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구참선 최상승법2020. 3. 10. 12:24

 

 

§(332) (게송)행주좌와일체처~ / 이조 말엽 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하고,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 일체시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1) 약 16분.

 

(2) 약 13분.

 

(1)------------------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정묘년(丁卯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늘까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부처님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조에 와서, 이조 말엽에 와서 이 불법(佛法)이, 이 참선법(參禪法)이 잠시 침체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께서 출현(出現)을 하셔가지고 처음에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시고, 어떻게 참 두뇌가 명석하시고 또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일찌감치 그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대강사(大講師)가 되어서 천하에 학인(學人)을 모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에 무데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시고, '경(經)을 아무리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알고 설(說)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아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다' 한 것을 깨달으시고서 학인을 다 흩어버리고 이래가지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침체(沈滯)한 한국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을 하셔서 경허 큰스님 밑에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여러 도인(道人)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한국에 선풍이 크게 융성을 해가지고 만공 스님 밑에 고봉(高峰) 스님, 전강(田岡) 스님, 보월(寶月) 스님, 또 여러 도인들이 나오셔서 오늘날 한국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도처에 선방(禪房)이 있어서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정진(精進)을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정법이 오늘날 한국에 이렇게 전통해 내려온 것은 오직 경허 스님께서 대강사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확철대오해서 선풍을 진작한 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고 그 종파(宗派)에 따라서 가풍이 모다 다르고, 현재도 일본에는 일본식 참선이 전해 내려와서 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서구에 참선이 소개 되어서 서구 사람들이 많은 일본 참선에 대해서 모다 듣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한국에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하고는 하늘과 땅에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참선이고 다 좋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참선법은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만큼만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은, 한 말로 말해서 의리선(義理禪)입니다. 공안(公案)을 의리(義理)로, 의리로 따져서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화두(話頭)를 받어가지고 며칠 이마를 찡그리고 애써서 이리저리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조실 스님한테 가서 자기 본 바를 말하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줍니다.

 

또 새로 공안을 하나, 화두를 타가지고 또 며칠간 끙끙 앓으면서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럴싸한 답을 하면, 안 맞으면 "안 맞다! 또 다시 더해라"

또 며칠 애써서 가서 뭐라고 대답하면 "되았다!" 그러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그래서 영리한 사람은 금방 이르기도 하고, 이삼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사오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또 오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대체적으로 백 개 이상의 화두를 통과하면 조실(祖室) 자격을 준다.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처음~15분26초)

 

 

 

 

(2)------------------

 

예를 들자면,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그때에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에 근원(根源)이며 이 하택 저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고,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없어진 때도 없으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어. 머리도 없고 꽁무니도 없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이냐?"

"모든 부처님에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아, 그럴싸하니 대답을 하지 안했습니까. 이론적으로 말할 때 뭐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 맞는 말이지.

 

육조 스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시기를,

"내가 내동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찌 '모든 부처님에 본원(本源)'이니, '하택신회의 불성(佛性)'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너는 나중에 애써서 공부를 해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해도 너는 얼자(孼子)가 되고,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겄구나"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강사(講師)같은 거,

참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하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되겄구나' 이렇게 평을 하셨습니다.

 

얼마 있다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하는 수좌가 왔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아! 남악회양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데 대해서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꽈악 맥힌 체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8년 동안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인고?...' 도저히 꽉 맥혀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그러한 그 콰악 맥혀서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으로, 그 의단(疑團)으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육조 스님의 법(法)을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의리선(義理禪), 일본 사람들이 화두를 뭐 백 개를 통과(通過)하고, 오백 개를 통과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 동안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가지고 "이것이 아닙니까!"그러면 "옳다"하고 또 하고,

천칠백 공안을 다 통과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선이 아니고 활구참선이 아니고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닌 것입니다.

 

백 개를 통과해봤자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몇 개 통과했는가? 많이 통과했다고 해서 무슨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닌 바에는 확철대오를 하고, 안 하고 한 것은 놔두고 '바르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 공부는 한 만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공부지만, 바르게 하지 못한 공부는 벌써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길이라 서울을 간다며, 저 호남에서 서울을 간다면서 북쪽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으로 향해 가는 거와 같애서, 바르지 못한 길을 아무리 쉬지 않고 열심히 간다고 해도 바르게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살부살모(殺父殺母)하는 죄(罪)는 불전참회(佛前懺悔)어니와,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거니와, 미득(未得)을 위증(謂證)하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죄는 참회무로(懺悔無路)다, 참회할 길이 없다"하셨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인 죄를 어디 가서 참회를 해.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또 그 정법을 의지해서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이 아닌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

이 의리선을 의리로 이론으로 이렇게 따져서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분석해 들어가는 이런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죽은 구(句)의 참선이다, 죽은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요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알 수 없는,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 생사심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의리선(義理禪)으로 참선을 하면 그것이 이미 바르지 못한 수행이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그 나름대로 의리선도 열심히 하다보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낀 바가 있고 그 어떤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깨달음이 아니여.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줄 착각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그런 삿된 참선을 지도하고.

또 그런 삿된 참선을 배워가지고 그 사람이 또 그런 삿된 수행을 해가지고 또 삿된 어떤 것을 깨달라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하고 해서 영영 부처님의 정법은 다 믿는 사람이 없고 실천한 사람이 없어지고 삿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정법(正法)이 멸망(滅亡)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나 어떠한 국법(國法)으로 불법(佛法)이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탄압을 하고 아무리 파괴를 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나타난 어떠한 그러한 것은 탄압을 할 수가 있고 그 파괴를 할 수가 있겠지만—사찰(寺刹)이라든지 또는 불상(佛像)이라든지 경전(經典)이라든지 그런 상(相)이 있는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수가 있겠지마는, 정법(正法)은 그것으로서 멸망이 되지 않습니다.

 

정법은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제자들이 우리 불법을 삿되게 믿고 삿되게 행할 때에 정법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15분27초~28분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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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