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스님(선요)2024. 9. 23. 11:51

§(101) 고봉스님의 수행 / 공부가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정진해라.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 / 화두는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과(菩提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요 관문.

**송담스님(No.101)—1979년 1월 관음재일 법문(79.01.24.음) (용101)

 

약 12분.

 

그만큼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 산란 아니면 혼침,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라고 한 큰스님도 '내가 3년 동안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내가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으리라' 이래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서 참선을 시작했는데, 겨우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 있을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잠이 퍼일어났습니다.
잠이 퍼일어나면 일어서서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하다가 잠이 깨지면 다시 또 포단 위에 올라가서 정진을 하는데, 앉으면 이 생각 저 생각 산란심(散亂心)이 퍼일어나고 산란심이 조끔 가라앉을 만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고 이리해서.

그리고 화두를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어느 곳으로부터서 어데로부터서 내가 왔으며, 죽으면 내가 어느 곳으로 가는고?」 화두를 이렇게 하라고 그 지도를 받아 가지고 아! 그렇게 화두를 하는데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졌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데서 왔으며, 이 세상을 살고 죽으면은 어느 곳으로 가는고?' 아 이렇게 두 갈래 길로—생각도 이렇게 간추려 지지를 아니하고, 앉았다 하면은 혼침 아니면 산란, 산란 아니면 혼침,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 지낸 것이 어느덧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가고 며칠 안 가면 마지막 3년 기한이 차서 그날이 지내가면 천상 자살을 해 버리려고 했던 그날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착잡하기가 말할 수 없고, 초조하고 불안하기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황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하룻저녁에는 꿈에 단교(斷橋) 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이 화두를 해라' 아 꿈에 화두를 탔는데, 꿈을 깨서 보니 그 꿈속에서 탄 그 화두가 그렇게 성성(惺惺)하게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제절로 들려.

밥 먹을 때도 건성, 똥 눌 때도 건성, 대중생활 속에서 생활을 해 나가는데 일체 건성이고, 오직 「만법귀일(萬法歸一)이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데 기가 맥혀.
하루 이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저녁까지 밤새 잠 뭐,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해 볼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 독로(獨露)—하늘을 쳐다봐도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땅을 봐도 화두, 하늘을 봐도 화두, 사람을 뭐 수백 명 사람 모인 데에 있어도 그 화두뿐이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6일,  엿샛날이 돌아간, 엿샛날 채웠는데 그때 달마 스님 제삿날을 맞이해서 탑전(塔前)에 제사를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를 올리러 갔다가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영탱화(影幀畵)에 그 찬(讚)이 있는데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백 년이면 삼만육천 일이죠. '백 년, 삼만육천 일에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로구나' 한 아! 그 게송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3년 동안 사한(死限)을 해 가지고, 3년 해서 되지 아니하면 죽을 기한을 한 사람이 공부야 되건 안 되건 등한(等閒)히 지내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안 들리고, 아무리 혼침에 떨어져도 단 일 분, 단 일 초도 등한히 지내지를 안 하고 계속 최선을 다해서, 앉아서 잠이 오면 서서 거닐면서 화두를 들고 쪼옥, 졸음이 나가면 다시 와서 앉고 하기를 3년을 되건 안 되건 한결같이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20분57초)

이 공부는 '잘된다'고 생각이 된다고 해서 잘된 것도 아니고, '잘 못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그 공부가 잘 못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화두가 제법 잘 들리고 성성하다고 '아! 화두가 참 잘 들리는구나. 이런 상태로 주욱 나갔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공부가 잘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아! 화두가 잘 들리는구나. 참 이렇게 좀 쭉 나갔으면' 고 생각이 벌써 화두를 놓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게 공부 옳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여.
잘되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를 들고 나가는 것뿐인 것이여.

또 그렇게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그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그런 때가 또 옵니다. 그러나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야말로 내가 한 계단 힘을 얻을 수 있는, 올라서려고 하는 그러한 고비가, 바로 그 공부가 잘 안되고 뒤틀리고 지루하고 몸부림쳐 지고 한 때가 그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것을 잘 아시고, 조끔도 짜증을 내지 말고 허리를 주욱 펴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이뭣고?」 하면서 이렇게 내쉬어.

참 앉아서 뒤틀리고, 답답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고 이럴 때에는 조용히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한 일(一)' 자로 떠억 노선을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고, 가슴이 좀 시원해지고 혼침이 없어지면 다시 또 자리에 가서 하고.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잘 지혜스럽게 그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조끔도 한 생각도 후퇴하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하면은 한 걸음, 한 고동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로써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고비요 거기서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14분44초~26분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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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라고 한 큰스님도 '내가 3년 동안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내가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으리라' 이래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서 참선을 시작했는데~ ; 
[참고] 고봉스님의 수행에 대한 법문.
① 『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② 『선요禪要』 2. 시중示衆 ; 이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포행(布行 펴다·흩어지다 포/다니다·가다·길 행)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포단(蒲團 부들 포/둥글 단) ; ①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方席). ②부들풀로 만든 둥근 방석. 근래에는 이 포단 대신 '좌복(坐服)'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云 老僧在靑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전등록(傳燈錄)』 제10권. 조주선사.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벽암록(碧巖錄)』 제45칙.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님이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사시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마지 올린다’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摩指, 摩旨, 磨旨) ‘손으로 만들어 올린다 혹은 정성스럽게 만든 공양을 올리오니 제 뜻을 감읍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조 법연(五祖法演) : (? – 1104) 속성은 등(鄧)씨. 사천성 면주부(綿州府) 파서(巴西)에서 났다. 35세에 출가하여, 처음엔 강당에서 <백법(百法)> <유식론(唯識論)> 같은 것을 공부하였다.
뒤에 백운 수단(白雲守端)선사의 회상에 가서 있을 때,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 화상의 「마니주 화두」에 대하여 묻는데, 백운선사가 크게 꾸짖는 것을 듣고 곧 깨치어 온 몸에 땀을 흘리면서 아래와 같은 게송을 지어 바쳤다.

『저 산 밑에 한뙈기 묵은 밭, 왜 즐기노 노인에게 물었더니, 몇 번 팔고 또 산건, 대숲과 소나무에 맑은 바람 온다고(山前一片閑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隣松竹引淸風)』 이에 백운선사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을 이어서 서주(舒州) 사면산(四面山)에서 출세하였다.
다시 백운산, 그 다음에는 태평산(太平山), 마지막으로 기주(蘄州) 오조산 동선사(五祖山東禪寺)에서 크게 교화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불안 청원(佛眼清遠) • 태평 혜근(太平慧懃) • 원오 극근(圜悟克勤)은 오조 문하의 세 부처라고 하였다.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에 80여 세로써 입적하였다.

마니주(摩尼珠) 화두란, 사조(師祖)라 하는 이가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에 있는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의 귀절을 끌어다가 남전에게 묻기를 『마니주를 세상에서 모르는데, 여래장 속에서 찾아 냈구나 하였으니, 어떤 것이 여래장이오니까?』 남전이 대답하기를 『내가 너하고 같이 다니는 것이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은?』
『그도 또한 그것이지』

『마니주는 어떤 것이오니까?』
『가거라! 네가 내 말을 모른다』 하는 데서 사조가 깨쳤다.

*영탱(影幀 그림자 영/그림 족자 탱, 그림 족자 정) ; 불교 종파의 조사나 고승을 그린 그림으로 진영(眞影), 영정(影幀), 정상(頂相), 조사도(祖師圖)라고도 불리운다.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등한히(等閒- 같을 등/한가하다·등한하다 한)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No.09)—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4분21초)
다맛 단정(端正)히 앉을지언정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이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억제를 한다든지 구속을 한다든지, 무리를 가해서 하지 말고, 단정하게만 허고서 일체 긴장과 억제를 싹 풀어 버리고서 화두를 들되,
지금도 이렇게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마는 호흡을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면서 화두를 들되,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 무자(無字)를 허는 이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

그렇게 애써서 해가되, 혹 혼침(昏沈)이 와 가지고 꾸벅 또 꾸벅, 이렇게 혼침이 오면은 정신을 바짝 차려서 또 (한두 번 소리내어) 화두를 또 들고, 그렇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날씨는 더웁고 그래 가지고 혼침이 오면은 살모시 이렇게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살모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왔다갔다 한 5분—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못쓰니까, 한 5분 왔다갔다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와서 또 정진을 하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은 자연히 모든 마(魔)가 소멸(消滅)이 되고. ‘마가 소멸된다’는 것은 혼침도 그것이 마(魔)고, 산란심(散亂心)도 그것도 마(魔)다 그말이여. 밖에서 들어오는 마(魔), 안에서 일어나는 마(魔), 모든 것이 다 마(魔)여, 마(魔)라고 볼 수가 있는데.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다져 나감으로써 그 마가 소멸이 되고, 마가 소멸이 되면은 눈이 떠억 안정이 된다 그말이여. 눈이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도 안정이 되고,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안정이 된다.
그 눈이 안정이 되면은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따악 안정이 되면은 몸도 안정이 되어서, 조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다.(12분8초~16분28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3분57초)
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졸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15분5초~19분2초)


[참고 ❸]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2분28초)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37분50초~40분19초)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 환희마(歡喜魔), 환희(歡喜)의 마구니[魔], 환희라는 번뇌. 번뇌마(煩惱魔).
*환희마(歡喜魔) ; 환희(歡喜)의 마구니[魔]. 환희라는 번뇌. 참선 수행자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은 번뇌, 망념이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p127. (가로판 p124)
工夫가  未得入手라도  莫生煩惱니  恐煩惱魔가  入心이니라.  若覺省力이라도  不可生歡喜니  恐歡喜魔가  入心이니라.

공부가 순일하지 못하더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지니, 번뇌마(煩惱魔)가 마음에 들어올까 두려우니라. 만약 힘덞을 느낄지라도 환희심을 내지 말지니, 환희마(歡喜魔)가 마음에 들어올까 두려우니라.

*마(魔) : [산스크리트어]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고동 ;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나 계기.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대혜종고(大慧宗杲) : (1089 – 1163) 경산 종고(徑山宗杲). 법명은 종고,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묘희(妙喜)이며, 속성은 해(奚)씨. 안휘성(安徽省)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에서 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선주의 명교(明敎)선사에게 가서, 깨친 바가 있은 뒤, 조동종의 장로들께 많이 찾아다니다가 변경(汴京)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원오선사의 법을 받아 가지고, 경산의 능인사(能仁寺)에서 크게 교화하였다.

그 때 나라의 정사를 비평하였다는 혐의로, 형주(衡州)에 귀양갔다가 또 얼마 뒤에 매주(梅州)로 옮기게 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백여 명의 제자 가운데 반수 이상이 그 지방의 풍토병으로 죽었다.
17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경산과 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廣利寺)와 전당(錢塘)의 영지사(靈芝寺), 건강(建康)의 보령사(保寧寺) 같은 여러 곳에 있다가, 송나라 효종(孝宗) 융흥(隆興) 1년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대혜보각 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5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등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0여 명이 있었다.
그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애쓴 것은 천동 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부수어 버리고 활구(活句)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 ; 선용기심(善用其心).
*선용기심(善用其心) ; ‘잘 그 마음을 쓴다’는 뜻으로, 정진할 때 역순경계(逆順境界)에 닥쳐 경계에 휘둘리지 않게 그 마음을 잘 단속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정진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가 안 들리고, 답답하고 애를 먹을 때 선용기심(善用其心), 그 마음을 잘 잡도리해서 그러한 고비를 잘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고 힘을 얻게 된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省力]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得力] 곳입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보리(菩提)의 과(果) ; 보리과(菩提果). 깨달음.
*보리(菩提) : [산스크리트어]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果 열매·결과 과) ; ①열매를 맺음. 또는 그 열매. 원인으로부터 생긴 결말의 상태. ②원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체의 법(결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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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