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정진(요중선)2020. 11. 25. 11:11

§(175) (게송)본시산중인~ /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 / 내 마음에 탐진치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불법이요, 참선 / 출가한 목적은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다 / (게송)죽영소계진부동~ / 해탈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내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못 꺼줘요. 집에 붙은 불은 이웃 사람도 와서 꺼줄 수가 있고 소방서가 와서 꺼줄 수 있지만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꺼줄 수가 없어. 혹 좋은 말을 해서 위안은 시켜줄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5)—1982년 7월 첫째 일요법회. (용175)

 

약 22분.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애설산중사(愛說山中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본래 산속에서 사는 사람이라.

애설산중화(愛說山中話)로구나. 산중의 얘기하기를 좋아하더라 그말이여.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은 친구들을 만나서 입을 벌렸다 하면 감옥 속에서 일어난 얘기들을 하고, 법률을 공부하고 법조계 있는 사람은 밤낮 만나면 법률 얘기, 무슨 사건 얘기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예술가는 모이면은 밤낮 입 벌렸다 하면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철학하는 사람이 모이면은 철학을 얘기하듯이, 원래 승려는 산중에서 도(道)를 닦는 것으로 일생에 업을 삼기 때문에 입을 벌렸다 하면 밤낮 도 닦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저 중은 법상(法床)에만 올라가면 무슨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하고 밤낮 참선만 하라고 한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도둑질 밖에는 해 먹고살 것이 없어서 그렇게 징역을 살고 나와도 2범 3범 4범 5범 다시는 안 한다고 나와도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무엇을 해 먹고살 것이나 그말이여.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세계 도처에서는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모든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인심은 날로 박해져 가고, 생각해 보면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험난하고 복잡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불자(佛子)는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더욱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훨훨 타고 있는 이 불속에서도 타 죽지 않는 길을 우리는 찾았고, 생로병사의 이 고해(苦海) 속에서도 그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만났지마는 만난 것으로써 다가 아니고 지금부터 참으로 목숨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지 아니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배를 탔으면 부지런히 바른 방향을 잡아서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지, 배에 올라탔다고 해서 누가 내 대신 노를 저어주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노를 저어서 한시바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지내가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죽음을 향해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지, 무상살귀(無常殺鬼)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지,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런지 하여간 우리는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고 또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을 향해서 또 한 걸음 다가가고,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모르고 그럭저럭 지냈을지언정 이러한 도리를 알고서는 그럭저럭 지낼 수가 없습니다. 꼭 이 선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와야만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댁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를 타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생각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바로 그 자리가 공부할 때인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보통 사람은 속상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상하는 일만 계속해서 생각하고 속상하는 속이 더 상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일을 이것저것 더 생각을 생각해 내면서 점점 더 속을 상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참선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속상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상할 때 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상하는 마음은 한시바삐 없어져야지.

 

속상하는 것은, 확! 부해가 나고 속이 상한 것은 마치 집에 불이 붙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집에 불이 붙으면 빨리 끌수록 좋은 것입니다. 불이 붙은 데다가 휘발유를 갖다 끼얹고, 불 잘 탈 수 있는 나무를 갖다가 더 보태 주고 이렇게 한다면 그 재산은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울화(鬱火), 그래서 썽나는 것을 울화라고 그러거든.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꼭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깊이 속상할 만한 일들을 생각해 내고 더 속상할, 속이 더 깊이 상하도록 이리저리 연구해서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불이 났다 하면 그 불이 어린애가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났건, 자기가 실수를 해서 불이 났건, 도둑놈이 와서 불을 질렀건, 이웃 사람이 와서 불을 질렀건, 남편이 술짐에 불을 질렀건, 누전이 되어서 불이 났건 그 원인은 따질 것이 없습니다.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불이 난 줄 알았다 하면은 즉각 최선을 다해서 불을 꺼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슨 이유로 해서 우리가 부해가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슬픈 생각이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괴로움이 생겼건, 그 이유는 따질 것이 없고 다못 빨리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이렇게 해서 썽내는 불을 꺼야 하고, 슬픔의 불을 꺼야 하고, 괴로움의 불을 꺼야 할 것입니다. 그 불을 끔으로써 귀중한 재산을 지키고 손해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집은 불이 나서 타더라도 또 지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보험에 들어놨으면 헌 집 태우고 좋은 새집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많이 해 놓은 것이 있거나 다른 재산이 있으면 그까짓 쓰러질 것 같이 생긴 보기 싫은 집은 타버린 뒤에 오히려 더 좋게 잘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은 되게 타서 큰 충격을 받아버리면 10년 20년 수명이 단축이 되고 병도 생기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금생에 오랫동안 부해를 나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고, 오랫동안 괴로움에 잠겨 있으면 반드시 육체적인 병이 생기고 결국은 의원이 고칠 수 없는 무서운 중병의 상태에도 이르르고 결국은 죽게도 됩니다.

어쩌서 새로 지을 수 있는 집 같은 것에 불이 나면 백사(百事)를 제(除)하고 그 불을 끄려고 하면서 한번 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우리의 육체와 생명에 불이 붙을 때에는 왜 그렇게 급히 끄려고 하지를 아니하느냐 이 말이여.

 

내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못 꺼줘요. 집에 붙은 불은 이웃 사람도 와서 꺼줄 수가 있고 소방서가 와서 꺼줄 수 있지만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꺼줄 수가 없어. 혹 좋은 말을 해서 위안은 시켜줄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다 그말이여.

열반(涅槃)이라 한 말은 인도 말인데, 니르바나(nirvāṇa)라고 하는 인도 말인데, 중국에서 음으로 음사(音寫)하기를 열반(涅槃)이라 음사를 했는데, 뜻으로 번역하면 적멸(寂滅)이라고 번역을 해요. 적멸(寂滅), '적적할 적(寂)'자 하고 '멸할 멸(滅)'자 하고.

 

'적적하게 멸했다' 그 말은 훨훨 타던 마음에 불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그 뜻의 근원은 그렇게 된 거여.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그말이여.

 

그 방법이 꼭 머리를 깎어야만 참선을 할 수가 있고, 머리 깎은 사람만이 마음의 불을 꺼야 한다. 그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네만 꼭 마음의 불을 꺼야 하고, 세속에서 사시는 분은 불을 안 꺼도 된다 하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에서 사시는 분일수록에 백배 천배 더 노력을 해야 하고 더 생명 바쳐서 참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에 그럭저럭하다가 안 해 놓으면 내생(來生)에 소가 될지, 개가 될지, 지옥에 갈지 누가 보증을 할 것이냐 이 말이여.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출가하신 이 스님네들도, 우리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정든 고향과 청춘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명예를 구해서입니까? 편안함을 구해서입니까? 무슨 권리나 재산을 구해서입니까?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 스님네는 정말 밤잠을 안 자고 모다 공부하신 스님네만 모다 오셨습니다마는, 지혜롭게 열심히 공부를 하되 지혜롭게 공부를 하셔서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를 해서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 데에 끈치지 마시고, 우리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도를 닦을 수 있게 해주시고, 도를 이루게 해주신 국가와 민족과 스승과 부모와 우리의 모든 의식주를 공급해 준 여러 신도님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은 그 진리 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입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허고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이요. 대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일렁하니까 그 대나무 그림자가 따라서 일렁일렁 움직이는 것이 마치 층계를 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여.

대나무 그림자가, 대나무가 바람에 움직임에 따라서 층계를 쓸고 있지만 층계에 있던 문지는 하나도 쓸어지지를 않더라. 움직이지를 않더라.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 달이 고요한 호수에 비추니까 저 호수 밑바닥까지 달이 가서 물을 뚫고 들어가서 호수 밑바닥까지 달빛이 들어갔는데 뚫고 들어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물에는 아무 구멍도 뚫리지를 않더라 그말이여.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문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30분42초~52분1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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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본시산중인~' ;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18권. 「祖師機緣 六祖下第四世之五(南嶽下後第三世之一)」에 나오는 몽암악(蒙菴岳)의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 다섯 가지 큰 은혜를 항상 명심(銘心)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 명심불망오종대은(銘心不忘五種大恩).

①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 : 각기 그 머무는 곳을 편안하게 해 주는 나라의 은혜.

②생양구로부모지은(生養劬勞父母之恩) : 낳고 길러 수고해 주신 부모의 은혜.

③유통정법사장지은(流通正法師長之恩) : 정법을 전해 주신 스승의 은혜.

④사사공양단월지은(四事供養檀越之恩) : 네 가지 공양물(衣食住藥)을 베풀어 주는 신도의 은혜.

⑤탁마상성붕우지은(琢磨相成朋友之恩) : 서로 탁마해서 공부를 완성시켜 주는 도반의 은혜.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 득력(得力).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게송) '죽영소계진부동~'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17.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문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미증(未曾), 부증(不曾) : 일찍이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의 교설은 언어문자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반야경』이나 『능가경』 등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 말을 선종에서 강조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참고 ❶] 『금강선론(金剛仙論)』 (세친=천친 造 | 금강선 釋 | 보리유지 한역) 제5권.

如來從得道夜 至涅槃 更不說一字者 明證法無名相 言語道斷 心行處滅 不可以名相往說 故言不說一字也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밤부터 열반에 드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결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법(法)은 명상(名相)이 없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헤아릴 방법도 소멸하여 명상으로써 설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참고 ❷] 『선교석(禪敎釋)』 (서산대사)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智度論>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마지막 발제하까지, 이 두 기간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외별전의 취지를 가리킨다.<『지도론』>

 

[참고 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제5권 (실차난타 역 | 김진철 번역 | 한글대장경) '3. 무상품 ② 無常品第三之餘'

大慧 若人說法墮文字者 是虛誑說 何以故 諸法自性離文字故 是故 大慧 我經中說 我與諸佛及諸菩薩 不說一字 不答一字 所以者何 一切諸法離文字故 非不隨義而分別說

 

대혜여, 만약 어떤 이가 법을 설하되 문자에 떨어진다면 이것은 허망하게 속이는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경 가운데서 '나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자도 설하지 않고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므로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하여 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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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