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精進) 수행2014. 7. 18. 18:18

 

 

§(377) (게송)삼라만상동귀환~ / 선가귀감(禪家龜鑑)-팔만대장경의 골수(骨髓) / 도인 81행-영아행(嬰兒行) / 참선에 요긴한 점-삼요, 무조건 ‘이뭣고?’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났지마는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 금생에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느니라.


참선이란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 해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허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헌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허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가귀감이라는 이 책은 그러헌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77) - 1989년 2월 첫째일요법회(89.2.5)에서. (용377)

 

(1) 약 21분.

 

(2) 약 22분.


(1)------------------

삼라만상동귀환(森羅萬像同歸幻)한디  조과장공멱몰종(鳥過長空覓沒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불시장신처(虛空不是藏身處)라  간취풍전대우송(看取風前帶雨松)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라만상(森羅萬像)이 동귀환(同歸幻)이다.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환(幻)으로 모두 다 똑같이 환(幻)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도 결국은 한줌의 흙이 되고 나중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은 어디로 갔는지 볼 수가 없고,
집도 오래되면 허물어져 버리고, 나무도 오래되면은 죽어서 없어져 버리고,

저 태양도 오래오래 저렇게 발광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마는 일초 일초 열이 식어가고 있고 모양이 변해가서 언젠가는 저 태양과 달과 모든 별들도 결국은 다 부서져서 없어져 버릴 때가 오는 거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일초 일초 쉼 없이 모양이 변해 가지고 결국은 언젠가는 이것이 없어져 버릴 때가 오는 것이여.

조과장공멱몰종(鳥過長空覓沒蹤)이다. 저 새가 저 긴 하늘을 날아가매 날아간 자취가 없어.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듯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겨났다 없어진 자취도 또한 찾을 길이 없더라.

그러면 모든 것이 생겨났다 없어져 버리면 결국은 허공으로 돌아가 버리고, 자취가 없으니까 허공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그러면 그 허공이라는 것이 과연 이 몸뚱이, 나 자신을 거기다가 감출만 하냐?(虛空不是藏身處)
그 허공이라는 곳에 이 몸뚱이와 우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거기다가 떠억 안신(安身)헐 만한 곳이 못 되더라 그말이여.

그러면 어디다가 우리의 이 몸뚱이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놈을 어디다가 갖다가 붙일 것인가?
간취풍전대우송(看取風前帶雨松)이다. 저 바람 앞에 비에 흔들리는 저 소나무, 그놈을 똑바로 들어라.
바람이 불며 비가 그 소나무에 뿌릴 때, 비 뿌리는 가운데에 바람이 소나무에 지나갈 때, 소나무에 그 솔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솔바람 부는 거기를 똑바로 보고 알아차려라 이거거든.

오늘, 무진년이 마지막 끝나는 섣달 스무 아흐레 그믐날입니다.
그리고 양력으로는 2월 5일 첫째 일요법회 날인데, 어제는 입춘법회가 있었습니다마는, 오늘 또 이 무진년 마지막 끝나는 날이 하필 또 일요법회와 이렇게 맞섰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퍽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그러헌 해였습니다.
세계가 그렇고 나라가 그렇고, 그러헌 커다란 대해에 파도가 치는 속에 우리는 낱낱이 조그마한 조각배를 그 파도 속에 띄우면서 용케도 엎어지지 아니하고 이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드시고 억센 파도 속에 그놈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그 파도에 덮쳐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어 버리는 그러헌 나라도 있고, 그러헌 회사도 있고, 또 그러헌 사람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용케도 그 억센 파도를 잘 견디고 극복해서 다시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부처님의 따스한 자비의 가피(加被)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에, 무한히 부처님께 감사헌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해서 한 해가 저물었으니, 지난 1년 동안에 있었던 모든 몸 아프고 마음 아팠던 그리고 괴롭고 쓰리던 모든 일들, 원망스럽고 미웠던 일들, 다 깨끗이 자취없이 사라져 가는 한 해와 더불어 그런 언짢은 생각, 언짢은 일들도 함께 다 흘려보내 버리는 것이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릇 속에 담겨 있었던 좋지 못한 음식, 변질된 음식, 독한 음식, 먹을 수 없는 음식들, 그런 것은 깨끗이 비워버리고 깨끗이 씻어서 아주 더운물에 끓여서 그래서 그릇을 비워놔야 거기에 다른 음식을 담을 수가 있듯이,
지난 1년 동안에 우리의 주변에 일어났던 일, 또 우리 일신상에 일어났던 일, 우리의 마음속에 스쳐간 모든 일들을 깨끗이 다 버려버리고,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게 허고서 새해 첫날을 맞이해야 또 새해는 싱그럽고 희망찬 한 해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방금 조실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났지마는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 금생에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시고 절절한 그런 법문을 다 같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돌아올 때 새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분 1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초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참 축복 받을 만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최웅식 동자(童子)가 오늘 백일(百日)을 맞이하는 날로, 그 백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고 하는 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골수가 똘똘 뭉쳐서 수록되어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저술하시고, 우리 용화사에서 84년도에 번역을 해서 간행한 이래로 이번까지 16판을 간행을 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은 바로 팔만대장경이 바로 이 한 권 속에 축약(縮約)이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헌 경을 여러분께 법공양(法供養)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자가 새로 태어난, 정말 어느 집에 어느 아들이라도 새로 태어났을 때에는 집안 식구뿐만이 아니라 온 이웃사람 일가친척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들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생(生)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인연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바꾸고 허는 이러헌 일들이,
낱낱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우주의 진리 체(體)인 진여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서 새로운 생을 받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은 바로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生)은 바로 고통이다,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 이외에 뭣이 있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진리를 깨달은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도 진리요, 늙음도 진리요, 앓는 것도 진리요, 이승을 하직하는 죽음도 진리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봄에 잎이 피고 꽃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있듯이, 인생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희로애락이 있고,
이런 것이 전부가 다 진리 체의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갓난애기가 태어나는 것은 온 우주법계로부터서 축복을 받고, 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저 하늘나라의 선신(善神)들도 축복을 하고, 저 축생이나 미물(微物)까지라도 축복을 허는 것입니다.
개나 호랭이 같은 그러한 축생도 갓난애기는 절대로 해롭게 허지 않습니다.
어른은 보고 왕왕 짓고 물려고 허면서도 갓난애기는 보고 그렇게 저런 개들도 사랑을 하고, 사람이나 돼지를 막 잡아먹는 호랭이도 갓난애기는 그렇게 애끼고 사랑허는 뜻을 표하는 것입니다.

갓난애기는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해서 쪼끔도 물들지를 안 해서, 그래서 그 갓난애기의 마음가짐은 바로 도인(道人)의 경지와 거의 흡사하는 것입니다.

도인의 여러 가지 그 도인의 행에, 도행(道行)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좋고 궂은 행위가 다 포함 될 수가 있습니다.
광행(狂行)-미친 행도 있고, 승행(僧行)도 있고, 속행(俗行)도 있고, 남자행, 여자행, 심지어 화엄경에는 창녀-53선지식 속에는 창녀도 있습니다, 마을의 장자(長者)도 있고.

그 창녀(娼女)라 하면은 세속에 빈축을 받는 상대지마는 53선지식속에 창녀가 있다 그말이여.
그 창녀는, 사람이 그 창녀 얼굴만 봐도 마음이 맑아지고, 그 창녀의 손만 한번 잡아도 업장(業障)이 소멸허고, 그 창녀하고 한 번 잠만 자도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허는 그러헌 창녀도 있다 그말이여.

그런 81행 가운데에 어떠헌 행(行)을 최고로 치느냐 허면,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치거든.

갓난애기,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갓난애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다못 배고프면 울 줄만 알고, 뜨거워도 울 줄 알고, 너무 추워도 울고, 또 목이 말라도 울고, 다쳐서 아퍼도 울고.

어린 아기의 언어(言語)는 우는 것이 언어여. 어린 아기 우는 것은 그것이 바로 언어이면서 그것이 바로 설법이요,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말이여. 왜 그러냐?
어린 아이에는 아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없거든. 완전히 깨끗하고 순수무잡해서 거의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는 도인(道人)의 심경(心境)과 같더라.

그래서 그 어린 아이는 우리 집 애기가 아니고, 남의 집 애기라도 애기가 났다고 하면 모두가 다 축복을 하거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천국에도 간다’고 하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까닭이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동자의 백일을 맞이해서 오늘 이 선가귀감을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이 책을 받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은 세세생생에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아니하실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 불법 문중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면은 이 한 권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역대 조사(祖師)가 깨달은 경지에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法門)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선가귀감 속에서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데 대단히 요긴한 점 몇 군데를 설해 드리겠습니다.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첫째는 대신근(大信根)이요, 둘째는 대분지(大憤志)요, 셋째는 대의정(大疑情)이니라.
만약 그 한 가지만 궐(闕)하드라도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마침내 폐기(癈器)를 이룰 것이다.(처음~20분34초)

 

 

 



(2)------------------

참선을 해 나가는 데는 대신근(大信根), 큰 신심이 있어야 돼. 무슨 신심(信心)이냐?
‘나도 바로 부처다.’ 중생이 바로 부처고,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바로 부처다.’ 나라고 하는 놈을 내놓고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다.
부처는 반드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그놈을 갖다가 철견(徹見)함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경전 속에 문자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을 허나 밥을 먹으나, 번뇌·망상이 일어나거나, 진심(瞋心)을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몸뚱이의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 그 신념이 여지없이 꽉 박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분심(大憤心).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현과 모든 도인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가지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중생의 탈을 쓰고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어찌 이래 가지고 잠을 편안히 자며, 편안히 밥을 먹으며, 무슨 한담(閑談)으로써 세월을 보내며,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럭저럭 이 아까운 목숨을 보낼 것인가?
아~! 속에서부터 넘쳐흐르는 그 대분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좋은 줄 알면서도 분심이 없으면 일체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이 몸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셋째, 대의정(大疑情)이 있어야 하느니라. 무슨 의정(疑情)인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이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허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어떤 분은 진즉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어떤 중생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고 있느냐?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기에.. ‘이 무엇이여?’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이, 지어서 ‘이뭣고?’ ‘이뭣고?’하는 게 아니라, 저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심이 나와서 항상 눈을 뜨나 감으나 눈앞에 환히 현전(現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 이것은 셋이 동시에, 3가지의 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야 해.
신심만 있고 분심이 없다든지, 분심만 있고 의심이 없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 의심과 분심과 신심이 이 3가지가 항상 함께 일어나면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안 들립니다.” “자꾸 들면 그냥 이뭣고 뿐이지 정말 간절(懇切)한 의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허면 간절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이러헌 하소연을 하신 분을 간혹 만납니다.
그건 다름이 아닙니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한목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주작(做作)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아야지, 그냥 의식적으로 일부러 들면 그때 잠깐 있다가, 들지 아니하면 그냥 달아나 버리고, 이것은 삼요(三要)를 동시에 갖추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 일용(日用)에 인연을 응(應)하는 곳.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이러헌 일상생활 허는 곳에서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뭣고?’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허지 말고, 잘되고 못되고 헌 것도 따지지 말고, 다못 그렇게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고 그렇게 화두를 들어오고 들어가란 말이여.
그렇게 애써서 들다보면, 이치 길이 딱 끊어져버려. 뜻 길이 딱 끊어져버려. 그래가지고 아무 자미(滋味)가 없어져버려.

그래 가지고 심두(心頭)가 열민(熱悶)해. 마음이 열민해. 다맛 가슴이 답답할 뿐이라 그말이여.
이것을 공부가 잘된다고 할 수도 없고, 못된다고 할 수도 없고, 도대체가 앞뒷이 딱 끊어져버리면서 가슴이 답답하기만하다 그말이여. 바로 그때가, 당인(當人)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내던질 곳이여.

가슴이 답답허면 그 답답한 것을 이기지 못해 가지고 ‘어이구, 이거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이런 것인가? 이러다가 이거 내가 상기증(上氣症)이 생길라고 이런 것인가? 이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이것이 무슨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잘못될라고 이런 것이 아니여. 그런 의심을 하지 말어.

알 수가 없어.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지고, 일체 그 동안에 보고 듣고 배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재미도 없어. 그러는 가운데 가슴만 답답…. 바로 그 경계가 몸과 마음을 갖다 내던져 놔버릴 곳이여.
이것이 바로 성불(成佛)하고 조사(祖師)가 될 수 있는 기본이여, 그것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이 일은 마치 모기가 쇠로 된-쇠로 지어 붓어서 만든 소, 소 등어리를 향해서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불문(不問)하고, 몸뚱이 채, 입부리를 갖다가 소 등어리를 향해서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소 등어리에 앉어 가지고, 입부리를 거기다가 들어간가 안 들어간가 이렇게 박어 보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채 압량해서 아주 그냥 그 소 등어리로 아주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마치 수영선수가 높은 데에서 물을 향해서 다이빙을 허듯이 그렇게 소 등어리... ‘쇠로 맨들었나 말았나, 쇠로 되았으니 안 들어갈 것이다’ 그러헌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야.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몸뚱이 채 뚫고 들어가. 그래 가지고 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탁! 거기다 갖다가 내던지면서 뚫고 들어갈 때 바로 그 몸뚱이 압량해서 소 속으로 풍 들어가는 거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중으로 검술을 배우러 들어갔어. 그 산중에 정말 아주 검술을 통달한 큰 도사가 있단 말을 듣고, 어렵게 어렵게 찾아가서 간신히 그 분을 만났어.
만났는데, “검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니까짓 놈이 무슨 검술을 배워?”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 정말 검술에 통달한 도사란 것을 나는 알고 왔습니다. 절대로 선생님이 아무리 가라고해도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안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장작이나 패라.”

날마다 나무를 비어다가 하루에 아주 수십 짐씩 장작을 팼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 한 달, 두 달… 한 삼 년을 두고 장작을 팼어.
처음에는 헛 찍기도 하고 잘 못했지만, 한 3년을 하니까 아무리 큰 나무도 한번 탁! 치면 쩍쩍 갈라졌습니다. 아무리 질긴 뿌럭지 끌통도 그 어디를 찍으면은 이 장작이 쩍 갈라진다고 허는 것을 다 터득을 했습니다.

소나무가 되았건, 참나무가 되었건, 귀목나무가 되았건, 아주 장작 패는데 아주 도가 텄습니다.
하루는 장작을 패기 위해서 저 도끼를 쳐들고 탁! 찍을라고 할 때에, 그 선생이 살짝 뒤에서 숨어 서있다가 냉큼 그 장작 위에다가 크만한 돌멩이를 갖다가 척 놨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일심(一心)으로 그 도끼를 갖다가 내리쳤는데, 탁! 깨진데 보니까, 장작이 아니라 차돌멩이가 쩍 갈라졌다 그말이여. 깜짝 놀래 가지고,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돌멩이를 하나 놓고 다시 쪼개봤습니다. 도끼날만 뭉그러졌지 돌멩이가 쪼개지질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해봐도 돌멩이가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왜 선생님이 턱! 갖다 놓은 돌멩이는 쩍 갈라졌는데, 자기가 그 돌멩이를 쪼갤라고 하니까 안 쪼개졌겠습니까? 처음에 내리칠 때에는 그것이 돌멩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못, ‘안 뽀개질 것이다. 쪼개질 것이다’, ‘쪼개진가, 안 뽀개진가 한번 해보자’ 그러헌 망상(妄想), 그러헌 사량심(思量心)이 전혀 붙어있질 않았습니다.

다만 내리치는 자신이나 내리치는 도끼나 거기에 놓여지는 돌이나, 그 삼자가 하나가 되았어. 그것을 무심(無心)이라 그래.
무심 속에서 갖다 내려치니까 돌멩이 아니라 쇳덩어리를 놨어도 쩍 갈라졌을 것이다 그말이여.

두 번째 세 번째 시험 삼아서 헐 때에는 벌써 이것이 돌멩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마음속에 먹고 있었고,
‘돌멩인데 또 한번 쪼개진가 한번 해보자’허는 그런 번뇌심(煩惱心)이 발동을 했기 때문에 몇 번을 찍어도 쪼개지질 않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활을 가지고 사냥을 나갔는데, 그 사람도 활 공부를 허는 사람으로서 사냥을 나갔는데, 저 만큼 큰 호랭이란 놈이 떡! 버티고 섰다 그말이여.
그래서 “너 이놈, 저리 비키지 못할까” 몇 번 소리를 쳤지마는 그 누런 얼룩얼룩한 호랭이가 꿈쩍도 안 해.

그래서 활을 댕겨 가지고는, 저놈을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내가 죽느냐 니가 죽느냐, 아주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활을 땡겨 가지고 팍 쐈는데 화살이 쏙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 호랭이가 넘어지질 않고 턱 있다 그말이여.
살살 가까이... 지가 심장에 아주 정통으로 맞아서 화살이 갖다가 쏙 들어갔으니 지가 안 죽고 베길 수가 없을 것이다. 가봤더니, 호랭이가 아니라 바윗돌이였었다.

‘참, 이상하다. 뭔 놈의 바윗돌 속에 화살이 들어갈까?’ 다시 그 자리에 되돌아와 가지고 몇 번 활을 쏴 봤지만은 탁탁 되받아 버리고 화살이 그 바위 속에 백히질 안 했다 그말이여.
이것도 역시 도끼로 차돌을 깬 것과 마찬가지 이치여.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이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정신작용,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이 동하면 그것이 바로 번뇌요, 망상이요, 생사심이요, 아주 그건 그런 것인데,
앞뒤가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끊어지고, 무모색(無摸索)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다맛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 들어갈 때에는 바위가 되었건 쇳덩어리가 되았건 호랭이가 되았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속가(俗家)의 문구에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헌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을 때,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 그거여.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잡두리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이뭣고?’

‘내가 중생이다, 내가 여자다, 남자다’
‘내가 나이가 먹어서 늙어서 인자 해봤자 안될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참선을 안 해보고 염불만 했기 때문에 갑자기 참선을 헌들 언제 될까?’
그러헌 쓸데없는 생각을 허는 것이 아니여.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이뭣고?’ 화두를 탔으면 되고 안 되고 헌 것을 따지지 말어. 다못 무조건 하고 ‘이뭣고?’ 뿐이거든.

요새 일본서 나오는 이 참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번역해 나옵니다.
지식 있는 사람들은 그러헌 '참선이 좋다'고 말은 듣고 또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우리 한국에 큰스님네들이 그 참선에 대한 내논 책은 그렇게 구해 보기가 어렵고,
그러니 일본 책을 많이 사다보고, 그래 가지고 뭣인가 도대체 참선에 대해서 알아야 또 헐 맛이 날 것이다 그래서 일본 책을 많이 보면,
그 공안(公案)에 대해서 무문관(無門關)이라든지 뭐 벽암록(碧巖錄)이라든지 모다 참선에 대한 많은 책들이 일본에서는 번역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선을 갖다가 널리 보급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참선을 허도록 권장허기 위해서 허는 그 뜻은 좋았지만은,
이 참선이라고 허는 것이 그렇게 공안을 풀이를 하고 그래 가지고 그렇게 많이 염송(拈頌)이나 또는 벽암록이나 무문관이나 이러헌 책을 갖다가 많이 읽고, 풀어서 재미있게 얘기처럼 모다 풀어서 해석을 해놨는데,
그걸 읽었다고 해서 절대로 참선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닥치는 대로 다 읽어서 다 해석할 줄 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이란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 해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허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헌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허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가귀감이라는 이 책은 그러헌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처음~42분1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삼라만상동귀환~’ ; [소요당집 外] (한글대장경 169, 동국대학교 역경원) p71 소요 스님 게송 ‘賽義玄法師(의현법사에게 답함)’ 참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다사다난(多事多難) ; 여러 가지로 일이나 어려움이 많음.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절절한 --> 절절(切切)하다 ; 매우 간절하다.
*선가귀감(禪家龜鑑) ; 조선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될-선종(禪宗)을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서산대사(西山大師)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공양(法供養)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베풂. ②불서(佛書)를 사람들에게 베풂.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미물(微物) ; 벌레 따위의 하찮은 동물.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무구(清淨無垢) ;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음.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문수 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 들은 선지식(스승).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영아행(嬰兒行) ;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
*체모(體貌) ; 체면(體面).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궐(闕) ; ①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림. ②여러 자리 가운데 일부 자리가 비거나 차례가 빠짐.

 

 

 



-------------------(2)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열반(涅槃) : [범] nirvana  [파] nibbana  음을 따라 니반나(泥畔那) • 니원(泥洹) • 열반나(涅槃那)라 쓰고, 뜻으로 번역하여 멸(滅) • 적멸(寂滅) • 멸도(滅度) • 원적(圓寂) • 안락(安樂) • 해탈(解脫) 등이라 한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를 말함이니,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자성불(自性佛)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의 고해苦海)로부터 구하여(濟)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가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불교]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한담(閑談) ; 심심풀이로 이야기를 나눔. 또는 그러한 이야기.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주작(做作)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뭣고(시심마) ; 분류 ‘화두(공안) 참고’
*당인(當人) ;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그 사람.
*상기증(上氣症 오를 상,기운 기,증세 증)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증세. 상기증이 생기면-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증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이 사용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입부리 ; 새의 부리나 동물의 입을 말하는 ‘주둥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의단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화두불명수계)2014. 6. 23. 14:49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33분28초부터 시작됩니다>

 

 

§(306) 화두 / ‘이뭣고?’-효과와 공덕 / 법(法)의 양식(糧食), 심농(心農) / 노정기(路程記) / 법의 기쁨 / 참선은 우리의 본업(本業), 그 밖에 모든 것은 부업.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 만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당신네 농사는 당신 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뭣고?’는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의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06) - 19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어(86.08.03)에서.(용306)

 

(1) 약 14분.

(2) 약 15분.

 

(1)-------------------

 

지금부터서 그 오계(五戒)를 지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기 위해서 닦아 가는 화두(話頭) 법문을 설하겠습니다. 불명(佛名)을 이제 타신 분이나, 또 화두를 타신 분이나, 오계를 받고자 하신 분도 다 같이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을 하는 그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 퍼르르 성을 내는데 그 성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하는데 그 기뻐할 줄 아는 놈. 다치면은 아픈데 그 아플 줄 아는 놈. 배가 고프면 배고픈 밥먹을 줄 아는 놈.

한 생각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독사와 같은 마음이 나는데-나찰귀(羅刹鬼)와 같고 독사와 같이 되는데, 또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며 또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찰나(刹那) 간에 독사도 되기도 하고, 찰나 간에 천사도 되기도 하는, 그러한 그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한 놈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있어.

그놈을 성이 날 때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중생들은 뭐 하나가 기분이 나쁘면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생각에 생각을 더 펴 가지고 점점 속이 상해 나가고, 또 누가 미우면 조금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과거에 몇해 전에 있었던 일까지 이 생각 저 생각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점점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러는 법이고,
도(道)를 닦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은 언짢은 일을 당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냉큼 ‘이뭣고?’ 이래 버리거든.

누가 미운 짓을 해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해 버리면, 구태여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속상하는 소리를 해 가지고 그 사람과 다툴 필요가 없는 것이여.

그래서 도를 안 닦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해서 점점 죄를 짓게 되고 웬수를 맨들고 시끄럽게 맨들고 남과 웬수를 맺게 되는 거고, 집안을 결국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맨드는 거고,

이 도를 닦는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환경에 휩쓸리지를 아니하고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고 언제나 마음속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또 귀빈을 맞이해서 사는 그런 마음, 항상 천상(天上)이나 극락(極樂)에서 사는 그런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를 젓고 갈 때, 노젓는 사람이 노젓기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거와 마찬가지여.

도 닦는 사람은 자기의 한 생각을 잘 조정 함으로써 자꾸 자꾸 승화되어 가고 도가 깊어지는 것이고,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눈을 보면 봄으로 해서 죄를 짓고, 뭣을 들으면 들음으로 해서 점점 번뇌(煩惱)의 불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한마디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만대장경-해인사에 그 팔만대장경 판이 있는데 그놈을 목판에다 찍어보면 수천 권이 되는데 그놈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어도 다 해석도 못하죠.
그러나 ‘이뭣고~?’ 한마디를 하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거와 똑같애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공덕이 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 만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아미타불을 육백 만번 할라면 백일 동안을 계속 불러야 하는데 ‘이뭣고?’ 한번 하는데 1초도 안 걸립니다.   그만큼 ‘이뭣고?’는 공덕이 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 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여.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잘 연구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농사짓는 법도 있지만,
이미 농사 잘 짓는 법 아는 사람과 같이 그 사람과 같이 농사를 짓고, 이미 다른 사람이 농사를 지어논 놈을 갖다가 밥을 해서 딱 놔주면 입에다 떠 넣어준 것입니다.

‘이뭣고?’하라고 가르쳐 준 것은 밥을 여러분 입에다 떠 넣어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기만 하면 되는데, 입에다 이렇게 떠 넣어 주어도 뱉어 버리고 씹지도 않고 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 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는 거와 같애.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법(法)의 양식(糧食)’입니다. 법의 양이여, 도(道)의 양식이거든.

그래서 이 법의 양식을 부지런히 먹고 잘 씹어서 삼키면 여러분은 도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심(心)’자, ‘농사 농(農)’자, 심농(心農)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수행하실 때에 들녘을 지나는데,
어느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이 부처님이 탁발(托鉢)을 하시니까, ‘밥을 못주겠다.’ ‘왜 못주느냐.’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먹지만, 당신네들은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밤낮 서늘한 그늘속에 앉아서 있다가 때만 되면 거저 밥을 얻어 먹으러 오니 우리는 공밥 먹는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가 없다. 이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것을 어찌 당신들한테 줄 수가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이 ‘당신만 농사를 짓는게 아니라 나도 농사를 지었소. 당신보다도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소.’ (바라문) ‘어찌 도를 닦는 사문(沙門)이 거짓말을 허요.’

‘아하, 거짓말이 아니요.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 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 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사는 ‘마음의 농사’야.

농사는 짓는 때가 있고 그 때를 타서 열심히 해야지, 씨만 심어놓고 가꾸지를 안하면 그 농사는 폐농(廢農)을 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때 맞춰서 땅을 갈고, 모자리를 해서 그놈을 때 맞춰서 심고, 그래 가지고 농약을 주고 비료를 주고 그래 가지고 그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걸 등한히 해 보십시오.
벌레가 다 먹어버리고 물을 맞춰서 주지 않으면 말라죽거나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잠기면은 병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수확을 거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가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농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농사짓는 모자리의 씨를 심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어서 때 맞춰서 잘 가꾸어 나가야지, 일시라도 등한히 해 버리면 벌레가 와서 침식을 하게 되고 말라죽거나 떠 죽거나 그렇게 해서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32분48초~46분11초)




(2)-------------------

우리의 도(道)도 잠시도 등한히 하면 그렇게 안이비설신의-육근(六根)을 통해서 팔만사천마군(八萬四千魔軍)이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군이가 왜 우리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치냐’하면 도인(道人)이 생겨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군이의 궁전이 흔들리게 되고 마군이가 소탕이 되어서 마군이 살곳이 없기 때문에, 마군이가 자기 설 땅을 지키고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그 마군이를 항상 우리는 잘 대항해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심왕(心王) 국토를 잘 지켜나가야만 우리는 도를 성취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군이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올라고 하는 그 찰나에-이미 들어와 버리면 쫓아내기가 어려워, 들어올라고 할 때 딱! 그놈을 문을 닫아 걸어야 되거든.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날 때, 무엇이 눈을 통해서 들어올 때, 어떠한 사물이 귀를 통해서 들릴 때,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올 때에,
바로 그 즉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 마군이가 우리의 국토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의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달·두 달·석달·1년·이태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으로 성장 또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도를 향해서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닦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세속의 다 직업이 있지만, 이 ‘이뭣고?’ 내가 나를 닦는-나의 영혼을 갖다가 해탈케 하는 이 직업이 정말 우리의 본업(本業)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또 의식주를 위해서 다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까짓 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위하는 직업에다 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이나 개인이나 사회·국가에 있어서 정말 충실하고자 하면 이 ‘이뭣고?’사업을 잘해야 그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정말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루어져 봤자 별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정말 우리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바칠 것은 오직 이것뿐인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 한번 앉아 보세요.
가부좌를 할 때는 몸을 단정히 하되 너무 힘을 주어 가지고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어깨에다 힘을 주거나 목에 힘을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어금니는 지긋이 물고 또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에다 꼬부려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은 평상으로 뜨되 자기 자리에서 약 3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는 것입니다.
'눈을 떨군다'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한 점을 응시(凝視)하거나 주시(注視)하는 것이 아니고, 본다면 그 점이 보이되 의식적으로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상으로 뜨되 뜨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좌우나 전후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두 어깨위에 두 귀가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몸을 단정히 한 다음에,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배꼽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하고, 숨을 내쉴 때는 그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 지도록,
들어마신 호흡이 그까지 가도록 몰아부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숨은 코로 들어가지만 우리의 생각은 배가 볼록하게만 맨들면 되어요. 그냥 배를 요렇게 내밀면 되어.
들어마실땐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배를 홀쪽하게 잡아댕기면 되는 것입니다.

들어마셔 보세요. 배를 볼록하니 내밀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 하나·둘·셋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를 등쪽으로 홀쪽하게 맨드는 것입니다.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하니 들어마셔. 그래서 들어마시는 시간은 약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들어마셨다가 딱 정지하는데 정지하는 시간은 약 3초, 또 정지했다가 내쉬는 시간이 약 3,4초 조금 긴 듯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 들어마실 때 너무 배가 가뜩 이렇게 들어마시면 안 되어요. 8부 정도만 들어마시고.
또 딱 정지하는 것도 약 3초 정도만 해야지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으면 그것도 안되고,
또 내쉴 때에도 약 8부 정도만 내쉬어야지, 뱃속에 하나도 없을 때까지 완전히 뱃가죽이 등어리가 닿을 때까지 다 내쉴려고 하면 그것도 힘이 들고 무리가 가니까 그래도 안 되고,

그래서 들어마신 호흡도 8부 정도 들어마시고, 내쉬는 호흡도 약 8부 정도 들어마셔서 호흡을 하는데 조금도 무리가 안 가도록,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가 3초 정지했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할 때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하니 숨을 또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 주욱 하셔 나가면 나중에는 한달, 두달, 석달 이렇게 하다보면 ‘이뭣고?’를 숨 내쉴 때마다 안해도 괜찮게 되어요.
숨은 서너번 할 때에 ‘이뭣고?’ 한번 해 놓고서, 숨은 서너번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해도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참으로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번 하고 점심 때까지 ‘이뭣고?’는 들지 안해도 항상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 그만 그것이 화두를 이미 들어...(녹음 불량)
‘이뭣고?’ 딱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챙겨 가지고 또 금방 또 망상에 들면 그때 또 ‘이뭣고?’

망상이 들어오지 않고 ‘이뭣고?’한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딱 있으면, 뭐 구태여 ‘이뭣고?’ ‘이뭣고?’ 자꾸 되풀이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관세음보살은 하루에 십만 독(讀), 이십만 독해서 횟수를 채우기 위해서 염주(念珠)를 부지런히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데 ‘이뭣고?’는 그게 아니어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부른 것이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공덕에 해당된다고 그러니까, 이놈을 하루에 오만 독을 하면은 육백만에다 오만을 곱하면 얼마냐? 진짜 이렇게만 하면은 며칠 안가서 툭 터질거다.

절대로 ‘이뭣고?’는 횟수가 문제가 아니고 그 간절(懇切)한 간절한 그 의심, 의심(疑心)이 나중에는 의단(疑團)이 되어.

한번 화두를 들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 뭉탱이'가 고대로 있어 가지고 무엇을 봐도 그 의단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무엇을 들어도 흔들림이 없이,
알 수 없는 의단이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차를 타거나, 누가 옆에서 나한테 욕을 하거나 억울한 소리를 해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화두만이 떠억 드러나게 된다면 그게 공부가 자리가 잡혀가는 거여. 익숙해지는 거여.

그렇게 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을 자면 꿈에서도 그 의단이 없어지지 않고, 새벽에 눈을 떠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는 건데,
공부가 익숙하게 되어서 그렇게 되어야 머지 않아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열심히 해야 그런 타성일편 지경이 오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아니하고 허다 말다가 그저 그래 놓고서,
‘아이고, 참선해봤자 되지도 않고 우리는 근기(根機)가 얕아서 염불이나 해야지, 참선은 좋은 줄은 알지마는 죄 많은 중생이라 못한다’고, 이런 자포자기를 하신 분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해서 발심(發心)하고 분심(憤心)을 가지고 의심(疑心)을 내서, 대신심과 대분심,
‘어째서 과거에 불보살과 선지식은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해탈도를 증득했는데 나는 왜 같은 사람으로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했는가.’
속에서 분한 생각이 나고 그래 가지고 도를 아니 닦을라야 아니 닦을 수 없는 그런 분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의단, 대의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하는 그 간절한 의심.
이 3가지 요소가 동시에 일어날 때에 우리는 화두를 들랴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계를 지킬랴고 안해도 저절로 계가 지켜지는 것이고, 참선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는 그 가운데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오계를 받고 또 화두를 타고 또 불명(佛名)을 받게 되겠습니다. 앞으로 스님네가 부르는대로 차례차례 나오셔서 이 불명을 받아 타셔서, 자기의 불명이 무엇인가를 잘 아셔야 합니다.
속에 이와 똑같이 생긴 계문(戒文)이 들어있고 거기에 여러분의 불명이 씌여 있습니다. 한문으로 씌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봉투에는 한글로 씌여 있으니까 자기의 불명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아시고,
가정에서도 내외 간에 서로 불명을 부르시면 더욱 좋고, 형제자매 간에도 불명을 부르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엄마’하지 말고 ‘아무개 보살’ 이렇게 해서 불명을 서로 부르면 불명을 부른 사람도 공덕이 되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피차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불명 한번 부를 때마다 ‘이뭣고?’를 하는 데에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되는 것이니만큼,
불명을 잘 스스로 잊지말고 남의 불명도 잘 알아서 서로 서로 불러주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또 부처님의 아들로서 도반으로서 좋은 인연이 깊어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32분48초~60분3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오계(五戒) ;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②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
③불사음(不邪婬).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불음주(不飮酒). 취기(醉氣)가 있는 것에 취(醉)하지 말라.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불명(佛名) ; 불법에 귀의한 남녀 신자에게 붙이는 이름.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수라장(修羅場) ; 아수라장(阿修羅場). ①아수라왕(阿修羅王)이 제석천(帝釋天)과 싸운 마당. ②싸움이나 기타의 이유로 혼란에 빠져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된 곳. 또는 그러한 상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바라문(婆羅門) ; ‘브라만(Brahman)(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사제 계급)’의 음역어.
*탁발(托鉢 밀 탁, 바리때 발) ; 스님이 경문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음.
*사문(沙門) ; 슈라마나(산스크리트어: śramaṇa, 팔리어: samaṇa)의 음역. 식(息)·근식(勤息)·정지(淨志) 등으로 번역. 여러 선법(善法)을 근수(勤修)하고, 악법(惡法)을 행하지 않으며, 심신을 조어(調御)하여 청정(淸淨)한 깨달음의 길을 지향(志向)하고 노력함을 뜻함.
①인도에서 바라문교의 「베다」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제종교 수행자의 총칭.
②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2)

*육근(六根) ; 육경(六境-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고 판단하기 위한 능력이 있는 기관. 눈, 귀, 코, 혀, 몸, 뜻(眼,耳,鼻,舌,身,意)을 이른다.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 ; 많은 수의 악마의 군세(軍勢)를 뜻함.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심왕(心王) : 의식 작용의 본체。객관(客觀) 대상에 대하여 그 일반상(一般相)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여기에 육식(六識), 팔식(八識), 구식(九識)의 구별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로 좌선(坐禪) 수행을 말한다.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부업(副業) ; 본업 이외에 여가를 이용하여 갖는 직업.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계문(戒文) ; 불자(佛子)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조목별로 적은 글.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6. 18. 12:49

§(246) 공안(화두)-다못 알 수 없는 의심 / 신심·분심·용맹심 / 향림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 조주스님은 30년 부잡용심(不雜用心)의 끈기와 정성 / 세수하다 코 만지기.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 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헌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허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헌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거여.


**송담스님(No.246)-84년(갑자년) 추계산철결제 법문(84.08.27)에서. (용246)


약 21분.

 


고인(古人)은 이 공부를 허기 위해서, 한 공안(公案)을-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화두(話頭)라고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公案) 하나를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심 정력을 쏟아서 밤낮도 가리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도 가리지 아니하고, 어묵동정(語默動靜)도 가리지 아니하고, 일체처 일체시(一切處 一切時)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 한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했습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떤 것이 달마 조사가 인도에서 오신 뜻입니까?’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데 대해서 조주 스님이 대답허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달마스님이 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느냐?’하고 묻는 데에 대해서,
‘참선법을 설하기 위해서 오셨다’ ‘내가 내 마음을 깨달라서 견성성불을 허는 법을 가르키기 위해서 왔다’
우리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대답험즉 한데,

또 ‘달마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 가섭존자로부터 아난존자, 아난존자로부터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달마 스님까지 28대를 법을 전해 왔는데, 그 28대 조사인 달마 대사가 그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내려오는 그 최상승법, 정법을 중국에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대답험즉 한데,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아! 이렇게 대답을 해.

‘대관절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을꼬~?’
이것이 바로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이고, 화두(話頭)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는, 그 동안에 자기가 배우고 알고 한 모든 지식이 여기에 동원되야서는 아니 되고, 모든 이론이 여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어.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아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걸어가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억울한 소리를 듣고 울화통이 치밀어서 속이 상할 때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 계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이 ‘이뭣고?’,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다못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무조건하고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다가 그걸로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 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그래서 옛날에 이 공부는 ‘무얼 많이 알고 배우고 허면은 오히려 이 공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을 알고, 학교를 많이 다니고 해서 지식이 풍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들여서 그것을 동원하지만 아니하면, 뭐 하등(何等)의 해로울 것도 없지만,

중생의 습기(習氣)라 하는 것이 그렇기가 어려워서 뭘 많이 알면 아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놈을 갖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으로 이리저리 분석도 허고, 적용도 해보고, 종합도 해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보고도 싶고 이럴 수가 있어서 허는 말이지, 꼭 많이 알면 못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는 큰 신심(信心).
‘내가 본래 부처다. 나도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찌 내라고 해서 이 공부를 못헐 것이 있는가? 나도 열심히 허면 결정코 성불을 헐 수 있다’고 허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을 끼고 바다를 건너뛸려고 허는 것은 헐 수가 없는 일이여,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하는 바로 거기에 나의 본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
‘올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만 허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분심(憤心)을 가져야 하는데,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결판을 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고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 속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허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가져야 해. 분심을 가져야 용맹심이 나고, 용맹심을 내야 퇴타(退墮)를 안하게 되는 것이여.

분심이 없고 용맹심이 없으면 공부에 아무 매카리가 없어 가지고,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공부를 허는 것인지 안 허는 것인지,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여간해서 이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달(了達)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손수 머리를 깎어 버리고 6년, 어떤 경전에는 12년이라고 되어있는 데도 있습니다마는, 그 무서운 고행을 하셨고,
달마(達摩) 대사도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셨고, 장경(長慶) 스님이라 하는 분은 포단(蒲團)을, 방석을 7개를 뚫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좌선을 지극정성으로 했으면, 궁뎅이로 방석이 뚫어져서 못 쓰게 되면 또 다른 방석을 가지고 또 정진을 하고,
1년 이태 이렇게 한 방석을 가지고 한결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허다 보니까 멀쩡한 방석이 닳고 닳아서 구녁이 뚫어져. 이렇게 하기를 7개 포단을 뚫었다 이거여.

향림(香林)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어. 타성일편이라 하는 것은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그 40년에사 타성을 일편(打成一片)했다 그거여.

조주(趙州) 스님은 소년 시절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견성(見性)을 한 그러헌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헐 만큼 그런 큰스님인데, 3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어. 잡되게 마음을 쓰지를 안 했다.

이 공부는 이만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만, 이만한 끈기와 정성과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조금 해보고 ‘아이고, 그놈의 것 못 해먹을 지서리다’, ‘인연이 없나 보다’, ‘내가 근기가 약한가 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하루해가 넘으면 ‘오늘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하루해가 넘어갔구나’ 이래가지고 발을 뻗고 통곡을 헌 스님도 있다고 합니다.
밤에 잘 때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깨면서 정진을 헌 그런 스님도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지고서 지리산을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밤새 다니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 돌이 지금 지리산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앞에 그 돌이 지금도 놓여 있습니다마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니 된다고 허는 것은 충분히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 10번만 불러도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데, 우리 같은 여자가, 더군다나 속가에 있으면서 그 참선은 감히 생각지도 못헐 일이다.
그저 염불(念佛)이나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가야겠다.’
혹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분이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면으로 보자면 그렇고,

쉬운 면으로 보자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그랬어. 세수를 허다 보면 코를 만지지 않을랴고 해도 저절로 코가 만져지는 것이여.
내가 나를 찾는 공부가 쉽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걸어갈 때, 말헐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을랴고 함으로 해서 달아나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이지, 찾을랴고 허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그것이 쉽다고 헐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찾을랴고 허면, 이렇게 시청언동(示聽言動)-눈, 코, 입, 귀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말하고, 바로 거기에 있건마는,
과연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놈이 무엇인가?’하고 찾어 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이렇게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듣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다 가려내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그렇게 판별헐 줄 아는,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잠시도 나와 더불어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건마는, 그렇게 소소영령하고 분명한데 아!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찾어도 볼 수가 없고, 1분 1초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이 노상 같이 있고, 가깝기로 말하면 한 걸음도 여의지 않고 1초도 여의지 않는 것이고,
멀기로 말하면은 삼천대천세계를 찾어도 없으니 이 기기(奇奇)하고 묘묘(妙妙)한 이 도리를 어떻게 말로 가르켜주고 생각으로 알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헌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화두(話頭).

‘이 무엇고~?’
말을 할 때에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배가 고플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해 갈수록 꽉 막혔어. 앞도 없고 뒤도 없어.

‘이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처음에는 입으로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금방 딴 생각이 일어나고,
앉았을 때 ‘이뭣고?’했는데 일어서다가 잊어버리고, 금방 ‘이뭣고?’허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은 그 소리 듣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말이여.

보다가 잊어버리고, 듣다가 잊어버리고, 냄새 맡다가 잊어버리고, 먹다가 잊어버리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린 것 걱정허지 말고, 딴 번뇌·망상 일어나는 것도 걱정허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여. ‘이뭣고~?’

경(經) 공부를 한다든지 다른 무슨 공부를 허면 무엇이 알아진 것도 있고, 하루 하면 하루 한만큼 무엇이 얻어진 바가 있고, 이틀 허면 이틀 헌만큼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진 바가 있는데,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허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헌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거여.
스승 없이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허면 백이면 백, 다 잘못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22분18초~43분1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조주스님, 달마스님, 가섭존자, 아난존자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하등(何等) ; 주로 ‘하등의’의 꼴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아무런’의 뜻을 나타내는 말.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자래 ; '자라'의 사투리.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매카리 ; 매가리. '매가리'는 '맥(脈-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장경(長慶) 스님 ; (856-932)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속성은 손(孫)씨, 법명은 혜릉(慧陵) 법호는 장경, 시호는 초각(超覺)대사.
*향림(香林) 스님 ; (870-949) 청원(靑原)하 제6세인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속성은 상관(上官), 법명은 징원(澄遠), 법호는 향림.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지서리 ; '짓거리(‘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 있는, 신라 성덕왕때 삼법 스님이 중국 선종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두개골)을 모셔와 안치한 석감(石龕) 위에 세운 탑을 말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Posted by 닥공닥정
인과 인연 비유2014. 4. 2. 02:46

§ 3능, 3불능 / 정업(定業)은 난면(難免) /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쓴 것 / 찰나(刹那) 간에 몰록 / 신•분•의(信•憤•疑) 삼요.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써가지고 그 각본에 의해서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과 금생에 지어가는 업, 그런 것들이 합해 가지고 우리의 미래가 열려 나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이미 과거에 지어버린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나, 그 각본을 우리는 고쳐서 쓸 필요가 있다.
불교는, 인과법은 숙명론(宿命論)도 아니고 운명론(運命論)도 아니다.


명상(名相), 이름이나 모양이라는 것은 환(幻)으로 이루어진 거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을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는 거여.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해서 자기의 주인공(主人公)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은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는 사람은 착하나 악하나 그놈이 그놈이여. 언제 어떻게 변할른지 모르는 거여.


우선 당장 괴로운 일이 있는데 「이뭣고?」만 할 수 있느냐? 괴로운 일 자체가 꿈에 어디 종기를 앓는 거와 같애. 꿈을 꾸는 동안에는 정말 아프지만 꿈을 깨자마자 꿈에 앓던 종기가 몰록 낫어버리는 거여. 차츰차츰 낫아가는게 아니라, 찰나(刹那)간에 몰록 낫아버리는 것이여.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신•분•의(信•憤•疑) 삼요소로 나간다면 누가 못 깨닫게 되느냐 그말이여.


**송담스님(No.521) - 1994년 1월 첫째일요법회(94.01.02)에서.(용521)

 

(1) 약 21분.

 

(2) 약 18분.

 


(1)--------------------

 

새해가 돌아오면 토정비결을 본다든지, 어디 또 만신이나 점쟁이한테 가서 신수도 보고 해서 금년 운수가 어떤가? 뭔 일이 좀 잘될란가?

참 답답해서 가시는 분도 있고, 누가 족집게 점쟁이다 잘맞춘다 하니까 호기심으로 따라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냥 좋다고 하면은 좋아가지고 복채도 많이 주고 돌아오지만,
‘대주(大住)가 금년에 대단히 안 좋다고.. 굿을 몇 번을 해야 하고, 무슨 몇십만 원 짜리 부적(符籍)을 사서 몸에 지녀야 하고..’ 이거 참 겁나는 소리를 하면 그 말을 듣고는 속이 편틀 못하다 그말이여.

아무리 여기서는 이런 말을 들어도 집에 가서 어쩌고저쩌고 하면 금방 생각을 내신다 그말이여. 이건 지식이 있건 없건 여자분은 여간해서 그런 데에 속지 않기가 어렵다 그말이여.
‘남편한테 해롭고 자식한테 해롭다’하는 데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해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 나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그것이 별로 그렇게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그거 왜 그러냐?

점쟁이는 혹 지내간 일은 더러 맞추는데,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못 맞춰. 점쟁이 한테는 삿된 귀신이 잠시 붙어가지고 그 삿된 귀신이 돌아다니면서 봐서 일러주면은 지내간 일은 잘 맞추는데, 귀신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잡귀는 모르거든.

부처님처럼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나서 육신통(六神通)으로 보신다면은 과거•현재•미래를 손바닥 안에 보듯 환히 아시지만, 점쟁이는 육신통이 난 게 아니여. 잡신(雜神)이 잠시 붙어가지고 그 잡신의 힘으로 지내간 일 뭘 좀 아는 소리를 하는데, 그것 가지고 미래 일까지는 다 모르거든.
혹 맞추기도 하고 안 맞추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말을 믿고 우리가 중대한 일을 추진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건 정신병자가 운전하는 차를 탄 거와 같아서 그놈이 언제 어디다 꿀어박을지 모르거든.

우리는 아무리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해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만나고, 슬픈 일도 만나고, 괴로운 일도 만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한테도 3불능(三不能)이 있어. 3능(三能)과 3불능이 부처님한테 있다고 그러는데, 부처님께서 세 가지 능한 것은 무엇이냐?
(첫째는) 일체 상이 다 공(空)해서 그래 가지고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이 부처님이 능하는 일이여.
두 번째는 모든 중생의 성품을 환히 다 알고, 억겁의 모든 일을 다 맥힘이 없이 다 아시는 거여.
셋째는 무량 중생을 제도하실 수가 있어. 이것이 부처님이 세가지 능하신 것인데,

그러한 삼명육통과 팔해탈(八解脫)을 증득하신 그러한 부처님도 세 가지 능(能)치 못한 것이 있는데,
당신이 무량겁으로부터서 오시면서 지으신 정업(定業)은 멸(滅)할 수가 없어. 그래 모든 것을 환히 다 아시고 육신통이 자재(自在)하시고 팔해탈이 자재하신데 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다 하실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정업을 멸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인연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가 없어.
셋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혀. 이 세상의 한 중생도 없이 다 무량 중생을 제도하실 수는 있으나, 중생계가 완전히 다 없어지도록 하실 수는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법력(法力)과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으로서도 부처님의 고국인 가비라(迦毗羅) 왕국이 멸망할 때 그걸 번연히 알고 계셨고 보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으신 것이여.
과거의 삼천불, 현겁 삼천불, 미래 삼천불 삼천(三千)의 부처님이 계셔도 중생계는 다하지 못하는 거여.

부처님의 자비는 인연이 있고 없고 간에 다 똑같이 베풀어지지만, 인연(因緣) 있는 중생이라야 제도가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우리는 인연을 부처님과 맺음으로 해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되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믿게 되고, 믿고서 실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 부처님께도 그런 삼불능(三不能)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는 부처님께서 능(能)치 못한 3가지도 우리는 또 마찬가지고, 우리는 그보다도 수수 백만 가지가 능치 못한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우리가 과거에 지은 그런 정업(定業)을 우리가 점쟁이 말 듣고 그것이 면(免)해질 수가 없어.

방법은, 이미 우리가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이고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받아 넘기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여.

공자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중국을 이렇게 유행을 하시는데, 관리한테 붙잡혀 가지고 큰 난을 당했어. 그것은 양호라고 하는 악인이 있었는데, 공자님이 그 양호란 놈하고 얼굴이 비슷하게 생겨 가지고 양호인줄 알고 체포를 당해 가지고 참 억울한 어려운 일을 당하다가 간신히 풀려났는데,

그 제자가 묻기를 ‘성현(聖賢)도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 제자들은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을 숭배하듯이 공자님을 그렇게 숭배하는데, 「어찌 공자님과 같은 성현이 이런 참 어려운 일을 당할 수가 있겠느냐?」 의심이 나서 여쭈어 본 건데,

성현이라고 해서 어려운 일을 안 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의 그 마음은 다를지언정 - 중생이나 범부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은 당황하고 겁을 내고, 마음이 동요가 되어서 겁에 질려서 자기의 마음을 지닐 수가 없어. 그런데 성현은 당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당한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범부 같으면 당신의 고국이 그렇게 망할 때 신통력으로 그 적군을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때려 부수고 죽이고 물리치고 혹 그런 마음을 냈을런지도 모르는데, 부처님은 환히 알고 그 광경을 다 보시면서도 그런 적극적인 행동을 하시지 않았어.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그 고국의 사람들이 아주 멸종이 되게 생겼으니까 5천 명을 골라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아 가지고 저 높은 하늘나라에다 갖다가 잠시 피신을 시켰어.
부처님께서는 『그래 봤자 뭔 소용이 되겠느냐? 한 번 해 봐라.』 그래서 목련존자가 그렇게 했는데 다 난리가 가라앉은 다음에 가서 바리때 가지러 가니까 속에서 다 죽어갖고 있어. 과거에 죽을 업을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걸 받게 될 때에는 피할 길이 없어.

목련존자도 5백 생을 결국은 타살(打殺)을 당했는데 과거에 업연(業緣)으로 그랬는데, 마지막 5백 생도 결국은 당신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외도(外道)들이 자꾸 불법(佛法)이 흥왕을 하니까,
‘부처님의 왼팔, 오른팔을 끊어야만 되겠다’ 그래 가지고 목련존자가 숲속에서 턱 이렇게 좌선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수백 개의 돌팔매질을 해 가지고 결국은 몸이 부서지게 되었다 그말이여.

목련존자의 같은 고향에서 같이 출가한 도반인 사리불(舍利佛)존자가 『왜 그대는 신통이 제일인데 왜 신통술을 어디다 두고 그렇게 맞었냐?』 그러니까,
『신통의 신(神)자도 생각이 안 나더라』 그렇게 경전에 쓰여 있는 데도 있고,  『내가 불자(佛子)로서 인과법(因果法)을 아는 사람이 피해서 되겠느냐』 또 그렇게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두 가지가 다 맞는 말씀이고.

점쟁이 말 듣고 재앙을 면할려고 해서는 안 돼. 그런데 점쟁이가 가끔은 절에 가서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치성(致誠)을 드리라고 그렇게 보내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와서 절에 와서 천도재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런 분도 있습니다.
부처님께 시주도 하고, 치성도 드리고, 또 조상의 천도재(薦度齋)도 지내고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천도재를 지내 가지고 집안에 우환이 없어진 그런 경우도 나는 많이 봤습니다.

많이 보기는 했으나, 정업(定業)은 난면(難免)인 것입니다.
받되 정법(正法)으로써 마음이 딱 기둥이 서면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바른 마음으로, 바른 정신으로, 신심과 원력으로, 지혜와 인내로써 그런 일을 잘 처리해 나가고 그 일을 소화를 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쓴 것>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써가지고 그 각본에 의해서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나 탤런트는 각본을 쓴 작가가 따로 있고, 그 각본에 의해서 감독이나 연출이 그것을 연출을 해 가지고 배우나 탤런트를 잘 선정을 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연극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배우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
각본에 의해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길 밖에는 없는 것이고, 배우 지 마음대로 이리저리 못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무량겁이라고 해도 좋지만 가깝게 금생 일생 이렇게 사는 것만을 우선 생각을 해 보자 이겁니다.
우리가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어렸을 때를 살고, 어떻게 유치원으로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을 다녀 가지고, 어떻게 누구와 결혼을 했고, 어떻게 이렇게 살아가고 어떤 자식을 낳았냐? 그리고 일생 동안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갔느냐?

생로병사 일생만을 생각해 본다 하면 그것이 무슨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제석천왕(帝釋天王)이나, 또 어떤 뭐 염라대왕이나, 어떠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시켜갖고 되는 일이 아니여.

전부 우리 자신이 그러한 각본을 썼어. 각본을 써 가지고 자기가 그 각본에 의해서 지금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마지막 죽어갈 때까지 각본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여.
하나도 부모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어. 선생을 원망할 것도 없고, 사회를 원망할 것도 없고, 국가를 원망할 것도 없어. 부부 간에도 남편이 아내를 원망할 것도 없고, 아내가 남편을 원망할 것도 없어.

도둑질하다가 감옥을 가도 검사나 판사를 원망할 것이 없는 거여. 지가 그 죄를 지어 가지고 판결을 받아 가지고 징역을 사는데, 감옥에 들어가서 내나 자기를 잡아넣은 형사를 '내가 나가기만 하면은 그놈의 형사 가만 안 놔둔다'고 이를 갈아붙이는 죄수가 있다면, 그거 어떻게 된 것이냐 그말이여.
자기를 무기 징역을 청구를 하고, 무기를 갖다가 판결을 내리는 검사와 판사를 원망하는 죄수가 있다면 그거 어떻게 된 거냐 그말이여.

가끔 전혀 자기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징역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자기를 억울하게 그 징역을 살게 하는 형사나 검사나 판사를 정말 중생으로서는 참 원망 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원망할 것이 없어.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사람을 억울하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금생에 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그말이여.

과거가 없는 금생(今生)은 없어. 전부가 금생에 우리가 지은 업과 과거에 지은 업이 다 연관성 있게 우리의 모든 것이 전개되어 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래서 과거에 지은 업과 금생에 지어가는 업, 그런 것들이 합해 가지고 우리의 미래가 열려 나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이미 과거에 지어버린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나, 그 각본을 우리는 고쳐서 쓸 필요가 있다 그말이여.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은 거기서 전개되어 가는 것을 보고 야단들이여.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은 작가한테 막 편지질을 하고 전화질 하고 방송국에다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 살려야 한다’고 야단들인데, 그렇게 하두 전국에서 들어오면은 처음에 작가의 생각은 죽일라고 했다가도 하도 그래싸면 그거 바꾼다고 그래.

그까짓 TV에 나오는 거 죽이면 어떻고 살리면 어떻고 별 것이 아닌데,
우리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이 있어가지고 금생에 이렇게 불행한 일만 당하게 되었다 하면, 그 각본이 다른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내가 썼기 때문에 금생에 각본을 달리 쓸 수는 있다 그말이여.
달리 써 가지고 어쨌든지 좋은 방향으로 요렇게 틀으면 좀 힘은 들랑가 모르지만, 자기가 쓴 각본을 자기가 방향을 바꿔나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미래는 꼭 과거에 지은 그놈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우리가 해 가는 일까지 합해져 가지고 미래가 열리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운명론이다, 숙명론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 불교는.

인과법은 숙명론(宿命論)도 아니고 운명론(運命論)도 아니여.(42분45초~63분35초)

 

 

 

 

 

(2)--------------------

 

미래는 꼭 과거에 지은 그놈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우리가 해 가는 일까지 합해져 가지고 미래가 열리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운명론이다, 숙명론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 불교는.


인과법은 숙명론(宿命論)도 아니고 운명론(運命論)도 아니여.

과거에 지은 업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지만, 금생에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것까지 합해져 가지고 미래가 열려지기 때문에 우리는 각본을 바꿔쓰면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 어떻게 각본을 쓰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방향은 바꿀 수가 있다 그말이여.

인과의 법칙을 정말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활용을 해 나가야 한다.
인과법을 잘못 믿으면 완전히 숙명론•운명론에 떨어져 가지고 그러고, 그렇지 않으면 까딱하면 인과법을 믿지 않고, 발무인과(撥無因果) 『에잇 그까짓 거 소용이 없다고!』

못된 짓을 하면 응당 잘 못살아야 하고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극악무도하고 못된 짓만 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러고 정직하고 착하고 참 그런데 사사건건이 불운(不運)을 당하고 못살고 억울하게 그렇게 일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 그런 걸 보면 『그것 인과법 소용 없다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

금생에 것만 갖고 우리의 앞이 그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과거에 지은 것까지 합해져서 되기 때문에, 과거에 워낙 좋은 복을 지어놓으면 금생에 못된 짓을 해도 우선 괜찮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요.
금생에 나쁜짓 한 건 또 언젠가는 꼭 받게 되지만, 우선 과거에 지어놓은 것이 워낙 많으면 그것이 금생에 좀 나쁜짓 해도 그럭저럭 잘사는 사람도 있어. 그러나 그것 믿을 것이 못되는 거고.

금생(今生)에 착하고 부지런히 해도 못 당할 일 많이 당하는 것은 전생(前生)에 지은 나쁜 악업이 있기 때문에 금생에 좀 잘해도 별로 좋은 꼴을 못 보는 거여.

그래서 인과의 법칙에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바로 현실적으로 받는 경우가 있고, 금생에 지어 가지고 바로 이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금생에 지어가지고 다음 생, 저 다음 생, 몇 생을 건너 뛰어 가지고 가서 받는 수가 있어.
현생보(現生報)•순생보(順生報)•순후보(順後報) 이것이 세 가지 차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이지 안 받는 것은 아니여, 언젠가는 다 받게 되는데.

그렇게 지어서 받는 것은 면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우리의 마음으로 지어서 이렇게 벌어지는 일들이라,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이라 하는 것은 만법(萬法)의 근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환상이요 물거품 같은 것이다.』 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래서 범부(凡夫)는 모든 것이 환(幻)인데 환인 줄을 모르고서 환(幻)의 업(業)에 집착을 해 가지고 거기에 끄달리는 거고.

성문(聲聞)은 모든 환(幻)을 그것을 굉장히 두려워 해. 생로병사를 굉장히 두려워 해가지고 어떻게 하면 - 죽음이 무서우니까, 죽음을 안 당할라면은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태어나기만 하면 늙어서 병들어서 결국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니까, 죽음이 없을라면은 태어나지 않아야겠다. 그래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방법으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말이여.
멸진정은 영원히 아주 정(定)에 들어가 버린 거여. 그러면 태어나지를 않기 때문에 죽음도 없다. 이게 소승(小乘)의 생각이다.

보살(菩薩)은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환(幻)의 경계여. 본래 없는 것이고 본래 남이 없는 거여.

눈병 든 사람에게 이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 우리는 눈동자를 옆에서 요렇게 눌루고 보면 해도 둘로 보이고, 달도 둘로 보이고, 뭔 물건도 둘로 보입니다. 여러분 댁에 가서 시험을 해보세요.
그냥 보면 하나인데, 눈동자를 요렇게 눌러가지고 압력을 가해 가지고 보면은 삐뚤어지게 보이고 둘로 보인다 말이여.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는 허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 난 사람은 뭣이 이상한 것이 이리 왔다갔다 하고,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불이 켜진 것처럼도 보이고 모다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는 꽃이 안 보이거든.

눈병이 나기 전에도 없었던 거고, 눈병이 난 뒤에도 허공에는 꽃이 없는 거고,
그러다가 눈병이 나은 뒤에도 - 허공의 꽃은 원래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눈병 난 사람은 보이니까 그 눈병 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할거라 그말이여. 눈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허공의 꽃이 원래)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명상(名相), 이름이나 모양이나 그런 것은,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거,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은 명상(名相)이여 그게. 명상(名相)!

명상(名相)이라는 것은 환(幻)으로 이루어진 거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여 그것이.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을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는 거여.

어린애들은 크레용이나 무슨 연필을 가지면 벼람박이고 어디고 마구잽이 막 그려 젖히거든.
철없는 중생이 우리의 마음으로 일체 경계(境界)를 당해서 온갖 것을 정말 미친 사람이 어떠한 연극에 각본을 쓰듯이 종잡을 수 없이 쓰거든.
죽일라고 했다가 살리고, 살릴라고 했다가 죽이고 그저, 도둑놈을 갖다가 착한 사람을 만들고, 착한 사람을 어떤 때는 또 도둑놈으로 만들고 해 가지고는 종잡을 수 없이 계속 끝이 없는 각본을 써 가는데.

우리 중생이 하는 짓이 바로 미친 정신병자가 연극 각본을 쓴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우리의 무량겁을 그런 각본을 써 왔고,
앞으로 정법(正法)을 믿고 바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해서 자기의 주인공(主人公)을 계발하고 그놈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간 사람은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는 사람은 착하나 악하나 그놈이 그놈이여.

언제 어떻게 변할는지 모르는 거여. 그래 가지고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해 갈 거다 그말이여.

조금 착한 짓 한 사람은 좋은 곳에 태어날 거고, 악한 짓 한 사람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이고, 천당에 좋은 곳으로 가봤자 받을 만큼 복을 받으면 또 떨어지는 거고,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받는 기한이 길고 길어서 언제 나올 기약 있을는지 모르나, 나와 봤자 또 마찬가지여. 언제 무슨 짓을 또 하냐.

그래서 무슨 소리를 듣든지 「이뭣고?」, 무슨 것을 눈으로 보든지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를 하시라 그말이여.

우선 당장 괴로운 일이 있는데 「이뭣고?」만 할 수 있느냐?
괴로운 일 자체가 꿈에 등창을 앓거나 어디 종기를 앓는 거와 같애. 꿈이라 하지마는 실지로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정말 아퍼. 무서운 걸 보면 무섭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고, 아플 때는 정말 꿈에도 아퍼요.

아프다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그러다가, 누가 와서 꿈을 깨거나 잠을 깨주면 눈을 뜨고 보면, 깨고 나서도 한참 아퍼. 아퍼도 정신을 차려서 보면 진짜는 안 아픈 거여 그게.
정말 눈 딱 떠서 정신만 차려버리면 그렇게 아프던 종기가 깨끗이 낫어 버리는 거여. 몰록 낫어, 몰록.

세속의 사전에는 ‘몰록’이란 말이 있는가 어쩐가 모르는데, 이 불가(佛家)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이래서 ‘몰록 깨닫고 몰록 닦는다’는 것이,
전기 스위치를 탁 올리면 찰나(刹那) 간에 탁 켜지고 탁 내리면은 찰나 간에 깜깜해지듯이, 그 꿈에 앓던 몸의 종기가 잠을 깨자마자 몰록 낫어버리는 거여. 차츰차츰 낫어가는 게 아니라.

그래서 방편(方便)•점차(漸次)가 없어. 점차(漸次)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거여. 차츰차츰 요렇게 낫아가는게 아니라, 찰나(刹那) 간에 탁! 몰록 낫아버리는 것이여.

이궁어시(理窮於是)다. 모든 이치가 여기에서 다해 버린 거여.
그래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고 차츰차츰 깨달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뭣고?」를 해 가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계속 의심으로 참구(參究)를 해 가면,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그 의심이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우리의 속도 의심으로 가득차고, 온 세계의 무엇을 보나 듣거나 산을 봐도 ‘이뭣고?’뿐이요, 꽃을 봐도 ‘이뭣고?’뿐이요.
‘이뭣고?’를 ‘이뭣고?’들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고 한 게 아니라, 들고 놓고 할 것이 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의심이 온 법계에 가득차게 되서 더이상 커질 수가 없을 때는 어떠한 찰나에 툭 터지게 되는 거여.

그래 가지고 의단(疑團)을 갖다가 통 밑구녁 빠지듯이 의단이 탁! 터지는 거여. 그러면서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거여.

비록 석 달 만에 깨달은 사람, 3년 만에 깨달은 사람, 30년 만에 깨달은 사람, 마지막 죽을 때까지 못 깨달은 사람도 있을 수가 있으나, 다른 모든 것은 하다가 안 되면 그것은 실패고, 소용이 없는데, 이 공부는 끝까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도 깨닫지 못했어도 그것이 헛일이 아니여.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놓은 것은 고대로 그 공덕이 거기에 다 있어서 금방 새로운 몸을 받아가지고 그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젊어서 정법을 만나게 되고, 그 믿어지게 되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 젊어서 툭 3일 만에 깨닫고, 언하(言下)에 깨닫고, 한철 만에 깨닫는 것이 그 까닭이 있는 거여.
전생에 그렇게 하다가 몸을 바꿔났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툭 깨닫게 되는 거여.

그래서 ‘하! 내가 이렇게 아무리 할라고 해도 안 된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도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은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렇다’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결국은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해야 혀.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하고, 허다가 말다가 하고, 그래 갖고는 언제 그것이 될 거냐 그말이여.

할 때는 정말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믿은 데에서 열심히 하면은 거기서 또 분심(憤心)이 나고, 분심 있는 곳에 신심이 더욱 깊어지고 해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여.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는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이것이 삼요소(三要素)인데, 이 삼요소로 나간다면 누가 못 깨닫게 되느냐 그말이여.

새해에 우리의 법보 가족은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어떠한 종류의 일을 당하거나,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만나거나,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신분의(信憤疑) 삼요소로써 단속해 나가기를 우리는 1994년의 첫 번째 법회날을 맞이해서 다 같이 다짐을 합시다.(63분10초~81분17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대주(大主) ; ①무당이, 굿하는 집이나 단골로 다니는 집의 바깥주인을 이르는 말. ②여자가 자기 집의 바깥주인을 이르는 말.

*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잡신(雜神) ; 온갖 잡스러운 귀신.
*삼능(三能) 삼불능(三不能) ;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가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을 세움.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해서 만법을 아는 지혜를 이루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알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막힘이 없이 다 아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무량겁으로부터서 지은 정업(定業)은 멸하지 못함.
②인연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무량중생을 제도하실 수는 있으나 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팔해탈(八解脫)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여덟 가지 선정(禪定).
*정업(定業) ; 과거에 지은 업에 따라 현세에서 받게 되는 과보(果報).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신통력(神通力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힘 력) : 수행을 통(通)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 초인간적인(神) 능력.
*가비라국(迦毗羅國) ; kapila國(카필라).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아버님 정반왕(淨飯王)이 다스리던 나라. 실달다(悉達多) 태자(太子) 곧 석존(釋尊)이 태어난 곳.
*석가족의 멸망 ; BC 6세기에 코살라국(Kosals國) 사위성(舍衛城)의 왕인 파사닉왕(波斯匿王)이 석가족 사람과의 혼인을 청해 왔는데, 석가족은 파사닉왕이 낮은 신분 출신의 왕이어서, 왕의 청을 거만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파사닉왕의 세력이 워낙 강했으므로 왕족 하녀의 딸을 석가족의 처녀라 속여 파사닉왕에게 보냈다.
이 하녀의 딸과  파사닉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리(琉璃)태자가 8세 때 어머니의 나라인 석가족의 카필라국(Kapila國)을 방문했는데, 석가족의 사람들은 유리태자를 무시하고 ‘종년의 자식’이라 하며 천대하고 모욕을 주었다. 이에 태자는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 마음 먹었다.

한 신하의 계략으로 파사닉왕이 죽고 유리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지난날 석가족에게 당한 모욕을 보복하고자 출병을 하였는데,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유리왕(琉璃王)과 그 군사들이 카필라국으로 가는 길목에-말라 죽은 고목 밑에 앉아 계셨다.
유리왕은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왜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앉지 않으시고, 말라 죽은 고목 아래 계십니까?’하고 여쭙자 ‘친족의 그늘은 나무의 잎과 같이 시원하다’고 말씀하시니, 유리왕은 부처님의 뜻을 알고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또다시 석가족에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카필라국으로 향했다.

이런 중에 부처님의 제자인 목련존자는 석가족을 구하고자 부처님께 나아가 사뢰었다.
‘저의 신통력으로 유리왕의 군대를 타방 세계로 던져버리거나, 카필라국을 허공에다 옮겨 놓거나, 카필라국 위에 쇠그물을 덮을 수 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석가족의 전생 인연도 타방 세계에 던져 버릴 수 있겠느냐, 전생 인연도 허공에 옮겨 둘 수 있겠는가, 쇠그물로 전생 인연을 덮을 수 있겠는가’ 되물으시고,
‘지금 석가족들의 전생 인연이 이미 다 익었으므로, 이제는 그 갚음을 받아야 한다.’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곧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록 저 허공을 이 땅으로 만들고, 또 이 땅을 허공으로 만들려 해도, 그것은 다 본디 인연에 매었나니, 그 인연은 영원히 안 썩느니라.”
목련존자가 그 석가족 사람들이 아주 멸종이 되게 생겼으니까 5천 명을 골라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아 가지고 저 높은 하늘나라에다 갖다가 잠시 피신시키려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래 봤자 뭔 소용이 되겠느냐? 한 번 해 봐라.” 그래서 목련존자가 그렇게 했는데 다 난리가 지나고 나서 바리때 속을 보니 다 죽어 있었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 진군하다 돌아오고 진군하다 돌아왔으나 네 번째에는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다.
이리하여 유리왕과 그 군대는 석가족을 잔인하게 짓밟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사위성(舍衛城)으로 되돌아 갔다.

부처님은 비구들과 함께 유리왕과 그 군대가 휩쓸고간 불태워진 카필라국을 보시고 곧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모든 현상은 덧없는 것이니, 한 번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네. 나지 않으면 곧 죽지 않나니, 이 열반이 가장 큰 즐거움이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으로 가셨다. 그 때에 비구들에게 말씁하셨다.
“지금 저 유리왕과 그 군사들은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하고 지금부터 일주일 뒤에는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과연 유리왕과 그 군사들은 일주일 뒤에 강가에서 밤에 비바람이 몰아쳐 물에 떠내려가 죽어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또 하늘 불이 내려와 궁전을 모두 불살랐다.
부처님께서는 천안(天眼)으로 유리왕과 그 군사들이 지옥에 떨어진 것을 아시고 곧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악(惡)을 행하되 못내 심한 것, 그것은 모두 몸과 입의 행(行)이다. 지금의 몸으로도 고통 받지만, 타고 날 목숨도 짧을 것이다.  만일 집에서 살게 될 때는 그 집은 모두 불에 살리고, 만일 목숨을 마치게 되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부처님께서는 석가족과 유리왕의 전생 인연을 말씀하셨다.
“옛날 이 왕사성에 한 어촌이 있었다. 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은 풀뿌리를 먹었는데, 그 촌에 큰 못이 있었고 또 거기는 물고기가 많았다. 왕사성의 사람들은 그 못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 물고기중 하나가 `우리는 전에 이 사람들에게 아무 허물이 없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와서 우리를 잡아먹는다. 다음에 원수를 갚자.`하였다.
그 촌에는 어떤 어린애가 있었는데, 물고기를 잡지도 않고 또 목숨을 죽이지도 않았으나 물고기들이 죽는 것을 보고 매우 재밌어하였다.
비구들이여, 알라. 그 때의 그 왕사성의 사람들이 석가족이고, 그 물고기중 하나가 지금의 저 유리왕이요, 그 때에 죽는 물고기를 보고 웃던 어린애는 바로 나이니라.
그 물고기를 잡아먹은 과보로 무수한 겁을 걸쳐 지옥에 떨어졌고 또 지금에 그 갚음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 때에 물고기 죽는 것을 보고 웃었기 때문에 지금 머리가 아파 돌로 치는 것 같고 또 머리에 수미산을 인 것처럼 무겁다.
이것이 이른바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잘 단속하고 범행을 닦는 이를 생각하고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도록 하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번연하다 ;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분명하다.
*삼천불(三千佛) ; 과거세(過去世)의 천불(千佛), 현재세(現在世)의 천불, 미래세(未來世)의 천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인연(因緣)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목건련 (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고통을 겪는 중에,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에게 나아가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수촌에서 열반에 들었다.

목련존자의 과거 업연(業緣) ; 먼 과거 전생에 목련(目連)은 늙은 눈먼 부모를 모시고 나이가 들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살고 있었는데, 부모는 그것이 안타까워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젊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시집온 여인은 처음 며칠 동안에는 별 불평없이 눈먼 시부모를 잘 모시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시부모를 보기만 해도 짜증을 내며 같이 살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외출하여 일을 보러 간 사이에 그녀는 일부러 진흙과 쌀겨와 쌀죽의 찌꺼기를 집안 여기저기에 흩뜨려 놓았다.
이렇게 해 놓고 돌아온 남편에게 눈먼 당신의 부모가 이렇게 해 놓았다고, 자기는 이제 시부모와 더이상 같이 못 산다고 하며 계속 들볶자 그는 아내의 말만 믿고 부모를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딴 곳에 사는 친척이 부모님더러 한번 오라고 한다고 말하고는 수레에 태워 숲속에 깊이 들어가서, ‘아버지, 이 고삐 좀 잡고 계세요. 황소가 길을 잘 알고 있어서 가만 놔두어도 잘 갈 겁니다. 여기는 도둑들이 출몰하는 곳이니 저는 내려서 살펴봐야겠습니다.’하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에 들어간 그는 마치 도둑들이 공격을 해오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니까, 부모는 놀라면서 ‘아들아, 우리는 살 만큼 살았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너라도 어서 도망쳐라’고 하였다.
아들은 소리를 외치며 도적들처럼 다가와 부모를 죽여 시체를 숲속에 버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 악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고도 악행의 과보가 아직 다하지 않아서 100생 동안 온몸이 가루가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아죽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과거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을 모시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서원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 그는 미래 세상에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자기는 그 부처님 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공덕 바라밀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목련존자의 태어남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고, 결국 외도들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라한을 이룬 성자였기 때문에 중생처럼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적멸(寂滅)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같이 목련존자의 전생과 그에 따른 과보를 말씀하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법구경 137~140)을 읊으시었다.
“죄가 없고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는 자에게, 폭력를 사용하여 해를 끼치면, 참으로 아주 빠르게 다음 10가지 중 하나에 떨어지리라.
①심한 고통을 당함. ②아주 가난해짐. ③몸의 상해(신체적 절단). ④중대한 질병이나 정신이상을 일으킴. ⑤왕의 노여움을 사 모든 재산을 빼앗김. ⑥재산과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고소를 당함. ⑦가족이 생명을 잃음. ⑧재산이 천재지변 등으로 파괴됨. ⑨집에 벼락이 내리거나 불에 탐. @그런 뒤 그 어리석은 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리.”
[참고] [법구경-담마파다] (전재성 역주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p451~454, [법구경이야기 2] (무념·응진 역 | 옛길) p 384~390.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라고도 한다.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외도(外道) ; 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의 가르침(道). 또는 그 신봉자.
*사리불(舍利弗) ; 산스크리트의 샤리푸트라(śāriputra), 팔리어(語) 샤리푸타(Sāriputta)의 음역(音譯)이며, 추자(鶖子) ·사리자(舍利子)라고도 한다. 원명 우빠띳사.
인도 중부의 마가다왕국 수도 왕사성(王舍城) 근처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목건련과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목건련(目犍連) 및 250명의 산자야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경전 중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10대 제자 중 수제자로,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되었다고 전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1년 전, 목건련이 그렇게 외도들의 몰매를 맞고 열반에 들려고 하자, 사리불은 자신이 목련보다 먼저 열반에 들겠다고 하고, 부처님께 자신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 것을 허락받기 위해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로 갔다.
사리불은 ‘부처님께서 곧 열반에 드실 것을 알기에, 차마 제 눈으로 부처님의 열반을 볼 수 없어 먼저 열반에 들고자 합니다’하고 간청을 하여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처님께 귀의하게 한 후 열반에 들었다.
*치성(致誠 이룰 치,정성 성) ; 있는 정성을 다함. 또는 그 정성.
*천도재(薦度齋)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각본(脚本) ; ①[연극][영화] 연극이나 영화, 방송극을 만들기 위해 배우의 대사나 동작, 장면 순서, 무대 장치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글. ②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사전에 꾸민 계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제석천(帝釋天) ; 불법(佛法) 지키는 수호신. [天神]들의 제왕[] 샤크라〔釋〕라는 .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 ()씨이며 ()이라 한역하고, ‘제바 ()’이라 한역하며, ‘인달라 ()’ 한역하니  능천제(能天帝)’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32() 통솔하면서 불법(佛法)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  손에 금강저(金剛杵)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인과(因果) ; ①원인과 결과. 현상을 생성시키는 것과 생성된 현상. ②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이치. ③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도리.
*숙명론(宿命論) ; 세상의 모든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견해나 학설. 같은말-운명론(運命論).

 

 

 


---------------------(2)

 

*현생보(現生報) ; 현세(現世)에서 업(業)을 지어 현세에서 받는 과보(果報)를 이른다. 순현보(順現報). 현보(現報).

*순생보(順生報) ; 지금 세상에서 지은 선악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받는 인과응보를 이른다. 생보(生報), 순차보(順次報).
*순후보(順後報) ; 지금 세상에서 지은 선악에 따라 삼생(三生) 이후에 받는 과보(果報)를 이른다. 후보(後報).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성문(聲聞) ; 부처님의 음성(聲)을 들은(聞) 사람이라는 뜻.
① 산스크리트어 śrāvaka, 팔리어 sāvaka.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사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자.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 ② 성문승(聲聞乘)의 준말.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 · 각유정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육경(六境) ; 육진(六塵).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말한다.
*육식(六識) ; 육근(六根)에 의하여 대상을 깨닫는 여섯 가지 작용. 곧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여섯 가지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