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참공안'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4.09.07 §(765) (게송)약이색견아~ / 일념(一念)단속 / 삼요(三要) / 생사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2. 2014.08.09 §(178) (게송)작야강남우~ / 자자(自恣) / 참선(參禪)은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3. 2014.07.06 §(455) 계행(戒行) / 단전호흡- 상기병 주의 / 화두 드는 법 / 화두 가운데에 가장 처음,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麼) 화두, ‘이뭣고?’
  4. 2014.06.13 §(401) 심우송(尋牛頌) / 공안을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라-의단독로 하도록 잡드리해 가야 /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 / 선용기심(善用其心).
  5. 2014.04.28 §(240) (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다못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무조건하고 ‘이뭣고~?’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6. 2014.04.07 §(524)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나건,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정신을 챙겨 화두를 들고나가야 돼. / 무기공(無記空).
  7. 2014.04.06 §(524)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보살님들의 여러 질문에 대한 말씀). / 영아행(嬰兒行).
  8. 2014.03.24 §(445) 진짜 화두 / 포구발심(怖懼發心) / 시삼마(是甚麼)는 가장 근원적인 화두 / 화두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화두를 안 들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9. 2014.03.21 §(세등08) 법문을 옳게 들어야. / 화두는 의심(疑心)이라. / 참선은 다 쏟아 버리는 공부 / 썩은 나무둥치.
  10. 2014.03.11 §(세등68) (게송) 참선수투조사관~ / 육화(六和) / 해제(解制)가 바로 결제(結制) / 새판잽이.
신심(삼요)2014. 9. 7. 13:17

§(765) (게송)약이색견아~ / 일념(一念)단속 / 삼요(三要) / 생사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지금 세계 인구가 56억이라고 하는데 그 많은 인간들이 정말 무상(無常)을 느끼고,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정진하는 사람이 그 몇 분의 일이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그 56억 가운데에서 정말 선택된 도반들이고, 우리에게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을 향해서 가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고 알뜰히 단속해 나가면 우리는 이 생사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살아가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 765)—2014(갑오년) 동안거 해제 및 백일기도 회향(02.14) 15분. (용765)


약 15분.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하고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니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만약 색상(色相)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면,

시인(是人)은 행사도(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할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있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오늘 갑오년 정월 15일 해제일(解制日)입니다.
석 달 전 10월 15일에 결제(結制)를 해 가지고 오늘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됩니다. 이 자리에는 다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이 모이셨습니다.

같이 결제 법요식을 갖고 석 달 동안을 조실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왔습니다.
오늘 석 달이 지난 뒤에 해제일을 맞이해서 우리 도반들이 그 동안에 석 달 동안을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 이 법당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말을 듣고,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진(六塵)을 만나면 거기서 육식(六識)이 발동을 하는데,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육근을 통해서—부모 뱃속에서 태어난 이래로 오늘까지—살아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는—각자 그 사람의 신심(信心)과 업(業)에 따라서 살아가겠는데,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정법(正法)을 믿고 정진을 하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접할 때—그리 따라가면 생사(生死)의 길로 가는 것이고—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그 찰나(剎那)에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뭣고~?’ 자기로 돌아오는 사람은 남이 봄에는 똑같이 밥 먹고, 잠자고, 앉고 서고 하지만은 이렇게 정진을 ‘한 생각’한 사람이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진하는 사람은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團束)하느냐’가 깨달음을 가져 오느냐,
일념단속을 시원치 않게 해 가지고 다시 끝없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나나 못나나 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주 법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의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데 많이 산 사람은 100살도 살고, 중간쯤 산 사람은 7~80에 가기도 하고, 3~40에 가기도 하고, 어려서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법을 믿지 않고 그럭저럭 산 사람은 이 타고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서도 거의 동물에 가깝게 일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56억이라고 하는데 그 많은 인간들이 정말 무상(無常)을 느끼고,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정진하는 사람이 그 몇 분의 일이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그 56억 가운데에서 정말 선택된 도반들이고, 우리에게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을 향해서 가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들께 내가 와서 무슨 말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도반들이라,
내가 늙어서 여러분께 할 말은 우리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삼요(三要)가 있는데,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것이 삼요라 하는데, 무엇을 믿느냐?

‘나도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 조사(祖師)와 같은 똑같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심이 철저해야 그 다음에는 ‘내가 왜 여태까지 불조(佛祖)와 같은 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에 대한 분심(憤心)이 가슴에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 분심이 없으면 공부한다고 해도 앉으면 꾸벅꾸벅 졸면서 시간을 채우는 것인데, 그 분심이 철저해야 저절로 혼침(昏沈)도 달아나고 일 초 일 초를 마음 단속하는데에 철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신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분심이 있어야 하고, 세번째는 우리가 닦아가는 본참공안(本參公案)인 것입니다.

본참공안, 대부분 ‘이뭣고~?’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무(無)자’ 화두를 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만은,
어떠한 공안,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한번 결정을 하고 어떤 선지식(善知識)한테 화두를 탓으면 공부가 잘 되어가거나 잘 안 되거나 그 화두를 자꾸 바꾸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단이 투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지,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면 공부를 잘못 해가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는 것 밖에는 우리는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목욕탕에 가거나, 도량 소지(掃地)를 하거나 또는 밭에 나가서 운력(運力)을 하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고 알뜰히 단속해 나가면 우리는 이 생사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살아가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가 살 만큼 살다가 가는데, 한 사람도 안 죽고 몇백 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생사(生死)가, 죽음이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입니다.
숨 한 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부모한테 이 몸을 받아나가지고 또 좋은 인연이 있어서 불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우리는 닦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행스런 좋은 여건하에 이 몸을 받아서 오늘날까지 왔으니 앞으로 3년을 살런지 10년을 살런지 한 달을 살런지 그건 살아봐야 알지 모르는 것입니다만은,
일단은 한 생각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볼 때 ‘이뭣고~?’. 귀를 통해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 단속을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세상이 언제 원자탄이 터져서 잿더미가 될런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교통 사고로 죽을런지, 병으로 죽을런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만큼 건강할 때 어쨌든지 화두 단속을 열심히 해 나가는 것 뿐인 것입니다.

오늘 비록 해제일을 맞이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고 있습니다만은 해제는 ‘석 달 동안 정진하느라고 애썼으니까 이제 푹 좀 쉬어야겠다, 잠도 좀 실컷 자야겠다, 가고 싶은데 여행도 좀 해야겠다’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여행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겠으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거나 간에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으면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요, 일을 할 때도 그것이 정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밖에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떻게 알뜰하게 사느냐?’하는 것은 화두 단속을 철저히 하는 그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조실스님의 그 우렁찬 법문을 우리는 다같이 들었습니다.
산승이 여러분께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앞으로 결제까지 또 석 달이 남아있습니다마는 지난 석 달 동안 지낸 것보단 해제 동안을 정말 알뜰히 단속을 해서 정진하실 것을 우리 다같이 명심을 하고 다음 여름 결제날 또 만나게 될 것을 기약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박수)(처음~14분2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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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이색견아~’ ; [금강경(金剛經)]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사구게(四句偈).
*색상(色相) ;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의 형상.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진(六塵)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과 같음.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

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윤회(輪廻) ;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고통.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삼세(三世) : [범] trayo - dhvanah 과거 • 현재 • 미래, 또는 전생 • 금생 • 내생을 말한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무자(無字) ; 분류 ‘화두(공안)’ 참고.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僧問。萬法歸一一歸何所。師云。老僧在青州作得一領布衫重七斤。

[전등록(傳燈錄) 제10권. 조주선사.
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벽암록(碧巖錄)] 제45칙.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소지(掃地) ; ①마당(땅)을 쓸다. ②청소.
*운력(運力) ;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우리말 '울력'과 같다. 의미와 관계없이 운력(運力)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한다는 미래의 삶.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Posted by 닥공닥정
하안거 해제 백종2014. 8. 9. 13:01

 

 

§(178) (게송)작야강남우~ / 자자(自恣) / 참선(參禪)은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화두 하나만을 잘 잡드리 할 줄 안다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다 따라오는 것인데, 사실 정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좌에 국집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좌를 여의지도 아니한다’


문제는 우리의 한 마음 한 생각에 있을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8) - 1982년(임술년) 하안거 해제법회. (용178)

 

(1) 약 12분.

 

(2) 약 10분.


(1)------------------

작야강남우(昨夜江南雨)에  동정추수심(洞庭秋水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엽고주객(一葉孤舟客)이  월중천리심(月中千里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야강남우(昨夜江南雨)에, 어젯밤 강남 비에,
동정추수심(洞庭秋水深)이로구나. 동정(洞庭)에 가을 물이 깊구나.

일엽고주객(一葉孤舟客)이  월중천리심(月中千里心)이라.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가는 '손'이 달 가운데에 천리(千里)의 마음이더라.

오늘은 임술년 여름 안거 해제일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회향(廻向)날이기도 합니다.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해제를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금년은 4월에 윤달이 들어서 그래서 6월 15일에 해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여름 결제를 한 비구·비구니 수행 납자들이 망월사 또 도봉산에 원효사, 의정부 회룡사, 전라도 맨 끄터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또 부산에서는 대성암 이런 모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해서 이렇게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도 각기 자기 인연 따라서 여기저기에서 정진을 하고서 오늘 해제일에 몇십 리 몇백 리를 걸어서 부처님 회상(會上)에 모여 가지고 자자(自恣)라 해서 빙 둘러서 앉아 가지고 자자의 의식을 거행을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 법요식(法要式)은 맨 먼저 부처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지난 석 달 안거 동안에 나에게—수행에 방해가 될 만한 법도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대중은 자비심으로 그것을 지적을 해 주시오’ 이렇게 대중을 향해서 부처님께서 몸소 제일 먼저 자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대중이 아무 말이 없으면 그 허물이 없었던 걸로 인정을 하고 또 그 다음 목련존자, 또 사리불 존자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차례대로 그러헌 법요식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는 무슨 허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법(法)을 존중하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맨 먼저 그렇게 대중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물었을 때에 맨 위에 첫 자리에 앉았던 목련존자나 또는 가섭존자나 사리불 그러헌 수제자가 부처님 곁으로 경건하게 가까이 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그 자자(自恣)를 할 때에는 왼쪽 무릎은 땅에 대고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서 합장을 하고 대중에게 묻는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에 그 옆에 있던 맨 윗자리 제자가 부처님께 다가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시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부처님께 무슨 허물이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공경스럽게 부처님을 일으켜 드림으로써 다음 사람으로 그 법요식은 진행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이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그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설법을 허시고 제자들을 이끌으시고 하는 그 생생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승(小乘)불교라 해서 수천 년간을 푸대접을 받아왔었지만 근자에 소승불교 이 『아함경(阿含經)』과 같은 이러한 경전이 새롭게 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자자를 행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해서 석달 동안 어떻게 수행을 했는가? 수행을 하는 동안 행여나 자기에게 어떤 잘못이 없었던가? 다른 대중에게 어떠헌 피해는 끼친 바가 없었던가?
자기로 인해서 불법에 누명(陋名)은 끼치지 않했던가? 이렇게 해서 반성을 하고, 자기 혼자 반성을 헐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그것을 지적해 달라고 스스로 간청하는 그러헌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해인사나 그 밖에 총림(叢林)에서는 이러헌 법요식이 거행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대단히 좋은 법도(法度)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해제 법요식을 맞이해서 여기에 모이신 비구스님 또는 비구니스님 또 여러 청신사·청신녀 사부대중이 낱낱이 부처님 당시에 행해졌던 그 자자(自恣) 법요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상기하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어떠헌 수행상에 잘못은 없었던가? 부처님 법도에 어긋나는 그러헌 일은 없었던가? 나로 인해서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입힌 바는 없었던가?

고요히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해서 행여나 잘못이 있으면 그러헌 잘못은 이 자리에서 참회를 하시고 앞으로 수행해 나가는 데에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청정하게 원만하게 수행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한철, 한철 거듭해 나갈 때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 나가고 자신의 수행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 나간다면, 결정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말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처음~12분1초)

 

 



(2)------------------

'오늘 해제를 하면 걸망을 짊어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오대산을 가느냐, 설악산을 가느냐 또는 남해를 가느냐' 이렇게 걸망귀신이, 벌써 반살림 지나면 걸망귀신이 들썩들썩 한다고 옛날부터 그런 말이 전해 내려오고, 겨울철에는 납월 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勇猛精進)이 끝나면 벌써 그때부터서는 걸망귀신이 동요가 되아 가지고 정진할 마음은 벌써 들떠버린다고 그런 말이 있어 왔습니다마는,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반살림이 지내면서부터 더 열심히 정진들을 하시고 해제에 임박해서는 더 모다 가행정진(加行精進)들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회룡사나 망월사, 원효사 그 밖에 강진 백련사 그런 데서도 여러 대중들이 많이 오셨습니다마는 거기서도 각각 못지않게 정진들을 잘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다른 사람을, 물론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일체 중생을 참으로 위할려면 우선 자기가 확철대오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이것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행 정진을 하게 된 만큼, 오늘 해제한 뒤에 참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동안에 석 달 동안은 삼복 더위중이라 대단히 정진하기가 어려웠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한 더위 속에서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하셨거든 하물며 앞으로 넉 달 반이라고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겨울 결제를 할 때까지는 넉 달—다른 해에는 석 달 밖에 없었는데 금년은 윤달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넉 달 반이라고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은 춥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그러헌 좋은 계절입니다. 어쨌든지 그 긴 좋은 기간을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 동안에 여기서 저기서 모다 정진하고 오신 스님네들로부터서 여러 가지 정진에 관한 문의를 해 왔는데, 정진이란 게 화두(話頭)를 어떻게 단속(團束)해 나가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화두 하나만을 잘 잡드리 할 줄 안다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다 따라오는 것인데, 사실 정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해서, 그러면 서서 종일 일을 하고, 종일 말을 하고, 종일 서성거려도 상관이 없느냐 하면, 앉은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또한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이것입니다.

참으로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한 이 뜻을 잘 못 이해한 사람은, ‘좌(坐)에 있지 않다’ 그 말에만 잘못 집착을 하면, 공연히 서서—정진은 진짜 속으로는 되지도 아니하면서 공연히 미친 사람처럼 나부대고 설쳐대는 데에 가까웁게 될 것이고,
또 ‘좌(坐)를 여의지 않는다’한 그 말에만 집착을 한다면, 너무 앉은뱅이처럼 앉아서만 하는 것만이 공부라고 해서 좌에 국집(局執)하는 그러헌 잘못된 정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좌(坐)에 국집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공연히 설쳐대서도 아니 될 것이고, 또 ‘좌를 여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너무 좌(坐)에만 국집하는 그것도 올바른 정진이 아닐 것이다.

이 2가지 뜻—‘좌에 국집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좌를 여의지도 아니한다’는 이 2가지 뜻을 참으로 올바르게 인식을 한다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가 다 좌(坐) 아님이 없을 것이고, 이 도리를, 이 2가지 뜻을 잘 이해를 못한다면 비록 좌(坐)를 여의지 아니한다고 해도, 참다웁게 좌선(坐禪)을 못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넉 달 반에 그 긴 좋은 기간 동안에, 좌에 국집하지도 말고 또한 좌를 여의지도 아니하면서 정진을 알뜰히 해 주실 것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혹 어느 선지식을 친견하러 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좋은 도반을 찾아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성지(聖地) 도량에 순례차 떠날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건강상 휴양차, 건강을 위해서 어느 의원을 찾아가거나 또는 약을 먹기 위해서 어느 장소를 찾아가거나 또는 모래찜을 하기 위해서 강변이나 해변을 찾아가시는 도반도 계실 줄 생각을 합니다.

어디를 가시건, 누구를 만나러 가시건, 어데 가서 무엇을 하건, 사람이 살아있는 이상은 가야 할 데도 있고, 만나야 할 곳도 있을 것이고, 만나 해야 할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헌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그때 그 장소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여의지 아니한다면,
어데 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누구를 만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어데를 가서 강에 몸을 담그거나 모래 속에 몸을 묻거나,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또는 어느 계곡 어느 봉우리를 발로 등산을 하고 거닌다 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한 마음 한 생각에 있을 것입니다.(처음~22분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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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작야강남우~’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85 ‘회구(懷舊, 옛일을 추억함)’ 게송 참고.
*일엽편주(一葉片舟) ; 자그마한 한 척의 배.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인 법회. ②설법하는 모임. 설법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자리.
*법요식(法要式) ; 불사(佛事-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를 할 때 행하는 의식.
*목련존자, 가섭존자, 사리불존자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원시경전(原始經典) ; 원시불교(Early Buddhism, 原始佛敎)시대에 결집된 불경. 그것은 한역(漢譯) 아함경(阿含經) 및 팔리 삼장(三藏) 등이다.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아함경(阿含經) ;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āgama의 음사로, 전해 온 가르침이라는 뜻.
초기 불교시대에 성립된 수천의 경전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팔리(pāli) 어로 된 니카야(nikāya)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sanskrit) 본(本)이 아가마(āgama)임.
이 아가마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아함경으로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음.

(1)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 30경. 문장의 길이가 긴 경전을 모은 것.
(2)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 222경. 문장의 길이가 중간 정도인 것을 모은 것.
(3)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 1,362경. 짧은 경전을 모은 것.
(4)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1권 471경. 사제(四諦)·육도(六度)·팔정도(八正道) 등과 같이 법수(法數)를 순서대로 분류하여 엮은 것. 이에 해당하는 니카야는 다음과 같음.

(1) 디가 니카야(dīgha-nikāya, 長部). 내용이 긴 34경을 모은 것으로 3편으로 분류되어 있음. 한역 장아함경에 해당함.
(2)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āya, 中部). 중간 정도 길이의 152경을 모은 것으로 약 50경씩 3편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다시 각 편은 5품으로, 각 품은 대개 10경 단위로 구성되어 있음. 한역 중아함경에 해당함.
(3) 상윳타 니카야(saṃyutta-nikāya, 相應部). 짧은 경전 2,875경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배열한 것으로 전체가 5품으로 되어 있음. 한역 잡아함경에 해당함.
(4) 앙굿타라 니카야(aṅguttara-nikāya, 增支部). 2,198경이 법수(法數)에 따라 1법에서 11법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음. 한역 증일아함경에 해당함.
(5) 쿳다카 니카야(khuddaka-nikāya, 小部). 법구경·경집·본생담 등 15경으로 구성되어 있음
*누명(陋名 좁을·천할 루,이름 명) ; 사실이 아닌 일로 이름을 더럽히는 억울한 평판.
*총림(叢林) ; ①많은 수행승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 ②전각(殿閣)·선원(禪院) ·강원(講院)·율원(律院) 등을 두루 갖춘 큰 사찰.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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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월 팔일(臘月八日) ;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한 날을 말함.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정진(精進) : [범]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사위의(四威儀) : 행•주•좌•와(行住坐臥)。 일상생활에 있어서 온갖 동작하는 몸짓의 4종의 구별(행•주•좌•와)이 부처님의 제계(制戒)에 꼭 들어맞는 행동.
*본참공안(本參公案) :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자세 호흡)2014. 7. 6. 12:38

§(455) 계행(戒行) / 단전호흡, 상기병 주의 / 화두 드는 법 / 화두 가운데에 가장 처음,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麼) 화두, ‘이뭣고?’

단전호흡은 항상 자연스럽게 무리가 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정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몸 건강해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여법하게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이 화두 드는 것이 참선의 요점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송담스님(No.455)-91년 9월 첫째일요법회(91.09.01)에서. (용455)


약 15분.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아 가지고 그 화두를 여법(如法)하게 참구해 나가는 것, 그것 밖에 없지마는, 그래도 공부를 바르게 해 나갈랴면은

첫째, 계행(戒行)을 지켜야 한다. 계행을 지키되 계상(戒相)에 집착함이 없이 계상에 떨어지지 않고 계를 지키고,
또 화두를 참상(參祥)하되, 간절한 의심으로 참구를 한답시고 막 용을 쓰면서 억지로 눈썹 미간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억지로 파고 들어가면 상기병(上氣病)에 십상(十常) 걸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되, 맨 처음에는 폐 속에 들어있는 호흡을 전부 다 내뿜어. 다 내뿜은 다음에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았다가 또 후~ 하고 다 내뿜어버려. 다 내뿜은 다음에는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이렇게 하기를 두 번 내지 세 번을 해서 허파 속에 들어있는 묵은 공기를 다 청소를 해낸 다음에, 그때부터서 본격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는데,
들어마시는 호흡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들어마시고, 또 들어마신 다음에 딱 정지를 해. 호흡을 정지하기를 약 3초 동안 정지를 했다가 또 내쉴 때도 약 3초 동안 걸려서 내쉬고,

내쉰 다음에 약 3초 동안 또 정지를 하고, 그렇게 해도 좋지만 내쉬는 시간을 아주 미세하게 조용하게 가늘게 주욱 내쉬다 보면은 한 4초나 5초 이렇게 되니까, 다 내쉰 다음에 특별히 정지할 것이 없이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가늘게, 조용하게 내쉬면 되는 거여.

그래서 다 내쉬면 또 들어마시는 시간 3초, 들어마셔 가지고 정지하는 시간이 3초, 그래가지고 내쉬는 시간은 조용하게 미세하게 길게 내쉬다 보면 내쉬는 시간은 약 4~5초 이렇게 걸리도록.

그런데 처음에 준비 호흡을 할 때에는 더이상 들어마실 수 없을 만큼 가득 들어마시고, 또 정지하는 시간도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았다가, 또 내쉬는 것도 더이상 내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다 내쉬지만,

이 정식 본(本) 단전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가득 들어마셔도 안 되고, 너무 오랫동안 억지로 참아도 안 되고, 내쉬는 시간도 너무 완전무결하게 다 내쉴라고 해서는 안 돼.

왜 그러냐? 그러면 땀이 나고 무리가 가서 몇 분 안 가서 헛숨을 쉬어야 하고 그러니까, 절대로 이 준비호흡은 그렇게 철저하게 들어마시고 철저하게 내쉬고 하지만,
본(本) 단전호흡에 가서는 8부만 들어마시고 또 3초 동안만 정지했다가 내쉬는 것도 8부 정도만 내쉬어. 더 내쉴 수 있지만 완전히 다 내쉴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을 잘 알고 해야지, 덮어놓고 무리하게 하면은 너댓 번도 못해서 등어리에 땀이 나고 하는데,
혹 겨울에 너무 춥거나 또 음식을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되고 체했을 때에는 이 준비호흡과 같은 그러한 호흡을 다섯 번 내지 열 번을 하면 등어리에 땀이 나면서 트림이 나오면서 체한 것도 툭 터지는 거여.

그러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전호흡은 항상 자연스럽게 무리가 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 녹음 법문에 병이 안 나고 참 묘(妙)하게 공부해 나가는 법이 바로 이 단전호흡에 관한 말씀인데 좀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단전호흡도 중요하지만은 단전호흡 하나만 하고 화두를 안 하면, 그것은 몸은 건강해지고 정신 집중력도 생기고 여러 가지로 살아가는데 좋고 하지만,
화두가 없이 밤낮 단전호흡만 하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이 되려고 하는 도교의 그런 사람들이 밤낮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몸 건강해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참나’를 깨달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데,

이 몸뚱이만 가지고 삼백 년... 팽조라는 사람은 칠백 년까지도 살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지마는, 이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장수(長壽)한 사람은 장수하고 6~70 살 사람은 살고 그런 것이지, 이 몸뚱이로 오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돼.

그러나 사는 날까지 건강은 해야 한다 그말이여. 사는 날까지 건강하고, 건강해야 참선도 마음껏 할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단전호흡을 하기는 같은 방법으로 한다 해도 목적이 다르다 그말이여.

이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여법하게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이 화두 드는 것이 참선의 요점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선방에 들어와서 참선을 하는 스님네나 또 보살님 10년 20년씩 선방에 다녀도 이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알기가 어렵다.

‘이뭣고?’ 또는 아까 조실스님께서 말씀하신 판치생모(板齒生毛), 무자(無子) 화두나 문헌에 오른 화두만 해도 천칠백 개가 넘는데 그 천칠백 개나 되는 화두 가운데에 가장 처음 화두,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이뭣고?’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 성낼 줄 아는 놈,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놈, 눈으로 보면은 저것이 꽃이다·새다·나비다, 그 아는 놈.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혀로 맛볼 줄 알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러할 줄 아는 놈이 다 사람마다 다 있다 그말이여. 그것이 나의 주인공(主人公)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그 주인공이 분명히 이 몸뚱이에 딱 주재하고 있으면서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들을 줄도 알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든 육체적인 작용, 정신적인 작용을 하는...
차로 말하면은 운전사와 같은 그러한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을 찾는 것이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맨 처음에는 그렇게 들어.
나중에는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바로 그 ‘이뭣고?’하는 그놈을 다시 되돌려 찾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 ‘이뭣고?’하는 놈으로부터서 나오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모든 작용이 나오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그 뿌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여.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데 단전호흡을 안 하고 자꾸 그렇게만 해 나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길게,
또 다 나갔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면 날 새기를 하면서 해도 상기가 되는 법이 없어.

처음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숨을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다 내쉰 다음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서도 아까 들었던 그 ‘이뭣고?’ 의심(疑心)이 고대로 있으면, 그 있는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딱 관(觀)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에도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내쉴 때 새로 또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되아. 있는 그 의심을 떠억 관조(觀照)하면서 내쉬거든.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되, 들어마실 때에도 딴 생각이 안 일어나고, 아까 들었던 그 화두의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의심을 관조해.

그래서 그렇게 주욱 해 나가다가 어느새 화두가 달아나버리고 없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으면 그때 또 화두를 떠억 한 번씩 챙겨 나가는 거여.

이렇게 해 나가면 망상(妄想)을 안 일으킬라고 할 필요도 없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어버리기 때문에 망상을 일부러 쫓아낼려고 할 것도 없어.
이렇게 해 나가면 차츰차츰 망상은 줄어지고 또 이렇게 화두를 들 때 단전호흡을 하면 혼침도 안 일어나는 것이여. 혼침(昏沈)과 산란심(散亂心)을 두 가지를 다 힘 안들이고 내가 잘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단전호흡이다 그말이여.

단전호흡을 하되 항상 들어마시고 내쉴 때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성성(惺惺)하게 적적(寂寂)하게 현전(現前)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나가는 것이다.(7분20초~22분2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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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로 좌선(坐禪) 수행을 말한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계행(戒行) ; ①계() 지켜 수행하는 .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 ②계율과 도덕.

*계상(戒相) ; ①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4가지 분류[계사별 戒四別],  계법(戒法) · 계체(戒體) · 계행(戒行) · 계상(戒相) 하나. 계율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차별 있는 행동 양상. () 지키거나[持戒] 범한[破戒] 상태, 또는 계를 범한 경우 그에 대한 죄의 가벼움과 무거움 등의 차별된 상.

②계() (). 계율에 대한 생각.  계상(戒相) 청정성, 집착의 여부는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참고] 『화엄경』 60권본 10 14 명법품(明法品)(대정장9. p.460c)  계를 지킨다는 () 일으키지 않으므로 계에 집착함이 없다. 이것을 청정시바라밀이라 한다. 不生持戒相故  於戒無著  是名淸淨尸波羅蜜

*참상(參祥) ; 참구(參究)와 같음.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말. ②'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온 말.
*헛숨 ; 공연히 내쉬는 숨. 자연스러운 호흡과 상관없이 내쉬는 숨을 이른다.
*8부(八部)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장생불사(長生不死 길 장/날 생/아니 불/죽을 사) ; 오래도록(長) 살고(生) 죽지(死) 않음(不).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公案)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소소영령(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머트럽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4. 6. 13. 14:15

§(401) 심우송(尋牛頌) / 공안을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라. 의단독로 하도록 잡드리해 가야 /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 / 선용기심(善用其心).

우리가 지금 그러한 심우송(尋牛頌)을 자세히 따져보는 것도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이 '마음 소'를 찾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앞과 뒷이 콱 맥힌 상태에서 의단으로 공안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 단계, 그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공안을 참구하는데 가서는 앞뒤가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꽉 맥혀서 오직 의단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가야 그래야 그 사람이 공안을 타파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오직 그 화두 한 마디, 한 의심만을 향해서 의단이 독로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해. 답답허면 답답헐수록 그렇게 해 나가고, 아무리 공부가 안되면 안 될수록에 그렇게만 해 나가야 돼.


**송담스님(No.401) - 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65분)에서. (용401)

 

(1) 약 13분.

 

(2) 약 17분.

 


(1)------------------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십우송(十牛頌)-10가지의 소를 찾는 게송에 대한 그 심우송(尋牛頌)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그 마음자리를 ‘소’에다가 비유해 가지고 고인(古人)들이 게송(偈頌)을 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리심(菩提心)을 발해 가지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견성(見性)해서 중생교화하는 데까지 10단계로 노나서 게송으로 읊은 것인데 그 게송에 따라서 고인들은 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많이 여러 가지 종류의 게송도 나오고, 여러 가지 종류의 그것에 의한 그림도 나오고, 요새는 달력 캘린더에도 그런 그림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마는,

첫째, 제일의 심우(尋牛)-'찾을 심(尋)'자, '소 우(牛)'자-‘소를 찾는다. 심우(尋牛)’ 그 단계는 보리심을 발하는 위치여.
우리는 언제 생겨날 때가 없는, ‘언제 그 마음자리가 생겨났다’하고 헤아려 볼 수 없을 만큼 우주세계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었던 그 '마음 소'인데,
그 '마음 소'를 부처님도 가지고 계시고, 모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도 그 '마음 소'를 다 가지고 계시고, 우리의 중생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개·소·돼지·미물에 짐승·벌레까지라도 그 자리를 다 가지고 있다 그말이야.

근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잊어 버렸어. 가지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해 모르고 살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부처님의 법, 조사의 법문에 의지해서 잃어버렸던 그 '마음 소'를 찾는다 그말이여.
그 마음, 진여불성 자리를 찾는 것을 그 ‘소를 찾는다’고 해서 심우(尋牛)라 그러는데, 보리심을 발(發)해야 그때부터서 '마음 소'를 찾기 시작한 거다 그말이여.

그래 아까 조실 스님께서 첫 번째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 '마음 소' 찾는 데에다가 두고 읊으신 게송인데, 그 게송이 중국의 그 곽암(廓庵) 선사라고 하는 도인(道人)이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 다음에 가서 견적(見跡)이거든. 자취를 봐. 소를 찾아서 인자 집을 떠나 가지고 그 소를 찾으러,
그 산이 험하고 물이 넓고 하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그 소를 찾으러 방방곡곡이 다니는데 그 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이 막심을 하다 그말이여.
근데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니 발자취를 발견을 했어. 발자취를 발견한 것을 두 번째 견적이라 그러는데,

그리고 세 번째가 견우(見牛)고-소를 보고,
또 소를 본 다음에는 득우(得牛)-소를 붙잡는 거여.
그리고 다섯 번째 가서 목우(牧牛)여. 소를 먹이는 거여. 길들여서 먹여.

그러니 처음에 소를 찾을랴고 하는 그 보리심을 발한 것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세계 50억 인구가 있다 하지마는 정말 그 '마음 소' 찾으려는 마음을 낸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1600년 전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지고 고구려·백제·신라를 거쳐서 또 고려, 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1600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태어난 사람은 참 이 불교에 인연이 있어서 우리는 이렇게 참 여기에 까지 왔으나 그러한 국가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런 불교와 인연이 없는 나라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할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를 열심히 찾다 보면은 그 자취를 발견하게 되고 그 자취를 따라서 나아가다 보면은 결국은 소가 거기에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 소를 본 다음에는 그놈을 붙잡을라고 하면 도망치거든.

그놈을 잘 어떻게 해서 지혜와 인내와 방편으로써, 그놈을 잘해서 접근을 해 가지고 그놈을 재치있게 붙들어야지. 소를 저 먼 밑으로 소 봤다고 해서 막 지혜없이 쫓아가서 어거지로 잡을라고 하면 그 소가 도망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도 역시 그 바른 선각자의 바른 지도하에 여법하게 정진을 해야 되지,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우격다짐으로 막 몰아붙인다고 해서 이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를 본 다음에는 그것을 잘 붙들고, 붙든 다음에도 그놈을 참 지혜롭게 요령있게 소를 잘 먹여야지, 붙들어만 놨다고 해서 그걸 아무렇게나 놔두면 다시 또 도망쳐 버릴 것이고.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이 소를 잘 다스려 나가는가? 그것을 참 정성을 다해서 잘 그 소를 먹이고 거두어 나가야 그 소가 토실토실 살이 찌고 번질번질하니 기름져서, 그 소가 농사도 짓고 병도 안 나고 그 소를 인자 맘대로 참 잘 길러 가지고,

여섯 번째 가서 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외양간에다 딱 묶어 놓고 잘 먹이는데, 얼마동안 잘 먹이다 보면,
일곱 번째 가서 망우존인(忘牛存人)이거든.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어.
인자 딱 잘 먹여서 외양간에다 해 놓으니까 소가 길이 들어서 도망가질 않으니까, 소에 대한 인자 관심을 놔 버리고 딱 주인만 있는 거지.
'소에 대한 생각'은 인자 아주 길이 잘 들여있고, 편안하게 외양간에 길들여져서 있으니까, 이것도 다 공부해 나가는 절차를 거기에다 그렇게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쉬웁게 말하자면은 이 길을 들이는 과정에서는,
화두를 열심히 열심히 애를 써서 열심히 들다 보면은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대로 의단(疑團)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는 과정, 그놈을 거쳐서 나중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거든.
확철대오를 하면은 일체처 일체시에서 깨달음의 경지가 낭연독존하며-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경지에 이르르거든. 무수이수(無修而修)거든. 닦음이 없이 닦는 거거든.

그리고 여덟 번째 가서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거든. 사람과 소를 완전히 다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집에 돌아와 가지고 소는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것[忘牛存人]'은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 사람과 소를 둘 다 잊어버린 것은 보리(菩提)를 이룬 위치다.

또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것[忘牛存人]'은 소승(小乘)에서는 아공(我空)의 경계를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러고, 그 다음에 인우구망(人牛俱忘)의 자리는 대승의 경지에서 말하는 보리를 이룬 경지에다가 비유해서 그렇게 했다고 고인은 그렇게 해설을 합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 와서 이 반본환원(返本還源) 이것은 열반(涅槃)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것은 대승이나 소승이 다 같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열 번 째 가서 수수입전(垂手入廛) 손을 드리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중생계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런 10가지 단계로 보리심을 발(發)해 가지고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보림(保任)을 다 완성을 한 다음에 중생을 교화하러 나가는 그러한 단계를 10가지로 이렇게 구분한 것인데,
참 대단히 그 '마음 소'를 찾는 경계를 그 '소' 찾는 경계에다가 비유해서 이렇게 게송을 읊고 또 그림을 이렇게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를 닦아가는 데에 퍽 이해하기 쉽고 재미스럽게 표현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께서는 첫 번째 제일 심우(尋牛) 단계와 두 번째 자취를 보는 견적(見跡)의 단계만을 게송으로 읊으시고 그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9분43초~22분30초)

 

 

 


(2)------------------

 

우리가 지금 그러한 심우송(尋牛頌)을 자세히 따져보는 것도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이 '마음 소'를 찾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앞과 뒷이 콱 맥힌 상태에서 의단으로 공안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 단계, 그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산승이 읊은 그 게송에 ‘불법(佛法)이다. 전등(傳燈)을 계승한다’ 그러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다못 자기의 공안-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위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공부를 지어 가는데,

공부를 지어 가는데 있어서 고인(古人) 공안 상에 복탁(卜度)하고 망령되이 해석을 가하지 말아라. 비록 낱낱이 해석을 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었다 할지라도 '참나'를 깨닫는 일과는 아무 교섭(交涉)이 없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공안을 갖다가 사량분별로 따져서 이것은 무슨 최초구다, 이것은 말후구(末後句)다, 이것은 제삼구(第三句)다, 이것은 제2구다, 이것은 체(體)다 용(用)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다, 이런 식으로.. 이것은 본분이다 신훈이다.
옛날에 강사나 또는 의리선(義理禪)을 하는 사람들은 공안을 낱낱이 그렇게 분석하고 따져 가지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그 공안을 다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여겼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니여. 그러한 식으로 백 천 공안을 다 따져서 결론을 내려 봤자 그것은 생사해탈도 아니고 견성성불도 아니여.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렇거늘, 하물며 그 불 속에 어떻게 앉거나 누울 수가 있겠는가?
공안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그래 가지고 어떤 분별심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마치 불덩어리에 훨훨 타는 무서운 불길 가까이 가 가지고 그것을 만져 볼랴고 그러고 또 그 속에 들어갈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거거든.

그 공안 속에, 크게 나누고 작게 나누고 논상논하(論上論下) 이러쿵 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다, 신훈이다, 본분이다, 일구·이구·삼구다, 이렇게 따진 것이 다 분대분소(分大分小)하고 논상논하 한 것이거든.
이러면 그것이 상신실명(喪身失命)-벌써 수행자로써 공안을 갖다가 의리(義理)로 따지고 사량분별로 이렇게 따지는 짓을 하는 것은 벌써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여.

조실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것은 이 공안을 가지고 사량분별로 따진 것을 극히 엄격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까닭이 바로 공안은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하면은 수행자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려.

공안을 그런 식으로 따져서 무슨 공안을 대하든지, 법문을 듣던지, 어록을 보던지, 보면은 자기 나름대로 이러쿵이러쿵 따져서 결론을 내려.

조실 스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기를 사견종자(邪見種子)라 그랬습니다.
사견(邪見) 삿된 종자, 삿된 견해를 가진 씨알머리다 그거거든. 사견종자는 암만 해봤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러주면 『예 알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금방 다음에 또 사견을 내거든.

어쨌든지 공안을 참구하는데 가서는 앞뒤가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꽉 맥혀서 오직 의단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가야 그래야 그 사람이 공안을 타파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또 하나, 공부하는 사람이 주의할 것은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여. 글을 찾고 글귀를 쫓는 거여.
그것이 공부하다가 답답하고 암만해도 안 되고 하면은 뭐 전등(傳燈)·염송(拈頌) 기타 조사어록 모다 이런 것을 뜨적뜨적 하며 행여나 거기서 무슨 좋은 해결이 나올까?

워낙 해도 해도 안 되고 가슴은 못 견디게 그렇게 답답하니까 혹 그런 것을 보면 좀 후련하고 시원해지는 맛이 있어서 그런 것을 다 볼라고 그러고,
또 그런 어록 속에 기언묘구(奇言妙句)-'기특한 말과 묘한 글귀'가 있으면 그런 것을 마음속에 기억을 하고, 이런 것은 다맛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큰 장애가 된다.
진실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짓을 하지 말아라.

그 공부가 안 되고, 암만해도 공부가 진취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앉아서도 답답하고 서서도 답답하고 추호도 어떤 그 공부가 잘된다고 하는 그런 시원한 대목이 없으니까,
대단히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마는, 그 답답하고 꽉 맥히고 이 단계가 이러한 경지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좋은 경계라 그랬습니다.

대혜 스님도 그러한 경지야말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계니까, 거기에서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아라. 번뇌심을 내지 말고 거기에서-그 답답하고 답답한 그런 경지에서,
선용기심(善用其心)-잘 그 마음을 잡드리를 해 가지고, 화두를 놓치지 말고 참구를 잘 해가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고인이 한결같이 당부하신 말입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은 이 비량(比量)-이것과 저것을 비교허고 공안을 이 공안과 저 공안을 비교허는 거야.
그래 가지고 마음을 가져서-이 공안 저 공안에 대해서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서 주박(湊泊)을 혀.
그걸 따지고 그놈을 가지고 속으로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여.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이것은 그렇게 하면은 도(道) 하고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야. 공안을 가지고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이놈과 저놈을 비교허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사량분별로 복탁(卜度)하고 이런 것은 미륵불(彌勒佛)-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생허실 때까지 이르러도 그 사람은 참 깨달음과는 아무 교섭(交涉)이 없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 속에 갇혀 있는 거와 같애서,
‘다못 어떻게 허면 이 사방이 은산철벽으로 둘러서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허면 여기서 빠져나갈까?’ 오직 그 활로(活路)를 찾는 그 한가지 일만이 문제가 되야 해.

그래서 그 활로를 찾는 방법이 「이 뭣고?」거든. 「이뭣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판치생모 화두를 말씀허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무자 화두를 허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허신 분은 「이 뭣고?」

오직 그 화두 한 마디, 한 의심만을 향해서 의단이 독로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해. 답답허면 답답헐수록 그렇게 해 나가고, 아무리 공부가 안되면 안 될수록에 그렇게만 해 나가야 돼.

또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머리가 개운하면서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리면서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잘 들릴 때가 오되, 그럴 때라 하더라도 ‘아! 됐다. 이제 공부가 잘된다’ 그런 기쁜 마음을 내서는 안 돼. 그런 기쁜 마음을 내면 금방 또 경계가 확 변한 거거든.

그래서 설사 공부가 좀 수월허게 화두가 잘 들리고 의심이 의단이 잘 순일허게 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안 돼.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는 항상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권속이 육근문두에 와서 지키고 있거든. 그래 가지고 잠깐이라도 틈만 있으면 그 육근을 통해서 들어와 가지고 아주 내란을 일으킬라고 작정을 허는거여.

마치 한 국가도 이웃나라가 그 나라를 침범을 할라며는 항상 간첩을 보내 가지고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감시허다가, 감시허면서 계속 서로 이간(離間)을 붙이는 거여.
정부와 백성을 이간을 붙이고, 백성과 백성을 이간을 시키고, 신하와 임금을 이간을 시켜 가지고, 이간을 시켜서 싸움만 일어나면은, 그것이 바로 침범해서 그 나라를 갔다가 빼앗기가 가장 좋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나라가 이웃나라로부터서 침범을 안 받고 멸망을 안 할랴며는 어쨌든지 그 나라 백성이 서로 화합을 해야 하거든.
그 나라 백성이 화합이 돼 가지고 모두가 서로 믿고 자기의 맡은바 소임을 열심히 허고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가장 나라를 위하고 국가 민족을 위하는 것이 되어서 외부에서 침범해봤자 도저히 성공을 못 허는 것이여.

우리 공부해 나가는 사람도 눈과 코와 입, 귀-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서로 눈은 자기의 역할이 따로 있고, 입은 입의 역할이 따로 있고, 또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고,
그러니 우리의 발심한 그 마음으로 주재(主宰)가 되아야, 육근(六根)이 심왕(心王)의 명령에 모두가 다 복종을 하고 합심해서 한 대사(大事)를 향해서 합심이 될 때에 도(道)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여.

그런데 그놈이 흩어져 가지고 오욕락(五欲樂)에 빠지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의 종이 된다면 도업(道業)은 성취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국은 마군(魔軍)이의 함정에 빠지고 그 홀랑게에 걸려서 도업 이루기 커녕은 마군이의 종자(種子)가 되고 마는 것이여.
그 마군이의 종자가 안 되고 법왕 권속이 되는 길은 마군이의 올개미가 무엇인가를 잘 알면은 그 올개미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올개미가 바로 사량분별이거든.

우리 공부하는 분상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가장 중요헌 것이야.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나가면은 마군이가 거기에는 발붙이지를 못하는거여.
꽉 맥히지 않고 알아 들어가고 이치 길이 있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 갈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마군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이여.(9분43초~39분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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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
[참고]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공(我空) ; 인공(人空).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보림(保任 보임)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2)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방금 산승이 읊은 그 게송>>> 이 법문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한다.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의 문 앞. 육근과의 경계.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이간(離間) ;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헐뜯어 관계가 멀어지게 만듦. 또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각각 제삼자를 헐뜯고 일러바치고 하여 사이의 정을 떨어뜨림.
*주재(主宰) ;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함. 또는 그 사람.
*심왕(心王) : 의식 작용의 본체。객관(客觀) 대상에 대하여 그 일반상(一般相)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여기에 육식(六識), 팔식(八識), 구식(九識)의 구별이 있다.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홀랑게 ; '매듭'의 사투리.
*올개미 ; '올가미'의 사투리. 노끈이나 철선 따위로, 잡아당겨도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기구.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Posted by 닥공닥정

 

 

§(240) (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다못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무조건하고 ‘이뭣고~?’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저 ‘이뭣고?’하면은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거기에서 생사(生死)를 해탈(解脫)을 하고, 거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그러니까 나도 해야겠다. 다못 그런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바보처럼 탁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송담스님(No.240) - 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 법회에서.(용240)

 

약 11분.

 


정종소식몰자미(正宗消息沒滋味)헌데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로다
나무~아미타불~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종소식몰자미(正宗消息沒滋味)라. 최상승 활구참선은 몰자미(沒滋味)여. 아무 재미가 없다 그말이여.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여. 여하약하(如何若何)가 다 소용이 없어. 이러쿵저러쿵 잘하니 못하니, 잘되니 안 되니, 시비(是非)가 여기에는 붙지를 못한다.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은산철벽을 타파해 버리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이때가 바로 생사대하(生死大河)를 건너가는 것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타파해 버려. 무슨 은산철벽이냐?
화두(話頭)의 의심,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이 알라야 알 수 없고, 앞으로 나갈라야 앞도 맥히고, 뒤로 물러설라야 뒤도 맥히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둘러봐야 꽉 맥혀서,
마치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서 나아가자니 앞도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히고, 쇠뿔통이 좁아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도 못하고.

‘이 쇠뿔이 무엇이냐?’하면 중국에 가면 물소가 있는데, 물소뿔이 기드란헌데 그 기드란한 물소뿔을 가지고 쥐 잡는 쥐덫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물소뿔 속에 저 안에다가 쥐가 좋아하는 음식물을 넣어 놓으면 쥐가 그 좋은 냄새를 맡고서 그걸 먹으려고 쇠뿔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음식을 물고 잡아댕겼다 하면은 찰크닥! 뒷문이 닫혀 가지고 쥐가 꼼짝없이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쥐가 물소뿔에 들어가서 꼼짝 못허고 잡혀.

앞으로 나가자니 꽉 맥혔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도 닫혀서 돌아서자니 좁아서 돌아서지도 못하고, 화두를 들고 의심을 허되 이렇게 꽉 맥히도록 맥히게 공부를 지어가야 한단 말이여.

알아 들어갈 것이 있고, 따질 것이 있고 이론적으로 분석허고, 그래 가지고 무슨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알아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그렇게 화두를 참구(參究)를 허면 그것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해서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여.

무조건하고 ‘이 무엇고?’ ‘이뭣고?’

다못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무조건하고 ‘이뭣고~?’

그저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이 없으니까 모를수록에 더 좋으니까 ‘이뭣고~?’

그저 ‘이뭣고?’하면은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거기에서 생사(生死)를 해탈(解脫)을 하고, 거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그러니까 나도 해야겠다. 다못 그런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바보처럼 탁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바보처럼 그렇게 해 갈수록에 그 사람은 상근대지(上根大智)고,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이렇게도 해봤다 저렇게도 해봤다, 이렇게 서성거리고 더듬거리고 갈팡질팡하고 이런 사람은 상근대지(上根大智)라 할 수가 없어. 아직 이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들어가는 인연(因緣)이 성숙하지 못한 증거여.

참으로 이 최상승법에 발심(發心)을 헌 사람이면 뭘 많이 알려고 헐 필요도 없고, 이리저리 따질 것도 없고, 그저 찰나간에 바보 똥멍청이가 되어가지고 그저 ‘이뭣고~?’ 그렇게만 들어가야 된다.
그 상태를 갖다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가서 꼼짝 못한 거와 같고 이것이 바로 은산철벽이다 그말이여.

은(銀)으로 만들어진 산(山)이요, 쇠[鐵]로 맨든 벽(壁)에 부딪힌 것 같애서, 갈라야 갈 수가 없어. 뚫고 나갈라야 뚫을 수가 없어. 화두가 그렇게 되게 맥혀 버려야 헌다 그말이여.

그래서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 되게 맥히고 그 의심이 간절(懇切)하고 크면 클수록 큰 깨달음을 얻는데, 그 의심이 「어떻게 해서 의심이 터지냐 ?」하면,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그 동안에 보고 듣고 한 경전이나 불교교리 그런 것을 가지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이렇게 나가면은 죽을 때까지 그런 식으로 따져도 그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라 하는 것은 오지를 않고, 무조건하고 꽉 맥힌 의심만으로만 나가. 그러니 얼마나 답답허겄냐 그말이여.

무슨 책을 보면 환히 알아지는 것이 있고 느껴지는 것이 있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날마다 보면 날마다 본만큼 무엇인가 알아지는 것이 있으니까 좀 재미도 있고 답답허지를 않은데,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무조건하고 그저 ‘이뭣고?’만 하니, 오늘도 그 모냥이고 하루를 더 해도 그만이고, 일주일을 해도 알 수가 없고, 한 달을 해도 알 수가 없고, 석 달을 지내도 아무 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고, 답답허기만 허다.

그것이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참으로 공부가 바르게 되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바르게 해 가야 거기에서 업장이 소멸이 되고 결국은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를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처음~10분3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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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6) '贈淳長老' 사명대사(1544-1610) 게송 참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시비(是非) ; ①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 ②이러니저러니 좋지 않게 트집을 잡아서 말함. ③옳고 그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뭣고?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이뭣고? (이 무엇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보살선방 법문2014. 4. 7. 11:17

§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나건,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정신을 챙겨 화두를 들고나가야 돼. / 무기공(無記空) / 잡담 말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삼매(三昧)는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바른 정(定)’이라 하는 것은 밥 먹을 때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지 않고, 종일 걷되 한 조각의 땅도 밟음이 없고, 종일 말하되 한마디 말도 한 바가 없어야, 그래야 그것이 진짜 삼매고 바른 정이야.

‘양반 못된 것이 장터에 가서 큰소리 치고, 개 못된 것이 들에 가서 짖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선방에 와서 자기가 잘난 체하고 큰소리 치고 남을 멸시하고 마구잡이 막 행동을 하고 한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어.

 

**송담스님(No.524) - 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용524)

 

약 21분.

 

그리고 주력(呪力)을 하거나 기도를 하다 보면 의술(醫術)을 배우지 안 했는데 침도 놓고 또 손으로 요렇게 만져서 지압 같은 것도 하고 또 무슨 약처방 같은 것도 이렇게 일러주는 그런 능력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건 전생(前生)에 의술을 공부를 했거나 또는 ‘내생(來生)에는 내가 의술을 통달해 가지고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리라’하는 그런 원력(願力)을 세웠거나 그런 경우에 금생(今生)에 그렇게 주력을 하다 보면,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런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걸 꼭 나쁘다고 할 것은 없으나 이 선방(禪房)에 들어와서는 자기 공부할라고 들어왔지 여기 와서 사람들 병 고쳐 줄라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만약에 그런 능력이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 하다 보면 많이 모여 들어가 가지고 이 선방이 완전히 병 치료하는 병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제(結制) 중에는 선방 내에서는 그걸 좀 삼가하시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도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좋고, 선방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 그런 좋은 능력이 있으면 해제(解制)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만나서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은 뭐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참선을 하는데 자꾸 이상스런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난다 하면 그 경계가 좋은 경계가 되었건, 무슨 신비한 경계가 되었건 거기에 집착(執着)을 하면 안 돼. 그것은 그대로 놔둬 버리고 정신을 딱! 챙겨 가지고 화두를 계속해서 화두를 들어 나가야 돼.

천하 없는 신비하고도 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따라가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건 공부가 아냐. 그냥 고대로 물리치려고 하지도 말고 그대로 놔둔 채 똑바른 정신으로 화두만 떠억 들고 나가면 계속 그러면 결국은 그 경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여.

 

공부하는 가운데 환상이 나타나거나, 부처님이 나타나거나,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거나 별별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참 경계가 아니야.

 

그리고 참선하고 있으면 집에서 뭔 일 일어나는 것이 나타나서 미리 알게 되고, ‘집에 누가 죽었다’하면 가서 보면 죽어 갖고 있고, ‘누가 올 거다’하면—참선 중에 그것이 그냥 자연히 알아져서, 가서 보면 누가 와 있기도 하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식(識)이 맑아지니까, 그 맑아진 식의 능력으로 그것이 알아지는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잡신(雜神)이 이런 것을 와서 일러주기도 하고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식(識)이 맑아져서 알아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道)를 통한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환히 알아지니까 ‘내가 도통(道通)을 했구나’ 그렇게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런 것이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도(道), 내가 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成成佛) 하는 것과는 영판 길이 다릅니다 그게.

그것은 공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거기에 집착하면 정말 사도(邪道)로 빠지게 되는 것이니까 집착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그걸 사용하려고 하지도 말고, 좋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없었던 걸로 놔 버려야 합니다.

놔 버리고 자꾸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꾸준히 들고 나가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해로울 것도 없습니다.

 

화두를 놔 버리고 그런 데에 집착을 하고 그런 데에 빠져 가지고, 그런 거 아는 소리를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정도(正道) 하고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고, 잘되어 봤자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니까,

모처럼 이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말해서 초능력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뭣한 사람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무척 노력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건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또 예불(禮佛)을 하러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는 밤에 정진할 때, 환히 아주 백 촉짜리 불을 켠 것처럼 환히 모든 것이 비쳐.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데 자기 눈에는 환히 그렇게 광명(光明)이 보이는 수가 있어.

그런 것도 역시 그런 거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머지않아서 내가 도통하려고 이런가 보다’ 그러한 생각도 하지 말어. 집착하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이 없어.

 

그것이 꼭 '나쁜 것이다. 좋은 것이다' 말할 것도 아니고, 문제는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거고,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올바르게 정진을 해 나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여. 그렇게 아시기 바라고.

 

그리고 ‘정진하다 보면 코로 향내가 난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향내가 날 수도 있고.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것이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향내가 정상적으로 나는 향내라면 다른 사람 코에도 다 그 향내가 나야 할 텐데 자기에만 느끼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어떻게 어떠한 공부를 해 왔느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해 왔느냐? 과거에 어떠한 업을 지었느냐? 그런 것에 따라서 그렇게 향내가 날 수도 있고, 캄캄한 밤에도 환히 모든 것이 다 보일 수도 있고, 여기서 수백 리 떨어진 데에서 하는 소리를 여기서 들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50가지의 그런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해서 소상(昭詳)하니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도(道)와는 별개의 것이여.

그런 경계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정법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의 주의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런 신기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가 일어나면, 그것에 집착을 했다 하면 거기서부터 정도(正道)에서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시기를 바라고.

 

삼매(三昧)와 선정(禪定)은 다른 것이냐, 틀린 것이냐? 같은 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삼매(三昧)는 인도 말이고, 중국 말로는 정(定)이라 그러는 것인데, 같은 말이죠.

 

그런데 무엇이고 한 가지, 책을 읽는데 거기에 열중하고 골몰해 가지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밖에서 떠드는 소리도 안 들리고 한다면 그것은 ‘독서 삼매’가 될 것이고.

글씨를 쓰는데 열심히 글씨를 쓰다 보면 자기가 글씨를 쓴다는 생각도 없고, 잘 쓸라는 생각도 없고, 밖에서 아무리 시끄러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글씨 쓰는 데만 정신이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글씨의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도 마찬가지여. 일에도 열중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되면은 그것은 ‘일의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이뭣고’가 되었건 또는 ‘옴 마니 반메 훔’이 되었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 되었건, 일심(一心)으로 하다 보면 그것도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도 정에 들어가는 것인데,

정(定)에는 사(邪)의 정, 삿된 정과 바른 정이 있어. 삿된 정에 빠지면 삿된 결과가 오는 것이고 바른 정에 들어가야 바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삼매(三昧)는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바른 정신으로 바른 신심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해 나가야 더이상 의심이 커질라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라야 간절할 수 없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야 해.

그래 가지고 순일무잡해 가지고 나가면은 결국에는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직 그 길이다.

 

그리고 참선 하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라 가지고,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도 화두에 대한 바른 의심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따악 유지가 되어 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면은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여. 설사 모든 세상을 훤히 알고 신통술이 나와도 그것은 정법이 아니다 그말이여.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그러한 무기공에 떨어진 것을 '삼매에 들었다'고 좋아하고 착각을 하고 남에게 자랑을 하고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중이 모여서 선방에 와서 정진을 할 때에는 대중의 법도(法度)에 순응하면서 그 가운데 정진을 잘 잡드리를 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몇 시간을 꼼짝도 않고 앉을 수가 있다. 나야말로 이 가운데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가지고 있고,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별 사람들이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들이 아니다’하고 낮잡아 보고 멸시하고 그런 것은 정신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여.

스물네 시간을 꼼짝도 않고 앉았다 하더라도 생각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여.

 

40년 동안을 꼼짝 안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 스님이 있었는데, 자기는 한국에서 제일 정진을 잘한 도인이라고 착각에 빠져 갖고 있었어. 마곡사에 그런 스님이 있었는데. 그게 40년이 아니라 억겁 동안을 앉아서 꼼짝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법이 아니여.

 

‘바른 정(定)’이라 하는 것은 밥 먹을 때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지 않고, 종일 걷되 한 조각의 땅도 밟음이 없고, 종일 말하되 한마디 말도 한 바가 없어야, 그래야 그것이 진짜 삼매고 바른 정이야.

 

여러분은 일단 이 용화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였으면 용화선원의 법도에 순응하면서 여법하게 정진하되, 다른 사람에게 이만큼도 방해를 주지 아니해야 해.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주지 아니하면서 자기 공부를 안으로 착실하게 해 나가야 한다. 자기 공부 잘한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법도(法度)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벌써 바른 마음가짐이 되어 있질 않거든.

 

그 점에 대해서 어느 선방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여. 그 선방에 가면은 그 선방의 법도를 지키면서 다른 분에게는 조금도 방해를 주지 아니하면서 자기 공부를 내부적으로 착실하게 다져 나갈 줄 알아야 해.

그러다 보면 말이 필요가 없는 거여. 말을 많이 하고 큰소리를 치고, 선방에 와서 자기가 잘났다고 큰소리 치고, 자기 이외에 누가 나만큼 공부한 사람이 없냐고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게 될 거냐 그말이여.

 

‘양반 못된 것이 장터에 가서 큰소리 치고, 개 못된 것이 들에 가서 짖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선방에 와서 자기가 잘난 체하고 큰소리 치고 남을 멸시하고 마구잡이 막 행동을 하고 한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어. 그 점에 대해서 각별히 명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살님 말씀) “용화사 정법문중에 선을 하러 오면은 어떻게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데, 우리 여러 보살님들이 너무 잡담이 많습니다. 풍기문란해 가지고 원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 법문에 한마디 한마디도 실행을 못하는 걸 보면 저 옥상에 가서 실컷 울고 내려옵니다. 왜 이렇게 어지럼하게 정법이 이렇게 문란하게 돼 가는지 이래야 되는가를 너무너무 기가 막혀서 숨이 막혀 제가 고자질을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건 고자질이 아니고 참, 조실 스님 때부터서 주욱 해 오신 선배 도반(道伴)으로서 여러 도반을 위하고 용화선원의 법도를 위해서 자비심(慈悲心)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전에도 항상 말씀을 드렸죠. '입선(入禪) 시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방선(放禪) 시간이라도 잡담을 하시지 말라'

방선 시간에 혹 허리가 아프면 지대방에서 허리를 좀 펴시는 것까지는 좋으나, 몸은 쭈욱 펴시되 마음은 항상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방선 시간이라고 해서 마구잡이 떠들다 보면 그것이 자기 공부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보살님네한테도 피해를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여기에 오면 가정 문제 뭐 사회 문제 뭐 이 소리 저 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오직 화두 하나만 가지고 잡드리를 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전에 어떤 스님을 입승(立繩)을 맡겼는데, 어떻게 엄격히 했던지 변소에 갈 때도 따라가고, 변소에 가고 올 때도 말을 못하게 잡드리를 한 입승이 있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내가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소에 갈 때 올 때 잡담하지 말 것, 지대방에서도 잡담하지 말 것. 여기 와서 일분일초(一分一秒)가 새롭고 아까운데 어떻게 그렇게 잡담으로 세월을 보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그 점에 대해서는 오늘 대단히 좋은 의견을 말씀을 하셨고, 내가 그전부터 항상 주장하는 바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그것을 매우 강경하게 단속을 하셨습니다.

 

조실 스님은 그때에 계신 분은 아시겠지만, 종이로 이렇게 관(冠)을 만들어 가지고 잡담만 하면 그 관을 그 사람한테 이렇게 씌워 줍니다. 그러고 이렇게 지내다가 누가 잡담만 하면 그거 벗어서 잡담한 사람한테 머리에 이렇게 관을 씌워주고 해서, 그 관이 이 사람으로 갔다 저 사람으로 갔다 이렇게 까지 조실 스님은 엄격하게 단속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열반(涅槃)하신 조실 스님을 살아 계신 조실 스님처럼 우리는 그렇게 모시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정 잡담을 많이 하시면 그 관을 몇 개를 만들어 가지고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잡담을 하실 것이고.

그래서 잡담을 안 하셔야 합니다. 정말 방선 시간에도 잡담을 하지 말고 조용하게, 이 큰방에서는 방선 시간에도 좌선(坐禪) 하시고 싶으면 계속해서 하셔도 되고 또 지대방에 가시더라도 절대로 잡담만은 하시지 않도록.

 

앞으로 한 20일 남았나? 한 보름 남았는데, 보름 동안을 정말 자율적으로 입승 스님이 엄격하게 단속을 해서가 아니라 각자 자율적으로 보름 동안을 정말 여법하게 한번 모범적으로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38분54초~59분3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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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呪力) ;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의 효과.

*원력(願力) : 원(願)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 • 숙원력(宿願力) • 대원업력(大願業力) • 서원(誓願) • 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본원(本願) : 근본서원(根本誓願)의 준말. 모든 불보살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일으킨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결정코 이루려는 맹세(서원).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다.

①총원(總願)--모든 불보살님들의 공통원, 사홍서원(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가없는 중생을 맹세코 다 건지리이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끝없는 번뇌를 맹세코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한없는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우리이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다 이루리이다.

②별원(別願)--불보살님마다 중생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운 원(아미타불48원, 약사여래12원 등등). 별원은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정도(正道) ; ①올바른 도. 올바른 실천법. ②팔정도(八正道)의 약칭.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능엄경(楞嚴經) ; 본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10권. 당(唐)의 반자밀제(般刺蜜帝) 번역.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세존과 아난(阿難)의 문답으로 시작하여 깨달음의 본성과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하고 여래장(如來藏)이 무엇인가를 밝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음신앙이라 하고 능엄다라니(楞嚴陀羅尼)를 설한 다음, 보살의 수행 단계, 중생이 수행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번뇌에 대해 그 원인과 종류를 밝힘.

*소상(昭祥)하다 ; (이유나 설명이)자세하고 분명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 ;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일심(一心) ; ①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평등한 마음. ②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마음. 통일된 마음. ③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마음. ④아뢰야식(阿賴耶識).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 ; 밤이 되어도 눕지 않고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 · 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 · 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지대방 ; 절의 큰방 머리에 있는 작은 방. 이부자리, 옷 등의 물건을 넣어 두는 곳이며, 스님들이 잠깐 휴식을 하기도 하는 곳이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Posted by 닥공닥정
보살선방 법문2014. 4. 6. 15:43

§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보살님들의 여러 질문에 대한 말씀). / 영아행(嬰兒行).

 

이뭣고?’를 챙기는 것은 무량겁 흘러내려온 생사윤회(生死輪迴)의 그 흐름을 거스르는 거여. 거슬러 가지고 그 뿌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거든 이게. 그러니까 힘이 들 수 밖에 없어.

힘이 들고 어렵지만 이것을 해야만 영원한 생사윤회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믿고 조사의 법문을 믿고서 우리가 참선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바른 자세와 호흡으로 여법하게 화두를 들고 계속 참구(參究)하면 결국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순일무잡하게 될 때가 오는 것이다.

**송담스님(No.524) - 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용524)

약 21분.

 

정진(精進)을 하다 보면은 한없이 환희심이 나기도 하고, 한없이 슬픈 생각이 나기도 하고, 한없이 아주 죽어버리고 싶은 그런 생각이 날 때도 있고, 한없이 외로운 생각이 날 때도 있고, 밥을 먹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이 출출 흐르는 수도 있습니다.

정진 하다가 보면 그러한 경지가 있을 수가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집착(執着)을 하면 안 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떠억 들어나가야 하는 거여.

 

그런 경지에 자기도 모르는 새에 빠져 들어가서 거기에 집착을 하면, 그 정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그말이여.

어떠한 경지가 나타나더라도 퍼떡 정신을 차려서 자세가 비틀어졌으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몸에 긴장이 들어서 굳어 있으면 그 긴장을 풀고, 단정한 자세와 단전호흡으로 바르게 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가면, 금방 그런 경지가 다 사라지고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여.

 

 

‘왜 이렇게 참선이 안되는지 답답하다. 도대체 될 건지 안될 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공부가 잘될까?’ 이건 정진하려고 애쓴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서 모든 것이 잘되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잘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안된다'고 답답하고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운—공연히 부처님을 원망하고, 모다 조주 스님을 원망하고, 조사(祖師)를 원망하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원망스럽고, 이런 생각하다 보면 한이 없습니다.

 

안되는 것은 당연해.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업(業)을 지어서 업을 받고 또 업을 지어서 업을 받으면서, 물 흘러가듯이 이렇게 생사윤회(生死輪迴)의 흐름 속에 살아오다가 ‘이뭣고?’를 챙긴 것은 그 흐름을 거스르는 거여. 거슬러 가지고 그 뿌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거든 이게. 그러니까 힘이 들 수 밖에 없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업(業)으로 인해서 새로운 과보를 받아서 또 그렇게 살아가면—울다가 웃다가, 좋아하다가 괴로워하다가 그렇게 그냥 살아가면 별일이 없어.

지옥에 가면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천당에 가면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지은 업대로 받으면 그냥 별일이 아닌데.

 

이것을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해서 영원히 생사윤회를 해 가지고서는 끝이 없으니까 이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가지고 근본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로 돌아가려 하니까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여.

힘이 들고 어렵지마는, 이것을 해야만 영원한 생사윤회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믿고 조사의 법문을 믿고서 우리가 참선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그리고 여법하게 화두를 들고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계속해서 하다 보면 결국은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망상(妄想)을 물리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순일무잡하게 될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것은 본인이 그런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중단하지 않고 게으름부리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거거든.

'앞으로 잘될 거냐 안될 거냐? 내가 견성을 할 거냐 못 할 거냐? 확철대오를 하냐 안 하냐?' 그런 것을 지금 따지고 앉았을 시간이 없다 그말이여.

 

 

‘단전호흡이 잘 안된다’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그런 것은, 단전호흡도 하는 방법을 잘 알아 가지고 자연스럽게—무리하게 하려고 하지를 말어.

억지로 시간을 오래 끌어서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자기에게 가장 알맞고 적당한 길이로, 3초에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한 3~4초 동안에 조용히 내쉬고.

이 시간을 한번 들어마셨다가 내쉴 때까지 한 10초나 12초 이렇게 그런 정도로 하면 누구나 괜찮은데.

 

자꾸 하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그때 상황에 따라서 자기의 체질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해야지, '억지로 10초씩 해서 30초씩 하자, 억지로 25초씩 해 가지고 1분 동안에 하리라' 이렇게 무리하게 하면 안 되는 거여.

 

 

‘자식들이 전부 성당에 나가서 걱정이다’ 하는데.

기왕이면 부모님 종교를 따라서 불법(佛法)를 믿고 정법(正法)을 믿게 되면 천만다행한 일이나, 무슨 인연으로 성당에 나가게 된다면 참 그걸 억지로 못 가게 날마다 큰소리를 치고 그럴 수도 없는 거고. 성당에 나가되 바른 마음으로 잘 믿으면 다행한 일이고.

 

이것을 돌리는 방법은 ‘불교를 믿어라, 믿어라’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스스로 불교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이 정말 여법(如法)하게 정법을 믿고 여법하게 참선하셔서, 마음가짐이나 말씀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 자녀들의 눈에, ‘야! 우리 어머니는 정말 불교를 믿으시더니 정말 훌륭하시다!’ 또 어머니를 통해서 불교의 말씀을 듣고 ‘정말 불교는 참 좋은 종교로구나!’ 이렇게 스스로 느껴서 불교로 돌아와야 되는 것이지,

 

어머니가 자녀들이 보기에 여법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불교가 별로 좋은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면 돌아올 가망성은 없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강요하지 말고, 마음가짐으로 행동으로 불교의 좋은 것을 자녀들이 자연히 보고 느끼도록, 그러면 돌아오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돌아오게 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참선을 하니 몸이—등에서 일어나기 시작해 가지고 온 몸에서 열이 나고, 몸뚱이가 주먹만 하게 이렇게 조여진 것을 느낀다’ 그러는데.

단전호흡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이 단전에서 이렇게 열이 나 가지고 그 열이 차츰차츰 몸으로 번져서 등으로도 이렇게 열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주천화후(周天火候)라고, 단전호흡을 계속해서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은 순리이고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밤에도 모다 그 단전호흡을 주로 하는 그런 수행자들은 한데에서 밤을 지샐 때, 단전호흡을 하면 전신에 그렇게 열이 돌기 때문에 추움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닌데.

 

‘주먹만 하게 몸이 조여진다’고 한 것은 그 자기의 느낌이겠지요.

열이 나건, 그런 데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기의 본참화두를 항상 놓치지 않도록, 망각하지 않도록 그걸 잘 잡드리해 나가면 그런 것을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앉았을 때에 옆구리가 결린다’하는 것은 아마 그 부분이 내부에 좀 좋지 않은 대목이 있어 가지고 아마 그런 것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또 뭐 일을 조금 심하게 해 가지고 결릴 수도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심하면, 옆구리가 결려서 호흡하기도 어려우면, 파스 같은 것을 붙여 보시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병원에 가서 문의를 하실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보살님 질문) “원장 스님께 자꾸 물어보기... 말씀을 여쭤보겠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큰스님 계실 적에, 그 전에도 인제 어딜 가면은 산에 같은 데 가면은 무슨 글씨 같은 게 떠오르고 그러는데, 몰랐습니다. 그랬는데 이 근년에는 이게 마음이나 행동이 모두가 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아주 철모르는 어린네 행동이 되어 있어요 제가.

그리고 이 우주가 말이에요. 우주가 이 공 같은, 축구공 같은 그런 기분에서 이거 이렇게 놀리고 댕긴다는 그런 기분하에서 허황심(虛荒心)에 항상 기쁜 거예요. 그리고 이제 모든 행동이 아이들 같은 이거, 뭐 먹고 입고, 엄마가 걱정이 무슨 걱정이 있건 없건 그거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이거 그런 경지 이걸 어떻게 담아야 될까요?”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연세가 지금 일흔 셋 이지요”

 

보살님은, 아마 보살님 뿐만이 아니라 불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점점 어린애가 되어갑니다. 그 세속에도 연세가 팔십, 구십이 되면 아주 어린애처럼 되어 가지고 그런 분을 더러 볼 수가 있는데.

참선을 열심히 하면 그냥 순수한, 아주 순진한 어린애처럼 마음이 그렇게 깨끗해지니까,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어린애처럼 된 것은 대단히 좋은 증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늙어가면서 심술이 뒤룩뒤룩하고 탐심(貪心)이 꽉 차 가지고, 행동과 언어에 남을 찍어서 삐틀어서 긁어 잡아당기는 그런 말이 입에서 튀겨져 나오고, 마음에는 탐심이 꽉 절어 가지고 닥치는 대로 긁어 담아 가지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르고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참선을 정말 올바르게 해 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져서 욕심도 없어지고, 탐심도 없어지고, 진심도 잘 안내고 어린애처럼 되어 가지고 그렇게 순진하게 된다면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도인(道人)의 81행(行)이 있는데, 81행 가운데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치는 것입니다. 영아행이라 한 것은, 인자 철없는 한두 살 어린애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경에도 ‘어린애처럼 되어야 천당에 갈 수가 있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진한 어린애처럼 그렇게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해진다면 그건 대단히 좋은 증상이고 그건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가지고, 손에다 가지고 공 가지고 놀듯이 그런다는데.

사실 우주가 이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세계가 동서남북 시방(十方)으로 무한대(無限大)로 많습니다. 마치 이 공중에 먼지가 날으듯이 우리 현재 천문학에서 발견한 별이 수없이 많지마는 그 몇억만 배의 별들이 이 무한한 허공 속에는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진리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다 우리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고 그런 것입니다. 손으로 맘대로 가지고 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진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런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고, 평범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평범한 가운데에 화두를 들고 이렇게 모든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매(三昧)에 들 때에는 눈을 뜨고 드느냐, 감고 드느냐?’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는데.

우리가 참선 공부를 해 나갈 때에는 눈을 감고 하는 것 보단 눈을 평상(平常)으로 뜨는 것이 좋습니다.

 

초학자(初學者)는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보여 가지고 그리 정신을 빼앗기기 때문에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진이 잘된다고 그렇게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처음에 습관을 들일 때부터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해야 좋습니다.

눈을 감고 하면은 조용하니 공부가 잘된 것 같지마는 까딱하면 혼침에 빠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안 좋으니까 눈을 평상으로 뜨게 하고.

 

 

잔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어 보면 ‘판치생모(板齒生毛)’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이뭣고?' 화두를 타 가지고 하면 조실 스님 법문에 ‘판치생모’ 법문이 나오더라도 자기의 본참화두인 ‘이뭣고?’를 꾸준히 해 나가신 것이 좋습니다.

 

맨 처음에 ‘판치생모’ 화두를 타셨다면 아무리 ‘이뭣고?’ 법문을 듣더라도 자기의 본참공안인 ‘판치생모’를 들어야 하는 것이고.

또 어디서 ‘무자(無字)’ 화두를 타셨다면 아무리 어떤 큰스님네가 ‘이뭣고?’나 다른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 법문을 하시더라도 자기의 본참공안인 ‘무자' 화두를 쭈욱 들어 가야지, 이 법문 들었다고 해서 화두를 그리 바꾸고, 저 법문 들었다고 해서 그리 바꾸고, 자꾸 이렇게 바꿔싸면 안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라고 제가 말씀을 했는데.

‘이뭣고?’한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여운이, 들어마셨다가 다음에 머꿀 때까지 그 여운이 그때까지 알 수 없는 의심이 그때까지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또 내쉴 때 ‘이뭣고?’

 

처음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는 꼭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상관이 없어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호흡은 몇 번을 하더라도 한번 화두 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을 관(觀)해 나가야 되는 것이여.

그러다가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화두가 없어져 버리면 다시 그때 또 내쉬면서 ‘이뭣고?’를 챙기고 이렇게 하는 거야.

 

아침에 새벽에 떠억 화두를 한번 들었는데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다면, 호흡이야 그동안에 수없이 하거나 말거나 그거 상관이 없고, 공양(供養)을 잡술 때도 공양을 이렇게 들면서도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게 되어야 하거든.

공양이 끝나고도 고대로 있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더라도 고대로 있어야 되서, 그래 가지고 성성적적하게 한번 든 화두가 종일토록 있다면 그건 아주 공부가 아주 순숙(純熟)해진 증거니까, 꼭 화두를 숨 내쉴 때마다 자꾸 안 해도 상관이 없다. 화두가 없어지면 다시 또 챙기는 거고.(18분20초~38분4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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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정심(正心) ; 바른 마음, 또는 마음을 가다듬음.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주천화후(周天火候) ; 단전에 모여 있는 신기(神氣)를 따뜻하게 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퍼지게 하고 그래서 온몸이 열기로 가득차게 하는 도가 수련법이다. 이러한 수련을 열 달간 계속하면 단전에 신태(神胎)가 생기고 더 계속하면 체내에 단(丹)이 형성되어 불로장생하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북창비결 [北窓祕訣]에서.

*한데 ; ①사방, 상하를 덮거나 가리지 아니한 곳. 곧 집채의 바깥. 노천(露天). ②일정하게 정하여진 자리가 아닌 다른 곳.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삼척동자(三尺童子) ; 키가 석[三] 자[尺]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童子]. 철없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 한 자[尺]는 약 30.3Cm에 해당한다.

*허황심(虛荒心 헛될·공허할 허/허황할·황당무계할 황/뜻·생각 심) ; 헛되고[虛] 황당(荒唐)한 생각[心]. 현실성이 없고 근거가 없어 미덥지 못한 생각.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영아행(嬰兒行) ;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

*시방(十方) : 「십방」이라 발음하지 않는다。동 · 서 · 남 · 북의 사방(四方)과 각 중간 방위인 사유(四維)에 상 · 하까지 넣어서 열 가지 방향으로써 무한한 우주(宇宙)의 입체적 공간 전체를 말하게 된다.

*정진하는 분상(分上)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 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14. 3. 24. 18:19

§(445) 진짜 화두 / 포구발심(怖懼發心) / 시삼마(是甚) 가장 근원적인 화두 / 화두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두를 안 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체처 일체시에서 낱낱이  자체가 공안 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어서, 새로 화두를 탄다고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방편(方便)으로 설하는 것이지, 정말 진짜 화두는 중생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닥치는 일—정든 가족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거기서 진짜 화두를 얻게 되며, 진짜 거기서 대발심(大發心) 하게 되며, 거기서 대분심(大憤心) 일어나게 되며, 거기서 대의단(大疑團) 돈발(頓發)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삼마 화두는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여. 화두를 새로 타기 전에 모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참공안(本參公案)이여. 의심  할래야   수가 없거든. 이건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송담스님(No.445)—1991 5 첫째 일요법회. (용445)

 

약 10분.

 

 

앞으로 초파일이 지나고 또 4월 15일이 되면 하안거, 여름 결제가 시작이 됩니다.

새로 () 받을 행자(行者)  앞으로 선방에 가고자 하는 수좌(首座)들이 '화두를 받어 가지고 그래가지고 선방에 가야겠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법상(法床) 올라온 기회를 타서, 선방에 여름 결제에 방부(房付) 들이고자  보살님이나  선방에 가서 방부를 들이고자  스님네를 위해서  화두 드는 것에 대해서 간략히 설하고자 합니다.

 

 화두(話頭)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화두요,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세상이 온통 공안(公案)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여.

눈으로  , 귀로 들을 , 코로 냄새 맡을 , 혀로 맛볼 , 몸으로 차웁고 더운 것을 느낄  우리가 닥치는 모든 경계(境界)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하나하나가 공안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낱낱이  자체가 공안 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어서, 새로 화두를 탄다고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방편(方便)으로 설하는 것이지,

정말 진짜 화두는 중생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닥치는 일—정든 가족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거기서 진짜 화두를 얻게 되며, 진짜 거기서 대발심(大發心) 하게 되며, 거기서 대분심(大憤心) 일어나게 되며, 거기서 대의단(大疑團) 돈발(頓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화두는 ()할래야 매할 수가 없고, 잃어버릴라야 잃어버릴 수가 없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저절로 발심이요, 저절로 분심이요, 저절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는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어리신 나이에 다정한, 같이  배우고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바로 그것을 보고 발심을 하셨고,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꿈속에서 지옥고(地獄苦) 받는 광경을 보시고서 정말 포구발심(怖懼發心) 허셔.

 

 지옥고 받는 무서운, 인간의  생사고(生死苦)라고 하는 것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느끼시고 그래 가지고 출가하셔서, 누가 선방 규칙을  지켜라’ ‘묵언을 해라’ ‘말을 많이 하지 말어라  어째라 저째라 하는 그러한 자자꾸레한 그런 말이 전혀 필요가 없어. 저절로 대분발  가지고 젊으신 나이에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시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도 그만큼 발심할  있는 많은 일들이 이웃에서, 우리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날이면 날마다 무수한 사건들이 연거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건너 불처럼 직접  일이 아니다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무심히 지나쳐 버리고,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지나쳐서 그렇지 사실은 알고 보면  기가 막힐 일이죠.

 

시삼마(是甚).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뭉쳐진, 아버지의   방울과 어머니의   방울이 만나 가지고  몸을 받아 낳는데,  몸은 머지않아서 병들어서 늙어서 결국은  버리게 되는데,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 주인공(主人公) 있거든.

 

그놈이 부르면 대답할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성도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욕심도  줄도 알고,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고,  생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은 찰나간(刹那間)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같이 되기도 하고 천사와 같이 되기도 하는데,

 생각 비뚤어지면은 찰나간에 악마가  수도 있어. 나찰(羅刹) 귀신이  수도 있고, 독사가  수도 있고.  생각 잘못 먹으면 음흉하기가 구렁이보다도 더 고약하게  수도 있다 그말이여.

 

그러한 놈을 우리가 낱낱이  가지고 있어. 대관절 그놈이 무엇인가?

이거 화두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불법(佛法) 무엇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가만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의심을  할래야   수가 없거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시삼마 화두는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여. 화두를 새로 타기 전에 모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참공안(本參公案)이여.

 

의심  할래야   수가 없거든. 이건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랐으니 의심이 없을 수가 없고, 다못 올바르게 참구(參究) 나가는 법만 몰랐지  시삼마 본참공안은 사람 사람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어.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참구하는 방법을 바로 알고 하면 공부하다가 사견(邪見) 떨어지지 않고, 이걸 바르게 참구를 안 하면 이거 하다가 정신이 샐쭉해지기도 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수가 있고, 이걸 참구를 잘못하면 상기병(上氣病) 올라서 골이 뽀개질라 그러고 눈알이 빠질라 그러고  안돼.

 

그래서 바르게  화두를 들어가는 법을 알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말이여.(1739~2725)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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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 수행하는 사람. ②계()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

*방부(房付)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 참가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이란 뜻인데, ()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 옛말이 있다. ()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 이치(理致)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라고   일체의 (). ③시비(是非)•선악(善惡)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 순경(順境), 내경(內境) 외경(外境)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방편(方便 방법·수단 /편할 )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일어날·나타날·밝힐 )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 直頓의 , 곧바로.

*()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려워할 /두려워할 /일어날 /마음 ) : 끝없이 되풀이 되는 육도윤회(六途輪廻)에서 받을 생사(生死) 정말 무섭구나.  생사의 고통을 매우 두려워[怖懼]하여, 두려운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 사람의 몸이 , , , 바람(,,,)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 의미하는 .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 주인옹(主人翁).

*찰나간(刹那間 ·짧은시간 /어찌 /사이 )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세간(世間 : 이 세상, 미혹한 세계)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 그의 이름을 부르면  음성(音聲) 듣고()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준다는 보살. 자비의 화신.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 되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

*상기병(上氣病 오를 /기운 / )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 머리에 치밀게()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이 사용된다.

*요료법(尿療法) ; 요료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Posted by 닥공닥정
법문 듣는 법2014. 3. 21. 18:50

 

 

§(세등08) 법문을 옳게 들어야. / 화두는 의심(疑心)이라. / 참선은 다 쏟아 버리는 공부 / 썩은 나무둥치.

 

법문은 많이 들어서 머리 속에다 넣어 놓고 많이 알고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듣고서 그 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일체 지식·알음알이를 놔버리고, 다못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현전해야만 그것이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다.


천 번, 만 번을 법문을 듣고 해도 다만 알 수 없는 한 생각 뿐이라야 된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08)-병진년 동안거 결제 中 법문(1976.12.17)에서. (세등08)

 

약 10분.

 


금방 전강 조실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법문 설하신 것을 들었는데, 조사 공안이 천칠백 공안이나 되는 가운데에 이 조주(趙州)의 무자(無字)는 옛날부터 가장 많이 논란되고, 또 많은 스님네들이 무자를 통해서 정진을 허고 무자를 통해서 많은 깨달은 분들이 나왔는데, 그만큼 이 무자는 공안 가운데에서도 힘을 얻어간 그런 공안이라.

그래서 이 몽산 스님께서도 이 무자에 관해서 이렇게 자세히 설을 허셨지마는, 우리 정진하는 참선학자의 분상에서는 이렇게 10가지 조목으로 자세히 말씀해 놓으신 것이 잘 들으면은 약이 될 수도 있고, 잘못 들으면은 오히려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그러헌 위험성도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에게 화두를 타 가지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가면 아무 병폐가 없는 것이여.

유(有)니 무(無)니, 이 선지식은 이렇게 말씀허시고, 저 선지식은 저렇게 말씀허시고, 그러니 어떤 것이 옳으냐 마냐 하고, 여기 가서 물어보고, 저기 가서 물어보고, 이렇게도 해봤다, 저렇게도 해봤다,
이렇게 해서 공연히 분별심을 내 가지고 자기 선지식으로부터 지도받은 고대로 해 나가지를 않고, 공연히 이리저리 따져보고 의심하고 분별심을 내고 거기에서 화두에 병(病)은 생기는 것이다.

오늘 아침 들은 이 법문도 옳게 들으면은 그러헌 분별내지 아니하고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무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라고 이렇게 자세히 법문허신 것이지, 여기에 나오는 10가지 조목으로 자세히 말씀허신 거, 그것을 낱낱이 무슨 듣고 외와서 따지라고 허신 법문이 아니다 그말이여.

이렇게 법문을 듣고서 다못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이 돈발(頓發)을 해서, 꽉 맥혀 가지고, 맥힌 그 의심 하나만이 현전(現前)을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법문을 참 옳게 들은 것이고, 그렇지를 못허고 이리저리 분별하고 사리상량을 붙여서 따지고 이런다면은 그것은 법문을 옳게 들은 사람이 못되는 것이여.

화두는 의심(疑心)이라, 자기가 과거에 경을 보았거나 또는 어떠한 법문을 들었거나,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 그러헌 지식·교리·상식 그러헌 것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생각해 보고 이리 분석하고 저렇게 종합하고 이래 가지고서, 그런 것으로 살림을 삼고, 또 이 선지식한테 법문을 듣고 가서 이러쿵저러쿵, 저 선지식한테 들은 것과 비교해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이런 식으로 공부를 삼는다고 허면은,
그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점점 중생 알음알이만 더 조장이 될 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말이여.

법문은 많이 들어서 머리 속에다 넣어 놓고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듣고서 자기에 그 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일체 지식·알음알이를 놔버리고, 다못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현전해야만 그것이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다.

천 번, 만 번을 법문을 듣고 해도 다만 알 수 없는 한 생각 뿐이라야 된다 그말이여.

세상의 공부는 많이 듣고 알고 있어서 많이 기억을 하고 머리 속에 많이 알고 있어야 그 사람이 유식허다 그러고 참 훌륭한 학자라고 그러지마는 이 참선 공부는 많이 알고 있는 그런 것은 오히려 병(病)이요, 공부가 옳게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비유를 해서 말하자면은 세속의 공부는 병 속에다가 많은 것을 담는 공부라 하겠지마는 이 불법(佛法)의 참선 공부는 이미 들어있는 것도 다 쏟아 내버려야, 될 수 있으면 싹 쏟아서 추호(秋毫)도 냄새까지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이 부셔내는 공부다 그말이여.

그래서 고인네가 말씀허시기를 ‘불조(佛祖)가 나와서 설법을 해도 깨닫자 생각도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잡으러 와도 두려워 할 중도 모르고, 철두철미(徹頭徹尾) 똥멍청이·천치·바보가 된다면은 - 깨달을 중도 모르고 죽인다고 해도 두려울 중도 모르고 그렇게 철저히 바보가 된다면은 - 내가 너를 인가(印可)하리라’ 이렇게까지 말씀허신 일이 있습니다.

다 썩은 나무둥치가 되아 가지고 - 썩지 아니한 나무둥치는 나무꾼이 불을 때기 위해서 끌텅을 캐가기라도 하지만, 완전히 버근버근 썩어 문드러져 버린 그러헌 나무둥치는 나무꾼도 그것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말이여.

그러헌 쓸모없는 물건이 되야 가지고 오직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만을 간절(懇切)히 지어가야, 그래야 그 사람에게는 깨달을 분이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잘난 척하고, 똑똑한 척하고, 유식한 척하고, 이런 것은 우리 공부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될 뿐이지 아무 이익이 없는 것이여.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 무엇을 잘난 척하고, 유식한 척하고, 말 잘한 척하고, 그것이 다 쓸데없는 일이다 그말이여.(처음~10분1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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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 [몽산법어 蒙山法語]의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을 말함.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은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에 있어서 본참공안에 대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 참구를 하지 않고, 사량분별·알음알이로 공부를 삼는 잘못된 병폐를 10가지로 정리하여 그 병폐를 알고 극복해 올바른 활구참선을 하기 위한 몽산 스님의 법문.
*공안(公案) ; 또는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이십 년 동안 있었다.
팔십 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사십 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백이십 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무자(無字)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거두절미(去頭截尾) ; 어떤 일의 요점만 간단히 말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한다.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철두철미(徹頭徹尾) ;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고 철저하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〇분(分) : ①분수(分數-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〇-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Posted by 닥공닥정
대중 생활2014. 3. 11. 20:33

§(세등68) (게송) 참선수투조사관~ / 육화(六和) / 해제(解制)가 바로 결제(結制) / 새판잽이.

화두를 들어서 자꾸 화두를 참구(參究)를 허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지게 되고, 마음 길이 끊어져야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여. 다못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참구해 나가. 거기에서 분별심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분별심이 끊어져. 마음 길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원각(圓覺)을 이루고자 하면, 자비와 지혜와 행원과 이사에 융통(融通)해야 해.


화합하는 마음은 어디서 생기느냐? 각자 자기의 소임을 충실히 허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해 나가면, 일부러 화합을 헐려고 마음을 낼 것도 없이 저절로 화합이 되는 것이여.


(산철 동안에도) 꼭 결제 중에 하는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정진이 중간에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어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철 여름결제에 연결이 된다 그말이여. 그 석 달 동안을 애써서 해 가지고 산철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버리면, 다음 여름 결제 시작하면 다시 또 공부가 새판잽이가 되는 거여. 그렇게 되면은 앞으로 10년, 20년, 일생을 선방을 다닌다 해도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68) - 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에서. (세등68)

 

약 13분.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는 것이고, 조사관을 타파해. 참선의 목적은 조사관을 타파해야 하는 거여.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露絕)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마음 길! 화두를 들어서 자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지게 되고, 마음 길이 끊어져야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여.

의리선(義理禪)! 의리로 공안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마음 길이 끊어지기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사구(死句)다, 죽은 참선이다' 그런 거여.
확철대오 할 수 있는 참선이 아니고, 점점 중생의 사량분별을 치성하게 만들어 가지고 참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점점 멀어지는 공부이기 때문에 의리선이나 사구선(死句禪)을 하지 말아라 이거거든.

활구참선(活句參禪)!  일체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가는 짓이 끊어지는, 다못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참구해 나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만을 잡드리 해 나가야 돼. 거기에서 분별심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분별심이 끊어져. 마음 길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수행을 해 나가는데, 이치(理致)에 치우쳐서 닦아 나가면 적적한 데에 맥혀, 꽉 체하게 되는 것이고. 적적한 데에 처박히게 되는 것이고. 또 지(智). 치우쳐서 지혜만을 닦아 나가면, 자비심이 없어져 버리고.
또 치우쳐서 자비만을 닦아나가. 그저 다른 사람만을 위하고 어떻게 허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이렇게 치우치게 자비만을 닦아 나가면, 염습(染習)! 습기에 물들어 가는 염습만을 문득 더 증장시키게 되는 것이여.
다맛 원(願)만을 발하고, 자꾸 발원(發願)만을 해 나가면은 유위(有爲)의 정(情)이 일어난다.

아무리 이치가 좋다고 해도 이치만에 치우치고, 아무리 지(智)가 좋다 해도 지혜만을 치우치고, 아무리 자비가 좋다 해도 자비만에 치우치고, 아무리 발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밤낮 발원만을 하고 - 그래서 이치와 지(智)와 자비와 발원, 이런 것들을 다 겸해서 다 갖추어서 해 나가야 그래야 허물이 없어.
이사(理事)가 융통하고 행원(行願)이 서로 겸해서 자비와 지혜를 겸해서 닦아 나가야, 그래야 정말 대도를 성취한다. 화엄론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래서 이렇게 결제 때가 되면은 방(榜)을 짜 가지고 전 대중이 각기 한 가지 내지 두 가지 이상 그런 소임을 맡아 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자기의 소임을 정성껏 다 완수하면서 그 가운데에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돼.

아무 것도 안 하고, 손발 하나 까딱 안 하고, 오직 앉아서 좌(坐)에만 국집(局執)해 가지고, 뭐 울력 조금 있으면 파르르르 하니 속으로 진심(瞋心)을 내고, 짜증을 내고, 옆에서 누가 빠스락만 해도 그러고, 남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딸삭 하기를 싫어하고, 그렇게 인색을 허고, 그래 가지고서는 설사 어떤 소견이 나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드라도 그것은 벽지불(辟支佛) 밖에는 되지를 못하는 것이여.

정말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원각(圓覺)을 이루고자 하면 자비와 지혜와 행원과 이사에 융통(融通)해야 해.

각기 자기의 소임을 맡아서 각자 정성껏 하지 아니하면, 그 선방은 밤낮 문제점이 일어나 가지고 여러 사람이 정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 선방에는 주지나 원장이 있어야 하고, 총무와 재무와 교무가 있어야 하고, 또 원주(園主)·별좌(別座)와 채공(菜供)·공양주(供養主)가 있어야 하고, 다각(茶角)이 있어야 하고, 또 선방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소임을 맡아 가지고 전체 대중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거든. 화합이 되어야!

화합(和合)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내 마음과 저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돼.
서로서로 존경하고, 서로서로 아끼고, 서로서로 받드는 마음이 그것이 한마음이 되어서 그래서 조금도 신경을 쓸 것이 없어. 그러니 거기에 무슨 시비가 일어나며, 누구를 이뻐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승가(僧伽)라 하는 것이여. 승가는 인도 발음으로 상카(saṃgha)라 그러는데, 그 상카라 하는 것은 화합이라는 뜻이거든.

수행을 해 나가는데 이십 명, 삼십 명 내지 많은 대중은 중국에서는 오백 명, 칠백 명 대중도 있고, 큰 총림(叢林)은 천오백 명까지도 이렇게 지내는데, 그 많은 대중이 구십 일간을 아무 탈없이 지내게 되는 것은 오직 그 화합하는 마음이여.
화합하는 마음은 어디서 생기느냐? 각자 자기의 소임을 충실히 하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해 나가면, 일부러 화합을 헐려고 마음을 낼 것도 없이 저절로 화합이 되는 것이여.

물과 물을 타면은 바로 하나가 되어 버려, 한 가지 되고. 물과 우유를 타도 이렇게 섞어지는데, 물과 기름은 아무리 타 가지고 저어도 섞어진 것 같은데, 한참 있으면 기름은 물위로 떠버리고, 물은 가라앉아 버린다.

우리가 목적이 같고, 해 나가는 생활이 같고, 우리의 생각이 같고, 그래서 육화(六和)의 원칙!
육화의 원칙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순응하면은 저절로 물과 물이 섞인 듯, 물과 우유가 섞인 것처럼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될 때에 석 달 안거가 무장무애(無障無礙)하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하는 마당에 왜 이 이런 말씀을 허냐 하면은 해제(解制)가 바로 결제(結制)거든.
오늘 해제니까, 벌써 걸망짐 모두 다 싸놓고 어디로 가리라 하는 것을 미리 다 며칠 전부터서 장만해 둔 것을 내가 환히 다 알고 있지마는, 해제가 결제거든.

해제인줄 알고 걸망 짊어지고 나가면은 봄바람에 기분 참 좋은 것은 사실이나, 행여나 화두 하나를 놓쳐버리면은 그것이 어찌 훌륭한 납자(衲子)라 할 수가 있겠느냐.

해제해서 터억 걸망을 지고 나가는 바로 첫걸음부터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잡두리를 해 나가야 정말 지난 석 달 동안 올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이고,
걸망 짊어지고 팔도강산을 좁다하고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하고 막 여기저기 싸다니면서, 희희닥거리고 화두는 놓쳐버린다면 그 사람은 석 달 동안 껍데기로만 참선을 했지 속으로는 진짜 참선을 아니한 사람이다. 이력서를 내보일 것도 없고, 벌써 허는 행동이 바로 언제나 자기의 이력서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어디 산철 결제 하는 데 가서 있으면은 그런 데 가서 정진을 해도 좋고, 그런 데가 없으면은 인연 따라서 지내되, 어디에 가서 어디를 걸어가거나 어느 절에 가서 머물거나, 무엇을 하던지 간에 - 은사스님 절에 가서 일을 거들거나, 어디 다른 친구 절에 가서 거들거나,

무엇을 하건 간에, 어디를 가건 간에, 꼭 결제 중에 하는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정진이 중간에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아 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 철 여름 결제에 연결이 된다 그말이여.

그 석 달 동안을 애써서 해 가지고 산철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버리면, 다음 여름 결제 시작하면 다시 또 공부가 새판잽이가 되는 거여.
그렇게 되면은 앞으로 10년, 20년, 일생을 선방을 다닌다 해도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28분44초~41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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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무문 혜개 스님의 [무문관(無門關)] 1조주구자(趙州狗子)’ 있는 . [선가귀감](용화선원) p61참고. *=(끊을 ).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화두(공안) 말함. 관문(關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 관문이 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치성(熾盛 맹렬하게 일어남·성할 치/성할 )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 ) p49~52.

大抵學者는  叅活句언정  叅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叅句者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叅意者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 참구(參句) 참의(參意)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叅句)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 마음 길이 끊어지고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叅意)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있기 때문이다。

(譯註)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교문(敎門) 55 점차를 거치지 않고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다시 말하면 화두(공안) 타파하여 견성 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 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 돈교(頓敎) 교문(敎門)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자취가 남아 있고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치(理致) ;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趣旨).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자비(慈悲) ;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 ()연민동정 원의(原義),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

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염습(染習) ; 습기(習氣-번뇌로 인하여 형성된 습관이나 버릇) 물들어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

*유위(有爲,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에서 ()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 조작된 ,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이사(理事) ; ①깨달음의 진리와 차별 현상. ②본체와 차별 현상.

*행원(行願) ; 수행과 서원(誓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 ; 안거(安居)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 15일에 들어가며, 동안거는 음력 10 15일에 들어간다.

*해제(解制 해/만들법도 ) ; (안거)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

*() ; 용상방(龍象榜)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것이다.

*국집(局執) ; 마음이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 사리(事理)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울력 ; 함께 모아 일하는 ,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우리말. 그러나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로 운력(運力)이라고도 한다. 의미와 관계없이 울력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벽지불(辟支佛) ; 산스크리트어 pratyeka-buddha 팔리어 pacceka-buddha 음사. 홀로 깨달은 자라는 . 독각(獨覺연각(緣覺)이라 번역.

스승 없이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깨달은 . 홀로 연기(緣起) 이치를 주시하여 깨달은 . 홀로 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 깨달음. 진여(眞如) 체득. 부처님의 지혜.

*융통(融通) ; 때나 형편에 맞게 신축성 있게 일을 처리함.

*원주(園主) ; 절에 소속된 밭의 채소를 가꾸는 소임, 또는 일을 맡은 스님.

*별좌(別座) ; 절에서 식사·의복·방석·이부자리 등을 담당하는 직책, 또는 일을 맡은 스님.

*채공(菜供) ;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소임, 또는 일을 맡은 스님.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일을 맡은 스님.

*다각(茶角) ; 절에서 마실 차를 마련하는 소임, 또는 일을 맡은 스님.

*승가(僧伽) ; (산스크리트)(팔리) saṃgha 음사. (화합중(和合衆)이라 번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화합하고 있는 불교 교단.

보통은 출가자의 집단을 가르키지만, 넓게는 재가(在家) 신도도 포함.

*총림(叢林) ; ①많은 수행승들이 모여 수행하는 . ②전각(殿閣선원(禪院) ·강원(講院율원(律院) 등을 두루 갖춘 사찰.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육화(六和) ; 교단의 화합과 함께 대중의 수행 자세를 일깨워주는 여섯 가지 화합하는 . 육화합(六和合), 육화경(六和敬)이라고도 . 수행자(修行者) 서로에게 행위·견해를 같게 하여 화합하고, 서로 경애하는 여섯가지 방법.

①같은 계율을 가지고 수행하여 화동(和同)하고 애경(愛敬)하라(戒和).

②정견(正見) 같이하여 함께 해탈하라(見和).

③의식(衣食) 함께 하여 이로움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라(利和).

④같이 살며 부드럽게 행동하라(身和).

⑤다투지 말고 자비롭게 말하라(口和).

⑥같이 일하며 남의 뜻을 존중하라(意和).

*걸망 ; 물건을 담아서 등에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주머니.

*납자(衲子 옷을 꿰맴 ,사람 ) ; 남이 버린 옷이나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 자신을 가리킬 사용.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 ; 높은 깊은 물도 꺼리지 않고. (꺼릴 ), (넓을 ).

*산철(散철) ; 본철(本철-하안거,동안거) 아닌 시기.

*새판잡이 ; 새로 일을 벌여 다시 하는 .

*도업(道業) ; () 깨달음. () 영위.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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