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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 (게송)파사노년친석가~ / 자기가 자기의 자성불을 찾는 ‘이뭣고?’밖에는 생사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없다 / (게송)호향차시명자기~.
〇산승(山僧)이 이렇게 구십이 넘어서 늙어가지고 여러분께 정말 간곡히 부탁드리는 말씀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건강하실 때에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라」고 이 말씀을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89)—2018년 동안거해제(18.03.02) (용789)
(1) 약 20분.
(2) 약 14분.
(1)------------------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하니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제득혈루무용처(啼得血淚無用處)라 불여함구과잔춘(不如緘口過殘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무술년 음력 정월 15일 동안거(冬安居) 해제(解制)일입니다.
지난 석달 동안 정진하느라고 모두 애를 쓰셨습니다.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요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다.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석가모니 부처님을 친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상광음(頭上光陰)은 전두비(轉頭飛)다, 머리위에 광음(光陰)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구나.
제득혈루무용처(啼得血淚無用處)여.
이렇게 시간은 화살같이 지나가고 있고, 우리 자신들은 머리에 흰머리가 나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한 시간 한 시간 다가가고 있는데 아무리 죽음이 싫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바래보았자 시간은 우리를 위해서 기달라 주지를 않습니다.
눈에서 피눈물이 나도록 시간을 붙잡을라고 노력을 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한탄하고 원망해 봤자 그렇게 해서 눈에 피눈물이 나도록 울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서 무상(無常)을 참으로 느끼고 깨달으고 일 분 일 초 지내간 것이 우리가 죽음을 향해서 일 초 일 초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뼛속 깊이 느낀다면은 바로 그때 그 장소를 놓치지 말고 ‘이뭣고?’를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한다고 해서 죽음을 면할 수가 있느냐? 시간을 막을 수가 있느냐?
그것은 아니지마는 우리가 할 일은, 해야 할 일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모이고 명예와 권리를 하늘같이 쌓다 하더라도 죽음은 막을 수가 없고 면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죽음을 우리가 대항해 나가는 길은 ‘이뭣고?’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열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는 해도 해도 끝이 없지마는 그래도 우리가 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은—일 초 일 초 죽음을 향해서 가는 이 처지에 그것을 이겨 나가는 길, 그래도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은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찾는 길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평상시 이만큼 건강할 때에,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그리 가서 거기에 따라가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다맛 눈으로 무엇을 보는 순간, 귀로 무엇을 듣는 순간 그리 정신을 팔리면 무상 속에 끌려나가는 것뿐이고.
바로 눈으로 무엇을 볼 그 찰나에 바로 ‘이뭣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귀로 무슨 말을 들을 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그 때와 장소를 범연(泛然)히 지나치지 말고 바로 그때를 즉(卽)해서 ‘이뭣고?’
자꾸 자기 자성불을 찾는 ‘이뭣고?’밖에는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은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별로 재미도 없고 만날 해봤자 무슨 결론이 날 것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이뭣고?’하고 자기가 자기의 자성불을 찾는 이 공부밖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고, 다른 길은 가봤자 빤하기 때문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는 그 찰나에도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항상 때와 장소를 즉해서 바로 참나를 찾는 ‘이뭣고?’ 이것이야말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열려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세(末世)에 태어났지마는 다행히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참나를 찾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그것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분이 좋을 때도 ‘이뭣고?’
누가 나를 욕을 하더라도 그 욕에 의해서 속이 상하지 말고, 욕 들을 그 찰나에 나는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욕하는 것이 나를 찾게 하는 채찍이 되고, 참나를 찾게 하는 부처님 법(法)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말세에 우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이 참나를 찾는 최상승법을 듣고 믿고, 그리고 ‘이뭣고?’를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이 육체를 받아났는데 우리가 부모님께 해 드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를 낳아서 키워서 가리켜서 이만큼 사람 노릇을 하게 해 주신 부모의 은혜가 소중하지마는 그 부모의 소중한 은혜를 갚는 길은 나를 낳아주신—이 육체를 낳아 주심과 동시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도 함께 우리는 받아났습니다.
그런 소중한 이 몸뚱이고, 이 소중한 자성 부처님을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는 부모가 낳아 주셨지마는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은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리거나 좋은 옷을 해 드리는 것으로써 만분의 일도 갚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항상 ‘이뭣고?’를 찾음으로써만이 부모의 은혜를 갚는 도리가 그속에 들어 있고, 모든 성현의 은혜를 갚는 길도 거기에 있고,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도 내가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길,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그것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하는 길이 거기에 열려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는 끝이 없지마는 이것은 내가 해야지 다른 사람이 내 대신 해줄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셔서 이만큼 살게 해주시고 이렇게 불법(佛法)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시고.
여기에 모이신 머리를 깎은 스님네나 머리을 안 깎은 처사님이나 거사님도 다 부모님으로 인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님의 은혜는 다른 길로 은혜의 백분의 일도 못 갚습니다.
부모의 그 고마운 은혜를 갚는 길은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이뭣고?’ ‘이뭣고?’를 함으로써만이 생사해탈 할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게 무엇이냐?
한번 태어난 사람은 누구라도 차츰 자라서 늙어서 병들어 죽기 마련인데, 그동안에 그럭저럭 살다보면 주름살이 생기고 흰머리가 나고 해서 결국은 하루하루 시간이 가면 죽음을 향해서 가게 되는데, 바로 그래도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열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를 찾는 ‘이뭣고?’야말로 이것은 최상승법이요, 내가 부처님이 되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벼슬을 해봤자 그것을 내생에 하나도 관(棺) 속에 가지고 가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60세 70세 80세 90세 되다 보면 결국은 육체는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죽음을 만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생사를 해탈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죽음이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생사해탈하는 길을 알았고 믿었고, ‘이뭣고?’를 열심히 해 놓은 사람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 생사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한테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죽고 육체로 이백 년, 삼백 년 사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살 만큼 살면 가는데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그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숨이 마지막 딱 끊어질 그 찰나에도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러면서 숨을 딱 거두면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원(願)에 따라서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도환생을 하게 되면 그런 대로 좋고, 도솔천내원궁에 가면 그런 대로 좋고, 또 극락세계에 가게 되면 그것도 또한 괜찮습니다.
어떠한 소원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각자 자기의 신심과 원력에 달려 있습니다.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생사는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살 만큼 살다가 마지막 숨 거둘 때도 ‘이뭣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 그 사람은 극락세계가 아니면은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참나를 찾는 ‘이뭣고?’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한 사람이라고 해서 육체로 이백 년, 삼백 년 사는 것은 아니지마는 살 만큼 살다가 갈 때라도 ‘이뭣고?’를 한 사람은 생사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숨 꼴딱 넘어갈 때도 ‘이뭣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태어날 것입니다.
최상승법인 내가 나의 자성불을 찾는 이 참선(參禪) 공부는 생사를 해탈하는,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열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처음~19분30초)
(2)------------------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라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라. 백년광음(百年光陰)이 전두비(轉頭非)다.
정말 이렇게 말을 듣고 걸어다닐 수 있고, 밥 먹고 옷 입고 이러는 이러한 힘이 있을 때, 이럴 때 자기의 자성불을 잘 밝히라 그말이여.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라 그말이에요.
백년광영(百年光影)이 전두비(轉頭非)여. 우리가 오래 살아봤자 백년 정도 사는데 그 백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계신 여러분들은 다 칠팔십, 머지않아서 또 백세가 가까워집니다마는 이 시간에 명예나 권리나 지위 부귀를 아무리 많이 쌓아 놓아봤자 그것으로 생사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맛 ‘이뭣고?’밖에는 없습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는 찰나에 ‘이뭣고?’ 귀로 무슨 말을 들을 때 ‘이뭣고?’ 속이 상할 때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 ‘이뭣고?’ 때와 장소를 가릴 것이 없습니다.
속으로 항상 참나를 찾는,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하는 것이, 이것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 열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이렇게 구십이 넘어서 늙어가지고 여러분께 정말 간곡히 부탁드리는 말씀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건강하실 때에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라」고 이 말씀을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허수히 듣지 말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기분이 좋을 때도 ‘이뭣고?’
누가 나한테 욕을 하더라도 그말을 인해서 속이 상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뭣고?’ 이렇게 자기 부처님을 찾는 공부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는 말이 바로 나로 하여금 부처님을 찾는 공부를 하게 해주는 법문(法門)이 되는 것이여.
비록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생로병사가 있고, 성주괴공이 있고—이 육체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주법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지마는 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은 돈 가지고도 안 되고, 명예나 지위 부귀 권리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이 속에서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기분이 좋을 때도 ‘이뭣고?’ 항상 자기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하는 것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명예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맛 이만큼 건강하면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수도장(修道場)인 것입니다.
이 말세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났지마는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나서 이렇게 최상승법을 여러분께 말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또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인연을 갖은 여러분들은 정말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는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우리는 비록 말세라고 해서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이 육체를 받아난 사람은 결국은 죽게 되는데, 죽을 때도 ‘이뭣고?’ 이러면서 숨을 딱 거두면 숨 떨어지자마자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생을 살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가지 업(業)을 지어왔을 것입니다마는, 업을 지어왔다 하더라도 그 업 속에 업으로 인해서 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 부처님을 친견하고 다시 인도환생을 할 수 있다면은 인도환생을 하면 좋고, 도솔천내원궁에서 영원히 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그 길이 내가 내 자신의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이 구십이 넘어서 앞으로 얼마 동안 이러한 말씀을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께 말씀을 드릴 기회가 몇번이나 있을란가 그건 알 수가 없으나,
내가 여러분께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것은 이것밖에는 여러분께 해 드릴 말씀이 없고, 이렇게 해 드림으로 해서 이 말씀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면 여러분은 받드시 도솔천내원궁에 태어나시게 되리라고 나는 믿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이뭣고?’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산승의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말씀을 옳다고 믿고 그렇게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을 하신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대중 손들고, 박수>
여러분이 정말 손을 들고 박수를 치신 그 뜻이 진심에서 나오신 행동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그 마음을 믿습니다.
앞으로 20년을 더 살런지, 50년을 더 살런지 사람마다 다 연세가 연령이 다르지만 이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내가 나의 자성(自性) 부처님을 찾는 길이 최고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이 그 말을 옳다고 믿고 손을 들고 박수를 쳐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소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라, 우리가 이만큼 말귀를 듣고, 걸어다닐 수 있고, 밥 먹고 옷 입고 이만큼 건강이 있을 때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라 이말이여.
백년 세월이라는 것은 화살처럼 지금 날아가고 있으니, 시간은 아무리 기운이 세거나 권리가 있거나 돈이 많아도 시간은 붙잡을 수가 없어.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이뭣고?’을 열심히 안 하시면 후세에 가서 아무리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까 손을 들고 박수를 쳤기 때문에 여러분은 산승의 말을 깊이 명심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희로애락,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이뭣고?’를 열심히 해서 반드시 정법에 의해서 생사해탈을 해서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또 만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19분31초~33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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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怕死老年親釋迦 頭上光陰轉頭飛’ ;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61~162.
〇怕死老年에 親釋迦로다. 好向此時明自己어다 百年光影이 轉頭非로다.
죽음이 두려운 늙으막에야 부처님을 가까이 함이로다. 당장 이 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파사노년(怕死老年)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글에 '이름 구할 젊을 적 공자님만 따랐고, 죽기 싫은 늙으막 부처님께 나가네(求名少日慕宣聖 怕死老年親釋迦)'라고 하였다.
*(게송) ‘啼得血淚無用處 不如緘口過殘年’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 1권 1칙 도솔(兜率)’ 취암열상당거차화운(翠嵓悅上堂擧此話云) 참고.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광음(光陰) ; 햇빛과 그늘,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자성불(自性佛) ; 자성(自性)이 즉 부처라는 뜻.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범연(泛然)히 ; ①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이 없어 데면데면하게.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〇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〇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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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61 게송 참고.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허수히 ; 짜임새나 단정함이 없이 느슨한 데가 있게.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 · 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