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전암22)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화두를 의단독로하도록 잡드리하는 것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여행권) / 불자는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 소승계, 대승계 / 화두는 '내가 내 마음을 찾는 방법' / 불법(佛法)은 '내가 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목적.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 / (게송)백운운리청산중~ / 주관과 객관은 원래 하나 / 여래장이 전개된 것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다 / (게송)권군심심참묘화~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하고 여쭈어봤어.

 

마조 스님께서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너의 자가보장이니라. 바로 그 보장(寶藏) 속에는 일체가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으며 조끔도 부족함이 없으며, 영원히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보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보장을 놔두고 어찌 밖에서 그 보장을 찾는단 말인고?"

그 말 한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이것을 ‘언하대오(言下大悟)’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혜해 스님은 지적 이론(知的理論)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처님과 똑같이 확철대오를 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여. 안 것과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죽어갈 때 한푼 못 가지고 갑니다. 널 속에다가 금덩어리를 가뜩 담어서 가지고 가봤자 염라대왕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쓰고 남을 재산은 자가보장을 개발을 해. 자가보장(自家寶藏), '이뭣고?'

 

**송담스님(복전암No.22)—1990년 관음칠성회 기도회향 법문(90.10.07) (복전암22) (54분)

 

(1/3) 약 21분.

 

(2/3) 약 17분.

 

(3/3) 약 15분.

 

(1/3)----------------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기회환(我人山下幾回還)고

나무~아미타불~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我人山下)에 기회환(幾回還)고.

저 하늘갓으로 고향(故鄕)을 떠나서 방랑객이 되어서 몇 번이나 돌고 돌다가 '내다', '사람이다'한 아인(我人)의 산하(山下)를 또 몇 번을 돌고 돌았던가.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타가, 은애(恩愛)를 입고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하고 사랑을 주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생사윤회의 강(江) 속에서 문득 스승을 만났어. 생사 없는 도리를 설해주는 부처님, 조사스님, 선지식을 만났더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다. 생사 없는, 그리고 나의 마음의 고향길을 밟게 되었더라.

 

 

오늘 경오년(庚午年) 시월 초이레, 관음칠성회(觀音七星會) 칠일기도 회향(廻向) 법요식을 맞이해서 이렇게 신남신녀(信男信女)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많이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기도 회향 법요식을 즈음해서 불명(佛名)도 타고 또 십선계(十善戒)도 받고 또 참선(參禪)을 하실 분은 또 화두(話頭)를 타는, 그러한 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권'을 받게 됩니다.

화두와 불명과 십선계는 바로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를 하다가 부처님이 계시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라고 하는 것은 불명(佛名)을 받을 때 그 종이 한 장, 계(戒)를 받는 그 계첩(戒牒) 하나, 화두(話頭)를 탈 때에 그 

문(偈文)

 한 장, 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그 한 장의 종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찾는 화두 한마디를 철저하게 마음에 새겨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그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항상 끊이지 않고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할 때에 바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몸에 간직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 표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고 비행기가 있고 차가 있다 하더라도 그 표를 놓쳐버리면 탈 수가 없어.

한번 그 표를 탔으면은 그것을 깊이 잘 간직을 해야지 함부로 해서 어디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든지 놓쳐버리면 못 가거든.

 

 

오늘 십선계를, 불명을 타고 또 화두를 타고 십선계를 받을 분은 호궤합장(胡跪合掌)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합장을.

그렇지 않는 분은 그냥 가만히 앉어서 법문(法門)만 들으시면 됩니다.

 

이 십선계(十善戒)는 살(殺) · 도(盜) · 음(淫) · 망(妄).... 몸, 마음으로—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와 입[口]으로 짓는 네 가지와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그래서 몸으로 짓는 세 가지는 (첫째) 살생(殺生),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不偸盜]. 셋째, 사음(邪淫)을 하지 말라[不邪淫].

이것이 살생을 하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사음을 하지 말라. 이것은 몸으로 짓는 세 가지고.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不妄語]. 다섯째는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지 말아라[不綺語]. 여섯째는 이간(離間)질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不兩舌]. 일곱째는 악(惡)한 말을 하지 말아라[不惡口].

이것은 입으로 짓는 네 가지고.
그다음에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는, 탐욕심(貪欲心)을 내지 말라[不貪欲]. 또 진심(瞋心)을 내지 말라[不瞋恚]. 사견(邪見)을 갖지 말라[不邪見].

이 사견은,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갖지 말아라 그건데, 이 '어리석고 삿된 견해'는 무엇이냐 하면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거여.

 

대승법(大乘法)을 신(信)하는 불자(佛子)는 첫째, 자비심(慈悲心)이 있어야 하니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해야 하고. 둘째, 내 것을 남에게 보시(布施)를 할지언정 어찌 남의 것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세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항상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야하거든, 하물며 자기 남편과 자기 아내가 아닌 사람과 관계를 할 수가 있겠는가.

 

넷째, 정법(正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하거든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다섯째) 불자는 마땅히 항상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음탕한 말과 상스러운 말이 입 밖에 나올 수가 있겠는가.

(여섯째) 불자는 마땅히 서로 화합을 시킬지언정 어찌 이간질을 해가지고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서로 싸우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일곱째) 정법을 믿는 불자는 항상 그 입에서는 부드럽고 사랑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입에 못 담을 욕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불자는 내 것을 항상 보시(布施)를 하고 항상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탐욕심(貪欲心)을 낼 수가 있으며,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어떻게 진심(瞋心)을 낼 수가 있겠는가.

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내 몸같이 아끼고 돌보아야하거늘,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해서 진심을 내고 진심 낸 끝에는 미워하고 그럴 수가 없거든.

 

불법을 믿는 사람은 맨 처음에 인과법(因果法)을 믿어야 하는 거여. 인과법을 안 믿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이여.

인과라 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여.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인데.

무엇이든지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마구잽이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낸 사람은 인과법을 안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여.

 

인과법을 믿는 사람은—내가 말 한마디 하는 거, 한 생각 일으키는 거, 발 한번 디디고, 내디딘 것이 전부가 다 어떠한 그 결과적으로 자기가 지은 대로 그 과(果)를 받게 되는 것이여.

욕 한마디하는 그 과보(果報)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예는 우리의 현실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고 경전에서도 얼마든지 그 예가 있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통제일(神通第一) 목련존자는 결혼을 해가지고 내외간에 참 정답게 잘 살고 있는데,

그 모친이—결혼하기 전에는 애미 밖에 모르고 애미한테 그렇게 효성을 다하고 그러더니, 결혼한 뒤에는 그 아내한테 빠져가지고 아내하고만 가깝게 친근히 지내고 애미한테는 등한히 하니까, 그 어머니 마음에 굉장히 섭섭했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사사건건이 '저놈은 장가간 뒤에는 계집한테 빠져가지고 애미를 우습게 안다'고 이래가지고 자꾸 날이면 날마다 그래 쌓으니까, 그 아들이 화를 내가지고 "어떤 장사(壯士)가 있어서 저 늙은이를 뚜드러 팼으면 좋겠다"고, 아! 이런 말을 했다 그말이여.

그 과보로 오백생 동안을 죽을 때는 뭇매를 맞어서 죽었다 그말이여. 부처님 제자로 신통이 나고, 육신통(六神通)이 다 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음에도 불구하고 목련존자는 집장외도(執杖外道)의 패거리로부터 물매를 맞어서 죽었습니다.

 

육신통이 난 그런 아라한의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기가 지은 과보를 면치를 못했어. 이렇게 인과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맨 처음에 인과법부터 철저하게 믿어야 해.

인과만 철저히 믿는다면은 살생도 할 리가 없고, 도둑질도 할 리가 없고, 사음도 할 리가 없고, 거짓말도 할 리가 없고,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할 일도 없고, 이간질도 할 리가 없고, 악한 욕을 할 리도 없고, 탐욕심을 낼 일도 없고, 진심을 낼 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법을 얼마만큼 철저히 믿느냐'를 가늠해 볼라면, 인과법을 얼마만큼 철저히 믿느냐 그것을 보면 알 수가 있어.

 

그런데 이 인과법도 차등(差等)이 있어.

 

실지로 살생을 하지 아니하고, 도둑질을 하지 아니하고,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산목숨 죽일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도둑질 할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사음을 할 마음을 내지 아니해야해.

몸으로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잘 지켜야 해.

 

몸으로 지키는 것은 소승계(小乘戒)고, 마음으로도 잘 지키는 것은 이것은 대승계(大乘戒)여.

소승계는 어지간하면 지키기가 쉬운데, 대승계는 참 지키기가 어려운 거여.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낸다 하더라도 실지로 죽이지만 않으면 소승계는 지킨 것이 되나, 대승계는 죽일려고 마음을 낼 때 이미 대승계는 범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대승계는 훨씬 차원이 높은 계(戒)고, 소승계는 초보적인 차원이 좀 낮은 계(戒)지만, 우리는 소승계도 잘 지키고 동시에 대승계도 잘 지킬 수 있도록 까지 끝없는 수행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저 물건이 좋다. 저걸 내가 훔쳤으면'한 생각 낼 때 이미 대승계는 도둑질을 범한 것이고, 그러니 이 대승계를 잘 지킬려면은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여.

그래서 이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먼저 받고 그 계를 철저하게 잘 지킬려면 참선을 열심히 해야 하거든.

 

그러면 오늘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을 분은 합장을 하고,

"이 열 가지 계는 대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불자로서 나를 깨닫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할 원력(願力)과 신심(信心)을 가진 사람이니, 능(能)히 이 열 가지 계를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잘 지키겠습니다"

 

"이상 십선대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

 

"이상 십선대계는 대승불자로서 마땅히 잘 가져야 할 바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능지"

 

편안히 앉으세요.

 

부처님 앞에 이 십선대계를 잘 지키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면 연비(燃臂)를—연비는 다음에 요 계첩(戒牒)을 드리면서 그때 연비를 받도록.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았으니 우리는 대승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불자가 되었습니다.

이 대승 십선대계를 낱낱이 지킬려고 하면은 참 어려운 것이여.

 

지킬려고 마음을 낼 때 벌써 범(犯)하게 된 도리가 있어.

 

그래서 이 대승십선대계는 몸으로 지키기는 쉽지만 마음으로 지키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여.

어떻게 하면 이 지키기 어려운 대승계를 잘 지킬 수 있느냐 하면은, 항상 화두를 들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거여.(처음~21분4초)

 

 

 

 

(2/3)----------------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내 마음을 찾는 방법이여.

 

불법(佛法)은 '내가 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내 마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이라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마조(馬祖) 스님의 제자인 혜해(慧海) 스님의 지으신 법문이여.

그런데 그 스님은 중국에 월주(越州) 땅에 있는 대운사(大雲寺) 스님이었었는데, 마조 스님이라고 한 큰 도인(道人)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마조(馬祖)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떠억 절을 하니까 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디서 왔는고?"하고 물으니까, "저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러 왔는고?"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집 보배창고는 놓아두고서 뭣 하러 사방을 이렇게 돌아다니는고? 나한테는 아무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나한테 구하러 왔단 말인가?"

그러니까 그 혜해 스님이 일어서서 떠억 절을 하고서 묻기를,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집 보배창고입니까?" 그렇게 여쭈었어.

 

오늘 십선대계도 받고 불명도 받고 화두도 받지마는, 진짜 이 산승(山僧)이 여러분께 꼭 간절히 일러드리고 싶은 말을 할라고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전기가 딱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만큼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해서 진짜 마음에 보배를 찾아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표를, 진짜 표를 타게 될 이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인연(因緣)과 복(福)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 시간 맞춰서 전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하고 여쭈어봤어.

 

마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바로 그 보장(寶藏) 속에는 일체가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으며 조끔도 부족함이 없으며, 영원히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보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보장을 놔두고 어찌 밖에서 그 보장을 찾는단 말인고?"

 

그 말 한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이것을 ‘언하대오(言下大悟)’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혜해 스님은 지적 이론(知的理論)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처님과 똑같이 확철대오를 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여. 안 것과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도 언하에 대오한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이 찰나 동안에 언하대오를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 법문을 들은 그 인연으로 여러분은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금생(今生)에 못하면은 내생(來生)에라도 하게 되겠지만, 같은 값이면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확철대오 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지끔 이 법문을 듣고 있는—그 듣는 것이 귀가 듣는 것이 아니어요. 듣는 놈은 속에 있고 다못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거든. 그 귀를 통해서 듣는 놈,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항상 그 의심(疑心)을 관(觀)해.

 

속이 상할 때도, 불끈 속에서 속상하는 놈이 요렇게 주먹탱이 같은 놈이 일어날 때, 바로 '이 일어난 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슬플 때 '이 슬퍼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 '괴로워 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가끔씩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플 때도 '이 아플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속이 상할 때마다, 원망스러울 때 괴로울 때, 그 찰나 찰나가 바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바로 그 기회(機會)다.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하고  청산산중백운다(靑山山中白雲多)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여운산장작반(日與雲山長作伴)하면  안신무처불위가(安身無處不爲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이요  청산산중백운다(靑山山中白雲多)로구나.

흰구름 뭉게뭉게 속에 청산(靑山)이 중중(重重)하고, 청산 산 가운데에 백운(白雲)이 많구나.

 

일여운산장작반(日與雲山長作伴)하면, 날이면 날마다 첩첩산중에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곳에 청산이 첩첩한, 구름과 그 청산을 길이길이 도반(道伴)을 삼고 살아갈 때에,

안신무처불위가(安身無處不爲家)로구나. 구름 뭉게뭉게 일어나는 곳, 청산이 첩첩한 바로 그곳이 내 몸 편안히 할 나의 집 아닌 곳이 없구나.

 

이건, 구름은 객관 세계(客觀世界)를 비유한 것이고, 청산은 주관(主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객관(客觀)은, 주관(主觀)은 무엇이냐?

내가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를 통해서 온갖 내음을 맡고, 입을 통해서 온갖 맛을 보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이 육근을 통해서 모든 것을 느끼는 이 육근(六根), 느낄 줄 아는 놈이 그것이 주관(主觀)이고.

육경(六境),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모든 빛깔과 모냥, 모든 형형색색의 소리, 모든 냄새, 모든 맛, 몸뚱이를 통해서 느끼는 모든 색진(色塵), 촉(觸), 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 하는 모든 법(法)이 다 그것이 객관 세계(客觀世界)인데,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이것이 객관(客觀)이여.

 

그런데, 모든 객관은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인식(認識)되는 것이고, 또 모든 객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관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여.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그 육진(六塵)이 없으면, 우리에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식(識)이, 육근(六根)을 통해서 식(識)이 일어나는 것이여.

 

그래서 육진(六塵, 육경六境)과 육근(六根)과 육식(六識)은 항상 이것이 삼위가 연관이 되어서 우리가 생활을 하고 온 세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여.

 

그래서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은 우리의 제팔(第八) 아뢰야식(阿賴耶識), 우리에게 그 여래장(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그 여래장이 나가서 전개(展開)된 것이 요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宇宙法界)다.

우주법계가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여래장(如來藏)이 나가서 벌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요 법계(法界). 법계를 거두면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여.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두 개가 따로따로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여.

그래서 우리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이뭣고?’로 돌아올 줄 아는 것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그 소리가 좋은 소리가 되었건 나쁜 소리가 되었건, 법문이 되었건 개 짖는 소리가 되었건, 무슨 소리든지 듣자마자 '이뭣고?'로 돌아와야 해.

 

이 법을 믿는 사람이 세계 60억 가운데 몇 사람이 되나 그말이여.

최상승, 불법(佛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법문(法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이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거여.

 

이 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밤낮 육진 세계(六塵世界), 외부 세계(外部世界)에만 팔려서 사는 거여.

그것을 비유해서 말하기를, 고향을 떠나서 타관(他官) 객지(客地)로 떠돌아다니면서 그 자기 딴은 참 좀 잘살아 볼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身世), 방랑객 신세로 일생을, 무량겁(無量劫)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법문을 듣고 믿는 사람은 바로 자기의 쓰고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보배창고에 보배가 가득—실컷 쓰고 온 사람들한테 다 노놔 주어도 끝이 없는, 편히 살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밖에서 그 보물을 찾고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지마는, 지혜(智慧) 있는 사람은 내게서 찾어야 하는 거여.

 

만석꾼이가 되아도, 실제로 만석꾼이 갑부도 정법(正法)을 안 믿는 사람은 천하에 불쌍한 가난뱅이인 것이고, 별로 큰 재산이 없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상승법을 믿고 내 마음 속에서 영원을 찾는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어.

보리밥에 나물밥을 먹고 살아도, 된장찌개 하나로 먹고 살아도 조끔도 부족함이 없는 거여.

 

자기가 지은 대로 잘살면 잘사는 대로 좋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좋고,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이 부러운 것 없이 충족(充足)하다 그말이여.(21분5초~38분28초)

 

 

 

 

(3/3)----------------

 

십선계를 받고 '이뭣고?'—지금 이 법문을 들은 사람은 다 '이뭣고?' 화두를 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 하나는 잘 지녀야 하는 거여.

 

속상할 때도 그 속상한 데에 오래오래 빠져있지 말고 얼른 '이뭣고?' 화두를 들으라 그말이여. 이 속상한 생각이, 속상하던 마음이 스르르르 가라앉어 버리거든.

누가 원망스럽고 미웁더라도 냉큼 숨을 떠억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미운 생각이 쏴악 없어져버리거든.

 

십선계(十善戒)를 받고, 또 이렇게 화두(話頭)를 받고, 불명(佛名)을 진즉 받은 분은 그 불명을 가지고, 오늘 불명을 새로 타신 분은 새로 탄 그 불명으로써 서로 친구간에도 부르고, 내외간에도 부르고, 가족끼리도 부르고 이렇게 불명을 부름으로써, 서로 불명을 불러줌으로써 그 공덕(功德)이 되고 부름을 받을 때에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또 불명을 부르고 부름을 받을 때에 화두를 들게 되니까, 그렇게 해서 고향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돌아가는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금생에 또 그 참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한 사람은 어느 찰나에 툭 터질는지 모르거든.

 

이 혜해 스님은 숙세에 많이 닦었고, 마조 스님을 신(信)하기를 정말 추호(秋毫)도 의심 없이 목숨 바쳐서 신(信)해서 떠억 신(信)했기 때문에,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그 묻는 그놈이 바로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그 언하(言下)에 툭! 터져버렸어.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가운데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어.

언제 터질런지 모르니까, 항상 간절(懇切)한 의심(疑心), '이뭣고?' 잠시도 놓지 말아야 해.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똥 누면서도 '이뭣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의심(疑心)이 간절(懇切)히 안 난다'고 그런 생각할 것 없고, '공부가 잘 안된다'고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이뭣고?' 그렇게 하라.

 

언제 되고 안되고 한 생각 낼 겨를이 있느냐 그말이여.

자꾸 하다보면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져. 그냥 들어져 있다 그말이여.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들어져 있고, 점심 먹으면서 한 숟갈 떠억 떠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도 고대로 화두가 있게 되는 거여. 될 때가 꼭 오는 거여.

저녁에 잘 때에도 떠억 누워서 '이뭣고?' 그 의심을 들고서 터억~,

빨리 잘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들고 있다보면 언제 잠이 온 중 모르게 잠이 와.

 

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어져 있고, 아침에 눈 딱 뜨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그 화두가 딱, 엊저녁에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는 거여.

양치질하면서도 고대로 들어져 있고, 세수를 하면서도 고대로 있고, 법당에 가서 예불을 하면서도 고대로, 그러한 지경에까지 되면 머지않아서 툭 터져버리거든.

 

지끔 돈이 있는 사람이 제일이고, 돈이 있어야 양반이고, 돈이 있어야 사람노릇한다 그러지만,

그 돈, 부자 될려고 다 하지만 저마다 부자 된 거 아니고, 전생(前生)에 복(福)을 많이 지어논 사람이라야 큰 부자가 되는 거고, 또 큰 복은 안 지어 놨어도 부지런히 일하면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 거여.

 

밖에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말고 자가보장(自家寶藏),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보물을 캐는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해야 정말 남부럽지 않게 금생에도 잘살고, 세세생생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도솔천 내원궁에서 참 온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께 부자 되는 법을 어떤 사람이 물으니까, "버는 것보단, 쓰는 것이 작으면 부자가 되느니라"

 

좀 말 같지 않은 소리 같지마는, 아무리 많이 벌어도 번 것보단 더 많이 쓴 사람은 항상 가난한 거고, 조끔 벌어도 버는 것보단 조끔씩 쪼끔 적게 쓰면 그 사람은 저축이 될 것입니다.

쓰고 남으면 그건 모아놓았다가 또 큰 일이 있으면 쓰는 거고, 보시(布施)도 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죽어갈 때 한푼 못 가지고 갑니다.

 

널 속에다가 금덩어리를 가뜩 담어서 가지고 가봤자 염라대왕한테 그거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염라대왕이 그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참 영원히 쓰고 남을 재산은 자가보장을 개발을 해. 자가보장(自家寶藏), '이뭣고?'

 

'이뭣고?'헌 사람은 살생을 안 하게 되니 죄 지을 것이 없고, 도둑질을 안 하게 되고, 사음을 안 하게 되고, 망어 · 기어 · 양설 · 악구를 안 하게 되고, 탐진치 삼독(三毒)을 범하지 않게 되니, 지옥은 암만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혹 지옥에,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다면 지옥에도 가고 싶은 사람이 혹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이 십선계(十善戒)를 지키는 사람, 또 '이뭣고?'를 하는 사람은 아무리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가.숨 딱! 끊어지자마자 도솔천 내원궁에 가게 되고, 또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더라도 참 잘 인물 좋게 태어나서 바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될 테니 '이뭣고?'밖에는 없습니다.

백번 천번 말을 해도 '이뭣고?' 하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이뭣고?' 속에 다 들어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참 좋은 염불(念佛)이지만, '이뭣고?'한 사람은 '이뭣고?' 속에 그 아미타불이 다 들어있어. 얼마 만큼 들어있느냐?

 

육백만 번,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을 부른 공덕이 '이뭣고?' 한 번 하는 속에 들어있어.

그러면 '아미타불' 육백만 번을 부를랴면은 백일 동안을 잠자는 시간 .....(녹음 끊어짐) ...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불명과 십선계를 받으신 그 계첩(戒牒)은 내가 법상(法床)에 내려간 뒤에 질서있게 다 노놔 드리겠습니다. 또 이 계첩을 받을 때에 또 이 연비(燃臂)를 하시도록.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하니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오

나무~아미타불~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하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오

나무~아미타불~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하니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오.

여러분께 권하노니, 이 깊고도 깊은 이 자가보장(自家寶藏)의 화두법(話頭法)을 권하노니,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오. 이 얻기 어려운 이 좋은 보배를 가지고 어찌 헛되이 시간을 보내리오.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하니,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과 같은 이 소중한 이 좋은 시간이 없으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리오. 장부의, 여러분은 이 불명을 타고 십선계를 받고 화두를 탔어. 이 최상승법문을 들었으니 여러분은 그냥 이 몸 고대로 대장부(大丈夫)여. 머리가 있거나 없거나, 치마를 입었거나 안 입었거나 그냥 대장부여.

 

장부(丈夫)의 마음과 뜻을 가지고 그럭저럭 세상을 보내고 말 것인가?

아무리 남자라도 째째한 심보를 쓰면은 여자만도 못하는 것이고, 설사 여자의 몸을 받아났다 하더라도 정법(正法)을 믿고 장부의 뜻을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가면 바로 그 사람이 대장부다.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정사가 바쁘고 사회 일이 바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 생사 문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왔는데, 금생 이후로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최상승법을 들었으니 철저하게 믿고—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한문으로 되어서 읽기도 어렵고 읽어봤자 뜻도 잘 모르지만, '이뭣고?' 하나만 하면, 그렇게 해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이 자가보장(自家寶藏)을 확철대오 해버리면, 팔만대장경 환한 것입니다. 한문 글자를 못해도 그 이치는 환한 거여.

 

'이뭣고?'

 

합장을 하세요.

손을 드세요. 오른 손을.

 

정법을 믿고, 그동안에 <금강경>을 독송하던 분, 아미타불을 부르신 분, 관세음보살을 부른 분, '옴 마니 반메 훔'을 하신 분, 여러 가지 다 나름대로 신심을 가지고 다 하셨겠습니다마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정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이뭣고?'를 합시다.

 

(큰스님) '이뭣고?'

(대중) '이뭣고?'

 

(큰스님) '이뭣고?'

(대중) '이뭣고?'

 

(큰스님) '이뭣고?'

(대중) '이뭣고?'

 

성불합시다.(38분30초~53분34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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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 ; 『금강경오가해』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함허 득통 스님의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因小利養 捨父逃逝 流落天涯 幾度往返我人山下 幾度出沒恩愛河中 忽逢良友 指示 踏得常樂家鄕 始知昔年生死路 虛送百千閑日月
 
작은 이익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도망가서 하늘가를 떠도니, 몇 번이나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산하(山下)를 오고갔으며, 몇 번이나 은혜(恩惠)와 애욕(愛欲)의 강물 속에 출몰(出沒)했던가.
홀연히 좋은 친구의 가리킴[指示]을 만나서 즐거운(생사 없는) (마음의) 고향을 밟으니, 비로소 옛날 생사의 길에서 오랜 동안 허송세월했음을 알겠음이로다.
*'내다', '사람이다'한 아인(我人)의 산하(山下)를   번을 돌고 돌았던가 ; 아상(我相), 인상(人相).
*사상(四相) ;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
①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나라는 관념 · 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 · 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 · 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②인상(人相) ; 산스크리트어 pudgala-saṃjñā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③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 · 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④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 · 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 · 생각. 생명체라는 관념 · 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육조구결(六祖口訣).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 p135~136) (『육조 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 p98~99) 참고.
 
衆生佛性 本無有異 緣有四相 不入無餘涅槃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迷 卽佛是衆生 悟 卽衆生是佛
중생과 불성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佛)입니다.
 
迷人 恃有財寶學問族姓 輕慢一切人 名我相 雖行仁義禮智信 而意高自負 不行普敬 言我解行仁義禮智信 不合敬爾 名人相 好事歸己 惡事施人 名衆生相 對境取捨分別 名壽者相 是謂凡夫四相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나 학문 또는 출신[族姓]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비록 인의예지신을 행하나 뜻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서 널리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인의예지신을 행할 줄 안다’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음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리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하고,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분별하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하니 이것들을 범부(凡夫)의 사상(四相)이라 합니다.
 
修行人 亦有四相 心有能所 輕慢衆生 名我相 自恃持戒 輕破戒者 名人相 厭三塗故 願生諸天 是衆生相 心愛長年 而勤修福業 諸執不忘 是壽者相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수행인도 또한 사상(四相)이 있으니,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자신은 계를 지킨다고 파계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요, 오래 살고자 부지런히 복업을 닦으면서도 온갖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이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 없는 도리를 설해주는~'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십선계(十善戒) ; 몸[身]과 입[口]과 뜻[意 생각]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십악(十惡) ; 몸[身]과 입[口]과 뜻[意 생각]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입[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뜻[意 생각]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계첩(戒牒 삼가할 계/증명서 첩) ; 계(戒)를 받았다는 증명서(證明書). 츨가한 스님이나 재가 신도들이 계를 받은 다음 계를 받았다는 신표(信表)로서 주는 증서.
*문(偈文)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경 · 론 · 석(經論釋) 중에 나오는 게송(偈頌)을 말한다. 게구(偈句), 게송(偈頌)의 글귀.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연비(燃臂 불이 타다·불사르다·불을 붙이다 연/팔·팔뚝 비) ; ①불교에서 수행자가 계(戒)를 받을 때, 팔뚝에 향이나 심지로 불을 놓아 뜨는 의식 또는 그 자국. ②팔[臂]을 태우는[燃] 고행. 고행의 한 방법으로 팔뚝을 향불로 지지는 일.
연비(然臂 · 煉臂)로도 쓴다. 발원(發願) · 입서(入誓) · 고행(苦行) · 희사(喜捨)의 등의 뜻으로 행한다.
*계첩(戒牒 삼가할 계/증명서 첩) ; 계(戒)를 받았다는 증명서(證明書). 츨가한 스님이나 재가 신도들이 계를 받은 다음 계를 받았다는 신표(信表)로서 주는 증서.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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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馬祖) : (709 – 788) 법명은 도일(道一), 속성은 마(馬)씨。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 십방(什放)에서 나서 어려서 출가하였다.
남악(南嶽)에 가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회양선사(懷讓禪師)가 묻기를,
『무엇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부처 되려고 좌선하지요』
 
그 이튿날 회양선사가 도일의 앞에 가서 벽돌을 돌에 갈고 있었다.
도일이 묻기를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하렵니까?』
『거울을 만들려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읍니까?』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줄 아는가?』
 
『......그러면 어찌 하오리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상관없는 것이며, 부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집착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는 것이 선이다!』하는 말 끝에 크게 깨쳤다.
 
그의 법을 받아 가지고, 강서성 남강(南康)의 공공산(龔公山)과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종릉(鍾陵) 개원사(開元寺)에서 교화하니, 그의 법을 받은 제자가 139인이나 되었다.
 
그의 제자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서 신라의 도균(道均)선사와 철감(哲鑑)국사가 나왔고,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범일(梵日) • 진감(眞鑑)의 두 국사가, 귀종 지상(歸宗知常)에게서 대모(大茅)화상이, 대매 법상(大梅法常)에게서 가지(迦智)선사와 충언(忠彥)선사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에게서 무염(無染)국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도의(道義)국사와 혜철(惠哲)국사와 홍척(洪陟)선사가, 장경 회운(章敬懷暉)에게서 현욱(玄昱)국사와 각체(覺體)선사 같은 신라의 큰스님들이 나왔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자가보장(自家寶藏) ; '자기집[自家] 보배 창고[寶藏]' 중생이 각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가리킴.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자라는, 자기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자루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96 11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지끔 이 법문을 듣고 있는—그 듣는 것이 귀가 듣는 것이 아니어요. 듣는 놈은 속에 있고 다못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거든. 그 귀를 통해서 듣는 놈,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항상 그 의심(疑心)을 관(觀)해'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운산(雲山)'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아뢰야식(阿賴耶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여래장(如來藏) ;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성품.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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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 혜해 스님은 숙세에 많이 닦었고, 마조 스님을 신(信)하기를 정말 추호(秋毫)도 의심 없이 목숨 바쳐서 신(信)해서 떠억 신(信)했기 때문에,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물었을 , 묻는 그놈이 바로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언하(言下)에 ! 터져버렸어' ;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자가보장(自家寶藏) ; '자기집[自家] 보배 창고[寶藏]' 중생이 각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가리킴.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비어 있는 부처님의 자리[處]를 메운다[補]고 해서 이름에 보처(補處)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아 미래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을 이른다. 부처님 생존시에 아일다(阿逸多, Ajita)가 도를 열심히 닦아 도솔천에 왕생하여 이 보살의 위치에 올랐다. 석가모니도 태어나기 전에 호명(護明)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살의 위치에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도솔천보다 낮은 사천왕천이나 도리천·야마천에는 게으름과 욕정이 남아 있고, 도솔천보다 상위의 천들은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시(布施) : [범]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 ; 시체를 넣는 관(棺)이나 곽(槨)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영감(靈龕)이라고도 한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게송) '권군심심참묘화~'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下) ‘送寧宏二禪師歸山 - 산으로 돌아가는 영(寧)·굉(宏) 두 선사를 보내며’ 참고.
[참고] 『태고집(太古集)』 (설서雪栖 編,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219.
'送寧宏二禪師歸山'
君不見  悉達多之碧山行  警汝呼吸棄人生 勸君深心參妙話  難得良晨可虛過  無量劫來無此日  丈夫心志只恁麽
 
'산으로 돌아가는 영(寧)·굉(宏) 두 선사를 보내며'
그대들은 실달다(悉達多)가 푸른 산으로 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잠깐인 인생을 버리라고 그대들을 일깨우신 것이다.
그대들에게 권하나니, 깊은 마음으로 묘한 화두 참구하라. 얻기 어려운 좋은 때를 어찌 허송하겠는가. 한량없는 세월에 이 날이 또 없나니, 대장부의 마음은 그저 이러해야 하네.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