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119)) 주금강(周金剛) 법문 / 주금강이가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태워 버린 그 도리, 용담(龍潭) 큰스님이 촛불을 비춰 줬다가 탁! 꺼버린 그 도리는 그 무슨 도리며, 그거 다 공안(公案) 도리(道理)인데, 하나도 어김이 없이 바로 탁탁 일러야 하는 것이여.
만공스님의 공안 답 편지를 보월스님이 불 태운 일화 / 알 수 없는 화두 의심 하나를 가지고 비비고 나가거라. 뚫고 나가거라. 정진해 나가거라. 이것이 화두에 제일 묘(妙) / 알 수 없는 이것이 참선법(參禪法) / 보월 스님 첫 설법 이야기.
**전강선사(No.119)—1972년(임자년) 1월 관음재일 법문(송담스님, 전강선사 두 분 법문) (임자72.01.24) (전119) (화두공안)
(1) 약 20분.
(2) 약 12분.
(1)------------------
주금강이가, 주금강(周金剛)이라는 거 그 속인 이름을... 주금강이가 중도 아니고 속인인 거지마는, 하여간 옛날에는 중보담도 속인(俗人)이 더 발심(發心)했고, 더 부처님의 정법을 더 바로 믿고.
남방에? 남방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늘 헌 법문이여. 또 없는 법문인 줄 알고 들우? 뭐 내가 없는 법문, 어떻게 뭣허러 갖다가 없는 법문혀? 이런 법문, 늘 들은 놈을 해사 말길이나 다 알아듣지.
주금강이라는 사람이—거 사람이지 뭐 별거 있나—사람이, 부처님이 설법하시되 부처님 경서(經書) 가운데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사 성불(成佛)하니라' 삼아승지겁이면은 그거 설찬히 역사가 오래다 그말이여. '설찬히 오래다'는 말은 이건 무수겁(無數劫)도 거그는 붙지 못혀. 몇억만 겁도 거다가 붙일 수 없어. 한량없는 참 오래란 말이여.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사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하느니라. 견성해서 부처가 되느니라' 했는데, 견성해서 부처 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니까, 생사해탈을 해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니까.
생사해탈이라도, 생사해탈 다시 또 또 또 생사(生死)가 있어? 그건 소용없어. 생사해탈했으면은 아주 해 부렀지, 영원히 생사해탈해 부렀지. 그 또 미(迷)해서 범부(凡夫) 되아? 없어. 생사해탈해 버린 것을 부처라 햐.
삼아승지겁을 닦아야사 생사해탈해서 부처가 되어 가지고 출세장부(出世丈夫)라고 했는데, 남방(南方)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바로 사람 마음 가르켜서 견성해서 부처 되어 버려?' 그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찰나간(刹那間)에 있다고 햐? 찰나간이라는 건 '잠깐 사이'인데, 찰나(刹那)가 아승지겁(阿僧祇劫)과 대(對)여.
아승지겁이란 하도 원대(遠代)해서 역사(歷史)로 댈 수 없는 것을 아승지겁이라 하고, 찰나(刹那)라 하는 것은, 어떻게 그동안에 찰나라는 건 엇다가 일념도 아니어. 일 분도 아니고 일 초도 아니어. 착! 뭐 없어. 역사도 없어, 그놈 찰나라는 건.
'남방에서는 중생 성불(成佛)이 찰나간(刹那間)이락 해 가지고는 이 선법, 참선법(參禪法)을 가르키고 앉았어? 이놈 외도(外道) 놈들을 항복 받을 수밖에 없다' 항복을 받으러 나오는데, 삼아승지겁이라는 그 경서(經書)를 짊어지고—삼아승지겁이라는 그 경(經)이 어디 있냐 하면 『금강경』에 있거든.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에 있잖아.
금강경을 뚤뚤 말아 짊어지고는 남방에 외도, '찰나 사이에 견성성불한다'는 외도를 항복 받을 수밖에 없다. 나오다가 다 와서 그 용담(龍潭) 스님 회상(會上)에 그 선방(禪房)이 있으니까, 선방에 용담 스님이 그렇게 삼아승지겁을 닦아서 성불한 도리를 갖다가서, '찰나간에 성불해서, 중생 성불해서 생사해탈한다'는, 그 가서 막 '이 마구니들을 이 숭악한 마구니를 때려 부술 수밖에 없다' 하고는 나왔다 그말이여.
나와서 불과해야 얼마 안 된 그 지경에, 그저 잠깐 동안 갈 테이지만 배가 고파서 점심을 좀 사 먹고 가려고, 그 지금 같으면 가다가 무슨 뭐 음식 파는 음식점에 노파가 하나 있으니까 노인한테, "여보, 거 나 점심(點心) 좀 주오. 점심 좀 요기 해야겠소, 좀 주오"
“예, 그 점심(點心)은 드리지요마는, 거 짊어진 건 무엇이기에 그리 조그만한 똘똘 말아 짊어졌소? 아, 그 똥글똥글하네" "여, 짊어진 건 금강경이요"
"금강경은 왜 지고 오시오?" "남방에 외도(外道)를 항복 받으러 오지. 중생 성불이 찰나간(刹那間)이라고, 마음만 깨달으면 곧 성불해서 생사가 없다는 그런 놈의 외도들을 항복 받을라고 이 짊어지고 오요. 그 금강경 가운데에... 그러면은 삼아승지겁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바로 부처님이 말씀을 해 놓았는데 부처님 말씀을 어긴 것이 그것이 외도가 아니겠소? 그래서 그래 금강경을 짊어지고 와 증거 댈라고 지고 오지요"
"그래요, 그러면 그 금강경 가운데에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 현재심(現在心) 불가득(不可得),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을 통 얻지 못해. 얻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씀이 있는데, 점마하심(點麽何心), 어느 마음에 점(點)을 칠랍니까?"
금강경에 있는 말이지. '과거심도 얻지 못하고, 현재심도 얻지 못하고, 미래심도 얻지 못하니 그 어떤 마음에 점을 칠랍니까?' 흥, 입이 붙어버렸네. 삼아승지겁을 닦아사 성불한다는 말만 믿었지,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본래 없는 것은 보들 못했것다.
과거 · 현재 · 미래심이 그 어디 있는가? 우리 시방 한번, 한번 내심(內心), 안 마음으로써 어디 한번 살펴보고 밖으로 또 살펴보십시오. 밖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어디 가서 '안 마음[內心]'이, 어디 가서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붙어 있고 어디 가서 뭐가 있어?
없지? 없어. 암만 말은 곧 그만 '과거심이다 현재심이다 미래심이다' 곧 했다마는 없다. 그렇게 한번 바로 들어가서 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답 못했지. "여보, 당신 점심(點心)을 내가 줄라고 했더니, '그렇게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가운데, 어떤 마음에 점심을 먹일라고 하느냐?'고 물어도 답 못혀? 여보 당신 나한테 점심 얻어먹기는 틀렸으니 짊어지고 가오" 밥 못 얻어먹었다.
그길로 바로 그 용담(龍潭) 큰스님, 참 조실 스님한테를 척 가서 조실방(祖室房)에 척 들어갔다. 들어가서 그 문답처(問答處)에 가서 꽉 맥혀. 뭔 뭐 뭐 대답 한마디, 뭔 말이 있어? 벌써 거기서 방맹이 맞고 간 사람이.
책도 내놓기 전에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냐? 무슨 물건이 왔냐?” 하는데, 다시 무슨 뭐 입 한번 벌린 일이 있어? 무슨 물건이 온지 모르지. 이렇게 막혀 버리고. 뭐가 있어야지. 답할 수가 있나?
인사하고 나갈라 하는데, 밤인데 (용담 스님이) 촛불을 써주었다가, 촛불 불빛에 신을 찾아 신고—주금강이가 신을 찾아 신고, 막 신을 찾아 신고 돌아서려고 할 때, (용담 스님이) 촛불을 탁! 끄는데,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했거든. 촛불 탁! 끌 때 활연대오를 했다 그 말이여.
그래 그만 짊어졌던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불 탁! 질러서 탁 태워 버렸지. 금강경, 주금강이가 태워 버린 그 도리는 그 어째서 태웠으며, 촛불을 비춰 줬다가 탁! 꺼버린 그 도리는 그 무슨 도리며, 그거 다 공안(公案) 도리(道理)인데, 하나도 어김이 없이 바로 탁탁 일러야 하는 것이여. 공안이라는 게 그려.
인천서 서울을 갔다 오면은 '정거장이 몇이냐?' 하는데 가서 '일곱이다' 일곱 정거장 가운데, 부평은 어떻게 생겼으며, 소사는 어떻게 생겼으며, 거 주욱 남대문까지 다 고대로 딱딱 말해야 되지. 보도 않고는 할 수 없거든. 공안이라는 게, 화두가 그렇게 되어 있어. 따악 있는데.
주금강(周金剛)이가 법당 뒤에서 탁! 태워 번지고 나와서는 '참! 이렇구나. 불법(佛法)이 여차(如此)하구나!' 하고, 그전 주금강(周金剛)이가 아니어. 바로 주금강(周金剛)이여.
그러면 그 도리를 중간에, 만공(滿空) 스님 회상에서 운암 스님이 지내다가, 정운암(鄭雲庵)이라고 하는 이가 만공 큰스님 밑에 도를 닦고 그러고 있다가 부산으로 내려간 뒤에 그놈이 의심나니까, 그 주금강이가 그 법당 뒤에다가서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 탁! 태워번지고 대장부(大丈夫) 세력을 지은 그 도리를 물었다 그 말이여.
그 도리가 내나 '점마하심(點麽何心), 금강경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都不可得)이니 어느 마음에 점(點) 칠라느냐?' 고 점(點) 딱! 쳐야, 고거 그 주금강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한 도리가 고놈이여. 금강경소초 탁! 태워 버린 고 도리(道理)여.
그러니 만공 큰스님한테는 묻되, '그때에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이니 점마하심(點麽何心)입니까? 하고 물을 때에는 큰스님은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니까, 만공 큰스님께서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 점심요야(點心了也)다. 과거 위음왕불 이전에 점심 먹어 마쳤다'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최초불(最初佛)인데, 얼마나 과거 위음왕불은 깊고 오래 되었고 참 역사적입니까. 그 '과거 위음왕불 생기기 전에 점심을 먹어 마쳤느니라' 요렇게 답(答)을 해서 부산 시방 선암사 운암 스님이 묻는데 그놈을 답(答)을 보낼라고 써 놨는데, 그 답을, 우편국(郵便局)에다 부칠라고 가지고 간 놈을 뺏어 가지고는 보월(寶月) 스님이—만공 스님 큰 제자인데, 수제자인데—뺏어 가지고 불을 탁! 질러 버려. 불을 탁 질러서 때려 치워 번지고는 "뉘 눈깔을 멀리시려고 이러헌 답이 있습니까?" 법사 스님한테. 만공 큰스님한테.
벼락이지! 거, 법담(法談)이라는 것은 무슨 참 한번 그릇친다면은 큰일나지. "뉘 눈깔을 멀릴라고 큰스님께서 이런 답이 계시리까" 앞에서 그래.
깜짝 놀래 가지고는 그때부터 밥을 안 잡숫고는 고놈을 공안해 가지고 '어느 마음에 점 쳤다고 해야사 맞겠나?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처(都不可得處)에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요놈을 가지고는 이레 동안을 금선대(金仙臺)에서 가만히 앉어서 입정(入定) 중에 앉아서 공부를 하시다가 이레 만에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는, "보월, 이리 오소. 내 답을 듣소"
보월 스님, 오라고 하는데 안 갈 수 있어? 앞에 척 가서 꿇어 앉아서 "그저 황송합니다" 그 큰스님한테, 과연 큰스님이 그르친 것을 보고, 바로 보시지 못한 것을 보고, 한 말 한번 여쭈었지마는 그건 헐 수 없거든. 제자 지위가 있으니까, "황송합니다" 하고 업드렸으니까, 답을 척 하시는데 참 그런 명답이 없었죠? 그래, 보월 스님이 역시 절을 제대로 무수히... "그렇습니다" 이렇게 답해 마친 일이 있고.
그다음에 응, 고 부산서 답해 놓은 답은 아직 이 만공 스님과 이 답하기 전에 그 안에, 일주일 안에 답을 해 보냈습니다. 그 답을 해 보냈지마는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都不可得), 도불가득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면은 암만 답해 놔야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니까.
그 답을 또 좀 들어보십시오.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都不可得)인데 점마하심(點麽何心)고? 어느 마음에 점을 칠라느냐?" 이렇게 떡 물을 거 같으면은, 보월 스님 답이여. 만공 스님 제자, 보월 스님 답이여.
'배호서(背湖西)하고, 호서(湖西)를 등지고' 그 호서(湖西)인께 서(西)인께, '배호서(背湖西)하고, 호서(湖西)를 등지고, 향영남(向嶺南)은, 영남(嶺南)으로 가는 것은 심중(心中)에 부절여의(不絶餘疑)러니, 마음 가운데에 남은 의심을 끊지 못했더니, 여금(如今)에도 여의(餘疑)를 끊지 못했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본 뒤에는 소각해 버리고, 태워 버리고 소각, 갱절여의(更絶餘疑)해라, 다시 여의(餘疑)를 남은 의심을 끊어라(背湖西向嶺南 心中不絶餘疑 如今不絶餘疑 見後燒却 更絶餘疑)' 요렇게 보냈어.
그게 그 무슨 답이겄냐 말씀이여. 생각해 보시오. 확철대오한 도리가 그 도리여?
이 '호서(湖西)를 이별하고 영남(嶺南)으로 가 가지고는 여태까장 그 의심(疑心)을 끊지 못했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본 뒤에는 태워 번지고 다시 남저지(나머지) 의심을 끊어라' 고렇게 답했다 그말이여
이 생사해탈(生死解脫) 도리가, 내나야 아까 내가 오도송(悟道頌)에, 터억 깨달아 가지고 오도송을 짓되, '밝은 달밤에 근촌(近村)에서 젓대 소리가 들리고, 여 가까운 어디 절에 새벽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종소리 들리는 그 도리이고, '밥 먹자, 옷 입자, 가자' 하는 그 도리여. 그 도리를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어.
그런데 천 가지 만 가지 백억 이치를 다 여의고 봐도 점점 진흙 밭에 빠져 들어가 죽으러 가는 골 밖에는 없다. 그래서 헐 수 할 수 없이 '유무지견(有無之見)이니, 있다 없다, 뭐 있고 없는 놈 까장도 없다' 별별 걸 다 여의어 버린 거기에 나아가서 공안(公案)이 있다. 내가 밤낮으로 하는 말씀이 이것 아니요.
공안이 거가 있어.
입으로써서는, '입 열기 전에 그르쳤다. 미개구착(未開口錯)이다' 입 열기 전에 그르친 것이 제이구(第二句)여. 그게 제이구(第二句)여. 입 열기 전에 그르쳤는데, 입도 열기 전에 그르쳤는데 글쎄 무슨 이치를 때려 붙여 옳겄냐 그 말이여.
그래서 세상에 그 모도 선도(仙道)가 있지마는, 그 선(仙)도 비슷비슷하지마는 장자(莊子)의 철학이니 노자(老子)의 철학이니, 장자에 현빈(玄牝)이니 노자의 허무(虛無)니, 그러헌 것 가지고는 될 수 없어.
다맛 우리 부처님 정법문중(正法門中)에는 '심마물(甚麼物)이냐?' 이뿐입니다. 이것 하나뿐입니다. '무슨 물건인고?' '밥 먹고, 오고 가고 오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 알 수 없거든.
지가 무슨 이치를 붙여 죽지 말고, 대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알 수 없는 그놈 하나를 가지고 비비고 나가거라. 뚫고 나가거라. 정진해 나가거라. 이것이 화두에 제일 묘(妙)입니다.
그러면은 거기에서 제일(第一) 분심(憤心)을 가져라. 분심이란 건 분(憤)한 마음. 분심이라 하는 것은 '어째서 세상에 말이여. 세상에 내가 나를 몰라? 내가 나를 모르고도 살 건가? 이게 사는 건가? 아이고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머니 뱃속에 들어올 때에 뭐가 왔어? 뭐가 왔어? 뱃속에 들어앉아서 요 몸뚱이 하나를 이걸 이만큼 타 가지고 나왔지마는 몸뚱이 퍼 짊어지고, 싸 짊어지고 나온 물건이 무슨 물건이여? 요까짓 몸뚱이 또 나와서 그 시비해리(是非海裏)에서 횡신입(橫身入)하고, 그 사기 협잡이나 하고 일평생 살다가 또 내던져 버리고 또 가는 놈이 있으니, 뭐가 가냔 말이여? 뭐가 가는데 또 가는 곳은 어디냔 말이여.
이것이 인생의 근본 철학이다. 무슨 또 철학인가? 비철학(非哲學)이여, 철학도 아니여. '이게 심리학이다' 무슨 심리학이여? 심리학은 무슨 심리학이여? 철학도 아니요, 심리학도 아니요, 종교도 아니요.(34분38초~54분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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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니여! 뭐 '내'라는 이름을 때려 붙이면 내 '내'라고 하는 놈이 무엇이여? 내가 내여? '내'라는 것도 내가 내 이름 때려 붙여서 '내'라고 해 가지고서는, 거다가 별별 무슨 아소심(我所心)을 갖다 때려 붙이는 것이 중생 모도 습기(習氣) 습성(習性)으로써 한 것이지마는, 어디 그게 낸가? 나도 아니지.
비유(非有)여. 유(有)도 아니다. 있는 모양이 어디 있나? 비무(非無)다. '없다'고 상(相)을 붙여봐라. 무슨 또 없나? 이렇게도 있는 놈인데 왜 없어. 내 눈앞에 모도 보이는 것이 유(有)요,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만상삼라(萬象森羅)와 정여무정(情與無情)과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촉촉(化化觸觸)이 뭔가?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없어?
또 그놈을 '있다'고 해 놓고 보니 '있다'고 한 놈에 그 근본을 찾아 들어가 봐라. '있다'는 놈이 어디가 상(相)이 있나? 어디가 색상이 붙어 있나? 뭐 내가 눈으로 한번 뜰 때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그대로 보인다마는 눈 한번 척 감고 보니 뭐가 있나?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러니 이놈에 그 무슨 유(有)도 실법(實法)이 아니요, 무(無)도 실법이 아니요, 유무중(有無中)도 실법이 아니다.
자! 도대체 이 천언만담(千言萬談) 구백생명을 조장시키는 내 주인공(主人公)! 일념지간(一念之間)에도, 한 번 마음 내 가지고도 거기에 번식을 해서 별별 놈의 생각, 색상(色相) 장엄(莊嚴)을 해 제키는 이 주인공, 내 마음자리, 도대체 이놈이 뭐냐?
알 수 없는 이것이, 이것이 참선법(參禪法)이여.
왜 내가 몰랐나? 왜 나는 모르고 있나? 과거 제불(諸佛)은 누구인데, 부처님은 벌써 장부(丈夫)가 되어 버렸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해 생사 없는 부처님이 되어 가지고 앉아계신다. 무슨 생사가 있나? 요요장재백운간(寥寥長在白雲間)이지.
왜 우리는 이렇게 생사해탈을 못하고 이 지경 되어 있노? 이게 무슨 지경이란 말이냐? 분(憤)하구나.
자, 이 몸뚱이 하나 받아 와 가지고—이만한 몸뚱이, 건강한 몸뚱이 요만큼 가지기도 솔찬히 어려운 문제이니라.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핏덩어리 같은 몸뚱이 하나 가지고 나와서 그래도 이렇게 죽지 않고 까불까불 살았다고 놀리고, 눈으로 보고 왔다갔다하고 산다마는, 일식불래(一識不來)며, 그놈의 왔던 식(識)이 가 버리면 그만인 거, 고격, 식풍(識風)이 고격(鼓擊)해서, 바람지내가 듯이 그냥 가버리면 그만 인거, 목숨 하나 끊어지면 그만 인거, 또 언제 가서 또 요만한 몸을 장만해 오겄노?
이 몸이 없으면은 이 공부를 못하는 것이니, 자 금생에는 다행히 이 몸을 얻어서 이만큼 건강한 때가 되었구나. 자, 분심을 내야겠다. 분한 마음을 내야겠다. 나는 어찌 못한단 말이냐.
인인개개청풍불(人人箇箇淸風拂)이요, 사람 사람이 발 앞에는 청풍불(淸風拂)이 있고. 왜? 왜 부처는 벌써 장부(丈夫)가 되어서 생사 없는 해탈세계(解脫世界)에 주인공(主人公)이 되어 있고, 우리는 이와 같이 해탈 못하고 이와 같이 되어 있어?
분심도 철저히 내야겠다마는 신심(信心)을 갖춰야겠구나. 신(信), 콱! 믿어야겠구나. 왜 내가 믿지 못하고 여차(如此)하노? 왜 이렇게 지내가? 철저히 믿어 가지고 의정(疑情) 돈발(頓發)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이 몰록 돈발해 가지고 의심을 한 번 때려 부셔야 하겠구나.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놈이 의심 아닌가. 의심 하나를 때려 쳐부숴야겠구나. 이놈 하나 대분심(大憤心), 대신심(大信心), 대분지(대의심大疑心) 이 삼요(三要)를 갖춰라.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갖춰라.
그래 운암(雲庵) 스님한테 보월(寶月) 스님은 그렇게 편지를 척 해서 보내고, 만공(滿空) 스님은 거기에서 크게 깨달라서 참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했어. 그러면 만공 스님이 보월 스님만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공안도 그렇게 실수가 있는 공안이 있어. 조주(趙州) 같은 밝은 그런 분도 그 그렇게 세 번 실수한 일도 있거든.
그래서 견성을 해 가지고도 공안(公案)에 탁마(琢磨)를 혀. 잘 견성한 스님한테 가서 탁마도 하고, 또 학자가 더 크게 아는 법은 큰스님한테 또 탁마 시켜 드리기도 하고, 이러헌 것이 탁마상성(琢磨相成) 붕우지은(朋友之恩)이여. 사장지은(師長之恩)이고. 여까지 말씀을 했는데.
보월 스님 같은 그런 밝은 이가 만공 큰스님 밑에 났어. 나서, 공안이 당최 막힐 것이 없고, 일체 공안을 척 들어 대면은 스님보다 더 하니까 뭐 '아이고! 우리 보월밖에 없네' 하고, 당신 좌(座)를 맡겨 드렸어. 아! 그러니 보월 스님이 인자 조실(祖室)이지.
그래도 원청 노장님이 살은 오지게 쩠어. 그렇게 많이 살찐 이는 없어, 남자로서. 머리로써 모가지로써 몸뚱이가 거지반 같어. 똑 깍지동만하게 생겨 가지고 옷을 못 입어. 아무리 해도 여가 벌어져 버리고 인자 옷이 안 맞아.
그래 가지고 항상 이러고 앉아 있으면은, 우는 상(相)이라, 여가 이렇게 붙어 가지고. 볼때기도 뻘-겨. 참 그렇게 못난 이는 천하에 없거든. 뻘-게 가지고는 '헤-' 하고 앉아 있는 노장이여.
아, 만공 큰스님이 법(法)을 그리 전(傳)했으니까, 대중은 잔뜩 모여 있으니까, 와서 설법을 청(請)할 거 아니어. 대중이 모도 그저 인자 참 '보월 큰스님께서 설법해 줍소사' 하고 대중이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했는데 안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사부대중이 꽉 짜서 들어앉았다 그 말이여.
꽉 들어앉았고 또 법당(法堂)이라는 것은 대중만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니어. 칠부대중(七部大衆)이 모두 와서 있는 거여. 칠부대중이라 하는 것은 비인(非人) 등(等)이 있어. 사람 아닌 등(等)이 있어. 비인(非人) 등(等)이란 모도 귀신, 귀신 등류(等類)가 있거든. 거 부처님 설법한다고 비인(非人) 등이 다 모여 있어서, 거 위엄(威嚴)이 무서운 것이거든. 설법상(說法床)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란 말씀이여.
아, 그런데 올라가시라고 하니까 인자 올라갔지. 아, 좀 연습이라도 해 보고, 좀 혼자 뒷방에서라도 해 보고 그러고 올라가야지, 그냥 올라가라고 헌다고 생전 안 하다 올라가 논게 뭔 말이 나올 게 있나, 아무 말도.
법(法)이라 하는 건 누가 아나? 이것도 법이고, '억!'도 법이고, '뚝!' 이것도 법이고, '뭣이 어째 이놈!' 이것도 법인데, 아무 거나 쓰면 되지마는 못써. 쓸성 싶어? 안되거든. 어떻게 그놈 턱! 쓰면 그놈 잡아 가지고 패궐(敗闕)을 뒤집어버리면 꼼짝달싹 못한 것이여.
아, 올라가 논게, '설법(說法)해줍소사' 헌께 올라가 가지고는 엉뚱한 넨장—만공 큰스님이 올라가서 설법하면 잘하지, 설법을. 만공 큰스님 설법. 그 한번 설법을 해 놓으면은 그만 중생의, 그 중생의 번뇌 망상이 스르르르르 없어져 번지고 그 법 믿는 마음이 '하, 부처님' 하고, 이 마음이 돌아 나온다 말이여. 음성(音聲) 가운데.
그런 설법을, 게송(偈頌) 읊은 걸 늘 들었으니 '나도 인제 설법(說法)하면 저렇게 한번 하리라' 고 생각은 간절했다 그말이여. 아 그러면 좀 익혀 가지고 해야 할 텐데, 생전 익히지도 않고 올라와서 되나?
또 올라와서는 아,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끝에 설법 다 하고 내려와서 하는 법인데, 아 그냥 올라앉아서 처음에 막 올라앉아 가지고 그놈부텀 내놓는다. 마치고 내려올 놈을 한다 그말이여.
뚱뚱한 노장님이 법상(法床)이 능~청 해 가지고 앉아, "웬갱~ 법계~" 운다 그 말이여. 그냥. 울어 버려. 아, 그러니 보통 사람과 달라서 얼굴이 그래 크고 뚱뚱한 이가, 본래 또 우는 것 같이 생겼는데 '웬갱법계~'를 하고 우는데, 볼 수가 있나? 참 볼 수가 없지.
그럼 바로 그 앞에서 혜성이라고 뚱뚱한 조카 상좌, 한 놈이 있는데, 얼굴도 그놈도 또 뚱뚱혀. 모두 뚱뚱한 것들.. 뚱뚱한 조실 스님 밑에 뚱뚱한 놈도 앉았다가, 이래 보더니 "하하 하하하, 아이고 죽겄네" 하고 그러고 웃어 버렸네. 뚱뚱한 사람이.
아, 그래 놓으니 그만 조실 스님도 올라가서 '웬갱법계~'를 하면서 울었지, 아, 이 혜성이라고 이놈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웃어버린게 노장님이 법문도 못하고 이러고 앉았지. 앉아 있는데, 조해운 스님이라고 그이는 입승(立繩)인데, 또 입승 스님도 그만 혀. 그렇게 크던 않아도 그 뚱뚱하니 그렇게 생긴 이가 입승인데 뒤뿌리라 그랬다. "웃지마라, 웃지마! 히히히히히" 웃지 말라고 해 놓고는 '웃지마라, 웃지마라' 해 놓고는 '히히히히히히' 아! 이래버리네.
아따, 비구니 대중, 그 사부대중이 꽉 모였다가 웃음판이 되아 번지고 말았소. 그러니 보월 큰스님이 그렇게 견성을 크게 해 가지고 설법상에 올라가서 그런 우세를 했다 그 말씀이여. 그 송담(松潭) 스님이 그런 우세할까 싶어서 첫 설법상에 안 올라온 것이여. 아 한번 턱 올라와서 우세를 해야사, 척...
그 그다음에는 한번 우세하고 나서는 생전 게송 한 번 안 읊어. '원공법계' 소리 한마디 한 일 없어. 참 그 평생을 못 들었구만, 그 우세 한 번 하고는 안 혀.
아, 한번 올라와서는 그런 우세를 헐 요량하고 터억 한번 할 것인데, 아 온 대중이 그만 모다 웃고 그런 바람에 아 얼마나—그래도 그 가운데에 모도 발심(發心)은 다 했거든. 다 믿고 더 발심하고, 나중에 보월 큰스님 법상에... 그래 그 뒤에는 법문 못하고 내려왔어. 내려와 앉았다가 조실방(祖室房)으로 내려왔는데 발대죽을 떠 받쳤어. 우세 아니라 더 그랬어도 하나도 소용없고 위법망구(爲法忘軀)여. 법 밖에는 거기에서는 대중이 몰랐어. 그래가지고는 그 큰스님을 모시고 법(法)을 배웠어.
아, 그러니 여기 한번 올라와서 뭐 참 한바탕 그 우스메 소리 한번 해도 좋고, 우세를 잔뜩 해 가도 좋은데, 올라가란게 안 올라가고 서서 그냥 강연식으로 한마디 해 버리니, 우리 대중 모도 여러분들이 기대가 어긋졌어. 이것으로써 오늘 설법은 마치고.(54분42초~66분50초)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117)) 오무기(五武器) 왕자 이야기.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 /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
〇이 길을 철저히 믿고 성실하게 해 나가면 얼마 안 가서 여러분은 과연 이 금강이라고 하는 무기가, 이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무섭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마음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을 때 여러분은 신심(信心)을 안 낼라야 안 낼 수가 없고, 분심(憤心)을 안 낼라야 분심을 안 낼 수 없고, 깨달음을 얻지 아니할라야 아니할 수가 없이 제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7)—1980(경신)년 신수기도 회향(80.02.24) (용117)
약 11분.
옛날에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 왕자는 아주 훌륭한 그 선생을 찾아가 가지고 다섯 가지의 무술을 익혔습니다. 활 쏘는 법 또 칼 쓰는 법 또 방패 쓰는 법 또 방(棒), 몽둥이 봉술 그리고 또 창을 쓰는 법,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을 아주 선생님에 못지않을 만큼 잘 배워서 능란하게 익혀 가지고 그 선생의 인가를 받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큰 광야를 만났는데, 광야를 지내오는 도중에 키는 야자수만큼 그렇게 몇십 척이 되는지 크고 그리고 눈은 큰 쟁반처럼 부리부리하고 그리고 아금니는 독수리 발톱처럼 생긴 그 무서운 아금니에다가 전신(全身)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털이 전신에 털이 나 갖고 있는 그러한 무서운 괴물을 만났습니다.
괴물이 앞을 턱! 가로막고서 "내가 여러 날을 굶었는데 마치 니 토실토실한 니 몸을 내가 먹어야겠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서 달라들었습니다. 그때 이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활을 갖다가 쏴 가지고, 그 괴물에 목을 향해서 쐈습니다. 뚫고 영락없이 뚫고 들어가 가지고 퍽! 쓰러질 줄 알았는데 쓰러지기 커녕은 그 화살이 그 번질번질한 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괴물은 또 한 발 다가왔습니다. 거기서 또 칼을 빼 들고 달라들어서 그 칼로 괴물에 목을 갖다 쳤습니다. 툭! 쓰러질 줄 알았는데 쓰러지지도 않고 칼이 괴물에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몽둥이를 휘둘러 가지고 몽둥이로 후려쳤는데 몽둥이도 딱! 들어붙어 버렸습니다. 방패도 딱 들어붙어 버렸습니다. 창도 갖다가 냅대 염통을 향해서 찌르고 달라들었는데 들어가지도 않고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몸에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무기가 다 그 괴물에 몸에 붙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먹으로 냅대 치고 달라들었습니다. 주먹이 그 괴물에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는 발길로 냅대 찼습니다. 발로 냅대 차도 발이 딱 붙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목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가지고 그 괴물에 가슴팍에다 냅대 쳐 받았는데 모가지까지, 머리까지 괴물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괴물이 하는 말이 "이제 다섯 가지의 무기와 니 주먹과 다리와 머리까지도 내 몸에 붙어버렸어. 이제 너는 꼼짝 못 하게 되었으니 이제 너는 내 입속으로 들어갈 수밖에는 없다. 어쩌냐, 각오는 단단히 되었느냐?"
오무기(五武器) 하는 말이 "허허, 니가 잘 몰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무기가 있는데 그 무기는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다. 인자 니가 나를 삼킬라면 삼켜 봐라. 내가 니 뱃속에 들어가 가지고 그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내두르면 니 창자 속이 갈기갈기 찢겨 가지고 너는 펄펄 뛰다가 죽어. 그러면 내가 니 배를 째고 나오면 되는 것이니 먹을라면 먹어라. 먹을수록 나는 더 좋다" 아, 그러니까 그 괴물이 아! 그 찬찬히 쳐다보니까 조끔도 두려운 기색이 없고 아주 자신이 만만해 가지고 먹으라고 하는데 겁이 왈칵 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금강이라는 무기를 빼 들고 달려들면 참으로 자기가 죽을까 싶어서 거기서 항복을 하고 빌었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나옵니다.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금강은 어떠한 쇠나 어떠한 것으로서도 이 금강은 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갖다가 '금강'이라 그러고.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경(經), 우리의 지혜(智慧) 지혜를 갖다가 금강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법보선원, 용화사 법보선원에 와서 이 금강을, 우리가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고 배워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건, 어떠한 슬픔을 만나건, 어떠한 괴로움을 만나건, 그때일수록 그 금강을 갖다가 챙겨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가슴이 아플 때도 '이뭣고?' 억울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슬픔과 그 괴로움과 그 억울함 때문에 가슴속에 불이 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병이 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가정이 파탄이 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지만, 정법(正法)을 믿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사람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잠깐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허리를 쭈욱 펴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그때그때를 잘 단속해 나간다면 그러한 어려운 일들, 그 광야에서 나타났던 그 괴물, 괴물도 꼼짝을 못하고 항복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고 많은 괴로움과 재난도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화두(話頭) 한 생각으로써 결국은 다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결국은 어떠한 기도 기도도, 어떠한 불공(佛供)도, 어떠한 수행도—아까 여러 가지의 무기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활이나 칼이나 창이나 몽둥이가 염불 · 기도 · 독경 · 주력 모다 이러한 것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고,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는 바로 내가 나의 참마음을 깨닫는 지혜를 얻는 길, 참선 화두에다가 비교를 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길을 철저히 믿고 성실하게 해 나가면 얼마 안 가서 여러분은 과연 이 금강이라고 하는 무기가, 이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무섭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마음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을 때 여러분은 신심(信心)을 안 낼라야 안 낼 수가 없고, 분심(憤心)을 안 낼라야 분심을 안 낼 수 없고, 깨달음을 얻지 아니할라야 아니할 수가 없이 제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소원이 경각간(頃刻間)에 이루어지고,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 어려운 것이 오히려 나에 도움이 되어주도록,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밑거름이 되어지게 하는 묘(妙)한 방법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047))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 /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되는 사람은 없다 /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 / 전강 선사의 직지사에서의 목숨 바친 정진. 상기병 / 묘(妙)하게 닦아 가는 방법은 일어나는 망상을 되돌려서 '이뭣고?' 화두드는 것.
〇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관(觀)해 가야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큰 의심 뭉텡이가 되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경지에서 그 대의단(疑團)이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동시에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〇이 참선은 꼭 여러 해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금방 금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그분은 공부가 잘되려면은 멀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에 모든 공부는 점점 닦아서 쌓아 올라가는 공부지마는, 점진적이지마는 이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금방 1초 전까지 콱! 맥혀서, 시커먼 먹통처럼 꽉 맥혀서 깜깜했다 하더라도 1분 후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47)—1977년 하안거 결제법문(77.04.15.음) (용047)
(1) 약 18분.
(2) 약 9분.
(1)------------------
전강 조실 스님 법문 들으신 동안 조우신 분도 이제는 눈을 번쩍 뜨시고 여기를 쳐다보십시오.
조실 스님 법문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서 한 말씀 한 구절 놓치지 않고 다 알아들었다 해도 정말 바로 듣기가 어려운 법문이어서 꾸벅꾸벅 처음부터서 끝가지 졸면서 들은 그 법문이 얼마만큼 조실 스님의 법문을 소화를 하셨는가? 댁에 가셔서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정사년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대관절 결제(結制)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안거(安居)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이냐? 이러한 말씀을 처음 들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 같아서 대충 결제와 안거에 대해서 말씀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인도에는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있습니다. 이 여름 석 달 동안은 어떻게 비가 많이 오던지 도저히 산에서 숲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도는 더운 지방이라 비가 아니 올 때에는 전부 다 흩어져서 나무 밑에 숲속에 들어가서 참선을 모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숲속에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군데 모여서 신도들이 지어서 바친 절, 선방(禪房)에 모여서 같이 참선을 했던 것입니다. 그 장마철에 왕래를 끊고 한 선방에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기간을 하안거(夏安居), 여름 안거라 이렇게 말하고, 그 안거가 시작하는 날을 결제(結制)라 그럽니다. 결제 동안에는 일절 자기 마음대로 멀고 가까운 데를 왕래하는 것을 금하고서 참선에 몰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여름 석 달 동안 공부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선원에서도 결제와 또 이 결제 참선에 참예 못한 법보제자 여러분을 위해서 또 백일기도도 아울러서 봉행을 하는 그 백일기도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맨 처음에 출가(出家)하실 때로부터서 견성(見性)하신 내용에 대한 조실 스님의 법문을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조우신 분은 들은 바 없이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 말씀도 빼놓지 않고 다 들으셨다고 이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세속에 계실 때에 친어머니 밑에서는 그렇게 호강을 하고 귀여움을 받고 자라시다가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모를 맞이한 날로부터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지고 정말 견디지 못할 그러한 나날을 보내시다가 결국은 출가하셔서—유기그릇을 만드는 유기 공장에 불무질을 하는 그러한 일자리도 가져 보셨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방황을 하시다가 해인사로 출가를 하셔 가지고 인공 스님을 만나 뵈옵고 김응해 스님 밑에서 사미(沙彌) 과정을 마치시다가 그 응해 스님의 그 법문을 듣고 또 그 친한 친구가 뜻밖에 죽게 되는 바람에 무상을 철저히 느끼시고서 선방으로 나오셔서 직지사 제산 스님 밑에서 참선을, 첫 철 참선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결제일이라 참선을 어떻게 해야 옳게 하고, 어떻게 하면은 잘못되는 것인가?
처음 나오신 보살님들을 위해서도 오늘 이 조실 스님의 법문은 대단히 중요한 법문이었고 또 오래 전부터서 참선을 해 오신 분들을 위해서도 대단히 요긴한 법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산 스님께 화두를 탈 때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해라' 이렇게 화두(話頭)를 일러주셨지마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배우시고 『선요(禪要)』를 배우심으로 해서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참선, 그러한 바른 참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어리신 몸에 그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선은 다맛 알 수 없는 의관(疑觀)이라야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관한다든지 그밖에 어떠한 묘한 것이라도 보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들여다보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념미생전,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하라'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대관절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어떻게 관(觀)하냐 그말이여. 이것은 아무리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하려고 한들 되지도 아니한 것이며, 해 봤자 이것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관(觀)해 가야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큰 의심 뭉텡이가 되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경지에서 그 대의단(疑團)이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동시에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의심하느냐?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아지 못한 것도 많지마는 깊이 따져 들어가자면 실상은 너무나도 아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훌륭한 대학자라 하더라도 깊이깊이 자세히 따져 들어간다 하면은 얼마 안 가서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 하는 사람이 아무것이나 대고 의심을 하면 되겠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선각자(先覺者)로부터 화두를 지정을 받아 가지고, 그 스님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도하에 간절히 골똘히 한 화두만을 의심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조끔 해 보다가 의심이 잘 안 나고 여의(如意)하게 들리지 아니하면 저 화두 좀 들어보고, 이 스님 밑에서 조끔 해 보다가 잘 안되면 저 스님 밑에 가서 다시 또 화두를 타서 해 보고, 3년 5년 10년을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갈팡질팡하다가 아까운 세월만 보내고 공부는 아무 얻은 바가 없는 체 방황만 하다가 마는 그러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 흡족하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 익혀 오기를 번뇌와 망상, 육식(六識)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살림을 해 온 우리입니다. 금생에 정법(正法)을 만나서 참선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갑자기 처음부터서 잘되리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익히고 익히고 해서 그것이 습관이 된 것은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잘되는 것이고, 안 해 보던 것은 처음에 하려고 하면은 잘 안되는 것이 정칙입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해 보니 오히려 더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정신집중이 더 잘 안되더라. 그러니 참선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냐? 오히려 참선하므로써 정신이 오히려 더 복잡하고 산란하고 한 것이니 참선은 정신집중에 해로운 것이 아니냐?'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마는.
우리는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건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면 저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면 이 생각, 해서 하루에도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마는 하루종일 다 마치고 나서 '내가 오늘 무슨 생각들을 했는가?'하고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도 별로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떠오른 것이 없으면 '오늘 하루 무엇을 생각했느냐?'하고 물어보면 '별 생각 안 했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아무 뿌리도 없고 주책없는 생각들을 정(情)껏 하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졸다가 잠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를 무량겁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익힌 것을 금방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한다고 해서 '이뭣고?'가 순일무잡하게 잘 되겠습니까? 안되지마는 그래도 또 들고 들고 또 들고 하는 동안에 차츰차츰 그전에 익숙했던 것은 차츰차츰 설어지고, 설었던 것은 차츰차츰 습관이 되어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글씨를 써도 처음에는 서툴지마는 얼마 동안 노력을 하면 잘 써지게 됩니다. 끝까지 계속해서 하면 점점 잘 써서 명필이 되겠지마는 어느 정도 가다가 붓을 놔 버리고 몇 해씩 놀아버리면 다시 글씨가 서툴어지는 것입니다.
참선과 번뇌 망상과의 관계도 그러한 예에다가 비교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한번 시작한 사람은 결단코 쉬어서는 아니된 것이고 중도에서 폐지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아서 대도를 성취할 때까지는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산다 해도 내가 안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석 달 결제를 시작하는 마당에 제방에서 정진 잘하신 좋은 스님네도 오셨고, 보살님네도 여러 해 동안 이 용화선원에서 참선하신 분도 여러분이 계시지마는 처음으로 생전 처음으로 참선을 하려고 오신 노보살님도 계시고 젊은 보살님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이 참선은 꼭 여러 해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금방 금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그분은 공부가 잘되려면은 멀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에 모든 공부는 점점 닦아서 쌓아 올라가는 공부지마는, 점진적이지마는 이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금방 1초 전까지 콱! 맥혀서, 시커먼 먹통처럼 꽉 맥혀서 깜깜했다 하더라도 1분 후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비약적이기 때문에 늦게 왔다고 해서 자기 자신은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고, 도저히 바랄 수 없고, 그저 참선하면 혈압도 내려가고, 머리 아픈 것도 낫고, 정신쇠약도 낫는다고 하니까 그걸 조끔 해 보리라' 이러한 얍삭한 마음으로 참선을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이 다 여래(如來)와,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 자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참선을 하면 다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거사(居士)님이나 처음 나와서 참선을 해 보려고 하는 보살(菩薩)님네들도 자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부처님의 말씀, 역대조사(歷代祖師) 스님네의 말씀을 깊이 믿고서 공부를 계속해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처음~18분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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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직지사(直指寺)에 처음 들어가셔서 제산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가지고 생각해 보니 '절대로 그 화두는 옳은 참선법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아시고서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서 계속 공부를 해 나가시는데,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깔고 방석을 하나 딱 갖다 놓고서 대중스님네야 방선(放禪)을 하거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상관이 없이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규칙을 세워 가지고 법당 뒤에서 정진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목탁을 치면 가셔서 공양을 잡숫고는 바로 법당 뒤로 앉아서 거가 앉어서 정진을 하시는데, 졸음이 와서 꺼뻑 하면은 두 번도 하기 전에 일어나셔서 왔다갔다 거니시다가 정신이 또 깨끗해지면은 다시 또 그 자리에 가서 또 앉아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해 나가시는데, 너무너무 골똘한 마음으로 너무 힘을 써서 이마빡에 '적을 소(小)'자를 쓰면서 계속 파고 들으셨던 것입니다.
이 참선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서 떠억 관(觀)해 나가야지, 머리로 화두를 들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해 가는 것은 좋지마는—힘을 쓸 곳이 있지, 머리에다가 화두를 두고 머리에다 힘을 쓴다고 하면은 전신(全身)에 피와 전신에 기운이 머리로 모이게 되어서 머리가 멍해지고 나중에는 골치가 아퍼지고 그래도 끊임없이 밀고 나가면 눈이 피가 벌겋게 상충이 되어 가지고 눈알이 둘러 빠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골치는 벌어지려고 그러고.
이렇게 해서, 그래도 쉬지 않고 밀고 나가셨기 때문에 조실 스님은 코로 입으로 뻘건 피를 막 쏟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골똘히 그리고 간절히 용맹스럽게 하셨으면은 그러한 지경에까지 도달하셨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은 제산 스님으로부터서 '니가 내 시킨 대로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니 멋대로 하다가 벌건 선지피가 코로 입으로 쏟아지는 그런 무서운 병이 발생을 했으니 너는 이 절로부터서 떠나라' 이렇게 해서 거기서 쫓겨나셨던 것입니다.
되던 안되던 기왕 할 바에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그러한 정도로 정진을 해야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한 신심(信心) · 분심(憤心) · 의심(疑心)이 없고서는 만날 참선한다고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써 세월을 삼고, 조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고, 방선을 하면은 잡담으로써 세월을 보내고, 입선을 하면은 졸고 번뇌와 망상으로써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한 철 한 철을 그렇게 지낸다고 하면, 10년 내지 30년 일생을 선방에서 선방으로 다닌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보장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을 부딪쳐야 할 곳은 그만한 정도에 간절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져야 하기는 하지마는,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느냐? 어떻게 의심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분명한 길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힘을 안 쓸 디다 씀으로 해서 그러한 무서운 병을 얻으셨다' 이리 말씀하시고 '묘(妙)하게 닦아 가는 길이 있었는디 내가 그것을 모르고서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묘(妙)하게 닦아 가는 것이냐?'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을 위해서, 여기엔 법회에 참여하신 지 아직 몇 번이 되지 아니하신 초발(初發) 신도 여러분을 위해서 불가불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 몸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내 몸 밖에 어떠한 환경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떠한 책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떠한 이론으로 이것을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몸 안에서 어떻게 찾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 우리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고 별별 생각이 다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은 분명 우리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시 무명심(無明心)이요, 번뇌 망상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은 망상(妄想)인 것입니다.
그 일어나는 망상은 중생의 전 살림살이지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거기에 가서 공부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망상을 여의고는 공부 길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망상을…. 대관절 그 망상 일어나는 곳을 우리는 깨달으면은 그것이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 자리로부터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망상을 버리고 찾어서는 아니됩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되잡아서 되돌려서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어떠한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조끔도 한탄할 것도 없고 심술을 낼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번뇌 망상이 전혀 일어나지 아니한 목석과 같은 그런 사람은 정신병자가 아니면 넋이 나간 사람입니다. 번뇌 망상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고, 살아 있고 정신이 분명해야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 쌓어 참선을 못합니다' 그 사람은 참선이 아직 무엇인 줄 잘 모르고, 옳게 닦아 가는 방법을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일어날수록 좋습니다. 일어나는 생각으로 바로 '이뭣고?'하면은 일어나는 망상은 나를 찾는 참선으로 들어가는 좋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18분16초~27분33초)
§(058) 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선지식의 지도 없이는 깨닫지 못한다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
〇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합니까?
〇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〇묻는 사람도 물속에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용058)
약 21분.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는 동지에 대한 말씀과 또 참선, 참선법에 대한 말씀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리는 법에 관한 말씀, 그리고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을 때에 법담(法談)하신 내용, 그리고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라야만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하는 것이지 간혜(乾慧), 영리해서 이리저리 발라 맞추고 따져서 말 잘하고 그러한 재주 기운 가지고 생사는 면(免)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참선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탁자(卓子) 위에 모셔 놓은 부처님, 또는 삼천년 전에 정반왕에 탄생하셨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신 싯다르타(siddhartha), 석가모니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인 줄 알고.
바로 지금 산승(山僧)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는 '참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그놈을 항시 놓치지 말고 그놈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있길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입을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 없는 모든 일은 다 할 수가 있어도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의 몸으로부터서 부처님을 밖으로 내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번 뛰었다 엎쳤다 온갖 짓을 다하고 한다 하더라도 나로부터서 나의 부처님을 밖으로 내몰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부처님을 안 볼려고 하고 내몰려고 할수록 나의 부처님은 더욱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가 아닌 줄 알고 그놈을 내놓고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의 자성(自性)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있는 나무, 누가 못 보는 것입니까?
누구라도 장님이 아닌 도막에는 문을 열면은 뜰 앞에 있는, 뜰에 있는 나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만 보고, 나무(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평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이 위대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국왕의 은혜, 국가 민족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다 우리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갚을려고 해도 갚기가 어렵지마는 정말 고마운 것은 공기(空氣)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도 언제라도 우리는 제절로 이 공기가 우리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탄광, 장성에서 탄광에 화재가 나가지고 이번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일을 당해 봐야 공기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없을 때에는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는가를 아무도 느끼지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동이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가 끌고 가서 대주면 그저 소는 꿀꺽꿀꺽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듯이 선지식이 '이렇게 하라'하면은 그렇게만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계속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그리고 크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그 말이 아무래도 곧이가 들리지 않아서 이 책도 떠들어 보고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이리도 따져 보고 저리도 따져 보고 갈팡질팡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뭐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20년 세월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남는 것은 지해(知解), 사량심(思量心)만 더해 가지고 생사를 면하기는 썩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지총명(世智總眀)은 득도(得道)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말한 영리하고 지능지수가 높고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은 이 정법,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하기가 썩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선지식들도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서 불보살(佛菩薩)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해도 깨닫자 생각지도 아니하고, 나찰귀신이 와서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 콱! 맥힌 아주 쑥맥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너에게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고 인가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내고 슬퍼하고 걸어 다니고 하는 이놈. 분명히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건마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찾아보면 간 곳이 없어.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걸어갈 때에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산을 보아도 「이뭣고?」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다못 그렇게 일념 일념을 단속해 나가.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결국은 「이뭣고?」를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시 눈앞에 나타나게.
이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못 가서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스승 없이 독학할 수도 있고 자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여러 가지 경전을 사다 놓고, 조사어록을 사다 놓고, 참선에 관한 일본 서적 · 한국 서적 · 중국 서적을 사다 놓고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면서 혼자 자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명 만 명 속에도 제대로 공부가 되질 못하는 것이고,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몰라도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음왕불은 부처님 가운데에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그렇게 하면은 곧 잘될 것 같지마는 얼마 해 가다 보면은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마음의 눈 박을 곳을 얻지를 못한 채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뒤틀리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영 이것이 공부가 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못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 해 나감으로 해서 언젠가는 차츰차츰 번뇌와 망상은 이 알 수 없는 의심 앞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줄어지면서 화두 들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번뇌심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심한 분은 '아휴, 내가 참선은 내가 인연이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먹고, 여자고, 말세중생이라 참선은 안되나 보다' 이래 해 가지고 다시 염불을 한다든지.
'내가 업장(業障)이 많으니까 기도를 해 갖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선방에서 몇 철씩 하다가도 기도하러 돌아다니고 이런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8분52초~30분15초)
남전(南泉)이 어느 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에서 고양이 때문에 싸우자, 고양이를 번쩍 쳐들고는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말하면 살릴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베리라"
그러자 대중에서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선사가 두 동강 내었다.
나중에 이 일을 들어 조주(趙州)에게 물으니, 조주가 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니,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실참(實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길의 즐거움은 종내 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보고 알아 미세한 데 들어가는 것은 도를 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참구는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많은 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알차게 참구하여 진실로 깨달고자 하면, 종전에 좌선(坐禪)해서 얻은 것과 경전에서 얻은 것과 고인의 어록에서 얻은 것과 종사의 입을 통해 얻은 것 등에서 자미(滋味)있고 소중히 여긴 깨달았던 경계를, 한꺼번에 다른 세계에 쓸어 버리고 자세하게 살펴야 좋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만약 진실한 참학자(參學者)라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한 참구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참구이며 진실한 깨달음인가?
하루 열두 시간과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 일을 생각하되, 심의식(心意識)을 떠나 참구하여 범성(凡聖)의 길을 벗어나고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배우고 그것을 면밀히 길러 언제나 무념(無念)하고 항상 어둡지 않아, 마침내 기댈 곳이 다 사라지고 명연(冥然)한 자리에 이르면 자연히 도에 합할 것이다. 고인이 ‘무심(無心)이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을 본다’라는 말을 모르는가?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간혜(乾慧) : 비록 깨쳐서 지혜가 났더라도, 정(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은 마른 지혜라고 한다. 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알더라도, 나고 죽는 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乾 = 하늘 건, 마를 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평상화(平常話) ; ①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②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소지 ; '소제(掃除, 청소淸掃)'의 사투리.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일찰나(一刹那) ; 극히 짧은 순간.
*탁자(卓子) ; ①물건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 모양으로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②불상(佛像) 앞에 붙박이로 만들어 두고, 공양물(供養物) · 다기(茶器) 따위를 차려 놓는 상.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 실달다(悉達多) · 실달(悉達)이라고도 쓴다.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도막 ; ①짧고 작은 동강. ②'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〇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쑥맥 ; '숙맥(菽麥)'의 비표준어.
*숙맥(菽麥 콩 숙/보리 맥) ; ①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콩과 보리.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소치(所致 것·바 소/이르다·도달하다 치) ; (주로 '~의 소치'의 구성으로 쓰여) 어떠한 까닭으로 일어난[致] 바[所].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345) (게송)인능생소소생능~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〇'이뭣고?' 이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0.345)—1988년 1월 첫째일요법회(88.01.03) (용345)
약 13분.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다. 능(能)을 인연해서 소(所)가 생겨나. 능(能)은 주관을 말한 것이고, 소(所)는 객관을 말한 것이여. 주관으로 인해서 모든 객관이 생겨난 것이여.
소생능(所生能)이다. 또 그 객관으로 인해서 또 능(能)이 주관이 움직이게 된다. 능(能)과 소(所)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어.
능소구망(能所俱忘)에 생불생(生不生)이다. 능(能)과 소(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주관과 객관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것이 없어지게 되면 생불생(生不生)이다. 생(生)하되 생(生)이 아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처음에부터 잘되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무량겁을 두고 우리가 익혀온 것이 주관과 객관 속에 서로 굴림을 받고 얽히고설켜서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온 것인데, 어떻게 처음부터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꾸 한곳을 향해서 끈질기게 도전을 하면, 계속해서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안될수록에 더욱 열심히 하고, 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 내지 말고, 안되아도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서 더욱 신심(信心)을 내고 더욱 인내심과 지혜심으로써, 신심으로부터서 신심으로 계속해서 해 나가면 어느 날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들어지지 않던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턱! 들리게 된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을 물리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끊어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와. 그것이 능소(能所)가 구망(俱忘)이거든.
그러면 생불생(生不生)이여. 눈으로 하늘을 보되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땅을 보되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어. 밥 맛을 몰라. 밥이 된지 진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그렇게 순일무잡하게 공부가 되아 가는 것입니다.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늙은 조개가 저 고래가 살고 있는 그 넓고 넓은 바다의 물을 다 둘러 마셔.
마셔 버리면은 산호지상(珊瑚枝上)에 월삼경(月三更)이다. 저 바다 밑바닥에 있던 그 산호가 빠알간 산호 가지에 휘황찬 삼경(三更) 달이 찬란히 빛날 것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이 늙은 조개가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 넓고 넓은 그 깊은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이뭣고?'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이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는—'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큰 소원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지장보살을 불러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또는 '고왕경을 읽어라' 또는 '금강경을 읽어라' 이러한 방편(方便)을 설해 드리기도 합니다마는,
그러한 혹 하고 많은 방편이 다 뭉친들 다 합한들 어찌 이 한마디의 화두! 공안에다 댈 수야 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목숨 다할 때까지 가능하면 금생에 결정코, 금생 아니라 무량겁을 두고도 이 한마디로써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리라.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문제삼을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목숨 바쳐서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것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골수로 나가고,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듯이 외골수로 오직 이것 하나만을 향해서 전부를 바칠 때에 우리는 그 늙은 조개가 그 대해수(大海水)를 둘러 마시듯이 우리는 결정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60분47초~1시간13분45초)(끝)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요, 축생의 스승은 아닙니까? 옛날 여래가 세상에 계시면서도 축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라 합니까?"
수다라경(修多羅經)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첨파국(瞻婆國)에 계시면서 가라(迦羅) 못가에서 첨파국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이때 못 안에 무명조개[蛤 대합조개] 하나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를 듣고는 기뻐하여 곧 못에서 나와 풀뿌리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에 어떤 한 소를 치는 사람[牧牛人]은 대중들이 둘러서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있음을 보고는 부처님에게 가서 법을 들으려고 하여 지팡이로 땅을 찌른 것이 무명조개 머리에 잘못 닿았습니다. 무명조개는 곧 목숨이 끊어져서 도리천에 나아 도리천왕이 되었으니, 그 복의 과보 때문이었습니다. 궁전의 세로와 너비는 바로 12유순이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기녀들의 오락 소리를 보고 깨달은 뒤에 곧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앞서 축생이었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이 하늘 궁전에 태어났을까?'
곧 하늘 눈[天眼]으로 자세히 살피니, 앞서 못가에 부처님 설법을 들은 이 공덕 때문에 이 과보를 얻었기에 무명조개 천인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에게 가서 닿아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였습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첨바라국(瞻婆羅國)의 가라못[迦羅池] 가에 가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못에 있던 대합조개 한 마리가 부처님께서 못가에서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가 법을 듣고 있었다.
그때 또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소를 놓아 먹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앉아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는 것을 보고 곧 부처님에게로 나아가 설법을 들으려고 지팡이를 땅에 꽂다가 잘못해 조개의 머리를 찔렀다. 조개는 곧 그 자리에서 죽어 도리천에 났다. 그 복의 과보로 그 궁전의 가로 세로가 12유순이 되었다. 그는 여러 천녀들과 향락하다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께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했다.
수다원향은 일체의 견혹(見惑 : 이론적인 번뇌)을 끊으며, 사다함향 · 아나함향에 의해 일체의 욕계(欲界)의 사혹(思惑 : 情意에 의한 습관적 번뇌)을 끊고, 아라한향에서는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의 사혹을 끊는다.
따라서 삼계의 일체의 견혹 · 사혹의 번뇌가 모두 끊어지면, 이 때에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달성된다.
아라한과는 이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도(無學道 아라한)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일곱은 아직도 상위(上位)가 있어서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경지이므로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고 한다.
예류(預流 수다원)에서 불환(不還 아나함)까지는 개울의 흐름이나 외갈래길로 상정(想定)하여, 흐름을 타고 있는 자가 예류(預流 수다원), 한 번 뒤로 돌아갈 상태에 있는 자가 일래(一來 사다함), 다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상태를 불환(不還 아나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122)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 / 유리병 속 오리 화두 /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데, 무엇을 깨닫느냐?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〇수수께끼,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바로 이것이 화두라 하는 것입니다.
〇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이 불법(佛法)이 무엇인줄도 알기 전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데서 와서 뭣 하러 왔으며 또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 다 자기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인생이 스스로 자연적으로 품게 되어 있는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疑心),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방법을 갖다가 만들어, 방법이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참선법에 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〇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께서 우리 말세에 태어난 근기가 약한 업보 중생(業報衆生)들도 공부할 수 있도록 개발해 놓은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 것입니다.
〇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이론, 우리가 아무리 체계 있는 이론을 세웠다 해도 깨달음 앞에서는 일종에 분별심(分別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가르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10년 20년을 세월을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을 애쓸 필요가 없이 그 공안에 대한 답을 다 가르켜서 알겄게만 하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것을 애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 말씀이여.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〇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 (용122)
(1) 약 17분.
(2) 약 9분.
(1)------------------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 · 화두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안(公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가운데에는 처음 나오신 분도 있고 학생들도 있고 그래서 이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공안이라 하는 것은 공립학교라 해서 공(公)자 하고, 안건이라서 안(案)자인데, 공안이라 한 말은 '관가의 법률'이라 이런 말입니다.
관청에서는 모든 것을 그 법규에 따라서 모든 사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면 즉각 그 법규에 비추어 봐가지고 그 법규에 있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도,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이 공안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 공안을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그 공안을 참구(參究)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공안(公案) ·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일종에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상식 · 지식 이걸 총동원해 가지고 그 수수께끼를 이리 풀어보고, 저리 풀어 보고 그래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 보고 해 가지고 '아! 이것이다'하고 알아맞추는 것이 바로 이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끼리 모이면 수수께끼를 하는 수수께끼도 그 자못 아주 쉬운 것으로부터 재미있는 것 그리고 깊은 뜻을 담은 그런 수수께끼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수수께끼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인데.
유리병이 하나가 있는데, 유리병 주둥이는 좁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툭 퍼져가지고 퍼진 그러한 병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오리를 새끼 때 그 병 주둥이를 통해서 병 속에다 담았습니다.
새끼 때는 몸집이 작으니까 그 좁은 주둥이로 오리 새끼를 넣을 수가 있었는데, 넣어 가지고 매일 먹을 것을 먹이를 주었습니다. 물도 주고 먹이를 주어서 그 오리가 차츰차츰 자라 가지고 그 큰 병에서 애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오리를, 오리도 상하지 아니하고 또 그 병도 깨뜨리지 않고서 그 오리를 밖으로 꺼낼 수가 있느냐? 이것도 공안 가운데에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도 이것을 두고두고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터럭 하나도 상하지 않게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걸 꺼낼 수가 있을꼬?' 걸어가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차를 타고 갈 때도 그것을 참구하고, 여러 가지로 참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병을 무슨 열을 높여 가지고 그 유리병이 물렁물렁하게 만들아서 주둥이를 넓혀 가지고 꺼낸다든지, 그러한 생각들은 벌써 이론을 사용한 것이여. 이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이론을 사용한 동안에는 바른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아! 저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무슨 기합술로 탁 뻐개서 얼른 꺼낸 다음에 딱 붙일 수가 없을까?'
그러한 생각들을 가지고는 아무리 해 봤자 오리는 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했다 하면 절대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한 방법으로 참구를 해야 해.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다못 이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야만,
오늘도 그렇게 참구하고, 내일도 그렇게 참구하고, 모레도그렇게참구하고, 앉어서도그렇게참구하고, 속이상할때도—어른한테걱정을들어가지고확! 속이상할때도딱! 그생각을돌려서 '어떻게하면꺼낼수가있을까?'
이렇게일체처일체시, 언제어디에서무엇을 하고있든지간에이렇게참구를 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깜박 무엇을 보는 순간에 이 공안에 대한 참구를 잊어버리고, 또 무엇을 들은 순간에 깜빡 잊어버리지만, 잊어버렸다 하면 퍼뜩 돌이켜서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돌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다가, 차츰차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잊어버린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이 화두를 참구하는 시간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항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이렇게 저절로 참구가 되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가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수수께끼,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바로 이것이 화두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 무엇고? 시삼마(是甚麼)?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자동차에는 운전사가 있어서 자동차를 운전을 하면 앞으로도 갔다 뒤로도 갔다, 왼쪽으로도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빨리도 가고 천천히도 가고 또 정지도 하고 자유자재로 합니다.
그건 겉에서 보기에는 차가 그렇게 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지로 속을 알면 차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차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육체도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입으로 말하고 밥을 먹는 것, 손으로 움직여서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것이 이것이 몸뚱이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운전사가 우리의 몸 안에 있습니다. 그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이 몸뚱이는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오셨지만 여러분의 발이 지멋대로 여기를 오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운전하고 있는 주인공이 '오늘은 용화사에 가자' 거기서 결정을 내려가지고 명령을 하기 때문에 이 몸뚱이는 차도 타고 발로 걷기도 하고 해서 여기를 오시게 된 것입니다.
'아니여,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아내가 자꾸 가자고 해싸서 내가 따라왔다. 그것은 아내가 그러면 나의 주인공이냐?' 그러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내가 백번을 졸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최종 결재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아내가 별소리 해 봤자 자기의 주인이 결재를 아니하면 여기는 오시지를 않고 어디 등산하실 수도 있고, 낚시터에 가실 수도 있고, 친구와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보통 '그게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그런 정도는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마음, 마음, 다 마음이란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들은 풍월로 들은 대로 그저 마음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쓰고 있는 것뿐이지, 실지로 그 마음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없고 그 마음의 참 실상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없기 때문에 귀로 들을 수가 없고, 형단(形段)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건마는 그놈이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손이나 발을 통해서 온갖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있다면 눈에 보여야 하고 손으로 잡을 수가 있어야 할 텐데, 왜 있으면서 볼 수 없고 잡을 수가 없느냐?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모냥 무슨 빛깔을 하고 있으며, 대관절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있느냐? 간 속에가 있느냐? 심장 속에가 있느냐? 머리 두골 속에가 들어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들어있다면 똥을 누면 변소간으로 빠질 것이고, 그런데 창자 속에가 있는지 어디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갖다가 왜 있다면 왜 볼 수가 없느냐?
온갖 것을 그놈은 다 보고 듣고 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볼 수가 없느냐?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그저 의식주(衣食住)가 인생에 전부인줄만 알고, 그저 배만 부르면 그저 아무 근심이 없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이 불법(佛法)이 무엇인줄도 알기 전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데서 와서 뭣 하러 왔으며 또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 다 자기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참선법(參禪法)은 인생이 스스로 자연적으로 품게 되어 있는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疑心),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방법을 갖다가 만들어, 방법이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참선법에 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 공안은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한다고 그랬습니다마는 실지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 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바쳐서 풀어야만할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안고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주, 오욕락(五欲樂) 때문에 그 중요한 문제를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놔둔 채 방황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우리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녹음 끊김)... 아니하고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더 연마하고 더욱 연구를 해서 우리에게,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근기(根機)가 약한 업보 중생(業報衆生)들도 공부가 할 수 있도록 개발해 놓은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 것입니다.
'이뭣고?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났는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가 나를 낳아주신 것이 아니여.
그 참나는 부모로 인해서—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한테 받은 것이 아니여.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긴 때가 없이 존재해 온 것이여.
이 몸뚱이는 늙어서 병들어 죽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참나는 태어난 때가 없기 때문에 또한 죽는 것도 아닌 것이여.
죽고 사는 것이 아니요,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여.
'이뭣고?' '이뭣고?'(30분43초~47분24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판치생모라고 하는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안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하면 조주 스님께 어떤 스님이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서래의,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달마 스님이 무엇하러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근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나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은 있어서는 같은 뜻인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참선법을 가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기 위해서 달마 스님이 오셨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은데, 그러한 대답을 하시지 아니하고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판치에 털이나?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자 이빨 위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의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됩니다. 천칠백이 넘는 것입니다.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수없이 많고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이나 되는데, 그러면 그 많은 공안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 것이냐?
일본에서는 의리선(義理禪)이라 해가지고 이 공안을 하나씩 스승으로부터 받아가지고 그 하나를 며칠 동안에 걸쳐서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해서 온갖 방법,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가지고 그 스승한테 가서 딱 이릅니다. 이르면 '되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하나의 공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 개 이상의 공안을 통과를 하면 '너는 조실이 될 자격이 있다. 너의 제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하고 자격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에서부터서 쭉 내려오는 정통적인 활구참선법에 있어서는 공안을 애당초부터 이론을 사용하지 말도록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을 가지고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이리 해가지고 어떠한 결론을 얻은 것은 설사 그 결론이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 그럴싸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공안에 바른 답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이론, 우리가 아무리 체계 있는 이론을 세웠다 해도 깨달음 앞에서는 일종에 분별심(分別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가르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10년 20년을 세월을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을 애쓸 필요가 없이 그 공안에 대한 답을 다 가르켜서 알겄게만 하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것을 애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 말씀이여.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분별심을 가지고 공안을 천착(穿鑿)을 하지를 말아라. 따지고 분석하지 말아라.
분별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이것을 바로 '죽을 사(死)'자, '글귀 구(句)'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여.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 이론과 일체 말 길과 일체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버릇을 버리고서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또는 '어떻게 하면 병도 깨지 않고 오리도 다치지 않고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다못 그렇게만 다구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살 활(活)'자, '글귀 구(句)'자, 활구참선(活句參禪), 사구참선의 반대 활구참선.
활구참선! 이 활구참선을 해야만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47분25초~55분59초)
*공안(公案) ; 화두(話頭),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가자(假藉 임시·일시/깔다·빌리다 자) ; 임시로 빌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 자기 본분의 소식, 궁극적인 진실을 가리키는 선종의 화두이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미생면목(父母未生面目)이라고도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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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達摩)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119)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경봉 스님과의 일화 / 참선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 / 이 세상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〇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〇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〇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〇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 19분.
방금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조(馬祖) 스님은 중국의 육조(六祖) 스님의 제자, 회양(懷讓) 스님의 제자로서,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라.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하는 달마 스님께서 그렇게 예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후대에 가서 마조라고 하는 대도인(大道人)이 나와 가지고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 정법을 천하에 선양한다’고 하는 뜻으로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조 스님께서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원상,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이 둥그라미 안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겠다” 이렇게 어떤 승려, 도를 배우는 승려 앞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승려는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딱 앉았습니다. 마조 스님은 주장자로 그 승려를 한 대 후려팼습니다.
그 승려는 탁! 마조 스님을 쳐다보면서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은 입을 딱 다물고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이 공안(公案)은 마조원상(馬祖圓相)이라 해서 종문(宗門) 중에 공안 가운데에 최고 가는 공안으로 천년을 두고 선종 문중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공안은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이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경봉 스님께서, 지금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계신 경봉(鏡峰) 큰스님께서 처음에 깨달으셨을 때, 바로 마치 그때 거기에 당도하신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경봉 스님보다는 훨씬 연세가 아래였었지마는 바로 이 마조원상의 공안을 경봉 스님께 물어 가지고, 처음에는 경봉 스님께서 그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켔습니다. 거기에서 조실 스님은 “당장 이 송장을 끌어 묻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거기에서 한참 눈을 웅큼하게 해 가지고 계시다가 다시 경봉 스님께서 “이제 알았다. 다시 물어라” 이렇게 해서 그때 보시니 아까의 경계와 판연히 달라서 경봉 스님을 산골짜구니로 끌고가 가지고 이 공안을 다시 물으니까 여지없이 경봉 스님께서 일르셨다고 한 말씀을 금방 법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 선원에서 공부를 하고 오신 납자스님네도 여러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신도 보살님 여러분들도 우리 용화사에서 지내신 분 또 다른 선방에서 공부를 하시고 오신 보살님네들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동안 석 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시고 오신 분들입니다.
해제가 되면 으레이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회상으로 모여 가지고 그동안에 공부했던 것을 탁마하고, 잘못했던 것을 대중 앞에 참회하고, 그렇게 해서 한철동안 지낸 공부를 총결산 하고, 반성하고 참회해서 다시 새로운 정신을 가다듬어서 공부를 해왔었습니다.
이 가운데에 참여하신 청신사 청신녀 그리고 비구 비구니 여러분들, 과연 지난 삼동(三冬) 안거 동안 정진을 하셔서 투철히 깨치신 바가 있으면 이 마조원상, 원상을 그려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한번 자신 있게 일러 보시기를 바랍니다. 전강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수응(酬應)을 해 드리겠습니다.
“스님께 못 이르겠습니다” “환귀본처(還歸本處)하라. 이르지 못할 것을 뭐하러 나왔느냐”
이 공안은 벌써 이를라고 생각을 움직이면 그르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사자는 교인(獅子咬人)하고 한로는 축괴(韓獹逐塊)’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한테 돌멩이를 던지면 개는 그 돌멩이가 무슨 명태 대가리나, 고기 덤뱅이 인줄 알고 그 돌멩이를 물으러 우르르르 쫓아가는 법이고, 사자는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는 쫓아가지 아니하고 돌멩이를 던진 그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답시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면 빠진 사람을 건지기커녕 자기까지 빠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을 제도할 원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급하고, 잠을 자는 일도 급하고, 세속에 우리가 맡은 모든 일들이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망각하고 오직 자식 생각만을 하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는 우선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고 자식 불을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효자라 하더라도—그 효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부모만을 위하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지라도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발등의 불을 쪼끔 오래 놔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시 뜨겁다가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발의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이고, 권리를 많이 누리고, 명예를 하늘 닿도록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은 나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을 때 한 톨도 한 치도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죽어갈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명예를 얻느라고 얻은 죄업(罪業), 재산을 얻느라고 지은 죄업, 권리를 누리느라고 지은 죄만을 산더미처럼 지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통곡을 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지금 마조원상 법문을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여러분 앞에 물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내가 오늘 이르지를 못했으니 당장 집에 가서 경전을 뒤적거리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뒤적거려서라도 기어이 이것을 찾아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사 공안이 적혀있는 염송(拈頌)이나 무문관(無門關)이나 그 밖의 벽암록(碧巖錄) 같은 어떠한 어록을 뒤적거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보지를 못했다면 찰나 간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이 가장 지혜 있고 바른 수행인인 것입니다.
공안은, 화두는 절대로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더듬어서 알아맞출 수도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었다든지 사량심으로 알아졌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요, 중생의 번뇌 망상으로 얻어진 것이라, 망상에 결국은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기 좋게 생긴 사람을 만들어 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사람이 아니고 흙이나 석고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아무리 이쁘게 조각을 해 놨어도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11분49초~31분)
*마조(馬祖) 스님, 육조(六祖) 스님, 남악회양(南嶽懷讓)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〇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 조실 스님과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刊) p24 - 26. 〇내가 25세 때 덕숭산 금선대에 계신 만공 스님을 처음 찾아가서 예배하니 나에게 묻기를 “심마물이 임마래오(甚麽物恁麽來)”하시었다. 내가 다시 예배하니 또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어?”하시었다. 이번에는 내가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니 만공 스님은 그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 “허! 저렇게 주제 넘는 사람이 견성했다해. 네 습기(習氣)냐, 체면없이 무슨 짓이냐?” 이러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나를 보시기만 하면 비웃으며 “저 사람, 저런 사람이 견성을 했다 하니 말세 불법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번번이 조롱을 하시었다. 나는 차츰 불안해지다가 분심이 났다. 선지식이 저러실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핏기가 하나도 없어 앉으면 잠이 와서 앉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말랐다.
그래서 운동대를 붙잡고 서서 ‘에라! 한바탕 해봐야겠다. 그까짓 놈의 몸은 하다가 죽으면 그뿐이지’하고, 나는 만공 큰스님의 말씀을 믿고 그 회상에서 하안거 중 판치생모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하다가 반 철이 지날 무렵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 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확 드러났다.
그 길로 조실 방에 들어가 보월 스님 앞에 원상을 그려 놓고 묻기를 “마조원상 법문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入也打不入也打) >고 하였으니 조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하니 보월 스님은 곧 원상을 뭉개셨다.
나는 보월 스님께 말하되 “납승을 갈등 구덩이(葛藤窠臼)속에 죽이신 것입니다. 마조방하(馬祖棒下)에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월 스님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고 만공 스님 처소에 와서 다시 묻되, “마조원상 법문을 보월스님께 물었더니 원상을 뭉개었습니다. 이렇게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하였더니 만공 스님은 도로 나에게 묻되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하시었다.
내가 답하되, “큰스님께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하였더니,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초안(初眼)이에게 주시면서 “자네가 묻게”하시니 초안 스님이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해서, 내가 초안이를 보고 여지없이 일렀다.
그러나 학자를 위해서 설파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점검하시되,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가 있겠느냐(誰知更有夜行人)”하셨다.
그런 다음,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과의 서신문답과 기타 중요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시니, 내가 곧 엎드려서 허부적 허부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 만공 스님께서 “옳다. 옳다!(善哉善哉)” 인가하시고 곧 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 주시되,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수응(酬應 응대할 수,응할 응) ; 남의 요구에 응함. *사자는 교인(獅子咬人)하고 한로는 축괴(韓獹逐塊) ;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느니라’ *咬(교)물다. 깨물다. *獹(로)개 이름. 전국시대 한(韓)나라 좋은 개 이름. *逐(축)쫓다. *塊(괴)흙덩이. [참고] ①《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1권 ‘양주 왕경초 상시(襄州王敬初常侍)’에 '師子齩人 韓獹逐塊' ②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獅子咬人 韓獹逐塊'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9,47에서)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우선(優先)하다 ; (...보다, ...에) 딴 것에 앞서 특별하게 대우하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조사어록(祖師語錄) ; 어록(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406) 쥐 법문(法門)—'화두'라고 하는 쥐 / 용궁(龍宮) 스님 /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게송)석화광음주~ / 참선 해서 무량겁 생사윤회의 쇠사슬로부터서 벗어나야.
〇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무명(無明)·업식(業識)·번뇌·망상을 쥐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그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와 망상을 ‘화두(話頭)’라고 하는 쥐를 시켜서 그놈을 다 잡아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〇앞으로 어떠한 불보살(佛菩薩)이 나타나셔서 더 좋은 방법을 설하시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활구참선법만큼 훌륭한 깨달음의 길은 없습니다.
〇참선을 안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 불러야죠.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부르지만, 활구참선을 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죽을 때도 ‘이뭣고?’하면서 숨을 딱 거두도록 이렇게 해야 돼.
〇인생 일생사가 비록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뭉쳐진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활구참선하신다면 정말 소중한 뭄뚱이고 이승에 사람 몸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왜 그러냐?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쇠사슬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송담스님(No.406)—90년 1월 첫째일요법회 (용406)
(1) 약 15분.
(2) 약 13분.
(1)------------------
어떤 사람이 집에 어떻게 쥐가 들끓어서, 그 고양이를 갖다 놔봐도 몇 마리는 축(縮)지지만은 아주 잡을 수가 없고 또 쥐약을 갖다 놓으니까 집에서 키우는 개가 여러 마리 죽고, 도대체 그것 가지고도 안되고 그럴수록에 쥐는 점점 더 무성해져 가지고는 마을에 있는 쥐가 다 모여들고 산에 있는 쥐, 들에 있는 쥐까지 더 모여든다 그말이야.
파리도 파리채나 약으로 자꾸 잡아 싸면 몇 마리는 축지지만은 점점 더 모여든 것입니다. 잡아서 죽여가지고 그런 것을 해결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 가지고 꾀를 냈습니다.
쥐를 잡아다가—쥐덫으로 쥐를 생포해 가지고 꽁댕이를 짤라 버리고는 그 쥐를 독에다 담아 넣고는 굶겼습니다. 굶겨가니까 이놈이 배가 고파서 못 견딘다 그말이야.
그래서 정 못 견뎌하면은 쥐를 잡아가지고는 쥐 고기를 쪼금씩 떼어서 먹였습니다. 그러니까 배고파서 못 견디는 놈이 쥐 고기를 먹더니 차츰차츰 생기가 나.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조금씩 더 주고 더 주고 해 가지고 완전히 쥐에게 쥐 고기를 먹여가지고 아주 뚱실뚱실하니 아주 건강하게 되었다 그말이야.
그래서 나중에는 산 쥐를 넣으니까 벌써 쥐 고기에 맛들인 놈이라 산 쥐를 탁! 잡아서 그놈을 잡아먹었다 그말이야. 매일 한 마리씩 잡아 넣으면 쥐 고기만 먹고도 아주 잘 살게 되었어.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놨습니다. 풀어놓으니까 쥐구멍으로 맘대로 드나들면서 집안에 있는 쥐를 다 잡아먹었다 그말이야. 처음에는 새끼 어린 놈을 모다 다 줏어 먹더니 나중에는 큰 놈도 다 잡아먹어버려.
고양이를 놓으니까 어쩌다 겉으로 나돌아다니는 놈은 잡아먹지만은 쥐구멍 속에 딱 들어가 버리면 못 잡아먹는 데, 쥐를 시켜서 쥐를 잡게 하니까 맘대로 쥐구멍으로 다니면서 쏵 다 잡아먹었다 그말이야.
그전에는 마을 쥐, 들쥐 모다 오더니 그놈들도 신문이 있는지, 그 집에 갔다가는 뼈다구도 못 추린다 해가지고 인자 그 집에는 얼씬도 쥐가 안 와.
행여나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쥐 잡아서 쥐 잡을 생각을 마십시오. 이건 쥐 잡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는 끊임없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보면 망상이 일어나고, 귀로 들어도 망상이 일어나고 또 가만히 앉았어도 망상이 일어나고, 일어나는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면은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은 나쁜 생각으로 인해서 나쁜 죄를 또 짓게 되고,
희로애락, 흥망성쇠, 가지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말로서 나타나고, 얼굴로서 나타나고, 행동으로서 나타나고 해가지고 업(業)을 지어서 그래가지고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그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무명(無明)·업식(業識)·번뇌·망상을 쥐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와 망상을 ‘화두(話頭)’라고 하는 쥐를 시켜서 그놈을 다 잡아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화두는 공안(公案)인데 공안은 불덩어리와 같아서 중생이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질 수가 없어. 거기에 접근해 가지고 뭐라고 따질려고 생각하면 벌써 그 불에 타죽는 것이여. 그래서 사량분별로 화두는 따지면 안 돼. 그건 깨닫기 커녕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야.
그 화두를 올바른 방법으로 잘 거각(擧却)을 하면 끝없이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망상을 그놈으로 다 잡아먹을 수가 있는 것이야. 쥐를 잘 훈련을 시켜가지고 온 쥐를 다 잡아먹은 다음에 그 쥐 한 마리만 딱 없애버리면은 쥐는 아주 멸종이 될 것이다 그말이야.
화두 하나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거각을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잡드리를 해 나가는데, 더이상 의심이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
산을 봐도 화두요, 들을 봐도 화두요, 사람을 봐도 화두요, 귀로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물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나에게 욕을 하는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밥을 먹어도 화두요, 똥을 눠도 화두요,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만을 거각해서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즉각 화두로서 떠억 의단을 거각을 한다.
이 화두 앞에는 도무지 천하 없는 망상도 번뇌도 얼씬거리지를 못해. 얼씬거렸다면 화두를 딱 들어버리면 탁 잡아먹어버려.
처음에는 잘 안돼. ‘이뭣고?’해도, ‘이뭣고?’하는 속에도 저 속에서는 할 생각 다 하거든. ‘이뭣고?’하면서도 집안 생각 다 하고, 미국에 가 있는 아들 생각 다 하는데, 그래도 자꾸 하고 하고 또 하고 하면 언젠가는 할라고 안 해도 의단이 저절로 성성(惺惺)하게 들릴 때가 오고 마는 것이여.
더이상 간절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하고 더이상 성성할 수 없을 만큼 성성해질 때, 어느 찰나에 그놈이 탁! 터지게 된다 그말이야. 통 밑구녁 빠지듯이 턱 터지게 돼. 그게 확철대오(廓徹大悟)거든.
다른 공안도 환하거든. 이렇게 되면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자기의 그 깨달은 바가 바른가 그른가에 대한 점검을 받아야 되고, 그 점검을 받은 다음에는 공안을 타파한 뒤에 어떻게 정진해 가야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그래, 화두를 드는 것은 망상 없애기 위해서 방편으로 그런 것이지, 뭐 깨달음이 있기는 무슨 깨달음이 있어. 절대로 그렇지 않아’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몸으로서 실지로서 우리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신 것인데 어찌 이것이 거짓말일까보냐.
앞으로 어떠한 불보살(佛菩薩)이 나타나셔서 더 좋은 방법을 설하시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활구참선법만큼 훌륭한 깨달음의 길은 없습니다.
망상이 일어날수록에 그 망상을 버릴려고 하고 없앨려고 하고 쫓아낼려고 하지 말고 화두만 딱 거각하면 그만이야. 쥐가 나타나면 그놈 쫓아낼라고 하지 말고 그 독에서 키운 그 쥐만 갖다가 그리 풀어 놔버리면 그만이야. 어디로 도망갈 것이냐 그말이야. 도망갈 곳이 없거든.
고양이가 쫓으면 쥐구멍으로 들어가지만 쥐를 내보내는데야 도망갈 곳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면 이놈도 올라갈 것이고 땅속으로 들어가면 이놈도 들어갈 것이고, 갈 곳이 없거든. 화두만 딱! 거각해 버리면.
부애가 나도 ‘이뭣고?’요, 슬퍼도 ‘이뭣고?’요, 억울해도 ‘이뭣고?’요, 몸이 아파도 ‘이뭣고?’요,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될 때에도 다른 거 생각할 거 없어, 아미타불 생각할 거 없어. ‘이뭣고?’
‘이뭣고?’ 참선을 안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불러야죠.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부르지만, 활구참선을 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죽을 때도 ‘이뭣고?’하면서 숨을 딱 거두도록 이렇게 해야 돼.
내가 아는 어떤 노보살님은 그 ‘이뭣고?’하고 가는데 차가 뒤집어졌어. 버스가 뒤집어졌는데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 그분은 아무데도 다치지도 않았어.
또 내가 아는 어느 비구니 스님은 화두를 들고 떠억 가는데, 저기 청평 큰 호숫가를 지내다가 버스가 호수로 빠져가지고 그 안에 탄 사람이 몰사(沒死)했습니다. 수십 명이 다 죽었는데, 그 화두를 들고 간 그 비구니 스님은 ‘이뭣고?’를 물에 빠져서도 고대로 ‘이뭣고?’를 하고 있는데 환하니 보여서 그 열려진 문으로 기어나왔다 그말이여.
기어나와 가지고 허부적허부적 헤엄을 치면서 이렇게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고 이제 돌 돌아간 어린 아기가 물위에 떠가지고 허우적허우적하고 있어서 그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애기 하나하고 그 비구니 스님 하나만 살았어.
그래서 그 애기를 갖다가 수양아들을 삼아가지고 그 애가 커서 지금 학교 잘 다니고 있고 한데, 그래서 그 비구니 스님을 용궁(龍宮)에 갔다 왔다 해서 용궁 스님이라고 별명이 붙었는데.
참 이상한 것이 화두를 들고 가다가 배가 침몰해도 그분은 죽지를 않아. 차가 뒤집어져도 죽지를 않아. 어떠한 난세(亂世)를 당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들고 정진한 사람은 그 난세를 피하게 되고 꼭 죽게 된 데에서도 살아난다 그말이여.
그것이 왜 그러냐? 항상 이십오 신장(二十五神將)이 옹호를 하고 댕기거든. 보통 착한 마음만 가져도 선신(善神)이 지켜주는데,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하는 사람은 선신 하나 둘이 아니라 25신장이 항상 옹호를 하는 거야. 그러니 교통사고에 살아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여러분은 숙세에 얼마나 선근(善根)을 심었기에 이러한 활구참선을 믿게 되었고 그것을 또 실천하게 되셨냐 그말이야.(35분28초~49분42초)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몽중에 꿈 가운데에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하다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금선대, 저 금선대에 만겁동안 먹을 수 있는 그 많은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는구나.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우리의 이 몸뚱이, 우리의 이 생명은 눈 한번 감었다 뜨지 못하면 내생(來生)이고,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이여. 참, 그 찰나(刹那)라! 언제 1년 후에 죽게 될런지, 한 달 후에 죽게 될런지, 사흘 후에 죽게 될런지, 1분 후에 죽게 될런지, 우리의 수명은 참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니,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어찌 맹렬히 반성을 해서 마음보를 돌이키지 못하는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최상승법을 믿고 해탈도(解脫道)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사부대중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고 또 방부(房付)를 들이고 그렇게 참 고행을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구속(拘束)을 했기에 우리는 해탈(解脫)을 할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구속을 한 점 또는 내가 나 자신을 구속을 한 점. 쇠사슬 보다도 더 견고하고 무서운 것으로 우리 자신들을 그렇게 속박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얽히고, 물질에 얽히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 모다 그런 것에 얽히고, 원한으로 얽히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으로서 얽히고, 자존심과 체면에 얽히고, 마약 술 그런 것에도 얽히고, 무량겁 지어 놓은 습기(習氣)에도 얽히고, 자기가 자기를 얽히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얽어매고, 다른 사람은 또 자기 자신을 얽어매고 또 그 사람이 또 나를 얽어매고 해서,
피차(彼此) 서로 많은 머리카락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뭉쳐 있듯이 인간들이 그러한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쇠사슬로 서로 얽히고 얽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을 오늘날까지 이렇게 오고 있는 것입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움직일려고 그러고, 정지되어 있는 물건은 계속해서 정지되어 있을려고 하는 그러한 성질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관성의 법칙이라 그러는데, 그래서 기차나 전철을 타고 가다가 급정거를 하면 사람이 와르르 넘어질려고 그런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고, 또 가만히 차에 앉아 있는데 급작스럽게 차가 출발을 하면 사람이 버뜩 뒤로 자빠지려고 그러고 이런 것도 역시 관성의 법칙이고, 옷에 먼지가 있는 것을 탁! 이렇게 털면은 먼지가 떨어지는 것도 역시 그런 관성의 법칙을 이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뉴월 뙤약볕도 쬐다가 안 쬐면 서운하다’고 그런 구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데, 여태까지 구속되어 있다가 그렇게 풀어준다 해도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한다 그말이야.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면 그 무서운 쇠사슬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고 그렇게 목이 마르도록 말씀을 하고, 법문을 들어도 아! 그 무엇이 그렇게 그리운지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여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런 법문을 들으신 분은 ‘아! 내가 이제부터서는 그런 쇠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나도 벗어나고 또 다른 사람 내가 얽어매고 있는 쇠사슬도 풀어주리라.’ 그렇게 다 얼굴을 제가 보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댁에 가셔서 정말 탁 풀어 버리실런지 그거 또 아까워서 계속 그러실런지 인자 스스로 가서 잘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유가 좋은 것입니다. 탁! 자기도 풀면 좋고 남 얽어맨 것도 탁 풀어주세요. 풀어주면 그 사람도 나한테 더 잘하고.
어떻게 그놈을 서로 얽어매 놓고 한집에서 살면서 그렇게 서로 불편한 관계로 사실 수가 있겠습니까. 탁 풀어주면은 저도 좋고 남도 좋고 그냥 어제까지의 감옥이 오늘은 극락세계로 변할 것입니다.
화두 한번 터억 화두 든 마음으로 쳐다보면 앞에서 봐도 이쁘고 뒤에서 봐도 이쁠텐데, 화두를 놓쳐 버리고 옛날에 품었던 원한심을 가지고 쳐다보면 볼수록 미웁다 그말이여. 그거 미워해 봤자 무엇이 좋을 것입니까. 터억 화두를 들고 풀어줘 버리면은 당장 그날 저녁 밥상부터 달라질텐데.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여. 이 세월은 돌과 돌을 탁 부딪치면 불이 번쩍하듯이 그렇게 화살같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여. 홍안진백두(紅顔盡白頭)다. 그 젊었을 때 윤기 나고 불그스레한 얼굴이 벌써 머리가 허예져 버린 것이여.
인간(人間)은 백년몽(百年夢)이여. 인간은 백 년 동안 꾸는 꿈이여. 이 몸뚱이는 부유일생사(蜉蝣一生事)다. 하루살이 일생사야. 백 년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긴 것 같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인생 일생사란 것이 하루살이 신세 밖에는 안됩니다.
비록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활구참선하신다면 정말 소중한 뭄뚱이고 이승에 사람 몸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왜 그러냐?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쇠사슬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악업으로 얽혀진 모든 사람들을 다 풀어버리니 일체가 다 좋은 도반(道伴)이요, 형제간이요 자매간이 되어서 온 세계 온 법계가 행복한 한 가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으로 해제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선방에 방부들인 스님네 또 보살님네 그 동안도 열심히 정진들 하셨지만 남은 동안을 더욱 알뜰히 정진을 해주시길 부탁을 하고, 또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신 분들도 방부들이신 분들 못지않게 생활 속에서 열심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고 법상에서 내려자고자 합니다.(49분43초~62분5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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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縮)지다 ; 축(縮)나다. ①일정한 수나 양에서 모자람이 생기다. ②몸이나 얼굴 따위에서 살이 빠지다. *꽁댕이 ; ‘꼬랑이('꼬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얼씬 ; 조금 큰 것이 눈앞에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는 모양.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함[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惑-業-苦 三道]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기신론(起信論)>에 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와 말과 생각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몰사(沒死 빠질 몰,죽을 사) ; 모두 다 죽음. *허부적허부적하다 ; '허우적허우적하다(사람이 팔다리를 자꾸 이리저리 내두르다)'의 사투리. *수양아들(收養아들) ; 자신이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가 기른 아들.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선근(善根) ;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착한 인(因)·행위. 온갖 선(善)을 낳는 근본. 청정한 행위를 할 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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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탐착몽중일립미~’ ; 성철스님 ‘납자십게(衲子十偈)’—'회두(回頭)' 게송 참고.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하는 미래의 삶. *찰나(剎那) : [범] ksana 지극히 짧은 시간. 하루가 육백 사십 팔만 찰나라 하였는데, 지금 시간으로는 1초의 75분의 1에 해당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관성(慣性 버릇·익숙하여짐 관,성질 성) ; [물리]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의 상태를 지속하려고 하는 성질. *(게송)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 ; [청허당집(清虛堂集)] (西山 休靜, 朴敬勛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86쪽 ‘세상을 탄식함’ 게송 참고.(石火光陰走 紅顔盡白頭 山中十年夢 人世是蜉蝣) *불그스레하다 ; (물건이나 그 빛이)곱고 연하게 조금 붉은 데가 있다. *허옇다 ; (사물이나 그 빛이)정도에 지나치게 희다. *부유(蜉蝣) ; [동물] 하루살이목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