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21.08.13 §((세등51)) 『논어(論語)』 첫마디 / (게송)종타방임타비~ / 누가 나를 헐뜯어도 그 말을 감로수처럼 달게 받아 마셔라 / 바다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가라.
  2. 2021.08.12 §((세등51)) 대의지하 필유대오 / 최상승법은 일념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는 것 / (게송)마니주인불식~ /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3. 2021.08.11 §((세등51)) 달마 조사가 전해준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는 활구참선법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설.
  4. 2021.08.10 §((세등51)) (게송)군자하산지~ /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해 나가야 /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묵언이 되야 / (게송)거년별아여산정~.
  5. 2021.08.09 §((233))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한 과제 / 간화선(看話禪) / 묘관(妙觀) / 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수마(睡魔) / 생력(省力)이 득력(得力).
  6. 2021.08.07 §((세등28))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 화두(話頭)를 든다=화두를 생각한다=화두를 관(觀)한다.
  7. 2021.08.05 §((472)) (게송)우후정화연야발~ / LA 인종 폭동 / 참선법을 배워야 세계가 평화롭게, 인간이 인간답게 / 백인이나 유색 인종이나 인간의 본성에는 차등이 없다.
  8. 2021.08.01 §((301))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 (게송)운변천첩장~.
하심 팔풍 경계대처2021. 8. 13. 07:13

§((세등51)) 『논어(論語)』,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 (게송)종타방임타비~ /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 마셔서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아라 / 불자(佛子)라면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가라.

무슨 시비가 나한테 상관이 있어? 칭찬을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울뿐이여. 나를 헐고 뜯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속상할 것이 없어. 거기서 너그러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서 더욱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사람은 일장월취(日將月就), 나날이 발전하고 다달이 승화되어 갈 것이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하심팔풍)

 

 

 

약 12분.

 

 


유교 경전에 『논어(論語)』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사서(四書) 중에 하나인데, 그 논어의 첫마디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즉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별로 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지 아니한데, 깊은 뜻이 있지 아니하면 왜 논어에 첫마디에 그것이 있을까 보냐?  무슨 경전이든지 첫마디에 있는 법문이 그 경전에 최고에 깊은 진리를 표현했다고 보면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 무슨 글공부를 글을 배워 갖고 그것을 자꾸 읽어 쌓으면 기쁘지 아니하냐. 그러한 피상적인 뜻이 아니라, 도(道)를 얘기한 것입니다.

선지식으로부터—우리 불교, 이 선학(禪學) 이 종문(宗門) 중에다가 비유를 한다면,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도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시시때때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얼마나 기쁘냐 그 말이여. 기쁘지 않겠느냐?
아 공부를 하면 '참 내가 어쩌다가 이런 좋은 최상승법을 만났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이런 좋은 법을 만났는가?' 밥 먹다가 생각해도 너무너무 기쁘고, 중생들의 그 고해(苦海)에 빠져서 그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허덕이는 것을 보면은 불쌍하면서 가엾으면서, 내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참 행복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서 오면—막걸리 친구나 뭐 동창생이 찾아오면 얼마나 기쁘냐?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같이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내가 공부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다면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 말이여. 내가 출가해 가지고 별로 훌륭하지를 못하고 도를 잘 못 닦고...(녹음 끊김)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君子)가 아니냐?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수행인이 아니냐 그 말이여.
자기가 조금 뭣 좀 한다고 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고 그것을 자랑하고, 내가 제일이라 하는 생각을 갖고 남을 헐뜯고 한다면은 이것을 어찌 참다운 수행인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란 말은 불교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인이다. 또는 보살이다' 이러한 정도에 뜻과 같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 가운데에 하나에, 불자찬훼타(不自讚毁他)라고 하는 조항이 있는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고 하는 것은 보살이 지켜야 할 십중대계에 하나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을까 보냐 그 말이여.
세속에 선비도 조금 어지간한 사람은 그러한 법이 없거늘, 하물며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을 결별해 버리고 생사를 바쳐서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 수행인이고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고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니라
나무~아미타불~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남이 나를 비방하면 비방하는 대로 맽겨둬 버리고, 나를 헐고 뜯으면 헐고 뜯는 대로 그 사람한테 그 맡겨둬. 맘대로 하라고.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횃불을 들고 허공을 불사르려고 하는 것 같애서 저만 피로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횃불을 들고, 아무리 훨훨 타는 큰 횃불을 가지고 이 하늘을 불사를라고 막 해봐라 그 말이여. 허공이 타는가? 그러다가 저만 피로해 가지고 지쳐 쓰러지거나 잘못하면 불똥이 튀겨서 지 몸이 타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면, 나는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헐고 뜯고 비방하는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서 마시면—내가 잘못해서 나의 단점을 누가 헐고 뜯는다면은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자기를 반성하고 고칠 것이고, 나는 실지로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모략 중상을 한다면 그렇더라도 그 말을 '아 내가 그래도 전생에라도 뭣을 잘못한 점이 있거나, 나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지마는 나에게 그런 잘못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감로수처럼 받아서 먹어서 잘 소화를 시켜버리면,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하리라.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비방하고 헐고 뜯고 한 그것이 소화가 되어 가지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선지식이 되고 불보살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감로수를 마시고.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발심한 수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조금 뭐라고 한다고 파르르르르 신경질을 내고 속으로 감정를 품고, 꽁하니 미운 생각을 속으로 품고, '언젠가 저년을 갖다가 내가 한바탕 봐주리라' 이러한 소인(小人)의 근성을 가져서 쓸 것인가 이 말이여.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도를 닦은 사람이 어찌 감로수처럼 받어 마셔야지, 그러한 말을 듣고 감정을 품고 언젠가는 봐줄려고 하는 꽁한 복수심을 갖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냐.

아 그말을 감로수처럼 받아 마시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누가 나 안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면 어찌 나에 대해서 말을 할까보냐 그 말이여.
성현의 말씀에도 나를 칭찬해 준 사람은 도적이요,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스승이요 은인이다 그랬어. 하물며 출가인 분상에 그만한 것을 이해를 못하고, 소화를 시키고 거기에서 살아가지를 못하고 죽음의 무덤을 판대서야 말로 할 수가 없거든.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대중방에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만한 정신 자세가 되어 있지 아니해 가지고 선방에 나갈 자격이 있는가? 선방에 나간다면 강원의 학인도 그러지 못하고, 선방에 나가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쯤은 되어야 해. 이쯤되어 가지고 나가 보라 그 말이여.
무슨 시비가 나한테 상관이 있어? 칭찬을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울뿐이여. 나를 헐고 뜯는다 하더라도 그 그렇게 속상할 것이 없어. 거기서 터억 너그러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서 더욱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사람은 일장월취(日將月就)여. 나날이 발전하고 다달이 승화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스님네뿐만이 아니라 세속에 계시는 청신사 청신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자(佛子)라면 응당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이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신다면은 바로 그이가 보살(菩薩)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보살, 여자 신도를 보살(菩薩)이라고 부르는데 그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 나가셔야 한다 그 말이여.(42분2초~54분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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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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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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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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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세등51)) 참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들어 있다.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 (게송)마니주인불식~ /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의심-화두드는 법)

 

 

 

약 19분.

 

 

 

처음에 선방에 와 가지고 정진을 하되, 올바르게 공부를 못해 가지고 참 가석하게도 몸에 병이 난다든지 또는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그러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가끔 봅니다.

이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이거여.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여. 큰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 그 큰 의심이 터지면서 크게 깨달어. 의심이 시원찮으면 깨닫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소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깨달음이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큰 깨달음(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은 주둥이는 쪼끄마하고 그 밑에 몸뚱이는 크낙해 가지고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를 집어넣었다. 오리 새끼 금방 깐 거야 조그마하기 때문에 그 유리병 작은 주둥이로 집어넣었어. 오리 새끼를.
넣어 가지고 날마다 물도 주고 먹이도 주고 해 가지고 그 오리를 먹여 살렸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크니까, 그 오리가 크막한 애미가 되었어. 몸뚱이는 크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오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컸는데, 그 오리를 유리병 밖으로 꺼내야겠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유리병을 깨지도 말고 그 오리도 다치지 않게 어떻게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냈다.

이것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중에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이 문제를 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유리병을 어떻게 깨지 않고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는가?' 그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오리를 죽여 가지고 대가리 띠어서 꺼내고, 날갯죽지 꺼내고, 발목쟁이 꺼내고, 몸뚱이도 토막을 내서 꺼내고, 아 그렇게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유리병을 유리를 갖다가 확 깨 가지고 그렇다면은 오리를 다치지 않고 꺼낼 수가 있겠으나, '유리병도 조금도 깨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하고 그리고서 오리도 상하지 않게 어떻게 꺼낼 수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자기는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오리 꺼내는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오리를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기는 '이뭣고?'를 해라 그 말이여.
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분은, 설사 다른 공안—오리 새끼 꺼내는 공안이 되었건, 또는 이뭣고 공안이 되었건, 또는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건 간에, 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외의 화두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하물며 세속에 어떠한 문제나 경전에 있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의심을 만났을 때에 탁! 똘똘 그놈을 뭉쳐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해 나간다면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더라도 '아, 산이 푸르르구나,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끼였구나' 이런 식으로 쫓아가지 말고, 푸른 산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의 화두(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아와. 이것이 바로 천의만의(千疑萬疑)가 병작일의(倂作一疑)다 그 말이여. 이 화두에,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이것이 큰 병(病)이여.
꺼떡허면 자기 화두는 놔 버리고 어믄 다리를 긁어. 어믄 일에 신경을 쓰고, 어믄 일에 걸려든다 그 말이여. 이것이 병 중에서는 최고의 큰 병이여.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뭘 생각하는 데에 끄달리고, 남이 잘하고 잘 못하는 데에 끄달리고, 그게 다 발심(發心)이 철저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본참(本參)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육근(六根)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에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십팔천(十八天)을 돌고 돌아. 그러다가 잘못 끌어 박히면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니주인불식(摩尼珠人不識)이여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면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육도법계를 자유자재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인가?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어늘, 중생심 그 제8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 희로애락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 육근 · 육식 · 육진(六塵. 六境)이 바로 여래장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덥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한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한 신통이다.

그런데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요, 분명히 있으되 비어 있는 것이고, 분명히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령하건마는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하며 색상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중생의 소견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가지고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에 충실해서—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아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이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이뭣고?'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무서운 호랑이나 큰 구랭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뿔 달린 무서운 악귀 같은 것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갈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를 않고, 그 자리에 있자니 잡혀 죽게 생겼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옛날에 참선하지 아니할 때에는 고함을 지른다든지, 막 도망갈라고 몸부림을 치되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한참동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자기가 지르는 자기의 고함소리에 눈을 뜨고 보면 전신에 땀이 흠뻑 젖어 갖고 있는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을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한 뒤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 화두를 탁! 들어 버리면 눈이 딱! 떠져 버린단 말이여.
비단 꿈속에 뿐만이 아니여. 인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나는 일, 속상하는 일,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일체 선악 경계를 당했을 때, 화두를 딱! 들어 보라 그 말이여. 어디에 속상한 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분한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슬프고 괴로운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다그쳐 나가면 깨닫기를 바랠 것이 없어. 독 안에 든 자라와 같아서 지가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조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어서 빨리 깨달러 가지고 남 앞에 큰소리 한번 쳐보리라'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 큰소리쳐서 뭣해?(23분11초~41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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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21. 8. 11. 09:50

§((세등51)) 달마 조사가 직지인심(直指人心),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이 활구참선법을 전해 주셨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편설에 떨어져 있다면 어리석고 가엽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활구참선,최상승법)

 

 

 

약8분.

 

 


우리가 해야 할 나아갈 일은—달마 스님! 우리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지만, 우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부처님으로부터 28번째 법등(法燈)을 전수하신 달마 조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조사가 140세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이 직지인심(直指人心),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이 활구참선법을 전해 주시지 안 했다면, 우리는 계율이나 지키고 경전이나 연구하는 그러한 불법에 빠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그러한 묘(妙)한 문(門)이 있는 것을 모르고 말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달마 스님을 인해서 우리는 참으로 부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달마 스님의 법(法)은 선정, 선정(禪定)을 닦아서 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이 아닙니다. 물론 참선하는 데에 계율도 지켜야 하고, 선정도 닦아야 하고, 교리에도 밝으면 좋고, 불법에 한 법도 버릴 법은 없으나, 그 근원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바로 파악을 해 가지고 그 중심을 바로잡아서 수행을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뜩이 근기(根機)는 약해서 자기 몸 하나도 추단해 나가기 어려운 그러한 처지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잔뜩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 보고 싶어 한다면, 까딱하면 근본은 잊어버리고 지엽(枝葉)에 걸려서 평생을 그르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출가 수행인이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계율을 또 지켜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육바라밀을 닦어야 하고.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다 갖추어야 하고. 그러나 계율을 지키기 위한 계율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지키기 위한 육바라밀을 지키고, 팔만세행을 갖추기 위한 팔만세행을 갖추어서는 그것은 이 몸을 가지고 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여.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마음을 관하는 한 법! 화두를 참구(參究)해서 생각생각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한 경계에 들어가면 계행(戒行)을 지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계행이 지켜져 있고, 육바라밀을 닦을려고 안 해도 바로 행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하고, 생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절로 육바라밀이 지켜지 버리게 된다. 팔만세행도 역시 일부러 갖추려고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단이 독로해서 화두가 순일한 사람이 어찌 살생을 할 마음을 내며, 어찌 도둑질할 마음을 내며, 어찌 간음을 할 생각을 낼 것이냐 그 말이여. 한 마음 단속해서 화두가 순일하게 나아가면 일체 행(行)이 바로 거기에 다 제절로 갖추어지는 거여. 이것이 바로 달마 스님께서 주창하신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오계(五戒)와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묘한 문이어서 어느 문으로 들어가도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러 다 문이 열려져 있는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지만, 그 묘한 법을 잘못 이해하고 그 방편문(方便門)에 국집(局執)해서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마치 달 가르키는 손가락을 잘못 이해를 해 가지고, 그 손가락을 인해서 하늘에 있는 달을 봐야지, 달은 보지 아니하고 그 손가락만 국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 달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겨우 돌이 지내갈락말락한 어린아이에게 '저 하늘에 달을 보라' 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그 손가락을 통해서 하늘에 달을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자꾸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팔만장경이,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경(經)에는 온갖 방편설이 있지만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 가지고, 바로 가리키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본자성(本自性)을 보지 않고서 방편에만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어리석고 가엽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15분13초~23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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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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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8. 10. 11:49

§((세등51)) (게송)군자하산지~ / 출가한 우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없다 /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지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한다 / (게송)거년별아여산정~.

**송담스님(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세등51) (정진)

 

 

(1) 약 15분.

 

 

(2) 약 4분.

 


(1)------------------

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무~아미타불~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한디  추색입정괴(秋色入庭槐)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그대는 어느 산으로부터서 왔는가?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는 저 황악산으로부터서 왔느니라.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하니, 서로 만나서 한번 웃으니,
추색(秋色)이 입정괴(入庭槐)로구나. 가을빛이 뜰 앞에 괴목 나무에 왔구나. 괴목 나무에 들었구나.

해제를 하고 제방(諸方) 선원에서 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해서,
'어디에서 지난 여름을 지냈는가?'
'나는 아무데서 여름을 지냈다'

'정진은 지난 여름 동안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우리 선방에서는 이러이러히 지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많지만 피차가 서로 생각 생각이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고 속으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서, 그리고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인사를 나누는데, 구태여 입을 벌려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썩하니 물어보고 대답하고 할 것이 없어.
피차 생긋이 웃는 그 미소 속에 한없이 깊은 마음에서 인사가 오고가더라 그 말이여. 그리고 도량을 둘러보니 괴목 나무에 가을 소식이 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러한 게송입니다.


갑자년 하안거를 마치고 오늘 해제 법요일을 맞이해서 이 세등선원에서 지내는 대중과 또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서 몇몇 도반(道伴)과 그 반야선원에는 겨울에는 대중스님네를 모아서 정진을 하고, 여름에는 신도 보살님네들이 십여 명 모여서 금년 여름에 지냈다고 그럽니다.
그 대중도 모다 이 자리에 참석을 했고, 또 제방에 각 선원에서 정진을 한 비구니 선객 스님들도 거기서 해제를 마치고 오늘 이 자리에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해제를 하고, 각기 자기 선원에서 해제를 하고 도반들이 팔도에서 이렇게 모이니, 그 얼굴 얼굴에 신심과 환희심과 그리고 '기어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마치고야 말겠다'고 하는 그러한 의연한 결심이 그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역력하고, 생긋이 웃는 미소 속에는 지혜와 평화와 자비가 넘쳐흐르는 모습들을 보고 나는 너무너무 감격을 했습니다. 우리 도반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불법(佛法)은 결단코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온 세계가 싸움이 일어나 불바다가 되고, 설사 종단에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우리의 도반들이 밤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는 한에 있어서는, 불법은 결정코 끊어지지를 아니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부처님의 등불이 훨훨 타올라서 온 세계를 밝게 비추고 말 것입니다.


방금 전강 대선사(田岡大禪師)에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 그리고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出家)한 우리 도반들,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렸거니 무슨 애착이 있으며, 무슨 시비가 있으며, 무슨 걸거칠 것이 있겠습니까.
앉으나 서나, 눕거나 거닐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보냐.
밥이 질면 진 대로, 밥이 되면 된 대로, 찌개가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언제 밥이 되다 질다, 찌개가 짜다 싱겁다, 그러한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묵언(默言)을 일부러 하려고 해서 묵언을 하는 것이 아니여. 묵언패(默言牌)를 목에다가 써서 붙이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뭐 글씨를 써서 문답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심으로 정진을 하다 보니까 제절로 묵언이 되어버린다. 꼭 할말이 있으면 한마디하고, 누가 부르면 대답하고, 한마디 말 끝나 버리면 바로 묵언이여. 하루 종일 지내봤자 뭐 그리 할말이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하루에 한마디하기도 하고 또는 한마디 안 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마디 하기도 하고 세 마디 하기도 하나, 그 한마디 두 마디 한다고 해서 정진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여. 꼭 할말은 하되 쓸데없는 말을 안 하게 되니까, 일부러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에 일념으로 해 나가기 때문에 제절로 그것이 묵언이여. 이것이 진짜, 선객(禪客)이 해야 할 묵언인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20대에 출가하자마자 느낀 바가 있어서 10년을 묵언을 했지마는, 나는 근기(根機)가 약해서 할말을 하면서 그냥 고대로 묵언을 한 그러한 묵언을 하지 못하고, 할말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하고 완전히 벙어리처럼 묵언을 했는데, 묵언을 한 뒤에 가만히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지금도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그렇게 썩 훌륭한 묵언을 하지를 못했어.
진짜 훌륭한 묵언은 할말 있으면 한마디 탁! 하고, 딱! 끝나자마자 바로 묵언이여. 하루에 한마디 내지 반 마디 이런 정도, 그렇게 꼭 필요한 말이 없거든. 여기에 모인 대중들도 그러한 묵언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흔히 '소승(小僧)도 묵언을 하고 싶습니다. 묵언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이러한 말들을 가끔 와서 문의를 하는 선객들을 만났는데, 나는 그러한 형식적인 벙어리 흉내낸—속으로는 온갖 분별 다 하고 시비에 참견하면서 억지로 입만 딱 다물고 벙어리 흉내내는 그러한 묵언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진짜 묵언을 해라. 할말 한마디 두 마디는, 부득이해서 해야 할 한마디 두 마디는 하되 정말 화두에 일념,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어져 버리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져 버리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처음~15분9초)





(2)------------------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일송군초수빈(今日送君楚水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디  낙화제조우잔춘(落花啼鳥又殘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년송군초수빈(今年送君楚水濱)이로구나.
거년(去年)에는 우리가 저 여산 땅 꼭대기에서 여산에서 이별을 했더니, 금년에는 그대를 초수 물가에서 보내게 되는구나.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데,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유유(悠悠)해서 서로 말이 없는데, 꽃은 지며 새는 우는데, 여름이 다 가는구나.

오늘 해제를 하고 우리 도반들이 동서남북으로 헤어져 가는데 서로 묵묵히 말이 없어. 말이 없지만 다시 다음 어느 회상(會上)에서 만나게 될는지, 어느 곳에서 서로 또 다시 만나게 될는지 만날 그때까지 서로 건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자 하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에 인사가 오고갈 것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넉 달, 몸조심하고 이 결제 동안에 그 정진한 그 정진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산철에도 보다 더 마음을 가다듬고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하고 말을 맺고자 합니다.(57분37초~61분3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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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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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33))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 / 어떠한 근기,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 /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송담스님(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용233) (의심-화두드는법)

 

 

(1) 약 16분.

 

 

(2) 약 16분.

 


(1)-----------------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41분39초~57분19초)




(2)----------------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57분21초~1시간12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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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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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1. 8. 7. 06:56

§((세등28))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비우는 공부 /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 화두(話頭)를 든다=화두를 생각한다=화두를 관(觀)한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음) (세등28)(참선의목적)

 

 

 

약 19분.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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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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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72)) (게송)우후정화연야발~ / LA 인종 폭동(1992년). 인과법(因果法)의 과보(果報) / 참선법을 배워야 세계가 평화롭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 / 백인이나 유색 인종이나 인간의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차등(差等)이 없는 것 / 자기 마음 하나를 잘 다스려야.

 

 

약 21분.

 

 


**송담스님(No.472)—1992년 5월 첫째일요법회(92.05.03) (용472) (하심팔풍경계대처)

우후정화연야발(雨後庭花連夜發)하여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화응유의향인소(花應有意向人笑)언만  만원선승공도춘(滿院禪僧空度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우후정화연야발(雨後庭花連夜發)하니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로구나.
비 온 뒤 뜰에 꽃이 밤을 이어서 피었어. 비가 오니 그 비 기운을 받아서 뜰에 꽃이 아주 만발을 했다 그 말이여.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다. 그 꽃에 맑은 향기가 나부껴서 새벽 창을 뚫고 들어왔어.

화응유의향인소(花應有意向人笑)언마는, 그 만발한 꽃은 응당 뜻이 있어서 사람들을 향해서 웃고 있건만,
만원선승(滿院禪僧)은 공도춘(空度春)이로구나. 이 선원에 가득한 모든 대중들은 그 꽃에 깊은 뜻을 모르고서 공연히 이 봄을 지내고 있구나.

편양(鞭羊) 선사의 게송입니다.


오늘은 임신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몽산법어(蒙山法語)』에 나오는 그 '동산숭장주(東山崇藏主)라고 하는 분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떠나는 제자를 향해서 설한 법문[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을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금년도 벌써 5월이 되었습니다. 엊그제 눈이 오고 우박이 쏟아지고 비가 오고, 벌써 꽃은 만발하고 있지마는 벌써 여름이 머지않아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입하(入夏)가 돌아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세월은 이렇게 하루하루 지나간 줄 모르게 지나가고 또 오는 소식도 없이 이렇게 오고, 그렇게 해서 재촉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흰머리가 생기게 하고 주름살이 불어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사형(死刑) 집행일이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시겠지마는, '미국은 민주주의 나라고, 살기 좋은 나라고, 부자의 나라고, 세계에서 제일 참 좋은 나라라고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모다 말들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나라에 흑인들 폭동(暴動)이 일어나 가지고[LA 인종 폭동(1992년)], 폭동이 일어난 피해를 입은 제일 큰 대상이 한국 사람들이라 하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좀더 잘살아 보려고 미국을 갔는데 무엇을 잘못해 가지고 흑인들이 한국 사람을 상대해서 800개에 가까운 한국 사람의 가게에다가 타거나 파괴가 되고 약탈을 당했다 하니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금생에 설사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잘살아 보려고 애썼을지언정 무슨 흑인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백인에 대한,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 대우한 그 원한을 참 애잔한 한국 사람들한테 한풀이를 한 모양인데, 우리는 인과법(因果法)을 믿기 때문에 그 인과법에 입각해서 이것을 살펴보면 '설사 금생에 잘못한 것이 없다 하더라고 전생에 잘못한 그 과보(果報)가 있어서 금생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빚어서 구웠는데, 처음에 구운 것이 너무 불이 약해 가지고 허옇게 나왔어. 그것이 백인(白人)이고. 너무 허옇게 나와서 화력을 좀 강하게 했는데 너무 화력이 강해 가지고 시커멓게 구워진 것이 검둥이고. 그래서 세 번 만에 약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게 적당하게 구운 것이 황인종(黃人種)이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황인종이거든.

그런데 그러한 황(黃)이라 하는 것은 중(中)입니다. 검은 것은 북(北)이고, 빨간 것은 남쪽이고, 흰 것은 서쪽이고, 푸른 것은 동쪽이고 그리고 노란색은 중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색, 오색(五色)을 동 · 서 · 남 · 북 · 중앙에다가 배대(配對)를 하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황인종은 중앙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황인종은 '가장—너무 굽지도 않고, 너무 덜 굽지도 않고—적당하게 구워진 것이 바로 동양의 황인종이다' 인자 그러한 비유의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우리 동양 사람은, 그러한 성현도 동양에서 많이 나오고, 그에 따라서 진리의 개발도 동양에서 일어나고, 모든 문화도 동양에서부터 발원지(發源地)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모다 물질문명을 다투어서 발전을 시켜 가지고 모다 살기에 편리하고, 또 그것이 악용이 되면은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서 사람을 모다 죽이고 세계를 멸망케 하는 그러한 위험한 면이 있지만,
우리 동양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본성을 개발해서 그래서 진리를 자기에게 찾아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나아가서 온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느냐' 이러한 쪽으로 동양의 성현들은 공자님이나 부처님이나 또는 노자나 동양의 성현들은 전부 그러한 방향으로 문을 열어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나아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동양인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서는 자기 자신도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 가지고 세계평화는 이룩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 와서 이 참선법(參禪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가 평화롭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거기서 열리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고, 백인은 유색 인종(有色人種)을 무시한다 그말이여. 이번에는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흑인들한테 피해를, 본의 아닌 참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으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물론 백인들이 그것을 자각을 하고 유색 인종을 멸시하고 탄압하고 무시하고 천대하는 그러한 생각들이 마음에서 없어진다면 혹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 백인이라 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유색 인종을 종 부리듯 생각하고, 법으로는 물론 평등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흑인뿐만이 아니라 황색 인종까지도 백인들은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보를 머지않아서 한국 사람이 이번에 당한 것 몇십 배, 몇백 배를 당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미국은 흑인이 지배하는 시대가 앞으로 오십 년, 백 년 후에는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그러한 참혹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려면은 마음속에서 유색 인종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그런 마음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우선 법적으로 했지만, 법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실지로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없어져야만 그런 무서운 과보를 면하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백인들이 이 동양 사람, 황색 인종을 무시하니까 황색 인종은 그 마음을 검둥이들한테 부애풀이를 한다든지, 겉으로 부애풀이는 못해도 마음속으로 천대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희거나, 검거나, 누르거나, 전혀 인간의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차등(差等)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희다 하더라도 마음을 검게 쓴다면 검둥이만 못할 것이고, 설사 얼굴이 누르거나 검더라도 그 마음을 부처님을 믿고 진리를 믿는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써 모든 사람을 상대한다면 그 사람은 백인보다도 훨씬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귀의 노예가 되고, 눈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귀와 눈은 우리의 마음이 활동하는 문(門)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문(門)에 지나지 못한, 눈에 비친 색상과 귀로 들어오는 소리, 그것에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만다면 무서운 삼악도(三惡途)의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엇을 듣건, 항상 거기에서 자기의 본심(本心)으로 돌아가고 본지(本旨)에 입각해서 행동을 하고, 본지에 입각해서 말을 하고, 본지에 입각해서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삼악도를 면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자꾸 불어나서 가정에서, 사회 국가에서, 온 세계에서 자기의 본심을 찾는 본지에 입각한 생활을 해 나간다면 세계평화는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움을 하고, 빛깔이 다르다고 해서 싸움을 하고,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싸운다면 결국은 온 세계는 원래는 다 한 집안 식구고, 한 형제간인데, 형제간끼리 싸우는 것이 되고, 집안끼리 싸우는 것밖에는 안된 것입니다.
가깝게 생각하면 한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싸우고, 형제간에 서로 의사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고, 한 가족 안에서도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고부간(姑婦間)에 싸우고 형제간에 싸운다면 그 가정이 불행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인 것입니다.

얼굴 빛깔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상대방의 종교를 존중히 여기고, 그러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가고 언제나 근본에 의해서 근본을 향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간다면 지엽적으로 다른 점은 다 거기에서 적당하게 융화가 되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철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하는 선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참(久參)의 생각과 신참(新參)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남방에서 온 사람과 북방에서 온 사람이 다를 수가 있고, 다를 것이나 그 선원의 근본 규범에 서로 자발적으로 순종을 하고 개인의 의사를 지나치게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선원은 석 달 동안 아무 장애가 없이 정진을 잘해서 해제(解制)를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일을 자기의 의사만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짓밟는다면 중간에 결국은 걸망을 싸고 도망가게 되고, 서로 언쟁이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선방에 규범이 있고, 가정에는 가훈이 있고,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온 세계에는 인륜이라고 하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러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느냐?
문제는 자기 마음 하나를 다스리지를 못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마음만 다스릴 줄을 알고 자기의 감정만 다스릴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신사요, 숙녀요, 모범이 될 수 있는, 존경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처음~21분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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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21. 8. 1. 07:08

§((301))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 (게송)운변천첩장~.

**송담스님(No.301)—1986년(병인년) 하안거 결제 (용301) (정진,수행)

 

 

 

약 8분.

 

 


학자(學者)가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되, 활구(活句)—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알아들어 갈 것이 끊어져서, 그 공안(公案)을 마치 불덩어리와 같이 생각을 해.
큰 불덩어리는 가까이 가면은 내 몸이 순식간에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덩어리라 하는 것은, 큰 무서운 큰 불덩어리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가까이만 갔다 하면은 찰나간에 옷에 불이 붙고 얼굴이 확 타버릴 테니까.

그래서 이 공안 앞에는 무불법조착지처(無佛法措着之處)여. '부처다, 법이다' 그러한 소견(所見)을 거기다 갖다가 붙일 수가 없는 것이여.
다만 알 수 없는 큰 의심!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심이 어떻게 간절(懇切)하던지 하늘에 뻗질러.

이렇게 하루하루를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 나가면, 그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그렇게 간절하게 간절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떠억 현전(現前)하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境地)가 온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중단함이 없이 딴생각 내지 말고 계속해서 알뜰히 잘 단속을 해 나가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통 밑구녘 빠진 것처럼 의단을 타파하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구(求)하지 아니해도 일찰나(一刹那) 간에 확연(廓然) 터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그렇게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증거가 낱낱이 다 분명(分明)한 것이니, 조급한 생각을 먹지 말고, 두려운 지루한 생각도 먹지 말고, '공부가 잘된다, 못 된다' 이러한 생각도 내지 말고,
조끔 잘된다고 좋아하는 마음도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답답하고 영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그렇다 하더라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해 나가서 석 달 동안이 아주 하루같이 이렇게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인댄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다.
구름 가에는 천첩(千疊), 천 겹이나 쌓인 산이요, 울타리 밖에는 한 소리 시냇물이더라.
구름이, 구름이 자욱이 낀 밖에는 천첩(千疊)이나 쌓이고 쌓인 산이 둘러싸여 있고, 담장, 울타리 담장 밖에는 한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더라.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하면, 만약 열흘이 넘도록, 열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아니했다면,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어찌 비 개인 뒤에 저 새파란 하늘을 볼 수가 있겠는가.
열흘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이 되어서 비가 와서 구름이 꽉 끼었다가 그 구름이 쏵 벗거지니까 정말 새파랗게 트인 하늘을 이렇게 감상 깊게 볼 수가 있더라.

더운 여름, 정말 애써서 정진을 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정말 알뜰히 알뜰히 정진을 하면, 석 달이 지난 뒤 7월 해제(解制)가 되어서 정말 새파란 고운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34분3초~42분10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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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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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