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 (2/9) 몽산화상의 무자십절목.

**전강선사(No.499)—무자십절목(2) (기불둔치평생까지) (갑인74.05.21.새벽) (전499)

 

(1) 약 27분.

 

(2) 약 27분.

 

(1)------------------


동호춘수록(東湖春水綠)이요  백구임부침(白鷗任浮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오  의구숙노화(依舊宿蘆花)니라
나무~아미타불~

조주 스님 말씀에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지극한 도는, 극한 도는 무난(無難)이다. 어려움이 없다'
우리 참선, 활구참선법보담 더 더 어려운 법이 어디 있으며, 또 최고법(最高法)이 어디 어디 있는가? 제일가는 법이지.
이 법은 어려움이 없다. 견성(見性)허기도 어렵지 않고, 공부해 들어가는 법도 어렵지 않고, 천하에 어려움이 없어.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라. 간택(揀擇)을 혐의(嫌疑)한다.
모도 요리조리 갈려서 그놈을 간택해서 잘할라 해서 모도 그놈을 포장을 헐라고 헌다 그 말이여. 요새 모도 현대 길 포장한다, 무슨 그런 문자처럼. 길을 처음에 내 가지고는 막 내 놓으니까—어디 거 뭐 길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비가 오면은 그만 물꾸렁텅이고, 이거 돌 천지고, 뭐 그것 될 수 있나, 길이? 아무것도 아니지? 포장을 해 놔사 그 길이 되어서 고속도로 같이 번쩍번쩍허니 마음대로 그저 그만 차도 가고 사람도 오고, 그와 같애서.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유혐간택(唯嫌揀擇)이여. 간택(揀擇)을 혐의(嫌疑)한다. 요리조리 모도 간택해서 그놈을 잘할라고 모도 갈려서 야단친 것을 혐의혀.
도(道)라는 건, 길이라는 건 그건 처음에 길 내 노면은 그놈 포장하고 별짓 다 하고 도는, 저 세상에 가는 길은 도(道)는 그러허지마는, 우리 참선허는 이 대도(大道), 이 도(道)는 그거도 ‘길 도(道)’ 자여. 도는 마찬가지지. 이 도(道)는 간택이 없어. 뭐 포장하고 무슨 뭐 간택하고 뭐 그런 것이 없어. 그 도(道)와는 달러, 그 ‘길 도(道)’ 자는 마찬가진디.

그러면은 그 무슨 의미인고? 그 얼른 들으면 그 의미가 알 수 없지?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는데 간택을 혐의한다' 요리조리 모도 따지고, 간택하고, 옳은가 그른가, 모도 이 뭘 찾는 거, 그것은 못쓴다 그 말이여,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것은 안 된다 그 말이여, 간택을 혐의한다는 것은.
듣기가 그 잘못 들으면 그 잘 안되지. 그건 그렇게 허면 안 된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활구법(活句法)이라는 것은 그저 ‘개가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無)!’

‘무(無),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알 수 없는 것 하나뿐인데 무슨 간택을 혀? 거다가. 뿐 뿐이라는 소리도 거 소용없는 소리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서」 자까장 넣을 것도 없어. ‘어째 무(無)라 했는고?’

‘무(無)!’ 무(無) 하나뿐이다. 무(無) 하나뿐인디 잘잘못이 뭐가 있어? 잘못 일렀니, 잘 일렀느니, 뭣을 일렀느니, 유(有)를 일렀느니, 무(無)를 일렀느니, 뭐 그런 것이 있나? 뭐 분석 해석 거다 붙일 것이, 무엇을 잘을 붙일 것이여? 무엇을 뗄 것이며? 다시는 그뿐인데. ‘무(無)!’

아! 그러면은 불법 근본도리가 천하 없는 본래 무(無)를 일르고, 무슨 뭐 무무(無無)도 역무(亦無)를 일러 놓고, 무슨 뭐 불견(佛見) 법견(法見)까장 다 떼고 일러 놓고, 유(有)도 무(無)도 비유(非有) 비무(非無)도 아닌 것을 다 여의어 버리고 일러 놓고, 그런 것이 아니거든?
만약 그런 것을 떼고 여의고 붙일 것 같으면은 뭣 헐라고 거다가서 무슨 떼느니 여의느니 뭣을... 거 없어. 다만 무(無)여. ‘조주는 어째 무(無)?’ 뿐이여. 알 수 없는 무(無) 하나뿐이여. 그 도리가 거기 있으니 나오지, 안 나올 이치가 없어.

그런디 그 조주 무(無)라고 헌 그 도리가 무슨 광명체가 나오고, 무슨 모냥다리가 나오고, 무슨 유무(有無)가 나오고, 무슨 비무(非無)가 비유(非有)가 나오고, 그런 것이 아니여. 그런 것이 그냥 그저 공연히 해보다가 깜깜하다고, 뭘 모른다고, 아는 게 없다고. 훤허니 그 뭐 백만사(百萬事)를 다 아는 것이 법(法)일 것인가?
그 아는 것이 법일 것 같으면은 뭐 세상 요술 같은 거 모도 가르켜 가지고 알게 맨들지 뭐. 점쳐서 알게 맨들지. 점쟁이도 다 아는 것이고. 요새 봉사도 글 손으로 짚어 보고 글을 다 안다는구만. 그런 것이나 그것도 뭐 참선법이게? 그 뭐 뭐 천하사를 뭐 책을 굉장허게 많이 쟁여 놓고는 그 책에 가서 뭐 글자는 아니라는구만? 모도 뭐 뭐 오돌토톨헌 것이 있어 가지고 요렇게 만져 보고 다... 안 만져 보고도 알아야지. 또 안 만져 보고 알면 뭣혀? 화(禍)의 문(門)인데.

선법(禪法)은 그런 것이 아니기 따문에 무(無)여. 무(無)면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 무(無)?’ 무(無)뿐이여. 그러면 어디 그 무슨 간택이 있어야지? 거가 간택이 있어야 무슨.. '간택을 혐의한다'고, 간택 말아라! 그 말이여. 무(無)뿐인디. 알 수 없는 것뿐인디.
'이뭣고?'도 그렇지. 이뭣고도 ‘이뭣고?’ 알 수 없는 놈 하나, 참 부지일자(不知一字) 묘(妙)의 문(門)이다. 그밖에 더 있어?

동호(東湖)에 춘수록(春水綠)허니, 동호에 봄물이 푸렀는디, 봄물이 퍼러니 춘수(春水)는 만사택(滿四澤)으로 동호(東湖)에 물이 꽉 차서 그 물빛이 퍼렇다 그 말이여. 그 물빛 푸르지 무슨 뭐?
물빛은 푸르니까 푸르다고 헌 거여. 거다 의미를 그 해석을 붙이지 말란 말이여. 봄물은 퍼렇지. 퍼런 밖에 뭐가 있나?

백구(白鷗)는 임부침(任浮沈)이로구나. 백구(白鷗)는 아! 백구 흰 놈, 흰 백구란 놈은 물에 가라앉았다가 또 떠올랐다가 백구임부침(白鷗任浮沈)이여. 거다 무엇을 붙일 건가? 무엇을 붙이고 보지 말란 말이여. 그 모도가 모도가 개중도리(箇中道理)지, 이 가운데 도리지. 뭐 다른 도리가 무엇이 있겄나 그 말이여.

어주(漁舟)는 하처거(何處去)냐. 고깃배는 고깃배는 하처(何處)로 가느냐? 저 멀리 뜨는 배는 그 어디로 가는고?
의구숙노화(依舊宿蘆花)로구나. 예[舊]를 의지해서 노화(蘆花)에 자는구나. 그건 가다가 그 노화꽃 갓에 그 갈대꽃 모도 핀 바닷가에 거 잔다 그 말이여. 그 무슨 의미를 붙일 것인가? 거다가 뭐 의미를 갖다가서 해석해서 볼 것인가?


이 입 껍데기[口皮邊]로 조주가 ‘무(無)!’ 허는 그 도리를, 조주선(趙州禪)을 입 껍데기로 돌아 비출진댄—입으로만 ‘무, 무’ 헌다 그 말이여. ‘무, 무’ 입 껍데기로만 ‘무, 무’ 혀. 거그 까닭이 많이 있지. 아무 의단(疑團)은 없이,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은 없이, 그만 ‘무, 무’만 허고 앉었다. 그 뭣 헐 거여 그거?

그 도무지 알 수 없는 '무(無)'다.
입 껍데기로만 ‘무, 무’ 허고 있을진대는 타일(他日)에 긱철방(喫鐵棒)허리라. 다른 날에 쇠방망치를 씹으리라.
견성은 꿈에도 못헐 터이니, 조주 무(無) 도리는 꿈에도 깨닫지 못할 터이니, 거 중생 소견 그대로 입 껍데기로만 ‘무, 무’ 허고, 이뭣고만 ‘이뭣고, 이뭣고’ 껍데기만 하지, 알 수 없는 의심을 갖추지 못허면은 그 뭐, 거 뭐여 거? 아무것도 아니지.

앉어서 그만 ‘무, 무’ 허다가 잠이나 자고, ‘이뭣고’ 허다가 잠이나 자고, 성래(醒來)하면은, 깨어나면은 또 호사망상(胡思妄想)이나, 호사망상이란 것은 그 큰 망상을 드리 끄집어 일으켜 가지고는 허는 것이여. 세상 모도 그저 명예 권리나, 세상에 모도 그저 그동안 해 나오든 살림살이나, 뭐 이런 것을 한번 호사(胡思), 크게 생각을 해서 망상(妄想)으로 그만—잠자다가, 호사망상(胡思妄想)허다 큰 망상을 내다가, 덤덤허니 ‘무 무’ 허다가, ‘이뭣고’만 허다, 입으로만 참선, 입 참선만 하면 뭣 혀?

또 좌착(坐着), 앉은 참선만 허면 뭣 혀? 앉었는 것이 그거 참선이여? 가만히 앉었다고 참선이여? 그 가만히 앉었는 앉은뱅이는 평생 참선이겠네? 그것도 못쓴다 그 말이여. 앉어서 자리만 착(着)해도 못쓰고, 서서 또 참선헌다고 밤낮 댕기기만 하면 그것이 선(禪)이여?
서나 앉으나 누우나 일체처에 그 그 참말로 그 해 나가는 그 참선법, 참선법, 다루는 법, 화두를 턱 거각(擧却)하는 법, 그 법이 뭣이냐?
도무지! 거다가서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니, 참 참선허는 법은 어려움이 없어. 유혐간택(唯嫌揀擇)이여. 간택을 혐의한다. 간택 말아라. '옳냐?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옳게 헌 것이냐, 그르케 한 것이냐?' 고것을 붙이지 말아라.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허면, ‘어째서 무(無)?’ 있단 말도 아니요, 없다—있는 것을 말헌 것도 아니요, 없는 걸 말헌 것도 아니고, 있고 없는 놈을 말헌 것도 아니요, 참으로 없는 놈을 말헌 것도 아니요. 뭐 일체 뭐 정량(情量), 뭐 사량(思量), 분별 뭐, 여하약하 진리 이치 도무지 밖에, 아무 그 밖에 다만 무(無) 했으니, 그 조주 무(無)란 도리(道理)는 무슨 도리냐? ‘어째 무(無)?’ 해도 그 아무 일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거가 무엇이 붙어? '없다'고 찾으면 뭣이 그리 그 옳게 붙으며, '무(無)'라고 찾으면 못쓸 게 무엇이 있을까마는, 중생의 상량(商量) 사념(邪念)으로써 못쓰게 된다 그 말이여.
「'있다'고 헌 것이, 불성이 있다 했는데 조주는 어째서 ‘없다’ 했는고? 요것이 옳다. 뭐 지나(支那) 중국말은 ‘무(無)!’ 헌 것이 한국말로 ‘없다’ 했으니 '없다'고 찾는 것이 옳지, 거다가 일체 유무지견(有無之見)을 붙이지 않고 찾아? 그 잘못된 것이다」 또 잘못을 붙이네. 거 다 저만 속는 것이여. 잘 들어야 되아.

무(無)도 그대로 견성성불(見性成佛) 도리면은 '없다'는 놈도 견성성불 도리요, '있다'는 놈도 견성성불 도리요.
내가 그 어디, 그 설법해 논 디 그 있지.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논 갈러 가는 것도 시법(是法)이면, 여자가 호맹이를 들고 밭매러 가는 것도 시법(是法)일 것이다 그 말이여. 농부가 쟁기질 하러 가는 것도 비법(非法)이면 법이 아니면, 여자가 호미 들고 밭매러 가는 것도 비법(非法)일 것이다 그 말이여.
도무지 중생념, 중생 사량념이 그것이—따지는 법, 분별법 그것이 간택(揀擇)이여. 그 간택을 혐의(嫌疑)한다. 요걸 요렇게 들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앞으로써 화두를 해 나가는 디 뭘로 해 나가느냐? 무자(無字)로 한번 말해 보자.
‘없다’고 해 나가는 것이 옳냐? ‘무(無)’라고 해 나가는 게 옳냐? 이놈 이놈을 가지고 좀 얘기해 나간다 그 말이여.

조주선(趙州禪)을, 조주 무(無)라고 헌 그 선(禪)을 입 껍데기로만 비춰? 입 껍데기로만 비추는 것은 그거는 가만히 그저 씨잘데없는 뭐, 뭣이여? 아무 의심 없는 무사갑중(無事匣中)에 있어도, 일없는 갑중(匣中)에 들어앉어도 안 되아. 소용없어. 그 뭣이여? ‘무, 무’만 허고 있으면 뭣 할 것인가 말이여? ‘이뭣고, 이뭣고’만 하면 뭣 할 것인가 말이여?

'대체 이뭣고?' ‘뭣고? 해 놓고 보니 이뭣고?’ ‘이뭣고?’
‘이’ 그놈이 벌써 의심(疑心)이거든? ‘이’ 그놈이 알 수 없는 것이거든?
‘이’ 헌 놈까장 들멕일 것 없어. ‘이뭣고?’

'무(無)!' ‘어째 무(無)?’ '어째'가 거그 들었거든. ‘어째 무(無)?’ 이놈을 갖추어야 되아. 참으로 이놈을 갖추어야사 간택이 없는 법이다 그 말이여. 참 지도(至道)는,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간택(揀擇)이 없다는 말 중대한 말이여, 그 말이. 뭐 보통 말이 아니여. 보통 말씀인 것이 아니여. 극(極) 간택한 말씀이여.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라. 조주 스님 말씀이 모도 그렇게 참 쉽지. 천하에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

남전(南泉) 스님, 남전 스님 말씀에 “굉이(고양이) 모가지를 추켜들고 한번 일러 봐라” 헌게. 그렇게 허니까 왼통 대중은 나와서 굉이 소리를 헌 놈도 있고, 뭐 별소리를 다 하지마는 그것 벌써 거, 다 저 죽거든, 저 죽어 버리고 말아.
굉이를 추켜들고 "일러라" 하! 그러니 굉이 소리를 헌다. 또 그 뭐 굉이 모가지를 추켜들고 보이는 그 형태를 뭐 이르기도 허고, 굉이를 뺏기도 허고, 뭐 거다가 절을 허기도 허고, 거다가서 무슨 뭐 그 긱감 소식을 보이기도—긱감, 긱감이라는 건 입을 씹어뱉은 도리다 그 말이여. 입을 꾹꾹 씹어서 뱉은 것을 긱감이라고 그려.

별짓을 다 하지마는 발써 그 남전 스님 뜻은 보들 못허거든. 남전 스님, 굉이(고양이)를 추켜들고 "일러라" 그거 모른다 그 말이여. 꽉 맥혀서 모른다 그 말이여. 모르는 놈은 그대로 죽고, 아는 놈은 외도로 죽고, 어떻게 혀? 바로 바로 본 학자래야사 그 허는 법이지, 못허는 법이여.
'굉이 무슨 눈깔이 어떻다, 굉이 코빼기가 어떻다, 굉이 몸뚱이가 어떻다, 발은 어떻게 생겼다' 그까짓 소리 해 쓸 것인가? 뭐 조주 스님 굉이 모가지를 추켜들기 전 도리를 일러 쓸 것인가?
소용없어. 그대로 공안(公案)은 봐야지. 남전 스님 떡 굉이를 추켜든 도리를 바로 봐야 되지.

조주가 들어오니까 “자네는 이 굉이(고양이)를 추켜들었으니 어떻게 헐래?” 물으니께, 신짝을 떠억 뒤집어 이고—뒤집어 이거나 옳게 이거나 상관없어, 신짝을 이었지. 신짝을 이고서는 나간다 그 말이여. 그만 나가, 밖으로 나가. 그 무슨 도리냐 그 말이여?
그 벌써 아무 때나 그거 뭐 지견 붙일라면은 누가 못혀? 뭐 별 지견 다 붙일 수 있지. 중생 망상 일어나는 대로 다 갖다 붙일 수 있지. 그거 아니거든. 공안(公案)이란 도리가 그게 그대로 있어.

남전 스님이 있다가 “자네가 있었으면 굉이 살릴 뻔 했네” 그 도리는 그건 무슨 도리여? '조주가 바로 일렀다' 그런 말이여? 그까짓 것 붙이면 뭣 혀.
거 남전 스님 “자네가 있었으면 굉이 살릴 뻔 했네” 그 무슨 도리냐 그 말이여? 무서운 말이여. 그 말이 남전 스님 그것을 바로 봐야 혀.


입 껍데기로 비추지 말아라. 다른 날에 철방(鐵棒)을 씹을 것이다. 그 삼악도에 떨어져서 나올 기약이 없이 지옥고를 받을 것이다.
무(無)가, 조주(趙州) 무(無)라는 이 무(無)가 삼세제불(三世諸佛)의 골수(骨髓)요. 삼세제불의 뼉따구 속의 골수여. 역대조사(歷代祖師)의 안목(眼目)이다. 역대조사의 바로 눈이다.
일기(一期)에 흔출(掀出)해야, 한번 무(無)에 그대로 도득(道得)을 해 놓았다. 바로 일러 놓았다. 재이면전(在爾面前)이로구나. 네 낯바닥 앞에다 딱 일러두었구나. 네 낯바닥 앞에 바로 일러 놓았어.

성조한(性燥漢), 성조한, 성품 마른 놈이, 그 날랜 대승학자가, 그 상근학자(上根學者)가 한 어깨로 턱 메 가거드면, 깨달라 가거드면 말이여. 확철대오를 해 갈 것 같으면은 산승(山僧)의 주장자(柱杖子)로도 역미긍타이재(亦未肯打爾在)다. 산승의 주장자로도 또한 너를 때릴 수가 없다. 너를 칠 수가 없다.
산승의 주장자는 본분납승(本分衲僧)의 방(棒)이여. 불조(佛祖)라도 그 방(棒)은 헐 수 없어. 어제 여까장 했든 놈 다시 연속헌 것이여.

운문 선사가 "내가 당시에 있었으면 일방타살(一棒打殺)이라. 부처님을 타살해서 개 주겄다" 하는 방(棒)이여. 운문방(雲門棒)이여. 본분납승 방(棒)이여. 본분학자의 방이라는 것은 불조(佛祖)도 헐 수가 없어.
그러면 본분납승의 방(棒)에는 다 죽고 말 것인가? 그 방(棒)은 또 못 이를 것인가? 백 번도 이를 수 있고, 천 번도 이를 수 있는 것이여.

네가 바로 무(無)에만 확철대오해 버릴 것 같으면은 본분납승(本分衲僧)의 방(棒)으로도 너를 때릴 수가 없다. 차도(且道)하라. 어째 그러냐? 필경(畢竟)에 여하(如何)오? 어째 그러냐?(처음~26분38초)





(2)------------------

지자개무자(只這箇無字)는, 이 낱 무자(無字)라 하는 것은 전무파비(全無巴鼻)허되 유사파비(有些巴鼻)니라. 내 거까장 했어, 어제 아침에.
온전히 끝코[巴鼻]가 없으되 파비(巴鼻)가 있느니라. 아주 '없다'고 해 놓고, '없다'고 턱 해 번지면은 그거 어디 무슨 법이 '없다'고 헌 놈뿐인가? '없다'고 헌 놈도 방(棒)이면 '있다'는 놈도 방(棒)이요, 유무(有無)가 방(棒)이면은 방(棒) 그놈도 방(棒)이지, 뭐 뭐 방(棒) 없는 법이 있나? '파비(巴鼻)가 없다'고 해 놓고 보니 벌써 방(棒)을 짊어지고 들어온 것이다.

혹자(或者)는 위시단명도자(謂是斷命刀子)라고 허며, 혹 어떤 자는 '이것이 명(命) 끊는 칼이다' 명(命)이라는 것은—칼이란 게 생명을 끊는 칼이다 그 말이여. 생명을 끊으니까 일체 일어나는 번뇌 망상, 그저 일체 상량심, 다 그놈이 끊어 버리는 놈이다, 베어 버리는 놈이다. 이치도 다 끊어 버리고, 살불살조(殺佛殺祖)요,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칼이다 그 말이여.
또 일체 차별 지혜를 모도 여는 자물쇠통이다. 꽉 잠과 논 자물쇠를 끌르는 놈이다. 조주무자(趙州無字)라는 것은 일체 범성정량(凡聖情量)이고, 일체 도리회(道理會)고, 망상은 더군다나 말할 것 없고, 일체 망상이고 다 때려 끊어 버리는 놈이다. 다 베 버린 칼과 같은 칼이다.

또 자물쇳대와 같애서, 꽉 잠과 놓은 자물쇠를 터꺽 끄르면은 문이 툭 끌러지는 자물쇠통 그놈 문 끌러 버릴 것 같으면은 문 안에 방안에 일체 등물(等物)이 그대로 다 마음대로 인자 그저 알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고, 모도 일체를 모도 차별, 뭐 지혜, 그저 생사해탈도, 뭐 할 것 없이 다 여는 자물쇠 열대(열쇠)다. 요렇게 헌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조주무자(趙州無字)는 고런 것이다. 망상을 다 베 버려 버리는 칼이요, 일체 지혜를 여는 자물쇠와 같다' 요런다 그 말이여. '조주무자가 생사해탈도 막 그놈 허고 그저 그만 범성정량(凡聖情量)에도 뛰어나는 열쇠요' 요렇게 헌다.

호여삼십방(好與三十棒)이다. 네 이놈, 삼십방을 메고 들어와서 삼십방에 죽어라 이놈아. 너를 삼십방을 주겠다. 시(是) 상방(賞棒)이냐, 벌방(罰棒)이냐? 이게 무슨 방이냐? 이 방이 이게 무슨 방이여? 이걸 물었어. 제가 바로 본다면은 바로 봐서 바로 넉넉허면은 한마디씩 일러 봐. 이런 디서 일러 보라 그 말이여.
못 이르게 헌 것이 아니여. 함부로 주뎅이 벌리지 말라 이게지. 그놈의 주뎅이 절단날 테니까. 법(法) 비방해 가지고 아비지옥에 들어갈 터니까. 바로 보이거든 이르는 법이요, 바로 보들 못 했으면 못 일러.

이놈을 툭! 깨달라 버릴 것 같으면은 이게 무슨 방(棒)이냐? 벌방(罰棒)이냐, 상방(賞棒)이냐?
무서운 간택법이니까. 이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이라는 건 덮어두는 것이여. 강사도 한 번도 이건 설(說)하도 않는 것이여. 설해 봤던들 허덜 못혀.

나 뭐 내가 무슨 뭔... 과거에 강사(講師)들, 무슨 뭐 박한영 같은 강사가 거 당최 강사로는 하나뿐인디 뭐 없었지. 거 합천 해인사 홍도여관에서 나는 얻어먹고 댕기다가 뽀이질을 헐 땐디, 내가 뽀이질을 허다가 물었다 그 말이여. 이걸 물은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경론(經論), 경에 있는 말도 묻고, 금강경도 묻고, 일체유심조도 묻고, 박한영 허고 최남선이 허고 같이 왔을 때, 최남선이가 한국의 문사(文士)거든.
아 최남선이, 할 것 같으면 한국 팔문사(八文士)에 제일 최고인디 뭐. 한국 팔문사 가운데에도 최남선이는 그 역사, 역사가지. 역사에 제일 밝지. 한국 역사 하면은 모를 것이 없어. 허지마는 입이 없었지. 뭔 입이 있어? 입이 있을 수가 있어야지, 못 일러.
내가 그때 얻어먹고 내가 홍도여관에서 뽀이질허고 있었지마는, 뽀이질! 날 뽀이로 봤다가는 자기네가 잘못 봤어. 그 뽀이로 본다한들 뭐 별 거 있나?

강사(講師)가, 뭐 합천 해인사 강사가 이만저만한 강사가 꽉 찼는디 사월초파일에 사람이 몇만 명, 한 3만 명, 4만 명 온다는 초파일 날인디, 도량 경내가 그렇게 너른 경내지마는 꽉 차 버려. 긍게 법당 그 큰 법당도 막 뜰까장 꽉 차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헌디 내가 뽀이를 허고 있다가 뭐 이마빡에다 머리빡에다가서 수건을 동이고 떡 있다가, 뭐 수건 버릴 거 뭐 있나? 수건 쓰고 내가 들어가지. 들어가서, “법상(法床) 좀 빌려라. 내 법상에 올라갈 터니까”

홍도여관 뽀이 정영신(鄭永信)이가 들어왔다 하면 별도리 없어. 내가 올라간다고 누가 날 끄집어낼 사람 없어. 누구 누구 강사들이 올라가서 설법한다고 할 때 차례로 올라가서 차례 설법을 할 때인디, 그 차례 설법 뒤에 차츰차츰 허라고, 내가 할 말이 있다고, 내가 설법해야 허겄다고, 오늘은 내가 설법을 할 테니 좀 들으라고.
그러고서는 법상에 올라가서 “나는 홍도여관 뽀이요” 그래 논다 그 말이여. “내 설법을 좀 들어 보시오” 그래 놓고는 거 뭔 말 나온 대로 허지, 내가 무슨 뭐 거기에 뭐 준비해 논 말도 아무것도 없지. 뭣 준비해 논 말이 있어? 아무 준비해 논 말도 없고.
올라가서 척 한번, “자연적(自然的)이냐 천연적(天然的)이냐, 만겁(萬劫)에 현안(懸案)인 천지의 비밀이냐. 자연도 아니요, 천연도 아니요, 만겁 현안의 비밀도 아니다. 심마(甚麽)냐? 이 뭐냐?” 한번 아! 뭐 그런 설법했지 뭐, 다른 것 뭐 있나? 다른 말 헐 것이 있어야 하지.

아! 그렇게 허고 내려올 것 같으면은 그만 그래도 그 중들 강사들 즈그 글 가운데에서, 권중(卷中) 가운데에서 아무리 그 뭐 얻은 것이 무엇이 있나? 고인(古人)네 말해 논 것 모도 조박(糟粕), 찌거리 모도 짜 먹고 모도 그런 것 가지고 모도 횡설수설헌 거, 그런 거 아는 것 가지고 소용이 있나?
둥 그렇지 뭐. 내가 그렇게 지냈어. 뭐 틀림없어. 내 그 법문 내 밤낮 어디 모도 해 놓았지.


필경(畢竟)에 어째서 이 낱 무자(無字)가 이러허냐?
'뭐 자물쇠를 자물쇠통 같애서 문 툭 끌러 가지고 방안에 일체 등물(等物), 일체 살림살이 다 얻고 내가 다 보고 내 주물르고 마음대로 허는 그런 자물쇠다. 중생의 일체 번뇌망상심과 계교상량심, 사량분별심을 쏵 잘라 버리는 칼이다. 요것이 무자의지(無字意旨)다' 요런 놈들이 있어?
호여삼십방(好與三十棒)이여, 삼십방을 주리라. 이건 뭔 방(棒)이냐? 이게 상방(賞棒)이냐, 벌방(罰棒)이냐? 그놈 상방이라고 헐 테여, 벌방이라고 헐 테여? 그놈 뭐라고 할 테냐 그 말이여.

아! 그런 디 가서 의심이라니? 무슨 놈의 의심이여? 어디 백천 공안에 의심이 있으면은 그 견성인가? 의심이 없을 것 같으면은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을 다 깨달랐다 그 말이여. 그렇게 깨달랐을 것 같으면은 제불지(諸佛地)에 올라가, 부처님과 똑같이 깨달랐다 그 말이여.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다. 한 번 뛰어서 여래지에 올라갔다 그 말이여.
왜 여래지에 올라갔을 것 같으면은 그 곧 그만 그 구경각(究竟覺)이지. 여지없는 각이니 구경각이지, 무슨 놈의 또 거가서 무엇이 있어? 견성, 구경각을 해 버릴 것 같으면 무슨 생사가 있으며, 생사가 없다기 보담도 일체 변화 신통도 다 갖춰져 있고, 다시 재미(再迷)가 무엇이 있어? 아주 구경 그대로 갖추어져버려 구경각인디.

'닦을 것도 없고 그때는 그래야 각(覺)이지, 글안으면 각(覺) 아니다' 고와 달라. 그거 다른 말이여, 그 말이.
아무리 구경각을, 그 도리는 삼세제불 역대조사의 그 천칠백 공안에 가서는 확철대오를 했지마는, 일초에 직입여래지해서 이즉돈오(理卽頓悟), 이치는 몰록 깼다마는, 거기에 오후재미(悟後再迷)를 또 말해 놔. 오후(悟後)에 다시 미(迷)하면 큰일난다. 오후재미(悟後再迷)는 구(求)허들 못한다, 그랬다 그 말이여. 깨달라 가지고 재미(再迷)지, 깨달지 못하고 재미(再迷)는 그건 말도 할 것도 없는 것이고. 그 말이 다른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 말만 봐 가지고서는 '구경각은 그런 법이 없다' 누가 구경각을 말했나? 그 지경 아직... 조주 스님도 턱 깨달은 후에 40년을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고, 잡념을 쓰지 안 했고, 향림(香林)도 40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고. 그런 모도 그저 오후(悟後) 단속을 기맥히게 해 놨네.

저 어린아, 어린 자식을 낳았다. 낳아 노니 뱃속에서 뿍 낳아 노니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다. 똑같다. 사람, 사람 형용은 똑같여.
아! 허지마는 그놈이 말할 줄도 모르지, 그놈이 일어나 댕길 줄도 모르지, 걸을 줄... 뭐 밥 먹을 줄도 모르지, 그저 누워서 그러고만 있으니 그놈을 차츰차츰 길러 키워서, 어른 다 어른이 되어서 손발로 마음대로 그저 운수급반(運水及搬)하고, 아 그저 성숙시위(成熟施爲)를 마음대로 제가 하고, 그래 한 이십(二十) 길러 놓으면은 인자 큰 아들 큰 사람이 되아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니 장양성태(長養聖胎)를, 성태(聖胎)를 길러라. 성현이 되게 키워. 바로 깨달라 가지고 성태를 기르는 법이지,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혀?

돈오(頓悟)는, 근본도리는 깨달랐지마는 아직 오후(悟後)에 그 수양을, 성태를 기뤄야 할 것이다. 아! 이 말이지.
견성해 가지고 견성 못헌 학자를, 당신은 구경각을 증(證)해 가지고도 견성 못헌 학자를 그렇게 가르켜 나가야 하지, '구경각밖에는 없다. 그게 깨달은 것이 깨달음 아니다' 거 그래 버리고 말 것인가? 그 차제(次第)를 가르켜야지. 하! 이거 내 참말로!

나 과거에 한암 스님, 만공 스님... 만공 큰스님, 혜봉 큰스님, 한암 큰스님, 용성 큰스님, 혜월 큰스님, 그런 큰스님 있을 때, 내 경허 큰스님만 못 모셨고 못 뵈었고, 수월 큰스님은 내가 못 뵜고는, 내 다 봤다 그 말이여. 그 다음 또 그 뒤에 난 큰스님네들도 내가 다 보고, 다 법문 듣고 다.
다! 만공 큰스님도 큰 단속이 무슨 단속이냐 하면은 “이 사람아! 득이수난(得易守難)이니, 얻기는 쉽지마는 지키기가 어려우니. 오후재미(悟後再迷)라니! 큰일나느니!” 내 늘 들었다 그 말이여.(녹음 끊김)

...하고 깨달라 가지고는 증오(證悟)가 또 있어. 증오가 있고. 아! 그거 분명히 있는데.
그것 보조 스님께서 "네가 이놈"—(학인 질문)"왜 깨달른 사람이 하나도 그 그저 뭐 증오가 있어야 할 턴디, 깨달은 사람이면 증오(證悟)일 턴디, 구경각(究竟覺)일 턴디, 왜 모도 한 사람도 신통변화도 없고 그런 모도 보통 사람과 똑같으니 어디 그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답)"이놈아 네가 경발광언(輕發狂言)...” 발광언이라고 했어. 발광언(發狂言)! “미친 미친 발광언을 말아라. 네가 그렇게 이치를 아지 못허고 무슨 법을 믿는다 하냐? 설리(說理)의, 이치를 말허되 본말(本末)을 알들 못허고, 선후(先後)를 아지 못해 가지고 뭐냐?”
아! 이렇게 막 치고서는 '신통변화가 설사 낭발(朗發)허드래도, 구경각을 증해서 낭발허드래도 그런 것을 느그 같은 놈한테 쓸 것이냐?' 말하자면, 거기는 그렇게 되지 않았지마는.

모도 미인(迷人)한테다가 신통변화 구경각을 쓰면 알 것이냐? 또 써서 뭣 할 것이냐? 불가요용(不可要用)이니라. 요용(要用)을 어따 요녀러 것 쓸 것이 없어. 그러헌 그 신통변화를 모도 쓸 것 같으면은 사견 상견으로써 중생을 꼬은 것밖에 더 되냐? 아! 이 말씀이지.
보조 스님께서 구경각을 다 했지마는 학자를 가르키는 디는 아! 그렇게 가르켜 나가야 할 것이지, “에이, 구경각 안 헌 사람은 그거 그 각(覺)이 아니다” 이래 버리고 말면 될 것이냔 말이다. 그런 것을 듣고 믿고 또 차서(次序)를 알고 그래야사 중퇴(中退), 물러가지를 않고 타락을 않지. '그만 한번 깨달으면은 그만 구경각이다. 다시는 뭐 증(證)이 없고 무슨 그래야 된다'고, '그게 각(覺)이다' 아! 구경각(究竟覺)은 그렇지.

그러면 학자가 인자 처음 해 나가다가 처꺽 그 무슨... 만공 큰스님도 종을 치는디, 종소리에 땅 땅 땅 땅 땅 치는디, 아! 그만 확철대오를 했네. 아! 대오(大悟)를 했지마는 그 대오가 옳은 대오인지, 그른 대오인지 어디 큰스님네한테 가서 한번 법전(法戰)을, 한번 탁마(琢磨)를 해봐야 할 턴디, 해본 일은 없고, 밤새드락 그 깨달은 경계가 환허니, 뭐 진대지(盡大地)가 광명중이라. 대지가 그대로가 광명중이여. 아무것도 없고 광명중이여. '하! 이거 이것 참! 이게 대도로구나. 이게 참 깨달은 도리로구나' 혼자서 담뿍 안고는 밤새드락 그 도리를 수용했네.
그것이 각(覺)이여? 그 훤헌 그게 각(覺)일 것인가 말이여? 그렇지마는 밤새드락 그 경계를 가지고 계셨다는 거여. 거기 말이 많이 있지마는 그것 다 내가 언제 헐 도리도 없고, 무자(無字) 해 나가는 가운데에다가 조금 넣었지.


'이게 상방(賞棒)이냐, 벌방(罰棒)이냐?' 이것은 누가 묻냐 하면은 이 몽산 화상(蒙山和尙)이 묻는 것이여 지금은.
'자물쇠 끌르는 열쇠라고 허는 학자도 있고, 일체 지해 상량견을 끊는 칼이라고도 헌 자가 있으니, 이게 참말로 그러냐? 이놈 너 삼십방(三十棒)을 줄 것이다. 내가 삼십방을 준다마는 이게 뭔 방(棒)이냐? 상방이냐, 벌방이냐?' 요까지.

직요도득제당(直饒道得諦當)이라도, 네가 바로 넉넉히 이걸 일러. 삼십방이 이 방(棒)이 무슨 방이라는 걸 바로 이르드래도, 넉넉하게 잘 일러. 제당(諦當) 하드래도 이재심처(爾在甚處)하야 견조주(見趙州)오? 네가 어느 곳에서 조주 무(無)라고 헌 뜻을 봤냐 그 말이여. 조주 무(無)라고 하는 뜻은 그것은 삼십방을, 능히 일러도 못 본다 그 말이여. 보들 못혀.

요새 또 이르되, 이게 절목(節目) 떨어진 것이여. 요새 또 이르되, 조주(趙州)는 고불(古佛)이라. 조주는 옛 부처다. 조주가 그대로 선사(禪師)가 아니라 옛 부처여. 안광(眼光)이 삭파사천하(爍破四天下)다. 조주의 눈 광명은 사천하를 혁파한다. 사천하를 그만 눈 광명에 떨어져 버려, 사천하(四天下)가.
사천하가 보통 우리 이 지구성(地球星) 천(天)만 아니여. 사주세계(四洲世界) 천(天)이여. 동불바제(東弗婆提) · 서구다니(西瞿陀尼) · 남섬부주(南瞻部洲) · 북구로주(北俱盧洲), 사천하 천이다 그 말이여. 사천하를 혁파하는 조주(趙州) 안광(眼光)이여.

관기도개무자(觀其道箇無字)컨댄, 무(無)라고 이른 낱 그 무자의지(無字意旨)를 보건댄, 그 무자의 성명(性命)이란 건 무자의지(無字意旨)다 그 말이여. 무자의 의지가, 성명(性命)이—성명이라는 것은, 무자의 의지가 낙재본색납자수리(落在本色衲子手裏)다. 본색납자의 손 속에 떨어져 있다 그 말이여.
본색납자(本色衲子)라는 건 누구를 의미한 것인가? 본분납승(本分衲僧)은? 그 여기에 지금 의미를 갖다 헐 것 같으면은 이 여기에는 본분납승이 누구냐 하면은 조주(趙州)다 그 말이여, 조주.
조주 스님의 무(無)가 조주 스님의 뜻이거늘—조주 뜻이 딱! 무자(無字)인디, 그 무자가 조주 스님 뜻인디, 조주 스님 뜻을 본분납자의 손 속이라고 그렇게 헌 말이여. 본분납승의 수리(手裏)에 떨어져 있거늘, 조주무자의 의지는 조주 스님께 지금 딱 들어 있거늘, 그 말이여.

유일등인(有一等人)은, 요새 일등인은, 일등(一等)이란 사람은, 유일등(有一等) 일등헌 사람이 있어서는, 일등은 누구를 일등이냐 하면, 일등은 참선허는 학자를 일등이락 해야. 참선허는 학자도 활구학자를 일승이라고 한다 그 말이여. 활구학자가 아니면 일승학자 못되아.
일등인(一等人), 일등학자는 저 무자상(無字上)을 향(向)해서 토자미(討滋味)하나니, 무자에 가서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무, 무’만 하고 있다 그 말이여. ‘무, 무’ ‘무, 무’ 무(無)가 무슨, 무가 무슨 뜻이여?

무(無)는 조주 뜻이 탁! 틀어백혀 있는데 조주 뜻을,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헌 것이 조주 뜻 찾는 것이다 그 말이여. ‘어째서 조주 스님은 무라고 했는고?’ 이렇게 의단(疑團)을 갖춰 가야 한다 그 말이여. ‘어째 무라고 했는고?’ ‘무(無), 무(無)라니?’ 여기 나와. 그렇잖아도 나오는디,

있다 없다, 무슨 유무(有無) 중이다, 무슨 비무(非無) 중이다, 그것 다 때려치워 버리고 ‘조주는 어째 무(無)라 했는고?’ 있다고도 않고, 없다고도 않고, 무슨 뭐 뭐 크다고도 않고, 적다고도 않고,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이 가장 가깝다 이게여. 전부, 경허 스님, 혜월 스님, 만공 스님, 전부 한국 도인네가 이렇게 다 말씀을 했다 그 말이여. ‘어째서 무라 했는고?’
‘없다!’고 찾지 말고 ‘무(無)!’ 바로 해 나가는 것이 참으로 그 가깝게 가르킨디 제일 옳다. 조주 스님 근본 뜻을 참구해 나가는 것이 옳다. 이게 가장 영리 학자는, 영리한 일등학자는 깨닫기가 그렇게 쉽다. 그렇게 가깝다 이게여. 큰스님네 헌 말씀을 내가 들어 헌 거여.

무자(無字)를 향(向)해서 ‘무, 무’만 허고 찾고 있으니 구피변(口皮邊)이다 이게여. 입 껍데기로 찾는 것이다 이게여. '이뭣고?'도 ‘이뭣고, 이뭣고’ 입 껍데기로만 '이뭣고, 이뭣고'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여. '이뭣고~?' ‘이-?’ 해 놓고 보니 뭐냔 말이다?

기불둔치평생(豈不鈍置平生)이냐? 어찌 평생을 둔치, 입 껍데기로만 돌라—공부헌다고 허다가서는 공연히 앉은 자리 아깝고, 참선 자리 아깝고, 좌복 아깝고, 밥 아깝고, 시주것 아깝고—그러고만 있어? 그 뭐 차라리 차라리 그 지랄병을 허지, 어디 가서 앉은뱅이 노릇을 허지, 그까짓 참선을 헐 것이여?

참말로 알 수 없는, 그 천성(千聖)도 불식(不識) 도리를 갖춰라.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 석가도 오히려 알덜 못한 도리를 갖춰라. 천성이 입을 벽상(壁上)에 건 도리를 그대로 갖춰 가지고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갖춰 나가거라. 그 의심을 갖춰 나가지 않고는 못쓸 선(禪), 못쓸 것이 되어 번지고 만다. 일등인켕이는 하등인도 안 된다.

오늘은 ‘무, 무’ 입 껍데기로만 돌아 비추는 거 그것은 안 되니 그 의단을, 어쨌든지 활구(活句)는 의심 하나뿐이니깐 의심을 갖춰라 하는 그 대문(大文)에, 평생을 네가 그르쳐 버리고 말 것이니까 한번 일등인이 되어라. 옳은 참선을 해라. 여까장. 둔치평생(鈍置平生)까장. 요 밑에 나가서 인자 '없다'고 헌 놈이 옳으냐, '무(無)' 헌 놈이 옳으냐 헌 것이 갈려져. (26분39초~53분) (끝)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