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 추모재2022. 11. 6. 15:20

 

 

§(725) 전강선사 34주기 추모재 / 전강스님의 녹음법문을 들으면서 철저히 정진한다면 누구라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 우리는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사는 수행자.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추모재를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과 같이 추모재에 참여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다 같이 들은 이 감동을 여러분과 함께 앞으로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러한 마음으로 정진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활구참선을 열심히 한다면 남녀노소와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그분이 바로 전강 조실 스님의 수법제자(受法弟子)가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25)—전강선사 34주기 추모재(2008.12.28) (용725)

 

약 14분.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지 2552년이 되었습니다. 2552년이 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열반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현재 살아계신 부처님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크고 작은 사찰(寺刹)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계신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예불(禮佛)하고 그러면서 수행을 하고, 부처님의 그 법이 오늘날까지도 온 우주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은 해인사에 경판(經板)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러나 부처님의 육성(肉聲)은 우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진리를 깨달은 분은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위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우리 깨닫지 못한 중생(衆生)은 살아계신 부처님의 육성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열반하신 지 34회가 된 전강 조실 스님의 추모재(追慕齋)를 맞이해서 우리는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육성(肉聲)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살아계신 조실 스님의 법문처럼 경청을 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들은 바와 같이 법문 내용이 견성(見性)하셔서 견성하신 확철대오하신 그 경계에서 읊으신 오도송(悟道頌)과 선지식(善知識)과 법문답하는 그런 것을 생시(生時)에 설하신 육성으로 우리는 경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祖室)로 모시고 정진하는 많은 선방에서는 열반하셨지마는 전강대종사를 조실로 모시고 녹음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 100년, 몇백 년이 가더라도 조실 스님의 법문은 육성으로 우리는 들을 수가 있어서 경전으로 된 글로 보는 것과 귀를 통해서 육성으로 바로 들은 것과는 우리가 받는 감동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은 어느 날 만공(滿空) 스님과 용성(龍城) 스님, 두 선지식이 한자리에서 용성 스님께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일르시오” 이렇게 용성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만공 스님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니 용성 스님께서 “양구(良久)십니까?” 그런게, 만공 스님께서 “아니오”

그렇게 두 큰스님네가 문답을 할 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옆에 계시다가 “두 큰스님네가 서로 멱사리를 잡고 진흙구덩이로 들어가고 있으니 법담(法談)이라고 하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용성 스님이 “수좌(首座)가 일러보소”
조실 스님께서 “물으십시오” 그런게, (용성 스님이)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르게”
조실 스님께서 답하시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란 말씀이요” 이러한 내용이 녹음법문에 있습니다. 이 가운데 계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녹음법문을 통해서 그 장면의 법문답(法問答)하시는 것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당시에 만공 스님, 용성 스님, 혜월 스님, 혜봉 스님, 보월 스님, 한암 스님, 제산 스님 등 당대에 대선지식으로부터 다 법거량(法擧量)을 해 가지고 그 선지식들이 조실 스님한테 속된 표현으로 '꼼짝을 못하셨습니다'
"일러라, 옳다" 이렇게 인가(印可)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지식과 법거량을 해 가지고 선지식이 꼼짝을 못하면 바로 그것이 정말 살아있는 인가가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은 (젊은 시절 자연치료 만행 때) 통도사(通度寺)에 떠억 들어가셨는데 그 선방에 수좌 스님네들이 “아 신수좌(信首座), 참 잘왔소. 지금 경봉 스님이 미쳐 갖고 저러고 있으니 마치 잘왔다”고 헌게 “미친 것을 내가 가면 어떻게 해?” “아이 그래도 여그까지 왔으니 경봉 스님을 만나고 가라”고. 그래 가지고 대중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옆에서 부축해 가지고 경봉 스님 앞에까지 갔습니다.

그때 경봉 스님은 요샛말로 한 소식을 해 가지고 눈이 벌게 가지고, 점잖은 신도분이 오면 “너, 니 서방하고 끌어안고 자는 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그것이 바로 깨달은 경지니라” 이렇게 해서 무방반야(無妨般若)로 뭐 점잔이고 뭣이고 걸림이 없이 마구잽이 걸림이 없이 그러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조실 스님이 수좌들한테 끌려서 떠억 경봉 스님 앞에 가 가지고 원상(圓相)을 떡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하니까, 경봉 스님이 원상을 이렇게 뭉개버렸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이 송장 끄집어내라!” 고함을 지르니까 경봉 스님이 눈이 휘둥그레 해 가지고 한참 동안 있다가 탁! 무릎을 치면서 "옳다, 알았다! 다시 물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기상이.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여기서부터서는 단둘이 얘기를 해야 하겠으니 대중은 따라오지 마시오” 그래 가지고 경봉 스님을 끌고 그 골짜구니로 들어가서 터억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公案)을 물으니까 여지없이 경봉 스님이 일렀습니다. 그래 가지고 경봉 스님은 그 미친기가 가라앉고. (뒤에 1931년) 서른세 살밖에 안 되는 청년, 수좌—그때는 전강(田岡)이 아니고 영신(永信) 수좌인데, 영신 스님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 조실로 모셨습니다. 그 뒤로 전강 조실 스님은 전국 주요 선원에 조실을 역임을 하신 것을 방금 여러분들은 조실 스님 약력(略歷) 소개에서 잘 들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전강 조실 스님은 이 말세(末世)에 태어나신 정말 대선지식(大善知識) 중의 대선지식이고, 걸림이 없는 그런 살아계신 그런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여러분과 같이 들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는 감동적으로 느꼈습니다.
우리는 세상은 비록 말세가 되어서 온 세계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정치니, 사상이니, 주의니 해 가지고 명예와 권리와 이끗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서로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싸우고 있는 이러한 말세지만, 우리가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의지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들으면서 정말 철저히 정진한다면 누구라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조실 스님의 추모재를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과 같이 추모재에 참여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다 같이 들은 이 감동을 여러분과 함께 앞으로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러한 마음으로 정진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활구참선을 열심히 한다면 남녀노소와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그분이 바로 전강 조실 스님의 수법제자(受法弟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몸이 오늘 이렇게 숨쉬고 있지마는 일 분 뒤, 한 시간 뒤, 하루 뒤 우리의 생명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찰나찰나를 항시 화두를 들고 알뜰히 철저허게 정진을 하신다면 우리는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사는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정성을 다해서 점심 공양(供養)을 준비했으니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맛있게 공양을 드시기 바랍니다. 다음 또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처음~14분15초) (끝)




전강영신 대종사 행장 약록 (田岡永信 大宗師 行狀 略錄)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전강대종사 법어 「언하대오(言下大悟)」》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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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禮拜)하는 의식.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팔만장경(八萬藏經)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오도송(悟道頌) ; 불도(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그 경지 또는 그 기쁨을 나타낸 게송(偈頌), 또는 노래.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전강선사 오도송(悟道頌) ; 원래는 7언이었으나 후에 5언으로 만드심.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
어젯밤 삼경에 누각에 달빛이 가득히 비추었는데, 옛집 창밖에는 갈대꽃이 허옇게 핀 가을이로구나.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
부처와 조사가 여기에 이르러서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바위 밑에 흐르는 물은 다리로 지나오는구나.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용성진종(龍城震鍾) ; (1864~1940)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다. 1879년 16세 때 가야산 해인사의 극락암(極樂庵)으로 출가하여 화월(華月)을 은사로, 혜조(慧造)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계를 받았다. 그해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수월영민(水月永旻)의 지도로 대비주(大悲呪)를 수행하고, 양주 보광사(普光寺)의 도솔암(兜率庵)에서 정진하였다.
1886년 23세에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동 아도모례원 모례샘 근처에서 용맹정진 끝에 오도(悟道)하였다.

1911년 48세에 서울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 개조하여 대각사(大覺寺)를 건립하였다. 1919년 56세 때, 3·1운동 당시에는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의 대표자로 참가하였다. 3년 동안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 뒤 서울 가회동에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한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921년 58세에 서울 대각사에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61세에 불교 포교의 일환으로 박한영(朴漢永)과 함께 불교잡지인 『불일(佛日)』을 간행하였다. 1925년 62세에 선을 보급하기 위하여 도봉산 망월사에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였다.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참고] '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총본산 대각사' 사이트 참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양구(良久) : 한참 말이 없이 침묵하고 있는 것인데, 그 첫 기록으로는 어떤 외도(外道)가 부처님께 묻기를 『말씀하지도 말고 말씀 안 하지도 말고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하는데, 부처님은 양구하였다。그러자 그 외도는 깨치고 나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또 유마경에 둘 아닌 법(不二法)에 대하여 여러 보살들이 제각기 말하는데, 유마힐은 양구하여 여럿의 칭찬을 받았다。그 뒤로 종문(宗門)에서 법담(法談)하는데 이 특별한 수단을 많이 쓴다.
[참고]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 · 拈頌說話)』 제1권. (혜심, 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14 참고.
제 16칙. 「양구(良久)」
世尊因有外道問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良久 外道讚歎云 世尊 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外道去後 阿難問佛云 外道有何所證 而言得入 佛言如世良馬 見鞭影而行

세존께 어떤 외도가 물었다. “말 있음으로도 묻지 않고 말 없음으로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께서 양구(良久)하셨다. 그러자 외도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시어 저의 미혹의 구름을 걷어 주셔서 저로 하여금 깨달아 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물러갔다.

외도가 떠난 뒤에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다. “외도가 무엇을 증득했기에 ‘깨달아 들었다’ 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간의 좋은 말[馬]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으니라”
*멱사리 ; ‘멱살(사람의 멱 부분의 살. 또는 그 부분. 사람의 멱이 닿는 부분의 옷깃)’의 사투리. *멱 : 목의 앞쪽.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법거량(法擧揚 법 법/들 거/나타낼•밝힐 량) ; 법문답(法問答).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전강 조실 스님, 경봉 스님과 탁마 ; 「전강선사일대기」 제13호에 자세한 내용 있음. ①>>>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법문 브로그) ②유튜브에서 보기(47분 37초부터~)

*소식(消息 줄어들다·사라지다·없애다 소/불어나다·살다·번식하다·호흡하다 식) ; ① 산스크리트어 vārttā. 소장(消長) · 증감(增減) · 성쇠(盛衰) 등의 변화. 때에 따라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변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가하는 측면만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참고]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제20권. 당(唐) 청량산(淸涼山) 대화엄사(大華嚴寺) 사문(沙門) 징관(澄觀) 술(述).
言傳授之者 善消息之者 易豐卦云 天地盈虛 與時消息 釋云 消者盡也 息者生也 謂可加則加 可減則減 可出則出 可沒則沒 故言消息

전수(傳授)란 증감의 변화를 잘 하는 것이다. 『역(易)』 「풍괘(豐卦)」에 '천지의 만물이 차고 비며 반복하는 현상도 때와 더불어 일어나는 증감의 변화이다'라고 하였다. 다음과 같이 푼다. '소(消)란 다하여 사라짐이고, 식(息)이란 발생하는 것이다. 증가할 만하면 증가하고 감소할 만하면 감소하며, 나타날 만하면 나타나고 사라질 만하면 사라지므로 소식(消息)이라 한다.
②일상의 기거(起居). 안부. 살아가는 내용.
③원기를 회복시키는 것. 살아나게 만드는 것.
[참고] 『불설아난사사경(佛說阿難四事經)』
人民富有盈穀 孤獨鰥寡 衣食不充 疾病困篤 無以自濟 當給醫藥 糜粥消息 令其得愈 命不橫盡

제왕이나 인민은 부유하여 가득한 곡식을 고아나 외로운 늙은이나 홀아비나 과부나 의식이 충분하지 못한 이나 병이 매우 심하여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이에게 약을 주고 미음과 죽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병이 낫고 횡액에 죽지 않게 하여야 하니라.
④깨달음의 결정적인 단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갖가지 실마리. 또는 깨달은 경계 자체.
[참고]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26. 「시중(示衆)」에서
若論實參實悟 正如八十翁翁 向逆風逆水裏 牽一隻無底鐵船相似 不問上與不上 徹與不徹 直須心心無間 念念無虧 一步一步 盡平生伎倆睚將去 睚到著脚 不得處 筋斷骨折時 驀然水轉風回 卽是到家消息 卽今莫有到家底麼 (卓柱杖一下 云) 十萬八千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消息)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⑤조짐. 단서. 기미. 분별할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경계를 단소식(斷消息) · 무소식(無消息) 등이라 한다.

*무방반야(無妨般若) ; ‘반야에 방해(妨害)되지 않는다’
*점잔 ; 점잖은(언행이나 몸가짐이 의젓하고 예의 바른) 태도.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참고] 송담스님(No.282) - 86년 1월 첫째일요법회(1986.01.05)에서. (2분 19초)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 · 수(受) · 심(心) · 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법제자(受法弟子) ; 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인가(印可) 받은 제자.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