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듣는 법'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1.10.11 •§•(008) 법문이 딴 것이 아니라 그 화두의 대의(大意)여. 큰 의정(疑情)의 근본 뜻이여. 언하대오허는 법이여. 화두 그대로 역력허면서, 법문 대의는 그대로 낙구(落臼)라.
  2. 2021.08.26 §((335)) (게송)작야시우치~ / 법문이란? /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끊어버려야 /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
  3. 2020.12.19 §((137)) (게송)동풍취일과~ /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4. 2020.05.20 §(세등37) (게송)운개공자활~ /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불설일자(不說一字) / (게송)단지성색본비진~.
  5. 2017.09.21 §(465) 영훈선사와 귀종선사 /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다.
  6. 2017.03.25 §(014)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학문, 이론을 다 잊어버릴수록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 / 한 생각 단속하는 데에 윤회를 여의는 길이 있다.
  7. 2016.08.25 §(299)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 / 방안퉁수 / 좋은 법문을 들으려면 자신이 먼저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 자세여야, 과녁이 분명해야 명중(命中)한다.
  8. 2015.01.10 §(112) 법문을 옳게 듣는 길 /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 / ‘딴 생각[別念]’해서는 안됨 / 공부가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 해야 / 칠통(漆桶) 타파(打破).
  9. 2014.05.31 §(240) 법문듣는 법 -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 본참화두의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10. 2014.04.16 §(568) (게송) 일체불류환유견~ / ‘나는 참선을 한다’는 생각만 있어갖고는 정말 생사해탈이 되는 것은 아니고,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이뭣고?’를 챙기셔야 됩니다.
법문 듣는 법2021. 10. 11. 06:32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23분 5초부터 시작됩니다>

 

 

•§•(008) 법문이 딴 것이 아니라 그 화두의 대의(大意)여. 큰 의정(疑情)의 근본 뜻이여. 언하대오허는 법이여. 화두 그대로 역력허면서, 법문 대의는 그대로 낙구(落臼)라.

법문이 딴 것이 아니라 그 화두 고놈의 대의(大意)여. 큰 의정(疑情)의 근본 뜻이여. 언하(言下)에 대오(大悟) 할 수 있는 것이여. 언하에 대오를 허는 법이여.
화두 그대로 역력(歷歷)허면서, 법문 대의는 그대로 낙구(落臼)라. 그대로 척 들어오는 것이여. 헌디, 화두 독로 했다고 법문이 안 듣켜? 다 듣고도 능히 화두는 그대로 독로 헌 것이여.

**전강선사(No.008)—전강선사 일대기 제3호(경술1970년 12월 1일 새벽.음) (전008)

 

 

약 5분.

 


법문(法門) 들을 때에는 화두를 혀! 내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혀. 본참화두를 딱! 헌 가운데에서 법문도 안 들어와. 그 지경 좋지.
법문도 귀에 안 들어온디, 내 참선은 내 화두 허느라고 법문도 안 들어온디, 거 뭐 뭐 다시 그 경계 외에 뭣을 구헐 것이여. 뭣을 바랠 것이여. 법문은 들어서 뭣 헐 것이여. 화두 의단(疑團)만 독로(獨露) 했는데.

그러면 화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가운데에서 이 법문도 안 듣킨가? 법문도 통 귀에 들어오지 않고 화두 의단독로만 나오는가?

법문, 법문이 딴 것이 아니라 그 화두 고놈의 대의(大意)여. 큰 의정(疑情)의 근본 뜻이여.
언하(言下)에 대오(大悟) 할 수 있는 것이여. 언하에 대오를 허는 법이여.

참선 화두 그대로 역력(歷歷)허면서, 법문 대의는 그대로 낙구(落臼)라. 그대로 척 들어오는 것이여. 헌디, 화두 독로 했다고 법문이 안 듣켜? 다 듣고도 능히 화두는 그대로 독로 헌 것이여.

저 조인광중중(稠人廣衆中)에, 조인(稠人)이라는 것은 모지라질 조자인디, 사람이 수천 명이 꽉 콩나물처럼 섰는 디가 조인이여.
우묵허니 조인광중중에 여러 조인들이, 여러 사람들이 그저 떠들고 대고 잡화(雜話)하고 뭐 와각 와각 그런 것은 소용없어.

의단독로에 뭐가 들어와? 뭔 말, 그 같은 게 들어올 게 뭐 있어?
아무리 시끄럽게 아니라, 아무리 무슨 천지를 뒤집는다 하드래도 화두학자한테는 안 들어와.

허지마는 이런 공안 법문이 화두 역력허면서 그 법문은 그대로 낙구(落臼)가 척척 되아.
낙구(落臼)라는 것은 뭐냐? 문을 척 열면 제대로 가서 탁 맞는 것을 낙구라 하고, 방아 찧으면은 올려 놔두면 제대로 툭 떨어진 게 낙구여. ‘구(臼)에 떨어진다[落]’ 그말이여.

뭐 들을라고 해서 들어지나. 화두 헌 학자가 그대로 법문이 그만 그 제일구(第一句) 법문 턱턱 들어온 거지. 그래서 언하대오(言下大悟)여, 언하에 대오다. 말 아래 크게 깨달는다.

‘공부, 참선 화두, 화두 허니라고 언제 법문 들을 겨를이 있느냐?’ 이런 말도 들었지마는,
그렇게까장 공부를 헐 것 같으면은, 화두 허니라고 법문도 안 듣키면은 그 지경—그 화두가 그것이 그 법문도 안 듣킨다 허는 그 지경이 반 쪼가리밖에는 안되는 것이여.

화두를 들고 역력헌 가운데에 이러헌 공안(公案) 법문을 들을라고 듣는 것이 아니라 낙구가 된다 그말이여, 내 말은.

이런 말을 잘 들어! 부처님 설법을 족 설법헐 때에는 그 뭐락 했어? 뭐라고.
‘허공이 되아가지고 들을지니라. 다 비워라! 다 비워 놓아 버려라. 안 마음, 바깥 경계 툭 놓아 버려라’
뭐 놓을 것이 뭣이 있나? 처컥 귀 들고 들으면은 그 놓고, 안 놓은 게 어디 있는가? 여여독문(如如獨聞) 이지.(22분5초~27분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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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역력(歷歷 겪을·지낼·수를 셀·가릴 력) ; ①뚜렷한 모양. 분명한 모양. 똑똑한 모양. ②사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양.
*낙구(落臼 떨어질 락/절구·곡식을 찧는 기구·찧다 구) ; ‘절구[臼]에 떨어진다[落]’는 말로 ‘백발백중(百發百中)‘, ’틀림없는 결과’의 뜻을 나타낸다.
[참고] 『선요(禪要)』 (고봉화상 | 조계종출판사) 7. 示衆 p65 주석에서.
추문낙구(推門落臼) : 문을 여닫을 적에 문이 암돌짝[臼 : 절구처럼 구멍이 패인 곳]을 벗어나지 않고 자유롭게 열리고 닫히는 상태로서,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말과 같다.[臼是門開閉之處也 開門之時 亦發於臼 閉門之時 亦落於臼 猶言百發百中].
*조인광중(稠人廣衆) ;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
*조인(稠人 빽빽할 조/사람 인) ; 많은 사람.
*제일구(第一句) ; ①‘처음 한마디 말’이니 불교의 핵심도리를 드러내는 첫번째 말. ②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개념 지을 수 없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以心傳心] 진리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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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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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21. 8. 26. 07:03

 

 

§((335)) (게송)작야시우치~ / 법문이란? /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끊어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 /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송담스님(No.335)—1987년 7월 첫째일요법회(87.07.05) (용335) (법문 듣는 법)

 

 

약 14분.

 


작야시우치(昨夜是愚痴)가  금조성준걸(今朝成俊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개해탈문(好箇解脫門)이여  석무인맹렬(惜無人猛烈)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야시우치(昨夜是愚痴)가, 어젯밤에 깜깜한 어리석은 멍청이가,
금조성준걸(今朝成俊傑)이로구나. 오늘 아침에 갑자기 준걸(俊傑)이 되어 버렸구나.

호개해탈문(好箇解脫門)이여. 좋고 좋구나 이 해탈문이여.
맹렬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깝구나.(惜無人猛烈)

깨달음은 오래오래 닦아서, 그래 가지고 깨달음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까지는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있던 사람이 하룻밤 새에 툭 터져 버리면 바로 해탈도를 증득을 하는 것입니다.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70년도에 성도재 법문으로, 조실 스님의 일대기 법문 속에서 만공 큰스님, 용성 큰스님 그리고 보월 큰스님 이 말세에 대선지식(大善知識)들, 그런 선지식들과 함께 최상승법 제일구(第一句) 도리를 가지고 염롱(拈弄)하시는, 한바탕 거량(擧量)을 해 가지고 그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두르면서 맞부딪치는 그러한 장면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법문 한 구절밖에 다시 무슨 법문을 더 들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 법문을 듣고 뼈에 사무치고 온 몸에 털이 거꾸로 떨어 서며, 칼날을 목에다 대고 용맹정진(勇猛精進)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수좌(首座)가 아닐 것입니다.

법문(法門)이라는 게 무슨 경전을 해설을 하고 강의를 하고, 무슨 이론에 대해서 천착(穿鑿)을 하고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리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의 중생 상량심(商量心)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듣고 우리가 앞 생각이 끊어지고 뒷 생각이 끊어지며, 다맛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현전(現前)해서 다시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다시 일으켜야 할 화두도 없으면서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맛 의단이 독로한 채 찰나(刹那)가 끊어져 버려야 할 것이여.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잃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념에 생사심(生死心)이 끊을려고 하지 안 해도 당념에 끊어져버려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여.

보고 듣고 하는 것도—산을 보아도 산이 보이지를 않고, 물을 보아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수백 만 명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아니하고, 별별 소음과 잡음이 있어도 한 소리도 귀에 들리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누가 옆에서 잡담을 하거나, 누가 나를 칭찬을 하거나, 누가 나를 험담을 하거나, 일체 시비 우여곡절이 내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거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내 몸뚱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조차도 모르거늘, 무슨 시비와 흥망성쇠가 내게 무슨 상관이 있어.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대사자후(大獅子吼)로 설하신 제일구(第一句) 도리는 술수(術數)가 아닙니다. 배울라야 배울 수 없고 가르칠라야 가르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리는 팔만대장경을 뒤적거려도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96종 철학을 통달을 해도 그러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
이 도리는 엄격히 말해서 불조(佛祖)도 엿볼 수가 없는 것이고 귀신도 들여다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고요할 때에는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한번 움직였다 하면은 큰 불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수미산과 같아서 아무리 움직일라고 해도 꺼떡도 아니한 것이며,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한 생각 움직거리면 그 불덩어리에 타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할 수가 없는 것이여.

온 세계에 하나도 감춘 바가 없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틀의 땅에서 찾으면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더듬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 망상을 쉴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참선을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호소를 합니다마는, 망상을 쉴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참선을 잘못 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상을 끊을려고 하는 생각이 벌써 틀린 것이고, 망상을 쉬고 또 쉬고 해서 망상이 하나도 없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면 참선이 참 잘될 것 같지마는 참선은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를 애당초부터 문제시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과거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일체 선악 · 시비 · 원한 · 애정 천하 없는 생각도 내가 관계할 일이 아닙니다. 그냥 고대로 놔버려. 다만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이여. 거기에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지, 망상도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고.
일체처 일체시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이, 내가 그것을 참견을 하고 취하고 버릴려고 하는 데에서 공부가 그릇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만을 자꾸 챙겨서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더우면 더운 대로 챙겨 나가면 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추워도 이놈을 추켜들고 비벼대면 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배가 고파도 이놈이요, 배가 불러도 이놈이요,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 한 의단(疑團)을 가지고 나아갈 뿐인 것입니다.(처음~13분5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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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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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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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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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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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20. 12. 19. 09:43

§((137)) (게송)동풍취일과~ /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송담스님(No.137)—1981년(신유년) 신수기도 입재(81.02.07) (용137)

 

약 6분.

 

동풍취일과(東風吹一過)한디  화란만계홍(花爛滿溪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출백운외(山出白雲外)한디  송월만창시(松月滿窓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동풍(東風)이 취일과(吹一過)하니  화란만계홍(花爛滿溪紅)이로구나.
봄바람이 한번 불어 지내가니 꽃이 난만(爛漫)히 피어서 시내에 가득히 붉구나.

산출백운외(山出白雲外)하니  송월(松月)이 만창시(滿窓時)로다.
산이 백운(白雲) 밖에 우뚝 솟으니, 솔 달이 창(窓)에 가득한 때로다.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한번 쳤습니다. 그리고서 이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 보이신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범부(凡夫)는 그 주장자의 겉모양을 보고, 도인(道人)은 그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주장자를 들어서 법상을 칠 때에, '어째서 저 주장자는 왜 들어서 보이며 또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것이 무엇인가? 저 중이 설법(說法)을 할 때마다 주장자를 떠억 들어서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쿵! 하고 치는데 저게 무슨 짓인가?'
다맛 주장자를—들어 보이는 그 주장자를 볼 뿐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만을 들었을 뿐인 것입니다.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이 도리는 조실 스님의 법문에서는 '도인은 그 주장자를 들어 보는... 주장자를 보는 그놈을 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듣는 놈을, 들을 줄 아는 놈을 본다' 하셨습니다.

주장자를 눈을 통해서 보는 놈, 그놈을 과연 어떻게 보며,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
오직 화두(話頭), 공안(公案), '이 무엇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중생의 사량분별심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를 관조(觀照)할 때에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처음~6분1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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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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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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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20. 5. 20. 17:39

§(세등37) (게송)운개공자활~ / 설(說)할 바 법(法)이 없고, 들을 바 법(法)이 없는 것이 이것이 '참 설법(說法)' / 불설일자(不說一字) / 설(說)할 바가 없으면서도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시는 것, 그래서 대중들도 들을 것이 없지만 위법망구적으로 법문을 듣되 한마디도 들은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게송)단지성색본비진~.

 

**송담스님(세등선원No.37)—1981년(신유년) 동안거 반살림 법문(81.11.22) (세등37)

 

약 14분.

 

운개공자활(雲開空自濶)이요  엽락즉귀근(葉落卽歸根)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회수연파리(廻首煙波裏)에  어가과원촌(漁歌過遠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운개공자활(雲開空自濶)이요. 껌껌허게 구름이 끼었다가 그 구름이 활짝 열리니까 저 허공은 저절로 환히 열렸다.

엽락즉귀근(葉落卽歸根)이라. 가을이 되서 단풍이 져가지고 그 이파리가 떨어지니 곧 뿌리로 돌아가더라.

 

회수연파리(廻首煙波裏)하니, 머리를 돌이켜, 머리를 돌려서 안개 연기 자욱한 파도 속에 돌리니,

어가과원촌(漁歌過遠村)이라. 고기잡이 노래가 먼 마을을 지내가더라.

 

오늘은 신유년(辛酉年) 삼동결제(三冬結制) 반살림 날입니다.

결제(結制) 때 법문을 듣고 공부를 시작하면 해제(解制) 때까지 한결같이 정진(精進)을 지어가면 되겠지만 우리의 근기(根機)가 그렇지를 못해서, 그래서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어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일어나도록 그래가지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채찍을 가하기 위해서 결제 중간에 법회를 한번 갖는 것입니다.

 

원래 반살림은 동짓달 그믐날 갖는 것이 일반 준례(準例)지만 오늘은 동짓달 스무 이튿날, 이 세등선원을 창설한 원장 스님, 세등 스님의 생신날로써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도 올리기 겸해서 오늘 이렇게 반살림 법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법문을 남김없이 다 들었습니다.
그 법문 밖에 무슨 또 할 말이 있을까마는, 법문(法門)이라 하는 것이 원래 설(說)할 것이 없는 것이여. 들을 것이 없어.

 

설(說)할 바 법(法)이 없고, 들을 바 법(法)이 없는 것이 이것이 '참 설법(說法)'이여.

 

부처님께서 열반회상(涅槃會上)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오늘 이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느니라"

 

49년 동안 팔만사천의 법문을 설하시고서 마지막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동안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느니라" 이것이 '참 설법(說法)'인 것입니다.

 

설(說)할 바 법(法)이 있어서 설한다면 그 설법(說法)은 틀려버린 것입니다.
설(說)할 바 법(法)이 없다고 해서 아주 입을 꼭 다물고 법회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설(說)할 바가 없으면서도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중들도 들을 바가 없어. 들을 것이 없지만, 그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법문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법문을 귀로 듣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속에 기억할 것이 있고, 알아들어서 얻은 바가 있고, 이것은 법문을 잘못 들은 것입니다.

그 위법망구적으로 정성(精誠)을 들여서 법문을 듣되 한마디도 들은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색상(色相)을 보고 음성(音聲)을 듣고 그래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얻은 바가 있고 나를 구(求)한다면, 이것은 삿된 길을 행(行)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행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색상(色相)과 음성(音聲) 소리에 즉(卽)하지도 말고, 색상과 음성을 여의지도 말아야 할 것이여.

 

 

단지성색본비진(但知聲色本非眞)이요  자연불피성색혹(自然不被聲色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진자어현지회(見盡自於玄旨會)하면  정망능여도상친(情忘能與道相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불피성색혹(自然不被聲色惑)이니라.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견진자어현지회(見盡自於玄旨會)하면  정망능여도상친(情忘能與道相親)이라.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생각 다한 데에 이르러서, 다해가지고 생각 없는 곳에 이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리라.

생각이, 생각이 다해가지고 생각 없는 곳에 이르러서 참나를 확철대오를 하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리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으로부터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바로 견성(見性)하야 성불(成佛)할 것이다.

 

정법학자(正法學者)가 이 법문을 듣고 화두(話頭)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다면 이 법문을 바로 들은 것이 될 것이여.(처음~13분5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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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운개공자활(雲開空自濶)~’ ; 『선문염송·염송설화』 (혜심·각운 지음) ‘제4권 115칙 신주(新州)’ 송원(松源) 송(頌) 참고.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열반회상(涅槃會上) ;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임해서 열린 법회. 세존의 마지막 설법으로서 간절한 유훈(遺訓 죽은 사람이 생전에 남긴, 타일러 잘못이 없도록 일깨워 주는 말)을 남기셨고, 『유교경』 · 『열반경』 등의 경전으로 전승되었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회상(涅槃會上)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오늘 이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느니라"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미증(未曾), 부증(不曾) : 일찍이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의 교설은 언어문자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반야경』이나 『능가경』 등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 말을 선종에서 강조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참고 ❶] 『금강선론(金剛仙論)』 (세친=천친 造 | 금강선 釋 | 보리유지 한역) 제5권.

如來從得道夜 至涅槃 更不說一字者 明證法無名相 言語道斷 心行處滅 不可以名相往說 故言不說一字也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밤부터 열반에 드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결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법(法)은 명상(名相)이 없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헤아릴 방법도 소멸하여 명상으로써 설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참고 ❷] 『선교석(禪敎釋)』 (서산대사)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智度論>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마지막 발제하까지, 이 두 기간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외별전의 취지를 가리킨다.<『지도론』>

 

[참고 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제5권 (실차난타 역 | 김진철 번역 | 한글대장경) '3. 무상품 ② 無常品第三之餘'

大慧 若人說法墮文字者 是虛誑說 何以故 諸法自性離文字故 是故 大慧 我經中說 我與諸佛及諸菩薩 不說一字 不答一字 所以者何 一切諸法離文字故 非不隨義而分別說

 

대혜여, 만약 어떤 이가 법을 설하되 문자에 떨어진다면 이것은 허망하게 속이는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경 가운데서 '나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자도 설하지 않고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므로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하여 설하지 않는다.

*상주설법(常住說法) ; 우주 대자연의 운행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말.

흐르는 물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 모두 그대로가 부처님이 출세하신 모습이요, 쉴 사이 없이 하는 설법이다.

*상주(常住) ; 과거 · 현재 · 미래 등 삼세(三世)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생멸의 변화를 겪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것. 상(常)이라고도 하는데, 무상(無常)과 대칭한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금강경』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色見聲求 是行邪道 作麼生 不行邪道去 但知聲色本非眞 自然不被聲色惑 見盡自於玄旨會 情忘能與道相親

 

색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즉(卽)하다 ; 어떤 사실에 의거(依據)하다. *의거(依據)하다 : 어떤 사실이나 원리 따의에 근거(根據)하다.

*(게송) '단지성색본비진(但知聲色本非眞)~' ; 『금강경오가해』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함허 득통 스님의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게송 참고.

*현현하다(玄玄-- 검을·깊을·고요할·신묘할 현) ;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미묘(微妙)하다.

*미묘(微妙 작다·정교精巧하다·은밀隱密히 미/말할 수 없이 빼어나고 훌륭하다 묘) ; 인간의 생각이나 언어로는 헤아리거나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훌륭한 대상, 또는 상태를 형용하는 말. 주로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 깨달음의 경지 등을 형용하는 말로 쓰인다.

*정(情) ; ①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 ②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③[불교] 혼탁한 망념(妄念).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리라' ;

[참고] 『한가로운 도인의 길 - 나옹화상법어집』 (김달진 역주, 세계사刊).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보임(示諸念佛人/8首)’ 게송 참고. p166.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고?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마음을 부딪쳐 가지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아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생각이 다해가지고 생각 없는 곳에 이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에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것이다)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자금광(紫金光) ; 자마금(紫磨金 : 황금 중의 최고인 자색을 띈 금) 색(色)을 띄고 있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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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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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17. 9. 21. 22:35

§(465) 영훈선사와 귀종선사 /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 생사(生死) 문제보다  바쁜 것이 없다.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있고 들을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말을  법문을 즉(卽)해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듣는 것이거든.

 

**송담스님(No.465)—92 2 첫째일요법회(92.02.02) (용465)

 

약 8분.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라고 하는  선지식이 옛날에 계셨는데,  선사가 최초에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을 찾아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떠억 찾아가서  귀종 선사에게 묻기를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매우 엄숙하고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귀종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향해서 일러주되 네가 믿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말하기를 큰스님께서는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학자를 위해서 정말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감히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종 선사가 가로되 네가  부처니라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야 되겠습니까?”

귀종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空華)가 난타(亂墮)니라.  티끌이 눈에 있으면 공화가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영훈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 해가지고 보림하는 길까지 눈을 떴습니다.

 

 장애가  티끌이 눈에 있으니, 공화(空華)라고 하는 것은 눈병든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슨 꽃이 피어서 이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서물서물 서물서물 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거든.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일러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네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까,

큰스님께서 어찌 거짓말 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실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니까, “네가  부처니라 거기서 확철대오를 했거든.

 

부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부처님, 부처가 무엇이냐?”하 물으면 나름대로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 실달(悉達) 태자  그런 등등 나름대로  말씀하실  있고,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바로 진리를 깨달으신 진리와 하나가  성현이다 아마 그렇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네가  부처다. 영훈이 네가  부처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부처다

이러한 이것은 이론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고 또 영훈 선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수긍을 해서 아하, 바로 내가 부처구나하고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어.

 

네가  부처다”고 하는 데에서 이론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서 ! 깨달아 버린 거여.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그래서 법문(法門)을 듣되  법문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상식 모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리에 모이신 법보제자(法寶弟子)는 무슨 법문을 듣던지 바로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있고 들을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말을  법문을 즉(卽)해서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듣는 것이거든.

 

보통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은 귀가 번쩍해서 눈알이 초롱초롱하고 조끔 재미없는 얘기를 하면 꾸벅꾸벅  시간  졸다가  일어나 가지고 누가   것을 봤나  봤나 래뚤래.

 

그런데  그래서 섣달그믐께 모다 신도님들은 모다 바쁘고 여러 가지로 새해를 맞기 위한 여러 가지 가정사, 회사 공장 모다 여러 가지로 모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다 많이 참석을 하셨는데,

사실 바쁜 것은 생사(生死) 문제보다  바쁜 것이 없고, 우리가   일 초 죽음을 향해서 계속 가고 있는데 자기의 생사 문제보단 더 바쁜 것은 없거든.

 

집에서도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참선도   있지만 그래도 법회에 이렇게 한번 떠억 나와서 부처님께 예배도 올리고 축원도 하고 그러고 도반(道伴)들도 만나고 이렇게   아는 소리  하고  하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도반들이 같이 모여서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이다.(16분28초~24분4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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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 습기(習氣) 제하고 ()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 보호임지(保護任持)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보호하여 지킨다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천진함을 보전하고  자재함을 따른다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실달(悉達) ; 싯다르타(siddhartha) 음역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출가하기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실달다(悉達多)’이라고도 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법당(법보전) 모셨으니 우리가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 의지해서 도를 닦는   도반(道伴)이면서   가족인 것입니다.

*즉해서(卽해서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丹田]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없는 생각 ()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벗.

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17. 3. 25. 22:47

 

 

§(014)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학문, 이론을  잊어버릴수록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 / 한 생각 단속하는 데에 윤회를 여의는 길이 있다.

 

어떤 병에다가 물건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을 자꾸 쏟아서 버려서 깨끗한  병으로 만드는 거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학문, 학설, 일체 이론은  잊어버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해야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시간 동안에 걸쳐서  여러 가지 법문을 들었지마는  말씀도 옮길 말씀이 없고, 다못   없는 이뭣고?’ 생각만 속에서 간절히 일어나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오늘 법문을 누구보다도  들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송담스님(No.014)—76 2월 관음재일 법문(76.02.24.음) (용014)

 

약 7분.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을  같이 들었습니다.

 

다달이 관음재(觀音齋)를 기해서 이렇게 신남신녀 여러분께서 이렇게 참집(參集)을 하셔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사부대중이  같이 이렇게 경청을 해서 우리의 신심을 돋구고 그래서 정진하는데 이익을 얻어서 우리의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이렇게 해 오고 있습니다.

 

원래 불법(佛法)은 무슨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연구해서 지식을 많이 얻어 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보거나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거기에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을 일으켜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 도달하기 위해서 경을 보고 법문을 듣는 것이지, 경을 보고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우리의 지식을 넓혀 가지고 아는 것이 많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을 많이 보고, 법문을 많이 들어서 아주 아는 것이 풍부해지면은 그 사람이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랑을 삼고, 남들도 그러한 이를 부럽게 생각하신 분을 간혹   있습니다마는,  불법은 무엇을 많이 보고 듣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알고, 많이 듣고 해서 잔뜩 속에 쌓아두고 있는 것보다는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을   있으면 하나라도  많이 잊어버리고, 버리는 데에서 오히려 불법에 공부가  많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병에다가 물건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을 자꾸 쏟아서 버려서 깨끗한  병으로 만드는 거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학문, 학설, 일체 이론은  잊어버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해야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법보선원에 오신지가 20, 10, 5, 3 또는   아니 되시거나, 오늘 처음으로 나오신 분도 계시겠지마는, 많이 법문을 들을수록에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비울  있는 그러한 능력이 길러져야 그분이 그동안 법문을  옳게 들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은 오늘 처음 오셨다고 해서 하나도 공부가 되어 있지 않고 초학자(初學者), 오래 전부터서 여기 많이 오셔서 구참(久參)이 되었다고 해서 그분이 공부가 많이 되어 있다고만은 꼭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들으신 것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조랑조랑 이야기할  있다고 해서 그분이 오늘 법문을  들으신 것이라고는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 동안에 걸쳐서  여러 가지 법문을 들었지마는  말씀도 옮길 말씀이 없고, 다못   없는 이뭣고?’ 생각만 속에서 간절히 일어나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오늘 법문을 누구보다도  들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무슨 경을 많이  가지고 누구한테라도 자랑할  있을 만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있을 만큼 무슨 불교에 대한 교리를 알고 싶어서 밤낮 책을 뒤적거리고 그러실 것이 아니라,

 

어쨌든지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간단한   말씀만에 의지해서 걸어가실 때나, 앉아 계실 때나, 무슨 일을 하실 때나, 또는 식사를 하실 때나, 변소에 가실 그런 때까지라도 생각 생각이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話頭) 들어지고, 화두를 들을라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부처님 제자가 되는 길이 바로 거기 있는 것이고, 영겁을 두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생사고(生死苦)를 여의는 길이 바로   생각 단속하는데 있는 것입니다.(처음~7)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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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 조실 스님 ;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관음재(觀音齋) ; 관음재일(觀音齋日). 매월 음력 24.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 3(身口意 三業)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참집(參集 참여할 참/모일 집) ; 어떤 자리에 참가하기 위해 모임.

*돋구다 ; 돋우다(감정이나 기운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다. 정도를 더 높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 부처님의 가르침.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소소영령(昭昭靈靈)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있다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생사도 없고, 버려야  번뇌도 없다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깨달음 ; ().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구참(久參 오랠 /참구할·참여할 )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 오랫동안 () 닦은 .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 귀의한지 오래 되는 . 초학(初學) 상대어.

*조랑조랑 ; (어린 사람이) 계속하여 똑똑하게 글을 외거나 말을 하는 소리.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 했을까?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생사고(生死苦) ; 생사(生死)라는 고통[]. 가장 근원적인 고통이며, 이것에서 벗어나야 해탈을 얻는다.

*생사(生死) ; ①생과 . 살아 있는 것과 죽은 .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 생각 일어날  새로 태어난 것이고,  번뇌가 꺼질   죽는 ,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것이 바로 생사(生死)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생각이 일어날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 ,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16. 8. 25. 09:40

§(299)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 / 방안퉁수 / 좋은 법문을 들으려면 자신이 먼저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 자세여야, 과녁이 분명해야 명중(命中)한다.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법문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항시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녁이 분명해야  과녁을 보고 활을 쏴서 명중(命中)을 시키는 것이지 활을  때에도  과녁이 분명하게 ! 있어야  활을 쏘는 사람도 정신을 통일을  가지고 정확하게 딱! 맞추는 거지, 과녁이 삐딱하니 있어 가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여 쌌고 그런다면 아무리 활을  쏘는 사람도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좋은 법문을 듣고 싶고, 법사로 하여금 훌륭한 법을 설하게 하고자 하시거든, 여러분 자신이  법문을 받아들일  있도록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신심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아무리 엉터리 법사라도 여러분의  지극한 신심과 법력으로 좋은 법문을  할래야   수가 없고, 저절로 아무 말을 해도  법문이비단 평범한  한마디를 하고, 평범한 게송(偈頌) 하나를 읊어도  게송  한마디가 여러분의  지극한 신심의 과녁에 가서 ! 꽂혀 가지고, 여러분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있는그런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99)—1986 5 첫째 일요법회(86.05.04) (용299)

 

약 16분.

 

여러분에게 아주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실 공부는 선방(禪房) 들어와서 죽비(篦) 치고 입선(入禪)만 하는 그것만이 공부가 아니고,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話頭)를 들고생활 속에서 성날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슬플  슬픈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속이 상할   속상하는  생각을 버리고 찾지를 말고 바로  생각에 ()해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도록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게  때에 공부가 익숙해진 선객(禪客)이라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공부를 지어 가는 사람은 댁(宅)에서 생활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참선(參禪)이요,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것도 그것이 바로 참선이요.

 

 이런 법회에 절에 오실 때에 차를 타시는 것도 참선이요, 차에서 내려서 걸어서  절에까지 오시는 것도 참선이고.

 도량(道場)에 들어서서 어떠한 스님을 만나면은 노소간(老少間)에 합장을 하고 이렇게 배례(拜禮)를 하는 것도 참선이요.  신도분을 만나서도 미소를 지으면서 합장을 하고 이렇게 안녕하셨느냐 인사 한마디하는 것도 그것이 모두가  참선 아닌 것이 없다  말씀입니다.

 

  법당에 떠억 들어와서도 자기가 앉을 만한 자리에 따악! 방석을 가지고 와서 앉아서, 허리를  펴고 반가부좌(半跏趺坐) 또는 가부좌(跏趺坐)를 하고서 화두를 들고  법회가 시작할 때까지 참선을 하시는 , 이것이 참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일반 다른 사찰에는 절에 무슨 법회가 있다 하면은 법당에 들어와서 잡담을 많이  가지고 법당이 와글와글 와글와글  가지고 장터처럼 모다 그러는데.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들어오시면 제각기 자리에 앉아서 들어오시자마자 떠억! 참선을 하셔서. 그러니  법당에 들어오기 전에는  법당 안에  분도  계신가 보다하고. 와서 너무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그런데 들어와서 보면 법당에  여명 대중이 ! 앉아 있다.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만큼 그렇게 엄숙하고 조용해야  것이다 그말이여.

 

먼저 오신 분은   있으면  앞으로 앉으시고, 나중에 오신 분은 차츰차츰 이어서 이렇게 앉고, 제일 나중에 오신 분은 자연히 그래서 뒤에 앉으시고, 이렇게 되어야  것입니다.

어중간하니 중간에 가서 앉으면, 앞에는 비워놓고  뒤에 가서 앉었고이렇게 되지를 않고 차례차례 앞에서부터  내려간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먼저 와서 하신 분이 그렇게 경건하고 엄숙하게 정진을 하고 계신다면, 뒤에 오신 분들도 자연히 차례차례 앉으면서 앉자마자  참선하시고, 앉자마자 참선하시고 해서, 법회 시작할 때까지 삼십  전에 오시거나,  시간전에 오시거나 먼저 오셔서 정진하신다면 그것도 또한 좋은 것이 아니냐  말씀입니다.

이것이  용화사 법보제자들이 법문을 들으러 오셔서, 법당에 들어오셔서 취해야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법보재(法寶齋)라든지, 초파일이라든지 그밖에 입춘이나 동지차례라든지 이럴  부처님 앞에, 영단(靈壇) 앞에 차려 놓은 모든 재물(齋物)을  공양(供養)을 하시게  때에는  알아서  고루고루 잡숫도록 모다 해드릴 텐데.

여기서 직접 손을 대서 서로 다투어서 그것을 잡술라고 하는 그런 일은물론 여기에 계신 분은 대부분 그러실 리가 없겠지만, 가끔 많이 손님이 오시다 보면 종종 그런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들은 질서 없는 일이고, 법보제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질서가 없는 곳에는 혼란이 오고, 혼란이 오는 곳에는 화두를 들고 경건하게 정진한 수행인의 자세가  수가 없는 곳입니다. 들어오실 때에도 그렇게 질서있게 그렇게 하시려니와 법회가 끝나고 나가실 때에도 차례차례 이렇게 나가시도록 그렇게 하시고.

 식당에 내려가셔서 공양을 하시게  때에도 차례차례 질서 있게 그렇게 하신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한 일들이 고대로 바로 정진이 되도록.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 무시선이라 하는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디 가서 나는 용화사 다니면서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最上乘法) 법문에 의지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합니다 감히 이렇게 말씀을 하기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도량에 왔을 때만 그러실 것이 아니라,  조계사라든지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들으러  가시더라도 고대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용화사 신도는 다르구나  말을 잘하고 그래서가 아니라, 하는 행동이 벌써 다르고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가 다르고, 경건하게 합장을 하고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서 신도끼리 인사 한마디 하는 것도 벌써 다르고.

 

어느  법당에 법문을 들으러 들어가서 따악 앉아 계신  모습만 봐도 ! 저분은 바로 참선을 하시는 분이로구나. 저분은 바로 용화사 법보제자로구나 이렇게 되도록 해야   생각을 합니다. 물론  가운데는 거개(擧皆),  90% 이상이  그렇게 하신 분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새로 오신 분들도  다른 절에 다니신 신도분도 그렇게 하셔서 법회장 자체가 엄숙하고 경건해야법회 분위기, 법문 듣는 분위기가 그렇게 엄숙하고 경건해야 법을 설하는 사람도 자연히 정말 좋은 법문(法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말을 하는 연설가(演說家)가 아니고,  좋은 말재주를 가지는 변사(辯士)도 아니고,

여러분이 지극한 신심과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주시면 저는 말도   모르지만 저절로 마음에서부터서 우러나와서 여러분의 마음에 가서 꽂힐  있는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오고, 분위기가 산만하고 엄숙하고 경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릴라고 마음을 먹어도 영판 말이  안되고 그래서.

 

그래 저는 항시 어느 절에서 법문을 청하면 나는 ‘방안퉁수’가 되어 가지고 용화사에서만   조금씩 하지 다른  가면은 도저히 법문을 하들 못합니다.

방안퉁수는  방에 앉으면 삐빼삐빼 제법 불다가, 다른  가서  퉁수  불어볼라면 영판 소리가  나고 대롱 소리만 피피~ 난다. 이것이 바로 방안퉁수라 하는 건데.

그래 나는 방안퉁수가 되어서 어디 다른 절에서 초청을 하면 도저히 가서 하들 못합니다.  그러냐?

 

여기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해서 훈련을  시켜 놓고, 여법(如法)하게 모다 지도를  놓으셔서 여러분들이 들어오셨다 하면 모두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잘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신심과 조실 스님의 법력에 힘입어서 그래도 겨우  마디   있는데,

다른 절에 가면 웅성웅성 웅성웅성 하고 법상에 올라와서  5 이상 가만히 앉았어도 영판  잡음이 가시지를  해서 그런 상황에서는 퉁수가 나오질 않습니다. 저도 퉁수를 조금 엉터리 퉁수를 부는데,  방안에서만 불고 다른  나가면 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법사(法師) 스님으로부터 좋은 법문을 듣고 싶으면, 여러분 자신이 그런 경건하고 엄숙하고 뜨거운 신심이 여러분 가슴속에 넘쳐흐르는 마음을 가질 때에  법사의 좋은 법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도 첫째, 분위기가 좋고  종이도 좋고, 붓도 좋고, 먹도 좋고, 물감이 좋아야 좋은 작품을 그리는 것입니다.

장바닥에다가 신문지 같은 ,  마분지 같은 것을 놓고,  몽당 빗자루 같은 그런 붓을 갖다 놓고  그림 하나, 좋은 그림 하나 그려 주십시오 절대로 좋은 작품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음악가가 음악을 부른다든지 또는 피아노나 어떤 악기를 연주할 때에도  장소가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만큼 그렇게 엄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준이 높은 청중과 그런 음악을 연주할  있는 장소와 분위기가 훌륭해야  훌륭한 음악을 연주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법문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항시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녁이 분명해야  과녁을 보고 활을 쏴서 명중(命中)을 시키는 것이지지금 우리나라 궁도(弓道), 양궁(洋弓)이 세계적으로 떨치고 있는데 활을  때에도  과녁이 분명하게 ! 있어야  활을 쏘는 사람도 정신을 통일을  가지고 정확하게 딱! 맞추는 거지,

과녁이 삐딱하니 있어 가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여 쌌고 그런다면 아무리 활을  쏘는 사람도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법문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법문을 듣고 싶고, 법사로 하여금 훌륭한 법을 설하게 하고자 하시거든, 여러분 자신이  법문을 받아들일  있도록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세로, 신심으로.

댁에서 오실 때부터서 며칠 전부터서 며칟날이 법회날이다하면은 달력에다 미리미리 표를  놨다가, 그날은 어디 다른  놀러갈 것도  보류를 하고, 식구대로 모다 어른과 애기어린이 법회도 있고, 중고등학교 법회도 있고  어른 법회도 있으니그날은 모다 노소남녀가 손에 손을 잡고 미리서 부터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오셔서 법문을 듣는다면,

 

아무리 엉터리 법사라도 여러분의  지극한 신심과 법력으로 좋은 법문을  할래야   수가 없고, 저절로 아무 말을 해도  법문이 펄펄 살아있는 좋은 법문이비단 평범한  한마디를 하고, 평범한 게송(偈頌) 하나를 읊어도  게송  한마디가 여러분의  지극한 신심의 과녁에 가서 ! 꽂혀 가지고, 여러분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있는 그런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2333~3949)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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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죽비( 대나무 /빗치개·통발 )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 들어가는 , 좌선(坐禪) 시작하는 . 참선(좌선)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丹田]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없는 생각 ()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선객(禪客 참선 /손님사람 )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 ·남의  ) ; 남의 집이나 가정을 높여 가리키는 .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배례(拜禮) ; 절을 하여 예를 갖춤. 또는  .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줄임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 전당이라는 . 
그래서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모셨고,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

*재물(齋物) ; 절에서 재(齋)를 지낼 때 신도나 재자(齋者)가 부처님이나 영단(靈壇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에 올린 공양물(供養物).

*공양(供養) ; ①불()•()•() 삼보(三寶) 음식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

*정진(精進) : []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六波羅蜜)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 닦는 () 있어서는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

[참고] 송담스님(No.152)—1981 10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 증득(證得) 바로  곳이드라

그렇게  생각  생각을 무엇을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한 걸음  걸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화선(看話禪) ; () 화두(話頭)  말이다. 간화(看話) 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을 본다[]’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화두를 ()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거개(擧皆 들 거/다 개) ; ①전체에 가까운 수효나 분량. 거의 대부분. ②대체로 모두.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말재주 ; 말을 솜씨 있게 남달리 잘하는 기술.

*변사(辯士 말 잘할 변/선비·남자 사) ; ①말솜씨가 좋아 말을 잘하는 사람. ②무성 영화를 상영할 때 영화에 맞추어 그 줄거리나 대화 내용을 설명하던 사람. ③연사(演士 연설하는 사람).

*방안퉁수 ; ‘자기 방안에서는 퉁수를 제법 부는데, 밖에 나가서는 퉁수를 잘 못 부는 사람’의 뜻으로 ‘집안에만 들어앉아 밖에 나가 별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퉁수 ; ‘퉁소(洞簫 국악기의 하나로 가는 대로 만든 목관 악기)’의 사투리.

*여법(如法 같을·같게 ·따를·좇을 /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법사(法師) ; ①심법(心法) 전하여  스님. ②불법(佛法) 통달하고 언제나 청정한 수행을 닦아 남의 스승이 되어 사람을 교화하는 스님. ③설법하는 스님.

*명중(命中 목숨·표적 명/가운데·과녁에 맞을 중) ; 화살이나 탄환 따위가 겨냥한 곳에 바로 맞음.

*며칟날 ; 그 달의 몇 번째 날.

*목욕재계(沐浴齋戒) ; 제사나 중요한  따위를 앞두고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 피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

*게송(偈頌) ; (). () ()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15. 1. 10. 11:34

§(112) 법문을 옳게 듣는 길 /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 / ‘딴 생각[別念]’해서는 안됨 / 공부가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 해야 / 칠통(漆桶) 타파(打破).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祖師)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생각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 (용112)

 

약 18분.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우렁찬 음성으로 최상승 법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따지고 분별(分別)하고 그렇게 해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장님이 코끼리 구경한 것 같고 또 귀머거리가 음악을 감상한 것 같아서,
한 시간을 통해서 들어도 대관절 내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가? 무슨 법문을 들었는가? 주욱 종합을 해 보아도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그러한 느낌이 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이해를 못한다 하더라도, 그 법문을 들어서 귀에만 지내가더라도 그 인연으로 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그 법문을 당장은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법문을 정성스럽게 듣고, 듣는 가운데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자기의 본참화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화두를 생각 생각이 간절한 의심으로 관조해 나간다고 하면은,

오히려 그 법문 내용을 소상하게 잘 이해를 해서 ‘아하! 이런 말씀이로구나. 이런 말씀이로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서 들은 사람보다도,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그 뜻을 알 수 없는 그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들어가는 사람이 훨씬 더 법문을 잘 들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승 법문을 옳게 듣는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떠억 들어 보임으로서 법을 전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거렴화(擧拈花)’
또 다자탑전에서 자리를, 누더기를 입은 제자 가섭존자에게 자리를 노나서 앉히시는 ‘다자탑전(多子塔前)의 분반좌(分半座), 또 열반(涅槃)하셔서 곽 밖으로 두 다리를 써억 내미시는 ’곽시쌍부(槨示雙趺)‘ 이렇게 해서 3차례에 걸쳐서 법(法)을 전(傳)하신 법문을 하셨습니다.

영산회상에 꽃을 드는 도리나, 다자탑에서 자리를 노나 앉으신 것이나, 또 열반회상에서 곽(槨) 밖에 두 다리를 내보이시는 도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 도리'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아! 이것은 이러한 뜻이로구나’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신 뜻은 이것은 바로 불교의 진여(眞如)의 체(體)를 전하시고 또 분반좌 하신 것은 용(用)을 전하시고, 곽시쌍부 하신 것은, 체와 용을 한목 전하신 것이다.’
이런 등속(等屬)으로 아무리 따져서 수긍(首肯)을 해봤자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결과 밖에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참다운 진리가 될 까닭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祖師)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서 깨닫기를 바란다든지, 이래가지고서는 공부를 기껏 잘해 나가다 중요한 고비에 있어서 자기의 공부를 그르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여러 가지 공안이 있지만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도 받은 한 공안에 일여(一如)하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잘되어갑니다. ‘이대로 해가면 얼마 안가면은 득력(得力)을 할 수 있겠거니’ 이리 생각하고, 한 철, 두 철을 지내다보면 영 옛날보다도 훨씬 더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번뇌 망상이 더 잘 퍼일어나고 영 자리가 잡히지를 않고 이렇게 해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도 번뇌심을 내지 말고 심호흡을 하면서 착실히, 착실히 공부를 다져나가면 그렇게 해서 한 고비를 넘기면은 다시 또 수월하게 공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수월하게 공부가 화두가 잘 일여하게 들리고 잘되어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입니다.
기뻐하는 생각 내면 벌써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니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러한 번뇌심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도 말고 또 잘 안된다고 해서 번뇌심(煩惱心)도 내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를 지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애를 써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공부를 다잽이를 해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금방 도망가고, 금방 딴 생각이 들어오고 그랬던 것이, 자꾸자꾸 해가면은 나중에는 헐려고 안 해도 화두가 떠억 들어지게 되면서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언제 지내간지 모르게 시간이 지내가고,
그때는 다리가 저린 것도 없고, 몸이 괴로운 것도 없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없고, 정신도 깨끗하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앉아있다고 하는 그것마저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뚱이마저도 의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싱그럽고 이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두는 그런 가운데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깨끗하고, 너무 편안해서, 까딱하면 화두를 그때 망각(忘却)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절대로 그러한 경지에서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가운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깨끗하게 독로(獨露)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잠깐이라도 화두를 놓쳐버리고 ‘아! 좋구나. 이러한 경지로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툭 깨닫게 해주셨으면, 이러다가 빨리 깨달았으면’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다가 내가 까딱하면 미치면 어찌할고’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고비에서 그 천길만길 되는 길를 간신히 간신히 올라가 가지고, 발 한번 삐끗해 가지고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정진을 하면은 옆에 사람들도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하! 저이가 지금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는구나’ 알게 되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렇게 공부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입승(立繩) 스님을 비롯해서 좌우에서 서로서로 잘 보호를 해줘야 합니다.

대중 가운데에는 혹 ‘지가 공부한 척 하고 그런다’고 아주 뒤에서 수근수근하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만은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공부가 또 순일하게 되어 갈 때가 있을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순일하게 되어 갈 때 주위에서 잘 보호를 해주고, 자기도 그럴 때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공부를 잘 보호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렇게 나가면 나중에는 일어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도 고대로 있고, 천만 명이 우글거리는 시장 속에 들어가도 조금도 화두가 흐트러지지를 아니하고, 딴 생각을 일부러 좀 할려고 해도 딴 생각이 되지를 않고 이러한 경지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지않아서 칠통(漆桶)을 타파(打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를 해야지, 그때에 조심성 없이 또 좌우에서 방해를 친다든지 보호를 안 해가지고 그러한 경지(境地)가 깨져버리면 나중에는 1년, 2년, 3년을 애를 써도 여간해서 다시 또 그러한 경지가 돌아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법(如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면 누구라도 반드시 그러한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처음~17분3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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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지내가다 ; '지나가다'의 사투리.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삼처전심(三處傳心) ; 세존이 가섭(迦葉)존자에게 마음-선(禪)의 등불을 따로 전했다는 세 곳.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영산회상거염화 靈山會上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사라쌍수하곽시쌍부 沙羅雙樹下槨示雙趺)이 세째이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
다자탑(pahuputraka)은 중인도 비사리(毘舍離Vaisali)성 서북쪽에 있다。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떤 장자(長者)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이룬 뒤에, 그 아들 딸 육십 명이 아버지가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그 곳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를 낮보았다。이에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를 나누어 두 분이 함께 앉으셨다 한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
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사라쌍수하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 :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
부처님께서 북부 인도의 구시라(拘尸羅 Kusinagara)성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그리하여 학의 숲(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몸은 금으로 만든 관에 모시고 다시 구리로 지은 덧곽에 모셔 두었는데, 먼 곳에 갔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7일 만에 당도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3번 돌고 3번 절하매, 관곽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 한다.
*노나다 ; ‘나누다’의 사투리.
*등속(等屬) ; 나열한 사물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몰아서 이르는 말.
*수긍(首肯) ; 옳다고 인정함. 옳게 여김.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득력(得力) ; ①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 ②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번뇌(煩惱)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나, 이곳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을 말함.
*밀밀면면(密密綿綿) :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길게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것。 정밀하게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는 모습.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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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듣는 법2014. 5. 31. 15:57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29분 51초부터 시작됩니다>

 

 

§(240) 법문듣는 법 /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 본참화두의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송담스님(No.240)-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 법회에서. (용240)

 

약 5분.


오늘 갑자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 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局執)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거와 같애요.

그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그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약을 차라리 안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법(法)에 국집하면 - 아주 신심 있는 이는 그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법(法)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 그 배는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하거든.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더 잘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허면서 밥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탈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그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9분3초~33분1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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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 p53 에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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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듣는 법2014. 4. 16. 16:23

§(568) (게송) 일체불류환유견~ / ‘나는 참선을 한다’는 생각만 있어갖고는 정말 생사해탈이 되는 것은 아니고,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이뭣고?’를 챙기셔야 됩니다.

 

**송담스님(No.568)-96년 법보재 법회에서. (용568)

 

약 5분.

 


일체불류환유견(一切不留還有見)이요  요무가기상존지(了無可記尙存知)니라
나무~아미타불~
고가전지비친도(故家田地非親到)요  화병하증요득기(畫餅何曾療得饑)리요
나무~아미타불~

일체불류환유견(一切不留還有見)이여. '아무것도 나는 집착한 것이 없다. 아무것도 나는 집착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하더라도, ‘나는 머물른 것이 없고 집착한 것이 없다’고 하는 그 견해는 남아있는 것이고,
요무가기상존지(了無可記尙存知)다. 가히 요달(了達)해서, 요달한 그 생각이 없다고 해도 ‘없다’고 하는 그 알음알이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일체에 머물러 있는 바가 없다. 요달한 기약이 없다’고 한 그런 지견(知見)이 남아 있으면, 고가전지비친도(故家田地非親到)여. 우리의 본래의 마음고향에는 아직도 친히 이르른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마치 그림으로 된 떡떡을 아무리 맛있게 보기 좋게 그려 놨다 하더라도, 그 그림의 떡을 봐가지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여다보고 있어도 배고픔을 면틀 못한 것이다.(畫餅何曾療得饑)


지금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대한 말씀을 했고, 정법(正法)에 대한 말씀을 했고, 생사해탈(生死解脫)에 관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들었습니다마는 ‘나는 정법을 믿는다, 최상승법을 믿는다, 나는 참선을 한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만 있어 갖고는 정말 생사해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부터 ‘이뭣고?’를 챙기셔야 됩니다.

이 법회가 끝난 뒤에 여러분은 점심 공양을 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비록 변변치 못합니다. 도시락도 싸고, 또  비빕밥도 했습니다. 무엇이 되었건 질서있게 천천히 별로 맛은 없지마는 ‘이뭣고?’를 하시면서 잡수면 그래도 그런대로 감칠맛이 있을 것입니다.

‘이뭣고?’ ‘이뭣고?’를 항상 가시는 걸음걸음 ‘이뭣고?’를 하시고, 아주 이생을 다 사시고 숨 딱! 끊어질 때도 ‘이뭣고?’로 사시고, 이 몸을 버리고 가시는 걸음걸음에도 ‘이뭣고?’로 가신다면, 지옥 천당 어디를 가나 여러분 발 디딘 곳은 바로 그 길이 바로 해탈도(解脫道)가 되실 것입니다.(62분10초~67분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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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체불류환유견~’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2014) p205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이뭣고?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이뭣고? (이 무엇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감칠맛 ; 음식물이 입에 당기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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