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스님 약력2014. 11. 16. 11:54
청원행사(青原行思), 동산양개(洞山良价), 조산탐장(曹山耽章), 자명초원(慈明楚圓), 현사사비(玄沙師備), 설봉의존(雪峰義存), 부휴선수(浮休善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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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행사(青原行思) : (? – 740) 속성 유(劉)씨。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廬陵縣)에서 났다。어려서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의 인가를 받고, 대중의 상수(上首)로 있었다.
그리하여 육조 문하의 장로(長老)이더니, 뒤에 그 고향인 길주(吉州) 청원산 정거사(青原山靜居寺)에서 교화하였는데, 육조가 열반한 뒤에 학자들이 그 곳에 많이 모였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8년에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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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양개(洞山良价) : (807 – 869) 속성은 유(兪)씨。절강성 소흥부(紹興府) 회계(會稽)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배우다가 눈•귀•코가 없다(無眼耳鼻舌身意)는 뜻을 캐어 물었더니 그 은사가 대답하지 못하고, 오예산(五洩山)의 영묵(靈默)선사에게 인도하여 참선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운암에게 묻기를 『혜충(慧忠)국사의 말에 무정(無情=목숨 없는 것)이 설법한다 하였는데, 무정의 설법은 어떤 이가 듣습니까?』
『무정의 설법을 무정이 듣느니라』
『화상도 들으십니까?』
『내가 듣는다면 너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하는 데서 깨친 바 있었고,

운암의 임종 법문에 대하여 물을 건너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비로소 크게 깨쳐 운암의 참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송을 짓기를,

아예 그를 딸치 말게 더욱더욱 멀어 가네 (切忌從他覔  迢迢與我疎)
내가 이제 홀로 가니 간 곳마다 그를 보네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
그는 이제 바로 난데 나는 지금 그 아닐쎄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이와 같이 알고라야 참 이치에 맞게 되리 (應須恁麼會  方得契如如)

그 뒤에 강서성 여릉도(廬陵道)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동산의 보리원(普利院)에서 교화하여 법을 받은 제자가 26분이 있었다。그 가운데는 신라의 금장(金藏)화상이 있었고, 동산의 제이세(第二世) 소산 광인(疎山匡仁)에게서 신라의 명조안(明照安)과 동진(洞眞)이 나왔다.

당나라 함통(咸通) 10년에 상당 설법하고 대중을 하직한 뒤 입적 하였는데, 모두 통곡하므로 다시 깨어나서 이렛동안 설법하고 앉아서 갔다。그 때 나이 63.
그를 종조(宗祖)로 삼는 조동종은 지금까지 중국과 일본에 융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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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 탐장(曹山耽章) : (839 – 901) 법명은 본적(本寂)이며, 탐장은 자(字)라기도 하고 이름이라기도 한다。속성은 황(黃)씨。복건성 복주부(福州府) 고전현(古田縣)에서 났다.

어려서 유학(儒學)에 정통하였고, 19세에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가지고, 동산에 가서 그 법을 받고 무주(撫州)의 길수(吉水)에서 교화하였다. 조계의 육조를 사모하는 뜻으로 그 산 이름을 조산이라 고쳤고, 그 뒤 함통 8년 전후 도둑의 난을 만나 의황현(宜黃縣)의 하옥산(荷玉山)으로 옮겼다.

동산의 오위(五位) 법문은 그가 완성하여 총림의 표준을 만들고, 그 종지를 크게 떨쳤다。그러나 그의 법계(法系)는 사대(四代) 만에 끊어졌다.
당나라 소종(昭宗) 천복(天復) 1년에 63세로써 입적하였다。저서로 <어록(語錄)>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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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 초원(慈明楚圓) : (987 – 1040) 속성은 이(李)씨。광서성(廣西省) 계림부(桂林府) 전주(全州)에서 났다.
22세에 출가하여 멀리 분양 선소(汾陽善昭)선사의 회상에 갔었다.
분양은 욕설과 세속의 더러운 말만 할 뿐이므로 하루는 정성을 다하여 간 하였더니, 크게 성내어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하고 내쫓았다。초원이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데, 분양이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그 바람에 크게 깨쳤다.

뒤에 석상산 숭승사(石霜山崇勝寺)와 담주 흥화사(潭州興化寺) 같은 여러 곳에서 교화하니, 법을 이은 제자가 50인이나 되었다。자명(慈明)은 54세로써 입적한 뒤의 시호(諡號)이고, 석상화상(石霜和尙)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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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사 사비(玄沙師備) : (835 – 908) 속성은 사(謝)씨。복건성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젊어서는 낚시질을 좋아하였는데, 30세에 출가하여 공부하는 길을 얻어 가지고는 고향에 돌아가서 음식을 겨우 목숨이 붙어 있을 만큼 먹어 가면서, 바위 밑과 산꼭대기에서 늘 좌선(坐禪)하였다.

설봉 화상이 그에게 선지식을 찾아보라고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혼자 공부하여 깨친 바 있었고, 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크게 깨쳤다.


설봉의 법을 이어 가지고, 매계장(梅鷄場) 보응원(普應院)에서 교화하다가 얼마 안 가서 복주의 현사원에 옮기었다。후량(後梁) 태조(太祖) 개평(開平) 2년에 74세로써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은 <현사어록(玄沙語錄)> 3권, <현사광록(玄沙廣錄)> 3권이 있고, 그의 제자 천룡 중기(天龍重機)에게서 고려의 설악 영광(雪岳令光)선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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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 의존(雪峰義存) : (822 – 908) 속성은 증(曾)씨。복건성 천주부 남안현에서 여러 대로 불법을 진실하게 믿어 오는 집에서 났다.

나면서부터 종소리를 듣거나 불전에서 쓰는 물건을 보게 되면 곧 즐거워하는 표정이 나타났고, 파 마늘 냄새를 꺼리었다.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옥간사(玉澗寺)에 갔다가 그 길로 집에 오지 않고 중이 되었다.


참선을 시작한 뒤에 먼저 염관(鹽官)에 갔고, 투자(投子)에 세 번, 동산에 아홉 번 갔으나 얻은 바가 넉넉지 못하였는데, 덕산에게 법을 묻다가 한 방망이 맞고서 깨쳤으나 아직 훤칠하지 못하다가, 그 사형 암두(巖頭)가 크게 꾸짖는 데서 비로소 크게 깨쳤다.


뒤에 복주(福州)의 상골산(象骨山)에 들어가서 그 이름을 설봉산으로 고치고 40년 가까이 교화하니, 모인 대중이 어느 때나 1500명을 넘었고, 법을 이은 제자가 56인이 있었다.

그 중에는 신라의 대무위(大無爲)선사와 고려의 현눌(玄訥)과 영조(靈照)선사가 있었고, 그 제자 장경 혜릉(長慶慧稜)에게서 신라의 구산(龜山)화상이 나왔다。후량(後梁) 태조(太祖) 2년에 87세로써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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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휴(浮休) ; (1543-1615) 조선시대의 스님. 전북 남원 출신. 법명은 선수(善修). 호는 부휴(浮休).

20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신명(信明)에게 출가하고, 후에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덕유산,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에 머물고,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입적함.

저서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