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중현'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5.05.07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2. 2015.04.02 §(280) (게송)약인투득상두관~/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법문 / 용화선원의 가풍 / 선재동자의 진실함 / (게송)역력이빈주~ / 대의지하 필유대오.
  3. 2015.03.15 §(280) 용화선원의 가풍—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4. 2015.01.10 §(112) 법문을 옳게 듣는 길 /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 / ‘딴 생각[別念]’해서는 안됨 / 공부가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 해야 / 칠통(漆桶) 타파(打破).
  5. 2014.11.08 §(466)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말고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해야 /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6. 2014.07.29 §(337) 화두-본참화두(本參話頭) / 현중현(玄中玄) 도리-인가(印可)-선지식 / 대중처소, 선지식을 여의지 말고 같이 공부해야.
  7. 2014.07.11 §(282)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탁마(琢磨) / 삼구(三句), 삼현(三玄) / (게송)해고종견저~ /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보아야.
  8. 2014.01.22 §(287) (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 인가(印可)
  9. 2014.01.04 §(287)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 / 깨달을려면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러야. /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단전 호흡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1) 약 21분.  (2) 약 6분.


(1)------------------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야심경이 좋다니까 반야심경을 읽고, 천수경이 좋다니까 천수경을 냅다 틀어재끼고, 관세음보살이 좋다면 아들을 위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죽은 영감을 위해서는 지장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러다 참선이 좋다니까 앉아서 참선 흉내 좀 내고,
입춘이 되면은 또 무당집에 가서 5만원 10만원짜리 또 부작을 사고, 좋다는 데는 다 쫓아다니고, 그러다가 결국은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입니다.

이리저리 좋다는 것은 다 인연을 맺고 공덕을 지었으니까 악도(惡途)에는 떨어지지 않기를 나도 바래고, 원(願)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실 것을 나는 다같이 바래기는 하지마는 과연 그분이 극락세계에 꼭 갈 것인가? 나는 보증을 못합니다.

복을 짓고 착한 일을 한 만큼 내생에 천당에도 가고 또 사람이 되더라도 부자도 되고 인물도 잘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나도 믿습니다마는,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다른 사람에게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을 수 있도록 이것이야말로 샘이 없는 복[無漏福]이요,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라. 이 복이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남 보고 하라고만 하고 자기는 안한 사람이 있거든. 자기만 하고 남 보고는 별로 권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법이야말로 이것이 바로 대승법이요,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거와 같고, 수레에 두 수레바퀴가 있는 거와 같아서, 새가 날개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하나만 가지고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이 세등선원을 짓는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 짓는 것이요,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여러 신남신녀가 시주(施主)를 하고 화주(化主)를 하는 것도 이것 또한 자리이타를 하는 것이여.

부처님 출현하신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있어서야 원래 생사 없는 본각(本覺)자리에 계시는데 무엇이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가지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이다.

한 글자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을 설하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다.
한 글귀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역대 조사(祖師)가 많은 어록(語錄)을 남기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한 자비심에서 나오신 소식이다.

오늘 산승이 나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도 내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수행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시간도 바쁘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올라와서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언부언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부처님께서 다겁(多劫)을 두고 스스로 생사 속에서 윤회하신 그런 뼈아픈 경험이 계셨기 때문에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나오셨어.

저 자신도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 정진을 해봤기 때문에 선지식한테 들은 말씀, 나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바를 여러분에게 간곡히 말씀을 드림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정진을 잘할 수 있는, 발심하실 수 있는 채찍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하는 그러한 마음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진즉부터서 공부를 해서 이런 말을 듣지 아니하고라도 잘 정진을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처음으로 공부를 하러 오셔서 이러한 말씀이 꼭 필요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미 다 잘 알고 공부를 잘하고 계신 분은 증명을 하시면 되는 게고, 처음 와서 들으신 분은 뼈에 사무쳐서 명심해서 듣고 발심을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선배 후배 도반들의 그 돈독한 정의가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언제든지 좌선을 해서, 참선 시작할 때에는 준비 호흡으로 숨을 가득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쉬어 버리고 나서, 그렇게 2번을 하고서,

3번째는 가슴으로 들어마시지를 말고 가슴과 윗배는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불어나도록, 볼록해지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숨을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윗배와 가슴은 약간은 움직이겠지만 거의 가만히 있도록 유지를 하면서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진다.

들어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하니 아주 수월하게 들어마시는 거여.

너무 오랜 시간을 걸려서 들어마실라고 하지를 말고,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셨으면 너무 가득 들어마시지를 말고, 아까 준비 호흡을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인자 본(本) 호흡, 단전 호흡에 들어가서는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면 안된다 그말이여.

8부쯤만 들어마셔. 더 들어마실수 있지마는 8부쯤만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딱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그 홀쪽해지기 시작할 때 그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이것은 아주 초보자를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보자는 이러한 방법을 써서 하면 단전 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단전 호흡도 잘되고, ‘단전 호흡했다’하면 화두도 거기에 붙여서 함께 잘되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익숙해진 사람은 숨을 들어마시거나, 내쉬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그까짓것도 구애 없이 항시 화두의 의단(疑團)이 항시 목전(目前)에 상주해서, 눈앞에 항시 나타나서 일여(一如)하겠지만,
처음 한 사람은 ‘이뭣고?’해도, 금방 ‘이뭣고?’한 사이에 생각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어렸을 때로 날아갔다, 집으로 날아갔다, 야단이거든. 그러다 보면 화두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다시 또 챙길라면은 힘이 들거든. 그러다 억지로 ‘이뭣고?’ ‘이뭣고?’하다 보면은 모가지만 뻣뻣해 가지고 골만 빠개질라고 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안되고, 아! 이러니 할려고 마음은 내는데, 할려고 하면은 잘 안되니 그거 어떻게 하냐?

그래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여러 가지로 다 경험을 해 보고 연구를 한 결과 이 단전 호흡을 겸해서 하도록 이렇게 모다 지도를 해 오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지금 오늘 유독 결제날이기 때문에 단전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벌써 넘어서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고만 했으면’ 이러시겠지만 굶어서 돌아가시지를 않습니다. 조금 배가 고파야 말이 들어가지 잔뜩 먹고 쌕쌕거리게 되면은 졸음만 오지, 법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장한 다음에 잡숴야 밥이 맛이 있습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면서 내쉬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 어떻게 들어마시냐 하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이렇게 하지를 말고, 물론 코로는 들어가겠지만,
우리의 기분으로는 저 궁둥이 뒤에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이렇게 볼록해지도록 그런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머물렀다 내쉴 때는 코로 내쉰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쉴 때도 저리 뒤로 해서—궁둥이 뒤로 해서 저 뒤로 쑤욱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내쉬어 보시라 그말이여.
저 뒤에서 쑤욱 들어마셨다, 들어마신 호흡을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저 뒤로 쑤욱 배꼽을 뒤로 잡어당기면서 뒤로 내쉬는 거여.

그런데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하지를 말어. 너무 억지로 해 가지고는 그냥 한 두어 번만 하면 숨이 가쁘게 이렇게 하시다가 ‘아이고! 그거 되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예요.

아주 수월하게—들어마시는데 3초 걸리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한 4~5초 걸리게 조용하게 내쉬고,
이렇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거기다가—배꼽밑에 배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관심을 두고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보시라 그말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몸도 차츰 건강해지고 가벼워지고 골치 아픈 병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거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는 사람도 그게 낫고, 집안에서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가슴앓이 속병이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하면 그 병이 낫는다 그말이여.

이것을 하면서 화두까지 거기다 겸해서 하면은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이말이여. 화두는 아니하고 밤낮 고것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병을 고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 갖고는 그건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여.

거기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하고 가정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시고 낮에도 시간 있는 대로 그렇게 하시고,

이 공부는 꼭 앉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말하면서, 걸어가면서, 차 타면서, 행주좌와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 오늘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못 장소가 형편상 이 세등선원일 수도 있고, 또 보문사일 수도 있고, 군산일 수도 있고, 또 시내일 수도 있고, 조치원일 수도 있고, 청주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자리에서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 업장(業障)이 거기에서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 업장이 녹아지면은 소원성취는 거기에 있거든.(60분26초~80분55초)


(2)------------------

내가 그전에는 얼굴이 아주 시커먼 사람인데, 아! 30년을 참선을 하니까, 내 얼굴보고 검다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여.
성질이 아주 불같아 가지고 신경질을 잘내기로 아주 유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 참선을 했더니 나 보고 마음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여러분 가운데도 얼굴이 검어서 고민인 사람, 얼굴에 무엇이 많이 나서 고민인 사람, 또 신경질을 많이 내고 고집이 세다고 욕을 먹고 그러한 평판이 있는 분, 오장육부에 병이 많은—내가 또 병주머니여서 학교를 다닐 때는 1년에 한 달 내지 두 달은 꼭 결석을 했다.

그런데 출가해 가지고 참선을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그런는데, 내가 별로 약도 많이 먹지도 않고,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 죽기보다 더 싫어한 사람이어서 병원에 잘 안 가고 그러는데, 참선을 해서 이렇게 몸도 건강해 진 것 같어.

여러분들도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금방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하는 이러한 법을 명심을 해서 실천에 옮기신다면 얼굴도 예뻐질 것이고 오장육부의 병도 다 나아질 것이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평판이 있는 시어머니, 며느리, 스승, 상좌 할 것 없이 다 불보살과 같이—나는 워낙 고약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된 사람이 그만큼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금생에 불보살과 같이 될 것을 나는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늘 결제일을 기해서 여기에 모이신 출가한 스님네나 마을에 계신 신도 여러분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름 일어나듯이, 산에 구름 일어나듯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이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밝은 달은 원래로 말이 없느니라.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여러분에게 드리지를 못합니다. 이 주장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80분56초~86분14초)(끝)


------------------(1)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과 무루복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화주(化主) ; ①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주(主). 부처님를 말함. ②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물건·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 예로부터 석취미모(惜取眉毛, 눈썹을 아낄지어다)라고, 경(經)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설법을 하면 미모(眉毛•눈썹)가 빠진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런데 ‘한 물건(一物)’이라 표현하는 진리의 본체는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하였으니,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법을 한다'는 것은 선지식의 중생을 위한 간절한 자비심을 나타내는 뜻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8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2)

*병주머니 ; 갖가지 병이 많은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몽산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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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정진(精進)2015.04.02 16:18
§(280) (게송)약인투득상두관~/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법문 / 용화선원의 가풍 / 선재동자의 진실함 / (게송)역력이빈주~ / 대의지하 필유대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몽산 스님께서는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용화선원 가풍—「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송담스님(No.280)—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


(1)------------------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데는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고
나무~아미타불~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인간의 분별 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 같으면,

녹수와 청산에 어찌 구애(礙)를 받을 것인가.(何拘綠水與靑山)


중생은 자기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이 넓고 넓은 산하대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 육도법계(六道法界)가 온통 다 자기의 집이요 한 마당이건만,

자기 본 마당, 본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자기의 분별 경계에 떨어져 가지고 거기에 취사(取捨)와 집착(執着)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어. 어디를 가나 편안치를 못하고, 어디를 가나 걸리고 몸 둘 곳이 없어.


한바탕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확연히 깨달아버리면 천당과 지옥도 걸릴 것이 없고, 인간의 부귀와 영화와 시시비비(是是非非)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을축년 시월 십오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청풍납자(清風衲子)가 사방에서 모여서 한철을 한 지붕 밑에서, 한 도량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고 또 보살선원에도 경향 각지에서 백 명이 방부를 들이고 고락(苦樂)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을 해 가면 공기가 탁하고, 공장과 자동차에 모든 소음이 이렇게 심하고,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할지라도 ‘한 생각’ 철저해 버리면 그런 것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돈독(敦篤)하고 철저하지 못하면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사사건건 걸리게 되고 내가 거기에 끌려 나가고,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게 되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마음이 동요가 될 것입니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하늘에 달이 떴으되 달 자체가 ‘내가 달이다’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물며 ‘나는 밝다. 밝지 못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한 생각은 더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달 자체는 때에 따라서 둥글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캄캄하게 안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전혀 그런 상(相)이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내가 들어서 온갖 분별심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대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백 명 대중이 한 방에 모여서 석 달 동안을 지낼 때에 한 생각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철저히 단속하지 못한다면 그 백 명 대중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마음이 동요가 되고, 한 사람 동요됨으로 해서 그 방에 여러 사람이 속이 불편해 질 것이고 이리해서 바람 잘 날이 없어.


그래서 몽산(蒙山) 스님께서 결제 법문에 말씀을 하시기를,

‘만약 이 도량에 와 가지고 함께 이 고요함을 함께 하고자 할진댄, 참선정진을 하고자 할진대는,

세상에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집착과 거꾸러진 그런 생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선원에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인사(人事)로 왕래하는 거, 인사로 왕래하는 그 인사를 끊어버리고, 모든 수용은 인연 따라서 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반찬이 좋으면 좋은 대로, 짜면 짠 대로, 인연 따라서 수용을 하되,

아홉시부터서 세시까지, 삼경(三更) 동안을 제외하고는 수면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문밖에 거리에 나가지를 말 것이며, 밖에서 어떤 신도가 공양을 청(請)한다하더라도 나가지 말 것이며,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전에는 경(經)도 보지 말 것이며, 대중적인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경도 보지를 말아라.

이와 같이 여법(如法)하게 3년을 정진을 하되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면 산승이 여러 대중을 대신해서 지옥을 가겠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3년, 10년 내지 30년을 정진을 하되 확철대오를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법하게 정말 생사대사를 위해서 잠깐 동안도 한눈 팔 겨를이 없고, 잠깐 동안도 딴 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한 말씀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보증하신 그러한 표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느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철 두 철 하다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처음~17분4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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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향해 가면서 차례차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했습니다.


한 선지식 친견하고 거기서 법문을 듣고 그리고 또 거기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그 다음에 그 선지식이 또 그 다음 선지식을 소개를 하면 또 그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선지식 밑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승사(承嗣)를 해서 그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거기서 또 얻은 바가 있어.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53선지식을 친견해 나가는 데 그 53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 스님도 있고, 신(神)들도 있고, 외도도 있고, 창녀도 있고, 보살도 있고, 동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선지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위법망구적으로 친견하고 승사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53선지식한테 깨달은 법문을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슴에 간직을 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해서 미륵보살이 손 한번 탁! 튕기는 바람에 53선지식한테 들은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을 해라. 맨 처음에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해라”한 말씀을 듣고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리라’하고 마음을 먹자마자,

문수보살이 저 먼 일백십성이나 멀리 떨어진 그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터억 뻗쳐 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만져주셨습니다.


만지시면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착하고 착하구나! 네가 철저한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53선지식을 그렇게 아무 딴 퇴타심(退墮心)이 없이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그렇지 못했으면 조금 얻은 것으로 해서 만족을 삼아 가지고 중단을 했을 것이며, 조금 얻은 것으로서 거기에 집착을 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해탈과 선지식의 섭호(護)한 바가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선재동자는 확철대오를 해서 문수보살과 같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삼독(三毒)이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변했으며, 육식(六識)이 육신통(六神通)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입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역력(歷歷),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그말이여.

역력해서 빈주(賓主)를 여의었어. ‘주관 객관, 너다 내다’하는 그러한 마음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여. 적적요요(寂寂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모든 ‘색상(色相)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이다’ 그런 색공의 견해도 다 끊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하라. 우리 눈앞에 형단(形段)이 없으되—볼라야 볼 수도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이놈이 분명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알라야 알 수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산입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은 우뚝 백운(白雲) 가운데 섰느니라.(17분48초~27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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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인투득상두관~’ ; ①『석문의범(釋門儀範)』 다비문(茶毘文)—쇄골편(碎骨篇) 참고. ②卍新纂續藏經 제65책 《高峰龍泉院因師集賢語錄》 제13권 ‘涅槃法語門—散灰’ 참고.

*상두관(上頭關) ; 조사관(祖師關).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투득하다(透得-- 통할 투,얻을 득) ; (사람 무엇)막힘 없이 환하게 깨닫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청풍납자(清風衲子 맑을 청,바람 풍,옷을 꿰맴 납,자식 자) ; 수행을 하여 맑은 기운을 지닌 스님을 청풍(清風)-맑은 바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참고] 운수납자(雲水衲子) ; 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묻거나 수행을 하러 여러 곳으로 다니는 스님을 머무름이 없는 구름(雲)과 물(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돈독(敦篤)하다(도타울 돈,도타울 독)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신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발로(發露)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몽산(蒙山)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인사(人事)사람 사이 지켜야  예의 간주되는 또는 그러 예의 키기 위한 행동.

*삼경(三更) : 二경~四경 (밤 9시~새벽 3시)으로 불가(佛家)의 지정된 취침시간.

*공양(供養)을 청(請)하다 ; 재가신도가 스님들께 공양(식사)을 드리기 위하여 초청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경(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헌.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견성(見性) : '성품(性)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노선(線)개인이나 조직단체 따위 일정한 목표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따르는 활동 방침.

*가풍(家風) ; 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견처(見處) ; 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래선(如來禪)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의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는 선.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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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 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승우(勝友)라고도 함.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승사(承嗣 받들 승,이을 사) ; 후임자나 후대가 선임자나 선대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

*미륵보살(彌勒菩薩)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한다.

*신근(信根) ; 신(信, 진리에 대한 확신)의 뿌리. 신념(信念,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기초. 신근의 근(根)은, 나무뿌리와 같이 능히 유지시키는 것과 생기게 하는 것을 뜻함.

[참고] 신(信) : ①진리에 대한 확신。 ②신은 마음을 맑게 하고 해태를 막는 정신작용이다。 마치 수정주(水精珠)가 능히 탁한 물을 맑게 하듯이 마음에 신(信)이 있으면 마음으로 하여금 맑게 하는 것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 「만약 일체중생이 처음에 삼보의 바다에 들어오매 신(信)으로써 근본을 삼고 불가에 머무르거든 계(戒)로써 근본을 삼으라」하시고,

지도론(智度論)에 「불법대해(佛法大海)에는 신(信)으로 능입(能入)을 삼고 지(智)로 능도(能度)를 삼는다」하시며, 화엄경에 「신(信)은 도(道)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信爲道元 功德母)」하신 것이다.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섭호하다(護-- 도울 섭,보호할 호) ; (부처님이 중생을) 받아들여 보살피다.

*보현보살(普賢菩薩) ;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상징함.

산스크리트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 표기. 보현(普賢), 편길(遍吉)이라 한역.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

연화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보살들은 다 각각 부처님 공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어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삼취정계(三聚淨戒) ; 대승불교 보살(菩薩)이 지녀야 할 계법(戒法, 부처님이 정한 계율의 법)에 대한 총칭. 삼취청정계, 삼취계라고도 한다. 섭률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로 나뉜다.


①섭률의계는 5계·10계·250계 등 일정하게 제정된 여러 규율위의(規律威儀) 등을 지켜 일체의 허물과 악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지악문(止惡門)이라고도 한다.

②섭선법계는 적극적으로 일체의 선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수선문(修善門)이라고도 한다.

③섭중생계는 자비심으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는 일체의 이타행위를 말한다. 권선문(勸善門)이라고도 한다.


①섭률의계 ②섭선법계는 자리(自利)이며, ③섭중생계는 이타(利他)행위이다. 모든 계법은 그 어느 것이라도 이 3가지에 포함되는데, 청정하기 때문에 정계(淨戒)라고 한다. 취(聚)는 집적(集積)의 뜻.


원효대사는 삼취정계 가운데 ①섭률의계는 단()의 덕목(德目)이고, ②섭선법계는 지()의 덕목이며, ③섭중생계는 은()의 덕목이기 때문에, 이 삼덕의 과()를 얻으면 그것이 곧 정각(正覺)을 이루는 길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 삼취정계를 간직함에 따라 중생과 자기의 내심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본각(本覺)·불과(佛果)를 볼 수 있게 됨을 강조하였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게송) ‘역력이빈주~’ ; 『청허집(淸虛集)』 ‘贈道能禪子’ 참고.

*역력(歷歷) ; 훤히 알 수 있게 분명하고 또렷함.

*빈주(賓主 손님 빈,주인 주) ; ①손님과 주인. 객관(客觀)과 주관(主觀). 현상세계와 절대의 진여(眞如). ②수행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제자(賓)와 스승(主).

*형단(形段 모양 형,구분 단) ; ①형태. 형태로 나타나서 보이는 것. ②모양. 외양.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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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용화선원2015.03.15 14:06
§(280) 용화선원의 가풍—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송담스님(No.280)—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

 약 4분.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느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철 두 철 하다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14분14초~17분4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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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線)개인이나 조직단체 따위 일정한 목표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따르는 활동 방침.

*가풍(家風) ; 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견처(見處) ; 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래선(如來禪)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의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는 선.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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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법문 듣는 법2015.01.10 11:34

§(112) 법문을 옳게 듣는 길 /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 / ‘딴 생각[別念]’해서는 안됨 / 공부가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 해야 / 칠통(漆桶) 타파(打破).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祖師)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생각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


 약 18분.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우렁찬 음성으로 최상승 법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따지고 분별(分別)하고 그렇게 해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장님이 코끼리 구경한 것 같고 또 귀머거리가 음악을 감상한 것 같아서,
한 시간을 통해서 들어도 대관절 내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가? 무슨 법문을 들었는가? 주욱 종합을 해 보아도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그러한 느낌이 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이해를 못한다 하더라도, 그 법문을 들어서 귀에만 지내가더라도 그 인연으로 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그 법문을 당장은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법문을 정성스럽게 듣고, 듣는 가운데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자기의 본참화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화두를 생각 생각이 간절한 의심으로 관조해 나간다고 하면은,

오히려 그 법문 내용을 소상하게 잘 이해를 해서 ‘아하! 이런 말씀이로구나. 이런 말씀이로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서 들은 사람보다도,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그 뜻을 알 수 없는 그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들어가는 사람이 훨씬 더 법문을 잘 들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승 법문을 옳게 듣는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떠억 들어 보임으로서 법을 전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거렴화(擧拈花)’
또 다자탑전에서 자리를, 누더기를 입은 제자 가섭존자에게 자리를 노나서 앉히시는 ‘다자탑전(多子塔前)의 분반좌(分半座), 또 열반(涅槃)하셔서 곽 밖으로 두 다리를 써억 내미시는 ’곽시쌍부(槨示雙趺)‘
이렇게 해서 3차례에 걸쳐서 법(法)을 전(傳)하신 법문을 하셨습니다.

영산회상에 꽃을 드는 도리나, 다자탑에서 자리를 노나 앉으신 것이나, 또 열반회상에서 곽(槨) 밖에 두 다리를 내보이시는 도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 도리'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아! 이것은 이러한 뜻이로구나’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신 뜻은 이것은 바로 불교의 진여(眞如)의 체(體)를 전하시고 또 분반좌 하신 것은 용(用)을 전하시고, 곽시쌍부 하신 것은, 체와 용을 한목 전하신 것이다.’

이런 등속(等屬)으로 아무리 따져서 수긍(首肯)을 해봤자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결과 밖에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참다운 진리가 될 까닭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祖師)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서 깨닫기를 바란다든지, 이래가지고서는 공부를 기껏 잘해 나가다 중요한 고비에 있어서 자기의 공부를 그르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여러 가지 공안이 있지만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도 받은 한 공안에 일여(一如)하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잘되어갑니다. ‘이대로 해가면 얼마 안가면은 득력(得力)을 할 수 있겠거니’ 이리 생각하고,
한 철, 두 철을 지내다보면 영 옛날보다도 훨씬 더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번뇌 망상이 더 잘 퍼일어나고 영 자리가 잡히지를 않고 이렇게 해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도 번뇌심을 내지 말고 심호흡을 하면서 착실히, 착실히 공부를 다져나가면 그렇게 해서 한 고비를 넘기면은 다시 또 수월하게 공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수월하게 공부가 화두가 잘 일여하게 들리고 잘되어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입니다.
기뻐하는 생각 내면 벌써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니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러한 번뇌심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도 말고 또 잘 안된다고 해서 번뇌심(煩惱心)도 내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를 지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애를 써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공부를 다잽이를 해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금방 도망가고, 금방 딴 생각이 들어오고 그랬던 것이,
자꾸자꾸 해가면은 나중에는 헐려고 안 해도 화두가 떠억 들어지게 되면서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언제 지내간지 모르게 시간이 지내가고,

그때는 다리가 저린 것도 없고, 몸이 괴로운 것도 없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없고, 정신도 깨끗하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앉아있다고 하는 그것마저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뚱이마저도 의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싱그럽고 이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두는 그런 가운데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깨끗하고, 너무 편안해서, 까딱하면 화두를 그때 망각(忘却)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절대로 그러한 경지에서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가운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깨끗하게 독로(獨露)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잠깐이라도 화두를 놓쳐버리고 ‘아! 좋구나. 이러한 경지로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툭 깨닫게 해주셨으면, 이러다가 빨리 깨달았으면’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다가 내가 까딱하면 미치면 어찌할고’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고비에서 그 천길만길 되는 길를 간신히 간신히 올라가 가지고, 발 한번 삐끗해 가지고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정진을 하면은 옆에 사람들도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하! 저이가 지금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는구나’ 알게 되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렇게 공부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입승(立繩) 스님을 비롯해서 좌우에서 서로서로 잘 보호를 해줘야 합니다.

대중 가운데에는 혹 ‘지가 공부한 척 하고 그런다’고 아주 뒤에서 수근수근하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만은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공부가 또 순일하게 되어 갈 때가 있을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순일하게 되어 갈 때 주위에서 잘 보호를 해주고, 자기도 그럴 때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공부를 잘 보호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렇게 나가면 나중에는 일어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도 고대로 있고,
천만 명이 우글거리는 시장 속에 들어가도 조금도 화두가 흐트러지지를 아니하고, 딴 생각을 일부러 좀 할려고 해도 딴 생각이 되지를 않고 이러한 경지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지않아서 칠통(漆桶)을 타파(打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를 해야지,
그때에 조심성 없이 또 좌우에서 방해를 친다든지 보호를 안 해가지고 그러한 경지(境地)가 깨져버리면 나중에는 1년, 2년, 3년을 애를 써도 여간해서 다시 또 그러한 경지가 돌아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법(如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면 누구라도 반드시 그러한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처음~17분3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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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지내가다 ; '지나가다'의 사투리.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삼처전심(三處傳心) ; 세존이 가섭(迦葉)존자에게 마음-선(禪)의 등불을 따로 전했다는 세 곳.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영산회상거염화 靈山會上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사라쌍수하곽시쌍부 沙羅雙樹下槨示雙趺)이 세째이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
다자탑(pahuputraka)은 중인도 비사리(毘舍離Vaisali)성 서북쪽에 있다。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떤 장자(長者)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이룬 뒤에, 그 아들 딸 육십 명이 아버지가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그 곳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를 낮보았다。이에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를 나누어 두 분이 함께 앉으셨다 한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
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사라쌍수하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 :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
부처님께서 북부 인도의 구시라(拘尸羅 Kusinagara)성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그리하여 학의 숲(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몸은 금으로 만든 관에 모시고 다시 구리로 지은 덧곽에 모셔 두었는데, 먼 곳에 갔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7일 만에 당도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3번 돌고 3번 절하매, 관곽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 한다.
*노나다 ; ‘나누다’의 사투리.
*등속(等屬) ; 나열한 사물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몰아서 이르는 말.
*수긍(首肯) ; 옳다고 인정함. 옳게 여김.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득력(得力) ; ①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 ②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번뇌(煩惱)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나, 이곳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을 말함.
*밀밀면면(密密綿綿) :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길게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것。 정밀하게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는 모습.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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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보살선방 법문2014.11.08 15:12

§(466)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말고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해야 /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참 '처옥자쇄(妻獄子鎖)'라고,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 업으로 인해서 생사해탈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송담스님(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


(1) 약 20분.  (2) 약 22분.


(1)------------------

큰 추위는 없었던 걸로 생각이 됩니다. 겨울은 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좋다고 모다 그렇게 생각되어 왔는데,
여기는 해변가가 되어서 해마다 겨울에는 강한 추운 바람이 불고 그래서 새벽에 모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 젓숫고 하는데 노보살님들이 감기에도 많이 걸리시고 모다 그랬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겨울이 그렇게 춥지 않은 것이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어피차 편안하고 자유롭고 따뜻한 가정을 떠나서 이렇게 선원에 오셔서 정진하시게 되면,
아무리 고단하고 춥고 힘이 들어도 새벽에는 일어나야 하고 또 잠자리가 편틀 못하고, 눕고 싶을 때 눕지 못하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여러 가지 참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 와서 서로 다투어서 방부(房付)를 드리고 또 심지어는 인원이 차서 방부를 못 드리고 또 울고 돌아가신 분도 많이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을 무릅쓰고 그렇게 정진하라고 하신 여러 신도님네들 또 거사님 보살님, 참 갸륵하고 그 고마움을 원장으로서는 참 가슴깊이 느끼는 바입니다.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진을 해 나가는데 처음부터 흡족하게 그렇게 수월하게 정진이 되어가면 좋겠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는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자기가 지어놓은 업(業)이 있기 때문에,
그 업이 천차만별이어서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정진을 해도 육체적으로 오는 것, 정신적으로 오는 거, 그 나타나는 경계라고 할까 그런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보면 자기가 지은 업과 현재 정진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생각들 그런 차이로 해서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입승(立繩) 스님이 적어 온 걸로 보면 사람 따라서 나타나는 경계가 여러 가지로 있는데,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안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그런 경계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말씀을 했지만은 그런 경계는 집착(執着)을 하면은—환한 경계가 나타난다던지, 껌껌한 이불 속에서도 환히 머리카락이 다 보일 정도로 환하다든지, 머리가 시원하고 개운함을 느낀다든지,
미래 일이 나타난다든지, 꿈속에 뭘 느꼈다든지, 꿈속에 어떤 분이 나와서 뭐라고 일러줬다든지, 사람 몸을 보면 환히 오장육부가 다 보이고 어디가 병이 들었는지 그것도 다 알 수가 있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든지, 자기 몸이 풍선처럼 가벼움을 느꼈다든지,

어떠헌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에 집착하면 공부가 삐뚤어져 나가는 거고, 그런 것에 전혀 생각을 두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좋다 나쁘다’ 생각을 갖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둔 채 자꾸 바른 자세로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를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잡도리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 경계가 나타났으니 내가 이거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것에 대해서 밤낮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자랑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가 지금 공부가 상당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자랑을 하고 이런 것은 진실한 수행자에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보통 이러헌 철저한 신심과 법문을 들은 사람이 아니면,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스스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하도 신기하니까.

그러나 그런 법문(法門)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것에 하도 신기하고 이상하고 묘하고 그러니까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그런 법문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에 혼탁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런 것에 집착하면 벌써 사견(邪見)에 떨어진 것이고 공부가 삿된 대로 빠져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점쟁이 같은 거, 이상한 모다 신기(神氣)가 있는 그러헌 존재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탁! 놔 버려야 하거든.


그리고 정진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몸을 단정히 갖되 몸의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정히 앉되 손을 이렇게 수계(手契)를 하는데,
여기도 너무 엄지손에 힘을 준다든지, 또는 엄지손과 엄지손이 떨어진다든지 비뚤어진다든지,
엄지손을 이렇게 손장난을 한다든지 그래서는 안 되고, (양 엄지손을) 대되 전혀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

어떤 분은 힘을 꼭 줘야 화두가 잘된 것 같이 느껴진다는 그런 분도 있는데 그러더라도 (힘을) 꽉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요.
(힘을) 꽉 주면은 나중에는 몸 전체가 힘이 그리 주어지기 때문에 공부해 나가는데 지장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우선 힘을 주면 된 것 같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기만 하고.

또 눈에다가 힘을 주고—간절히 의심을 할라고 하면은 미간(眉間)에 ‘내 천(川)자’가 쓰여질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거기다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힘을 주지 말고, 단정하면서도 어깨에도 힘을 주지 말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또 미간에도 힘을 주지 말고, 힘을 어디다가 주었다 하면 정진해 나가는데 장애요소가 거기서 생길 수가 있다 그거거든.

그러면 단전(丹田)에다 힘을 준 것은 어떠냐?
단전은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약간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차츰차츰 홀쭉하게 하니까 거기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질 수가 있는데 그것도 너무 힘을 많이 주어서는 안돼.
기분 상으로만 가볍게 그렇게 하는 것이지 너무 힘을 주어서는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걸 말씀을 드리고.


그 화두를—이 화두를 하니까 잘 안 되어서 저 화두를 하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했다가 ‘무자(無字)’로 했다가 또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를 했다 이러는데,
안 된다고 해서 화두를 자꾸 바꿔 싸면, 새로 바꾸면은 된 것 같다가 나중에 얼마 지내면은 옛날 것이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것을 들어보면 또 잘되고,

그래서 화두는 아무리 안 되어도 한 화두를 가지고 자꾸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나중에 언젠가는 된 때가 오는 것이지,
안 된다고 해서 또 바꾸고, 또 해 봐서 안 된다고 또 바꾸고, 자꾸 바꿔 버릇하면은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 절대로 화두를 안 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그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고.

이미 바꿔 가지고 현재 잘 되어간다면 그분은 그냥 그것으로 해 나가십시오.
그 동안에 자꾸 바꾼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만 이미 바꾼 지가 오래되어 가지고 그대로 쭉 잘 되어가면 그분은 고대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면 정진하다가, 쭉 해 나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닥쳤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여.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그것을 조심을 하시고.


공부를 하다보면 확 트인 것처럼 시원하고 개운하고 그런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시적인 경계니까 ‘이것이 좋으네 나쁘네’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요.
좋다 나쁘다 생각하지 말고, 확 트인 것처럼 느끼거나 뭐 성성하거나 적적하거나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런 데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데에 좋냐 나쁘냐? 자꾸 그걸 가지고 실갱이를 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둬.

좋으면 좋은 대로, 시원하면 시원한 대로, 환하면 환한 대로, 껌껌하면 껌껌한 대로 그냥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아! 사람 건강도 소화가 잘 되다 안 되다, 뱃속이 거북하다 설사하다가 그렇지만, 그때 그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거냐 말이여.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고 놔두고 살아가는 거지.

그것이 무슨 큰 괴변(怪變)이나 일어난 것처럼 무슨 큰 일로 취급을 하지 말고, 하다보면 그런 것도 있으려니 하고 그냥 고대로 놔두고 여법하게 정진만 주욱 해나가면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가끔 말씀을 드렸지만은 어떠한 뭐 밥을 먹다가 한다든지, 차를 마시다가 한다든지, 목욕을 하다가 한다든지, 무슨 소리를 들은 찰나에 그냥 막힘이 확 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슨 시(詩)가 나오기도 하고, 다른 공안에 대해서 그냥 의심이 하나도 막히지를 않고 그런 것을 느끼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 해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그런데 정말 바로 깨달았는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냐, 안 얻었냐’하는 것은 자기 혼자로서는 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고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지 혼자로서는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없고.

또 아무한테나 물어보아 가지고 옳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그것도 참 정말 바른 지혜를 갖춘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아야지, 아무한테라도 가서 받아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데 공부하다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경계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인데, 구경의 경지에 이르러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견도 그러한 경계도 깨끗이 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거듭 말씀을 드린 것은 누구나 정진하다 보면 텅 빈 경계에 들어가기도 하고, 공안에 대해서 아무 의심도 다 없어져 버리고 너무너무 머리가 개운하고 그런 경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조사(祖師)와 같은 그런 경지가 아니라면,
스스로 ‘이것이 참 깨달음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그것을 버려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합니다.(처음~18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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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떤 분은 항상 자기에 영가(靈駕)가 붙어갖고 있는데,
절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영가는 거기서 떨어져서 절에서는 떨어져 버리고 또 절에서 일 다 보고 나가면은 딱 또 들어붙고 그런다는 분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영가가 그렇게 붙고 떨어지고 하는 거.

또 항상 영가가 눈에 보여. 남 49재 하는 데도 가서 보면 그 49재 하는 그 영가가 눈에 다 보인다 그말이여.
생전시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이 어떻게 생긴 것을 환히 다 알고, 그래가지고 재자(齋者) 보고 ‘지금 오늘 49재 지낸 분이 얼굴이 이렇게 생겼고 무슨 옷을 입고 그랬냐’하면, ‘그렇다’고.

그런 것이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것은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특수한 사람에게는 영가가 보일 수도 있고 또 영가가 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道)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여.

영가란 것은 내나 우리는 ‘몸뚱이가 있는 영가(靈駕)’고, 영가는 ‘몸이 없는 사람’이니까,
혹 지금 이 방에도 영가가 있을 수가 있고, 법당에도 법문할 때는 우주법계의 영가를 다 초청을 하니까 다 영가가 들어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 이 사바세계에 사는 우리 일반 사람에게는 그런 영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이죠. 보인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고.

그런데 영가는 사람이 죽어서 49재에 딴 데로 다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떠날 수도 있고, 100일에 떠날 수도 있고, 소상(小祥)에 떠날 수도 있고, 대상(大祥)을 지내고 떠날 수도 있고,
소상·대상 다 지내고도 떠나지 않고 자기집에서 그냥 또 그렇게 영가가 머물러 있는 수도 있고, 50년 내지 100년간도 안 떠나고 그 집에서 머물러 있는 수도 있다고 그럼니다마는.

이 영가는 내 눈으로는 아직 영가를 보지 못했고, ‘몸뚱이 있는 영가’는 많이 보지마는 ‘몸뚱이 없는 영가’는 내 눈에는 잘 안 보여요.

그래도 본인이 영가가 자기에게 보이고 자기 몸에 항상 붙어있고 꿈에도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모다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니,
그런 분은 내 생각에는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서 또 금생에 와서 지은 업에 따라서 특수한 그런 체질이라고 할까, 특수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가가 보이고 나타나고 또 몸에 항상 따라다니고 하면은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고,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그런 분은 항상 계행을 잘 지켜야 하고 심성을 착하게 곱게 써야 하고 또 백중이라든지 법보재라든지 모다 그런 때는 항상 그런 영가들을 위해서 천도(薦度)를 잘 해 줘야 하고 그렇죠.

대부분 그런 분에게 또 그런 영가가 많이 따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 법계에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런 참 외로운 영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도를 잘 해 주고 또 그분한테 가까이 가야만 천도를 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될 경우 그런 분한테 인연 있는 영가가 따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 밥을 잘 준다’고 소문이 나면은 팔도의 모다 걸인들이 그 집을 찾아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영가 천도를 잘 해 주고 자꾸 그런 분에게는 그런 영가들이 꿈에 와서 현몽을 대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천도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까 힘닿는 대로 잘 천도를 해 주신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밥 없는 사람 밥을 주고, 옷 없는 사람 옷을 주고, 직장이 없는 사람 직장을 알선을 해주고, 병든 사람을 병을 치료해 주고 그러면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와서 잘 봐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또 영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영가 천도를 그런 인연이 닿으면 또 해 주시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또 어떤 분은 염라대왕이 자기를 끌고 갈라고 하는 그런 것을 느낀다고 그러는데,
염라대왕이 일부러 와서 자기를 끌고 간가 어쩐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면, 끌려가기 싫어서 안 끌려간다면 그건 잘된 일이고, 그러나 언젠가는 가게 될 테니까 너무 그것을 미리서부터 걱정하실 것은 없고.

염라대왕이 끌고 갈라고 하거나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使者)가 와서 끌고 갈라고 하거나, 참선한 사람은 그럴 때 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딱 챙기시면 비명(非命)에 끌려가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꼭 가게 될 인연이 되면은 조금도 두려운 생각하지 말고 ‘이뭣고?’를 하면서 갈 때 되면 가는 것이지 뭐,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안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 가게 될 때는 가더라도 ‘이뭣고?’하는 마음으로 가면 그 상관이 없다 그말이여.


그리고 한 가지 가끔 내가 듣는 소린데,
본인은 아직 시집을 안 가고 나이가 30을 넘고 그래도 그냥 처녀로 부처님 불법을 믿고 이렇게 정진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본인이 꼭 안 갈라 한 것은 아닐런지도 모르고 또 좋은 인연이 있으면 갈라고 하는 생각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냥 이대로 보살로써 정진하다가 시절이 돌아오면 출가해서 스님이 될려고 하는 생각도 있는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드리고 정진을 하고 그러는데,
자꾸 좌우에서 “시집을 안가고 죽으면 몽달귀신이 되니까 시집을 가라”고 자꾸 권고를 하신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시집을 가라고 권고한 것은 절대로 나쁜 마음으로 그러신 것은 아니고, 그래도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것이 뭐 당연한 것이고, 시집가서 남편과 해로하고 자녀도 낳고 그래야 나중에 늙으면 외롭지 않고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그것도 때가 있으니까 좋은 인연있을 때 가라고 권고한 것은 좋은 마음에서 하신 것이지 절대로 뭐 해코자 해서 그러신 것은 아닐 테지마는.

억지로 팔자에 시집 갈 팔자를 타고났는데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갈라고 하는 생각은 있어도 적당한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사주팔자가 되었건, 전생에 지은 인연이 되었건 간에 그런 인연이 닿지 않아서 안 가게 되고,
또 불법에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불자로서 참선을 하고, 별로 그렇게 큰 고통이나 불편이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자꾸 몽달귀신으로 협박을 하면서 자꾸 가라고 그러실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노처녀로 있다가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서 도를 잘 닦는다면 그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여러분들 다 시집가서 결혼해 가지고 이렇게 50년, 60년, 70년 이렇게 살아보셔서 ‘정말 나는 결혼을 해서 참 행복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이 가운데는 계시겠지만,
겪어보시면 결혼 생활이라 하는 것이 아마 출가해서 도 닦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스님이 되라’고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본인이 결혼 안 하고 출가할 수 있는 사람을 몽달귀신 얘기를 해 갖고 공포심을 느껴서 가기 싫은 시집을 억지로 가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공부하러 오신 이 마당에는 공부에 관한 공부 생각만 해야지 다른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고 그러니까,

절대로 자꾸 시집가라, 시집가라—막 좀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 좀 할라고 하면—자꾸 시집가라고 그래 싸면 마음이 헷갈리거든. 내가 시집을 가야 옳은가? 안 가야 옳은가?
그 소리가 듣기 싫으니까 한철 나왔다가 안 나와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말이여.

혹 집안에 홀아비가 있어서 저 여자하고 짝을 맞춰줬으면 참 좋겠다 싶어서 자꾸 그러실 수도 있지 않은가 싶은데,
결혼은 참 '처옥자쇄'라고, 인자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래서 '처옥자쇄(妻獄子鎖)'라 그러는데.

참, 결혼생활은 여러분도 다 겪어보셨지만 어쩔 수 없이 다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긴 했지만 결혼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습니까.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제가 보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힘든,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공부해 나가는 데에는 대보살(大菩薩)이 아니고서는 많은 지장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해야 하고.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 하면서 참선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이 드시겠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 업으로 인해서 생사해탈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 보살님네들은 참 너무너무 갸륵하고 훌륭하고, 참 그렇다고 생각이 됩니다.


끝으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 보름 남았는데, 또 이틀 후에 정월 초하루가 돌아와서 또 차례(茶禮) 행사도 있고 어수선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놓치지 알고 정진하시도록 당부를 드리고, 남은 보름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잘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또 제가 말씀을 안 드린 그런 내용에 어떤 당신 나름대로 느낀 바도 있을 것이고, 물어보고자 한 그런 점을 속으로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낱낱이 여기서 다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어떠한 경계, 어떠한 느낌, 어떠한 소견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이 아닌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조사(祖師)의 경지가 아니면 그냥 스스로 탁! 치워버리면 그만이여.
없었던 걸로 탁! 놔 버리고 깨끗한 초학자의 마음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조금 어디 아프다고 해서 낱낱이 병원에 쫓아다니면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낫어야 하거든.

마을에서는 병원에 자주 간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데,
그 병원이라 한 것은 물론 호미로 막아야 할 때 병원에 안 갔다가 가래로 막게 되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스스로 집착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딱 놔 버리고 화두만 들면 낱낱이 병원에 안 가도 돼어.
그것이 기다(그렇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 거기서부터 병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 요점만을 내가 말씀을 드리면 요점만을 잊지 않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어떠한 병도 스스로 고칠 수가 있는 것이여.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가 집착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여.

심지어는 확철대오 해 가지고도 ‘나는 깨달았다’하는 생각을 가져도 벌써 그것이 잘못인데, 깨닫지도 못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 그걸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뭐 사람 몸뚱이가 환히 보이거나, 내일이나 모레가 어떻게 되고, 사람을 척 보면 전생에 무엇이다 하는 것도 안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그런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어, 병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속으로 딱 간직하고, 그걸 자꾸 써먹고, 남에게 자랑하고, 자기가 무슨 도통이나 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런데에서 병이 되고 결국은 사도(邪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안 떨어지려면 집착하지 않고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뭣고?’만 해 가면 그건 괜찮다 그말이죠.
되었습니다.(18분29초~40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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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부(房付)를 드리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구경(究竟 궁구할 구, 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잡도리 ;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수계(手契) ; 수인(手印)·인(印)·인계(印契)·밀인(密印)·인상(印相)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 mudrā
불보살(佛菩薩)의 내증(內證 깨달은 진리)·본서(本誓 근본서원) 등의 덕(德)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 모양.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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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소상(小祥 작을 소,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 큰 대, 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사자(使者 사신 사,놈 자) : 죽은 사람의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다는 저승의 귀신.
*처옥자쇄(妻獄子鎖 아내 처,감옥 옥,자식 자,자물쇠 쇄) ;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라는 말로 결혼생활의 구속을 비유한 말.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
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
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구경각(究竟覺) ; 깨달음의 극치. 무명(無眀)이 사라지고 깨달음의 본체가 나타나는 경지.
마음의 본원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결코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구경각(究竟覺)은 여래지(如來地) 또는 불지(佛地)를 가리킨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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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화두(공안)2014.07.29 15:52

§(337) 화두 - 본참화두(本參話頭) / 현중현(玄中玄) 도리 - 인가(印可) - 선지식 / 대중처소, 선지식을 여의지 말고 같이 공부해야.

화두의 개념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어떠헌 과제’인 것입니다. 문제.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좋은 도반이 있는 대중처소(大衆處所)를 여의지 말 것이며, 바르게 지도해 주는 선지식을 여의지 아니해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약20분.


이 화두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허는데,
'말씀 화(話)자, 머리 두(頭)자' '말머리'다 그러는데,  사실은 '말머리'가 아니라 '말'이라,
'머리 두(頭)자'는 어조사(語助辭)로 붙은 것이고 말씀 화(話)자-화(話), 말이라 그말인데,

무엇을 두고 허는 말이냐 허면은,
「이 무엇고?」, 시심마(是甚麽) 또는 조주무자(趙州無字)라든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이러헌 것을 갖다가 화두라 그러는데,

첫째 그 화두의 개념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어떠헌 과제’인 것입니다. 문제.
그 문제는—분명히 그 문제를 깨달라야 되는데, 세속의 어떠헌 문제는 그것이 국어 문제가 되었건, 역사 문제가 되었건 또는 수학 문제가 되었건,
그런 문제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 해 가지고, 지식과 상식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실력을 총동원 해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해 가지고 결국은 탁! 그 답을 알아내는 것인데,

참선허는데 있어서 이 화두는 그동안에 자기가 경을 읽고 사회의 어떤 책을 읽고, 그래 가지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동원해 가지고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어요.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가령 판치생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허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늘도 그렇게 허고 내일도 그렇게 허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공부를 참구(參究)를 해 나가는 거고,

또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허신 분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그렇게 허다가,
좀더 가깝게 간절히 다그쳐 해 나갈려면 「'이뭣고'허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허고,
거기서 더 「이 '이뭣고?'헐 때 '이'허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참구를 해 가는데,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 알 수 없는 그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이뭣고?」라든지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또는 무자(無字)라든지 이런 것을 통틀어서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또 다른 이름으로는 공안(公案)이라 허기도 하는 것이다.

‘화두가 무엇이냐?’하면은, 「이뭣고?」화두를 탄 사람은 ‘「이뭣고?」입니다’ 또는 한문으로 말헐 때에는 ‘시심마(是甚麽)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허는 거고,
또 ‘판치생모’화두를 탄 분은 ‘화두가 무엇이냐?’ 그러면 ‘판치생모(板齒生毛)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허고,
또 ‘정전백수자’나 또는 ‘마삼근’화두를 타신 분은 ‘화두가 무엇이냐?’허면 ‘마삼근(麻三斤)입니다.’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화두를 허든지-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헌 것은 없고,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어떤 한 화두를 탔으면 공부가 잘되거나 안 되거나 그것도 따질 것이 없고, 오직 그 한번 탄 그 화두 하나만을 꾸준히 참구를 해 가는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를 탔는데 허다가 보면 「이뭣고?」가 잘 안되고,
조실스님 녹음 법문을 듣다가 「판치생모」화두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렇게 해 보니까 저절로 의심이 잘 난 것같이 느껴진다 그말이여.

『에이! 「이뭣고?」는 안 되니까 그것 그만 두어버리고 판치생모를 해야겠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하루를 해 봐도 잘되고 이틀을 해 봐도 잘되고, ‘이제 이것으로 결정을 해야것다.’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한 달·두 달·석 달 해보니까, 아! 다시 또 판치생모가 잘 안되고,
‘이뭣고?’ 또 「이뭣고?」를 허니까 또 공부가 잘된 것같이 느껴진다. 『에이, 그놈의 거 「이뭣고?」를 인자 해야 것다.』 ‘이뭣고?’

「이뭣고?」를 헐라고 마음을 먹으면 판치생모가 생각이 나고, 판치생모를 가지고 해보면 「이뭣고?」가 생각이 나고, 아침에는 「이뭣고?」로 좀 해 보고, 저녁에는 판치생모 좀 해 보고,
이것 입맛이 없으면 비빔밥도 먹다가 또 물에 말아 먹다가 또 그것이 맛이 없으면 수제비도 떠먹다가 라면도 끓여 먹다가, 음식은 그럴 수가 있지만,

화두는 잘된다고 이놈으로 해 보고, 화두를 한 두서너 개를 가지고 입맛대로 요놈 갖고도 해보고 저놈 갖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이 참선을 해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속담에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한 1미터나 2미터 파 봐도 물이 안 나오면 ‘에이! 그거’ 때려 묻어 버리고 저만큼 가서 또 파고, 또 몇 자 파 봐도 안 나오면 동쪽에 가서 파 보고, 또 한 길 파 봐도 안 나오면 서쪽에 가서 파고,
그 사람은 혹 물이 한 길이나 두 길 파서 물이 나와 봤자 그 물은 건수(乾水)입니다.
장마철에 꿀꿀꿀 나오니까 ‘에이! 인자 되었다’허고, 장마만 지면 흙탕물이 나오고 가뭄이 되면 물이 안 나온다 그말이여. 그까짓 놈의 물을 어디다 쓸 것이야 그말이여.

한 길 파서 안 나오면 두 길을 파고, 두 길을 파서 안 나오면 석 길·넉 길·다섯 길·여섯 길, 한 열 길 파고 들어가면은 암반이 나와서 ‘아이고 인자 틀렸다’ 그렇게 마음을 먹을 것이 아니라, 바위가 나오면 기계를 동원을 해 가지고 그 바위도 구녁을 뚫어라 그거거든.
바위를 한 길이고 두 길이고 파고 들어가면 물이 막 펑펑 쏟아지는데 그 물은 진짜 지하수거든. 가물어도 줄지도 않고 장마가 들어도 불어나지도 않는 그러헌 물이라야 믿고 먹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이 참선도 조금 해 봐가지고 잘되고 ‘아아! 이것이로구나’ 그러고는,
‘「이뭣고?」란 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말허는 놈이고, 성내는 놈이고, 골내는 놈이 이놈이 바로 「이뭣고?」고, 이놈이 바로 불성이고, 이놈이 바로 부처님이지 이놈 말고 무슨 부처가 있어?’
‘에이 이까짓 놈의 거, 깨닫기는 무엇을 따로 깨달을 것이 있어? 본래 깨달을 것도 없고 미(迷)할 것도 없고, 깨달을 부처도 없고 무슨 제도헐 중생도 없다고 그런 법문을 들었는데,
바로 이놈이다. 누가 나보고 욕허면 성내고, 칭찬허면 웃고, 이놈 내놓고 부처가 어디가 있어? 나도 한 소식 분명히 했다. 그러니 무슨 배가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고, 무슨 놈의 용맹정진을 따로 허며 참선을 다해. 말키 그거 중생을 속이는 놈의 소리고 미친 놈의 소리다. 내가 여태까지 속은 것이 분하다.’

그래 가지고 막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맘대로 그래. 참 기가 맥히지.
그래 가지고 그냥 닥치는 대로 그저 욕도 허고 싶으면 허고, 그저 파계(破戒)도 허고 싶으면 허고, 그저 먹고 싶은 대로 허고, 그저 먹고 싶으면 돼야지도 잡아먹고 닭도 잡아먹고 구렁이도 잡아먹고 닥치는 대로 허고,
행동도 그저 닥치는 대로 동서남북에 앵기는 대로 그저 남의 수박도 따다 먹고, 그저 지나가다 호박도 있으면 그냥 따다가 그냥 시장갈 것도 없이 그냥 장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오고, 가다가 그저 신도 떨어지면 남의 신도 신어 버리고 닥치는 대로 그렇게 지내니,
그 사람이 인물도 좋고, 구변(口辯)도 좋아서 말도 잘 허고, 학식도 있어서 모르는 것이 없고, 행동을 허면은 그냥 무애도인(無碍道人)이여. 맥힘이 없어. 아따! 그 사람, 진짜 도인은 그분이 도인이다.

누가 무슨 공안을 묻더라도 그냥 고함을 질러 버리고, 가지고 있는 몽둥이로 대갈통을 때려 버리고, 진짜 허는 행동이 맥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 어디를 가나 그분은 맥힘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까 욕심이 없어.
돈도 그저 주면 쓰고 그냥 백만 원을 주면 백만 원을 그냥 휘딱 먹어 써 버리고, 택시도 타고 가다가 운전사가 만 원만 달라고 허면 ‘옜다! 여기 있다’ 이만 원 더 줘 버리고.

잘못 보면은 ‘무애 도인이고 맥힘이 없고 이 세상에 도인은 그분이 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러헌 법을 가르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안(公案)이 필요헌 것입니다.

이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자기 혼자 선지식 없이 공부를 해서 깨달랐다고 허는 사람이 모두가 다 이 체중현 도리를 가지고 허는 것이고,
자기가 본 도리가 체중현 도리 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체중현 도리 밖에 못 본 사람헌테 어떤 학자가 와서 깨달랐다고 인가를 해 달라고 허면, 체중현 도리만 본 사람은 다 인가를 허게 됩니다.
체중현 도리 밖에 못 본 것을 깨달랐다고 인가를 받게 되면, 자기도 평생 동안 체중현 도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고 또 다른 후배들이 와서 물을 때에도 체중현 도리를 본 사람은 다 옳게 알았다고 인가를 허게 됩니다.

그래서 인가 받기는 참 쉽고 인가 허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일생사가 무엇이 되며, 그 사람과 인연이 있는 학자들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이냐?
불법(佛法)은 바로 여기에서 파멸(破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불’이라 허는 것은 인류 역사가 저 원시 시대(原始時代)로부터 석기 시대(石器時代)로 이렇게 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헌 발견이 ‘불’인데, 옛날에는 그 불씨를 굉장히 소중히 여겼어.

부싯돌을 쳐 가지고 불을 맨들기도 허고, 그런데 그 불씨를 없애지 아니 헐러고 참 깊이 잘 간직을 허고,
옛날에는 불씨를 남에게 주지 조차도 잘 안 헙니다. 그러면 복이 달아난다 해 가지고 안 주고, 그 불씨가 몇 대(代)를 물려가고 그러는데, 그 불이라는 것이 그렇게 소중헌데,

그 불을 잘못 가까이 허면은 화상을 입고 타 죽기도 허고 생명을 잃기도 허고 재산을 다 잃어버리기도 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을 멀리해서 잃어버리면 또 얼어죽습니다.
겨울에 연탄을 때건 또는 기름을 때건 또는 전기를 이용허건, 무엇을 이용허건 간에 그것은 열(熱)이여.
열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인데, 그 불을 잘못허면 그 불로 인해서 생명을 잃고 재산을 손실허는 거고, 그 불을 잘 이용을 허면은 그 불로 인해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불을 어떻게 잘 멀리허지도 아니허고 가까이허지도 아니허냐? 이것은 우리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인 것입니다.

범부(凡夫)가 진공(眞空)의 이치, 그 이치를 잘못 보고 그놈에 집착을 허면,
그 공에 떨어지지 아니허고 거기서 바로 나아가 가지고 묘유(妙有)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꽁꽁 얼어붙은 얼음에 얼어 가지고 죽는 것이 되는 거고,

바로 이 공의 이치에서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허고, 거기서 나아가 가지고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 그것은 선지식이 아니면 그것은 가릴 수가 없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눈을 가진 선지식의 지시 없이는,
혼자 토굴에 가 가지고 밤잠을 안 자고 일종(一種)을 허면서 또는 생식을 허면서 솔잎이나 약 뿌리를 먹으면서 용맹정진을 헌다 허드라도 기껏 잘 봐봤자 공의 이치를 보는 것이고,
잘못 보면 귀신같은 것이 붙어 가지고 헛소리를 허게 되고, 미친 소리를 허기 십상팔구인 것입니다. 몸뚱이가 병들지 아니허면 정신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도반이 있는 대중처소(大衆處所)를 여의지 말 것이며, 바르게 지도해 주는 선지식을 여의지 아니해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좋은 도반, 대중과 같이 공부허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렇게 말씀을 허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16분45초~36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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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조사(語助辭) ; 한문에서, 실질적인 뜻은 없으면서 다른 글자의 보조로만 쓰이는 토. ‘焉’, ‘也’, ‘於’, ‘乎’ 따위가 있다.
*시심마(是甚麽), 조주무자(趙州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마삼근(麻三斤), 판치생모(板齒生毛)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現劫) 천 불의 제5불(佛).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말키 ; '말끔(조금도 남김없이 모두)'의 사투리.
*파계(破戒) ; 계(戒)를 받은 사람이 그 계율을 어김.
*무애(無碍) ; 막히거나 거칠 것이 없음.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三玄] 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이사(理事) ; ①깨달음의 진리와 차별 현상. ②본체와 차별 현상.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관문(關門) ; ①다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꼭 거쳐야 할 단계. 또는 중요한 고비. ②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지점. ③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세워 지나가는 사람이나 물품을 조사하는 곳. ④국경이나 요새의 성문.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대중처소(大衆處所) ; 많은 승려가 모여 수행하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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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282)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탁마(琢磨) / 삼구(三句), 삼현(三玄) / (게송)해고종견저~ /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보아야.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송담스님(No.282) - 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1) 약 19분.  (2) 약 9분.


(1)------------------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허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한 대도(大道)가 혁혁(赫赫)해서 밝고 밝아서 분명해. 사람 사람이 본래부터 낱낱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 이루었더라.

부처님이나 조사(祖師)나 우리 범부나 축생에 이르기까지도 본래 그 대도는 갖추어 있어서 닦아 가지고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낱낱이 다 원만하게 다 원성(圓成)해 있더라. 본래 갖추어져 원만하게 이루어져 가지고 그것을 갖추어 있다.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영겁현출만반형(永劫出萬般形)이여. 영겁을 두고 만 가지 형상을 나타내더라.


본래는 더 닦을 것도 없고 증(證)할 것도 없고 남고 모지램이 없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다.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어긋짐으로 해서 이렇게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면서,
때로는 지옥에 갔다, 때로는 축생이 되었다, 축생도 개·돼지와 소·말·뱀과 구렁이 온갖 종류의 축생이 다 있고, 사람으로 출현하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형형색색으로 태어나고, 또 선행을 닦으면 천상에서 태어나 가지고 온갖 낙(樂)을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영겁을 두고 쉴 사이 없이 윤회를 허게 되는데 그 원인은 한 생각 어긋난 그 때문이다.

금년 새해를 맞이해서 이렇게 사부대중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이 소한절을 맞이해서 수십 년 내로 처음 오는 그런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설한(雪寒) 속에 이렇게 참석을 하셨습니다.

모두 정법을 믿는 신심(信心)과 또 새해를 어떻게 분심(憤心)·발심(發心)해서 도를 닦아갈 것인가? 희망과 용맹으로 가득찬 그리고 빛나는 눈매와 얼굴의 모습을 뵙게 되니 매우 감개(感慨)가 무량합니다.

이렇게 많이 모이신 가운데에 저 봉암사에서 정진을 하다가 지견(知見)이 나서 찾아온 젊은 도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단히 그 얻은 바가, 설사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 희유한 그런 지견이 나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온 데 대해서는 매우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다가 지견(知見)이 나면 그 도량(道場)에 선지식(善知識)이 계시거나 선배가 있으면은 거기에 자기의 깨달은 바를 개로(開露)해서 점검을 받고,
그 도량에 또 그럴만한 분이 없으면은 불원천리하고 선배와 선지식을 찾아서 자기의 그 깨달은 바를 갖다가 기탄없이 개로를 해서 탁마(琢磨)를 헌다고 허는 것은,

우리 종문(宗門) 중에 있어서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행해 내려오는 우리의 가풍(家風)이라 헐 수가 있고, 아무리 말세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납자(衲子) 세계에 있어서 대단히 영원히 전해가야 할 그러한 좋은 한 풍속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혼자, 얻은 바가 있어 가지고 자기 혼자만 그것을 꼭 지켜가면서 그것을 자기 살림살이로 알고,
‘누구한테 지금 물어 볼 것은 뭐 있으며, 이 이상 더 누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은 소용이 없고, 이것은 절대적이고 이건 틀림이 없다’해 가지고 혼자 그놈을 지켜나가면서 살림을 해 간다고 허는 것은,

이것은 조사 말씀에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다.’ 또 깨달은 뒤에 지견이 난 뒤에 사람을 만나질 못하면은 큰 해가 된다.’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호(醍醐)라고 하는 것은 우유로 만드는 아주 좋은 우유를 가지고 만들은 최고에 맛있고 아주 신령스러운 효험이 있는 약인데, 그러한 좋은 제호가 그것을 잘못 관리함으로 해서 그것이 변질이 되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독약으로도 변할 수가 있다.

무량겁을 생사윤회하다가 금생에 불법을 만나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다가 소견이 낫다고 하면, 마치 그 많은 우유 가운데에 최고품을 가지고 잘 특수한 방법으로 제호라고 하는 약을 만들은 데다가 비교를 헐 수가 있는데, 그 제호라는 좋은 약도 잘못 관리해 가지고 독약으로 변한 것처럼,

그 무량겁으로 도를 닦아서 모처럼 어떤 경계가 나타났다 이것인데, 그것을 바른 선지식에게 탁마를 해서 그것을 갖다가 점검을 바로 받아 가지고, 그것이 미급(未及)하거나 잘못된 것이면 여지없이 탁마를 통해서 때려치워 버리고서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고 정진을 해 나간다고 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그 소견(所見)이 난 학자의 지견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어떻게 가리느냐?
옛날 눈 밝은 조사스님네는 벌써 거동을 보고 그 눈빛을 보면은 벌써 확연히 다 가려내셨던 것입니다.

벌써 입 벌리기 전에 딱! 점검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거기다가 공안(公案)을 물어 가지고 그 공안을 어떻게 답 하는가? 그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답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견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제1구(第一句)는 상신실명(喪身失命)이고, 제2구(第二句)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라. 제3구(第三句)는 분기소추(糞箕掃箒)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이 삼구(三句)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학자(學者)가 - 참선(參禪)하는 납자(衲子)가 공부를 해 가지고 최초의 지견(知見)이 나면 대부분 체중현(體中玄),
일체 삼라만상이 모든 것이 다 큰 것과 작은 거, 흰 것과 검은 거, 선과 악, 또 밝은 것과 어두운 거, 부처와 중생, 모든 것이 이 상대로 다 이루어졌는데, 이 상대(相對)와 차별(差別)이 다 끊어져버리는 그러한 경계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에 눈을 떠, 지견이 나가지고 이러한 경계에 계합이 되면 이 세상을 갖다가 콧구녁으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콧구멍으로 들랑거리고, 이 삼천대천세계가 눈으로 다 덮어 버릴 수가 있고, 부처와 중생이며, 선과 악이며, 육도법계(六途法界)도 온통 한 할(喝)로써 다 부셔 버릴 수도 있고, 또 다 이룰 수도 있고, 도무지 그 경계가 쇄락(灑落)하기를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고종견저(海枯見底)하고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시방무허공(十方無虛空)하고  대지무촌토(大地無寸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바다가 말르면 마침내는 그 바다 밑바닥을 갖다가 볼 수가 있어.(海枯見底)

바다가 다 말라서 밑바닥이 환히 볼 수가 있을 때까지는 몇천만 년이 지나가야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바다가 말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가 말르면은 마침내는 그 밑바닥을 볼 수가 있으나,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어.(人死不知心) 아무리 많이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더라.

볼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고, 손으로 잡을랴고 해도 잡을 수가 없어.
그런데 안 볼라야 안 볼 수가 없거든.

볼랴고 허고 들을랴고 허고 잡을랴고 하면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데, 안 볼라야 안 볼 수가 없고, 안 들을라야 안 들을 수가 없고, 안 잡을라야 안 잡을 수가 없어.
그것이 이 두 말이 완전히 서로 위패되는 말인데, 이 두 가지 반대되는 말이 동시에 딱! 계합(契合)이 되거든.

시방(十方)에 무허공(無虛空)이여. 이 시방이 꽉 차 있는 것이 허공인데 허공이 없어.
대지(大地)는 온통 땅인데, 흙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대지에 한 치만한 땅도 없다 그말이여.
이 체중현(體中玄)에 눈을 뜬 경계가 바로 이렇다 그말이여.(처음~19분17초)



(2)------------------


공안을 물으면 마조원상(馬祖圓相),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상을 그려놓고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러니까, 일어서서 방석을 들고서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그러고는 방석을 놓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이르지를 못했느니라.』

『그러면 입으로 이르겠습니다.』 『그러면 일러봐라.』
『알라야 알 수가 없고, 모를라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 공안에 대해서 그러한 답을 할 수가 없느냐 허면,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소견이 나서 불원천리(不遠千里)허고 온 것까지는 대단히 좋고 반가우나, 그 학인이 그러한 소견에 주저앉아서 '알았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공부에 진취가 없을 것입니다.

조실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활구참선하는 학자의 지조를 가지고 그러한 소견을 스스로 다 쓸어버리고 정말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느냐?’
도저히 이빨이 들어 갈 수가 없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질 수가 없는 그러한 공안을 가지고 목숨을 바쳐서 새로 공부를 지어 나간다면 이 학자는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해를 맞이해서 그러한 좋은 참 반갑고도 기쁜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우리들도 공부하다가 그러한 소견이 나더라도, 나면 반드시 자기가 믿는 또 믿을 수 있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바로 점검을 받아 가지고 나아가되,

그러한 이 불조(佛祖)와 같은 그러한 견지가 아니면 여지없이 버려버리고, 재발심(再發心)을 해 가지고 그 전에 보다 더 몇십 배 더 분심과 신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처음~27분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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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지견(知見) ; 올바르고 명료하게 아는 능력.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능력.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도량(道場) : [범] bodhimandala 도를 닦는 곳이란 말이다. 절.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탁마(琢磨)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노력하는 것.
*종문(宗門) ; 각기 주장하는 교리(敎理)를 따라 세운 불교의 갈래.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미급(未及) ; 아직 미치지 못함.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삼구(三句)[참고] [三句] 삼구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207.


[참고]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三玄] 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할(喝) : 보통  속음(俗音)의 '갈'로는 발음하지 않는다。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이다。큰 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보임이니, 이것을 처음 쓰기는 마조(馬祖)가 한 번 할했는데 백장(百丈)이 사흘이나 귀먹고 눈이 캄캄하였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그 뒤로부터 흔히 쓰는데, 임제(臨濟)가 가장 많이 썼다.
*쇄락(灑落) ;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함.
*(게송) ‘해고종견저(海枯見底)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 ; [선문염송•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김월운 역 | 동국역경원) ‘제11권 417칙 불성(佛性)’ p236 진정문(眞淨文) 게송 참고.

*(게송) ‘시방무허공(十方無虛空)  대지무촌토(大地無寸土)’ ; [禪宗頌古聯珠通集] 남당흥(南堂興) 게송 참고.
*계합(契合) ;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2)


*마조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참고.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방장(方丈) ; ①선원(禪院)의 운영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 스님, 또는 그가 거처하는 방.
②선원(禪院)·강원(講院)·율원(律院)을 모두 갖추고 있는 총림(叢林)의 가장 높은 스님.
*확연(確然)히 ; 아주 확실하게.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시금석(試金石) ; ①층샛돌(귀금속의 순도를 판정하는 데 쓰는 검은색의 현무암이나 규질의 암석).
②가치, 능력, 역량 따위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기회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견처(見處) ; 보는 입장. 견해. 보는 바. 파악하고 있는 바.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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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 인가(印可)

**송담스님(No.287) - 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86.02.02)(63분)에서.

 약 9분.


대지촬래여립미(大地撮來如粒米)하여 당양타고대가간(當陽打鼓大家看)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안중약미제금설(眼中若未除金屑)인댄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參究)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찰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 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를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해 가다보면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갖다가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고 무엇이고 간에 그것을 소반 위에 있는 쌀이나 곡식을 갖다가 거머쥐듯이, 온 삼천대천세계도 한 손으로 쏵 휘어잡아서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참 기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온 태양과 별, 달까지라도 한 손에 거머쥐어다가,(大地撮來如粒米)
밝은 데다 갖다 놓고서, 그걸 갖다가 손바닥에다 놓고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걸림 없는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當陽打鼓大家看)

그러면 제도 받을 중생이 어디가 있으며, 제도를 할 부처가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천당과 지옥이 무엇이며, 중생과 부처가 무슨 차별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러나 안중(眼中)에 약미제금설(若未除金屑)이면, 눈 가운데 만약 금싸라기를 빼내지 못하면,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다. 어떤 것이 누르고 어떤 것이 검은 것을 가려내기는 크게 어려운 것이다.

겨우 공견(空見),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가 일념(一念) 속에 있고, 육도법계(六途法界)가 바로 이 일념 속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걸릴 것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막힐 것이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현중현(玄中玄), 공안(公案)에 있어서 현중현 도리(道理)를 바로 보지 못하면, 마치 눈 가운데에 금싸라기를 빼내지 못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겨우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소견(所見)을 가지고, 그래 봤자 그것은 체중현(體中玄)의 경계(境界)라, 체중현의 경계는 공(空)의 이치거든.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인데,

진공의 이치도 이렇게 옅은 분별심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확철대오해서 그렇게 크게 봐 버리면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활구(活句) 문중에, 이 조사(祖師) 문중에 있어서는 체중현 도리 보는 그러한 것을 깨달랐다고 인증(認證)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체중현 도리를 보는 것으로서 인가를 해 주면 그 각견(覺見)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이치(理致)로는 짐작을 하지만은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는 부처가 와도 한 방맹이, 조사가 와도 한 방맹이, 그래서 거침이 없을 것 같은 그러한 횡행자재(橫行自在)한 생각을 갖지만, 이치로 그럴지언정 사(事)에 막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인가를 해 주면 그 사람의 공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해서 - 법(法)을 설하되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것이고, 현(顯)과 밀(密)이 있는데 현밀(顯密)을 가리지를 못해 가지고 함부로 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기가 막힌 도인(道人) 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정말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해 줄 말이 있고 안 해줄 말이 있는 것이며,

때에 따라서 인과법이라든지 모든 방편설이 다 적재적소에 쓰면은 좋은 약이 되려니와, 그것을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쓰게 되면, 법도 못쓰게 만들고, 또 중생도 못쓰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중대한 과오를 범해서 용서받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보단 훨씬 나은 사람에게 인가를 해 주고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해야지, 자기와 같은 정도의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인가를 해 주면, 인가 받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반 밖에 못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30분52초~39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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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166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때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육도(六途) ; (=六道)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인(業因)에 의하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현중현(玄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〇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도리(道理) ; 이치.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를 꿰뚫고 있는 법칙.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이(理) ; 이치(理致). ①진리. 근본 도리. 보편적인 것. ②현상의 배후에 있어서, 현상을 현상답게 하는 것.
*사(事) ; ①구체성. 현상. 나타나는 현상. ②개별적 현상. 차별의 상(相)의 하나하나. 구체적, 차별적인 것. 이(理)의 반대. 현실.
*횡행자재(橫行自在)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현밀(顯密) ; ①뚜렷함과 은밀함. ②현교(顯敎)와 밀교(密敎). 현로(顯露)한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 드러나는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의 의미.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중생이 부처님 가르침인 교법(敎法)을 듣고 제각기 이를 깨달을 만한 능력.
*종사(宗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조사(祖師)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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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참선 (목적)2014.01.04 14:23

§(287)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 / 깨달을려면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러야. /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가부좌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 조사와 선지식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참선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87) - 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86.02.02)(63분)에서.

 약 18분.


오늘은 2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田岡) 조실스님의 녹음 법문을 사부대중이 잘 들었습니다.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조실(祖室) 스님께서 15년간을 이곳에 머무르시면서 많은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시면서 항상 활구참선법, 최상승법을 선양(宣揚)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성불을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는데 그 8만4천 법문을 교(敎)라 한다면,
그 교(敎) 밖에 따로 마음을 전하신 것이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 교외별전 선지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는 ‘화두(話頭)’라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마는 물론 그러한 체계화된 간화선(看話禪)은 없었지만,
부처님 때부터서 그 부처님의 설법과 중생을 교화하는 그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 그 법(法)이 자유자재로 구사(驅使)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세상이 흐름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가 차츰 약해지고 또 영리한 마음은 점점 늘어나 가지고 순박성을 잃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차츰차츰 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을, 중생의 근기 따라서 마련하실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아니했지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하택신회 선사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저 하택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라야 그릴 수도 없는데 어찌 네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그것이 벌써 이름이 아니냐, 이름이 없다고 그랬는데 왜 이름을 붙이느냐?’ 이렇게 꾸짖으시고서,
‘네가 나중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 밖에는 되지 못하겠구나. 사량으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는 강사와 같은 그러한 무리 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렇게 점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을 뵈러 와서는 절을 하니까  ‘십마물(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일부러 ‘이뭣고?’ ‘이뭣고?’ 형식적으로 하고, 또 할 때는 잠시 알 수 없는 생각이 있다가 금방 돌아서면 의심이 없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육조 스님의 그 물음 뒤끝에 꽉 막힌 그 의심이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고, 안할 라야 안할 수가 없고, 저절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꽉 막힌 그 의심이 차오르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8년 동안을 그러한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던 것입니다.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던 것입니다.

활구참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뭘 이러 저리 좀 하다가, 무슨 경계가 나타난다고 ‘아! 알았다. 내가 알았다.’ 이런 생각을 내고서 무슨 공안을 갖다가 자기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뭐라고 이를라고 하고.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애써서 한 철 두 철 하면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일체다. 전체가 바로 나요, 나 밖에 이 세계가 어디가 있느냐?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산을 보나 들을 보나 돌을 보나 그것이 모두가 딴 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내 면목이다.’
이러한 체중현(體中玄)의 그런 공견(空見)이라 하는 것은 한 철 아니면 두 철이면 누구나 그러한 경계는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지어간다면 그 사람은 조그만한 그릇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자기 그릇으로 평생을 수용하다 가는 것입니다.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작년에 세계적인 그 사진작가가, 그분은 우리나라 6.25동란 때 전쟁고아로서 미국에 양자를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 사진을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이가 한번 어느분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이 참선에 대해 항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참선이란 게 대관절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참선을 해 가지고 구경(究竟)으로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겨우 자기 이름만을 한글로 서투르게 쓸 정도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갔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통역을 통해서 그 짧은 시간에 참선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도 어렵고, 그래서 풍선을 하나의 예로써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가부좌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조사와 선지식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니까 그 사진을 찍고, 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씨를 쓰고, 또 쇠를 만드는 그러한 그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쇠를 녹여서 좋은 쇠를 만드는 그 가운데, 또 백정이 소를 잡는 데에는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풍선을 불고 있다.

금방 그 풍선을 잘못 불면 처음에 조금 훅 불다가 어문 가운데서 툭 터져 가지고 실패해 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당히 클 때까지 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개중(個中)에는 이 우주의 법계에 가득 찰 만큼 그러한 큰 풍선을 불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 가지고 터트릴 수 있는, 그렇게 풍선을 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우주, 동서고금에 가장 크고도 좋은 풍선을 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지금 우리는 승려로서 우리 나름대로의 가장 좋은 풍선을 불려고 목숨을 바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사진작가로서 당신의 풍선을 잘 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예술가도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런 도(道)나 법(法)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이해를 잘 하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달 후에 그이가 인편에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지금도 풍선을 열심히 불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그 전단을 보내왔었습니다.

참선을, ‘꼭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화두를 타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선에 관한 고정된 관념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정된 생각을 가지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지루한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못하고 시간이 없으면 못하고 어떠한 특별히 혜택 받은 사람이 아니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참선 자체를 경원시(敬遠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려고 하니까 지루하고,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고,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으니까, ‘하! 이거 화두가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이냐?’ 또는 내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나는 참선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내 근기가 참선을 할 만큼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차라리 이렇게 아무리 해 봤자 재미도 없고 별 성과도 없는 참선을 이렇게 한다고 해 봤자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경(經)을 읽어볼까? 염불(念佛)을 할까? 주력(呪力)을 할까? 그래 가지고 경을 읽다가 염불을 하다, 주력을 하다, 그러다가 보면 또 다시 참선을 하고 싶어서, 또 참선을 하다가 말다가 참 이러한 분을 상당히 많이 겪어봤습니다.

이 참선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한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또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참선을 잘할 수도 있는 그러한 면도 있는 것입니다.(2분7초~20분1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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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田岡) 선사 ;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음)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셨다.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으셨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 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고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 12월 2일(음)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하시고 앉아서 열반에 드셨다.
그리고 후학(後學)을 위한 700여 개의 육성 법문테이프를 남기셨다.
세수(世壽) 77세, 법랍(法臘) 61세.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납자(衲子 옷을 꿰맴 납/사람 자) ; 남이 버린 헌 옷이나 베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선지(禪旨) : 선(禪) : [범]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타연나(駄衍那)라 쓰고, 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 등으로 번역한다.
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가섭존자가 전한 선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교법만이 유포되었었는데, 달마대사(達摩大師)가 건너온 뒤로부터 선법이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이 글에 말하는 선법은 조사선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8, p34에서.
(5)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説者는  爲教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教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教門)이 되었다。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教)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6)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教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가  皆是教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教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教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구사(驅使 몰 구,부릴 사) ; 말이나 수사법, 기교, 수단 따위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씀.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육조(六祖), 하택신회(荷澤神會), 남악회양(南嶽懷讓) ;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조.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개중(個中) ; 여럿이 있는 그 가운데.
*경원시(敬遠視) ; 겉으로는 가까운 체하면서 실제로는 멀리하고 꺼림칙하게 여김.
*망상(妄想) ;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을 함. 또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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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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