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 (7/9) 몽산화상의 무자십절목.
**전강선사(No.504)—무자십절목(7) (통명자기까지) (갑인74.05.26. 새벽) (전504)
(1) 약 35분.
(2) 약 18분.
(1)------------------
교소침변부(巧笑枕邊斧)허고 감언석상사(甘言席上蛇)니라
나무~아미타불~
악의감수절(惡衣甘守節)이요 암곡호장신(巖谷好藏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교소(巧笑)는 침변부(枕邊斧)다. 그 교묘스럽게 이상스럽게 웃음을 웃되, 그렇게 괴상스럽게 처억 웃는 웃음은, 묘하게 싸악 웃는 웃음은 웃음 속에 도꾸(도끼)가 들었어. 도꾸, 그 나무 패는 도꾸, 그 무서운 도꾸가 있다 그 말이여. 도꾸 그놈 한번 찍으면 모가지도 뚝 떨어지는 그런 도꾸가 있거든. 좋은 이상스러운 웃음, 교소(巧笑).
감언(甘言)은 석상사(席上蛇)니라. 단, 그 단 말은—그 말을 꿀같이 좋게, 내 귀에 좋게 듣기 좋게 그렇게 헌 말은 자리 밑에 뱀이여. 내 앉었는 자리 밑에 독사여. 거 물어 죽이는 독사란 말이여.
우리 도문(道門)에는 그런 감언이설(甘言利說) 감언이, 단 말이 없고, 괴상스러운 교소(巧笑)가 없어.
뭐 공안이라도 턱 일러서 방(棒)이 내리고 할(喝)이 내리고 그 괴상허다 그 말이여. 그러헌 디 가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이지, 뭐 “옳다!” “네가 바로”—깨닫도 못한 걸—“깨달랐다!” 사람 천만 사람을 그렇게 갖다 버려 죽여? 그 깨닫지 못한 걸 깨달랐다 하면은 어찌 될 것인고? 그러니 인자 잡것만 되어 가지고는 모도 넘을 갖다 다 눈멀려 죽이고.
저 대혜 스님 때부텀 지금으로부터서 한 백 몇 년 전부텀 얼마나 그러헌 모도 무인가(無印可) 중이 나와 가지고, 인가도 없는 중이 제가 나와 가지고 도인 노릇을... '여마사속(如麻似粟)이라, 삼 같고 대 같다' 그랬다 그 말이여.
바로 보면은 어디 인가할 것이 뭐 인가가, 뭐 인가헐 것 없다는 건 아니지? 오히려 방(棒)을 맞지.
보월 큰스님, 만공 스님 제자 보월 큰스님이, 만공 스님이 바로 턱 인가를 헌 그런 스님인데, 10년 만에. 늦게 참 중이 되았어. 되았어도 사람은 당최 모냥은 참 세상에는 불출(不出)이지. 그렇게 불출은 아마 몇 없을 게로구만 세상에.
김보월 스님, 얼굴은 뻘거니 메주 볼태기가 메주뎅이만 한 놈이 둘이 여가 붙었다 말이여. 붙었고. 몸뚱이는 얼마나 큰지 천하 없는 옷을 해도 맞지 않으니께 여가 이래 버개 해 가지고는 원 세상에 그렇게 생긴 이는 없어. 수중다리는 양쪽 수중다리네. 다리가 둘 다 다 기둥 만한 수중다리여, 둘 다 다.
그런 어른인데, 아! 10년 만에 도를 깨 노니, 도를 깨달라 노니, 아! 도(道)가 있으니까 천하에 그 뭐 뭐 제일이지, 말할 거 뭐 있어? 만공 큰스님한테 인가를 척 받고. 만공 큰스님이 법(法)을 전해 주었지. 법을 전해서 (예산) 보덕사(報德寺)란 절에다가 인자 회상(會上)을 꾸미고 보월 스님이 거그 조실(祖室)로 계시고.
만공 큰스님은 보덕사 주지(住持)로 계시고—인자 조실 내놓으시고, 보월 스님한테다 전했으니까 조실 내놓으시고 이름을 주지라고 띄고는 그래 계시면서 조불양화(助佛揚化)를, 그 당신 제자 보월 스님한테 법은 전했으니 조불양화를, 양화(揚化)를 항상 보월 스님을 위해서 학자들을 모도 그리 믿게 맨들고 그렇게 똑 계시는데.
저 경상남도 부산, 부산 선암사! 선암사에 혜월 큰스님이 계시는데, 혜월 큰스님 회상에 정운암 스님이 법(法)을 물었다. 법을 물어 왔는디 뭐라고 법을 물었냐 하면은... 거 뭣이 자꾸 이렇게 얼른 안 나오니까 또 생각하니라고 요러고 있지. 허! 그것!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인데, 「과거심 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 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 불가득(未來心不可得),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인데 점마하심(點麽何心)고?」 이러헌 법문이 있는디. 점심(點心)이락 하니, 이건 어떻게 된 말이냐 하면은 옛날에—그것도 들어야 되아. 이렇게만 들어 버리면은 아는 이는 알지마는 모르는 이는 중간에 들어 놓으니까 소연(昭然)허지 못하지.
옛날에 주금강(周金剛)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디, 주금강이라는 사람은 중도 아니고 그저 속인이든가? 『금강경(金剛經)』을 하도 많이 읽어서 주금강이여. 성(姓)은 주(周)가고 이름은 금강(金剛)이란 말이여, 이름이.
그런데 금강경을 읽는디, 남방(南方)에—그때는 선방(禪房)이 별로 없던 것이여. '남방에 선방이 있으되 참선 모도 선방이 있으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바로 사람 마음을 가르켜서 견성성불이라고 해야? 제 마음만 깨달으면은 그만 견성이요, 그만 부처가 되아 생사(生死)가 없어? 그 외도법(外道法)이다' 아! 세상에 외도가 앉어서 정법(正法)을 외도라고 헌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법밖에는 없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견성해서 성불허는 법밖에는 말씀헌 것이 없지. 그 다음에는 천경만설(千經萬說)이 방편설(方便說)이지, 뭐 어디 무슨 뭐 방편으로만 설해 놨지, 그거 어디 무슨 법이라 했나? 팔만사천 다라니문(陀羅尼文)이 있고 뭐 병 낫는 주문(呪文)이 있고, 복 받는 주문이 있고, 당장에 무슨 뭐 부귀영화 하는 지위 만능헌 그러헌 무슨 맨 그 모도 방편설이지 그것이 견성성불, 생사 면하는 법인가? 그런디 이놈의 주금강이는 금강경에만 착(着)해 가지고, 경(經)에만 착(着)해 가지고는 참선법을 비방한다.
아! 참선법은 부처님의 몸뚱이요, 부처님의 눈인디. 아! 당장 출가해서 설산수도(雪山修道)해서 견성성불해 가지고 턱 나왔는디, 그거는 모르고 말이여. 견성성불헌 후에 금강경 설한 경만 딱 믿어 가지고는 아! 선(禪)을 반대 비방 배척헌다 그 말이여. 그 어디 있을 수가 있나? 그런 법이 있나?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부처님이 바로 견성(見性)해 나와 가지고는 그 견성법 전통해 나왔지, 무슨 경을 전통해 나왔는가? 설법헌 경을 어디 전해 나온 데가 있나? 견성허란 말인디, 경(經)이라는 것은.
아! 이놈의 주금강이는 그 경에만 착(着)해 가지고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사 성불헌다 했는디, 뭐 남방에서 제 마음만 깨달으면은 그것이 그만 견성성불이락 해야? 에이 이놈들, 외도놈들을 모도 항복 받아야겄다'고. 주금강이가 그 책을 짊어지고, 그 경(經)을—삼아승지겁을 닦아야만 성불헌다는 그 경을 딱 싸서 짊어지고는, 책 보따리를 해서 짊어지고는 나온다 그 말이여.
그 경 가운데 그런 말이 있으니까,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견성헌다' 이런 말을, 삼아승지겁이라는 것은 숫자로 참 그 1년 2년 3년 10년 20년 백년 천년 이렇게 나가 가지고는 아! 삼아승지겁이라는 것은 그건 말로 헐 수가 없는, 햇수로는 말을 헐 수가 없어.
뭐 요새 억조(億兆)니, 무슨 뭐 십양(十穰) 백양이니, 저 해(垓)까장 있다는, 경(京) 십경 백경 뭐 그런 경까장 뭐 이렇게 있다니, 수(數) 수학은 그거는 다함이 없으니까. 숫자 다함이 있나? 수학 박사는 없어. 숫자 다 간 박사는 없다 그 말이여.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여! 삼아승지겁이란 건 겁수(劫數)를 셀 수가 없어. 그렇게 많이 닦아야사 성불(成佛)헌다 그 말이 있다 그 말이여.
삼아승지겁이라는 것은 그건 일념(一念)에 있는 것이여. 일념, 한 생각. 턱! 깨달을 것 같으면은, 툭! 바로 턱 깨치면은 깨친 그동안이 역사도 없어. 시간도 없어. 시간 공간도 없어.
턱! 깨치는 중생성불 찰나간(刹那間)이다. 중생이 성불허는 법이 잠깐 뭣 백짓장 하나 가림이 있어? 털끝 하나가 거그 갈려져 있어? 그저 '이뭣고?' 툭 깨면은 아 그만 견성이여.
삼아승지겁이라는 것은 견성 툭 헌, 확철대오헌 바람에 누진통(漏盡通), 일체 누(漏)가 다해 버려. 그 무슨 누(漏)가 있어? 법누(法漏)가 어디 찡가져 있을 거냔 말이여? 법누(法漏)도 없고, 불누(佛漏)도 없고, 그 일체 유루지견(有漏之見)도 없지마는 무루지견(無漏之見)도 없어. 툭 깨달라 버리는 거여. 참선법이란 게 이렇게 찰나(刹那)다.
찰나라는 건 잠깐... 고건 또 이 찰나라는 것은—아까 아승지겁(阿僧祇劫)이라는 건 말로 헐 수 없는 숫자를 다 세 넣어도 안 차지마는, 찰나라는 것은 잠깐이여. 말할 것 없어. 그 시간은 어느 때인지 몰라.
나만 깨달라 번지면은 그만 견성(見性)이다. 그러면은 그 그만 그곳에 가서 중생견이 퍽 녹아져 떨어져 번지고는 일체 누(漏)가 다해 번지는, 아 번지면 그만 그건 구경각(究竟覺)이지. 그 그대로지, 뭐 말할 거 있나?
아! 그런 곳이니 거기 가서 삼독심(三毒心)이, 모두 세 가지 독헌 마음이—탐심(貪心) 일어나고, 진심(瞋心) 일어나고, 어리석은 마음[痴心]이 탐진치(貪瞋痴)인디, 탐진치가 어디 붙어 있나? 딱 깨, 툭! 깨버렸는디 어디가 붙어 있어? 탐진치가 다한 곳이 곧 그만 그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 그 말이여. 뭐 뭐 뭐 거그 무슨 시간이고 뭐이고 뭐가 있어?
이런 것인디 그런 도리는 꿈에도 보지 못하고는 그만 그 문자(文字)에 착(着)해 가지고는 삼아승지겁이—누천만억(累千萬億), 당최 말로 헐 수 없는 숫자, 그렇게 많이 겪어야 성불헌다고 그것만 꽉 믿었다 말이여. 믿어 가지고는, 그게 그게 숭악한 상견(相見)이지. 상견외도지.
그래 가지고는 남방(南方)에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허는, 견성성불허는 그런 모도 마구니들을, 그 거짓말 종자요 모도 마구니들을 항복 받는다고 나온다 그 말이여.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6년 만에 견성성불 견성오도를 허셨으니 부처님도 그러면 모도 마구니인가? 허! 이런 놈의 소견이...
그래 가지고 척 나오는디, 어디를 나오는고 하니, 덕산(용담) 스님이 계신 곳을 나온다 그말이여. 덕산(용담) 스님이란 큰 선지식 스님이 계시는데, 거기를 나오다가 거지반 다 오다가 덕산(용담) 스님 계시는 그 절 밑에 동구(洞口) 마을 앞에 주점이 있는데—술 파는, 점심도 팔고 술도 파는 그런 집이 있는데 거그 들어가서 잠깐 쉬어서, 배가 고프니까 점심이나 좀 사 먹고 간다고, "여보! 주인, 점심 있으면 나 좀 주십시오" 점심 달락 하니까, 그 늙은 술 파는 노인이 바로 덕산(용담) 스님 계신 그 동구에 마을 앞에 있으니까 덕산(용담) 스님 신도가 되어 가지고는 참선(參禪)을 잘 했던 것이여. 부인이라도 참 참선을 잘해서 도(道)가 참 대단했던 것이여.
아! 우리 모도 용화사 신도 여러분들 인자 참 참선 다 허지. 인제 참선만 하지, 뭐 지금 어디 속으로 무슨 뭐 상견(相見)에 떨어져 가지고는 무슨 축원이나 '아무개 보체 수명장수허고..' 요런 디 떨어져 있는가? 인자는 공양을 내도 부처님한테다 공양 올리고 축원, 그건 일없다는 것이여. 인자는 다 되아 버렸어. 무축(無祝)을 제일 치고.
아 '축원 없이 금강경 도리로 아 이렇게 허면 제일 공덕이 있다고 10년 동안이나 법문을 허셨는데 무얼 우리가 그런 것에 집착할까니 그런 거 헐락 하냐'고, 아! 대중공양(大衆供養)이면 그만이라고. 그래 안 허는구만 인자. 없제. 그 잘되았지. 무축(無祝)을 해 봐! 똑. 부처님한테다 따악 기도 올리고는 기달라 보란 말이여, 된가 안된가? 허! 참 나, 기가 맥힐 일이지.
풍랑이 큰 바다에 일어날 거 같으면은 그 물결이 출렁거리다가 바람이 자면은 물결이 교교(皎皎)허다. 물결이 교교헌 디는 천월(天月)이, 하늘 달이 공배회(共徘徊)한다. 달이 그대로 떠억 나타나듯기, 아! 축원도 없는 곳에서 일체번뇌 망념도 거가서 무슨 일어날 것도 없어. 구허는 마음도 없이 그래야 대공(大功)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법이지. 아! 그러고 아주 무축(無祝)을 제일 치는 것이여.
아! 그래 그 노인 보고 배가 고프니깐 "나 여보시오, 점심(點心) 좀 주십시오. 점심 한 상 주시오" 사 먹을라고 그러니까, 그 노바(노파)가 덕산(용담) 스님 신도라 벌써 그만 선(禪)을 많이 공부를 해서 그 법(法)이 있든 것이여.
"아! 그 당신 그 쪼그만헌 보따리 짊어진 것이 뭣이요?" 아! 그러니 그 무슨 보따리 속에 뭐 짊어진 걸 물을 것이 없는데, 원 그 보따리 속에 든 것을 금강경인지 뭔지 알았던가 어쩐가 물었지.
물으나, 그까짓 것 안다고 그게 법인가? 그까짓 거 속에 보따리 속에 싼 것이 안 보이고, 싸 놨지마는 그거 환히 보이는 고런 것이 법일 것인가? 그까짓 것이야 그 말할 것도 없지.
허지마는 "그 보따리 속에 싼 게 뭣이요?"
"이것 금강경이요"
"금강경이요? 금강경이면은 금강경 가운데에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이요, 현재심(現在心) 불가득(不可得)이요,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이다」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이라고 했는데, 점심을 달락 하니 점마하심(點麽何心)고? 어느 마음에 점(點)을 칠라우?" 이렇게 묻네. 법이란 건 이렇게 장만해서 물으면 되는 것이지. 그 공안(公案)이지 뭣이여? 점심이라고 헌 게 '점칠 점(點)' 자, '마음 심(心)' 자, 마음에 점친다 그 말이여. 점심이란 건, 말이.
그 과거심(過去心)도 어디 있어? 얻지 못허지. 현재심(現在心)은 어디 있어? 현재심도 얻지 못허지. 미래심(未來心)은 어디 있어? 미래심도 얻지 못허지.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인디 점마하심(點麽何心)입니까? 어느 마음에 점을 칠랍니까?' 물으니께 꽉 맥혀서 답할 수가 있나? 삼아승지겁에 착(着)했는디 어디 답할 수가 있어야지. 꽉 맥혔지.
천하없는 이치라도 이치를 장만해 가지고 제가 이치를 딱 가지고 있으면 이치 그놈이 철벽(鐵壁)이여. 철벽, 쇠벽이란 말이여. 그놈이 모도 그 번뇌장(煩惱藏), 일체중생의 생사번뇌장 고방(庫房)이여, 고방! 곳간이란 말이여, 그것이. 무슨 놈의 이치를 갖다가서 붙여 가지고는 소용없어.
"어느 마음에 점을 칠라오?" 꽉 맥혀서 답을 못했어. "당신이 점심 못 먹.. 할 수 없소. 그 말을 그 법을 답을 해사 점심을 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점심 안 주겄오" 점심을 안 준다 그 말이여.
법(法)이 다 그렇게 박절(迫切)혀. 배가 고파 죽겄는디도 밥도 안 주어. 그 말 답하면 밥을 준다고 해놓고 안 준다 그 말이여. 그러헌 모도 박절허고, 쫓아내기도 허고. 뭐 미워서 쫓아낼 것인가?
'너 이놈 송장 끌고 온 놈이 어디를 오느냐'고 삼십방(三十棒)을 내려 우수(雨水)면은 그놈 방(棒)을 맞고 기어 들어오지, 나가? 60통방(痛棒)을 맞고도 들어오지, 나가냐 그 말이여? 그 무슨 그러헌 디 가서 개거이 휘딱 나갔다가 휘딱 들어오고 그거이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도학자라는 것은 그런 법이 없거든. 떠억 그 도격(道格)이 척 고물차야 되지.
그 말을 대답을 못해 가지고 밥도 못 얻어먹었지. 아! 그 안 줘. 여지없어. 그러나저러나 발써 거그서 노바(老婆)한테 그 방맹이를 짊어지고는, 덕산(용담) 스님한테를 찾아왔으니 안 올라갈 수가 없다. 그래 덕산(용담) 스님을 찾아 올라갔어, 주금강이가. 그 찾아 올라가서 법담(法談)헌 것은 그만 두고, 그건 이다음에 헐 요량하고.
주금강이한테 노바가, 주막집에 그 점심 해 파는 노바가 "과거심 불가득이요 현재심 불가득이요 미래심 불가득,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인데 어느 마음에 점(點)을 칠라느냐? 어느 마음에 점을 칠라느냐?" 요것을 이 답, 이 법문을 부산 선암사에 있는 정운암 스님이 만공 스님한테로 물어왔다 그 말이여, 편지로. 잘 들어야 되아.
그래 만공 큰스님이 그 법문을 대답하되—법문은 이렇게 들어야 옳고 이렇게 해야 옳은 것이여. 조용허니 새벽에 깨끗한 정신에 자고 일어나서 배가 텅 비어서 뱃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 이때에 듣는 것이여. 옳은 신심(信心)과 옳은 참 의단(疑團) 의심(疑心)과 분심(憤心)을 가지고 들으면은 제일, 법문 듣고 언하(言下)에 대오(大悟)가 제일 쉬운 것이여. 새벽 정심(定心), 내가 새벽 법문헌 것이 까달이 있어.
법문이라는 것이 뭐 공연히 그저 그만 그까짓 나발 부는 소리 듣듯기, 그만 뭐 바람소리 듣듯기, 그만 지내가는 뭔 말 듣듯기, 그만 아무때나 앉아서 조음서 이것... 그것 천하 망했어. 그런 법 없거든.
앉으면 졸지. 법문만 들으면 귀에만 들어올라고 허면 졸지. 그 마구니가 고런 마구니가 귓속에 들어 가지고 망가실업(忘家失業)허게 맨든 것이여. 망가(忘家), 내 집을 잊어버리게 맨들고. 내 고향을 내 고향집을 가야 할 것 아닌가? 내 각세계(覺世界)를, 깨달은 집을, 각체(覺體)를, 묘한 각체를 깨달라야 할 것 아닌가.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놈의 그놈의 마구니한테 끌려 가지고는 혼비사인(魂飛死人)이여. 혼이 날아 버리고는 죽은 사람이라, 그 뭣 혀 그거? 그렇게 닦아 가지고는 미륵하생을 닦는다한들 유하익(有何益)이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과거심 불가득이요, 현재심 불가득이요, 미래심 불가득, 삼세심(三世心)을 불가득(不可得)인디 점마하심(點麽何心)가? 어느 마음에 점을 칠라느냐?' 만공 큰스님이 그놈을 답을 허되, 참 그 기맥히지. 그러헌 답이라도 큰스님네도 암만 깨달랐어도 공안에 가서 희미한 공안이 있고, 그런 공안이 아마 있는 모양이지?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以前)에 점심료야(點心了也)니라' 위음왕불 이전에, 위음왕불이 제일 최초불인디, '위음왕불 생기기 전에 점심을 먹어 마쳤다' 요렇게 답을 했네. 그 정운암 묻는디 답을 그렇게 했다 그 말이여.
그래서 편지에다 써 가지고 보내는디, 그 보월 스님이 가만히 계시다가 그 법문 답을 가만히 보니 큰일났거든. 한국에 만공 큰스님이 제일 도인(道人)이신데, 아! 학자한테 법문을 그렇게 해 보내서는 그 큰일났거든.
학자, 그 학자한테 헌 법문이지마는 만공 큰스님이 당대에 헌 그 법문이 미래로 시방까장 내려온 것 보지. 언제든지 그 구전(口傳)으로도 흘러 내려갈 법문이란 말이여. '과거 위음왕불 전에 점심을 먹어 마쳤다' 이렇게 답했네. 거 큰일날 답이거든.
보월 스님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는 만공 큰스님께 떠억 그저 절을 올리고서는 "죄송합니다마는 이 편지는 보내서는 안되겄습니다" 하고 성냥불을 탁 켜서, 어른 쓴 편지를 갖다가 성냥불을 켜서 보내니 예의상으로는 크게 틀렸거든. 그러지마는 "헐 수가 없습니다" 하고 절을 올리고서는 성냥불을 탁 켜서 편지를 불에 사롸 버렸다 그 말이여.
아! 만공 큰스님이 어쩔 거여? 그 어째 세상에 제자한테 아! 그런 꼴을 당했으니 편지를 갖다 태워 버렸으니, 보내는 법문을 태워 버렸으니 그 참 깜짝 놀래 가지고는 정신을 챙겨 가지고는 밥도 안 잡숫고, 잠도 안 주무시고 이레를 계셨어, 이레를. 이레를 꼼짝... 내가 봤어. 그건 내가 본 경계여. 내가 참 요거 저 그때 공부헐 때 그게 다 회상(會上)에 있을 때여.
금선대(金仙臺)에서 꼼짝.. 당최 아! 그런게 야단났어. 밥도 안 잡숫지. 잠도 안 주무시지. 딱 앉어서 여올여치(如兀如癡)다. 부동(不動)허고 앉았어. 참, 오줌도 안 누고 앉었다 그 말이여. 이렇게.. 그렇게 참 근기(根機)가 무척... 근기도 말할 수 없는 어른이지.
이레만에 그만 물팍을 치고는 "허허!" 웃고는, "보월, 이리 오게" 보월을 불러다 놓고 "내가 자네한테 은혜를 갚음세" 그러고서는 그 법(法)을 답을 했다 그 말이여.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삼세심을 도불가득인디 점마하심이냐?' 한디 답을 턱 했는데, 그 답은 밀답(密答)이라. 답을 여기서 안 해 주어.
공안 답에 밀답을 헌 법이 없거든. 고인네 법문에도 밀답이 따로 있어. 답 딱딱 해 논 것도 있고. 답 해 놓은 것은 답 해 놨자 그놈 답 들어 봤던들 그 소용없어. 왜 답이 오직 많나? 조주 스님도 답을 오직 많이 했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냐?" "금사탄두마랑부(金沙灘頭馬郞婦)니라. 금사탄두(金沙灘頭)에는 마랑(馬郞)의 부(婦)니라" '말 마(馬)' 자, '사내 랑(郞)' 자, '지애비(지어미) 부(婦)' 자, 마랑부(馬郞婦)니라. 이렇게 일러 놨어.
그 그렇게 일러 놨으면은 그걸 들어 봤던들 소용이 있나?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지. 답 하나를 해 놨으면 고 답 듣고 뭐 그 공안 파설(破說)해서 알아? 봐? 씨잘데없는 소리여.
아! 그러면... 어 그것, 무슨 이렇게 잘 나오지를 않고. 그놈은 또 그만 생각했자 안 나오는 놈은 그만두지 그 억지로 헐라고 헐 것도 없고.
만공 큰스님이 그 답을 처억 해 놨단 말이여. 해 노니까 그때에 가서 보월 스님이 다시 배(拜)를, 예배를 올렸다 그 말이여. “예” 제자한테 또 인가 받네, 오히려. 그거 그걸 탁마상성(琢磨相成)이락 햐. 서로 탁마해서 이루는 것이여.
제자한테는 확철대오했으면은 서로 의심난 공안, 맥힌 공안이—암만 오(悟)라도 깨달랐어도 오후(悟後)에도 그 맥힌 공안이 있다고 했거든. 그걸 탁마(琢磨)락 햐. 맥힌 공안이 있기 따문에 탁마하거든. 공안에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에 맥힘이 없어야사 허는 건데, 인자 그렇게 맥힌 데가 있으면은 탁마상성 허는 법이거든.
그래 가지고는 그 정운암한테 답장을 쓰되, 인자 보월 스님이 답장을 쓰고 만공 스님은 증명을 허시고, 그래 써서 보낸다. 편지 답을. 그 답이 뭐 어떻게 했냐 하면은, 들어 봤던들 모르지마는 그저 그 들어는 두란 말이여.
「배호서(背湖西)하고 호서(湖西)를 등지고, '등질 배(背)' 자, 향영남(向嶺南)은 영남(嶺南)으로 향한 것은, 심중부절여의(心中不絶餘疑)러니, 마음 가운데 여의(餘疑)를 끊지 못했더니, 여금(如今)에도 부절여의(不絶餘疑)로구나. 지금에도 여의(餘疑)를 끊지 못했구나. 견후(見後)에 회각(灰却)하고 본 뒤에는 회각해 버리고, 본 뒤에는 회각(灰却)—'불태울 회(灰)' 자, '물리칠 각(却)' 자—회각해 버리고, 갱절여의(更絶餘疑)하라. 다시 여의를 끊어 버려라」 그렇게 해 보냈다 그 말이여. 그 답이 무슨 답이냐 말이여? 참 그러헌 답은 기가 맥힌 답이라 쎄도 못 내루는 것이여.
「배호서(背湖西)하고 향영남(向嶺南)은 심중부절여의(心中不絶餘疑)러니 여금(如今)에도 부절여의(不絶餘疑)로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갱절여의(更絶餘疑)하라」
이렇게 해 놨네. 하! 이거 무슨 말이냔 말이여? 평상화(平常話) 시답(是答)이여. 평상으로 답한 것이여, 그것이. 허지마는 아무도 모르지. 쎄도 못 내루아. 그렇게 편지를 헌 일이 있어.(처음~34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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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뭔 말에 내가 이러헌고 하니 교소(巧笑)는, 공교(工巧)헌 웃음 속에는 응, 웃음은 침변부(枕邊斧)요. 베개 위에 도꾸여. 베개 위에 도꾸로, 모가지 때려죽이는 도꾸여.
감언(甘言)은 석상사(席上蛇)다. 단 말은 자리 밑구녁에 독사 뱀이여. 자리 밑구녁에 그놈이 독사가 있으니 물어서 죽여 버리는 놈 아닌가.
악의(惡衣)는 감수절(甘守節)이오. 악한 옷이라는 것은 절개(節槪)를 지키는 학자 절개여. 악한 옷, 떨어진 옷 말이여. 다 헤어진 옷은 절개 옷이여, 절개 옷. 도 닦는 옷이다 그 말이여. 우리가 어디 좋은 옷 입는가? 옷이라고 모도 너절헌 거, 지드란 헌 거, 거무튀튀헌 것, 때 색, 때꼽째기 색 같은 거, 이런 것이나 입고.
그러고는 암곡(巖谷)은 호장신(好藏身)이다. 암곡(巖谷) 저런 이렇게 선방 채려 놓고 이러헌 선방 한쪽 구석에서 이러고 가만히 도 닦는 거. 이렇게 도 닦는 도학자가 이렇게 청빈허게, 가난하고 깨끗허게 도를 닦아 나가는 가운데에—무슨 그러헌 그 대접이나 받고, 어디 찬성이나 받고, 그게 뭐 법담허면은 아 그 좋다고 잘했다고 인가나 해 주고. 인가가 그것이 무슨 뭐 그렇게 인가 함부로 헐 수가 있나?
그 스승님이라도 말 한마디 잘못..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以前)에 점심료야(點心了也)라' 벌써 그르친 곳이 있기 따문에 불을 탁! 태와 부러. 이러헌 짓. 얼마나 무참허고, 학자를 그렇게 거느리시다가 도(道)를 전(傳)허고 떠억 그래 별당에 계신 어른, 아! 그런 어른한테 그 헐 수가 있나? 헐 짓인가, 그? 그러면 일시 체면만 유지하기 위해서 알고도 안 하면 쓸 거여? 벼락날 건 내야지? 벌써 틀렸는디 그냥 두어?
마음, 거족동념시(擧足動念時)에 바로 봐 버려. 그냥 봐 버려. 벌써 척 물으면은 공안 물으면은 행동 벌써 보면 알아부러. 환혀. 그 “아! 내가 그 스님 그 말 그 말씀을 어떻게 답하리까?” 그래도 벌써 그건 답이 딱! 맞는 곳이 있거든. “스님께는 답 못허겄습니다” 이래도 딱딱 맞는 게 있거든.
박고봉 스님이 한참 참 만공 스님한테 인가 받고 그 저... 그 무슨 절인고? 거그서 돌아가신 어른 말이여, 박고봉 스님. 그 서대문 밖에나 뭐이냐 그 뭔 절, 그 절은 뭐 뭔 절이라고 허는고? 삼선암 화계사에 있는 절 밑에 그 뭐 그걸 뭔 절이라고 허지?
그 절에 있다 돌아가신 고봉 스님 젊은 당시에 한참 '견성했다' 해 가지고는 계시면서, 그 술 주면 술 잡숫고, 약주 주면 약주 잘 자시고, 술 한잔 자시고 법문 잘허고 그랬다 그말이여. 그러면 견성한 이가 또 술 생기면 술 잡숫고, 그러면 또 한잔 잡수면 그걸 또 뽄본 학자도 있지마는, 그것 뽄볼 수 있나?
그건 도인이 또 술 자신 이도 있고, 진묵 스님도 술을 무슨 뭐 참 동이로 잡솼는디. 술을 자시고, "학자가 누가 나한테 술을 먹을 때에, 나한테 만약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의지(話頭意旨)를 물으면은 내가 '술!' 그러겄다"
술은 무슨 그건 공안이 아니리오? 술도 공안이요. 어육 고기 먹고 술 먹고 무슨 헌 것이 반야묘용(般若妙用) 아님이 있나? 체중현(體中玄)에 들어가서는 그런 법도 있다 그 말이여.
그렇다고 해서 그만 뭐든지 물으면 “술!” 뭣 허면 “고기!” 뭐든지 물으면은 “잡담!” 그것도 막 법(法)이여? 그거는 그건 체중현으로 본다면은 추어망담(醜語妄談)도 개시묘법(皆是妙法)이니, 확철대오헌 분상(分上)에는 뭣이 아니리요. 허지만 그렇게 못혀. 그렇게 헌 법이 없어.
"술 먹을 때에 조주무자 공안을 묻거드면 내 문답 내가 답허되 '술!' 그러겄다" 그랬다 그 말이여. 그래 내가 있다가, 나는 그때 그런 그 스님네 밑에 다 공부하고 있을 때지 뭐. 나보담 나이 한 근 10년 되었으니까, 훨씬 참 선배시고. 아! 그래 고봉 스님, 고봉 큰스님, 그래 그때도 다 큰스님노릇 헐 때니께.
"조주무자의지(趙州無字意旨)를 묻거드면은 '술!' 그래요? 그렇게 문답을 해야 해요?"
"그래!" 그 말에다 "그래!"
"나한테 물으십시오" 나한테 물어. 내가 그래 가지고 그 문답 헌 놈이 지금 다 있어.
거 문답 들은 사람은 다 알지. 그런 것 지금 함부로 여기서 허면은 듣고 제 지견(知見) 붙여서 공연히 딴짓허고 앉었어. 그래서 내가 그 문답을 않고 내비두겄어.
그래 공안 문답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히 분명하고, 심히 무섭고 어림도 없어.
이 공안도 그저 그 도리, 아무때나 해도 그 도리, 아! 이놈 '양말 한 짝이가 도(道)요. 양말 한 짝이가 부처요' 요따구 짓이나 하고 돌아댕기면서 꺼떡허면 대답 푹 헐라고 나오고. 그래 돼야? 아! 그게 되냐 그 말이여? 아! 견성헌 것 같애? 마음에? 양심으로 한번 내 도(道)를 내가 비춰봐. 양심과 그 어디 허는 지정머리가 된가?
그런 버릇대기를 왜 허냐 그말이여? 왜 도 닦는 학자가 거짓 행동을 허냐 그 말이여? 무엇을 못해서 그런 짓을 혀? 차라리 빌어먹고 거리 노상에 가 춤을 추고 돌아댕길지언정 그런 짓을 왜 허냐 그 말이여. 학자가 삼가해야 한다 그 말이여. 크게 삼가혀. 그래 가지고 참말로 참회를 했거들랑 진참회(眞懺悔)를 허고.
다시는 그런 버릇이 없이 처꺽 깨달은 뒤에는 알아. 자기 양을 알아. '이게 깨달은 것이로구나. 이게 안 것이로구나. 요거 어쩌다 내 소견 들어간 게로구나' 고런 것과 달러. 주의 주의헐지어다.
일천칠백 칙 공안(一千七百則公案)을 수감향이면전(誰敢向爾面前) 염출(拈出)이리요. 한번 척 깨달을 것 같으면은 일천칠백 칙 공안(一千七百則公安)—일천칠백 선지식(一千七百善知識)이 있어서 낱낱이 그 공안을 다 묻는 법이 달러. 똑같은 생사 없는 법, 공안이지마는 공안이 다 달러. 그 묻는 공안 그 뜻을, 그 큰스님네 묻는 공안 뜻을 바로 봐야 옳게 답하는 것이거든.
그것을 모르면은 그 답을 뭐 제멋대로 제대로 '아무것도 없는디, 이것도 없는 놈이고, 이것도 없는 놈이고, 억! 그놈도 없는 놈이고, 밥 먹는 놈도 없는 놈이고, 가는 놈도 모도 없는 거이다' 개시무(皆是無)로 그것 아니여. 그런 짓 허면 그건 그건 저 신선 공법(空法)도 아니여. 고걸 고걸 체중현(體中玄) 체중현선(體中玄禪), 공선(空禪), 공에 빠진 놈의 선이여. 그건 견성했자 저 죽는 견성이여. 고따구 짓 해 가지고는 생전 된 법 없어.
그냥 곧 그래 가지고는 망발무애지행(妄發無碍之行)하고, 망담무애지담(妄談無碍之談)하고 그래 가지고 돌아댕기다가 그냥, 그 어디 속가에 가 버리고 그런 거여. 퇴속해 버리고 그런 거여. 대번 한철 들어와서 그런 소리허다 돌아댕기다 주먹이나 내밀다 퇴속하는 거여.
공안을 척척 봐 버려사 다시는 다시는 참 그 퇴타(退墮)가 없어. 퇴타한 법 없거든. 바로 공안을 견성을 바로 헌 사람이 퇴타한 법 없거든. 그 퇴타할 것인가? 일천칠백 칙 공안(一千七百則公安)을 확철대오 해 논 뒤에야 누가 다시 그 앞에 가서 뭐 말할 것이 뭣이 있어, 처꺽 처꺽 물으면은 추문낙구(推門落臼)지. 문을 열면은 확에 탁!탁! 떨어지지.
제불조(諸佛祖) 대기용(大機用)과, 모든 부처님의 큰 기용과, 부처님 모도 말씀헌 기용(機用)과 신통삼매(神通三昧)와 삼현삼요(三玄三要)와 종종차별지(種種差別智) 일체무애혜(一切無碍慧)가 진종차출(盡從此出)이여. 화두로써 다 그대로 낭발(朗發) 되아 부러. 하나도 무슨 일체 이치에 맥힘이 어디 있어? 맥히다니 뭐가 맥혀?
아무때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다 맥히지 않는다'고 그러고 허는 건, 그것은 그건 참 망작무애지행(妄作無碍之行)이라. 망령되이 무애(無碍)의 행을 짓고 앉어서 죄업만 퍼 짓는디, 그놈의 죄는 불통참회(不通懺悔)라. 참회가 없어.
그래 가지고 제가 '알았다'고, 그거는 못쓰는 것이여. 영 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딴 사람까장 다 버려. 그런 종자는 같이 있어도 못쓴 것이여. 벼락같이 종문(宗門)에서 축출해 버리는 것이지, 다시 그것은 용서헐 수 없는 것이여.
바로 참회를 허거들랑 진참회(眞懺悔)를 떡! 해 번지고는, 의전지시(依前只是) 옛날 그 공부할 때보담도 더 중하게 화두를 다잽이해서—대혜(大慧) 스님이 다 견성했다고 해 가지고 갔다가 다시 와서 참회허고, 원오(圜悟) 스님한테 와서 다시 견성해서 『대혜 서장(書狀)』을 모도 짓고 허듯기, 그러면 그 발심학자(發心學者)여. 도 닦는 학자여.
'죄가 다 되어 버려서 인자는 참회도 일없고, 뭐 참회는 무슨 참회여' 그건 못써. 천하에 못써.
종종차별지(種種差別智)와 일체무애혜(一切無碍慧)가 진종차출(盡從此出)이다. 일체무애혜, 일체 도무지 공안이 일로 쫓아 다 나온다. 수연(雖然)이나, 비록 그렇기는 그렇다마는 나개시이(那箇是爾) 자기(自己)냐? 어떤 것이 이 낱 네 자기(自己)냐? 어떤 것이 네 본래면목(本來面目)고? 또 묻네. '어떤 것이 네 면목(面目)이냐?' 이놈 하나를 또 물어.
일대장교(一大藏敎)는 시개절각(是箇切脚)이다. 일대장교라는 건 시개절각이다. 부처님의 일대장교란 것은 이 낱 절각(切脚)이다. 다리 부러진 것이다. 이것 아무도 못 새기고 모르는 것이여. 이것 몰라. '느그는 다 모르는디 나만 안다' 이 말 같지마는, 어째? 또 내가 그말 하면 어쩌냐 그 말이여. 아! 아는 사람이면 나와 말해 보란 말이여.
일대장교(一大藏敎)가 시개절각(是箇切脚)이다. 일대장교라는 건 이게 절각(切脚)이다. 다리 부러진 것이다. '끊어질 절(切)' 자를, '간절 절(切)' 자를 '끊어진다'고 햐. '다리 각(脚)' 자, 다리 끊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다리 끊어지면 온당한가? 일대장교는 시개절각이다.
증절착자개무자부(曾切着者箇無字否)아? 일찍이 간절히 이 낱 무자(無字)를 착득해 보겄냐?
이런 깊은 법문은 헐 도리가 없어. 허지마는 응 뭐 기위(旣爲) 기위 직지(直指) 절목(節目)을 내가 새기니까 이런 법문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막 해 나간다 그 말이여. 듣고 뭐 알라고 헐건 없지마는.
일대장교(一大藏敎)는, 부처님 장교(藏敎)는 다리 부러진 것이다 그 말이여. 증절착자개무자부(曾切着者箇無字否)아? 일찍이 이 낱 무자(無字)도 네가 절착(切着)을 해 보겄냐? 무자도 한번 절착, 절착(切着)이라는 것은 깨달라 얻는 것을 절착이락 햐. 절착(切着)을 해 보겄느냐?
무슨 말인고 하니 일대장교(一大藏敎)라는 건 이 낱 절각(切脚)이여. 일대장교라는 것은 주각(註脚)이여, 주각. 절각(切脚)을 주각(註脚)이라고 봐. 주각(註脚)이라는 것은 뭘 주각이라고 하느냐? 요리조리 알음알이를 내서, 일대장교는 별별 알음알이를 붙여서 해석을 붙여서 말헐 수 있는 것이지마는, 주각을 할 수 있는 게지마는 이 말이여. 그것을 절각(切脚)을 그렇게 못 본다 그 말이여. 그래야 말이 되지.
부처님의 말씀은 무슨 말씀이든지 주각(註脚)을 한번 내서 '거 무슨 도리다, 무슨 이치다' 해 볼 수도 있어. '삼현(三玄)이다, 삼요(三要)다, 무슨 무문관(無門關)이다, 제일구(第一句)다, 제이구(第二句)다, 제삼구(第三句)다' 뭐 별소리 한 번 붙여서 해 볼 수가 있지마는, 이 낱 무자(無字)도 네가 한번 절착(切着)해 보겄냐? 무자에도 네가 한번 그 해석을 붙여서 요리조리 네 분석을 붙여서 말을 한번 해 보겄느냐 그 말이여. 뭐 별 그런 깊은 말은 아니여. 허지마는 글 뜻이 그렇게 어렵다 그 말이여.
그리고 부처님 말씀은 천경만설(千經萬說)은 다 말할 수 있고 이리저리 모도 변론은 붙일 수 있지마는, 이 무자(無字)에도 한번 그래 보겄냐? 무자 시방 내세우는 말이여. 무자 하나, 지금 무자의지(無字意旨) 하나 간택한 말이니까. 무자도 한번 해 보겄냐 그 말이여.
어떤 게 네 자기(自己)냐? 어떤 게 네 몸뚱이냐? 네 마음자리 그 자리냐?
일대장교는 네 자기 마음자리, 네 마음자리를 모도 이리저리 이리저리 모도 경(經)으로 교설(敎說)을 해서 이렇게 해 놓은 것이 그것이 주각해 놓은 것이지마는, 무자(無字)에도 한번 그래 보겄느냐 그말이여. 무자(無字)에도 이렇게 주각(註脚) 한 번 내 보겄냐?
영리한(靈利漢)은 직하흔번(直下掀飜)해라. 영리한 놈은 직하(直下)에 한번 바로 봐 버려라. 그래서 통명자기(洞明自己)해라. 자기를 통명해라. 너를 바로 깨달라 버려라.(34분39초~52분13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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