이 많이 나서 고민인 사람, 또 신경질을 많이 내고 고집이 세다고 욕을 먹고 그러한 평판이 있는 분, 오장육부에 병이 많은—내가 또 병주머니여서 학교를 다닐 때는 1년에 한 달 내지 두 달은 꼭 결석을 했다.

그런데 출가해 가지고 참선을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그런는데, 내가 별로 약도 많이 먹지도 않고,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 죽기보다 더 싫어한 사람이어서 병원에 잘 안 가고 그러는데, 참선을 해서 이렇게 몸도 건강해 진 것 같어.

여러분들도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금방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하는 이러한 법을 명심을 해서 실천에 옮기신다면 얼굴도 예뻐질 것이고 오장육부의 병도 다 나아질 것이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평판이 있는 시어머니, 며느리, 스승, 상좌 할 것 없이 다 불보살과 같이—나는 워낙 고약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된 사람이 그만큼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금생에 불보살과 같이 될 것을 나는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늘 결제일을 기해서 여기에 모이신 출가한 스님네나 마을에 계신 신도 여러분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름 일어나듯이, 산에 구름 일어나듯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이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밝은 달은 원래로 말이 없느니라.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여러분에게 드리지를 못합니다. 이 주장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80분56초~86분1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4분 51초)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과 무루복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화주(化主) ; ①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주(主). 부처님를 말함. ②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물건·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 예로부터 석취미모(惜取眉毛, 눈썹을 아낄지어다)라고, 경(經)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설법을 하면 미모(眉毛•눈썹)가 빠진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런데 ‘한 물건(一物)’이라 표현하는 진리의 본체는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하였으니,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법을 한다'는 것은 선지식의 중생을 위한 간절한 자비심을 나타내는 뜻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체중현(337:2분48초).mp3
1.29MB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체중현(282:2분19초).mp3
1.07MB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체중현(466:2분26초).mp3
1.12MB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2분 26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체중현(112:2분36초).mp3
1.19MB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 36초)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8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2)

*병주머니 ; 갖가지 병이 많은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몽산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