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 일대기2020. 4. 2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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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강선사 일대기(田岡禪師 一代記) (제13호) 자연적이냐 천연적이냐.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 (68분)

 

(1/4) 약 18분.

 

(2/4) 약 18분.

 

(3/4) 약 17분.

 

(4/4) 약 15분.

 

(1/4)----------------

 

부운부귀비유의(浮雲富貴非留意)허고  와각공명기염정(蝸角功名豈染情)이냐

나무~아미타불~

춘일쾌청춘수족(春日快晴春睡足)이요  와청산조일만성(臥聽山鳥一萬聲)가

나무~아미타불~

 

천하에 부귀와 영화와 인생의 향락을 쏴악 벗어 버리고 우리 출가 학자들, 도학자(道學者)들, 이렇게 와서 앉어서 도를 닦고 지낸단 말여.

지끔 세상 뒤끓는 것 보면 굉장해. 그렇게 모도 높은 인물들, 그 잘난 인물들 엊저녁에, 어제저녁에 모도 또 다시—제 몇 대인가? 4대인가, 원 5대인가? 국회의원들, 한국 국회의원들 명단 발표허는데 굉장햐.

 

그런 모도 그, 그 얼마나 출세 모두 인물들인데, 그런 인물들이 그렇게 훌륭허고 참 높은 지위에—헌디, 어째 그 최상 인물들인디, 그렇게나 반성헐 줄을 모를까?

반성헐 줄을 모르니깐... 그렇지마는 세상은 또 그렇게 해야 될 터이지마는, 그렇게 허는...

 

발심(發心)을 해서 도 닦는 그것은 그건 물론 해야 헐 턴디. 아, 그거 허면서도 못헐 까닭이 뭐 있나.

국회의원도 헐 수 있고 대통령도 헐 수 있고, 뭐 별것 다 헐 수 있제.

 

아, 그러면은 그만 그, 그 나라 그 정치가 큰, 무슨 말로 헐 수 없는 부처님의 정치라고 헐 수가 있는데.

왼통 그 가운데에서 그 부귀 · 권리 · 투쟁 · 쟁탈, 그 굉장허다 그말이제.

 

그저 그 그만 어째 그렇게도 지금은 그렇게 그저 무슨 그 사고가 그렇게 많이 있어.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이 죽는고.

사람이 많이 나와 그러나 원! 그렇게 죽는 것 밖에 없단 말이여.

 

이렇게 참, 뒤끓는 세상에 우리 출가 도인(道人)들, 집에 뛰어나서 이 도인들,

이렇게 와서 모아서 이 결제, 삼동결제(三冬結制)허고 도 닦는, 이 참 얼매나 경행(慶幸)허다고 헐 것인가, 만행(萬幸)허다고 헐 것인가, 다행(多幸)허다고 헐 것인가.

 

이런 가운데에서 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허고, 그만 그럭저럭 이 대자연 한가헌 부처님의 그 품속에서 춘일 화창헌디, 춘일(春日)은 쾌청(快晴)헌디 수면만 잠이나 자고, 그럭저럭 허송허고.

 

와청산간(臥聽山間)에 백만성(百萬聲)이다. 저 산속에 일백, 일만 새소리나 그놈이나 듣고, 그럭저럭 허송하다가 은몰(隱沒) 차시 해 버리면, 그래도 이만헌 기회 얻어 나와서, 이, 이때 만약에 그럭저럭 지내다가 이 세상 떨쳐 버리면은 앞에 부닥쳐 온 세상은 어떠헌 세상이 올런지 가만히 생각헐 필요가 있다 그말이여.

 

그 뒤집어지고 야단치고, 그 또 인자 그 김대중씨 뭣 했다고, 운동했다고 또 인자 입건되고 뭣 되고 정치, 그 이리저리 그 참 꿈적도 못허겄드구만. 그것 또 무슨 국회의원 30명인가 다시 뽑아서 어쩌고 야단치고.

이러헌 속에서 우리는 썩 비껴 나와서 이렇게 참, 도 닦고 앉었으니 참 한바탕 닦어야 헐 것이여.

 

암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이 몸 바꾸아 다시 오면은 이 세상은 또 어떻게 될런지 모르겄어. 곧 그저 그만 점점 앞으로 변해 나가니까.

 

그러고 지금은... 그전에는 그저 우리 조선이면 조선이요, 한국이면 한국 울타리 속에서, 저 밖에 다른 나라에는 어찌 되든 말든 모르고 이렇게 살아 왔으니 뭐 어쩌.

지금은 세계가 그만 서로 그 맨 그저 싸움 싸울 준비, 그저 무슨 수소탄이니, 무슨 별별 그 원자탄이니 이런 것 만들어 가지고는 전부 이러고 있다.

 

어쩌튼지 우리는 후생도 미루지 말고 금생에 정진 한바탕해서 일을 마쳐 버려야 할 것 같애.

결국은 각(覺)이니까. 깨달라 버리면은 각세계가 해탈세계고, 우리의 영원히 살 고향이여.

 

 

내가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 스님과 한바탕 서로 탁마(琢磨)를 허고서는, 그때 경봉 스님허고 그 꼭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으로 탁마 한번 허고는 나는 그길로 그날 새벽에, 날도 새기 전에 내 오장치 내 살림살이 걸머 짊어지고 나와 버렸으니까. 거그 더 머무를 필요도 없고.

 

양산 통도사 들어간 그 길이 내 타락 길이라.

거그만 안 들어갔드래도 도로 그만 저어 그저 여름에는 북회(北廻), 북으로 둘러서 영동팔경(嶺東八景)으로 그리 둘러서, 여름에는 그리 둘러서, 겨울에는 또 남해지방으로 이리 둘러, 일 년에 한 바퀴썩만 삥 두르면 일 년 되아.

 

아, 그런디 그만 양산 통도사도 안 봤고, 거그 한번 들어가서 큰 산중이니깐 잠깐 보고 오리라고 들어간 것이 아, 그저 그전에 지낸 추산 스님이 나를 보고서는 그렇게 그만 반가해 가지고 발견해서 들어갔제.

 

보광전에 들어가서 서로 참, 경봉 스님과 한번 서로 닥트린 것도 좋지.

 

암만 천하없이 경봉 스님은 원청 점잖헌 이고, 산중에서도 아주 이름난 분이여. 점잖허고 그 뜻이 고상하고.

그렇게 양산 통도사가 구하 스님파가 있고 그 산중 그전 모도 인자, 스님네의 사상이 다 있고 이래서, 구하 스님을 무척 통도사에서 반대를 해 왔거든. 어디나 그때 그랬지.

 

주지(住持)만 한 근 10년을 주지를 허고 있으니까, 모도 그때 시대는 왜정 시대(倭政時代)니까 별수 없이 그저 도변창(渡邊彰)이가 나와서 고문으로 있고, 거기에 주지는 주지만 할 것 같으면 왜색(倭色)을 안 띠고 헐 수가 없고.

그러니까 모도 30본산(三十本山) 주지는 또 뭉쳐서 왜색을 띠고 다 이러니까, 어느 절을 막론하고 주지를 모도 배신허고 주지 배척 운동(排斥運動)이 일어나고 다 그렇게 했지마는.

 

경봉 스님은 구하 스님의 문중이라도 구하 스님 문중에도 들지 않고, 산중 문중에도 들지 않고 원청 참 그 정직해서 부처님에 정법을 그대로 참, 수행해서 나온 분인데.

마침 통도사에는 더군다나 수좌(首座)로 나오는 절이 아니여. 도 닦으러 나온 절이 아니여. 어째 그렇드냐?

 

양산 통도사에는 그전 과거 시대부텀 자장 율사(慈藏律師)의 율맥(律脈)이 흘러 내려오고, 부귀를 해 나온 절이기 따문에 율종, 율맥을—율사는, 율종 율맥이라는 것은 견성(見性)허는 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여.

율(律)이라는 것은 집착성이 있어서, 생명 하나 딱 죽이면은 '허! 내가 살생을 했구나. 아이고, 내가 죄를 지었구나' 요놈이 그것이, 죄상(罪相)이 꽉 백혀 버려. 거 사진 찍는 것이여.

 

그녀러 죄상이 본래 없는 도리를, 그놈을 바로 보는 것이 불법대의(佛法大意)고, 그것이 참선법(參禪法)이고.

 

죄성(罪性)이 본래 공(空)했어.

'그러면 죄성이 본래 공했으니까 막 때려 죽이는 것이 그거 죄성 공헌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여.

 

죄성이 공헐수록에 때려 죽이지 아니해야 하는 것이제, 죄성이 공했으니까 막 죽여 버려? 그것은 숭악한 그것은 외도(外道)고.

죄성이 본래 없는데 생명을 죽일 것은 어디 있으며, 그럴수록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대로 죄성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제. 악성(惡性)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제.

 

이렇게 원만허니 갖춰 가야 허는 것이제, 죄성이 없으니 막 죽이고, 죄성이 없으니 막 잡아먹고, 살생도 막해 먹고, 그래서야 거 쓸 것인가.

 

그렇지마는 율사(律師)라 하는 것은 율에 꽉 집(執)해 놓으니 다시는 별수 없어. 본래 근본도리를 보들 못했으니 집착 안 헐래야 안 헐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기 따문에 참말로 대승율사(大乘律師)는 견성부텀 해 가지고야 정말 율사여. 대승율사래야 허는 것이제. 대승율사라는 것은 벌써, 벌써 계성(戒性)부텀 다루는 것이제.

 

그러니 본래 통도사에 자장율사는 오백생 청정비구(淸淨比丘)로 나와서, 견성해 가지고 오백생 청정비구로 나온 이여.

그러니 그런 거룩헌 자장율사지마는, 그 밑에 율맥을 이어 나온 분들이, 다 이어나온 것은 아니지마는, 어디 견성해 가지고 율맥을 이었나?

 

또 율맥이라는 것은, 율맥도 아무 스님 율을 받았다 하지마는, 그건 부처님 때부텀 율맥이 전해 내려온 것도 아니고.

 

선전어가섭(禪傳於迦葉)허고 교전어아란(敎傳於阿難)이라, 교(敎)는 아난한테 전했다 했지마는, 교가 또 어디 교가 전(傳)이 어디 있나? 교전이 어디 있어? 율종이 어디 있으며?

그대로 선종(禪宗)한테 그대로 그대로 그만 선종한테 꽉 묶어져 있는 율이고, 선종한테 그대로 붙어 있는 교여.(처음~17분52초)

 

 

 

 

(2/4)----------------

 

또 교(선)가 암만 불구문자(不拘文字)니, 문자도 거그는 소용이 없으니 교(敎)가 무슨 소용이 있나 했지마는, 부처님이 또 곧 가르치고 전허고 모도 말로 허신 것이 그 교(敎)인디, 어떻게 또 교를 여지없이 모도 없애 버리고 뭐 선(禪)만 어떻게 헐 수 있는가?

 

그러니 그 가운데 다 뚤뚤 뭉쳐서 전해 내려온 것이 그게 선(禪)이여!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도리를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 그것이 선이고, 곧 교이고, 그것이 율이고, 그런 것이여. 하나도 떼지 말고 그대로 다 갖춰야 된다 그말이여.

 

우리 몸뚱아리에, 몸뚱이만 가지고 사나?

눈도 있도,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六根)이 다 있어야 허는 것이고, 항상 그렇게 보아야 허제.

 

허지마는 통도사에는 율행이, 율사가 나온 디고, 그다음에는 '부자 절'이라. 돈 버는 절이여.

그래서 누룩을 모도 디뎌서 그놈 가지고 팔아서 돈을 많이 벌고, 모도 부(富)헌 디여. 그러기 따문에 걸망을 짊어지고 잘 나오들 못헌 디여.

스님한테 정해 상좌(上佐) 노릇허면은 한 뭉텡이 돈 벌어서 논 사고 다 이런 디제.

 

허지마는 경봉 스님은 그때 시대에도 그렇게 있으면서 나오기도 어려운 도저히 형편도 못 되고, 구하 스님이 주지니 그 밑에 얼마든지 강사(講師)로도 해야 할 것이고, 삼직(三職)으로도 해야 할 것이고, 그 구하 스님이 경봉 스님 일인(一人)이라 했어.

 

아, 그랬지마는 그것 다 턱! 때려 치와 버리고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 나와서 참선을 했어. 허다가 어째 또 본산(本山)에 안 들어올 수 없어 들어왔다가는 본산에서 잽혀 가지고, 붙잽혀 가지고 못 나가고 그래 있다가,

인제 그 농사를 통도사는 지니까, 농사를 잘 지어 놓고 물꼬 좀 보러 갔다가 물꼬를 막는 바람에 툭! 터져 버렸다. 툭 깨 버렸어.

 

그 깨는 것이, 툭 터진 것이 대오(大悟), 우리 대오허는 법이 그게—자, 부처님도 경계 보고 깼제. 별 탁! 뜬 놈 보고, 탁! 봐 버렸제.

권렴(捲簾), 주름 턱! 주름 살 턱! 거둔 것 보고 장경(長慶) 도인도 툭 깨 버렸제. 이렇게 경계를 보고 탁 깨아.

 

오히려 경계(境界)를 보고 깨는 것이 말, 언하대오(言下大悟) 보담도 더 힘이 있어.

척! 경계를 척 보고, 툭! 봐 버리는 것이 제일 도력(道力)이 있다는 것이여.

 

도(道)도 그놈 깨달라도 힘이 설찬히 차별이 있어.

여지없이 바로 깨달은 힘이—힘이 있게 깨달을 것 같으면은 보림(保任)도, 보림허기가 퍽 쉽기도 허고, 또 희미허게 깨달라 놓을 것 같으면은 그 힘대가리 없는 각(覺)이라는 게 그 우스운 것이여.

 

그만 그저 공안은 하나 봤다 허지마는 모도 맥힌 대문이 있고, 또 설사 안 맥히드래도 모도 그런가 저런가 허는 희미허고. 그 천(淺)이면 그려, 그것이.

 

경계를 보고 깨는 거, 또 언하, 언하대오, 언하대오가 그것 또 참 언하에 툭! 깨는 거, 말 · 법문 듣다 깨는 거, 이 경계 보고 깨는 것만은 오히려 못허다 했지?

 

그 다음에는 자기가 문자참선(文字參禪), 문자 중에서 글을 보고 깨는 거, 그건 퍽 그 힘대가리 없다는 것이여. 허니 참선은 '강사 참선'이 어렵고. 왜 어렵냐?

어떻게 쪼사 놨던지, 언구(言句)를 이래 쪼사 놨던지 그 어려와.

 

너무 많이 알수록에 아는 놈이 장애가 되어서 의심(疑心)이 잘 일어나들 않고, 해석이 자꾸 붙고 '요런 것이 아닌가?'허다가도 '에, 아니다'고 내던져도, 또 그 따지는 습관이 '향상이다. 오! 향상은 어떤 거제?' '향하다. 오! 향하는 어떤 것이제?'

이래 가지고는 무슨 여러가지 그 모도 그 이해(理解)가 이해, 이치의 해가 나.

 

보통 아무 근원 없이 일어나는 망상보담도 고 향상(向上) · 향하(向下) 같은 그런 이(理)에 가서 이로(理路)가, 이치길이 자꾸 나온 것이 그것이 대해(大害)라. 큰일나! 그녀러 거.

 

안 헌다 해도 자신이 밤낮 허고 앉었거든, 고 짓을.

그래 가지고는 아침 때 그러지, 안 헐라다가도 또 저녁 때 그러지. 자신도 마음대로 못혀.

 

하! 오직 해야사, 얼마나 참, 강(講)을 삼십여 년을 허셨으니, 옛날에 그 누구... 저 무슨 스님이제?

서산(西山) 스님 찾아... 소요 스님! 소요 스님!

 

소요 스님이 그 강(講)을 삼십 년이나 했으니 무척도 했제, 삼십 년이란 세월을.

그 경(經)을 그리 잘 보고, 속서(俗書)는 통달했고.

그래 가지고는 확, 이건 너무 알아 가지고는 당최 뭐 턱! 말헐 것 같으면은 모르는 것이 있어야제. 환허다.

 

허지마는 어디 아는 것이, 어디 아는 것이 그게 참선이여?

그렇게 큰 강사기 따문에 아는 것이 참선 아닌 줄을 확연히 알았거든.

 

알았으니까, '교외(敎外)에 별전선지(別傳禪旨)다. 교(敎) 밖에 별(別)로 전(傳)헌 선지(禪旨)가 있다. 교 밖에 별전선지는 아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이 아니니 세상에 아는 것 밖에 무슨 도리일 것인가 말이여.

 

그러면 모르는 것인가?

꽉 맥혀서 몰랐으면은 우리 범부(凡夫)처럼 과거도 꽉 막혀 모르고, 또 금생에 와서도 지나지 않은 일은 다 꽉 맥혀 모르고, 오늘 있어 내일 일을 모르고, 또 금생에 이 몸 가지고 있지마는 내버리고 갈 일도 모르고, 우리 중생은 그러허니, 그렇게 꽉 맥혀서 모르는 것인가?

 

아는 것이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것도 아니니라.

 

꽉 맥혀 모르는 것이 그것이 법(法)이여?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법이 아니면은 아는 것, 모르는 것 그 중간 사이, 그 아는 놈 모르는 놈 젖혀 놓고 그 중간에 비유(非有) 비무(非無) 뭐 고런 것이 법인가?

그것도 아니여.

 

아는 놈도 아니기 따문에 모르는 놈도 아니여.

그러기 따문에 그 쫌도 아니여. 모르는 놈, 아는 놈 그 중간 토막도 아니여.

그러니 뭣이냐 그말이여? 이런 꼴 좀 보소.

 

뭐라고 해 놓으면 그것은 교외별전(敎外別傳) 선법(禪法)이 아니여!

그 무슨 법이 그러헌 법이 있겄느냐 그말이여?

 

그러니, 모르는 법, 아는 법, 그 중간에 그 가운데 그것,

그다음에 밝은 거, 그러니께 어두운 거, 어두운 것 밝은 것, 그것 짬 사리도 아무것도 아니여.

 

거기에서 만약에 무슨, 무슨 고 밖에 또 도리를 갖다가서 '옳다! 그 도리다'해 가지고는 그놈을 갖다 집착허고 앉었어도 그건 법이 아니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러니 단진범정(但盡凡情)이여. 범정(凡情) 다 해 버렸어. 범부정(凡夫情)은 다 없다.

모르는 범부정, 모르고 알고 모도 그 범부정, 아나 모르나 다 범부정, 중도 제일까장 다 범부정, 그놈의 범부정 쏴악 쓸어 버렸으니, 그러고 인자 성정이 아닐 것인가?

 

성인(聖人)의 정(情), 성인의 뜻, 성해, 이런 제...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별도 성해가 어디 있어? 그 성해에 어디가 머무를 것이여?

 

그것, 무슨 법이 이러헌 법이 있느냐 그말이여.

 

교외(敎外)에 별전(別傳), 교 밖에 별전법이니라.

세상에 이런 법이여.

 

 

그러니 '입타불입타(入打不入打)다' 원상 그려 놓고.

원상(圓相)이 그 최고 도리여. 다시 원상 더 나갈 도리는 없어, 입 열어서 말허자면.

 

고불(古佛)이 미생전(未生前)이요, 옛 부처가 나기 전이여.

거, 옛 부처도 생기기 전이니, 거 또 옛 부처가 나기 전이지마는, 천지도 나기 전이지마는, 거기에서 제불(諸佛)이 출세허기도 허고 제불이 열반허기도 허고 그런 디여.

 

제불출신처(諸佛出身處)요, 제불열반처(諸佛涅槃處)요, 천성(千聖)도 불식처(不識處)요, 불불(佛佛)도 서로 보지 못헌 곳이요,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요, 오히려 알지 못했어.

 

이러헌 원상을 척 그려 놓고 '거기에 들어가도 죽고, 거그 나와도 죽는다'

하, 이거! 그게 그 최고여! 거 거그서 그 중생 해탈 많이 시키는 공안이여.

 

그러기 따문에... 그러기 따문에 마조(馬祖)가 답살천하인(踏殺天下人)허는 공안이니라. 천하인을 답살해 죽이는 공안이다.

거그서 무슨 상량(商量)으로 답허냐 그말이여.

 

그놈, 당시에 마조 스님이 물으니까, 학자 하나가 원상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응, 그놈 하나 답허면, 그놈 또 봐야 허네. '그 학자가 눈이 있나 없나? 왜 들어갔나?'

 

원상 안에 쑥 들어가니 마조 스님은 쳤다. 따악!

아, 칠 수밖에 없제.

 

치니까, 척! 쳐다 보고 "타모갑부득(打某甲不得)입니다. 모갑을 치지 못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휴거(休去)를 했다. 아무 말이 없어.

 

그 학자는 왜 들어갔으며, 들어가 가지고는 맞아 놓고는 "저를 못 쳤습니다" 그러니께 마조 스님은 쉬어 버렸다.

 

고것이, 그 공안에 응, 거 법로(法路)여. 법을 써.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용무생사가 그게 현중현(玄中玄) 도리인데.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말이여.

 

 

아, 이 불 피워라. 불 피우고 지침허는 어른은 와서 지침 좀 않게 옆에 앉으시라고 그려.

누가 그리 지침허시는고? 약 좀 잡솼으면 쓰겄는데.

그 차와 그러요. 요리 나오시요. 내가 허라는 대로 해요. 나오시요.

어서! 그 나오시요. 그러고 글안허면 저 방으로 들어가서 앉으셔. 냉해서 그럽니다.

 

법문 안 들어도 괜찮해. 어서! 그러시요. (괜찮아요.) 저 옆으로 가란 말이요. 허허!

지침을 자꾸 해싼게 내가, 내가 법문 안 허고 가면 쓰겄소? 이 법문이 중요헌 법문인디. 인자 여 끝마치는 법문이여.

옳제! 더 들어 앉으시요 쑥! 괜찮해야. 뜨스운 자리 요렇게 앉으면 한결 가라앉습니다. 인자 보시오. 허허! 그 참. 차우니까 그런데.

 

 

이 공안 법문이여. 참말로 공안 법문이여.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생사 없는 걸 그대로 써 나가는 거여.

오(悟)를 허되 참으로 터꺽! 보고 툭 깼네. 힘이 있어야!(17분53초~36분1초)

 

 

 

 

(3/4)----------------

 

그래서 원상을 그려 놓고 '입타불입야타(入打不入也打)'

거그에 한마디 일른다. 옳게 설사 일러.

옳게 이른다 해도, '그 중이 어떻게 들어간 중이냐? 눈이 있나 없나?' 얼른 못 개려내는 거여.

 

어째서 또 들어가서는 "모갑(某甲)을 치지 못했습니다"

마조 스님은 휴거(休去)헌 것은 뭣인가?

 

그런 것은 체중현 도리나, 고렇게 들어서 공안을 어찌 짐작해 알어 가지고 생전 꿈도 소용없어!

'그런 것인가? 어찌 요런 것인가?' 그 때문에 안 되아. 그것이 어디 선(禪)인가? 그 선 아니여.

 

처억! 만공 스님 십대문답 어떻게 된 까닭을 주욱...

'(십대문답) 저 끝에 가서 백지(白紙) 네모진 디다 한 쪽 귀텡이에다가 원상(圓相)을 해 놨느니라'헌 걸 그걸, 그런 것을 바로 선사(禪師) 뜻을 봐야 혀. 그래서 천칠백 공안이니라.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천칠백 선사가 다 그 근본 본대의야 틀림이 없지마는, 그 맨들아 논 공안 그 자물쇠통 채워 놓은 것이 다 달러.

 

그놈이 바로 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깨달랐다 해도 안 되아.

하나만 봐 가지고는 넘, 그래 중생 교화를 못하는 거, 용무생사도 안 된 거, 자기도 항상 해 나가도 그렇게 활발치를 못혀. 걸려!

걸리면, 설사 하나는 옳게 했다 하드래도, 그거 안 되아.

 

그러면은 경봉 스님이 물 대다가 툭 깨쳐 가지고는 그만 야단치든 경계는 그거는 체중현이여. 암만 천하없이 그래도, 강사(講師) 소견으로 있든 때여.

 

모도 들어 가지고 대교를 모도 판단해서, 그 다 알아 가지고 모도 인자 허다가 보니 그 들난 곳이 그 강사 처음에 공, 뭐 뭐, 입으로 다루던, 설시(說時)는 사오(似悟)나, 말헐 때에는 설헐 때에는 깨달은 것 같지마는 대경환미(對境還迷)허든 경계, 그 경계와 물구녁에 논 물 대다가 툭 막어 가지고 툭! 그만 보든 경계와는 영 달라. 그러지마는 그것도 체중현이여.

 

그러기 따문에 체중현이기 따문에 체중현을 아는 것 다르고, 또 보는 것 달라.

 

그 체중현을 처꺽 봤지마는, 그러기 따문에 추어망담(醜語妄談)이 개시선(皆是禪)이고 개시묘(皆是妙)고, 그만 막 들입대 그만 부인와도 욕을 막 들입대 했다 그말이여.

 

그때 뭐, 뭐 내가 들어가 야단났었는디, 자기는 그때 경계를 모르든 것이여.

아, 그러기 따문에 내가 그때 가서 그렇게 탁! 해 가지고는 그만, 그 내가 갖다 고함 질러서 옥련봉 밑에로 올라가서 그런 걸 다 모르제. 모르기 따문에 한번도 말 안 혀.

 

"아니, 경봉 스님 더러 안 하더냐?"허면은 "통 못 들었소" 그려.

 

아, 여그, 여그 종성 수좌도 거그 지냈단디, 내가 물어봤어.

흥, "한번 그런 말 못 들었소" 허거덩.

 

그래도 어찌 학자(學者)를 가르키시다가 당신이 어떠헌 경계를 얻었다는 거, 그런 것은 말허는 법이여.

 

만공 큰스님도 다 그런 말했고, 혜월 큰스님께서도 그 견성은, '단지불회시즉견성(但知不會是卽見性)이라'헌 디서 툭 깨가지고는 했다는 말씀 다 학자한테 허고,

전혀 안 허신다는 것은 그 경봉 스님이 그때 시대를, 그만 그때 경계를 모르시든 것이여. 꿈겉이.

 

그래도 그 생리적으로 뭐 그렇게 미친 것은 아니기 따문에 다 아는 것인데, 모른다 한다니,

나 그러나 저러나 또 알아도 그럴 수도 있겠제.

 

그때 경봉 스님이 만약에—암만 천하없이 별소리 다 해도, 정영신이가 얻어먹고 들어가서, 걸식허고 들어가서 한번 안 대질렀으면, 거그서 그만 그대로 경봉 스님은 출세했으면은 안 되아. 되들 안 혀.

그때 그 답허고 점두(點頭) 턱 허고 내려와서는, 점두 척 허고 내려와서는, 보광전에 앉어 가지고는 그 뒤부텀은 한번도 입 뗀 법이 없어. 입을 뗀 법이 없었댜. 그저 앉으면 정진만 허고 앉었었어.

그럴 것이거든. 참말로 정진을 해야 허는 것이거든.

 

턱! 그 경계 들어갔다고—흥! 일예(一翳)가 재안(在眼)이면, 한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은 공화난타(空華亂墮)다.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했으니 뭣 헐 것이 있어. 뭣을 닦아?

 

허어! 참 닦아야 한다. 인자 참 정말이다.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원각대지가 낭연독존을 해야 헌다.

 

낭연독존은 해서 그건 지킨 건가? 말허자니 그런 것이제.

아, 이거! 말만 허면은 조비모락(鳥飛毛落)이니 그럼 어떻게, 어떻게 헐 것인가? 누() 밖에 어떻게 설헐 것인가.

 

 

벌쎄 거, 거그 와 앉으니께 어디 기침 허시요? 내가 의원보담 더 헌디, 그걸 모르고는 자꾸 지침만 허고 앉었으니 설법도 못허게 만들고.

허어, 그것 참! 내가 어쩌요 여보시요. 또 지침허는 이 나오란 말씀이여. 아, 내가 옳게 일러 드리는데.

 

 

그래 가지고는 내가 그다음에 통도사에서 떠나서 저 인자 밖에 가서 어디로 갔냐 하면—그때 인자 떠나 가지고는 통도 한번 들어갔다가 타락을 했어. 큰 절 그런 데 안 들어가는 법인디, 내 마음대로,

 

(노래) 격안전촌양삼가(隔岸前村兩三家) 밥 짓난 연기 일고, 파조귀래(罷釣歸來) 배를 매고 괴기 주고 술을 사서 많이 먹고 취허네.

 

아, 이러고 돌아댕겼으면 아무 일 없는 디 말이여, 그때.

 

홍록이, 아, 그분 만나서 한자리썩 배우면서 아, 이러고 강촌에, 연기 뜬 강촌에서 그렇게 댕기면은 퍽 무척 참, 그 내 경계인디, 그냥 막 그 내던져 버리고 내가 나와 버려. 그녀러 것, 따라댕기기도 챙피허드구만.

노래 부른다고 그것 배운다고 좀 따라댕겼는데, 아 그려도 배우기는 설찬히 배웠다 그 말씀이여.

 

아, 자꾸 내 요새 한자리 한자리 헌 것이 그것만 배운 줄 아요? 또 있어. 또 있지마는 내가 안 내놓아. 허! 숭보까 싶은게.

그렇지마는 뭐 그 숭보면 뭣 혀? 그거 숭봐 가지고 누가 뭐 숭으로 아나?

숭으로 안 알아. 도인(道人)의 가풍(家風)인 줄 알제.

 

아, 글쎄 가다가 거지가 길가에 앉어서만—인자 그 다음에 배워 가지고 나오다가 말이여. 나오다가...

 

그 이래 법문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헌 법문이라. 이건 그런 거여. 헐 수 없어.

 

심심허면 말여, 짚부채를 앞에다 놓고는 확! 튕겨, 한번 이렇게 해서, 여럿이 있으면.

미친 행동을 한번 해. 확! 쳐놓고는 앞에다 턱 놓고는 떠억 앉어서,

 

(노래) 산학(山壑)이 잠형(潛形)허고 허! 음풍(陰風)이 노호(怒號)헌디

수변(水邊)에 우난 새는 천병만마(千兵萬馬) 서로...

 

아, 이러고 한바탕허면은 모도 와서 보요. 잉, 모도 듣고 봐. 노래 들을라고.

 

참, 그놈 한마디, 요사 없는 세외한인(世外閑人)은 그놈 배워야겄어.

내 그놈 배워 가지고 설찬히 써먹었구만.

 

아니, 여 거, 그놈을 한바탕하고, "그놈의 것! 참, 꼭 나올 곡조는 나온다마는 배가 고파 못허겄구나!"허면, 그냥 뭣이 막, 막 생기요. 막, 돈도 주고 뭐 사 주고.

아, 받아 가지고 그놈 받아서 모두 사 먹제 어쩌 그 뭐, 돈 받아서 내던져? 주면 받고...

 

허다가 배 고프다고만 해놓으면 뭐 사 주요. 거, 그 꾀가 나더구만 그. 그래 돌아댕겼으면 내가 참, 얼마나 더 좋을런지 몰랐었는데.

 

그만 통도사를 아침에 새벽에 일찍 나와 가지고, 거그서 그만...

홍록이, 내가 가만 아, 그렇게 참 댕기고 허다가 간단 말이나 허고 가야헐 것 아니요?

못쓸, 못쓸 일이제. 허지마는 또 그 간다 온다 하면 어쩌고 어쩌고 허면 그 소용 있어? 휙 돌아서 버렸제. 참 무심허제.

 

자기는 화두를 다 내가 가르켜 주고, 늘 무상헌 설법을 해 주어서 그 같은 놈의 가야금 하나 등에 메고 돌아댕기는 것 아무것도 아니고, '참말로 참선을 해야겄구나'허는 생각이 꽉 들어서 발심(發心)해서 인자는 나를 따라댕길 판이라.

그놈의 가야금을 가지고 댕기든지 말든지 즈그 집안에는 아무 일 없디야. 벌써 나왔으니깐, 따라가 중이나 될 판이여.

 

그렇게 헐 판인디, 그녀러 것 가야금 가지고 댕기면서 노래나 부르고 허던 거 데리고 들어와서 중 맨들아 놓으면은 넨장, 참선헌다고 돌아앉었다가,

 

(노래) 아서라. 풍백(風伯)에 붙인 목숨 아니 놀고 뭣 헐꺼나, 징징 지당당 당징징...

 

어쩌고 하면 그녀러 것, 거 쓸 수가 있나.

그러면 에이, 나 혼자 도망을 쳐가지고 나와서... 그 뭣이, 뭣이 그놈이 그렇거든.

 

 

통도사를 댕겨서, 아 그래 그만 그래 또 해인사를 들어갔단 말씀이여.

안 들어갔으면 아무 일 없는데, 합천 해인사를 들어갔어.

 

합천 해인사는 내가 중 된 디여.

아, 거그서 중 되아 가지고 거그서 나온 디를 들어갔으니 어찌 될 것이여.

 

'정영신이 나가서 견성했단다' 소리는 다 나 가지고는, 발쎄 그렇게 돌아댕긴다는 말은 다 들었는데, 거그를 척 들어가니까 어쩔 것이여.

 

거, 우리 스님도 다 있고, 아, 이런 디인디 들어가 놓으니깐 그 뭐 야단이제.

머리는 그렇게 길러 가지고는 모냥다리는 그 모냥으로 들어갔으니, 그래 인자 여그서 저그서 머리, 모두 머리를 깎을라고 대들고, 그 짐을 모도 뺏아서 불에 태와 버릴라고 하고 야단들이제.

 

다 소용없고, 뭐 천하없는 짓 해야 다 소용없고, 여관에 가서 짐을 떡 벗어 놓고,

여관에 들어가서, 내 중된 본사(本寺)에 들어가서 그 여관 홍도여관에 들어가서...

홍도여관은 그 내 친고여. 세상에 둘도 없는 친고(親故)여. 이동수라고.

 

그 여그 위패(位牌) 이동수, 내가 해놨소. 내 친고라고 이동수 위패를 다 해 놨어.

죽었다 해. 나보담 한 살 더 먹은 것이 한 삼 년 전에 죽었소.

 

그래 내가 아무도 모르게 여다가 내가 영가를 해 놓고, 동수 이동수 영가(靈駕)에 내가 벌어다가, 설법해 품 팔아, 설법 돈 받아다 거다 떡 넣어서 돈 딱 찍어 가지고,

그래 이번에 논 산 디다가 넣어서 사백만 원—삼백만 원 내가 했는디 또 그동안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해 가지고 사백만 원 맨들어 가지고 논 사는디 넣어 놨습니다.

 

그래 이 절, 인자 이 절에다가 이전해서 영원히 위패단을 모셔 가야 헐 것 아니요? 낱낱이 만 원썩 냈으니 그걸 해야 헐 거 아니여.

 

삼백만 원도, 여그 다 알제, 적은 사람이 알제? 상법이가 알제?

삼백만 원도 삼백만 원 다 낱낱 냈음사, 삼백만 원 들어서지마는, 삼백만 원... 한 2나 들어오고 1은 안 들어왔습니다.

안 들어온 그놈, 어찌 안 낼란가 어쩔란가? 3년이 되아 가도 안 내고. 그런 이가 더러 있어.

 

그 안 낸 이는 내가 늘 똑같이 저렇게 불 피우고 법보제자 축원해 나가니, 필경에 다 내야 할 것이지마는, 안 내면은 그이는 공연헌 업(業)만 지어 놨지. 업만...

공(空)으로 해도 영가한테 그 무슨 공(功)이 되기야 되지 안 될리야 없겠지마는, 그 헌 분은 양심상 그 안되거든.

 

허지마는 한번 위패단을 해 놓고 그 돈을 없애면 어쩔거냔 말씀이여.

위패 수대로 내가 다 뀌어 놓았지. 그동안 내가 어떻게 어떻게 허던지 해서 다 맞촤서 다 뀌어 놓았지.

 

인자 받은 놈 그놈은 내가 받아서 인자 대중 살림살이 해 나가도 좋제. 뭐 내가 뭐, 두말헐 것...

허지마는, 내가 그것도 어디 무슨 뭐 들어오기만 허면 갖다가... 저, 인천 얼른 갔다 나온 것은 저금허러 간 것이여. 그 돈은 뭐 죽어도 목숨이 잘라져도 나 안 내놓는 것이여.

 

내가 그 무슨 간탐(慳貪)으로 내가 무슨 뭐 내 돈 만들라고 내가 그려, 뭣 혀?

법보단(法寶壇) 유지해서 여러 신도 어른네 부모를 위해 놓고, 영원히 천도(薦度)해서 우리 부모, 저 확철대오(廓徹大悟) 세계를 모도 가시게 천도헐라는 원력이 모도 있고 헌 돈을 내가—아, 그 돈보덤 더 헌 사찰 부처님 논도 팔아먹고 절도 팔아먹는 놈의 중이 있어.

 

나, 용주사 주지로 갔는데 거기에 절 땅, 그 위에 우연히 들어온 놈 용주사 땅이라고 팔라고 해서, 내가 대번에 가서 해약을 해버렸습니다.

"중이 땅 팔아먹고 산 팔아먹는 놈, 산 팔아먹는 놈 된 법 없다" 이랬소마는.

 

뜻밖에 또 여까장 돌아와서 이런 얘기까장 했어. 그만 거까장 두고.

나온 대로 헐 수밖에 없으니까.(36분2초~53분17초)

 

 

 

 

(4/4)----------------

 

경봉 스님이 참 나와 만난 것은, 내가 거지로 들어가서 서푼 중이 못 되고, 내가 그때 내 행색도 그렇게 우수운 거지마는, 거지 아니라 백정 자식이라도 무슨 무당 자식이라도 소용없어.

내게 한번 물어서 그 언하(言下)에 그렇게 보셨으면은, 헐 수 없어!

 

'내가 그렇게 해서, 내가 그때 그 병이 그렇게 내가 고만 한바탕 미친 그 지경을 넹겼다'하는 걸, 당신도 학자들한테 그 알려 줘야 나온 곳이 분명하고.

 

그다음에 내가 나와서 인자 그 합천 해인사 들어왔단 말씀이여. 그건 두고 또 헌 거여, 또 이 재차!

재차 한번 헐만헌 게 있는 것이여.

 

거그서 딱! 걷어 잡고는 그만 다시 그 경계 치워 버리고, 그전과 같은 그 추담망담(醜談妄談)이 개시묘법(皆是妙法)이라고 붙이지 않고.

대관, 추담은 추담이고, 묘담(妙談)은 묘담이고, 법담(法談)은 법담이제, '추언망담이 묘담이다, 설법 법담이다'는 건 벌써 그건 체중현인 것이여.

 

그 지경 쏵 없애고서는 그대로 정진해 나가네, 가만히.

들으니 늘 정진을, 다시는 말 한마디 없이 정진헌다. 그 뒤에.

 

그렇게 했기 따문에 지금 경봉 스님이 그 지위를 받는 것이고, 모도 학자들이 거그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이제.

당신이 '여기와 도 배우라'고 헌다고 배와? 경봉 스님한테 가 도 배울 거여? 안되는 것이여.

 

당신이 그러헌 참 격외선(格外禪)을, 격외복을 지어놨기 따문에, 해탈복을 지어 그 수행하는 것이 해탈위신을 지켰기 따문에, 그때 딱! 근쳐 버리고 딱 아주 공부했기 따문에 지금 학자가 끓는 거여.

그거 그때에 잠깐 내 인연 부닥친 것도 과거 천만 겁 중에 다 인연이 있어 그렇게 된 것이지.

 

 

통도를 마치고 해인사를 들어와서, 합천 해인사에서 그렇게 그만 인공 스님, 우리 스님은 '견성해 들어 왔다고 헌 놈이 저 지경 되아 가지고 미친놈의 자식이 들어왔으니 조런 것을 상좌라고?'

 

얼마 겪어 보니 지랄이거든. 견성 헌 건 하나도 안 보이고 지랄헌 것만 보이네.

머리 이렇게 키워 가지고는, 나도 그놈의 뱃심 좋기는 설찬허겄다. 스님 앞에도 그 소용없네.

 

가다가도 막걸리 한잔 쭈욱 아, 거 가니께 헐 수...

인자 홍도여관에다가 짐을 붙인 것은, 짐짝을 붙인 것은 어디 뒷방에 들어가서 뒷방 밥 한 숟갈 얻어먹고, 김치 쪼가리 하나 얻어먹고 그러고 살라고 허면은 뭐, 뭐 뒷방 어디 꽉 찼지마는, 그렇게 지낼라하면은 왼통 대접이 하늘 같지마는,

그놈의 대접 받는다고 대접 받고 앉어서 아침에는 죽 한 그릇 얻어먹고, 낮으로는 서곡(黍穀) 밥 그것 한 숟갈 얻어먹고 김치 한 쪼가리 얻어먹고 살면은 나는 살 길이 없어! 그때는.

 

모가지에서 어린, 인자 그때는 그렇게 줄줄 쏟아지는 피는 없어도 모가지에서 간데미 같은 피는 한바탕썩 뱉으면은 팍팍 나와. 그러니 비린내가 나서 살 수가 없거던. 그러니 가서 그렇게 살 도리도 없어, 내 형편이!

그러지마는 내가 그런 말을 허겄어? 누구한테 뭐라고 자랑을 허겄어, 뭣 허겄어?

 

나 혼자만 그저 그렇게 침을 뱉고 있으면서, 머리 속에는 이렇게 보면은 전부 모도 솟아서 모도 그 부스럼이 얽커져서 그래서 껍데기를 기루어 가지고 그러고 있는디.

 

아니 내 상좌라고 허는 것이, 상좌라고 헌 것이 그렇게 들어와서 그 지경허고 여관에가 붙어 가지고 밤낮 보면, 인자는 그 막걸리패에나 가서 막걸리나 한잔씩 얻어먹고,

여관에서, 인자 그 친고, 친고 여관인디 거그서 그만 심부름도 해 주고 그저—내가 암만 뭐 나를 시킬라고 해서 하나? 시키도 않지마는 내가 자진해서 뽀이(boy) 노릇을 허제.

 

역부러 손이 올 것 같으면은 귀빈실 손인가 가서 쫓아가서—인자 그 누데기 고놈 벗어 버리고, 머리 이놈은 이렇게 질워서 나왔은게 움펑 감투는 인자 안 쓰고, 요렇게 해서 그냥 총각머리처럼 했다.

그때는 하이칼라 깎든지 허제, 시방 모냥 더벅이 없어. 그전에는 인자 요렇게 헌디 요놈은 요것도 인자 깎은 것도 요렇게, 다시 요까장, 요까장 내려와 버렸제. 그냥 그놈 그대로 두고는.

 

깎으라고 해 싸도 죽어도 안 깎어. 머리가 못 깎아.

속에 깎으면은 부스럼이 꽉 차 놓아서 깎으들 못혀.

똑, 부스럼 나오면 깨소금 단지라 햐, 모도.

깨소금 단지라고 날 보고 여그, 그런게 못 깎아. 그래 놓아 둔 걸 모르고는.

 

그래 가지고서는... 또 그러고 속인(俗人)이라고 허고—그러고 인자 각처(各處) 먼 디서 올 것 같으면은 내가 속인이라고 해야사 허제, 중이라고는 못하겄단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인자 심부름질이나 허고 이러고 있제. 하루 혀, 이틀 혀, 며칠을 혀도 소용...

 

요 우리 스님이 그냥 뵈기 싫다고 중을 떼 버렸어.

인자 중으로 그때는 있었는데, 인공 스님이 중으로 떼 버려 나를.

'에이, 그녀러 것, 중 두었다 나만 스승 욕 얻어먹고 못된 놈'이라고. '그놈 어디 도 닦다가 왔다고 헌 놈이 저 지경 저 모냥 저 더런, 이런 행동이나 하고, 밤낮 술 처먹고 고기 처먹고 그런다'

 

얻어, 안 얻어먹을 수가 있나? 그거 얻어먹을라고 거기 있는디. 그랬네.

 

그래 가지고도 밉상짓을 참말로 볼 수 없는 행동을 허네.

그거 그 지경 되아 놓은게 못쓰겄드구마는, 사사(事事)에 어긋나서.

 

들어와서, 그러자 저러자 인자 4월 8일이 닥쳐왔네.

아 넨장, 4월 8일이 닥쳐오면은, 그 4월 8일 날은 그 산중에 그 높은 강사(講師)들이 모도 인자 정해져 있어 가지고는 설법을 허는 것인데, 고경 스님이 허고, 여그 능산 스님이라고 혀, 능산 스님도 하고, 환경 스님도 허고, 보혜 스님도 허고 이러헌 그 이름난 큰 강사가 벌건 법복(法服)을 입고, 그 큰 법당에, 하여간 천 명 들어앉어도 그 들어앉을만헌 법당이여.

뜰까장 막 서면 굉장한디, 4월 8일에는 3만 명이 오니, 몇만 명이 오니 그럽니다, 옛날도.

 

꽉! 법당에 와서, 사람이 와서 차고 있는디, 그놈의 강사들이 인자 고경 같은 사람, 이고경 같은 사람, 강사들이 그 좋은 가사를 입고 그 척, 위의(威儀)를 갖추고 설법당에 올라가면은 '저런 것들이 설법을 해 가지고 대중을 그르칠라고 올라가는구나' 그 마음이 난다 그말이여.

 

 

자지 말어! 자지 말어! 잘라면 나가거라!

힘들어서 이렇게 설법허고 있는디 또 자빠져 자고 자빠졌어.

 

몇 억만 년이나 속았냐! 그놈한테.

잠 안 자고 들을만헌 사람들이 그러니 그 더 못쓰겄단 말이여.

 

또 자 봐라, 또 자올라 봐.

자올면 인자 법문헐란께. 인자는 눈 뜨면 안 헐란다. 자올라라.

 

원! 법상에서, '졸면 못쓴다'해도, 그러헌 어디 그 신심이 고래 가지고 뭣 해아? 용맹심이 그래 가지고 뭣 되아?

 

나 법문, 참말로 뭔 말씀을 허고 있던지, 큰스님네가 설법허면 한번 꼬빡해 본 일이 없네.

언제여, 시방도 큰스님네 법문허면 꼬빡도 않네, 나.

 

그까짓 무슨 놈의 그 그럭저럭헌 것 헌다면은 '그까짓 법문이냐'고 있도 앉도 않고.

 

내 법문을 그렇게 들어?

들어봐라. 그렇게 들으면 느 과보가 어떤가.

 

꽉… 4월 8일이 왔는데, 고경 스님이 그때 정해져 있는 법사(法師)인디, 그 법상에 올라갈라고 딱 정리하고 있어. 법상에 막 올라갈라는 것을 소리를!

 

머리를 이렇게 질러 가지고는, 그래 가지고 인자 뭐, 밑에는 그냥 우습게 입었제.

뭣이 인자 심부름허든 옷 그대로—누가, 인자 나 뭐 다른 옷이 있나?

 

소리를 질러!

거, 그런 산중에, 그 짜여져 있는 산중에서 거지 같은 것이 내가, 암만 그 본사(本寺)라고 하지마는, 거그 본사에 그 더군다나 홍도여관 뽀이로 있어 가지고 소리를 지르니 되아?

 

고함을 한번 냅대 질러 버렸단 말이여.

질르고는 “어디라고 올라갈라고 하냐!”고 고함을 지르고.

 

내가 그만 대번에 올라갔단 말이여, 내가!

거 뭣 헐라고 거그 내가 올라갔냐 그말이여? 그런 짓을 해서 쓰겄어?

 

내가 대번, 그냥, 뭐... 아, 법상에 올라갈라고 헌게, 머리를 이래...

하! 이런 놈의 것. 본사에서.

 

내 우세 그때, 곧 죽을 놈의 그런 우세를 했기 따문에 오래 사는가 몰라, 지금 안 죽었는가 모르지.

하! 그런 놈의 짓을 허겄어?

 

참, 그래도 그 기맥히제. 그래도 기맥혀.

 

올라 가지고는, 그때 그놈 법문이여. 똑 그대로 내가 하는 거여. 그 하나도 안 잊어 버렸은게.

시방 왔다갔다허는 그 내, 어느 날 어느 달 어디로 갔다 그건 몰라.

안 외아. 하나도 몰라 시방. 그래 나온 대로 시방 허는 거여.

 

아, 거 척! 가서, 법상에 가서 척 해 가지고 "회마(會麼), 악!" 이래 놓고는, 척 앉어서 이런 법문을 하네.

 

누가 나를 올라가라고 했나? 하 참, 기가 맥혀! 그때에.

시방 못하겄어. 시방 그러라면 못하요. 절대 못해. 체면이 생겨서 못해.

 

 

"자연적(自然的)이냐 천연적(天然的)이냐?"

인자 여럿이 꽉 찼은게 그만... (큰 소리로)

 

"만겁(萬劫)에 현안(懸案)인 천지(天地)의 비밀(秘密)이냐?"

눈을 뚝 뜨고 말여.

 

"자연도 아니요 천연도 아니요, 만겁에 현안인 천지의 비밀도 아니니라!" 이랬네, 그 설법전에서.

 

"자연적이냐 천연적이냐? 만겁에 현안인 천지의 비밀이냐? 자연도 아니요 천연도 아니요, 만겁에 현안인 천지의 비밀도 아니니라!" 그래 놓고는,

 

"선천(先天)도 무기시(無其始)요, 후천(後天)도 무기종(無其終)이다. 선천(先天)도 시(始)가 없고 후천(後天)도 종(終)이 없느니라. 시심마물(是甚麽物)고? 무슨 물건이 이런 물건이 있느냐?

대답해라! 이놈 대답허면은 이 법상에 올라올 자격이 있다! 대답 못허면 나한테 물어라!"하며 이랬다.

 

하 이러고, 이래 조져 대는데, 그때 제일 내가 법문 잘했네, 그때!

'참! 정영신이다' 소문나 버렸네.

 

막 자유 자발적으로 올라가서 한바탕 해 놨는데. 그 군중이 조용허니 말 한마디 없이 들었네.

 

시방 허능산이 살아 있어.

대명사라고. 저 우에 대명사라고, 그 정능아파트 뒤에 올라가면 새로 지은 절, 쪼끄만헌 대명사라고 있어. 거기에 지끔 경인생인데, 81세인가 그려. 나를 독단으로 시방도 얘기혀.

 

여그 온, 여그 저 서울 의정부서 내려온 사람, 젊은 학생이라고 안 있어?

그 사람도 그이가 나를 이리 천도해서 왔어. 대학생이라고 천도해서 시방 댕기는 것이여.

헌디 능산 스님이 말해서 왔다는 이여. 오면 물어 보란 말이여.

 

그것, 강사여. 독신(篤信)이여 독신! 그때, 그때 법문 듣고 그런 거여.

 

그러니 글쎄 그 지경 되아 가지고 법상을 척 올라가서 그 설법 한바탕 해 놓은 것이 기적이란께. 없어.

뭐 말도 좀 좋아, 현대 사람도 들을만 허고. 응, 그전 구식 사람도 들을만 하고.

 

"자연적이냐 천연적이냐?" 많이 혔는디 그 밑에는 몰라, 인자. 그건 다 잊어 버렸어, 설찬히 많이 했는디.

 

"자연적(自然的)이냐 천연적(天然的)이냐? 만겁(萬劫)에 현안(懸案)인 천지(天地)의 비밀(秘密)이냐? 자연도 아니요 천연도 아니요, 만겁에 현안인 비밀도 아니다.

선천(先天)도 무기시(無其始)요, 후천(後天)도 무기종(無其終)이다. 하날 전에도 처음이 없고 하날 후도 종(終)이 없다. 시심마물(是甚麽物)이냐? 무슨 물건고?" 아, 이렇게 한번 물어.

 

"만약에 답헐 사람이면 나오니라. 답허는 사람이면 여그 올라올 설법 법사 자격이 있고, 만약 이 말을 답 못하면은 못한다! 답 못허는 사람이면 나한테 와서 물어라!" 아 이러고 앉었네.

 

이것 법문 잘 됐제!

 

여까장 두고, 그 한번 더 해야 마쳐 지겄구만, 인자.

그러고, 그러고 인자 들어오는구만. 아이고. (53분23초~1시간8분35초) (일대기 13호 끝)

 

 

 

 

----------------(1/4)

 

*(게송) ‘부운부귀비유의~’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朴上舍草堂’ 게송 참고.

*도학자(道學者) ; 도(道)를 닦는 사람. 수행자(修行者).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각(覺) ; 깨달음.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2분 19초)

[참고] 송담스님(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오장치 ; ‘오쟁이’의 사투리. *오쟁이 : 물건을 정돈하거나 담아 두기 위하여 짚을 엮어서 만든 작은 섬(곡식을 담기 위해 짚으로 엮어서 만든 자루).

*닥트리다(닥뜨리다) ; ①(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마주하여 가까이 서거나 만나다.

②(사람이 닥쳐오는 일이나 문제 따위에) 직접 맞서다.

③(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다그쳐서 재촉하다.

*원청 ; ‘워낙(두드러지게 몹시)’의 사투리.

*왜정 시대(倭政時代) ; '일제 강점기(日帝強占期)'의 이전 말.

*일제 강점기(日帝強占期) ; 일제의 1910년의 국권 강탈(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병합韓日倂合 조약)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35년간의 시대.

*도변창(渡邊彰 와타나베 아키라) ; 일본인 불교학자로서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종교과, 고적조사과 등에서 문화, 종교 분야를 담당한 촉탁 직원.

1911년 6월 3일 시행된, 전국의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조선 불교에 대한 행정 통제를 강화하고 식민지 지배 구조에 불교를 예속시키기 위한 규제 일변도의 악법인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도 사내(寺內) 총독이 그에게 위촉하여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이듬해, 출범한지 만 1년여 만에 임제종(臨濟宗 :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 당시 유일한 종단이었던 원종圓宗의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의 예속하에 두려고 하자, 이를 개종역조[改宗易祖, 종지宗旨를 고치고 종조宗祖를 바꾸는 것]의 매교적 행위라 규탄하여 1911년 1월 15일에 순천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한용운·오성월 스님 등이 총회를 열고 이회광 중심의 원종을 부정하는 새로운 종단을 세우기로 하였는데 그것이 곧 임제종이다)이 해산되고,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의원(朝鮮佛敎禪敎兩宗各本山住持議院)이 설립되면서 사찰의 설립과 주지의 임명등 불교계의 모든 행위가 총독부의 승인을 받게 되어 불교계가 일제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왜색(倭色 왜나라·일본 왜/빛깔·모양 색) ; 일본 문물의 영향을 받은 양식을 얕잡아 이르는 말.

*30본산(三十本山) ;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병합 조약) 직후에 시작된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조선 불교에 대한 행정 통제를 강화하고 식민지 지배 구조에 불교를 예속시키기 위한 규제 일변도의 악법인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공포하고 시행하여 그동안 독립적 개별적으로 운영되던 조선의 불교 사찰을 30개의 본산, 중심 사찰을 선정해 한 지역의 다른 사찰을 관할하게 한 제도.

30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이, 말사(末寺)의 주지는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서 임명하도록 하였다. 1924년 11월에 화엄사가 본산으로 되어 31본산(三十一本山)이 되었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계율(戒律) ;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말미암은 모든 악(惡)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

계는 좋은 습관이나 도덕적 행위의 뜻으로 모든 불자가 지켜야 할 불교도덕이며, 율은 모든 그릇됨을 여의고 깨달음의 세계로 선도해야 할 출가 교단의 통제 규범.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성(罪性) ; 죄의 본성. 죄의 실체.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악성(惡性) ; [산스크리트어] akuśala, aśubha 선(善) · 무기(無記)와 함께 삼성(三性 사람의 세 가지 성품)의 하나. 악한 성품. 불선성(不善性). 현세와 후세에 나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탐진치(貪瞋癡) 등의 악한 마음과 이로 인한 일체의 악업(惡業)을 말한다.

*율사(律師) ; 계(戒)와 율(律)에 능통한 스님. 일반적으로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2/4)

 

*'또 교(선)가 암만 불구문자(不拘文字)니, 문자도 거그는 소용이 없으니 교(敎)가 무슨 소용이 있나 했지마는~' ;

[참고] 『五燈會元』 제3권 '南嶽下二世 馬祖一禪師法嗣 洪州百丈山懷海禪師者'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영광(靈光)이 홀로 비취어 근진(根塵)을 멀리 벗어나며 체(體)는 진상(眞常)이 드러나 문자에 걸리지 아니하고, 심성(心性)은 물듦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성(圓成)하니 다만 망연(妄緣)을 여의면  곧 여여불(如如佛)이라.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 부처는 곧 이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人心]을 곧바로[直] 가리켜[指],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디디다 ; ①발을 올려놓고 서거나, 발로 내리누르다. ②누룩(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이나 메주의 반죽을 보자기에 싸서 발로 밟아 덩어리를 짓다. ③어려운 상황을 견디어 내거나 이겨 내다.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강사(講師) ; 경론(經論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을 가르치는 스님.

*삼직(三職) ; 주지(住持)를 돕는 세 직책. 곧 총무, 교무, 재무를 말함.

*퇴설당(堆雪堂) ; 해인사에 있는 전각(殿閣)으로 최근까지 상선원(上禪院)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1899년에 경허 선사께서 이곳에 주석하시면서 동수정혜결사[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서 함께 불과를 이루는 계사(모임의 조직)]를 한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본산(本山) ; 본사(本寺 처음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 절). 그 종파에 딸린 여러 절을 총괄하는 한 종(宗)의 근본 도량(절).

*물꼬 ; ①논에 물이 넘어 들어오거나 나가게 하기 위하여 만든 좁은 통로. ②진전이 없거나 막혀 있는 상태를 푸는 실마리나 계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 깨는 것이, 툭 터진 것이 대오(大悟), 우리 대오허는 법이 그게—자, 부처님도 경계 보고 깼제. 별 탁! 뜬 놈 보고, 탁! 봐 버렸제' ; 견명성(見明星). 부처님이 12월 8일 새벽별[明星]을 보시고 성도하였다는 고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저히 깨닫는 것을 말한다.

*명성(明星) ;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샛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1) 15분 19초.

[참고 ①] 송담스님(No.405)—89년(기사년) 성도재 법회(90.01.04)

 

(1)------------------

 

밤마다 별은 반짝거립니다. 구름이 꽉 낀 날은 안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밤이면 언제나 별은 반짝거립니다. 삼천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 밤에는 별이 빛납니다.

우리도 빛나는 번쩍거리는 그 별을 보고, 삼천년 동안에 아니 수억만 년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별을 봅니다. 번쩍이는 별을 보지마는 별을 보았다고 해서 다 확철대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별빛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어.

 

해마다 제방(諸方)에서는 섣달 초하루부터 납월팔일 새벽까지 만 7일간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부처님께서 납월 8일에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기 때문에 그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또 그 뜻깊은 날을 우리가 그냥 범연(泛然)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용맹정진을 해. 7일 동안을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완전히 앉은 채 그렇게 용맹정진을 합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납월 8일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왜 우리는 납월 8일 새벽 하늘의 별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밤마다 번쩍거리는 수없는 별을 보고도 왜 깨닫지를 못할까요?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별을 보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을 보고 깨달아?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아?

“바로 그 별을 보는 것이다” 이 간단한 한 말씀 속에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신 바로 그 도리를 단적(端的)으로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한데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로구나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 천자나 되는 긴 낚시줄을 똑바로 드리우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요, 그 낚시가 물에 떨어지자마자 한 물결이 일어나니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더라.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와서 고기가 그 낚시를 물지를 않아.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가득한 배에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우리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어. 무량 중생을 제도하셨다.

부처님께서 확철대오하신 그 법을 가섭 존자에게 전하시고, 가섭 존자는 아란 존자, 아란 존자는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28대를 달마 조사까지 전하고, 달마 조사가 중국으로 오셔서 6조 스님까지, 6조 스님 이후로 5종 가풍이 벌어져서 전강 조실 스님까지 77대를 전해 내려왔습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고, 설할라야 설할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이 도리를 깨닫고 또 그것을 전하고 받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꼭 깨달을 것이 있고, 꼭 전할 것이 있고 또 전해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 됩니다. ‘깨달을 것이 있고, 전할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다’고 그렇게 그 말을 따라서 그렇게 인식하고, 또 자기도 깨달으려고 생각을 하고.

 

이러한 말에 떨어져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은—마치 배를 타고 가다가 그 갑판 위에서 칼을 가지고 무엇을 하다가 그 칼을 잘못 놓쳐가지고 바닷물에 빠트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뱃전에서 칼을 잃어 버렸다’해 가지고, 나중에 그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그 장소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뱃전을 쪼아 가지고 표(標)를 해 놨습니다.

언제라도 그 뱃전 그 자리에서 떨구었으니까, 그 뱃전에다가 표를 해 놔야 그 뱃전 밑으로 내려가면은 그 밑바닥에 칼이 있을 것이다 이거거든.

 

또 어떤 사람은 산에서 어느 나무 등걸 밑에서 토끼를 한 마리 보았는데, 그 토끼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나무 등걸에서 토끼를 발견했다가 놓쳤으니까, 항상 그 나무 등걸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끼가 달아났으니까 여기 가 있으면 그 토끼가 오려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칼을 잃어버리고 뱃전에다가 표를 한 사람이나, 토끼를 놓치고서 나무 등걸 옆에서 토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퍽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셨으니까 행여나 나도 납월팔일 날 새벽에 하늘에 뜬 그 별을 보면 혹 깨달을란가?’ 이리 생각하고 추운데 새벽에 나가가지고 동쪽에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을 새벽부터 쳐다보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별을 보는 것이니라. 보는 놈이니라”

깨달음이 별로부터 오겠습니까?

 

저 먼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거기에 불이 났구나’ 뻘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하얀 연기만 일어난 것만 보고도 ‘아! 저기에 벌써 불이 났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담 밖에 담 너머로 뿔만 지나간 것을 보아도 ‘아! 저 담 밖에 소가 지나갔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 몸뚱이는 담에 가리어서 보이지 않고 뿔 끄터리만 보여도 담 밖에 소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말이여. 영리한 사람은 척! 연기만 보고 불인 줄 알고, 뿔만 보고도 소인 줄 알아.

 

어리석은 사람은 연기를 보고 불인 줄을 모르고, 그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저것이 무엇인가? 뿔 끄터리를 보고 벌써 소인 줄 알아야 할 텐데, 저것이 뾰족한 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말인가? 개인가? 사람인가? 지게인가? 이러쿵저러쿵 따진다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여. 척!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8분46초~24분5초)

 

(2) 5분 13초.

(2)------------------

 

과거에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고, 또 어떤 도인은 복숭화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비로 땅을 쓸다가 돌이 와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도인은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시장에서 장꾼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했다 그말이여.

 

어찌 하필 부처님처럼 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여.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체(體)고, 부는 바람 소리, 흐르는 물소리, 개 짖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일체가 다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여.

그러니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다 우리가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때요, 곳이다 그말이여.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다가, 무엇을 듣다가 깨달을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어떠한 중대한 뉴스를 방송을 한다 할 때, 시간을 잘 모를 때에는 항상 다이얼을 맞춰서 딱 놔두고 기다리듯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깨달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화두를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야 한다 그말이여.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경지로 나아가야 그 언젠가 탁!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사량분별에 떨어진다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는 데에 끄달린다든지, 귀로 무엇을 듣는데 끄달리고 있는 한은 그러한 경지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항상 화두를 잡드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정진이여.

경전도 볼 것이 아니고, 어록도 볼 것이 아니고, 일체처 일체시가 행주좌와 어묵동정 사위의(四威儀)에서 화두만 성성적적(惺惺寂寂) 하게 잡드리해 갈 뿐이여.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똥을 눌 때도 그렇고, 오줌을 눌 때도 그러고, 앉아서도 그러고 서서도 그러고.

 

이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되는 법이 없어. 고조사(古祖師)들이 ‘그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아주...

부처님께서는 ‘무엇 무엇이 안 하면 내가 어쩌리라’고 함부로 그러한 막담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인(古人)네는 우리 후인(後人)들을 위해서, 그렇게도 무서운 그러한 맹세를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36분35초~41분48초)

 

[참고 ②] 『선문염송 · 염송설화』 (혜심 · 각운 지음 | 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1권 3칙 ‘오도(悟道)’

<염송설화(拈頌說話)>

大慧云 釋迦老子正覺山前 從定而起 因見明星忽然悟道 信知時節若至 其理自彰 但記悟道時節因緣而已 則世尊悟處 不在明星上 香嚴悟處 不在擊竹邊

 

대혜가 이르기를 “석가 노자께서 정각산 앞에서 선정에서 일어나 샛별을 보시는 순간 홀연히 도를 깨달으셨으니, 이는 시절이 이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도를 깨달은 시절과 인연을 기록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깨달음은 샛별에 있지 않고 향엄의 깨달음은 대나무를 때리는 데 있지 않다.

 

*장경(長慶) 스님 ; (856-932)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속성은 손(孫)씨, 법명은 혜릉(慧陵) 법호는 장경, 시호는 초각(超覺)대사.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설찬히 ; 솔찬이. 솔찬히. ‘아주 많이. 상당히. 제법’의 사투리.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힘대가리 ; 이 말은 주로 '힘대가리 없다'는 표현으로 쓰여, '힘이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산 스님 ; 서산대사.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28, p34에서.(가로판 p29, p35)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說者는  爲敎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敎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가  皆是敎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敎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敎外別傳禪旨]가 되리라.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단진범정(但盡凡情) 별무성해(別無聖解) ; ‘다만 범부의 생각이 다할지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니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83. (가로판 p87)

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이 다할지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니라.

 

(註解) 病盡藥除하면  還是本人이니라

병이 없어지고 약까지 쓰지 않는다면, 앓기 전 그 사람이니라.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범정(凡情 무릇·보통 범/뜻 정) ; 범부(凡夫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의 생각. 또는 범부의 망상분별을 말한다. 깨닫지 못한 이들이 근거 없이 범상한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것. 범심(凡心)과 같은 말.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 ;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2.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생사는 본래 없다 ;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현중현(玄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良久)와 방망이[棒]와 할(喝)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2분 48초)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2분 19초)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2분 26초)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분 36초)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4분 18초)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법견(法見) ; 법에 대한 견해. 법에 집착하는 견해 또는 법이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며, 법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견해라야 정견이라 한다.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법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로 쓰인다. 부처님의 경지에 집착하는 견해인 불견(佛見)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 삼구(三句).

 

[참고 ①] [ 別明臨濟宗旨 ]  별명임제종지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206~207. (가로판 p213~214)

大凡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三要하니  一句는  *無文綵印이요 三玄三要는  有文綵印이라  權實은 玄이요  照用은  要라.

 

따로 임제종지를 밝힘 : 일구(一句) 가운데 삼현(三玄)이 갖추어 있고, 일현(一玄) 가운데 삼요(三要)가 갖추어 있는데, 일구는 글발이 없는 인(印)이고, 삼현과 삼요는 글발이 있는 인이다。 권도와 실상은 현(玄)이며, 비침과 씀은 요(要)가 된다.

 

*무문채인(無文綵印) 또는 무문인(無文印) : 선법(禪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는 수가 있다.

①의리선(義理禪)이란 것은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을 이름이니, 마치 인장으로써 진흙에 찍으면(印泥) 인발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다.

②여래선(如來禪)이란 것은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어서, 마치 인장을 물에 찍은(印水) 것 같다.

③조사선(祖師禪)이란 것은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이치나 일에 다 걸림 없는 것이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印空)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②] [三句] 삼구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207. (가로판 p214)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참고 ③]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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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 한암 스님 서신문답[십대문답]—만공 스님은 덕숭산 정혜사 아래 금선대에 계시고, 한암 스님은 금강산 지장암에 계실 때의 서신문답.

 

만공 :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이로구나.(漢岩到金剛雪上加霜) 지장도량 내에 업경대가 있으니 업이 얼마나 되느냐?(地藏道場內有業鏡臺業多少麽)

한암 : 묻기 전에 삼십방을 놨느니라.(故問此問以前合喫三十棒)

 

만공 : 방맹이를 씹힌 뒤에는 어떻게 할테냐?(喫後如何)

한암 : 잣서리 때가 좋으니 잣서리허러 올라오십시오.(此時好時節速來)

 

만공 : 암두(巖頭) 잣서리 때는 원하지마는 덕산(德山) 잣서리 때는 원치 않는다.

한암 : 암두와 덕산 이름은 알았다마는 성(姓)이 무어냐?

 

만공 : 도둑놈이 삼천리 밖에 지나갔는디(賊過後三千里), 문전행인(門前行人)의 성 물어 뭣할테냐?

한암 : 금선대에 보배관이여, 금과 옥으로 가히 비유할 수가 없구나.(金仙臺裏寶花冠金玉難可比)

 

만공 스님께서 백지를 네모반듯하게 잘라가지고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원상 하나 그려 보냈습니다.

 

[참고 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편찬 | 수덕사 능인선원) p99~100.

서신 문답 — 한암 스님이 금강산에 있을 때

만공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눈 위에 서리까지 겹쳤도다. 지장 도량(地藏道場)에 업경대(業鏡臺)가 있으니, 허물이 얼마나 되오?』 師云 『漢岩 到金剛 雪上加霜. 地藏道場 有業鏡臺 所作罪業 多少麽?』

한암 『묻기 전과 물은 후를 합하여 30방을 맞았읍니다.』 岩云 『故問以前 此問以後 合喫了三十棒也』

 

만공 『맞은 뒷 소식은 어떠하시오?』 師云 『喫後消息以爲如何』

한암 『지금 곧 잣서리가 한창이니, 이 때를 놓지지 말고 오셔서 같이 먹으면 어떻겠습니까?』 岩云 『今當栢子燒喫時 勿失時機來相遊 亦不樂乎?』

 

만공 『암두의 잣서리 늦은 것은 원통하지만, 덕산의 잣서리 늦은 것은 원통하지 않소』 師云 『唯恨岩頭栢失時 不怨德山栢子遲』

한암 『암두와 덕산이라는 이름은 알았으나, 그들의 성은 무엇이라 합니까?』 岩云 『旣知岩頭德山名 未審其姓 是甚麼?』

 

만공 『도둑놈이 벌써 천리는 도망갔을 터인데 문전 나그네여, 성은 물어 무엇하겠소?』 師云 『賊過去已千里後 來問姓名門前客 問姓作甚麼?』

한암 『금선대(金仙臺) 안에 보배 화관이여! 금 · 은 · 옥 · 백으로 견주기 어렵도다』 岩云 『金仙臺裡 寶貨冠 金銀玉帛 難可比』

 

만공 스님은 최후로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려서 보냈다. 師 最後 (그림) 記畵如是(백지 네모반듯하게 잘라가지고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원상 하나 그려보냈읍니다)

 

[참고 ②] 『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 (한암문도회 | 오대산 월정사) p436~437.

만공스님이 한암스님에게 이르되,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지장 도량에 업경대가 있으니 지은 죄업이 얼마나 되는가.” 師云 漢岩이 到金剛하니 雪上加霜이라 地藏道場에 有業鏡臺하니 所作罪業이 多少麽아

한암스님이 답하기를,

“이 질문하기 전과 질문한 뒤를 합하여 30방망이를 맞아야겠다.” 岩云 姑問以前과 此問以後에 合喫了三十棒也로다

 

만공 — “맞은 뒤의 소식은 어떠한가.” 師云 喫後消息은 以爲如何오

한암 — “지금은 잣서리 할 때라. 때를 잃지 않고 와서 서로 놀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岩云 今當栢子燒喫時에 勿失時機來相遊가 亦不樂乎아

 

만공 — “암두(岩頭)의 잣서리 할 때를 놓침은 한스럽지만 덕산(德山)의 잣서리에 늦음은 원망하지 않노라.” 師云 唯恨岩頭栢失時나 不怨德山栢子遲로다

한암 — “암두와 덕산의 이름을 알지만 그 성은 무엇인가.” 岩云 旣知岩頭德山名이니 未審其姓은 是甚麼오

 

만공 — “도둑이 이미 지나간 지 천리가 넘었거늘, 문앞에 지나가는 길손이 성을 물어서 무엇하랴.” 師云 賊過去已千里後라 來問姓名門前客이니 問姓에 作甚麼오

한암 — “금선대 속에 보화관이여, 금은 옥백으로 비교하기 어렵도다.” 岩云 金仙臺裡에 寶貨冠이요 金銀玉帛 難可比라

 

만공스님이 최후로 백지에 이렇게 그려 보내다. 師 最後에 記畵如是하다(백지 네모반듯하게 잘라가지고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원상 하나 그려보내다)

 

*이 문답은 한암선사께서 금강산 지장암 업경대에 계실 때 일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들입대 ; 들입다(세차게 마구).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 ; '다만[但] 알지 못할[不會] 줄 알면[知] 곧[是卽] 성품을 본[見性] 것이니라'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

問 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答 只汝自心 更作什麼方便 若作方便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문) 어떤 방편을 지어야 한 생각 기틀을 돌이켜서 곧 자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 다만 너의 스스로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려 하는고.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서는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의 눈인데 무엇을 다시 보리오. 만일 잃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본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도 없거니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으리오.

자기의 영지(靈知)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일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줄 알면 곧 성품을 본[見性] 것이니라.

*점두(點頭 고개를 끄덕일 점/머리 두) ; (사람이)승낙하거나 찬성하거나 옳다는 뜻으로 머리를 약간 끄덕임.

*일예재안공화난추(一翳在眼空花亂墜) ; 일예재안공화난타(一翳在眼空花亂墮).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가지가지 망상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참고 ①] 『전등록(傳燈錄)』 (제10권) ‘복주(福州)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 (전등록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 p691~692)

初參歸宗問 如何是佛 宗曰 我向汝道汝還信否 師曰 和尙發誠實言何敢不信 宗曰 卽汝便是 師曰 如何保任 宗曰 一翳在眼空花亂墜(法眼云 歸宗若無後語有什麼歸宗也)

 

처음에 귀종을 뵙고는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다면 그대는 믿겠는가?”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정성스럽고 참된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대가 부처다”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하나의 그림자라도 눈을 가리면 허공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법안(法眼)이 말하기를 “귀종(歸宗)이 뒷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귀종(歸宗 : 조종에 돌아간다는 뜻)이라 할 것이 무엇이랴?라고 하였다]

 

師辭歸宗 宗問 子什麼處去 師曰 歸嶺中去 宗曰 子在此多年裝束了却來 爲子說一上佛法 師結束了上堂 宗曰 近前來 師乃近前 宗曰 時寒途中善爲 師聆此一言頓忘前解 後歸寂諡弘照大師 塔曰圓相

 

대사가 귀종에게 하직을 아뢰니, 귀종이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가려는가?”

“영중(嶺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네가 여기에 여러 해 있었으니, 짐을 꾸려 놓고는 잠시 오라. 내가 자네에게 유일하고 최상인 불법을 말해 주리라”

대사가 짐을 꾸려 놓고 법당에 올라가니, 귀종이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대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니, 귀종이 말했다. “날씨가 차니, 도중에 조심하라”

대사가 이 말을 듣고는 앞서의 견해를 단박에 잊었다.

나중에 입적하니, 홍조(弘照) 대사라 시호하고, 탑호는 원상(圓相)이라 하였다.

 

[참고 ②]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普照知訥 一一五八 ~ 一二一O)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은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주고자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화상의 성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보림 해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깨달은 것이다.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卽與古聖 把手共行

 

위에 든 옛 성인들의 도에 드신 인연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안으로 말미암아 믿어 아는 곳[信解處]이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참고 ③] 『선문염송(禪門拈頌)』 제 257칙 ‘즉여(卽汝)’

歸宗因僧問 如何是佛 師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於此有省.

 

(6분 29초)

[참고 ④] 송담스님(No.465)—92년 2월 첫째일요법회(92.02.02)에서.

저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라고 하는 큰 선지식이 옛날에 계셨는데, 그 선사가 최초에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을 찾아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떠억 찾아가서 그 귀종 선사에게 묻기를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매우 엄숙하고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귀종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향해서 일러주되 네가 믿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말하기를 “큰스님께서는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학자를 위해서 정말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감히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종 선사가 가로되 “네가 곧 부처니라”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야 되겠습니까?”

귀종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空華)가 난타(亂墮)니라.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공화가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이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영훈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보림하는 길까지 눈을 떴습니다.

 

한 장애가 한 티끌이 눈에 있으니, 공화(空華)라고 하는 것은 눈병든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슨 꽃이 피어서 이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서물서물 서물서물 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거든.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일러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네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까,

“큰스님께서 어찌 거짓말 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실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니까, “네가 곧 부처니라” 거기서 확철대오를 했거든.

 

부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부처님, 부처가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나름대로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 실달(悉達) 태자 뭐 그런 등등 나름대로 다 말씀하실 수 있고,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바로 진리를 깨달으신 진리와 하나가 된 성현이다’ 아마 그렇게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네가 곧 부처다. 영훈이 네가 곧 부처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부처다”

이러한 이것은 이론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고 또 영훈 선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수긍을 해서 ‘아하, 바로 내가 부처구나’하고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어.

 

“네가 곧 부처다”고 하는 데에서 이론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서 툭! 깨달아 버린 거여.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 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그래서 법문(法門)을 듣되 그 법문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상식 모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이 자리에 모이신 법보제자(法寶弟子)는 무슨 법문을 듣던지 바로—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그 법문을 즉(卽)해서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그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거든.(16분28초~22분57초)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조비모락(鳥飛毛落) ;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3~44. (가로판 p44~45)

諸佛은 說弓하시고 祖師는 說絃하시니 佛說無碍之法은 方歸一味어니와 拂此一味之迹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故로 云, 庭前栢樹子話는 龍藏所未有底라 하시니라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한맛에 돌아가거니와, 이 한맛의 자취마저 털어 버려야 바야흐로 조사가 보인 한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고 한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하시니라.

 

(註解) 說弓은 曲也요 說絃은 直也며 龍藏은 龍宮之藏經也라 僧이 問趙州하되 如何是祖師西來意닛고 州答云, 庭前栢樹子라 하시니 此는 所謂格外禪旨也라

【 魚行水濁이요 鳥飛毛落이니라

 

활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굽다는 뜻이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다는 뜻이며, 용궁의 장경이란 것은 용궁에 모셔 둔 대장경이다。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조사가 서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하시니, 이것이 이른바 격 밖의 선지이다.

【 고기가 놀면 물이 흐리고 새가 날면 깃이 떨어지느니라.

 

*가풍(家風) ; ①종풍(宗風)—종문(宗門)의 풍규(風規 풍습상의 규정). 문풍(門風)—선문(禪門)에 있어서의 종풍(宗風).

②선림(禪林, 선종禪宗)에서의 행위의 규범. 청규(淸規, 선원에서 일상의 생활규정). 선종에서 가르침을 나타낼 경우, 각자가 갖는 독자적인 방식, 또는 지도의 방법을 말함.

③그 종(宗)만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

④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친고(親故) ; 친구(親舊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위패(位牌 지위·높여서 어떤 사람 위/명찰·위패 패) ; 죽은 사람의 위(位 이름 · 지위. 높여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를 모시는 나무패.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간탐(慳貪 아낄·인색할 간/탐할 탐) ; 몹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음.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인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안에 위패를 모신 단(壇).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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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푼 ; 한 푼짜리 엽전 세 개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없는 것을 이르는 말.

*격외선(格外禪) ; 언어 · 문자로 의론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는 선(禪)을 말한다.

*격외(格外 격식 격/바깥 외) ; 규정되고 고체화된 세간적(世間的)인 척도를 초월하는 것. 즉 분별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격(格)은 격식(格式) · 규격(規格) · 법칙 · 규정 등을 말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세간(世間)의 척도라는 뜻이다.

[참고] 『벽암록(碧巖錄)』 (원오극근) 제9칙 ‘조주사문(趙州四門)’ 평창(評唱) 참고.

大凡參禪問道 明究自己 切忌揀擇言句 何故 不見趙州擧道 「至道無難唯嫌揀擇」

 

무릇 참선하며 도를 묻는 것은 자기를 밝히고자 함이니, 절대로 언구로 간택해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인가? 조주 스님이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라고 한 말을 듣지 못했는가?

 

又不見雲門道 「如今禪和子 三箇五箇聚頭 口喃喃地便道 『這箇是上才語句 那箇是就身處打出語』 不知古人方便門中 爲初機後學未明心地 未見本性 不得已而立箇方便語句 如祖師西來 單傳心印 直指人心 見性成佛 那裏如此葛藤 須是斬斷語言 格外見諦 透脫得去 可謂如龍得水 似虎靠山」

 

또한 듣지 못했는가? 운문 스님이 말하기를,

“요즈음 선수행자들은 네댓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입을 떠벌리면서 ‘이것은 재능이 뛰어난 자가 한 말이며 저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고들 한다. 이는 고인이 방편문에서, 처음 배우는 후학들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므로 부득이 방편으로 언구를 사용하게 되었음을 모른 것이라 하겠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셔서, 심인(心印)을 전하여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셨는데[見性成佛], 어느 곳에 이와 같은 언어문자가 있었겠는가? 모름지기 언어를 끊어 버리고 격외(格外)에서 참다운 이치[諦]를 보아 투철하게 벗어나야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다”

*뱃심 ; 염치나 두려움 없이, 조금도 굽히지 않고 제 고집대로 버티어 내는 힘.

*서곡(黍穀 기장 서/곡식 곡) ; 수수, 옥수수, 조, 기장 따위의 잡곡.

*간데미(肝데미) ; 간더미. 간덩어리. '피덩어리'를 이르는 말.

*부스럼 ; 피부에 나는 종기(腫氣)를 통틀어 이르는 말.

*뽀이(boy) ;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남자.

*속인(俗人 속인·평범하다·대중적이다 속/사람 인) ; ①세속(世俗)의 사람[人]. ②불가(佛家)에서 스님이 아닌 일반 사람을 이르는 말.

*밉상짓 ; 밉상+짓. 보기 싫거나 미운 행동을 하는 일. 밉상(-相)은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리는 데가 있는 미운 모습’을 이르는 말.

*'그거 그 지경 되아 놓은게 못쓰겄드구마는, 사사(事事)에 어긋나서' ; 사사무애(事事無礙).

현상계의 일체의 사상(事象)이 서로 융합하여 방해하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함. 일체의 사물이 서로 상즉무애(相卽無碍)인 것을 말함.

단일한 하나의 현상이 다른 모든 모든 현상과 어김없이 하나가 되는 관계처럼, 모든 차별적 존재가 서로 걸림없이 다른 모든 존재를 포섭하고 포섭되며 자재하게 뒤섞여 있는 법계의 실상을 나타낸다.

*위의(威儀 위엄·권위·두려움·거동·공덕·존엄하다 위/거동·법도·법식·예절 의) ; ①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②예법에 맞는 몸가짐. ③(불교) 계율(戒律 불자가 지켜야 할 규범).

*본사(本寺) ; 본산(本山). ①처음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 절. ②그 종파에 딸린 여러 절을 총괄하는 한 종(宗)의 근본 도량(절).

*우세 ; 남에게서 놀림이나 비웃음을 받음. 또는 그 놀림이나 비웃음.

*회마(會麼) ; '알겠는가?'

*현안(懸案 달다·매달다·매달리다 현/안건 안) ; ①이전부터 의논하여 오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문제나 의안. '걸린 문제'로 순화. ②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는 일. 또는 안건.

*독신(篤信) ; 깊고 확실하게 믿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