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깨달음'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3.12.22 §(세등35) 활구참선을 해야 / 생사윤회의 근원은 무명(無明), 무명은 바로 번뇌 망상 /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은산철벽,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뭣고?' 1
  2. 2022.07.10 §((301)) 깨달음은 아는 것이 아니다 / 아는 것이라면 공안을 해설하는 강의를 한다면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 /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고, 배울 수가 없는 것.
  3. 2021.04.13 §((054)) 활구참선과 사구참선.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다.
  4. 2021.03.21 •§•((119)) (게송)명월근촌저~ / 묘리(妙理)를 붙일수록에 진흙 구렁텅이에 점점 더 빠지고 점점 더 들어간다 / 찾다가 죽는 것이 공안법이여. 참선 공안법.
  5. 2020.12.09 §((405)) (게송)외외낙락적나라~ / 부처님께서 항상 부르시는 노래,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 ‘이뭣고?’ 일념 단속함으로 해서 해탈도를 증득.
  6. 2020.05.05 §(465) 영훈선사와 귀종선사 /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다.
  7. 2019.04.01 §(124) 최상승법은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 /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 선방 /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
아는 것과 깨달음2023. 12. 22. 10:06

§(세등35)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은 무명(無明), 무명은 바꿔서 말하면 분별사량심인데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 그래서 참선을 한답시고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지는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을 해서 어찌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은산철벽(銀山鐵壁),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송담스님(세등선원No.35)—1981(신유)년 하안거 해제(81.07.17.음) (세등35) (아는것과 깨달음)

 

약 10분.


요사이 일본(日本)에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이 한국에 흘러 들어와 가지고 일부 거사(居士)들이 그러한 식에 참선을 하고, 그러한 식에 참선을 자꾸 학생들에게 모다 가리키고 해 가지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삿된, 못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리선은 따질 것이 있고, 알아 들어갈 것이 있고, 더듬어볼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며칠 동안 이리저리 해보면 그럴싸한 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해보면 심심치 않고 무엇인가 공부가 나날이 되어간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어서 그 선생한테 가서 일르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 하나를 주어서 또 주면 그걸 가지고 이리저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서 그럴싸한 무슨 결론 얻어 가지고 가서 말을 하면 또 다른 화두를 일러주고 해서 다섯 개, 열 개, 스무 개, 이런 식으로 해서 자꾸 따져 들어간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와서, 가끔 와서 인가(印可)를 해 달라고 오는 학생 청년들이 있는데, 도저히 이것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옴 마니 반메 훔'을 하고 '고왕경(高王經)'을 읽을지언정, 이러한 죽은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위(旣爲)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게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하는 이놈이 무엇고?'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하는 사람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그 화두 하나만을 정말 간절한 의심으로 오직 한결같이, 분별심으로 따지지 말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가는 것입니다.

'따지는 것이 오히려 졸음도 안 오고 재미도 있고 해 보면 무엇인가 할 것이 있고 씹히는 것이 있어서 심심치 않은데 어째서 따지지 말라고 합니까?'
우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根源)이 무엇이냐 하면은 무명(無明)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고, 무명이라는 것이 다시 말을 바꿔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인데, 분별사량심이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인데, 어찌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 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의심날 것도 없고 상식적인 얘기고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긴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따지고 있느냐 그 말이여.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그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가리켜줄 수 있는 것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배와서 아는 것이여?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바르게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거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앞으로 나아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누워서도 '이 뭣고?'
밥을 먹을 때도 '이 뭣고?'
옷을 입을 때에도 '이 뭣고?'
똥을 눌 때도 '이 뭣고?'
일을 할 때도 '이 뭣고?'
산을 보아도 '이 뭣고?'
새소리, 물소리,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해 가는 것이여.


견색비유색(見色非有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녹음 끊김)

.....알 수 없는 의단(疑團) 뿐이여.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라.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개 소리가 듣되 개 소리가 아니여. 어찌 '저것이 개 소리다' '저것은 새파트 소리다' '저것은 삽살이 소리다' '저것은 똥개 소리다' '저것은 기차 소리다' '기차 저것은 디젤 기관차다'
어찌 그러한 분별심(分別心)을 계속 내서 가지에 다시 가지가 뻗고, 잎에 다시 잎이 뻗고, 뿌리에 다시 뿌리가 뻗어서 끊임없이 생사(生死)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냐.

산을 보되 산인 줄을 모르고, 꽃을 보되 꽃인 줄을 모르고, 개 소리를 듣되 개 소린 중을 모르고, 기차 소리를 듣되 기차 소린 줄을 모르고, 누가 나를 칭찬하되 좋아헐 중도 모르고, 누가 나를 비방(誹謗)하되 썽낼 줄도 모르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온갖 색상(色相), 온갖 소리에 걸리지 아니할 때[色聲不礙處],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라, 바로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게 정진을 해 갈 때 어찌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할 것인가? (37분25초~46분3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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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참고]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2분10초)
공안(화두)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뭣고?'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참선이 지금 일본으로부터서 수입이 되어가지고 많은 지성인들이 그러한 참선을 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7분41초~79분50초)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기위(旣爲) ; 기이(旣已 : 이미. 벌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 자기 본분의 소식, 궁극적인 진실을 가리키는 선종의 화두이다.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미생면목(父母未生面目)이라고도 한다.

[참고] 『선문염송·염송설화(제15권)』 (5) (동국역경원) 제597칙 ‘일격(一擊)’ p375~378. 『전등록(제11권)』 (동국역경원) ‘등주 향엄 지한 선사’ p718~720.
대혜(大慧)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향엄(香嚴) 화상이 백장(百丈) 스님 문하에 있을 때 총명 영리하고 본 것, 들은 것이 많았으나 여러 해를 참선(參禪)해도 이루지 못했다. 백장 스님이 천화(遷化)하고 나중에 위산(潙山)으로 가니, 위산 스님이 묻기를 ‘듣자 하니 그대는 백장의 회상에 있을 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는데, 이는 그대의 지식과 상념(想念)일 뿐이다. 그대의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일로써 한 구절 대답해 보라[父母未生時 試道一句看]’ 하였다.
선사는 위산의 이 한 물음을 받자 당장 앞뒤가 막막해져서 곧장 방으로 돌아가 평소에 읽었던 문자를 뒤적이면서 대답거리를 찾았으나 한 구절도 알맞은 대답거리를 구하지 못해 끝내 스스로 탄식하되 ‘그림 속의 떡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없구나[畵餠不可充飢]’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주 위산에게 설파(說破)해 주기를 청했는데 위산은 ‘내가 만일 그대에게 설파해 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에게 원망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파해 줄 수 없다(전등록 : 내가 말하면 나의 견해일 뿐이니, 그대의 안목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고 하였다.
하는 수 없어 평생에 모은 문자와 서적들을 끌어내다가 불사르고 다시는 불법도 배우려 할 것 없이 되는 대로 지내기로 하고, 이에 위산에게 하직을 고하고 곧장 남양(南陽)으로 가서 충(忠) 국사의 유적에 참배하고 거기에 머물렀다. 어느날 초목을 베다가 기와 조각을 주워 던진 것이 대나무에 맞아 소리가 나자, 자신도 모르게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콧구멍을 만났다.(깨달은 뒤에 다음과 같이 송했다)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處處無蹤跡 聲色外威儀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한번 쳐서 알든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고 다스리지 않게 됐네.
행동하는데 옛길을 드날리니 초췌한 처지가 되지 않는다.
곳곳에 자취가 없고 빛과 소리 밖의 위의(威儀)로다
제방(諸方)의 도를 아는 이들은 모두가 최상의 근기라 하네.

그때의 경지는 마치 어두운 데서 등불을 만난 것 같고, 병든 이가 의원을 만난 것 같으며, 가난한 이가 보물을 얻은 것 같고, 아기가 엄마를 만난 것 같았다.
마침내 목욕 분향(焚香)하고 멀리 위산 쪽을 향해 절을 하면서 찬탄하되 ‘화상의 대비하신 은혜가 부모보다 낫습니다. 그때 만일 제게 설파해 주셨다면 어찌 오늘의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게송) '견색비간색~' ;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야부 게송 참고.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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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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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22. 7. 10. 21:11

§((301)) 부처님과 아란존자의 전생. 아란존자의 등창 수술 일화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 아는 것이라면 공안(公案)을 해설하는 강의를 한다면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 /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는 것이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 부처님과 조사는 깨닫는 방법을 가리키셨다.

**송담스님(No.301)—1986년(병인년) 하안거 결제 (용301) (아는 것과 깨달음)

 

약 15분.

 


부처님의 그 시자(侍者)를 지낸 아란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 태어나서, 아란존자가 스물다섯에 출가(出家)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시운다섯(55세)이시고 아란존자는 스물다섯에 출가했는데, 그 아란존자는 속가(俗家)로는 부처님 사촌동생이시고, 출가해 가지고서는 부처님 제자가 되셨는데,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설하신 모든 법문(法門)을 한 귀절도 빠짐없이 조르르르 다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涅槃)하신 뒤 제일회(第一會) 결집(結集)을 할 때, 아란존자가 그 부처님의 법문을 전부 외어서 그래 가지고 그 결집을 했던 것입니다.

그 아란존자(阿難尊者)는 과연 어떻게 해서 그렇게 기억력(記憶力)이 좋아 가지고 부처님 일대(一代) 소설(所說)을 다 그렇게 외워 바칠 수가 있느냐 하면,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실 때에 얼마만큼 골똘하게 정성스럽게 청법(聽法)을 했냐?' 좋은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아란존자가 등창이 났었는데 기파(耆婆) 대감이 그 등창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술을 하기 위해서 아란존자를 기둥에다가 묶어 매고 여러 사람이 팔다리를 잡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란존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그 묶지 말고 그냥 수술을 해도 좋다고 하니까, 기파 대감은,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칼로 등을 째는데 아무리 참을라고 한다고 해서 그 아픈 것을 참을 수가 없고, 몸을 움직이게 되면은 수술하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으니까 묶어 매야 합니다" 헌게,
"묶어 매지 말고, 내가 부처님 설법하실 때, 부처님 설법(說法)을 들을 때에 그때 내 등을 수술을 하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파 대감이 부처님 설법할 때에 아란존자 등으로 가서 그 등 수술을 마쳤습니다.
법문이 다 끝난 다음에 아란존자가 기파 대감을 향해서, "아, 내가 법문 들을 때 수술을 하라고 했는데 왜 수술을 안 했소?" 하고 물어보니까, "수술은 이미 해 마쳤습니다" 헌게, "아, 그래야" 하고.
얼마나 골똘하게 부처님 법문을 들었으면, 칼로 등을 째고 수술을 하고 고름을 짜낸대도 그 아픈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만큼 골똘히 들었기에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설하신 법문을 한 귀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다 기억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 아란존자와 또 부처님과의 전생(前生)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저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 전에는 아란존자와 부처님과는 도반(道伴)이었었습니다.
함께 도(道) 닦는 아주 다정한 도반이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정말 아주 철저하게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셔서 온전히 아주 활구참선만을 하셨는데, 아란존자는 자꾸 경(經)을 좋아했습니다. 경 보기를 좋아하고 경 외우기를 좋아하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이랬습니다.

그것이 생(生)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아란존자와 부처님은, 부처님 태어나실 때마다 아란존자도 항시 같이 이렇게 태어나서 또 도를 닦고 그렇게 여러 생을 그렇게 내려오셨는데,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란존자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설법하신 것을 기억을 해 가지고 결집(結集)을 하는 그러한 소임을 맡으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크게 보면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삽삼조사(卅三祖師)가 전부 다 과거에 다 불보살이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갖다가 조불양화(助佛揚化)하기 위해서 짐짓 그 제자의 탈을 쓰고 제자로서 나타나서 부처님의 법(法)을 전통하신 것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지마는,
같은 도반으로서 같이 공부를 시작했어도 '그 사람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을 하느냐? 활구참선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철저히 하느냐?'

여기 가서 이 법문 듣고 저기 가서 저 법문 듣고, '금강경(金剛經)이 좋다' 하면 금강경을 독송(讀誦)하고, '법화경(法華經)이 좋다' 하면 법화경을 독송하고, '유마경(維摩經)이 좋다' 하면 유마경을 독송하고, '무엇이 좋다' 하면 이것도 저것도 하니까, 이 고루고루 하면 다 참 좋은 걸로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이 도(道)는, 특히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이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는 외골수로 한 길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옴막 다 바쳐서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열한 근기로 짧은 인생에 있어서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들었습니다마는,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다, 큰 의심 아래 크게 깨닫는다. 적게 의심하면,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을 가지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을 전혀 아니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법문이 있습니다.

지끔 참선이 매우 널리 그 관심을 받게 되어서 승속(僧俗) 간에 이 참선에 대해서 모다 관심을 갖고 모다 하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따른 많은 책도 나오고 그랬습니다마는, 이 활구참선은 정말 제일 간단하고 하기가 쉬운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천칠백 공안을, 전부 다 이 공안(公案)이 생겨날 때에는 부처님과 조사(祖師) 간에 그 법(法)을 거량(擧揚)해서 그 법을 거량하는 그 기연(機緣)이, 어떠한 기회(機會)에 그 공안이 생겨났으므로, 그러한 기연을 잘 알고 또 그 공안을 이리저리 따지고 그렇게 해서 그럴싸한 어떤 해답을 얻으면 썩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재미에 팔려서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수수께끼 풀듯이 그것을 풀고, 그것을 뭐라고 대답하면 '옳다' 하고 일러주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주어서 그 공안을 가지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그 애를 써서 궁리를 하고 따져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서 '이것이다' 하고 그러면, '그러면 옳다' 그렇게 해서 또 한 공안을 통과를 하고, 또 그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열 개, 스무 개, 오십 개, 백 개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참 '누구는 오십 개가 통과했다, 누구는 백 개가 통과했다' 이래 가지고 그것 많이 통과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그걸 많이 통과함으로써 많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본인도 착각을 하고 남에게 과시를 하고, 이러한 참선이 일본에 진즉부터서 수십 년, 백여 년, 몇백 년 전부터서 일본에서는 그러한 참선이 유행을 해 가지고 헌데, 그러한 참선이 우리나라로 역수입(逆輸入)이 되어 가지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참선을 가리키고 배우고 하는 그러한 경향이 지금 유행을 하고 있는데.

이 임제종(臨濟宗) 조사문중(祖師門中)에 있어서는 차라리 아니할지언정 그러한 참선은 해서는 아니 되고, 차라리 깨닫지 아니할지언정 그러한 식에 깨달음을 요구(要求)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왜그러냐?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리(義理)로 따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다' 하고 아는 것이라면 구태여 애써서 알 것이 없고, 수십 명 수백 명을 모아 놓고 계속 공안(公案)을 해설하는 강의(講義)를 한다면 그 강의를 들은 사람은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라면 뭣 하러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하시며,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떻게, 조사 밑에 이미 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전부 다 깨달라 마쳐 버렸을 것입니다.

근데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여.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나 조사가 깨달음을 그런 식으로 가리켜서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 도가 어렵다고 하며 깨달음이 귀하다고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는 것이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면 부처님과 조사는 무엇을 하셨냐 하면 깨닫는 방법, '어떻게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렇게 도를 닦아라'
깨닫는 것은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신 부처님의 힘으로도 중생에게 가리켜서 깨닫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깨달음을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많이 들으셨고 또 이 용화(龍華) 이 법보전(法寶殿)에서 많은 법문을 들으신 분은 이미 그러한 사상이 철저해서 누가 뭐라 해도 그런 데에 흔들림을 받으시지는 않겠지만, 행여나 누가 그러한 말로써 유혹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한 생각이라도 바로 돌이켜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거각(擧却)해 나가도록.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저절로 소멸(消滅)이 되고 거기에서 확철대오할 수 있는 인연(因緣)이 성숙(成熟)되어 가는 것입니다.(9분38초~24분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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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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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21. 4. 13. 08:30

§((054)) 활구(活句)참선과 사구(死句)참선.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화두는 선지식에게 받은 본참화두 하나를 일여하게 밀고 나가야 /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다.

**송담스님(No.054)—1977년 9월 관음재일(77.09.24) (아는것과 깨달음)

 

 

약 7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활구참선은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론적으로 따지고, 경전에 있는 교리를 등용을 해서 따지고, 자기가 어떤 스님한테 들은 법문을 듣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따져서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구나! 아!'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마침내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 죽은 참선이기 때문에 영원히 해 봤자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 가운데 '화두(話頭)는 어떠한 책이나 잡지나 신문, 그러한 데에서 보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화두를 선택하지 말고 반드시 선지식에게 딱! 하나를 받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 어디서 지내가는 말로 듣거나, 책에서 봐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선택을 한 화두는 해 나가다가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 화두가 좋은가, 나쁜가?' 자꾸 스스로 그것을 혐의를 하고 의심을 해 가지고 중간에 갈팡질팡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가 크게 장애를 받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화두를 딱! 지정을 받아 가지고 한 번 받았으면은 다시는 그것을 변경을 하지 말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때까지 일여(一如)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떠한 화두라도 처음부터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곧 잘될 것 같다가 얼마 동안 해 가면 영 답답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점점 화두가 들리지 아니하면서 그 애를 먹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딴생각을 내지 말고, 잘 그 마음을 써서 한 생각 한 생각, 일 분 일 분을 법(法)답게 간절히 공부를 지어 나간다고 하면은 반드시 그렇게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치도록 애를 먹혔던 그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정말 제절로 화두가 들리면서 순일무잡하게 정진이 되어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간다 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생각 '아! 인자 되었다. 참! 좋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되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되기 마련입니다마는 그 생각이 고약한 망상 중에는 최고 가는 고약한 망상인 것입니다.

보통 때,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른 것은 뿌리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절로 없어지지마는, 공부가 한참 잘되어 갈 고비에 이르러서 '아! 참 좋다. 아! 이렇게 계속 잘되었으면' 아, 이러한 생각을 낸 것은 고비를 넘을려고 한 판에 뒷걸음질을 쳐서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 것과 같애서 그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갈 때에 그러한 생각 내는 것은 아주 타당한 것 같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최고로 고약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 둬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어도 짜증을 내지 말고, 공부가 잘되어 가도 좋아하는 기쁜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한결같이 이 화두를 들고 나가되, 잘 안되어갈 때—가슴이 답답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몸이 뒤틀리도록 괴롭고 지루하고 이럴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그 길을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하는 가운데에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고요해지고 깨끗해지면 다시 또 방석에 가서 또 정진을 하시는데.

이 화두를,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38분37초~44분5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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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21. 3. 21. 13:28

•§•((119)) (게송)명월근촌저~ / 묘리(妙理)를 붙일수록에 진흙 구렁텅이에 점점 더 빠지고 점점 더 들어간다 / 찾다가 죽는 것이 공안법(公案法)이여. 참선 공안법.

**전강선사(No.119)—1972년(임자년) 1월 관음재일 법문(송담스님, 전강선사 두 분 법문) (임자72.01.24) (전119)

 

 

약 12분.

 


명월근촌저(明月近村笛)하고  청신원사종(淸晨遠寺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풍이취객(竹風移醉客)이여  화우정유봉(花雨定遊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턱 해 놓고, 흥! 일찍이 향당(鄕黨)을 여의고, 일찍이 부모처자와 고향 향당을 여의어 번지고 발심출가(發心出家)해서 도(道)를 닦다가 대도(大道)를 통했다. 대도를 통해 놓고 터억 보니, 아! 뭐 산중에서 도 닦다가 툭 깨 버렸다.

그 깨 놓고 척 보니, 그거 참! 말로 할 수 없는 깨달은 그 경계를 설향수(說向誰)오. 어따가 더불여서 말을 해 볼꼬?
천상 바로 깨달은 스승한테나 가서 해 볼까, 해 볼 게 없다.

깨달아 놓고 보니 그 경계여. 아무 청산(靑山) 속에 산적적(山寂寂)허고 수잔잔(水潺潺)허고 강월조(江月照)허고 송풍취(松風吹)헌다.
아, 그 뭐 뭣이 어따가서 그 말할 것이냐? 뜻밖에 시(詩)가 하나 나오는데 이런 시(詩)가 나왔단 말이여. 들어보니 알 수 있나?

명월(明月)이 근촌저(近村笛)여. 달은 훤허니 밝은데, 가까운 마을에서 젓대 소리가 나는구나. 그 젓대 소리, 그 다른 가풍이 아니어.
옛날에 내가 깨닫기 전에도 들은 젓대 소리다마는 깨달아 놓고 들어본즉 젓대 소리도 각양 각이야. 깨달은 이 소리, 젓대 소리가 이놈이 각(覺)이냐 아니 각이냐? 이것 참! 어디로 가?

청신원사종(淸晨遠寺鍾)이로구나. 또 새벽에 일찌거니 들어본즉 저 먼 절에서는 쇳소리가 땅~ 나는구나. 아 그놈의 소리 그 쇳소리가, 그 쇳소리가 모도 내가 그전 과거에는 쇳소리로 들었더니, 지금은 쇳소리가 아니란 것은 아니다마는, 쇳소리는 쇳소리다마는 이게 생(生)이냐 사(死)냐?
생사(生死) 도리(道理)가 여기 붙어 있느냐? 생사(生死) 도리(道理)가 붙어 있지 않은 도리냐? 무슨 도리냐 말이여.

아 이거 똑 같다마는, 거다가 '같다, 같지 않다' 거 뭔 그런 상(相)을 붙여서 볼 것이냐, 떼고 볼 것이냐? 여의고 볼 것이냐, 없애 버리고 볼 것이냐?
거 그대로 옛 때 들은 종(鍾)소리여, 옛 때 듣던 저[笛] 소리다 그 말이여.

죽풍이취객(竹風移醉客)이요. 대는 이슬을 잔뜩 머금고 비가 온 뒤인데, 오후인데, 그 댓가지에 이슬이 꽉 맺혔는데 웬 놈이 술 취해 가지고 가다가 그 밑에 가서 잠을 자는데, 그 댓바람[竹風]이 스르르 부니깐 그 대에 모도 맺혀져 있는 대 이슬이, 죽로(竹露)가 그만 확 떨어진게, 하! 이 술 취한 놈도 털털 깨고 일어난다.
아! 그 비오가풍(秘奧家風)이다. 이것이 무슨 가풍(家風)인가 말이여. 그 그전에는 그 어떻게 그렇게 봤건마는 이거 한번 깨달은 후에 보니 이거 참말로 이거 대가풍(大家風)이로구나! 큰 가풍이로구나!

화우(花雨)에 정유봉(定遊蜂)이다. 꽃이 턱! 피어서 멍울멍울한데 벌이란 놈은 꿀 빼가니라고 야단들이다. 댓바람이 불어서 비는 개버렸는데, 하! 그 뒤에는 벌은 날아다니면서 꿀 빼가니라고 휭 휭 날아다니는구나.
내나 그 경계가 그 경계인데 어째 이렇게도 오후경계(悟後境界)가, 깨달은 한번 뒷 경계가 여차(如此)하냐!
이것 참, 오후(悟後), 깨달은 후인가? '오후(悟後)에도 약불견인(若不見人)이면 번성독약(翻成毒藥)이라' 하더니, 스승을 찾아가 봐야 할 것인가?
이런 송구(頌句) 하나를 지었더라.


아까 여기 왠 처사(處士) 한 분이 나한테 와서 묻되, "삼매(三昧)와 정(定)과 그 구분이 어떻소?" 묻는데,
그 나, "삼매(三昧)라는 것과 정(定)이라는 것은 오후(悟後)에 있는 듯한데, 깨달은 후에 있는 듯한데 어째 그러냐. 조주(趙州)는 40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다. '조주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을 했다' 했거든. 조주 스님은 사미 때, 13살 먹을 사미 때 남전(南泉) 스님한테 견성(見性)을 했는데, 왠 40년이냔 말이여. 40년에 타성일편 했다. 아마 조주 스님 40년 타성일편이 그것이 이 정(定)일 것이여. 깨달은 후에, 오후(悟後) 정(定)일 것이여.
향림(香林)은 4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이니라. 향림은 40년에, 40년 되어서사 잡념(雜念)을 쓰지 않았다. 그것이 삼매일 것이여. 그러니 오전(悟前)에 있어서 오후(悟後) 경계(境界)를 내가 대답할 수가 있소?" 이렇게 내가 답변(答辯)을 하고 말았어.


오후(悟後) 경계(境界)를 내가 들어서 얘기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지금 이 송(頌)을 짓는 것은 오도송(悟道頌)이여. 깨달아 가지고 지은 송(頌)이 이렇다 그 말이여.
그 경계를, 깨달은 경계만 하더라도 이 경계를 가지고 이렇게 마을에서 부는 젓대 소리를 들었으며, 그 근처에서 종치는 새벽 종치는 종소리를 들었으며, 술 취해 가지고 가다가서 그 비 떨어지는 바람에 술 깬 도리를 보았으며, 벌이란 놈이 휭휭 날아가서 꽃다운 도리를 보았으나 이 경이 시하경(是何境)이냐? 이 무슨 경(境)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말을 허자니 견성(見性)한 경계(境界), 견성한 학자(學者)가 바로 깨달은 학자가 해탈송(解脫頌)이여. 해탈(解脫) 경계(境界)에 앉아서 지은 글이다 그말이여. 그 해탈 경계 소식(消息)을 알 수가 있느냐 말이다.
꼭 우리는 이 도리를 바로 봐야 하고 바로 알아야 할 텐데, 우리가 이 도리를 보지 못하고 이 도리를 알지 못했으니 순 중생이다. 우리는 중생인 것이여.

중생이 아무리 그놈의 젓대 소리를 들어 봤자 그 젓대 소리가 그 뭐 삐삐 부는 그뿐이고, 종소리가 쿵- 나는 뿐이지, 거기에 무슨 이치가 붙어 있겠나?

하지마는 그 종소리나 그 젓대 소리에다가서 무슨 묘리(妙理)를 붙여 봐라. 천 가지 만 가지의 묘리(妙理)를 붙일수록에 죽는다.
말하자면 진흙 밭에 들어간, 전체 그 진흙 구렁텅이가 얼마나 깊이깊이 진흙 구렁텅인지 그놈의 데 한 번 빠지면 발 내디딜수록에 점점 더 빠지고 점점 더 들어간다.

마찬가지다. 거다가서 중생이 아무리 묘리(妙理)를 다 붙여 보고, 또 그 이치를 다 떼 번지고 보고, 별별 짓을 다 해 봐라, 진흙 밭에 빠진 놈이 걸음 걸음이 더 빠지는 법이여. 그래 오직해야 '찾다가 죽는다'니? 찾다가 죽어.
무슨 이치인가? 찾다가 죽는 것이 공안법(公案法)이여. 참선 공안법이여.

여까장 말해 두고. 더 할라야 할 수 없으니깐.
그놈 진흙 밭에 빠진 놈은 나올라고 할수록 죽네. 공안 역시, 화두 공안 역시 알라고 할수록 죽으니까, 여까장 둘 수밖에 없지.(22분55초~34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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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20. 12. 9. 17:06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42분 9초부터 시작됩니다>

 

 

§((405)) (게송)외외낙락적나라~ / 부처님께서 항상 부르시는 노래,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사람 사람이 본래 태평(太平)하다’ 사람 사람이 원만구족한 본래 태평한 존재들이다 / ‘이뭣고?’ 일념 단속함으로 해서 일념 속에서 천당 · 지옥을 타파해, 일념 속에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

 

부처님 자신은 '남이 없다' 무생(無生), 남이 없어!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는 망(妄)이 없다 보시고, 당신은 남[生]이 없는데 무엇을 제도할 중생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노래를 부르시냐 하면은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사람 사람이 본래 태평(太平)하다’

 

**송담스님(No.405)—1989년(기사년) 성도재 법회(90.01.04) (용405)

 

약 9분.

 

외외낙락적나라(巍巍落落赤裸裸)한데  독보건곤수반아(獨步乾坤誰伴我)오

나무~아미타불~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데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오

나무~아미타불~

 

외외낙락적나라(巍巍落落赤裸裸)한, 높고 높고, 높고 높아서 깨끗하고 깨끗해.

독보건곤수반아(獨步乾坤誰伴我), 건곤(乾坤)에, 천지에 홀로 가니 누가 나와 더불어 짝을 할 것인가.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데, 만약 산중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던들,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오, 어찌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갔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시고 일생을 살으셨을까?

부처님께서 항상 부르시는 노래가 있었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노래를 부르셨을까?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른 사람을 보되 ‘제도(濟度)할 중생(衆生)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여.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죄가 많고, 생각하는 것이 순 망상(妄想)만 들끓고 망령(妄靈)된 경계에 빠져 있는 그러한 불쌍한 중생들이라’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실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망(妄)이 있다고 그렇게 보시지를 않혀.

그러면 부처님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신가? ‘부처님은 깨달아서 진리와 하나가 된 그러한 경지’라고 우리 생각에는 그럴 것 같은데,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래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을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부처님 자신은 '남이 없다' 무생(無生), 남이 없어!

 

부처님 자신이 남[生]이 없는데, 무엇을—일체에는 망(妄)이 없고, 당신은 남[生]이 없는데 무엇을 제도할 중생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노래를 부르시냐 하면은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본래 태평(太平)하다’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셨을 것이다.

 

사람 사람이 다 본래부터 태평해. 깨달을 바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빠져야 할 지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할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할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아니요, 제도 받을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여.

얼굴이야 잘생겼거나 못생겼거나, 귀족이거나 천민이거나, 부자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해서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덜어낼 것도 없어. 원만구족한 본래 태평한 존재들이다 그말이여.

 

납월팔일(臘月八日)을 맞이해서 우리는 본래 조금도 부처님과 조금도 모자랄 것도 없이 원만구족한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긍지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까요? 오장육부와 사지백체(四肢百體)는 성한 데가 없이 항상 아프고 괴롭고, 이 세상에 나서 늙어서 병들어 가지고 결국은 희로애락과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그리고 버티다 버티다 못해서 왜 죽어갈까요?

죽으면 과연 어느 곳으로 갈까요? 천당에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이다.

 

이러한 고달픈 생(生)이, 유랑(流浪)이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무량겁으로 이어진다고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상에는 지옥도 천당도 있다면 일념지간(一念之間)에 있는 것이여. 없다면 없는 것이지만 있다면 일념지간에 있어.

무량겁도 일념 속에 들어 있고, 그 일념간에 있는 천당, 일념 속에 있는 지옥, 그것만 해결해 버리면 무량겁의 생사고(生死苦)도 바로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 그래서 일념 단속(一念團束)을 해야 해.

일념 단속함으로 해서 일념 속에서 천당 · 지옥을 타파해 버려. 일념 속에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것이여.

 

기사년 납월팔일을 기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이 산승(山僧)이 여러 사부대중, 여러 도반들을 향해서 간곡히 정진하실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42분3초~51분9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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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20. 5. 5. 17:09

§(465) 영훈선사와 귀종선사 /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다.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그 법문을 즉(卽)해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그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거든.

 

**송담스님(No.465)—92년 2월 첫째일요법회(92.02.02) (용465)

 

약 8분.

 

저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라고 하는 큰 선지식이 옛날에 계셨는데, 그 선사가 최초에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을 찾아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떠억 찾아가서 그 귀종 선사에게 묻기를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매우 엄숙하고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귀종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향해서 일러주되 네가 믿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말하기를 “큰스님께서는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학자를 위해서 정말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감히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종 선사가 가로되 “네가 곧 부처니라”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야 되겠습니까?”

귀종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空華)가 난타(亂墮)니라.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공화가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이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영훈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보림하는 길까지 눈을 떴습니다.

 

한 장애가 한 티끌이 눈에 있으니, 공화(空華)라고 하는 것은 눈병든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슨 꽃이 피어서 이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서물서물 서물서물 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거든.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일러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네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까,

“큰스님께서 어찌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실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니까, “네가 곧 부처니라” 거기서 확철대오를 했거든.

 

부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부처님, 부처가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나름대로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 실달(悉達) 태자 뭐 그런 등등 나름대로 다 말씀하실 수 있고,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바로 진리를 깨달으신 진리와 하나가 된 성현이다’ 아마 그렇게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네가 곧 부처다. 영훈이 네가 곧 부처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부처다”

이러한 이것은 이론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고 또 영훈 선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수긍을 해서 ‘아하, 바로 내가 부처구나’하고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어.

 

“네가 곧 부처다”고 하는 데에서 이론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서 툭! 깨달아 버린 거여.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그래서 법문(法門)을 듣되 그 법문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상식 모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이 자리에 모이신 법보제자(法寶弟子)는 무슨 법문을 듣던지 바로—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그 법문을 즉(卽)해서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그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거든.

 

보통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은 귀가 번쩍해서 눈알이 초롱초롱하고 조끔 재미없는 얘기를 하면 꾸벅꾸벅 한 시간 내 졸다가 뚝 일어나 가지고 누가 나 잔 것을 봤나 안 봤나 뚤래뚤래.

 

그런데 참 그래서 섣달그믐께 모다 신도님들은 모다 바쁘고 여러 가지로 새해를 맞기 위한 여러 가지 가정사, 회사 공장 모다 여러 가지로 모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다 많이 참석을 하셨는데,

사실 바쁜 것은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고, 우리가 일 초 일 초 죽음을 향해서 계속 가고 있는데 자기의 생사 문제보단 더 바쁜 것은 없거든.

 

집에서도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참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법회에 이렇게 한번 떠억 나와서 부처님께 예배도 올리고 축원도 하고 그러고 도반(道伴)들도 만나고 이렇게 또 다 아는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도반들이 같이 모여서 또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이다.(16분28초~24분4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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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일예재안공화난추(一翳在眼空花亂墜) ; 일예재안공화난타(一翳在眼空花亂墮).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가지가지 망상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참고 ①] 『전등록(傳燈錄)』 (제10권) ‘복주(福州)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 (전등록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 p691~692)

初參歸宗問 如何是佛 宗曰 我向汝道汝還信否 師曰 和尙發誠實言何敢不信 宗曰 卽汝便是 師曰 如何保任 宗曰 一翳在眼空花亂墜(法眼云 歸宗若無後語有什麼歸宗也)

 

처음에 귀종을 뵙고는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다면 그대는 믿겠는가?”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정성스럽고 참된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대가 부처다”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하나의 그림자라도 눈을 가리면 허공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법안(法眼)이 말하기를 “귀종(歸宗)이 뒷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귀종(歸宗 : 조종에 돌아간다는 뜻)이라 할 것이 무엇이랴?라고 하였다]

 

師辭歸宗 宗問 子什麼處去 師曰 歸嶺中去 宗曰 子在此多年裝束了却來 爲子說一上佛法 師結束了上堂 宗曰 近前來 師乃近前 宗曰 時寒途中善爲 師聆此一言頓忘前解 後歸寂諡弘照大師 塔曰圓相

 

대사가 귀종에게 하직을 아뢰니, 귀종이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가려는가?”

“영중(嶺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네가 여기에 여러 해 있었으니, 짐을 꾸려 놓고는 잠시 오라. 내가 자네에게 유일하고 최상인 불법을 말해 주리라”

 

대사가 짐을 꾸려 놓고 법당에 올라가니, 귀종이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대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니, 귀종이 말했다. “날씨가 차니, 도중에 조심하라”

대사가 이 말을 듣고는 앞서의 견해를 단박에 잊었다. 나중에 입적하니, 홍조(弘照) 대사라 시호하고, 탑호는 원상(圓相)이라 하였다.

 

[참고 ②]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普照知訥 一一五八 ~ 一二一O)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은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주고자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화상의 성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보림 해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깨달은 것이다.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卽與古聖 把手共行

 

위에 든 옛 성인들의 도에 드신 인연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안으로 말미암아 믿어 아는 곳[信解處]이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참고 ③] 『선문염송(禪門拈頌)』 제 257칙 ‘즉여(卽汝)’

歸宗因僧問 如何是佛 師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於此有省.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실달(悉達) ; 싯다르타(siddhartha)의 음역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실달다(悉達多)’이라고도 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9분 10초)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19. 4. 1. 06:57

 

 

§(124) 최상승법은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 /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 선방 /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

 

이 도리는 가르켜 줄래야 가르켜 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가르켜 줄려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고, 이 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릴 정도의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배울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 (용124)

 

(1) 약 19분.

 

(2) 약 10분.

 

(1)------------------

 

오늘은 경신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일입니다.

해마다 4월 15일이면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 동안 그 더운 여름철 더위를 모르고 정진을 해서 7월 보름날, 백중날 해제를 해 왔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법당 신축 관계도 있고 또 저 밑에 두 선방과 후원, 창고 해서 대소 건물 일곱 채가 철거가 되게 되어서 결제(結制)를 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를 했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오늘 결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헐릴 때 헐리드라도 그때까지는 우리가 서로 결제를 해 가지고 열심히 정진을 하는 것이 도리에도 합당하고 우리 불사(佛事)를 위해서도 좋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위태로운 그러한 지경에 놓여 있고 우리나라도 대단히 걱정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세에 우리의 생명과 가정과 사회 국가 민족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위태로운 지경에서 우리는 살 수밖에는 없게 되었는가?

 

이것은 이웃나라가 나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저 소련이나 무슨 공산국가가 나뻐서 그렇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인과(因果)의 법칙에서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한때 태어날 수밖에는 없도록 동업(同業)을 지어 놓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함께 같은 시대에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 괴로움과 근심을 함께 하면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나의 몸을 단속하고, 나의 입을 단속하고, 나의 마음을 단속해야 할 것인가?

물어 볼 것도 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 불법(佛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 이외에는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해서 이 생사고락(生死苦樂)의 구덩이 속에서, 이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은 오직 최상승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을 누구를 원망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이러한 시대를 만났고 이러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진댄 내가 지은 그 업(業)에 근원을 해결을 해야만 당장 자기의 앞길이 트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빚을 자기가 갚어야 그 부채로부터 자기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아무리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고 해서 그 빚이 없어질 까닭이 없고, 피해 다닐수록 더욱 불안하고 더욱 공포에 싸여서 그러는 동안에 죄는 더욱 가증(加增)해 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빚 갚고 빚을 다 갚아 버리면 그때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오직 한 길이요, 분명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자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법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산승(山僧)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을 때는 그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 우리는 자성(自性)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하는 동안에는 영겁을 두고 찾어도 그 사람은 찾을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장소가 따로 없고,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물론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장소가 있으면 앉아서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그리고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제 어디서라도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꼭 나에 알맞게 마련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알맞게 마련되지 아니했다 해서 밤낮 그러한 장소와 시간만 찾아다니다가는 결국은 금생에 그 사람은 공부를 못할 사람인 것입니다.

 

섰을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걸어 다닐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 「이뭣고?」

괴롭고 슬플 때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 나갈 때 그 사람에게는 가장 정진하기에 알맞은 시간이 제공이 되는 것이며, 가장 정진하기에 알맞는 장소가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만나지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따로 찾지 아니하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바로 그때 그 찰나 찰나를 놓치지 아니하고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나간다면은 그 사람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 놓여 진다하더라도 바로 그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뜻있는 좋은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한 시간 한 시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온통 세계가 불바다가 되고 온통 나라가 난리가 일어나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발심(發心)하고 오히려 분심(憤心)을 내고 철저한 부처님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공부를 못한다. 화두가 잘 들리지 아니한다. 의심이 잘 나지를 않는다. 몸이 아퍼서 공부를 잘 못한다' 이러한 말들은 그와 같이 공부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꽃 피고 잎이 피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구름이 나르고 있는 고대로 열반(涅槃)의 세계요, 극락세계요, 고대로 가 전부 불세계(佛世界)인데 무엇을 깨닫느냐? 무엇을 찾으며 깨달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아까 어떤 학인(學人)이 와서 그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열반경』에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고 하는 게송(偈頌)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학인은 그 게송의 뜻을 그렇게 물어 온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비단 그 게송뿐만이 아니라 열반경이나 원각경이나 경을 보면은 그러한 내용의 뜻이 전편의 경전에 다 그러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을 읽고, 그러한 경에 대한 법문을 듣고서 그런 줄로 알면 그 사람에게는 도 닦을 필요도 없고 참선(參禪)도 할 필요가 없느냐?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부처님의 몸뚱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참 설법이다' 이렇게 믿고.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우리 몸 이대로 고대로 성불(成佛)이고 그대로 열반이다. 따로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서 그리고서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내용을 경(經)을 통해서 알았다고 해서,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리가 참선이 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필요도 없고, 무슨 뭐 법문을 들을 필요도 없고 법을 설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고 제도 받을 필요도 없다. 뭐 있는 그대로가 바로 열반인데 무슨 해탈을 생사해탈 하냐' 그래 가지고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고.

 

참으로 이 도리를 요달(了達)한 사람은 할 일이라고는 없어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그뿐인 것입니다마는.

요달하지 못한 분상에는, 아까 '이대로가 곧 전부가 열반이요, 열반이기 때문에 벗어야 할 생사도 없다'고 하는 내용을 알기만 알았지, 실지 그러한 경계에 자기가 계합(契合)하지 못하고 투철하지 못한 분상에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고,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그것이, 아는 것 그것 가지고 생사(生死)에 자유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아는 것이 그것이 도(道)고, 아는 것으로써 구경(究竟)의 경지라고 한다면 가르켜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라면 가르켜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의 뜻을 아무리 알아듣기 쉽게 납득이 되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그럴싸하게 설명을 해 주면 '아하, 그런 뜻이로구나' 이렇게 우리는 그런 경전에 있는 어려운 말씀을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지(分別智)로써, 중생의 분별지로써 이해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싸하게 알았다 하드라도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그것은 중생의 분별지요,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다른 데에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이 끊어지지 아니하면 천하 없이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요, 경전에 쓰여 있는 말씀 고대로를 외우고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분별심으로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어디까지나 부처님 말씀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분별지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지로 무엇을 알고 분별지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 생사윤회의 원인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전에 있는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 알았다면 목숨 바쳐서—정말 생사가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이튿날로 미룰 것도 아니요, 그날 저녁으로 미룰 것도 아니고 당장 그 자리에서부터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선지식의 지도하에 참선을 하는 그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가르켜 줄래야 가르켜 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가르켜 줄려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고, 이 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릴 정도의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배울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9분13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몽산(蒙山) 스님이 마을에 학자로서 불법(佛法)을 심히 비방을 하든 사람이 강아지 꿈을 꾸고서 자기가 자칫했으면 강아지로 태어날 뻔 봤다고 하는 것을 확인을 하고 거기에 발심을 해 가지고 출가해서 대도인이 된 인연 설화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에도 수없이 많은 비유의 설화와 인연의 법문이 많지만 그러한 한 토막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와 같은 그러한 비유 인과설 속에서 신심과 분심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을 바로 알아들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이 꼭 인삼, 녹용과 같은 그러한 값비싼 약만이 우리의 병을 나수는 것이 아니고 값이 헐어디 헐은 들과 산에 나 있는 야생초 몇 뿌리를 삶아서 먹어도 병을 신효(神效)하게 낫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하면 어려운 법문, 암만 듣고 또 읽어도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그런 어려운 경전의 말씀만이 정말 높고 깊은 진리다. 그러한 어려운 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는지.

 

'나는 아직 경도 한 권도 읽지 못했고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천수(千手)도 아직 못 욉니다. 그러니 불명(佛名)도 아직 탈 수가 없고 더군다나 참선은 할 생각조차도 못 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분을 가끔 만납니다마는,

무슨 천수(千手)를 달달 외우고, 무슨 경전을 많이 보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해석할 줄 알고 그러한 것은 활구참선을 하는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전을 많이 보고 그래 가지고 알아 가지고 자기가 '참,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누가 뭐 어떠한 승려라 하더라도 감히 내 앞에 무슨 법문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법화경이고 화엄경이고 금강경이고 닥치는 대로 다 외우고 읽고 해석할 줄 안다. 나를 덮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러한 거사나 신도가 계신다고 하면 참 그렇게 딱하고 안될 수가 없습니다. 불법을 무슨 그런 지식으로 생각하고,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불법은 많이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외우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그러면 경은 뭐하러 부처님이 설하셨으며, 경은 뭐하러 해인사에 그렇게 경판을 오래 보관하면서 인쇄를 해서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 뭐 많이 봐도 소용이 없다면 한 권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또 생각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보되 한 글자도 남은 바가 없어야 하고, 글자로 된 경전을 읽으므로 해서 그 글자로 된 경전은 완전히 소화가 되어서 그것이 없어지고서 부처님께서 입을 통해서 설할 수 없는 참 진리를 자기의 마음에서 깨달라야만 그 사람은 경전을 옳게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닭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사람 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풀을 참 많이 비어서 그래 가지고 퇴비를 하면 좋다' 그러지만 닭똥을 썩히지 아니하고 푹 띄워서 완전히 발효를 시킨 거름이라야 그것을 밭에다 주고 식물에다 주어도 거기서 그 참으로 비료가 되는 것이지,

푹 썩지 아니한 발효하지 아니한 쌩똥을 갔다가 과실 과목(果木)이나 채소나 곡식에 주면 거기서 열이 나 가지고 과일 나무 뿌리가 참으로 썩어 버리고 채소고 곡식이고 하나도 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도 그 경전을 읽고서 완전히 그놈이 삭아서 한 글자도 남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닫게 되아야 그 경전을 옳게 보는 것입니다.

 

태권도나 유도나 검도 그런 걸 처음에 배우면 그 주먹이 근실근실해 가지고 누구하고 한번 싸워 보고 싶고, 벽도 한번 차 보고 싶고, 조그만한 일에 누가 있으면 싸움하는 데만 있으면 자기가 탁! 가로막고 나서서 한번 그놈을 뽐내 보고 싶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 삼단 사단 오단 육단 올라가면 여간해서 어디 가서 주먹을 내놓지도 않고 자기가 그러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척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푹 썩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썩어서 아주 흔적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해 갈수록—'내노라'하는 생각, '나는 이렇게 참선을 잘했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참선을 해서 한 소식을 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것을 그러한 얻었다고 하는 생각, '깨달랐다'고 하는 생각,

'나는 참선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30년을 했다'고 하는 그러한 밥그릇 수를 따져서 자기가 으시대고 새로 공부하는 사람을 갖다가 자기가 오래했다고 하는 그것으로써 짓이기고 욱박지르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래할수록 참으로 바르게 한 사람이라면 아무 냄새가 나지를 아니하고 더욱 겸손하고 그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조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는 사람은 30년을 했건 10년을 했건 또는 공부를 시작한지가 불과 1년 밖에 안 되었다 하드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참되게 닦아 간 사람은 그 사람이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닦아 가야만 도업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서도 깨달랐다고 하는 각견(覺見)이 없어져야 그 사람은 바로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은 척하고 으시대고 뽐낸다고 해서 그것이 어디다 쓸 것이여.(19분14초~28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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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동업(同業) ; 동일한 부류의 업(業). 동일한 과보를 받는 원인이 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이것이 삼업이다.

*생사고락(生死苦樂) ;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이르는 말.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4분 48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분별지(分別智) ; 생멸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지혜.

범부(凡夫)의 지위에서는 허망하게 헤아리며 분별하는 망상이며, 불지(佛地)에서는 방편을 발휘하는 후득지(後得智)이다. 범부의 허망한 분별을 떠나면 무분별지(無分別智, 근본지根本智)와 상응하게 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진실한 지혜이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후득지(後得智) ; 근본지(根本智)에 이른 후(後)에 얻는[得] 지혜(智慧)라는 뜻.

모든 분별이 끊어진 경지에 이른 후에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아는 지혜. 모든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깨달음을 이른 후에 다시 온갖 차별을 명명백백하게 아는 지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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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千手) ; 천수경(千手經). 관음신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엮어진 경으로, 현재 사찰에서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의 구성은 천구백년 이후에 갖추어진 것이다.

천수경은 한국불교 신앙의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경전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에게 귀의하여 참회하고 발원하는 글과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근실근실하다 ; 가려운 느낌이 자꾸 나다.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