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스님 약력2014. 11. 16. 11:54
청원행사(青原行思), 동산양개(洞山良价), 조산탐장(曹山耽章), 자명초원(慈明楚圓), 현사사비(玄沙師備), 설봉의존(雪峰義存), 부휴선수(浮休善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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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행사(青原行思) : (? – 740) 속성 유(劉)씨。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廬陵縣)에서 났다。어려서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의 인가를 받고, 대중의 상수(上首)로 있었다.
그리하여 육조 문하의 장로(長老)이더니, 뒤에 그 고향인 길주(吉州) 청원산 정거사(青原山靜居寺)에서 교화하였는데, 육조가 열반한 뒤에 학자들이 그 곳에 많이 모였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8년에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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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양개(洞山良价) : (807 – 869) 속성은 유(兪)씨。절강성 소흥부(紹興府) 회계(會稽)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배우다가 눈•귀•코가 없다(無眼耳鼻舌身意)는 뜻을 캐어 물었더니 그 은사가 대답하지 못하고, 오예산(五洩山)의 영묵(靈默)선사에게 인도하여 참선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운암에게 묻기를 『혜충(慧忠)국사의 말에 무정(無情=목숨 없는 것)이 설법한다 하였는데, 무정의 설법은 어떤 이가 듣습니까?』
『무정의 설법을 무정이 듣느니라』
『화상도 들으십니까?』
『내가 듣는다면 너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하는 데서 깨친 바 있었고,

운암의 임종 법문에 대하여 물을 건너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비로소 크게 깨쳐 운암의 참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송을 짓기를,

아예 그를 딸치 말게 더욱더욱 멀어 가네 (切忌從他覔  迢迢與我疎)
내가 이제 홀로 가니 간 곳마다 그를 보네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
그는 이제 바로 난데 나는 지금 그 아닐쎄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이와 같이 알고라야 참 이치에 맞게 되리 (應須恁麼會  方得契如如)

그 뒤에 강서성 여릉도(廬陵道)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동산의 보리원(普利院)에서 교화하여 법을 받은 제자가 26분이 있었다。그 가운데는 신라의 금장(金藏)화상이 있었고, 동산의 제이세(第二世) 소산 광인(疎山匡仁)에게서 신라의 명조안(明照安)과 동진(洞眞)이 나왔다.

당나라 함통(咸通) 10년에 상당 설법하고 대중을 하직한 뒤 입적 하였는데, 모두 통곡하므로 다시 깨어나서 이렛동안 설법하고 앉아서 갔다。그 때 나이 63.
그를 종조(宗祖)로 삼는 조동종은 지금까지 중국과 일본에 융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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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 탐장(曹山耽章) : (839 – 901) 법명은 본적(本寂)이며, 탐장은 자(字)라기도 하고 이름이라기도 한다。속성은 황(黃)씨。복건성 복주부(福州府) 고전현(古田縣)에서 났다.

어려서 유학(儒學)에 정통하였고, 19세에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가지고, 동산에 가서 그 법을 받고 무주(撫州)의 길수(吉水)에서 교화하였다. 조계의 육조를 사모하는 뜻으로 그 산 이름을 조산이라 고쳤고, 그 뒤 함통 8년 전후 도둑의 난을 만나 의황현(宜黃縣)의 하옥산(荷玉山)으로 옮겼다.

동산의 오위(五位) 법문은 그가 완성하여 총림의 표준을 만들고, 그 종지를 크게 떨쳤다。그러나 그의 법계(法系)는 사대(四代) 만에 끊어졌다.
당나라 소종(昭宗) 천복(天復) 1년에 63세로써 입적하였다。저서로 <어록(語錄)>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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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 초원(慈明楚圓) : (987 – 1040) 속성은 이(李)씨。광서성(廣西省) 계림부(桂林府) 전주(全州)에서 났다.
22세에 출가하여 멀리 분양 선소(汾陽善昭)선사의 회상에 갔었다.
분양은 욕설과 세속의 더러운 말만 할 뿐이므로 하루는 정성을 다하여 간 하였더니, 크게 성내어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하고 내쫓았다。초원이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데, 분양이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그 바람에 크게 깨쳤다.

뒤에 석상산 숭승사(石霜山崇勝寺)와 담주 흥화사(潭州興化寺) 같은 여러 곳에서 교화하니, 법을 이은 제자가 50인이나 되었다。자명(慈明)은 54세로써 입적한 뒤의 시호(諡號)이고, 석상화상(石霜和尙)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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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사 사비(玄沙師備) : (835 – 908) 속성은 사(謝)씨。복건성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젊어서는 낚시질을 좋아하였는데, 30세에 출가하여 공부하는 길을 얻어 가지고는 고향에 돌아가서 음식을 겨우 목숨이 붙어 있을 만큼 먹어 가면서, 바위 밑과 산꼭대기에서 늘 좌선(坐禪)하였다.

설봉 화상이 그에게 선지식을 찾아보라고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혼자 공부하여 깨친 바 있었고, 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크게 깨쳤다.


설봉의 법을 이어 가지고, 매계장(梅鷄場) 보응원(普應院)에서 교화하다가 얼마 안 가서 복주의 현사원에 옮기었다。후량(後梁) 태조(太祖) 개평(開平) 2년에 74세로써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은 <현사어록(玄沙語錄)> 3권, <현사광록(玄沙廣錄)> 3권이 있고, 그의 제자 천룡 중기(天龍重機)에게서 고려의 설악 영광(雪岳令光)선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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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 의존(雪峰義存) : (822 – 908) 속성은 증(曾)씨。복건성 천주부 남안현에서 여러 대로 불법을 진실하게 믿어 오는 집에서 났다.

나면서부터 종소리를 듣거나 불전에서 쓰는 물건을 보게 되면 곧 즐거워하는 표정이 나타났고, 파 마늘 냄새를 꺼리었다.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옥간사(玉澗寺)에 갔다가 그 길로 집에 오지 않고 중이 되었다.


참선을 시작한 뒤에 먼저 염관(鹽官)에 갔고, 투자(投子)에 세 번, 동산에 아홉 번 갔으나 얻은 바가 넉넉지 못하였는데, 덕산에게 법을 묻다가 한 방망이 맞고서 깨쳤으나 아직 훤칠하지 못하다가, 그 사형 암두(巖頭)가 크게 꾸짖는 데서 비로소 크게 깨쳤다.


뒤에 복주(福州)의 상골산(象骨山)에 들어가서 그 이름을 설봉산으로 고치고 40년 가까이 교화하니, 모인 대중이 어느 때나 1500명을 넘었고, 법을 이은 제자가 56인이 있었다.

그 중에는 신라의 대무위(大無爲)선사와 고려의 현눌(玄訥)과 영조(靈照)선사가 있었고, 그 제자 장경 혜릉(長慶慧稜)에게서 신라의 구산(龜山)화상이 나왔다。후량(後梁) 태조(太祖) 2년에 87세로써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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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휴(浮休) ; (1543-1615) 조선시대의 스님. 전북 남원 출신. 법명은 선수(善修). 호는 부휴(浮休).

20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신명(信明)에게 출가하고, 후에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덕유산,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에 머물고,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입적함.

저서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Posted by 닥공닥정
역대 스님 약력2014. 10. 4. 11:42

사명대사(四溟大師), 경허성우(鏡虛惺牛), 만공월면(滿空月面), 보월선사(寶月禪師), 전강영신(田岡永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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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四溟大師) ; (1544~1610) 법명은 유정(惟政), 자는 이환(離幻), 법호는 사명(四溟) 또는 종봉(鐘峰) 혹은 송운(松雲)이라고도 하는데,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경상도 밀양(密陽)에서 났다。아버지는 임 수성(任守成)이고, 어머니는 달성 서(徐)씨였다.
그는 어려서 늘 돌이나 흙을 쌓아 부처님이나 탑을 만들고, 꽃이나 모래밥으로써 불공(佛供)하는 놀이를 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큰 자라를 잡아 가는 것을 보고, 주워 모았던 산밤(山栗)을 주고 바꾸어서 물에 넣어 준 일이 있었다.

13살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 孟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155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천(金泉)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에 출가하여 신묵(信默)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전등록 傳燈錄>을 보다가 깨친 바가 있었고, 18살에 선과(禪科)에 급제하였으며, 33살에 선종(禪宗)의 사찰이 서울 봉은사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고사하고 떠나,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스님을 모시고 더욱 크게 깨쳐 그의 법을 받았다.

36살부터 49까지 사이에 금강산 • 팔공산(八公山) • 태백산 • 오대산 같은 곳에서 지내다가 다시 금강산 유점사 명적암(明寂庵)에서 지내는데,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倭賊)이 영동(嶺東)지방에 거쳐 벌써 유점사까지 쳐들어왔다. 사명대사는 글로 써서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깨우쳐 타일렀다.
그는 다시 고성(古城)에 들어가서도 함부로 살생(殺生)을 하지 말라고 왜장들을 설유한 결과 영동 구읍(嶺東九邑)이 병화를 면하였으니 이것은 사명대사의 대자비심의 공적이었다.

선조(宣祖) 임금은 피난길을 떠나고 서울은 함락되어 나라가 위태로워지니, 그 길로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승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평안도 순안(順安)에 가서 서산스님의 휘하에서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받았다.

명나라 총병(總兵) 유정(劉綎)이 사명대사에게 명(命)하여, 강화(講和) 문제를 위하여 1594년부터 1598년까지 부산의 왜적 진영에 4번이나 들어가서 가등청정(加藤淸正)과 화의 담판하였으나 복잡한 국제정세로 말미암아 큰 효과는 없었으나, 그 비범한 수완을 삼국의 군민이 크게 칭송하였다.
이때에 가등청정이 묻기를, “조선에는 무슨 보배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사명대사는 대답하기를 “근년에 와서 우리 조선에는 별다른 보배가 없고 오직 그대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한다”라고 하니, 가등청정은 무릎을 치면서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적군들은 그를 「설보 화상(說寶和尙) 또는 보두화상(寶頭和尙)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편으로 영남의 군사를 지휘하여 유격전을 하게 하면서, 팔공(八公) • 금오(金鰲) • 용기(龍起)의 각처와 마지막으로 부산에까지 성을 쌓았을 뿐 아니라, 이런 일들이 끝난 뒤에 직인(職印)과 전마(戰馬)를 나라에 바쳤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1597년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성(島山城)에서, 그리고 1598년 명나라 유제독(劉提督)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특별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때까지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군량미는 사천여 석이고, 무기와 군복도 만여 벌이 되었다.
1602년 가을에 임금은 그에게 「가선동지중추부사(嘉善同知中樞府事)」의 관품을 내렸다.

1604년(선조 37) 1월 서산대사의 부고를 받고 묘향산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국명(國命)을 받고,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그 이듬해(1605년) 봄에 귀국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가의대부 행용양위 대호군(嘉義大夫 行龍驤衛 大護軍)을 봉하고 그 조상 삼세를 추증(追贈)하였다。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대중을 모아 놓고 말씀하시기를 “사대(四大, 地水火風)로 합[假合]하여 빌린 이 몸은 이제 그 진리로 돌아감이니, 어찌 번거롭게 오고가면서 환(幻)과 같은 몸뚱이를 수고롭게 하리요. 내가 이제 입멸(入滅)하여 큰 변화에 순응하려 함이로다”라고 하신뒤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 67세, 법랍 51하(夏)였다.
제자들이 해인사 서쪽 기슭에다 다비하여 사리를 수습, 부도를 세워 봉안하고 그 앞에 영당(影堂:오늘의 弘濟庵)을 건립하였다. 그의 저술이 퍽 많았으나 병화로 대개 없어지고, 남은 것은 <분충서난록 奮忠紓難錄> <사명집 四溟集>등 7권밖에 전하지 못한다。시호를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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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鏡虛禪師) ; (1849-1912) 성(姓)은 송(宋)씨이고 법명은 성우(惺牛),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호(號)는 경허(鏡虛)이며 여산(礪山) 사람이다.
헌종 15년 기유(己酉)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송두옥(宋斗玉)이요 어머니는 밀양(密陽) 박(朴)씨였다.
태어난 뒤 사흘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을 시키자 아기 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경기도 광주군 청계사(淸溪寺)에 가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컸으며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나무하고 물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모셨다.

14세가 되도록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때에 그 선비가 소일꺼리로 곁에 불러 앉히고 천자문·통사(通史) 등의 글을 가르쳐 보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대로 외우고 문리를 해석할만큼 크게 진보가 있으니 선비가 크게 감탄하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還俗)을 하며 스님의 공부를 크게 성취시키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편지를 써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에게 추천하였다. 화상은 그 당대에 큰 강사였다.

만화강백(萬化講伯) 처소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료하였다.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열배 백배 앞섰으며 영호(嶺湖)의 강원에 두루 참석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고 널리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름이 팔도에 떨치었다.
23세 때에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하니 교의(敎意)를 논(論)하매 큰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사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왔다.

31세 때 하루는 전날 은사 계허스님이 보살펴 아껴주던 정이 생각나서 한번 찾아뵙고자 대중에게 고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급히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려 하자 주인이 내쫓았다.
그 동네 수십 집을 찾아갔지만 집집마다 다 쫓기를 매우 급히 하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전염병(콜레라)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서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하였다.
스님이 그 말을 듣자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고 마음이 떨리며 마치 죽음의 벼랑에 다다른 것 같으며,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어서 일체 세상 일이 도무지 꿈 밖의 청산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文字)에 구속되지 않고 조사(祖師)의 가르침을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하고 발원을 마치고 평소의 읽은 바 공안(公案)을 생각해보니,
이리저리 의해(義解)로 배우던 습성이 있어서 지해(知解)로 따져지므로 의심으로 참구(參究)할 분(分)이 없으나 오직 영운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라는 화두(話頭)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참구하였다.

산에 돌아온 뒤에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따라 잘들 가게나. 내가 뜻을 두어 원하는 것은 이에 있지 않다네”하고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參究)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같이 3개월을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한 사미(沙彌)스님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俗姓)은 이(李)씨라, 그의 아버지가 좌선을 여러 해 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李處士)라고 부르는데, 사미의 스승이 마침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를 하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沙門, 스님)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하니까,
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

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하니,
사미가 말하길 “지금 주실(籌室) 화상이 참선(參禪)을 매우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 이치를 알 것이니 사부(師傅)께서는 가서 물으소서”

그 스님이 흔연(欣然)히 가서 절하고 앉아서 이처사(李處士)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牛無鼻孔處)’는 말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眼目)이 정(定)히 움직여 ‘옛부처 나기전 소식(古佛未生前消息)’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꺼지고 물질과 나를 함께 잊으니 곧 고인(古人)의 ‘크게 쉬고 쉬는 경지(大休歇之地)’에 도달한지라,
백천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기와가 깨어지듯 하니, 때는 고종 16년 기묘(己卯 1879)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날 이후 스님은 방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하니,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無事之人 本來如是)”고 하였다.
스님은 그 이듬해인 경진년 봄에 어머니와 형 태허스님이 계신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오후보림(悟後保任)하였다.

게송으로 그 깨달아 증득한 곳을 이르기를,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

홀연히 콧구멍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천장암에 머물면서 하루는 대중에게 설법할 적에 특히 전등(傳燈)의 연원(淵源)을 밝히는데 스님의 법은 용암화상(龍巖和尙)에게 이었으니 청허(淸虛)의 12세손이 되며 환성(喚惺)의 7세손이 된다 하였다.
그 뒤로 호서(湖西)에 20여 년 간 오래 주석하니 천장암과 서산의 개심사와 부석사, 마곡사·칠갑산 장곡사·아산 봉곡사·금산 태고사·계룡산 갑사·동학사·신원사·속리산 법주사 등지로 왕래하며 때로는 마음을 고요히 묵상하며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설교하면서 호서에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었다.

51세 때 기해년(1899) 가을에 합천 해인사 조실로 초대받고 가니 때마침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사업이 있었는데 대중이 스님을 추대하여 법주로 모셨다.
영축산 통도사·표충사·대승사·동화사·파계사와 금정산 범어사와 호남의 화엄사·실상사·쌍계사·송광사·태안사는 모두 화상께서 유력(遊歷)하던 곳이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 또한 구름 일 듯하니, 이 기간처럼 부처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함이 이와같이 성(盛)함이 없었다.

임인년(1902)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 편찬 불사. 가을 동래 범어사의 금강암과 마하사 나한 개분불사(改粉佛事) 때 증명법사를 하였다.
56세 때 갑진년(1904) 2월 11일에 천장암에서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도록 부촉하였다. 봄에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 석왕사에 이르러 오백나한 개분불사의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선비 박난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有髮居士) 박진사(朴進士)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갑산·강계 등지로 내왕하며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만행두타(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64세 때 임자년(1912)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態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入寂)하니 법랍 56세였다. 입적 소식을 듣고 만공(滿空)·혜월(慧月)선사가 곧 그 곳에 가서 난덕산(難德山)으로 운구하여 다비(茶毘)를 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만공선사 주재, 한용운 스님의 편찬으로 스님의 법어를 모은 「경허집(鏡虛集)」이 있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석명정 역 | 극락선원), 『경허법어(鏡虛法語)』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 | 김진성 역 | 인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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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선사(滿空禪師)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도암(道岩). 속성은 여산(礪山) 송(宋)씨,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갑진년 1904년 2월 11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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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월선사(寶月禪師) ; 보월성인(寶月性印 1884-1924). 만공 선사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다. *수법제자(受法弟子)—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인가(印可) 받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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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 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700여 시간 분량의 육성녹음법문을 남기셨다.

Posted by 닥공닥정
역대 스님 약력2014. 5. 14. 15:50

오조홍인(五祖弘忍), 영가현각(永嘉玄覺), 보조지눌(普照知訥), 서산휴정(西山休靜), 사리불(舍利弗), 목련(目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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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五祖)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중국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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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永嘉) : (665–713) 중국 절강성(浙江省) 온주부(温州府) 영가현(永嘉縣) 대(戴)씨 집에서 났다.
법명은 현각(玄覺), 자(字)는 명도(明道), 호는 진각(眞覺)이다.
여덟 살에 출가하여 장경을 널리 보고, 천태(天台)의 지관(止觀)을 숭상하였다. <유마경>을 읽다가 견성하고,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六祖)에게 인가를 받고는, 곧 돌아가서 고향의 용흥사(龍興寺)에 있었다.
그의 저술은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관심십문(觀心十門)> <증도가(證道歌)> 등이 남아 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院) 1년에 49세에 앉아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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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普照國師) ; (1158~1210) 고려의 스님.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의종(毅宗) 19년(1165) 8세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에 속하는 종휘(宗暉)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명종 12년(1182) 25살 때인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전남 창평군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하던 중 하루는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켜서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다.
명종 15년(1185 乙巳)에는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다 이통현(李通玄) 장자(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
1190년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정혜쌍수(定慧雙修)할 것을 권하였다.

신종(神宗) 1년(1198 戊午) 몇 사람의 도반과 함께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은거하였다.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되 “내가 보문사(普門寺)에서 지낸 이후 10여년이 경과하였다. 비록 뜻을 얻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항상 꺼림직 하였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는 여가에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 1089-1163)의 어록(語錄)을 보다가,
‘…… 선(禪)은 고요한 곳[靜處]에도 있지 않고 또한 분요한 곳[鬧處]에도 있지 아니하며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일상생활에서 인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에도 있지 않습니다.
비록 이와같으나 제일(第一)에 정처(靜處)와 요처(閙處)와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와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를 버리고서도 아니됩니다. 참(參)하여 홀연히 눈을 뜨면 바야흐로 모두 다 자가옥리사(自家屋裏事-자기 집안의 일)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하며, 원수와 멀리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하였다.

1200년(신종 3, 庚申)에 조계산 길상사(吉祥寺), 곧 지금의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11년간 대중을 지도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
그리고 대중에게 송지(誦持)하기를 권함에는 항상 『금강경(金剛經)』으로써 법을 삼도록 하고, 교의(敎義)를 연설함에는 『육조단경』을 강설하며,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으로써 주장을 펴고, 『대혜어록(大慧語錄)』으로써 함께 우익(羽翼)을 삼았다.
수행에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경절문(徑截門)을 세워 수행자들을 지도함.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역설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상수(定慧雙修)를 권하고 간화선(看話禪)으로 증오(證悟)할 것을 주창하였다.
1210년(희종 6년) 3월 27일 53세의 나이로 입적(入寂). 희종은 그에게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그의 묘탑에도 감로(甘露)라는 이름을 내렸다.

3월 27일 아침, 스님께서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이 눈은 조사(祖師)의 눈이 아니고, 이 코도 조사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입이 아니고,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준 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법고(法鼓)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여 설법을 하고 문답을 하신 다음, 마지막으로 어떤 스님이 묻기를 “옛날 유마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시질(示疾)한 것과, 오늘 조계산에서 목우자(牧牛子)가 작병(作病)한 것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너희들은 같은지 다른지를 배워라” 하고,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몇 번 내리치고 말하되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 하고, 주장자를 잡고 법상에 걸터앉아 고요히 입적하였다.

저서 :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수심결(修心訣)·진심직설(眞心直說)·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염불요문(念佛要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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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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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舍利弗) ; 산스크리트의 샤리푸트라(śāriputra), 팔리어(語) 샤리푸타(Sāriputta)의 음역(音譯)이며, 추자(鶖子) ·사리자(舍利子)라고도 한다. 원명 우빠띳사.
인도 중부의 마가다왕국 수도 왕사성(王舍城) 근처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목건련과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목건련(目犍連) 및 250명의 산자야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경전 중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10대 제자 중 수제자로,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되었다고 전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1년 전, 목건련이 그렇게 외도들의 몰매를 맞고 열반에 들려고 하자, 사리불은 자신이 목련보다 먼저 열반에 들겠다고 하고, 부처님께 자신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 것을 허락받기 위해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로 갔다.
사리불은 ‘부처님께서 곧 열반에 드실 것을 알기에, 차마 제 눈으로 부처님의 열반을 볼 수 없어 먼저 열반에 들고자 합니다’하고 간청을 하여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처님께 귀의하게 한 후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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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건련 (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고통을 겪는 중에,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에게 나아가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수촌에서 열반에 들었다.

목련존자의 과거 업연(業緣) ; 먼 과거 전생에 목련(目連)은 늙은 눈먼 부모를 모시고 나이가 들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살고 있었는데, 부모는 그것이 안타까워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젊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시집온 여인은 처음 며칠 동안에는 별 불평없이 눈먼 시부모를 잘 모시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시부모를 보기만 해도 짜증을 내며 같이 살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외출하여 일을 보러 간 사이에 그녀는 일부러 진흙과 쌀겨와 쌀죽의 찌꺼기를 집안 여기저기에 흩뜨려 놓았다.
이렇게 해 놓고 돌아온 남편에게 눈먼 당신의 부모가 이렇게 해 놓았다고, 자기는 이제 시부모와 더이상 같이 못 산다고 하며 계속 들볶자 그는 아내의 말만 믿고 부모를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딴 곳에 사는 친척이 부모님더러 한번 오라고 한다고 말하고는 수레에 태워 숲속에 깊이 들어가서, ‘아버지, 이 고삐 좀 잡고 계세요. 황소가 길을 잘 알고 있어서 가만 놔두어도 잘 갈 겁니다. 여기는 도둑들이 출몰하는 곳이니 저는 내려서 살펴봐야겠습니다.’하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에 들어간 그는 마치 도둑들이 공격을 해오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니까, 부모는 놀라면서 ‘아들아, 우리는 살 만큼 살았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너라도 어서 도망쳐라’고 하였다.
아들은 소리를 외치며 도적들처럼 다가와 부모를 죽여 시체를 숲속에 버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 악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고도 악행의 과보가 아직 다하지 않아서 100생 동안 온몸이 가루가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아죽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과거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을 모시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서원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 그는 미래 세상에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자기는 그 부처님 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공덕 바라밀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목련존자의 태어남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고, 결국 외도들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라한을 이룬 성자였기 때문에 중생처럼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적멸(寂滅)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같이 목련존자의 전생과 그에 따른 과보를 말씀하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법구경 137~140)을 읊으시었다.
“죄가 없고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는 자에게, 폭력를 사용하여 해를 끼치면, 참으로 아주 빠르게 다음 10가지 중 하나에 떨어지리라.
①심한 고통을 당함. ②아주 가난해짐. ③몸의 상해(신체적 절단). ④중대한 질병이나 정신이상을 일으킴. ⑤왕의 노여움을 사 모든 재산을 빼앗김. ⑥재산과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고소를 당함. ⑦가족이 생명을 잃음. ⑧재산이 천재지변 등으로 파괴됨. ⑨집에 벼락이 내리거나 불에 탐. @그런 뒤 그 어리석은 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리.”
[참고] [법구경-담마파다] (전재성 역주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p451~454, [법구경이야기 2] (무념·응진 역 | 옛길) p 384~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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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스님 약력2014. 3. 23. 08:58

마조도일(馬祖道一),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희운(黃檗希運), 조주종심(趙州從諗), 운문문언(雲門文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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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馬祖) : (709 – 788) 법명은 도일(道一), 속성은 마(馬)씨。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 십방(什放)에서 나서 어려서 출가하였다.

남악(南嶽)에 가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묻기를,
『무엇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부처 되려고 좌선하지요』

그 이튿날 회양선사가 도일의 앞에 가서 벽돌을 돌에 갈고 있었다。도일이 묻기를,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하렵니까?』 『거울을 만들려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읍니까?』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줄 아는가?』
『......그러면 어찌 하오리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상관없는 것이며, 부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집착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는 것이 선이다!』하는 말 끝에 크게 깨쳤다.

그의 법을 받아 가지고, 강서성 남강(南康)의 공공산(龔公山)과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종릉(鍾陵) 개원사(開元寺)에서 교화하니, 그의 법을 받은 제자가 139인이나 되었다.

그의 제자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서 신라의 도균(道均)선사와 철감(哲鑑)국사가  나왔고,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범일(梵日) • 진감(眞鑑)의 두 국사가,
귀종 지상(歸宗知常)에게서 대모(大茅)화상이,
대매 법상(大梅法常)에게서 가지(迦智)선사와 충언(忠彥)선사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에게서 무염(無染)국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도의(道義)국사와 혜철(惠哲)국사와 홍척(洪陟)선사가,
장경 회운(章敬懷暉)에게서 현욱(玄昱)국사와 각체(覺體)선사 같은 신라의 큰 스님들이 나왔었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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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百丈) : (720 – 814) 법명은 회해(懷海), 속성은 왕(王)씨。복건성(福建省) 민후현(閩候縣) 곧 옛날의 장락현(長樂縣)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장경을 열람하였고, 뒤에 마조의 시자(侍者)가 되어 모시고 어디로 가는데,
물오리 떼가 울고 가는 것을 보고 마조가 묻기를,
『저게 무슨 소리냐?』 『물오리 소립니다』
한참 있다가 다시 묻기를,
『아까 그 소리가 어디 있느냐?』 『날아가 버렸읍니다』
이에 마조는 돌아서면서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그는 아픔을 못 이기어 소리질렀다.
그 때에 마조는 『그래도 날아갔다고 말할 터이냐?』하는 데서 처음 깨치고, 그 다음 마조가 「할」하는 데서 크게 깨쳤다.

마조가 입적한 뒤에 그 탑을 석문(石門)에 쌓고 10년 동안 모시고 지내면서 마조의 법석을 계승하다가, 홍주(洪州)의 대웅산(大雄山) 곧 지금의 남창부(南昌府) 봉신현(奉新縣)에 있는 백장산에 들어가서 교화하였다.

그 때까지의 선원은 모두 율종(律宗)의 제도를 그대로 써 왔던 것이므로, 선종의 독특한 제도를 창설하여 선원의 모든 규칙을 자세히 만들고 더구나 경제적인 기초를 세워 놓았다.
그리하여 <백장청규(百丈清規)>는 지금까지 중국•한국•일본 할것없이 불교 교단의 기본 법칙이 되고 있다.

또한 공부하는 이는 물론 누구나 반드시 노동할 것을 가르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하여 죽을 때까지 날마다 몸소 일하였다.
제자들이 보기에 하도 딱해서 하루는 일하는 연장을 감추었더니 그 날은 굶었다고 한다.

95세로써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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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
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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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120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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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雲門) : ( ? – 949 ) 법명은 문언(文偃), 속성은 장(張)씨。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처음에는 율종(律宗)을 숭상하였다.
목주(睦州)에 갔더니, 진 존숙(陳尊宿)이 그의 멱살을 잡고 『말해라 !  말해라!』하는데 대답하지 못하므로 문 밖으로 밀쳐서 내쫓고 문을 닫을 때, 그의 발이 문틈에 끼어서 발가락이 끊어졌다。그 바람에 깨쳤다.

그 뒤에 설봉 의존(雪峰義存) 화상에게 가서 더욱 크게 깨쳐 그의 법을 이었다. 운문산 광태선원(光泰禪院)에서 오래 교화하니, 입실(入室)한 제자가 88인이나 있었다.

어떤 날 설법하기를,
『빛을 꿰뚫지 못하는 데 두 가지 병이 있다.
온갖 곳에 밝지 못하고 눈앞에 무엇이 있는 것이 한 가지 병이고,
가령 온갖 법이 빈 이치를 뚫어 알았더라도 어렴풋이 무엇이 있는 듯한 것은 또한 완전히 뚫은 것이 못된다.

법신을 뚫는데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는데,
법신 경계에까지 갔더라도 법에 대한 국집(法執)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나」의 소견이 아직도 가시어지지 못하여 법신 갓에 머물러 서게 되는 것이 한 가지 병이고,
설사 법신을 꿰뚫어 나갔다 하더라도 자세히 검찰하여 본다면, 어떤 숨 기운(氣息)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그것이 또한 병이니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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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스님 약력2014. 1. 6. 14:03

보제존자(普濟尊者), 대혜종고(大慧宗杲), 완산정응(皖山正凝), 몽산(蒙山), 박산무이선사(博山無異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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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법명:혜근(惠勤) 호:나옹(懶翁) 당호:강월헌(江月軒) 속성:아(牙),영해(寧海)사람.

20세 때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어른들께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비통한 생각을 품고, 공덕산 묘적암에 가서 요연(了然)에게 중이 되다.

요연「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
혜근「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거니와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
스님은 그곳을 떠나서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좌선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

중국 원나라 북경(北京)에서 지공(指空)을 뵙고 계오(契悟)한 바 있었고, 2년 동안 공부하다.
다시 남쪽으로 가서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서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다.
복룡산에서 천암(千巖)의 선실(禪室)에 들어갔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찾은 뒤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의 법의와 불자를 전해 받다.

칙명으로 대도(大都)의 광제선사에 있다가 1358년 귀국하여 가는 곳마다 법을 설하고 1360년 오대산에 들어가다。 공민왕이 청하여 내전에서 법요를 듣고, 신광사에 있게 하다.
1371년 왕사가 되고, 대조계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禪教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다.
뒤에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여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낙성(落成)하다.

1376(고려 우왕 2년) 왕명을 받아 밀양의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入寂).
세수(世壽):57, 법랍:38, 시호:선각(禪覺).
이색(李穡)이 글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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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종고(大慧宗杲) : (1089 – 1163) 경산 종고(徑山宗杲).
법명은 종고,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묘희(妙喜)이며, 속성은 해(奚)씨.
안휘성(安徽省)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에서 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선주의 명교(明敎)선사에게 가서, 깨친 바가 있은 뒤, 조동종의 장로들께 많이 찾아다니다가 변경(汴京)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원오선사의 법을 받아 가지고, 경산의 능인사(能仁寺)에서 크게 교화하였다.
그 때 나라의 정사를 비평하였다는 혐의로, 형주(衡州)에 귀양갔다가 또 얼마 뒤에 매주(梅州)로 옮기게 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백여 명의 제자 가운데 반수 이상이 그 지방의 풍토병으로 죽었다.

17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경산과 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廣利寺)와 전당(錢塘)의 영지사(靈芝寺), 건강(建康)의 보령사(保寧寺) 같은 여러 곳에 있다가, 송나라 효종(孝宗) 융흥(隆興) 1년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대혜보각 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5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등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0여 명이 있었다.

그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애쓴 것은 천동 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부수어 버리고 활구(活句)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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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정응(皖山正凝) : 원나라 스님。 생몰연대 알 수 없음.
서주대호(舒州大湖) 이(李)씨.

17세에 부모를 여의고 황주(黃州) 쌍천영(雙泉瑛) 선사에 출가. 무명성(無明性) 선사를 배알하고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다시 민(閩)현에 들어가 고봉덕수(孤峰德秀) 선사에 의지하여 반년 만에 비로소 입실(入室)。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후에 고산(鼓山)에서 법을 펴니 대중이 四千에 이르렀다.
세수 84.

몽산에게 법을 전했으며 어록 몇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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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蒙山) : 원(元)나라 스님, 생몰 연대 알 수 없음.
이름은 덕이(德異), 강서성(江西省) 여릉도(廬陵道) 시양 고안현(時陽高安縣)에서 났다.

그 고향 시양이 당나라 때에는 균주(筠州)였기 때문에 고균(古筠) 비구라고 한 일도 있었고,
여릉도 몽산에 있었으므로 몽산화상이라 하며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 전산(殿山)에 있었으므로 전산화상이라기도 하고,
휴휴암(休休庵)에 있었으므로 휴휴암주라기도 하였다.

고산(鼓山)의 완산(皖山) 정응선사(正凝禪師)의 법을 이었다.

그의 교화한 시기는 원나라 세조(世祖)때이며, 우리 고려의 충렬왕 때이다.

그래서 고려의 고승들과 문필의 거래가 많았고, 그의 저서 가운데 <법어약록(法語略錄)> <수심결(修心訣)>등은 이조 중엽에 우리 글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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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무이선사(博山無異禪師) : (1575~1630) 조동종스님.
법명은 원래(元來), 호 무이(無異), 여주 서성(廬州舒城)사람. 속성은 사씨(沙氏).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 만력 3년생.

16세에 오대산 정암통(靜菴通)화상에게 삭발.
처음에 공관(空觀)을 닦다가 수창혜경(壽昌惠經)에게서 깨쳤다.

만력 30년 박산에 주(住)했는데 그 때 28세。 다음으로 민현(閩縣)의 동암(董巖), 대앙(大仰)의 고산(鼓山)에 주(住)하고 숭정(崇禎) 2년 천계(天界)에 주(住)했다.

의종(毅宗) 황제 숭정 3년(1630년)에 입적했는데 임종시에 역력분명(歷歷分明) 넉 자를 썼다.
세수(世壽)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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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스님 약력2013. 12. 2. 11:07

가섭(迦葉), 아난존자(阿難尊者), 달마대사(達摩大師), 혜가(慧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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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迦葉) : [범] Mahakasyapa.
음을 따라 마하가섭(摩訶迦葉)이라고도 하며, 뜻으로는 대음광(大飮光)• 대구씨(大龜氏)라 번역한다。Kasyapa는 성(姓)이고, maha는 크다는 말이니, 다섯 가섭 가운데 맏이를 뜻한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한 분.
본래는 바라문으로 석존이 성도한 지 삼 년쯤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는 제자 가운데서도 의•식•주를 극도로 검박하게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두타행(頭陀行)이 제일이었으며 부처님의 의발(衣鉢)을 받은 상수 제자(上首弟子)로서 부처님이 입멸한 뒤, 오백 아라한을 데리고 제일 결집(第一結集)을 하면서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부처님 이후의 법통(法統)을 말할 때에는 그가 초조(初祖)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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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존자(阿難尊者) : [범] Ananda.
음을 따라 아난타(阿難陀)로 쓰고, 줄여서 아난(阿難)이라 하며, 뜻으로 번역하여 환희(歡喜) 또는 경희(慶喜)라고 하니, 「기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사촌이며 조달(調達)의 친 동생이다.

부처님 성도하시던 날 밤에 났고, 스물 다섯 살에 출가하여 25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侍者)로 있었으며 십대제자 가운데서도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그 총명이 놀라웠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가섭존자의 주관으로 왕사성 밖에 있는 필발라굴(畢鉢羅窟 Vaibhara)에서 오백 성승(聖僧)이 모여 경전을 결집하는데 아난존자는 그 때까지 아직 성과(聖果)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묻기를 『부처님께서 사형(師兄)에게 법을 전하실 때에 금란가사(金襴袈裟) 말고 따로 무엇을 전하신 것이 있읍니까?』『아난아』『예?』『문 밖에 찰간(刹竿)대를 꺾어 버려라! 』하였다.

그러나 아난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그리하여 용맹 정진 사흘 만에야 비로소 크게 깨치고 나서, 회의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다 외니 하나도 틀림없음을 대중이 증명하여 경의 결집이 완성된 것이다.

그 후 가섭존자로부터 법통(法統)을 받았다가 상나화수(商那和修)에게 법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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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達摩大師)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

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

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
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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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가(慧可) : (487~593) 중국 선종의 제2조.이름은 신광(神光).
속성은 희(姫). 낙양(洛陽)사람으로 낙양 향산(香山)에서 출가함.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불교와 유교를 배우고, 32세에 향산으로 돌아와 8년 간 수선(修禪)하였다.

40세에 숭산 소림사에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찾아가서 눈 속에 서서 가르침을 구하였으나 허락치 않으므로, 드디어 왼팔을 끊어 그 굳은 뜻을 보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크게 깨달았음.

552년 제자 승찬(僧璨)에게 법을 전하고, 업도에 34년을 머물다 뒤에 관성현 광구사에서 『열반경』을 강하여 여러 사람의 신앙이 높아지니 변화(辨和)의 참소로 수나라 개황 13년 적중간(翟仲侃)에 의해 처형됨.

나이 107. 당 태조가 정종보각대사(正宗普覺大師)라 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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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스님 약력2013. 11. 20. 13:59

육조혜능(六祖慧能), 남악회양(南嶽懷讓), 하택신회(荷澤神會), 임제의현(臨濟義玄), 규봉종밀(圭峰宗密)

*육조(六祖) : (638 ~ 713) 육조혜능(六祖慧能).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 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24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麈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麈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40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76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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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선사(懷讓禪師) : (677 ~ 744) 남악회양(南嶽懷讓).
섬서성(陝西省) 흥안부(興安府) 두(杜)씨 집에서 났다.
15살에 출가하여 육조의 법회에 가서 8년 만에야 견성하여 그 법을 받고, 전후 15년 동안 모시고 지내다가 남악(南嶽) 반야사 관음대(般若寺觀音臺)에서 교화하니, 그 법을 받은 제자가 아홉 분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의 본여선사(本如禪師)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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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회선사(神會禪師) : (686 ~ 760) 하택신회(荷澤神會) 또는 하택선사(荷澤禪師)라고도 한다.
호북성(湖北省) 양양부(襄陽府) 고(高)씨의 집에서 났다。어려서 유교(儒敎)와 도교(道敎)의 글에 정통하였는데 <후한서(後漢書)>를 보다가 불교의 묘한 이치를 알고 출가하여 경을 많이 숭상하였다.

처음엔 형주(荊州)의 옥천사(玉泉寺)에 가서 삼 년 동안이나 신수(神秀)대사를 모시고 있다가, 그가 칙천 황후(則天皇后)의 청을 받고 서울로 가게 되자 그의 지시로 육조의 법회로 갔다。그 때의 나이가 열 세 살이라기도 하고 마흔 넷이었다고도한다.

육조의 법을 받은 뒤에 남양(南陽)의 용흥사(龍興寺)와 낙양(洛陽)의 하택사에 있으면서, 육조의 종지를 크게 드날려서 신수의 종지가 쓰러지게 되었다.

어사(御史) 노혁(盧奕)의 무고(誣告)로 여러 해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에는 군비와 군수품을 많이 모집하여 나라에 바쳤다.

저술로는 <현종기(顯宗記)> 1권, <신회어록(神會語錄)> 3권, <하택미결(荷澤微決)> 1권이 있다.

그의 문하에 유능한 이가 많아서 한동안(150년 가량) 하택종이 큰 세력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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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臨濟) : ( ? – 867) 임제의현(臨濟義玄).
속성은 형(荊)씨이고 이름은 의현(義玄)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강당에서 경을 연구하다가 황벽(黃檗) 희운선사(希運禪師)의 법회에 가서 3년 동안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도 묻지 못하고 지냈는데, 제일좌(第一座)의 지도를 받아 『어떤 것이 불법의 똑바른 참뜻입니까?』하고 물었더니, 황벽은 다짜고짜로 몽둥이로 한바탕 때려 주었다。제일좌의 권에 따라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한 가지 말을 물어서 똑같이 매만 실컷 맞았다。그러나 그 맞은 까닭을 아지 못할 뿐 아니라, 그곳에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그곳을 떠나려는데 황벽의 지시로 대우(大愚)화상의 회상으로 갔다.

『황벽이 요사이 무슨 법문이 있던가?』하고 대우가 물었다。세 번이나 얻어맞은 사연을 자세히 말하고, 무슨 허물이 있어서 그처럼 때리는지 모르겠더라고 말하였다。대우는 『허! 황벽이 그처럼 너 때문에 애썼는데 허물을 찾고 있단 말이냐?』하는 데서 크게 깨치고는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군』하였다。대우가 『아까는 허물을 찾던 놈이 지금 와서 무슨 큰소리 하느냐?』한즉, 주먹으로 대우의 옆구리를 세 번이나 쥐어 박았다.

그리고 황벽에게 되돌아와서 그 법통을 잇고, 고향인 하북성(河北省) 진주(鎭州)의 임제원(臨濟院)에서 주로 간화선으로써 크게 교화하였다。그의 법을 이은 제자가 스물 두 분이나 있었다。그리하여 그는 임제종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당나라 의종(毅宗) 함통(咸通) 8년에 입적하였다。저서로는 <임제혜조선사어록(臨濟慧照禪師語錄)>이 한 권 있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는 신라의 지리산 화상도 있었다。그의 밑으로 십 구 세(世) 되는 평산 처림(平山處林)의 법을 고려의 나옹왕사(懶翁王師)가 받아 왔고, 또 같은 임제 십 구 세 석옥 청공(石屋清珙)의 법을 태고국사(太古國師)가 받아 와서, 이조 시대의 우리 나라 불교는 온전히 임제종의 법맥(法脈)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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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봉(圭峰) : (780 – 841) 법명은 종밀(宗密), 규봉종밀(圭峰宗密), 속성은 하(何)씨
사천성(四川省) 순경부(順慶府) 서충현(西充縣)에서 났다.
젊어서 유교를 배웠고, 스물 여덟에 과거보러 가다가 수주(遂州) 도원선사(道圓禪師)를 만나 출가하여 참선하였다。어떤 날 신도의 재(齋)에 가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깨쳤다.

그 뒤 징관(澄觀)에게서 <화엄경>의 깊은 이치를 받아 가져 화엄종의 오조(五祖)가 되었으나, 항상 선(禪)과 교(敎)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 종남산 규봉(終南山圭峰)에 많이 있었다.

그의 저술은 <원각경대소(圓覺經大疏)> 3권과 그 <석의초(釋義抄)> 13권, <화엄경윤관(華嚴經綸貫)> 15권,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2권, <기신론소(起信論疏)> 4권, <원각도량수증의(圓覺道場修證儀)> 18권 등 모두 200여 권이 있다.

당나라 회창(會昌) 1년에 62세로써 입적하였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