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68)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의심관(疑心觀) /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68) - 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에서. (세등68)

 

약 21분.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모든 사람 사람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이로구나. 사람 사람의 다리 아래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하면,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은
부처님이나 조사나 모든 성현, 우리 모두 범부, 범성(凡聖)을 막론하고 낱낱이 다 본구재 도리(本具在道理), 새로 닦아서 깨달을 것도 없이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어 있는 그 도리가 있다.

그것을 본구재 도리(本具在道理)라고도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본각대지(本覺大智)라고도 하는데,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성(自性)의 법신불(法身佛)을 다 가지고 있지마는 왜 우리는 이렇게 중생의 탈을 쓰고서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면서 생사고(生死苦)를 받고 있는가?

까닭 없이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멀쩡한 탈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오늘날까지 오면서 그 탈을 바꿔 쓰면서, 여기서 나서 저기서 죽고, 저기서 나서 여기서 죽기를 수없이 해왔어.

그 무량겁을 탈을 바꿔 쓰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오면서, 우리에는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한 거울을 가지고 있는데, 그 거울 속에 그 동안에 겪어오는 모든 일들 그 거울 속에 다 녹화(錄畵)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제8 아뢰야식(第八 阿賴耶識)이라 하는 것이여.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는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오면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모든 사실들이 터럭끝 만한 작은 일로부터서 이 세계가 파괴되는 그런 큰일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그 속에 다 녹화·녹음이 되어 있는 거여.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버려라.
그 거울 속에 녹화되고 녹음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어떠한 인연을 만나면은 거기서 녹화된 것이 밖으로 이렇게 현행(現行)을 하는 것이여. 밖으로 그것이 이렇게 나와.
행동으로 나타나고, 생각으로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 나타나고, 귀를 통해서 나타나고, 그 현행을 하면서 동시에 또 새로운 사실들이 또 녹화가 되고 녹음이 돼.

녹화·녹음이 새로 되는 것을 훈습(薰習)이라 그러고, 또 훈습한 것이 밖으로 또 나타난 것을 현행이라 그러는데, 현행(現行)과 훈습(薰習)이 동시에 돌아가는 거여. 이것이 바로 우리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모습이여.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이 거울을 갖다가 여지없이  깨트려버려서 흔적조차도 없어질 때(打破鏡來無影跡),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생사 없는 도리’를 간단한 한 구절로 표현을 했지만, 새가 꽃가지에 올라와서 한 소리 우는 것이 그것이 평범한 사실이지만,
깨달은 도리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지마는 표현할 수 없는 바를 이렇게 고인(古人)은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평범한 한 구절이 깨달은 사람은 여지없이 그 깨달은 경지를 바로 볼 수가 있지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에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서 소리내어 우는 것이 하나의 평범한 사실에 불과한 것이여.
이 평범한 새 한 마리가 꽃가지에 올라가서 그 우는 것을 여기에다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붙여서 이러쿵저러쿵 자기의 소견을 붙이고 사량분별을 붙인다면, 그 깨달은 도리를 표현한 이 법(法)이 완전히 죽은 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출가해서 스승을 찾아서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해서 이 화택(火宅)으로부터 해탈하는 법문을 고구정녕(苦口叮嚀)한 육성으로 들었습니다.

활구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에 대해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말로 따지고, 또 더듬어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래가지고 ‘아하 바로 이 뜻이로구나.’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지는 거여. 그 '따져서는 안 된다'고 천 번 만 번 법문을 들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따지고 앉았어.

특히 두려운 것은 한 철,두 철, 세 철 열심히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는데, ‘이무엇고?’ ‘이뭣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끝없이 끊임없이 일구월심(日久月深) 이렇게 해 나가면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렇게 번뇌·망상이 일어나던 것이 번뇌·망상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화두를 그렇게 들려고 해도 화두는 잘 안 들렸던 것이 차츰차츰 화두가 들어지기 시작해. 화두가 차츰차츰 들어지는 시간이 불어남에 따라서 망상은 차츰차츰 줄어진다 그말이여.

그래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고,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기쁨을 아니 느낄 수가 없어. 참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한 경계를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아! 이것이 바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법열(法悅)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도(道)에 낙(樂)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완전하게만 된다면은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로구나.’ 그래 가지고 이런 상태로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생각을 내서 바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빠져서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리라 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그러니까, 그냥 그 고요한 경지에 빠져 들어가서 그것을 떠억 즐기고 있다 그말이여.

거기에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이 주의할 바는 아무리 고요하고, 아무리 편안하고, 아무리 맑고 깨끗하다 하드라도 '깨끗하다, 편안하다, 맑고 고요하다' 그런 데에 탐착해 가지고 화두를 잃어버리는 사실.
화두를 잃어버린다면 거기에서 벌써 공부는 삐뚤어져 버린 것이여. 거기에서 저 죽을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여. 사견(邪見)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여.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그런 데에는 조금도 생각을 두지 말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를 해 나가야 되는 것이여.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힘을 쓰면서 용을 쓰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허고 막 힘을 쓰면서 허라는 게 아니여.
처음에 공부를 헐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허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허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허고 자주자주 들을 수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아니 되는 거여.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 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일 분의 백천 분의 일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할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처음~20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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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소요당집 逍遙堂集] (한글대장경169, 동국대학교역경원) p100 ‘순 상인(淳上人)에게’ 게송 참고.
*범성(凡聖) ;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육도윤회(六途輪廻) ; 생사윤회(生死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겁(劫) ; (산) kalpa의 음사.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긴 시간.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여덟 가지 마음 작용.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第六 意識, 第七 末那識, 第八 阿賴耶識이라 한다.
*현행(現行) ;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種子)가 변화하고 성숙하여 일어나는 인식 작용.
[참고]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훈(熏 연기낄 훈) ; 훈습(熏習 , 薰習) ① 어떤 성질에 물듦. 어떤 기운이 배어 듦. ② 산스크리트어 vāsanā 마치 향 냄새가 옷에 스며들 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공안(公案, 화두)을 타파(打破)해서 ;
[참고]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 ; 생각하여(思) 헤아려서(量)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름(分別).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기쁨과 선정(禪定)에 들어가 마음이 즐거운 것.
*법열(法悅)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거나 배우는 기쁨. ②진리를 깨달았을 때 가슴에 잔잔히 사무치는 기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이뭣고(是甚麼) / 판치생모(板齒生毛) / 마삼근(麻三斤)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잡드리(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관조(觀照) ;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62.
〇工夫는  *如調絃之法하야  緊緩을  得其中이니,  勤則近執着하고  忘則落無明하리니,  惺惺歷歷하고  密密綿綿이니라.


공부는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하니, 너무 애쓰면 병 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미세하게 끊임없이 하여야 하느니라。

<註解>
彈琴者曰,  緩急이  得中한  然後에야  清音이  普矣라 하니,  工夫도  亦如此하야  急則動血囊하고,  忘則入鬼窟이니,  不徐不疾하야사  妙在其中이니라.


거문고를 타는 자가 말하기를 '그 줄의 느슨하고 팽팽함이 알맞은 뒤라야 아름다운 소리가 잘 난다'고 한다。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히 하면 혈기가 고르지 못한 병이 나고, 잊어버리면 흐리멍덩하여 귀신의 굴로 들어가게 된다。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되면 오묘함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제물에 ; 저 혼자 스스로의 바람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선방(禪房) ; 참선(參禪)하는 방.
*공부처(工夫處) ; 배우거나 수행하는 곳.

Posted by 닥공닥정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 법문에서 49분 58초부터 들으시면 됩니다>

 

§(582)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 이 화두는 항상 가깝게 들어야 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쉽고도 간단하고도 누구라도 행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이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여.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니거든.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을 하면,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자기의 선방(禪房), 활구참선 도량(道場)입니다.


**송담스님(No.582) - 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65분)에서. (용582)

 

약 8분.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하고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이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니라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
계(戒) - 오계·십계·이백오십계·오백 계 그런 계를,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누구를 스승으로 하느냐?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 이렇게까지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 소중한 계를 삼천 겁 동안을 청정하게 잘 지키고,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대장경을 팔만 세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 공덕(功德)을 말로써 다 표현 할 수가 없지만,

삼천겁 계를 지키고 팔만 세 동안을 경을 외운다 하더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에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다. 밥 반 그릇 먹은 동안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생각한 만 같지 못하다.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아서 실상을 염(念)한다는 것은 바로 이 활구참선 하는 거야. 잠깐 동안 활구참선 한 것만 못하다 그말이여,

그러니 계를 삼천겁 지키는 목적이 무엇이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거고,
장경(藏經)을 팔만 세 동안 열심히 읽고 외우는 목적이 무엇이냐? 나를 깨닫기 위해서 경(經)을 읽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없어,

그러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쉽고도 간단하고도 누구라도 행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이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貧富貴賤)과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 전혀 상관이 없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그것이 무엇이 어려울 것이 뭐 있느냐.

그래서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여러 선지식(善知識)들한테 여러 가지 화두(話頭)를 타셨겠으나,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여.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니거든.

여러분!  오늘 한번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한번 불러보셔.
“정은아!” 부르듯이 여러분도 여러분 이름을 부르셔,  시작!

(신도분들이 각자 자기 이름을 부른다!) OOO!
“예!”하고, (신도분들) “예!”
‘무슨 물건인고?’

공부가 잘 안 되면 조용한데 가서 자기 이름을 한번 불러보셔. 그리고 자기 목청이 터지도록 한번 불러보고 자기가 '예' 하고 대답하고 ‘무슨 물건이냐?’ 그렇게 한번 물어보시라.

무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시던지, ‘이뭣고?’를 하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공안을 가지고 공부하신 분도 그렇게 한번 해 보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이 화두는 항상 가깝게 들어야 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할 때,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일러주지만, 자꾸 하다보면,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렇게 가깝게 다그쳐서 들어야 되는 거야.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보담도 더 가깝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런 뜻으로 『‘이’뭣고?』

나중에는 ‘이뭣고?’ 소리도 할 것도 없이 대번에 정신만 차리면 의단(疑團)이 탁 나타나게 되는 거야.

여러분이 얼마만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알차게 다그쳐 나가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큰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턱~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야.(46분37초~54분4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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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戒) ; 불교에 귀의한 자가 선(善)을 쌓기 위해 지켜야 할 규범.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좋은 과보를 받을 선행(善行).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선방(禪房) ; 참선(參禪)하는 방.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Posted by 닥공닥정

§(088) 화두, 화두의심, 깨달음.

 

**송담스님(No.0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용088)

 

약 18분.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심, 깨달음>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剎那)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 깨달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참선을 해 나가는데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화두를 지금부터 말씀을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계시는 만덕장보살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혹 생각헐런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한 조건에 지나지 못하고,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 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 성품이다 • 주인공(主人公)이다 •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놨을 것입니다 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風月)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 덥고 • 부드럽고 •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갔다하고,또 10년 전 • 20년 전 •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末世)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六道)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聖賢)들도 일 생, 이 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 - 우리 밖의 모든 사물 - 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 슬플 때도 • 밥을 먹을 때도 • 차를 탈 때도 • 앉었을 때도 •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51분28초~68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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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풍월(風月) ;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 진여(眞如)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하직(下直) ;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Posted by 닥공닥정

§(458) 우리는 다행히 불법(佛法)을 만났으니 올바르게 참선을 해야겠다.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한 화두를 타 가지고, 활구참선을 해서 불조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정진해 ..

 

**송담스님(No.458) - 1991년(신미년) 동안거결제법회(37분)에서. (용458)

 

약 12분.


세상이 이렇게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온통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오욕락은 재산 - 요새 같으면은 국가적으로는 경제라고 하는데, 물론 나라가 부흥하고 백성이 잘 살라면은 경제가 부흥을 해야 하지요.

그러나 경제가 아무리 GNP가 만 불, 백만 불, 천만 불 올라간다 허드라도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에 불이 타는 한, 아무리 경제가 부흥한다 해도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말세에 정치니, 경제니, 교육이니, 일등국이니, 후진국이니 해 봤자 불법(佛法)을, 참다운 불법을 옳게 믿고 실천하지 않는 한은, 이 세상은 점점 말세적인 증상을 노출해 가지고 서로 죽이고 서로 침범하고 이웃나라끼리도 무력으로 싸우다, 사상으로 싸우다가, 경제적으로 싸우다가, 급기야는 종교로 싸우다가, 싸우고 싸우다가, 서로 죽이고 서로 죽음을 당하고 그래가지고 세상이 결국은 지옥으로 변해 가고 있다 그말이여.

나라와 나라 뿐만이 아니라 기업체와 기업체가 싸우고, 개인과 개인이 싸우고, 정치가는 당과 당이 싸우고, 이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말이야. 이러한 싸움이 GNP가 올라간다고 그 싸움이 없어지겠습니까? 올라 갈수록 싸움은 더욱 악랄해지고 피비린내 나는 지옥(地獄)세계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럴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런 불법(佛法)을 만났는가? 세계 60억 인구 가운데에 어떻게 해서 우리가 불법(佛法)을 만나서 생사없는 도리(道理)를 위해서, 도를 닦을 수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기왕 이렇게 불법을 믿고 결제에 방부(房付)를 드리고 참선을 할 바에는 올바르게 해야겠다 이거거든.

수참활구(須參活句)언정 막참사구(莫參死句)하라.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할지언정 사구참선(死句參禪) 하지 말아라.

그러면 활구참선은 무엇이냐?  활구참선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불조의 스승이 되는 것이여. 불조(佛祖),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같이 되는 거여.
사구참선을 해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얻은 바가 있다고 해 봤자, 자기 스스로도 구제를 못하는 것이다. 조사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허셔.

그러면 활구(活句)는 무엇이냐 하면은 경절문(徑截門) 활구여. 마음 길이 끊어지고 뜻 길과 말 길이 끊어져. 그리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없어.

그러면 사구(死句)는 무엇이냐 하면, 이치 길이 있고 말 길이 있어.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어. 그리고 듣고, 알고, 생각할 것이 있다 그말이야.

화엄경이나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이런 경전들이 다 일승 원교니, 대승 종교니 해 가지고 경전 중에서는 참 훌륭한 경전이고 그렇지만,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조사선에서는 그런 경전에 있는 말씀도 의지해서는 안 돼. 따지면 벌써 그것이 사구(死句)가 되어.

이런 말은 불교학자나 교가에서 들으면 불법을 비방한다고 그렇게 말을 헐는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경전을 비방한 것이 아니여.
이 활구선(活句禪)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거든. 그런 경을 다 보고 알더라도 그 경을 다 버리고서 일체 이론을 떠나서, 바로 이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확철대오하는 이 조사선(祖師禪)에 있어서는 경전에 대해서 놓아라고 헐 수밖에는 없는 거여. 그렇다고 해서 경 자체를 비방하는 것은 아니야. 여러분이 그 분간을 잘 아셔야 돼.

참선을 허시기 전에는 참선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금강경도 공부를 해야 하고 반야심경도 공부를 해야하고 법화경도 독송을 허고 화엄경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해서 숙세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인연이 있어서 참선법을 믿고 알게된 때부터서는 경을 탁 놔야 하는 거야. 놓고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턱 타 가지고 -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그때부터서는 경에 있는 말씀도 탁 놔 버리고,
오직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참구(參究)해야 한다 그말이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탄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탄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타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저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그렇게 따지는 것이 아니야.
또 정전백수자는 ‘뜰 앞에 잣낭구?’ ‘뜰 앞에 잣낭구가 무엇인가?’ 그렇게 뜰 앞에 잣나무를 쫓아가서 그 놈을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뜰 앞에 잣낭구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거야.

어느 화두가 좋고 어느 화두가 나쁜 것이 아니고, 일단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하나 탔으면 아무리 공부가 안 되더라도, 그 한 화두를 가지고 한결같이 해 나가야 돼.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의심이 안 난다고 해서 또 다른 스님한테 가서 또 화두를 타 가지고 해 보고, 그 놈이 안 되면 또 저 다른 스님한테 가서 해 보고, 그리하다 보면 맨 처음 탄 화두가 좀 의심이 난 것 같으면 그놈 좀 해 봤다, 이놈 좀 해 봤다 이래 가지고서는 확철대오를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우물을 파되 열 자를 파서 안 나오면 오십 자를 파고, 오십 자를 파서 안 나오면 백 자를 파고, 백 자를 파서 안 되면은 백 미터를 파고, 이렇게 해서 목숨을 바쳐서 한 우물을 파야 참으로 가물어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불지 않는 좋은 물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금 파 가지고 물이 나왔다면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건수(乾水)로써, 장마철에는 풍풍풍풍풍 넘쳐흐르고 가뭄이 들면은 물이 차츰 줄어서 결국은 물이 밭어지게 될 것이여.

조금 이리저리 해 가지고 뭐 소견이 났다고 해서 그런 것을 견성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불조의 지경(至境)에 이르기 전에는, 뭐 조금 한 소견났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도 깨달랐다고 착각을 하고, 그래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을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뭐 한 소식했다고 남한테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불조의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그까짓 무슨 소견이 난 걸 그것에 만족을 해?

스스로 그것이 참 깨달음이 아닌 줄 (알고) 스스로 그것을 탁 부인해 버리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의 마음으로써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자기가 불조의 지경에 이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기 전에 스스로 자기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말이야.(17분6초~28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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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末世 끝 말, 세상 세)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지옥(地獄 땅 지/감옥 옥) ; ①고통이 가득찬 세계. 현세에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사후 그 보답을 받는 곳. ②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도리(道理) ; 이치.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를 꿰뚫고 있는 법칙.
*방부(房付 방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 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 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 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선지식(善知識) ; 불교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건수(乾水) 평상시에는 물이 고여 있지 않다가, 장마 때 땅속으로 스몄던 빗물이 잠시 솟아나서 괴는 샘물.
*밭다 ; (무엇이)바싹 졸아서 물기가 거의 없어지다.
*지경(至境 이를 지/지경 경) ; 대상에 도달하는 것.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구경각(究竟覺) ;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켜 마침내 마음의 근원을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46) 활구참선(活句參禪)이란? / 묘오(妙悟) 요궁심로절(要窮心路) / 활구참선은 참나를 깨닫게 하는 가장 묘한 / 공부는 올바르게 최선을 다해.

 

묘오(妙悟) 요궁심로절(要窮心路)이요. 묘한 깨달음은, 정말 참다운 ()다운 깨달음은 마음길(心路)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길을 어떻게 끊느냐?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하면 그것이 끊어지냐? 끊을랴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여.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이뭣고?’ 오직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다못 그렇게만 화두를 의심해 따름이여. 그렇게 가면 망상심(妄想心) 끊을랴고 하지 해도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부처님과 같은 대성현이 나오셔서 다시 어떠한 우리 중생들에게 맞는 새로운 법을 설하신다면 몰라도 현재까지는 이보다 우리의 중생의 번뇌 망상을 끊어서참나 깨닫게 하는 묘한 법은 없습니다. 활구참선이 아니고서는 세상없이 나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지도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되,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 자기에게 매서운 채찍질을 가하면서 하루 하루를 그리고 시간 시간을, 아니 1 1초를 알뜰히 단속을 해야 것입니다.

 

망상(妄想)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이러한 말은 아직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여. 일어나는 망상은 조금도 성화 필요가 없거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챙기면, 화두만을 들어버리면 그것이 가장 쉬웁게 번뇌와 망상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46)—계해년 하안거해제 법어(1983.07.17) (세등46)

 

 

약 17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활구참선이라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活句參禪) 무엇이냐? 참선이면 참선이지, 활구참선이란 대관절 무엇이냐?

 

화두를 어떠한 선지식(善知識)한테 받아 가지고 화두를 갖다가 참구(參究) 하되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고, 사량분별(思量分別) 따져 들어가고,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교리라든지 지식이라든지, 상식이라든지 그런 것으로 이렇게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그러면 그것이 바로 활구참선이 아닌 사구참선(死句參禪)이다.

 

알아 들어가는 참선 아무리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서 알아 들어간다 하드라도, 그래 가지고 그럴싸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드라도 마침내 중생심, 분별심, 번뇌(煩惱) 망상심(妄想心)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번뇌 망상심이요 분별심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이다. 생사심으로 어찌 생사심이 끊어질 것이냐.

 

미륵불(彌勒佛) 하생(下生) 때까지 찾아 들어가고,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간다 하드라도 그것은 종래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묘오(妙悟) 요궁심로절(要窮心路)이요. 묘한 깨달음은, 정말 참다운 ()다운 깨달음은 마음길(心路)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길을 어떻게 끊느냐?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하면 그것이 끊어지냐? 끊을랴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여.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를 하면—‘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 화두를 하는 사람은어째서 무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무엇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이무엇고?’ 오직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다못 그렇게만 화두를 의심해 따름이여. 그렇게 가면 망상심(妄想心) 끊을랴고 하지 해도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175)

 

앞으로 부처님과 같은 대성현이 나오셔서 다시 어떠한 우리 중생들에게 맞는 새로운 법을 설하신다면 몰라도 현재까지는 이보다 우리의 중생의 번뇌 망상을 끊어서참나 깨닫게 하는 묘한 법은 없습니다. 활구참선이 아니고서는 세상없이 나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믿는 믿을 있는 바른 깨달음을 이룬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가지고 참선을 하되 처음에는 잘된 같지만, 얼마 보면 의심이 나고 답답하기만 하고 공부가 안되는 것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공부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될 수도 없고, 갈수록 점점 잘되어 수도 없습니다.

 

선요(禪要) 보면 참선하는 상황을흘러내려 오는 강물을 거슬러서 배를 밀어 올린 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물은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려 오는데, 배를 갖다가 물줄기를 거슬러서 거꾸로 상류(上流) 향해서 계속 배를 밀어 올릴 얼마나 힘이 들것이냐 그말이여.

겨우 삿대쯤 밀어 올리면은 삿대쯤 흘러내려 가고, 삿대쯤 밀어 올리면 삿대쯤 흘러내려 가고, 흘러내려 오면 다시 거꾸로 밀어 올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밀어 올렸는데 다시 흘러내려서 밑으로 십배나 흘러내려 간다.

 

그렇게 해서 밀어 올리면 올린 만큼 몇배를 거꾸로 내려가고, 밀어 올리면 거꾸로 내려가고 가지고 배가 상류로 올라가기커녕은 결국은 배가 바다까지 떠내려갔다 그말이여.

바다까지 떠내려갔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계속 상류를 향해서 끌어올릴라고 있는 힘을 다하고, 몸과 목숨을 다해서 끌어올릴라고 때에, 더이상 힘을 쓸래야 없고 기량이 다해서 기진맥진해서 기절을 버릴 지경에 이르르면 확철대오(廓徹大悟) 한다 그랬어.(2052)

 

참선이라는 것이 누구나 제게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남녀노소(男女老少) 상관이 없고, 빈부귀천(貧富貴賤) 상관이 없고, 지식(知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할랴고만 하면세수하다가 만지기 보다도 쉽다이렇게 고인(古人)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실지로 보면 이와같이 배를 물을 거슬러서 밀어 올릴라고 하는 만큼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 위해서는 몸과 목숨을 바쳐야 . 바쳐서 한번 죽었다 깨어나야만, 완전히 죽었다 깨어나야만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선지식 고인 가운데에는 소시(少時) 그렇게 일찍 깨달은 분도 가끔 있고, 언하(言下) 대오(大悟) 분도 있지만, 그러한 분은 전생(前生) 몸과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정진(精進) 있은 인연으로 금생에 일찍 깨달을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어느 생엔가는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정진이 없고서는 일대사(一大事)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3, 10, 20, 30 내지 일생 동안을 그렇게 고행정진을 해도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일생 동안을 헛되이 보냈냐 하면 그것이 아니여.

올바른 방법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헛되이 일생을 보낸 것이 아니라, 숨을 마즈막 거둘 때에도 오직 화두 의단(疑團) 독로(獨露)해서 의단이 독로한 가운데 숨을 거둔다면, 사람은 숨을 거두자마자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 해서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젊어서 확철대오를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올바르게 공부를 하되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것은바른 스승을 만났느냐, 만났느냐? 올바른 방법으로 공부를 했냐, 했느냐?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다하고 있지 않느냐?’ 오직 이것은 항시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봐야 것입니다.

 

설사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지도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되,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 자기에게 매서운 채찍질을 가하면서 하루 하루를 그리고 시간 시간을, 아니 1 1초를 알뜰히 단속을 해야 것입니다.(2534)

 

그렇게 해서 몸이 안정(安定) 되고, 몸이 안정이 되면 눈알이 안정이 되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동자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눈껍데기가 깜박깜박 그러한 것은 눈이 안정이 되얐다 수가 없는 것이여.

 

눈이 따악 안정이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앉아서나 서서나,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일을 때나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화두를 들라고 해도 터억 의심이 독로하되,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도록, 오직 그렇게만 다잽이를 해가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걱정 것이 없고, 일어나되 억지로 보낼라고 하지도 말고 누를라고 하지도 말고, 성화를 필요가 없어.

 

다만 화두(話頭)만을 거각(擧却) 버리면, 일어났던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서 화두가 독로하되, 그래도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귀로 들어오고 눈으로 뭣을 보면 모양이 눈에 들어오지만, 거기에 내가 끄달리지만 하고 화두만 들어버리면 그런 소리나 모양은 나한테 장애를 주지 아니한 자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망상(妄想)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이러한 말은 아직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여. 일어나는 망상은 조금도 성화 필요가 없거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챙기면, 화두만을 들어버리면 그것이 가장 쉬웁게 번뇌와 망상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깨끗한 그러한 경계가 나면, 자칫하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런 데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여.

 

벌써! 고요하다, ! 깨끗하다너무너무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 경계(境界) 취해 버리면 화두를 놓치게 되는데,

화두를 들면 행여나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묘한 경계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고요한 빠지게 되면 이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여.

 

아무리 고요하고 깨끗하고 그럴지라도 거기에서 화두(話頭) 떠억 챙겨야만 되는 것입니다.(1312~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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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 ; 나쁜 마음의 작용. 번요뇌란(煩擾惱亂) .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성냄()•어리석음() 있다.

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앞의 () () ()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망상(妄想 망령될 /생각 ) ;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 . 또는 그런 생각.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마음.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있게 한다.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56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 미륵이라 한다.

*생사윤회(生死輪廻) ;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선요(禪要) ; 고봉원묘(高峰原妙) 법어로,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요의(要體) 적은 .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 완성.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수할 /없을 /섞일 ) ; 대상 자체가 순수(純粹)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 없음().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자타(自他)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경계.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

*성화(成火) ; ①일 따위가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속이 , 또는 그런 증세. ②몹시 귀찮게 구는 .

*성화를 대다 ; 자꾸 몹시 귀찮게 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망상(妄想 망령될 , 생각 ) ;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 . 또는 그런 생각.

*적적(寂寂) ; 고요하고 평온함.

*성성(惺惺) ; 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확철대오(廓徹大悟 /통할 / /깨달을 ) ; 크게 통한 깨달음. 내가 나를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249) 생각생각에 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염념상연(念念相連)해라. 의단독로  그놈 연속해 나가는 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지경 / 회광자간, 회광반조.

 

**전강선사(No.249) - 고담화상법어1(임자.72.6.2)(37분)법문에서. (전249)

 

(1) 약 6분.

(2) 약 5분.

 

(1)------------------

 

항상 공안(公案)을 조주(趙州) 공안을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인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때기 이빨에 털났느니라.

무슨 도리(道理)냐 말이여. 따져가지고는 되지 않는 도리여. 아무리 이놈을 수수께끼처럼 별 생각을 다 붙여봐도 고것은 안되거든, 선(禪)이라는 것은. 그러니 그걸 주의하라는 것이여.

그러헌 의리선(義理禪), 해석선(解釋禪), 따지고 붙이는 선(禪) 그것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그런 종자(種子)는 여지없이 쫓아내 버리고 그것은 기르지 않아야 돼. 그래야 활구학자(活句學者) 활구선(活句禪)이지. 그런 것이 생겨 나오면 못 쓰거든.

다언(多言) 말을 하지 말고 공안선(公案禪)을 해라. 공안을 떠-억 염념상연(念念相連)해라. 생각생각에 그 의심(疑心)을 연(連)해라. 의심(疑心), 알 수 없는 놈을 연속해라. 시심마(是甚麼)면, ‘이뭣고?’ ‘이-뭣고?’

‘이-’ 아! ‘이-’한 놈이 있다 말이여 분명히. ‘이-’해 놓고 보니 뭐냔 말이다. 도대체 뭐냔 말이다. 별 놈의 이치를 다 때려 붙여 봐라. 모양있는 지견을, 모양있는 무슨 모양을 다 때려 붙여 봐라. 오색을 다 갖다 붙여보고 오색없는 지경을 다 붙여봐라. 그런건 공안참선(公案參禪)이 아니야.

‘이뭣고?’ 알 수 없는 하나가 떠억 나와 가지고는 그만 그놈 하나 뿐이다. 전체가 그놈 하나 뿐이여. 가나 오나 그놈 하나 뿐이여. 일체처(一切處)에 그놈 하나 뿐이여.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놈 하나 뿐이여. 똥 눌 때라도 오줌 눌 때라도 밥 먹을 때라도 그놈 하나 뿐이야.

그놈 하나 다뤄 나가는데 뭐가 그리 어렵냐 그말이여. 천하에 쉬운 것이 그뿐인데.

이놈을 생각생각이 연(連)해라. 전념(前念)이 끊어지기 전에 곧 후각(後覺)이, 뒤에 깨달은 그 알 수 없는 놈이 항상 꼬리를 연(連)해. 염념상연(念念相連)을 해라.

좋지, 참 재미나지.

그 일념(一念)이, 알 수 없는 일념이 독로(獨露)된데 가서 일체 중생고(衆生苦)가 거기 없다. 중생고가 뭐냐하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중생고인데 그저 그 분별식이 일어나 가지고는 못 견디지.

그 분별식 가운데 얻지 못한 것이 있고, 되지 않은 일이 있고, 무슨 애가 탄 일이 있고, 뭐 별 놈의 중생고가 다 거기서 일어난다. 중생고 퍼 일어나는 것이 망상번뇌(妄想煩惱)에서 일어나는건데,
망상번뇌가 붙덜 못혀. ‘이뭣고?’에는.

‘이뭣고?’.
‘이뭣고?’ 그놈이 또 ‘이뭣고?’. 찾는 놈 또 찾는구나 ‘이뭣고?'
‘이뭣고?’한 놈을 또 ‘이뭣고?'한다.

아,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아침마다 일러주는데 무엇을 물어 사석(私席)으로, 사석으로 물을게 뭐여. 물을게 있어야 묻지.

‘이뭣고---?’
‘이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이뭣고?’ 그 의심 그놈의 덤뱅이가 그놈이 참, 그것 ‘이뭣고?’라도 깰래야 깰 수 없고 흩을래야 흩을 수 없고 그놈 뭐.
잘~ 그놈 해보지. 당장에 거가서 직하(直下)에 거가서 무변리(無變理)거가 있고 변함이 없는 도리가 있고.

그대로가 독로(獨露)인대, 의단독로(疑團獨露) 그것이 바로가 그대로가 그놈 연속(連續)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지경인대, 언제나 언제나 오래오래 몇 철 몇 해 해가지고사 타성일편이 올라는가 그때 올라는가. 요런 놈의 소견(所見)봐라.

직하에 그만, 타성일편도 오는 것이고, 지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도 거기서 오는 것이고.

항상 상연(相連)해라. 그 상연(相連) 참 묘(妙)하다.(11분29초~17분24초)

 

 

 

 


(2)------------------

 

‘이뭣고?’ 하나 득력(得力)해서 그만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보지. 깨닫지 못하고 죽더라도 그 일편(一片)이 그대로 가서 그만 정법신심가(正法信心家)에 가서 그대로 몸뚱이 턱 받아 가지고 나와서 또 ‘이뭣고?’하는 것이여.

상대목전(相對目前)해라. 목전(目前)에 탁 드러나야 한다. 독로, 독로(獨露)가 그거야. 눈 앞에, 이 내 눈 뜬, 이 눈깔 눈 앞에도 나타나지마는 심안(心眼)에, 내 마음 눈이 있지 않은가. 이 눈 보다도, 눈 감아도 보이는 눈이 있지 않은가. 눈 감아도 보이는 눈 앞에 탁 나타날 것이다.

분금강지(奮金剛志)해라. 금강같은 뜻을 가지고 분(奮)을 한번 내라. 스르르르 풀어지는 고런놈의, 그 금방 났다가 금방 없어진 놈의 고런놈의 마음, 거 뭣 할거냐. 그게 도심(道心)이냐. 도 닦는 마음이 그러하냐. 금강(金剛)같은 마음을, 분(奮)을 내라.

분심(奮心)이 제일이다. 왜 내가 나를 모르다니. 왜 내가 내 면목(面目)을 내 낯빤대기를 내가 몰라. 내 콧배기를 내가 몰라. 우째서 모르냐 말이여. 무슨 까닭으로 몰라? 왜 못 봐.

그런 뜻을 한번 가지고 일념만년(一念萬年)이다. 그 생각이, 그 깨짐이 없는 그 철저한 마음, 그 뭉태기는 만년(萬年)이다. 만년이면 만년 지낸들 없어지나, 벌써 만년인대. 만년이면 또 만년이지. 또 만년이면 또 만년이지. 억만년(億萬年)이지.

그 염(念)이 도렴(道念)이 ‘이뭣고?’마음이, 이처럼 견고하고 이처럼 맺어져 한 덩어리로, 풀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화두(話頭)가 자꾸 민첩하게 아름답게 틈없이 온당한 한 덩어리 떠억 될때 회광자간(廻光自看)해라

회광자간(廻光自看)이라는 건, 다시 더 맹렬하게 ‘이뭣고?’를 한번 봐라. 관(觀)해라.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판치생모 그 의지(意旨)를, 조주(趙州)가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으니, ‘어째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놈을 한번 심안(心眼)으로 회광(廻光)해라.

가만~히 관(觀)을 해라. 관(觀)이 의단(疑團)뿐이거든.
알 수 없는 놈 뿐이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놈 딱 틀림없이 나온 놈이 그놈이, 그것이 반조(返照)여.
회광반조(廻光返照)를 달리 했다가는 큰일나.
여기 다 그렇게 해 놨으니.

그놈을 찰이(察而)하고 부관(復觀)해라. 살피고 또 다시 관(觀)하라 하는건, 의심(疑心)을 더 맹렬히 하고 후렴(後念)을 더 알 수 없는 의심을 자꾸.

의단 뿐이니까, 의단독로(疑團獨露)니까.
관(觀)이나 부관(復觀)이나 찰(察)이나 전부가 의단(疑團)이라는 거여. 의심 하나 뿐이여.

의심을 가만~히, 꼭 ‘어째서 판치생모~’해서 되나.
나중에는 그만 판치생모가 그대로 의심 하나 뿐인데, 이뭣고가 그대로 의심 하나 뿐인데.

살피고 다시 관하는(察而復觀) 것이 그것이 거기에 가서, 용맹도 더하고 신심도 더하고 분심도 더하고 못된 중생념이 붙지 못하게, 거기서 뭐 그러헌 무슨 별념(別念)이 생겨 나올 것이 뭣이 있나.(20분4초~24분53초)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