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 일대기2020. 4. 2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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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강선사 일대기(田岡禪師 一代記) (제12호) 경봉스님과 탁마.

 

**전강선사(No.025)—전강선사 일대기 제12호(경술1970년 12월 20일.음) (1971년 1월 16일) (71분)

 

(1/4) 약 16분.

 

(2/4) 약 20분.

 

(3/4) 약 15분.

 

(4/4) 약 21분.

 

(1/4)----------------

 

참선활구학자(參禪活句學者)여  이가세월심(離家歲月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저성낙매곡(笛聲落梅曲)이여  금일자가보(今日自家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참선 활구학자야! 참선허는 활구학자들, 이렇게 사부중(四部衆)이 이렇게 모였구나.

아무, 세상에 도무지 앞뒤 없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활구를 깨달을라고 몽그리고 나온 학자들이다. 앞뒤, 뭐가 있어.

 

간단허다. 얼마나 진실허고 얼마나 참되고.

 

세상에, 세상에 이 일 밖에 더 있어?

그놈의 숭악헌 그 악업(惡業)만 짓는 일 그거 다 내던지고, 생사 없는 해탈(解脫) 직업 밖에 더 있어? 이 직업 위에 더 있냔 말이여?

 

그대로 진실해 버렸고. 흥! 우리는 인자 원수도 다 끊어져 버렸고, 지옥도 악취(惡趣)도 다 우리에게는 없고, 해탈 대학자다.

 

저성낙매곡(笛聲落梅曲). 인자 언하(言下)에 대오(大悟) 남았다.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서, 의단만 잘 갖추어 앞으로 나간다.

그 일, 의단독로 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언하대오.

 

낙매곡(落梅曲)을 듣고, 낙매곡이라는 곡조가 있는디, 매화 떨어지는 곡조를 터억 첫 소리에 듣고 활연대각이다. 활연(豁然)히 대오(大悟)를 했느니라.

 

세상에, 그밖에 어디 있을 거여. 참, 이상 없제.

출격장부(出格丈夫)요, 격 밖에 뛰어난 장부요. 겁외장부(劫外丈夫)요, 겁 밖에 장부요.

 

활구선학자가 그렇게도 응, 그대로 다 지켜져 있고, 그대로 다 가져져 있고, 본래 그 근본 바탕 고대로가 청정 계행(戒行)이요, 일체 십악중죄(十惡重罪) 거그 지을 것 어디 있어? 뭘 지어?

지을 죄상(罪相)도 다 벗거져 버렸는디, 죄상이 거그 어디 있어? 십악중죄장이 어디 있냐 말이여?

 

가지느니 범하느니, 일체 재계(齋戒)니 일체 파계(破戒)니, 어디 있어?

다맛 활구학자! 그러니 겁외장부요, 겁 밖에 난 장부요.

 

내가 이렇게 응, 그때 암만 내가 병이 들어서 곧 죽게 되았지마는 거그에 가서 힘을 얻어 놓으니,

그렇게 내가 무슨 확철대오라고 헐 건 없지마는, 그래도 큰스님네한테 내가 그만헌 인가(印可), 딱딱 그 법담(法談)헌 게 안 있어?

 

어디 일점난만(一點難謾)이제. 내가 없는 말 그대로 '인가 받았다' 고러고 댕겨?

나, 그런 추접스런 소리는 헐 이치가 없고, 그런 비인격적 행동을 왜 해? 응, 그러헌 활구학자가. 없제.

 

암만 병이 들어서 내가 피 다 흘려 버리고, 몸은 백지장 같이 되아 가지고 나섰지마는.

그래 머리 길루어 버리고 오장치 하나 짊어지고 짚부채 하나 맨들아 들고, 그러고 척 나서서 댕기지마는, 천하에 나보담 참말로 활구학자가 어디 있으며, 나보덤 청정헌 행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느냐?

 

느그는 나를 아무리 무행자(無行者)로 보고 무행—중도 아니제, 무슨 중으로 댕겼나?

바가지 들고 막 얻어먹고, 막걸리면 막걸리, 뭐 고기 겉은 걸 주면은 그놈 콩나물 대가리 겉은 거 얻어서 아 그놈 한점 먹고, 그놈 한점 한점 먹는 바람에 거그서 내가 그 얼마나 청정관(淸淨觀)을 가지고, 깨끗헌 청정관이지.

 

그 돼야지 고기가 무슨 돼야지 고기란 상(相)이 붙어 있나? 거 가서 무엇이 붙어 있어?

'내가 돼야지 고기다. 내가 추육(醜肉)이다, 더러운 고기다. 내가 무슨 뭐 괴기다' 일체제상 (一切諸相)이 어디 거그 붙어 있냔 말이여? 거가 무슨 제상이 붙어 있는가?

 

나는 다맛 그대로 받아서, 아 그놈 먹고 내 소업(所業)을, 내 닦아 행하는 바를 그대로 이루어 나가는데.

뭐 '무행허는 사람'이니, 뭔 '정영신이는 그대로 그만 선방에서 삐끌어져 나가 가지고는 어촌주사(漁村酒肆)에 안하무행(眼下無行)을 허고 댕긴다'

소문이 그만 뭐! 그때 그 뭐 별것 아니지마는 나 하나로서 그러헌 뭐 참 천담만설(千談萬說)이 일어났다 그말이여. 방방곡곡(坊坊曲曲)에 그랬제 뭐.

 

'그거 그래 병 들어 가지고 인자 나가서 주사(酒肆)에 안하무애(眼下無碍) 허고 댕긴디 뭔 도(道)는 뭔 도 어쩌고?'

천(千)이 그럴 것 같으면은 거기에 한두 사람이나 혹 지자지(知者知)헐까, 누가 아느냐 그말이여? 알 사람이 누구겠냐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대승사 가서—인자 갔다왔다 하니까 뭐, 어디 정망헌 데가 있어야제? 갔다왔다 하니깐 정망처(定望處)는 없고, 이리 갔다 또 온 길도 오기도 허고, 저리 갔다 도로 북회우동류(北廻又東流)도 허기도 허고 이러제.

 

나, 그 뭐 어느 날 어디 갔고 어느 날 그 알 것이여? 그때 뭐 연대갑자(年代甲子)도 총부지(總不知)허고 나선 사람이. 그런 것 소용 없어.

시방도 다 뀌어 대라 할 것 같으면, 그때가 나이 어느 때 쯤 되았다 그저 그건 알지마는, 소용 없어.

 

혼자 그와 같이 처음에는 보따리 하나 그래 나서 가지고 나중에... 그거 다 고런 건 안 넣었으니깐 그려.

 

또 순흥(順興)까장 가 부석사(浮石寺)에 들어가서—요건 그 시방 족 가는 그 행로(行路)가 아니고 인자 중간 중간이 그건디.

순흥 부석사에 들어가서, 그 순흥 부석사가 소천서 10리 올라가드구만. 영주 소천서 10리를 올라가.

그때는 그 뭐, 영주인지 무엇인지 소천인지 내가 그런 말은 내가 알았는데.

 

올라가니 칠십 주가 보이는 디여. 눈앞으로 칠십 주가 따악, 칠십 고을이 보이니 얼마나 앞이 툭 터졌어.

올라가니까, 주지는 석운이라고 허드야, 뭐 서옹이라고 허드야 헌디, 그 사람은 나가 버리고 없고 아이 하나가 있는디, "야, 내가 배가 고파 죽겄으니 나 밥 좀 도라"

하! 이놈이 어린아이라도 그 거지 숭악헌 거지, 거지로도 볼 수가 없고, 아! 그런 건디, 그놈이 그렇게 나를 그 반가이 허면서 밥을 따뜻허게 채려 준 것이 잊혀지지 않는군.

 

그놈을 얻어먹고, 거그서 내가 짚 한 다발을 얻어 가지고는, 고 짚으로써 가마니 치데끼 그런 꾀를 내가지고는, 노끈을 이렇게 인자 여럿을 이렇게 해 놓고서는, 짚을 조끔씩 가려서 요리 양쪽으로 짚뿌럭대기가 나오게 해 가지고는 요렇게 엮고, 돌 달어 가지고 요렇게 엮고, 또 돌로 요렇게, 이놈을 잘 엮어서는, 양쪽을 요리 뒤집어 싸서 또 요렇게 요렇게 엮어서 오장치를 만들아 놓으니 희한허다 그말이여.

 

그놈에다 갖다가 인자 떨어진 옷을 거다 집어 넣으니깐, 어디 가다가 쉬어도 좋고.

궤짝을 처음에 져, 천하 못쓰겄드구만. 꿰짝은 그 안 되겄드구만. 그것도 경험이 있어야 겄드구만.

짚 오장치를 짊어지고는, 바가지는 인자 그 오장치 속에다 넣기도 허고, 설찬히 큼직허게 해서 지고. 태평이여.

 

짚부채를 하나 인자 거그서 만들아서 팔죽선이락 햐.

짚부채 하나를 팔죽선을 맨들아서, 자리는 이렇게 하나에 묶어 가지고는 끝에가 여럿... 하나, 둘, 셋 엮어가 나중에 넷 엮어 가지고 한 댓 맥기... 끝에는 엮어 놓으면은 넙적허게 되거든.

세상에, 그놈 드니, 참 태평이여.

 

가다가도 아무디라도 땅이 추저도 고놈 놓고 깔고 앉고, 어디 가든지 그놈 깔고 앉기가 좋아. 고 짚방석이라 냉기도 안 올라오고. 고 하나!

또 급허면 어디 가서 뭣 주면 거다 받아. 받아 놓고 먹기가 십상이여. 거 둘!

그다음에 더우면 부쳐. 응 셋!

 

나, 다는 못 하겄구만, 여덟 가지인디.

그 팔죽선이여, 하여간. 여덟 가지를 다 수용허는 것이여.

 

가다가 저 장(場) 겉은 디 가면은 사람이 많이 모여들어. 이래 장으로 모도 가.

봐 가지고 저녁 때 나올 때가 더 좋아, 갈 때보다.

 

짚부채로 한번 툭 둘러.

들고는 서서 "여보시요, 와서 내 말 한마디 듣고 가시오" 그러고 짚부채를 두르네.

 

그 뭣이, 저런 사람이 저 움펑 감투를 쓰고 저런 것이 있는고 싶어서 모아든다 그말이여.

모아들면은 약 처음에 한 여나뭇 그저 이렇게 모아들면은 설법(說法)을 혀. 좋제, 설법 그때!

 

허!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을 헐 것 같으면은 어떻게 된다는 그런 설법도 해 주고. 대번에 그 무슨 참선법을 말허니 알 것인가?

그다음에는 인자 무슨 그 공덕찬 법문도 해 주고. 모도 고런 디 등등 쓰는 것이여.

 

그 여덟 가지의 팔행선(八行扇)이라고 허기도 허고, 팔죽선(八竹扇)이라고 허기도 허고. 요렇게 만들아 가지고 짊어지고는 한바탕 또 고놈을 댕겼다 그말이여.

고러헌 그 짊어지고 댕긴 고놈 고때가 또 따로 있고, 고 놈을 지고 또 댕긴 게 아니여.

이것은 뒤고, 또 뒤 거를 헌 거여. 이 뒤 것 헌 것이고.(처음~15분38초)

 

 

 

 

(2/4)----------------

 

대승사에서 그 박홍록이를 만나 가지고는 가야금을 인자 내가 짊어지고. 그 대승사 거쳐 왔지.

 

그 장진사 참, 대방(大棒) 내루고... 대방 내룰 수밖에 없지.

갖다가 활구학자를 쭉 모아 놓고 삼십여 명, 근 오십 명 모아 놓고, 예천 또 보살님네도 모였드구만.

그 대중에 앉어서, 글씨 그렇게 법문을 갖다가 옳게 허지 못허고.

 

응! <네가 확철대오를, 조주 무자에 확철대오를 헐 것 같으면은 산승(山僧)의 주장자(柱杖子)로도 역미긍타이재(亦未肯打爾在)허리라. 산승의 주장자로도 너를 갬히 칠 수 없다>

이래 놓은 그 법문인데. 그 어떤 법문인데, 그 대중의 눈을 멀리냐 그말이여.

그걸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있나! 내가 체면만 채리면 뭣 헐 것이여. 벼락이다! 벼락이여.

 

조주무자(趙州無字)는 종문중일관(宗門中一關)인디, 종문 가운데 제일인디, <조주무자를 담하득거(擔荷得去)허면, '무(無)'헌디 툭 깨달라 버릴 것 같으면은 산승의 주장자로도 역미긍타이재(亦未肯打爾在)허리라. 산승의 주장자로도 너를 갬히 칠 수 없다>

 

무슨 말이여? 그 주장자가 어떤 주장자냐 그말이여.

아, 이놈 어림도 없네! 어림 택이나 있어? 그건 못혀!

그 방(棒)을 갈려 내아?

 

<조주무자를 담하득거(擔荷得去)허면, 깨달라 얻어 가면, 산승의 주장자로도 너를 칠 수 없느니라>

흥! 무서운 그 조주십절목(趙州十節目) 가운데에 일(一) 절이여.

 

또 그 밑에 내려가다가 또 <상(賞)야, 벌(罰)이냐?>

고 밑에 가서, <조주노인검(趙州露刃劒)이여. 조주 드러난 칼이여. 한상광염염(寒霜光焰焰)이다. 차운 서릿빛이 염염허구나. 의의문여하(擬議問如何)하면 분신작양단(分身作兩段)이다. 어떻다고 헐 것 같으면 너는 몸이 두 쪼가리 나 버렸느니라>

 

고 밑에가 그게 있어.

 

<상야(賞耶) 벌야(罰耶), 상방이냐, 벌방이냐?> 헌 놈이 그 제2절에 있어.

 

그게 무슨, 그거 그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법문을 장진사가 허고 있는데, 장진사가 그때 예천 아주 그 도인(道人)으로 유명혀.

아, 그런 도인인디, 거그 와 앉어서 그것을, 이놈을 갖다 학자들한테다 가서 사구(死句)를 만들아서 설파(說破)를 허고 앉었네! 아, 이런 꼴이.

 

탁! 내가 들어가서 '그런 법이,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막, 환성지안 선사의 일할(一喝)로써, 거 무슨 외도(外道) 잡데끼... 중간에 그 무슨 외도, 뭐 나 만날 얘기헌 것 없는가 왜?

냅대 그만 잡아 한바탕 했단 말이여.

 

거까장 저 엊저녁에 내 했지.

또 허거든. 백 번 허면 어째.

 

어디 가서 그런 데 가서 내가 거지 행동을 허며, 그런 데 가서 내가 체면을 채리며 그럴 것이여?

막 때려 허야지. 내가 나선 길이 어떤 길인데.

 

아, 이놈 그 나를 거지로 보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보든 홍록이가 퍽 나를 참...

 

그런게 모도 나와서 그만 절을 헐밖에 없제. 내가 절 다 받았구만.

장진사도 "그렇겄습니다"허고 참 했고. 진사도 나이 뭐 그렇게 늙지도 않고 헌 사람이 법(法)에 가서 어쩔 것이여.

 

그래 놓고 내가 그놈을 즈그가 다 정신채릴 만큼도 해 주었네.

<본분납승(本分衲僧)이라는 게 그 어떤 걸 본분납승이라 하느냐?> 하고는 한바탕 해 주었거든 또.

 

상방 벌방도, '거기에서 상방이다 벌방이다, 상방벌방이다' 허고 앉었어? 바로 일러야지!

하! 그놈 뭐 해 놓으니 뭐 어쩔 꺼여?

 

 

그래 홍록이허고 같이 인자 참, 어울러졌제. 그래 그날 따라댕기면서 인자 가야금을 내가 '가르켜달라'고...

앉으면, 석상(石上)에도 앉으면은 요놈은 요렇게 허고, 요놈은 요렇게 허고, 요놈은 저성이고, 요놈은 탄성이고 뭐 그걸 다 일러 주고 가르켜 주고, 뭐 허잔 대로 해 주어.

 

그러지마는 돈벌이를 헐라니께, 그 사람은 영리(營利)로 나섰으니 돈벌이를 헐라고 하니까 어디 잔치집이던지, 어디 환갑 친 디던지, 고런 디를 댕겨야 허거든.

또 대승사 마냥으로 절 겉은 디, 그런 디 들어가서 한가히 허는 디 가서도...

 

또 고놈이 인자 아주 그 가야금 고놈이 아주 그만 살림살이라. 고놈만 척 놓고 앉으면은 참, 기가 맥힌 사람이다. 천하에 미남자요, 천하에 제일이여! 그러고 댕기다가도 보면.

 

아, 그러니 그분은 절 같은 디를 들어가서 더러 놀아야 할턴디, 절 같은 디 따라 들어가면 아조 곤란혀.

나는 벌써 머리는 길렀고 누데기는 입었지마는, 그놈이 중누데기도 아니고, 이건 뭐 속인 누데기도 아니고, 속인 거지도 아니고, 채림채림이 그 이상해.

 

그래 가지고 가서 그런 디 가면은 그 어울리지도 않고—어울리나, 안 허나, 그까짓 것 상관없제.

어울리고 누가 뭐 안 어울리고, 나를 잘 봐 주고 못 봐 주고, 그런 디 걸려 있지 않으니깐 상관없지마는 어쩐지 가기 싫어.

절 겉은 데 하도 많이 댕겨 쌓고, 그런 데는 가기가 싫어.

내가 끄리니까, 나를 또 대접허기 위해서 곧 갈 절도 안 들어갔어.

 

그러고 댕기면은 거 참 그것도 농세(弄世), 참 우리 활구학자들 거침없이 댕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여. 한번 척 그놈 들어 매고 절에도 가고 환갑집에도 가고, 그냥 홍록이는 이름이 나버려서 가는 디마당 대환영이여.

아, 그래 댕기면서 그 가야금 타고 한바탕 놀면은 그냥 음식이라는 것은 참 대접 잘혀. 그것 참! 내가 부엥이 집을 만났어.

 

혼자 짬짬허니 댕기다가 십 리도 가고 오 리도 가고 그렇게 댕기면서 얻어먹다가, 그게 좀 고적혀. 대단히 고독해.

그게 고독이 뭣이 있을까마는—무슨 놈의 고독이여? 청사십리행을 헌들, 십 리를 바라보고 간들 내가 거기에 무슨 뭐, 거가서 뭣 할 것이여? 십 리 쫓아가 뭣 할 것이여? 그저 가는 길이지.

 

십 리도 행하고 오 리도 행하고, 있고 싶으면 있고, 아 이러고 나가는데 뭣이 고적허고 고독허고 있을 거여?

그 속에서 내가 그저 얻은 독존 경계가 있으면 내가 그 경계나 가지고 나갈지언정, 뭐 내가 뭐, 뭐 하나 임산임수(臨山臨水), 등산도수(登山渡水)에 뭣이 뭐 의심이 있으리요? 아무 무슨 고독이니 무엇이니 없지.

 

그러지마는, 어쩌다 그놈의 습기(習氣)가 갱동(更動)이여. 응, 다생습기(多生習氣), 과거 습기가 갱동을 혀.

다시 동(動)해서 너무 그냥 사람이 하나도 없는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가서, 새소리만 너머 듣고, 짤짤 흐르는 계성(溪聲)이나 듣고 앉었으면은, 혹 또 좀 아따 인간이 너무 이래 고요허고, 외롭고 멀어!

고런 지경이 더러 있드구만. 그게 이 뭐 나는 '오! 이것이 다생 모도 습기로구나'하고는 지내다가.

 

 

그래도 또 목적이 그 무엇을 좀 멕여 줘야 할턴디, 이렇게 당초에 그만 몸이 원청 못쓰게 되아 버렸으니, 목적은 나선 것은 이 몸을 좀 어떻게 좀 복구를 해가지고는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내 목적은 나섰는디,

넘이야 웃건 말건, '무행한다' 뭔 '버렸다' 뭐 그까짓 놈의 소리는 관계헐 것도 말 것도 없고.

 

'아, 이것 좀 먹어야 허겄는데...' 이러고 있다가 연기 푸르르 나면 뒤에 조금 있다 들어가면 꼭 밥 푸거든. 밥 푸면은 고 밥 푸고 끝에 눌은밥처럼 붙은 거, 고 훑어서 조금 주제, 많이는 안 주어 그것도. 어떤 집이는 한때 먹게 주어.

 

그놈을 몇 집 얻어야 되는데, 그놈의 것, 댕김서 그까짓 것 얻어 봤던들, 반찬 조끔 달라고 해 얻었던들 그거 뭐 영양이 뭐 있어?

뭐 고기 누가 주나? 안 주어.

 

혹 가다 인자 잔치집을 만나 들어가면은 콩나물 좀 허고 거다가 뭐 콩과자 겉은 것 좀 놓고, 촌에 잉!

고기는 어쩌다 째끔 한 점 주거나 그려. 그도 그놈 참 맛있지. 싸서 그놈 먹고. 막걸리 한잔 그놈 주면 먹고.

헐 수 있어? 그것 뭐, 그것 내가 그런 것을 가리고는 안 먹고 어쩌고 할 꺼여? 그놈이 첫째 제일인디, 좀 먹을라고 나갔는데.

 

그러니 어디 가서 내가 그때 그래 가지고서는, 돈 좀, 아... 또 이것도 중간에 그저 왔다갔다 하네.

 

용성 큰스님께서 망월사에서 날 인삼백합탕(人參百合湯)을 백 첩(貼)을 지어 주어.

그때 약 한 첩에 일 원씩이여. 그 일 원씩이면 굉장헌 약이여. 그렇게 지어 줘.

 

그런 약을 못 얻어먹어 내 나간 것 아니여. 문어 전복 같은 걸 먹기 위해서 내가 바닷가에 어디 가서 사 먹을라고 혀도 얼마든지 사 먹어.

허지마는, 고것이 아니여.

 

막 산도 올라가고, 물도 건네고 풍파고행(風波苦行)을 해 나가면서 생기면 생긴 대로 먹고, 눕고 자고 싶으면 바우 우에 자기도 하고 이렇게 자연치료, 고행치료, 고렇게 해야 된다고 의원(醫員)이, 백용남이 병원에서 의사가 고만 이렇게 아조 말해 주고.

그 병을 뭐 가만히 앉어서 괴기만 얻어먹으면 낫는 게 아니여. 그래서 그렇게 나선 거여.

 

백합탕 그놈 백 첩을 달여 먹어봐도 소용이 없어. 그것 가지고는 되들 안해.

육단(肉團)이 동(動)해서 목구녁에서 피가 어려 가지고 나오니까 안 되아. 오직이야 그랬을 것이요.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해서 도 닦으러 나온 사람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도를 닦다가 그런 병을 얻어 가지고 나온 사람이 무슨 뭔 무행(無行)헐려고 나섰겠어?

그 어리석게 넘의 지경을 알도 못허고 비판이지.

 

그까짓! 세상에 무슨 뭐 조금도 거그서 퇴태심(退怠心)이 있다면 내가 바로 말하지.

거그서 더 무상하고, 나는 거그서 도를 더 닦고. 참 바우 사이에 가에 앉어서라도 참 기가 맥히지.

 

시삼계(是三界)에, 화택삼계(火宅三界)에, 삼악도(三惡途)에 한번 뛰어 날라 하면은 그 보통 그 이마심(伊麼心)을, 이러헌 마음, 이럭저럭 헌 마음, 요걸 가지고 될 것이여?

좀 해 보다가 안 된다고 돌아댕김서 그만 한화(閑話)나 하다가, 잡담이나 하다가 휭 나가, 바람 쐬러 나간다고 삥 돌아댕기다가, 가만히 고 있을 때에 찾아보면 없거든. 하! 이런 꼴 좀 보소.

 

그 사람 어디 갔냐고 조사 안 한 줄 알어, 내가? 날마당 조사여.

오늘은 그 사람이 어디 갔구나. 오늘은 나갔다가 어디로 오는구나.

 

내가 이렇게 이빨 하나 해 넣은다고 해서 갈아 가지고 이 쑤셔 넣고는, 그냥 쑤셔 넣고 바로! 그만 쫓아 온 사람이여. 와서 그저 뒷조사부텀 낱낱이 허는 사람이여.

 

글씨 어디 갔다가 내가 환히 본 중에 문을 하루 잠과 놓고 보니...

그저 바람 쐬러는 가제. 허지마는 한 저 담을 한 댓 장이나 뜯어 놓고는 고리 넘어 댕겨.

내가 다 보고도 "아 여그 어떤 도독놈이 이랬냐, 어쩌냐?" 헌게, "아마 그 무슨 그놈들이 그렸는가 보요" 어쩌고 이려. 흠, 기가 맥혀서!

 

그렇게, 이마도차로 해 나갔다가는 이 한평생 그르쳐 버러. 된 법 없어.

이 한평생뿐 아니다. 미륵하생(彌勒下生)까장 해 보아라. 되는 건가? 안 되아.

 

아주 치워 버려. 도 닦기를 치워 버려.

치워 버리면 어떻게 헐 건가? 그 치워 버린 곳이 어떤 곳인가? 기가 맥히다.

 

자, '아무리 오욕락(五慾樂) 그놈의 것 한번 해 보고 이놈의 것 중노릇을 헌다던지, 이놈의 중노릇 때려 치워 버리고 오욕락 한번 받아 봐야겄구나. 좋은 마누라 하나 얻어서 아들 잘 한번 낳아 보고, 나도 세상에 한번 보람 있이 살아 봐야겄다' 어짜고 그래 봐.

그래 가서, 가서 살아 봐. 좋은 마누라, 미인 하나 얻어 가지고 살아 봐.

 

과거에는 안 살아 봤나? 몇천만 겁을 거 살아 왔고, 몇천만 겁을 또 죄 지어서 지옥고도 가 받아 봤고, 안 간 데가 어디일 것인가?

 

대도(大道), 한번 깨달라 본 일은 없어.

 

바로 깨달라 버릴 것 같으면은 그건 각세계(覺世界)인디, 깨달은 각세계에 가서, 각세계에 가서 무슨 삼악도가 있나? 삼악도는 무슨 삼악도며, 뭐 지옥이니 천당이니 거가 뭣이 붙어 있냔 말이여?

천하에 거그를 말씀해서 '나 깨달은 해탈 고향, 확철대오' 거가 극락세계(極樂世界) 상품상생(上品上生)이고, 거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란 말이여. 그런데 뭐 뭐 뭐 두말할 것이 어디 있어. 틀림없어!

 

그런디 어리석은 중생 앞에 헐 수 없어 그 상견(相見) 말을 그렇게 허고, 사견 말을 그렇게 말씀했지마는, 사견 · 상견을 그렇게 말씀을 했지마는, 사견 상견을 여의고는 법을 설헐 수가 없기 따문에 극락세계 상품, 그 말을 해 놓고서는 부처님 말씀에 뭐락 했어?

 

극락세계 상품 봐라.

그 뭐 그 무슨 새가 있으되 보살 화현(化現)이 모도 새가 되아 가지고 있는데 무슨 가릉 · 공작, 거 무슨 별별 모도 그 새가 다 울음을 우는데 그 울음 소리가 모도 법문이고, 모도 뭐 이렇게 모도 말해 놨으며,

금 · 은 · 유리 · 파려 · 차거 · 진주 · 적주 모도 보배가 왼 산이 모두 되아 버리고, 나무가 모도 보배가 되아 버리고, 왼통 이렇게 사견 · 상견을 막 드리 설해 놨다 그말이여.

 

'사견 · 상견이라는 것은 도무지 못쓰니라'고 막 해 놓고는, 거그는 그렇게 해 놨네.

그만 그 중생의, 모도 중생의 그 방편설(方便說)이 아닌가?

 

꽉 맥힌 놈의 중생이라는 것은 상(相) 밖에는 볼 줄 모르고, 사견 밖에는 볼 줄 모르고, 죄 짓는 것 밖에는 모르고, 어디 가서 나를 깨달을 줄 아나? 나를 믿을 줄이나 알며, 내가 뭣인 줄이나 아나?

그러면 어디, '내'라는 그곳에 들어가서 무슨 상견이 있나? 모냥 상견이 어디 있어? 거가 무슨 색상(色相)이 있나? 사견 · 상견, 색상 없는 곳을...

 

그렇게 이렇게 방편으로 설하다가 싸악 돌아와서 『금강경』에 와서 보란 말이여. 여 『금강경』 있는 것 보란 말씀이여.

세상에, 바로 못 봐? 바로 못 믿고, 바로 못 행해?(15분39초~35분10초)

 

 

 

 

(3/4)----------------

 

다, 그래 가지고는 젠장! 이거 좀 고독헌 상이 혹 습기(習氣)로 그 동(動)햐.

그러면 나는, 그저 그려도 그저 그렇게 나섰으니깐 뭐 정처 없이, 연한 연조 없이 좀 댕기리라고 댕기다가 그 마침 홍록이를 만나서 따라댕기니 잘 얻어먹어!

 

나 참 거! 아, 그렇게 한마디씩 놀아 놓으면은 모도 돈 거둬 주제, 좋다 하제, 야단나제. 그러면 상을 턱! 채려 오면은 나도 거그서 얻어먹어.

그려 미안혀 죽겠드구마는, 속으로는 그렇지마는 미안헌 놈의 것을 내가 어따가 뭐 그 뭐 체면 차릴 것이 있나.

 

그냥 앞에 좋은 놈, 홍록이 앞에 놓아 준 놈, 그런 놈 뭐 옆에서 내가 먹으면은 그 대중 중에, 만좌중(滿座中)에 좀 안 되았는갑드구만. 그런게 나를 옷을 좋은 놈 한 벌을 해서 줄터니까 입고 그러고 댕기자고 해.

'에이, 그녀러 것은 싫다. 내가 옷 잘 발라 입고 뭐 머리 잘 하이칼라 허고 그놈 짊어지고 댕기면 내 도리에 어긋난다. 어디 가서 그건 절대 불(不)!'

 

그래 가지고는 뭔 그래 딴엔 좀 챙피헌갑드구마는, 사람 많이 있을 때에는. 속으로는 퍽 나를 무척...

 

그런 디다 가다가 바우 같은 데 앉어서는, '인유생로병사(人有生老病死)하고, 사람의 몸뚱이는 나서 늙어 죽는 그러헌 이 인생이라는 건, 우리 이 몸이라는 건 이런 것이 붙어 있고, 계유성주괴공(界有成住壞空)이 있니라. 이 세상은 암만 장엄 찬란헌 나라라도 성주괴공이 있느니라. 무너지고 없어지는 때가 있느니라'

이래서 그 무상(無常)한 설법해 주는 데 가서 아주 믿었어! 홍록이는 날 꽉 믿어서 '아이고, 나를 참 바로 제도 지도해 줄 선생이다!'

 

사실이제 뭐. 그러고 나는 저헌테 요구헐 것이 노래 좀 배우는 것 뿐이여.

노래 그것도, 그것도 전문으로 이렇게 그걸 배워야제, 생각은 따로 있고 배울라니까 잘 안 되드구만.

 

 

모도 안 자올고 잘 듣는가?

안 자오는가 보다. 이런 소리에는 안 자올거든. 그 묘허제.

하나도 안 자오네. 시방 내가 보니.

 

똑 한 놈이 눈 감고 있구만, 고놈은 안 자온 체험서. 고런 것은 쫓아 내버려야 헌다.

내가 다 알고 혀. 한 놈이 그려.

 

그따구로 공부헌 체허고.

법문 들을 때에는 측이목이청현음(側耳目而聽玄音)이라니.

 

내 법문을 그렇게 슬쩍 들을 법문 아니여!

'허, 참 자기가 법문허면서 자기 법문이 제일이고 자찬(自讚)하고' 그렇게도 듣지 말아.

 

내가 그 거문고를 한번 또 탈 작정이여. 그걸 해야 허제, 안 넣으면 안 되아.

그게 평상화(平常話)요, 그게 제일구(第一句)요, 그게 말후구(末後句)여.

이거 여의고 있어? 보란 말이여.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인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니라. 뜰 앞에 잣냉기니라"

그 뭐, 그거 바로 그대로 해논 거 아닌가.

 

이런 참! 내가 도장원(都壯元) 법문에 가서 "꿀 딱 받아 먹고 있을 때 어떻게 살아 가겄느냐?"

"달다!"

어디 여의고 했나? 어디 딴 데가 찾어 거다가 붙였는가? 왜 도장원 안 했을 것이여?

 

 

홍록이를 따라댕김서부텀은 참 거 퍽 잘 얻어먹었네!

그러지마는 챙피해서 '옷 한 벌 해 줄라?' 안 입어. 뭘 내가 입어, 그놈의 옷을 얻어 입어?

얼마나 청백(淸白)하며, 내가 얼마나 처억! 그 굳은 절개를 가지고 나섰는데, 그 옷을 내가 벗을 것이여? 소용없어.

 

가지고는 얻어먹고, 인자 가다가 조금 쉴 때 가서 그런 데 가서 배왔어. 어디 그 그런 데가 놈서 어떻게 배울 것이여?

 

그 실없이 여그서 내놓으면은 법상(法床)에서 그 실격(失格)이여. 격이 아니지마는, 아 우리 대중께 뭔 내가 그 뭐 조금 실수허면 뭐 별거 있나?

어디 가서 그 실수헌 것을 비방하고, 어디 가서 모도 비방선전을 해서, '법상에서 저 거문고 가야금 타고 단가(短歌) 하드라' 그러고 모도 비평헐 것이여?

 

무비법(無非法)으로써 아, 이렇게 다 헐지언정, 내가 이런 것도 여그다 넣어 놓으면, 이 모도 보살님네께서 돈을 모도 그 어려운 돈을 모도 합해서 모도 벌어 가지고 녹음 테프를 사 줬는데,

'여그 녹음 테프에다가 좋은 법문을 해서 모도 넣을지언정 이런 음곡(音曲)을 넣어서, 가야금 겉은 거 노래 곡조를 넣어서 해 놨으니' 그렇게 거그서 모도 그렇게 발견헐 것이여?

 

'그게 무진곡(無盡曲)이요, 그게 참으로 법문(法門)이다' 이러셔야 하고.

이 결집(結集)헐 때에는 결집헌 사람이 뺄라면 빼고, 넣을라면 넣고 그럴 것이제.

 

인자 여그서 이 홍록이 편에, 홍록이 만나서 이렇게 지내다가 뚝! 떨어져 갈려 버려.

그까짓 것, 그거 뭐 참 벼락이제 뭐. 물이 청산 지내가는 격이제, 그 뭐 거 내가...

 

허지마는, 우선 댕기다가서 그놈 발심(發心)시켜 놓고. 발심을 시켰으니 간 디마다 노래 한마디씩 불르고는 저도 인자 모도 무상헌 법문도 다 넘 해 줄 것이고.

그때 동사섭(同事攝) 포교(布敎) 허니라고 그랬제.

 

그래도 그것 전공으로 안 배운게 안 되지마는, 무데무데 하나씩 듣고 배운 것이...

그 단가 곡조도, 그것 노래쟁이 곡조라고 다 노래가 아니여. 암만 듣기 좋다고 노래가 아니여.

인자 참말로 그 노래 그것도 거 참 곡조가 상당허고 기가 맥혀.

 

이 '만고강산(萬古江山)'도, '백구야'도.

 

(노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이러면, 그 노래 곡조는 돼도 안 된다는 게여. 그 아는 사람은 그려.

 

(노래) 백구야~ 훨~훨~ 나지 마라

요래야 헌다는 거여. 왜 그러냐? 그래야 그놈이 안 날라가제.

 

(노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는 거여.

 

(노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이래야 이놈이 곡조가 된다는 거여. 그놈 그 격이라. 경이여. 그래 놓고는 그놈을 맞춰서 허거든.

 

(노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너를 잡~으러 내 안 간다.

징~ 징징 지당 당~ 징당 동당

 

그것 잘헌다, 참 좋다 말이여!

응, 웃지 말고 들어, 인자 곡조인게.

 

그러고, 고것도 곡조에 들어간 놈이고.

또, 봉래산 좋은 경처 지척... 다녀올라니... 만고강산 유람 갈제...

 

(노래) 봉래산(蓬萊山) 좋은 경처, 지척(咫尺)에 던져 두고 못 본 지가 몇 핼런고.

다행히 오늘날에 만고강산(萬古江山) 유람 갈제, 경포(鏡浦) 동령(東嶺)의 명월(明月)을 구경허고, 청간정(淸澗亭) 낙산사(洛山寺)와 총석정(叢石亭)을 구경허고,

단발령(斷髮嶺) 올라보니 천봉만학(千峯萬壑) 부용(芙蓉)들은 하날 닿게 솟아 있고 백절폭포(百折瀑布) 급한 물은 은하수(銀河水)를 기울은듯 잠든 구름 깨워 맑은 안개가 잠겼으니 선경(仙境)일세가 분명쿠나.

당 징 지당~당당당당 징~징 지당 동징...

 

아! 그 법문이 말후구 법문이 이럴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댕김서 그래 놓으면 얻어먹고도 참 족햐!

그놈을 잘 얻어먹고 아, 그렇게 댕기면은 몇 해 말헐 것도 없이 살도 요렇게 찌고 좋겠어.

허지마는, 그녀러 것 조끔 해 볼 일이제, 그렇게 많이 그것 가지고 돌아댕김서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만 가다가 저 무슨 저리 올라가다 영동 올라가다가 그 '잘 가거라, 잘 있거라' 헐 것도 없고 새벽에 그만 보따리—저 곤해 자는디, 오장치 짊어지고는 '에이! 간다 이놈아 잘 있거라. 너 잘 가거라 이놈아'

나와 버렸제. 나왔어. 나와 가지고 어라, 여까장 왔다가 내가 그전에 안 본 사찰이 있으니 사찰이나 보고.

 

인자는 에지간히 좀 나아져. 확실히 나아져. 기운도 나아지고.

이병위사(以病爲師)하니, 병으로서 스승을 삼았으니 그 병고에 내가 그 야단칠 게 뭐 있나?

그까짓 놈의 내, 좀 나아지니 점점 그 몸도 끌고 댕길만도 하고.

 

나와 가지고는 언양을 왔제. 와 가지고는, '어라, 여까장 왔다가 내가 그 전에 안 본 통도사를 볼 수밖에 없구나' 인자 경봉당을 찾아간...

 

그래 가지고 인자 금당을 들어갔어. 금당에 들어가서, 공소방에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갈라고 공소방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대중에는 간 것도 없고, 내가 대중에 뭣허러 가? 승방같은 디도, 뭐 그 머슴 자는 방도 안 들어가는디.

 

그저 '공소방에서 자라' 해. 어쩐지.

몸이 깨끗하겄당, 뭐 그 인자 좀 그래도 얼굴도 조금 나아지고 뭐 그런게.

 

공소방에서 밥을 이리저리 줘서 그래 밥을 먹고 거그 잘라 한디, 저녁 밤에 아직 한 여덟 시나 됐을까 헌디, 아 노장님이 한 분 내려왔어 보광전 선원에서.

 

"아! 신수좌(信首座)님 아니요?"

 

이리 본 게 추천원 스님! 아니 저 추천원이 아니라, 저 추천원은 금강산 저 호랭이, 저번에 왜 호랭이, 대글빡 줏어다가 묻은 그이가 추천원 스님이고. 아, 이 스님이 누구여? 아따, 그?

아따, 그 뭔 당최 저번에도 다 알았는데 또 이렇게 안 나온다. 그만 두고.

 

그 입승(立繩) 스님이 나왔어. 나 아는 이여. 잘 아는 이여.

 

"아 이거 웬 일이여? 신수좌님!" 그래.

"왜요? 뭐 뭐, 당신 그 나를 놀랠 것 뭐 있소? 그만 그대로 가만히 당신 혼자나 알고 있제, 그 뭐 야단이여" 그런게.

 

"아이고! 우리 신수좌님이 왔냐!”고.

아, 노장님이 내 앞에 절을 그냥—아 이런 놈의, 뜻밖에 이러니깐 마음에 나도 어리둥절허고.

 

채공 · 공양주가 모도 듣고는 가서, 모도 공포(公布)를 해 버렸네.

그만 큰 절에서도 알고, 보광전 선방에서 '신수좌가 여그 왔다'한게, 왁 나왔어. 대중이 다 나왔어.

하! 이런 놈의, '아따 내가 에지간헌갑다' 싶기도 하고. 또 그만 '에이, 내가 괜히 들어왔구나' 싶기도 하고.

 

"자, 어쨌든 여하약하를 막론허고 보광전으로 가십시다" 허고 오장치를 막 쥐어 끌어.

"그까짓 놈, 오장친들 질러 갖고 해. 그러면 내, 나 안 갈란다"고, "내비두라"고 헌게,

 

아 그양, 뭐 그양 그놈도 그저 그양 그것 가지고 짊어지고 갈까 싶은게 그런가, 그양 기어이 끌고는 보광전으로 들어갔어.

보광전에 갖다 보기 싫은가 아무데나 놓길래, 내가 뒤집어다가 딱 놓고는.(35분14초~49분56초)

 

 

 

(4/4)----------------

 

"경봉 스님이 지금 우리 통도사에서는 제일가는 스님인데, 강(講)으로도 제일가고, 참, 뜻도 그 의지도 굉장한 스님이신데, 김경봉 스님, 아주 일 경봉스님이신데, 아! 그분이 참선허다가 그만 견성했다 해 가지고는 저리 야단나 버렸습니다"

"왜 견성(見性)했으면 견성을 했제, 왜 야단나?"

 

"천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견성 후에도 약불견인(若不見人)이면, 큰스님을 보지 못허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했으니, 신수좌님이 좀, 꼭 좀 봐 주셔야 허겄습니다"허고, "그저, 그저 자비를 드리우소서. 그저 이 외에 더 있겄습니까"허고.

아, 이 노장님이 설찬히 노장님이여 그이가. 헌디... 같이 있다 한 철 지내고 다 그랬구만. 그래 이름이 시방 안 나오는구만.

 

아, 어떻게 붙잡고 이런지 당최 뭐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있어야제.

 

그런데 경봉 스님은 대체 그 견성했다 해 가지고는 굉장해. 뭐 왼 산중이 다 '경봉 스님은 참선허다가 마(魔)가 들었다'한 사람도 있고, '미쳤다'고 헌 사람도 있고, 이렇게 모두 야단나고 있을 때인디.

 

김구하 스님이 그때에 주지는 아니고 별당으로 나와 있을 때인가, 그때가?

별당에는... 그렇제, 아마 별당으로 나와 있었제. 그 전에 우리 어릴 때 들어와 중이 될 때 그때 주지니까. 여러 해, 여러 철 했제. 그럼 그때 뭐 그때 주지가 누구든고, 내 그건 모르겄구마는.

 

참, 강사 많기는 양산 통도사요, 산중 중 많기는 양산 통도사요, 통도사 또 그 무슨 그때 무슨 절에서 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 학생이 굉장히 많고, 지방학림이 있고 굉장한 덴데, 중들이 다 모아 버렸네.

'어디서 신수좌라는 뭐 그 중이 아주 그 걸식허고 댕기다가 들어왔다' 소문이 나 가지고는 꽉 들어 모여. 장처럼 들어 모였네.

 

그날 밤 자고, 그날 저녁에는 밤에는 인자 글안코는 인자 그 이튿날 아침에 또 두 번째 와서 그랬어.

새벽에 그 조끔만 허면 떠날 판인디 아, 그냥 일찌거니 들어와서 떠날까 싶은게 와서, 그래서 날 샌 뒤에 갔다 그말이여.

 

 

가니까 그 키가 큼직허니 경봉 스님이 큼직헌 이가 보광전 조실방에 앉어서 "후우, 후우, 푸우" 아 이러고 앉었어! 몸뚱이서 그려. 눈을 뜬게 눈이 벌겨.

그래 가지고 "허! 네가 아느냐, 네가 아는냐?" 아, 이래 쌓고는 망담을 막햐. 추담망담(醜談妄談)을 막햐. 추담망담이라 하면 알겠제, 내가 여그서 똑 그런 말을 해서 되아?

 

그저 글시 양산 언양서 모도 여자, 젊은 여자가 오면, 경봉 스님 견성했다고 모도 와서 절을 허면 "네 이년들, 네 이년들!" 그러고 욕을 혀. 막 욕을 혀.

"네 이년들!" 그래 놓고는 "야, 이년들아! 이것이 화엄경이여"

거다 모도 붙여 가지고 욕을 혀. 아 그러니 뭐 말헐 것이 뭣이 있어?

 

딱 앉었는디, 날 보고 인자 그만 좀 닥트려 달라고, 법담을 좀 허고 물어 달라고 그러니, 아 내가 뭐라고 헐꺼여 가서?

까딱 잘못하다가는 걸승, 객승 걸승이 그 큰 이가 쫓아와서 빰대기나 한번 냅대 쳐 놓으면 아, 거그 내가 그 볼일 다 봤제. 그런 놈의 우세가 어디 있으며... 내 참, 기가 맥혀.

 

아, 그런데 앞뒤서는 어디로 도망도 못 가게 해 놓고는 좀 해 달라고 헌단 말이여.

참! 만행(萬行)이여. 그때 나 그때 참말로 항상 생각허면 만행이여.

 

그 만좌(滿座), 그 왼 산중이 다 모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아, 그 경봉 스님이나 나와 가지고 빰대기나 한번 때리고, "이 자식, 이 거지, 이놈의 자식이!" 발질로 툭 차 버리면 어쩔거여 그거?

 

암만 내가 그 얻어먹고 댕겨도 고상하기를 짝이 없고, 내가 기가 맥힌 원력(願力)을 가지고 댕긴 사람인데, 그 어쩔거냔 말여?

더군다나 또 법담이나 허다가 내가 그 꼼짝달싹 못해 버리면은—마구잽이 제일귀를 일러도 차 버리고, 아무리 좋은 설법을 그대로 해 줘도 "뭐가 이 자석아!" 허면 어쩌? 소용 있어, 그거?

그 본전 못 찾아. 안 된단 말이여.

 

척! 가다듬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될꼬? 응, 꼭 한바탕해서...'

전부! 그 산중 전부 그 보자는디, 나는 뭐 거지로 들어온 사람인디, 내가 그 거그서 인자 날라갈 판이여. 까딱허면 인자 그 누데기고 지랄이고 뭐 거 참, 기가 맥혀.

 

아! 이놈의 거, 달아나도 못하고 이것!

에라, 이놈의 그러나저러나 그까짓 것 내가 그것에 놀래? 전...

 

두어라! 그놈의 것! 냅대 한 번 용맹 용기를 내 가지고는 "경봉당, 이만치 나오시요"

나오드구만, 앞에 은근 '정영신(鄭永信)'이라고 헌게 눈이 둥그레, 그래도!

그래도 다 알아. 뭐 어디 생리적으로 미쳤나?

 

원상(圓相)을 척 하나를 그려 놓고 조끔도 내가 태도에, 조끔도 무슨 뭐 포외(怖畏)가 있어? 무슨 포외여.

그대로 원상을 척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와도 치고, 이 속에 나가도 치느니라... 친다"

마조(馬祖) 화상에 답살천하인(踏殺天下人) 허는 공안이여. "이르십시요"

 

내가 공경히 "이르십시요"

나보담 나이 한 8세나 더 자셨는데.

 

그런게, 그만 나오더니 두말헐 것 없고—그렇지! 자기 경계는 속일 수 없은게—그 원상을 이렇게 응! 이 뭉케.

 

그 어째? 시험헌 법이 어째?

 

원상 그거 뭉켄 것도 상당하지. 응, 고불(古佛)이 미생전(未生前)에, 고불도 생기기 전에, 일상원(一相圓)인디, 한 일상이 둥그렀는데 그 일상까장도, 법상(法相)까장도 다 한 번 뭉케니, 그 지견(知見)이 그 아닌가. 그거 상당헌 지견이제.

강사(講師) 지견은 거그 못 따라. 그거 요새 의리(義理)로, 무슨 체중현(體中玄)으로 뭐 고까짓 거 못 따라, 거 딸치 못햐.

 

법로(法路)로는 막간 것이여. 법로 길로는 막 들어간 거여 그게.

요새 무슨 뭐 어짜고 어짜고 무슨 '한 물건 없는데 없는 놈까장 어쩌고' 고따구 놈의 소리를 가지고서 되아? 어디 거그서 거그서 참말로 봐.

 

"그, 거그다가 때려 묻어라!" 고함질렀네.

"고 원상 저 뭉켄 거기다 갖다 집어 넣고 묻어라!" 내가.

 

얼마나! 환허니까 인자 그때 가서는 어쩔 것인가? 내 힘이 힘대로 나제.

경봉당 그 지금 어디 꺼꾸러진 것을 내가 바로 찾았기 따문에 그래 힘이 일어나는 거여.

 

다루는 걸 보아!

"거다 묻어라" '때려 묻으라!'고 냅대 고함을 지르니께, 턱 허니, 탁! 뜨고 눈을 이래 떠 가지고 나를 보고 앉었어.

 

앉었다가는 "내가 알았다! 알았다!"

 

왜 그래, 왜? 응, 왜 그래? 안 봤으면 그려?

그것이 바로 들어가는 거여. 바로 가는 거여.

 

벌써 눈치 보니 분명 봤다! 그말이여. 틀림없어. 뭐 일러서 내가 아나?

 

아, 여그 보살님이, '그런 말 더러 허드냐?'고 허면 한마디도 그걸 못 들었댜.

그 그때가 경계가 당신이 그 알도 못헌 경계인가, 날 모른지도 몰라. 알 수 없제.

 

뭐 비불발설(非不發說), 안 헌대야. 그런 말 헐 것이여 허기는. 안 허지만.

내야 뭐 안 혀? 내야. 내가 없는 말을 이런 말을 허고 앉었어? 아, 이런 꼴 좀 보소.

 

그만 내가 가서 여그를, 옷을 요짝을 잡고 "나오라"고.

그 안 따라 나와? 나오제, 안 나와?

 

후딱 거그서 둘이 올라가서, 그 건네 물 건너서 옥련암 밑에를 내려간게, 바우가 물 흐르는 것 다 왔네. 물이 짤짤 짤짤. "대중은 다 물러가라"고.

 

거그 딱 앉혀 놓고서는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에, 아는 곳을 향해서 알았다고 고함지른 것을 이르라!"고 헌게, 안 일러? 퍼떡 이르제. 허!

 

"거, 어떠요?"헌게 고개를 끄덕 끄덕. 그 밖이여.

다른 것 아무 것도, 아무 다른 공안 하나 내가 갖다가, 거다가 더 탁마(琢磨) 없어.

그러고는 내가 나와, 내려왔어. 더 헐 것 없는 거여. 뭘 뭘 다른 걸 탁마, 물을 게 없어. 그러고 암만 그때 본 정신은 아니거든.

 

턱 둘이 내려와서 "부디 진중(鎭重)허라"고, 내가 그래 부탁해 놓고는.

인자 그때에—추산이다! 추산. 추산 스님이다! '가을 추(秋)'자 '묏 산(山)'자, 추산(秋山) 스님인데,

입승이 추산 스님인데, "참, 고맙다"고 절을 허고, "좀 두고 봐야겄습니다. 어찌 될른지 인자 모르겄습니다"

 

그냥 그러고 돌아와서는, 점두(點頭)허고 들어와서는 딱 앉더니—그렇게! 요 일 순간도 그냥 안혀, 뭐 욕을 해 놓고는 '화엄경이다, 뭔 경이다' 요래 자꾸, 요러고 앉었어 요러고. 아, 요거 미친 거 아닌가.

그 기운이 딱! 잽히면서 가만히 앉어서 아침 밥 먹드락, 낮 밥 먹드락, 도무지 조는 법도 없고 앉었대.

 

그 나는 떠나와 버렸지. 내가 그 뭐 알 거 뭐 있나?

나 떠나간 뒤에 그만 그 버릇이 딱 고쳐지고.

 

나는 일렀다고, 그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 탁! 했고 뭐 틀림 있어? "어떠냐?" 딱딱...

 

그러고는 내가 통, 나 중 치고 내 평생에 둘이여!

경봉... 그놈에 탁, 내가 '그렇다'고, 그다음에 매곡사에서 은(隱)수좌! 은수좌, 그놈 아침까장 깜깜하더니 밥 딱 먹고 나서 탁! 여지없이 일러.

 

내 여다가서 그 송(頌) 내가 얘기허고. 나, 송(頌) 아직 얘기 안 했어. 그 나오는 것이여, 그 나와.

아침까장 10년 묵언 마지막 헌 날, 아침까장 깜깜하던 것이 밥 딱 먹고 나서는 그저 언하(言下)에 오(悟)지. 언하대오(言下大悟)야. 똑 둘.

 

또 게송을 안 잊어 버리고 나오는가 모르겄다.

시방 그 경봉 스님 또 그 송은 내가 잊어 버렸구만. 그 무슨 원을 가지고 헌 것이 있는데 잊어 버렸어. 그런데 그건 떠나와 버려서 또... 잊어 버려 이렇게.

 

이건 묵언수좌(默言首座), 여 송담(松潭), 시방 이 게송이로구만.

거가 황매산이여. 오조(五祖) 스님 계신 데도 황매산이지마는—여 황매산이제? 응? 알제야. (예, 황매산입니다) 그 모두 매곡리가 있고.

 

 

황매산정하춘설(黃梅山庭下春雪)이다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를

나무~아미타불~

하사(何事)로 십년(十年)을 왕비력(枉費力)고  월하섬진대강류(月下蟾津大江流)를

나무~아미타불~

 

그 황매산정(黃梅山庭)에 하춘설(下春雪), 그때 눈이 올 때여. 정월달이니까.

황매산정(黃梅山庭)에 하춘설(下春雪)이다.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리는데, 한안은, 한안(寒雁)은 여천향북비(唳天向北飛)라. 그렇구나! 아까 그걸 몰랐네.

 

한안은 여천향북비로구나. 차운 기러기는 저 하늘가로 울면서 향북비(向北飛)라. 북으로 향해 날라 가는구나. 고게 직경이제. 좋제.

한안은 여천향북비다. 차운 기러기는 장천(長天)에 울면서 북으로 향해 나는구나.

 

하사(何事)로 십년(十年)을 왕비력(枉費力)이냐. 무슨 일로 내가 10년을 묵언(默言)을 묵언을 허면서 그 고생을 했는고?

월하섬진대강류(月下蟾津大江流)다. 달 아래에 섬진강이 흐르는구나.

 

참 잘했지! 잘했어.

다 말해 봐! '잘했다'는 말이나.

 

내가 둘을, 틀림없제. 만약 그때에 경봉 스님이 나한테 그 지경 못 잡았으면 안 되아.

지금 경봉 스님이 지금보담 더이상 가는 학자를 데리고 더 교화를 헌다 해도 인증 안 해.

 

인증 안 허면, 내가 인증 안 허면 안 되아. 왜 그러냐?

내가 한국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나를 다 인가했는데, 내가 인가 안 허면 되아?

어림도 없는 일이여. 그러니께 내 지금 그러 헌 말이여.

 

나도, 내가 무슨 나 혼자 헌 소리여?

나도, 시방 깨달라 가지고 모두 견성해 조실(祖室)에 앉어 있는 분이 지금 여러 분인데, '나도 당신네 인가를 받아야 허겄으니, 자기네도 내 인가를 받아라' 이러고 있어. 틀림없어.

 

그런 법 없어. 절대로 안 되아!

자기 혼자 인가도 없이 그대로 나와서 즈그끼리 인가허고, 즈그끼리 조실에 앉고 그런다고 되아?

 

활구학자들아! 불가불심(不可不審)이냐, 어찌 살피지 않을까 보냐?

그게 뉘(누구의) 목숨을 자르는 일인가 생각해 봐! 뉘 모가지를 베는 것인가 생각해 보란 말여!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있다면, 확철대오허는 참선법이 있다면 어찌 우리 부처님의 말을 믿지 않고, 우리 부처님에 그 경계를 밟지 않을 것인가?

불불(佛佛)이 이렇게 전통해 왔는데, 어떻게 안 혀?

인가 없는 스승한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될 것이여?

 

'그럼 고불(古佛)은 어디서 인가 받았냐?' 이러고 나와?

왜 왜 고불 이전에, 어디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없다고도 해 놨지마는, 위음왕불도 생겨 나온 그런 불도 무슨 당신 그때 깨쳤제 뭐.

거 어디 '없다' 했나? 없다고 했어? '전연 없다'고는 안 했지.

 

인가 없이 깨달은 이는 생이지지(生而知之)보담도 승학(勝學)이다.

그 만(萬) 가운데 드물다 그랬지, 없단 말은 없거든.

 

그러면 해필 거그 쫓아가서 '어디 누구는 인가 있나? 중흥조한테 모도 누가 인가했나?' 요러고 앉었어?

다 있어. 다 대왔어, 또 그러고.

 

요새 요새 사람들은 더군다나 제가 나와서 못혀. 암만 천하없이 그래싸도 못혀.

 

허니, 내가 누가 견성 못했느니, 누가 견성했니 내 그런 말을 허는 건가?

우리 부처님에 이와 같이 밝혀논 그 우리 정법—못 깨달라 가지고 '깨달랐다'하고, 남 죽이고 저 죽고 불법 망허고 이걸 내가 말허는 것이제, 누가 못 깨달랐느니 깨달랐느니 누구 내가 허물허는 사람이여? 내가 어디 그런 허물을 내가 무슨 해서 뭣혀?

 

이렇게 내가 바른대로 척사현정(斥邪顯正), 사(邪)를 배척허고 정(正)을 나투아 놔사 도(道) 배우는 학자들이 여기에서 바로 가제.

그래서 내가 여까장 말헌 것이드라.(49분57초~1시간10분52초) (일대기 12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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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몽그리다 ; 몽구르다.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벼르거나 굳게 다짐을 하다.

*숭악하다 ; ‘속이 응큼하다(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거나 음흉陰凶하다)’ ‘흉악凶惡하다(성격, 언행이 모질고 악랄하다)’의 사투리.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악취(惡趣) ; ①악도(惡道). 삼악도(三惡道). 악업을 지어서 죽은 뒤에 태어나는 고통을 받는 악한 세계.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②육도(六道)를 악취라고 하기도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가로판 p53)

當於本參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에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에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를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參上(어본참상)에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가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와 二六時中(이륙시중)에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활연히(豁然- 열리다·달達하다·탁 트인 골짜기 활/그러할 연) ; ①앞이 탁 트여[豁] 시원스러운 그러한[然]. ②의문이 갑자기 풀려 막힘이 없이 밝게.

*출격장부(出格丈夫) ; 격 밖에 뛰어난 장부. 보통의 규격을 초과한 장부.

*장부(丈夫 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겁외장부(劫外丈夫) ; 겁 밖에 장부. 우주세계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변화를 벗어난, 곧 우주세계의 생성 · 소멸을 벗어난 불생불멸(不生不滅),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경지의 장부.

겁(劫)은 세계의 성 · 주 · 괴 · 공(成住壞空) 등이 반복되는 헤아릴 수 없이 긴 무상한 변화의 시간을 말한다. 따라서 겁외(劫外)는 세계의 성 · 주 · 괴 · 공(成住壞空) 등이 반복되는 헤아릴 수 없이 긴 무상한 변화의 시간[劫]을 벗어난[外] 초연한 경지를 말한다.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〇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〇말[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〇뜻[意]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일점난만(一點難謾 한 일/점 점/어려울 난/속일 만) ; 한 점도 속이기 어렵다. '한 점[一點]'은 아주 적은 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장치 ; ‘오쟁이’의 사투리. *오쟁이 : 물건을 정돈하거나 담아 두기 위하여 짚을 엮어서 만든 작은 섬(곡식을 담기 위해 짚으로 엮어서 만든 자루).

*무행(無行 없다·~하지 않다 무/행하다·계행·행실 행) ; 계행(戒行)이 없다[無]. 계를 지키지 않는 것. 또는 수행(修行)을 하지 않다[無].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어촌주사(漁村酒肆) ; 어촌(漁村)과 주막[酒肆(술 주/가게 사) 비교적 큰 규모의 술집].

*'연대갑자(年代甲子)도 총부지(總不知)' ; '세월이 가나 오나 내 알 바 아니다'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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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棒) ; 몽둥이. 또는 주장자(柱杖子).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柱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을 말함.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은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에 있어서 본참공안에 대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 참구를 하지 않고, 사량분별·알음알이로 공부를 삼는 잘못된 병폐를 10가지로 정리하여 그 병폐를 알고 극복해 올바른 활구참선을 하기 위한 몽산 스님의 법문.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냅대 ; ‘냅다(몹시 빠르고 세차게. 또는 그런 모양으로)’의 사투리.

*본분납승(本分衲僧) ; 본분산승(本分山僧), 본색납자(本色衲子)과 같은 말.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堅持)하는 납승. 또는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도리를 깨닫기 위한 수행을 하는 스님.

*부엉이 집 ; 부엉이는 집(둥지)에 먹을 것을 많이 모아 두는 버릇이 있다는 데서, 없는 것이 없이 무엇이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다생습기(多生習氣) ; 육도(六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서 생사윤회를 반복하며 살아온 수없이 많은 삶 동안에 익혀 몸에 밴 습관(적인 기운).

*원청 ; ‘워낙(두드러지게 몹시)’의 사투리.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육단(肉團) ; 육단심(肉團心). [범] Hrdaya  4심의 하나。 심장을 말함。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 한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화택삼계(火宅三界) ; 화택(火宅). 세상의 쾌락에만 깊이 집착해 지혜롭지 못하여, 온갖 번뇌 · 생로병사 · 우환의 고통을 받는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세상[三界]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온갖 번뇌와 고통, 생로병사의 사나운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무서운 세계.

[참고] 『법화경』 제2권 '제3 비유품(譬喩品)'에서.

一切衆生 皆是吾子 深著世樂 無有慧心 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 常有生老 病死憂患 如是等火 熾然不息

 

모든 중생이 다 나[如來]의 자식이건만 그들은 세상의 쾌락에 깊이 빠져 지혜롭지 못하며, 삼계(三界)는 편치 않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아 온갖 고통이 가득차 심히 두려우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우환의 그러한 불길이 사납게 타올라 꺼지지 않고 있다.

*삼악도(三惡途, 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미륵(彌勒) : 대승보살. [범] Maitreya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등이라고 음사하고, 한역하여 자씨(慈氏).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현재는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고도 하고, 미래에 성불할 것이 예정된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보처보살(補處菩薩) : 보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줄임말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태어나면 성불하여 부처님의 자리[處]를 메우는[補] 것이 예정된 보살을 일컫는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아 미래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을 이른다. 부처님 생존시에 아일다(阿逸多, Ajita)가 도를 열심히 닦아 도솔천에 왕생하여 이 보살의 위치에 올랐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태어나기 전에 호명(護明)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살의 위치에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도솔천보다 낮은 사천왕천이나 도리천·야마천에는 게으름과 욕정이 남아 있고, 도솔천보다 상위의 천들은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각(覺) ; 깨달음.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상견(相見) ; 상(相)이 있다는 견해.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577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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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좌중(滿座中) ; 자리에 꽉 차게 늘어앉은 여러 사람 가운데.

*하이칼라(high collar) ; ①머리털을 아랫부분만 깎고 윗부분은 남겨서 가르는 서양식 남자 머리의 모양. ②예전에, 서양식 유행을 따르던 멋쟁이를 이르던 말.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측이목이청현음(側耳目而聽玄音) ; '눈과 귀를 기울여 현미(玄微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미묘함)한 소리를 들으며'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聞法之次 如履薄氷 必須側耳目而聽玄音 肅情塵而賞幽致 下堂後 默坐觀之 如有所疑 博問先覺 夕惕朝詢 不濫絲髮

 

법문을 들을 때에는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여, 반드시 눈과 귀를 기울여 현미(玄微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미묘함)한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에 번뇌를 맑히고 그윽한 이치를 완상(玩賞)하다가, 법당에서 내려온 뒤에는 묵묵히 앉아 관하되, 만일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먼저 깨우친 이에게 널리 물으며, 저녁에 근념(勤念)하고 아침에 물어서 실오라기 털끝만큼도 넘기지 말지니라.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제일구(第一句) ; ①‘처음 한마디 말’이니 불교의 핵심도리를 드러내는 첫번째 말.

②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개념 지을 수 없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以心傳心) 진리를 가리키는 말.

[참고] [三句] 삼구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207 참고. (가로판 p214)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참고]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말후구(末後句) ; ①말후(末後)는 구경(究竟), 필경(畢竟), 구극(究極), 지극(至極)의 뜻. 구(句)는 언구(言句), 어구(語句), 문구(文句)란 뜻. 크게 깨달아 구경에 이르러서 하는 말. 지극한 글귀. 말후일구(末後一句).

②문장의 맨 끝의 말. ③임종의 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①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②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달다 ;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의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달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에 대오할지어다.

 

*무진(無盡) ; ①다함이 없는 것. 다함이 없을 만큼 매우. 끝이 없을 정도로 매우. ②무궁(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무제(無際 넓고 멀어서 끝이 없음).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동사섭(同事攝) ; 보살(菩薩)이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攝受)하기 위하여 행하는 4섭(四攝 :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하나.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이 일하며 어울려 지내면서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苦樂), 화복(禍福)을 함께 함으로써 자연스레 중생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말한다.

 

 

*단가(短歌) <만고강산>  (소리 / 박초선. 북 / 조용복)

만고강산(萬古江山) 유람(遊覽)할 제 삼신산(三神山)이 어디메뇨 일봉래(一蓬萊) 이방장(二方丈)과 삼영주(三瀛洲) 이 아니냐
죽장(竹杖) 짚고 풍월(風月) 실어 봉래산(蓬萊山)을 구경갈 제
경포(鏡浦) 동령(東嶺)의 명월(明月)을 구경하고 청간정(淸澗亭) 낙산사(洛山寺)와 총석정(叢石亭)을 구경하고
단발령(斷髮令)을 얼른 넘어 봉래산(蓬萊山)을 올라서니 천봉만학(千峯萬壑) 부용(芙蓉)들은 하늘 닿게 솟아 있고
백절폭포(百折瀑布) 급(急)한 물은 은하수(銀河水)를 기울인 듯 잠든 구름 깨어 일고 맑은 안개 잠겼으니 선경(仙境)일세가 분명쿠나
이때마침 모춘(暮春)이라 붉은 꽃 푸른 잎과 나는 나비 우는 새는 춘광춘색(春光春色)을 자랑한다

봉래산(蓬萊山) 좋은 경치(景致) 지척(咫尺)에 던져두고 못 본 지가 몇 핼런고
다행(多幸)히 오늘날에 만고강산(萬古江山)을 유람(遊覽)할제 이곳을 당도(當到)하니 옛일이 새로워라
어화 세상(世上) 벗님네야 상전벽해(桑田碧海) 웃들 마소 엽진화락(葉盡花落) 뉘 없을까
서산(西山)에 지는 해는 양류사(楊柳絲)로 잡아매고 동령(東嶺)에 걸린 달은 계수(桂樹)에 머물러라
한없이 놀고가자 어이하면 잘 놀손가
무정한 친구 벗님네 금잔디 자르르르 깔린 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거리고 놀아보자.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공포(公布 공개·공적인 것·널리 공/펼·드러낼 포) ; 일반 대중에게 공개적(公開的)으로 널리 알림[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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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74~75. (가로판 p78)

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이 바른가를 결택 받아야 하느니라。

    

註解(주해)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須生慚愧(수생참괴)하야사  始得(시득)다  道如大海(도여대해)하야  轉入轉深(전입전심)하니 愼勿得小爲足(신물득소위족)하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則(약불견인즉) 醍醐上味(제호상미)가  翻成毒藥(번성독약)하리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道)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닥트리다(닥뜨리다) ; ①(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마주하여 가까이 서거나 만나다.

②(사람이 닥쳐오는 일이나 문제 따위에) 직접 맞서다.

③(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다그쳐서 재촉하다.

*우세 ; 남에게서 놀림이나 비웃음을 받음. 또는 그 놀림이나 비웃음.

*포외(怖畏 두려워할 포/두려워할 외) ; 두렵고 무서움.

화엄경에서는 ①생활의 두려움. ②명예를 잃을 두려움. ③악도(惡道)에 떨어질 두려움. ④죽음의 두려움. ⑤대중 앞에 나섬에 대한 두려움 따위의 다섯 가지 두려움을 이른다.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2분 19초)

[참고] 송담스님(No.282) - 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의리(義理)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2분 48초)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2분 19초)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2분 26초)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분 36초)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4분 18초)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반기이파>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진중하다(鎭重-- 누르다·지키다 진/무게·정중히 함 중) ; 무게[重]가 있고 점잖다[鎭]. (사람이나 그 생각, 태도가) 묵직하고 진지하다.

*점두하다(點頭-- 고개를 끄덕일 점/머리 두) ; (사람이)승낙하거나 찬성하거나 옳다는 뜻으로 머리를 약간 끄덕이다.

*송(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묵언 수좌(默言首座) ; 송담(松潭) 스님의 별명. 10년간 묵언을 하며 수행을 해서 '묵언수좌'라는 별명이 생김.

*(게송) '황매산정춘설하(黃梅山庭春雪下)~' ; 송담선사 오도송(悟道頌).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 ; 전강 조실 스님이 수행하시던 1920년대 당시 유명한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를 말씀하신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음왕불(威音王佛) : [범]  Bhismagarjitasvararaja-Buddha <법화경>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이름. 한량없는 과거의 부처님으로, 이 부처님 이전에는 부처님이 없었다고 하여 ‘지극히 오랜 옛적’을 뜻한다.

*'인가 없이 깨달은 이는 생이지지(生而知之)보담도 승학(勝學)이다. 그 만(萬) 가운데 드물다 그랬지, 없단 말은 없거든'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若自己 以緣會合 得聖人意 卽不用參善知識 此卽是生而知之勝學也 若未悟解 須勤苦參學 因敎方得悟 若自明了 不學亦得 不同迷人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만약 자기가 인연을 만나 성인의 뜻을 얻었다면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之] 정말 뛰어난 학인이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부지런히 애써 선지식을 찾아가 배우라. 스승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만일 스스로 분명히 알았다면 배우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과는 다르다.

 

*생이지지(生而知之) ; 삼지(三知 ①生而知之, ②학이지지學而知之 도를 배워서 깨달음, ③곤이지지困而知之 고생하며 공부한 끝에 도를 깨달음)의 하나.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도(道)를 깨달음을 이른다.

*척사현정(斥邪顯正) ; 삿된 것을 거부하여 물리쳐, 불법(佛法)의 진리를 올바르게 나타내 보임.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