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 (9/9) 몽산화상의 무자십절목. (끝)

**전강선사(No.507)—무자십절목(9) (끝) (갑인74.05.29) (전507)

 

약 28분.


금봉천리객(今逢千里客)이  내파만산운(來破萬山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창연미죽색(蒼煙迷竹色)이요  창외하일지(窓外夏日遲)니라
나무~아미타불~

금봉천리객(今逢千里客)이다. 천리의 먼 손이 이제사... 천리 먼 손이여. 객(客)이여. 몇 천리가 이것 몇 천리인지, 몇억만 천리인지 모르지. 먼 놈을 의미해서 천리(千里)라고 헌 건디, 저 원객(遠客)이란 말이여. 멀리서 온 이 참! 객(客)이 나그네 객이 이제사 만났다 그 말이여. 몇 무량겁에 한량없는 겁에 이제사 나 찾는 법, 나를 깨닫는 법, 이 정법(正法)을 만났다 그 말이여.
얼마나 언제 그전 과거에 언제 한번이나 만나 봤던가? 남[生]이 없는 내가. 왜 여태까장 이렇게 이렇게 만나 보지 못했을까? 정법을 왜 만나지 못허고 여태까장 깨닫지 못했을까 말이여.

내파만산운(來破萬山雲)이로구나. 이제 와서는 만산(萬山) 구름을 헤치는구나. 그 만산(萬山) 일만 산속에 어디 바위 틈새기 어디 깊은 속에, 그 어디 가서 내 나를 바로 가르켜 줄 스승이 있는가? 그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다해서 스승 찾는 법이여. 스승 없이는 못하는 법이라. 그 내가 가지고 있는 나지마는, 나를 깨닫는 법이 스승 없이는 깨닫들 못혀.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는 그 참선(參禪) 그 쉬운 법. 어려운 법 아니여, 그렇게 쉬운 법, 아 뭐 손바닥이면 손바닥이지, 손바닥을 뒤집을 것도 없네. 손바닥을 엎으면은 손등인디, 손등도 아니여 손바닥이지.
아! 그놈이 그놈이지, 내 코빼기 콧등이 내 콧등이 만져 보면 내 콧등이 그놈이지, 콧등이 안에 든 것도 아니여. 내가 나를 가지고 있는 이놈이 그렇게 가깝고, 아! 그렇게 그놈인디 시(是) 저인디, 왜 그렇게 못 깨달라?

우리 부처님 터억 깨달라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서는 부처님 같이 부처님 같이 그렇게 깨달라 가지고 세 가지 능[三能]이, 세 가지 능치 못한 것[三不能]이 있어. 그렇게 확철대오를 허셨건마는 세 가지 능치 못한 일이 있다.
①한 가지는 깨닫지 못한 저 중생을, 깨닫지 못한 모도 삼계화택(三界火宅) 중생을 깨닫게 해 주어. 확철대오를 시켜주련마는 그 일시에 일체중생을 확철대오를 허게 맨들들 못혀. 그건 제가 필경 저를 제가 깨닫지, 깨달라 주지를 못혀. 아무리 깨달라 주고 싶지마는 깨달라 주들 못혀. 그것이 하나가 능치 못한 일이 있고.
②무연중생(無緣衆生)을 제도난(濟度難)이여. 나를 비방한 자를 그 비방, 부처를 비방한 자를 제도 못혀. 그 어떻게 그 비방하고 믿지 안 한디 어떻게 제도를 헐 것이냐 그 말이여. 첫째 믿어야 되는 건데, 믿지 않거든. 믿지 않은 놈을 어떻게 헐 것이냐 그 말이여. 제가 믿어서 가르켜 준 대로 인자 봉행을 해야 할 턴디, 믿지 않은 놈이 부처님의 말씀을 봉행하는가? 안 되지.
③중생업을 대신 못혀. 중생이 모도 제가 죄를 퍼 짓고 한량없는 죄를 짓고 악도(惡途)에 떨어지는 것을 대신 못혀. 부처님께서 백번이나 천번이나 대신허고 싶지마는 대신 못한다. 그 세 가지 능치 못한 일이 있어. 헐 수 없거든.

이렇게 금생에 참 이 몸 받아서 와 가지고는 금생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믿어 들어왔다. 부처님 정법을 만났다. 이만큼 했으면 부처님 정법을 만났지. 이렇게 들어와서 이 선문(禪門)에 들어와서 부처님 참선법 가르켜 준 법을 그대로 봉행해 나가니 만났다.

내파만산운(來破萬山雲)이다. 그 그저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闊)하고 스승을 찾아 댕기는 법이다. 처음에 들어와 가지고는 고행(苦行)? 고행이라니? 그 괴로운 행.
뭐 돈벌이를 혀? 무엇을 혀? 무엇을 구해? 아무것도 없이 주장자나 짚고, 걸망 하나 떨어진 옷이나마 짊어지고, 내파만산운(來破萬山雲)이여. 만산 구름을 헤쳐.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闊)이여. 산 높고 물 널룬 것을 관계허지 안 혀. 물도 막 건네고, 산도 막 올라가고, 구름도 헤치고, 이렇게 스승을 찾는다.

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은 어떻게—그 손바닥이건마는, 손바닥 엎은 것도 아니여 손바닥이건마는 아! 그렇게 아! 스승을 만나지 못허면은 얻기가 어려와. 그 참 묘한 일이지. 제 혼자 공부를 해 들어가다가 분석해 따져서 무엇을 맨들어 가지고 들여다보고 앉었는 것은 참선법이 아니여.
해 들어가다가 모도 그만 그 적조(寂照)에 모도 체(滯)해서, 뭐 사선(邪禪)에 떨어져서 무슨 이치나 장만해 가지고 들어앉어서 비추고 앉었다든지, 보고 앉었다든지, 깔고 앉었다든지, 그거 소용없어. 그건 헛 고행이여. 헛된 고행이지. 괴로운 고행만 하는 것이지.

어쨌든지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옳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은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고 했다, 달마 스님도.
자! 찾아 나서 보았자, 만나 보았자 알 수가 있나? 제가 어떻게 스승을 알 도리가 있나? 동도(同道)래야 방지(方知)요. 도(道)가 같아야사 바야흐로 알고, 성현이래야 능지성현(能知聖賢)인데, 어떻게 그 선지식(善知識)을 가릴 수가 있나? 알 수가 없지.
그러니까 척 나서 가지고는 방방곡곡 이렇게 댕기면서 차츰차츰 원문(遠聞)도 허고, 근문(近聞)도 허고, 서로 대해서 이렇게 차츰 나서면은 아는 법이여. 차츰 구참도 만나고, 뭐 이래 가지고는 모도 논평도 있고, 어떤 스님이 법이 있다 없다, 그런 것도 다 만나 말을 들으면은 알 수가 있고, 차츰차츰 그렇게 찾는 법이여.

처음에 미(迷)해 가지고 대번에 어떻게 볼 수가 있어야 찾지. 모냥이 모냥이 있어야 찾지. 그 도인(道人)은 모냥이 달른가? 행동만 가지고 찾아보지? 행동만 가지고 그 찾아보니 그 도인인가? 별짓을 다하면 그게 도인인가?
도인일수록에 영아행(嬰兒行)! 제일 미친 광행(狂行)도 분수가 있지, 영아행이라는 것은 광행보다도 더 혀. 한 서너 살 먹은 놈이, 너덧 살 먹은 놈이 불인지 물인지 뭐 아나? 막 집고 그저, 미친놈은 오히려 불인 줄이나 알고 모두 허지마는 어린 것은 그것도 모른다 그 말이여. 그러헌 영아행을 가진 도인인데, 참도인은 영아행이라 했는데 어떻게 알 것인가?
과연 그러기 따문에 도(道)를 찾아 나온 학자는 그렇게 고행(苦行)이다. 그 괴로운 것뿐이여. 아무것도 없어. 그 고행뿐이여.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여. 편안한 거, 아주 무슨 뭐, 내 무슨 그런 것 구한 것 아니여.

창연(蒼煙)은 미죽색(迷竹色)이다. 푸른 연기는 죽색(竹色)을 희미허게 맨드는구나. 푸른 연기는 대색[竹色]을, 퍼런 대색을 희미하게 맨든다. 아! 그런 모도 댕기는데 그 사방 안개 속에 그 어디 모도 그 뭐 길인들 온당하며, 뭐 산인들 온당한가? 산고수활(山高水闊)이 험악, 험악하고.
창외(窓外)에는 하일지(夏日遲)다. 창밖에는 어디 그저 밖에는 하일(夏日), 여름날이 더디어. 그 날은 더워서 폭염에 기가 맥힌데, 그 고통 고생이 어떠헌가 말이여? 우리 도학자의 고행이라는 것은, 도를 구하는 도행이라는 것은 참 이러헌 괴로운 고학자(苦學者)여.
이러 않고서는 호귀득도난(豪貴得道難)이여. 호걸스럽고 귀엽고, 좋은 밥 먹고 좋은 옷 입고, 잘 살고 부귀헌 디서 도를 얻어? 소용없는 소리여. 빈한(貧寒)에, 가난허고 차운 디서 도심(道心)이 발(發)하고, 차운 역행(逆行) 속에서 도를 얻는 법이다.


어떤 것이 이 낱 네 자기(自己)냐? 어떤 것이 네, 네 자기냐? 자기(自己)라는 것은 어떤 것이 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냐? 일대장교(一大藏敎)는 시개절각(是箇切脚)이다. 부처님이 49년 설법해 놓은 장교(藏敎)는 절각(切脚)이여. 다리 부러진 것이다. 그 절각(切脚)이라 하면 다리 부러졌다니 그 뭔 소리여? 대장교(大藏敎)가 그—다리 부러졌으니 못쓴 것이지—쓸데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그놈 쓸데없다는 놈은 그렇게 볼 것이 아니여. ‘끊어질 절(切)’ 자, ‘다리 각(脚)’ 자, 한문을 바로 새기자면 다리 끊어진 놈이다. 절각이다 하지마는, 그 절각(切脚)이라는 것은 주각(註脚)이다 그 말이여. 주각(註脚)! 여러 가지 그 모도 주각을 내논 것이다.

네 자기, 네 본래면목에 대장교(大藏敎)는 주각(註脚)을 내논 것이여. 허지마는 증절착자개무자부(曾切着者箇無字否)아? 일찍이 이 낱 무자(無字)에도 한번 주각을 내보겄느냐? 절착(切着)도 주각(註脚)이여. ‘간절 절(切)’ 자는 주각이여. 절착(切着)도 '한번 따져 보겄느냐?' 그 말이여. '분석을 해보겄느냐?' 그 말이여. 이리저리 '마음이란 건 어떻다, 네 자기란 건 어떻다, 뭐 본래 없다, 뭐 본래 있다, 무슨 유도 아니다, 본래 무도 아니다, 뭐 제1구다, 제2구다, 제3구다' 무슨 뭐 그러헌 분설(分雪) 그러헌 별말을 다 했어.
허다가 조사관(祖師關)에 들어가서는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원상에다 갖다가서는 네 귀에다가서 동글뱅이를 달던지, 점을 하나씩 찍던지 찍어 놓고서는, 목마각유사사족(木馬脚有四蛇足)이로구나. 나무 말에, 목마(木馬)에 각각 네 배암 발이 달렸구나. 모도 요러헌 분설, 요러헌 공안 주각을 모도 낼 수가 있지마는, 이 무자(無字) 조주 ‘무(無)’ 헌 무자에도 그런 주각을 붙여 보겄느냐? 종문(宗門) 중에 없는 공안이니까. 조주가 ‘무(無)’ 했는데 거다가 무엇을 붙여 보겄느냐? 별 걸 다 붙여 봐라. 증절착자개무자부(曾切着者箇無字否)아? 일찍이 이 낱 무자에다가서 주각을 내보겄느냐?

영리한(靈利漢) 놈은 직하(直下)에 흔번(掀飜)헐 것이다. 이 말 아래에 바로 깨달을 것이다. 글쎄 그 그 일체가 다 아니라 했으니, 뭔 이치니 무슨 뭐 별별 도리 다 붙여 봤자 아니라 했으니 바로 그 볼 것 아니여? 바로 볼 것이다 그 말이여. 범정(凡情)도 다했고, 성해(聖解)도 거기에 붙들 못허거늘, 바로 보들 못혀? 또 거그서 절착(切着)을 혀? 또 주각(註脚)을 내아, 고렇게 말헌 디서? 그것 참! 바로 본 사람은 벌써 그 주각 낼 겨를도 없어.

영리한(靈利漢)은 직하(直下)에 흔번(掀飜)해라. 직하에 흔번, 뒤집어 버리면은 통명자기(洞明自己)다. 제 면목을 통명(洞明)헌다. 통명이라는 것은—‘고을 동(洞)’ 자를 '통(洞)'이여. 삼점변(三點邊 :氵)에 '한 가지 동(同)' 헌 자(字), 그놈을 훤출히 그려. 아주 넉넉하게 훤출히 밝혀 버린다 그 말이여. 끝도 없고 갓도 없이 남음이 없이 탁! 밝혀 버리는 것을 통명이락 햐.
자기(自己)를 통명(洞明)한다. 제 면목을 그만 통명(洞明)해 버려. 아는 것 문제 아니여. 통명이라는 것은 그만 뭐 '본다'고 해야 맞을까? 본다는 것도 소용없어. 그만 그대로 각(覺)이여. 통명(洞明)헌다.

착파조주(捉破趙州)다. 조주를 한 방맹이 놓을 것이다. 조주 한 방맹이 착파(捉破)를 헐 것이고.
'감파불조득인증처(勘破佛祖得人憎處)다. 불조(佛祖)가 사람 미워헌 곳 얻은 것을 감파(勘破)한다' 새기자면 이렇게 여는데, 그건 무슨 말인고 하니 부처님도 한 방맹이—부처님을 방(棒)을 때리다니 되아? 하지마는 부처님도 한 방맹이 맞을 분(分)이 있다 그 말이여. 그건 바로 봐야지. 불조(佛祖)가 사람 미워헌 곳 얻은 것을 감파한다.

그러면 너를 허락해서 내가 이르되, 대장교(大藏敎)도 옹창지(癰瘡紙)다. 대장교가 부스럼 닦아 내버린 종이다.
그 뭐 부처님 일대소설(一代所說) 대장경이 모도 주각 주파(註破)해 놓은 것이지. 비유컨댄 왼 몸뚱이, 이 사람의 왼 몸뚱이, 깨끗한 몸뚱이, 아주 부스럼 하나 없는 몸뚱이를 긁어서 모도 그 부스럼을 내서, 그 부스럼을 인자 닦아서 고름 핏덩이를 닦아서 내버린 종이라고 허겄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어.

수연(雖然)이나 비록 이렇기는 이렇다마는 나개시무자(那箇是無字)냐? 이 무자(無字)는 어느 곳에서 나왔나? 어디서 나왔기 따문에 여시(如是) 주장(主張)했느냐? 이렇게 주장을 해 놨느냐?
이 주장해 놓은 무자(無字)는 유심기특(有甚奇特)이완댄, 무슨 기특이 있어서 종문(宗門) 가운데 허다공안(許多公案)이, 이 불교 가운데 허다한 공안이 많이 있는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모도 있고 이런 공안이 많이 있는디, 조주무자 공안을 이렇게 품(品)을 해 놨느냐? '종문에 제일이요' 이렇게 찬(讚)을 해 놨느냐?

이렇게 주장한 무자(無字)는 무자보담 더 지낸[능가한] 화두는 없냐?[過此無字者否]
화두가 어디 더 허고 덜 헐 게 있는가? 허지마는 경계(境界)는 다 달르지. 그 경계를, 화두 공안 그 지경 경계를 이르지 못하면 백천 가야 소용없거든. 천칠백 공안에, 천칠백 공안 천칠백 선지식의 뜻을 바로 봐야 하거든.

그러면은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인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 판때기 이빨에 털 났느니라' 그러면 "그것이 무자(無字)와 똑같다" 그 말도 아닌 소리여. "그 무자(無字)와 똑같다는 소리다" 모르는 소리여. 알고는 그렇게 말하는 법이 없어.
경계는 다 달라. 천칠백이 다 달라. 그 공안이라는 건 경계 바로 턱 일러 버릴 것 같으면은—그 낙처(落處)는 똑같어, 낙처는. 생사 없는 낙처는 같지, 다른 법이 없어. 허지마는 그 낱낱이 그 공안 그 격(格)을 바로 봐야 하거든. 그 격 밖을 바로 봐야 하거든.

‘무수호손도상수(無鬚猢猻倒上樹)다. 수염 없는 늙은 원숭이가 냉기를 올라간다’ 하면, 그러면 그놈, 거 격(格)이 맞도록 알아야 한다 그 말이여. 그 무슨 말이여? 뭐 '수염 없는 늙은 원숭이가 냉기를 올라간다. 그거 본래 없는 말이다' 그 소용없어. 모도 그러면 없는...
'말키 없다. 모도 변무(便無)다. 무자도 본래 없다는 말이고, 생사 없다는 말이고, 무수호손(無鬚猢猻)도 본래 없다는 말이고, 판치생모도 본래 없다는 말이고, 뭐 다 똑같은 말' 그러면 그건 미친놈의 선(禪)이여. 그것은 신선공(神仙空)도 아니여, 공(空)도 아녀. 고렇게 봐서는, 그 무엇이여 그것이?
낱낱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어김없이 그 격을 다 봐야 하거든. 그래야 공안을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이라 그러지. 글안허면 뭣 헐라고 천칠백 공안을 말해 놓을 까닭이 있나?

이 무자(無字)에 지낸[능가한] 화두가 없나?[過此無字者否]
약유(若有)인대는 무자보담 더헌, 더헌 화두가 있다 할 것 같으면은 어찌 저렇게 품제타(品題他)냐? 저그다가 저렇게 품(品)을 해 놔? '종문(宗門) 중에 제일이라' 해 놨느냐?
그러면 또 만약 없다[若無]고 헐 것 같으면은—무자(無字)가 있다고 헐 것 같으면은, 무자가 다른 일체공안 일러 논 그 가운데에 제일이라고 해 놨으니, 제일이라고 헐 것 같으면은 조주 없을 때는, 조주가 나오기 전에는 어찌 불조(佛祖)가 없었겠느냐? 조주 없을 때는 조주 나오기 전에는 불조가 없었냐? 무자(無字)가 제일이라 하게?

구안납승(具眼衲僧)은, 눈 갖춘 납승(衲僧)은 한 점도 속이기 어려우니 한번 일러 봐라. 그 무자의지(無字意旨)는 어떠헌 도리냐? 거 쎗바닥 내룰 수 없어.

그래 내가 또 말허지마는 혜봉 스님한테 가서, “무자의지(無字意旨) 반(半)만 일러주시오”
“무(無)”

“거 반(半)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수좌가 일르소. 무자의지(無字意旨) 반만 이르게”
내가 “무(無)”

고개를 끄덕끄덕, “고인이 말씀허되 고인(古人)이 이르되, '거년(去年) 가난은 가난이 아니여. 거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어서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今年) 가난이 시(是)가난이라 추야무(錐也無)로구나. 송곳도 없구나 했으니, 그렇게 송곳도 없다 하니까, 여래선(如來禪) 밖에는 안된다. 조사선(祖師禪)을 일러라' 했으니, 어떤 게 조사선이겄나?” 이렇게 나한테 물었다 그 말이여.
그 물을 때, “능각(菱角)이 첨첨(尖尖)허지만 불사타(不似他)라” 이렇게 일렀다.

고렇게 일러 놓고서는 나는 그 이상 더 이를 수 없다고 야단쳤네, 나 혼자. 혜봉 스님은 웃고만 있는데. 그래 가지고 세상에 입을 벌리고 돌아댕기면서 '견성했다'고 '알았다'고 나도 그랬든 모냥이지. 참 기가 맥히지.

거기서 조사선은 못 일렀네.
'송곳까장 없다고.. 여래선 밖에는 안된다' 딱딱 있어. 여지없이 있어. 일체 공안이 다 있어.

십절목(十節目)은 오늘 아침에 끝났어.(처음~27분38초)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