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숯쟁이 영감 /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 / 모든 현상은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 생사는 본래 없다 / 이만할 때 자기를 밝히라.
〇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〇불법은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〇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33)—1981년 1월 첫째일요법회 (용133)
(1/3) 약 21분.
(2/3) 약 20분.
(3/3) 약 8분.
(1/3)----------------
인생이 과거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세계 40억 인구가 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오장육부가 다 있지만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하게 닮은 사람은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각기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각기 생각한 바가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받음이 또한 다르다 이 말씀이여.
누구는 부자로 살고, 누구는 명예와 권리가 있고, 누구는 힘이 세고,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병약하고,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불량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차(差)가 있지만 이것이 다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다.
일신상만 그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형과 동생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이지, 우연히 아무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이 그러한 관계가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옛날에 정승(政丞)이, 아주 학식도 높고 경륜도 있고 인격도 훌륭하고 한 정승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의 부인도 남편 못지않게 어질고 착하고 모든 부덕(婦德)을 원만히 갖추었드라.
아들도 여러 형제 두고 살림도 풍족하고 그러한 아주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부인이 간 곳이 없어졌다. 혹 친정에를 갔는가, 이웃을 갔는가, 갈만한 곳을 다 연락을 해서 알아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래서 그 정승이 정승을 내놓고 그 아내를 찾으러 나섰다. 팔도를 다니면서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데, 마치 강원도 지방을 가 가지고 어느 산중을 지내다가 보니 자기 아내와 비슷한 사람이 가마니를 이고 어느 영감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 쫓아가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틀림없이 자기 아내여.
"여보, 당신이 아무개 아니요?"
"예, 기요"
그런데 왜 "어찌된 일이냐?"하고 물어보니까,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나가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고.
"저 앞에 간 사람은 누구냐?"고.
"새로 만나 영감"이라고.
"그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무엇이요?"
"숯 가마니요"
"당신이 미쳤느냐"고 붙들고 낙루(落淚)를 하는데, 부인은 별로 울지도 않고 멀쩡해 갖고 섰다 그말이여. 저만큼 숯쟁이 영감이 가다가 암만 기다려도 안 오니까 지게를 거기다 받쳐 놓고.
"올라가자"
"싫다"
"자식도 보고 싶지 않냐?"
"안 보고 싶다"
"저 숯쟁이 영감이 무엇이 좋아서 나를 싫다 하느냐?"
"나도 모르겠소"
아! 이래 가지고 영감은 울고불고해도 할멈은 별로 그렇게 슬퍼한 기색도 없이 자꾸 숯쟁이 영감만 따라갈려고 한다 그말이여. 기가 맥혀서. 강제로 끌고갈 수도 없고, 본인이 싫다는데야 별도리가 없어.
그래서 참 그 영감은 그 숯쟁이 영감한테 마누라를 꼼짝없이 뺏기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건 도대체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도 없고, 자기 권리로 숯쟁이 영감을 권력으로 눌러서 뺏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길로 한 발 두 발 걸어서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들어 갔어. 찾아들어 가 가지고 큰스님을 만나 가지고 일장 설화(一場說話)를 다 얘기를 했어.
"어째서 나와 반평생을 같이 사는 동안에 싸워 본 일도 없고, 피차 서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바도 없고, 이 세상에 임금님 내 놓고는 내가 이 세상에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나 이상 좋은 영감이 없을 텐데 남편이 없을 텐데, 어째서 나를 버리고 그 숯쟁이 영감을 갔는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으면 참선을 해라"
그래 가지고 참선(參禪)을 시작을 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뭣고?'를 하는데 밥도 먹게 되면 먹고 말게 되면 말고, 잠도 자게 되면 정 고단하면 조금 자고 벌떡 일어나서 공부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정말 그 큰스님의 지도하에 목숨을 바쳐서 도를, 참선을 했습니다.
참선이란 것이 꼭—'내가 마누라와의 관계가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참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승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해 볼 건 다해 보고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고, 오직 생짜로 마누라한테 내소박을 맞고, 숯쟁이 영감한테 가버린 그 이유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 궁금하고 기가 맥혀서 '이것은 기어코 내가 이것은 알고야만 말겠다!' 그래 가지고 죽기로 맹세를 하고 정진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을 먹어도 짜고 싱겁고 매운 중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중도 모르고 제절로 속에서 의심이 나는데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소지를 하면서도 '이뭣고?'
누가 자기 보고 '잘하네, 못하네' 무슨 그런 시비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속에서 자동으로 분심(憤心)이 나고 의심이 나는데, 옆에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했어. 간절한 의심이 속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데 '이뭣고?' 뿐이다.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하다가, 잠도 안 오고 배고픈 중도 모르고 의단이 독로해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해 가지고 툭 터졌는데 아! 자기 전생(前生)이 환히 다 보인다 그말이여.
이 말을 듣고서 '옳지! 참선을 하면 전생을 환히 아는구나'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아니됩니다.
이것은 인과(因果)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단이 독로해야 한다고 하는 것만을 얘기한 것이지, '아! 견성(見性)을 하면 전생 일을 훤히 안다, 전생 일을 아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다' 이렇게 비약을, 비약적으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전생에 과연 어떻게 해서 마누라를 만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니까 환하니 보이는데, 전생에 자기는 내나 그 오대산에서 공부하던 선객(禪客) 스님인데.
그 마누라는 누구인고 하고 보니까, 선방에 스님네들은 겨울에는 그 어한(禦寒)을 하기 위해서 솜을 넣어서 누벼 가지고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그것이 또 떨어지면 헝겊을 거듭거듭 대 가지고 마치 따오기를 새를 갖다가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더덩캥이 누데기를 입고 사는데, 겨울에는 추워서 빨 수도 없고 한 해 겨울을 입고 그 이듬해사 그 누데기를 빨게 됩니다.
요새는 이[蝨]가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약을 할려고 해도 구경을 할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이가 아주 자주자주 옷을 갈아입고 그런다 해도 이가 전혀 없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누데기 같은 것을 한 해 겨울을 입고 보면 누데기 안에 이가 뚱실뚱실한 황소만씩한 이로부터서 서카래까지 수없이 더글더글합니다.
그 누데기 속에 이가 한 마리가 크기 시작하는데 주먹탱이 만큼 컸는가, 가려우면 그놈을 잡아내 가지고 손바닥에다가 이렇게 굴려 보기도 하고 또 씨름도 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집어넣고.
그놈을 잡아서 버리면은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것 같고, 차마 그래서 도로 집어넣다가 심심하면 꺼내서 같이 또 놀고 집어넣고 그렇게 한 해 겨울을 지냈는데, 그래가지고 해동(解冬)이 되아서 이제 누데기를 빨게 되았다.
그냥 마구잽이 빨면 툭 터져서 죽으면 안돼았고, 그래도 한 해 겨울을 같이 지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아! 그 이를 어떻게 처리를 할까?
옷을 갈아입고 다시 또 몸에다 넣자니 그렇고, 그러던 차에 마치 개를 만났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 개한테 이를 갖다가 개 몸뚱이에다 요렇게 살짝 넣어 주었다 그말이여.
그 이가 누구냐 하면은 자기 할머니(부인)였었다. 한 해 겨울을 따뜻한 자기 몸에서 함께 지냈으니 그 인연으로 그다음 생에 마누라가 되어가지고 자기와 일심동체가 되어가지고 반평생을 같이 살았어. 그러면 그 개가 누구냐 하면은 숯쟁이 영감이다.
이를 잡어서 개한테 넣어 줬는데, 그 자기 몸에서 잡아가지고 개한테 넘겨줄 그때가 돌아오니까 자기를 버리고—부인도 모르지, 모르고서 그 개한테 건너간 그 도수가 딱 돌아오니까 정승 영감을 버리고 정처 없이 가출을 해가지고 걸어가고 걸어가다 얻어먹고 얻어먹다 걸어가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그 숯쟁이 영감, 개가 숯쟁이 영감으로 태어났는데 그 숯쟁이 영감을 만나자 처음 만났는데 그냥 첫눈에 눈이 딱! 맞어 버렸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까닭도 없이 그 숯쟁이 영감을 한눈에 딱! 보자마자 '이게 바로 내 영감이다'
숯쟁이 영감, 매일 숯을 과서, 숯을 갖다가 구워가지고 그놈을 팔아서 30리 50리를 걸어서 강릉장에 가서 팔고 그놈을 팔아 가지고 또 잡곡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그놈을 끓여 먹고 사는 홀애비 신세인데 옷도 참 말로 할 수가 없고, 숯쟁이 영감이 숯가루로 화장을 하고 사는데 수염허며 무엇이 볼 것이 있겠느냐 그말이여. 볼수락 정 떨어지게 생겼겠지만 전생의 인연으로 정승 영감 백보다 낫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숯쟁이 영감이야 정승 부인이 자기를 찾아왔는데, 자기가 정승 부인이라고는 안 하지만 벌써 정승 부인이면 밖으로 풍기는 그 귀인의 자태가 자르르 하고.
"여기서 영감님하고 영감님 밥도 해 드리고 여기서 같이 살 수 없을까요?"
"아이구, 그 말씀을, 어디 그런 말씀을 다 하시느냐?"고, "여기서 어떻게 사실 것이냐?"고, "안 된다"
"아니 상관이 없다"고, "여기서 같이 살게만 해 달라"고.
너무 자기하고 그 부인하고 비교를 해 보니 비교가 되지를 않고, 도대체 황감(惶感)하고 죄송해서 '아! 그러시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렇지만 호박이 넝쿨째 떨어져서 속으로야 기가 맥히게 좋지만 '안 된다'해도 뭐 자기가 탁 걷어붙이고 나아가서 밥을 하고.
그날 저녁에, 방은 쪼그만한 됫박만한 방 하나 밖인데 부인이 몇백 리를 걸어서 걸어서 와가지고 꾸벅꾸벅 졸다가 쓰러져 자는데, 영감은 그 옆에 잘 수도 없고 윗목에 가서 혼자 쪼그리고 앉았다가 '에이, 나도 모르겠다'해 같이 자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부부간이 되었는데.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부부간에 만나는 인연이 반드시 과거에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만나고, 금생에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 이런 것이여.
여러분 가운데는 부부간에 정분이 기가맥히게 좋은 분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좋다가 중간에 쪼금 그 냉각기가 있다가 또 나중에 또다시 좋기도 하고 또 중간에 헤어지기도 하고. 영화 같은 데 보면 헤어졌다 또 다시 만나기도 하고.
참,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기구한 것인데, 그것이 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여. 반드시 아까 숯쟁이 영감과 같은, 그보다도 더 이상한 묘한 그러한 인연이 얽히고설켜서 금생에 이렇게 만나는 것이여.(25분25초~46분39초)
(2/3)----------------
일생 동안을 잘 살아도 한마당 꿈에 지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잘 못산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한바탕 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꿈에 주먹탱이 만한 보석을 얻어 봤댔자 꿈 깨 버리면 간 곳이 없고, 꿈에 무서운 호랭이나 독사한테 쫓겨서 진일 켜 봤댔자 눈만 딱! 떠 버리면 호랭이도 간 곳이 없고 독사도 간 곳이 없습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꿈에 그런 호랭이한테 쫓긴다던지 독사한테 쫓길 때 그 무섭고 겁이 난 것이 말로 할 수 없는데, 아무리 도망갈려고 해도 발은 제자리에서만 동동거리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큰소리가 나지를 않고 그리하다가, 얼마 동안을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눈을 떠 보면 전신이 땀이 젖어 갖고 있고 이러한 꿈을 꾸는 수가 있었는데,
참선을 한 뒤로는 그런 어려운 그런 무서운 경지를 딱 닥치면 금방 탁! 화두(話頭)를 들면서 눈이 뚝 떠져 버린다 말이여. 그래서 그런 무서운 꿈을 잘 꾸지도 않지만 혹 꾸더라도 금방 내가 '에이, 이까짓 것'하고 탁! 정신을 차려버리면 눈이 뚝 떠져 버리는 그런 경험을 가끔 하게 되는데.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섭건 괴롭건, 기쁘건 행복하건 간에 엄격히 말하면 인생 칠십이라고 해 봤자 잠깐 동안 꾸는 봄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이여.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도 눈떠 버리면 허망한 것이고, 괴롭다 하더라도 무섭다 하더라도 딱! 눈떠 버리면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무서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우리는 인생 어피차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에 의탁을 해서 이 몸을 받아 낳고 일평생을 길건 짧건 좋건 궂건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꿈은 꿈이로되 분명 현실은 또 있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꿈이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호랭이를 만나면 무섭고 독사를 만나면 무섭고, 보석이나 금덩어리를 주으면 기쁘고 그것을 빼앗기면 아깝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문제가 하나도 아니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인생에 명예와 권리와 지위와 부귀공명이 그것이 허망한 것이고 꿈이라 하지만, 인생으로써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되고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현실을 내놓고 꿈이 따로 없고, 꿈을 내놓고 현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한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세상은 무상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다. 다 소용없는 것이다, 다 버려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그 가운데 그것이 허망한 줄을 알아야지, '허망한 것이니까 다 소용없다' 이러한 방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올바른 불자(佛子)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충실하다고 해서 허망한 줄을 모르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거기에 얽매이면 그 사람은 또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허망한 줄만 알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아빠로서 엄마로서 국민으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하지 아니한다든지, 그것에 충실한답시고 거기에 완전히 얽매어 가지고 참으로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른다던지, 이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이지만 두 사람이 다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 별, 그리고 산과 흐르는 물, 꽃과 잎, 모든 동물,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온갖 것이 이 두두물물이—이것을 불교의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하는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일체법이라 하는데, 이 삼라만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생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이것 자체가 어데서 왔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여의고 우리의 자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떠나서 우리의 참마음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번뇌와 망상이 우리의 진여자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우리의 자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저 출렁거리는 산더미 같은 바다에 파도, 크고 작은 파도가 물을 떠나서 파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는 물이 움직여서 파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파도가 바로 물인 것입니다. 파도를 버리고서 물을 찾는다면 우리는 물을 앞에다 두고 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웬수 같은 자식, 웬수 같은 남편, 웬수 같은 아내, 웬수 같은 형, 웬수 같은 동생, 웬수 같은 친구, 웬수 같은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어째서 훌륭한 부모, 좋은 자식, 좋은 형, 좋은 동생,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웬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한탄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온전히 이유는 그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
한 번 지어 놓은 인연(因緣)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기가 지어 놓은 인과(因果)는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나, 온갖 인과에 근원을 깨달라서 체달(體達)을 하면 제절로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자기에게 자기가 지어서 받은 인과, 윤회 생사윤회를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녹음 끊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병 난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전거 구사리 같은 것이 이리저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눈병을 깨끗이 치료를 한 뒤에 보면 아무것도 허공에는 원래로 없었던 것이여.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만 보였지 눈병이 나 있을 때나, 눈병을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보인 생사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생사해탈, 생사해탈' 말을 했지만,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의 언어를 빌려서 그러한 표현을 방편(方便)으로 쓰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리가 높고, 아무리 학문이 높고, 아무리 기운이 세고,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이 참나를 깨닫는 일만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재산과 모든 힘과 모든 학식과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정승이라 하드라도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내, 얌전한 아내, 일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백년을 해로(偕老)할 줄 알았다가 뜻밖에 간 곳이 없으니, 삼천리 강토를 한 손에 움켜쥐고 호령을 했던 정승도 사랑하는 아내가 간 곳이 없어지자 살맛이 없어지고 정승도 다 팽개치고 그 아내를 찾어 나섰습니다.
거지와 마찬가지인 숯쟁이 홀애비 영감한테 정승에 부인을 빼앗길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재산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명예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46분41초~66분41초)
(3/3)----------------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라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라.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두상광음(頭上光陰)이 전두비(轉頭飛)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이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히라. 이때, 이때란 어느 때냐?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건강할 때—바쁘다 핑계 대지 말고, 아직은 시간이 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아들딸 키워 놓고 장가 보내 놓고 이러한 등등 핑계를 대지 말고. '몸이 건강치 못하니까 병을 낫은 다음에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좀 더 부자가 되어가지고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이만한 처지에서 바쁘면 바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당장 내일 일을 모르고 밤새 일을 모르고 한 시간 뒷일을 모르는 백지 한 장 밖을 내다보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 무엇을 믿고 뒤로 미루겠는가 이 말씀이여.
머리 위에 광음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시간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장소는 앉아 있을 때는 바로 그 자리가, 서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걸어갈 때는 그곳이, 차를 탈 때는 바로 그 차 안이, 변소에 앉았을 때는 변소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감옥이, 병원에 있는 사람은 병원이 바로 그때 그 자리가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바로 부처님 품안이요, 부처님 손바닥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날아가는 새 소리, 비행기 소리,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까마귀 소리, 개 짖는 소리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고대로 전부 부처님에 설법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 나에게 억울하게 욕하는 소리, 부처님에 설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여러분은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 수행인이요, 불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제부터서는 원망할 남편도 없고, 원망할 아내도 없고, 미워할 이웃도 없고 웬수도 없습니다. 어제까지 미웠던 사람도 이제부터서는 미워할 거리가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는 누구도 부처님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웬수도 이제부터서는 나로 하여금 참나를 깨닫게 해 주는 도반(道伴)이요, 관세음보살이요,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의 묘한 진리가 위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이 말씀을 믿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후생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입니다.(66분47초~1시간14분37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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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정승(政丞 정사 정/도울·정승 승) ;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행정부의 최고 기관)의 수반(首班 행정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통틀어 이르는 말.
*부덕(婦德 아내·여자 부/덕·은혜·선행·행위 덕) ; 부녀자(婦女子 결혼한 여자와 성숙한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아름다운 덕행(德行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
*낙루(落淚 떨어질 낙/눈물 루) ; 눈물을 흘림. 또는 그 눈물.
*일장 설화(一場說話) ; 한바탕(크게 벌어진 한판)의 이야기.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생짜(生-) ; 아무런 근거나 조건도 없이 억지를 부리거나 강다짐을 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
*내소박(內疏薄 안·부녀자·아내 내/멀어질 소/야박할 박) ; 아내가 남편을 박대(薄待)함.
*박대(薄待 엷을·야박할 박/대접할·대우할 대) ; 남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野薄] 대접(待接)함. 푸대접. 인정 없이 모질게 대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적적성성(寂寂惺惺) ; 성성적적(惺惺寂寂).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내나 ; ①다름이 아니라. ②결국에 가서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어한(禦寒 막을 어/찰 한) ; 추위를 막음. 또는 추위에 언 몸을 녹임.
*더덩캥이 ; 더뎅이(부스럼 딱지나 때 따위가 거듭 붙어서 된 조각).
*누데기 ; ‘누더기(누덕누덕 기운 헌 옷)’의 사투리.
*이[蝨] ; 몸길이 1~4밀리미터이고, 몸은 보통 편평한 방추형이다. 사람의 불결한 머리나 옷, 동물의 털 등에 붙어 살면서 번식하여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해충이다. 피를 빨아 먹어서 몸을 가렵게 하는 외에 발진티푸스, 재귀열 등의 질병을 옮긴다.
*서카래 ; '서캐(이[蝨]의 알)'의 사투리. 서까래, 써까리, 서카리, 쌔기 라고도 한다.
*황감하다(惶感-- 두려워하다·당황하다·어찌할 바를 모르다 황/느끼다·감동하다·고맙게 여기다 감) ; 황송하고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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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주먹탱이 ; 주먹(다섯 손가락을 모두 오무려 쥔 손)같이 둥글고 단단하게 한데 뭉쳐진 어떤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봄꿈 ; ①봄날에 꾸는 꿈. ②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생사대해(生死大海) ; '생사의 큰 바다[大海]' 중생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공화(空花, 空華).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구사리 ; 일본어 'くさり(쿠사리)'이며, '쇠사슬'이라는 뜻. 자전거 체인을 말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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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 ;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 (가로판 p169) 게송 참고.
〇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당장 이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광음(光陰 빛 광/응달 음) ; 햇빛[光]과 그늘[陰],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불회상(佛會上) ;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〇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