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공안)2020. 12. 11. 19:34

§((047))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 /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되는 사람은 없다 /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 / 전강 선사의 직지사에서의 목숨 바친 정진. 상기병 / 묘(妙)하게 닦아 가는 방법은 일어나는 망상을 되돌려서 '이뭣고?' 화두드는 것.

 

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관(觀)해 가야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큰 의심 뭉텡이가 되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경지에서 그 대의단(疑團)이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동시에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참선은 꼭 여러 해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금방 금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그분은 공부가 잘되려면은 멀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에 모든 공부는 점점 닦아서 쌓아 올라가는 공부지마는, 점진적이지마는 이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금방 1초 전까지 콱! 맥혀서, 시커먼 먹통처럼 꽉 맥혀서 깜깜했다 하더라도 1분 후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47)—1977년 하안거 결제법문(77.04.15.음) (용047)

 

(1) 약 18분.

 

(2) 약 9분.

 

(1)------------------

 

전강 조실 스님 법문 들으신 동안 조우신 분도 이제는 눈을 번쩍 뜨시고 여기를 쳐다보십시오.

조실 스님 법문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서 한 말씀 한 구절 놓치지 않고 다 알아들었다 해도 정말 바로 듣기가 어려운 법문이어서 꾸벅꾸벅 처음부터서 끝가지 졸면서 들은 그 법문이 얼마만큼 조실 스님의 법문을 소화를 하셨는가? 댁에 가셔서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정사년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대관절 결제(結制)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안거(安居)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이냐? 이러한 말씀을 처음 들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 같아서 대충 결제와 안거에 대해서 말씀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인도에는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있습니다. 이 여름 석 달 동안은 어떻게 비가 많이 오던지 도저히 산에서 숲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도는 더운 지방이라 비가 아니 올 때에는 전부 다 흩어져서 나무 밑에 숲속에 들어가서 참선을 모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숲속에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군데 모여서 신도들이 지어서 바친 절, 선방(禪房)에 모여서 같이 참선을 했던 것입니다. 그 장마철에 왕래를 끊고 한 선방에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기간을 하안거(夏安居), 여름 안거라 이렇게 말하고, 그 안거가 시작하는 날을 결제(結制)라 그럽니다. 결제 동안에는 일절 자기 마음대로 멀고 가까운 데를 왕래하는 것을 금하고서 참선에 몰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여름 석 달 동안 공부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선원에서도 결제와 또 이 결제 참선에 참예 못한 법보제자 여러분을 위해서 또 백일기도도 아울러서 봉행을 하는 그 백일기도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맨 처음에 출가(出家)하실 때로부터서 견성(見性)하신 내용에 대한 조실 스님의 법문을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조우신 분은 들은 바 없이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 말씀도 빼놓지 않고 다 들으셨다고 이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세속에 계실 때에 친어머니 밑에서는 그렇게 호강을 하고 귀여움을 받고 자라시다가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모를 맞이한 날로부터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지고 정말 견디지 못할 그러한 나날을 보내시다가 결국은 출가하셔서—유기그릇을 만드는 유기 공장에 불무질을 하는 그러한 일자리도 가져 보셨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방황을 하시다가 해인사로 출가를 하셔 가지고 인공 스님을 만나 뵈옵고 김응해 스님 밑에서 사미(沙彌) 과정을 마치시다가 그 응해 스님의 그 법문을 듣고 또 그 친한 친구가 뜻밖에 죽게 되는 바람에 무상을 철저히 느끼시고서 선방으로 나오셔서 직지사 제산 스님 밑에서 참선을, 첫 철 참선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결제일이라 참선을 어떻게 해야 옳게 하고, 어떻게 하면은 잘못되는 것인가?

처음 나오신 보살님들을 위해서도 오늘 이 조실 스님의 법문은 대단히 중요한 법문이었고 또 오래 전부터서 참선을 해 오신 분들을 위해서도 대단히 요긴한 법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산 스님께 화두를 탈 때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해라' 이렇게 화두(話頭)를 일러주셨지마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배우시고 『선요(禪要)』를 배우심으로 해서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참선, 그러한 바른 참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어리신 몸에 그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선은 다맛 알 수 없는 의관(疑觀)이라야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관한다든지 그밖에 어떠한 묘한 것이라도 보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들여다보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념미생전,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하라'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대관절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어떻게 관(觀)하냐 그말이여. 이것은 아무리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하려고 한들 되지도 아니한 것이며, 해 봤자 이것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관(觀)해 가야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큰 의심 뭉텡이가 되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경지에서 그 대의단(疑團)이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동시에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의심하느냐?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아지 못한 것도 많지마는 깊이 따져 들어가자면 실상은 너무나도 아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훌륭한 대학자라 하더라도 깊이깊이 자세히 따져 들어간다 하면은 얼마 안 가서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 하는 사람이 아무것이나 대고 의심을 하면 되겠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선각자(先覺者)로부터 화두를 지정을 받아 가지고, 그 스님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도하에 간절히 골똘히 한 화두만을 의심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조끔 해 보다가 의심이 잘 안 나고 여의(如意)하게 들리지 아니하면 저 화두 좀 들어보고, 이 스님 밑에서 조끔 해 보다가 잘 안되면 저 스님 밑에 가서 다시 또 화두를 타서 해 보고, 3년 5년 10년을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갈팡질팡하다가 아까운 세월만 보내고 공부는 아무 얻은 바가 없는 체 방황만 하다가 마는 그러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 흡족하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 익혀 오기를 번뇌와 망상, 육식(六識)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살림을 해 온 우리입니다. 금생에 정법(正法)을 만나서 참선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갑자기 처음부터서 잘되리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익히고 익히고 해서 그것이 습관이 된 것은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잘되는 것이고, 안 해 보던 것은 처음에 하려고 하면은 잘 안되는 것이 정칙입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해 보니 오히려 더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정신집중이 더 잘 안되더라. 그러니 참선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냐? 오히려 참선하므로써 정신이 오히려 더 복잡하고 산란하고 한 것이니 참선은 정신집중에 해로운 것이 아니냐?'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마는.

우리는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건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면 저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면 이 생각, 해서 하루에도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마는 하루종일 다 마치고 나서 '내가 오늘 무슨 생각들을 했는가?'하고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도 별로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떠오른 것이 없으면 '오늘 하루 무엇을 생각했느냐?'하고 물어보면 '별 생각 안 했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아무 뿌리도 없고 주책없는 생각들을 정(情)껏 하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졸다가 잠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를 무량겁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익힌 것을 금방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한다고 해서 '이뭣고?'가 순일무잡하게 잘 되겠습니까? 안되지마는 그래도 또 들고 들고 또 들고 하는 동안에 차츰차츰 그전에 익숙했던 것은 차츰차츰 설어지고, 설었던 것은 차츰차츰 습관이 되어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글씨를 써도 처음에는 서툴지마는 얼마 동안 노력을 하면 잘 써지게 됩니다. 끝까지 계속해서 하면 점점 잘 써서 명필이 되겠지마는 어느 정도 가다가 붓을 놔 버리고 몇 해씩 놀아버리면 다시 글씨가 서툴어지는 것입니다.

 

참선과 번뇌 망상과의 관계도 그러한 예에다가 비교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한번 시작한 사람은 결단코 쉬어서는 아니된 것이고 중도에서 폐지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아서 대도를 성취할 때까지는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산다 해도 내가 안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석 달 결제를 시작하는 마당에 제방에서 정진 잘하신 좋은 스님네도 오셨고, 보살님네도 여러 해 동안 이 용화선원에서 참선하신 분도 여러분이 계시지마는 처음으로 생전 처음으로 참선을 하려고 오신 노보살님도 계시고 젊은 보살님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이 참선은 꼭 여러 해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금방 금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그분은 공부가 잘되려면은 멀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에 모든 공부는 점점 닦아서 쌓아 올라가는 공부지마는, 점진적이지마는 이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금방 1초 전까지 콱! 맥혀서, 시커먼 먹통처럼 꽉 맥혀서 깜깜했다 하더라도 1분 후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비약적이기 때문에 늦게 왔다고 해서 자기 자신은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고, 도저히 바랄 수 없고, 그저 참선하면 혈압도 내려가고, 머리 아픈 것도 낫고, 정신쇠약도 낫는다고 하니까 그걸 조끔 해 보리라' 이러한 얍삭한 마음으로 참선을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이 다 여래(如來)와,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 자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참선을 하면 다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거사(居士)님이나 처음 나와서 참선을 해 보려고 하는 보살(菩薩)님네들도 자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부처님의 말씀, 역대조사(歷代祖師) 스님네의 말씀을 깊이 믿고서 공부를 계속해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처음~18분15초)

 

 

 

 

(2)------------------

 

그런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직지사(直指寺)에 처음 들어가셔서 제산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가지고 생각해 보니 '절대로 그 화두는 옳은 참선법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아시고서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서 계속 공부를 해 나가시는데,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깔고 방석을 하나 딱 갖다 놓고서 대중스님네야 방선(放禪)을 하거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상관이 없이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규칙을 세워 가지고 법당 뒤에서 정진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목탁을 치면 가셔서 공양을 잡숫고는 바로 법당 뒤로 앉아서 거가 앉어서 정진을 하시는데, 졸음이 와서 꺼뻑 하면은 두 번도 하기 전에 일어나셔서 왔다갔다 거니시다가 정신이 또 깨끗해지면은 다시 또 그 자리에 가서 또 앉아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해 나가시는데, 너무너무 골똘한 마음으로 너무 힘을 써서 이마빡에 '적을 소(小)'자를 쓰면서 계속 파고 들으셨던 것입니다.

 

이 참선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서 떠억 관(觀)해 나가야지, 머리로 화두를 들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해 가는 것은 좋지마는—힘을 쓸 곳이 있지, 머리에다가 화두를 두고 머리에다 힘을 쓴다고 하면은 전신(全身)에 피와 전신에 기운이 머리로 모이게 되어서 머리가 멍해지고 나중에는 골치가 아퍼지고 그래도 끊임없이 밀고 나가면 눈이 피가 벌겋게 상충이 되어 가지고 눈알이 둘러 빠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골치는 벌어지려고 그러고.

이렇게 해서, 그래도 쉬지 않고 밀고 나가셨기 때문에 조실 스님은 코로 입으로 뻘건 피를 막 쏟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골똘히 그리고 간절히 용맹스럽게 하셨으면은 그러한 지경에까지 도달하셨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은 제산 스님으로부터서 '니가 내 시킨 대로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니 멋대로 하다가 벌건 선지피가 코로 입으로 쏟아지는 그런 무서운 병이 발생을 했으니 너는 이 절로부터서 떠나라' 이렇게 해서 거기서 쫓겨나셨던 것입니다.

 

되던 안되던 기왕 할 바에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그러한 정도로 정진을 해야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한 신심(信心) · 분심(憤心) · 의심(疑心)이 없고서는 만날 참선한다고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써 세월을 삼고, 조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고, 방선을 하면은 잡담으로써 세월을 보내고, 입선을 하면은 졸고 번뇌와 망상으로써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한 철 한 철을 그렇게 지낸다고 하면, 10년 내지 30년 일생을 선방에서 선방으로 다닌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보장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을 부딪쳐야 할 곳은 그만한 정도에 간절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져야 하기는 하지마는,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느냐? 어떻게 의심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분명한 길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힘을 안 쓸 디다 씀으로 해서 그러한 무서운 병을 얻으셨다' 이리 말씀하시고 '묘(妙)하게 닦아 가는 길이 있었는디 내가 그것을 모르고서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묘(妙)하게 닦아 가는 것이냐?'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을 위해서, 여기엔 법회에 참여하신 지 아직 몇 번이 되지 아니하신 초발(初發) 신도 여러분을 위해서 불가불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 몸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내 몸 밖에 어떠한 환경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떠한 책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떠한 이론으로 이것을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몸 안에서 어떻게 찾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 우리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고 별별 생각이 다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은 분명 우리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시 무명심(無明心)이요, 번뇌 망상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은 망상(妄想)인 것입니다.

 

그 일어나는 망상은 중생의 전 살림살이지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거기에 가서 공부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망상을 여의고는 공부 길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망상을…. 대관절 그 망상 일어나는 곳을 우리는 깨달으면은 그것이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 자리로부터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망상을 버리고 찾어서는 아니됩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되잡아서 되돌려서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어떠한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조끔도 한탄할 것도 없고 심술을 낼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번뇌 망상이 전혀 일어나지 아니한 목석과 같은 그런 사람은 정신병자가 아니면 넋이 나간 사람입니다. 번뇌 망상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고, 살아 있고 정신이 분명해야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 쌓어 참선을 못합니다' 그 사람은 참선이 아직 무엇인 줄 잘 모르고, 옳게 닦아 가는 방법을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일어날수록 좋습니다. 일어나는 생각으로 바로 '이뭣고?'하면은 일어나는 망상은 나를 찾는 참선으로 들어가는 좋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18분16초~27분3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