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28))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비우는 공부 /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 화두(話頭)를 든다=화두를 생각한다=화두를 관(觀)한다.
〇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음) (세등28)(화두드는법)
약 19분.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