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정진(요중선)2024. 2. 14. 16:59

§(119)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참다운 신심(信心) /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話頭)가 들어질 수밖에 없다.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다 /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자기의 소임을 성심성의껏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진리에 적합한 포교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무언동자암차허.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菩薩道)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 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布敎) 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19)—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 19분.

 


철저한 신심(信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 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 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佛菩薩)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大道)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話頭)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禪房)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 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精進)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參禪)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는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佛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佛弟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菩薩道)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 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布敎) 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解脫)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 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 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도리가 다르냐 틀리냐?” 이렇게 만공 스님께서 조실 스님께 물으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32분38초~51분1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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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 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 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칠통을 타파(打破) ; 타파칠통(打破漆桶). 무명(無明)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중생의 마음을 타파하여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승속(僧俗) ; 스님[僧]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燎原 화톳불·태울·들불 요(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보살도(菩薩道) ; ①보살의 수행. 보살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 깨달음에 이르는 도. ②대승불교.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게송)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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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15. 6. 20. 11:08

 

 

 

§(119)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利養)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 6분.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利養)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답시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면 빠진 사람을 건지기커녕 자기까지 빠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을 제도할 원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급하고, 잠을 자는 일도 급하고, 세속에 우리가 맡은 모든 일들이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망각(忘却)하고 오직 자식 생각만을 하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는 우선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고 자식 불을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효자라 하더라도—그 효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부모만을 위하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지라도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발등의 불을 쪼끔 오래 놔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시 뜨겁다가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발의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이고, 권리를 많이 누리고, 명예를 하늘 닿도록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은 나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을 때 한 톨도, 한 치도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죽어갈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명예를 얻느라고 얻은 죄업(罪業), 재산을 얻느라고 지은 죄업, 권리를 누리느라고 지은 죄만을 산더미처럼 지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통곡을 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이요, 정법(正法)인 것입니다.(21분27초~27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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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양(利養) ; 재물을 탐하는 일.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우선(優先)하다 ; (...보다, ...에) 딴 것에 앞서 특별하게 대우하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5. 14. 14:42

§(119) 신심, 분심, 의심(삼요) / 참선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진실한 포교(布敎)란?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22분.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여법(如法)하게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한 믿음이 서야 하고, 철저한 의심이 있는 곳에 큰 분심이 일어나고, 철저한 믿음과 큰 분심이 있는 곳에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는 대의정이 돈발(頓發)하는 것입니다.
대의정(大疑情)은 오직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의 밑바탕 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방에 살아도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하지 아니 한다면 10년 20년을 선방에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돈과 쌀을 쌓아 가지고 50년 60년을 절을 왕래하고 선방을 드나든다 하더라도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점심밥 싸 가지고 경치 좋은 관광지 왔다갔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철저한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 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의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汗漫)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 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 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 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 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 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른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 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도리가 다르냐 틀리냐?” 이렇게 만공 스님께서 조실 스님께 물으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29분53초~51분1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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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핏대를 세우다 ;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몹시 화를 내거나 흥분하다.
*한만(汗漫)히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소홀하거나 무심하게.
*대신(代身)하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그것의 역할이나 책임을 떠맡아 하다.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부양가족(扶養家族) ; 자기가 돌보고 있는 가족.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식이란 말이다。불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목숨(慧命)을 이어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의 불길 ; ‘매우 빠르게 번지는 벌판의 불길’이라는 뜻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퍼지는 세력이나 기세를이르는 말. *요원(燎原 화톳불·들불 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게송) ‘有眼石人齊下淚  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Posted by 닥공닥정
화두(공안)2015. 5. 12. 11:01

§(119)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경봉 스님과의 일화 / 참선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 / 이 세상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 19분.

 


방금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조(馬祖) 스님은 중국의 육조(六祖) 스님의 제자, 회양(懷讓) 스님의 제자로서,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라.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하는 달마 스님께서 그렇게 예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후대에 가서 마조라고 하는 대도인(大道人)이 나와 가지고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 정법을 천하에 선양한다’고 하는 뜻으로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조 스님께서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원상,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이 둥그라미 안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겠다” 이렇게 어떤 승려, 도를 배우는 승려 앞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승려는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딱 앉았습니다. 마조 스님은 주장자로 그 승려를 한 대 후려팼습니다.

그 승려는 탁! 마조 스님을 쳐다보면서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은 입을 딱 다물고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이 공안(公案)은 마조원상(馬祖圓相)이라 해서 종문(宗門) 중에 공안 가운데에 최고 가는 공안으로 천년을 두고 선종 문중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공안은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이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경봉 스님께서, 지금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계신 경봉(鏡峰) 큰스님께서 처음에 깨달으셨을 때, 바로 마치 그때 거기에 당도하신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경봉 스님보다는 훨씬 연세가 아래였었지마는 바로 이 마조원상의 공안을 경봉 스님께 물어 가지고,
처음에는 경봉 스님께서 그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켔습니다.
거기에서 조실 스님은 “당장 이 송장을 끌어 묻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거기에서 한참 눈을 웅큼하게 해 가지고 계시다가 다시 경봉 스님께서 “이제 알았다. 다시 물어라” 이렇게 해서 그때 보시니 아까의 경계와 판연히 달라서 경봉 스님을 산골짜구니로 끌고가 가지고 이 공안을 다시 물으니까 여지없이 경봉 스님께서 일르셨다고 한 말씀을 금방 법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 선원에서 공부를 하고 오신 납자스님네도 여러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신도 보살님 여러분들도 우리 용화사에서 지내신 분 또 다른 선방에서 공부를 하시고 오신 보살님네들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동안 석 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시고 오신 분들입니다.

해제가 되면 으레이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회상으로 모여 가지고 그동안에 공부했던 것을 탁마하고, 잘못했던 것을 대중 앞에 참회하고, 그렇게 해서 한철동안 지낸 공부를 총결산 하고, 반성하고 참회해서 다시 새로운 정신을 가다듬어서 공부를 해왔었습니다.

이 가운데에 참여하신 청신사 청신녀 그리고 비구 비구니 여러분들,
과연 지난 삼동(三冬) 안거 동안 정진을 하셔서 투철히 깨치신 바가 있으면 이 마조원상, 원상을 그려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한번 자신 있게 일러 보시기를 바랍니다. 전강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수응(酬應)을 해 드리겠습니다.

“스님께 못 이르겠습니다”
“환귀본처(還歸本處)하라. 이르지 못할 것을 뭐하러 나왔느냐”

이 공안은 벌써 이를라고 생각을 움직이면 그르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사자는 교인(獅子咬人)하고 한로는 축괴(韓獹逐塊)’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한테 돌멩이를 던지면 개는 그 돌멩이가 무슨 명태 대가리나, 고기 덤뱅이 인줄 알고 그 돌멩이를 물으러 우르르르 쫓아가는 법이고, 사자는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는 쫓아가지 아니하고 돌멩이를 던진 그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답시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면 빠진 사람을 건지기커녕 자기까지 빠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을 제도할 원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급하고, 잠을 자는 일도 급하고, 세속에 우리가 맡은 모든 일들이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망각하고 오직 자식 생각만을 하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는 우선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고 자식 불을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효자라 하더라도—그 효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부모만을 위하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지라도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발등의 불을 쪼끔 오래 놔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시 뜨겁다가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발의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이고, 권리를 많이 누리고, 명예를 하늘 닿도록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은 나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을 때 한 톨도 한 치도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죽어갈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명예를 얻느라고 얻은 죄업(罪業), 재산을 얻느라고 지은 죄업, 권리를 누리느라고 지은 죄만을 산더미처럼 지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통곡을 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지금 마조원상 법문을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여러분 앞에 물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내가 오늘 이르지를 못했으니 당장 집에 가서 경전을 뒤적거리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뒤적거려서라도 기어이 이것을 찾아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사 공안이 적혀있는 염송(拈頌)이나 무문관(無門關)이나 그 밖의 벽암록(碧巖錄) 같은 어떠한 어록을 뒤적거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보지를 못했다면 찰나 간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이 가장 지혜 있고 바른 수행인인 것입니다.

공안은, 화두는 절대로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더듬어서 알아맞출 수도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었다든지 사량심으로 알아졌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요, 중생의 번뇌 망상으로 얻어진 것이라, 망상에 결국은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기 좋게 생긴 사람을 만들어 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사람이 아니고 흙이나 석고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아무리 이쁘게 조각을 해 놨어도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11분49초~31분)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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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馬祖) 스님, 육조(六祖) 스님, 남악회양(南嶽懷讓)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〇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 조실 스님과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刊) p24 - 26.
내가 25세 때 덕숭산 금선대에 계신 만공 스님을 처음 찾아가서 예배하니 나에게 묻기를 “심마물이 임마래오(甚麽物恁麽來)”하시었다. 내가 다시 예배하니 또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어?”하시었다.
이번에는 내가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니 만공 스님은 그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 “허! 저렇게 주제 넘는 사람이 견성했다해. 네 습기(習氣)냐, 체면없이 무슨 짓이냐?” 이러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나를 보시기만 하면 비웃으며 “저 사람, 저런 사람이 견성을 했다 하니 말세 불법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번번이 조롱을 하시었다.
나는 차츰 불안해지다가 분심이 났다. 선지식이 저러실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핏기가 하나도 없어 앉으면 잠이 와서 앉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말랐다.

그래서 운동대를 붙잡고 서서 ‘에라!  한바탕 해봐야겠다.  그까짓 놈의 몸은 하다가 죽으면 그뿐이지’하고,
나는 만공 큰스님의 말씀을 믿고 그 회상에서 하안거 중 판치생모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하다가 반 철이 지날 무렵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 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확 드러났다.

그 길로 조실 방에 들어가 보월 스님 앞에 원상을 그려 놓고 묻기를 “마조원상 법문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入也打不入也打) >고 하였으니 조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하니 보월 스님은 곧 원상을 뭉개셨다.

나는 보월 스님께 말하되 “납승을 갈등 구덩이(葛藤窠臼)속에 죽이신 것입니다. 마조방하(馬祖棒下)에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월 스님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고 만공 스님 처소에 와서 다시 묻되,
“마조원상 법문을 보월스님께 물었더니 원상을 뭉개었습니다. 이렇게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하였더니 만공 스님은 도로 나에게 묻되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하시었다.

내가 답하되, “큰스님께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하였더니,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초안(初眼)이에게 주시면서 “자네가 묻게”하시니 초안 스님이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해서, 내가 초안이를 보고 여지없이 일렀다.

그러나 학자를 위해서 설파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점검하시되,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가 있겠느냐(誰知更有夜行人)”하셨다.

그런 다음,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과의 서신문답과 기타 중요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시니,
내가 곧 엎드려서 허부적 허부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 만공 스님께서 “옳다. 옳다!(善哉善哉)” 인가하시고 곧 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 주시되,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이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이라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한데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이로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수응(酬應 응대할 수,응할 응) ; 남의 요구에 응함.
*사자는 교인(獅子咬人)하고 한로는 축괴(韓獹逐塊) ;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느니라’
*咬(교)물다. 깨물다. *獹(로)개 이름. 전국시대 한(韓)나라 좋은 개 이름. *逐(축)쫓다. *塊(괴)흙덩이.
[참고] ①《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1권 ‘양주 왕경초 상시(襄州王敬初常侍)’에 '師子齩人  韓獹逐塊'
②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獅子咬人  韓獹逐塊'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9,47에서)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우선(優先)하다 ; (...보다, ...에) 딴 것에 앞서 특별하게 대우하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조사어록(祖師語錄) ; 어록(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Posted by 닥공닥정
발심 자신(自信)2015. 5. 10. 14:13

 

 

§(119) 내 공부는 아무도 내 대신해 줄 수 없다 /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참선법을 만났을 때 철두철미 정진해서 생사해탈 해야.

어떠한 불보살과 성현과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내가 공부해 나가는 방법은 일러주실 수 있지만, 내 대신 공부는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효성스런 제자나 상좌나 아들과 딸이라 하더라도 내 대신 이 공부를 해 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대신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 엄숙한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만났으되 목숨을 바쳐서 철저히 수행을 하지 아니 한다면 마치 보배가 많이 있는 산속에 들어가서 보배를 찾아서 얻지를 아니하고 빙글빙글 서성대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 12분.


경신년(庚申年)을 맞이해서 처음으로 관음재(觀音齋) 법요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지나간 신해년(辛亥年 1971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10월 15일 결제날 설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갑인년(甲寅年 1974년)에 열반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는 10년 전에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생생한 육성으로 생존해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그 법문을 감격스럽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은 전국 방방곡곡에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들이 녹음 카세트(cassette)를 통해서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법문을 듣고 또 들을수록에 조실 스님 생존하셨을 때 왜 직접 친견을 못했던가? 또 친견하신 일이 있는 분도 한번이라도 더 친견을 못했던가? 또 생존하셨을 때 좀 더 열심히 정진을 해서 왜 그때 힘을 얻지 못했던가?
이렇게 해서 한탄을 하고 후회를 하신 분들이 수없이 많이 계신 것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부모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등한히 하고 불효를 하고, 그러다가 부모 돌아가신 뒤에사 살아 계실 때 효도 못한 것을 한탄을 하고 후회를 하는 사람이 유사 이래(有史以來)로 그러한 말이 전해 내려옵니다.

조실 스님 살아 계실 때에 그때 철저히 정진을 못하고 득력(得力)을 못했다고 한탄하는 분이 지금 적지 않지만, 앞으로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마저도 듣기 어려운 때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녹음기에 녹음되어 있는 것은 앞으로 몇 해를 더 음성이 변하지 않고 존재할런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마저도 듣지 못할 때, 그때는 참으로 무슨 법문을 듣고 우리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서 활구참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직까장은 다행히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마는 오늘 이럭저럭, 내일 이럭저럭, 금년 봄을 이럭저럭, 금년 여름을 그렁저렁 지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다보면 우리는 차츰 늙어가고 조실 스님 법문마저도 녹음을 통해서나마 듣지 못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누구를 붙잡고 한탄을 할 것인가?

세월은 흐르는 화살처럼 흘러가고, 우리는 하루하루 기력이 떨어져 가며 머리에는 흰머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 공부는 내 자신 외에는 아무도 내 대신(代身)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어떠한 불보살과 성현과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내가 공부해 나가는 방법은 일러주실 수 있지만, 내 대신 공부는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효성스런 제자나 상좌나 아들과 딸이라 하더라도 내 대신 이 공부를 해 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대신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 엄숙한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원래로 없다’고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몸을 받아난 이상 마침내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을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이 몸을 잃으면 다시 어느 생에 사람의 몸을 다시 받을 것인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도윤회(六道輪廻)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 사바세계보다는 저 하늘나라는 훨씬 편안하고 즐겁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다고는 하되 거기에서는 도(道)를 닦을 수가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즐겁고 편안해서 도를 닦을 필요도 없고 도를 닦을 마음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천당(天堂)에 한번 올라가서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또 그것도 괜찮지만, 천당에서 복을 받을 만큼, 자기가 지어 놓은 만큼 다 받으면 다시 인간 세상이나 축생이나 지옥에 떨어지고만 말기 때문에 천당에 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안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축생이나 지옥이나 귀도(鬼道)에 떨어지면 너무 괴로워서, 지옥에는 너무 지옥고(地獄苦)가 괴로워서 도를 닦을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고, 축생이 되면 어리석어서 법문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지금 부처님 열반하신 뒤 3천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서 말세(末世)라고는 하지만, 과거에 무슨 복을 지었고, 무슨 수승한 인연을 지었기에 금생에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 법문인 참선법(參禪法), 이 정법(正法)을 만나게 되었겠습니까.

정법을 만났으되 목숨을 바쳐서 철저히 수행을 하지 아니 한다면 마치 보배가 많이 있는 산속에 들어가서 보배를 찾아서 얻지를 아니하고 빙글빙글 서성대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쌀을 구해서 솥에 밥을 지어서 맛있게 지어놨지만 그 밥을 그릇에 퍼서 상에 놓아야 하고, 상에 차려놨지만 숟갈로 떠야 하고, 숟갈로 떴지만 입에다 떠 넣어야지, 입에다 떠 넣으되 그것을 잘 씹어서 삼켜야만 배가 부를 것입니다.

입에다 넣었다고 해서 도로 토해 내버린다면 배가 부를 까닭이 없고 그것을 잘 저작(咀嚼)을 해서 삼켜서 흡수를 해야만 비로소 피가 되고 살이 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몸 받아서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나서 활구참선을 배우고 듣고 했다하되, 정말 온갖 정성과 힘을 기울여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소홀히 지내 보내지 아니하고 철두철미 정진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깨달음을 얻으며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期)하겠습니까.(처음~11분4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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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카세트(cassette) ; ①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를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할 수있도록 만든 녹음기. 원어—카세트 테이프 리코더(cassette tape recorder).
②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 1963년 네덜란드의 필립스사가 개발하였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법문에서)
*대신(代身 대신할 대,몸 신) ; 어떤 대상과 역할이나 책임을 바꾸거나 그것을 떠맡아 함. 또는 그렇게 된 새로운 대상.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천당(天堂) ; 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귀도(鬼道) ; 아귀(餓鬼), 야차(夜叉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을 괴롭힌다는, 모습이 추악하고 잔인한 귀신), 나찰(羅刹) 등의 세계를 말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기(期)하다 ; 이루어지도록 기약하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