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 참선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

화엄경에 있는 말씀이건, 법화경에 있는 말씀이건, 금강경에 있는 말씀이건, 그러헌 데에 써 있는 것을 보고 알거나, 남한테 듣고 아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은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는 불교를 참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실 분이 있다면은 그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공부를 성취하고자 하거든,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고 하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다못 그런 생각이 나더라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화두만 들어 버리면 저절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3)(참선법E)-76년 1월 관음재일 법문(76.01.24.음) (용013)


 

 

 약 13분.


용맹심(勇猛心), 분심(憤心), 아까 처음에 신심(信心)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심과 용맹심이 없을 수가 없고, 그것이 있어야 그 다음에 이 ‘이뭣고?’ 화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의심!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의심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하니까 처음 듣는 분은 「이뭣고」가 무엇인가? 그러시겠지마는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 뭣고(이뭐꼬)?’ 이거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자(字)지만은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거든.

'사투리'지마는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무리 서울의 본토박이라 하더라도 이 참선할 때에는 불가불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뭣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러면 「이것」이란 게 뭐냐? “엄마!” 부르면 “왜?” 하고 대답할 줄 알고, “옥자야!” 하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알고, 또 듣기 싫은 욕하면 성낼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여기 앉아서도 서울 일이 환하고, 서울역을 생각하면 서울역이 환하고, 또 대전을 생각하면 대전이 환하고, 또 20년 30년 전 어릴 적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지 않습니까?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플 줄 알고, 이 몸뚱이는 차를 타야 가고 걸어가야 가고 또 비행기를 타야 갈 수가 있고 배도 타야 하지마는, 이놈은 뭘 타고 가는 것이 아니거든.
가만히 앉아서도 퍼뜩 번갯불보다도 더 빨리 갔다 올 수도 있고, 아무리 비행기가 빠르다 해도 10년 전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현재 과학으로는.

그렇지마는 이놈은 10년 전도 갔다 올라면 갔다 오고, 50년 전도 갔다 올라면 갔다 오고, 앞으로 10년 뒷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하고, 백년 뒷일도 생각할라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놈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종횡자재(縱橫自在)입니다.

이렇게 조화(造化) 무쌍(無雙)한 놈이 우리의 몸뚱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놈이 어디에 있는가는 알 수 없지마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그러한 조화 무쌍한 그런 놈이 있어요.

그것을 보통 ‘그것이 무엇이냐? 마음이지, 그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다 대답하시겠지마는 그건 다 들은 풍월로 하시는 말씀이라, 이 참선하는 데에는 들어 가지고 아는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화엄경에 있는 말씀이건, 법화경에 있는 말씀이건, 금강경에 있는 말씀이건, 그러헌 데에 써 있는 것을 보고 알거나, 남한테 듣고 아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 참선하는 데에는 다 싹 쓸어서 다 잊어버리고, 다 버리고서 참선을 하셔야 합니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은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는 불교를 참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실 분이 있다면은 그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깨끗이 다 씻어 없애 버리고 금방 갓난애기가 아무 생각 없듯이, 그러한 갓난애기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다못 ‘이것이 무엇인고...?’ ‘이 무엇고...?’ 이렇게만 해 가셔야 됩니다.

이것을 '마음'이니 '성품'이니 그것이 '자성불'이니 그런 생각 여기다 붙여서는 안 됩니다.
일체 그러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고, 이리저리 더듬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무슨 경전에서 본 말씀을 여기다가 참조를 해서 비교해 보고, 그러한 것은 중생의 ‘알음알이’라 이 공부에는 하등의 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공부를 가로막는 병에 지내지 못합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공부를 성취하고자 하시거든,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고 하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다못 그런 생각이 나더라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화두만 들어 버리면 저절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방법이 몸에 있는 것은 자꾸 손으로 집어 던지면 되겠지만, 이것은 뭐 손으로 던질 수도 없는 것이고, 던질라고 생각냈다 하면은 벌써 던질라고 하는 망상이 하나 더 생겨날 따름입니다.

그래서 던지는 묘방은 다른 게 아니라, ‘이뭣고?’해 버리면 던져지는 거예요. 「판치생모」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이뭣고」하시는 분은 ‘이 뭣고~?’
무슨 근심스러운 생각이 나면은 바로 그 생각 버리지 말고 ‘이뭣고?’하면 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근심스러운 일이 있거나, 또는 억울한 말을 듣고 성이 나거나, 무슨 기쁜 일을 당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이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들고 또 들고 하는데, 입으로는 들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번개보다도 더 빨리 딴 생각이 침범해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들어온 줄 알면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하시다 보면은 나중에 차츰차츰 익어지게 되어서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때가 옵니다.

그런 때는 몸도 가볍고 머리도 개운해서 아주 그렇게 상쾌하고 조용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로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는 마음 내면은 벌써 그것이 기쁜 마군(魔軍)이가 쳐들어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공부가 잘 될수록에 화두를 더욱 간절히 들어야 됩니다.

마냥 한번 잘 되기 시작하면 계속 잘 되면 참 좋겠는데, 내동 어제까지 잘 되던 것이 뚝 변해 가지고 영 안 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무릎이 아프고, 몸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고, 골치가 띵하고 해서 도저히 공부가 안 됩니다. 그 안 된다고 해서 짜증을 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 몸이 무겁고 지루하고 그럴 때에는, 그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니 일어나서 밖으로 맑은 공기를 쏘이면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좀 하면은 가슴도 후련해지고 머리도 개운해지고 몸도 좀 가벼워지면, 그러면 또 가서 방석에 앉아서 또 하시고, 이렇게 해서 그 고비를 지혜스럽게 잘 달래서 그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겁고 지루하고 한 것은 마장(魔障)이 붙어서 공부가 잘 안 될라고 그런 게 아니라,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설려고 그러한 상태가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높은 산을 오를 때에,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 설 때에는 매우 다리가 아프고 답답하고 숨이 가쁘고 그러지마는 그 고비 넘겨 놓고 나면은 그 다음부터서는 수월하게 내리막길이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도 잘 되어 가다가 또 답답하고 안 되어 가다가, 그러다가 또 그 고비를 어떻게 해서 넘기면은 또 그 다음에 잘 되다 그것을 수십 번, 수백 번 그런 고비를 넘고 또 넘어야 됩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면은 나중에는 밥 먹을 때에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고, 똥 눌 때도 들어지고, 걸어가고 일할 때에도, 이 화두를 좀 그만 두고 딴 생각을 할려고 해도 화두가 나타나 가지고 딴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잠을 잘 때 꿈속에서도 이 화두가 들어지게 됩니다.

저녁에 잘 때도 눈을 감고 화두를 들고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이뭣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면서 누워 있으면은 언제 잠이 온 줄 모르게 잠이 들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아침에 눈을 딱 뜨면은 기분에는 한 10분 누웠다 일어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은 대 여섯 시간 이렇게 자져 갖고 있단 말씀이에요.

그래 아침에 눈을 딱 뜨는데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엊저녁에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 갖고 있다 그 말이에요.

이러한 지경에까지 오도록 열심히 열심히 하시면은 그 가운데에 무량겁으로 지어온 갖은 팔만사천 가지 업장(業障)은 그 속에서 다 녹아지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 육도윤회를 면하는 생사해탈(生死解脫)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믿고 고대로 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무엇 때문에 조실스님께서 팔십 고령(高齡)에 이르도록 가만히 당신 공부하시고 조용히 지내시면은 편하실 텐데, 팔십 고령에 혈압은 그렇게 200이 넘나드시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 피를 토하는 그러한 간곡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한 법문을 마지막 열반하신 날까지 그렇게 해주실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이 법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렇게 여러분들의 생사해탈하는 데에 유일한 묘방(妙方)이기 때문에 마지막 이 사바세계를 하직하신 그날까지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큰스님의 법은(法恩)을 갚는 길은 오직 여러분 자신들이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길 (법문 끊김) ...묘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31분16초~44분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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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심(勇猛心) ; 용감하고 사나운 마음.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종횡자재(縱橫自在) ; 자기 마음대로 행함.
*조화(造化) ;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신통하게 된 일. 또는 일을 꾸미는 재간.
*무쌍하다(無雙--) ; 서로 견줄 만한 짝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판치생모(板齒生毛), 무자(無字) 화두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내동 ; ‘일껏(모처럼 애써서)’의 사투리.
*포행(布行) ; 스님들이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한가로이 뜰을 걷는 일.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묘방(妙方) ; 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