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정진(요중선)'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21.11.18 §((212))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금강보검의천한~.
  2. 2021.08.23 §((151)) 무상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 / 참선은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3. 2021.06.04 §((330)) 「부처님 오신 날」,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 (게송)불원공명단원산~ /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다.
  4. 2021.05.21 §((242))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훈도 / 자녀교육 / 포교 / ‘이뭣고?’ 화두드는 법 / 참선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5. 2021.05.10 §((252)) 기도와 정진이 궁극에는 하나 / 일 속에서 참선하라 / 자기 생사 문제가 본업(本業)이고, 그밖에 일은 전부 빚 갚는 일 / (게송)본자허명절점하~.
  6. 2021.04.28 §((117)) 우리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 / 참선을 통해서 참나를 깨달은 것만이 오직 영원한 것 / 인과(因果) / 무량겁, 자기 운명은 지금 한 생각이 중대한 원인.
  7. 2021.04.04 §((244)) (게송)위타위기수미선~ / 무주상(無住相)으로 영원한 무루복(無漏福)의 과보 / 수행은 '있는 그 자리에서' / 수행은 당인(當人)의 마음에 달려 있다.
  8. 2021.01.24 §((596)) (게송)행년홀홀급여류~ / 정말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야 / 정치는 보살심(菩薩心)으로 해야 / 무쟁삼매(無諍三昧) / 놓는 공부가 '이 뭣고?'여.
  9. 2020.12.17 §((155))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선법, 불법(佛法) / (게송)승시승혜속시속~ / 각자 주어진 책임 가운데에서 공부가 되야.
  10. 2020.11.25 §(175) (게송)본시산중인~ /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참선 / (게송)죽영소계진부동~ / 해탈해야 할 생사도 원래 없는 것.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11. 18. 14:09

§((212))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금강보검의천한~.

**송담스님(No.212)—1983년 9월 첫째 일요법회(83.09.04) (용212) (생활속 정진)

 

약22분.


불법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아 가느냐?' 거기에서 불법이 융성해지는 것이지 어떠한 사회적인 조직으로 인해서 불법의 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한 종단 체제가 바로 잡아져서 안정이 되어야 그 종단 산하에 귀의한 신도들도 마음이 잡혀서 가정이라던지 사회에 옳게 생활을 해 나가시고 일을 해 나가실 것이고, 우리 출가한 스님네들도 마음이 놓여서 정진을 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단 문제는 여러분들이 신문을 통해서 알고 계신 분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마는 뭐라고 여러분 앞에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 종단의 이러한 가끔 일어나는 여러 사태에 관해서 염려를 하는 신도분이 계셔서, “대관절 출가한 스님네들이 어째서 도만을 열심히 닦고 청정한 마음으로 해 나가면 종단도 그러한 스님네들이 나와서 잘해 나가면 종단도 잘되고 참 다른 많은 사람들도 불법에 대해서 신심을 내서 많이 귀의를 하게 되고 그럴 텐데, 꺼떡허면 종단이 시끄럽고 모다 그래 가지고 어디다가 내가 불교신자라고 얼굴을 내놓기가 참 창피한 때가 많다. 대관절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 신도들은 처자권속이 있고 모다 가정이 있고 해서 돈이나 권리가 없으면 도저히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번연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악착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을 벌라고 애를 쓰고, 심지어는 부정도 하고 자칫 잘못하다가 들키면은 징역도 살 만한 그러한 일도 가정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스님네야 살아서 무슨 상투가 있나, 죽으니 뭐 자식이 있나, 아내가 있나, 무엇이 걱정이 있어서, 그저 한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두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그뿐인데 왜 그렇게 시끄럽게 그래 쌓습니까?”
아주 내 앞에 와서 탁! 까놓고 공격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참 나도 승려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공격을 나도 받어야 하고, 참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으나 내가 가만히 그 문제를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나대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그래서 "나는 그 종단에 나와서 일하는 모다 스님네들은 어느 모로 보던지 다 똑똑하고 다 훌륭한 스님네들인데, 그렇게 서로 싸움을 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하면 모든 불자와 모든 국민으로부터 참 많은 욕을 얻어먹을 줄 빤히 알면서 그렇게 분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그분네들이 그 불보살 화현(化現)이 나타나 가지고 일부러 그러시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든 종교가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처음 천 년간은 계속해서 발전을 해 나가고 번영을 해 나가다가 그다음 천 년간은 평행을 이루고, 그다음 천 년간은 차츰차츰 쇠퇴해 가는 기간이다. 그런데 특히 불교는 지금 3천 년이 되었으니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는 벌써 2천 년 지내면서부터 차츰차츰 쇠(衰)해 가지고 벌써 3천 년이 되었으니, 고목나무 가운데에도 아주 속이 참 완전히 썩어서 꽃도 잘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기 어려운 그러한 아주 극도로 썩은 그런 고목나무와 같은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고대로 놔두고는 새싹이 돋아날래야 돋아날 수가 없어.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빨리 쓰러뜨려 버려야 그 밑에서 새싹이 나 가지고 그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 가지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을 게 아니냐. 그래서 지금 종단에 나와서 일을 보시는 스님네들이 참 욕 얻어먹을 것을 각오하고 또 심지어는 지옥에 들어갈 것도 각오를 하고, 그 고목나무를 비어서 쓰러뜨려 버리고 새싹을 기르기 위해서 나오신 불보살의 화현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분네들도 참 피땀을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못 자고 고생을 하고, 심지어는 때로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참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이 아마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과연 그 말을 들으니까 그럴싸하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마는, 내일이면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가지고 새로운 길을 모색을 한다고 승려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통지가 왔습니다.

우리 사부대중은 하루빨리 종단이 바로잡아지고, 정말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목숨바치는 그러한 실답고 참다운 수행자, 출가승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하신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종단은 반드시 또 바로잡아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일신(一身)에 관해서도 첫째나 둘째, 셋째 부인보단 넷째 부인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아야겠고 또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인류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우리 종단을 위해서도 그러한 마음가짐과 그러한 풍토가 이루어져야만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신 바와 같이 칼(KAL)기가 그렇게 참 소련의 그런 무도한 폭격으로 인해서 269명이라고 하는 아까운 생명이 죽어갔고, 또 이러한 분개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하느냐? 우리는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슬픔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조 때부터 내려오면서 계속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궁중에서 왕가에서는 서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와 숙질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밑에 모다 벼슬아치나 선배들은 모다 노론, 소론이다 해 가지고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그래 가지고 불교는 갖다가 탄압을 하고, 이리 내려오다가 결국은 경술년에 왜놈한테 나라를 빼앗기고 그래 가지고 왜정 36년간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는 핍박을 당하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마는 38선이 갈라져 가지고 계속 오늘날까지 참 내려오면서, 많이 우리나라가 좋아졌습니다.
옛날에는 보릿고개라 해서 참 수없이 많은 사람이 굶주림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그러다가 차츰차츰 우리나라는 다 먹고살 만하게 되었고 또 국위도 많이 선양이 되었고, 참 옛날에다 비교하면 참 말로 할 수 없이 참 잘살게 되었으나, 그래도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힘이 약해서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참 분통 터질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니 만큼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일치단결해서 각기 자기 맡은 바 소임을 완수를 하고 더욱 나라를 갖다가 부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일에 충실을 하고 그것을 뿌리로 해 가지고 모든 사업도 해야 하고 각기 학생은 학생대로, 또 학자는 학자대로, 실업가는 실업가대로 또 각기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밖에 일은 아무리 그것이 소중하다 해도 줄기요, 가지요, 잎이기 때문에 그 잎과 가지와 줄기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면은 뿌리가 제대로 박혀야 하고, 뿌리가 충분한 영양과 수분과 좋은 토양 속에 묻혀야만 거기에서 좋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행복하고, 한 가정이 평화롭고, 한 나라가 부강하고 나아가서 인류의 평화를 유지할라면 그 뿌리인, 근본인 각자의 자성(自性)을 바로잡아 깨달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참 한결같이 다 말씀한 바지만, 특히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법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퍽 살기는 편리하게 되었지마는 이렇게 살벌(殺伐)해 가고, 나라와 나라끼리 이렇게 참 못 할 짓을 하고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성현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뿌리를 북돋은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해 온 까닭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신 바와 같이 대학, 세계 각국의 모든 교육이 오직 그 잎이나 가지를 갖다가 충실히 하는 그런 지엽적인 과학기술 교육에 치중을 해 왔을뿐 뿌리를 북돋은, 우리의 자성을 깨닫는 그러한 교육은 거의 무시를 해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첫째 둘째 셋째 부인만 애끼고, 그리고 제일 그 배신(背信)을 해 버리고 말 첫째나 둘째한테만 빠져 가지고 넷째 부인—진정 애끼고 사랑해야 할 넷째 부인에 대해서 괄세를 하고 냉대를 한 그 죄과로써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까딱 잘못해서 미국이나 소련 같은 데서 핵무기라던지 레이저 광선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참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이 세계 인류는 다 같은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시체로 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 없는 도리'가 내게 있으므로 내게 있는 그 생사 없는 도리만 본다면 백 번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단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최상승법에 목숨 바쳐서 철저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하면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가
나무~아미타불~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금강의 보배 칼이 하늘에 의지해서 싸늘한데, 하늘에 금강 보검이 번쩍거리면서 서 있다 그 말이여.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한 번 번쩍 하는 바람에 능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가 두 동강이가 났구나.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한데, 온 세계에 두루 펴져 있는 마군(魔軍)이가 일로 좇아서 전부 함락이 되었는데,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무슨 도깨비가 있어서 그 속을 엿볼 것인가.

여러분에게 있는 보배 칼을 항시 갈고 닦아서 손에서 놓지 아니한다면 어떠한 마군(魔軍)이도 여러분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종단과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매월 일요법회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열리는데, 어린이 법회도 이 지하 아래층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니까 국민학교 학생들 또 유치원 학생들 그런 자녀분이 있으시면 같이 데리고 오셔서 그 일요법회에 참석을 해 가지고 불교의 좋은 노래도 배우고 또 재미있는 불교의 설화도 듣고 이렇게 해서 어릴 때부터서 불교의 씨를 심어주면 차츰 커가면서 훌륭한 불자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39분36초~60분58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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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8. 23. 08:29

§((151))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 / 핑계 대는 것은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 / 사바세계는 원래가 믿지 못할 곳.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 무상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지혜(智慧) 있는 사람'.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 참선법은 날마다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생활속 정진-요중선)

 

 

약 18분.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짓어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 최상승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법이여.
'저는 참선을 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녹음 끊김) 뭣헌 사람은 "공부를 하면 뭣이 흰옷 입은 것이 휙 지내가고 무슨.. 뭣이 부처님이 나와서 뭣을 주어서 받으려고 하니까 없어져 버리고 그랬다"고. 아주 자기가 공부를 잘한 것처럼 또 "부처님이 뭣을 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시원하니 아주 배창시까지 아주 얼음을 먹은 거 같이 그렇게 시원하고 좋더라"고, "이거 내가 도통한 거 아니냐"
그 말을 앉은 자리마다 이 새로 들어온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자기는 아주 공부를 잘한 것처럼 으시대고 "이 소리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가지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뭣이, 뭐이 나와 가지고 무슨 뭘 줄까 하고, 밤낮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쳐도 아무도 안 준다"고,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
"아니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냐?" 헌께 "자기가 그랬단 말 하지 말라고 하드라"고.

세상에 그분이 퍽 점잖은 분이고, 불교를 아주—소시(少時) 때부터 과부가 되어 가지고, 소시 때부터 삼사십 년간을 참선을 한 분인데, 세상에 그러한 요물 같은, 요사스런 삿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 틈틈이 경을 읽어 가지고 설법을, 뭐 부처님 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몰라.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 딱! 입이 붙어버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여. 무슨 부처님이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그런 것이 아녀.
혹 참선을 하다 보면 혼침(昏沈)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뭣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리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이 까빡할 동안에 헛것이 보인 것이지, 어찌 그것이 견성(見性)이요 도통(道通)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런 것은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고, '하아, 내가 이거 도통하려고 이런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여.

참선은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을 성성하다 그런 거여.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하는 거여. '적적(寂寂)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한 가운데에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의단(疑團)이, 의심(疑心)이 산을 봐도 '이뭣고?'
구름을 봐도 '이뭣고?'
흘러가는 강물을 봐도 '이뭣고?'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과부가 외아들이 저 타관(他官)에 가서 온다고 하는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고—한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두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일 년이 되어도 일자(一字) 서신(書信) 한마디 없이 소식 없을 때,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먼 산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날아가는 새를 봐도 아들 생각,
떡을 봐도 아들 생각,
밥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어떤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자나깨나 아들 생각하듯이 '이뭣고?' 자나깨나 '이뭣고?' (33분11초~50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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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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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30))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 안내 / 「부처님 오신 날」,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 / (게송)불원공명단원산~ /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다.

**송담스님(No.330)—1987년 5월 첫째일요법회(87.05.03) (용330) (생활속 정진,요중선)

 

 

약 12분.

 


내일모레는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사월초파일.
이 법당에도 등(燈)이 가득 달려 있고, 법당 밖에도 달려 있고, 「부처님 오신 날」이 국경일로 이렇게 지정이 된 뒤로는 도회지나 산간이나 방방곡곡에 이 초파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등(燈)이 모다 매달리고, 사람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진리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업장(業障)을 소멸을 해서 새로운 진리의 부처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파일에 어쨌든지 모두모두 식구들이 다 손을 잡고 나오시고, 또 일가친척 가족들 또 모두모두 권고해서 다 부처님 앞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법문도 듣고, 부처님의 탄생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자기의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앞길을 축복받는 일이 되고, 그럼으로써 진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태자로 탄생을 하셨는데 바로 그날이 내일모레 다가오는데, 그날 막연하게 등불만을 켜고 복을 빌고, 그것도 참 소박한 의미에서 참 소박한 한 신앙으로 참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자신도 내일모레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그날을 맞이하는 것이 참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부처님이나 다름없는 구원겁(久遠劫) 전에 다 성불(成佛)한 그런 법신(法身)인 것입니다마는, 까닭없이 우리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떠한 원인으로 해서 그냥 무명(無明)으로 덮여 가지고 그냥 이렇게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렇게 참 범부(凡夫)로서 이렇게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내일모레를 기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 오신 날」을 욕불일(浴佛日)이라 그럽니다. 목욕, 목욕탕 이래서 '목욕 욕(浴)' 자, '부처 불(佛)' 자,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날이다' 그래서 욕불일이라 그러는데.
‘부처님이 탄생을 하셔서 그날 그 아홉 용(龍)이 입으로 물을 이렇게 청정한 물을 토해 가지고 목욕을 시켰다’ 인자 그렇게 설화적으로 전해 내려옵니다마는.

‘부처님이 태어나 가지고 목욕하신 날이다’ 해서 철불(鐵佛)을—쇠로 조성한 불상(佛像)을 따악 갖다가 안치해 놓고, 전 대중이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바가지로 물을 퍼 가지고 부처님께 물을 퍼 붓는 그런 행사도 옛날에는 거행했고, 지금도 또 거행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그런 행사를 안 갖습니다마는.

그 부처님께 물을 요렇게 부어서 목욕을 시켜드리는 그 행사가 부처님이 태어난 그것을 우리의 마음속에 확실히 이렇게 새겨서, 그 부처님이 바로 자기와 동일시(同一視)를 해서 자기의 몸에 자기가 그날, 부처님 탄생한 날 자기도 새로 태어나서 그 부처님 목욕시킨 그 물로 자기의 몸에 물을 부어서 목욕을 함으로써,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부처가 될 것을 마음에 다지는 그러한 뜻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철불(鐵佛)에다가 물을 붓는 행사는 안 갖지마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과 또 산승(山僧)의 말을 들음으로 해서 눈에 보이는 물로 목욕을 한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법수(法水)로써 목욕을 해 가지고, 업장을 소멸하고 청정한 몸과 청정한 마음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기약을 하는 그러한 의미로 초파일에 모두 등(燈)도 모다 잘 다시고 또 법문도 들으시고 그래서 초파일에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하고  산중채약기년간(山中採藥幾年間)고
나무~아미타불~
심심송뢰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 세속의 공명, 부귀공명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산을 원해서,
산중(山中)에 채약기년간(採藥幾年間)고, 그 산중에서 약을 캐기 그 몇 년이나 되었던가?

심심송뢰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깊고 깊은 그 솔바람 부는 안개가 자욱한 그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한 곡 지초(芝草) 캐는 이 노래에 일만 경계가 한가롭구나.

이건 산중에 들어가서 처사(處士)가 되어 가지고 그 온갖 약초를 캐면서 그 약초를 캐서 달여 먹고, 약초를 캐 가지고 연명(延命)해 나가는 이런 약초를 캐면서 지초 캐는 노래를 갖다가 부르면서 그 한가한 거동을 읊은 시입니다.

세속이 이렇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흥망성쇠와 빈부귀천 모다 이런 것을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 대세가 전부 그 원인을 따져보면 탐진치, 탐진치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싸움이고 전쟁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데에서 턱 벗어나 가지고 정법에 귀의(歸依)해서 도를 닦는 것, 그것을 갖다가 산중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는 데에다가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으면 비록 세속(世俗)에서 살아도 그 세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또 형제 간에 우애하고, 이웃지간에 화목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그러고 모든 사람을 상대할 때 사랑으로써 상대하고,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생활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할라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안 되어도 세속에 살아도 바로 그것이 산중에서 도를 닦은 거와 마찬가지고, 그냥 세속에서 살아도 그 솔바람 부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시냇물 가에서 약초를 캐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그것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1시간3분59초~1시간15분33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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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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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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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5. 21. 10:12

§((242))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하신 엄숙한 훈도(발 씻은 물과 대야) / 자녀 교육 / 불교의 포교 / ‘이뭣고?’ 화두 드는 법 /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여러 가지 수행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42)—1984년 7월 첫째일요법회(84.07.01) (용242) (생활 속 정진 요중선)

 

 

(1/3) 약 20분.

 

(2/3) 약 20분.

 

(3/3) 약 20분.

 


(1/3)------------------

오늘 갑자년 7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했는데, 본격적으로 여름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등어리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너무 더워서 머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에 숨이 막힐듯 이 더위에도 불구하시고 사부대중이 이렇게 법당을 가득 메우셨는데, 지금 이렇게 더운 것을 참고 견디면서 여기에서 참 마음자리를 찾는 법문을 듣고 마음을 닦지 아니하면, 참으로 그 펄펄 끓는 화탕 노탕(火湯爐湯)지옥, 무간 아비(無間阿鼻)지옥에 들어가서 고(苦)를 받을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편하기를 바라고 시원하게 지내는 재미로 이 더위를 꺼려서 법회에 참석도 하지 아니하고, 더웁다고 선방에 방부도 들이지 아니하고, 서늘한 것만 찾고 냉동이 갖추어진 그런 데서 밤낮 얼음물이나 마시면서 시원하게 낮잠이나 자고 그렇게 지내다가,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어느 곳으로 끌려갈 것이냐 이 말씀이여.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다가 아무도 나를 위해서 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계(三界)에 대성인이시고 사생(四生)에 자부(慈父)이시지만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깨닫는 방법, 길은 일러주실 수 있지마는 내 대신 깨달라 주실 수도 없고, 내가 하지 아니하면 나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선성(善星) 비구는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수십 년을 모시고 살았지만,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했습니다. 바른 사상으로 바르게 불법을 믿고 바르게 닦지 아니하면, 설사 부처님을 평생을 모시고 산다 해도 삿된 소견을 가지고 바르게 닦지 아니했기 때문에 생함지옥을 한 것입니다.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부처님께는 나후라(羅睺羅)라고 하는 아드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 나후라존자가—'나후라(Rāhula 라훌라)' 라는 말은 ‘속박이다’ 그 말이여. 구속 · 속박 · 얽매임 이런 뜻인데,
나후라가 탄생을 하니까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 백성들이 축하 경축을 하고 야단이었었는데, 부처님 그 실달 태자(悉達太子)는 “아! 나후라가 태어났구나. 나를 출가하는 것을 구속하는, 막는 그러한 존재가 태어났구나” 이런 뜻에서 '나후라' 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경전에는 부처님이 출가하신 뒤에 나후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 데도 있습니다.
그 나후라가 야수다라(耶輸陀羅)—부처님 실달 태자의 태자비(太子妃) 야수다라가 그 나후라를 배 가지고 6년 동안을 해산(解産)을 못하고 6년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 저녁에 나후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 데도 있습니다.

어째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 뱃속에 포태(胞胎)가 되면 열 달 만에 태어나는데, 왜 나후라존자는 6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 동안을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었냐?
여러분이 들을 때에는 신화처럼 전설처럼 그렇게 들리시겠지만, 그렇게 전해 내려오니까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이여.
옛날에 그 나후라존자가 저 전생에 어느 나라 국왕으로 있을 때에 벽지불(辟支佛), 독각(獨覺)이 있었는데, 그 독각이 성중(城中)으로 들어와서 걸식(乞食)을 할려고 그러는데, 그것을 성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막으니까, 7일 동안을 들어오지를 못하고 산중에 딱 갇혀서 7일 동안을 굶게 했던 것입니다.
그 7일 동안을 독각 수행자로 하여금 산중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게 굶게 한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그 남은 과보(果報)로 해서 7년 동안을 태중에 갇혀 있었다. 이렇게 인과론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7일 동안을 걸식을 못하게 성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가지고, 7일 동안을 그 독각으로 하여금 굶게 한 그 인연으로 7년 간을 모태 중에 있어서 나오지 못했다 이것입니다.
이조 때에도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탄압한 나머지 승려들로 하여금 서울 장안에는 사대문(四大門) 안에는 들어오지를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조 말엽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 가지고, 겨우 승려들도 어렵게—몇백 년 간을 서울 장안을 못 들어오다가—겨우 장안에 들어갔던 그러한 참 비참한 역사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하신 엄숙한 훈도.

그 나후라존자가 15세에 출가를 했는데, 이 세상에 7년 만에 태어날 때에는 그 부처님이 성도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고 또 출가하기는 15살 때 출가를 했다.
어떻게 출가를 했냐 하면 부처님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셔 가지고 그 고향으로 돌아가셨는데, 고향으로 가시니까 그 부처님의 부인이셨던 야수다라 부인이 누각에서 떠억 보니까, ‘부처님이 성불을 해 가지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왕궁에 돌아오신다’는 기별을 듣고서 다락에 올라가서 이렇게 보니까, 참 거룩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떠억 성중으로 들어오신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나후라로 하여금 “저기, 저 맨 앞에 오시는 저 거룩한 어른이 너의 아버님이시다. 가서 인사를 여쭙고 ‘아버지, 저에게 유산(遺産)을 주십시오’ 하고 가서 인사를 해라” 하고 시켰습니다.
나후라존자는 그때 15살인데, 어머니 말 대로 내려가서 부처님께 인사를 하고 “아버지, 저에게 유산을 주십시오” 이랬겠다.
“오냐, 내가 유산을 줄테니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 가지고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머리를 착 깎아서 중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들어서 부처님의 왼팔인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 사리불에게 맡겨서 사리불을 스승, 은사를 삼고 사리불의 상좌(上佐)를 삼아 가지고 사리불로 하여금 교육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이지만 아무 철이 안 들고, 왕궁에서 참 귀여움만 받고 그래 가지고 도무지 버릇이 하나도 없고, 아버지가 모든 스님들의 스승이시고 모든 중생들의 존경 받는 그런 위대한 존재라 하는 것을 떠억 코에다 걸고서 말을 도무지 듣지를 않고, 무엇이던지 제멋대로—스승 말도 잘 안 듣고 남 말도 안 듣고,
누가 찾아와서 “부처님 어디 계시냐?” 하고 여쭤보면은 지금 계셔도, “어디 먼 데 가시고 안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고, 또 안 계셔도 “저 어디 가보라고, 지금 저기 계신다”고 해 가지고 늘상 사람들을 거짓말을 해 가지고 골탕을 먹이는 것을 아주 일쑤로 하고 그래서 대단히 말썽을 부리고 그랬었는데.

부처님께서 같이 데리고 있기보단 저 다른 산중으로 떼어 보내 가지고 거기서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 싶어서 그리 보냈는데, 별로 큰 효과가 없고 들려오는 소문에는 대단히 염려가 되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하루는 그 나후라존자가 있는 데를 찾아가셨어.
찾아가니까 나후라존자가 아버지가 오셨다고 반겨 하면서 의자를 내놓으면서 앉으시라고. 앉으신 다음에 부처님께서 “대야에다가 발을 씻게 물을 좀 떠 오너라”
물을 떠 오니까 “네가 내 발을 좀 씻겨라” 그러니까 나후라존자가 아주 신나게 발을 다 씻겨 드렸습니다.

다 씻고 난 다음에 “너 그 물을 먹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더러운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물이 아니면 살 수가 없지마는,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은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네가 출가해서 사문(沙門)이 되었지마는 말을 함부로 하고, 행동을 함부로 하고, 지켜야 할 계율을 지키지 않고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하면, 그리고 입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청정한 행을 가지지 아니하면, 마치 이 발 씻은 물과 같이 더러운 것이니라. 그래서 그 물은 버릴 수밖에 없어. 이 물을 갖다 버려라” 하니까 갖다 버리고서 대야를 갖다가 놓으니까, 부처님께서 그 대야를 갖다가 발로 차버렸습니다.

“왜 대야를 발로 차십니까?” 하니까.
“내가 대야를 발로 차니까, 행여나 그 대야가 깨질까봐 염려가 되느냐?” 부처님이 물어보시니까,
“그까짓 뭐 발 씻은 대야 헐하디 헐하고 비싸지도 않은 거, 그거 깨질까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거 봐라. 네가 정반왕(淨飯王)의 손자요, 왕손이요, 나의 제자요, 그렇지만 네가 입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을 진실하게 쓰지 아니하고 그러면, 저 발 씻는 대야처럼 너를 갖다가 사람들이 발길로 차고 내쫓친다 하더라도 아무도 너를 소중히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네가 왕손이요, 나의 제자요, 출가 사문(沙門)이고 한데, 얼마나 네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냐. 그러나 네가 마음으로, 입으로, 말로 출가인답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청정하지 못하면, 아무도 네가 죽는다 해도 너를 애석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는 것이니라” 이렇게 아주 준열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때부터 나후라존자는 그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뼛속 깊이 알아듣고서 그 뒤부터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도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래로 어떻게 묵묵히 말없이 수행을 열심히 했던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고, 마침내는 대성현이 되어서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에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손꼽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필 왜 오늘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나후라존자의 얘기를 하느냐 하면, 요새 날이 갈수록 청소년의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 범죄 사실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고, 그 범죄가 나날이 심해 가고 있고, 때로는 강도도 하고 때로는 사람도 죽이기도 하고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또 횟수가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네들은 학교를 보내나, 항시 그 자녀들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 성현의 아드님이신 나후라존자도 그러한 문제점이 있는 문제아동이었었지만, 부처님 그 지혜롭고 자비롭고 엄숙한 교훈으로써 그 나후라존자를 갖다가 잘 훈도(薰陶)해서 성현이 되도록 한 것을 우리는 거울삼아서 여러분들의 자녀의 교육에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해 나가신다면 자녀 교육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6분10초~26분15초)





(2/3)------------------

자녀 교육.

옛날부터 성현(聖賢)도 자식은 바꾸어서 가르켜야 한다.
공자님도 그 아드님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직접 당신이 가르키시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교육을 하셨고, 부처님도 당신이 직접 가르키시지 아니하고 사리불에게 맡겨서 그 아드님을 교육을 했습니다.

'왜 아무리 그 부모가 훌륭해도 직접 그 자식을 가르킬 수가 없느냐?' 하면, 자식은 정(情)으로 서로 인연이 맺어져서 부모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항시 정이 앞서게 됩니다.
정이 앞서게 되면은 교육은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스승과 제자 간에도 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이라 하는 것은 물러서, 무르면은 법도(法度)를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자기 뜻대로 안되면은 화가 먼저 치밀으고, 그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너무 기대하는 그 마음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삽시간에 미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말이 법도에 벗어난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심하게 매질을 하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부모 자식 간에 정의를 손상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때로는 위험한 지경에까지도 이를 수가 있어서, 자식은 스승에게 맡겨서 가르키는 것을 옛날부터서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시험—고등학교나 대학 입학시험, 그런 문제로 해서 행여나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해 가지고 그저 국민학교 때부터서 공부를 시키고 과외를 시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으는데, 그 자식이 부모가 요구한 만큼 그렇게 성적이 올라가지를 못한 경우가 많아서, 그러면 그럴수록에 그 자식의 교육에 더욱 부모는 신경을 쓰게 되고, 신경을 써서 계속 강압적으로 나가면, 점점점점 정신적인 압박을 느껴 가지고 아주 '공부' 소리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지고 '어떻게 하면 이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시험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래 견디다 못하면은 나가서 나쁜 친구와 사귀기도 하고, 좋지 않은 놀이터에 나가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자칫 잘못되는 수도 있고 그래서 대단히 모다 어려운 문제점이 있읍니다마는.

세상이 온통 서양 풍속이 물밀듯이 들어와 가지고 옛날의 우리나라 전통적인 그러한 윤리관으로서는 요새 자녀들을 다루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서양은 진즉부터 그러한 윤리관으로써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되어가지만, 우리나라는 옛날 전통은 무너져 버렸고, 새로운 윤리관이 정립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래 가지고 그냥 고대로 놔둘 수도 없고, 너무 심하게 단속을 하면 참으로 비뚤어져 버리고 이래서.

더군다나 학교 교육은 우리 한국적인 그런 교육제도가 정립이 되지 못해 있기 때문에, 옛날 왜정(倭政) 때 시키던 그런 교육 방법으로써 계속 시험점수만 따서 대학에 입학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국민학교 때부터서 그런 교육을 시켜왔기 때문에 애들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도 참다운, 자립해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해 나갈 만큼 훌륭한 교육을 받지를 못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모든 것이 또한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자녀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인가?

애들은 옛날의 윤리 그런 것에는 벗어나기를 바래고, 부모는 그대로 놔둘 수는 없고, 이래 가지고 여러 가지 갈등과 애로가 생기는데, 이럴 때에 부모가 감정에 흘른다든지 그것을 수습을 못하면 완전히 자식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자녀들을 입으로 가르키려고 하지 말고, 우선 내 마음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걱정을 하고 때로는 종아리를 치고 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가 화나는 것을 부애풀이하기 위해서 종아리를 때리고 큰소리를 치고 하는 것을 우리는 왕왕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의 부애풀이를 하기 위해서, 자식에게 욕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 종아리를 때리고 하는 한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역시 스승이 제자를 가르키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다룰 때에도 학생이 공부를 안 한다든지, 숙제를 안 해온다든지, 선생님 앞에 불순(不順)한 언동을 한다든지 하면 ‘그 애를 어떻게 지도해야 이 학생을 바로 지도할 것인가? 그 학생을 지도하는 데에 어떠한 지혜가 필요하며 어떠한 방법이 필요한가?’ 여기에 생각이 집중되지를 아니하고,
“감히 저놈이 선생님 앞에, 저런 고얀 놈이 있나?” 당장 흥분을 해 가지고, 자기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귀쌈을 올려대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이래 가지고 그 학생으로 하여금 상처를 입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하는 그러한 예도 우리는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서는 세상없어도 그 스승 밑에 훌륭한 학생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갖다가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혹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든지,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나쁜 친구하고 어울린다든지, 학교의 성적이 나쁘다든지, 학교에 간다고 해 놓고 사실은 다른 나쁜 친구와 놀다가 들어온다든지 반드시 그러한 경우를 만나게 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첫째의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해서, 정말 부처님 마음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써 우선 자기 자신을 수습을 하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저 애를 바로 잡을 수가 있을 것인가? 저 애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그 나후라를 훈도하듯이 그러한 지혜로운 방편을 쓰실 만한 여유를 가진다면 그 아들을 교육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다짜고짜로 뚜들어 패고 책을 찢고 욕지거리를 해서 푹 가출을 해 가지고 소식이 없어진다던지, 나가서 어떤 경우는 물에 빠져 죽어 버린다던지 자살을 해 버린다던지, 이러한 결과를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이것은 다시는 그 천추(千秋)의 한(恨)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킨다던지, 제자를 가르킨다던지 이 교육 문제는 첫째는 자기가 먼저 되어져야 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 노릇 하기가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키는 것은 말로써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로 가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가르킬 수 있는 것은 짐승은 몽둥이로 가르키고 또 먹을 것으로써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을 것과 몽둥이만 갖고는 절대로 교육을 원만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그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믿을 수 있게 해야 하고, 부모를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어떠한 애로 사항이라도 부모님 앞에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평소에 지혜와 자비로써 자녀를 상대를 해 나와야, 그 자녀가 사춘기를 맞이해서 또 어떤 중대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 털어놓고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님 앞에 의논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어려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〇불교의 포교.

넓게 말해서 불교는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외래 종교가 나날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이때에 불교(佛敎)도 포교(布敎) 사업을 잘해야 한다. 포교당을 많이 짓고 어쨌던지 스님들이 산중에만 들어가지 말고 이 도회지로 나와서 발벗고 나서서 포교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고 숭배하도록 해야지, 이대로 나가다간 전부 다 예수교나 기타 종교를 다 믿게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까지도 다른 종교에서 악착같이 끌어갈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쓰기 때문에 불교 신자들도 다 개종을 해버리지 않겠느냐.

이러한 우려를 표명해서, 모다 젊은 스님네들이 너도나도 모다 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다 대학도 가고 공부를 하고 있읍니다마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학문과 달라서 지식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닦는, 내 '참나'를 찾는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경을 해석할 줄 알고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포교의 목적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포교(布敎)는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衆生敎化)인데, 중생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고해(苦海)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을, 그것을 그 고해로부터 건지는 것이 그것이 포교의 목적인데, 자기 스스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건질 수가 있겠나.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풍덩 뛰어들면 그 사람도 건져내지 못하면서 자기까지 빠져 죽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교를 하려면 첫째, 자기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하고,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포교가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자녀 교육도 덮어놓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밥이 없냐, 옷이 없냐, 돈이 없냐. 왜 공부를 하지 아니하느냐! 다른 집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러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 계속 족치고 듣기 싫은 소리만 하고 그래 봤자, 점점 나빠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부모는 가장 근심과 걱정과 슬픔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식은 부모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하고 밤잠을 못 자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보고 '공부하라'고 하는 그 소리만 죽도록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가서 놀고 싶을 때 놀고, 친구하고도 어울리고 싶을 때 어울리고, 어디 또 가고 싶을 때 가도록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부모는 꼼짝 못하게 하고 ‘공부, 공부, 공부해라, 공부해라’ ‘네가 공부만 잘하면 내가 왜 너 보고 공부를 하라고 하겠느냐. 공부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나가서 놀으라고 하지,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그러지 않느냐’
이렇게 입씨름을 하고, 그렇지마는 자식의 귀에는 그런 말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저도 공부를 잘하고 싶고 점수를 백점을 맞고 싶지만, 해도 머리에 안 들어가고 잘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있지만, 어쩐지 공부가 영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고, 마음이 집중이 되지를 않고, 공부만 할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가 빙~하고 하나도 정신 집중력이 생기지를 않고, 공부는 하라고 해싸니, 뭐 환장을 할 지경이다 그 말이여.
좀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운동도 좀 하고 그래 봤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공부 못한다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러니 점점 나쁘게 하고 나중에는 거짓말을 하고 나가게 되고 이래서 점점점점 못쓰게 되니, 그럴 때에 부모는 억지로 ‘공부! 공부!’ 하지 말고 좀 나가서 놀게도 하고, 학교 점수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좀 느긋하게 스스로 공부할 마음이 나도록 해야지, 공부하라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그것을 막연하게 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잠자기 시작해 가지고 약 2시간 가까이 되면 대체적으로 잠이 깊이 드는데, 그 잠이 깊이 들었을 때를 그 시간을 타서 간절히 그 아들에게 되풀이해서 간절한 말과 간절한 음성으로 조용하게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말을 타이르십시오.(26분16초~46분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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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떠 갖고 있을 때에 ‘공부 공부’ 하면 당장 귀를 막고 싶고 속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마는, 잠이 깊이 들은 그 찰나에는 육식(六識)이 다 쉬어 버리고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는 무슨 말을 해도, 저에게 유익한 말을 아주 간절한 음성으로 잘 타이르면 거부 없이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 이튿날 전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할 마음을 내게 되고, 또 나쁜 버릇이 있는 학생은 또 그런 나쁜 버릇을 스스로 고치게 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특히 유치원이나 국민학교에 다니는 그러한 어린 아동들에게 이런 방법을 시험 삼아서 한번 사용을 해 보시면 반드시 큰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어째서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 타이르면 효과가 있느냐 하면, 눈이 떠 있을 때에는 제 생각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릇에 무엇이 잔뜩 담어 있는 거와 같아서, 그릇에 무엇이 담아 있는 데다가는 아무리 무엇을 집어넣어도 들어가지를 않는데, 잠이 꼬빡 들어서 자기 의식이 완전히 비어 버리면, 가뜩 들었던 그릇을 다 쏟아 버리고 빈 그릇의 상태로 돌아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릇이 비은다면 거기에 물을 담으면 물이 들어갈 것이요, 사과를 담으면 사과가 들어갈 것이요, 대추를 담으면 대추가 들어갈 것입니다.

어떤 어린 학생이 영 구구단을 외우지를 못해서, 그래서 그 구구단 하루 종일 외워도 잘 외우지를 못 했는데, 그 학생이 잠이 든 뒤에 1시간 50분쯤 되어서 잠이 깊이 들은 때를 타서 귀에다 거기다 대고 계속 구구단을 몇 번을 읽어 주었습니다.
읽어 주고서 “네가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한번만 이 구구단을 주욱 읽고 나면 너는 이 구구단을 주루루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서, 그 이튿날 아침에 “너 구구단 한번 읽어 봐라. 읽어 보면 네가 주욱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한번 해 봐라” 그랬는데 한번 주욱 읽어 보고서 구구단을 줄줄 줄줄 외우는 것을 보았다 그 말이여. 이것은 자녀 교육에 대단히 필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서 항시 부모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고, 옛날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그 가문의 훌륭한 어른의 일화도 많이 들려주고, “너의 혈통이 이러이러한 참 좋은 혈통에 태어났기 때문에 너는 모든 행동과 마음가짐을 이렇게 가져야 하느니라. 너의 할아버지는 이러이러한 어른이셨고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러이러한 어른이셨느니라” 이런 말을 자꾸 타일러 주고 또 행동으로써 부모가 다 보여주고.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그 애가 차츰차츰 자라면서 그 가훈(家訓)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또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고 훌륭한 인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불교를 믿되 무당집에 다니면서 밤낮 무당 하는 소리나 듣고 또 직접 무당은 아니라도 무당에 가까운 그러한 절에 다니면서 밤낮 그러한 소리나 듣고 점이나 치고 사주나 보고,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방 거기 가서 물어보고, 이러한 식으로 불법을 믿으면 종래 그러한 20년 30년을 믿어 봤자 잘되어 봤자 그 무당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들은 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처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이 벌여 놓은, 비로자나 법신불—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가 다 비로자나 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법(法)을 터득하면 일체법(一切法)이 다 한 법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한 법을 옳게 믿고 터득을 하면 교육 문제나 또는 가정 문제나, 회사 문제나, 사회 문제나, 국가 문제나, 세계 인류 문제나 모든 것이 다 한 통속(統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이여.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이뭣고?’

이 가운데에는 너무너무 잘 아시고, 참선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시고 또 올바르게 실천을 하시는 분도 많으시지만, 절에 법회를 몇 해를 댕겼는데, “대관절 ‘이뭐꼬’라는 것이 무엇인고? 이모의 코? 이모 코가 어쨌다는 거여? 밤낮 가면 ‘이모꼬’하라고 그러는데, 이모 코가 뭣이 어쨌다는 거여. 이모 코는 어떻고 고모의 코는 어떠냐. ‘이모 코’가 좋다는데 어째서 ‘이모 코’가 도대체 무어냐?” 하고 이렇게 몇 해를 다녀도 그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건 웃을 일이 아니고, 그동안에 처음 듣는 소리거든.
용화사 가면 좋다니까 오기는 왔는데 갈 때마다 ‘이모 코’만 찾으라고 하니까, 그거 참 '이모 코'가 별난 놈의 ‘이모 코’가 다 있다.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아하! '이모의 코'가 아니라 ‘이뭣고?’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게 무엇을 가르키는 말이냐 하면,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 말이여.
‘귀가 듣지 무엇이 들어? 귀가 없으면 못 듣고, 귀를 콱 먹어 버리면 못 들으니까 귀가 듣지, 듣기는 무엇이 들어?’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여.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속에 있어. ‘귀가 듣는다’ 하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이고, '귀를 통해서 듣는다' 그 말이여.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저 밖에를 보면 창문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이여. 이러한 비유도 엄격히 따지면은 폐단이 있는 말이지만, 편의상 이러한 비근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들어.

‘귀를 통해서 무엇이 들어?’
‘마음이 듣지’

'마음이 듣는다' 그 말이 맞는 말인데, 들은 풍월(風月)로 ‘마음, 마음’ 하지, 실지 '그 마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다그쳐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은 풍월로 그저 어릴 때부터 ‘마음, 마음’ 그저 속상한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그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속상할 줄도 알고 하는 그게 마음의 작용인데, 지금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그 『이것』은 그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일으키는 그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을 「마음」으로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용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작용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서 「마음」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무엇이 그리 슬퍼할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기쁠 때도, ‘그 기뻐할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에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뭣고?’를 찾어도 도무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면 환히 배꼽 밑에 불이 켜지고, 따악 눈을 감고 ‘이뭣고?’를 하면 온갖 것이 환히 천상도 나타나고 지옥도 나타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환히 다 나타난다고, 그래 가지고 자기는 도통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을 하고 그러한 노보살님이 그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용화사에서 하도 법문을 많이 들어서 그러한 것을 자랑하는 분은 없을 것이고,
설사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도 감히 챙피해서, 그런 소리만 하면은 ‘마섭(魔攝)이 되었다. 마구니에 빠졌다’고 호통을 맞을 테니까 은근히 함부로 말은 안 하고, 비밀 은근히 뒷구녘에서 그런 것을 자랑을 해 가지고 자기를 도통한 것처럼 믿게 할려고 공작을 하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참 가슴 아픈 일이라 할 것입니다.

찾아갈수록—‘이뭣고?’를 할수록 알 수가 없을 뿐이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거나, 무엇이 나타나거나, 무엇이 보이거나 이러면은 그건 공부가 잘못되어 간 것입니다.
어쩌다가 혹 그런 것이 슬쩍 스쳐가거나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幻相)이지, 그것이 참다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부정을 해 버려야 해.
다시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도 말고,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그걸 다시 나타나기를 바랄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그것은 귀 끝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생각해 버리고 다시는 관심을 거기다가 붙이지 말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냥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더 깊어지면 ‘이뭣고?’ 소리를 아니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獨露)하면,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덮치기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그때 가서 ‘이뭣고?~’ 한번 이렇게 챙겨 주면 되는 것입니다.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 5만 독(讀)을 한다 또는 10만 독을 한다' 해 가지고, 염주가 닳아지도록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타불 타불 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끄터리만 따서 ‘타불 타불 타불 타불....’

‘어쨌던지 오늘 내가 10만 독씩을 매일 채워 가지고, 내가 죽기 전에 아미타불을 봐야겠다’해 가지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는데, 또 염불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는 염불문(念佛門)도 있습니다.
염불이 나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염불을 해야겠다는 철저한 신심이 있고 또 염불을 통해서 극락세계에 갈 그러한 원력(願力)을 가지신 분, 그런 신심을 가지신 분은 또 염불도 좋은 것이지, ‘에이, 참선이 제일이고 그까짓 염불은 아무것도 아니다’ 염불하는 사람을 우습게보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염불도 정말 올바르게 지극정성으로 하면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용화사는 주로 참선법을 주로 해서 법(法)을 설하는 도량이기 때문에 염불에 대한 말씀을 아니합니다마는, 여러분은 참선을 지극정성으로 할지언정 염불에 대해서 비방을 하거나 그것을 우습게 여기거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동안에 여기에 계신 분 가운데에는 과거에 염불도 많이 하시고, 또 관세음보살도 많이 하시고, 또는 ‘옴마니반메훔’ 같은 그런 주력(呪力)을 지극정성으로 많이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수행 방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있어서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염불을 하시는 것이 좋을 분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을 하시는 것이 또 근기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46분30초~1시간6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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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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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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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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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5. 10. 17:13

§((252)) 기도와 정진이 궁극에 가서는 하나. 그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써 기도도 성취하고, 도업(道業)도 성취하게 되는 것 / '일 끝내 놓고 하리라' 하지 말고, 일 속에서 참선하라 / 자기 생사(生死) 문제가 본업(本業)이고, 그밖에 일은 전부 빚 갚는 일.

어쨌든지 이만큼 젊었을 때, 건강할 때, 내가 내 마음 닦는 수행을 해서 업(業)을 소멸해야 / 자기와 안 맞은 사람하고 지낼 때에 거기에서 자기를 돌이키고 반성하고, 자기를 갈고 닦아서 향상(向上)을 시켜야 / (게송)본자허명절점하~.

**송담스님(No.252)—1984(갑자)년 동안거 결제 (84.12.07) (용252) (생활속 정진, 요중선)

 

 

약 21분.



오늘은 삼동 결제(三冬結制)와 아울러서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입재(入齋) 날입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기도와 정진이 궁극에 가서는 하나인 것입니다. 기도도 한 생각 단속을 하지 아니하면 기도가 되지 아니한 것이고, 참선(參禪)도 한 생각을 단속 못하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댁에서 생활을 하시면서 정진하신 분,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들도 모두가 그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써 하루하루를 알뜰히 정진을 하심으로 해서 기도도 성취하고, 도업(道業)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댁에 계셔도 항시 이 선방에 와서 정진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신다면 그 생활 속에서, 밥 하면서 빨래 하면서 애를 길르면서 생활하면, 그 가운데에 한 생각만 단속하면, 앉어 있어도 상관이 없고, 누워 있어도 상관이 없고, 서 있어도 상관이 없고, 걸어 다녀도 상관이 없고, 차를 타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뒤로 미루고, 지금 이 시간 이 시간을 단속을 못하면 그 사람은 평생 동안 공부를 못하고 말 것이고,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고 어려운 형편에 있을 때라도 그때그때를 단속해 나가면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질 것이고.

복잡하고 어렵고 바쁜 속에서 공부를 단속해 버릇하면 그 다행스럽고—처음에야 어렵지마는, 어려웁다고 핑계 대지 아니하고 자꾸 해 버릇하면 나중에는 되어진 때가 오는 것이고, 나중에는 차츰차츰 자기의 성격이라던지, 자기의 공부하는 정진 힘이라던지를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가늠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옛날의 자기와 달라진,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 갈수록 이 공부는 정진력(精進力)이 증장(增長)이 되는 것이고, 자꾸 핑계 대고 아니하면 1년 가도 그 모냥이요, 3년 가도 그 모냥이요, 일이 다 끝날 때가 없습니다.

'아들딸만 결혼시켜 놓으면 인자는 그때서 참선을 좀 하리라' 해도 아들 낳아 놓으면은 손자 손녀가 또 튀겨져 나오고.
'딸만 인자 여워 버리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을까? 그때는 내가 선방에 가 참선하리라' 하지마는, 딸도 가기만 했다 하면은 일 년도 못 가서 뒤집어엎고 오게 되고. 또 가서 또 해산(解産) 수발해야 하고.

일이라는 것은 한(限)이 없고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 끝내 놓고 하리라' 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벌써 종자가 틀린 종자여.

일 속에서 할라고 마음을 먹어.

인생으로 태어났으니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시어머니 노릇도 해야 하고, 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고 해서 공부는 안 해봤자, 내 공부를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지를 안 하기 때문에, 딸 일 잘 봐주고 아들 일 잘 봐주고 살림 잘해 줬다고 해서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조끔도 그건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거 하니라고 애썼으니까 빨리 천당에 가라' 절대로 그런 염라대왕은 아직 안 태어났습니다.

그런 것은 자기가 과거에 지은 업(業)이요, 과거에 지은 빚으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되는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공부 안 해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피할 수가 없으니 그것 해야 하고, 그거 하면서 자기 공부는 자기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 생사(生死) 문제가 그것이 본업(本業)이 되고, 그밖에 일은 전부 빚 갚는 일인 것입니다. 빚 잘 갚었다고 누가 칭찬 안 해 줍니다.
그 자식을 키우는데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나게 그 고생을 하면서 자식을 길러서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이 그 자식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그 자식이 효도(孝道)를 하냐 하면 별로 그러한 속에서는 큰 효자가 나오질 않습니다.
아무것도 전해 줄 것이 없이 그래야지, 그 자식을 위해서 참 평생을 다 바친 자식일수록에 결혼해 놓고 보면 지 지집 밖에는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자식을 이렇게 애써서 길렀으니, 길러서 장가만 보내주면 내가 효도를 받아서 늙발에는 내가 호강을 좀 하리라' 하고 기대를 했다면 백 명이면 백 명, 그건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길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잘 길르되 그 자식한테 바래서는 아니 됩니다. 바래지 말고 자기 공부 자기가 해 나가야 합니다.

또 돈도 자기가 늙발에 쓸 것을 좀 준비를 해 놓은 것이 좋습니다. 탁! 털어서 자식한테 다 해 놓은즉슨은 늙발에 용돈이 없어서 그 참! 피나는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가 늙발에 쓸 돈도 준비를 해 놔야 하고.
또 자식한테는 부모의 의무는 할지언정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래지 말아야 합니다. 효도해 주기도 바래지 말고, 돈도 늙발에 잘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바랬다' 하면은 그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래지를 아니해야 그런대로 불효는 안 하게 되는 것이고, '많이 바랬다' 하면 반드시 불효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말은 여러분이 이해를 잘 못하면 '그 자식 길러 봤자 소용이 없고, 잘해 줘 봤자 소용없으니까 어쨌든지 외봉을 많이 쳐놨다가 늙발에 내가 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자식한테 바래서는 아니 됩니다. 바랜즉슨은 뒤에 가서 참 피눈물 나는 불효를 받게 되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이만큼 젊었을 때, 이만큼 건강할 때, 내가 내 마음 공부해서 수행을 해서 업(業)을 소멸(消滅)을 해 놔야 자식도 그런대로 괜찮하고, 며느리도 그런대로 괜찮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따라서 며느리가 좋은 며느리도 되고 자식도 좋은 것이 되지, 내가 업(業)이 꽉 차 갖고 있으면 멀쩡한 자식도 불효자식이 되고, 멀쩡한 며느리도 아주 고약한 며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며느리도 자기 친정에서 부모 밑에서 잘 배우고 잘 자라서 자기 부모를 버리고 내 집에 왔는데, 그게 어찌 못쓸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시어머니 눈에는 눈에 안 차고 못쓰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업이 차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또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집가서 시어머니와 뜻이 안 맞아서 속이 상하고 원망을 하고 '시어머니가 빨리 죽었으면' 또는 '다른 아들네 집으로 가버렸으면' 혹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고약한 심보를 가지면 자기는 복 받기는 틀린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속에 업(業)이 차 있기 때문에 멀쩡한 시부모가 고약한 시어머니로 비추는 것이지, 자기가 정말 업이 없어서 청정하고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시부모를 상대한다면은 시부모가 생전(生前) 사후(死後)를 그 자식 며느리한테 의탁(依託)을 할 판인데, 왜 그 며느리를 고약하게 들볶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 며느리한테도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 까닭을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자기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서 스스로 자꾸 향상되어 갈라고 노력을 해야 하고, 또 시부모는 시부모대로 그 잘못된 점을 스스로 자기에게서 찾아야, 찾아서 자기를 갖다가 향상을 시키고, 그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착한 마음으로 며느리를 상대한다면 그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친정어머니와 친딸과의 사이처럼 그렇게 오손도손하고 서로 그렇게 지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로 들었지만,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방에 80명이 지내시는데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다 오셨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 · 젊은 분, 김 씨 · 이 씨 · 박 씨 뭐 별별 성(姓)바지가 다 모이시고, 별별 모다 성격이 다른 분들이 모이셨지만, 공연히 달란 것 없이 미운 사람 있고, 나를 뭘 자꾸 나한테 잘해 주고 뭘 잘 주어도 그거 싫은 사람, 이거 중생계(衆生界)에서는 있을 수가 있습니다. 뭘 달라고 해도 주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로 좋은 사람도 있고.
그런데 이게 다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의 소치(所致)인 것입니다. 업으로 된 것을 업에만 맡겨 버리고 업에 따라서 행하면 언제 그 업을 소멸(消滅)하겠습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도 화두를 들고, 뵈기 싫은 사람을 만나도 화두를 들고 해서, 화두를 듦으로 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상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방(禪房)이란 데는 자기 마음 맞은 사람들끼리만 모여 가지고서는 그 정진(精進)에 별 도움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와 안 맞은 사람하고 한 철을 지낼 때에 거기에서 자기를 돌이키고 반성하고 자기에게 채찍을 가하고. 그래 가지고 자꾸 자기를 갖다가 갈고 닦아서 그래서 향상(向上)을 시켜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는 놀라울 만한 발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팔십 명이 모여 놨으니 참! 별별 성격의 소유자도 있겠지만, 그 자기 마음에 안 맞은 분을 미워하지 말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흘겨보면서 미워하고 그러지를 말고.
항시 자비(慈悲)스러운 눈매로 지켜 주며, 남 잘못한 것을 보고 허물로 생각하지 말고, 남 잘못한 것을 보고서 자기를 돌아보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신다면, 대중 가운데 몇 사람이 본의(本意) 아니게 잘못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대중에 아무 해(害)가 되지를 아니할 것이고, 또 한두 번 잘못하다가 스스로 자기를 깨우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선방 스님네도 한철 아무 장애 없이 잘 지낸다고 하는 것은—사실은 아직까지 우리 용화사에서는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로 10년 동안 중간에 별 탈이 없이 잘 지냈습니다마는, 그것은 조실 스님을 신(信)하는 철저한 그런 신심으로 지내시기 때문에 별 장애가 없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지 금년 겨울 석 달 동안도 지난 어떠한 결제 동안보다도 훨씬 알차고 짬진 한철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원효사나 회룡사 대중들도 거기 서로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끼리 모다 지내고 있지만, '항시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산다'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도 날짜를 정해 놓고 꼭 엄숙한 마음으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어쨌든지 여법하게 알차고 짬지게 정진(精進)을 하기를 부탁을 합니다.


본자허명절점하(本自虛明絶點瑕)한디  육창한월변하사(六窓寒月遍河沙)니라
나무~아미타불~
기간나유한장단(其間那有閑長短)하야  법계함용공일가(法界含容共一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자허명절점하(本自虛明絶點瑕)여, 본래 스스로 비고 밝아서 조그마한 티도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육창(六窓)에 한월(寒月)이 변하사(遍河沙)여. 여섯 창에 차운 달이 환히 비추어서 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다 비추고 있다 그 말이여. 자성(自性)의 달이 본래 밝고 밝아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창(六窓)을 통해서 삼천대천세계를 환히 비춘다 그 말이여.

기간나유한장단(其間那有閑長短)하야, 그 사이에 무슨 길고 짧은 그런 쓸데없는 것이 있겠느냐 그 말이여. 무슨 시비(是非)가 있고, 무슨 선악(善惡)이 있고, 친소(親疏)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법계함용공일가(法界含容共一家)여. 육도법계(六道法界)와 삼천대천세계가 온통 한 집이다 그 말이여.

내가 미(迷)한 생각으로 보니까, 중생의 업식(業識)으로 보니까 모든 것이 시비(是非)요, 차별(差別)이요, 죄악(罪惡)이요, 빈부귀천(貧富貴賤)이요, 흥망성쇠(興亡盛衰)요, 원근친소(遠近親疏)요 그런 것이지,
한 생각 비워져 버리면 눈으로 무엇을 봐도 그것은 불세계(佛世界)요, 귀로 무엇을 들어도 그것이 다 부처님 법문이요, 무슨 냄새를 맡아도 그것은 전단향(栴檀香)이요, 무엇을 먹어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이요.

금년 겨울 이 안거(安居) 결제일(結制日)을 맞이해서 이렇게 여러분과 더불어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된 인연으로 한 철이 정말 알뜰하고 짬진 한 철이 되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아를 철견(徹見)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이번 철에 각자 이루어지기를 부처님께 축원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44분11초~64분39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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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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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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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4. 28. 07:54

§((117)) 우리의 부처님 제자로서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 / '이뭣고?' 나의 안에서, 내가 나를 찾는 거, 참선을 통해서 참나를 깨달은 만이 오직 영원한 것 / 인과(因果)의 법칙 / 무량겁, 자기의 운명도 오직 현생(現生)의 한 생각 한 생각이 중대한 원인이 된다.

**송담스님(No.117)—1980(경신)년 신수기도 회향(80.02.24) (용117) (생활속 정진)

 

 

약 8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목적, 부처님 제자로서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아무리 내 뜻대로 얻어졌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밖에서 구해서 얻은 것은 반드시 밖으로 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안에서 나의 안에서 찾아야만 그것은 영원한 것인 것입니다.
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무엇이고 밖에서 얻은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남이 훔쳐 가거나 빼앗아 가거나 제절로 나로부터 떠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안에서 찾는 거 '이뭣고?' 내가 나를 찾는 거, 참선 공부, 참선을 통해서 참나를 깨달은 것 그것만이 오직 영원한 것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참선을 할 때 그것을 열심히 하면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나 그런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은 제절로 다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를 등한히 하고 그리고서 밖으로만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구하는 사람은 설사 일시적으로 얻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나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맨들어 놓고 떠날 때가 꼭 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필요한 만큼은 얻어지고, 설사 얻어졌다가 그것이 나로부터 떠난다 하더라도 그 떠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내가 불행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행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썩 행복해질 것도 없고, 그것이 이르러 오면 이르러 온 것에 따라서 적절히 나를 위해서 쓰고, 자손을 위해서 쓰고, 가정을 위해서 쓰고, 또 남을 위해서도 쓰고, 사회 국가를 위해서도 쓰는 것입니다.
쓴 만큼 쓰다가 또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해서 그것이 또 나로부터서 떠나면 떠난 대로 검소하게 살며, 많이 생기면 많이 생긴 대로 적절히 쓰고 또 적게 생기면 적게 생긴 대로 적절히 쓸 따름이지,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우쭐대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으시대고 행세를 하다가 그것이 떠나면 하루아침에 불행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풀이 죽어 가지고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돈은 억지로 욕심을 부리면서 남을 해롭게 하면서 억지로 벌려고 한다고 해서 벌어지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분복(分福)이 있어서 부자로 살 사람은 오백 석 할 사람은 오백 석 하고, 천 석 할 사람은 천 석 하는 것이지, 오백 석밖에 못 할 복밖에는 없는 사람이 눈에다 불을 쓰고 칼을 두르고 휘두른다고 해서 그것이 천 석이 절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이뭣고?만 하고 돈벌이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그러면 눈만 감고 밤낮 앉았으면 내외간에 그래도 되냐?'
그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의 기술과 형편에 따라서 적절한 직장을 가지고 충실하게 성실히 일을 해야 합니다. 농사를 짓건, 장사를 하건, 관공서에 나가건, 회사에 나가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을 하면서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얻어지는 재산을 또 유용하게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항시 마음으로는 '이뭣고?' 화두를 해서 마음에 양식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지는 것으로는 육체를 육체와 가정을 돌보지만, 참선을 통해서 자기의 영원한 마음을 잘 닦고 가꿈으로 해서 앞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육칠십 년,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돌아오고 맙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물질적인 육체에 지내지 못하고, 육체가 고장이 나면 그 육체를 버리고 다시 또 새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천상의 옷을 갈아입든지, 인간의 옷을 갈아입든지, 짐승의 털 난 가죽옷을 입든지, 뱀과 같은 파충류의 옷을 입든지, 귀신의 몸을 받든지, 지옥의 신세가 되든지, 모든 것은 자기가 어떻게 짓고 닦고 살았느냐 한 것에 따라서 그러한 옷이 자기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因果)의 법칙은 추호도 어김이 없는 팥 심은 데 팥이 나고,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그러한 지극히 과학적 사실에 지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과의 법칙을 우리의 눈앞에서 현실적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인과의 법칙을 미루어서 생각하면 전생(前生) 일도 또한 내생(來生) 일도 환히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있어서의 일 초 일 초가 모여서 결국은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미래가 약속될 수가 없습니다.

현실을 바르게 그리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만이 자기가 금생 동안에 죽을 때까지의 자기의 운명도 결정되려니와 이 몸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내생에 저 내생, 무량겁을 두고의 자기의 운명도 오직 현생(現生)의 한 생각 한 생각이 중대한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겠습니다.(48분7초~55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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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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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44)) (게송)위타위기수미선~ /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다 영원한 무루복(無漏福)의 과보(果報)를 받는다 / 수행은 '있는 그 자리에서' 해야 / 수행은 당인(當人)의 마음에 달려 있다.

**송담스님(No.244)—1984년 8월 첫째 일요법회(84.08.05) (용244) (생활속정진)

 

 

약 9분.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위타위기(爲他爲己)는 수미선(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고,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공덕을 쌓고, 비록 그것이 조그만한 선(善)이여. 선이 아닌 것은 아니나 이게 다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근본밖에는 안 된 것이다.

아까 다섯 가지 보시(布施) 공덕(功德)을 말해 놓고,
'보시를 하고 착한 일을 하고 한 것이 또 생사윤회의 원인 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러면 말이 '좋은 일을 하라고 했다, 하지 말라고 했다 종잡을 수가 없네'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어떠한 것을 보시를 하거나, 어떠한 좋은 일을 해도 이것이 다 무루복(無漏福)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유주상(有住相), '내가 이러한 좋은 일을 했다'고 상(相)을 내고 아주 공투세를 하고 자랑을 하고 이것은 상(相)이 있는, 상에 집착(執着)하는 선행(善行)이기 때문에 이것은 유루복(有漏福)이 되어서 그 공덕 지은 만큼 반드시 천상(天上)에 태어나거나 또는 인간에 태어나되 최고에 복을 받고 하겠지만, 유루복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하늘에다 대고 화살을 쏘면 아무리 기운이 센 장사가 활을 쏜다 하더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다시 떨어졌지, 지가 계속 무한대(無限大)로 저 하늘나라로 계속 올라가는 법은 없거든.
그래서 큰 복을 짓건, 작은 공덕을 쌓건 항시 무주상(無住相)으로 해라 이것입니다. 무주상으로 하면 그것이 다 영원한 무루복(無漏福)의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을 지어야지, '에이, 그까짓 거 생사윤회 밖에 안된다니 인자 콧물도 없다. 인자는 남에게 좋은 일 할 것도 없고 나만 배불리 먹고 살자'
법문을 마음으로 듣지 아니하고, 어디 어믄 구녁으로 법문을 잘못 들으면 이상한 데에 처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을 짓되 집착심(執着心)이 없는, 상(相)에 떨어지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복을 지을 것이요, 그래야 그것이 영원한 것이다 그 말이지.

복(福)도 인연 따라서 부지런히 지으려니와 또 복 짓는 데만 떨어지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또 무엇을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지혜 닦는 길이 바로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넝쿨 얽힌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그러한 데에 들어가서 길이길이 샘[漏]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리라.

'솔바람이 불고 칡넝쿨이 얽힌 산중에 들어가서 참선을 해야겠다' 한게,
'그러면 어떻게 해여? 집안 다 살림 다 그만두고 나도 참선(參禪)을 할라면은 저 산중(山中)으로만 들어가야 겠냐? 그러면 산중에 안 들어가면 참선을 못하냐?' 하면 그게 아니라.

인연 따라서 산중에 들어가서 할 만하면 백번이라도 들어가서 하면 좋고, 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할...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그 우글거리는 속에서 장사하면서 '이뭣고?'
가정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살림하면서 앉으며 '이뭣고?' 서면서 '이뭣고?' 손님 접대하며 '이뭣고?' 살림하면서 '이뭣고?'
회사에나 관공서에 나가서 사무 본 사람은 사무 보면서 의자에 걸터앉아서 '이뭣고?' 걸어가면서 '이뭣고?' 출퇴근하면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인생에 누가 괴롭지 아니하며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바로 그때가 화두(話頭)를 챙기는 좋은 시절이다.
그렇게 나가면 바로 그 자리가 어찌 솔바람 불고 칡넝쿨 얽어지는 그런 산중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꼭 솔바람 불고 칡넝쿨 얽어진 산중만 된다면 그럼 산중에만 들어가서 있으면 다 성불(成佛)하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거든.

발심(發心)을 하지 못하고 산중에 들어가 봤자 오히려 솔바람 소리가 듣기 싫고, 그 깊은 산중이 쓸쓸해서 살맛이 없고,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듣기 싫고, '에이!' 열흘도 못 가서 다시 집으로 와 버린다.
'저 외로운 섬으로 가면은 사람도 안 만나고 정말 공부가 잘 되겠다'
파도 소리가 듣기 싫어서 못 하고, 정말 고향이 그리워서 외로운 섬에 일주일도 못 있어.

당인(當人)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소나무와 칡덩쿨에만 달려 있을 것입니까?
참으로 소나무와 칡덩쿨 밑에서만 해야 한다면은 집안에다 큰 소나무 하나 심고, 거기다 칡덩쿨을 갖다가 심어서 뱅뱅 돌려 놓고 그 밑에 앉어서 한다면 다 성불을 하겠네요?

시장 바닥도 좋고, 산중(山中)도 좋고 그것은 인연 따라서 맽기고, 문제는 한 생각 단속(團束)하는 데에 천당과 지옥이 판가름이 나고, 산중과 속세(俗世)가 갈라질 것입니다.(52분40초~60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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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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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1. 24. 17:18

§((596)) (게송)행년홀홀급여류~ / 정말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 탐욕심(貪慾心)을 버려야 / 정치는 정말 사심(私心)없이 보살(菩薩)의 정신(精神)을 가지고 해야 한다 / '이 뭣고?' 한마디면은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업장(業障)이 탁! 소멸(消滅)이 되어 버린다.


'이뭣고?'를 한 사람은 궁극(窮極)에 무쟁삼매(無諍三昧), 다툼이 없는 삼매에 들어간다 / 진정한 행복, 평화는, '탁!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놓는 공부가 '이 뭣고?'여. 탁! 한 생각을 돌이키고 자기 본심(本心)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이 뭣고?'


이 한 몸뚱이도 내것이 아닌데, 무엇을 구(求)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休休身外更何求)


**송담스님(No.596)—1997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용596)



약 22분.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한데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차일신비아유(只此一身非我有)커늘  휴휴신외갱하구(休休身外更何求)리오

나무~아미타불~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헌디,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퍼뜩 퍼뜩 퍼뜩 지내가서 흘러가는 물과 같이 급하게 흘러간다 그 말이여.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다. 늙으면, 번듯번듯 날이면 날마다 머리 위로 올라간다 그 말이여. 머리가 자고 나면 허옇고, 자고 나면 허옇고 우시우시 머리가 쏟아진다 그 말이여.

늙은 것이, 속으로 기운이 없어지고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마는, 제일 쉽게 나타나는 것이 귀밑 머리로부터서 허옇기 시작해 가지고 금방 머리 여기저기서 희끗희끗 흰머리가 솟아 온다 그 말이여.


우리가 태어나면 백 년 이백 년 오래오래 살 것 같지만, 뱃속에 포태(胞胎) 되어 가지고 뱃속에서도 죽을 수도 있고, 뱃속에서 몇 달 안 되어서 유산(流産)할 수도 있고, 태어나다가 죽을 수도 있고, 태어나서 며칠 안 있다 죽기도 하고 몇 달 안 되다 죽기도 하고, 열 살 안에도 죽고 스무 살 안에도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싸우다가 죽고, 친구 칼에 맞아 죽기도 하고, 도둑한테 죽기도 하고, 인생의 목숨이라는 게 도무지 파리 목숨만도 못해.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도 모른다 그 말이여.

정말 무상(無常)을 깨달라야 하고 정말 믿을 것이 없어. 믿을 것이 없이 허망(虛妄)하고도 무상(無常)한 줄을 확실히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지나친 탐욕심(貪慾心)도 안 부리게 되고, 자기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해롭게 하는 일을 안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사람이 남을 죽이고 돈을 뺏겠습니까? 남을 죽이고 돈을 뺏을 때는 그것 갖고 잘먹고 잘살 줄 알고 그러지만, 정말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야 지나친 탐욕심(貪慾心)을 안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지차일신비아유(只此一身非我有)여. 알고 보면 이 한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여.

우리는 이것을 '내 몸이다' 생각해 가지고 음식을 보면 맛있는 거, 영양 있는 것 많이 먹으려고 그러고, 다른 사람보다도 우선 제 입에 먼저 넣으려고 그러고, 좋다고 하면은 마구 먹어대고, 그리고 그 피부가 좋아진다고 하면은 온갖 것을 얼굴에다 처바르고 비싼 화장품을 사 가지고 얼굴에다 찍어 바르고 토닥거리는데, 그래봤자 내나 늙는 것은 마찬가지고, 그런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이 몸뚱이는 흙기운과 물기운과 불기운과 바람기운과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사대(四大), 뭐 요새 여러 가지 원소(元素)는 수백 수십 가지 원소가 되겠지만, 인도(印度)에서는 네 가지로 크게 분류를 했어. 중국(中國)에서는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다섯 가지로 분류를 했고, 인도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네 가지로 분류를 했는데. 그야 분류를 하기에 달린 건데.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육체(肉體)는 몽쳐지고, 또 오온(五蘊)이라 해 가지고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물질적(物質的)인 것과 정신적(精神的)인 것으로 요렇게 또 두 가지로 노누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분류하면 노나져 버리는데, 그러면 '내'라는 게 어디가 있느냐? 하면 죽음에도 없어.

지금 요새 과학적으로 해부를 하고 분류를 해서 다 분석을 하면 여러 가지 원소(元素)가 나오겠지마는 '내'라 하는 놈 찾아보면 원자현미경으로 봐도 '내'라는 놈은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이것을, '내'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내가 내 앞으로 등기(登記)를 해 놓은 집이나 땅이나, 모다 그런 통장이나 그걸 '자기 소유다. 내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잠시 관리(管理)를 맡고 있는 것뿐이지, 자기 것은 사실은 아닌 거여. '내 개인 소유다. 내 것이다' 그러지만 자기 것은 아닌 거여. 관리만 하고 있다가 그냥 죽을 때면 그냥 고대로 놓고 가는 거여.

자손한테 남겨주기 위해서 그 못 먹고 못 입고 애끼고 그러지만, 그것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꼭 행복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서양에서는 자손한테 준 것은 세금을 많이 뜯어가지고, 주어봤자 세금 물다 보면은 별로 자손한테 돌아갈 것이 없으니까 차라리 공익 단체에다가 기증을 하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그러는데, 그건 대단히 우리도 본받아야 할 만한 좋은 법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 이 한 몸뚱이도 내것이 아닌데, 무엇을 구(求)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休休身外更何求)


정치도 자기가 아니면 대통령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마는, 서로 험담을 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고, 과거에는 상대와 맞수가 되면은 죽이고 자기가 하는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확실히 증명이 안 되고 있지마는, 그래 가지고 해 봤자 무엇입니까 그게. 결국은 자기도 제 명(命)에 못 죽는 거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아들들에게 정치하라고 시키지 말고, 첫째는 불법(佛法)을 믿어라. 그리고 무엇이든지 너에게 소질(素質)이 있는 거, 니가 하고 싶은 거, 음악이면 음악, 뭐 그림이면 그림, 또 학문이면 학문, 꼭 나가서 권리를 잡으려고 하는 그런 데로만 가야만 좋은 것으로 그렇게 억지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생(前生)에 정치를 많이 해서 그런지 정치라고 하면 아주 이가 갈립니다.멀쩡한 사람이 출마만 하면 정신병자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도 혹 출마를 하면 저렇게 될까?'

나도 과거에 정치했을 때—내가 숙명통(宿命通)이 안 나서 전생에 내가 왕 노릇을 했는가 어쨌는가, 내가 확실히는 몰라도 언젠가는 왕도 한번은 했지 않을까 속으로 짐작이 그렇게 가요. 왜 그러냐?

그런 거 하기 싫은 것을 보면은 내가 과거에 했지 않은가 싶어요. 젊어서 어려서 보리밥을 너무 많이 먹어 가지고 신물이 나면 보리밥을 보면 아주 정떨어져 보기도 싫다고 그러거든요? 그런 것을 보아서 정치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면, 과거에 전생에 임금 노릇도 몇 번 쯤은 해봤지 않을까?


임금님을 했다면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또 거기서 장관도 하고 대신도 하고, 또 임금이 되면 많은 처첩을, 궁녀를 거느리고 후궁을 거느리고 하니까 또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그래서 여러분들도, 정치하면은 명예가 올라가고 권리가 생기고 그러니까 그런 맛으로 서로 하려고 그러고, 한번 잡으면 안 내놓으려고 그러거든.

그게 사실은 별로 좋은 것도 아니고 그 할 짓이 못되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고 한 사람은 일부분이고 대부분 '잘못했다'고 한 사람이 더 많다 그 말이여. 어떻게 아무리 임금 노릇을 잘하고 대통령 노릇을 잘하기로서니 온 국민을 다 좋게 해 줄 수가 있는 문제냐 그 말이여.

이것을 법을 이렇게 제정하면 일부에서는 좋다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손해 본 사람은 다 싫다고 하는 거여.


그래서 정치를 이미 손을 대 가지고 손을 뗄 수가 없고, 그것 아니면은 해 묵을 것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또 해야지, 여태까지 여당이다 야당이다 하다가 이 법문(法門) 듣고 '아이고, 내 그거 그만두어야 겄다' 할 사람 한 사람도 있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하기는 하되 정당(正當)하게 하고, 일단 하게 되면 정말 사심(私心)없이 해야 하고, 이 몸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바친다는 그러한 마음으로 보살(菩薩)의 정신(精神)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렇다면 거기에 사욕(私慾)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떻게 하면 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잘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대통령을 하고 나오면, 대통령 하고 나오면은 호위하는 사람이 없어도 가는 곳마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대통령 할아버지' 이렇게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러한 대통령을 해야 하고.


정말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없고, 자기에게 경륜(經綸)이 있어서 이 침체된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모든 교육과 모든 것을 정말 잘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경륜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원력(願力)을 세우고 한번 해 볼 만하는데, 그거 그런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겄습니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은 그러한 대원력(大願力)과 대자비(大慈悲)와 대지혜(大智慧)를 갖춘 사람이 할 일이 바로 대통령이고 왕(王)이다 그 말이여. 그렇지 않으면은 할 짓이 못돼.


여러분은 (IMF 경제 위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뉴스를 듣고, 그러한 속에서 귀를 막고 살 수는 없고, 그런 흐름 속에도 우리도 다 같이 이렇게 국가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도 같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그래도 이 자리에 모이신, 또 산승(山僧)의 이러한 간곡한 말을 들으신 인연(因緣) 있는 분은, 정치를 하되 자기의 위치에서 사욕과 사심이 없이 성실히 하고, 인연이 있어서 관여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그만 둘 때는 깨끗하게 미련없이 놓아 버리고, 니아까를 끌던지 운전사를 하던지 농사를 짓던지 장사를 하든지, 영국에 윌슨 수상은 옥스포든가 켐브리진가 그 영국에 좋은 대학을 나와 가지고 영국에 수상이 되었는데, 아직 임기가 아직 남아 있어도 후배들을 위해서 미리 사표를 내고 나와 가지고 그 이튿날 운전사로 취직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쯤 되어야 하거든. 할 때는 멋들어지게 하고, 그만둘 때는 깨끗이 끝내고.

우리나라 이조(李朝) 동안에도, 그 이름은 내가 잊어버렸는데, 훌륭한 정승(政丞)이 있었는데 구십구 칸이나 되는 큰 건물 집을 짓고 많은 권속을 들이고 그렇게 참 권리를 누리고 정치를 하다가, 인연이 돌아와서 그만두게 되니까, 그것 다 고대로 버리고 자기가 키우고 있는 학 한 마리와 개나리 봇짐만 짊어지고 저 시골 고향 농촌으로 돌아간 그러한 훌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치라는 게 권리(權利)를 잡을 때는 명예와 권리가 따르고, 내놓을 때는 비참한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집니다. 할 때는 열심히 하고 멋지게 하고, 내놓을 때는 깨끗하게 내놓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고, 이렇게 그러한 멋있는 장부(丈夫)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라야, 그런 각오가 있어야 탁! 현재 가정에 살림도 하고 사업도 하고 직장도 있지만 딱! 법회(法會) 때가 돌아오면 법회에 와 가지고 법문(法門)을 따악 듣고 '이 뭣고?'를 하고.


'이 뭣고?'를 해야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왜 '이뭣고?'를 해야 그렇게 되냐 하면, 한 생각으로 억만 겁 일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억만 겁 미래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천금 만냥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목숨도 놓아 버릴 수가 있거든. 오욕락(五慾樂) 부귀영화(富貴榮華) 그까짓 것이 탁! 놓아 버릴 수가 있는 거여.

'이 뭣고?' 한마디면은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업장(業障)이 탁! 소멸(消滅)이 되어 버리는데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이뭣고?'를 한 사람은 궁극(窮極)에 어디에 도달하냐 하면 무쟁삼매(無諍三昧)에 들어가, 다툼이 없는 삼매에 들어가는 거여.

우리는 무한경쟁(無限競爭) 시대라 해 가지고 노상 경쟁, 경쟁, 경쟁 속에서 이렇게 해서 한시도 방심을 할 수가 없고, 회사에 들어가도 경쟁, 학교에 가도 경쟁, 정치를 해도 경쟁, 우두거니 있다가는 내가 쫓겨나고 내가 짓밟히고 하니까 그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뇌물을 쓰고 모략중상(謀略中傷)을 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동안에는 사회는 좋아지지 않습니다. 세계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는, '탁!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여. 놓는 공부가 '이 뭣고?'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욕심(慾心) 탐심(貪心),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개인적인 것 가정적인 것 사회적인 것, 탁! 생각을 돌이키고 자기 본심(本心)으로 돌아올 줄을 알어야 한다 그 말이여. 돌아오는 방법이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또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놈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며, 이렇게 외로우며, 이렇게 괴로우며, 이렇게 원망스러울까, 이렇게 억울허까?' 그러한 생각 속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날 새기를 하고 잠을 안 자도 안 없어집니다.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자꾸 하다 보면 스르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다같이,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다시 한 번,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우리가 참사람 되는 길이 여기에 있고, 개인의 평화, 가정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바로 이 '한 생각' 돌이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말을 맺고자 합니다.


벌써 날씨가 추워져서 겨울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모두 건강에 조심하시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 뭣고?'로써 우선 자기 중심(中心)을 딱! 잡고서, 그리고서 모든 일을 느긋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연구하면 반드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가 떠오를 것입니다. (39분29초~60분59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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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0. 12. 17. 21:03

§((155))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선법, 최상승법,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로써 번뇌를 돌이켜서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다.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내 마음 · 가정 · 사회 · 세상이 살기 좋은 편안한 곳이 된다 / (게송)승시승혜속시속~ /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송담스님(No.155)—1981년 12월 첫째일요법회(81.12.06) (용155)

 

(1) 약 19분.

 

(2) 약 7분.

 

(1)------------------

 

우리 일어나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번뇌망상 속에서 그 번뇌망상이 원인이 되어서 번져 가는 우리의 생사, 육도(六道)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이 대단히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 내용을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웠었지만, 그 법문 설하신 요지(要旨)는 바로 그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생사 없는 진리를 내 마음에 구현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간곡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것이 지끔 이 송담(松潭)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이 무엇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매일같이 속상하는 일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신상(一身上) 문제, 가정 문제, 사회 문제, 회사 문제, 보고 듣는 것 생각되는 것이 기쁜 일도 간혹 있지만 거개(擧皆)가 나로 하여금 괴롭게 하는,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러한 수없는 일들이 내 앞에 제출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내일 하루를 또 그렇게 지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지혜롭게 보고 지혜롭게 판단해서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이고, 현실 사회에서 결국은 패병(敗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될 수 있으면 빨리 그 속상하는 마음으로부터 헤어 나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속상한 일로 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서 큰일을 그르치게 되고 자기의 앞길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설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한 걸음 건너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법문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면 얼마 안 가서 이 최상승법이 그렇게 요긴하고 위대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그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동안 설(說)하신 법문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여. 팔만대장경 그 많은 법문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지만 우리가 그 경책(經冊)을, 한문으로 된 경책을 갖다가 읽어 봐도 잘 알 수가 없고 또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근자(近者)에 번역된 경전이 나오고 있지만 번역된 경전을 읽어 봐도 읽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또 그만인 것입니다.

그 많은 경전 속에 가장 핵심, 핵심적인 것. 그 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를 시킨 대도사들. 그 대종사(大宗師)에 지도를 통해서 가장 쉬웁게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면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어떠한 근심이 일어나건 노여움이 있거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변(變)하기 전(前)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무엇고?’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해서, '뭐 그러한 것이 최상승법이요, 그걸 뭐 불법(佛法)이라고 할 것이 있느냐?'

쉬웁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무서운 지옥고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을 갖다가, 그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이 뭣고?’ 한마디로써 팔만사천의 마구니를 다 항복 받을 수가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煩惱)를 극복할 수가 있고,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뭣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많은 좋다고 하는 경전을 읽고 해석을 할 줄 아신 분이 계시겠습니다마는, 불법(佛法)은 많이 알고 해석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알고 있는 것을 비워 버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많은 경전을 설하셨지만 그 경을 옳게 이해한다면 많이 머릿속에 외워서 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 버리는 거여. 비움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용화사 이 법보전(法寶殿)에서는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법을 전강 조실스님 계실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宣揚)을 하고 있습니다.

 

‘이 뭣고?’

그다음에는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하는, 지금 이뭣고 할 때에 ‘이-’ 하고 있는 이 「‘이-’ 하는 이놈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고 꽉 맥힌 그 의심(疑心), 의관(疑觀), ...(녹음 끊김) ...입니다.

 

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진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하루하루를 여법(如法)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려 나가면,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해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어 나가면, 묘하게도 화두(話頭)를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진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해 나가면 여간 걱정될 만한 일을 당해도 조끔도 당황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일로 해서 나의 마음이 동요(動搖)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침착해지고 아량(雅量)이 생기고, 그렇게 그전에는 미웠던 사람도 별로 미운 생각이 없고, 마음이 담담(淡淡)하게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담담해지고 아량이 있고 여유가 생긴다면은 얼마나 세상 살아가기가 좋겠습니까. 내 한 사람이 그렇게 됨으로 해서 나의 집안은 또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마음가짐이 된 사람이 직장에 가면 그 직장에 있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동료들도 얼마나 대하기가 좋겠느냐.(33분33초)

 

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느냐.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육도윤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여의고 열반(涅槃)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내 마음이 편해야 가정이 편안하고 가정이 편해야 직장에 가서도 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불안하고 내 마음 하나가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안정이 안 되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편안틀 못하고 풍파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이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만히 훌륭하게 하려면 첫째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제절로 잘되어 갈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이렇게 사회가 문명이 발달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기에 대처해서 우리가 거침없이 모든 일에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고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근본인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이 세상을 살기 좋고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 공부밖에는 없다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19분59초~38분24초)

 

 

 

 

(2)------------------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요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능어차선참상(若能於此善參詳)하면  육육종래삼십육(六六從來三十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여. 중(僧)은 이 중이고 속인(俗人)은 이 속인이다. 어찌 스님을 갖다가 속(俗)이라 하고 또 속인을 갖다 스님이라 할 것이냐 이 말이여.

기쁘면 웃어야지 기쁜데 웃지 아니하고, 슬프면 울어야지 울지 않고 웃고, 이래서는 평등(平等)한 진리(眞理)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여.

 

‘아휴, 오늘 내가 용화사에 가서 최상승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실천하니까 나는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오늘부터서 인자 나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이여. 남편도 소용없고, 가정도 소용없고,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울지도 않고, 누구 기쁜 일이 있어도 따라서 웃지도 않고' 이렇게 되어 간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산을 깎어서 못을 메움으로써 그래가지고 산을 없애 가지고 깊은 구렝이(골짜기)에다가 메워 가지고 평지(平地)를 만듦으로써 평등(平等)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최상승법을 옳게 이해한 사람은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을 줄을 알아야 돼.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각기 자기(自己)에게 주어진 책임(責任)을 충실(忠實)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여.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상(善參詳)하면, 만약 능히 여기에서 잘 공부를 지어나갈 줄 알면,

육육(六六)은 종래삼십육(從來三十六)이니라. 육(六)에다 육(六)을 곱하면 그 삼십육(三十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댁에 가실 때, 댁에 가셔서 생활할 때, 또 내일 직장에 나가실 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행해 나가시면 우리는 반드시 부처님 제자로서, ‘정말 어쩌다가 금생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생각할수록 다행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38분41초~45분4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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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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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0. 11. 25. 11:11

§(175) (게송)본시산중인~ /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 / 내 마음에 탐진치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불법이요, 참선 / 출가한 목적은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다 / (게송)죽영소계진부동~ / 해탈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내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못 꺼줘요. 집에 붙은 불은 이웃 사람도 와서 꺼줄 수가 있고 소방서가 와서 꺼줄 수 있지만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꺼줄 수가 없어. 혹 좋은 말을 해서 위안은 시켜줄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5)—1982년 7월 첫째 일요법회. (용175)

 

약 22분.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애설산중사(愛說山中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본래 산속에서 사는 사람이라.

애설산중화(愛說山中話)로구나. 산중의 얘기하기를 좋아하더라 그말이여.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은 친구들을 만나서 입을 벌렸다 하면 감옥 속에서 일어난 얘기들을 하고, 법률을 공부하고 법조계 있는 사람은 밤낮 만나면 법률 얘기, 무슨 사건 얘기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예술가는 모이면은 밤낮 입 벌렸다 하면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철학하는 사람이 모이면은 철학을 얘기하듯이, 원래 승려는 산중에서 도(道)를 닦는 것으로 일생에 업을 삼기 때문에 입을 벌렸다 하면 밤낮 도 닦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저 중은 법상(法床)에만 올라가면 무슨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하고 밤낮 참선만 하라고 한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도둑질 밖에는 해 먹고살 것이 없어서 그렇게 징역을 살고 나와도 2범 3범 4범 5범 다시는 안 한다고 나와도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무엇을 해 먹고살 것이나 그말이여.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세계 도처에서는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모든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인심은 날로 박해져 가고, 생각해 보면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험난하고 복잡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불자(佛子)는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더욱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훨훨 타고 있는 이 불속에서도 타 죽지 않는 길을 우리는 찾았고, 생로병사의 이 고해(苦海) 속에서도 그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만났지마는 만난 것으로써 다가 아니고 지금부터 참으로 목숨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지 아니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배를 탔으면 부지런히 바른 방향을 잡아서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지, 배에 올라탔다고 해서 누가 내 대신 노를 저어주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노를 저어서 한시바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지내가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죽음을 향해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지, 무상살귀(無常殺鬼)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지,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런지 하여간 우리는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고 또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을 향해서 또 한 걸음 다가가고,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모르고 그럭저럭 지냈을지언정 이러한 도리를 알고서는 그럭저럭 지낼 수가 없습니다. 꼭 이 선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와야만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댁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를 타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생각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바로 그 자리가 공부할 때인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보통 사람은 속상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상하는 일만 계속해서 생각하고 속상하는 속이 더 상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일을 이것저것 더 생각을 생각해 내면서 점점 더 속을 상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참선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속상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상할 때 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상하는 마음은 한시바삐 없어져야지.

 

속상하는 것은, 확! 부해가 나고 속이 상한 것은 마치 집에 불이 붙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집에 불이 붙으면 빨리 끌수록 좋은 것입니다. 불이 붙은 데다가 휘발유를 갖다 끼얹고, 불 잘 탈 수 있는 나무를 갖다가 더 보태 주고 이렇게 한다면 그 재산은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울화(鬱火), 그래서 썽나는 것을 울화라고 그러거든.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꼭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깊이 속상할 만한 일들을 생각해 내고 더 속상할, 속이 더 깊이 상하도록 이리저리 연구해서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불이 났다 하면 그 불이 어린애가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났건, 자기가 실수를 해서 불이 났건, 도둑놈이 와서 불을 질렀건, 이웃 사람이 와서 불을 질렀건, 남편이 술짐에 불을 질렀건, 누전이 되어서 불이 났건 그 원인은 따질 것이 없습니다.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불이 난 줄 알았다 하면은 즉각 최선을 다해서 불을 꺼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슨 이유로 해서 우리가 부해가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슬픈 생각이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괴로움이 생겼건, 그 이유는 따질 것이 없고 다못 빨리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이렇게 해서 썽내는 불을 꺼야 하고, 슬픔의 불을 꺼야 하고, 괴로움의 불을 꺼야 할 것입니다. 그 불을 끔으로써 귀중한 재산을 지키고 손해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집은 불이 나서 타더라도 또 지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보험에 들어놨으면 헌 집 태우고 좋은 새집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많이 해 놓은 것이 있거나 다른 재산이 있으면 그까짓 쓰러질 것 같이 생긴 보기 싫은 집은 타버린 뒤에 오히려 더 좋게 잘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은 되게 타서 큰 충격을 받아버리면 10년 20년 수명이 단축이 되고 병도 생기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금생에 오랫동안 부해를 나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고, 오랫동안 괴로움에 잠겨 있으면 반드시 육체적인 병이 생기고 결국은 의원이 고칠 수 없는 무서운 중병의 상태에도 이르르고 결국은 죽게도 됩니다.

어쩌서 새로 지을 수 있는 집 같은 것에 불이 나면 백사(百事)를 제(除)하고 그 불을 끄려고 하면서 한번 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우리의 육체와 생명에 불이 붙을 때에는 왜 그렇게 급히 끄려고 하지를 아니하느냐 이 말이여.

 

내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못 꺼줘요. 집에 붙은 불은 이웃 사람도 와서 꺼줄 수가 있고 소방서가 와서 꺼줄 수 있지만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꺼줄 수가 없어. 혹 좋은 말을 해서 위안은 시켜줄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다 그말이여.

열반(涅槃)이라 한 말은 인도 말인데, 니르바나(nirvāṇa)라고 하는 인도 말인데, 중국에서 음으로 음사(音寫)하기를 열반(涅槃)이라 음사를 했는데, 뜻으로 번역하면 적멸(寂滅)이라고 번역을 해요. 적멸(寂滅), '적적할 적(寂)'자 하고 '멸할 멸(滅)'자 하고.

 

'적적하게 멸했다' 그 말은 훨훨 타던 마음에 불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그 뜻의 근원은 그렇게 된 거여.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그말이여.

 

그 방법이 꼭 머리를 깎어야만 참선을 할 수가 있고, 머리 깎은 사람만이 마음의 불을 꺼야 한다. 그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네만 꼭 마음의 불을 꺼야 하고, 세속에서 사시는 분은 불을 안 꺼도 된다 하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에서 사시는 분일수록에 백배 천배 더 노력을 해야 하고 더 생명 바쳐서 참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에 그럭저럭하다가 안 해 놓으면 내생(來生)에 소가 될지, 개가 될지, 지옥에 갈지 누가 보증을 할 것이냐 이 말이여.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출가하신 이 스님네들도, 우리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정든 고향과 청춘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명예를 구해서입니까? 편안함을 구해서입니까? 무슨 권리나 재산을 구해서입니까?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 스님네는 정말 밤잠을 안 자고 모다 공부하신 스님네만 모다 오셨습니다마는, 지혜롭게 열심히 공부를 하되 지혜롭게 공부를 하셔서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를 해서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 데에 끈치지 마시고, 우리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도를 닦을 수 있게 해주시고, 도를 이루게 해주신 국가와 민족과 스승과 부모와 우리의 모든 의식주를 공급해 준 여러 신도님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은 그 진리 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입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허고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이요. 대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일렁하니까 그 대나무 그림자가 따라서 일렁일렁 움직이는 것이 마치 층계를 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여.

대나무 그림자가, 대나무가 바람에 움직임에 따라서 층계를 쓸고 있지만 층계에 있던 문지는 하나도 쓸어지지를 않더라. 움직이지를 않더라.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 달이 고요한 호수에 비추니까 저 호수 밑바닥까지 달이 가서 물을 뚫고 들어가서 호수 밑바닥까지 달빛이 들어갔는데 뚫고 들어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물에는 아무 구멍도 뚫리지를 않더라 그말이여.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문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30분42초~52분1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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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본시산중인~' ;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18권. 「祖師機緣 六祖下第四世之五(南嶽下後第三世之一)」에 나오는 몽암악(蒙菴岳)의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 다섯 가지 큰 은혜를 항상 명심(銘心)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 명심불망오종대은(銘心不忘五種大恩).

①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 : 각기 그 머무는 곳을 편안하게 해 주는 나라의 은혜.

②생양구로부모지은(生養劬勞父母之恩) : 낳고 길러 수고해 주신 부모의 은혜.

③유통정법사장지은(流通正法師長之恩) : 정법을 전해 주신 스승의 은혜.

④사사공양단월지은(四事供養檀越之恩) : 네 가지 공양물(衣食住藥)을 베풀어 주는 신도의 은혜.

⑤탁마상성붕우지은(琢磨相成朋友之恩) : 서로 탁마해서 공부를 완성시켜 주는 도반의 은혜.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 득력(得力).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게송) '죽영소계진부동~'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17.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문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미증(未曾), 부증(不曾) : 일찍이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의 교설은 언어문자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반야경』이나 『능가경』 등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 말을 선종에서 강조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참고 ❶] 『금강선론(金剛仙論)』 (세친=천친 造 | 금강선 釋 | 보리유지 한역) 제5권.

如來從得道夜 至涅槃 更不說一字者 明證法無名相 言語道斷 心行處滅 不可以名相往說 故言不說一字也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밤부터 열반에 드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결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법(法)은 명상(名相)이 없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헤아릴 방법도 소멸하여 명상으로써 설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참고 ❷] 『선교석(禪敎釋)』 (서산대사)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智度論>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마지막 발제하까지, 이 두 기간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외별전의 취지를 가리킨다.<『지도론』>

 

[참고 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제5권 (실차난타 역 | 김진철 번역 | 한글대장경) '3. 무상품 ② 無常品第三之餘'

大慧 若人說法墮文字者 是虛誑說 何以故 諸法自性離文字故 是故 大慧 我經中說 我與諸佛及諸菩薩 不說一字 不答一字 所以者何 一切諸法離文字故 非不隨義而分別說

 

대혜여, 만약 어떤 이가 법을 설하되 문자에 떨어진다면 이것은 허망하게 속이는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경 가운데서 '나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자도 설하지 않고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므로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하여 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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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