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797) (게송)약인정좌일수유~ / 성주괴공, 생로병사가 허망하나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깨달음으로 가는 발판 /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생사호흡지간 / 생사해탈 길은 ‘이뭣고?’뿐.
〇‘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누구도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성불(成佛)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그래 봤자 그것 때문에 참나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돈이 많거나 권리가 높거나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를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〇「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고 철저히 믿고, 한 숨 내쉴 때 ‘이뭣고?’ 들어마실 때 ‘이뭣고?’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이뭣고?’를 항상 챙기고 또 챙김으로 해서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서 이 무상한 육체를 가지고 영원을 살아가는 길, 생사해탈 하는 길이 ‘이뭣고?’뿐인 것입니다.
산승이 지금은 90세가 넘었으나 언제 죽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만큼 살아 있을 때 이런 말씀드리는 것을 깊이 명심해 주시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실 것을 믿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송담스님(No.797)—2019(기해)년 법보재 법회. (용797)
(1) 약 15분.
(2) 약 18분.
(1)------------------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보탑필경쇄위진(寶塔畢竟碎爲塵)이나 일념정진성정각(一念精進成正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다.
만약 사람이 잠깐 동안 떠억 정좌(靜坐)를 하면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칠보탑을 조성해서 모신 것보다도 더 공덕이 장하다. 왜 그러냐?
보탑(寶塔)은 필경쇄위진(畢竟碎爲塵)이나, 칠보탑을 쌓은 그 탑은 언젠가는 부서져서 티끌이 될 때가 있으나,
일념정진(一念精進)은 성정각(成正覺)이다. 한 생각 떠억 돌이켜서 ‘이뭣고?’ 정진을 하면 그것이 깨달음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인(古人)의 시(詩)입니다마는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것에 끄달리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은 듣는 데에 끌려가는데.
무엇을 보는 그 찰나에 ‘이뭣고?’를 챙기고, 귀로 무슨 말을 들을 때 좋은 말을 듣거나 나쁜 말을 듣거나, 좋아하거나 슬퍼하거나 속상하거나 그러지 말고, 바로 그 찰나에 ‘이뭣고?’를 떠억 챙기면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참나를 깨닫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은 그걸 듣고 계십니다마는.
이 조그만한 인연이 우리가 육도윤회(六途輪廻)로부터 벗어나서 참나를 깨닫는 그런 인연이 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만나서 이 법당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듣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 덕으로 이 육체를 받아나 가지고 이렇게 불법을 믿고, 이렇게 이 자리에 만나게 되었습니다마는.
이 사바세계는 모든 것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의 육체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감정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습니다마는,
성주괴공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나 우리가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찾는 참선(參禪)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허망하고 무상한 이 세계 그대로 깨달음으로 가는 발판이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60억 인구가 있지마는 이 정법을 믿는 사람, 참나를 깨닫는 참선을 하는 사람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온통 빈부귀천과 그런 것에 얽매여서 서로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라고 모두 발버둥을 치고 있으나 그것 뜻대로 이루기도 어렵지마는 이루어 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전부 그런 것들이 육도윤회의 근본밖에는 아닌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위해서 일생 동안을 발버둥을 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그 속에서 우리는 참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법회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마음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이 법당이 참나를 깨닫는 법당이요,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참나를 깨닫기 위한 거룩한, 갸륵한 수행인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육도윤회를 하는 평범한 중생일 수도 있고,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60억 인구 가운데에 선택된 참나를 찾는 소중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그래 봤자 많이 살아 봐야 백년 이쪽저쪽인데, 열심히 노력해서 백만장자가 되어도 그 재산을 저승에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거고, 자손한테 물려줘 봤자 그 재산으로 인해서 꼭 행복하게 사느냐, 안 사느냐는 두고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 무상한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 소중한 몸과 목숨을 거기다가 쏟아붓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정말 이 말씀을 뼛속 깊이 새겨듣고 일 초 일 초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참나를 찾아서 생사해탈하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뜻깊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바로 거기에서 ‘저것이 뭐다. 꽃이다. 나무다. 이쁘다’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한 생각, 눈으로 볼 때 일어날 때 그 찰나가 참나를 찾는 길로 가는 수행인이 되느냐, 눈으로 보는 찰나에 그리 끄달려 가 가지고 '좋다, 나쁘다' 잡념으로 망상으로 끌려가느냐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가 될 수도 있고, 그 찰나 마음먹기에 따라서 육도윤회로 가는 불쌍한 범부(凡夫) 중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육체에, 따지고 보면은 속에는 똥과 오줌과 그런 것이 육부(六腑)에, 창자 속에 가득차 있고, 일 초 일 초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신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정법을 믿고 참선법을 하는 사람은 이 육체가 그런 허망하고 보잘것없는 일개 불쌍한 중생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정말 소중하고도 소중한 부처님의 제자요, 수행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다 가정에서 일도 바쁘고 세상에서 할 일도 많고 그러겠으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다행히 불법을 믿고, 무상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소중한 수행자라고 산승(山僧)은 생각해서 여러분에게 감사한 마음과 이 무상한 세계에서 참나를 깨닫는 수행을 하는 소중한 도반(道伴)이요, 불제자(佛弟子)라고 생각해서 내가 백살이 가까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참석해서 이런 말씀을 하게 됩니다.
이 인연으로... (박수)
이 인연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법문중(佛法門中)에서,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또 만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박수) (처음~14분21초)
(2)------------------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하고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채득백화성밀후(採得百花成蜜後)에 부지신고위수감(不知辛苦爲誰甘)고
나무~아미타불~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다.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기러기 발자국만 모래에 남아 있으며, 사람은 죽어서 황천(黃泉)으로 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
벌들이 백 가지 꽃에서 꽃을 따다가 꿀을 쳤는데, 그 벌이 갖은 고생을 해서 꿀을 따다가 꿀통에다 딱 꿀을 채워 놨는데, 그 벌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꽃 저 꽃에서 똑 쪼금씩 쪼금씩 꿀을 따다가 벌통에다가 채워 놨는데, 그 벌이 죽음을 무릅쓰고 꿀을 따다가 놨는데 그 벌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꿀을 따먹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인생이 나와서 참 부모덕(父母德)에 이 몸을 받아났지마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히 돈도 벌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하고, 갖은 노력을 해서 재산도 이루고 명예도 이루고 모다 애를 써서 성공한 사람은 큰 부자가 되기도 하고 또 큰 학자가 되기도 하고, 자손을 가리켜서 성공을 시켜서 훌륭한 인생을 살도록 모든 부모들이 자손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써서 인생을 그렇게 사는데.
자손들은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애를 썼는가를 그런 것은 아지 못하고, 부모가 모아 놓은 재산을 가지고 흥청망청 쓰고, 먹고 쓰고 심지어는 노름도 하고 나쁜 길로 빠진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냥이 나름대로 인생을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자손을 위해서 모든 부모들은 애를 써서 재산도 모이고 좋은 집도 마련하고 해서 아들과 딸을 좋은 배필을 만나서 결혼을 시키고 애를 쓰지마는, 그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애를 써서 모은 재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덤부러 낭비를 하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가 아들과 딸을 났으니 애써서 돈을 벌고 해 가지고 자손을 잘 가리키고 잘 먹이고 잘 입혀서 잘살게 하도록 해 줄라고 하는 그 부모는 동서고금에 모든 부모님이 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런 부모의 애쓰시는 것을 이해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몇분의 일이나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가 낳아서 키워서 가리켜서 해 놓으니까 자기도 건강하게 자라고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학자도 되고, 예술가도 되고.
그렇게 생각할 때에 부모님의 은혜는 평생 동안 잊어서는 안 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성(孝誠)을 다해서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들어야 하고.
연세가 많아져서 병환이 나더라도 성의를 다해서 잘 보양을 해서 모든 정성을 다해서 부모를 잘 받들어 모셔야 하고.
부모의 육체와 음식이 중요하지마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리냐?
첫째, 지혜롭게 건강 관리를 하고, 학교를 다닐 때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고, 학교를 나와서 자라게 되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부모치고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덕에 이 몸을 받아났고, 부모덕에 학교도 다니고, 부모덕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잠시도 잊지 않고 부모에게 효심을 가지고 부모를 잘 받들어 모시고,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느냐? 여러분이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첫째에 건강 관리를 지혜롭게 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열심히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서 사회에 존경 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자기도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 생각하기에 달려 있지마는.
여기서 산승이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서 사회에 살 때는 돈을 벌어야 할 사람은 돈도 벌어야 하고,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직장에 충실하고 그러는데, 그러면서도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산승이 이렇게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몸으로 여러분에게 정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앉아서나 서서나 걸어갈 때나 직장에 가서나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십시요” 하는 이 말이 산승이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산승이 말씀드리는 것을... (박수) 이 말씀을 정말 뼛속 깊이 새기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인생이 살아가는데 많이 살아 봤자 백년 이쪽저쪽인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천당에도 가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거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나 축생이 될 수도 있고, 아귀가 될 수도 있고,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은 지옥에 가실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어떻게 사느냐에—심성을 어떻게 쓰느냐, 말을 어떻게 하느냐—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천 가지 만 가지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마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나를 찾는 ‘이뭣고?’밖에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누구도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성불(成佛)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그래 봤자 그것 때문에 참나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돈이 많거나 권리가 높거나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를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챙기는데 꼭 힘이 든 것도 아니고, 꼭 지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꼭 재산이 많아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뭣고?'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도 그 기분 나쁜 일만 자꾸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바로 ‘이뭣고?’를 챙기는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께 백살이 가까워 온 이 늙은이가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말씀은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제 말씀을 믿고 실천하겠다고 하신 분은 박수를..... (박수)
많이 살아 봤자 백살이고, 꼭 모든 사람이 다 백살을 산다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한 제자는 “백년도 살 수도 있습니다” 또 한 제자는 “생사는 십년 안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도 닦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한 제자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구나”
이런 말씀이 경전에 나옵니다마는.
여러분도 생사가 백년, 십년, 하루, 그렇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 죽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그렇게 그 사람은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는 성주괴공이 있어서 믿을 것이 못되고, 이 육체도 오늘은 이렇게 밥 먹고, 이렇게 말하고 듣고 있습니다마는 그 믿을 것이 못됩니다.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고 철저히 믿고, 한 숨 내쉴 때 ‘이뭣고?’ 들어마실 때 ‘이뭣고?’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이뭣고?’를 항상 챙기고 또 챙김으로 해서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서 이 무상한 육체를 가지고 영원을 살아가는 길, 생사해탈 하는 길이 ‘이뭣고?’뿐인 것입니다.
산승이 지금은 90세가 넘었으나 언제 죽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만큼 살아 있을 때 이런 말씀드리는 것을 깊이 명심해 주시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실 것을 믿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14분27초~32분19초)(끝)
------------------(1)
*(게송) ‘약인정좌일수유~’ ; 보조 지눌(普照知訥) 스님의 『진심직설(眞心直說)』 진심공덕(眞心功德) 장(章)에서 ‘古頌’으로 인용한 게송 참고.
*항하사(恒河沙) ; [불교]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沙]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첩경(捷徑 빠를 첩/지름길 경) ; 지름길. 가깝게 질러서 가는 빠른 길.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2)
*(게송) ‘雁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36(가로판 p142) 게송 참고.
*(게송) ‘採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甘’ ;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36(가로판 p142) 게송 참고. 당대시인(唐代詩人) 나은(羅隱 833~909)의 시 《봉(蜂)》 참고.
*황천(黃泉) ; 저승(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부모덕(父母德) ; 부모의 은덕(恩德 은혜와 덕. 또는 은혜로운 덕).
*덤부다 ; '덤비다(마구 대들거나 달려들다)'의 사투리.
*효성(孝誠 효도 효/정성 성) ;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는 정성.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노는 입에 염불한다' ; 가만히 있거나 노느니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말. 나옹화상의 「승원가」에는 몸으로 농사일을 하거나 직물을 짜면서도 입으로는 일념으로 염불하라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염불 수행할 것을 강조한 말.
한자의 음과 훈(訓 :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하나인 이두(吏讀)로 쓰인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승원가(僧元歌)」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참고] 『불교가사 원전연구』 (임기중 | 동국대학교출판부) p658. 『나옹록』 (선림고경총서 22 | 장경각) p358~359.
阿彌陀佛 念佛法隱 溫可事厓 碍臨業西 僧俗男女 勿論何古 有識無識 貴賤間厓 所業乙 弊治末古 農夫去加隱 農事何面 遊難口厓 阿彌陀佛 織女去加隱 績三何面 遊難口厓 阿彌陀佛 今生厓 利他何古 行住座臥 耳於何面 後生極樂 難乙可
아미타불 염불법은 온갖일애 걸림없어 승속남녀 물론하고 유식무식 귀천간애 소업을 폐치말고 농부거던 농사하며 노난입애 아미타불 직녀거던 길삼하며 노난입애 아미타불 금생애 이타하고 행주좌와 이어하면 후생극락 어려울까
多隱則 六字念佛 小隱則 四字念佛 行住坐臥 語默間厓 高聲以那 隱念以那 大小間 六字四字念佛乙 懃力大奴 念佛何刀 悲感去隱 阿彌陀佛 好隱耳刀 阿彌陀佛 遊難口厓 雜談末古 阿彌陀佛 言友三我 念念厓 阿彌陀佛 時時厓 阿彌陀佛 處處厓 阿彌陀佛 事事厓 阿彌陀佛 壹生厓 壹於何面 極樂去其 難奴溫可
많은즉 육자염불 적은즉 사자염불 행주좌와 어묵간애 고성이나 은념이나 대소간 육자사자염불을 근력대로 염불해도 슬픈것은 아미타불 좋은이도 아미타불 노난입애 잡담말고 아미타불 말벗삼아 염염애 아미타불 시시애 아미타불 처처애 아미타불 사사애 아미타불 일생애 이러하면 극락가기 어려온가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〇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