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약 5분.

 

설사 화두(話頭) 하나를 타가지고 일심(一心)으로 참구(參究)를 해서 '이뭣고?'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알아진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그러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믿기를,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자기도 도(道)를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그런 긍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려고 하고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도 일으켜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물론 그 '번뇌(煩惱)다' '망상(妄想)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아.

버릴려고 한다고 버려지지도 않고,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또한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진심(瞋心)이 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슬픔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넘어져도 '이뭣고?'

뒤집어져도 '이뭣고?'


사업이 잘되아도 '이뭣고?'

사업이 실패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58분~62분3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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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