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중현 체중현 공(空)'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4.01.08 §(280) 용화선원의 가풍. 깨달았다 하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 선재동자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것 때문에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 / (게송)역력이빈주~ / 大疑大悟 小疑小悟 不疑不悟. 2
  2. 2023.12.17 §(423)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지금 사바세계에 사는 것이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 / 체중현 도리 이러한 견처가 있으면 여지없이 털어 버리고, 순수한 초학자의 자세로서 정진해야. 1
  3. 2021.11.10 §((217))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일대사인연 / 대분심, 대신심, 대의단을 가지고 심원의마(心猿意馬)를 때려죽여야 / 생사를 당적하려면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야.
  4. 2021.03.14 §((233)) 복혜구족 / 현중현(玄中玄) / 가장 훌륭한 수행법 간화선 / 묘관(妙觀) / 노정기(路程記) / 일어나는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수마(睡魔).
  5. 2021.02.25 §((411))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어떤 수좌(首座)의 소견 /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 인가를 할 수 있다 / 『서장』에 증시랑의 철저한 발원.
  6. 2020.09.20 §(세등64) (게송)일이화상석~ / 공(空)도리, 체중현 도리 가지고 인가를 할 수 없다 / (게송)참선비식념~ /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참선의 목적.
  7. 2019.11.15 §(282)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탁마(琢磨) / 삼구(三句), 삼현(三玄) / (게송)해고종견저~ /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보아야.
  8. 2018.10.19 §(427) (게송)욕득불초무간업~ / 중봉선사의 돈오점수에 대한 말씀. 별립생애 / (게송)참선수투조사관~ / 깨달음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바로 활구참선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라.
  9. 2014.03.12 §(세등68) (게송) 구명소일모선성~ /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여 / 조백(糟魄).
  10. 2014.02.11 §(258) (게송) ‘학도지인불식진~’ /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식신(識神)을 갖다가 자기의 본래신(本來身)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280) 용화선원의 가풍.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 선재동자의 구도. 선재동자가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것 때문에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 (게송)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송담스님(No.280)—19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85.11.26)(용280)(체중현)

 

약 14분.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디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路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 철 두 철 하다 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進趣)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道場)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17분47초)


『화엄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향해 가면서 차례차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했습니다.

한 선지식 친견하고 거기서 법문(法門)을 듣고 그리고 또 거기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그다음에 그 선지식이 또 그다음 선지식을 소개를 하면 또 그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선지식 밑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승사(承嗣)를 해서 그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거기서 또 얻은 바가 있어.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53선지식을 친견해 나가는 데 그 53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 스님도 있고, 신(神)들도 있고, 외도도 있고, 창녀도 있고, 보살도 있고, 동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선지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위법망구적으로 친견하고 승사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53선지식한테 배운 들은 깨달은 법문을 조옥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고대로 가슴에 간직을 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해서 미륵보살이 손 한번 탁! 튕기는 바람에 53선지식한테 들은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을 해라. 맨 처음에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해라” 한 말씀을 듣고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리라’ 하고 마음을 먹자마자, 문수보살이 저 먼 일백십성이나 멀리 떨어진 그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터억 뻗쳐 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만져 주셨습니다.

만지시면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착하고 착하구나! 네가 철저한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53선지식을 그렇게 아무 딴 퇴타심(退墮心)이 없이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그렇지 못했으면 조금 얻은 것으로 해서 만족을 삼아 가지고 중단을 했을 것이며, 조금 얻은 것으로써 거기에 집착을 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해탈과 선지식의 섭호(攝護)한 바가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문수보살(선재동자)은 확철대오를 해서 문수보살과 같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삼독(三毒)이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변했으며, 육식(六識)이 육신통(六神通)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역력(歷歷),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그 말이여. 역력해서 빈주(賓主)를 여의었어. ‘주관 객관, 너다 내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여. 적적요요(寂寂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모든 ‘색상(色相)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이다’ 그런 색공의 견해도 다 끊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하라. 우리 눈앞에 형단(形段)이 없으되—볼라야 볼 수도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이놈이 분명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알라야 알 수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古人)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은 우뚝 백운(白雲) 가운데 섰느니라.(14분13초~27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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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풍(家風) ; ①종풍(宗風)—종문(宗門)의 풍규(風規 풍습상의 규정). 문풍(門風)—선문(禪門)에 있어서의 종풍(宗風).
②선림(禪林, 선종禪宗)에서의 행위의 규범. 청규(淸規, 선원에서 일상의 생활규정). 선종에서 가르침을 나타낼 경우, 각자가 갖는 독자적인 방식, 또는 지도의 방법을 말함.
③그 종(宗)만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 ④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 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삼현 ;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참고 ❶]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지눌 1158~1210 |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176~180. p200~20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p542~546.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또 물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잘 들었다. 그러나 고금 선문(禪門)의 통달한 사람이 견성하여 성불한 것이 어찌 일부분 성정(性淨)의 체성이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大師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略 曰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顆圓光 非內外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遍含一切法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나는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왜 듣지 않았던가? 영가 진각(眞覺) 대사는 조계(曹溪)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본심을 깨치고 노래를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마음 거울이 밝아 걸림이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게 사무쳐 사계(沙界)를 두루했다.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뚜렷한 광명은 안팎이 없다. 한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뚜렷이 통하고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모두 머금고 있다. 한 달이 일체의 물에 두루 나타나매, 일체의 물의 달이 한 달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하였다.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 曰 十方齊現一毛端 華藏重重帝網寒
又大慧禪師 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 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 若信得及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또 영소무(英邵武)도 본심을 깨치고 게송을 지었었다. 간략히 말하면 ‘시방 세계가 한 털끝에 한꺼번에 나타나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중중하여 제망(帝網)이 차다[寒]’
또 대혜(大慧)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고 ‘불성(佛性)의 뜻을 알고자 하면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하나니, 시절이 오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티끌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와 왕궁에 태어나 도량에 앉고, 법륜을 굴려 마군을 항복하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신 뒤에 열반에 들되, 그 모두가 이 시절을 벗어나지 않은 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줄을 믿으면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 하였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傳記中 不可勝數 昧者 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之旨故 纔聞禪者 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본심을 깨치고 제 마음 거울 속에 제망(帝網)처럼 중중한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본 이런 일들은 선문의 기록 가운데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있다. 그런데 우매한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문의 기록도 보지 못하고, 또 화엄대론(華嚴大論)의 뜻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참선하는 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성정(性淨)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이다.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들이 말로 표시된 의리(義理 사상이나 내용)의 한계에 걸리어, 능히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와 달은 손가락에 있지 않듯이, 법이 곧 내 마음임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을 마음에 전한 것이다[以心傳心].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 故 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 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 未忘 亦爲所破也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타파한 여러 가지 언구(言句)가 일부분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이성(理性)의 뜻에 어느 정도 가깝지마는, 우매한 사람들은 그 뜻를 알지 못하고 매양 비슷한 말의 예(例)를 가져 돈교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설사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계의 매우 심오한 법문에 대해서도 그 법에 애착하여 지해(知解)를 버리지 못하면 그것도 타파해야 할 것이다.

台敎 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 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 所及 故 淸凉祖師 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 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禪門 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천태교(天台敎)에서도 ‘원문(圓門)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면 초교(初敎)와 같이 타파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만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법계를 증득한 곳이라, 미리 말할 수도 없고 또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뜻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량 조사는 ‘원음(圓音)은 묻지 않아도 항상 연설하시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고 마음으로 전한다’ 하고,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의었음을 증득하셨다’ 하였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생각을 여의고 서로 전한 것이 법계를 단박 증득한 곳이요, 결코 돈교에서와 같이 법상(法相)을 설하지 않고 오직 진성만 보아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 體中玄 二 句中玄 三 玄中玄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선문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다. 첫째는 체중현(體中玄 체 가운데 현)이요, 둘째는 구중현(句中玄 구 가운데 현)이며, 셋째는 현중현(玄中玄 현 가운데 현)이다.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等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 未忘故 以句中玄無跡平常灑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灑落知見 灑落言句故 以玄中玄良久默然棒喝作用 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灑落知見 灑落言句 故 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玄 雖非臨濟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첫째의 체중현의 문에서는 ‘가없는 세계의 경계의 자기와 타인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는 등의 일일이 서로 걸리지 않는[事事無碍]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언교(言敎)에 대해 지해(知解)와 분별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구중현의 자취 없고 평상(平常)한 쇄락(灑落 산뜻한)한 언구(言句)로 그 집착을 부수어 불법의 지해를 단박 잊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쇄락한 지견과 쇄락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의 양구(良久)와 방할(棒喝) 등의 작용으로 단련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앞의 둘째 현문의 쇄락 지견과 쇄락 언구를 잊기 때문에 ‘뜻을 얻고 말을 잊으매 도와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법계를 단박 증득하는 곳이다.(이 가운데 비록 삼현三玄이 임제臨濟의 본의가 아니나 옛 스님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선문에도 처음 들어온 사람이나 하열한 근기를 위해 흐름을 따르는 허망과 더러움[妄染] 속에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性淨妙心]이 있다고 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 들어간 뒤에 그 지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 수 있다.
만약 지해와 분별을 잊지 못하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갖 행의 연기문 가운데서 몸을 돌려 걸림이 없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 ❷] 『보조국사어록,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글)’ p210~211. P216~217. P229. P231.
『선문촬요(禪門撮要)』 (청허당 휴정 엮음 | 연관 옮김 | 희양산 봉암사)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p564~565. P571.

禪門亦有爲密付難堪 借敎悟宗之者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云 無邊刹境自他 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선문에도 은밀히 부촉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문을 빌어, 종지를 깨닫는 자를 위하여 진성(眞性)이 연기(緣起)하는 사사무애 법을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삼현문(三玄門)에서 처음 근기[初機]가 들어갈 수 있는 체중현(體中玄)에서 밝힌 것과 같다. 거기에 “가없는 세계 경계[刹境]의 나와 남이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十世)의 고금이 처음과 끝이 지금 바로 한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하고, 또한 “한 글귀가 밝고 밝아 온갖 현상을 거두어 들인다”한 등등이 이것이다.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脫略窠臼者 纔聞俓截門 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

선문 가운데도 이런 원돈(圓頓) 신해(信解)하는 진실한 말씀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지만, 이것을 사구(死句)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를 내게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초심 학자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를 아직 참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에 부합하는 원만한 말씀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치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상근기로서 은밀히 전한 뜻을 감당하여 기존의 격식[窠臼]을 벗어날 수 있는 이라면,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조금 듣기만 하고도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 걸리지 않고 곧 속뜻[落處]을 아니, 이 이를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은 자’라 한다.

禪門亦有多種根機 入門稍異 或有依唯心唯識道理 入體中玄 此初玄門 有圓敎事事無碍之詮也 然 此人 長有佛法知見在心 不得脫灑 或有依本分事祇對灑落知見 入句中玄 破初玄門佛法知見 此玄 有徑截門 庭前栢樹子麻三斤等話頭

선문에도 또한 여러 가지 근기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다소 다르다. 어떤 이는 유심(唯心)과 유식(唯識)의 도리에 의하여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처음 현문[初玄門]인데, 원교의 사사무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항상 불법의 지견(知見)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이를 벗어나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이는 본분사에 의지하여 쇄락한 지견에만 대하여 구중현(句中玄)에 들어가 초현문(初玄門)의 불법 지견을 타파한다. 이 현문(玄門)에 경절문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등의 화두가 있다.

然 立此三玄門古禪師之意 以本分事祇對話頭 爲破病之語 故 置於第二玄 然 未亡灑落知見言句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 立第三玄中玄 良久默然棒喝作用等 破前灑落知見 所以云 三玄施設 本由遣病 若望上祖初宗 卽未可

그러나 이 삼현문을 세운 것은 옛 선사의 뜻인데, 본분사에 상응하는 화두로 병을 타파한다는 말을 삼기 때문에 제이현(第二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쇄락한 지견이라는 언구를 잊지 못하여 오히려 생사에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삼(第三) 현중현(玄中玄)의 양구, 묵연, 방, 할의 작용 등을 세워서 앞의 쇄락한 지견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삼현문을 시설한 것은 본래 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만일 옛 조사의 처음 종지에서 보면 그것도 옳지 않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19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반기이파) (4분 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참고 ❻]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여래선(如來禪) ;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의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는 선.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전혀 없다'는 허무론적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는 부정된다.
인과의 도리를 지워 없애는 삿된 견해이니 모든 지견(知見) 중에서 공견의 과실(過失)이 가장 무거움.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제7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 지황(智隍)선사.
但心如虛空 不著空見 應用無礙 動靜無心 凡聖情忘 能所俱泯 性相如如 無不定時

다만 마음을 허공처럼 하되 공견에 집착하지 않으면 응용에 걸림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무심하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잊고 주관[能]과 객관[所]이 다 없어져 성품과 형상이 여여하여 정(定)이 아닌 때가 없으리라.
*진취(進趣 나아가다·오르다 진/달리다·향하다·재촉하다 취) ; (정진해) 나아가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최초로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 들은 53위의 선지식(스승).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라고도 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승사(承嗣 받들 승/이을 사) ; 후임자나 후대가 선임자나 선대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
*미륵(彌勒) : 대승보살. [산스크리트어] Maitreya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등이라고 음사하고, 한역하여 자씨(慈氏).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현재는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고도 하고, 미래에 성불할 것이 예정된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신근(信根) ; 신(信, 진리에 대한 확신)의 뿌리. 신념(信念,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기초. 신근의 근(根)은, 나무뿌리와 같이 능히 유지시키는 것과 생기게 하는 것을 뜻함.
[참고] 신(信) : ①진리에 대한 확신. ②신은 마음을 맑게 하고 해태를 막는 정신작용이다. 마치 수정주(水精珠)가 능히 탁한 물을 맑게 하듯이 마음에 신(信)이 있으면 마음으로 하여금 맑게 하는 것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 「만약 일체중생이 처음에 삼보(三寶)의 바다에 들어오매 신(信)으로써 근본을 삼고 불가에 머무르거든 계(戒)로써 근본을 삼으라」 하시고, 지도론(智度論)에 「불법대해(佛法大海)에는 신(信)으로 능입(能入)을 삼고 지(智)로 능도(能度)를 삼는다」 하시며, 화엄경에 「신(信)은 도(道)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信爲道元 功德母)」 하신 것이다.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섭호하다(攝護-- 도울 섭/보호할 호) ; (부처님이 중생을) 받아들여 보살피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보현보살(普賢菩薩) ;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상징함.
산스크리트어 Samantabhadra.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 표기. 보현(普賢), 편길(遍吉)이라 한역.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
연화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보살들은 다 각각 부처님 공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어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다.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 성냄 ·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삼취정계(三聚淨戒) ; 대승불교 보살(菩薩)이 지녀야 할 계법(戒法, 부처님이 정한 계율의 법)에 대한 총칭. 삼취청정계, 삼취계라고도 한다. 섭률의계(攝律儀戒) · 섭선법계(攝善法戒) · 섭중생계(攝衆生戒)로 나뉜다.

①섭률의계는 5계 · 10계 · 250계 등 일정하게 제정된 여러 규율위의(規律威儀) 등을 지켜 일체의 허물과 악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지악문(止惡門)이라고도 한다.
②섭선법계는 적극적으로 일체의 선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수선문(修善門)이라고도 한다.
③섭중생계는 자비심으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는 일체의 이타행위를 말한다. 권선문(勸善門)이라고도 한다.

①섭률의계 ②섭선법계는 자리(自利)이며, ③섭중생계는 이타(利他)행위이다. 모든 계법은 그 어느 것이라도 이 3가지에 포함되는데, 청정하기 때문에 정계(淨戒)라고 한다. 취(聚)는 집적(集積)의 뜻.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무량공덕(無量功德) ; 무량의 공덕.
*무량(無量 없을 무/헤아릴 량) ; ①헤아릴[量] 수 없이[無] 많음. ②[불교] 가히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화엄경》에 나오는 백이십 수(數) 중 한 수의 이름이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게송)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도능선자(道能禪子)에게’ 참고.
*빈주(賓主 손님 빈/주인 주) ; ①손님과 주인. 객관(客觀)과 주관(主觀). 현상세계와 절대의 진여(眞如). ②수행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제자(賓)와 스승(主).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참고] 『박산화상참선경어(博山和尙參禪警語)』 (成正 集) <卍續藏 第63冊 No.1257> '시초심주공부경어(示初心做工夫警語)'에서.
做工夫 貴在起疑情 何謂疑情 如生不知何來 不得不疑來處 死不知何去 不得不疑去處 生死關竅不破 則疑情頓發 結在眉睫上 放亦不下 趁亦不去 忽朝樸破疑團 生死二字是甚麼閑家具 噁 古德云 大疑大悟 小疑小悟 不疑不悟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아침에 의심덩어리[疑團]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엑[噁] !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기를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법계(法界) : [범] dharmadhatu.  dharma 곧 법은 온갖 유형 무형의 물질과 모든 일과 어떤 이치이거나를 다 들어 말하고  dhatu는 경계(境界) 또는 범위(範圍)란 말이다. 그러므로 온갖 것[萬有]을 총괄하여 하는 말이니, 우주의 전체와 진리의 전체, 법 성품(法性)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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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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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현중현 체중현 공(空)2023. 12. 17. 08:05

§(423)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우리는 선악(善惡)의 업연(業緣)으로 지금 사바세계에 사는 것이 꿈속에서 몸을 받아나 살고 있는 것. 다행이 이 자리에 사부대중은 꿈인 줄 알고 참선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고 계시다.
정진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얻어진 공 도리, 체중현 도리 이런 것은 정말 버리기가 어렵다. 그러한 견처가 있으면 탁! 털어 내놓고 여지없이 털어 버리고, 정말 새로 발심(發心)한 순수한 초학자의 자세로서 정진을 해야.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이 무슨 큰스님이라 하고 그렇게 되어 가지고 남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지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해 가지고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그런 대승심을 가지고 정진하는데, 그까짓 조그마한 소견을 아까워서 버리지를 못하고 그놈을 떠억 간직해 가지고 자기도 한 소식했다 하는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남 앞에 으시대봤자 그것 어디다 쓰겠습니까?

**송담스님(No.423)—1990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용423) (현중현체중현)

 

약 14분.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상찰나실난측(無常刹那實難測)인데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인고
나무~아미타불~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꿈속에서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하다가 저 천상(天上) 금대(金臺)의 만겁량(萬劫糧), 만겁토록 먹고도 남을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는구나.



이 ‘꿈속의 한 알갱이 쌀’이라 하는 것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우리가 이렇게 몸 받아서 한평생을 사는 것이 이것이 꿈속에서 지금 몸을 받아난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식(業識)으로, 그 업식으로 지은 선악(善惡)의 업연(業緣)으로 지금 이 꿈속에 지금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나 가지고 꿈속에서 살면서도 꿈속인 줄을 모르고 지금 살고—시집 장가들고, 아들딸 낳고 모다 이렇게 또 사업을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도 꿈속에서 지금 만난 거고, 지금 이렇게 돈을 벌고 살림을 하고 산 것도 그래가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한 것도 꿈속에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꿈속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은 또 재판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서 복역을 하고 있고, 또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사람도 그것도 역시 꿈속에서 지금 그러고 있는데, 자기 양에 안 차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돈을 벌어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높은 벼슬을 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고 보면 하나도 실다운 것이 아니고 그것이 다 꿈속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이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그것이 꿈인 줄을 아셨어. 아셨기 때문에 그러한 탐착심(貪着心)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출가 사문(沙門)으로서 도를 닦고 계신 분들이여.
또 인연이 지중(至重)해서 출가는 안했지만 또 출가는 못했지만 세속에 몸담아 계시면서도 그런 데에 퐁 빠지지 아니하고 그저 인연을 어쩔 수가 없어서 인연 속에 있으면서도 정법을 믿고 불법을 믿고 참선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고 계신 거여.



여러분들은 참 그런 분들이라, 그러한 데에 집착해 가지고 만겁량(萬劫糧)을 잃어버리고 다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 빠지시지는 않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업(業)이 지중해서 업(業) 속에서 살다 보니 아무래도 정진(精進)에 지장이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결제 때 이렇게 방부(房付)를 들이고 와서 계시기도 하고, 부득이해서 가정을 아주 떠날 수가 없는 분은 출퇴근하시기도 하고, 또 출퇴근할 형편도 못 되시는 분은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을 하신 그런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의 처지 속에서 그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하시니 그 참 얼마나 다행하고 얼마나 감사한지를 모릅니다마는,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그 무상(無常)하기가 잠깐이여. 헤아릴 수가 없어.

하루에도 몇천 명, 몇만 명씩이 죽어가고 또 몇천 명, 몇만 명이 이렇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태어나도 언제 죽을런지—태어나면서 죽기도 하고, 한 달 만에 죽기도 하고, 10세 이내에 죽기도 하고, 20세 이내에 죽기도 하고, 그 고통을 겪어서 공부하고 이제 살 만큼 되면은 터끄덕 교통사고로 죽고.
그 무상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데,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냐. 어찌 이 무상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한 생각을 돌이켜서 철저하게 자기 생사 문제를 향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안 할까 보냐.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는 세속의 오욕락(五欲樂)에다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우리 이미 세속의 오욕락이 허망한 것인 줄 알고, 발심해서 출가해 가지고 정진한 분상(分上)에는 무엇이 ‘한 알갱이 쌀’이냐?



3년 내지 10년, 20년, 30년 정진을 하다보면 자기 나름대로 소견(所見)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소견이 나는 수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 수행력이 생겨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득력처(得力處)가 있을 수가 있는데,


정진하다가 어떠한 그런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 얻어지는 득력처—그것이 체중현(體中玄) 도리가 되었건, 어떤 공(空) 도리가 되었건 자기 나름대로 그 득력처, 그것이 바로 이 ‘한 알갱이 쌀’이다 그거거든.



세속의 명예, 권리, 지위 그런 오욕락에 대한 ‘한 알갱이 쌀’은 그까짓 거 버리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진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얻어진 공 도리, 체중현 도리 이런 것은 정말 버리기가 어려워. 따악 그 자기가 얻은 그 견처(見處)를 따악 속에다 간직해 가지고 도저히 그걸 버릴 수가 없어.



여지없이 그것을 버려 버리고 자기 맥히는 공안에 대해서 정진을 다잽이 나가야 정진이 옳게 되고 반드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분(分)이 있지, 조그만한 견처 그놈을 속으로 간직해 가지고 자기도 ‘한 소식했다’ 하는 그러한 생각을 떠억 지니고서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 사람은 세상없이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어.



이 대중 도반 가운데에 혹 그러한 견처가 있으면 탁! 털어 내놓고 여지없이 털어 버리고, 정말 새로 발심(發心)한 순수한 초학자(初學者)가 되어가지고 정말 알뜰히 완전히 초학자의 자세로서 그렇게 정진을 다잽이할 것을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이 무슨 큰스님이라 하고 그렇게 되어 가지고 남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지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해 가지고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그런 대승심을 가지고 정진하는데, 그까짓 조그마한 소견을 아까워서 버리지를 못하고 그놈을 떠억 간직해 가지고 자기도 한 소식했다 하는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남 앞에 으시대봤자 그것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그러한 분이 없으시겠지만 행여나 앞으로라도 어떤 견처가 나오면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이나 선배 앞에 탁! 털어 내놓고 깨끗이 털어 버리고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바라고, 또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도 정진하다가 어떠한 견처가 있으면—청신사 청신녀라고 해서 그런 견처가 없으라는 법도 없고.



부처님 당시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든지,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라든지, 우리나라에는 부설거사(浮雪居士)와 같은 그러한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네에 못지않은 그러한 대도사들도 있었고, 또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그러한 훌륭한 도인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비록 머리는 안 깎았지만 그 정법을 믿는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심(大疑心)에 있어서는 스님네 못지않도록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45분53초~59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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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 ; 성철스님 ‘납자십게(衲子十偈)’에서 ‘회두(回頭)’ 게송 참고.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금대(金臺) ; ①금으로  꾸며 놓은 대. ②아름답게 꾸며 놓은 대.
*만겁(萬劫 일 만·대단히 만/가장 긴 시간 겁) ; 대단히[萬] 오랜 시간[劫].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꿈[夢] ; ①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의 연속. ②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理想). ③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허무한 기대나 생각. ④현실을 떠난 듯한 즐거운 상태나 분위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⑤덧없음의 비유. 허깨비[幻]와 비슷하므로 환몽(幻夢) · 몽환(夢幻)이라고도 한다.

[불교] 잠을 자면서 꿈꾸면 좋은 꿈을 꾸었거나 나쁜 꿈을 꾸었거나, 꿈속에서는 무엇이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나 꿈 한번 꾸고 깨어나면 실지로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세계, 해나 달이나 별이나 지구나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그 조건이 흩어지면 그것이 또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그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함[爲]이 있는[有] 법(法)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모든[一切]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夢]과 같은 것이며, 꼭두각시 환상(幻像)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泡] 같은 것이며, 그림자[影]와 같은 것이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다. 풀끝에 이슬[露]과 같고 또 번쩍하는 번갯불[電]과 같은 것이다. 응당 이와 같이 관(觀)을 지을지니다[應作如是觀]. 이와 같이 달관(達觀)을 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그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길, 참선(參禪)을 만났습니다.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업연(業緣) ; 업(業)의 과보(果報)를 초래하는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탐착(貪着) ; ①만족할 줄 모르고 탐하고 집착함. 탐하고 구하는 것. 욕심부려 집착하는 것. 집착하는 것. 욕심부리는 것. 욕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대상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②깊이 마음에 두는 것.
갈애(渴愛), 애착(愛著 愛着), 염착(染著), 집착(執着), 탐애(貪愛),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사문(沙門) ; 슈라마나(산스크리트어: śramaṇa, 팔리어: samaṇa)의 음역. 식(息) · 근식(勤息) · 정지(淨志) 등으로 번역. 여러 선법(善法)을 근수(勤修)하고, 악법(惡法)을 행하지 않으며, 심신을 조어(調御)하여 청정(淸淨)한 깨달음의 길을 지향(志向)하고 노력함을 뜻함.
①인도에서 바라문교의 「베다」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제종교 수행자의 총칭.
②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득력처(得力處) ; 힘을 얻은[得力] 곳[處].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 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 (2분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 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 (2분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19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 (2분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 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 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 (2분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 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4분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소식(消息 줄어들다·사라지다·없애다 소/불어나다·살다·번식하다·호흡하다 식) ; ① 산스크리트어 vārttā. 소장(消長) · 증감(增減) · 성쇠(盛衰) 등의 변화. 때에 따라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변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가하는 측면만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참고]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제20권. 당(唐) 청량산(淸涼山) 대화엄사(大華嚴寺) 사문(沙門) 징관(澄觀) 술(述).
言傳授之者 善消息之者 易豐卦云 天地盈虛 與時消息 釋云 消者盡也 息者生也 謂可加則加 可減則減 可出則出 可沒則沒 故言消息

전수(傳授)란 증감의 변화를 잘 하는 것이다. 『역(易)』 「풍괘(豐卦)」에 '천지의 만물이 차고 비며 반복하는 현상도 때와 더불어 일어나는 증감의 변화이다'라고 하였다. 다음과 같이 푼다. '소(消)란 다하여 사라짐이고, 식(息)이란 발생하는 것이다. 증가할 만하면 증가하고 감소할 만하면 감소하며, 나타날 만하면 나타나고 사라질 만하면 사라지므로 소식(消息)이라 한다.

②일상의 기거(起居). 안부. 살아가는 내용.

③원기를 회복시키는 것. 살아나게 만드는 것.
[참고] 『불설아난사사경(佛說阿難四事經)』
人民富有盈穀 孤獨鰥寡 衣食不充 疾病困篤 無以自濟 當給醫藥 糜粥消息 令其得愈 命不橫盡

제왕이나 인민은 부유하여 가득한 곡식을 고아나 외로운 늙은이나 홀아비나 과부나 의식이 충분하지 못한 이나 병이 매우 심하여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이에게 약을 주고 미음과 죽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병이 낫고 횡액에 죽지 않게 하여야 하니라.

④깨달음의 결정적인 단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갖가지 실마리. 또는 깨달은 경계 자체.
[참고]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翁翁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消息)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⑤조짐. 단서. 기미. 분별할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경계를 단소식(斷消息) · 무소식(無消息) 등이라 한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유마거사 ; 유마힐(維摩詰).
*유마힐(維摩詰) : [범] Vimalakirti  음(音)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이라 하고, 줄여서 유마힐 또는 유마(維摩)라고만 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 되는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인도 비사리(毘舍利  Vaisali)성에서 거사(居士)로 지내면서 보살행업을 닦아 크게 교화하였다. 그 수행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제자들도 미칠 수 없었다. 그가 병들어 누우매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가서 문병하는데, 둘 아닌 이치[不二法]에 대하여 여럿이 돌려 가면서 말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유마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유마거사가 가장 둘 아닌 법을 잘 연설한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은 『유마경』의 주요한 내용이다.
*방거사(龐居士) ;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衡陽) 사람. 자는 도현(道玄)이다. 성은 방씨고, 이름은 온(蘊)이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석두(石頭)에게 선지(禪旨)를 짐작하였다. 탐욕스럽고 속된 것을 싫어해 재산을 모두 동정호(洞庭湖)에 던져 버리고 죽기(竹器)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뒤에 마조(馬祖)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마조는 “네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마셔버린 뒤면 일러주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2년 동안 정진하여 깨달았다.

죽으려 할 때 딸 영조를 시켜 그늘을 보아 오시(午時)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했다. 영조가 “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日蝕)이 일어납니다” 하자, 그는 평상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서 보는 동안, 영조가 그의 평상으로 올라가 죽어버렸다. 이를 본 그는 웃으면서 “내 딸의 솜씨가 나보다 빠르구나!” 하고는 7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서울(王都, 慶州)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광세(陳光世). 법명(法名)은 부설(浮雪). 자(字)는 천상(天祥).
어려서 불국사에 출가하였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에서 10년간 정진한 뒤, 오대산 문수보살의 도량을 참배하러 북으로 향하여 가던 길에 두릉(杜陵 :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신도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구무원에게 딸 묘화(妙花)가 있었는데, 부설을 흠모하여 부설과 부부가 되길 원하고, 만일 버림을 당하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니, 묘화의 부모도 부설에게 딸을 버리지 말고 제도하여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부설은 출가의 뜻이 견고하여 굽히지 않았으나, 또 돌이켜 보살의 자비로운 뜻을 생각하여 마침내 묘화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록 재가(在家)에 있었으나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정진을 계속하여 도를 이루었다. 등운과 월명도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부인은 110세를  살았는데, 말년에 집을 내놓아 사원으로 삼아 부설원(浮雪院)이라 하였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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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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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현중현 체중현 공(空)2021. 11. 10. 15:38

§((217))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이 정진해야 /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송담스님(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용217) (현중현,체중현,공)

 

 

(1) 약 15분.

 

(2) 약 21분.

 


(1)------------------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허고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하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한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동서남북 정처가 없어. 출가해서 걸망을 지고 도반과 선지식을 찾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해서 행각을 하는 분상에는 동서남북 정착(定着)함이 없어.
생애(生涯)는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오직 주장자 하나에 온 생애를 다 맽겨버렸다 그 말이여. 주장자가 동쪽으로 행하면 동쪽으로, 금년 여름에는 동쪽에서 지내다가 겨울철에는 북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갔다 남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주장자 하나로 생애를 맽겼는데.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여.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그래 가지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천봉(千峰), 바로 천(千) 봉아리 속을 향해서 들어가고 다시 또 만(萬) 봉아리를 향해서 간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그 수없는 것을 보고, 수없는 것을 듣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들이 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이 천 봉오리고 만 봉오리다 그 말이여.
그 봉오리 봉오리 넘을 때마다 거기에서 피렴심(疲厭心)도 느끼지 아니하고, 소득심(所得心)도 갖지를 아니하고, 만족심도 갖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


오늘은 계해년 가을 산철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수행 납자(衲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감격스럽게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용화사 선방대중과 또 도봉산 원효암 대중 그리고 여러 용화사 모다 돈독히 조실 스님의 법을 믿고 정진하는 신도 여러분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히 5재 천도식을 맞이한 민병태 영가를 위해서 좋은 법문을 설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이 용화사 법보선원 이 법요식에는 사부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만년위패 법보제자 영가들도 동시에 청혼(請魂)을 해서 이 법요식에 법문을 듣도록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특히 이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해제 법문을 잘 듣고, 과거 무량겁에 지은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에 업연(業緣)이 봄눈 녹듯이 녹고, 온갖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도솔천내원궁이나 또는 극락세계에 왕생을 하고,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게 되면 다시 불법문중(佛法門中)에 귀의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일대사인연,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





(2)------------------

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惡知) 악각(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 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15분2초~35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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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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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33)) 참회(懺悔)로 업장소멸 / 도를 닦는데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 /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고,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인가(印可) /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 /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1/3) 약 13분.

 

(2/3) 약 16분.

 

(3/3) 약 16분.

 

 

(1/3)----------------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가 많고, 도(道)를 닦는 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한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 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수행은 지혜와 또 복덕과, 복(福)과 혜(慧)를 겸(兼)해서 닦아 가는 길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만을 닦고 복(福)을 닦지 아니하면 가장 그 비근한 예를 들면, 머리는 좋은데 박복(薄福)해서 되는 일이 없이 내생(來生)에 태어나는 게고, 복(福)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내생에 몸을 태어나되 복은 있어서 돈은 좀 많이 있으나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어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이웃에도 그러한 예를 보실 수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복(福)을 함께 겸해서 닦아가라' 부처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지혜와 복, 복과 혜를 겸전(兼全)하신 최고의 성현(聖賢)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할 때 '두 가지가 구족하신 높은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具足)하시다' 하는 것이 바로 이 '복(福)과 혜(慧), 이 두 가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 가는데 있어서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데에도 그렇고, 세속에 사회인으로서 수행을,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와 사(事)를 다, 이(理)와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만 바로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만 맞고 사(事)에 맞지 아니하면 이것은 원만(圓滿)하게 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理致)만 맞고 사(事)를 무시하게 되면 이것은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事)라고 하는 것은 현실(現實)을 사(事)라고 하는 것이고,
이치상으로는 선(善)과 악(惡)이 두 가지가 아니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부처와 중생(衆生)이 두 가지가 아니요, 크고 작은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맑은 것과 깨끗한 것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事)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처음에 한 철 내지 두 철, 늦어도 한 3년 알뜰히 정진(精進)하게 되면 누구나 이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에 이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공(空)의 이치만 보는 것, 그것만을 가지고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를 하게 되고, 본인도 의심 없이 '자기가 바로 보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法)에는 현밀(顯密)이 있어서, 은밀(隱密)히 할 말과 또 이렇게 나타내서[顯] 할 부분이 있는 것인데, 현밀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잽이 말하게 되고, 이치로 보면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육도(六道)도, 인과(因果)도 모두가 인증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事)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하게 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하게 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하게 되어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또 좋은 재목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 말씀하시기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다'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드는 최고의 맛있는, 영양이 있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 제호에 최고에 맛이 변해 가지고 독약(毒藥)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잘 관리를 해야지 변질(變質)되어 버리면, 아깝다고 그것을 먹게 되면 병(病)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치를 보는,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도 대단히 희귀한 일이고 참 소중한 일이지만, 공(空)의 이치를 본 그 경계(境界)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분일초도 '내가 봤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면 그 공부는 거기서 멈추게 되고, 하는 짓은 미친 짓 밖에는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참선(參禪)하다 한 소식해 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법광(法狂)이라 해서, 법으로 미친 '법광'이 되어 가지고, 불조(佛祖)도 막 매도(罵倒)해 버리고 쳐부셔 버리고 욕을 퍼붓어 버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말을 막 함부로 하고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갖다가 그르치게 되고 불법(佛法)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 스님도 「혈맥론(血脈論)」에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라, 이 도(道)에 참, 사람 만나기 어렵다' 학자(學者)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또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통탄(痛歎)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났다고 해서 그 선지식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못 자기의 그 소견(所見)을 바르냐 그르냐를 점검(點檢) 간택 받는 일뿐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본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묘하고 힘이 솟구치고 환희에 넘쳐서 자기로서는 자기를 점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이 아니면 백(百)이면 백 다 잘못... 중간 잠깐 지나가야 할 그 경계에서 거기서 주저앉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8분34초~41분36초)




(2/3)---------------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41분39초~57분19초)




(3/3)----------------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7분21초~1시간1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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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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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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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411))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어떤 젊은 수좌(首座)의 소견 /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인가(印可)를 할 수 있다 / 『서장(書狀)』에 증시랑(曾侍郞)의 철저한 발원(發願) /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

**송담스님(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용411)

 

약 20분.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기회환(我人山下幾回還)고
나무~아미타불~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상(我人山上)에 기회환(幾回還)고.
저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한 생각 법왕(法王)을 어긴 죄(罪)로 끝없는 하늘가에 떨어져 나와 가지고 몇 번이나 돌아쳤으며,
아인산하(我人山下)에,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높고 높은 산 아래로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고, 사랑하고, 부모자식 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는 깊고 깊은 그 강 가운데에 유랑(流浪), 떠돌아다니다가 문듯 스승을 만났어.
그 스승을 만난 그 덕으로,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다. 생사(生死) 없는 상락(常樂)에 고향(故鄕) 길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게 되었구나.


오늘 경오년(庚午年) 정월(正月) 대보름날, 삼동안거(三冬安居) 회향 해제일과 백일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용화선원 대중과 또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또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 대중, 저 의정부 회룡사 선원 대중, 그리고 전주 위봉사 대중들, 기타 저 목포 · 여수 · 광주, 원근 경향(京鄕) 각지(各地)에서 이렇게 해제(解制) 법요식(法要式)을 기해서 이렇게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지난 갑인년(甲寅年) 정월 보름 해제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가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금생에 다시 이 자아를 자각(自覺)하는, 내가 나의 자성(自性)을 깨닫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 정법(正法)을 만났습니다.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이 최상법(最上法)을 만났으니, 그 인연만 하더라도 그 경행(慶幸)하기가 한량(限量)이 없으나, 기왕 이러한 불법을 만났을진대는 정말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겄더라.

한 철, 두 철 내지 세 철,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소견(所見)이 날 수가 있습니다.
5년 1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있을 뿐, 전혀 소견(所見)이 안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인가 소견이 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5년 10년 해도 소견이 안 난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고, 한 철 두 철 해서 무엇인가 그 소견이 나면 그것이 좋으냐 하면 그것이 아니여.
'10년 3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소견이 안 나도 공부를 옳게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바르게 공부를 한 거고, 한 철 두 철에 무슨 소견이 났으되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 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달포 전에 어떤 젊은 수좌(首座) 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 수좌는 여기서 행자노릇도 하던 사람인데, 어디 가서 중이 되어 가지고 선방(禪房)에도 다니고 여기도 와서도 한 철 지내고 그러던 사람인데, 중간에 쪼끄만한 토굴살이를 하다가, 토굴에 들어가서 정진을 하다가 연탄 불인지, 무슨 숯불인지 피워 놓고 그 가스에 중독이 되어 가지고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는데, 깨고 보니 '깨달랐다'고.
와서 '공안(公案)을 물으라?' 했습니다.

정진(精進)을 알뜰히 해서 소견(所見)이 났다면 당연히 참 물어볼 만도 하고, 또 바른 소견이 났다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면은 우리 이 문중에서,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얼마나 환희(歡喜) 스럽고 얼마나 경행(慶幸)한 일이겠습니까.
'가스에 중독되어서 일어나서 보니 뭐 소견이 났다' 그러니, 물어볼 가치도 없고. 하도 기가 차서.
가스 중독해서 죽었다가 깨어나서 소견이 났다면 선방에다 연탄불 잔뜩 피워 놓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진을 하다가 한 철 두 철 알뜰히 하면 무엇인가 무슨 공안도 이를 것 같고, 공안을 보면은 환희 막힘이 없고, 자기 나름대로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진공(眞空)의 이치(理致), 공(空) 도리, 공의 이치를—일체(一切)가 다 공(空)하고, 돌이나 나무나 그 나름대로 '내가 돌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것이 공(空)한 것이고, 저 해도 '내가 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 해는 해 그대로 그 자체가 공(空)한 것이다.
부처나 중생(衆生)이 둘이 아니고, 사람과 축생이 둘이 아니고, 악(惡)과 선(善)이 둘이 아니요, 밤과 낮이 둘이 아니요, 일체가 다 둘이 아닌 이것이 바로 공(空)이 아니고 무엇이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일러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입니다"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일러라"
"무(無)"

'무엇이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놈이 공(空)했으니 거기에 무슨 딴 답(答)이 있을 것이냐' 이래 가지고 무슨 공안(公案)이든지 그렇게 이르기로 하면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무엇이 맥힐 것이 있으며, 참구(參究)할 것이 무엇이 더 있느냐?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오면, "참, 공부를 애써서 하다 보면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지고 본인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여. 착각이니,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 현중현 도리를 바로 봐야지 그런 공(空) 도리,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것 가지고서는 도저히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초견성을 했느니, 한 소식을 했느니' 이러한 스스로 그런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앉었고, 꺼뜻하면은 다른 도반이나 신도들한테 자기는 '초견성을 했다'고 이런 소리하고.
이러한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살림을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그런 소견을 가지고 있는 한(限)은 바른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서장(書狀)』을 배우신 분은 다 아시겠지마는, 증시랑(曾侍郞)이 대혜선사(大慧禪師)한테 묻는 편지(便紙)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선지식(善知識)에 참(參)해 가지고 이 참선법(參禪法)을 들었는데, 이십에 결혼을 하고 또 벼슬을 하는 중에 이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를 못하고 그럭저럭 이렇게 늙었습니다.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입지(立志), 뜻을 세우고 기어코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해야겠다고 하는 이 발원(發願)은 실로 그럭저럭한 생각이 아니고, 깨닫지 못하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고인친증처(古人親證處)에 이르러야만 휴헐지지(休歇之地)를, 큰 휴헐지지를 삼을까 하나이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삼을까 하나이다' 이러한, 그 편지 가운데에 이런 마디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차라리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는 깨달음을 삼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증시랑(曾侍郞)은 속가(俗家)에 선비요, 벼슬아치로서 이렇게 철저한 발원(發願)을 했습니다.
하물며 정법(正法)을 믿는 납자(衲子)가, 최상승(最上乘)을 믿는 불자(佛子)로서 정진하다가 잠깐 무슨 소견(所見) 난 거, 공안(公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구경(究竟)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어찌 '초견성'이니, '한소식'이니 하고 '알았다'는 생각을 속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은 사람은 결단코 이러한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삼어서 되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도,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소승사과(小乘四果) 중에 최고의 지위(地位)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더라도 '내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라, 어찌 그것이 참 아라한(阿羅漢)이겠느냐.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가를 하겠느냐.

실지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될 텐데, 하물며 바른 깨달음을 얻지도 못하고 정진하다가 슬쩍 지내가는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일시적(一時的)인 소견을 어찌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감히 이름을 붙일 것이냐 그 말이거든.
우리가 얻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증(證)하지도 못한 것을 '증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하고 남에게 뽐낸다면, 어찌 그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목표로 하고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라 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온통 사기로써 업(業)을 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불법문중에서, 이 최상승(最上乘)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학자(學者)는 결단코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이며, 불조를 속이지 말 것이며, 중생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어떠한 소견이, 설사 자기도 기약하지 못한 가운데에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否定)을 해 버리고 언제나 백지(白紙)의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 알뜰하게 짬지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처음~19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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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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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세등64) (게송)일이화상석~ / 공(空) 도리,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가지고 견성했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다. 그걸 때려 쳐버리고 완전한 초학자가 되어 콱! 맥히는 화두를 가지고 새 출발해야 / (게송)참선비식념~ /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참선의 목적 / 해제 때 더 알뜰히 정진해야.

 

자기의 자성,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참선의 목적이지, 무슨 고요한 데에 들어가 가지고 아조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한번 정(定)에 들면 밤이 되는지 낮이 가는지, 배가 고픈지 모르고 계속 그 정(定)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거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밥 먹을 때 밥 먹고, 옷 입을 때 옷 입고, 똥 눌 때 똥 누고, 운력할 때 운력하면서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지, 고요한 데에 처박힌 것은 그것은 못쓰는 것입니다. 고요한 가운데에도 성성하게 의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 나가야 마구니도 침범을 못하고, 거기에서 온갖 계행(戒行)은 지킬라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고, 모든 업장(業障)도 거기에는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64)—1987(정묘)년 하안거 해제 법어(87.07.17) (세등64)

 

약 16분.

 

일이화상석(日移花上石)이요  운파월래지(雲破月來池)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법하증이(萬法何曾異)리요  노생자착의(勞生自着疑)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이화상석(日移花上石)이요  운파월래지(雲破月來池)니라. 해가 옮기매 꽃이 돌 위로 올라오고, 해가 시간이 지나가면 돌 옆에 서 있는 꽃 그림자가 바윗돌 있는 데로 그림자가 올라올 것이다 그말이여.

운파월래지(雲破月來池)니라. 꽉 구름이 끼어서 달이 보이지 않다가 그 구름이 흩어져 없어지면 그 달이 못 속으로 올 것이다. 못에 그 달빛이 번쩍거리고 그 달빛에 뜰 것이다 그말이여.

 

뭐 평범한 소리지요.

 

만법(萬法)이 하증이(何曾異)리요. 만법이 무엇이 일찍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노생자착의(勞生自着疑)니라. 공연히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늘에 뜬 달이나, 아름답게 피는 꽃이나, 숲에서 우는 새나, 흘러가는 물소리나, 심지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 소리나, 댕기는 자동차 소리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의 나타남이건만,

공연히 중생이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버리고 찾기 때문에 그 적나라(赤裸裸)한 그놈을 보지를 못할 따름인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데에 가지가지 마구니가 있다고 했지만, 정말 발심(發心)을 해서 정말 알뜰히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마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탐진치요, 밖에서 들어오는 마구니가 아닙니다. 가장 우리의 궁극에 깨달음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냐?

'아! 이것이로구나' 스스로 공부해 가지고 어떤 소견이 나면, '아하,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냐'하고 고러한 생각인 것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또 한 철 두 철 하면 공견(空見), 체중현(體中玄) 도리, 일체가 공(空)한 도리—부처나 중생이 둘이 아니요, 선과 악이 둘이 아니요, 검은 것과 흰 것이 둘이 아니요, 이 세상에 모든 상대되는 것들이 그것이 다 둘이 아니고 본래 같은 것이다.

그러한 공(空) 도리, 그러한 것을 봐. 그러한 공(空) 도리를 보면 마삼근(麻三斤)도 그놈이요,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놈이요, 이뭣고도 그놈이요, 뭐 똥막대기도 그놈이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 그것 아니고, 그것 내놓고 무엇이 있겠느냐?

 

무슨 공안을 물어봐도 '억' '할'하고, 무슨 공안을 물어도 몽둥이로 치고, 무슨 공안을 물어도 그저 방석을 갖다가 들었다가 땅에다 메다치고 그저, 아무 공안을 물어도 뭐 맥힐 것이 없어. 닥치는 대로 움직거리고, 닥치는 대로 일르고, 아무렇게 일러도 그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이러한 소견이 바로 공견이요, 이것이 바로 체중현 도리인데, 이러한 소견은 한 철 두 철 애써서 하면은 누구라도 그러한 소견(所見)은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견성했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하면 그 경지에 이르면은 금방 인가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가는 백 번을 받아보았자 궁극의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소견이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에 났다면은 그것이 바로 자기를 죽이며, 불법(佛法)을 죽이는 마구니가 자기에 붙었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탁! 스스로 그것을 때려 쳐버리고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완전한 초학자(初學者)가 되어 가지고 정말 콱! 맥히는 공안을 화두를 가지고 정말 새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애써서 공부하는 여러 선객(禪客)들에게 또 여러 불자(佛子)들에게 최종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섣불리 그런 소견 나가지고 ‘옳다, 옳다’ 옳다고 인가해 준다고 그놈에 속아 가지고 자기도 '깨달랐다'는 소견을 가지고 백만 겁(劫)을 정진을 해 보십시오.

오신통(五神通)이 다 나가지고 하늘에 승천, 하늘에 날아올라 가고,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를 왔다갔다하고 신통을 부려 본들 그것은 성불(成佛)이 아니고, 견성(見性)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비식념(參禪非息念)이요  묘성도친견(妙性圖親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별기낙진연(瞥起落塵緣)이요  불속타편점(不續墮偏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비식념(非息念)이요. 참선은 생각을 쉬는 공부가 아니여.

 

자꾸 생각을 쉬고 또 쉬고 해서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고, 망상이 다 끊어지고 그 고요하고 고요하고 적적한 경지에 들어가면, 그 편안하고 맑고 깨끗하고 그 신성한 그 묘하고도 그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경지를, 참 기가 막히지. 그러나 그러한 데에 이르는 것이 참선의 목적이 아니여.

멸진정(滅盡定)에까지 들어간다 해도, 그리고 저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까지 올라간다 해도 그것이 성불은 아닌 것입니다.

 

묘성(妙性)을 도친견(圖親見)이여. 자기의 자성,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이 참선의 목적이지, 무슨 고요한 데에 들어가 가지고 아조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한번 정(定)에 들면 밤이 되는지 낮이 가는지, 배가 고픈지 모르고 계속 그 정(定)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거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밥 먹을 때 밥 먹고, 옷 입을 때 옷 입고, 똥 눌 때 똥 누고, 운력할 때 운력하면서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 의단이 독로해야지, 고요한 데에 처박힌 것은 그것은 못쓰는 것입니다. 고요한 가운데에도 성성하게 의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별기낙진연(瞥起落塵緣)이여.

'하! 이것이로구나! 하! 좋다. 이런 경지에 영원히 있었으면. 내가 얼마 안 가면 확철대오 할라는가 보다. 이럴 때 누가 나 좀 탁! 깨닫게 해주었으면' 이러한 무슨 생각이고—불견(佛見)이고, 법견(法見)이고, 중생견(衆生見)이고, 무슨 생각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하면은 벌써 진연(塵緣), 티끌 인연에 떨어진 것이고.

 

불속타편점(不續墮偏漸)이여. 알 수 없는 의단이 잠깐이라도 끊어져서 한눈을 팔면 그것이 편점(偏漸)에 떨어져 버린 것이여.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구니도 침범을 못하고, 거기에서 온갖 계행(戒行)은 지킬라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고, 모든 업장(業障)도 거기에는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해제를 했지마는, 발심해서 도 닦는 사람이 해제 · 결제가 무슨 구별이 있어? 해제할수록에 더 야무지게 단속을 해.

결제 중에는 대중이 모다 모여서 규칙 속에서 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은 별 탈이 없지만, 해제하면은 맘대로 가고 싶은 데 가고, 오고 싶은 데 오고, 맘대로 그 생활이 자유로우니까 까딱하면은 그 잘못될 우려성이 있기 때문에 발심한 수행자라면 해제 때 더 단속을 해야 하고, 해제 때 더 알뜰히 정진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들도 여기에 백일기도 ·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을 하셨고 또 방부를 들이고 출퇴근을 하시면서 정진을 한 보살님도 계시지만, 형편상 여기에 나오시지 못하고 댁에서 모다 정진을 하신 분들도 어쨌든지 열심히 정진하시고, 생활 속에서 더 열심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다 회사라든지 사회라든지 모두가 복잡할수록에 여러분 자신들이 더욱 신심을 굳건히 해서 모다 이 가정이 화목하시고, 서로서로 용기를 주고 신심을 내가면서 열심히 하시기를 부탁을 하십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부처님 믿는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이여. 한 움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48분44초~64분10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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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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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현중현 체중현 공(空)2019. 11. 15. 06:49

 

 

§(282)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탁마(琢磨) / 삼구(三句), 삼현(三玄) / (게송)해고종견저~ /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보아야.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송담스님(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 (용282)

 

(1) 약 19분.

 

(2) 약 9분.

 

(1)-------------------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허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한 대도(大道)가 혁혁(赫赫)해서, 밝고 밝아서 분명해. 사람 사람이 본래부터 낱낱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 이루었더라.

 

부처님이나 조사(祖師)나 우리 범부(凡夫)나 축생에 이르기까지도 본래 그 대도는 갖추어 있어서 닦아 가지고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낱낱이 다 원만하게 다 원성(圓成)해 있더라. 본래 갖추어져 원만하게 이루어져 가지고 그것을 갖추어 있다.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한 생각 어긋진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영겁현출만반형(永劫顯出萬般形)이여. 영겁을 두고 만 가지 형상을 나타내더라.

 

본래는 더 닦을 것도 없고 증(證)할 것도 없고 남고 모지램이 없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다.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어긋짐으로 해서 이렇게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면서 때로는 지옥에 갔다, 때로는 축생이 되었다—축생도 개 · 돼지와 소 · 말 · 뱀과 구렁이 온갖 종류에 축생이 다 있고, 사람으로 출현하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형형색색으로 태어나고.

또 선행을 닦으면 천상에서 태어나 가지고 온갖 낙(樂)을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영겁을 두고 쉴 사이 없이 윤회를 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한 생각 어긋난 그 때문이다.

 

 

금년 새해를 맞이해서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이 소한절을 맞이해서 수십 년 내로 처음 오는 그런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설한(雪寒) 속에 이렇게 참석을 하셨습니다.

모두 정법을 믿는 신심(信心)과 또 새해를 어떻게 분심(憤心) · 발심(發心)해서 도를 닦아갈 것인가, 희망과 용맹으로 가득찬 그리고 빛나는 눈매와 얼굴의 모습을 뵙게 되니 매우 감개(感慨)가 무량합니다.

 

이렇게 많이 모이신 가운데에 저 봉암사에서 정진을 하다가 지견(知見)이 나서 찾아온 젊은 도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단히 그 얻은 바가, 설사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 희유한 그런 지견이 나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온 데 대해서는 매우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다가 지견(知見)이 나면 그 도량(道場)에 선지식(善知識)이 계시거나 선배가 있으면은 거기에 자기의 깨달은 바를 개로(開露)해서 점검을 받고, 그 도량에 또 그럴만한 분이 없으면은 불원천리하고 선배와 선지식을 찾아서 자기의 그 깨달은 바를 갖다가 기탄없이 개로를 해서 탁마(琢磨)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종문(宗門) 중에 있어서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행해 내려오는 우리의 가풍(家風)이라 할 수가 있고.

참 아무리 말세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납자(衲子) 세계에 있어서 대단히 영원히 전해 가야 할 그러한 좋은 한 풍속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혼자, 얻은 바가 있어 가지고 자기 혼자만 그것을 꼭 지켜가면서 그것을 자기 살림살이로 알고, ‘누구한테 지금 물어 볼 것은 뭐 있으며, 이 이상 더 누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은 소용이 없고, 이것은 절대적이고 이건 틀림이 없다’해 가지고 혼자 그놈을 지켜나가면서 살림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조사(祖師) 말씀에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다. 또 깨달은 뒤에 지견이 난 뒤에 사람을 만나질 못하면은 큰 해가 된다'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호(醍醐)라고 하는 것은 우유로 만드는, 아주 좋은 우유를 가지고 만들은 최고에 맛있고 아주 신령스러운 효험이 있는 약인데, 그러한 좋은 제호가 그것을 잘못 관리함으로 해서 그것이 변질이 되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독약으로도 변할 수가 있다.

 

무량겁을 생사윤회하다가 금생에 불법을 만나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다가 소견이 낫다고 하면, 마치 그 많은 우유 가운데에 최고품을 가지고 잘 특수한 방법으로 제호라고 하는 약을 만들은 데다가 비교를 할 수가 있는데.

그 제호라는 좋은 약도 잘못 관리해 가지고 독약으로 변한 것처럼, 그 무량겁으로 도를 닦아서 모처럼 어떠한 경계가 나타났다 이것인데.

 

그것을 바른 선지식에게 탁마를 해서 점검을 해서 그것을 갖다가 점검을 바로 받아 가지고, 그것이 미급(未及)하거나 잘못된 것이면 여지없이 탁마를 통해서 때려치워 버리고서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고 정진을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그 소견(所見)이 난 학자의 지견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어떻게 가리느냐?

옛날 눈 밝은 조사스님네는 벌써 거동을 보고 그 눈빛을 보면은 벌써 확연히 다 가려내셨던 것입니다. 벌써 입 벌리기 전에 딱! 점검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거기다가 공안(公案)을 물어 가지고 그 공안을 어떻게 답하는가?

 

그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답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견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제1구(第一句)는 상신실명(喪身失命)이고, 제2구(第二句)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라. 제3구(第三句)는 분기소추(糞箕掃箒)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이 삼구(三句)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학자(學者)가, 참선(參禪)하는 납자가 공부를 해 가지고 최초에 지견(知見)이 나면 대부분 체중현(體中玄)—일체 삼라만상이 모든 것이 다 큰 것과 작은 거, 흰 것과 검은 거, 선과 악, 또 밝은 것과 어두운 거, 부처와 중생, 모든 것이 이 상대로 다 이루어졌는데, 이 상대(相對)와 차별(差別)이 다 끊어져버리는 그러한 경계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에 눈을 떠, 지견이 나가지고 이러한 경계에 계합이 되면 이 세상을 갖다가 콧구녁으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콧구멍으로 들랑거리고, 이 삼천대천세계가 눈으로 다 덮어 버릴 수가 있고, 부처와 중생이며, 선과 악이며, 육도법계(六途法界)도 온통 한 할(喝)로써 다 부셔 버릴 수도 있고 또 다 이룰 수도 있고, 도무지 그 경계가 쇄락(灑落)하기를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고종견저(海枯終見底)하고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시방무허공(十方無虛空)하고  대지무촌토(大地無寸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바다가 마르면 마침내는 그 바다 밑바닥을 갖다가 볼 수가 있어.(海枯終見底) 바다가 다 말라서 밑바닥이 환히 볼 수가 있을 때까지는 몇천만 년이 지나가야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바다가 마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가 마르면은 마침내는 그 밑바닥을 볼 수가 있으나,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어.(人死不知心) 아무리 많이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더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어. 그런데 안 볼라야 안 볼 수가 없거든.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고 잡으려고 하면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데, 안 볼라야 안 볼 수가 없고, 안 들을라야 안 들을 수가 없고, 안 잡을라야 안 잡을 수가 없어.

그것이 이 두 말이 완전히 서로 위패되는 말인데, 이 두 가지 반대되는 말이 동시에 딱! 계합(契合)이 되거든.

 

시방(十方)에 무허공(無虛空)이여. 이 시방이 꽉 차 있는 것이 허공인데 허공이 없어. 대지(大地)는 온통 땅인데, 흙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대지에 한 치만한 땅도 없다 그말이여.

이 체중현(體中玄)에 눈을 뜬 경계가 바로 이렇다 그말이여.(처음~19분17초)

 

 

 

 

 

(2)-------------------

 

공안을 물으면—마조원상(馬祖圓相),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묻는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 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상을 그려놓고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러니까, 일어서서 방석을 들고서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하고, 그러고는 방석을 놓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이르지를 못했느니라"

 

"그러면 입으로 이르겠습니다"

"그러면 일러 봐라"

 

"알라야 알 수가 없고, 모를라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 공안에 대해서 그러한 답을 할 수가 없느냐 하면,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活句) 문중(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소견이 나서 불원천리하고 온 것까지는 대단히 좋고 반가우나, 그 학인이 그러한 소견에 주저앉아서 '알았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공부에 진취가 없을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학자의 지조를 가지고 그러한 소견을 스스로 다 쓸어버리고 정말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느냐?’

도저히 이빨이 들어갈 수가 없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질 수가 없는 그러한 공안을 가지고 목숨을 바쳐서 새로 공부를 지어 나간다면 이 학자는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해를 맞이해서 그러한 좋은 참 반갑고도 기쁜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우리들도 공부하다가 그러한 소견이 나더라도, 나면 반드시 자기가 믿는 또 믿을 수 있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바로 점검을 받아 가지고 나아가되,

그러한 이 불조(佛祖)와 같은 그러한 견지가 아니면 여지없이 버려 버리고, 재발심(再發心)을 해 가지고 그 전에 보다도 몇십 배 더 분심과 신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처음~27분4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순정리론』 권32(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 권60(대정장11, p.346c3)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奮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종문(宗門) ; ①선종. 선문(禪門). 선종에서는 선문(禪門)이 불교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 ②종파. 종지(宗旨). 자기가 속해 있는 종파.

*가풍(家風) ; ①종풍(宗風)—종문(宗門)의 풍규(風規 풍습상의 규정). 문풍(門風)—선문(禪門)에 있어서의 종풍(宗風).

②선림(禪林, 선종禪宗)에서의 행위의 규범. 청규(淸規, 선원에서 일상의 생활규정). 선종에서 가르침을 나타낼 경우, 각자가 갖는 독자적인 방식, 또는 지도의 방법을 말함.

③그 종(宗)만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 ④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74~75. (가로판 p78)

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이 바른가를 결택 받아야 하느니라。

    

註解(주해)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須生慚愧(수생참괴)하야사  始得(시득)다  道如大海(도여대해)하야  轉入轉深(전입전심)하니 愼勿得小爲足(신물득소위족)하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則(약불견인즉) 醍醐上味(제호상미)가  翻成毒藥(번성독약)하리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道)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 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미급(未及) ; 아직 미치지 못함.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삼구(三句) ;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207. (가로판 p214)

[三句] 삼구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참고]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할(喝) ; 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이다. 선종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진리를 나타낼 때, 또는 수행자를 꾸짖거나 호통칠 때 토하는 큰 소리.

큰 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보임이니, 이것을 처음 쓰기는 마조(馬祖)가 한 번 할했는데 백장(百丈)이 사흘이나 귀먹고 눈이 캄캄하였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그 뒤로부터 흔히 쓰는데, 임제(臨濟)가 가장 많이 썼다. 보통 속음(俗音)의 「갈」로는 발음하지 않는다.

*쇄락(灑落 물뿌릴 쇄/떨어질 락) ;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함.

*(게송) ‘해고종견저(海枯終見底)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 ; 『선문염송•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김월운 역 | 동국역경원) ‘제11권 417칙 불성(佛性)’ p236 진정문(眞淨文) 게송 참고.

*(게송) ‘시방무허공(十方無虛空) 대지무촌토(大地無寸土)’ ; 『禪宗頌古聯珠通集』 남당흥(南堂興) 게송 참고.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2)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마조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참고.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방장(方丈) ; ①선원(禪院)의 운영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 스님, 또는 그가 거처하는 방. ②선원(禪院)·강원(講院)·율원(律院)을 모두 갖추고 있는 총림(叢林)의 가장 높은 스님.

*방(棒) ;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확연(確然)히 ; 아주 확실하게.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시금석(試金石) ; ①층샛돌(귀금속의 순도를 판정하는 데 쓰는 검은색의 현무암이나 규질의 암석). ②가치, 능력, 역량 따위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기회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Posted by 닥공닥정
현중현 체중현 공(空)2018. 10. 19. 17:01

 

 

§(427) (게송)욕득불초무간업~ / 중봉선사의 돈오점수에 대한 말씀. 별립생애 / (게송)참선수투조사관~ / 깨달음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바로 활구참선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라.

 

**송담스님(N0.427)—90년 10월 첫째일요법회(90.10.07) (용427)

 

(1) 약 21분.

(2) 약 9분.

 

(1)------------------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인댄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야장천일월고(靜夜長天一月孤)한데  지음자유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인댄, 무간업(無間業),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죄업을 부르고자 하지 않거든,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이다. 정법륜(正法輪)을 비방하지 말아라.

 

정야장천일월고(靜夜長天一月孤)한데, 고요한 밤 긴 하늘에 한 달이 외로이 밝았는데,

지음자유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로구나. 지음(知音)은 스스로 솔바람이 있어 화답하는구나.

 

 

요새 송광사, 전라도 순천 송광사에서 동양 서양의 세계적인 불교 석학들이, 교수 · 박사 그런 분들이 모여서 돈오(頓悟) · 점수(漸修)에 대해서 갑론을박하며 '돈오 · 점수의 바른 뜻이 무엇이냐?' 이런 것에 대해서 상당히 열기를 가지고 논란을 하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불교신문을 통해서 봤습니다.

 

불교의 목적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목적이니—돈오(頓悟)란 말은 확철대오란 말인데, 확철대오와 또 확철대오한 뒤에 점수(漸修)해 나가는, 오후보림(悟後保任) 한다고 보통 말들 합니다마는.

 

'확철대오 했으면 그것으로써 더이상 닦을 것이 없어야지, 확철대오한 뒤에 점점(漸漸)이 닦아 갈 것이 있다면 어찌 그것이 참다운 확철대오라 할 수가 있겠느냐. 닦아 갈 것이 있다면 확철대오가 아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논란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참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참선을 해 가지고 그 애를 쓰는데 결국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해서 고행 정진을 한다면 참다운 깨달음을 얻어야지 바르지 못한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착각을 해서야 되겠느냐?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모여서 세계 국제학술대회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참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어느 큰스님이 이 돈오점수에 대한 책을 내 가지고 그 책을 낸 뒤로 참 십여 년이 흘렀는데, 그 뒤로 많은 그것에 대한 불교계에서 논란이 있어 와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학자들도 또 그 문제에 관해서 이렇게 학술회의까지 갖게 되니 참 좋은 뜻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 전강 조실 스님께서 제창하시는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는 우리 법보제자는 과연 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으로 이것을 해석을 하며 또 바르게 해석을 해야 또 우리도 갈팡질팡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도를 닦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인년에 마치 조실 스님께서 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설하신 바가 있어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다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선은 '무엇이 돈오(頓悟)고, 무엇이 점수(漸修)다' 이것을 실지로 참선도 하지도 아니하면서 입으로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백날 모여서 토론을 해 봤자 이것은 참,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바르게 닦아 갈라면 어떻게 닦은 것이 돈수, 바른 닦음이고, 어떻게 깨달아야 바른 깨달음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나름대로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에 의지하지 말고 다맛 알 수 없는 활구선(活句禪)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아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그런 신념에 의지해서 우리는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에 그런 것이, 그런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릴 까닭은 없겠습니다.

 

 

중봉, 중국의 천목산 고봉 선사(高峰禪師)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신 중봉 선사(中峰禪師)께서 '깨달은 뒤에 닦아갈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설하신 것이 있어서 몇 말씀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어.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정습(情習), 과거로부터 쌓은 정습이 다하지 못했다면,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원만치 못해서 그런 것이다. 혹 그 마음 깨달음이 원만치 못하다면 모름지기 이 원만치 못한 자취를 쓸어버리고 별립생애(別立生涯)여. 특별히 따로 생애를 세워서」

 

이 별립생애라고 하는 것은—'자기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 깨닫기는 깨달았으나 이제 보림(保任)만 하면 자기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습이 다하지 못하고 또 공안에 막힌 바가 있으면 이것은 자기의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의 이치, 그런 것을 그런 이치를 좀 보고서 그런 이치에 입각해서 모든 공안을 보면 막힌 바가 없고 다 알 것 같고, 화엄경이고 법화경이고 다 읽어 보면 환히 자기 나름대로 다 알고. 그러니까 자기도 깨달았다고 이렇게 착각을 하고서 '이제 나는 보림만 하면 된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참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안에 막히거나 정습이 다하지 못했으면 자기의 깨달음이 원만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그렇게 딱! 결판을 내고 별립생애, 다시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다시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거기다가 생명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기어코 확철대오를 하도록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중봉 스님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뒤에는 닦을 것이 없느냐? 닦을 것이 없단 말입니까?' 이렇게 또 자문을 하고서 답을 하시기를,

「미리 깨달아 보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통 밑구녁이 풍 빠지는, 통 밑구녁이 풍 둘러빠진 거와 같은 그러한 경지가 올 때까지, 다시 말하자면 확철대오 할 때까지 가행정진 용맹정진하면 닦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아직 깨닫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이러한 것 가지고 논란을 하는 것은 정법륜(正法輪)을 비방해 가지고 무간업을 자초하는 것 밖에는 아니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올 때마다 항상 말씀을 하기를, 정말 조사의 깨달음과 같이 확철대오를 못했으면—조금 자기 나름대로 공(空)의 이치, 체중현(體中玄) 도리 이런 걸 조금 한 소견이 나면 그걸 가지고 자기도 깨달았다 하는 그러한 견해에 집착을 해 가지고 막행막식하고,

그래 가지고 누구든지 자기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면 쉽게 '옳다'고 인가를 해 주고, 이래 가지고 자기도 망하고 많은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불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頓悟), 기왕 깨달으면은 돈오에 돈수, 돈수(頓修)라 하는 것은 '닦을 것이 없다'는 얘기죠. 몰록 다 닦아 버렸어. 확철대오 함과 동시에 다 닦아 버려, 닦아 마쳐 버렸어.

그러니까 그것이 돈수(頓修)인데, 돈수란 말은 '닦을 것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인데. 그건 부처님이라든지 조사(祖師) 가운데에는 돈오돈수(頓悟頓修)한 그러한 조사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다 전생에 무량겁을 다 닦아서 금생에 잠시 몸만 바꿔 났을 뿐이지, 이미 닦고 깨닫고 한 것은 전생에 무량겁을 두고 다 이미 원만성취한 분들은 몸만 바꿔 났으니까 더 간단하게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해 버리고 닦을 것조차 없이 다 돈오돈수가 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할 때까지, 참선을 시작해 가지고 확철대오할 때까지 많은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걸려 가지고 깨달은 분, 또 출가해 가지고 얼마 안 가서 그냥 언하에 확철대오한 분,

이러한 것은 마치 저 어느 산골짜구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물이 있는데, 그 물이 흐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에까지 도달하는데, 바닷가 바짝 가까이에서 솟은 물이면 금방 솟아나 가지고 몇 분 안 가서 바다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몇백 리, 몇천 리, 몇만 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서 나온 물은 그 물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까지 도달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도 닦는 사람은 자기가 언제부터서 전생, 저 전생, 십 생, 백 생 언제부터서 도를 닦았는가 우리는 숙명통(宿命通)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건 알 수가 없으나 다행히 금생에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났으면 그 바른 법에 의해서 목숨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을지언정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할 것을 미리서부터서 따질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바른 법에 의지할 것이고, 다음에는 있는 정신을, 정력을 다해서 전력투구를 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일 년 만에 깨닫든지, 삼 년 만에 깨닫게 되든지, 삼십 년 후에 깨닫든지, 마지막 죽을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든지, 그래도 전력투구를 한 사람은 바른 법에 의지해서 생명 바쳐서 닦은 사람은 아무 후회가 있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숨질 때까지도 다맛 '이뭣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상태에서 숨을 딱 거둔다면 그 사람은 다음 생에 금방 몸을 바꿔 나가지고 또 불법을 일찍 만나서 또 정법을 만나 가지고 또 닦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생에 얼마만큼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공부를 잡드리했느냐에 따라서 그다음 생에 좀 일찍 깨닫기도 하고, 더디 깨닫기도 할 것입니다.

 

달마 스님의 「혈맥론(血脈論)」이나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오직 깨닫는 것만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닫고 나야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자연히 닦을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54초)

 

 

 

 

 

(2)------------------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학도요궁심로단(學道要窮心路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심로단시전체현(心路斷時全體現)하니  여인음수지냉난(如人飮水知冷暖)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여.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한다 그말이여. 조사관.

학도요궁심로절(學道要窮心路絶)이여. 도를 닦아. 도를 닦는 것이 내나 참선인데, 도를 닦아 가는 데는 마음길이 끊어져야 해.

밤낮 사량분별로 '이렇다. 돈오가 어떻고 점수가 어떻고, 이것이 어떻고 저것이 어떻고' 밤낮 교리를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고 또 공안을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고 따지고 따져 봤자 깨달음에서는 점점 멀어져 버리는 거다 그말이여.

 

정말! 바른 참선을 하고 바르게 도를 닦고자 하면 공안을 타파(打破), 의단이 독로하고 타성일편이 되어 가지고 그 공안의 의단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마음길이 끊어져야 해.

'이뭣고?' 알 수 없는 화두 의심을 거각(擧却)할 때에 앞뒤 생각이 탁탁 끊어져 나가야 돼.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금강경을 읽거나, 화엄경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마음길이 탁탁 끊어져 나가야지,

마음속으로 사량계교(思量計較), 사량복탁(思量卜度), 공안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누가 뭔 말을 하면은 그놈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이러는 동안에는 깨달음을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여.

 

심로단시전체현(心路斷時全體現)이여.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마음길이 끊어져 버리면은 전체가 드러나.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전에 전체가 드러나는 거다 그말이여.

여인(如人)이 음수(飮水)에 지냉난(知冷暖)이여.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웁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알아.

 

'물이 얼마나 차운가? 얼마나 더운가?' 먹어 보지도 않고 남 보고 물어봤자 어떻게 그것을 가르키며, 먹어 보기도 전에 '이 물이 따신가? 차운가?' 이리저리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그말이여. 떠억 꿀떡꿀떡 마셔 보면 얼마나 뜨시고 얼마나 차운 것을 알 수가 있어.

 

깨달은, 돈오가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는 정말 알 수가 없는 거여.

 

깨달아 보지도 않고 깨달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아직 깨닫기도 전에 '닦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라야지 돈오점수는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백만 년을 두고 패를 갈라서 토론을 하고 따져 본들 그것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갈 뿐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아니어.

 

물론 불교 학자들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으로 경전을 연구하고 또 조사의 어록도 학자로서 연구하고 그런 입장에서 그런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나아가는 것이다' 학자로서 따져 가는 것을 나는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는 그렇게 따지는 것이 그것이 학자의 본업이고, 그거 학자의 그 나아갈 길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불교를 이론적으로 따지는 그러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 전강 조실 스님이나 산승이 항상 마음으로 원하고 또 이렇게 바라는 것은 학자로서의 나아가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정말 활구 선객(禪客)으로서, 참선하는 사람으로서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이론적인 연구나 추구보다는 바로 화두 공안에 입각해서 활구참선을 해 가야만 하루 하면 하루,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일 분 하면 일 분,

한 번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이 일 분 동안 끊어진다면 그만큼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마음길이 끊어짐으로써 그것이 바른 수행이고, 마음길이 끊어짐으로써 조사관을 타파해 가지고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다.

 

왜 그러냐?

생사(生死)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삼세육추(三細六麤)의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해서 온갖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업(業)을 지어 가지고 거기서 생사윤회를 하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끊으려면은 우리 마음으로부터서 일어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을 해야 한다.

 

단속은 덮어 놓고 그놈을 끊으려고 그러고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든지—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식(六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에 즉(卽)할 때마다 화두를 들고 자꾸 화두를 들어 나가면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은 저절로 거기서 끊어져 들어간다 그말이여.

마음길 끊어짐으로써 의단이 독로하게 되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확철대오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돈수돈오냐, 돈수점오냐, 보조 스님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20분56초~30분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 ; '무간업(無間業)을 부르지 않고자 할진댄,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증도가(證道歌)』에 나오는 구절.

*(게송) '정야장천일월고(靜夜長天一月孤) 지음자유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무간업(無間業) ; 무간악업(無間惡業). 무간죄(無間罪).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하는 업(業)으로 오역죄(五逆罪)를 가리키는 말.

오역죄, 곧 다섯 가지 무간업은 ①아버지를 시해하는 것[殺父]. ②어머니를 시해하는 것[殺母]. ③아라한을 죽이는 것[殺阿羅漢]. ④승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것[破僧]. ⑤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는 것[出佛身血].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정법륜(正法輪) ; 부처님이 설하신 올바른 가르침[正法]을 바퀴[輪]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륜(法輪 부처님의 가르침 법/바퀴 륜) ; 불법(佛法)을 수레바퀴[輪]에 비유한 것.

①불법으로 인해 중생의 죄악이 무너지는 것이, 전륜성왕의 윤보(輪寶)가 산악과 암석을 두드려 부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을 윤보에 비유하였다.

②부처님의 설법이 한 사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두루 퍼지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고 구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하였다.

③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이 원만하여 결함이 없는 것이, 수레바퀴가 둥글어 모난 것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하였다.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돈오 점수(頓悟漸修) : 불도를 닦아 나아가는 데 그 사람의 바탕(기질)을 따라, 차츰차츰 여러 계단을 밟아 올라가서 나중에 대각(大覺)을 이루는 것을 「오래 닦음」 곧 점수(漸修)라 하고, 어떤 이는 단번에 크게 깨쳐서 한 뜀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을 「단박(몰록) 깨침」 곧 돈오(頓悟)라고 한다.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 온 버릇, 곧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는 한때에 완전히 끊어 버릴 수가 없고, 현실의 사물 처리에 자유자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오래 닦아 나아가야 한다。그러므로 결국은 누구나 「점수」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깨치지 않고는 옳게 닦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조사스님들은 닦는 것보다 깨치는 것을 중요하게 말하는 바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보조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깨달음 ; 각(覺).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구두선(口頭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의리선(義理禪).

이런 구두선(口頭禪) ·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법제자(受法弟子) ; 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인가(印可) 받은 제자.

*중봉(中峰) 선사 ; (一二六三 ~ 一三二三) 중국 원나라 스님. 불명은 명본(明本). 항주 전당 사람. 보응(普應), 환주도인(幻住道人), 환주노인(幻住老人), 중봉보응국사(中峰普應國師)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금강경, 원각경, 법화경, 전등록 등을 보고, 후에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사관(死關)을 찾아 심요(心要)를 묻고, 금강경을 읽다 뒤에 샘물이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활연히 깨쳤다.

고봉의 법을 받고는 일정하게 있는 곳 없이 배(船)에서 있기도 하고 암자에서 거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북정자적(北庭慈寂) 스님이 편집한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30권이 있다. 『광록』안에는 「산방야화(山房夜話)」  「동어서화(東語西話)」  「신심명벽의해(信心銘闢義解)」가 포함되어 있다.

*'중봉 선사(中峰禪師)께서 '깨달은 뒤에 닦아갈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설하신 것' ;

[참고] 『산방야화(山房夜話)』 (중봉명본 선사) *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一之中 山房夜話中.

幻曰 心外無法 法外無心 若見有纖毫情習未盡 卽是悟心不圓而然也 或心悟不圓 須是掃其未圓之跡 別立生涯以期大徹可也

曰若然 則無履踐之說乎 答曰 茲不必預以有無履踐 自惑于心 請勤加鞭策 到桶底子一回脫落 其履踐之有無 當有以默契于中矣

*정습(情習) ; 망정(妄情)으로 생긴 번뇌의 습기(習氣).

*망정(妄情) ; 허망한 정식(情識). 진실한 인식과 견해를 벗어난 망령된 분별 · 생각.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2분 26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 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2분 36초)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러빠지다 ; 빙 둘려서 우묵하게 쑥 꺼지다.

*막행막식(막行막食) ; 수행자의 분에 맞지 않게, 행동이나 음식을 막 행(行)하고 가리지 않고 막 먹는 것.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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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참선수투조사관~'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示安山郡夫人妙幢(안산군 묘당부인에게 보임)'

參禪須透祖師關 學道要窮心路斷 心路斷時全體現 如人飮水知冷暖 到此田地莫問人 須參本色呈機看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사량계교(思量計較)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삼업(三業) :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이것이 삼업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Posted by 닥공닥정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42분 49초부터 시작됩니다>

 

§(세등68) (게송) 구명소일모선성~ /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여 / 조백(糟魄).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로구나!」헐 때 틀려버린 거여. 그렇게 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우리 수행자가 항상 주의할 것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여.

다못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 의단이 더 이상 간절(懇切)헐 수가 없고, 더 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 이상 순일(純一)하고 무잡(無雜)할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야 가지고는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는 것이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경지에서 「하! 이것이로구나.」하고 그렇게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68) - 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에서.(세등68)

 

약 9분.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응성점두지팔각(應聲點頭遲八刻)이여  초가저사검거구(稍加佇思劍去久)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怕死老年)에 친석가(親釋迦)다.
명예와 권리를 추구하던 젊은 날에는 공자님을 섬겨. 보통 사람들이 다 젊었을 때는 유교를 숭상하고, 유교의 법도에 따라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지키면서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것이 다 공자님을 사모하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이 들어 생사 무상(無常)한 것을 깨닫고, 정말 이 세상에 오욕락(五欲樂)이라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도 어렵지마는, 설사 뜻대로 이루어졌다 하드라도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한 그 무상함을 깨닫고 발심(發心)을 해서 불법(佛法)을 믿기 시작해. 그것이 바로 죽음이 무서운 늙으막에사 석가(釋迦)를 친했더라. 불법을 믿게 되었다 이거거든.

무량겁을 오욕락을 탐허다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헌 것은 바로 이 젊은 날에 공자님을 사모한 것과 같은 것이고, 우리가 금생에 겨우 이렇게 생사가 무상한 것을 깨닫고 불법을 믿고, 불법에 귀의해서 특이한 사람은 출가해서 이렇게 납자(衲子) 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파사노년(怕死老年)에 친석가(親釋迦)다, 그렇게도 볼 수가 있는데.

응성점두지팔각(應聲點頭遲八刻)이여.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끄덕 응두(應頭)를 허면 벌써 팔각(八刻)이 늦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소리를 듣고 고개를 꺼떡거리면 벌써 팔각(八刻)이 늦어.
‘아무개야!’ 불러서 ‘예!’ 하고 대답한 것도, 벌써 부르는 시간이 있고, 대답하기 위해서 - 스스로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그놈에 응해서 대답을 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벌써 팔각이다.

초가저사검거구(稍加佇思劍去久)다. 조금 벌써 생각을 머뭇거리면 - '앗! 누가 나를 부르는구나' '앗! 응 그렇구나'하고 벌써 속에 잠깐 머뭇거리면, 칼이 이미 지내간 뒤다 그말이여.
‘칼 조심해라. 누가 너를 칼을 찌를라고 허니까 칼 조심해라’하고 그 소리 듣고 벌써 요리 피헐려고 하면 벌써 칼이 모가지를 지내간 뒤가 벌써 오래다.

우리 수행자가 공부를 헐 때에, '아! 바로 이것이로구나'하면 벌써 아닌 거여 그게. 누구한테 가서 물어보자말자 벌써 그게 모가지에 칼이 지내가 버린 거여.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로구나!'헐 때 틀려버린 거여. 그렇게 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우리 수행자가 항상 주의할 것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여.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헐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純一)하고 무잡(無雜)할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 가지고는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는 것이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경지에서 '하! 이것이로구나'하고 그렇게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그것을 조백(糟魄)이라 그래. 그러한 조백을 안다면, 어떤 좀 그럴싸한 무슨 경지를 맛봤다고 해서 행여나 「이것이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런 서투른 생각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 수행자는 이 일대사!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잡드리 해서 어쨌든지 가행정진, 명실공히 용맹정진을 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움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걸어두노라.

버드나무 가지가 그 바람에 일렁거리는데, 그것을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어. 그것을 붙잡을 수가 없으니까 바람과 함께 난간에다가 이렇게 걸어둔다.(41분58초~51분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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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구명소일모선성 파사노년친석가’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學佛吟’에서.
*(게송) ‘응성점두지팔각 초가저사검거구’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258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참고.
*遲(더딜·늦을 지) *刻(시간·때 각) *稍(점점 초) *佇(우두커니 설·기다릴 저)
*삼강오륜(三綱五倫) ;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의 강령과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납자(衲子 기울•옷을 꿰맴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 스님을 이르는 말.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때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조백(糟魄 술지게미 조/찌꺼기 백) ;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인들의 저서와 말은 모두 찌꺼기란 뜻으로, 무릇 참된 도는 말과 글로 전달될 수 없으므로 현재 전하는 모든 것은 술지게미에 불과하다는 뜻.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가행정진(加行精進) ; 어떤 일정한 기간에 수면을 매우 줄이고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여서 하는 정진.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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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게송) ‘학도지인불식진~’ /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식신(識神)을 갖다가 자기의 본래신(本來身)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이 참선하는 사람은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아,이것이로구나.’ 그 생각이, 살생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음행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58) - 1985년(을축년) 신수기도입재(1985.02.22)(62분)에서. (용258)

 

약 8분.

 


학도지인(學道之人)은 불식진(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대  치인환작본래신(癡人喚作本來身)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학도지인(學道之人)이 불식진(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 이치를 아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삼아 - 식신을 가지고 자기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그렇게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그말이여.

그 식신(識神),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눈으로 무얼 보면 청·황·적·백을 분별을 하고 크고 작은 것을 알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 ‘저것 좋은 향내다’ ‘저것은 독한 가스 냄새다’ 그 향내를 분별하고,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면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생각으로 ‘저것은 좋은 일이다, 저것은 나쁜 일이다’ ‘저것은 예쁘다 밉다’ 그런 것을 분별을 하고, 이러한 것이 모두 우리의 식신(識神)의 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 식신(識神)이라 하는 것은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생사본(生死本)이여. 저 비롯함이 없는 저 무량겁 이전으로 부터서 오는 낳다 죽었다, 낳다 죽었다 하는 생사윤회의 근본이여.

치인(癡人)은 환작본래신(喚作本來身)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이 생사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불러 가지고 본래신(本來身)이라 하더라 그말이여.

참선을 하게 되면은 바로 이 눈으로 무얼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줄 아는 이놈을 내놓고 어디가 마음이라 하는 것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 나의 면목이다.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깨달은 분상에 보면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그놈을 여의고 본래신(本來身)이 없겠지마는,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바로 그놈이 바로 부처다. 그놈이 진여다. 그것이 바로 나의 참 면목이다. 그 놈을 여의고 무엇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다’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 낼 때에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과 거의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만은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일수 있으나 또 한 사람은 영원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사의 근본을 그릇 인식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아,이것이로구나.’ 그 생각이, 살생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음행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하셨지만, 산목숨을 죽이면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행히 영겁 뒤에 사람의 몸을 받아난다 하더라고 단명보(短命報)를 받거나, 평생에 병고(病苦)를 받는다 하셨습니다.

살생(殺生)이 그렇게 무서운 죄지만, 식신(識神) - 생사윤회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나의 본래의 부처라고 착각하는 그 죄는 영원한 생사(生死), 다시는 헤어나기 어려운 - 불조(佛祖)가 출세(出世)하셔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세하셔도 구제할 수 없는 - 그러한 무서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생하는 죄는 참회(懺悔)를 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지만은, 생사의 근본인 알음알이를 ‘참나’의 면목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참회할 길이 없고 구제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착각에 빠진 사람은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식신(識神)을 갖다가 자기의 본래신(本來身)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24분24초~32분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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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학도지인불식진~’ ;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 게송. [선문염송·염송설화 5](동국역경원刊) p36 참고.
*식신(識神) ; ①심식(心識). ②분별의식(分別意識).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것.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본래신(本來身) ; 진여불성(眞如佛性).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 ; 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되풀이되다 ; (같은 말이나 일이)반복되어 행해지다.
*그릇 ; ①어떤 일이 사리에 맞지 아니하게. ②어떤 일이나 형편이 잘못되게. ③어떤 상태나 조건이 좋지 아니하게.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살가죽을 벗겨 불 속에 집어넣거나 쇠매〔鐵鷹〕가 눈을 파먹는 따위의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함.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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