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화두'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25.01.16 •§•(319) (게송)오가유보물(吾家有寶物)~ / 내 면목(面目)을 깨닫는 것이 보물, 나 깨달은 방법이 무엇이냐? ‘이뭣고’여 / 모양, 상(相)에서 구하거나, 내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면 그거 도 아니다.
  2. 2024.09.24 §(114) 부처님의 골수 법문이 바로 참선법. 참선은 나의 주인공을 깨닫는 것이 목적 / '이뭣고'는 업(業)의 종자를 보리(菩提) 종자로 승화 / '한 생각' 단속. 3
  3. 2021.10.14 §((242)) ‘이뭣고?’ 화두드는 법 /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 사도에 빠지지 말라 / 일체 경계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 (게송)천강동일월~.
  4. 2021.09.08 §((212)) (게송)백운아향만리표~ / 육조과 남악회양 / 활구참선. 은산철벽 / 참선은 쉽다(세수하다가 코 만지기), 어렵다(깨 한말을, 한알씩 나무위로 굴려 올리기).
  5. 2021.06.19 §((233))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한 과제 / 간화선(看話禪) / 묘관(妙觀) / 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수마(睡魔) / 생력(省力)이 득력(得力).
  6. 2021.05.15 §((472))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것이 중요 / 단전호흡은 식사를 하고 2시간 뒤에 하라 / (게송)사로불용행~ /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
  7. 2021.01.27 §((084)) (게송)전빙시수수성빙~ / 무상(無常) / '영원히 생사가 없는 참 이치'를 깨닫고자 / 번뇌 속에서 나를 보는 방법이 '이뭣고?' / 점철성금(點鐵成金).
  8. 2020.12.13 §((047)) 부처님 그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 그 마음 깨닫는 방법이 참선법 /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9. 2020.09.30 §(306) 화두게문 설명(有一物於此~) / ‘이뭣고?’ 공덕 / 팔만대장경은 노정기(路程記) / 심농(心農), 법의 기쁨[法樂] / 참선이 본업(本業), 그 밖에 것은 부업.
  10. 2019.08.21 §(122)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비슷 / 유리병 속 오리 화두 / 불교의 목적은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 / 상(相)이 없이 닦아라 / 관심일법 총섭제행.
이뭣고 화두2025. 1. 16. 18:26

•§•(319) (게송)오가유보물(吾家有寶物)~ / 내 면목(面目)을 깨닫는 것이 보물, 나 깨달은 방법이 무엇이냐? ‘이뭣고’여 / 모양, 상(相)에서 구하거나, 내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면 그거 도 아니다 / 딴 데서 구하거나 전할 것이 아니다.


요새 우주인이 모도 달세계를 올라가고, 그 무엇이여? 그까짓 놈의 거. 그것 뭐 진공(眞空) 가운데 좀 올라가서 달세계 갔다 왔다고 뭐 그리 야단칠 것이 있나?
벌거지도 배때기에다가 불 달고 온 공중을 휘휘 날라댕기고, 저 무슨 가재 속에도 진주(珍珠)가 모두 들어 있고, 아! 전복 속에도 모도 그러헌 무슨 사리(舍利)가 들어 있는 것인디, 사람 송장 속에서 태우면 무슨 구슬이 나온다고 기특할 것이 뭐냐? 그것이. 무슨 기특혀, 그까짓 것이?

**전강선사(No.319) - 이뭣고 화두법(계축1973.7.26)(전319)

(1)+(2) 약 8분.



(1)------------------

오가유보물(吾家有寶物)이다  가소서래의(可笑西來意)니라
나무~아미타불~~
하시황매사(何是黃梅事)오  방할여우적(棒喝如雨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오가(吾家)에 유보물(有寶物)이다. 내게 큰 보물이 있다. 천하에 보물은 내가 보물이지, 내게 있지, 내게 있다는 것보담도 내가 보물이다.
천상천하에 우주 만물 가운데 ‘나’ 내놓고 뭐가 있나? 오직 ‘나’다.
하늘이다. 땅이다. 하늘 땅을 뒤집어 싸고 있는 큰 허공이다. 허공 가운데 두두물물 화화촉촉 뭐가 나보덤 나은 것이 있나? 내 밖에 뭐가 있나?

그 내 보물, 내가 ‘나’ 하나 찾아 놓으면, 내가 나를 깨달라 놓으면 천하에 보물이다.
그거 무슨 생(生)이 있나? 사(死)가 있나? 있다 없다 한 것이 있나? 나보다 보물이 뭐가 있겠나?

나를 내가 알지 못허고 나를 내가 깨닫지 못허고는 무슨 놈의 그 사람이니, 무슨 뭐 인생이니, 천상천하에 무슨 인유최귀(人唯最貴)니, 뭐가 있어 그것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여.

이까짓 놈의 송장 덤벵이가 ‘나’인가? 그 눈깔이 있다고 좀 본다고 잠깐 보다 마는 놈의 거, 그 눈깔이 내 눈깔이며, 입이 좀 뚫어져 가지고 말 좀 헌다고 그것이 내 입이며, 내 콧구녁이며, 내 몸뚱아리며, 그 내 임시의 모도 망상(妄想)으로써 원증회고(怨憎會苦)를 가려내는 그 무슨 번뇌(煩惱)가 ‘나’인가?

그 참 ‘참 내’ 내가 내 면목(面目) 그놈을 기어이 찾아서 깨달라 아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 그것이 보물이여. 이것이 참선법(參禪法)이고.

그 밖에는, 요새 우주인이 모도 달세계를 올라가고, 그 무엇이여? 그까짓 놈의 거. 그것 뭐 진공(眞空) 가운데 좀 올라가서 달세계 갔다 왔다고 뭐 그리 야단칠 것이 있나?
벌거지도 배때기에다가 불 달고 온 공중을 휘휘 날라댕기고, 저 무슨 가재 속에도 진주(珍珠)가 모두 들어 있고, 아! 전복 속에도 모도 그러헌 무슨 사리(舍利)가 들어 있는 것인디, 사람 송장 속에서 태우면 무슨 구슬이 나온다고 기특할 것이 뭐냐? 그것이. 무슨 기특혀, 그까짓 것이?

모냥으로 상(相)으로 모도 나타나는 그까짓 것이 그것이 도(道)인가? 모냥에, 상(相)에, 빛깔에 고러헌 데서 도를 찾는다든지, 내 마음 밖에서 도를 무슨 구해 온다든지, 그거 도(道) 아니여. 내 마음 밖에서 천하 없는 도를 다 발견한다 해도 그건 외도(外道)라. 내 마음 밖이니.

내 마음이, 아! 그놈이 보물. 내가 보물.
아! 이놈 하나 미왈중생(迷曰衆生)이다. 그놈을 깨닫지 못허고 내가 보지 못했으니 그것을 중생이라 한다. 내가 나 하나 깨달라 버리고, 나 하나 봐 버리면은 그만 성(聖)이다. 성현(聖賢)이여.

그 ‘나 깨달은 방법이 무엇이냐’하면, ‘이뭣고’여. ‘이뭣고~?’ (처음~6분12초)





(2)------------------

오가(吾家)에 유보물(有寶物)인데, 내 보물이 이렇게, 이러헌 보물이 있는데,
가소서래의(可笑西來意)다. 가히 우습다 서쪽 이치여.

누가 뭐 서쪽에 따로 이치가 있나? 서쪽에서 가지고 와서 나한테 그런 보물을 주었나?

네가 너 깨달라라. 내가 낱낱이 내 보물이 있다.

하시황매사(何是黃梅事)냐? 오조(五祖) 스님이 황매산에서 육조(六祖) 스님한테 전했다는 것이 무엇이여? 육조 스님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 그대로 깨달랐지. 전할 게 뭐 있나?

방할(棒喝)이 여우적(如雨滴)이니라. 만약에 딴 데로 구헐 것 같으면은, 내 보물 내던지고 딴 데서 찾을 것 같으면은 방맹이[棒]로 때려 조지고 할(喝)로 때려 조질 것이다. 방할이 여우적이여.

어디 가서 왜 너를 네가 바로 깨달라서 네게 구족(具足)한 보물, 네게 갖춰져 있는 보물, 아! 너 하나 깨달라 버리면은 생사(生死)가 시심마(是甚麽)냐? 죽고 사는 게 무엇이며, 불법(佛法)이 무슨 뭐 따로 불법이 어디 있나? 서천(西天)에서 온 불법이 무슨 소용이 있나?

방맹이와 할(喝)로 조져 댄다 이 말이여. 그런 게송(偈頌)을 인자 다 했습니다.(34분23초~35분44초)





------------------(1)

*(게송) ‘오가유보물(吾家有寶物)~’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91 ‘덕의선자(德義禪子)에게’ 게송 참고.
*두두물물(頭頭物物) ; ‘두(頭)‘는 사물이나 사람의 단위. ‘각각의 존재[頭頭]와 모든 사물[物物]’이라는 말. 곧 모든 것을 가리킨다.
*송장 ; 죽은 사람의 몸을 속되게 이르는 말.
*덤벵이 ; ‘덤벙이’의 사투리.
*덤벙이 ; 묽은 액체 따위가 뭉쳐진 덩이.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원증회고(怨憎會苦 원망할 원/미울 증/만날 회/쓰다·괴롭다 고) ; 팔고(八苦)의 하나. 원한이 있거나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서 생기는 괴로움이나 싫은 환경에 살거나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괴로움. 비애회고(非愛會苦) · 원증오고(怨憎惡苦)라고도 한다.
*팔고(八苦) ;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여덟 가지[八]의 괴로움[苦].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를 사고(四苦)라 하고, 여기에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고통[愛別離苦], 원망스럽고 미운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음이 성하는 고통[五陰盛苦]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벌거지 ; ‘벌레’의 사투리.
*배때기 ; ‘배’를 속되게 이르는 말.
*사리(舍利) ; sarira의 음사(音寫). 신골(身骨) • 유신(遺身)이라 번역. 시체나 유골을 뜻함. 그러나 오늘날에는 화장한 뒤에 나오는 작은 구슬 모양의 물질을 가리킴.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모냥에, 상(相)에, 빛깔에 고러헌 데서 도를 찾는다든지, 내 마음 밖에서 도를 무슨 구해 온다든지, 그거 도(道) 아니여’ ;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해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든 자라, 자기가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구덕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예”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19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❶]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참고 ❷]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참고 ❸]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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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이치[西來意] ;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말함.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오조(五祖) : (602 – 675) 당(唐)의 스님.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 580~651)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육조(六祖) : (638 ~ 713) 당(唐)의 스님.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 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 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5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5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지었다. 5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76세로써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물건’ ; 일물(一物).
*일물 • 일상(一物 • 一相) : 한 물건[一物] • 한 모양[一相]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2.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 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柱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방(棒) ; 몽둥이. 또는 주장자(柱杖子). ‘방망이 봉’ 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할(喝) ; 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이다. 선종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진리를 나타낼 때, 또는 수행자를 꾸짖거나 호통칠 때 토하는 큰 소리.
큰 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보임이니, 이것을 처음 쓰기는 마조(馬祖)가 한 번 할했는데 백장(百丈)이 사흘이나 귀먹고 눈이 캄캄하였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그 뒤로부터 흔히 쓰는데, 임제(臨濟)가 가장 많이 썼다. 보통 속음(俗音)의 「갈」로는 발음하지 않는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시심마(是甚麽) ; 이것[生死]이 무엇인가?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서천(西天) ; ①서쪽 하늘. ②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 인도(印度)의 옛 이름).
*‘조져 댄다’ ; ‘조지다 + 대다’
*조지다 ; {비속한 말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호되게 때리다.
*대다 ; [보조동사] (동사 뒤에서 ‘-어 대다’ 구성으로 쓰여)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 행동의 정도가 심함을 나타내는 말.(예 : 음식을 먹어 대다. 아이들이 깔깔 웃어 댄다. 진우는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우겨 댔다. 학생들이 어찌나 떠들어 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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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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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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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4. 9. 24. 11:59

§(114) 부처님의 골수 법문,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 바로 참선 공부. 참선은 내가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을 찾아 깨닫는 것이 목적 /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 참선법은 무량겁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 /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 깊은 산중이건 시장바닥이건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여기에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업(業)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4)—1980년(경신년) 입춘법회(음 1979.12.19/양 1980.02.05)(용114)

 

 

(1/4) 약 20분.

 

(2/4) 약 18분.

 

(3/4) 약 14분.

 

(4/4) 약 20분.



(1/4)----------------

그런데 모든 재앙은 사실 과거(過去)에 우리가 어떻게 지었느냐? 그리고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금으로부터 1초 전이 전부가 과거에 들어갑니다마는, 그 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러한 팔자가, 운명이 전개되는가?’를 그 원인을 모르고서, 당장 그것을 없이 하기만을 바래고, 그걸 없이 하기 위해서 점(占)을 친다던지, 갖은 푸닥거리를 한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주고 무당한테 그 부적(符籍) 같은 것을 사 가지고 몸에 지닌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소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것이 소멸 당하지 않기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 그 비린내 나는 생선을 엮던 그 새끼토막 같은 것을 몸에다 두르고 다니면서, 몸에서 비린내 안 나기를 소원해 봤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첫째, 몸에 비린내가 안 나게 할려면 생선을 묶었던 그 새끼를 몸으로부터 풀어서 버리고 그리고 몸을 깨끗이 닦음으로 해서 비린내는 내 몸에서부터서 안 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의 마음속에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고 승화(昇華)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앞날에 좋은 팔자와 운로(運路)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 업장을 소멸하는 법이 십선법(十善法)을 닦는다던지 또는 사성제(四聖諦)법을 닦는다던지 12인연법 · 육바라밀(六波羅蜜)법 · 염불(念佛) · 독경(讀經) · 기도, 얼마든지 우리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팔만사천 가지의 그러한 묘한 법이 있습니다.
어느 법(法)이고 하나도 버릴 법이 없고, 어느 법이고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닦는다고 하면은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법(法)을 다 닦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 어느 법이 그 가운데 좋고 나쁘고 해야 그것을 하지, 다 좋은 법인데 어떻게 어느 법만을 추려서 하고 어느 법은 안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두 번 해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기대할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방법을 좀 해보고, 그걸 좀 얼마 동안 해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법을 좀 해보고, 이렇게 해서 많은 세월 동안을 그런 식으로 갈팡질팡을 하면서 혹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고,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낙담(落膽)을 하고 비관(悲觀)을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온 분이 적지 아니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용화선원에서는 부적도 드리지도 않고, 언제나 다른 법회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일러드리는 말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이, 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녹여 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骨髓) 법문을 추출을 해 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法)이 모든 행(行)을 다 포섭(包攝)을 한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사람들은 밖에서 무엇을 찾는 데에는 익숙합니다. 물질적인 것이건 무엇이건 밖에서 찾는 데에는 어릴 때부터서 여태까지 무량겁을 두고 밖에서 무엇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소유를 만들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을 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구한 것은 언젠가는 인연이 도래(到來)하면 나로부터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참선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폐(語弊)를 면치 못합니다마는 부득이해서 그러한 말을 빌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하면 이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가 있는 이 육체를 가지고 '내 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마는,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滅)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물건’이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한다’ ‘재앙을 소멸을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바로 알아야만 그 업장을 소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굿을 하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부적을 몸에 많이 지니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봤자, 우리의 업장(業障)이 그러한 방법으로써 소멸(消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경우 일시적으로는 우선한 것 같이 느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시일이 지나면 다시 또 일어나고, 또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또 푸닥거리를 하면 조금 우선함을 느끼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점점점점 깊이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삿된 믿음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면 백이면 백, 다 집안에 재앙이 끊일 날이 없고 잡귀가 득실거리고, 그래 가지고 정신까지도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삿된 소견에 빠져 가지고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고 싶어도 무서운 협박과 엄포 때문에 겁이 나서 발을 빼지를 못한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정법(正法)은 그 근원을 바르게 다스려서 영원히 그러한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나무를 가꾸고자 할 때 그 뿌리에 좋은 흙과 좋은 비료와 기타 수분이라든지 그 충분히 잘 공급을 함으로써 그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결국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뿌리에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 또 좋은 적당한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수분도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그리고 뿌리는 다 밖으로 드러나다시피 하는 상태에서 가지와 잎에만 아무리 정성을 쏟아 봤자 그 나무는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시들고 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근본을 다스리면은 가지와 잎과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고, 근본을 버리고 지엽만을 붙잡고 아무리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우리의 ‘참나’를 찾아서 그걸 닦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육체와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라든지, 부부간에 문제라든지, 형제간에 또는 자식 자녀의 문제라든지, 친구나 일가친척에 관한 건이라든지,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그 근원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업(業)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아무리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 형제간의 관계, 일가친척의 문제를 바로잡을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그리고 원망을 해봤자 그리고 한탄을 해봤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듣고 그리고 그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 하면은 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을 바로 본 사람, 바로 안 사람, 바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을 알고 쓰고 있을 뿐 그 실상(實相),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을 가지고 그놈으로 그놈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면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단 일분일초도 떠날 수가 없고, 언제나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놈을 알 수가 없는 것인가?
눈을 통해서 모든 빛깔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분간하며,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고 숨을 쉬고,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맛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합니다. 손과 발, 육체를 가지고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다 식별을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가?’ 찾어보면 자취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면서, 왜 보는 그놈을 다시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알 수가 없는 것이냐?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 도를 닦는다, 불법을 믿는다고 해도, 1년 2년 3년 10년을 절에를 다니고 법문을 듣고 또 참선을 해도 마냥 제자리걸음이요 답답하기가 그지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보는 그놈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그놈을 찾으라고 법상(法床)에서 큰스님네는 법문하실 때마다 ‘그놈을 찾으라’고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는 아니하고.(8분16초~27분38초)





(2/4)----------------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

무슨 공부를 해서 차츰차츰 성과가 눈에 보이고, 이만큼 하면은 그만큼 한 결과가 나타나서 스스로도 흐뭇하고 남에게 이만큼 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면 더욱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 텐데 석 달씩,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집안을 갖다가 떠나서 선방(禪房)에 가서 석 달씩 그렇게 공부를 하고 와도 영감님 앞에, 또는 아들이나 며느리 앞에, 손자들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아무것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그다음 철에는 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공부를 했다'고 내놓을 것이 있으면 아들 딸 며느리 영감이 모두가 다 ‘참, 그 좋다’고 이해를 하고 더욱 가시도록 협조를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그분네들도 보람을 느끼고 또 그분들도 할려고 하시고 그럴 텐데, 만날 절에만 다니고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절로만 다니시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마당에야 그 참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타관(他官)에 가서 고생을 해 가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와 봤자 그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도둑을 맞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 써버리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석 달 내 자고 싶은 잠도 다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못 먹고, 그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이 정말 정법을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셨다면, 설사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은 영원한 것을 마음속에서 잘 닦아서 얻을 것...(녹음 끊김)...은 얻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여기에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가지고 밤도 줏어 담고 과자도 줏어 담고 해서,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서 그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업(業)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가서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공부를 하고 집에를 가서, '할머니, 가서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빈 자루라도 있으면 탁! 까뒤집어 보이는데,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루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루인데, 우주법계를 그 속에다 다 담아도 그 자루에는 다 차지도 않습니다. 허공을 그 속에다 다 집어넣어도 그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자루는 차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루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루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짓고 지은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이 세 가지 종류에 업으로써 지은, 수확한 종자(種子)를 그 속에 탁 가뜩 담어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자기 종자에 해당되는 인연을 만나면 그 많은 종자 속에 어떤 종자가 거기서 싹이 터 나옵니다. 수수나 조나 모든 종자(種子)가 습기와 적당한 열을 온도를 만나면 눈이 터 나오듯이,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쌓아져 있는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종자가 그때그때 터져 나온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손과 발 몸으로 감촉할 때, 생각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三不能]이 있는데, (첫째)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濟度)하지 못한다. 아무리 부처님이 삼계(三界)의 대성현이시고, 신통(神通)이 구족(具足)하신 그러한 대성현이시지만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다.

둘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는 말은 중생이 하나도 없도록 중생을 없앨 수는 없다.
중생은 그 한량이 없는 큰 그 아뢰야식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그 업의 종자가 가뜩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계속 거기에서는 싹이 터 나옵니다.

좁쌀도 나왔다가, 보리쌀도 나왔다가, 수수쌀도 나왔다가, 그때그때 싹이 트기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면 거기에 있는 많은 종자 가운데에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게 되고, 그다음에 또 나오게 되고 하는데, 계속 다 싹이 터서 다 발아(發芽)를 해 가지고 다 나가버리면 언젠가는 그 종자(種子)가 동이 날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싹이 터 나오면서 새로운 종자를 동시에 갖다가 또 저장하게 됩니다. 업장(業藏) 속에 있는 종자가 싹이 터 나온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합니다. 현행—'나타날 현(現)' 자, '행할 행(行)' 자. 종자가 밖에 어떠한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은 현행(現行)을 합니다. 싹이 터 나옵니다.
싹이 터 나오면서 거기에서 속에 있는 어떠한 종자를 갖다가 훈(薰)을 합니다. 그 종자를 갖다가 이 또 찜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자가 싹이 터 나오면서 다시 또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뜻으로 무엇을 생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행(現行)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고대로 아뢰야식 속에 또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수확을 해서 저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우리의 업의 종자가 한없이 터져 나오고 한없이 저장이 되기를 무량겁을 해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 그러한 작업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지은 복(福)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그놈이 다하면 다시 인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罪)를 지은 바가 많으면 또 지옥에 가기도 하고. 육도윤회를 끊임없이 계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또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 생사윤회가 또 계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과 법력(法力)으로도 그것을 갖다가 다 없앨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39분37초)


<무량겁 쌓아 놓은 업(業)의 종자(種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 바로 이 불법(佛法)이요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다. 빨간 꽃을 보았다. 지금 이 탁자 위에도 노란 국화가 화병에 꽂혀 있습니다.
그것을 본 찰나, '아! 국화로구나. 이 겨울에도 국화가 피었구나. 좋은 향내가 나겠지. 어떻게 저것을 겨울에 피웠나? 온실에서 재배를 했겠지?'

이런 것을, 국화 하나를 봄으로써 우리는 끝없이 생각이 그렇게 번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과거에 어떠한 국화에 관련된, 자기와 국화에 관련된 어떠한 일에 우리의 상념(想念)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눈물바람을 하기도 하고 혹 과거에 어떤 때를 갖다가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의 국화를 보았다. ‘노랗다. 아름답다’ 그러한 두 번째 생각으로 건너가기 전에 국화가 눈에 딱! 띄었을 때, 그때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국화를 보고 ‘노랗다. 아름답다. 송이가 크다 작다’ 이렇게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그렇게 번져 나갈 것이 아니라 국화가 눈에 탁! 들어온 그 찰나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화를 봤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새소리를 들었건, 차 소리를 들었건, 개 짖는 소리를 들었건, 들은 그 찰나에 '이뭣고?' '이뭣고?'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면, 과거에 그 친구가 자기에게 섭섭히 한 일까지 생각해 가지고 공연히 심사(心思)가 사나와지고 그 끝에 아들이나 손자나 며느리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거기에까지 신경질을 부리게까지 됩니다. 참선한 사람은 그게 아니라 '친구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생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27분39초~45분1초)





(3/4)----------------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녹음 끊김, 4초 묵음. 중복)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살고, 한 달을 그렇게 살고, 1년을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사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석 달을 해봤자 아들딸 · 손자 · 영감님께 아무것도 보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가고 하루하루를 다져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다져 나가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또는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이 개선되어 가고 개조되어 가고 승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오직 깨달음을 향해서 목적을 하고 닦아가는 것이지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빨리 얻어지는 효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까짓 나쁜 성격이 원만해지고, 옹졸했던 성격이 관대해지고, 이러한 것이 참선의 목적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구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러한 인간에 있어서 존경받을 수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격이 개선되어 간다면 그것도 또한 대단히 소중한 수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옹졸한 성격, 비열한 성격,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얼마를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치 없는 인간을 만들고,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그러한 일이 우리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시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동생으로서, 형으로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 '이뭣고?'로써 생각을 돌려나가는 길을 행하지를 못하고, 사소한 일로 해서 두 번째 생각 세 번째 생각으로 계속 올바르지 못한 중생심을 갖다가 방자히 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까지 언짢게 만드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부적(符籍)을 사러 가실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면 부적을 몇 장을 사서 가지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러나 이 공부를 철저히 하면 그러한 부적을 한 장도 갖지 않더라도 모든 재앙은 소멸이 되고, 있는 재앙을 소멸하는데 끄친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앙이 속에서 나오는지 밖에서 다가오는지 그걸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마는,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먼 데서 가까이에서 만났을 때 그것이 물질적인 문제가 되었건, 정신적인 문제가 되었던,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그러한 조건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보다 더 행복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 한 번 함으로써 재앙을 뒤집어서 복(福)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 업식(業識)을 돌려서 보리심(菩提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1원 1원이 모여 가지고 백 원이 되고, 1원 1원이 많이 모이면 천 원도 되고 백만 원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가지고 무량겁이 되고, 1초 1초가 모여 가지고 한 달 · 1년 · 백 년 ·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잔돈을 애낀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 원짜리 백 원짜리를 돈으로 알지 않고 막 풀풀풀풀 막 함부로 합니다마는, 참으로 부자는 큰돈은 갖다가 유용하게 몇천 만원씩 탁! 참 희사(喜捨)도 하고 기부도 하고 그렇게 쓰면서 10원 20원 굉장히 피 나오게 애끼는 것을 나는 봤습니다.

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차를 타건, 버스를 타건, 걸어가건, 댁에 돌아가셔서 방을 닦건, 밥을 지으시건 빨래를 하건, 앉었건 누었건, 이야기를 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남편이 속상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이뭣고?'
자식이 불효한 짓을 해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모든 생활을 지어나가라 이것입니다.

근본이 다 '이뭣고?'로써 중심이 딱! 잡힌 가운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일을 하고, 음식을 먹고, 발로 걸어가고, 이렇게 된 사람은 뿌리가 제대로 박힌 나무와 같아서 그 나무는 싱싱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지 아니하고 밤낮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이 생각 저 생각 자기 딴은 가정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도록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뭣고?'를 아니한 사람은 뿌리는 방치해 버리고, 그 가지에 이파리에 벌레를 떼어주고 소독을 치고 물을 뿌리고 온갖 노력을 다 해봤자, 뿌리가 드러나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나무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착한 일도 안 하고 그래도 괜찮으냐?'
그게 아닙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이겁니다.

참선을 함으로써 우리 근본 마음을 바로잡고 바로 닦아 나간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안에 가면 집안에서 부모에게 할 일, 남편에게 할 일, 자녀들에게 할 일, 해야 할 살림, 자기 자신을 위한 일,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에 왔어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근본이 서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불사(佛事)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일이 다 좋은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근본이 서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 제대로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죽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 헛일만 하게 되고, 죽도록 애써서 한다는 것이 속상할 일만 하게 되고, 후회할 일만 하게 되고, 한탄해야 할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참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마음속에 업(業)의 원인을 해결을 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은 내가 지어 가지고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속에 원인을 잘 다스려 놓으면, 영락없이 재앙으로 나한테 다가져 올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나에 가까이에 오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미묘(微妙)한 그 법을 스스로 느끼고 정법의 고마움과 신기하고 묘한 것을 뼛속에 사무치도록 느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45분2초~58분23초)





(4/4)----------------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그 형제는 대단히 합심을 해서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한마을에 사는 아주 가문이 좋은 부자집 따님이요 아주 인물이 좋은 규수(閨秀)하고 눈이 맞아 가지고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혼을 해 놓고 장사일로 해서 수백 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떠났습니다. 가 가지고 그 사업 관계로 해서 여러 해를 고향으로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통신이 있어서 편지도 할 수가 있고 전화도 할 수가 있었지만, 삼천년 전에는 그러한 통신수단이 없어서 그리고 너무 사업에 몰두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연락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 규수 댁(宅)에서는 아! 신랑이 먼 데로 가 가지고 소식이 없으니 딸은 자꾸 나이만 먹고 너무너무 기다리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규수의 부모는 '차라리 그 형이 소식이 없으니까 동생을 갖다가 사위로 맞이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냈습니다. '동생이 인물도 더 좋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 차라리 그 동생을 사위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하고 동생한테 사위가 되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동생이 말하기를 "그럴 수가 있습니까? 형님이 멀리 가셨다가 지금 사업상으로 못 오시는데 어떻게 제가 형수 될 분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당치않합니다. 지금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아주 딱 끊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참! 그 동생이 하는 말 들어보니 또 말은 옳은 말이다 그 말이여.(61분13초)

그래서 또 며칠을 두고 연구를 한 결과, 어떤 그 장사하는 사람을 시켜 가지고 돈을 주어서 '그 형이 거기서 그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실패가 되어 가지고 병이 나서 죽었다' ... (녹음 끊김. 8초간 묵음) ...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그 규수의 부모가 동생을 찾아가서 "아! 인자 당신 형이 병들어서 죽었으니 인제는 내 사위가 되어줘도 되지 않겠느냐?" 찝찝하니 생각하고 응하지를 않다가 몇 달이 지내갔습니다.
계속해서 사위를 삼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고 간곡히 교제를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동생이 형수 될 그 규수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 가지고 포태(胞胎)를 했습니다. 포태를 했는데 갑자기 그 형이 돌아온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 참 큰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파를 시켜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 가지고 그 포태된 애기를 갖다가 유산을 시켰습니다.

그래놓고 있는데 그 형이 과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맨 처음에 그 아내가 될 규수를 찾았는데, 벌써 그때는 형이 근처에 와서 ‘그 규수가 자기 동생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당장 그 동생과 그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갖다가 한칼로 요절을 내서 죽일라고 칼을 가지고 왔는데, 벌써 그런 소문을 듣고 동생은 이웃나라로 피해 갔습니다.

피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무슨 형수 될 규수가 욕심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참 형님하고 약혼만 해놓고 결혼도 못하고 병이 나서 죽게 된 규수가 딱하고, 동생으로서의 그 형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명감에서 그 규수하고 결혼을 한 것이, 아! 이렇게 형님이 살아오고 보니 참 변명할 길도 없고 무슨 사과할 수도 없고, 죽인다고 칼을 가지고 찾으러 다니니 그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웃나라로 피신을 우선 해 가지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되었는데, 그래 가지고 이 스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정말 생명을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계속해서 그 동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 이웃나라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느 산에서 도(道)를 닦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활을 잘 쏘는 포수를 갖다가 매수(買收)를 해 가지고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갖다가 더군다나 출가한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가 없어서 그 포수로 하여금 그 동생을 죽이면 후한 상을 준다고 이렇게 해 가지고, 그 포수하고 둘이 가 가지고 '포수는 저만큼 숨어 있으라'고 그러고, 자기는 동생한테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반가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인간적으로 대단히 딱한 그런 상황이었지마는, 이미 도를 얻은 스님이라 자기의 죄를 억지로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또 웬수로 상대해 가지고 형을 갖다가 상대하지도 않고 순수한 평범한 마음으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아주 그 속의 마음을 감추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하고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난 처음에는 너를 원망을 했지만 너를 사실은 만나고 싶었다" 이런 얘기 등등 하고 있을 때 약속을 했던 그 포수가 그 동생을 겨냥해 가지고 활을 쐈습니다.
아! 그 활 잘 쏘는 사람이 활을 쐈는데 그 활이 빗나가 가지고 형 모가지에 맞어 가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그 동생은 그 형을 시체를 거두어서 잘 장례를 지내주고 천도(薦度)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원한을 깊이 먹었던지 그 형은 죽어 가지고 독사(毒蛇)가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그 동생의 공부하고 있는 그 토굴에 문턱 밑에 가서 가만히 숨어서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언젠가 몸에 독(毒)이 오를 때를 기다려서 독이 몸에 잔뜩 어리면은 그 동생이 문으로 나올 때 탁 물어 버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 좀에 문에 치여 가지고 독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
아! 그 복수를 할려고 그랬던 것이 그 문에 치여 가지고 참 본의 아니게 죽게 되니까 더욱 독이 나 가지고 독거미가 되어 가지고 천장에 가서 붙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컸습니다. 커 가지고 아주 독이 올랐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가지고 그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갖다가 물어서 죽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또 그 동생은 어떻게 되고 형은 어떻게 되고 한 얘기가 장황이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해서 친구 간에 웬수가 되고, 형제와 부자 간에 웬수가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웬수가 되고,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어서, 금생에는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내생에는 저 사람은 나를 죽이고 이렇게 해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으면 그다음에는 그 쥐는 고양이가 되고 그래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점점 더 약이 올라가기 때문에 처음에 바늘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칼 가지고 싸움을 하다, 다음에는 도끼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총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을 잘못 처리해 가지고 큰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참선한 사람은 작은 일로 해서 큰일로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일을 발판으로 해서 큰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황금을 갖다가 똥처럼 쓰고, 지혜로운 사람은 똥을 갖다가 황금처럼 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잘 발효를 시켜서 퇴비를 만들어 가지고 비료로 사용하면은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우리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은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입니다—그러한 번뇌 망상을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 번뇌 망상이 완전히 승화(昇華)해 가지고 보리심, 깨달음을 증득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어렵다, 어렵다. 팔만대장경 그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읽으며, 읽어봤자 아지도 못하고, 한문이 어려워서 아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그 많은 것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아! 불법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러한 분들을 가끔 많이 만남니다마는 불법(佛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아직 정법(正法)을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법은 막연하게 어렵고 깊고 그렇게 겁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지, 참으로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고 행할 줄만 알면 불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성이 나면 그 성이 딴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적멸궁(寂滅宮)에서 나온 소식이거든. 그래서 그놈을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누를려고 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그 성내는 마음 그놈으로 '이 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나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 정법이요, 참선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이다 이 말씀이여.

오늘은 입춘날이라 여러분에게 부적을 노놔 드렸습니다. 다 받으셨습니까?
신도 : "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러분은 금방 받으신 그 부적으로 어떠한 재앙을 만나더라도 그 부적을 내세우십시오. 팔만사천 마구니도 그 부적 앞에는 꼼짝을 못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며, 항복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줄 것입니다.(58분30초~1시간18분6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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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팔식(第八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音寫)로, 거주지 · 저장 · 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 · 말나식(末那識) · 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식(識) ; 산스크리트어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대상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8식설(八識說)은 유식설(唯識說)에서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karma [팔리어]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 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팔자(八字) ; 사람의 한평생의 운수. 사주팔자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간지(干支)로 나타내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이 속에 일생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본다.
*푸닥거리 ; 무당이 부정(不淨)이나 살(煞)을 풀기 위해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하는 굿.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승화(昇華 오를 승/빛날 화) ;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
*운로(運路) ; 운길(운이 트인다는 길).
*십선(十善) ;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짓지 않음.
*십악(十惡) ; 나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惡)한 행위.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십악업(十惡業) · 십불선업(十不善業) · 십악업도(十惡業道) · 십흑악(十黑惡) 등이라고도 한다.

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 邪行).
말[口]로 짓는 네 가지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생각[뜻, 意]으로 짓는 세 가지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또는 치암(癡暗 어리석음).


*사성제(四聖諦) ; 사제(四諦). 제(諦)는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를 뜻함. 고(苦, 괴로움)를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함.
①고제(苦諦, 苦聖諦) : ‘고(苦, 괴로움)’라는 성스러운 진리.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고다”(상응부)
②집제(集諦, 集聖諦) : ‘고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진리.
③멸제(滅諦, 滅聖諦) :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됨으로써 고(苦, 괴로움)가 소멸되어 고의 끝남,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
④도제(道諦, 道聖諦) :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 바른 이해)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 정어(正語, 바른 말) · 정업(正業, 바른 행위) · 정명(正命, 바른 생계) ·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 정정(正定, 바른 집중)—는 갈애를 소멸시켜,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낙담(落膽 떨어질 낙(락)/쓸개 담) ; 너무 놀라 간이 떨어지는 듯하다는 뜻으로,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몹시 상함.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滅)하는 때도 없습니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 : 생겨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고[不滅] 항상 그대로 변함이 없는 진여(眞如)의 경계. 진리의 본질을 나타낸 것.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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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유루(有漏) ; ①샘[漏]이 있는[有].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는. ②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③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유위법(有爲法) ;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
위(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고,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을 가지는 것.
①여러 인연(因緣)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또는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및 존재(사물).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계의 일체의 사물. 인과 관계 위에 있는 존재.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의하여 화합생성된 것이므로 생(生)도 있고 멸(滅)도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하고, 무위법(無爲法)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절대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타관(他官 다르다·다른 곳 타/마을 관) ; 제가 나서 자란 곳이 아닌 다른 지역이나 고장.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전식득지(轉識得智) ;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 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 - 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 열반)의 청정한 지혜, 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4분43초)
우리가 정말 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믿는다면 ‘맨 처음에 무엇을 믿느냐’하면은 『내가 바로 부처다.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한테 무슨 생사(生死)가 있어?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요달(了達)한 분이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한테는 번뇌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내가 바로 부처다』 그렇게 딱 믿고 대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도 없는 것이다.

지금 그러면 우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는 무엇이며, 어머니한테 받아난 이 육체로 해서 생이 있고, 늙음이 있고, 병이 있고 마침내는 육칠십 살다가 결국은 죽는데, 그 죽음이 있는데 이 있는 죽음,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매(昧)했기 때문에, 매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은 우선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확실히 조리 있게 알면 그것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서 화두를 들어야 한 번을 들어도 여지없이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그놈을 들어 나가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우리의 중생의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없는 생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생사일망정 바로 거기서 생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29분6초~33분48초)

*보리과(菩提果) ; 깨달음.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果 열매·결과 과) ; ①열매를 맺음. 또는 그 열매. 원인으로부터 생긴 결말의 상태. ②원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체의 법(결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선업(善業) ; ①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착한 일. ②탐진치(貪瞋癡)를 감소시켜 없애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
*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악(惡) ; [산스크리트어] pāpa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음.
*무기업(無記業) ; 삼성업(三性業)의 하나. 선업(善業)에도 악업(惡業)에도 속하지 않으며, 선악 중의 어떠한 과보(果報)도 받지 않는 업을 이른다.
*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세가지 불능’ ; 삼불능(三不能).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 : 644~716) 선사가 말씀하신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시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결정된 업[定業]은 즉시 멸하지 못함. ②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4권. '숭악 원규 선사'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83~284.
佛能空一切相 成萬法智 而不能卽滅定業 佛能知群有性 窮億劫事 而不能化導無緣 佛能度無量有情 而不能盡衆生界 是謂三不能也
부처님께서는 온갖 형상의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셨으나 결정된 업[定業]을 즉시 없애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만 겁의 일을 기억하시나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유정(有情)을 제도하시나 중생 세계를 다하게 하지는 못하나니, 이것을 세 가지 능하지 못함[三不能]이라고 말한다.

定業亦不牢久 無緣亦謂一期 衆生界本無增減 更無一人能主有法 有法無主是謂無法 無法無主是謂無心 如我解佛亦無神通也 但能以無心通達一切法爾
결정된 업[定業]이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인연이 없다 함도 일기(一期)를 말한 것이고, 중생 세계도 본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라서 한 사람도 유법(有法)을 능히 주재하는 자가 없다. 유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법(無法)이라 하고, 무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 가령 내가 이해하기로는 부처님은 본래 신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무심으로써 온갖 법을 통달했을 뿐이다.

*삼계(三界) ; [산스크리트어] trayo-dhātavah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신통(神通) ; 육신통(六神通).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훈(熏 연기낄 훈) ; 훈습(熏習 , 薰習)
① 어떤 성질에 물듦. 어떤 기운이 배어 듦.
② 산스크리트어 vāsanā 마치 향 냄새가 옷에 스며들 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신통력(神通力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힘 력) :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通] 초인간적인[神] 능력[力].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눈물바람 ; 눈물을 많이 흘리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심사(心思) ; ①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일어나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 ②남을 괴롭히려는 고약하고 심술궂은 마음.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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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희사(喜捨 기쁠 희/버릴·베풀 사) ; ①보상을 구하지 않고, 기쁘게 재보(財寶)를 베푸는 것. 정사(淨捨 : 깨끗하게 내놓는 것), 정시(淨施 : 깨끗하게 베푸는 것)라고도 함. ②기껍게 자기의 의견, 생각을 버리는 일.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는 일.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 『치문경훈(緇門警訓)』에 있는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의 ‘팔일성해탈문(八溢聖解脫門)’에 나오는 구절.
實際理地, 不受一塵, 佛事門中, 不捨一法.

實際理地는(眞如자리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으나,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전화위복(轉禍爲福 회전하다·바꾸다 전/재앙 화/되다·이루어지다 위/복·행복 복) ; 재앙[禍]이 바뀌어[轉] 오히려 복(福)이 된다[爲]는 뜻으로, 좋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김을 이르는 말.
*미묘(微妙 작다·정교精巧하다·은밀隱密히 미/말할 수 없이 빼어나고 훌륭하다 묘) ; 인간의 생각이나 언어로는 헤아리거나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훌륭한 대상, 또는 상태를 형용하는 말. 주로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 깨달음의 경지 등을 형용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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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수(閨秀 안방·부녀자 규/빼어나다·훌륭하다·아름답다·꽃 수) ; ①혼기에 이른 남의 집 처녀를 점잖게 이르는 말. ②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여자.
*포태(胞胎 배·태보胎褓·자궁 포/아이를 배다·태아 태) ; 아이나 새끼를 뱀.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 ; '잠깐(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매우 짧은 시간)'의 사투리.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 · 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적멸궁(寂滅宮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집·대궐·절·마음 궁) ; 적멸의 궁전은 적멸을 형상화한 말로서,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게송)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니, 긴히 승두(繩頭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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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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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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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1. 10. 14. 05:08

§((242)) 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 '마음을 관(觀)한다'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 /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 사도(邪道)에—무당, 점쟁이 등—빠지지 말라 / 일체 경계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 (게송)천강동일월~.

여러 가지 수행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42)—1984년 7월 첫째일요법회(84.07.01) (용242) (이뭣고화두)

 

 

(1) 약 16분.

 

 

(2) 약 18분.

 


(1)------------------

〇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불법을, 불교를 믿되 무당집에 다니면서 밤낮 무당 하는 소리나 듣고 또 직접 무당은 아니라도 무당에 가까운 그러한 절에 다니면서 밤낮 그러한 소리나 듣고 점이나 치고 사주나 보고,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방 거기 가서 물어보고, 이러한 식으로 불법을 믿으면 종래 그러한 20년 30년을 믿어 봤자 잘되어 봤자 그 무당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들은 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처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이 벌여 놓은, 비로자나 법신불—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가 다 비로자나 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법(法)을 터득하면 일체법(一切法)이 다 한 법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한 법을 옳게 믿고 터득을 하면 교육 문제나 또는 가정 문제나, 회사 문제나, 사회 문제나, 국가 문제나, 세계 인류 문제나 모든 것이 다 한 통속(統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이여.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이뭣고?’

이 가운데에는 너무너무 잘 아시고, 참선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시고 또 올바르게 실천을 하시는 분도 많으시지만, 절에 법회를 몇 해를 댕겼는데, “대관절 ‘이뭐꼬’라는 것이 무엇인고? 이모의 코? 이모 코가 어쨌다는 거여? 밤낮 가면 ‘이모꼬’하라고 그러는데, 이모 코가 뭣이 어쨌다는 거여. 이모 코는 어떻고 고모의 코는 어떠냐. ‘이모 코’가 좋다는데 어째서 ‘이모 코’가 도대체 무어냐?” 하고 이렇게 몇 해를 다녀도 그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건 웃을 일이 아니고, 그동안에 처음 듣는 소리거든.
용화사 가면 좋다니까 오기는 왔는데 갈 때마다 ‘이모 코’만 찾으라고 하니까, 그거 참 '이모 코'가 별난 놈의 ‘이모 코’가 다 있다.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아하! '이모의 코'가 아니라 ‘이뭣고?’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게 무엇을 가르키는 말이냐 하면,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 말이여.
‘귀가 듣지 무엇이 들어? 귀가 없으면 못 듣고, 귀를 콱 먹어 버리면 못 들으니까 귀가 듣지, 듣기는 무엇이 들어?’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여.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속에 있어. ‘귀가 듣는다’ 하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이고, '귀를 통해서 듣는다' 그 말이여.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저 밖에를 보면 창문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이여. 이러한 비유도 엄격히 따지면은 폐단이 있는 말이지만, 편의상 이러한 비근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들어.

‘귀를 통해서 무엇이 들어?’
‘마음이 듣지’

'마음이 듣는다' 그 말이 맞는 말인데, 들은 풍월(風月)로 ‘마음, 마음’ 하지, 실지 '그 마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다그쳐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은 풍월로 그저 어릴 때부터 ‘마음, 마음’ 그저 속상한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그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속상할 줄도 알고 하는 그게 마음의 작용인데, 지금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그 『이것』은 그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일으키는 그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을 「마음」으로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용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작용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서 「마음」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무엇이 그리 슬퍼할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기쁠 때도, ‘그 기뻐할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에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뭣고?’를 찾어도 도무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면 환히 배꼽 밑에 불이 켜지고, 따악 눈을 감고 ‘이뭣고?’를 하면 온갖 것이 환히 천상도 나타나고 지옥도 나타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환히 다 나타난다고, 그래 가지고 자기는 도통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을 하고 그러한 노보살님이 그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용화사에서 하도 법문을 많이 들어서 그러한 것을 자랑하는 분은 없을 것이고,
설사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도 감히 챙피해서, 그런 소리만 하면은 ‘마섭(魔攝)이 되었다. 마구니에 빠졌다’고 호통을 맞을 테니까 은근히 함부로 말은 안 하고, 비밀 은근히 뒷구녁에서 그런 것을 자랑을 해 가지고 자기를 도통한 것처럼 믿게 할려고 공작을 하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참 가슴 아픈 일이라 할 것입니다.

찾아갈수록—‘이뭣고?’를 할수록 알 수가 없을 뿐이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거나, 무엇이 나타나거나, 무엇이 보이거나 이러면은 그건 공부가 잘못되어 간 것입니다.
어쩌다가 혹 그런 것이 슬쩍 스쳐가거나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幻相)이지, 그것이 참다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부정을 해 버려야 해.
다시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도 말고,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그걸 다시 나타나기를 바랄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그것은 귀 끝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생각해 버리고 다시는 관심을 거기다가 붙이지 말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냥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더 깊어지면 ‘이뭣고?’ 소리를 아니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獨露)하면,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덮치기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그때 가서 ‘이뭣고?~’ 한번 이렇게 챙겨 주면 되는 것입니다.


〇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 5만 독(讀)을 한다 또는 10만 독을 한다' 해 가지고, 염주가 닳아지도록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타불 타불 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끄터리만 따서 ‘타불 타불 타불 타불....’

‘어쨌든지 오늘 내가 10만 독씩을 매일 채워 가지고, 내가 죽기 전에 아미타불을 봐야겠다’해 가지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는데, 또 염불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는 염불문(念佛門)도 있습니다.
염불이 나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염불을 해야겠다는 철저한 신심이 있고 또 염불을 통해서 극락세계에 갈 그러한 원력(願力)을 가지신 분, 그런 신심을 가지신 분은 또 염불도 좋은 것이지, ‘에이, 참선이 제일이고 그까짓 염불은 아무것도 아니다’ 염불하는 사람을 우습게보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염불도 정말 올바르게 지극정성으로 하면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용화사는 주로 참선법을 주로 해서 법(法)을 설하는 도량이기 때문에 염불에 대한 말씀을 아니합니다마는, 여러분은 참선을 지극정성으로 할지언정 염불에 대해서 비방을 하거나 그것을 우습게 여기거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동안에 여기에 계신 분 가운데에는 과거에 염불도 많이 하시고, 또 관세음보살도 많이 하시고, 또는 ‘옴마니반메훔’ 같은 그런 주력(呪力)을 지극정성으로 많이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수행 방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있어서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염불을 하시는 것이 좋을 분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을 하시는 것이 또 근기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50분43초~1시간6분42초)





(2)------------------

〇사도(邪道)에—무당, 점쟁이 등—빠지지 말라.

그래서 참선법에 한번 마음을 붙이고 여기에 발을 디딘 분은 다른 데에 ‘무엇이 좋다’ 하면 그리 그냥 귀가 솔깃, ‘무엇이 좋다’ 하면 그것에 솔깃, 그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한번 믿은 마음이 철석같아야 하거든.
태산과 같이 부동하고 바다와 같이 깊어야지, 여기서 뭐라고 하면은 그 말에 솔깃, 저기 가서 뭔 말을 들으면 그것에 솔깃, 이거 좋다 하면 이것 솔깃, 저것 좋다 하면 저것 좀 해볼까, 이것 좋다... 밤낮 갈팡질팡, 갈팡질팡, ‘법화경을 읽으면 좋다’ 그러면 그때부터서는 인제 법화경, ‘에이, 법화경보다도 금강경이 더 좋다’ 하면 금강경, ‘화엄경이 진짜 좋다’ 하면 화엄경, ‘참선이 좋다’ 하면 참선.

참선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해 보니까 잠만 퍼오고 망상만 일어나고 아무 재미가 없어. ‘에이, 법화경 다시 해야겠다’
‘에이, 법화경 해 보았자 별수없고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치니까 환히 내 마음이 시원하게 다 가르쳐 주더라’ 이래 가지고 겉으로는 참선하는 척, 속으로는 무당을 조실스님으로 생각하고, 도대체 20년, 30년 불법을 믿으면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어.

보통 좋을 때는 부처님 믿고, 무슨 일만 났다 하면은 부리나케 무당 점쟁이한테 쫓아간다. 만약에 무당한테 가고 점쟁이가 그렇게 사람을 잘 모든 일을 다 뜻을 성취하게 하고 생사해탈하게 한다면, 우리 절에도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족집게 점쟁이를 얼마든지 갖다가 고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 가지고 일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지내간 이야기는 썩 잘 맞춥니다. 금방 터진 명도점쟁이라던지 그게 다 지내간 얘기를 그렇게 뭐 같이 산 사람보다도 더 잘 알아맞히고 그러는데, 그 사람 말 듣고 뭔 일이 다 해결이 된다면, 그 점쟁이는 대대손손이 대통령만 해먹고 장관만 해먹고 다 박사가 되겠지만, 점쟁이 뒤끝이 별로 좋지를 못합니다. 잡신(雜神)만 그 집구석에 드글드글 끓지, 한 자식 옳게 기르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잡신을 숭상하기 때문에 팔도의 잡신은 그 집안으로 다 모여들어서, 잡신은 굿을 하면은 그때는 조금 헤헤 하다가 며칠 지내면 도로 또 행패를 부립니다. 깡패 불러다가 이용해 먹으면, 나중에 그 깡패 등쌀에 그 집단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손해가는 것 같지만 정법(正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념(正念)으로 다스리고, 모든 일은 정법으로써 지혜로써 잘 수습해 나가면 결과적으로 거기에서 바른 길이 열리고 올바르게 해결이 되는 것이지, 밤낮 그런 잡신을 숭상하고 그런 잡된 삿된 길에 드나들고 추종을 하면 점점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물이 들고 나중에는 그 점쟁이 집에 들끓던 잡신이 자기집에까지 따라옵니다.

자기집에도 물을 떠놓고 빌고 대감단지를 해놓고 남편 몰래 뭐 이상한 짓을 하고 그러면 그 애가 머리가 따끔 따끔 아프던 것이 신기하게 나은 것 같고, 그러면 계속 그 짓을 해 가지고 나중에는 며느리한테 그걸 물려주고 딸 시집가는 데도 물려주고 이래 가지고는, 나중에는 딸이 느닷없이 싱숭생숭 해 가지고 곧 그냥 미칠락 말락 하면서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가지고 점쟁이가 될라다가 말라다가 곧 발광을 하거든.
그래 가지고 참 계속해서 처음에는 몇 해거리 한번씩 굿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래 갖고 안되니까 1년에 한 번씩 하다가, 나중에는 다달이 하다가 그래 가지고 집안 살림은 탕진이 되고, 그래 가지고 집안에 계속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화재가 일어난다, 약 먹고 죽는다 그래 가지고는 사람이 연거퍼 둘씩, 셋씩 막 죽는 거거든.

그러고 평생을 경험을 해 본 뒤에사 ‘아하! 이것이 나쁘구나’ 그것을 알고서 그것을 끊을려고 하면은 정말 그 '씨아시' 에다가 손가락을 넣고 견딘 것처럼 그렇게 아픈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씨아시' 라고 하는 것을 혹 시골에 사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 목화씨를 빼는 좋은 기계가 많지마는, 옛날에는 수동식입니다.
수동식으로 되어 가지고 꽈배기 과자 같이 나무를 만들어 가지고 두 개를 합해서 돌리면, 그래 가지고 목화(木花)를 집어넣어서 돌리면은 씨가 거기서 뚝뚝뚝 떨어지면서 솜만 저쪽으로 나오는데, 그 꽈배기같이 생긴 두 나무 돌아가는 사이에다가 목화를 넣다가 잘못해 가지고 손가락을 넣게 되면 손가락이 아주 파싹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놈을 참고 계속 손가락을 처음부터서 집어넣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당을 숭배하다가 그것을 그만둘라고 할 때에 그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이 바로 거기에다가 비유할 만큼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당이나 무당 숭배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것을 할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한 번 두 번 답답하면 가서 물어보고 또 물어봐서 해 보니까—밥을 해 놓고 손을 비비고 갖다 찌트러 버리고, 칼로 이리저리 해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하고 나면 좀 효험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한 번 두 번 하다가 그렇게 되는 거여.
마치 아편을 한 번 두 번, 정 그렇게 아플 때에 한번 맞으면 시원하니 낫고 하니까 또 맞고, 한 너댓 번만 맞으면 아편 중독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은 믿고 해 갈수록 담담하고, 그런 삿된 길은 한두 번 해 보면 그렇게 쌈박하고 좋거든.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 끌려 들어가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심하다고 별맛이 없다고 버리고, 입맛을 취해서 삿된 데에 빠지고, 입맛을 취해서 음식을 취하고 그러면은 사도(邪道)에 빠지고 결국은 건강을 해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삼복이 가까워서 몹시 더운데, 이렇게 한 분도 졸으시는 분이 없이 이렇게 참 잘 듣고 계셔서 대단히 감사한데, 정말 참선 얘기를 할 때에는 이렇게까지 눈이 초롱초롱 안 하고, 무당 얘기를 하니까 그렇게 눈이 반짝거린다 그 말이예요.


〇일체 경계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앞으로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돌아옵니다. 선방에 계신 비구 스님네 그리고 비구니 스님들, 더울 때 아무리 더위도 그 더울 때에 즉(卽)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또 이 선방에 계신 보살님네들이나, 또 가정에서 공부하시는 보살님네 · 청신사 여러분, 더울 때는 그 더울 때를 향해서 더운 곳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도록 노력을 하신다면 더운 줄을 모르고 한 해 여름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서늘 바람이 날 때에는 우리의 마음속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식어 버리고 청량한 법(法)의 기쁨과 선(禪)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여름에 되게 더워야 그래야 논밭에 모든 곡식이 잘 자라고, 겨울에 되게 추워야 모든 잡충들이 다 잘 죽고 그 이듬해 또 풍년을 기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울 때는 더워서 못한다고 한 사람은 추울 때는 또 추워서 못하고, 젊어서 바뻐서 못한다는 사람은 늙어서 몸이 아파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울 때는 더웁기 때문에 더움을 향해서 공부를 가다듬고, 추울 때는 그 추운 곳에 즉(卽)해서 생각을 돌이킨다면 춥고 더운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공부를 이루게 하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

비단 더웁고 추운 것 뿐이겠습니까? 속상할 때에는 그 속상한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슬플 때는 바로 그 슬픈 곳을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기쁠 때 괴로울 때는 바로 기쁘고 괴로울 때를 즉(卽)해서 화두를 든다면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마음 찾는 도량이요, 바로 법신불(法身佛)과 바로 무릎을 맞대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할 것입니다.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일주홍진(終日走紅塵)타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다.
천 개나 되는 강에 강물마다 달이 떠 있지만 그것은 한 달이더라 그 말이여. 하늘에 한 달이—달은 하나인데 그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추어 있더라 그 말이여. 천 개의 강에 다 강마다 달이 떠 있지만 그 달은 바로 하늘에 있는 한 달이더라 그 말이죠.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집집마다 뜨락마다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백목련도 피고 집집마다 피는데, 그것이 각각 다른 봄이 아니라 한 봄이더라 그 말이죠.

하늘에는 한 달이건만 우리는 어찌 이렇게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다른 상황 속에 태어났고,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동서남북 가가호호에 태어나서 김 서방, 이 서방, 박 서방 이렇게 태어났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팔도에 태어나서 각각 피도 다르고, 성도 다르고 이렇게 태어났는데, 오늘 이 시간은 사부대중이 온통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한마음이 된 이 공덕으로 우리는 세세생생에 한 불회상(佛會上)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종일토록 이 홍진(紅塵) 속에 줄달음질을 치면서(終日走紅塵), 자기집 보배를 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失却自家珍)

오늘부로는 바로 이 법당에서 나가는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이뭣고?’ 하고 자기의 자성(自性) 부처를 찾으신다면 세세생생에 다른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시고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결정코 자기집에 있는 세세생생에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아서 일체 중생에게 노나 줄만큼 무진장(無盡藏)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시간6분43초~1시간24분5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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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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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1. 9. 8. 09:58

§((212)) (게송)백운아향만리표~ / 육조 스님과 남악회양 선사, 하택신회 선사 / 활구참선. 은산철벽(銀山鐵壁) / 참선은 쉽다(세수하다가 코 만지기), 어렵다(깨 한 말을, 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리에서 굴려서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 올릴 만큼)

옛날부터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겠다고 출발을 했지만 중도에서 물러서거나 중도에서 쉬어버리거나 또는 딴 길로 빠지거나 이러기가 십상(十常) 쉽고, 끝까지 나아가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렇게 흔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까딱하면 중간에 어떠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해태심(懈怠心)을 내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한결같이 쉬지 않고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모시고 법문(法門)을 들어야 하고, 또 좋은 도반들과 항시 같이 수행을 해 나가야, 내가 혹시 해태심이 나거나 딴생각을 내더라도 도반(道伴)으로부터 경책(警策)을 받고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들어서 그러한 위기를 면하면서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12)—1983년 9월 첫째 일요법회(83.09.04) (용212) (이뭣고화두)

 

 

 

약 19분.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허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백운(白雲)이라고 하는 자식이 만리의 바람에 나부끼는데, 원래 백운은 청산에 의지해서 뭉쳐서 있다가 바람이 부니까 그 바람에 실려서 저 만리 하늘에 나부껴 날아갔다 그 말이여.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여. 그렇게 바람에 불려서 만리 하늘을 떠내려갔지만 그 백운은 항시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본래 놀며 의지하며 살고 있던 그 푸른 산을 마음속에는 잊지를 않고 있더라 그 말이지.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인데, 어째서 무슨 일로 이 백운은 청산으로 다시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길이길이 자기 본래 살던 그 청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으로 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이리저리 바람 따라서 물결 따라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구나.

우리는 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처럼 본래는 똑같은 본각(本覺)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새로 닦지 아니하고, 닦을 것도 없이 본래 깨달아져 있는 그러한 본각성(本覺性)이었건마는 한 생각 잘못 일어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풍파에 나부껴 가지고 무량겁을 동서사방 육도(六途)를 돌고 돌면서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그 부처님과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한 집에서 한 자리에서 기거를 같이 하고 생활을 같이 했건마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렇게 그 본 자리로 돌아갈 줄을 모르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이렇게 돌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바람이 그칠런지, 바람이 부는 한에 있어서는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날아가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날아가고, 북풍이 불면 남쪽으로 몰려가고, 남풍이 불면 북쪽으로 나부껴서 동서사방 정처가 없습니다.
조끔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축생도 되었다 인간도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되 좀 잘살기도 하고 못살기도 하고,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마치 우리의 이 존재가 청산을 떠난 흰구름과 같이 그렇게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태자로 태어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에 들어가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해서 현재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면면(綿綿)히 전해오고 있습니다마는,
삼천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에 부처님께서 전하신 그 정법(正法)은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썩은 사내끼에 매달려 있는 바윗돌과 같이 언제 그 썩은 새끼가 뚝 끊어져 가지고 그 바윗돌이 땅에 뚝 떨어질런지 모른 그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 불법이라고 하는 그 맥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 불교가 동양에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그 경전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또 번역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지마는, 참으로 그 불법에 등등상속해서 내려오는 그 법맥(法脈)이라고 하는 것은 실오라기만큼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육조(六祖)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육조 스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물으시기를,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떠받고 아래로는 땅을 기둥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가 없다. 항상 이 동용(動用)하는 가운데에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에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제불지근원(諸佛之根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고 이 하택 저 자신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제불의 근원이니, 하택의 불성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네가 앞으로 커서 공부를 열심히 해 가지고 설사 네가 큰 스님이 된다 하더라도 너는 마침내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 되것다”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법을 공부하는 학자나 강사 그러한 알음알이로 불법을 해석하고 강론하고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 되것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 선사가 떠억 육조 스님 앞에 와서 절을 했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 물으니까, 남악회양 선사는 망지소조(罔知所措)여. 꽉 맥혀 가지고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완전히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가지고 물러 나와서 8년 간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가슴속에 북받치는데 콱 맥혀서 ‘대관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무슨 물건인가?’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1년 이태 3년을 그렇게 되아 8년 만에사 탁! 깨쳤는데, 육조 스님 앞에를 갔습니다. “제가 깨달랐습니다”

“깨달랐으면 어디 일러봐라”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할 것은 없지 아니하나 더럽히고 물들인 것은 없습니다. 오렴은 곧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러니라’ 이렇게 해서 쾌히 인가(印可)를 하시고 법(法)을 남악회양 선사에 전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제불의 근원’이니, 무슨 ‘나의 불성’이니 그렇게 이론으로 따지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떠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콱 맥혀서 답답해 알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 가로막고 있고,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절벽이라,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고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어.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이렇게 해서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악회양 선사 같은 도인(道人)은 다 숙세에 선근종자(善根種子)로 다 전생에부터서 많이 닦으신 그러한 도인이 태어나셨겠지만 그래도 8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걸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근기(根機)가 박약(薄弱)한 우리 말세(末世) 중생들은 8년 아니라 80년이라도 지루한 생각을 갖지 말고 목숨을 바쳐서 한 화두(話頭)에 대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만한 공력과 그만한 끈기와 그만한 노력이 없이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어떻게 기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해서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진 것보다도 더 쉽다’ 이렇게도 쉬웁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웁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어렵기로 말하면은 깨 한 말을 갖다가—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럭지 있는 데서부터서 굴려서 저 열 길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서, 그 나무의 몸뚱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을 굴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려다 놓고, 다시 또 내려와서 깨 한 알을 갖다가 뿌리에서부터서 굴려서 올려 가지고 저 꼭대기에 갖다 놓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뚝 떨어지면 다시 뿌리에서부터서 굴려 올리고 그래서 깨 한 말을 굴려 올릴 만큼.

그것이 얼마나 공력을 드려야—그 하나를 평면으로 굴려 올린다면 모르지만, 서 있는 나무에 굴려서 올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만큼 공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겠다고 출발을 했지만 중도에서 물러서거나 중도에서 쉬어버리거나 또는 딴 길로 빠지거나 이러기가 십상(十常) 쉽고, 끝까지 나아가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렇게 흔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까딱하면 중간에 어떠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해태심(懈怠心)을 내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한결같이 쉬지 않고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모시고 법문(法門)을 들어야 하고, 또 좋은 도반들과 항시 같이 수행을 해 나가야, 내가 혹시 해태심이 나거나 딴생각을 내더라도 도반(道伴)으로부터 경책(警策)을 받고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들어서 그러한 위기를 면하면서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9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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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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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1. 6. 19. 07:39

§((233))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 / 어떠한 근기,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 /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이뭣고?)

 

 

(1) 약 16분.

 

(2) 약 16분.

 


(1)-----------------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41분39초~57분19초)




(2)----------------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7분21초~1시간1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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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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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1. 5. 15. 11:24

§((472)) '이뭣고?'는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것이 중요한 거여 / 참선 자세, 단전호흡 / 단전호흡은 공양을 하고 2시간 뒤에 하라 /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고, 의심이 적으면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닫지 못한다 / 간절하게 하는 것과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

달마 스님은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 (게송)사로불용행~ / '불(佛)'이란 말이 인도 말로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송담스님(No.472)—1992년 5월 첫째일요법회(92.05.03) (용472) (이뭣고화두)

 

 

(1) 약 15분.

 

(2) 약 8분.

 

 

(1)-----------------


앞으로 보름 후이면 임신년 하안거가 시작이 되는데, 그 하안거를 기해서 모두 방부를 들이고 정진을 하시고 또 이 선방에 나아가기 위해서 화두를 타고자 하는 분이 여기에 모다 참석을 했는데, 화두는 '이뭣고?'
개별적으로 만나서 이걸 일러주기가 어려워서 법상(法床)을 빌려서 말씀을 한 것이니까, 화두를 안 타신 분은 잘 듣고.

'이뭣고?'

'이뭣고?'는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여, 시삼마. "씨슴마" 중국 발음으로는.
근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이뭐꼬)'거든, “이뭣고?”

화두는 간결할수록 좋은 것이라, '이 것 이 무 엇 인 고' 여덟 자나 되는데, '이뭣고'하면 석 자거든.

'이뭣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거든.
근데 그런 긴 소리는 생략하고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 누면서도 '이뭣고?'
소지하면서도 '이뭣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이것을 놓치지 않도록.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꼭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를 챙기지 않아도—'이뭣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따악 관(觀)해야지, 그 의심이 있는데도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주 들고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화두가, '이뭣고?' 한 번 들어서 그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면 그때 챙기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와서 놓쳐 버리면 그때 챙기는 것이지, 괜히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이뭣고?'는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것이 중요한 거여. '이뭣고?'


첫째, 참선하는 데는 자세를 바르게 하거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떠억 하고. 해서 자세를 바르게 해.
자세를 앞으로 숙어도 안 되고, 좌우로 이렇게 기울어도 안 되고 또 단정히 한답시고 너무 지나치게 뻣뻣하니 뒤로 자지바지 이것도 못쓰는 거여. 단정하면서도 양어깨에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은 감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평상(平常)으로 뜨는 거여.

평상으로 뜨되, 앉은 자기한테로부터 약 2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는 거여.
'눈을 떨군다' 하는 것은 그 2미터 지점에다가 무슨 콩 같은 것을 놔두고 그 자리를 이렇게 그걸 쳐다보고 그렇게 하면 못쓰는 거고, 그냥 본 바 없이 평상으로 눈을 거기다 떨구라는 것이지, 그 자리를 응시(凝視)할 필요는 없어. 응시해선 안 되아.

그렇게 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그렇게 평상으로 떴으면, 그다음에 호흡을 하되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은 깊이 들어마셔서 조용히 내쉬는, 그리고 천천히 들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거여.
왜 이 단전호흡이 필요하냐 하면 사람이 살아 있는 증거는 숨을 쉬고 있으면 '살아 있다' 하고, 숨을 못 쉬면 죽은 거여. 그래서 이 호흡은 인간 생사(生死)와 즉결되는 문제여. 대단히 중요한 거여.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흡을 무심히 하는 거여. 그저 무심히 하고 있지만, 사실은 호흡은 바르게 하는 호흡이 있고, 바르지 못한 호흡이 있어.
바르게 호흡을 해야 몸의 노폐물이 밖으로 잘 배설이 되고, 따라서 피로도 회복이 빨리 되고 몸도 가벼워지고, 몸만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고 안정이 되는 거여.

그래서 어렸을 때, 어머니 뱃속에서 막 갓 태어났을 때는 저절로 이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거여. 그런데 차츰차츰 커가면서 그 단전호흡을 잊어버린 거여.
그래 가지고 잘못 호흡을 해 가지고, 요새 사람들이 어떻게 조금만 건들면 파르르르 신경질을 내고 단기(短氣)하고, 참을성이 없고 경솔하고, 신경질을 잘 내고 한 것이 전부 어렸을 때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었던 그 단전호흡을 잊어버리고 잘못 호흡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거여.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단전호흡법을 잘 알아 가지고 서서히 그 어렸을 때 숨쉬던 단전호흡으로 돌아가면 사람이 신경질 잘 내던 사람도 안 나게 되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는 버릇도 없어지고, 한 번 속상했다 하면은 며칠씩 그것이 안 없어지고 한 것도 단전호흡을 하면 금방 속이 좀 상하려고 하다가 금방 안 상할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른 새 상했다 하더라도 금방 그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여. 그렇게 중요해.
그래서 몸도 가벼워지고 어지간한 병은 다 없어지고, 혈압이 높은 사람도 혈압 약을 안 먹어도 이 단전호흡을 잘하면 혈압도 조정할 수가 있어.
물론 오줌만 잘 먹어도[요료법(尿療法)] 혈압 같은 건 대번에 일주일이면 낫지마는, 오줌 안 먹더라도 단전호흡만을 열심히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거여. 자기의 감정을 자기가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여.

그래서 참선을 안 하는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하면 참 좋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참선까지 한다면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전하고 나아가서 확철대오해서 생사(生死)까지 해탈(解脫)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하는 법을—단전호흡하는 법을 이 자리에서 더이상 내가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이 「참선법」이라고 하는 카세트(cassette)가 이 사무실에 가서 말하면, 그것을 구해 가지고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을 들으면은 자연히 이 단전호흡을 바르게 하는 법을 터득을 하게 되고, 화두를 드는 법도 터득을 하게 될 것인데 오늘은 간략히만 말씀을 드립니다.

준비 호흡을 세 번, 빨리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코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가, 입으로 '후~~~' 완전히 하나도 없을 때까지 다 내쉬고, 다 내뿜었으면 또 들어마셔.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어. 그래 가지고 입으로 '후~~~' 하고 다 내쉬어.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을 하면 가슴속에 있는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내뿜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서 세 번을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그때는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조용하게 숨을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 아랫배가 차츰차츰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8부쯤만 들어마셨으면 하나, 둘, 셋,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니 숨을 내쉬되, 입으로 내쉬지 말고 코로 내쉬어. 코로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코로 조용하니 내쉬는 거여.

그러면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정지하는 시간이 약 3초, 내쉬는 시간은 조금 길게 한 4, 5초 이렇게 조용하니... 들어마시는 것도 약 8부쯤만 들어마시되, 내쉬는 것도 약 8부쯤만 내쉬어.
가뜩 너무 가뜩 들어마시고, 너무 오래 참고, 너무 완전히 내쉴라... 준비호흡은 그렇게 하지만, 본 호흡에 들어가서는 8부쯤만 들어마시고, 참는 것도 약 3초 동안만 정지했다가, 내쉬는 시간도 완전히 다 내쉴라 하지 말고 8부쯤만 내쉬라 그거거든.

하되 식사를 하고,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단전호흡을 하지 말아. 하면은 위(胃)에 압박을 주니까 2시간 이내에 하지 말고, 2시간 뒤에 단전호흡을 하고.
처음으로 한 사람은 한 5분간만 하고, 또 쉬었다가 또 하고 해서 조금씩, 조금씩 해서 익혀 나가도록.

이것이 좋다 하니까 너무 무리를 해 가지고, 밥 금방 먹고 가득 위에 음식물이 들어 있는데 무리를 해 가지고 소화가 잘 안되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이런 수가 있으니까.
아무리 좋은 것도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조그만치 먹어야지,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배탈이 나고 설사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단전호흡이 좋다니까 이걸 너무 무리하게 해 가지고 병 난 사람을 내가 가끔 보거든.

그래서 그런 일이 없도록 서서히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해서 익혀 나가도록 하고.

화두는 '이뭣고?'를 하되,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에는 그렇게 익혀 나가도록.

「'이뭣고?'를 하되 의심(疑心)을 간절하게 의심을 하라」 이렇게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고,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하고, 크게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고, 의심이 적으면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고인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마에다가 아주 여기다 '내 천(川)’ 자를 쓰면서 (힘을 주면서)'이뭣고? 이뭣고?' 해 가지고 막 그냥 용을 쓰고 이렇게 얼마 안 가면 그 사람은 골이 뽀개지는 병이 생기는 거여.

간절하게 하는 것과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한 것과는 전혀 다른 거여.

그래서 이 참선하는 분은 반드시 법문(法門)을 자주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르게 해 나가야지, 참선이 아무리 좋아도 자기 식으로 우격다짐으로 말뚝 신심이 나 가지고 어거지로 막 몰아붙여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소화불량이 생기고 아무짝에도 못쓴다 그 말이거든.

반드시, 그래서 달마 스님은 그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하고 아주 탁! 못 박아서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여.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나오면은 어디로 갈 줄 모르는 것인데, 그래서 반드시 길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이 참선은 눈으로 보이는 길이 아니거든.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바른 스승 없이 제대로 해 갈 수가 있겠느냐?
까딱하면 병나고, 잘못하면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사견(邪見)에 빠지면 그거 미친 것이거든.

그래서 이것은 참! 바른 스승 없이는 하기가 어려운 것이고, 기왕 시작했다 하면 반드시 이것은 전신투구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해서 깨달아야 되는데, 바르게 해 나가야 한다.

오늘 화두를 새로 탄 사람은 그렇게 알고, 어쨌든지 출가한 사람은 '이거 하나 하자'고 출가를 하고, 출가법을 부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이니까 어쨌든지 철저하게 바르게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55분55초~1시간11분6초)





(2)-----------------

사로불용행(邪路不用行)하라  행지왕신고(行之枉辛苦)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요구불과(不要求佛果)하라  식취심왕주(識取心王主)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산(寒山), 습득(拾得),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 화현(化現)이고,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 화신(化身)이다' 하는데, 지금 산승(山僧)이 읊은 게송은 문수보살의 화현이신 한산의 게송입니다.

사로불용행(邪路不用行)이라, 삿된 길은 가지를 말아라.
행지왕신고(行之枉辛苦)니라, 삿된 길을 가면은 쓸데없이 쓰라림과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를 하는데, 자꾸 옆에서,
"이뭣고를 해 봤자 하근기(下根機)는 깨닫지도 못하고, 밤낮 해봤자 맛도 없고 아무것도 되는 것도 없고, 어쨌든지 지장경을 읽어라. 금강경을 읽어라. 무슨 주력을 해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아미타불은 부르다가 마지막 죽을 때 열 번만 부르면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반야용선을 가지고 데리러 오는데 그걸 하면은 돈도 안 들고, 참 고생할 것도 없고.
이뭣고 해 봤자 결제(結制)하러 가면은 돈 내야 하고 또 잠도 마음대로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죽비(竹篦) 치고 시간 맞춰서 앉으려면 허리 아프고 그러니 그까짓 거 뭐하러 그걸 하려고 하냐? 이것을 해라. 이거 읽으면 참 좋다는데 이것을 하지, 그거 참선은 다 최상근기를 타고 나야 그 사람이 닦지, 지금 참선한다고 해 봤자 누구 견성한 사람 봤어? 하지 말고 요렇게 이거하라"고 자꾸 옆에서 속삭속삭하면,

'대체 며칠 가서 해 봤지마는 별로 얻은 것도 없고, 누구는 꿈에 무엇을 나타나고 무엇을 했다는데 나는 별로 보인 것도 없고' 솔깃하니. 그래도 와서 법문 들어보면 '참선을 해야 한다'고 그러고, 또 그 옆에 말을 들어보면은 또 그것이 좋을 것 같고 갈팡질팡 갈팡질팡해.
그러지 말고 '굿을, 아무개가 굿을 잘하는데 굿을 하면은 어쩌고저쩌고 한다'
또 '굿을 할까?' 갈팡질팡하면 그 사람이 무엇이 되냐 그 말이여.

불요구불과(不要求佛果)여.
부처님이 탄생하신 뒤에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도 닦은 스님네나 청신사 청신녀가 수백만 명이지만, 부처님 같은 사람 한 번이나 나왔냐 이거거든. '그러니까 그거 다 소용없고 어쨌든지 아미타불 불러 갖고 극락세계 가는 것이 제일이다' 들어보면 그럴싸하거든.

참선을 하는데, 부처님과 같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불과(佛果)를 구하지 말아라 이거여.

식취심왕주(識取心王主)니라.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나의 주인공을 탁! 알아버려라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달아 버려야지, 거기다가 목표를 둬야지—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놈이 다 있거든.
바로 그놈을 탁! 식취(識取)하라 그 말이여. 딱! 알아차리라 그거거든.

성날 때, '이뭣고?'
탁! 이 성난 놈, 그놈을 챙기는 거거든.

뭘 볼 때, 탁! 볼 줄 아는 '이뭣고?' 탁! 챙겨라.
그렇게 챙겨 나갈 때 찰나찰나에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거여, 그게.
그놈 내놓고 무엇을 깨닫느냐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닫는 것이 '불(佛)'이여.

'불(佛)'이란 말이 인도(印度) 말인데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말이거든.
실달 태자(悉達太子)가 출가해 가지고 구담(瞿曇) 사문(沙門)이 되었는데 견성, 그걸 깨달았거든.

별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깨달은 뒤에 32상(三十二相)을 갖추고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것이 아니어. 내나 깨닫기 전에 그 모습을 가지고 계셨어.

우리는 32상도 갖추지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하고, 배고프면 밥 생각나고, 때리면 아프고, 욕하면 성내니까 흉악한 박지범부(博地凡夫)지만,
성날 때 '이뭣고?' 하고, 슬플 때 '이뭣고?' 하고, 속상할 때 '이뭣고?' 하고, 원망스러울 때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이뭣고?' 한 그 찰나찰나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놈 내놓고 절대로 부처가 따로 없는 것이여.

우리는 그렇게 믿고, 부지런히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그것밖에 정법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활구참선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견성성불의 길도 없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1시간11분13초~1시간18분38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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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1. 1. 27. 21:07

§((084)) (게송)전빙시수수성빙~ /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세계에 모든 것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진리(眞理)가 바로 '영원히 생사가 없는 참 이치'

 

생사심(生死心), 번뇌망상심 속에서 나를 찾아야 됩니다. 그것 보는 방법이 바로 '이뭣고?' / '이뭣고?' 이 글자 석 자가 무량겁 생사(生死)로부터 해탈(解脫)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해탈길 / 점철성금(點鐵成金). 우리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에 가장 최상승(最上乘) 불법(佛法)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하고자 하면 참나 찾는 '이뭣고?'를 해야 / 부처님이나, 우리나, 어떠한 죄 많은 중생이라도 그 근본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이 빛이 환희 밝게 나고 있다.

 

**송담스님(No.084)—1978(무오)년 칠석 법회(78.08.10) (용084)

 

 

약 18분.

전빙시수수성빙(全氷是水水成氷)이요  고경불마원유광(古鏡不磨原有光)이로다

나무~아미타불~

풍자동혜진자기(風自動兮塵自起)라  본래면목노당당(本來面目露堂堂)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얼음이 온전히 이 물이여. 그리고 물이 곧 얼음이 된 것이다(全氷是水水成氷).

얼음을 내놓고 물을 찾아서는 아니 됩니다. 얼음이 바로 그것이 물인 것이고, 그 물이 영하로 내려가면 얼음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가, 또 그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그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생주이멸(生住異滅)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의 공덕으로 태어나 가지고, 얼마 동안 자라다가, 자라는 것이 바로 늙어가는 과정이죠. 이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늙어서, 그래가지고 병들어 가지고 죽어갑니다. 그래서 이 우리의 몸뚱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世界)에는, 우리 몸밖에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습니다. 무슨 물건이던지 이루어졌다가, 얼마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해 가다가, 그 모냥이 파괴가 되어 가지고, 마침내는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고,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 모든 것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허망한 것이다.

일체(一切)의 유위법(有爲法)은 꿈[夢]과 같고, 꼭두각시[幻]와 같고, 물거품[泡]과 같고, 그림자[影]와 같고, 풀끝에 이슬[露]과 같고, 또 번갯불[電]과 같다.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허망하지 아니하고 참되고 영원(永遠)한 것이냐?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진리(眞理)가 바로 '영원히 생사가 없는 참 이치'를 우리는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이 허망한 모든 것들을 여의고, 그밖에 참된 것을 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영원히 참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 번뇌망상심(煩惱妄想心) 속에서 나를 찾아야 됩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보리열반(菩提涅槃)을 찾아야 합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이 삼라만상 그 허망한 것들 속에서, 그 놈을 버리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참된 것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보는 방법이 바로 '이 뭣고?'입니다. '이 뭣고?'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볼 줄 아는 놈, 귀를 가지고 들을 줄 아는 놈, 코로 냄새를 맡을 줄 아는 놈, 입으로 말하고 혀로 맛볼 줄 아는, '아! 이것은 쓰다 달다', '더웁다 차다' 느낄 줄 아는 이 몸뚱이.

여기에 앉아서도 서울도 순식간에 왔다갔다하고, 10년 20년 전 옛날 어릴 적에도 순식간에 왔다갔다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대관절 무엇이냐?'

아무리 그놈을 볼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건만, 분명히 들을 줄 알고, 분명히 볼 줄 알고, 성내고 울고 웃을 줄 아는 이놈!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뭣고?' 이 글자 석 자가 무량겁 생사(生死)로부터 해탈(解脫)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해탈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칠석 법요식(法要式)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되겠습니다.

 

얼음이 곧 이것이 물이여. 번뇌(煩惱) 망상(妄想)—성내고 슬퍼하고 웃고, 오고 가고 이것이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번뇌 망상이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모습이요, 생사윤회의 원인이 되겠지마는, 그놈을 여의고 '생사 없는 도리'가 없는 것이올시다. 그 속에서 바로 '이뭣고?'

성낼 때 그 성내는 놈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썽이 폭! 한 생각이 속에서 뒤집어질 때, 뒤집어지려고 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 이 속 뒤집어지는 놈, 이놈이 무엇인고?' '썽내는 놈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바로 점철성금(點鐵成金)입니다.

 

무쇠 덩어리를 딱! 갖다가 '금(金)이다!' 하고 탁! 점(點)을 치면 무쇠 덩어리가 찰나간에 황금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점철성금(點鐵成金)!

번뇌 망상 '한 생각' 폭! 일어나는 그 진심(瞋心)이 참선(參禪)을 안 하는 사람에게는 금방 독사(毒蛇)의 몸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원인이지마는, 참선을 하는 사람은 폭! 썽이 날 때 바로 '이 뭣고?' 이것이 바로 독사의 몸을 받기 전에 깨달음에 한 걸음 다가서는 도리(道理)올시다.

 

불법(佛法)은 우리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에 가장 최상승(最上乘) 불법(佛法)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칠석날에 공(功)을 들이고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축원(祝願)을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축원을 해 봤자—물론 그러한 유루(有漏)의, 유상(有相)의 공양(供養)도 복(福)이 아닌 것은 아니나—상(相)이 있는 공양, 유루복(有漏福)은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을, 아무리 힘센 사람이 화살을 공중에다 대서 쏘아 올렸다 하더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가 힘이 떨어지면 다시 땅에 떨어지듯이, 우리가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머무른 바 있는 마음으로 지은 복은 언젠가는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공덕(功德)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상(相)이 있는 것을 여의고 무상(無相)을 찾지 못한다'고 한 말씀이 생사심(生死心)을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몸이 있는 동안에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움직여야 하고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하고,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 거기에만 꽉 착(着)해 가지고 그것이 다 인 줄 알지 말고, 정말 그 가운데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해야 그러한 모냥 있는 것들도 바로 참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불사(佛事)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복(福) 짓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공부한 사람일수록에 더욱 상(相)이 없는 깨끗한, 영원히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복을 지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선을 열심히 해야—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남편이 수명장수하고, 사업이 잘되기를 바래고, 아들과 딸이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갖고 좋은 짝을 만나서 행복(幸福)하게 살기를 바래고, 돌아가신 선망부모(先亡父母), 돌아가신 어른들의 명복(冥福)을 비는 그러한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해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도 상당수 계실 줄 생각합니다. 다 좋은 생각이고 참 훌륭한 생각입니다.

 

참으로 돌아가신 선망부모, 돌아가신 남편, 비명(非命)에 간 아들과 딸의 명복(冥福)을 빌고, 살아계신 부모와 아들과 딸, 남편, 온 가족이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물질적인 공양에만 머무르시지 말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내가 나를 찾는 참선법(參禪法)을 잘 귀담아들으시고 마음에 명심(銘心)을 하셔서 댁에 가시는 걸음걸음이, 차 속에서, 댁에 가셔서 살림을 하면서,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신경질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언짢은 일을 당하거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참나를 찾는 데에 돌리면서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의 소원은 정말 눈앞에서 너무나도 신기하게도 성취되실 것을 나는 보장합니다.

 

모든 업(業)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업을 소멸(消滅)하는 것은 그 업의 근원(根源)인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흘러간 물을 깨끗이 하려면 그 위에 가서 꾸정커리지를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밑에 아래에 물을 맑게 할려고 애를 써봤자 저 상류(上流)에서 흙탕물을 계속 일구고 있다면 아래에 물이 맑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랫물을 맑게 하기를 바랜다면 저 위에서, 근원에서 흙탕물 일구는 일을 그만두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업을 소멸하고자 하면,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하고자 하면 우리의 업(業)을 소멸(消滅)해야 하고, 우리의 업을 소멸하고자 할진댄 바로 그 업(業)의 근원(根源)인 나의 마음, 나의 마음자리로 부터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흙탕물을 바로 되돌려서 참나 찾는 최상법 '이뭣고?'로 돌릴 때에 구정물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간 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옛 거울은 닦지 아니해도 원래로 빛이 있는 것이여(古鏡不磨原有光).

우리의 마음자리는 언제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는 그 본래(本來)의 우리 마음자리는 부처님이나, 우리나, 어떠한 죄 많은 중생이라도 그 근본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이 빛이 환희 밝게 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거기에 먼지가 끼여서 그 빛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렇게 빛이 나고 영롱하고 밝고 깨끗한 거울 위에 끼여 있는 띠끌만 닦아 버린다면은 새로 빛을 내게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빛이 날 것입니다.

 

바람이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에 띠끌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여(風自動兮塵自起).

그렇게 해서 거울 위에 있는 때[塵]만 '이 뭣고?'를 통해서 닦고 또 닦아 가고 열심히 닦는다면, 우리의 자성(自性), 우리의 참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눈 한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이 날 것입니다(本來面目露堂堂). (15분3초~32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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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0. 12. 13. 10:55

§((047)) 일체 무조건하고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 부처님의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는 말씀.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한 방법이 참선법 /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만인 것 / 부처님 역대조사처럼 그러한 대도를 성취해야.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한 생각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그 나쁜 생각으로 해서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좋은 생각을 내면 그 좋은 생각으로 해서 착한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일체 행동을 바르게 하려면은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려면은 참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49년 설법에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마는 그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 이 말씀이여요.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개발되고 세련된 방법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역대조사처럼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조그마한 얻은 바를 얻었다고 자족해서는 아니 되겄습니다. 차라리 꽉 맥혀서 깨닫지 못한 캄캄한 중생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 하나만을 들고 나갈지언정, 설사 그러한 상태로 죽음에 도달할지언정 큰 깨달음이 아닌 조그만한 얻은 바로써 살림을 삼아 나가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송담스님(No.047)—1977년 하안거 결제법문(77.04.15.음) (용047)

 

약 13분.

 

이렇게 해서 몸을 바르게 반가부좌를 하고, 눈을 평상으로 뜨고, 혀를 위로 꼬불려서 혀끄터리가 입천장에 가서 딱 닿도록 하고서, 몸을 그렇게 바르게 가진 다음 복식 심호흡을 열심히 연습을 해서 그 복식 심호흡이 잘된 뒤에 화두를 의심을 해야 합니다.

 

화두는 이론으로, 알음알이로, 지해 사량심으로 따져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수수꺼끼와 같은 것입니다. 수수꺼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 상식 · 이론을 동원을 해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해서 결국은 알아맞히는 것이지마는, 이 화두 공안은 그러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을 가지고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어떠한 경전을 읽고 해서 얻어진 모든 지식과 상식을 여기에 사용해서는 아니됩니다. 일체 그런 것을 동원하지 말고 다못 거두절미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이 뭣고?'

 

'이뭣고?' 화두는, 오늘 여기에 처음 나오신 분은 '이뭣고?' 화두를 하십시오. '이뭣고?'화두는 무엇이냐?

 

분명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원소로 해서 뭉쳐져 가지고 이 육체가 성립이 되었습니다. 앞에 계신 분들은 눈을 뚝 뜨고 제 얼굴을 보시면서 말을 들으세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여기 앉아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집에 일을 생각하면 집에 일이 환하고, 아들 얼굴을 생각하면 아들이 환하고, 딸 얼굴을 생각하면 딸 얼굴이 환하고, 미국에 가 있는 손자를 생각하면 손자 얼굴이 환하고, 어릴 적 일을 생각하면 어릴 적 일이 환하고,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서울도 눈 한번 깜작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하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금방 썽내다 또 웃을 수도 있고, 웃다가 썽낼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눈을 통해서 볼 수도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도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고, 욕하면 썽내고,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신출귀몰한 그러한 재주를 부리고 있느냐?

 

분명 여기에 오셨지마는 친구가 가자고 하니까 오셨고, 여기 오면 좋다고 하니까 오셨지마는, '여기를 가자. 친구가 가자' 그래서 온 것이 아닙니다. 동기는 친구가 가자고 해서 왔지마는 정말 직접 오는 것은 이 몸뚱이 속에 「내」라 하는 놈이 '가자'하고 그놈이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가자고 끌어도 속에 놈이 탁! 코를 숙여 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대관절 눈으로 볼 줄을 알면서도, 눈으로 그놈을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다 그말이여.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는 다 듣지마는, 대관절 그놈에서 무슨 소리가 나온가 귀를 기울여봤자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손을 통해서 모든 것은 잡지마는, 그놈을 한번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를 않습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놈, 이 몸뚱이에 주인인 그놈, 대관절 그것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말이여.

그놈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다가 이 몸뚱이 오장육부에 어딘가 큰 고장이 나게 되면은 이 몸뚱이로부터서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는 그 순간 송장이 되아 가지고 3분 후부터서는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사람이 되었다, 짐승이 되었다, 천당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이런 몸뚱이로 태어나고, 저런 몸뚱이로 태어나고, 지금 세계 40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있지마는 낱낱이 다 생긴 것이 다 다르다.

어째서 다르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량겁을 두고 금생에 이르도록 지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몸을 타고나되 각기 다르게 태어난다 그말이여. 형제간은, 쌍둥이는 많이 닮았지마는 성격까지 다 닮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닦았느냐에 따라서 금생에 어떠한 몸을 받느냐 하는 것이 결정이 되기 때문에, 금생에 자기 받아 난 것, 자기의 성격, 자기의 지능, 모든 것을 잘 검토해 보면 내가 전생(前生)에 어떠한 짓을 하고, 어떻게 닦았겠다 하는 것을 추측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몸을 받아나고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 그것을 알려면은 금생에 내가 어떻게 닦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행동과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내생(來生)에 내가 받어날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생에 인물도 잘 타고나고, 정신도 정말 훌륭하고 지혜롭게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큼 잘 타고나려면은 금생에 행동과 마음가짐을 잘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갖는 것이 잘 갖는 것이냐? 참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한 생각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그 나쁜 생각으로 해서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좋은 생각을 내면 그 좋은 생각으로 해서 착한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일체 행동을 바르게 하려면은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려면은 참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49년 설법에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마는 그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 이 말씀이여요.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개발되고 세련된 방법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용화선원에서 이렇게 다달이 두 차례 이상 법회를 열고 있는 것은 마음 닦는 법을 서로 연구하고 공부하자. 이러한 목적하에 이 용화선원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창설하셨고, 삼천년 동안 전해 내려온 불법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굉장히 불법은 어려워서 세속 사람으로서는 공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줄 알면서도 안 한다' 이렇게 많은 거사님들이 말씀하시지마는 알고 보면 참선처럼 더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일체 것은 나로부터서 먼 데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고 그것을 얻는 것이지마는, 참선은 나로부터서 가장 가까운 것을 찾는 것이고, 찾는 바로 그놈이기 때문에 쉽기로 말하면 그 이상 쉬운 것이 없고 가깝기로 말하면 부모 애인보다도 더 가까운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시면 그만인 것입니다. 많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많은 것을 알아서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 아까 화두를 배우고 싶다고 하신 분은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나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많은 법문을 듣고 여러 해 동안 참선을 하신 분도 바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이 알고 많이 듣고 오랫동안 참선방에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삼아서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깨닫기까장은 어떠한 것도 우리는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깨달랐다 해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중생심이 일어나는 것이라 보살이 아니다. 참 깨달음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물며 깨닫지 못한 사람이 글을 좀 많이 안다고 해서 또는 경을 좀 많이 읽었다고 해서 또는 오랫동안 여러 해 선방에 다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도 자랑하고 코에다 걸고 으시댈 것이 못 됩니다.

 

우리는 참선을 해서 어떠한 공안 하나 둘 내지 셋 넷 공안의 이치를 본 바가 있다 해도 구경(究竟)에 큰 깨달음에 도달하기 이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소견은 전연 아무 소견이 없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해로울지언정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조그마한 얻은 바로 해서 우리의 큰 깨달음을 막고 있는, 막혀서 나가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역대조사처럼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조그마한 얻은 바를 얻었다고 자족해서는 아니 되겄습니다. 차라리 꽉 맥혀서 깨닫지 못한 캄캄한 중생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 하나만을 들고 나갈지언정, 설사 그러한 상태로 죽음에 도달할지언정 큰 깨달음이 아닌 조그만한 얻은 바로써 살림을 삼아 나가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34분50초~47분2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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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20. 9. 30. 10:00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32분 57초부터 시작됩니다>

 

§(306) 화두 게문 설명(有一物於此~) / ‘이뭣고?’하고 한 생각 다스리면 바로 천당이나 극락 / 팔만대장경은 노정기(路程記) / 심농(心農), 법의 기쁨[法樂] / 참선은 우리의 본업(本業), 그 밖에 모든 것은 부업.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 있어서 ‘이뭣고~?’하고 화두를 들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거와 똑같해. 그리고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서,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면 목적지가 나온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뭣고?’는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입니다.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송담스님(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용306)

 

 

지금부터서  오계(五戒) 지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도(解脫道) 증득하기 위해서 닦아 가는 화두(話頭법문을 설하겠습니다. 불명(佛名)을 이제 타신 분이나, 또 화두를 타신 분이나오계를 받고자 하신 분도 다 같이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을 하는 그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은 파르르르 성을 내는데 그 성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하는데 그 기뻐할 줄 아는 놈.

다치면은 아픈데 그 아플 줄 아는 놈.

배가 고프면 배고픈, 밥먹을 줄 아는 놈.

 

한 생각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독사와 같은 마음이 나는데, 나찰귀(羅刹鬼)와 같고 독사와 같이 되는데, 또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 또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찰나(刹那)간에 독사도 되기도 하고, 찰나간에 천사도 되기도 하는 그러한 그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한 놈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있어.

 

그놈을 성이 날 때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중생들은 뭐 하나가 기분이 나쁘면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생각에 생각을 더 펴 가지고 점점 속이 상해 나가고, 또 누가 미우면 조금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과거에 몇해 전에 있었던 일까지 이 생각 저 생각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점점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러는 법이고.

도(道)를 닦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은 언짢은 일을 당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냉큼 ‘이뭣고?’ 이래 버리거든.

누가 미운 짓을 해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해 버리면, 구태여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속상하는 소리를 해 가지고 그 사람과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여.

 

그래서 도를 안 닦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해서 점점 죄를 짓게 되고 웬수를 만들고 시끄럽게 만들고 남과 웬수를 맺게 되는 거고, 집안을 결국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만드는 거고.

이 도를 닦는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환경에 휩쓸리지를 아니하고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고 언제나 마음속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또 귀빈을 맞이해서 사는 그런 마음, 항상 천당이나 극락(極樂)에서 사는 그런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를 젓고 갈 때에 노 젓는 사람이 노 젓기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도 닦는 사람은 자기의 한 생각을 잘 조정함으로써 자꾸자꾸 승화되어 가고 도가 깊어지는 것이고,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눈을 보면 봄으로 해서 죄를 짓고, 뭣을 들으면 들음으로 해서 점점 번뇌(煩惱)의 불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한마디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그 팔만대장경판이 있는데 그놈을 목판에다 찍어 놓으면 수천 권이 되는데 그놈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어도 다 해석도 못하죠. 그러나 ‘이뭣고~?’ 한마디를 하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거와 똑같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공덕이 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할라면은 백일 동안을 계속 불러야 하는데, ‘이뭣고?’ 한번 하는데 1초도 안 걸립니다. 그만큼 ‘이뭣고?’는 공덕이 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잘 연구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농사를 짓는 법도 있지만, 이미 농사 잘 짓는 법 아는 사람과 같이 그 사람과 같이 농사를 짓고, 이미 다른 사람이 농사지어 논 놈을 갖다가 밥을 해서 딱! 놔주면 입에다 떠 넣어준 것입니다.

 

‘이뭣고?’하라고 가르켜 준 것은 밥을 여러분 입에다 떠 넣어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기만 하면 되는 거여.

입에다 이렇게 떠 넣어 주어도 뱉어 버리고 씹지도 않고 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 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는 거와 같애.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법(法)의 양식(糧食)입니다. 법의 양(糧)이여, 도(道)의 양식이거든.

그래서 이 법의 양식을 부지런히 먹고 잘 씹어서 삼키면 여러분은 도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심(心)’자, ‘농사 농(農)’자, 심농(心農)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수행하실 때에 들녘을 지나는데, 어느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이 부처님이 탁발(托鉢)을 하시니까, "밥을 못 주겠다"

"왜 못 주느냐?"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먹지만, 당신네들은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밤낮 서늘한 그늘 속에 앉아서 있다가 때만 되면 거저 밥을 얻어먹으러 오니 우리는 공밥 먹는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가 없다. 이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것을 어찌 당신들한테 줄 수가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이 "당신만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나도 농사를 지었소. 당신보다도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소"

"어찌 도를 닦는 사문(沙門)이 거짓말을 허요"

 

"아하, 거짓말이 아니요.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 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사는 ‘마음의 농사’야!

 

농사는 짓는 때가 있고 그 때를 타서 열심히 해야지, 씨만 심어 놓고 가꾸지를 안 하면 그 농사는 폐농(廢農)을 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때맞춰서 땅을 갈고, 모자리를 해서 그놈을 때맞춰서 심고, 그래 가지고 농약을 주고 비료를 주고 그래 가지고 그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걸 등한히 해 보십시오.

벌레가 다 먹어버리고 물을 맞춰서 주지 않으면 말라 죽거나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잠기면은 병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수확을 거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가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농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농사짓는 모자리의 씨를 심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어서 때맞춰서 잘 가꾸어 나가야지, 일시라도 등한히 해 버리면 벌레가 와서 침식을 하게 되고 말라 죽거나 떠 죽거나 그렇게 해서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道)도 잠시도 등한히 하면 그렇게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왜 우리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치냐’하면 도인(道人)이 생겨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흔들리게 되고 마구니가 소탕이 되어서 마구니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마구니가 자기 설 땅을 지키고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를 항상 우리는 잘 대항해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심왕(心王) 국토를 잘 지켜나가야만 우리는 도를 성취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올라고 하는 그 찰나에—이미 들어와 버리면 쫓아내기가 어려워—들어올라고 할 때 딱! 그놈을 문을 닫아 걸어야 되거든.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날 때, 무엇이 눈을 통해서 들어올 때, 어떠한 사물이 귀를 통해서 들릴 때,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올 때에 바로 그 즉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 마구니가 우리의 국토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에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으로 성장 또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도를 향해서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세속에 다 직업이 있지만, 이 ‘이뭣고?’ 내가 나를 닦는, 나의 영혼을 갖다가 해탈케 하는 이 직업이 정말 우리의 본업(本業)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또 의식주를 위해서 다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까짓 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위하는 직업에다 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이나 개인이나 사회 국가에 있어서 정말 충실하고자 하면 이 ‘이뭣고?’ 사업을 잘해야 그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정말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루어져 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정말 우리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바칠 것은 오직 이것뿐인 것입니다.(32분49초~50분4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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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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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19. 8. 21. 19:24

§(122)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비슷 / 유리병 속 오리 화두 / 불교의 목적은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 / 상(相)이 없이 닦아라 / 관심일법 총섭제행.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이 불법(佛法)이 무엇인줄도 알기 전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데서 와서 뭣 하러 왔으며 또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 다 자기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인생이 스스로 자연적으로 품게 되어 있는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疑心),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방법을 갖다가 만들어, 방법이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참선법에 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께서 우리 말세에 태어난 근기가 약한 업보 중생(業報衆生)들도 공부할 수 있도록 개발해 놓은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중생은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답시고 한 것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이여. 업(業)을 짓고 있는 것이여. 그런데 '이뭣고?'를 한 사람은 죄 속에서 죄에 물들지 아니하고, 죄 속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고, 그러한 묘법(妙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이여. '이뭣고?'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 (용122)

 

(1) 약 22분.

(2) 약 21분.

 

(1)------------------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 · 화두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안(公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가운데에는 처음 나오신 분도 있고 학생들도 있고 그래서 이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공안이라 하는 것은 공립학교라 해서 공(公)자 하고, 안건이라서 안(案)자인데, 공안이라 한 말은 '관가의 법률'이라 이런 말입니다.

관청에서는 모든 것을 그 법규에 따라서 모든 사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면 즉각 그 법규에 비추어 봐가지고 그 법규에 있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도,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이 공안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 공안을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그 공안을 참구(參究)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공안(公案) ·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일종에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상식 · 지식 이걸 총동원해 가지고 그 수수께끼를 이리 풀어보고, 저리 풀어 보고 그래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 보고 해 가지고 '아! 이것이다'하고 알아맞추는 것이 바로 이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끼리 모이면 수수께끼를 하는 수수께끼도 그 자못 아주 쉬운 것으로부터 재미있는 것 그리고 깊은 뜻을 담은 그런 수수께끼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수수께끼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인데.

 

유리병이 하나가 있는데, 유리병 주둥이는 좁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툭 퍼져가지고 퍼진 그러한 병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오리를 새끼 때 그 병 주둥이를 통해서 병 속에다 담았습니다.

새끼 때는 몸집이 작으니까 그 좁은 주둥이로 오리 새끼를 넣을 수가 있었는데, 넣어 가지고 매일 먹을 것을 먹이를 주었습니다. 물도 주고 먹이를 주어서 그 오리가 차츰차츰 자라 가지고 그 큰 병에서 애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오리를, 오리도 상하지 아니하고 또 그 병도 깨뜨리지 않고서 그 오리를 밖으로 꺼낼 수가 있느냐? 이것도 공안 가운데에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도 이것을 두고두고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터럭 하나도 상하지 않게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걸 꺼낼 수가 있을꼬?' 걸어가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것을 참구하고, 차를 타고 갈 때도 그것을 참구하고, 여러 가지로 참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병을 무슨 열을 높여 가지고 그 유리병이 물렁물렁하게 만들아서 주둥이를 넓혀 가지고 꺼낸다든지, 그러한 생각들은 벌써 이론을 사용한 것이여. 이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이론을 사용한 동안에는 바른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아! 저렇게 하면 나올 수가 있을까? 무슨 기합술로 탁 뻐개서 얼른 꺼낸 다음에 딱 붙일 수가 없을까?'

그러한 생각들을 가지고는 아무리 해 봤자 오리는 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론을 사용했다 하면 절대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한 방법으로 참구를 해야 해.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다못 이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야만,

오늘도 그렇게 참구하고, 내일도 그렇게 참구하고, 모레도 그렇게 참구하고, 앉어서도 그렇게 참구하고, 속이 상할 때도—어른한테 걱정을 들어가지고 확! 속이 상할 때도 딱! 그 생각을 돌려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일체처 일체시,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이렇게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깜박 무엇을 보는 순간에 이 공안에 대한 참구를 잊어버리고, 또 무엇을 들은 순간에 깜빡 잊어버리지만, 잊어버렸다 하면 퍼뜩 돌이켜서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돌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다가, 차츰차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잊어버린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이 화두를 참구하는 시간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항시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꼬?' 이렇게 저절로 참구가 되어지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가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수수께끼,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바로 이것이 화두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 무엇고? 시삼마(是甚麼)?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뭐꼬?'

 

자동차에는 운전사가 있어서 자동차를 운전을 하면 앞으로도 갔다 뒤로도 갔다, 왼쪽으로도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빨리도 가고 천천히도 가고 또 정지도 하고 자유자재로 합니다.

그건 겉에서 보기에는 차가 그렇게 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지로 속을 알면 차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차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 이 육체도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입으로 말하고 밥을 먹는 것, 손으로 움직여서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것이 이것이 몸뚱이가 지멋대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운전사가 우리의 몸 안에 있습니다. 그 운전사의 조종에 의해서 이 몸뚱이는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오셨지만 여러분의 발이 지멋대로 여기를 오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운전하고 있는 주인공이 '오늘은 용화사에 가자' 거기서 결정을 내려가지고 명령을 하기 때문에 이 몸뚱이는 차도 타고 발로 걷기도 하고 해서 여기를 오시게 된 것입니다.

 

'아니여,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아내가 자꾸 가자고 해싸서 내가 따라왔다. 그것은 아내가 그러면 나의 주인공이냐?' 그러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내가 백번을 졸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최종 결재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아내가 별소리 해 봤자 자기의 주인이 결재를 아니하면 여기는 오시지를 않고 어디 등산하실 수도 있고, 낚시터에 가실 수도 있고, 친구와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보통 '그게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그런 정도는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마음, 마음, 다 마음이란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들은 풍월로 들은 대로 그저 마음이란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쓰고 있는 것뿐이지, 실지로 그 마음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없고 그 마음의 참 실상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없기 때문에 귀로 들을 수가 없고, 형단(形段)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건마는 그놈이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손이나 발을 통해서 온갖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있다면 눈에 보여야 하고 손으로 잡을 수가 있어야 할 텐데, 왜 있으면서 볼 수 없고 잡을 수가 없느냐?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모냥 무슨 빛깔을 하고 있으며, 대관절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있느냐? 간 속에가 있느냐? 심장 속에가 있느냐? 머리 두골 속에가 들어 있느냐?

그것이 밥통 속에가 들어있다면 똥을 누면 변소간으로 빠질 것이고, 그런데 창자 속에가 있는지 어디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갖다가 왜 있다면 왜 볼 수가 없느냐?

 

온갖 것을 그놈은 다 보고 듣고 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볼 수가 없느냐?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그저 의식주(衣食住)가 인생에 전부인줄만 알고, 그저 배만 부르면 그저 아무 근심이 없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이 불법(佛法)이 무엇인줄도 알기 전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데서 와서 뭣 하러 왔으며 또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해서 다 자기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참선법(參禪法)은 인생이 스스로 자연적으로 품게 되어 있는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疑心),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방법을 갖다가 만들어, 방법이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참선법에 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 공안은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한다고 그랬습니다마는 실지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 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바쳐서 풀어야만할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안고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주, 오욕락(五欲樂) 때문에 그 중요한 문제를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놔둔 채 방황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우리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녹음 끊김)... 아니하고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더 연마하고 더욱 연구를 해서 우리에게,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근기(根機)가 약한 업보 중생(業報衆生)들도 공부가 할 수 있도록 개발해 놓은 방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인 것입니다.

 

'이뭣고?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났는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가 나를 낳아주신 것이 아니여.

그 참나는 부모로 인해서—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는 부모한테 받은 것이 아니여.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긴 때가 없이 존재해 온 것이여.

 

이 몸뚱이는 늙어서 병들어 죽지만,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참나는 태어난 때가 없기 때문에 또한 죽는 것도 아닌 것이여.

죽고 사는 것이 아니요,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여.

 

'이뭣고?'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는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판치생모라고 하는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안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하면 조주 스님께 어떤 스님이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사서래의,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달마 스님이 무엇하러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근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나 표현은 다르지만 근본은 있어서는 같은 뜻인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참선법을 가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기 위해서 달마 스님이 오셨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은데, 그러한 대답을 하시지 아니하고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판치에 털이나?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자 이빨 위에 털이 났다고 했는고?'

이것이 또한 우리의 의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됩니다. 천칠백이 넘는 것입니다.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수없이 많고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이나 되는데, 그러면 그 많은 공안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 것이냐?

 

일본에서는 의리선(義理禪)이라 해가지고 이 공안을 하나씩 스승으로부터 받아가지고 그 하나를 며칠 동안에 걸쳐서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해서 온갖 방법,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가지고 그 스승한테 가서 딱 이릅니다. 이르면 '되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하나의 공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 개 이상의 공안을 통과를 하면 '너는 조실이 될 자격이 있다. 너의 제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하고 자격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에서부터서 쭉 내려오는 정통적인 활구참선법에 있어서는 공안을 애당초부터 이론을 사용하지 말도록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을 가지고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이리 해가지고 어떠한 결론을 얻은 것은 설사 그 결론이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 그럴싸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공안에 바른 답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이론, 우리가 아무리 체계 있는 이론을 세웠다 해도 깨달음 앞에서는 일종에 분별심(分別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가르켜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10년 20년을 세월을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것을 애쓸 필요가 없이 그 공안에 대한 답을 다 가르켜서 알겄게만 하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것을 애를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 말씀이여.

 

분별심으로 이르지 못한 곳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은 차라리 분별심을 놔 버린 데에서 오히려 깨달음에 들어갈 분(分)이 있는 것이지, 분별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서는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분별심을 가지고 공안을 천착(穿鑿)을 하지를 말아라. 따지고 분석하지 말아라.(30분43초~52분20초)

 

 

 

 

 

(2)------------------

 

분별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이것을 바로 '죽을 사(死)'자, '글귀 구(句)'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여.

 

분별심을 버리고 일체 이론과 일체 말 길과 일체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버릇을 버리고서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또는 '어떻게 하면 병도 깨지 않고 오리도 다치지 않고 그 오리를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이렇게 다못 그렇게만 다구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살 활(活)'자, '글귀 구(句)'자, 활구참선(活句參禪), 사구참선의 반대 활구참선.

 

활구참선! 이 활구참선을 해야만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이 말이여.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불법(佛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가?'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흐뭇해 할 줄 알고, 자기 뜻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은 근심 걱정하고 성을 내고 하는, 바로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도 잡히지 아니하면서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듣고, 온갖 일을 하는 그 신기하고도 묘한 대관절 그놈, 그놈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여.

 

자기가 자기 밖에 모든 것을 땅속으로부터 저 하늘나라에 하늘세계까지를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근원, 자기 자신, 참나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이요, 중생이기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생사 속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자기는 바로 우주의 중심점이요, 우주의 근원이라고 아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활구참선법이라 하는 것이여.

 

 

수수께끼 하나를 여러분에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데 많이 먹으면 죽는다. 그런데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없다.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공기다, 물이다' 별별 소리 합니다마는 다 맞지 않는 소리고, 그것은 '나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아무리 먹어봤자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이 먹으면 지가 안 죽고 못 배깁니다.

그런데 그건, 다른 것은 안 먹을라면 안 먹을 수가 있는데 나이는 아무리 안 먹을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떡국을 보지도 않고 되돌아서도 나이는 먹어지는 것입니다.

 

또 수수께끼 하나를 말하겠습니다.

「눈은 희고 배는 둥근 것이 무엇이냐?」

 

'눈은 희어? 눈은 희고... 그래 사람 눈이 희지. 흰창이 희니까. 사람, 배는 둥글어? 아닌데. 사람 눈이 희다고만 할 수가 없고 가운데 검은창이 있어서 그게 안 맞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도저히 분별심으로 따져 갖고는 알게 되아 있지를 않습니다. 이건 수수께끼는 수수께낀데 따질수록에 점점 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눈이 희고 배는 둥근 거... 북극에 가면 흰곰이 있다는데 흰곰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그건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안이 아니고 수수께끼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설파(說破)를 해 드리는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학자(學者)에게, 참선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틀린 것입니다, 일어나기가.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설파를 한다고 한 것은 공안이 아니라 수수께낀데 쪼끔 이상한 수수께끼여. 「눈은 희고 배는 둥근 것이 무엇이냐?」 '하늘에서 내린 눈은 희고, 우리가 먹는 과일 배는 둥글다' 이 말이예요.

이것을 갖다가 눈과 배를 결부(結付)를, 한 몸뚱이에다 붙여놓고 그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동물을 아무리 생각해봤자 알 수가 없거든. '하늘에서 내린 눈은 희고 깎아 먹는 배는 둥글다' 이렇게 볼 때에는 여지없이 이거 들어맞거든.

 

화두를 그런 식으로 '판치생모?' 판치(板齒)와 생모(生毛)를 함께 붙이니까 모르니까, 둘로 띄어 갖고 '그럼 판치가 무엇이냐? 생모가 무엇이냐?'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그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를 따져서 알아맞춘 것이 아니고 '조주가, 조주 스님이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느냐?' 그 조주, 판치생모라고 한 그 뜻을 우리는 참구(參究)를 해야 하는 것이여.

 

그것도 이론을 가지고 따져서 알아맞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그 「어째서」에다가 우리의 의심(疑心)의 눈을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왜? 왜 조주는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생모가 무엇인고'가 아니에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조주가 판치생모라고 한 그 조주의 뜻을 우리는 참구를 해야 하는 거여.

 

참구를 한다고는 하되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이러해서 그랬는가? 저래저래해서 그랬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어째서」에다가 우리의 의심의 눈을 박아야 한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이여. 활구참선을 하는 요령이여.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그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나기는 틀림없이 만났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지어 가야 공부를 다져 나가야 되는 것이여.

 

 

아무리 절에를 다니고, 용화선원을 한번도 법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하더라도 이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올바르게 화두를 들어 나가야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내동 이렇게 공부를 하라고 가르켜 드렸는데, 당신 집에 가서는 낮이나 밤중이나 그 노보살님은 "전강스님, 전강스님" 그렇게 가끔 그렇게 외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며느님이 들어가서 "어머니, 왜 전강스님은 그렇게, 돌아가신 전강스님을 불러싸십니까?"

"송담 스님이 그러는데 이뭣고를 하지 말고 전강스님을 부르라고 했다"

 

"세상에, 나도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법문을 들어봤는데 절대로 그러시지 않았는데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네가 잘못 들었다.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전강스님을 그렇게 부르라고 그러더라"

 

아, 그런다고 하루는 그 병환으로 잘 보행을 못하시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절에를 나오셔서 딱 앉혀놓고 '정말 그 전강스님을 부르라고 하셨습니까?' 나한테 그거 따지러 왔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잘 납득을 해 드렸는데 그 뒤로 가서 정말 '이뭣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셔서 돌아가실 때 편안하게 마지막 숨이 딸그닥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하면서 딱! 숨을 거두셨다 그말입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환생을 하셨을 줄 생각을 합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셨거나 다시 이 사바세계가 인연이 있었으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셔서 지금 어느 곳에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 틀림이 없고,

철이 나서 또 불문(佛門)으로 와서 용화선원으로 또 법문을 들으러 오셔서 금생에는 일찌감치 혹 그분이 출가를 하셔서 스님이 될는지도 모르고 또는 청신사(淸信士)나 청신녀(淸信女)가 될 줄 모릅니다마는 일찌감치 이 정법(正法)에 들어와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될 것을 나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깨닫는 법'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불법에는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이 있습니다.

권법이라 하는 것은 방편법(方便法)이라 이말이여. 방편법. 실법은 실다운 법이여. 불법에 참으로 여실(如實)히 그 실다웁게 설하신 법이에요.

 

이 권법, 방편법은 중생 근기(根機)가 미약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실상(實相)을 설해 가지고는 이해를 못하고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물러서 버리고, 헐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방편법을 설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재미를 붙이고 허겄게 맨들게 하기 위해서 이 방편법을 설하신 것이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편이라 하는 것은 일정 기간 동안 필요한 것이고, 일정 기간에 그 목적을 달성하면 바로 그 방편은 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을 건너는데 배를 타야 하는데 강을 건너고서는 그 배를 버리고 저쪽 언덕으로 걸어가야지, 그 배를 가지고 강을 건넌 뒤에도 그 배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놈을 짊어지고 끌고 육지로 돌아다닌다면 그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염불이라든지, 주력이라든지, 경을 읽는 거라든지, 무슨 무슨 십재(十齋) 재일(齋日)을 지킨다든지, 무슨 방생을 한다든지, 보시를 한다든지, 오후불식(午後不食) · 일종(一種)을 한다, 이런 것이 다 방편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방편은 그렇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꼭 필요한 것이고, 그 방편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진취를 가져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 지장보살 부르신 분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이나 또는 무슨 그밖에 주력이나 또는 기도를 하신 분도 있고, 그밖에 무슨 좋은 선행을 닦으신 분도 많으실 줄 압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다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을 하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집착을 해서는 아니 되겠다.

집착을 한 사람은 마치 배를 짊어지고 돌아다니고 그 무거운 배를 끌고 다니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을 집착을 하지를 말고 한 단계를 넘어섰으면 빨리 이 실법 · 정법 ·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 '이뭣고?' 이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뭣고?'한 사람은 선행도 하지를 말고 일종도 하지를 말고 또는 무슨 불공(佛供)도 드리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라 하냐, 그러면 그게 아닙니다.

상(相)이 없이, 집착함이 없이 온갖 선법(善法)을 다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닦으면서 거기에 집착이 없어야 하고, 집착 없는 가운데에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옳게 믿고 옳게 실천하는 것이라, 반드시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복과 지혜를 동시에 닦아 가는 것입니다. 복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 그래야만 복과 지혜를 함께 구족(具足)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의불(歸依佛) 양족존(兩足尊), 두 가지가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그 두 가지가 구족하다 하는 것은 바로 그 복(福)과 지혜(智慧), 두 가지가 구족하신 어른이 부처님이시에요.

 

참선 한답시고 보시도 안 하고, 참선 한답시고 선행도 하지 아니하고, 참선 한답시고 일체 선법을 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선을 하되 일체 선법을 닦음이 없이 닦아라. 상(相)이 없이 닦아라.

참선을 할수록에 오히려 그러한 것을 집착 없는 마음으로 더욱 행해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행해라 이것이여.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일을 끊임없이 행할 때 우리는 복과 지혜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법은 무궁무진해서 높기로 말하면 하늘보다도 더 높고, 깊기로 말하면 바다보다도 더 깊어서 말로써는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높고 깊고 크고 위대한 불법인데, 우리가 그것을 체달(體達)을 하고 확철대오 하는 길은 지극히 간단하고 극히 가까운 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그놈, '대관절 이 듣고 있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 그것을 참구하는 거여. '이뭣고?'

 

가장 자기에게 친한 것이 부모냐 하면 부모보다도 더 친한 것이 있어. 그것이 바로 자기여.

자기를 끌고 다니는 이 나, 참나, 나의 주인공 그것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거든. 그것을 찾는 것이여.

 

먼 데 있는 것을 찾는 것이, 경책(經冊)도 오히려 멉니다. 경책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자기 몸과 따로 떨어져 있거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지금 듣고 있는 놈, 이 말하고 있는 놈, 이놈. 성이 날 때는 그 성내는 놈, 슬퍼할 때는 그 슬퍼하는 놈. 자기와 잠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아. 언제나 자기와 더불어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그놈을 찾는 거여.

사실은 그것이 찾는다고 하면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에요. 언제나 있는데 무얼 찾어? 찾기는.

 

그런데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찾다가 잃어버리는 거여.

그러나 찾아야 되어요.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다가 바로 그놈을 깨달라야 되는 거여. 그놈을 봐야 되는 거여.

 

이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을 관하는, 내가 나의 마음을 찾는 이 한 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법을 다 그 가운데 다 갖추게 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 하나를 하게 되면 계율은 제절로 지켜질 것이여. '이뭣고?'한 사람이 무슨 사람을 죽이며, '이뭣고?'한 사람이 무슨 남의 물건을 훔칠 까닭이 있으며, '이뭣고?'한 사람이 무슨 거짓말을 하며, 무슨 죄를 지을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뭣고?'를 한 사람은 제절로 계율을 지키게 되고, 제절로 일체 선법을 닦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것을 가르켜서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이뭣고?'

과거에 지은 죄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다하더라도 '이뭣고?' 앞에에는 봄눈처럼 녹아지는 것이여. '이뭣고?'를 한 사람은 새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여.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그 죄에 물들지 아니한 법이 바로 '이뭣고?'요.

 

중생은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답시고 한 것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이여. 업(業)을 짓고 있는 것이여.

그런데 '이뭣고?'를 한 사람은 죄 속에서 죄에 물들지 아니하고, 죄 속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고, 그러한 묘법(妙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이여. '이뭣고?'(52분22초~1시간13분4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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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公案) ; 화두(話頭),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가자(假藉 임시·일시/깔다·빌리다 자) ; 임시로 빌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형단(形段 모양 형/구분 단) ; ①형태. 형태로 나타나서 보이는 것. ②모양. 외양.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 자기 본분의 소식, 궁극적인 진실을 가리키는 선종의 화두이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미생면목(父母未生面目)이라고도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달마(達摩) : [범] Bodhidharma (? – 536) 남인도의 향지왕(香至王)의 세째 아들로서 출가하여 반야다라 존자(般若多羅尊者)의 법을 받았다。본국에서 오래 교화하다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대통(大通) 1년(527)에 배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닿았다.

금릉(金陵)에 이르자 무제가 묻기를 『짐이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중을 득도시키기를 한정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작은 복이며 유루(有漏) 공덕이 될 뿐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두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有爲) 일로써 구할 수가 없는 것이요』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 가는 도리(聖諦第一義)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짐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읍니다(不識)』 무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푸대접하였다.

 

대사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석굴에서 구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있었다。혜가(慧可)가 와서 지성으로 법을 물었다。『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편안하게 하여 줄 터이니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에 혜가는 깨쳤다.

 

그 뒤에 세상 인연이 오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서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도부(道副)는 『문자에 국집할 것도 없고 문자를 버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는 말하기를 『제가 본 바로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한 번 보고(阿難見阿閦佛國)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은 『오온(五蘊)이 본래 비었으므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읍니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는 다만 나와서 절하고 제자리에 물러가 섰다.

이에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하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아래와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혜가에게 주었다.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질 뿐, 한 꽃이 피어 다섯 잎 벌어지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리(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세 번이나 모시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예물만은 부득이 받았다。그러나 광통율사(光統律師) 같은 이들은 그를 시기하여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지마는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 번째는 그대로 두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오다가, 총령(葱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 벗고,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 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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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흰창 ; '흰자위(눈알의 흰 부분)'의 사투리.

*검은창 ; '검은자위(눈알의 검은 부분)'의 사투리.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사구선(死句禪) ; 사구참선(死句參禪).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병근(病根 병 병/뿌리 근) ; 병(病)이 생겨난 뿌리[根], 근본적(根本的)인 원인.

*결부(結付 맺을·묶을 결/붙일·의지할 부) ; 일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연관시켜[結] 붙임[付].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권법(權法) ; 권교(權敎). 임시로 대승의 가르침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부처님이 설한 임시 가르침. 사람의 근기와 소질에 맞게 임시로 설하신 가르침. 임시 가르침. 실교(實敎)의 반대. 진실의 가르침에 이르면 버려야 함. 궁극의 취지에서는 ‘권실불이(權實不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는 하나라고 본다.

*실법(實法) ; ①진여(眞如). 진실의 모습. 변화가 없는 것. ②실교(實敎). 진실의 가르침.

*여실(如實)히 ; 사실과 꼭 같게.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십재(十齋) 재일(齋日) ; 십재일(十齋日). 매월 초하루 · 8 · 14 ·15 · 18 · 23 · 24 · 28 · 29 · 30일의 10일은 불보살의 명호를 지니고, 심신을 조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고, 스스로 행위를 반성하며 8재계(八齋戒)를 지키며 선한 일을 행하여 복을 빌고 죄를 소멸한다. 십재(十齋)라고도 한다.

*팔재계(八齋戒) ; 재가(在家)의 신도가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고 육재일(六齋日), 곧 음력 매월 8 · 14 · 15 · 23 · 29 · 30일에 하루 낮 하룻밤 동안 지키는 8가지 계율.

①이살생(離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음.

②이불여취(離不與取).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음.

③이비범행(離非梵行). 청정하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음.

④이허광어(離虛誑語). 헛된 말을 하지 않음.

⑤이음제주(離飮諸酒). 모든 술을 마시지 않음.

⑥이면좌고광엄려상좌(離眠坐高廣嚴麗牀座). 높고 넓고 화려한 평상에 앉지 않음.

⑦이도식향만이무가관청(離塗飾香鬘離舞歌觀聽). 향유(香油)를 바르거나 머리를 꾸미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음.

⑧이식비시식(離食非時食). 비시식(非時食 : 정오를 지나서 먹는 것)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오전중에만 식사하는 것.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상(相)이 없이' ; 무주상(無住相).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선법(善法, 산스크리트어: kuśalā dharmāh, 팔리어: kusala dhamma) ; 선법(착한 법)은 '선한 교법'의 줄임말로, 5계(五戒) · 10선(十善) · 3혜(三慧) · 4혜(四慧) · 4성제(四聖諦) · 3학(三學) · 5온설(五蘊說) · 12연기설(十二緣起說) · 8정도(八正道) · 37도품(三十七道品) · 6바라밀(六波羅蜜) 등 이치에 맞고, 자신과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 법(法), 즉 도리와 방편, 즉 가르침 또는 선한 행위와 수행법을 말한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자리이타(自利利他) ;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법이야말로 이것이 바로 대승법이요,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거와 같고, 수레에 두 수레바퀴가 있는 거와 같아서, 새가 날개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하나만 가지고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이 세등선원을 짓는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 짓는 것이요,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여러 신남신녀가 시주(施主)를 하고 화주(化主)를 하는 것도 이것 또한 자리이타를 하는 것이여.

 

부처님 출현하신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있어서야 원래 생사 없는 본각(本覺)자리에 계시는데 무엇이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가지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이다.

 

한 글자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을 설하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다.

한 글귀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역대 조사(祖師)가 많은 어록(語錄)을 남기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한 자비심에서 나오신 소식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순정리론』 권32(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 권60(대정장11, p.346c3)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참고] 『선문촬요(禪門撮要)』 (경허선사 編) ‘달마대사 관심론(達摩大師觀心論)’에서.

慧可問曰  若有人 志求佛道 當修何法 最爲省要 師答曰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問曰 云何一法 摠攝諸行

師答曰 心者 萬法之根本也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俱備 猶如大樹 所有枝條 及諸花菓 皆悉因根 栽樹者 存根而始生 伐樹者 去根而必死

若了心修道則 省功而易成 若不了心而修道 乃費功而無益 故知一切善惡 皆由自心 心外別求 終無是處

 

혜가(慧可)가 여쭈었다. “불도(佛道)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겠습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였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나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어찌하여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고 하십니까?”

“마음이란 온갖 법의 근본이요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 갖추게 된다. 이를테면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 뿌리로 말미암아 있으니, 나무를 가꾸려면 뿌리를 북돋우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베려면 뿌리를 없애야 반드시 죽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을 알아서 도를 닦으면 노력은 적게 들어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만약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모든 선과 악은 다 자기 마음에서 생겼으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끝내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