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정진(요중선)'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24.04.18 §(106) 요중선(鬧中禪) 정중선(靜中禪) / 보살은 '생사는 본래 없다'고 믿고 닦아 가는 것 / 자기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 반야의 묘용(妙用) / 한 생각 '이뭣고?' 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 2
  2. 2024.04.06 §(185) 행각(行脚) /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운광법사 / 일상생활이 도(道) 닦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장소. 1
  3. 2024.03.12 §(229)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기도를 하여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면 소원을 성취한다 / 제일 먼저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해야 / (게송)송백천년취~. 2
  4. 2024.02.14 §(119)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 신심 / 어떠한 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다 / 이 공부는 승속이 없다 / 진리에 적합한 포교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5. 2024.01.04 §(354)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발심만 제대로 하면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아라. 1
  6. 2023.12.24 §(세등35) 요중선(鬧中禪)과 정중선(靜中禪) / 시끄러운 가운데에 또는 활동하는 가운데에 잘되어야만 그 공부는 정말 살아 있는 공부라 할 수가 있다.
  7. 2023.12.18 §(423) 해제했다고 해이하시지 말라 / 요중선(鬧中禪) / 일념만년 회광반조 밀밀면면 성성적적 수질각차(手跌脚蹉) 의단타파 /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자기한테 있다 / (게송)산화사금수여람~ 1
  8. 2022.11.13 §((114)) 입춘(入春), 업장소멸 / 참선법은 무량겁 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 / 한 생각 단속 / 번뇌망상이 진여불성에서 일어난다.
  9. 2022.04.18 §(308) (게송)대지산하시아가~ / 모든 경계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설(說)하고 듣는 것이 동시(同時)인 것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10. 2021.11.18 §((212))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금강보검의천한~.
생활속 정진(요중선)2024. 4. 18. 20:16

§(106)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익히는 것은 시끄러운 속에서 요중선(鬧中禪)을 하기 위해서 익히는 공부 / 보살(菩薩)은 '원래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닦아 가는 것 / 자기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 마음가짐, 반야(般若)의 묘용(妙用) /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 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익히는 것은 시끄러운 속에서 요중선(鬧中禪)을 하기 위해서 익히는 공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괜찮습니다. 만날 조용한 데서만 해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공부에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는 사람이라, 이 공부가 매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는 것인데, 밤낮 조용한 데서만 익혀야만 공부가 좀 된 것 같고 그래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정말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할 만한 그러한 힘 있는 공부에 힘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야(般若)는 지혜(智慧)인데, 지혜롭게 마음을 쓰면 그러한 묘(妙)한 작용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여서, 우리의 생각 조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180도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으라. 천당과 지옥도 시간과 공간을 멀리 잡고 딴 데에서 딴 시간에 찾지를 말고,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그곳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화두(話頭) 한 번 들 때 지옥이 금방 천당이 되고.

공부는 언제 · 어데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 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입니다.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용106)

 

약 13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 요중선(鬧中禪)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요중선(鬧中禪)은 '시끄러울 료(鬧)' 자, '가운데 중(中)' 자, '참선 선(禪)' 자—시끄러운 가운데 참선하는 것을 요중선(鬧中禪)이라 그러고.
고요한 가운데 하는 참선, 정중선(靜中禪), 그건 인자 조용한 선방이나 조용한 방에서 아무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아니한 조용한 데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죽비를 치고 그렇게 앉아서 공부하면 그것을 정중선(靜中禪)이라 그러고.

밖에 나와서 일하면서 또 차를 타면서 걸어가면서 그런 가운데에 '이뭣고?' 이렇게 자꾸 그 시끄러운 속에서 공부를 다져 나가면 그걸 요중선(鬧中禪)이라 그러는데.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익히는 것은 시끄러운 속에서 요중선(鬧中禪)을 하기 위해서 익히는 공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괜찮습니다.

만날 조용한 데서만 해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공부에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는 사람이라, 이 공부가 매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는 것인데, 밤낮 조용한 데서만 익혀야만 공부가 좀 된 것 같고 그래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정말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할 만한 그러한 힘 있는 공부에 힘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조용한 데에서 기초를 닦고, 시간 있는 대로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해야는 하지마는,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참선하는 데 옆에서 말을 하던지 또 애들이 떠들던지 그러더라도 '아! 공부 좀 헐라는데 시끄럽게 떠든다'고, '저것이 마구니가 와서 그런다'고 신경질을 팩! 내고 그럴 것이 아니라, 이 시끄러운 속에서 오히려 정신을 바짝 챙겨 가지고 화두(話頭)를 한 번 떠억 들어라. 이런 식으로 마음을 써 나간다면 일 자체를 싫어하고 꺼려하고 그렇게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밤낮 조용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조끔 뭐 일할 거리가 생기면은 짜증이 나고 심술이 나고 불평이 나고 그런데, 일을 만나면 일한 속에서도 하고 조용한 시간에는 조용한 데서 하고,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밝은 놈이 오면 밝은 놈을 치고,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어둔 놈이 오면 어둔 놈도 치고, 사방팔면래연가타(四方八面來連架打) 사방팔면에서 오면은 작대기를 연거푸 치고, 허공래선풍타(虛空來旋風打)라, 허공에서 오면은 허공으로 오면은 바람을 돌려서 친다.
이건 보화(普化) 존자의 법문입니다마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정진(精進)을 해 나가면, 납자(衲子) 스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 나가시면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수행 노선이라 훨씬 몸도 건강해지고 정진도 훨씬 더 힘 있게 되어 갈 것입니다.

더욱이 세속에서 사시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께 '보살님'이라 한 이름을 붙여서 불러온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소승 나한(羅漢)은 생사(生死)에 빠지기를 가장 싫어해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에 들려면 첫째, 태중(胎中)에 들어가지 않해야겄다. 이것이 제일 중대한 조건입니다, 나한에 있어서는.
그래서 어쨌든지 '생사의, 태중에 들어가지 아니할려면은 또 그러한 업(業)을 짓지 아니해야 한다' 해 가지고 그러한 마음으로 도(道)를 닦아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조용한 데만 찾기 마련인 것입니다. 사람 상대하기를 싫어하고, 일을 싫어하고 백만사를 멀리 여의고 끊고 여의고 해 가지고 조용한 데로 조용한 데만 찾아 들어가서 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보살(菩薩)은 '원래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닦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가 본래 없는 데 끊을 것이 무엇이 있냐?'

그래서 고인(古人)이 게송(偈頌)을 읊으기를, 일가수폐우중문(一家愁閉雨中門)이요. 한 집은 문을 닫고 비 가운데 근심을 하고 있는데, 삼월나유화하로(三月懶遊花下路)라. 삼월에 꽃 아래 길에서 오락가락한다.
한 집은 비 가운데 문을 닫고 근심한 것은 소승(小乘)의 경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는 데 행여나 비 맞을까 봐서 문을 처닫고 밖에를 나가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비 맞을 것이 무서우니까 집안에서 문을 닫고 근심하고 있는 게고. 한 사람은 삼춘(三春)에 꽃이 만발했는데 그 꽃 아래 길에서 그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서 오락가락 거니는 것.

보살(菩薩)은 세간에 살되, 거기에 세간(世間)이라 하는 것은 전체가 오욕락(五欲樂)인데, 오욕락 속에 살면서 생사 속에 살면서, 영욕(榮辱) 득실(得失)과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 살면서, 조끔도 그런 것에 바람을 타지 아니한단 말여. 흥하면 흥한 대로 살고, 망하면 망한 대로 살고,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살고, 무슨 일이든지 닥치면 닥치는 대로 적절히 일을 처리해 나가되 자기 본심(本心)은 조끔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해 나가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을 해 나간다면 정말 여러분들에게 '보살'이라고 한 이름을 붙여도 조끔도 손색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라고 '보살님 보살님' 옛날부터서 불러 온 걸로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똑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은 행복하게 생각이 되고, 한 사람은 자기만이 불행한 사람으로 느끼면서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째서 같은 여건하에 있으면서 한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한 사람은 불행하게 사냐?
마음가짐이 '자기는 불행하다'고 생각을 해. 자기에게도 반드시 좋은 여건이 있으면서도 그 좋은 여건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면을 자꾸 생각을 하면서 '자기는 불행하다, 자기는 불행하다' 아주 그것을 날이면 날마다 화두를 들듯이 자기는 불행하다고만 생각한 사람은 결국은 그 사람은 불행한—당장 그때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기어코 불행한 정말 명실공히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업이 조끔 여의치 못허다던지, 건강이 좀 좋지 못허다던지, 가정 문제가 원만하지 못헌다던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세속에 있어서 어느 집안이나 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꼭 나쁘게 생각하고 어둡게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원망만 하고 자기 신세만 한탄만 하고 그럴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로 봐줘. 그러한 대로 봐주면서 '그래도 나만한 여건하에 살기도 어렵다. 우리 집안만 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만한 어머니도 만나기 어렵다. 우리 며느리만한 며느리도 드물다' 이렇게 좋게 좋게 생각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고 또 화두를 들고 나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그렇게 마음에 섭섭하게 느껴졌던 어머니 시어머니, 마음에 항시 섭섭하게 생각이 되었던 며느리가 어느덧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게 되고.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그전에 잘못 봤구나. 이러한 좋은 며느리를 내가 그렇게 잘못 봤구나' 이리 생각하고.
'아! 우리 어머니가 난 처음에 시집와서는 굉장히 고약한 시어머니인 줄 알았드니 참 알고 보니까 그러한 좋은 어머니였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반야(般若)의 묘용(妙用)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는 지혜(智慧)인데, 지혜롭게 마음을 쓰면 그러한 묘(妙)한 작용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여서, 우리의 생각 조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180도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으라. 천당과 지옥도 시간과 공간을 멀리 잡고 딴 데에서 딴 시간에 찾지를 말고,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그곳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화두(話頭) 한 번 들 때 지옥이 금방 천당이 되고.

지끔 시절이 뭐 '미끈유월에 뭔 동동팔월이니' 뭐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 지금 춥도 더웁지도 않고 마치 좋은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신도님네들도 이런 좋은 계절을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 주시기 부탁을 드립니다.

공부는 언제 · 어데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 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입니다.(19분5초~32분1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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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 데 쓰는 불교 용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매카리 ; 매가리. 맥아리.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당적(當敵 막다·지킴 당/원수·적·상대 적)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 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나한(羅漢) ; 아라한(阿羅漢)의 준말.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 응공(應供) · 응진(應眞) · 무학(無學) · 이악(離惡) · 살적(殺賊) · 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① 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② 존경받을 만한 불제자.
③ 고대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를 일컫는 말.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 · 멸도(滅度) · 적멸(寂滅) · 적정(寂靜)· 적(寂) · 안온(安穩) · 원적(圓寂) · 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원래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일가수폐우중문(一家愁閉雨中門)이요. 한 집은 문을 닫고 비 가운데 근심을 하고 있는데, 삼월나유화하로(三月懶遊花下路)라. 삼월에 꽃 아래 길에서 오락가락한다. 한 집은 비 가운데 문을 닫고 근심한 것은 소승(小乘)의 경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9~160. (가로판 p165~166)
(73)聲聞은  宴坐林中호대  被魔王捉하고  菩薩은  遊戱世間호대  外魔不覔이니라

성문은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되 마왕에 붙잡히고, 보살은 세간에 노닐어도 외마가 보지 못하느니라.

(註解) 聲聞은  取靜爲行故로  心動이요  心動則鬼見也라  菩薩은  性自空寂故로  無迹이라  無迹則外魔不見이니  此는  合論二乘菩薩하니라
【三月懶遊花下路어늘  一家愁閉雨中門이로다

성문은 고요한 것만 지킴으로써 수행을 삼는 까닭에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귀신이 보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성품이 본래 비고 고요하므로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으면 외마가 보지 못한다. 이것은 이승과 보살을 합쳐서 말한 것이다.
【봄바람 꽃길에서 오락가락 노니는데, 한 집은 빗속에 문을 닫고 근심하네.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 · 변화 · 흐른다는 시간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가운데 · 간격 · 틈새라는 공간의 뜻이 있다.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영욕(榮辱 영화 영/욕될 욕) ; 흔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철되는 영광(榮光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과 치욕(恥辱 부끄럽고 욕됨)을 아울러 이르는 말.
*득실(得失 얻을 득/잃을 실) ; ①이익과 손해. ②얻음과 잃음. ③성공과 실패.
*흥망성쇠(興亡盛衰) ; 흥하고 망함과 성하고 쇠함. 곧 어떤 사물 · 현상이 생겨나서 소멸하는 전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반야(般若) ; 산스크리트어 prajñā 팔리어 paññād의 음사(音寫). 혜(慧) · 지혜(智慧) · 명(明) · 혜명(慧明)이라 번역.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묘용(妙用) ; 신묘(神妙 : 신통神通하고 기묘奇妙함)한 작용(作用).
*신통(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①신기(神奇 : 신비롭고 기이하다)할 정도로 묘(妙)하다. ②모든 것을 신기(神奇)롭게 통달(通達)함.
*지끔 시절이 뭐 '미끈유월에 뭔 동동팔월이니' 뭐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 ‘깐깐오월, 미끈유월, 어정칠월, 동동팔월’
*깐깐오월(깐깐五月) ; 해가 길어서 일하기 지루한 달이라는 뜻으로, 음력 5월을 이르는 말.
*미끈유월(미끈六月) ; 쉽게 지나간다는 뜻으로, 음력 6월을 이르는 말.
*어정칠월 동동팔월 ; 농가에서, 농사일이 바쁜 음력 칠월은 어정거리다가 가고, 팔월은 추수에 바빠 동동거리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4분48초)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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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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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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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85)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언제나 행각(行脚)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공안)어째서 운광법사와 같은 선지식이 소의 과보(果報)를 받았느냐?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 /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

**송담스님(No.185)—1982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용185) (생활속 정진)

 

약 21분.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에, 중국(中國)에 동산숭장로(東山崇藏老)라고 하는 선지식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나가는, 행각(行脚)으로 나가는 제자에게 설(說)한 그 법문(法門)을 해 주셨는데, 설사 머리를 깎지 않고 속가(俗家)에서 가정을 가지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하는 그러한 생활을 하신 분, 또는 출가(出家)를 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평생을 도(道)를 닦는 그런 스님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언제나 행각(行脚)을 지금 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를,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지 아니하고 그렁저렁 살아가는 사람은 말고, 참으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더라도 행각에 나서고 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각에 나선 사람은 자기의 고향과 부모를 다 여의고 떠나왔으며, 또 자기의 은사(恩師) 스님이 계시는 그 절도 이미 하직(下直)을 하고 선지식(善知識)과 도반(道伴)을 찾어서 이미 길을 떠나 있거든.
고향과 부모를 떠났고 거기에서 다시 은사와 자기가 살던 절도 버리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행각에 나선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며 무슨 딴 일을 할 틈이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소지(掃地)를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하면 후일(後日)에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너의 밥값을 따져서 계산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운광법사(雲光法師)라 하는 큰스님이 계셨었는데, 계행(戒行)이 청정(淸淨)하고 설법(說法)을 잘해서 그 운광법사가 법문을 하시면 뜰 앞에 있는, 또는 산에 있는 바위도 감동이 되어 가지고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또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설법을 잘하시면 그 바윗덩어리가 감동이 되어 가지고 고개를 꺼떡꺼떡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쏟아지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런데 그 운광법사가 많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시기를, "시주(施主), 시주것은 그 쌀 알갱이 하나에 은혜(恩惠)가 일곱 근 반이라, 그렇게 시주에 물건이라 하는 것은 은혜가 그렇게 지중(至重)한 것인데, 그 무서운 시주것을 먹고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어서 소가 되느니라. 소가 되어 가지고 그 시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평생토록 죽도록 피땀 흘려서 일을 해서 그 은혜를 갚어야 하고, 죽어서는 피와 고기와 가죽으로써, 가죽과 뼈로써 또 그 은혜를 빚을 갚어야 하고, 한 생 동안 소노릇을 해서 못 갚으면은 죽자마자 다시 또 소가 되어 가지고, 소로 태어나 가지고 또 그 은혜를 갚고 해서 몇백 생, 몇천 생토록 그 은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렇게 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설법을 하시니까 그 어떤 스님 한 분이, "그러시다면 큰스님께서는 능히 그 시주에, 그런 시주가 바친 그런 그 무서운 시주것을 다 능히 소화시킬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하고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그 운광법사가 대답하기를, "능소(能消) 능소(能消)! 능히 소화를 시키고말고!"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소가 되었습니다.
큰 황소가 되어 가지고 "움메~ 움메~" 하고 우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운광법사처럼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고 그렇게 도(道)를 열심히 닦고, 그래 가지고 큰스님이 되어서 저렇게 설법을 잘해 가지고 많은 중생들을 교화(敎化)를 하셨는데 어째서 소가 되었느냐?'

그 운광법사가 소가 되어 가지고 죽은 다음에 그 운광법사, 그 소를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그래 가지고 큰 북을 만들어 가지고 절에다가 그 북을 만들어서 걸고, 아침저녁으로 예불(禮佛)할 때는 그 북을 쳤던 것입니다.
그 북소리를 듣고, '운광법사와 같은 그러한 큰스님도 이렇게 소가 되었는데, 하물며 그밖에 누가 소가 되지 않겠다고 자긍(自矜)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것을 거울삼아서 게을리 해태(懈怠)에 빠지지 말고 목숨 바쳐서 도를 닦을지니라' 이러한 뜻으로 큰 절에는 다 북을 매달아 놓고 조석(朝夕)으로 치는데.

'어째서 운광법사와 같은 그러한 대도사가, 대 선지식이 소의 과보(果報)를 받았느냐?' 이것이 하나에 공안(公案)입니다.

'어째서, 도(道)도 안 닦고 계행(戒行)도 안 지키고 그렇다면 혹 소가 된다 해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운광법사처럼 그렇게 계행이 청정하고 도를 그렇게 참 철저히 닦고, 설법을 그렇게 참 부처님 설법을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지고 바위가 고개를 꺼떡거리고 이렇게 감동을 주는 그러한 대법사(大法師)가 어째서 소가 되었느냐?'(17분36초)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고, 밤잠을 덜 자고, 말을 적게 하고, 쓸데없이 외출을 하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데에도 있는 것도 아니요, 밥을 안 먹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그러한 것들이 수행하는데 마땅히 좋은 수행자로서 다 주의해야 할 점이고 지켜야 할 점인데 또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여.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평생 동안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는, 그런다고만 해서 '그것이 가장 도를 잘 닦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평생 동안 묵언(默言)을 하고 벙어리 노릇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도(道)를 가장 잘 닦는다 할 수도 없는 것이여.
만약에 눕지 않는 것으로써 제일가는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는 금방 도(道)를 이룰 것이고, 말을 아니한 것으로써 가장 훌륭한 도를 닦는 것으로 여긴다면 벙어리는 일찌감치 도를 통할 것이고, 뭘 듣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는 것으로써 도를 삼는다면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제일 먼저 도를 툭! 통하고 말 것이겠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먹고, 자고, 듣고, 보고, 말하고, 걷고, 그러하면서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눈이라 하는 것은 '보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보고, 귀라 하는 것은 '들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듣고, 입은 '말하고 밥 먹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밥 먹을 때는 밥 먹고 말할 때는 말을 하고, 밤이 오면 '자라'고, 쉬는 시간이니까 쉴 때는 쉬되 거기에 착(着)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 나간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사람이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이다.

묵언을 한답시고 말은 아니하면서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參見)하고 온갖 참견을 다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다고 밤 잘 때 옆구리는 땅에 대지 아니하면서 종일토록 혼침(昏沈)에 떨어져서 꾸벅꾸벅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해 가지고 무슨 도(道)에 보탬이 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편행외도(遍行外道)는 하루에 공양(供養)을 한 끼밖에는 아니하고 장좌불와를 하고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고행(苦行)을 다 해도 그것이 참으로 바른 도를 깨닫지를 못했고, 밥 먹을 때 먹되 과식을 하지 아니하고, 말을, 할 말을 하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되 대도(大道)를 성취한 선지식(善知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평상시(平常時), 말하고 듣고 보고 걸어가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하는 이 평상(平常)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이는 것, 그리고 하루에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시간 생활을 한 것도 대단히 필요한 것이고 그렇되, 참으로 공부를 알차게 하려면 입선할 때뿐만이 아니라 방선(放禪) 시간, 결제 때뿐만이 아니라 산철에, 또 앉어 있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걸어 다닐 때나, 똥을 눌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바로 그때, 그 시간 그 장소 그 일에 있어서 경계(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해 나가는 이러한 수행자라야 도를 빨리 그리고 바르게 성취할 것입니다.

사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복잡하고 이상스럽고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중생에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이것을 돌이켜서 자기(自己)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입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화두를) 들고, 글안으면 경계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낸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彌勒)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닦어도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다고 과거에 모든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평상심(平常心),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 그 점에 대해서 강조를 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6분52초~27분5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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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에, 중국(中國)에 동산숭장로(東山崇藏老)라고 하는 선지식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나가는, 행각(行脚)으로 나가는 제자에게 설(說)한 그 법문(法門)을 해 주셨는데’ ;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동산 숭장주가 행각을 떠나는 제자에게 하신 법어)」 (가로판) p119~131.

① (전강 선사께서 하신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② (송담 스님께서 하신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행각(行脚) : ①수행자가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스승이나 벗을 구하여, 자기의 수행이나 교화를 위해 곳곳을 편력하는 것. ②스승의 슬하(膝下)를 떠나서 선(禪)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좋은 벗을 구하여, 마치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이 발길 닿는 대로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 이것을 행하는 자를 행각승(行脚僧) 또는 운수(雲水)라고 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속가(俗家) ; ①스님이 되기 전에 속했던 가정(집). ②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집.
*출가(出家) : [산스크리트어] pravrajyā 또는 pravrajita '집[家]에서 나온다[出]'는 말이다. 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2~133. (가로판 p139)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은사(恩師) ; ①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 ②자기를 출가시켜 길러 준 스승.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라고도 함.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하면 후일(後日)에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너의 밥값을 따져서 계산하게 될 것이다’ ; 밥값[飯錢] 계산[打算]. 타산반전(打算飯錢).
*타산반전(打算飯錢 셀 타/계산 산/밥 반/값 전) ; 밥값[飯錢] 계산[打算].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용화선원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동산숭장주가 제자를 행각 보내면서 하신 법어) p119~122. (가로판 p117~119)
大凡行脚은 須以此道로 爲懷호리니 不可受現成供養了하고 等閒過日이니라. 須是將生死二字하야 釘在額上하야 十二時中에 裂轉面皮하고 討箇分曉하야사 始得이니라

대저 행각할 때에는 모름지기 이 도(道)로써 회포(懷抱)를 삼을지니, 현성(現成)한 공양을 먹고 등한히 날을 보내지 말지니라. 모름지기 이 생사(生死) 두 글자를 가져, 이마에 두어 열두 때 가운데에 면피(面皮)를 열전(裂轉)하고 이것을 찾아 분명히 알아야사 비로소 옳으니라

若祗隨群逐隊하야 打空過時하면 他時에 閻羅老子가 打算飯錢하리니 莫道我與爾不說이니라

만약 무리를 따르고 떼를 좇아서 헛되이 시절을 지내면, 다른 때에 염라노자가 밥값[飯錢]을 타산(打算)하리니, 내가 너를 위해 「설해 주지 않았다」고 이르지 말지니라.

若做工夫인댄 須要日日打算하며 時時點檢호대 自轉鼓起來로 至二更히 看那裏是得力處며 那裏是不得力處며 那裏是打失處며 那裏是不打失處오호리라 若如此做將去하면 定有到家時節하리라

만약 공부할진댄, 모름지기 나날이 타산(打算)하며 때때로 점검하되, 북치고 일어나서부터 이경(二更)에 이르도록 「어느 곳이 힘을 얻은 곳이며 어느 곳이 힘을 얻지 못한 곳이며, 어느 곳이 잃은 곳이며 어느 곳이 잃지 아니한 곳인가?」하고 살펴볼지니라. 만약 이와 같이 공부하여 가면, 결정코 집에 이를 시절이 있으리라.

[참고 ❷] 『선관책진(禪關策進)』 「조사들의 법어(諸祖法語節要 第一)」 '동산연선사(東山演禪師) - 행각을 떠나려는 제자에게[送徒行脚]'
須將生死二字 貼在額頭上 討取箇分曉 如只隨群作隊 打哄過日 他時閻老子 打算飯錢 莫道我不曾說與爾來

반드시 「생사(生死)」 두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고 이 일을 분명히 밝혀라. 다만 무리를 따라 떼를 지어 헛된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면, 다른 때에 염라대왕이 밥값을 계산할 것이니, 내가 너를 위해 미리 '설해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라.

[참고 ❸]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示覺成禪和(각성선화에게 보임)'
眞實決定欲成此段大事因綠 立決定信 生堅固志 於二六時中 四威儀內 提起本參話頭 提來提去 疑來疑去 不覺參到話頭 不提自提 疑團不疑自疑之地 飜身一擲 更無閑言長語

진실로 결정코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綠)을 이루고자 하거든, 결정적인 믿음을 세우고 견고한 뜻을 내어, 하루종일 사위의(四威儀) 안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야 한다. 언제나 들고 늘 의심(疑心)하면 어느새 참구하는 화두가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의심덩이[疑團]가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는 몸을 뒤쳐 한번 내던지고 다시는 부질없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其或未然 話頭或時明白 或時不明白 或現或不現 或有或無 或間斷不間斷 是爲信心不竪 立志不固 如此虛送日月 空受信施 他時後日 未免閻羅老子 打算飯錢
是謂空來世上 打一遭耳 何暇更求閑言長語 長句短句東指西指者也 思之思之

혹 그렇게 되지 않아 화두가 어떤 때는 명백하고 어떤 때는 명백하지 않으며, 어떤 때는 나타나고 어떤 때는 나타나지 않으며,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으며, 어떤 때는 간단(間斷 끊김)이 있고 어떤 때는 간단이 없거나 하면 그것은 신심과 의지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을 허송하면서 헛되이 신도의 보시만 받으면, 뒷날 염라대왕의 밥값을 계산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부질없이 세상에 와서 한번 만났을 뿐이라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잔소리 긴소리 하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겠는가? 생각하고 생각하라.

[참고 ❹]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권) '興聖寺入院小說(흥성사 주지로 계시면서 하신 법문)' (무비 역주 | 민족사) p144.
又有衲衣在空閑 巡山傍水 節身時食 去於輕軟 輕忽上流 致使心漏不盡 理智不明 空到老而無成 作薄福德業 他日閻王老子 打算飯錢之時 莫道老僧不與你說 汝若不聽 吾未如之何也已矣

또 어떤 이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살거나, 산을 넘고 강을 가까이하면서 몸을 다스리고 하루 한 끼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가볍게 스스로를 다 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만일 번뇌가 다하지 못하고 이치와 지혜를 밝히지 못한다면 부질없이 늙어버릴 것이니, 이룬 것 하나 없이 박복(薄福)한 업(業)만 짓다 죽어, 다른 날에 염라대왕이 밥값을 내놓으라고 할 때 이 노승(老僧)이 여러분에게 일러주지 않았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듣지 않는다면 나인들 어찌하겠습니까?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시주것은 그 쌀 알갱이 하나에 은혜(恩惠)가 일곱 근 반이라’ ; 일미칠근(一米七斤).
*일미칠근(一米七斤) ; ‘쌀 한 톨을 생산하기 위해 농부가 흘리는 땀의 무게가 일곱 근이다’라는 말로, 쌀을 비롯한 모든 생산물이 매우 소중하고 귀한 정성이 들어간 것임을 알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들에 감사하고 아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42~145. p147. (가로판 p149~151. p154)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註解) 傳燈에  一道人이  道眼이  未明故로  身爲木菌하야  以還信施하니라.

아 ! 불자여。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주해) 전등록에 「옛날 어떤 도 닦는 사람이 도의 눈이 밝지 못한 탓으로 죽어서 나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니라.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註解) 智論에  一道人이  五粒粟으로  受牛身하야  生償筋骨하고  死還皮肉하니 虛受信施가  報應如響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하시니라.
(주해)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하시니 헛되이 시주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라 하시니라.
(註解) 進食을  如進毒者는  畏喪其道眼也요  受施를  如受箭者는  畏失其道果也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할지니,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의 두려워할 바라」하시니라.
(주해)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듯 하라는 말은 도의 눈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이고,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듯 하라는 말은 도의 열매를 잃을까 두려워함이니라.

[참고 ❷] (1)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권상(卷上) 백운화상초록(白雲和尙抄錄 | 원조각성 번역·해설 | 현음사) p111~112. (2) 『전등록(傳燈錄) 1』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10 참고.
迦那提波尊者得法 後至毗羅國 彼有長者 名梵摩淨德 一日園中 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多 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他人 皆不能見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其比丘道眼未明 虛沾信施故 報爲木菌 唯汝與子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七十有九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其樹不生耳

가나제바 존자께서 용수 대사에게 법을 얻으시고 그 뒤에 비라국에 가시었다. 그곳에 장자가 있으니 이름은 범마정덕이었다.
어느 날 정원 가운데 나무에 큰 귀가 생기되 버섯과 같고 맛은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두 번째 아들 라후라다가 따다 먹었는데 따고 나면 다시 자라고, 없어진 다음에도 다시 또 생겼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

이 때 가나제바 존자께서 그 전생의 인연을 아시고 드디어 그 집에 가셨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가나제바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전생에 한 비구를 공양했다. 그러나 그 비구는 도안(道眼)이 밝지를 못해서 헛되이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무의 버섯이 되었다. 오직 너와 너의 둘째 아들만이 정성껏 그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다”

또 물으시되 “장자의 나이가 얼마냐?” 장자가 답하기를 “79세입니다”
가나제바께서 이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도에 들어가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시주의 것을 갚아주나니, 너의 나이가 81세가 되면 그 나무에서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지중하다(至重-- 이를 지/무거울·소중할 중) ; ①(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무겁다. ②(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禮拜)하는 의식.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자긍(自矜 스스로 자/자랑하다·아끼다·공경하다 긍) ;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짐. 또는 그 긍지.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 ; 밤이 되어도 눕지 않고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편행외도(遍行外道) ; 출가 외도(外道)의 한 종류.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사분정진(四分精進) ;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네 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씩 시간을 정해 정진하는 것.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 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글안으면 ; ‘그렇지 않으면’의 사투리.
*미륵하생(彌勒下生) : 미륵은 범어로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이다.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평상심(平常心) ; 평상시(平常時)와 같은 마음.
*평상시(平常時) ; 평상(平常).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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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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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4. 3. 12. 14:02

§(229)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기도를 하여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면 소원을 성취한다 / 제일 먼저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해야 / (게송)송백천년취~.

내 자신을 먼저 바로잡고,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서 그렇게 하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들에게, 이렇게 해서 그것이 차츰차츰 멀리 멀리 뻗쳐 나가면 이웃과 모든 이 우리의 동포와 인류에게까지 그 성스러운 마음씨가 번져 나가도록.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평화(平和)로 향하게 하고 이 지구의 멸망을 막아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그러한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1) 약 8분.

 

(2) 약 11분.


(1)------------------

신수(身數)기도, 일주일간 인자 신수기도를 열심히 하셔야지요. 정성(精誠)껏 일주일 동안을 기도를 하셔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만 정성껏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마음속이 그뜩해 가지고 생각마다 고약한 생각, 말마다 고약한 소리, 행동을 고약한 행동을 하면, 일주일 기도를 아무리 정성껏 했기로서니 어떻게 그 사람에게 한량없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냐 그 말이여.

해마다 정월(正月)에는 그 해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좋다' 하는, 어떠한 해는 「마음보를 고치자」 그러한 말씀도 내가 했고, 작년에는 「썽을 내지 말자」 이런 말씀을 했는데, 금년에도 「썽을 내지 말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내게 하지 말자」
다른 사람 속을 이리저리 속상하게 만들어 놓고 "너 금년에는 썽을 안 내는 해여" 이래 해 가지고 약을 올리고, 「자기도 썽을 안 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게 하자」 금년에는 이렇게 나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썽 안 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복(福)을 짓는 것은 남에게 모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베푸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남의 마음을 어떠한 내가 충격을 가해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게 하는 거, 속상하게 하는 거—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짓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그것이 복을 짓는 데에 보다 더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 열 가지 한 것 보단 남 못할 일 한 가지 안 하는 것이 더 좋다' 하는 그러한 옛날의 말씀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남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하면서 가끔 말을 갖다가 박(薄)하게 해 가지고 남의 오장(五臟)을 활딱 뒤집어놓는 성미(性味)가 있단 말이여.
하는 일마다 본받을 일이 많고 아흔아홉 가지를 다 잘하는데, 가끔 그 말 한마디를 잘못해 가지고 남을 갖다가 오장을 쑤시는 그러한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것 참 아흔아홉 가지 공을 공(功)들여서 탑을 99층 탑을 쌓아 가지고, 한마디 그 독(毒)한 말로써 그 99층 탑을 때려부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그러한 분들을 잘 보살펴드리고 또 그러한 스님네를 잘 공양을 하는 것 대단히 좋고 그건 반드시 실천을 하되, 돈 안 들고 힘 안 들이고 공덕(功德)을 쌓을 수 있는 길.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같은 말이라도 남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줘.
그래서 부처님은 '망어(妄語)나 기어(綺語)나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하지 아니할뿐만 아니라, 따듯한 말, 부드러운 말, 자비(慈悲)스러운 말, 사랑하는 말로써 모든 어른과 친구와 아랫사람 이웃 사람에게 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 큰 복(福)을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내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말 한마디 비끗 잘못해 가지고 내가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행동의 중간에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이것이 삼업(三業)인데, 마음에 뭔 생각[意]이 나면 결국은 말[口]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身]으로써 그것이 실천이 되는데.
마음에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난 것은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밖으로 표현이 되고, 그다음에는 행동으로써 그것이 구체화(具體化)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떠오르기만 하고 밖으로 표현이 안 되면 자기의 문제로서 끝나지만, 말로써 이미 표현이 되어 버리면 긁어 담지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행동으로 실천을 해 버린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말, 불쑥 말이 나오기가 쉬운데, 한번 나가 버리면 그때 입을 탁! 막아 봤자 이미 소용이 없어요. 돈 안 들이고, 힘 안 들이고 사람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그러한 좋은 길.

그 말 한마디,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야만 사람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불쑥 잘못해 가지고 참 집안에 모든 시비(是非)도 일어나고, 친구 간에 의(義)도 상하게 되고, 그 대중(大衆)도 소란하게 맨들고,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제일조(第一條)에 그 '말을 적게 하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이 전해온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35분52초~43분23초)





(2)------------------

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하시되, '참 기도(祈禱)'는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어.
성현(聖賢)의 마음은 언제나 허공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면 내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면 바로 성현(聖賢)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여.
3일 기도나 일주일 기도 또는 백일 기도를 그렇게 그 열심히 하는 거, 오대산(五臺山)이나 강화(江華) 보문이나 저 홍련암이나 남해 보리암, 그런 성지(聖地)에 가서 그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은 '내 마음을 허공(虛空)과 같이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를 하는 거다' 그 말이여. 허공과 같이 하면은 바로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성현의 마음이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그저 속으로는 이 고약한 마음을 가뜩 품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가뜩차 가지고 잘되게만 해 달라고 막 빌어 대는데, 빌어 대다 보면은 천번 만번 백만번 천만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나 또는 그런 성현의 명호(名號)를 부르는데, 부르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져 가지고 성현의 마음과 같이 되니까 거기에서 원을 성취하게 되는 거여.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설사 성현의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이 청정해지니까 그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잠깐 한마디 원(願)을, 크고 작은 원을 세워도 바로 그 원이 성취가 잘되는 도리(道理)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가 끝난 뒤에 항시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실 것, 평상시(平常時)에 열심히 하실 것이며, 아까 말한 늙고 병들고 약하고 외로운 노인, 저 백리 밖에 사는 남의 노인도 그런 노인이 있으면 잘 돌봐주어야 할 텐데,
하물며 자기 집안에 계신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무리 말이 많고 성질이 괴팍하고 며느리를 별로 이뻐하지 않는 그러한 시어머니 시아버지라 할지라도, 정말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참다운 마음으로 부처님 받들듯이 잘 받들어 모시면 그러한 아주 고약한 성미를 가지신 어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감동이 되어 가지고,
'정말 내 며느리가 이 세상에서는 제일 착하고 이쁘고 좋은 며느리로구나. 아, 내가 저런 좋은 며느리를 너무 내가 볶아 대고 고약하게 굴었구나'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을 하고, 자기 마음을 그 며느리로 인해서 마음보를 고치고, 그래 가지고 정말 착하고 고운 마음씨가 된 그러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 여생(餘生)을 마치게 되고, 그래야만 그 할아버지 할머니도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성미가 괴팍하고 아주 인정머리 없고, 일평생 동안 며느리를 이뻐하지 아니하고 볶아 댔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저 늙은이가 빨리 죽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저 늙은이를 어디로 내보내 버릴 것인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미워하고 원망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점점 더 미워하게 되고 나중에는 노망하게 되면 며느리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저년이 내 집구석 망해 먹을라고 들어온 년이다' 그래 가지고 이를 갈아붙이고 '이년, 이년' 하고 계속 저주를 하다가 눈을 감게 되면, 그 노인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못하고 계속 그 집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며느리와 그 며느리 뱃속에서 나온 아들딸들을, 이놈에가 붙었다 저놈에 가 붙었다 하면서 계속 못살게 굴어 가지고 결국은 그 집안은 재앙(災殃)이 끊일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데부터서 잘해야 혀.
그러면 누가 제일 가까우냐? 내가, 나 자신이 제일 가깝거든.

그래서 내 자신을 먼저 바로잡고,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서 그렇게 하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들에게, 이렇게 해서 그것이 차츰차츰 멀리 멀리 뻗쳐 나가면 이웃과 모든 이 우리의 동포와 인류에게까지 그 성스러운 마음씨가 번져 나가도록.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평화(平和)로 향하게 하고 이 지구의 멸망을 막아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그러한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하고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牧丹一日紅)허되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허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라.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세상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를 안 해요. 그냥 ‘소나무 푸르거니’ 하고 별로 소나무를 그렇게 이뻐할 줄을 모른다 그 말이여.

그런데 목단(牧丹)은 하룻동안 빨갛게 이쁘게 피었다가 져 버리는데,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 아름답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무량(無量)의 복락(福樂)을 얻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법은 세상 사람들이 시드르르 하게 생각하고,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은 내 뜻대로 되어 봤자 잠깐 쌈빡하다 말아버린 것이고, 그 뒤끝은 천하 허망(虛妄)하고 한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은 재산과 색과 명예와 권리에는 모두가 거기에는 빠져 가지고 헤어날 줄을 모르는구나.(58분28초~68분46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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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마음보 ; 마음을 쓰는 속 바탕.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박하다(薄-- 엷다·얇다·적다·야박하다 박) ; ①(마음 씀씀이나 태도가) 너그럽거나 푼푼하지 못하여 야멸치고 쌀쌀하다. ②(이익이나 소득이) 많지 않아 보잘것없다. ③(무엇이) 두께가 얇다. ④(물건의 품질이) 변변하지 못하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망어(妄語) ; 거짓말이나 헛된 말.
*기어(綺語) ;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양설(兩舌) ; 이간질하는 말.
*악구(惡口) ;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자비(慈悲) : [산스크리트어] maitri  자비는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네 가지 끝없는 마음[四無量心] 가운데 두 가지이다. 모든 중생에게 실제로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慈能與樂), 중생의 고통을 실제로 덜어 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 걱정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 내어 주는 것을 「비(悲)」라고 한다(悲能拔苦).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 이것이 삼업이다.





------------------(2)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지극정성(至極精誠 이를·매우·궁극·극진히 할·깊을 지/극·다할·막다른 지경·매우 극/깨끗하다·정성스럽다 정/정성·진실 성)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 · 관세음(觀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나반존자(那畔尊者) ; 나반존자는 우리나라에서 말세의 복밭이라고 신앙하는 나한(羅漢).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獨] 수행(修行)한 성자(聖者)의 뜻으로 독성(獨聖) · 독수성(獨修聖)이라고도 한다.
이 존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일을 꿰뚫어 알고 있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준다고 함.
*명호(名號) ; 명자(名字), 명(名)이라고도 함. 이름. 주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기에 존호(尊號), 가호(嘉號)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명호(名號)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 커다란 작용이 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등의 행(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게송)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묘지곽(妙智廓) 게송 참고.
*목단(牧丹 치다·기르다 목/붉다·모란 단(란)) ; 모란(牡丹).
*모란(牡丹 수컷·양성 모/붉다·모란 단(란)) ; ① 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털이 없으며, 잎은 크다. 늦봄에 붉고 큰 꽃이 피는데 꽃빛은 보통 붉으나 개량 품종에 따라 흰색, 붉은 보라색, 검은 자주색, 누런색, 복숭앗빛을 띤 흰색 따위의 여러가지가 있다. ② ‘①’의 꽃.
‘丹’의 경우 본음은 ‘단’이나 ‘牡丹’의 경우, 속음인 ‘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여 ‘모란’으로 적는다.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량(無量 없을 무/헤아릴 량) ; ①헤아릴[量] 수 없이[無] 많음. ②[불교] 가히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화엄경》에 나오는 백이십 수(數) 중 한 수의 이름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쌈빡하다 ; ‘산뜻하다’의 사투리.
*산뜻하다 ; 기분이나 느낌이 깨끗하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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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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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4. 2. 14. 16:59

§(119)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참다운 신심(信心) /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話頭)가 들어질 수밖에 없다.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다 /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자기의 소임을 성심성의껏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진리에 적합한 포교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무언동자암차허.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菩薩道)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 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布敎) 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19)—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 19분.

 


철저한 신심(信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 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 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佛菩薩)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大道)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話頭)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禪房)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 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精進)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參禪)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는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佛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佛弟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菩薩道)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 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布敎) 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解脫)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 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 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도리가 다르냐 틀리냐?” 이렇게 만공 스님께서 조실 스님께 물으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32분38초~51분1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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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 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 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칠통을 타파(打破) ; 타파칠통(打破漆桶). 무명(無明)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중생의 마음을 타파하여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승속(僧俗) ; 스님[僧]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燎原 화톳불·태울·들불 요(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보살도(菩薩道) ; ①보살의 수행. 보살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 깨달음에 이르는 도. ②대승불교.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게송)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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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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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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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54)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발심만 제대로 하면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아라.

**송담스님(No.354)—1988년 동안거 해제(88.01.15.음) (용354) (요중선)

 

약 8분.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뚧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 너그러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상두관(上頭關),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철(了徹)해 버리면 이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하는 것이여. 그래버려야 산하대지가 너그러운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대, 인간에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녹수청산(綠水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거든.

여기 이 법보선원(法寶禪院)이 공기가 좀 나쁘고, 자동차 공장 모다 소음이 있고, 또 공양(供養) 모다 그런 수용(受用)이 박하고, 여러 가지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한들,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분별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좀 시끄러운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좀 박한 것이 오히려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고,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에 발심(發心)한 사람도 있고 발심이 덜 된 사람도 있고, 또 괴각(乖角)이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에의 어떠한 경계(境界)에, 다른 사람에,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 맞는, 도업(道業)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天堂)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흡족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 여러분들도 해제를 하고 오늘 다 댁으로 모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선방(禪房)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시지 말고, 바로 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시끄럽게 떠들고 모든 것이 내 마음과 같지 못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나간다면, 그 복잡한 세속(世俗),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세속, 가정, 사회가 온통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남편은 부처님이요, 아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며느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손자손녀는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을 지내다가 다음 또 여름철에 오셔서 방부를 들이고 또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정진하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법상(法床)을 내려가고자 합니다. (43분30초~51분6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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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 ; ①『석문의범(釋門儀範)』 다비문(茶毘文)—쇄골편(碎骨篇) 참고. ②卍新纂續藏經 제65책 《高峰龍泉院因師集賢語錄》 제13권 ‘涅槃法語門—散灰’ 참고.
*상두관(上頭關) ; 조사관(祖師關).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요철(了徹 마치다·완전히·깨닫다 요/통하다·꿰뚫다 철) ; ①완전히 통하다. 꿰뚫어 마치다. ②꿰뚫어 깨닫다.
*투득하다(透得-- 통할 투/얻을 득) ; (사람이 무엇을)막힘이 없이 환하게 깨닫다.
*너그럽다 ; ①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 ②폭 따위가 여유 있게 넓다. ③경사가 급하지 아니하다. ④움직임이 완만하다.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법보선원(法寶禪院) ; 인천시 미추홀구 주염로 43에 있는 용화선원(龍華禪院)에 있는 스님 선방(禪房)의 이름.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괴각(乖角 어그러지다·어긋나다·거스르다·비정상이다·비뚤어지다 괴/뿔·모진 데·다투다 각) ; 어긋나고 틀어지다. 언행(言行)이 대중의 질서를 따르지 못하고, 유달리 어긋나는 짓을 말하며, 또는 그러한 짓을 하는 사람.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용맹(勇猛 날래다·용감하다·결단력이 있다·강하다 용/굳세고 용맹스럽다·맹렬하다·굳고 강하다 맹) ; 기운차고 씩씩하며 두려움 없이 용감함.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참고]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65. 4권.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波斯匿王於閑靜處 作是思惟 '佛所敎法 極有義利 能得現報 無有熱惱 不待時節 能將於人到于善處 語諸人言 <汝等來 善示汝妙法> 夫爲智者 自身取證 深得解達 須善友 須善同伴 恒應親友如是善友 不向惡友幷惡知識 遠離惡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바사닉왕이 조용한 곳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지극한 뜻[義]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고, 심한 번뇌를 없애고, 때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서 좋은 곳에 이르게 하시며, 여러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오너라. 너희들에게 미묘한 법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니, 슬기로운 이는 몸소 증득해서 깊이 이해하고 통달한다. 그리고 착한 법과 착한 동반자를 구해서 그와 같은 착한 벗을 항상 친근케 하며, 악한 벗과 악한 지식(知識)에게 향하지 않게 하고 나쁜 도반을 멀리하게 하시는구나'

思惟是已 從坐處起 往詣佛所 在一面坐 白佛言 "世尊 我於閑處 作是思惟 '佛所敎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無諸熱惱 不待時節 乃至不與惡友交遊'" 佛告王曰 實爾 實爾 佛所敎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乃至不與惡伴交遊"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조용한 곳에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며, 심한 번뇌를 없애고, 때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 나아가 나쁜 벗과 사귀지 못하게 하신다'"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실로 그렇고 그렇소이다. 부처가 가르치는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게 하며, 나아가 나쁜 벗과 사귀지 못하게 하오"

我於往時 在王舍城耆梨跋提林 爾時 阿難比丘獨在靜處 作是思惟 善知識者 梵行半體 阿難起已 來至我所 頂禮我已 而作是言 善知識者 梵行半體 非惡知識 惡伴 惡友

내가 옛날 왕사성 기리발제(耆梨跋提) 숲 속에 있었을 때, 아난(阿難) 비구가 혼자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소. '선지식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절반의 힘은 되겠다'
그러고 나서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처소로 와서 나에게 예배하고 이러한 말을 하였소. '선지식(善知識)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절반의 힘은 되오니 그는 나쁜 지식, 나쁜 도반, 나쁜 벗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我告阿難 '止 止 莫作是語 所以者何 夫善知識 善友 善伴 乃是梵行全體 又善友伴者 不與惡知識 惡友 惡伴而爲徒黨 何以故 我以善知識故 脫於生死 是故當知 善知識者 梵行全體 如是之事 應分別知 佛所說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乃至不與惡友惡伴惡知識等而爲伴黨'

나는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소.
"그만 그만,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 왜냐 하면 선지식과 착한 벗 착한 도반은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전체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 또 착한 벗과 착한 도반은 나쁜 지식과 나쁜 벗 나쁜 도반과 무리를 짓지 않으니 왜냐 하면 나 역시 선지식 때문에 생사를 해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전체적인 힘이 된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하며 그러한 일을 잘 분별해서 알아야 한다. 부처가 말한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나쁜 벗과 나쁜 도반 나쁜 지식들과 무리를 짓지 않게 하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❶]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❷]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보살님 ;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 · 관세음(觀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남순동자(南巡童子) ; 선재동자(善財童子).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 보리심을 발해 진리를 찾아 남쪽으로 여행하였으므로 남순동자(南巡童子)로도 불린다.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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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3. 12. 24. 10:01

§(세등35) 요중선(鬧中禪)과 정중선(靜中禪) / 시끄러운 가운데에 또는 활동하는 가운데에 잘되어야만 그 공부는 정말 살아 있는 공부라 할 수가 있다 / (게송)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

**송담스님(세등선원No.35)—1981(신유)년 하안거 해제(81.07.17.음) (세등35) (생활속 정진-요중선)

 

약 5분.


지난 백 일 동안 이 세등선원에서는 백일기도(百日祈禱)를 봉행(奉行)을 했습니다.
설사 여기에 오셔서 정진은 못하고 각자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계셨을망정 정진하는 스님네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셨고, 생활 속에서 기도를 하셨다면 여기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참선(參禪)하는 스님네와 조끔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원래 공부에는 동중선(動中禪)과 요중선(鬧中禪), 또는 요중선과 정중선(靜中禪)이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하는 정진과 활동을 하면서 시끄러운 속에서 하는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고요한 가운데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을 하는 것은 시끄러운 가운데에,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잘될 수 있도록 엄격한 훈련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가운데에 또는 활동하는 가운데에 잘되어야만 그 공부는 정말 살아 있는 공부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요한 곳에서 규칙을 세우고 죽비를 치면서 그렇게 해야만 공부가 좀 되고, 오며가며 시끄러운 가운데 일하면서 활동하는 가운데에는 영 화두가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공부가 안될 그 공부는 아직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열심히 하고, 그 고요한 가운데에 열심히 익힌 그 공부를 활동하는 가운데,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채찍을 가하면서 정진을 갖다가 밀고 나가야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시끄러운 가운데에나 조용한 가운데에나 조끔도 걸림이 없이 공부를 다잽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모든 색과 모든 소리에 걸림이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법왕성에 이르르는 곳이다」 한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또 만날 때까지 기어코 공안이 타파(打破)되도록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주먹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 매어두노라.(51분41초~56분24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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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중선(鬧中禪 시끄러울 뇨/가운데 중/참선 선) ; 시끄러운 가운데 하는 참선. 동중선(動中禪)라고도 한다. 조용한 가운데 하는 참선은 정중선(靜中禪)이라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21)—1987년 2월 첫째 일요법회(87.02.01) (용321) (2분10초)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세간(世間)에 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인간 세상에 모든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서 바로 그 생활 속에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요중선(鬧中禪)이고 적극적 임운선(任運禪)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상근인이 할 수 있는 참선이다. 그 적극적(積極的) 요중선(鬧中禪)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참선(參禪)이다' 이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전부가 상근인(上根人)이냐 하면은, 상근인도 더러는 있지마는 대부분은 중근, 하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중근, 하근이라도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화두(話頭)를 들고 일체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일을 당했을 때 그리 따라가지 아니하고, 그리 말려들어 가지 아니하고 바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이렇게 해 나가서 그런 세간의 흥망성쇠에 내가 끌려 들어가지만 않으면 그것이 바로 상근인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상근이 따로 있고 하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근인다웁게 모든 일에 임해서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그놈을 디디고 극복을 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상근의 가풍(家風)인 것입니다.(7분50초~10분1초)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모든 색과 모든 소리에 걸림이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법왕성에 이르르는 곳이다’

[참고]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야부 게송 참고.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

 

색을 보되 색에 간섭 받지 않고 소리를 듣되 소리가 아님이라. 무슨 색상을 보건 무슨 소리를 듣건 걸림없는 곳에 이르면 바로 법왕이 있는 곳에 도달하는 것이니라.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게송)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화풍탑재옥난간(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제23권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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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3. 12. 18. 08:07

§(423) ‘해제했다’고 해서 해이하시지 말라 / 요중(鬧中), 동중(動中)에서도 여법(如法)하게 알뜰하게 정진해야 / 산승(山僧)이 과거에 한 10년간 말을 안 해 본 경험.
일념만년(一念萬年) 회광반조(廻光返照) 밀밀면면(密密綿綿) 성성적적(惺惺寂寂) 수질각차(手跌脚蹉) 의단타파(疑團打破) /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붙어 있어 / (게송)산화사금수여람~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붙어 있어. 자기가 잘 단속해 나가면 깨달음으로 나가는 것이고, 한 생각 단속을 게을리하면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여.
그래서 깨닫고, 못 깨닫고 한 양단(兩端)의 기로(岐路)는 자기한테 있는 것이고, 시비에 끌려가냐, 안 끌려가냐 하는 것은 사람을 따라주지 말어. 그 사람한테 맡겨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해제를 해서 어디를 가시거나, 가정으로 가시거나 어느 사찰을 가시거나, 어떠한 경계를 만나고 어떠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 경계(境界)에 시비심(是非心)을 내지 말고, 분별심을 내지 말고, 다맛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나아가면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할 것이다.

**송담스님(No.423)—1990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용423) (생활속 정진-요중선)


 

약 13분.


오늘 삼하안거 해제와 또 백일기도 회향과 또 8월 첫째 일요법회, 세 가지 법요식을 아울러서 갖게 되었습니다마는, 대중이 운집해서 정진을 하다 보니 결제(結制)가 필요하고 또 이렇게 해제(解制)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해제했다’고 해서 우리의 정진에 조금도 해이(解弛)해져서는 아니될 줄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또 7월 백중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이 있습니다마는 그때 산철 결제 방부를 받게 됩니다. 산철 결제에도 방부를 들이고 또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했다’고 해서 해이하시지 말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또 스님네들도 산철 결제에 방부 들이실 분은 들일지라도 어쨌든지 해제 동안에 알뜰하게—어느 산중을 가시건, 어느 바닷가를 가시건, 어디를 가시거나 산철 동안에 요중선(鬧中禪) 동중선(動中禪)을 알뜰히 다잽이를 해서, ‘지난 석 달 결제 중에 한 스스로의 수행력이 과연 얼마만 한가?‘ 과연 요중(鬧中)에서도 동중(動中)에서도 여법(如法)하게 알뜰하게 정진이 되는가를 잘 가늠하면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말을 많이 한 것입니다.
물론 결제 중에는 말 많이 하실 필요가 없었겠으나, 인자 해제했으니까 말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누가 말할 사람도 없고, ‘인자 해제했으니까 우리 마음껏 그동안에 못한 말을 실컷 한번 해 보자’ 그런 생각을 갖지 마시고, 어쨌든지 말을 많이 하시지 말고, 어느 사찰을 가시던지 말을 많이 하시지 말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산승(山僧)이 과거에 한 10년간 말을 안 해 본 경험이 있어서 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그 일가지견(一家之見)이 있어서 말씀을 드린 건데, 입을 많이 벌리고 떠들고 난 뒤끝에는 아무래도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이 또 빠져 나가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이 본의 아니게 또 튀겨져 나오게 되고, 그러면 스스로도 손해가 되거니와 듣는 사람에게도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또 시비가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고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말을 적게 하고, 그렇다고 해서 다 묵언(默言)을 하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꼭 필요한 말은 하시되 간단하게 한두 마디로 끝내 버리고 떠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신다면 해제했다고 해서 무슨 정진하기에 불편할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생각 생각이 화두를 들고 또 금강과 같은 그 금강지(金剛志), 견고한 뜻을 분(奮) 내서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항상 행주좌와 간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고, 살피고 또 살펴서, 혼침(昏沈)이 오면은 전제(全提)를 하고,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나면 단제(單提)를 하고, 간단(間斷) 자꾸 생각이 끊어지고 화두가 순일하게 연속이 안 될 때에는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서[勤提], 일구월심해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고 면면밀밀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때까지.



화두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떠억 들어지면 그때의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고 고요하고 깨끗한 그 경지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그러나 그 쾌락안연(快樂安然)한 상태에 맛들여서 그놈을 탐착하다가 화두를 놓쳐버리면 안 되아.
그런 가운데에도 화두를 잘 거각(擧却)을 해서 그 순수무잡(純粹無雜)한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면 수질각차(手跌脚蹉) 해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많은 도인들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잡드리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만 명이면 만 명 다 틀림이 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사람을 만나 보면은 얘기를 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시비가 일어나고, 시비가 일어나다 보면 공부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니, 옳고 그른 것은 상대방한테다 맡겨 버리고.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붙어 있어. 자기가 잘 단속해 나가면 깨달음으로 나가는 것이고, 한 생각 단속을 게을리하면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여.
그래서 깨닫고, 못 깨닫고 한 양단(兩端)의 기로(岐路)는 자기한테 있는 것이고, 시비에 끌려가냐, 안 끌려가냐 하는 것은 사람을 따라주지 말어. 그 사람한테 맡겨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산화사금수여람(山花似錦水如藍)하니  막문전삼여후삼(莫問前三與後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하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화사금수여람(山花似錦水如藍)이여. 산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어 비단과 같고, 물은 푸르기가 쪽빛과 같구나.
막문전삼여후삼(莫問前三與後三)이다. 전삼(前三)과 후삼(後三)을 묻지를 말아라.



중국의 무착(無着) 스님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기 위해서 오대산을 찾아갔는데, 허름한 나무하는 영감님을 만났어. 그래서 그 영감님과—문수보살인 줄도 모르고 영감님을 만나 “뭣하러 왔느냐?” 하니까,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다”



“어디서 왔느냐?”
“저 아무데서 왔다”



“거기는 대중이 몇 분이나 되느냐?” 하니까, “몇백 명이 이렇게 된다”



(무착 스님이) 영감 보고 “대중이 몇이나 되냐?” 그러니까, “전삼삼 후삼삼이다”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 이건 공안(公案)이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숫자로 알 수 있는 말이 아니여.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을 묻지를 말아라.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하면, 내 마음 경(境)이나 저 바깥 경계가 확연해서 저 경계라든지, 내라든지 그런 것을 잊어버리면—심경(心境)이 확연(廓然)해서 피차(彼此)를 잊어버리면,
대천사계(大千沙界)가 총포함(總包含)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항하사수(恒河沙數)와 같은 그런 세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해제를 해서 어디를 가시거나, 가정으로 가시거나 어느 사찰을 가시거나, 어떠한 경계를 만나고 어떠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 경계(境界)에 시비심(是非心)을 내지 말고, 분별심을 내지 말고, 다맛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나아가면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할 것이다.(59분46초~1시간12분4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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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안거(三夏安居) ; 삼하(三夏, 여름의 석 달)에 하는 하안거(夏安居,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말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백중(百中/百衆) ; 음력 칠월 보름날. 백중일(百中日) ·  백종(百種) · 백종(百種)날이라고도 한다.
석 달간의 하안거(夏安居)를 마치는 날로, 하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리어 그 공덕으로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제한 목련존자의 효심을 기원으로 하는,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우란분재 盂蘭盆齋).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 · 고려 시대에는 이날 국가적으로 '우란분재(우란분회)'를 열었으나 조선 시대 이후로 절에서만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재(齋)를 올리고, 농가에서는 이날 하루 농번기의 피로를 씻기 위해 머슴을 쉬게 하였다.
*우란분재(盂蘭盆齋) ; 지옥도와 아귀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베푸는 재(齋).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악도(惡途) 중생과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일체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를 구제하고자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재(齋)를 베푼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우란분재가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우란분회(盂蘭盆會) · 우란분절(盂蘭盆節) · 우란법회(盂蘭法會) · 우란재(盂蘭齋)라고도 한다.
우란분재일인 음력 7월 15일은 많은[百]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 해서 백중(百衆), 많은 음식을 마련하여 공양한다 해서 백종(百種),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라 해서 백종(百終)으로 부르고, 세시일로는 백중(百中 · 白衆 · 백족白足)이라 한다.
*우란분(盂蘭盆) ; 산스크리트어 ullambana. 우란은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도 음사(音寫)하고, 도현(倒懸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 또는 구도현(救倒懸 :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한다)이라 한역(漢譯)한다.
분(盆)은 그릇(식기)의 뜻으로, 한역하면 구기(救器)라고 하며, 뜻으로 구성해 말하자면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음식을 가득 담아 삼보三寶에 공양 올리는) 그릇[救倒懸器]'이라 한다.

절에서, 음력 7월 15일에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의식.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부처님 제자 중에 신통력이 제일인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통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모두 모이는 하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인 자자일(自恣日)에 삼보(三寶)에 공양하게 하여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악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산철(散철) ; 본철(本철-하안거,동안거)이 아닌 시기.
*방부(房付 방·거처 방/줄·부탁할 부)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일.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요중선(鬧中禪 시끄러울 뇨/가운데 중/참선 선) ; 시끄러운 가운데 하는 참선. 동중선(動中禪)라고도 한다. 조용한 가운데 하는 참선은 정중선(靜中禪)이라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21)—1987년 2월 첫째 일요법회(87.02.01) (용321)(2분10초)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세간(世間)에 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인간 세상에 모든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서 바로 그 생활 속에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요중선(鬧中禪)이고 적극적 임운선(任運禪)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상근인이 할 수 있는 참선이다. 그 적극적 요중선(鬧中禪)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참선(參禪)이다' 이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전부가 상근인(上根人)이냐 하면은, 상근인도 더러는 있지마는 대부분은 중근, 하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중근, 하근이라도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화두(話頭)를 들고 일체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일을 당했을 때 그리 따라가지 아니하고, 그리 말려들어 가지 아니하고 바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이렇게 해 나가서 그런 세간의 흥망성쇠에 내가 끌려 들어가지만 않으면 그것이 바로 상근인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상근이 따로 있고 하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근인다웁게 모든 일에 임해서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그놈을 디디고 극복을 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상근의 가풍(家風)인 것입니다.(7분50초~10분1초)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일가지견(一家之見) ; 일가견(一家見). 어떤 일에 관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안목이나 견해.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금강지(金剛志) :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뜻. 일체 번뇌를 쳐부술 수 있는 굳센 의지.
*분(奮) ; 떨치다. 분발(奮發)함(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운을 내어 떨쳐 일어남). 힘쓰다. 분격하다(憤激--). 일으킴.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19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 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혼침(昏沈 어두울 혼/ 잠길 침) ; 또는 혼침(惛沈).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전제(全提) ; 전(全) 부분이 들고 일어남(全分提起)의 뜻. 본래 그대로 나타냄. 전부를 그대로 나타내 보임.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423)—1990년(경오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편집 정리)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를 관하는 것. 단제는 무자(無字)를 하는데 생각을 한군데다 집중하는 데에는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리고 혹 오신통(五神通)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다.

전제(全提)는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전제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의심을 들다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 데에는 대단히 좋으나,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리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 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라.

생각 생각이 화두를 들고, 또 금강과 같은 그 금강지(金剛志), 견고한 뜻을 분(奮)내서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항상 행주좌와 간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고 살피고 또 살펴서, 혼침(昏沈)이 오면은 전제(全提)를 하고,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나면 단제(單提)를 하고, 간단(間斷) 자꾸 생각이 끊어지고 화두가 순일하게 연속이 안 될 때에는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서[勤提],
일구월심해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고 면면밀밀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면 그 순수무잡한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면 수질각차(手跌脚蹉) 해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많은 도인들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잡드리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만 명이면 만 명 다 틀림이 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 하고, 의심을 붙이지 않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만을 관하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밀밀면면(密密綿綿) ; 면면밀밀(綿綿密密).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쾌락안연(快樂安然) ; 쾌락하고 편안하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수질각차(手跌脚蹉 손 수/거꾸러질·넘어질 질/다리 각/미끄러질·넘어질 차) ; 각차수질(脚蹉手跌). (몸이 균형을 잃고) 손과 발이 미끄러지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0~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0~42 참고.
若要的實明證인댄  須開特達懷하며  發丈夫志하야  將從前惡知惡解와  奇言妙句와  禪道佛法과  盡平生眼裏所見底와  耳裏所聞底하야  莫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와  到與不到와  徹與不徹하고

만일 이 일을 적실하고 분명하게 증득하려면 특별한 포부를 품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종전의 나쁜 알음알이와 기묘한 언구(言句)와 선도(禪道)와 불법(佛法)과 평생동안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들에서 위태로움과 죽음, 얻음과 잃음, 남과 나, 옳음과 그름, 도달함과 도달치 못함, 사무침과 사무치지 못함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發大忿怒하며  奮金剛利刃하야  如斬一握絲에  一斬에  一切斷이라  一斷之後에  更不相續하야  直得胸次中이  空勞勞地와  虛豁豁地가  蕩蕩然 無絲毫許滯碍하야  更無一法可當情이  與初生으로  無異니라

크게 분발심을 내어 마치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한줌의 실을 벨 때, 한 번 베면 모두 다 끊어져서 그 후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당장 가슴속이 텅 비어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실끝만치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다시 한 법도 정식(情識)에 매이지 않음이 마치 갓난아기와 같을 것이다.

喫茶不知茶하고  喫飯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坐不知坐하야  情識이  頓淨하고  計較都忘이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차를 마셔도 차 마시는 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 모르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몰라 정식(情識)이 단박 깨끗해지고 계교(計較)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脚蹉手跌]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원문에 있는 '驀然 脚蹉手跌'은 몸의 균형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니, 아차! 하는 순간을 말한다. 轉身移步 懸崖撒手. (원순 스님 주)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한 생각 단속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게송) ‘산화사금수여람(山花似錦水如藍)~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예장종경 게송 참고.
*무착 문희(無着文喜) : (820 – 899) 가화(嘉禾)땅 주(朱)씨 집에서 나서 7살에 출가하였다. 처음엔 계율을 숭상하였고, 그 때 서울의 운화사(雲華寺)에 가서 징관(澄觀)법사에게서 화엄(華嚴)의 교리를 배웠고, 그 다음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오대산(五台山)에 들어갔는데, 보살의 화현(化現)이 여러 번 있었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선지(禪旨)가 밝은 뒤에 죽 솥에서 보살이 나타나므로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 무슨 상관 있느냐!』 하고 죽을 젓던 주걱으로 때려 주었다. 홍주(洪州) 관음원에서 앙산의 말 한마디에 크게 깨치고 그의 법을 이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2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 무착이란 것은 나라에서 지어 드린 법호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대천사계(大千沙界)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항하사수(恒河沙數 인도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은 수數 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와 같은 세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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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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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2. 11. 13. 10:44

§((114)) 입춘(入春)에 사찰에는 업장소멸, 소원성취를 빈다 /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다 저장이 되어 있는 업(業)의 종자(種子)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바로 참선(參禪) 공부.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공부 / 불법(佛法)은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 참선법은 무량겁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 /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

번뇌·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번뇌 망상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 '이뭣고?'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송담스님((No.114))—1980년(경신년) 입춘법회(음 1979.12.19/양 1980.02.05)(용114)(생활속 정진)

 

(1) 약 40분.

 

(2) 약 39분.


(1)------------------

오늘은 경신년(庚申年)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기미년(己未年) 12월 19일이지마는, 새해 경신년이—절후(節候)로써는 오늘이 입춘(入春)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경신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경신년, 달력으로는 경신년 정월 초하루부터 경신년이라고 하지마는 절후(節候)로는 오늘부터 경신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춘이 되어야만 정식으로 새해로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춘(入春)일에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잘못이 있었는가? 그것을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그래 가지고 ‘새해부터서는 어떻게 내가 살아가야겠다’ 이러한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이신 분들 가운데에는 경신년에 범띠하고 말띠하고 개띠에 든 분은 '삼재(三災)가 들었다' 해 가지고 입춘에 동참불공(同參佛供)을 하면은 그 삼재를 소멸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로 참여하신 분도 적지 아니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것도 또한 좋습니다. 삼재를 소멸하기 위해서 오셨건, 백 가지 재앙을 소멸하시기 위해서 오셨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삼재(三災)는 범띠하고 말띠하고 개띠가 새해 경신년(庚申年)에 들삼재고, 그렇다 해서 이 대단히 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모다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경험을 통해서 보면은 삼재가 들면 내년부터서 내후년, 저멩년까지 3년 동안 들삼재 · 앉을삼재 · 날삼재 해서 3년을 갖다가 범띠 · 말띠 · 개띠는 삼재가 듭니다마는, 삼재 때 가만히 증험을 해보면 정말 걱정할 만큼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병을 앓는다든지, 무슨 관재구설(官災口舌)이 있다던지, 무슨 사고를 당한다던지, 그 재수가 없다든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근심 걱정거리가 있어왔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삼재가 안 들은 사람은 그러면 전혀 그런 일이 없냐?’ 하면은 그렇지도 않건마는 ‘삼재가 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당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생각드는 것도 우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있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어져 있는 그런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재가 든 사람은 '삼재가 들었다'고 해서 더욱 조심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혹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가볍게 피해를 입지 않고 잘 넘길 수가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이리 생각하고 노력을 하는 것은 그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재(三災)를, 어째서 그 삼재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냐?
인(寅) · 오(午) · 술(戌) 생은 경신년부터서 3년간 삼재가 드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 동양의 음양학설, 내나 사주(四柱)도 음양학설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져서 삼재가 든다.
지금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 있어서는 이 음양오행을 수천 년 전부터서 그것이 아주 생활 속에 젖어 들어서 사주나 관상(觀相)이나 모든 점(占)이라든지 그런 것이 전부 음양오행으로 추리해서 그래 가지고 운명을 판단하는 그러한 방법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은 ‘그까짓 거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지, 무슨 그 사주가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러냐?’ 하고 그런 것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그렇게 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정말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음으로 해서 삼재가 되었건 오재가 되었건 그런 것을 문제하지 아니하고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다못 이 정법 하나 믿는 그 마음으로만 온전히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의 생활 습관상 또 그런 것이 너무너무 오랫동안 조상 때부터서 그러한 음양오행설이 아주 사무쳐 들어와 있어 가지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무시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입춘(入春)이면은 한국에 방방곡곡의 모든 사찰에는 그 입춘을 기해서 동참 기도와 불공을 드리고 그리고 업장(業障)을 소멸을 빌고, 소원성취를 빌고 그럽니다.

그런데 모든 재앙은 사실 과거(過去)에 우리가 어떻게 지었느냐? 그리고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금으로부터 1초 전이 전부가 과거에 들어갑니다마는, 그 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러한 팔자가, 운명이 전개되는가?’를 그 원인을 모르고서, 당장 그것을 없이 하기만을 바래고, 그걸 없이 하기 위해서 점(占)을 친다던지, 갖은 푸닥거리를 한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주고 무당한테 그 부적 같은 것을 사 가지고 몸에 지닌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소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것이 소멸 당하지 않기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 그 비린내 나는 생선을 엮던 그 새끼토막 같은 것을 몸에다 두르고 다니면서, 몸에서 비린내 안 나기를 소원해 봤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첫째, 몸에 비린내가 안 나게 할려면 생선을 묶었던 그 새끼를 몸으로부터 풀어서 버리고 그리고 몸을 깨끗이 닦음으로 해서 비린내는 내 몸에서부터서 안 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의 마음속에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고 승화(昇華)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앞날에 좋은 팔자와 운로(運路)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 업장을 소멸하는 법이 십선법(十善法)을 닦는다던지 또는 사성제(四聖諦)법을 닦는다던지 12인연법 · 육바라밀(六波羅蜜)법 · 염불(念佛) · 독경(讀經) · 기도, 얼마든지 우리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팔만사천 가지의 그러한 묘한 법이 있습니다.
어느 법(法)이고 하나도 버릴 법이 없고, 어느 법이고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닦는다고 하면은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법(法)을 다 닦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 어느 법이 그 가운데 좋고 나쁘고 해야 그것을 하지, 다 좋은 법인데 어떻게 어느 법만을 추려서 하고 어느 법은 안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두 번 해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기대할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방법을 좀 해보고, 그걸 좀 얼마 동안 해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법을 좀 해보고, 이렇게 해서 많은 세월 동안을 그런 식으로 갈팡질팡을 하면서 혹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고,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낙담(落膽)을 하고 비관(悲觀)을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온 분이 적지 아니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용화선원에서는 부적(符籍)도 드리지도 않고, 언제나 다른 법회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일러드리는 말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이, 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녹여 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骨髓) 법문을 추출을 해 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法)이 모든 행(行)을 다 포섭(包攝)을 한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사람들은 밖에서 무엇을 찾는 데에는 익숙합니다. 물질적인 것이건 무엇이건 밖에서 찾는 데에는 어릴 때부터서 여태까지 무량겁을 두고 밖에서 무엇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소유를 만들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을 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구한 것은 언젠가는 인연이 도래(到來)하면 나로부터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참선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폐(語弊)를 면치 못합니다마는 부득이해서 그러한 말을 빌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하면 이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가 있는 이 육체를 가지고 '내 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마는,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滅)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물건’이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한다’ ‘재앙을 소멸을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바로 알아야만 그 업장을 소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굿을 하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부적을 몸에 많이 지니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봤자, 우리의 업장(業障)이 그러한 방법으로써 소멸(消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경우 일시적으로는 우선한 것 같이 느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시일이 지나면 다시 또 일어나고, 또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또 푸닥거리를 하면 조금 우선함을 느끼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점점점점 깊이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삿된 믿음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면 백이면 백, 다 집안에 재앙이 끊일 날이 없고 잡귀가 득실거리고, 그래 가지고 정신까지도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삿된 소견에 빠져 가지고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고 싶어도 무서운 협박과 엄포 때문에 겁이 나서 발을 빼지를 못한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정법(正法)은 그 근원을 바르게 다스려서 영원히 그러한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나무를 가꾸고자 할 때 그 뿌리에 좋은 흙과 좋은 비료와 기타 수분이라든지 그 충분히 잘 공급을 함으로써 그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결국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뿌리에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 또 좋은 적당한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수분도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그리고 뿌리는 다 밖으로 드러나다시피 하는 상태에서 가지와 잎에만 아무리 정성을 쏟아 봤자 그 나무는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시들고 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근본을 다스리면은 가지와 잎과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고, 근본을 버리고 지엽만을 붙잡고 아무리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우리의 ‘참나’를 찾아서 그걸 닦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육체와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라든지, 부부간에 문제라든지, 형제간에 또는 자식 자녀의 문제라든지, 친구나 일가친척에 관한 건이라든지,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그 근원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업(業)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아무리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 형제간의 관계, 일가친척의 문제를 바로잡을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그리고 원망을 해봤자 그리고 한탄을 해봤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듣고 그리고 그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 하면은 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을 바로 본 사람, 바로 안 사람, 바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을 알고 쓰고 있을 뿐 그 실상(實相),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을 가지고 그놈으로 그놈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면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단 일분일초도 떠날 수가 없고, 언제나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놈을 알 수가 없는 것인가?
눈을 통해서 모든 빛깔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분간하며,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고 숨을 쉬고,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맛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합니다. 손과 발, 육체를 가지고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다 식별을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가?’ 찾어보면 자취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면서, 왜 보는 그놈을 다시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알 수가 없는 것이냐?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 도를 닦는다, 불법을 믿는다고 해도, 1년 2년 3년 10년을 절에를 다니고 법문을 듣고 또 참선을 해도 마냥 제자리걸음이요 답답하기가 그지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보는 그놈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그놈을 찾으라고 법상(法床)에서 큰스님네는 법문하실 때마다 ‘그놈을 찾으라’고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는 아니하고.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

무슨 공부를 해서 차츰차츰 성과가 눈에 보이고, 이만큼 하면은 그만큼 한 결과가 나타나서 스스로도 흐뭇하고 남에게 이만큼 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면 더욱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 텐데 석 달씩,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집안을 갖다가 떠나서 선방에 가서 석 달씩 그렇게 공부를 하고 와도 영감님 앞에, 또는 아들이나 며느리 앞에, 손자들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아무것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그다음 철에는 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공부를 했다'고 내놓을 것이 있으면 아들 딸 며느리 영감이 모두가 다 ‘참, 그 좋다’고 이해를 하고 더욱 가시도록 협조를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그분네들도 보람을 느끼고 또 그분들도 할려고 하시고 그럴 텐데, 만날 절에만 다니고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절로만 다니시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마당에야 그 참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타관(他官)에 가서 고생을 해 가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와 봤자 그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도둑을 맞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 써버리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석 달 내 자고 싶은 잠도 다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못 먹고, 그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이 정말 정법을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셨다면, 설사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은 영원한 것을 마음속에서 잘 닦아서 얻을 것...(녹음 끊김)...은 얻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여기에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가지고 밤도 줏어 담고 과자도 줏어 담고 해서,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서 그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업(業)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가서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공부를 하고 집에를 가서, '할머니, 가서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빈 자루라도 있으면 탁! 까뒤집어 보이는데,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루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루인데, 우주법계를 그 속에다 다 담아도 그 자루에는 다 차지도 않습니다. 허공을 그 속에다 다 집어넣어도 그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자루는 차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루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루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짓고 지은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이 세 가지 종류에 업으로써 지은, 수확한 종자(種子)를 그 속에 탁 가뜩 담어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자기 종자에 해당되는 인연을 만나면 그 많은 종자 속에 어떤 종자가 거기서 싹이 터 나옵니다. 수수나 조나 모든 종자(種子)가 습기와 적당한 열을 온도를 만나면 눈이 터 나오듯이,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쌓아져 있는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종자가 그때그때 터져 나온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손과 발 몸으로 감촉할 때, 생각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三不能]이 있는데, (첫째)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濟度)하지 못한다. 아무리 부처님이 삼계(三界)의 대성현이시고, 신통(神通)이 구족(具足)하신 그러한 대성현이시지만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다.

둘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는 말은 중생이 하나도 없도록 중생을 없앨 수는 없다.
중생은 그 한량이 없는 큰 그 아뢰야식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그 업의 종자가 가뜩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계속 거기에서는 싹이 터 나옵니다.

좁쌀도 나왔다가, 보리쌀도 나왔다가, 수수쌀도 나왔다가, 그때그때 싹이 트기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면 거기에 있는 많은 종자 가운데에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게 되고, 그다음에 또 나오게 되고 하는데, 계속 다 싹이 터서 다 발아(發芽)를 해 가지고 다 나가버리면 언젠가는 그 종자(種子)가 동이 날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싹이 터 나오면서 새로운 종자를 동시에 갖다가 또 저장하게 됩니다. 업장(業藏) 속에 있는 종자가 싹이 터 나온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합니다. 현행—'나타날 현(現)' 자, '행할 행(行)' 자. 종자가 밖에 어떠한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은 현행(現行)을 합니다. 싹이 터 나옵니다.
싹이 터 나오면서 거기에서 속에 있는 어떠한 종자를 갖다가 훈(薰)을 합니다. 그 종자를 갖다가 이 또 찜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자가 싹이 터 나오면서 다시 또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뜻으로 무엇을 생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행(現行)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고대로 아뢰야식 속에 또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수확을 해서 저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우리의 업의 종자가 한없이 터져 나오고 한없이 저장이 되기를 무량겁을 해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 그러한 작업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지은 복(福)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그놈이 다하면 다시 인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罪)를 지은 바가 많으면 또 지옥에 가기도 하고. 육도윤회를 끊임없이 계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또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 생사윤회가 또 계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과 법력(法力)으로도 그것을 갖다가 다 없앨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처음~39분37초)





(2)------------------

<무량겁 쌓아 놓은 업(業)의 종자(種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 바로 이 불법(佛法)이요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다. 빨간 꽃을 보았다. 지금 이 탁자 위에도 노란 국화가 화병에 꽂혀 있습니다.
그것을 본 찰나, '아! 국화로구나. 이 겨울에도 국화가 피었구나. 좋은 향내가 나겠지. 어떻게 저것을 겨울에 피웠나? 온실에서 재배를 했겠지?'

이런 것을, 국화 하나를 봄으로써 우리는 끝없이 생각이 그렇게 번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과거에 어떠한 국화에 관련된, 자기와 국화에 관련된 어떠한 일에 우리의 상념(想念)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눈물바람을 하기도 하고 혹 과거에 어떤 때를 갖다가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의 국화를 보았다. ‘노랗다. 아름답다’ 그러한 두 번째 생각으로 건너가기 전에 국화가 눈에 딱! 띄었을 때, 그때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국화를 보고 ‘노랗다. 아름답다. 송이가 크다 작다’ 이렇게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그렇게 번져 나갈 것이 아니라 국화가 눈에 탁! 들어온 그 찰나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화를 봤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새소리를 들었건, 차 소리를 들었건, 개 짖는 소리를 들었건, 들은 그 찰나에 '이뭣고?' '이뭣고?'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면, 과거에 그 친구가 자기에게 섭섭히 한 일까지 생각해 가지고 공연히 심사(心思)가 사나와지고 그 끝에 아들이나 손자나 며느리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거기에까지 신경질을 부리게까지 됩니다. 참선한 사람은 그게 아니라 '친구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생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45분1초)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녹음 끊김, 4초 묵음. 중복)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살고, 한 달을 그렇게 살고, 1년을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사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석 달을 해봤자 아들딸 · 손자 · 영감님께 아무것도 보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가고 하루하루를 다져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다져 나가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또는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이 개선되어 가고 개조되어 가고 승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오직 깨달음을 향해서 목적을 하고 닦아가는 것이지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빨리 얻어지는 효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까짓 나쁜 성격이 원만해지고, 옹졸했던 성격이 관대해지고, 이러한 것이 참선의 목적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구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러한 인간에 있어서 존경받을 수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격이 개선되어 간다면 그것도 또한 대단히 소중한 수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옹졸한 성격, 비열한 성격,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얼마를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치 없는 인간을 만들고,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그러한 일이 우리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시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동생으로서, 형으로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 '이뭣고?'로써 생각을 돌려나가는 길을 행하지를 못하고, 사소한 일로 해서 두 번째 생각 세 번째 생각으로 계속 올바르지 못한 중생심을 갖다가 방자히 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까지 언짢게 만드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부적(符籍)을 사러 가실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면 부적을 몇 장을 사서 가지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러나 이 공부를 철저히 하면 그러한 부적을 한 장도 갖지 않더라도 모든 재앙은 소멸이 되고, 있는 재앙을 소멸하는데 끄친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앙이 속에서 나오는지 밖에서 다가오는지 그걸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마는,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먼 데서 가까이에서 만났을 때 그것이 물질적인 문제가 되었건, 정신적인 문제가 되었던,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그러한 조건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보다 더 행복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 한 번 함으로써 재앙을 뒤집어서 복(福)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 업식(業識)을 돌려서 보리심(菩提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1원 1원이 모여 가지고 백 원이 되고, 1원 1원이 많이 모이면 천 원도 되고 백만 원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가지고 무량겁이 되고, 1초 1초가 모여 가지고 한 달 · 1년 · 백 년 ·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잔돈을 애낀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 원짜리 백 원짜리를 돈으로 알지 않고 막 풀풀풀풀 막 함부로 합니다마는, 참으로 부자는 큰돈은 갖다가 유용하게 몇천 만원씩 탁! 참 희사(喜捨)도 하고 기부도 하고 그렇게 쓰면서 10원 20원 굉장히 피 나오게 애끼는 것을 나는 봤습니다.

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차를 타건, 버스를 타건, 걸어가건, 댁에 돌아가셔서 방을 닦건, 밥을 지으시건 빨래를 하건, 앉었건 누었건, 이야기를 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남편이 속상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이뭣고?'
자식이 불효한 짓을 해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모든 생활을 지어나가라 이것입니다.

근본이 다 '이뭣고?'로써 중심이 딱! 잡힌 가운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일을 하고, 음식을 먹고, 발로 걸어가고, 이렇게 된 사람은 뿌리가 제대로 박힌 나무와 같아서 그 나무는 싱싱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지 아니하고 밤낮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이 생각 저 생각 자기 딴은 가정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도록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뭣고?'를 아니한 사람은 뿌리는 방치해 버리고, 그 가지에 이파리에 벌레를 떼어주고 소독을 치고 물을 뿌리고 온갖 노력을 다 해봤자, 뿌리가 드러나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나무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착한 일도 안 하고 그래도 괜찮으냐?'
그게 아닙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이겁니다.

참선을 함으로써 우리 근본 마음을 바로잡고 바로 닦아 나간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안에 가면 집안에서 부모에게 할 일, 남편에게 할 일, 자녀들에게 할 일, 해야 할 살림, 자기 자신을 위한 일,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에 왔어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근본이 서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불사(佛事)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일이 다 좋은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근본이 서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 제대로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죽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 헛일만 하게 되고, 죽도록 애써서 한다는 것이 속상할 일만 하게 되고, 후회할 일만 하게 되고, 한탄해야 할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참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마음속에 업(業)의 원인을 해결을 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은 내가 지어 가지고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속에 원인을 잘 다스려 놓으면, 영락없이 재앙으로 나한테 다가져 올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나에 가까이에 오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미묘한 그 법을 스스로 느끼고 정법의 고마움과 신기하고 묘한 것을 뼛속에 사무치도록 느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58분23초)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그 형제는 대단히 합심을 해서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한마을에 사는 아주 가문이 좋은 부자집 따님이요 아주 인물이 좋은 규수(閨秀)하고 눈이 맞아 가지고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혼을 해 놓고 장사일로 해서 수백 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떠났습니다. 가 가지고 그 사업 관계로 해서 여러 해를 고향으로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통신이 있어서 편지도 할 수가 있고 전화도 할 수가 있었지만, 삼천년 전에는 그러한 통신수단이 없어서 그리고 너무 사업에 몰두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연락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 규수 댁(宅)에서는 아! 신랑이 먼 데로 가 가지고 소식이 없으니 딸은 자꾸 나이만 먹고 너무너무 기다리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규수의 부모는 '차라리 그 형이 소식이 없으니까 동생을 갖다가 사위로 맞이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냈습니다. '동생이 인물도 더 좋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 차라리 그 동생을 사위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하고 동생한테 사위가 되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동생이 말하기를 "그럴 수가 있습니까? 형님이 멀리 가셨다가 지금 사업상으로 못 오시는데 어떻게 제가 형수 될 분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당치않합니다. 지금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아주 딱 끊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참! 그 동생이 하는 말 들어보니 또 말은 옳은 말이다 그 말이여.(61분13초)

그래서 또 며칠을 두고 연구를 한 결과, 어떤 그 장사하는 사람을 시켜 가지고 돈을 주어서 '그 형이 거기서 그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실패가 되어 가지고 병이 나서 죽었다' ... (녹음 끊김. 8초간 묵음) ...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그 규수의 부모가 동생을 찾아가서 "아! 인자 당신 형이 병들어서 죽었으니 인제는 내 사위가 되어줘도 되지 않겠느냐?" 찝찝하니 생각하고 응하지를 않다가 몇 달이 지내갔습니다.
계속해서 사위를 삼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고 간곡히 교제를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동생이 형수 될 그 규수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 가지고 포태(胞胎)를 했습니다. 포태를 했는데 갑자기 그 형이 돌아온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 참 큰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파를 시켜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 가지고 그 포태된 애기를 갖다가 유산을 시켰습니다.

그래놓고 있는데 그 형이 과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맨 처음에 그 아내가 될 규수를 찾았는데, 벌써 그때는 형이 근처에 와서 ‘그 규수가 자기 동생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당장 그 동생과 그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갖다가 한칼로 요절을 내서 죽일라고 칼을 가지고 왔는데, 벌써 그런 소문을 듣고 동생은 이웃나라로 피해 갔습니다.

피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무슨 형수 될 규수가 욕심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참 형님하고 약혼만 해놓고 결혼도 못하고 병이 나서 죽게 된 규수가 딱하고, 동생으로서의 그 형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명감에서 그 규수하고 결혼을 한 것이, 아! 이렇게 형님이 살아오고 보니 참 변명할 길도 없고 무슨 사과할 수도 없고, 죽인다고 칼을 가지고 찾으러 다니니 그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웃나라로 피신을 우선 해 가지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되었는데, 그래 가지고 이 스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정말 생명을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계속해서 그 동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 이웃나라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느 산에서 도(道)를 닦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활을 잘 쏘는 포수를 갖다가 매수(買收)를 해 가지고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갖다가 더군다나 출가한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가 없어서 그 포수로 하여금 그 동생을 죽이면 후한 상을 준다고 이렇게 해 가지고, 그 포수하고 둘이 가 가지고 '포수는 저만큼 숨어 있으라'고 그러고, 자기는 동생한테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반가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인간적으로 대단히 딱한 그런 상황이었지마는, 이미 도를 얻은 스님이라 자기의 죄를 억지로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또 웬수로 상대해 가지고 형을 갖다가 상대하지도 않고 순수한 평범한 마음으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아주 그 속의 마음을 감추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하고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난 처음에는 너를 원망을 했지만 너를 사실은 만나고 싶었다" 이런 얘기 등등 하고 있을 때 약속을 했던 그 포수가 그 동생을 겨냥해 가지고 활을 쐈습니다.
아! 그 활 잘 쏘는 사람이 활을 쐈는데 그 활이 빗나가 가지고 형 모가지에 맞어 가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그 동생은 그 형을 시체를 거두어서 잘 장례를 지내주고 천도(薦度)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원한을 깊이 먹었던지 그 형은 죽어 가지고 독사(毒蛇)가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그 동생의 공부하고 있는 그 토굴에 문턱 밑에 가서 가만히 숨어서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언젠가 몸에 독(毒)이 오를 때를 기다려서 독이 몸에 잔뜩 어리면은 그 동생이 문으로 나올 때 탁 물어 버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 좀에 문에 치여 가지고 독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
아! 그 복수를 할려고 그랬던 것이 그 문에 치여 가지고 참 본의 아니게 죽게 되니까 더욱 독이 나 가지고 독거미가 되어 가지고 천장에 가서 붙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컸습니다. 커 가지고 아주 독이 올랐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가지고 그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갖다가 물어서 죽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또 그 동생은 어떻게 되고 형은 어떻게 되고 한 얘기가 장황이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해서 친구 간에 웬수가 되고, 형제와 부자 간에 웬수가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웬수가 되고,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어서, 금생에는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내생에는 저 사람은 나를 죽이고 이렇게 해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으면 그다음에는 그 쥐는 고양이가 되고 그래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점점 더 약이 올라가기 때문에 처음에 바늘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칼 가지고 싸움을 하다, 다음에는 도끼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총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을 잘못 처리해 가지고 큰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참선한 사람은 작은 일로 해서 큰일로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일을 발판으로 해서 큰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황금을 갖다가 똥처럼 쓰고, 지혜로운 사람은 똥을 갖다가 황금처럼 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잘 발효를 시켜서 퇴비를 만들어 가지고 비료로 사용하면은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우리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은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입니다—그러한 번뇌 망상을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 번뇌 망상이 완전히 승화(昇華)해 가지고 보리심, 깨달음을 증득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어렵다, 어렵다. 팔만대장경 그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읽으며, 읽어봤자 아지도 못하고, 한문이 어려워서 아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그 많은 것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아! 불법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러한 분들을 가끔 많이 만남니다마는 불법(佛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아직 정법(正法)을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법은 막연하게 어렵고 깊고 그렇게 겁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지, 참으로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고 행할 줄만 알면 불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성이 나면 그 성이 딴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적멸궁(寂滅宮)에서 나온 소식이거든. 그래서 그놈을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누를려고 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그 성내는 마음 그놈으로 '이 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나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 정법이요, 참선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이다 이 말씀이여.

오늘은 입춘날이라 여러분에게 부적을 노놔 드렸습니다. 다 받으셨습니까?
신도 : "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러분은 금방 받으신 그 부적으로 어떠한 재앙을 만나더라도 그 부적을 내세우십시오. 팔만사천 마구니도 그 부적 앞에는 꼼짝을 못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며, 항복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줄 것입니다.(39분38초~1시간18분6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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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2. 4. 18. 20:49

§(308) (게송)대지산하시아가~ / 모든 경계에 즉(卽)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관조(觀照)할 때에 거기에서 견성성불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 “불법(佛法)을 먼 데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법은 너의 마음속에 있고 지금 이 자리, 이때를 버리고 찾지 말아라”
무량겁으로부터 영원한 미래가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이 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 갓없는 우주법계가 전판 다 부처님의 법문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고, 부처님의 법신(法身)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이 일체가 다 전부 다 부처님의 화현신(化現身)이요, 바로 우리 몸뚱이 속에 삼세제불이 다 머물러 계셔서 지금도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법문을 듣고 있는 우리는 법문을 설(說)하면서 동시에 그 법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것과 법문을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산승이 설한 것이 아니요 여러 사부대중이 설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 설하시고 부처님이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說)하고 듣는 것이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대총상법문은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들은 바 없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설할 것이 있다면은 그 법문은 바른 법문이 아니요. 들은 바가 있다면, 들을 것이 있다면 그 법문은 옳게 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법(法)을 설하고 이렇게 법을 들을 때에, 그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신 법신불(法身佛)과 우주 법계에 가득찬 일체 중생이 동시에 설하고 동시에 듣게 되므로 온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08)—1986년 칠석법회(86.08.12) (용308) (생활속 정진, 요중선)

 

약 18분.


대지산하시아가(大地山河是我家)인대  갱어하처멱향가(更於何處覓鄕家)오
나무~아미타불~
견산망도광미객(見山忘道狂迷客)이  종일행행부도가(終日行行不到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대지산하(大地山河)가 이 나의 집이여.
갱어하처멱향가(更於何處覓鄕家)오. 다시 어느 곳에서 내 고향집을 찾을 것인가.

견산망도광미객(見山忘道狂迷客)이, 눈앞에 나타난 그 산을 보다가 자기의 길을 잃어버리는 그런 길 잃은 손이, 종일행행부도가(終日行行不到家)로구나. 종일토록 가고도 가도 집에는 이르지를 못하는구나.

대지산하(大地山河),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대지산하가 온통 이것이 다 나의 집이요 나의 고향인데, 그것이 자기 고향인 줄을 모르고 자기 고향을 평생토록 찾으러 다녀.
왜 자기 고향에 발을 디디고 자기 고향에서 살면서 왜 고향을 찾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산을 기웃기웃 산을 보다가 자기의 갈 곳을 잊어버려, 길을 잊어버린다 그 말이여.

현실에 자기 발 디디고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의 고향이요, 자기가 설 곳이요, 자기의 바로 살아 갈 곳인데, 그 자리를 놔두고 저 눈에 보이는 저 먼산을 갖다가 '행여나 저기에 내 고향이 있는가? 저 산너머에 내 고향이 있는가?' 하고 멀리 찾다가 자기의 진짜 고향을 잊어버리더라 그 말이여.

우리 도 닦는 사람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위해서 온갖 고행(苦行)을 극복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데,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이러한 현실 경계를 내놓고 따로 도(道)의 경지를 찾고, 따로 견성(見性)할 것을 구하고, 따로 성불(成佛)할 어떠한 특수한 경지를 구하는 한은 참다운 견성은 이르러 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현재 우리가 발로 걸을 때,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할 때, 바로 그때, 그곳을 여의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곳에 즉(卽)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관조(觀照)할 때에 거기에서 견성성불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닥치고 있는 그 일이 자기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좋건 나쁘건, 기쁘건 슬프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여. 그놈을 여의고 찾지도 말 것이며, 그놈에 집착해서 구하지도 말 것이여. 일체처 일체시에 그렇게 다그쳐 가야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의 땅[如來地]에 이르는 소식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법회 때마다 “불법(佛法)을 먼 데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법은 너의 마음속에 있고 지금 이 자리, 이때를 버리고 찾지 말아라”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방편(方便)이 아니라 그 말이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너무 적절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도를 닦아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이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그것이 지금 목판(木版)으로 새겨져서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에 봉안이 되어있는데, 그 목판에 새겨진 부처님의 법문은 그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에 천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법문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세(出世)하시기 전 또는 부처님이 80세 동안 이 세상에 머무르시다가 열반하신 뒤,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무량겁으로부터 영원한 미래가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이 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육도법계(六道法界), 이 갓없는 우주법계(宇宙法界)가 전판 다 부처님의 법문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고, 부처님의 법신(法身)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 모래알 하나, 풀 이파리 하나, 꽃 이파리 하나, 구름 한 조각,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 끊임없는 부처님의 몸이요, 그 부처님 몸뚱이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모래알 속에 다 머물러 계시면서 끝없는 법문을 설하시고, 조그마한 풀 이파리 하나에서도 삼세제불이 그 속에서 다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삼라만상 그런 현상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뚱이, 언필칭(言必稱) 우리는 '중생(衆生)'이라 그러는데 남녀노소 우리 자신들도, 물론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이 일체가 다 전부 다 부처님의 화현신(化現身)이요, 바로 우리 몸뚱이 속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머물러 계셔서 지금도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문을 듣고 있는 우리는 무엇이냐?
법문을 설(說)하면서 동시에 그 법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것과 법문을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설(說)하고 듣고 있고, 여러분도 들으면서 동시에 또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승이 설한 것이 아니요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설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 설하시고 부처님이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說)하고 듣는 것이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묘(妙)하다고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시에 설하고 듣고 있는 이것을 어찌 중생의 생각으로 이것을 구할 수 있으며, 어찌 범부(凡夫)의 알음알이로 이것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칠석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이 돌아가신 선망부모와 형제자매와 원근(遠近) 친척의 영가(靈駕)를 명복을 빌고, 천도(薦度)해 드리고 또 살아계신 부모 형제자매와 자녀들의 수명장수를 빌고, 복덕구족을 빌고,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 자리에 모다 운집을 하시고 아울러서 칠석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은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들은 바 없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설할 것이 있다면은 그 법문은 바른 법문이 아니요. 들은 바가 있다면, 들을 것이 있다면 그 법문은 옳게 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법(法)을 설하고 이렇게 법을 들을 때에, 그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신 법신불(法身佛)과 우주 법계에 가득찬 일체 중생이 동시에 설하고 동시에 듣게 되므로 온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보살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온 세계에 퍼졌다 해도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꽃대로 붉게 피어서 아름답고, 풀은 풀대로 파랗게 너울거리고, 김 서방, 이 서방은 각각 아들딸 낳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그렇게 사는 것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관공리는 관공리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승려는 승려대로, 신도는 신도대로, 각각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분상(分上)에 맞추어서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책무를 완수할 때에 전부가 다 한마음이 되고, 한 불사(佛事)를 이룩하고, 한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춧돌과 기둥과 서까래와 대들보, 흙과 종이와 철근과 기왓장,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여러 가지 재료가 합해져서 하나의 훌륭한 집을 짓듯이, 우리 김가, 이가, 박가, 고가, 성(姓)도 다르고, 피도 다르고, 모양도 다 다르지만 각각 다른대로 저 나름대로의 생애가 있고, 저 나름대로 취미가 있고, 저 나름대로의 희망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마는,
바른 불법,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찾는다고 하는 점에서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닦는 것을 우리 모두의 본업(本業)으로 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때, 절에 오면은 훌륭한 신도요 법보제자요, 가정에 돌아가면 훌륭한 아내요, 어머니요, 아들이요, 딸이요, 아버지요, 형이요, 동생이요, 자식이 될 것입니다.(16분12초~33분3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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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산하시아가~’ ; 『소요당집(逍遙堂集)』 게송 참고.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여래지(如來地) ; 불지(佛地). 부처의 지위(地位)·경지(境地). '부처의 상태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成佛)과도 같은 뜻.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진진찰찰(塵塵刹刹) ; ①티끌 수와 같이 무수한 국토를 말한다. ②미세한 티끌 가운데에도 국토가 있다는 것.
진진찰토(塵塵刹土), 찰찰진진(刹刹塵塵)이라고도 한다. 진진(塵塵)은 티끌. 찰(刹)은 산스크리트어 kṣetra의 음사. 토(土), 국(國), 처(處)라고 번역. 국토. 세계. 땅. 장소. 영역.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실불(實佛) • 법성신(法性身)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다.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絕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언필칭(言必稱) ; 말을 할 때면 항상 일컫기를.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산것. 살아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함.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③부처가 될 수 있는 요소. 본질.
*화현신(化現身)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대총상(大總相法門) ; 진여(眞如)를 가르켜 말함. 진여의 실체.
진여가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섭한 것을 대(大)라 하고, 일미 평등(一味平等)하여 차별의 모양을 여읜 것을 총상(總相), 수행하는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법(法), 관하는 지혜가 드나드는 것을 문(門)이라 한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 ‘眞佛無口, 不解說法. 眞聽無耳, 其誰聞乎.’
[참고] 황벽(黃檗) 스님의 『완릉록(宛陵錄)』에서.
此性縱汝迷時亦不失, 悟時亦不得. 天眞自性, 本無迷悟. 盡十方虛空界, 元來是我一心體. 縱汝動用造作, 豈離虛空. 虛空本來無大無小, 無漏無爲, 無迷無悟. 了了見, 無一物, 亦無人, 亦無佛,

이 본성은 비록 네가 미혹해 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또 깨달았을 때라도 역시 얻는 것이 아니다. 천진스런 이 자성(自性)은 본래 미혹함도 깨달음도 없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원래 나의 한마음의 본체이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할지라도 어찌 허공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허공은 본래 크지도 않도 작지도 않으며, 번뇌도 없고 유위도 없으며, 미혹함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아 한 물건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絶纖毫的量, 是無依倚無粘綴一道淸流, 是自性無生法忍. 何有擬議. 眞佛無口, 不解說法. 眞聽無耳, 其誰聞乎. 珍重.

거기에는 털끝만큼도 계량(計量)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의지하여 기댈만한 것도 없고 달라붙을 것도 없는 한 줄기의 맑은 흐름인 것이며, 이것이 곧 자성(自性)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인 것이다. 어찌 무슨 의론의 여지가 있겠는가?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자신을 소중히 하여라.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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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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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21. 11. 18. 14:09

§((212))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금강보검의천한~.

**송담스님(No.212)—1983년 9월 첫째 일요법회(83.09.04) (용212) (생활속 정진)

 

약22분.


불법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아 가느냐?' 거기에서 불법이 융성해지는 것이지 어떠한 사회적인 조직으로 인해서 불법의 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한 종단 체제가 바로 잡아져서 안정이 되어야 그 종단 산하에 귀의한 신도들도 마음이 잡혀서 가정이라던지 사회에 옳게 생활을 해 나가시고 일을 해 나가실 것이고, 우리 출가한 스님네들도 마음이 놓여서 정진을 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단 문제는 여러분들이 신문을 통해서 알고 계신 분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마는 뭐라고 여러분 앞에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 종단의 이러한 가끔 일어나는 여러 사태에 관해서 염려를 하는 신도분이 계셔서, “대관절 출가한 스님네들이 어째서 도만을 열심히 닦고 청정한 마음으로 해 나가면 종단도 그러한 스님네들이 나와서 잘해 나가면 종단도 잘되고 참 다른 많은 사람들도 불법에 대해서 신심을 내서 많이 귀의를 하게 되고 그럴 텐데, 꺼떡허면 종단이 시끄럽고 모다 그래 가지고 어디다가 내가 불교신자라고 얼굴을 내놓기가 참 창피한 때가 많다. 대관절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 신도들은 처자권속이 있고 모다 가정이 있고 해서 돈이나 권리가 없으면 도저히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번연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악착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을 벌라고 애를 쓰고, 심지어는 부정도 하고 자칫 잘못하다가 들키면은 징역도 살 만한 그러한 일도 가정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스님네야 살아서 무슨 상투가 있나, 죽으니 뭐 자식이 있나, 아내가 있나, 무엇이 걱정이 있어서, 그저 한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두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그뿐인데 왜 그렇게 시끄럽게 그래 쌓습니까?”
아주 내 앞에 와서 탁! 까놓고 공격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참 나도 승려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공격을 나도 받어야 하고, 참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으나 내가 가만히 그 문제를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나대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그래서 "나는 그 종단에 나와서 일하는 모다 스님네들은 어느 모로 보던지 다 똑똑하고 다 훌륭한 스님네들인데, 그렇게 서로 싸움을 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하면 모든 불자와 모든 국민으로부터 참 많은 욕을 얻어먹을 줄 빤히 알면서 그렇게 분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그분네들이 그 불보살 화현(化現)이 나타나 가지고 일부러 그러시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든 종교가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처음 천 년간은 계속해서 발전을 해 나가고 번영을 해 나가다가 그다음 천 년간은 평행을 이루고, 그다음 천 년간은 차츰차츰 쇠퇴해 가는 기간이다. 그런데 특히 불교는 지금 3천 년이 되었으니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는 벌써 2천 년 지내면서부터 차츰차츰 쇠(衰)해 가지고 벌써 3천 년이 되었으니, 고목나무 가운데에도 아주 속이 참 완전히 썩어서 꽃도 잘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기 어려운 그러한 아주 극도로 썩은 그런 고목나무와 같은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고대로 놔두고는 새싹이 돋아날래야 돋아날 수가 없어.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빨리 쓰러뜨려 버려야 그 밑에서 새싹이 나 가지고 그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 가지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을 게 아니냐. 그래서 지금 종단에 나와서 일을 보시는 스님네들이 참 욕 얻어먹을 것을 각오하고 또 심지어는 지옥에 들어갈 것도 각오를 하고, 그 고목나무를 비어서 쓰러뜨려 버리고 새싹을 기르기 위해서 나오신 불보살의 화현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분네들도 참 피땀을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못 자고 고생을 하고, 심지어는 때로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참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이 아마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과연 그 말을 들으니까 그럴싸하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마는, 내일이면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가지고 새로운 길을 모색을 한다고 승려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통지가 왔습니다.

우리 사부대중은 하루빨리 종단이 바로잡아지고, 정말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목숨바치는 그러한 실답고 참다운 수행자, 출가승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하신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종단은 반드시 또 바로잡아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일신(一身)에 관해서도 첫째나 둘째, 셋째 부인보단 넷째 부인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아야겠고 또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인류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우리 종단을 위해서도 그러한 마음가짐과 그러한 풍토가 이루어져야만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신 바와 같이 칼(KAL)기가 그렇게 참 소련의 그런 무도한 폭격으로 인해서 269명이라고 하는 아까운 생명이 죽어갔고, 또 이러한 분개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하느냐? 우리는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슬픔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조 때부터 내려오면서 계속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궁중에서 왕가에서는 서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와 숙질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밑에 모다 벼슬아치나 선배들은 모다 노론, 소론이다 해 가지고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그래 가지고 불교는 갖다가 탄압을 하고, 이리 내려오다가 결국은 경술년에 왜놈한테 나라를 빼앗기고 그래 가지고 왜정 36년간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는 핍박을 당하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마는 38선이 갈라져 가지고 계속 오늘날까지 참 내려오면서, 많이 우리나라가 좋아졌습니다.
옛날에는 보릿고개라 해서 참 수없이 많은 사람이 굶주림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그러다가 차츰차츰 우리나라는 다 먹고살 만하게 되었고 또 국위도 많이 선양이 되었고, 참 옛날에다 비교하면 참 말로 할 수 없이 참 잘살게 되었으나, 그래도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힘이 약해서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참 분통 터질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니 만큼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일치단결해서 각기 자기 맡은 바 소임을 완수를 하고 더욱 나라를 갖다가 부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일에 충실을 하고 그것을 뿌리로 해 가지고 모든 사업도 해야 하고 각기 학생은 학생대로, 또 학자는 학자대로, 실업가는 실업가대로 또 각기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밖에 일은 아무리 그것이 소중하다 해도 줄기요, 가지요, 잎이기 때문에 그 잎과 가지와 줄기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면은 뿌리가 제대로 박혀야 하고, 뿌리가 충분한 영양과 수분과 좋은 토양 속에 묻혀야만 거기에서 좋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행복하고, 한 가정이 평화롭고, 한 나라가 부강하고 나아가서 인류의 평화를 유지할라면 그 뿌리인, 근본인 각자의 자성(自性)을 바로잡아 깨달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참 한결같이 다 말씀한 바지만, 특히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법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퍽 살기는 편리하게 되었지마는 이렇게 살벌(殺伐)해 가고, 나라와 나라끼리 이렇게 참 못 할 짓을 하고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성현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뿌리를 북돋은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해 온 까닭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신 바와 같이 대학, 세계 각국의 모든 교육이 오직 그 잎이나 가지를 갖다가 충실히 하는 그런 지엽적인 과학기술 교육에 치중을 해 왔을뿐 뿌리를 북돋은, 우리의 자성을 깨닫는 그러한 교육은 거의 무시를 해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첫째 둘째 셋째 부인만 애끼고, 그리고 제일 그 배신(背信)을 해 버리고 말 첫째나 둘째한테만 빠져 가지고 넷째 부인—진정 애끼고 사랑해야 할 넷째 부인에 대해서 괄세를 하고 냉대를 한 그 죄과로써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까딱 잘못해서 미국이나 소련 같은 데서 핵무기라던지 레이저 광선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참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이 세계 인류는 다 같은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시체로 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 없는 도리'가 내게 있으므로 내게 있는 그 생사 없는 도리만 본다면 백 번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단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최상승법에 목숨 바쳐서 철저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하면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가
나무~아미타불~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금강의 보배 칼이 하늘에 의지해서 싸늘한데, 하늘에 금강 보검이 번쩍거리면서 서 있다 그 말이여.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한 번 번쩍 하는 바람에 능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가 두 동강이가 났구나.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한데, 온 세계에 두루 펴져 있는 마군(魔軍)이가 일로 좇아서 전부 함락이 되었는데,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무슨 도깨비가 있어서 그 속을 엿볼 것인가.

여러분에게 있는 보배 칼을 항시 갈고 닦아서 손에서 놓지 아니한다면 어떠한 마군(魔軍)이도 여러분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종단과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매월 일요법회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열리는데, 어린이 법회도 이 지하 아래층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니까 국민학교 학생들 또 유치원 학생들 그런 자녀분이 있으시면 같이 데리고 오셔서 그 일요법회에 참석을 해 가지고 불교의 좋은 노래도 배우고 또 재미있는 불교의 설화도 듣고 이렇게 해서 어릴 때부터서 불교의 씨를 심어주면 차츰 커가면서 훌륭한 불자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39분36초~60분58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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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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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