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깨달음2020. 5. 5. 17:09

§(465) 영훈선사와 귀종선사 /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다.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그 법문을 즉(卽)해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그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거든.

 

**송담스님(No.465)—92년 2월 첫째일요법회(92.02.02) (용465)

 

약 8분.

 

저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라고 하는 큰 선지식이 옛날에 계셨는데, 그 선사가 최초에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을 찾아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떠억 찾아가서 그 귀종 선사에게 묻기를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매우 엄숙하고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귀종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향해서 일러주되 네가 믿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말하기를 “큰스님께서는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학자를 위해서 정말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감히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종 선사가 가로되 “네가 곧 부처니라”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야 되겠습니까?”

귀종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空華)가 난타(亂墮)니라.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공화가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이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영훈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보림하는 길까지 눈을 떴습니다.

 

한 장애가 한 티끌이 눈에 있으니, 공화(空華)라고 하는 것은 눈병든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슨 꽃이 피어서 이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서물서물 서물서물 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거든.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일러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네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까,

“큰스님께서 어찌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실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니까, “네가 곧 부처니라” 거기서 확철대오를 했거든.

 

부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부처님, 부처가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나름대로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 실달(悉達) 태자 뭐 그런 등등 나름대로 다 말씀하실 수 있고,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바로 진리를 깨달으신 진리와 하나가 된 성현이다’ 아마 그렇게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네가 곧 부처다. 영훈이 네가 곧 부처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부처다”

이러한 이것은 이론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고 또 영훈 선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수긍을 해서 ‘아하, 바로 내가 부처구나’하고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어.

 

“네가 곧 부처다”고 하는 데에서 이론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서 툭! 깨달아 버린 거여.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그래서 법문(法門)을 듣되 그 법문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상식 모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이 자리에 모이신 법보제자(法寶弟子)는 무슨 법문을 듣던지 바로—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그 법문을 즉(卽)해서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그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거든.

 

보통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은 귀가 번쩍해서 눈알이 초롱초롱하고 조끔 재미없는 얘기를 하면 꾸벅꾸벅 한 시간 내 졸다가 뚝 일어나 가지고 누가 나 잔 것을 봤나 안 봤나 뚤래뚤래.

 

그런데 참 그래서 섣달그믐께 모다 신도님들은 모다 바쁘고 여러 가지로 새해를 맞기 위한 여러 가지 가정사, 회사 공장 모다 여러 가지로 모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다 많이 참석을 하셨는데,

사실 바쁜 것은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고, 우리가 일 초 일 초 죽음을 향해서 계속 가고 있는데 자기의 생사 문제보단 더 바쁜 것은 없거든.

 

집에서도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참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법회에 이렇게 한번 떠억 나와서 부처님께 예배도 올리고 축원도 하고 그러고 도반(道伴)들도 만나고 이렇게 또 다 아는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도반들이 같이 모여서 또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이다.(16분28초~24분4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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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일예재안공화난추(一翳在眼空花亂墜) ; 일예재안공화난타(一翳在眼空花亂墮).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가지가지 망상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참고 ①] 『전등록(傳燈錄)』 (제10권) ‘복주(福州)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 (전등록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 p691~692)

初參歸宗問 如何是佛 宗曰 我向汝道汝還信否 師曰 和尙發誠實言何敢不信 宗曰 卽汝便是 師曰 如何保任 宗曰 一翳在眼空花亂墜(法眼云 歸宗若無後語有什麼歸宗也)

 

처음에 귀종을 뵙고는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다면 그대는 믿겠는가?”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정성스럽고 참된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대가 부처다”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하나의 그림자라도 눈을 가리면 허공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법안(法眼)이 말하기를 “귀종(歸宗)이 뒷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귀종(歸宗 : 조종에 돌아간다는 뜻)이라 할 것이 무엇이랴?라고 하였다]

 

師辭歸宗 宗問 子什麼處去 師曰 歸嶺中去 宗曰 子在此多年裝束了却來 爲子說一上佛法 師結束了上堂 宗曰 近前來 師乃近前 宗曰 時寒途中善爲 師聆此一言頓忘前解 後歸寂諡弘照大師 塔曰圓相

 

대사가 귀종에게 하직을 아뢰니, 귀종이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가려는가?”

“영중(嶺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네가 여기에 여러 해 있었으니, 짐을 꾸려 놓고는 잠시 오라. 내가 자네에게 유일하고 최상인 불법을 말해 주리라”

 

대사가 짐을 꾸려 놓고 법당에 올라가니, 귀종이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대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니, 귀종이 말했다. “날씨가 차니, 도중에 조심하라”

대사가 이 말을 듣고는 앞서의 견해를 단박에 잊었다. 나중에 입적하니, 홍조(弘照) 대사라 시호하고, 탑호는 원상(圓相)이라 하였다.

 

[참고 ②]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普照知訥 一一五八 ~ 一二一O)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은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주고자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화상의 성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보림 해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깨달은 것이다.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卽與古聖 把手共行

 

위에 든 옛 성인들의 도에 드신 인연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안으로 말미암아 믿어 아는 곳[信解處]이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참고 ③] 『선문염송(禪門拈頌)』 제 257칙 ‘즉여(卽汝)’

歸宗因僧問 如何是佛 師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於此有省.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실달(悉達) ; 싯다르타(siddhartha)의 음역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실달다(悉達多)’이라고도 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9분 10초)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