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삼요)'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5.05.22 §(336) 삼요(三要)—신심,분심,의심 /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공안을 아는 것이 아니라 확 봐 버린다 / 의심관(疑心觀)을 터득해야 한다.
  2. 2015.05.14 §(119) 신심, 분심, 의심(삼요) / 참선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진실한 포교(布敎)란?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3. 2015.04.13 §(세등26) 여종 욱면의 신심 / 공부하는데 핑계 대지 말라 / 부처님의 수행에 대한 거문고 줄 비유 / (게송)서왕한래춘부추~.
  4. 2015.04.11 §(세등26) (게송)일휘상인참춘풍~ / 혜가대사의 위법망구 / 바른 스승의 중요성 / (게송)일생장환주인공~ / 화두는 가깝게 들어야 한다.
  5. 2015.03.26 §(118) (게송)법법본래무소주~ / 참마음을 일으켜 공부를 끝장내라 / 조실스님 꿈에 지옥고 광경 / 3가지의 도에 나아가는 첩경(捷徑)과 5가지의 철저한 바른 믿음.
  6. 2014.12.09 §(755)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신심(信心)·분심(憤心)·의단(疑團)—삼요(三要).
  7. 2014.11.22 §(복전암26) (게송)돈오심원개보장~ /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 (게송)미원상한취원지~ / 보배가 우리 안에 있다.
  8. 2014.09.24 §(013) 신심, 분심, 의심 / 참선은 마군이와의 전쟁 /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
  9. 2014.09.07 §(765) (게송)약이색견아~ / 일념(一念)단속 / 삼요(三要) / 생사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10. 2014.06.18 §(246) 공안(화두)-다못 알 수 없는 의심 / 신심·분심·용맹심 / 향림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 조주스님은 30년 부잡용심(不雜用心)의 끈기와 정성 / 세수하다 코 만지기.
신심(삼요)2015. 5. 22. 14:39

§(336) 삼요(三要)—신심,분심,의심 /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공안을 아는 것이 아니라 확 봐 버린다 / 의심관(疑心觀)을 터득해야 한다.

깨달을 수 있다고 믿어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 해보지도 않고 ‘나는 깨달을 수가 없다’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나는 지옥 밖에는 못 간다’ 자꾸 스스로를 자포자기하고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서, 형제·친구를 위해서 다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부에 대한 욕심, ‘왜 나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는가?’한 이 공부에 대한 분심은 천하 없이도 양보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의심을 할려고 해도 자꾸 화두가 잘 잊어버린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분은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고, 분심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안 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분심이 있다면 의심을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일부러 의심을 안 하고 딴 생각을 좀 해볼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 의심을 스스로 이렇게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속으로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觀)한다’고 하는 것.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데, 이건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지로 자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해보면 처음에는 그 의심관을 잘 터득을 못하지만, 일구월심(日久月深) 자꾸 이 호흡과 맞춰서 해 나가다 보면 그 알 수 없는 묘한 그 의심관을 스스로 터득하게 돼.


**송담스님(No.336)—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 (용336)

 

(1) 약 15분.

(2) 약 16분.

 

(1)------------------

이 참선을 하려면 그래서 대신심(大信心)이 있어야 돼. 대신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대분심(大憤心)이 있어야 하고, 대의심(大疑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 가지를 삼요(三要)라 그러는데,

대신심이란 것이 무엇이냐?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많이 올리고, 그런 것도 신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 대신(大信)이라 하는 것은 ‘내가 부처다’하고 믿는 거여.
내 자신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내가 부처인 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지, 본래 내가 원만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 깨달으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고 하는 자신감을 가져야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중생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부처님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밥 먹고 옷 입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성내고 괴로워하고 하는 이러한 작용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뚱이 속에 살아있는 부처님의 작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미(迷)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마음도 내고, 탐심도 내고, 진심(瞋心)도 내고 그렇지만, 그 자체는 다른 데에서 그러한 작용이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부처님한테서 나오는 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면 자기의 몸뚱이 속에 살아계신 부처님이 분명히 계신 증거이기 때문에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고 깊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서는 아무리 참선을 해봤자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을 수 있다고 믿어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 해보지도 않고 ‘나는 깨달을 수가 없다’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나는 지옥 밖에는 못 간다’ 자꾸 스스로를 자포자기하고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그런 큰 신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대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 신심이 있어도 분심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공부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분심은 바로 용기인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분심을 내야 공부를 계속해서 해 나갈 수가 있고 깨달음에 나아갈 수가 있지, 분심이 죽어버리고 용기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과 모든 조사,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생사해탈을 해 가지고 중생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육도(六途)를 윤회하고 있는가?
그러한 생각으로 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명예나 권리나 또는 재산 모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시기를 내고 질투를 내고,
그래 가지고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싸우면서 심지어는 동포끼리 싸우고, 심지어는 형제 친구끼리 싸우고, 심지어는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도 싸우면서,
어째서 영원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이 깨달음을 위해서는 왜 그러한 분심을 낼 수가 없느냐?

정말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모한테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분심을 내고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의 이 욕심은 아무한테도 양보해서는 아니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다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부에 대한 욕심, ‘왜 나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는가?’한 이 공부에 대한 분심은 천하 없이도 양보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밤을 패서 공부하고,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고, 다른 사람은 앉아서 하더라도 자기는 앉을 시간이 없으면은 서서 하고, 차를 타면서 하고,
방부(房付)를 들이고—금년에도 88명이나 방부를 들이고 보살님네들이 정진을 하고 계십니다마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선방(禪房)에 와서 공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질 수가 있겠느냐! ’ 집에서 살림하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밥 짓고 또는 직장에서 이를 갈아붙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섭게 돌이켜 가며 다잡이를 해 간다면 그분이 먼저 대도를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심을 가지고 그 다음에 대분심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 가서 큰 의심(疑心)을 가져야 한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을 통해서 화두를 일러 주셨습니다.
‘판치생모(板齒生毛)’와 ‘이뭣고?’ 두 가지를 말씀을 하셨는데, 이미 조실 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계속해서 ‘판치생모’를 하셔야 하고,

조실 스님께 ‘이뭣고?’를 타셨거나 또는 산승으로부터 탔거나, 오늘 화두를 타시려는 분, ‘이뭣고?’
‘이뭣고?’ 그 말은 한문으로는 ‘시심마(是甚麼)’ 그러는데, 우리말로는 번역하면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그러거든. ‘이, 것, 이, 무, 엇, 인, 고’하면 일곱 자인데 ‘이, 뭣, 고’하면 석 자란 말이여. 그래서 간단하면서도 의심이 잘 나.
그래서 옛날부터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경상도 말로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이것’을 무엇을 지칭해서 ‘이것’이라 하냐 하면은,
『지금 말하는 바로 이놈』 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계시는데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말이거든. 『듣는 그놈』

그놈이 바로 욕도 할 줄도 알고, 칭찬할 줄도 알고 또 정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할 줄도 알고,
그놈이 한 번 삐뚤어지면 찰나 간에 악마가 되기도 하고, 그놈이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쓰면은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그놈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될 수도 있고, 비로자나 부처님이 될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이 될 수도 있고,
그놈이 나찰 귀신도 될 수도 있고, 독사도 될 수도 있고, 아귀도 될 수도 있고, 지옥찌꺼기가 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어떻게 해서 그놈이 그렇게 찰나간에 천당에 올라갔다가, 찰나간에 지옥에 떨어졌다가, 찰나간에 독사 배때기로 들어갔다가, 찰나간에 돼지가 되었다가, 찰나간에 사람이 되었다 하는 것이냐 그말이여.

신기하고 묘하기가 어디다가 비유할 데가 없어. 그래서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의심을 안 할 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의심을 할려고 해도 자꾸 화두가 잘 잊어버린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분은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고, 분심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안 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분심이 있다면 의심을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일부러 의심을 안 하고 딴 생각을 좀 해볼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을 감으나 뜨나, 앉으나 서나, 그냥 제절로, 자동으로 그냥 ‘이뭣고?’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누가 나한테 욕을 하고 억울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옛날부터서 해 내온 그 습기(習氣)가 있어서 잠깐 부애가 날 듯 하다가도 냉큼 ‘이뭣고?’ 탁! 챙겨 버리면 ‘이뭣고?’거든.
언제 속상할 겨를도 없고, 언제 억울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고, 미워할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하나 탁! 챙길 줄 알면 그냥 이 몸뚱이 요대로 바로 천사가 되고 싶으면 천사가 되고, 관세음보살이 되고 싶으면 관세음보살이 되고,
자기가 일부러 독사가 되고 싶으면 독사도 되고, 호랑이가 되고 싶으면 호랑이가 되고, 지옥에도 한번 가보고 싶으면 가 볼 수가 있다 그말이여.

쏜살같이 지옥에 떨어지다가도 탁!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금방 천상에 올라간다 그말이여.
죽어서 지옥에 가고, 죽어서 천당에 가는 그렇게도 믿어야 하고 사실 그렇기도 하지만, 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죽어서 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찰나간에 생사 문제가 더 소중하고 더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이 몸뚱이 살아서 이렇게 숨 쉬고, 밥 먹고, 옷 입고 할 때에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화두에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두리를 해서 공안을 타파하도록 노력한 사람은 죽어서 어디에 갈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천당에 가게 되면 가는 거고, 인연 따라서 지옥에 가게 되면 가는 것이지,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고, 참으로 죽어서 지옥에 가기 싫고, 축생에 가기 싫거든 지금 ‘이뭣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한 생각 등한히 해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이지, 지옥에 갈 사람이 미리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 생각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가고, 극락에도 가고, 인도환생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과를 믿어도 그렇게 믿어야 옳게 믿는 것이고, 그렇게 믿어야 최상승 학자의 믿음인 것입니다.(26분5초~40분33초)

 

 

 



(2)------------------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관(生死關)을 뚫어 버리면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너그러운 것을 깨닫게 되더라.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고 우리의 생사관을 타파하지를 못하면 이 우주 법계와 산하대지가 이렇게 넓건마는 갈 곳이 없습니다. 어디를 향해서 가겠습니까?

마치 파리란 놈을, 방안에서 문을 닫고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 천장에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가 붙고, 동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와 붙고, 어디가 붙든지 자기가 사방과 상하에 붙지.
지가 붙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이냐? 어디를 갈 것이냐?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고, 생사관을 투득을 하지 못하면 갈 곳이 어디입니까?
죽어서 지옥에 가고, 축생이 되고, 아귀 나찰이 되고, 중음신(中陰身)이 되어가지고 허공계를 헤매면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영원토록 육도윤회를 벗어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화두를 열심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공안을 타파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고 보면 산하대지가 정말 걸림이 없어.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여. 인간의 분별계(分別界)에 떨어지지 아니해. 인간의 분별계란 게 무엇이냐?
탐진치 삼독이 인간의 분별계요. 오욕락이 인간의 분별계요. 희로애락이 인간의 분별계요. 생로병사가 인간의 분별계요. 빈부귀천이 인간의 분별계여.
어디에 떨어지거나 인간의 분별계에 떨어졌다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인간 분별계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냐. 푸른 물, 푸른 산 무엇에 걸릴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북은 여행도 마음대로 못하고, 이사도 마음대로 못하고, 가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가지를 못한다고 그럼니다. 우리야 설악산에 가고 싶으면 설악산에 가고, 오대산에 가고 싶으면 가고, 지리산에 가고 싶으면... 어느 좋은 산이 있다면 누가 못 가게 할 사람 하나 없습니다.
어느 강, 어느 바다가 좋아서 갈라고 하면 어디라도 가지 우리가 못 갈 것이 없습니다.
어디로—부산 살다가 서울에 오든지, 서울 살다 부산을 가든지, 팔도에 제주도가 되었건, 강원도가 되었건, 이사가고 싶은 데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분별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화두를 참구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수무잡하게 되면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똥을 누나, 차를 타나, 빨래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거기에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다맛 의단이 독로하도록 단속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돼. 순수무잡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돼. 시간가는 중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생각도 없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바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다맛 순수하고 깨끗하고 맑은 의단만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지혜롭게, 급한 생각도 없고, 늘어진 생각도 없이 다못 묘한 의심관(疑心觀)만이 독로하도록 해 가는 것입니다. 억지로 힘을 쓸 것도 없고.

그렇게 해서 그 순수무잡한 의단이 독로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 좋다’는 생각도 내지를 말며, ‘이러한 경계가 영원히 갔으면’ 그런 생각도 내면 못쓰는 것입니다. 벌써 그 생각 내면 한 생각에 아주 그 경계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안되면 안된다고 번민을 하고,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가면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을 내고 기쁜 생각을 내. 이것이 다 공부를 바르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의 하는 짓인 것입니다.


잘 잡드리를 해서 그 경계가 깨지지 않도록 의단을 잡드리 해가면 어떠한 경계에 그 풍선이 터지듯이,
풍선을 부는 사람이 풍선을 계속해서 불다가 중단해 버리면 다시 바람이 피식 새 버리고, 그래서 잘 조심스럽게 불어야지 대번에 처음에 느닷없이 되게 불면 커지기도 전에 툭 찢어져 버리는 거고,

풍선을 불 때 요령 있게 잘 불면 점점점점 점점점점 커져 가지고, 커지다 커지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지경에까지 가서 계속해서 잘 불어 나가면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은 팡! 최고로 커질 때 팡! 터지도록.

우리가 화두를 의심해 나갈 때 처음에는 화두를 들면 잠깐 들 때만 의심이 있다가 금방 딴 생각이 들어오고 또 들면 또 그렇고, 그래도 계속해서 들면 나중에는 한 번 들어서 5분도 가고, 10분도 가고,

아침에 일어나서 들던 화두가 아침 먹을 때 까지 있고, 아침 식사 중에도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식사가 다 끝나고도 그 화두가 고대로 있고, 그 화두가 점심 때까지 되도록 그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그 화두가 저녁 먹을 때 까지 잠자리에 들 때에도 화두가 고대로 있다 그말이여.

화두를 든 채 자리에 누웠는데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잘 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있고,

이래서 순일무잡하고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 경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계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펑! 터지는 것입니다.

분별로 따지지 안해도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확연(確然)하고, 천칠백 공안에 확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 버린다 그말이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하고 아는 것이 아냐. 그냥 확 그 공안을 봐 버린 거여.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이렇게 다 실증(實證) 실오(實悟)를 해서 우리에게 그 조사의 어록(語錄)과 법어(法語)를 통해서 소연(昭然)하게 그 증거를 다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화두를 타신 분은 그전에는 이 법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그 화두와 불명과 오계를 설하는 법회를 가졌었는데 이번에는 바로 이 법회 시간에 화두를 바로 일러 드립니다.
아까 조실스님께서도 일러 주셨지만 다시 한번 화두를 일러 드립니다.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화두를 한번 따라서 해 보십시오. ‘이뭣고?’ 해 보세요. (신도분들)‘이뭣고?’

실지로 여러분이 참선하실 때에는 그렇게 소리를 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
‘이뭣고?’를 길게, ‘이뭣고......?’ '고'를 길게 빼는 것입니다. 숨이 다할 때까지 ‘이뭣고?’
숨이 다 나갔으면 또 스르르르 숨을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 의심을 스스로 이렇게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하는 것은—관도 역시 하나의 생각인데,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이뭣고?’ 속으로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觀)한다’고 하는 것.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데, 이건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지로 자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해보면 스스로 그 의심관(疑心觀)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의심관을 잘 터득을 못하지만, 일구월심(日久月深) 자꾸 이 호흡과 맞춰서 해 나가다 보면 그 알 수 없는 의심관, 그 묘한 그 의심관을 스스로 터득하게 돼.
그 의심관을 터득을 해야 참선의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 알 수 없는 그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야 망상을 끊으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고, 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거기서 의심이 끊어져.

속이 상하고 분심이 나고 할 때에도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자꾸 몇 번 하면 치밀어 오른 놈이 스르르르 가라앉아 버리거든, 이거 해보신 분은 다 아는 것입니다.

큰 의심을 가진 사람은 결국 크게 깨닫는 거고, 의심이 적은 사람은 깨달아도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40분34초~56분2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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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석가모니(釋迦牟尼) : sakya-muni의 음역. 샤카족의 성자(聖者)•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다잡이 ;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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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인투득상두관~’ ; ①『석문의범(釋門儀範)』 다비문(茶毘文)—쇄골편(碎骨篇) 참고. ②卍新纂續藏經 제65책 《高峰龍泉院因師集賢語錄》 제13권 ‘涅槃法語門—散灰’ 참고.
*상두관(上頭關) ; 조사관(祖師關).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투득하다(透得-- 통할 투,얻을 득) ; (사람이 무엇을)막힘이 없이 환하게 깨닫다.
*화두(공안)를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생사관(生死關) ; 생사의 관문.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분별계(分別界) ; 분별 경계(分別境界).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확연(確然)하다 ; (어떤 사실이나 증거가)아주 분명하고 확실하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실증(實證) ; 실제로 수행해서 깨닫는 것. 실증의 반대는 비증(比證 추론에 의해 깨닫는 것).
*실오(實悟) ; 진실의 깨달음.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소연(昭然)하다 ; (일이나 이치가)밝고 뚜렷하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5. 14. 14:42

§(119) 신심, 분심, 의심(삼요) / 참선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진실한 포교(布敎)란?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22분.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여법(如法)하게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한 믿음이 서야 하고, 철저한 의심이 있는 곳에 큰 분심이 일어나고, 철저한 믿음과 큰 분심이 있는 곳에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는 대의정이 돈발(頓發)하는 것입니다.
대의정(大疑情)은 오직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의 밑바탕 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방에 살아도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하지 아니 한다면 10년 20년을 선방에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돈과 쌀을 쌓아 가지고 50년 60년을 절을 왕래하고 선방을 드나든다 하더라도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점심밥 싸 가지고 경치 좋은 관광지 왔다갔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철저한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 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의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汗漫)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 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 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 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 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 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른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 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도리가 다르냐 틀리냐?” 이렇게 만공 스님께서 조실 스님께 물으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29분53초~51분1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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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핏대를 세우다 ;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몹시 화를 내거나 흥분하다.
*한만(汗漫)히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소홀하거나 무심하게.
*대신(代身)하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그것의 역할이나 책임을 떠맡아 하다.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부양가족(扶養家族) ; 자기가 돌보고 있는 가족.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식이란 말이다。불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목숨(慧命)을 이어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의 불길 ; ‘매우 빠르게 번지는 벌판의 불길’이라는 뜻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퍼지는 세력이나 기세를이르는 말. *요원(燎原 화톳불·들불 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게송) ‘有眼石人齊下淚  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4. 13. 12:38

 

 

§(세등26) 여종 욱면의 신심 / 공부하는데 핑계 대지 말라 / 부처님의 수행에 대한 거문고 줄 비유 / (게송)서왕한래춘부추~.

방아 찧고 절에 가면 밤은 벌써 이경(二更)이라, 한 소리 염불마다 부처되기 원하더니, 육신등공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였네, 일 많다 핑계 말고 욱면처럼 정진하소.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세상에서 사업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집안 살림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몸이 아퍼서 못한다’고 이러쿵 저러쿵 온갖 핑계를 대고,
‘병이 나으면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살림이 좀 나아지면 하리라’ 이렇게 핑계를 대시지 말고, 당장 이 자리부터서, 이 시간부터서 한 생각 한 생각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이뭣고?’


도 닦는 것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니라. 너무 거문고 줄을 세게 매지도 아니하고, 너무 느슨하게 매지도 아니하고, 가장 알맞게 거문고 줄을 매야만 정말 아름다운 곡을 탈 수가 있듯이, 이 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6)—기미년 동안거 해제 법어(80.01.17) (세등26)

 

(1) 약 20분.

(2) 약 11분.


(1)------------------

신라(新羅) 경덕왕 때, 지금 진주에 아간(阿干) 귀진(貴珍)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큰부자라 많은 종들을 두고 살았는데,
여러 수십 명의 친구들과 계(契)를 모아 가지고 그 계로 모여진 돈으로써 미타사(彌陀寺)라고 하는 절을 하나를 딱 지었다 그말이여.

절을 지어 놓고는 스님네를 모셔다가 놓고 법문도 듣고, 또 자기 계꾼들도 그 절에 매일 가서 염불을 하는데,
그 귀진이라고 하는 집에 여자 종이 하나 있었는데, 종의 이름은 욱면(郁面)이다 그말이여.

욱면이라고 하는 여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인을 따라서 자기도 따라가 가지고 염불을 하는데,
자기는 종이라나서 법당에를 들어가지를 못하고, 주인과 스님네는 법당에 들어가서 정근(精勤)을 하는데, 자기는 마당에 선 채 정근을 한다.

어떻게 열심히 하던지 마당에 서서 밤이 새도록 정근을 하는데,
그 주인이 그 욱면이를 보고, 종의 신분으로서 건방지게 따라와서 염불한다고 ‘당장 집으로 가라!’ 그리고는 그 이튿날부터서는 곡식을 두 섬씩을 줘 가지고 ‘너, 밤새 이 곡식을 방아를 찧어라’

그렇게 절에 못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일을 시켰는데, 욱면이는 초저녁부터서 어떻게 열심히 방아를 찧던지 두 섬 곡식을 다 찧어 놓으면 이경(二更)이 되었다 그말이여.

이경이 지난 뒤에 달음박질을 해서 절로 쫓아와 가지고 절에 와서 정근을 하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 12시까지 그 곡식 두 섬을 다 찧어 놨으니 몸이 피로할대로 피로하기 때문에 정근을 하다가 졸음이 와 가지고 까딱하면 넘어질라고 그러고, 넘어졌다 다시 쓰러지고.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서는 마당에다가 말뚝을 두 개를 박어 놓고는, 자기 손바닥에다가 송곳으로 구녁을 뚫어서 노끈으로 손을 묶어 가지고 딱 말뚝 위에다 올려 놓고, 쩜매 놓고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무서운 정근을 했다 이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하고, 이틀을 그렇게 하고, 한 달을 그렇게 하고, 두 달을 그렇게 하고 해서 9년 동안을 그렇게 무섭게 정근을 했어.

무슨 원(願)을 세웠든가? '금생에 결정코 불신(佛身)을 이루리라. 성불(成佛)을 하리라' 이렇게 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정근을 해가지고 9년만에 확철대오를 했는데,
가만히 ‘내가 과연 전생에 무엇이었길래 금생에 이렇게 남의 집 종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9년만에사 이렇게 도를 통했는가’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전생에 자기도 중이였었다 그말이여.

중이였었는데 그때 천수백 명의 대중과 더불어 ‘현생(現生)에 불신을 얻으리라’하고, 그렇게 맹세를 하고 같이 모다 도를 닦다가—자기도 따라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차츰 타락을 해가지고 안일(安逸)하기를 기다리고, 편안하기를 바래고, 그럭저럭 세월을 지내면서 파계(破戒)를 하고 그러면서 그 무서운 시주것을 많이 소모를 했다.

그래 가지고 죽어서—자기가 그때 도를 닦던 절이 어디냐 하면은 부석사, 영주에 가면 지금도 부석사가 있어서 그 무량수전이 국보에 잡혀 있지만—그 영주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 절 소가 되어 가지고 십수년간을 참,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말이여.

짐은 무겁고 힘은 모자라서 어물어물하면 수없이 모진 매를 맞고, 그렇게 십수년을 고생을 하다가,
하루에는 절에서 절로 경전을 큰 수레에다가 실어서 불경(佛經)을 운반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자기 마음이 후련하면서 눈물이 나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말이여. 그러다가 그날 저녁에 그 소가 죽었어. 그 소가 소의 몸을 벗었다 그말이여.

벗고서 그 다음에 어디에 태어났냐 하면은 이 진주 땅에 아간 귀진이라고 하는 그 사람 집에 태어났다.
그 귀진이란 사람은 전생에도 부자로서 그 영주 부석사에 많은 곡식과 의복과 약과 모다 그런 것을 많이 시주를 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귀진이라고 하는 신도가 전생에 시주한 그 시주것을 이 욱면이라고 하는 사람이 전생에 부석사 중으로 있으면서 그 시주것을 많이 받아먹었다 그말이여.
그 많이 받아먹고 도를 끝까지 잘 닦아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면 그 빚이 다 갚아졌을 텐데,

그놈을 잘 먹고, 잘 입고 그러면서 도는 철저히 닦지 않고 방일을 하고, 그럭저럭 잘못했기 때문에 소가 되어서 부석사 일을 한량없이 하고 수없는 매를 맞다가, 마지막에 그나마 경전을 실어다가 준 그 공덕으로 소의 몸을 벗고 귀진이 집에 종으로 태어났다 그말이여. 전생의 빚을 갚기 위해서 그 종으로 태어났어.

그랬다가 금생에 그 미타사 절에 가서 손바닥에 구녁을 뚫어 가지고 말뚝 머리에다가 짬매 놓고, 그 9년 동안을 피나는 고생을 하고,
낮에는 주인네 일하고, 밤에는 방아를 찧고, 그리고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끌고 가서 말뚝끝에다가 손을 짬매 놓고 그 9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피나는 정근을 했다 그말이여.

그랬던 일이 다 생각이 나는데, 그런 생각이 머리에 딱 떠오르면서 그 전생에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니까 너무 부끄러워서, 부끄러운 생각 속에 잠겨 있는데,

하늘에서 ‘욱면 낭자(娘子)는 법당 안으로 들어가시오.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염불을 하라’ 이런 소리가 하늘에서 들리거든.
그 소리를 듣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던 스님이 나와 가지고, 마당에서 정근을 하는 욱면이를 법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말이여.

들어가서 부처님 앞에 수없이 절을 하는데 법당 안, 법당 밖 도량에 이상한 향내가 풍기면서 하늘에는 장엄한 음악 소리가 풍겼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욱면이는 계속해서 절을 하더니, 느닷없이 몸이 솟구쳐 천장으로 올라가서 법당 천장을 뚫고 저 하늘 높이 솟아올라갔다.

그래서 대중이 모다 그 뚫어진 구녁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밖으로 나가서 이상한 음악 소리가 울리고 그 향내가 진동하는데, 아! 그래 놀래고 이상스럽게 생각했는데,
며칠 있다가 보니까 그 산의 중턱에 욱면이가 신던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어. 또 얼마 있다 보니까 산기슭에 욱면이의 몸이 내려와 가지고 앉아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욱면이의 신발이 떨어진 자리에는 보리사(菩提寺)란 절을 짓고, 욱면이가 몸뚱이 떡 앉아 있는 산기슭에는 제이보리사(第二菩提寺)란 절을 지어서, 그것이 지금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일자무식(一字無識)인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따라서 절에 가 가지고 그 우연히 그런 신심이 나 가지고,
방아를 찧으라고 하니까 그 방아를 저녁내 찧어 가지고 놓고는 새벽길로 절로 쫓아가 가지고 정근을 하는데, 잠이 오니까 손바닥에 구녁을 뚫어 가지고 그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다.

우리는 혜가대사가 팔을 끊어서 달마대사 앞에 바치고 법을 배우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모습을 들었고,
욱면이라고 하는 일자무식의 종이 손바닥에 구녁을 뚫어 가지고 9년 동안을 용맹정진을 해가지고, 육신(肉身)으로 등공(騰空)한 그러한 영험담(靈驗談)을 들었습니다.


방아 찧고 절에 가면 밤은 벌써 이경(二更)이라, 한 소리 염불마다 부처되기 원하더니,
육신등공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였네, 일 많다 핑계 말고 욱면처럼 정진하소.
나무~아미타불~

이 자리에 계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비구니 수좌 여러분.
여러분도 혜가대사처럼 위법망구하고, 여자 종 욱면이처럼 그러한 신심과 분심(憤心)과 견고한 뜻을 가지고 정진을 하신다면, 결정코 금생에 대도를 성취할 것을 나는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보증을 하겠습니다.

옛날 도인(道人)도 ‘그렇게 열심히 해서 3년을 해가지고 칠통(漆桶)을 타파(打破)를 하고 견성(見性)을 못한다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리라’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세상에서 사업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집안 살림하느라고 시간이 없다’ ‘몸이 아퍼서 못한다’고 이러쿵 저러쿵 온갖 핑계를 대고,
‘병이 나으면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살림이 좀 나아지면 하리라’ 이렇게 핑계를 대시지 말고,

당장 이 자리부터서, 이 시간부터서 한 생각 한 생각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아무리 일이 많다 해도 남의 집 종노릇을 하고 있는 욱면이라고 하느 여종만큼은 일이 더 많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세등선원에서 한철 동안을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한 대중 여러분!  그리고 제방(諸方)에서 해제를 마치고 여기에 참례(參禮)하신 수좌(首座) 여러분!
신심있는 단월(檀越)들이 바친 곡석과 의복, 자기의 공부도 뒤로 미루고 우리를 외호해 주신 이 본방...(녹음 끊김)...용맹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신라 때 욱면만큼의 고생에는 미치지 못했지 않은가 싶습니다.

우리의 신심, 우리의 용맹정진은 한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전부 다 손바닥에다가 구녁을 뚫으라는 말씀도 아니고, 모두 다 칼로써 왼팔을 끊으라고 권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분들이 한 그 목숨을 바칠 만한 그 신심!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고,
법을 위해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 무서운 정진, 그 굳은 9년 동안을 하루같이 한 그 철썩 같은 뜻!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소신연비(燒身燃臂)를 하지 아니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어렵다’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당장 손가락에다 불을 지르고, 몸을 갖다가 장작을 쌓아 놓고 몸을 태우고, 이렇게 경전의 말씀을 받아들여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것을 참고 이길 만한 그 참을성 있는,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는 그런 굳은 뜻을 우리는 배워야 하고, 몸을 갖다가 태울 만한, 몸을 헌신짝같이 버릴 만한 위법망구적인 그러한 정성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형식적인 것을 배워 가지고 손가락을 태우고, 형식적인 것을 배워 가지고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태우고, 도끼를 가지고 손가락을 짜르고, 이러한 어리석은—물론 그 신심은 물론 찬양할만 하지만,
그 신심이 어떻게 신심을 내느냐? 지혜로운 신심,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 알맹이 신심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28분3초~48분3초)

 

 

 



(2)------------------

부처님 당시에 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일생 동안에 너무 호강을 하고 귀염을 받아서, 한번도 그 발로 땅을 디디지 않았기 때문에 발바닥에 털이 안났습니다.
그래서 발바닥에 털 안난 사람이 있다해 가지고, 인근 마을 사람은 물론 저 멀리 사는 사람까지 그 소문을 듣고, 발바닥에 털 안난 사람을 구경하기 위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소문이 퍼지고 퍼지고 해가지고, 부처님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처님과 인연이 있어서 그 사람은 출가를 해서 부처님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떻게 용맹정진을 했던지 몸에 병이 났습니다.

몸에 병이 나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불법에 인연이 없어서 병만 나고 도는 이루지를 못하고, 차라리 내가 이렇게 병이 걸려 가지고 고생을 하다가 도(道)도 이루지 못하고 죽을 바에는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편히 먹고, 편히 자고,
그러면서 내게 한량없는 많은 재산이 있으니, 이 재산을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에 공양도 올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도 하고 또 사회복지를 위해서 희사도 하고 이러면서 내가 복을 지으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퇴속(退俗)할 마음을 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만히 정중에 살펴보니 제자 하나가 퇴속할 마음을 낸 것을 아시고, 그 제자에게 가서 “네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엇을 잘했느냐?”
제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거문고를 잘 뜯고, 거문고에 취미와 소질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냐. 그러면 그 거문고 줄을 되게 세게 매면 소리가 어떻드냐?”
“너무 세게 매면 소리가 제 음가가 나오지를 아니하고 까딱하면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 그러면 느슨하게 매면 어떻드냐?”
“너무 느슨하게 매면 소리가 제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곡을 탈 수가 없습니다”

“그래, 도 닦는 것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니라. 너무 거문고 줄을 세게 매지도 아니하고, 너무 느슨하게 매지도 아니하고, 가장 알맞게 거문고 줄을 매야만 정말 아름다운 곡을 탈 수가 있듯이, 이 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게으름을 부리고, 너무 배불리 먹고, 너무 편안하게 잠만 자고, 해태에 빠져도 도를 이룰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고행을 지나치게 하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것이라, 도는 얻기도 전에 병 먼저 나가지고 결국은 퇴타(退墮)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내가 출가해 가지고 온갖 설산 안에 있는 많은 신선들을 찾아다니면서 한 것이 무엇이었더냐. 불 속에도 들어가고, 가시덤불 위에도 걸어다니고, 밥도 굶고 잠도 안 자고, 갖은 고행을 누구 못지않게 했지만 나는 도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나친 환락에 빠진 것도 도에 장애요, 지나친 고행도 도에 장애다. 모두가 성스러운 수행이 되지를 못한다. 그것을 내가 깨달았드니라.
네가 어찌 나의 제자로서 나의 잘못된 과거를 네가 다시 밟을 수가 있단 말이냐”

그 제자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을 듣고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여법(如法)하게 도를 닦아 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혜가대사의 말씀, 또 이 욱면이라고 하는 신라 때 종의 말씀을 듣고,
‘옳다! 내가 오늘 저녁부터서는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자지 아니하고 용맹정진을 하리라’ 이러한 마음을 내신 분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혜롭게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도로 필요한 만큼은 먹어줘야 하고, 최소한도로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난다든지 그러한 퇴타의 인연이 없이 결정코 금생에 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닦으면 반드시 장애가 일어나 가지고 도를 얻기 전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최소한도로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재워 주고, 재워 주어야 그 이튿날 눈을 떴을 때 맑은 정신이 있어서 성성(惺惺)하게 도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밥도 너무 잘 먹고 너무 기름지게 먹은 것은 그것도 재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안 먹어도 못쓰는 것이여.

 

적당히 먹어 주고, 적당히 재워 주고, 적당히 입혀 줘야, 장애가 없이 도를 얻는 것이니 만큼 이 도는 지혜롭게 닦아야지, 신심과 용맹과 지혜가 있어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여.
바른 스승을 만나야만 신심이 나고, 바른 신심이 나야만 분심이 나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어리석게 닦기 때문에 도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바른 지도를 받고 한 사람이 어찌 퇴타하며, 어찌 마장(魔障)이 생기며, 어찌 도를 이룰 수가 없겠습니까.


서왕한래춘부추(暑往寒來春復秋)하고  석양서거수동류(夕陽西去水東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더위가 가고 추위가 오는구나. 봄이 지나면 다시 또 가을이 오는구나. 석양에는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는구나.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나개친증도지두(那箇親曾到地頭)오
나무~아미타불~

이 망망(茫茫)한 우주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개친증도지두(那箇親曾到地頭)냐, 그 가운데 몇 사람이 친히 대도를 성취할 사람이 나올 것이냐.(48분4초~59분49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욱면 이야기 ; [삼국유사(三國遺事)] 감통편(感通篇), ‘郁面婢念佛西昇(여종 욱면이 염불하여 서쪽 하늘로 올라가다)’
*아간(阿干) ; 신라 때, 십칠 관등(十七官等) 가운데 여섯째 등급(等級)의 벼슬을 이르던 말. 육두품이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관등이다.
*정근(精勤) ; ①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이나 공부에 아주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힘써 일하는 것. ②기도를 할 때 별념(別念)이 없이 일심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염불하는 것.
*이경(二更) : 하룻밤을 五경으로 나눈 둘째이니, 밤 9시~ 11시를 말함.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일자무식(一字無識) ;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음. 또는 그런 사람.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등공(騰空 오를 등,하늘 공) ; 승천(昇天). 하늘에 오름.
*영험담(靈驗談 신령할 영,증험 험,이야기 담) ; 기원(祈願)이나 신앙에 대하여, 신불(神佛)의 불가사의한 감응(感應)이 있는 것을 말한 이야기.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견성(見性) : 성품을 본다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참례(參禮) ; 예식, 제사, 전쟁 따위에 참가하여 관여함.
*수좌(首座)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단월(檀越) ; 시주(施主). dana-pati 의 음역.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소신연비(燒身燃臂) ; 소신공양(燒身供養). 자기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바침. 또는 그런 일.
*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난행(難行) ; ①행하기 어려움. ②고된 수행.

 

 

 



------------------(2)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성성(惺惺) ; 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게송) ‘서왕한래춘부추~’ ; 卍新纂續藏經 제65책 <禪宗頌古聯珠通集 36권> 설암조흠(雪巖祖欽) 스님 게송.
*망망하다(茫茫-- 아득할 망) ; 넓고 멀어 아득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4. 11. 15:42

 

 

§(세등26) (게송)일휘상인참춘풍~ / 혜가대사의 위법망구 / 바른 스승의 중요성 / (게송)일생장환주인공~ / 화두는 가깝게 들어야 한다.

법(法)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남에게 이것을 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란 얼마든지 동서남북으로 찾고 또 찾아서 찾을 수가 있겠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여.


바른 스승을 만나서 철저히 믿고 여지없이 자기의 선입관을 다 버리고 오직 지도한 대로만 여법(如法)하게 닦아 간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혜의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참선법은 저 멀리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뭣고?’한 바로 그놈을 찾는 것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뭣고?’하는 놈」을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송담스님(세등선원No.26)—기미년 동안거 해제 법어(80.01.17) (세등26)

 

(1) 약 20분.

(2) 약 8분.


(1)------------------

일휘상인참춘풍(一揮霜刃斬春風)헌데  설만공정낙엽홍(雪滿空庭落葉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리시비재변료(這裏是非才辨了)인댄  반륜한월침서봉(半輪寒月枕西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휘상인참춘풍(一揮霜刃斬春風)이다. 서릿발치는 칼을 한번 휘두르니 봄바람을 비는 거와 같고,
설만공정(雪滿空庭)에 낙엽홍(落葉紅)이라. 눈이 가득한 빈 뜰에는 이파리가 떨어져서 붉다.

자리시비(這裏是非)를 재변료(才辨了)인댄  반륜한월침서봉(半輪寒月枕西峰)이니라.
이 속에 옳고 그른 도리를 알겠느냐? 반바퀴 차운 달이 서쪽 봉우리에 벼개 했느니라.


부처님으로부터서 28조(二十八祖) 달마대사는 중국에 건너오셔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셨습니다. 일백사십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 가지고 중국에 오셨습니다.
중국에 오셔서 맨 처음에 양무제(梁武帝)를 만났습니다. 양무제가 사신을 보내서 달마스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달마대사를 친견한 양무제는 중국 역대 천자 가운데에 가장 신심이 돈독한 그러한 천자였습니다. 어떻게 신심이 장했던지 자기도 몸소 가사를 수하고, 많은 절을 짓고, 불경을 인포하고 스님네를 많이 외호를 했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뵙자마자 “짐(朕)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했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되오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시기를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廓然)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달마 스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짐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대사가 대답하시기를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달마대사의 뜻을 양무제는 알지를 못하고 달마대사를 푸대접을 했습니다.

그길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벽을 향하야 가부좌를 하고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했습니다.
9년 동안을 묵무언(默無言)하신 채 면벽관심을 하고 계시는데, 그때 신광(神光)대사라고 하는 한 승려가 ‘인도로부터서 대도인이 오셔서 소림굴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는데 그때가 12월 초아흐레경 엄동설한이라 초저녁부터서 눈이 내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굴 밖에 서서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서 있었는데, 밤새 눈이 퍼붓어 가지고 허리까지 눈이 차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광대사는 조끔도 움직이지 안했습니다.

밤이 깊어서 삼경을 지나고 새벽이 가까웠습니다.
달마대사가 너무 측은하게 생각을 하시고 “네가 그 눈 속에 밤새도록 서 있어 무엇을 구하느냐?”
신광대사가 대답하기를 “오직 큰스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널리 감로(甘露)의 법문을 열어 가지고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한 도리는 무량겁을 두고 용맹정진을 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음으로써 얻어지거늘,
어찌 너와 같은 소덕소지(小德小智), 적은 덕과 적은 지혜로 가벼운 마음과 건방진 마음으로 어찌 참불법의 도리를 바랜단 말이냐. 공연히 그러한 마음으로 헛되이 수고를 해봤자 소용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광대사가 그 말씀을 듣고 살며시 허리춤에 찼던 칼을 뽑아 들고, 자기의 왼팔을 탁! 쳐 가지고 스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때 칼로 왼팔을 치니까, 눈 속에서 새파란 파초(芭蕉) 이파리가 쑤욱 솟아올라 가지고 땅에 떨어지려는 팔을 받아 냈습니다. 파초에 받쳐진 팔을 들어서 달마스님 앞에 바쳤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달마 스님께서 ‘음, 그만하면 도를 닦을 수가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을 하시고,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해서 몸을 바쳤느니라. 네가 이제 내 앞에 팔을 끊었으니 그만하면 법을 구할 수가 있겠다. 네 이름을 신광이라 하지 말고 혜가(慧可)라고 해라”
‘그만했으면은 법을 구해 가지고 가히 지혜를 얻을만 하다’해서 혜가라고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혜가대사는 달마대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을 가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진리법을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니라”

혜가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제자의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너의 마음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네 마음을 편안케 해 주마”

혜가대사가 가로되 “아무리 마음을 찾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해서 너의 마음을 다 편안해 마쳤느니라”

2조 혜가대사가 달마 스님께 법을 구할 때 밤새도록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서 있어서 눈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대사는 ‘너와 같은 소지소덕(小智小德)과 경심만심(輕心慢心)으로 무슨 법을 구한단 말이냐?’
여기에서 팔을 꺾어서 올리고 비로소 달마대사는 ‘과연 그만했으면 법을 구할만 하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남에게 이것을 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스승으로부터 얻을 것은 없지만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희유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스승을 인(因)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느냐?
왜 스승으로부터 얻을 것도 없고, 스승이 줄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없이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던가?

이것은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란 얼마든지 동서남북으로 찾고 또 찾아서 찾을 수가 있겠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여.

마치 자기의 눈으로 온갖 세상의 것을 다 볼 수 있지만, 자기가 자기 눈은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눈은 거울을 빌리지 아니하면 자기의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거울 없이 자기 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여.

어째서 자기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보고, 희고 검고 붉고 누르고 한 것을 다 보면서 자기의 눈은 볼 수가 없느냐?
거울을 가자해서만이 자기의 눈을 볼 수가 있는데,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자기의 눈은 자기의 눈의 그림자일 뿐 참 자기의 눈도 아니다 이거거든.
거울에 비친 자기의 눈은 자기의 눈의 영상이요, 자기의 눈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지 자기 눈은 아니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있는 그 주인공은 하늘을 보고 파란 줄을 알고, 산을 보고 높고 낮차운 것을 알고, 물을 보고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소리를 듣고 새 소리다, 개 소리다, 차 소리다 온갖 소리를 다 분간하고,
냄새를 맡고 냄새가 구수하다, 구리다, 온갖 냄새를 다 코를 통해서 알고, 혀로써 온갖 맛을 짜고 싱거운 것을 알고, 몸으로써 춥고 더운 것을 알고, 생각으로써 슬프고 외롭고 성낼 줄을 알면서,

 

성낼 줄 알고, 희고 검은 줄을 알고, 짜고 싱거운 것을 아는 그놈은 과연 무엇으로써 보며, 무엇으로써 들으며, 무엇으로써 맛보며, 무엇으로서 냄새를 맡으며, 무엇으로써 만져 볼 수가 있는가?

눈으로 아무리 볼래야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아무리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고, 코로 냄새를 맡을래야 맡을 수 없고, 혀로 맛볼래야 맛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 없는 그놈을 보고 깨닫는 이것이기 때문에,
스승 없이는 아무리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피를 백 번을 토한다고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여.

바른 스승의 지도가 없이 이것을 깨달을라고 몸부림을 쳐봤자 애를 쓰면 쓸수록 빨리 미치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스승 없이 자기 혼자 산중에 들어가 가지고 토굴에 들어가서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밤잠을 안 자고 곡식을 끊고 풀 이파리와 나무 열매를 가지고 연명을 하면서 고행을 해봤자,
조금 식(識)이 맑아져서 겨우 된 것이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아니되고, 잘못되면 미치거나 삿된 종자가 되고 마는 것이여.

바른 스승만 만나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만 한다면 결정코 자기를 깨닫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처음~20분12초)

 

 



(2)------------------

어렵다 어렵다하지만 사실은 무엇이 깊이 숨어갔고 있고, 먼 데가 있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깝고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 쉽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멀고 깊고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른 스승만 만나고 위법망구적으로만 한다면 마치 목마른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 대주면 그 소는 꿀꺽꿀꺽 물만 마시면 갈증이 풀리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끌고 가는데 싫다고 뒤로 버틴다든지, 끌어다 갖다 대주어도 그 물이 독이 섞여 있나? 이리 의심을 하고 안 먹는다든지 이러면 그 소는 갈증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철저히 믿고 여지없이 자기의 선입관을 다 버리고 오직 지도한 대로만 여법(如法)하게 닦아 간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혜의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생장환주인공(一生長喚主人公)한데  불수인만회불문(不受人謾回不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일성성하처거(今日惺惺何處去)오  만산송백기비풍(滿山松柏起悲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생 동안을 ‘주인공(主人公)아! 주인공아!’ 이렇게 길이 불러서, 불수인만회불문(不受人謾回不問)이라.
어떤 도인(道人)이 일생 동안을 방에 들어가서 ‘주인공아!’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사람에게 속지 말어라’
‘아무개야!’ ‘예!’ 자기가 자기를 불러 놓고 대답을 하고서 ‘사람에게 속지를 말어라’ 이렇게 일생 동안을 공부를 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금일성성하처거(今日惺惺何處去)오. 오늘 성성(惺惺)한데 어느 곳을 향해서 가느냐?
만산송백기비풍(滿山松柏起悲風)이라. 만산(滿山)에 소나무와 잣나무에 슬픈 바람이 일어나는구나.
‘만산 송백에 슬픈 바람 소리가 일어난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소식입니다.

이 도리는, 참선법은 저 멀리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뭣고?’한 바로 그놈을 찾는 것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뭣고?’하는 놈」을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저 부모한테 나기 전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하니까, 30년 된 사람은 ‘30년 전에 부모 배에 태어나기 전에 그놈이 무엇이냐?’ 무량겁을 윤회를 해 왔는데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기 전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이렇게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지금 당장 ‘이뭣고?’한 거기에서 찾아야, 가깝게 찾아야 한다.

‘이뭣고?’  ‘지금 '이'하는 이놈이 무엇고?’ 언제라도 바로 이 ‘이뭣고?’한 여기에서 찾어라.
‘이뭣고?’ 알 수 없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곳에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 그놈을 묵묵히 관조(觀照)해야 한다 그말이여.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빨리 깨달을라고, 깨닫기를 기다리고, 깨닫기를 바래고, 누가 나를 깨닫게 해주기를 바라는데,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다.(20분13초~28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일휘상인참춘풍~’ ; [청매집(靑梅集)] (청매인오 스님) 상권 ‘少林斷臂’ 참고.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달마대사, 혜가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확연(廓然)하다 ; 넓게 텅 비어 있다.
*감로(甘露) ;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그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인(法印) ; ①묘법(妙法)의 인(印). 진리의 표시. 부처님의 가르침의 표시. 3법인(三法印)·4법인(四法印) 등이 있음. ②이치.
*경심(輕心) ; 경솔(輕率 말이나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움)한 마음.
*만심(慢心) ; 근본 번뇌의 하나.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자랑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깔보는 마음. 우쭐거리는 마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부처님의 가르침. ④본성.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식(識) ; ①인식작용. 식별작용. 대상을 다르게 아는 마음의 작용. ②마음·뜻과 같음. 마음.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2)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게송) ‘일생장환주인공~’ ; 卍新纂續藏經 제65책 <禪宗頌古聯珠通集 31권> 불국백(佛國白) 스님 게송 참고.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이뭣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 분류 ‘화두(공안)’ 참고.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3. 26. 13:07

 
§(118) (게송)법법본래무소주~ / 참마음을 일으켜 공부를 끝장내라 / 조실스님 꿈에 지옥고 광경 / 3가지의 도에 나아가는 첩경(徑)과 5가지의 철저한 바른 믿음.
 
중봉(中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철 두 철 또는 10년 20년 참선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고 공부가 진취가 없는 사람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참마음’, 참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공부가 끝장이 나지를 않는다”
 
생사 문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한번 듣고서 그 문제에 관해서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똥을 누거나 길을 가거나 차를 타거나 생각 생각이 염두(頭)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참마음을 발(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사 문제, 일대사 문제를 대해서 속으로부터—아무리 의식적으로 일으켜서가 아니라—저절로 솟구쳐 오르는 참마음이 있어야만 우리의 공부의 끝장이 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8) - 80년 동안거해제 법어(80.03.01) (용118)

 

(1) 약 21분.

(2) 약 9분.

 

 

(1)------------------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한데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한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法法)이 본래무소주(本來無所住)한데, 법법, 일체법(一切法), 온갖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이것이 바로 법법(法法)입니다. 이 온갖 법이 본래 주(住)한 바가 없다.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라. 주(住)한 바 없는 곳에 추심(追尋)을 끊으라.

 

하늘에는 구름이 날으고, 땅에는 물이 흐르고,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흰눈이 내리고, 농부는 쟁기를 가지고 논으로 들어가고, 나무꾼은 지게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이 모든 것이 본래로 주(住)한 바가 없는 법이다. 주(住)한 바 없는 곳에서 무엇을 찾는단 말이냐?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이니, 양오(陽烏)는 태양입니다. 태양이 어젯밤에 서쪽 산으로 넘어갔는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라. 오늘은 예나 다름없이 새벽 숲 위로 떠오르는구나.

 

 

오늘은 삼동결제(三冬結制), 기미년 동안거(冬安居)가 마지막 끝나는 해제일입니다. 동안거 해제일이요, 또 작년 10월 15일부터 시작한 백일기도가 오늘 회향(廻向)을 하는 날이고, 또 우리나라 옛날부터서 전해 내려오는 정월 대보름날로써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께 차례를 올리는 천도(薦度) 법요식(法要式)이 있겠습니다.

 

삼동 석 달 동안 참 오랜만에 강추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 스님네와 선방의 보살님네들 모다 정진을 열심히 해주셨고, 그 동안에 여러 차례 열리는 법회에 많은 사부대중들이 참여를 하셔서 법문을 듣고 또 정진들을 하셨습니다.

 

해제(解制)날은 자자(自恣)일이라 해 가지고 한군데 모여서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하고, 또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잘못된 점을 지적을 받아서 고맙게 생각하고 자기의 허물을 고쳐서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精進)하는데 채찍을 삼는 그러한 날인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각자 지나간 석 달 동안 정말 출가(出家) 본질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참되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정진을 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히 반성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해제라 해서 삼동의 안거가 끝나기는 했지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공부는 오히려 오늘부터 더욱 채찍을 맹렬히 가하면서 정진을 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중국의 고봉(高峰) 스님, 선요(禪要)의 그 고봉 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이신 중봉(中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철 두 철 또는 10년 20년 참선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고 공부가 진취가 없는 사람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참마음! 참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공부가 끝장이 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마음’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 나한테 도저히 참을라야 참을 수 없고, 잊을라야 잊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억울하고 분이 날만한 욕을 해왔을 때 참을 수도 없고, 아무리 마음을 돌려서 이해 할려고 해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말을 듣자마자 오장육부가 활딱 뒤집어지면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밥을 먹어도 그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잠을 잘려고 자리에 들어가도 잠이 오지 아니하고, 차를 타나, 길을 걸어가나, 일을 하거나 도무지 그렇게 억울하고 분한 욕을 듣고서는 기어코 해명(明)보다도 복수를 하던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풀리지를 않은 이러한 경우처럼,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나의 생사 문제—생사가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주검이요, 한번 죽으면 지옥이나 축생이나 무량겁을 두고 다시 생사의 수레바퀴 속에 괴로움을 받을 일.

"생사 무상, 생사 문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한번 듣고서 그 문제에 관해서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똥을 누거나 길을 가거나 차를 타거나 생각 생각이 염두(頭)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참마음을 발(發)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어렸을 때 해인사에서 도반 소년이 죽는 것을 보시고, 바로 그날 저녁에 저승에를 가셔 가지고 지옥(地獄)에서 지옥고 받는 그 현상을 목격을 하고,

 

그 사람을 맷돌에다 콩나물처럼 여러 사람을 한 다발씩 해서 맷돌 구녁에다 넣으면 큰 집 덩어리만한 아랫 맷돌은 왼쪽으로 돌고, 위짝은 오른쪽으로 돌면서 십여 명씩 사람을 다발로 집어넣으면 칠칠칠칠 갈리면서 시뻘건 피가 피고름으로 갈려서 나오는 그런 현상이며,

사람을 머리꼭대기부터서 톱으로 썰어 내리는 광경이며, 펄펄 끓는 구리쇠 물을 목에다가 따라 붓는 광경이며, 그런 것을 보시고 너무나 무서워서 소스라쳐 깨시고 그 길로 서장(書狀)을 배우시다가 서장을 덮어버리고 선방(禪房)으로 나가셨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사 문제, 일대사 문제를 대해서 속으로부터—아무리 의식적으로 일으켜서가 아니라—저절로 솟구쳐 오르는 참마음이 있어야만 우리의 공부의 끝장이 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는 데 첫째는 신심, 둘째는 분심, 셋째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 세 가지 요긴한 것[三要]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 신심(信心), 대관절 그 첫째 갖추어야 할 신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첫째는 자기 몸 가운데 있는 주인공,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혀를 가지고 맛을 볼 줄 알고,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아는 놈,

성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줄도 아는 그 주인공이 삼세제불(三世諸佛)과 더불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고 하는 사실, 나에게도 부처님과 같은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첫째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주인공이 무량겁을 두고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온갖 색상, 우리의 의식으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하고, 오욕락(五欲樂)에 빠지고 그것을 익히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똑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셋째는 고조사(古祖師)들이 남겨 놓으신 한 말씀 한마디가, 공안(公案)에 대한 말씀이라든지 또는 법문답(法問答) 하신 것이라든지, 일언반구(一言半句)가 마치 하늘에 뻗쳐 서 있는 큰 칼과 같아서,

그 고인(古人)의 일언반구에 대해서 등한히 그걸 따진다든지, 알음알이로 그것을 짐작을 해 볼라고 한다든지, 공연히 남의 흉내를 내서 법담(法談)을 한다든지, 이러다가는 그 큰 칼에 나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엄숙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선방에 한 철, 두 철, 세 철, 다니다 보면 큰스님네 법문도 듣고, 선배들의 법문답 하는 것을 보고, 그래 가지고 조그마한 소견을 그것을 가지고 희롱을 하고,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고, 이러한 조그만한 것을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만한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 이러한 태도는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진정한 수행인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일용공부(日用工夫)에 있어서 다못 자기가 공부를 짓지 아니한 것 그것을 두려워할지언정,

가다듬고 또 다잡이 하고 이렇게 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1분 1초라도 등한히 보냄이 없이 계속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가지고 생각 생각이 정미(微)롭게 공부를 지어 나간다면 결정코 확철대오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에 가서, 이 생사 문제—생사가 무상해서 찰나 찰나에 주검의 문을 향해서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이 생사 문제가 결정코 적은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을 하고,

만약 내가 큰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결정적인 지조를 가지고서 나의 힘으로 결단코 칠통(桶)을 타파(打破)할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삼도(三途)의 고해(苦海) 속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 말한 이 다섯 가지, 이것이 바로 수행인이 가져야 할 가장 간절(懇切)하고 간절한 명심해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믿고 그리고서 공부를 지어나간다면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믿음에 대해서 과연 자기가 그만큼 철저하게 빈틈없이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날이 점검을 하고 반성을 해 나가야 할 줄 압니다.(처음~20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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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빨리 도(道)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도를 닦아 가는 사람은 첫째, 지혜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 어떤 것이 지혜의 눈이냐?

 

이 세간(世間)에 태어난 이 몸과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모든 경계(境界)와 일체 시비—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한 일체 시비(是非)와 누구는 미웁고 누구는 사랑하고 하는 증애(愛)와,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하는 취사심(捨心), 무엇은 나에게 유리하고 무엇은 나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는 득실(失)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고 어떻게 하면 빨리 죽는가 하는 수명(命)에 관한 문제, 어떻게 하는 것은 나에게 괴롭고 어떻게 하는 것은 나한테 즐겁다고 하는 고락(苦樂)의 문제,

 

이러한 것들이 다 꿈속의 인연이다고 하는 것을, ‘꿈속에서 꿈꾸는 일이다, 꿈속의 인연이어서 조금도 그러한 것들이 실(實)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조파(破)하는 것입니다, 간파(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두철미(尾) 간파를 하고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탐진치(貪瞋) 삼독(三毒) 가운데에 치(癡)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봐야 할 것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이러한 세간의 신심(身心), 일체 경계라든지, 일체 시비·증애·취사·고락·득실, 그런 문제들이 실(實)다운 것으로 믿고 그것을 향해서 갖은 계략과 몸부림을 치는 것을 갖다가 ‘어리석음[癡]’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꿈속의 인연이다. 그래서 실다운 것이 아니고 꿈같이 허망한 것이고, 부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을 하고 간파를 하면 이것을 바로 ‘지혜의 눈이 밝아졌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종상불조(從上佛祖),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의 설하신 모든 말씀과 유불선(仙) 삼교(三敎)의 성현의 말씀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수많은 차별법이 다 한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소견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바로 이성(理性)에 통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치 이(理)자, 성품 성(性)자, ‘이치에 통달을 했다. 이성에 통달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늘부터 지금부터 미래가 다하도록 내가 만약 나를 깨닫지 못한다면,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정코 이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리라, 쉬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바로 지조(操), 이러한 굳건한 뜻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지혜의 눈, 둘째는 이성에 통달하고, 셋째는 지조가 견고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결(缺)해도 우리의 도는 완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혜의 눈은 얻었지만 이성에 통달하지 못하고 지조가 굳건하지 못한다면,

하나의 무사인(無事人), 일 없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그 사람은 다못 스스로 일 없는 사람이 되어서 소요(遙)는 할지언정 불법을 자아를 완성을 해서 자리이타(自利利他) 할 수 있는 진정한 부처님 제자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둘째인 이성에는 통달했으되 지혜의 눈을 뜨지 못했거나 지조가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영리하기는 할지언정 진정한 참 불제자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지조는 견고하되 지혜의 눈을 뜨지 못했다든지 이성에 통달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담판한(擔板漢)이라. 이 사람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려고 그러고, 맨몸으로 한강을 건너뛸려고 하는 지극히 우직한 사람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눈을, 또 이성에 통달, 셋째는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이런 철저한 뜻을 갖춘다면 불일성지(不日成之)다. 이 사람은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오늘 해제 법요식에 참석하신 여러분!

과연 이상의 세 가지의 도에 나아가는 첩경(徑)과 다섯 가지의 철저한 바른 믿음이 자기에게 얼마만큼 갖추어져 있었는가? 현재 얼마만큼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서 냉정하게 스스로 점검을 해보시고,

 

오늘 이후로 이 세 가지의 첩경과 다섯 가지의 믿음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이 없도록 단속을 하고 채찍을 가해서 결정코 이 몸 있을 때 생사,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해 주셔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20분58초~29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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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p93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追(추)쫓다,구하다 *尋(심)찾다 *上(상)위,오르다 *曉(효)새벽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양오(陽烏,暘烏 태양 양/까마귀 오) ; 태양(太陽)을 달리 이르는 말.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 불사(佛事 -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를 할 때 행하는 의식.
*자자(自恣 스스로 자/마음대로 자) ; 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에 수행자들이 한곳에 모여 자신의 잘못을 고백(告白)하고 참회(懺悔)하는 의식.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32~133.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고봉 스님 ; 분류 ‘고봉스님(선요)’ 참고.
*선요(禪要)『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법(嗣法 이을 사/법 법) ; 선가에서 스승으로부터 법(法 깨달음)을 이어받음. 또는 이어받은 사람.
*중봉(中峰) 스님 ; (1263~1323) 중국 원나라 스님. 불명은 명본(明本). 항주 전당 사람. 보응(普應), 환주도인(幻住道人), 환주노인(幻住老人), 중봉보응국사(中峰普應國師)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금강경, 원각경, 법화경, 전등록 등을 보고, 후에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사관(死關)을 찾아 심요(心要)를 묻고, 금강경을 읽다 뒤에 샘물이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활연히 깨쳤다.
고봉의 법을 받고는 일정하게 있는 곳 없이 배(船)에서 있기도 하고 암자에서 거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북정자적(北庭慈寂) 스님이 편집한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30권이 있다. 『광록』안에는 「산방야화(山房夜話)」  「동어서화(東語西話)」  「신심명벽의해(信心銘闢義解)」가 포함되어 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불교]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 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염두(頭) ; 마음속. 마음의 속.
*저승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염라국(國, 염라대왕이 가스리는 나라)이라고도 한다.
*지옥(地獄 땅 지, 감옥 옥) ; ①고통이 가득찬 세계. 현세에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사후 그 보답을 받는 곳. ②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소스라치다두려움이나 놀라움 따위 깜짝 놀라 몸을 갑자기 떠는 듯이 움직이다.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일언반구(一言半句)한마디 말과  구절이라는 으로아주 짧은  이르는 .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법담(法談) ; 선사(禪師)들이 서로 법문을 묻고 대답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잡이 ;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정미하다(微-- 정미할 정/자세함 미) ; 정밀하고 자세하다.

*분심(憤心)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삼도(三途, 三塗)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 지옥•아귀•축생의 생존.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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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변화, 간(間)은 가운데·간격을 뜻함.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조파(破) ; 석가모니가 지혜의 밝고 환한 빛으로 범부(凡夫 번뇌에 휩싸여 진리에 어두운 이)의 무명(無明 근본번뇌, 어리석은 마음)을 비추어 깨우치는 일.

*간파하다(看破--) ; 속내(드러나지 않은 이나 숨겨 마음)를 꿰뚫어 알아차리다.

*철두철미(尾)처음부터 까지 빈틈없고 철저하게.

*유불선(仙)유교 불교 도교 아울러 이르는 .

*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춘추 전국시대에 활약한 유가·도가·묵가·법가 등 수많은 학자와 학파들의 총칭.

*지조( 뜻 지/절개 조) ; 원칙 신념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꿋꿋한 의지 기개.

*결하다(缺-- 부족할 결) ; ①(무엇 갖추어야  )갖추지 못하고 빠뜨리다. ②(갖추어졌어야  )빠져 있거나 부족하다.

*소요( 거닐 소/서성거릴 요) ;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

*자리이타(自利利他) ;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것.

*담판한(擔板漢 멜 담/널판지 판/사나이 한) ; 판자를 어깨에 메어 한쪽을 보지 못하는 자, 곧 전체를 보지 못하고 편견을 가진 사람을 말함.

*불일성지(不日成之) ; 어떤 일을 며칠 안 걸려서 이룸.

*첩경( 빠를 첩/지름길 경) ; 지름길. 가깝게 질러서 가는 빠른 길.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12. 9. 13:04

 

 

§(755)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신심(信心)·분심(憤心)·의단(疑團)—삼요(三要).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정진만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고 하는 그 철저한 신심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55)—2012년(임진년) 동안거 결제(12.11.28) (용755)


약 14분.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해. 당당한 대도가 밝고 분명해서,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다, 사람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져 있어. 낱낱이 다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그 탓으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다. 무량겁을 만 가지 모양으로 현출(現出)을 한다.

우리의 본성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로부터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우리가 똑같이 그 본성은 차이가 없건만은 한 생각 어긋진 탓으로 해서 무량겁을 두고 윤회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태어날 때부터서 같이 온, 무량겁을 같이 윤회해 온 우리의 본성을 깨달아서 생사윤회(生死輪廻)로부터서 해탈을 하는 그 방법이 바로 방금 조실스님의 법문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깨달아서 생사윤회로부터서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승이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특별히 무슨 법을 설하기 위해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12개 선방에 방부를 들이고 삼동에 결제에 들어간 262명의 도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께 오늘 결제에 같이 조실스님께서 평생 설법을 하시던 이 법보전(法寶殿)에 모두가 다 운집을 하셨으니,
용화사 법보선원 원장으로서 앞으로 석 달 동안 무장무애하게 조실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정진하자고 여러분께 당부를 하고 인사를 하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비록 열두 개 선방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 멀고 가까운 각 선방에서 정진을 하시지만, 오늘 이 조실스님께서 평생 동안 설법을 하신 이 법보전에 같이 모인 뜻은 각기 자기 선방에서도 녹음 법문을 들으면 되지만은,

특별히 이 자리에 모이신 것은 조실스님의 그 생생한 법문을 같이 들음으로 해서 그 신심과 그 결의로 각기 선방에 돌아가서 석 달 동안 정진을 하되,
오늘 이 자리에서 법문을 같이 들은 그 감동과 느낌을 석 달 동안을 간직을 하면서 각 그 선방에서도 엄숙하고 경건하게,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정진을 하자, 그런 뜻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진은 죽비를 치고 입선을 하고, 또 죽비를 치고 방선을 하는데, 그거야 겉으로 보면 다 똑같지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어떠한 신심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느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것이 삼요(三要)인데 ‘믿을 신(信)’자 신(信)이라는 것은 ‘무엇을 신(信) 하느냐?’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정진만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고 하는 그 철저한 신심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분심은 ‘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내가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분심(憤心)!
분심이 없고 늘어져 가지고 흐지부지 하고 분심이 없는 정진은 앉으면 졸고, 방선하면 잡담하고 그렇게 석 달 동안을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분심이 항상 탁 몸에 있어야 화두를 들어도 여법하게 들고, 방선을 하더라도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선방에 방부만 들였지, 그럭저럭 지낸다면 신심도 없고, 분심도 없이 지낸다면 석 달 동안 금방 아무것도 한 바가 없고 정진에 힘을 얻지 못하고 그렇게 금방 석 달을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심(憤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이 있는 거기에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단이 철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단이 철저하지 못하면 혼침과 의리선(義理禪)에 빠져 가지고 — 묵조사선(默照邪禪)에 빠져 가지고 석 달 아니라 삼십 년을 지내도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이미 무자(無字) 화두나 판치생모(板齒生毛)나 그 밖에 여러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타서 다 이미 화두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만은.

화두는 이것 했다가 안 되면 저걸로 바꾸고 이리저리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화두를 탔으면 되고, 안 되고를 따지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단으로 의관(疑觀)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자(無字)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 뭣고~?’

무슨 화두가 되었건, 알 수 없는 의심, 의단(疑團)이지.
거기에 대한 이론으로 따지거나 사리(邪理) 상량(商量)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법(如法)하게 화두를 들어 나가면—그렇게 한다고 해도 문을 닫고 입선을 하면, 여러 대중이 호흡으로부터서 나쁜 공기가 나와 가지고 공기가 탁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혼침에 빠지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허리가 꼬부라지고 고개가 수그러지면 졸음이 오니까,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정히 앉아서 숨을 들여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정진을 지어 나가면 그릇 갈라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여러가지 면에서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중언(重言), 거듭해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만은,
어쨌든지 석 달 동안 건강하게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삼요를 갖추어서 정진을 잘 하시고 해제날 건강한 모습으로 또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간 하안거에는 240명이 방부를 드리고 정진을 했는데 이번 동안거에는 262명이 방부를 드리고 정진을 하게 되었다고 보고가 되어 있습니다.
방부 드리는 수좌(首座) 스님네가 불어나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현상이고, 기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겨울철 날씨가 추워도 지혜롭게 건강을 관리하면서 정진을 잘 하시길 부탁합니다.(끝)(처음~13분5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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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방해가 없음.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헌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헌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허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 칠백 공안 중의 하나.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

•승우(勝友)라고도 함.
*사리(邪理) ; 그릇된 이치나 생각.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①상인이 물품을 판매할 때, 서로 그 가치를 재서 결정하는 것. ②따지고 헤아리는 알음알이.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11. 22. 14:46

 

 

§(복전암26) (게송)돈오심원개보장~ /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 (게송)미원상한취원지~ / 보배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이 몸뚱이 속에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땅에 넣어도 썩지 않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는 영원불멸한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있어서, 그놈을 깨달으면 불생불멸한 생사해탈하는 법을 부처님께서 그것을 가리켜 놓으셨다.


밖에서 구(求)한 것은 다 마찬가지여. 무엇이고 밖에서 얻은 것, 밖에서 구한 것은 마음대로 잘 얻어지지도 않지만은 설사 마음대로 얻어졌다 해도 그것이 오래오래 내 것이 아니여.


인연 따라서 직장도 가져야 하고, 무엇인가 자기에 맞는 사업도 해야 하고, 그 하는 가운데 자기 안에 있는 보물을 찾는 공부도 같이 해 나가야 한다 그거거든.


**송담스님(복전암No.26)—지장기도 천도재 회향 (93년) (복전암26)


약 20분.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하니  각소거진불염진(卻笑居塵不染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다.
마음의 근원을 몰록 깨달아서 자기 안에 있는 보배 창고를 열어제끼면 인연 따라서 나고 인연 따라서 죽는,
인연 따라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고 하는 인연 따라서 생겨나는 이 몸뚱이의 본래의 몸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
연꽃이 그렇게 깨끗하게 곱게 향그럽게 그렇게 피지마는 그 연꽃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뿌리가 대관절 어디에다가 뿌리를 박고 있는가? 그걸 보면은 썩어서 새까맣게 썩은 흐리 속에 뿌리를 박고 있더라.

연꽃이 그렇게 깨끗하고 곱게 피니까—저 산중에 석간수(石間水), 맑고 깨끗한 석간수에는 연꽃이 뿌리를 박지를 못하고 거기서는 살 수가 없어.
그렇게 곱고 깨끗한 연꽃이지만 그 뿌리는 저 밑에 썩어 문드러진 진흙 속에다가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각소거진불염진(卻笑居塵不染塵)이다.
우리의 사람 —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졌어.

그래서 이 몸뚱이 속에는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과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더러운 것을 엷은 가죽주머니 속에다 담아 놓은 것이다.
조금만 상처를 내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피요, 오줌이요, 똥이요, 고름이요 그렇다 그말이야.

그런 더러운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한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우리의 불성(佛性)이 그 속에 떠억 안주(安住)를 하고 있더라.

그런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 몸뚱이를 무척 아끼고 잘 먹이고, 입히고, 씻고 단장을 하고 그러면서 어쨌든지 이 몸뚱이에 조금만 해로운 것은 잘 안 할라고 하거든.
이 몸뚱이에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무척 생각하는 것 같지마는 아무리 이 몸뚱이를 아끼고 보약을 먹이고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인다 해봤자 칠팔십 많이 살아봤자 백 년.

대부분의 사람은 칠팔십에 이 세상을 하직을 하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에 수없는 업(業)을 짓고 그 업에 따라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 뿐이다.

다행히 우리는 이 몸뚱이 속에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땅에 넣어도 썩지 않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는 영원불멸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이 있어서,
그놈을 깨달으면 불생불멸한 생사해탈하는 법을 우리의 부처님께서 그것을 가리켜 놓으셨다 그말이거든.

그 법을 우리가 몰랐다면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보잘것없는 더러운 오물주머니로써 죄만 퍼 짓다가 그 죄업에 따라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말이여.

이 몸뚱이 속에 그러한 보물이 들어있는 줄 참으로 안다면 어찌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소중한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 이 몸을 어떻게 위해야 잘 위한 것인가?

부정한 방법으로 명예를 취하고, 권리를 취하고, 재산을 취하면서 그저 잘 먹고 잘만 입고 좋은 집에서만 사는 것이 이 몸을 참으로 위하는 것인가?

이 몸은 잠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어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이 몸을 바꾸게 되지만,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한 주인공은 이 몸이 끝났다고 해서 아주 끝난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야.

잘살거나 못살거나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그저 그럭저럭 한 세상 지내고 말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고 비록 이 몸은 인연 따라서 잠시 이루어졌다가 금방 버리고 가는데 업에 따라서 다시 또 새로운 몸을 받아서 또 살게 되거든.
그러기를 수백억만 생을 거치면서 윤회(輪廻)를 하게 된다 그말이거든.


미원상한취원지(未圓常恨就圓遲)한데  원후여하이취휴(圓後如何易就虧)인고
나~무~아~미~타~불~
삼십야중원일야(三十夜中圓一夜)거늘  백년인사총여사(百年人事摠如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미원상한취원지(未圓常恨就圓遲)타가,
달이 보름달이 될 때까지는 ‘어서 빨리 둥근달이 되었으면, 왜 이렇게 날이 더디 가는가. 빨리빨리 날짜가 지나가 가지고 빨리 둥그란 달이 떴으면’하고 날이 더디 가는 것을 한(恨)을 하다가.

완전히 보름달이 된 뒤에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또 이그러져 버리는가?(圓後如何易就虧) 보름달이 지나면 열엿새되면 조금 줄어지고, 열이레가 되면 더 줄어지고, 열여드레가 되면 더 줄어지고 해 가지고.

둥글어질 때까지는 굉장히 더디 둥글어진 것처럼 그러던 것이, 한번 둥글어진 다음에는 금방금방 이지러져 가지고 조각달이 되고 만다.

한 달 삼십 밤 가운데에 완전히 둥근 날은 단 하룻밤 밖에는 없다 그말이야.(三十夜中圓一夜)
둥근달이 완전히 둥근달이 되어 가지고 좀 며칠간 그 둥근 상태로 있었으면 참 좋으련만 그렇게 더디 둥글어졌던 달이 완전히 둥글어진 다음에는 금방금방 이지러져 버린다 그말이거든.

백년인사(百年人事)가 총여사(摠如斯)다,  백 년 동안의 사람의 일이 모두가 다 이와 같더라.


부모님이 자녀를 낳아 가지고 그 어려서부터서 그놈을 키워서 먹여서 입히고 가리켜서, 그 정성과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들여서 그렇게 키워 놓으면 장가들고 또 자녀를 낳고, 세상에 나가서 또 출세를 하고 그러는데.

좀 건강해서 살 만큼 되면 그런 상태로 좀 오래오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행복하게 살고 그랬으면 좋겄만은,
애써서 길르는 과정은 그렇게 많은 정성을 들여서 해놨는데,
금방 주름살이 잡히고 금방 늙어서 허망하게 늙어서 병들고 그러다가 이리 죽고 저리 죽고 다 가버린다.

그 애써서 공부해 가지고 좋은 직장을 만나서 살 만큼 되면은 갖은 재난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업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 애를 써서 이뤄났지만은 이리저리 사고가 나고, 이리저리 문제가 일어나 가지고는 결국은 문을 닫게 되고,
관공서에 모다 취직하는 것도 그렇고, 이 세상에 한 가지도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그말이여.

애를 써서 좀 되었는가 싶으면 금방 이리저리 다 무너져 버리고 남는 것은 원망과 한탄과 서글픔 밖에는 없다 그말이여.

재산, 애정, 명예, 권리, 인간의 안락, 백만 가지가 다 마찬가지다. 하나도 믿을 것이 못돼.
하나도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 그것을 획득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없어.

우리가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거기다 바쳤으면 무엇인가 믿을 만한 결과가 나와 주어야 하는데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이러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느냐?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느냐?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느냐?

밖에서 구(求)한 것은 다 마찬가지여. 무엇이고 밖에서 얻은 것, 밖에서 구한 것은 마음대로 잘 얻어지지도 않지만은 설사 마음대로 얻어졌다 해도 그것이 오래오래 내 것이 아니여.
언젠가는 저절로 물러가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빼앗기거나 결국은 놓치고 마는 것이여.

내 몸 안에서, 내게에서, 안에서 구한 것은 좀 어렵고 힘이 들런지는 모르지만,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얻어지는 것이고, 한번 얻으면은 영원히 누가 훔쳐 갈 수도 없고,
열심히 열심히 잘 키워 나가면 설사 이 몸뚱이를 버린다 하더라도 금방 또 새 몸을 받게 되고, 새 몸을 받으면 한번 얻은 것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보배가 우리 안에 있어.
그것을 구하는 일만이 정말 우리가 생명을 바칠만한 곳이고, 우리의 모든 것을 거기에다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살면서 세속의 공부도 아니하고 세속의 사업도 아니하고 그러라는 것은 아니여.
인연 따라서 직장도 가져야 하고, 무엇인가 자기에 맞는 사업도 해야 하고, 그 하는 가운데 자기 안에 있는 보물을 찾는 공부도 같이 해 나가야 한다 그거거든.

그 공부를 해놓지 아니하면 언젠가는 정말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게 되고, 늙어 가서 너무너무 서글퍼서 살 수가 없는 것이여.(처음~19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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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無異元來禪師廣錄 第十九 에서 '示余愼爾居士'.
*몰록 ; 단박(에). 그 자리에서 바로 곧.
*보배 ; ①아주 귀하고 소중한 물건. ②아주 귀하고 소중하며 꼭 필요한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흐리 ; 수렁의 뜻을 가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있어 발을 디뎠을 때 푹푹 빠지는 논의 흙이나 방죽의 바닥에 오랫동안 쌓인 무른 흙을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불생불멸(不生不滅) :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진여(眞如)의 경계(境界).
진여란 우주만유에 보편(普遍)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본체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진리의 본질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 ‘미원상한취원지~’ ; 송익필(宋翼弼)의 『구봉집(龜峯集)』 1권 ‘망월(望月)’ 참고. *虧(휴)이지러지다.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9. 24. 07:22

§(013) 신심, 분심, 의심 / 참선은 마군이와의 전쟁 /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는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올바르게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은 다 이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시는 분은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참선법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팔만사천 마군이를 물리침으로서 무량겁의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고, 당장 현세에 그러한 도적놈에게 시달리지 않고 대자유·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최고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차라리 깨닫지 못한 중생으로써, 초학자로써 숨을 거두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서는 '알았다'는 생각을 갖지 맙시다.


**송담스님(No.13)(참선법E) - 76년 1월 관음재일 법문(76.01.24.음) (용013)

 

(1) 약 9분.

 

(2) 약 13분.


(1)------------------

참으로 참선(參禪)을 철저히 할라면은 인자 ‘생각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생각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갖느냐? 처음에 몸을 바르게 하는 법 말씀드렸지요? 그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하는 법을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에는 마음, 생각하는 것을 바르게 하는 법을 알아야 됩니다.

이 생각을 바르게 할라면은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부처님과 같이 또는 달마(達摩) 스님이나 서산대사나 사명당이나 그러한 과거의 도인(道人)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올바르게만 이 공부를 하면은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서는 참선은 성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뭣한 사람들은 “말세는 참선했자 소용없고 아미타불 불러야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말씀은 그 말씀에 해당하는 그 사람에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처님의 정법에 입각해서 말씀드린다면은 “올바른 신심으로 올바르게 지도를 받아서 올바르게만 하면은 아무리 말세라 할지라도 다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말세도 상관이 없고, 여자도 상관이 없고, 노인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다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는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올바르게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은 다 이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시는 분은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나는 나이도 많고, 인제사 불교에 왔기 때문에 도저히 견성성불은 가망 없고 그저 인연이나 맺었다가 내생에나 하자.’ 이런 생각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결단코 금생에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또 금생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해야 이 공부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지, 그 믿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전쟁도 아무리 적군이 많고, 아군이 수효가 적고 무력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써 이길 각오를 하고, 만약에 이기지 못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대들면은 10대 1 밖에는 안 되는, 100대 1 밖에 안 되는 적은 군사력을 가지고도 능히 전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참선도 전쟁입니다.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가 눈으로 코로.. 아까 조실스님께서 여섯 가지 도둑놈(六賊)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는, 팔만사천의 도둑놈이 여섯 문(六門)으로 틈만 있으면 침범해 들어옵니다.

우리의 마음을 왕에다 비교합니다. 심왕(心王).
심왕성(心王城)인데, 이 몸뚱이는 심왕의 성(城)인데, 그 성에 여섯 문(六門)이 있습니다.
눈, 코, 귀, 입, 몸뚱이, 의(意) 여섯 가지 문이 있는데, 그 여섯 문을 통해서 팔만사천의 마군이의 군사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들어와 가지고 이 심왕을 공격해 들어오는 이러한 무서운 전쟁입니다.

그래서 국가와 국가의 전쟁은 군인들이 싸우고, 국민은 그 마음이 단합해 가지고 뒷받침만 하면은 직접 총칼은 안 들어도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마음의 왕을 공격해 들어오는 팔만사천의 마군이 군사는 우리가 직접 싸워야 됩니다. 직접 싸우지 않고 남이 우리의 싸움을 막아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놈을 못 막고 그 팔만사천의 마구니 군사에 진 사람은 결국은 지옥에 가는 것이고, 그놈을 싸워서 끝까지 내가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이겨낸 사람은 극락에도 가고 견성성불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은 무량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하다가 조금 착한 일 하면 천당에 갔다가,
악한 일 하면 짐승이 되기도 하고, 성을 많이 내면 독사나 구렁이가 되기도 하고, 또 더 사람을 죽이고 못된 죄를 퍼 지으면은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참선법은 이 팔만사천 마군이—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팔만사천 마군이를 물리침으로서 무량겁으로 윤회하는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고,
당장 현세에 그러한 도적놈에게 시달리지 않고 대자유·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최고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첫째, ‘하면 된다’고 믿어야 됩니다.

둘째에 가서는 무엇 때문에 과거의 부처님과 보살님과 도인들은 이 문제를 진즉 해결을 해서 그런 성현이 되어 가지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해탈하시고 대해탈도를 증득을 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 하느라고 이렇게 육도윤회를 하면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행복을 얻지 못하고, 앞으로 눈 한번 감으면은 지옥에 떨어질런지 축생이 될런지 모르는 이러한 환경에 놓여져 있는가?

생각해 보면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배불리 먹고 호강하고 살면은 그것이 전부가 될는지 모르지마는,
이 인과의 법칙—이 문제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육도에 윤회할 그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그 이치를 우리가 알고 믿고 느끼는 사람이라면은,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렇게 해탈을 하지 못하고 윤회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속에서 분통이 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분심(憤心)이 나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다행히 내가 금생에 이 사람 몸 받아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만났다. 늦게 만났지마는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다행한 마음과 아울러서, 그러니 알고서 안 할 수가 있느냐? 나도 해야겠다’고 하는 용맹심이 속에서 북받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게을러 빠져가지고, 하거나 말거나 육도윤회를 하거나 말거나, 남이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면은 그러한 사람은 이 공부를 해 봤자 별 수가 없습니다.

용맹심(勇猛心), 분심(憤心), 아까 처음에 신심(信心)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심과 용맹심이 없을 수가 없고, 그것이 있어야 그 다음에 이 ‘이뭣고?’ 화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의심!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의심하는 거여.(23분30초~31분43초)

 

 

 



(2)------------------

이것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믿고 고대로 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무엇 때문에 조실스님께서 팔십 고령(高齡)에 이르도록 가만히 당신 공부하시고 조용히 지내시면은 편하실 텐데,
팔십 고령에 혈압은 그렇게 200이 넘나드시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 피를 토하는 그러한 간곡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한 그런 법문을 마지막 열반하신 날까지 그렇게 해주실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이 법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렇게 여러분들의 생사해탈하는 데에 유일한 묘방(妙方)이기 때문에 마지막 이 사바세계를 하직하신 그날까지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큰스님의 법은(法恩)을 갚는 길은 오직 여러분 자신들이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길 (법문 끊김) ...묘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첫째, 몸을 바르게 가질 것, 둘째 바른 호흡을 할 것, 셋째에 가서 바르게 생각을 가다듬는데,

생각을 바로잡을려면은 첫째 나도 성불할 수 있다고 믿고, 나도 하면은 부처님과 같이 그러한 성현(聖賢)이 될 수 있다고 믿고,
그 다음에, 무엇 때문에 나는 오늘날까지 이러한 좋은 방법을 몰랐던가? 알고서도 왜 그렇게 철저히 공부를 못했던가? 이것에 대해서 분심과 용맹심을 내시고,

마지막에 가서는 화두에 대한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을 가지셔야 됩니다. 의심이 간절할수록에 의심이 크고 의심이 클수록에 크게 깨닫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방법은 100번을 말씀드리고 1000번을 말씀드리더라도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아주 뼛속에 이것을 새겨야 됩니다.
가슴속 깊이 새겨서 언제, 어디서, 누가 묻더라도 이 참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으셔야 됩니다.

애매하게 갈팡질팡 이러면 된 것인가? 저러면 된 것인가?
저기 가서 들으면 이렇게 말하고, 여기 와서 말하면 저렇게 말하고 해서,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어느 방법이 옳은가 모르겠다.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 용화사 전강 조실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방법이 가장 옳은 방법이고 그렇게 하면 틀림없다고 믿고,
어디 가서 다른 절이나 다른 스님네 법문을 듣더라도 다 좋은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들을지언정,

이 참선해 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여기 와서 듣고 그렇게 조금 해보다가, 또 저기 가면 그대로 해보다가 갈팡질팡 하면 공부가 못쓰게 되는 것이니깐,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여기 조실스님께서 지도하신 대로 아주 딱! 고정을 해서 그렇게만 해 가시고,
다른 법문을 듣거나, 다른 경책(經冊)을 보거나 하는 것은 전부 내 공부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정성스럽게만 받아들일 뿐이지,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갈팡질팡 하시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 공부해 들어가다가 아주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그러한 신기하고도 묘한 그러한 싱그러운 경지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절대로—그리고서 그 나타난 것을 보고서 ‘아! 이것이로구나!’ ‘참! 좋구나!’ ‘바로 이것이 도통이구나’—이런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나타나건, 또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건, 또는 꿈속에 비몽사몽간에 별별 신기스런 경지가 나타나도 그것은 ‘헛것’이 보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타나서 뭐라고 설법을 하셔도 그것은 ‘헛것’입니다.

‘환(幻)’—꼭두각시, 환(幻)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것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말고 더욱 정신 차려서 화두를 들고 나가셔야 됩니다.

만일에 그러헌 신기한 경지가 나타났다고 해서 거기에서 기쁜 마음을 내 가지고 그놈을 따라가다 보면은 여러분은 영영 헤어나지 못할 마군이의 소굴로 흘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떨어졌다 하면은 그 다음에는 부처님이 출현하셔도 그 사람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하시다가 다 한 철 내지 두 철, 세 철 열심히 하다 보면은 자기 나름대로 견처(見處)가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어떠헌 화두·공안을 보아도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지고, 어떠한 공안을 보아도 하나도 의심이 안 나고,
다 자기 나름대로 공안에 대한 낙처(落處)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어지는 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천하 없이도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지는 공부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중생심으로 중생의 사리(邪理)·상량(商量)으로 알아지는 것은 천하 없는 묘한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알았다는 생각이 있으면은 언제라도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점검을 받어야 됩니다.

옛날에는 선지식이 “너 아니다. 그거 옳게 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은 거기에서 분심을 내 가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기어코 바로 깨달을려고 노력을 했건만,
지금 세상은 선지식이 아니라고 하면은 그때부터서 그 선지식을 돌아서서 비방하고 자기가 아는 척하고 그러한 폐단이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차라리 깨닫지 못한 중생으로써, 초학자로써 숨을 거두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서는 '알았다'는 생각을 갖지 맙시다.

설사 한 공안, 두 공안 보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힘을 생각해 보면 압니다.
이러한 소견 가지고 과연 부처님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대 조사와 같은 법력(法力)에 있어서 도력(道力)에 있어서 덕행에 있어서 부처님과 역대 조사에 비교해서 손색이 없겠는가를 언제라도 자문자답을 해 보십시오.

해 봐서 이래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할 수가 없고, 부처님과 같다고 할 수 없을 때에는 언제라도 자기의 견처(見處), 자기의 얻은 바를 깨끗이 버리고서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 간절히 공부해 나가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 족(足)함을 삼으면은 그 공부는 거기에서 중단이 되는 것이고, 얼마 안 가면은 퇴타(退墮)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결단코 이 사상(思想)은,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이 사상 하나는 철저해야 될 줄 압니다. 하물며 설사 바른 소견(所見)이라 하더라고 그렇습니다.
그렇거든 바른 소견이 아닌 공부 중에 환(幻)으로 나타난 그런 걸 가지고, 얻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에 차질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그 이상 슬프고 통탄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부디, 이 공부는 조급한 마음 갖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거문고 줄 고르듯이, 기타 줄 고르듯이, 너무 강하게 졸라매도 떨어지면 못 쓰는 것이고, 너무 줄이 늘어지면은 소리가 제 소리가 안 나는 것이고, 가장 적당하게 줄을 골라야만 제 음량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공부도 몸과 호흡과 마음을 가장 이상적이고 지혜스럽게 고르게 하고, 단속함으로써 우리의 공부는 나날이 진취하고 급기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이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의심이 나거든 다른 큰스님을 찾아가도 좋고, 또 여기에 오시면은 문의를 하시면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정성스럽게 말씀을 해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여기 법회 때마다 참 이렇게 많이 오시는데, 오셔서 이 법당에 들어오시면은 오시는 대로 앞에서부터 차츰차츰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은 오시는 대로 차츰차츰 차츰 뒤로 가시게 되면은 좀 늦게 오신 분이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 법회장이 소란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먼저 오셔서 뒤에 가서 떠억 앉아 계시면은 나중에 오신 분들은 그 사이로 오셔서 앞으로 오시기를 꺼려하시고, 대단히 법회 중에 소란하게 되면은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분들이 법문 듣는데 장애가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오시는 족족 앞에서부터 차곡차곡 차곡 이렇게 앉으시면은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좀 해주시고.

그리고 이 관음재 법회는 언제라도 10시 반에 딱 시작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은 조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시면은 제 시간에 참여를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늦어지시겠지마는, 늦게라도 참석하신 것은 안 참석하신 것보다는 낫지마는 기왕 참석하실 바에는 제 시간에 참석을 하셔서 앞자리부터서 차곡차곡 이렇게 앉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것으로 끝맺겠습니다. 다음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다음에 영단(靈壇)에 간단한 천도식이 있겠습니다.(42분33초~54분5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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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달마 스님, 서산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 ; 많은 수의 악마의 군세(軍勢)를 뜻함.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 팔만이라 하기도 한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육적(六賊) ;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도둑에 비유한 말.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심왕(心王) : 의식 작용의 본체。객관(客觀) 대상에 대하여 그 일반상(一般相)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여기에 육식(六識), 팔식(八識), 구식(九識)의 구별이 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용맹심(勇猛心) ; 용감하고 사나운 마음.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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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묘방(妙方) ; 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견처(見處) ; 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사리(邪理) ; 그릇된 이치나 생각.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①상인이 물품을 판매할 때, 서로 그 가치를 재서 결정하는 것. ②따지고 헤아리는 알음알이.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9. 7. 13:17

§(765) (게송)약이색견아~ / 일념(一念)단속 / 삼요(三要) / 생사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지금 세계 인구가 56억이라고 하는데 그 많은 인간들이 정말 무상(無常)을 느끼고,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정진하는 사람이 그 몇 분의 일이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그 56억 가운데에서 정말 선택된 도반들이고, 우리에게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을 향해서 가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고 알뜰히 단속해 나가면 우리는 이 생사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살아가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 765)—2014(갑오년) 동안거 해제 및 백일기도 회향(02.14) 15분. (용765)


약 15분.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하고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니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만약 색상(色相)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면,

시인(是人)은 행사도(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할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있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오늘 갑오년 정월 15일 해제일(解制日)입니다.
석 달 전 10월 15일에 결제(結制)를 해 가지고 오늘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됩니다. 이 자리에는 다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이 모이셨습니다.

같이 결제 법요식을 갖고 석 달 동안을 조실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왔습니다.
오늘 석 달이 지난 뒤에 해제일을 맞이해서 우리 도반들이 그 동안에 석 달 동안을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 이 법당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말을 듣고,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진(六塵)을 만나면 거기서 육식(六識)이 발동을 하는데,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육근을 통해서—부모 뱃속에서 태어난 이래로 오늘까지—살아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는—각자 그 사람의 신심(信心)과 업(業)에 따라서 살아가겠는데,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정법(正法)을 믿고 정진을 하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접할 때—그리 따라가면 생사(生死)의 길로 가는 것이고—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그 찰나(剎那)에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뭣고~?’ 자기로 돌아오는 사람은 남이 봄에는 똑같이 밥 먹고, 잠자고, 앉고 서고 하지만은 이렇게 정진을 ‘한 생각’한 사람이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진하는 사람은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團束)하느냐’가 깨달음을 가져 오느냐,
일념단속을 시원치 않게 해 가지고 다시 끝없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나나 못나나 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주 법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의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데 많이 산 사람은 100살도 살고, 중간쯤 산 사람은 7~80에 가기도 하고, 3~40에 가기도 하고, 어려서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법을 믿지 않고 그럭저럭 산 사람은 이 타고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서도 거의 동물에 가깝게 일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56억이라고 하는데 그 많은 인간들이 정말 무상(無常)을 느끼고,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정진하는 사람이 그 몇 분의 일이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그 56억 가운데에서 정말 선택된 도반들이고, 우리에게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을 향해서 가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들께 내가 와서 무슨 말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도반들이라,
내가 늙어서 여러분께 할 말은 우리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삼요(三要)가 있는데,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것이 삼요라 하는데, 무엇을 믿느냐?

‘나도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 조사(祖師)와 같은 똑같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심이 철저해야 그 다음에는 ‘내가 왜 여태까지 불조(佛祖)와 같은 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에 대한 분심(憤心)이 가슴에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 분심이 없으면 공부한다고 해도 앉으면 꾸벅꾸벅 졸면서 시간을 채우는 것인데, 그 분심이 철저해야 저절로 혼침(昏沈)도 달아나고 일 초 일 초를 마음 단속하는데에 철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신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분심이 있어야 하고, 세번째는 우리가 닦아가는 본참공안(本參公案)인 것입니다.

본참공안, 대부분 ‘이뭣고~?’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무(無)자’ 화두를 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만은,
어떠한 공안,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한번 결정을 하고 어떤 선지식(善知識)한테 화두를 탓으면 공부가 잘 되어가거나 잘 안 되거나 그 화두를 자꾸 바꾸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단이 투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지,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면 공부를 잘못 해가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는 것 밖에는 우리는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목욕탕에 가거나, 도량 소지(掃地)를 하거나 또는 밭에 나가서 운력(運力)을 하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고 알뜰히 단속해 나가면 우리는 이 생사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살아가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가 살 만큼 살다가 가는데, 한 사람도 안 죽고 몇백 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생사(生死)가, 죽음이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입니다.
숨 한 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부모한테 이 몸을 받아나가지고 또 좋은 인연이 있어서 불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우리는 닦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행스런 좋은 여건하에 이 몸을 받아서 오늘날까지 왔으니 앞으로 3년을 살런지 10년을 살런지 한 달을 살런지 그건 살아봐야 알지 모르는 것입니다만은,
일단은 한 생각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볼 때 ‘이뭣고~?’. 귀를 통해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 단속을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세상이 언제 원자탄이 터져서 잿더미가 될런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교통 사고로 죽을런지, 병으로 죽을런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만큼 건강할 때 어쨌든지 화두 단속을 열심히 해 나가는 것 뿐인 것입니다.

오늘 비록 해제일을 맞이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고 있습니다만은 해제는 ‘석 달 동안 정진하느라고 애썼으니까 이제 푹 좀 쉬어야겠다, 잠도 좀 실컷 자야겠다, 가고 싶은데 여행도 좀 해야겠다’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여행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겠으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거나 간에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으면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요, 일을 할 때도 그것이 정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밖에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떻게 알뜰하게 사느냐?’하는 것은 화두 단속을 철저히 하는 그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조실스님의 그 우렁찬 법문을 우리는 다같이 들었습니다.
산승이 여러분께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앞으로 결제까지 또 석 달이 남아있습니다마는 지난 석 달 동안 지낸 것보단 해제 동안을 정말 알뜰히 단속을 해서 정진하실 것을 우리 다같이 명심을 하고 다음 여름 결제날 또 만나게 될 것을 기약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박수)(처음~14분2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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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이색견아~’ ; [금강경(金剛經)]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사구게(四句偈).
*색상(色相) ;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의 형상.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진(六塵)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과 같음.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

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윤회(輪廻) ;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고통.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삼세(三世) : [범] trayo - dhvanah 과거 • 현재 • 미래, 또는 전생 • 금생 • 내생을 말한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무자(無字) ; 분류 ‘화두(공안)’ 참고.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僧問。萬法歸一一歸何所。師云。老僧在青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전등록(傳燈錄) 제10권. 조주선사.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벽암록(碧巖錄)] 제45칙.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소지(掃地) ; ①마당(땅)을 쓸다. ②청소.
*운력(運力) ;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우리말 '울력'과 같다. 의미와 관계없이 운력(運力)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한다는 미래의 삶.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6. 18. 12:49

§(246) 공안(화두)-다못 알 수 없는 의심 / 신심·분심·용맹심 / 향림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 조주스님은 30년 부잡용심(不雜用心)의 끈기와 정성 / 세수하다 코 만지기.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 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헌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허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헌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거여.


**송담스님(No.246)-84년(갑자년) 추계산철결제 법문(84.08.27)에서. (용246)


약 21분.

 


고인(古人)은 이 공부를 허기 위해서, 한 공안(公案)을-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화두(話頭)라고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公案) 하나를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심 정력을 쏟아서 밤낮도 가리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도 가리지 아니하고, 어묵동정(語默動靜)도 가리지 아니하고, 일체처 일체시(一切處 一切時)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 한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했습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떤 것이 달마 조사가 인도에서 오신 뜻입니까?’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데 대해서 조주 스님이 대답허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달마스님이 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느냐?’하고 묻는 데에 대해서,
‘참선법을 설하기 위해서 오셨다’ ‘내가 내 마음을 깨달라서 견성성불을 허는 법을 가르키기 위해서 왔다’
우리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대답험즉 한데,

또 ‘달마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 가섭존자로부터 아난존자, 아난존자로부터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달마 스님까지 28대를 법을 전해 왔는데, 그 28대 조사인 달마 대사가 그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내려오는 그 최상승법, 정법을 중국에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대답험즉 한데,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아! 이렇게 대답을 해.

‘대관절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을꼬~?’
이것이 바로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이고, 화두(話頭)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는, 그 동안에 자기가 배우고 알고 한 모든 지식이 여기에 동원되야서는 아니 되고, 모든 이론이 여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어.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아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걸어가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억울한 소리를 듣고 울화통이 치밀어서 속이 상할 때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 계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이 ‘이뭣고?’,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다못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무조건하고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다가 그걸로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 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그래서 옛날에 이 공부는 ‘무얼 많이 알고 배우고 허면은 오히려 이 공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을 알고, 학교를 많이 다니고 해서 지식이 풍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들여서 그것을 동원하지만 아니하면, 뭐 하등(何等)의 해로울 것도 없지만,

중생의 습기(習氣)라 하는 것이 그렇기가 어려워서 뭘 많이 알면 아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놈을 갖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으로 이리저리 분석도 허고, 적용도 해보고, 종합도 해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보고도 싶고 이럴 수가 있어서 허는 말이지, 꼭 많이 알면 못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는 큰 신심(信心).
‘내가 본래 부처다. 나도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찌 내라고 해서 이 공부를 못헐 것이 있는가? 나도 열심히 허면 결정코 성불을 헐 수 있다’고 허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을 끼고 바다를 건너뛸려고 허는 것은 헐 수가 없는 일이여,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하는 바로 거기에 나의 본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
‘올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만 허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분심(憤心)을 가져야 하는데,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결판을 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고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 속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허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가져야 해. 분심을 가져야 용맹심이 나고, 용맹심을 내야 퇴타(退墮)를 안하게 되는 것이여.

분심이 없고 용맹심이 없으면 공부에 아무 매카리가 없어 가지고,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공부를 허는 것인지 안 허는 것인지,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여간해서 이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달(了達)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손수 머리를 깎어 버리고 6년, 어떤 경전에는 12년이라고 되어있는 데도 있습니다마는, 그 무서운 고행을 하셨고,
달마(達摩) 대사도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셨고, 장경(長慶) 스님이라 하는 분은 포단(蒲團)을, 방석을 7개를 뚫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좌선을 지극정성으로 했으면, 궁뎅이로 방석이 뚫어져서 못 쓰게 되면 또 다른 방석을 가지고 또 정진을 하고,
1년 이태 이렇게 한 방석을 가지고 한결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허다 보니까 멀쩡한 방석이 닳고 닳아서 구녁이 뚫어져. 이렇게 하기를 7개 포단을 뚫었다 이거여.

향림(香林)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어. 타성일편이라 하는 것은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그 40년에사 타성을 일편(打成一片)했다 그거여.

조주(趙州) 스님은 소년 시절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견성(見性)을 한 그러헌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헐 만큼 그런 큰스님인데, 3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어. 잡되게 마음을 쓰지를 안 했다.

이 공부는 이만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만, 이만한 끈기와 정성과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조금 해보고 ‘아이고, 그놈의 것 못 해먹을 지서리다’, ‘인연이 없나 보다’, ‘내가 근기가 약한가 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하루해가 넘으면 ‘오늘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하루해가 넘어갔구나’ 이래가지고 발을 뻗고 통곡을 헌 스님도 있다고 합니다.
밤에 잘 때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깨면서 정진을 헌 그런 스님도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지고서 지리산을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밤새 다니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 돌이 지금 지리산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앞에 그 돌이 지금도 놓여 있습니다마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니 된다고 허는 것은 충분히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 10번만 불러도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데, 우리 같은 여자가, 더군다나 속가에 있으면서 그 참선은 감히 생각지도 못헐 일이다.
그저 염불(念佛)이나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가야겠다.’
혹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분이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면으로 보자면 그렇고,

쉬운 면으로 보자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그랬어. 세수를 허다 보면 코를 만지지 않을랴고 해도 저절로 코가 만져지는 것이여.
내가 나를 찾는 공부가 쉽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걸어갈 때, 말헐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을랴고 함으로 해서 달아나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이지, 찾을랴고 허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그것이 쉽다고 헐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찾을랴고 허면, 이렇게 시청언동(示聽言動)-눈, 코, 입, 귀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말하고, 바로 거기에 있건마는,
과연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놈이 무엇인가?’하고 찾어 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이렇게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듣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다 가려내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그렇게 판별헐 줄 아는,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잠시도 나와 더불어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건마는, 그렇게 소소영령하고 분명한데 아!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찾어도 볼 수가 없고, 1분 1초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이 노상 같이 있고, 가깝기로 말하면 한 걸음도 여의지 않고 1초도 여의지 않는 것이고,
멀기로 말하면은 삼천대천세계를 찾어도 없으니 이 기기(奇奇)하고 묘묘(妙妙)한 이 도리를 어떻게 말로 가르켜주고 생각으로 알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헌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화두(話頭).

‘이 무엇고~?’
말을 할 때에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배가 고플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해 갈수록 꽉 막혔어. 앞도 없고 뒤도 없어.

‘이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처음에는 입으로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금방 딴 생각이 일어나고,
앉았을 때 ‘이뭣고?’했는데 일어서다가 잊어버리고, 금방 ‘이뭣고?’허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은 그 소리 듣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말이여.

보다가 잊어버리고, 듣다가 잊어버리고, 냄새 맡다가 잊어버리고, 먹다가 잊어버리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린 것 걱정허지 말고, 딴 번뇌·망상 일어나는 것도 걱정허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여. ‘이뭣고~?’

경(經) 공부를 한다든지 다른 무슨 공부를 허면 무엇이 알아진 것도 있고, 하루 하면 하루 한만큼 무엇이 얻어진 바가 있고, 이틀 허면 이틀 헌만큼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진 바가 있는데,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허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헌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거여.
스승 없이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허면 백이면 백, 다 잘못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22분18초~43분1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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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조주스님, 달마스님, 가섭존자, 아난존자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하등(何等) ; 주로 ‘하등의’의 꼴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아무런’의 뜻을 나타내는 말.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자래 ; '자라'의 사투리.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매카리 ; 매가리. '매가리'는 '맥(脈-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장경(長慶) 스님 ; (856-932)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속성은 손(孫)씨, 법명은 혜릉(慧陵) 법호는 장경, 시호는 초각(超覺)대사.
*향림(香林) 스님 ; (870-949) 청원(靑原)하 제6세인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속성은 상관(上官), 법명은 징원(澄遠), 법호는 향림.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지서리 ; '짓거리(‘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 있는, 신라 성덕왕때 삼법 스님이 중국 선종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두개골)을 모셔와 안치한 석감(石龕) 위에 세운 탑을 말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