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삼요)2021. 6. 15. 15:57

§((411))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음--->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증(證)한 다음에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 (게송)화소산전누천기~.

**송담스님(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용411) (신심)

 

 

약 10분.

 


처음에는 생사 없는 도리를 믿다가—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그 말이여.

생사 없는 도리가 있는 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하지도 않을 것이여. 경(經)이나 보고, 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그러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있다고 한 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참선 안 합니다. 아무리 참선이 제일이라고 해도 절대로 하질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정진을 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믿기 까지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마는, 일단 믿었을진대는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하거던. 여법(如法)하게 해야 하거던.
큰 깨달음으로써 기약을 삼어야지, 조끔 뭔 소견난 거 그런 것은 챙피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없었던 걸로 여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알뜰히 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겨우 조끔 공부하다가 스쳐가는 그러한 경계를 가지고 '깨달랐다'고 착각하고, 또 공안을 깨달랐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공부가 다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되겄습니까.

하물며 공안을 타파하지도 못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서, 함부래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입을 함부로 벌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고, 불법(佛法)을 망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눈을 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해제날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 한마디, 한 구절 만 들어도, 한 편 만을 들어도 해제 법문은 그것으로써 충분합니다마는, 이렇게 여러 선원(禪院)에서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도반을 위해서 제가 이러한 노바심(老婆心)으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앞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할, 또 틀림없이 얻게 될 여러 도반들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게만 해 가면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것인데, 조그마한 그런 스쳐가는 소견을 가지고 '알았다'는 생각을 가짐으로 해서 공부가 거기서 사견(邪見)에 빠지고, 중도에서 중단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을 정말 가슴 깊이 명심(銘心)해 주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하야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요, 꽃이 피니, 꽃이 산전(山前)에, 산 앞에 활짝 피어 웃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법(無生法)을 설(說)함이로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꽃이 웃는 것이나, 새가 노래하는 것이 낱낱이 스스로 다 무궁(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그 무궁한 뜻을 바로 봐 버리면, 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근본도리(根本道理) 아님이 없도다.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입니다.

바로 깨닫고 보면 무엇이 부처님이 아니며, 무엇이 부처님의 법(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바로 보지 못했으니,

꽃을 봐도 '이 뭣고?'요,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산을 봐도 '이 뭣고?'요,
물을 흐르는 것을 봐도 알 수 없는 '이 뭣고?'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만 나간다면 그 올바르게,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알뜰히만 공부를 지어 간다면 결정코 조사(祖師) 스님들이 우리를 속이지 안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운집하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와 용무생사(用無生死)에 구경(究竟)에 이를 때까지는, 어떠한 소견(所見)이 나더라도 스스로 부정해 버리고, 정말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강조에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34분35초~44분43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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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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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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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11)) (게송)청정법신무내외~ / '삼매(三昧 samādhi)'는 한문으로 '정(定)' / 정정(正定)과 사정(邪定) /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 /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드는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 /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음--->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증(證)한 다음에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 (게송)화소산전누천기~.

**송담스님(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용411)

 

(1) 약 15분.

 

(2) 약 10분.


(1)------------------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하고  거래생사일진상(去來生死一眞常)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요, 청정법신(淸淨法身)에는 안과 밖이 없고,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진상(一眞常)이다. 가고 오고, 생(生)하고 사(死)하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이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一) 진상(眞常)이여, 한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진리(眞理)다.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만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정상(毘盧頂上)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들어보면, '일념(一念)이 무념(無念)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요, 불생(不生)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 해탈(解脫)이 곧 열반(涅槃)이다' 경전(經典)에는 다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념(無念)이 불생(不生)이요, 불생이 무심(無心)이요, 무심이 해탈(解脫)이다' 말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무념(無念)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번뇌(煩惱)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이 고대로 무기(無記) 속에 요렇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지금...' 흔히 한참 동안 멍청하게 시간 가는 중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중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한참 그렇게 그런 경지에 있다가 나와서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나왔다'고 보통 그렇게 얘기들 합니다.
그런데 그 '삼매(三昧 samādhi)'를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정(定)'인데, 그 정(定)도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 있어서, 중생이 아무 생각 없이 멍청허게 정(定)에 들어간 그런 것은 다 사정(邪定)이거든.

뱀 같은 거, 구랭이 같은 것도 가을에 개구리 잔뜩 잡아먹고, 초겨울에 잡아먹고 그리고 굴속에 들어가서 삼동내 물 한 방울 안 먹고, 개구리 한 마리, 쥐 한 마리 안 잡아먹고 고대로 삼동(三冬)을 지냈다가 그 이듬해 해동(解冬)이 되고 경첩이 지나고 그러면은 그 속에서 땅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이 삼동내 아무것도 안 먹고, 물 한 모금도 안 먹고 가만 있다 나오니까 그것이 '삼매(三昧)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꺼떡하면 혼침(昏沈)에 빠져서 있다 나와 가지고 '삼매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그러한 착각을 합니다.

무념(無念).
삼세육추(三細六麤), 세 가지 미세한 생각과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이 다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잠기는 것이고, 그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우리 학자(學者)는 선지식으로부터 그 공안 하나를 간택 받아 가지고 그놈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그걸 참구(參究)를 해 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고, 말 길이 있고, 이치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이 그렇게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알 수 없어!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 그 공부가 옳게 해 가는 것이지, '이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저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아!'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면 그건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도 참 깨달음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수에서 여까지 와서 화두(話頭)를 타려고 여러분이 오셨는데, 또 앞으로 선방(禪房)에 가기 위해서 또 화두를 타려고 온 수좌(首座)도 있는데, 개별적으로 화두를 일러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올라온 김에 새로 화두를 타려고 하는 분, 또 화두를 타서 하되 아직도 어떻게 화두를 참구해야 옳게 한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치 못한 분을 위해서 간단히 화두 참구(參究)하는 법을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엇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인고?' 그래서 '이 무엇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구쳐 나가.
그러다 나중에 가서는,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더 다구쳐 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뿐이여!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이렇게만 말해도 벌써 알아듣는 분은 알아듣지만,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또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녹음법문(錄音法門),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셔서 10번, 20번, 백 번, 천 번을 들으면서 자꾸 하다 보면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일체 화두를 자꾸 들어도, 들고 있으면서도 온갖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든. 일어나되, 그 일어난다고 성화도 대지 말고, 짜증도 내지 말고, 그놈을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못 일어나게 할 것도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들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이여.
그 번뇌(煩惱)가 일어나면은 '그놈이 또 일어난다'고 성화를 대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놈을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을 치신 분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여. 그냥 놔둬 뭐. 놔 두고 '이 뭣고?' 화두(話頭)만 딱! 챙겨 버리면 그만인 것이여.

그놈이 어디서 일어나 간데.

내나 자성(自性)자리에서 그놈이 일어나거든. 그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난 것이니까, 그냥 놔둬 버리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고, 화두를 들어버리면은 저절로 없어질 것을, 그놈을 없애려고 생각을 내니까, 없애려고 하는 그 또 한 새로운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자꾸 놓치면은 또 '이 뭣고?' 딴생각[別念]이 일어나도 또 '이 뭣고?'
'이 뭣고?' 만 챙겨버리면 그만인 거거던.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렇게 해 나가면 차츰차츰 번뇌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많아져.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아! 인자 공부가 잘되는구나. 아! 이것이 바로 무심(無心), 무념(無念)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내면, 그것이 벌써 무념(無念)이 아니고 벌써 망상(妄想)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지지리 애써서 공부해서 공부가 좀 익숙해질만 하면은, '하! 참 좋다. 툭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내면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석하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무심(無心). 무심도 오히려 벌써 무심(無心)이라고 할 때 천만리(千萬里)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맞히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못 꽉 맥힌 의심으로 정말 실(實)답게 참구(參究)해 나가고, 실(實)답게 정진(精進)을 해 나간 데에서 어떠한 찰나에 탁! 터지는 것이지, 정진하면서 그 공안을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렇게 따지면 맞을랑가, 저렇게 일르면 될랑가?' 이렇게 따져 가지고 공안을 보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해서... 그것은 알아지는 것이지, 알아진 것이 어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진 것이 어찌 그것이 참 깨달음이 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19분42초~34분28초)




(2)------------------

처음에는 생사 없는 도리를 믿다가—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그 말이여.

생사 없는 도리가 있는 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하지도 않을 것이여. 경(經)이나 보고, 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그러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있다고 한 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참선 안 합니다. 아무리 참선이 제일이라고 해도 절대로 하질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정진을 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믿기 까지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마는, 일단 믿었을진대는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하거던. 여법(如法)하게 해야 하거던.
큰 깨달음으로써 기약을 삼어야지, 조끔 뭔 소견난 거 그런 것은 챙피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없었던 걸로 여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알뜰히 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겨우 조끔 공부하다가 스쳐가는 그러한 경계를 가지고 '깨달랐다'고 착각하고, 또 공안을 깨달랐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공부가 다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되겄습니까.

하물며 공안을 타파하지도 못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서, 함부래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입을 함부로 벌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고, 불법(佛法)을 망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눈을 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해제날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 한마디, 한 구절 만 들어도, 한 편 만을 들어도 해제 법문은 그것으로써 충분합니다마는, 이렇게 여러 선원(禪院)에서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도반을 위해서 제가 이러한 노바심(老婆心)으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앞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할, 또 틀림없이 얻게 될 여러 도반들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게만 해 가면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것인데, 조그마한 그런 스쳐가는 소견을 가지고 '알았다'는 생각을 가짐으로 해서 공부가 거기서 사견(邪見)에 빠지고, 중도에서 중단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을 정말 가슴 깊이 명심(銘心)해 주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하야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요, 꽃이 피니, 꽃이 산전(山前)에, 산 앞에 활짝 피어 웃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법(無生法)을 설(說)함이로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꽃이 웃는 것이나, 새가 노래하는 것이 낱낱이 스스로 다 무궁(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그 무궁한 뜻을 바로 봐 버리면, 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근본도리(根本道理) 아님이 없도다.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입니다.

바로 깨닫고 보면 무엇이 부처님이 아니며, 무엇이 부처님의 법(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바로 보지 못했으니,

꽃을 봐도 '이 뭣고?'요,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산을 봐도 '이 뭣고?'요,
물을 흐르는 것을 봐도 알 수 없는 '이 뭣고?'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만 나간다면 그 올바르게,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알뜰히만 공부를 지어 간다면 결정코 조사(祖師) 스님들이 우리를 속이지 안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운집하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와 용무생사(用無生死)에 구경(究竟)에 이를 때까지는, 어떠한 소견(所見)이 나더라도 스스로 부정해 버리고, 정말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강조에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34분35초~44분43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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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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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11))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어떤 젊은 수좌(首座)의 소견 /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인가(印可)를 할 수 있다 / 『서장(書狀)』에 증시랑(曾侍郞)의 철저한 발원(發願) /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

**송담스님(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용411)

 

약 20분.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기회환(我人山下幾回還)고
나무~아미타불~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상(我人山上)에 기회환(幾回還)고.
저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한 생각 법왕(法王)을 어긴 죄(罪)로 끝없는 하늘가에 떨어져 나와 가지고 몇 번이나 돌아쳤으며,
아인산하(我人山下)에,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높고 높은 산 아래로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고, 사랑하고, 부모자식 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는 깊고 깊은 그 강 가운데에 유랑(流浪), 떠돌아다니다가 문듯 스승을 만났어.
그 스승을 만난 그 덕으로,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다. 생사(生死) 없는 상락(常樂)에 고향(故鄕) 길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게 되었구나.


오늘 경오년(庚午年) 정월(正月) 대보름날, 삼동안거(三冬安居) 회향 해제일과 백일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용화선원 대중과 또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또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 대중, 저 의정부 회룡사 선원 대중, 그리고 전주 위봉사 대중들, 기타 저 목포 · 여수 · 광주, 원근 경향(京鄕) 각지(各地)에서 이렇게 해제(解制) 법요식(法要式)을 기해서 이렇게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지난 갑인년(甲寅年) 정월 보름 해제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가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금생에 다시 이 자아를 자각(自覺)하는, 내가 나의 자성(自性)을 깨닫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 정법(正法)을 만났습니다.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이 최상법(最上法)을 만났으니, 그 인연만 하더라도 그 경행(慶幸)하기가 한량(限量)이 없으나, 기왕 이러한 불법을 만났을진대는 정말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겄더라.

한 철, 두 철 내지 세 철,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소견(所見)이 날 수가 있습니다.
5년 1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있을 뿐, 전혀 소견(所見)이 안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인가 소견이 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5년 10년 해도 소견이 안 난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고, 한 철 두 철 해서 무엇인가 그 소견이 나면 그것이 좋으냐 하면 그것이 아니여.
'10년 3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소견이 안 나도 공부를 옳게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바르게 공부를 한 거고, 한 철 두 철에 무슨 소견이 났으되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 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달포 전에 어떤 젊은 수좌(首座) 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 수좌는 여기서 행자노릇도 하던 사람인데, 어디 가서 중이 되어 가지고 선방(禪房)에도 다니고 여기도 와서도 한 철 지내고 그러던 사람인데, 중간에 쪼끄만한 토굴살이를 하다가, 토굴에 들어가서 정진을 하다가 연탄 불인지, 무슨 숯불인지 피워 놓고 그 가스에 중독이 되어 가지고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는데, 깨고 보니 '깨달랐다'고.
와서 '공안(公案)을 물으라?' 했습니다.

정진(精進)을 알뜰히 해서 소견(所見)이 났다면 당연히 참 물어볼 만도 하고, 또 바른 소견이 났다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면은 우리 이 문중에서,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얼마나 환희(歡喜) 스럽고 얼마나 경행(慶幸)한 일이겠습니까.
'가스에 중독되어서 일어나서 보니 뭐 소견이 났다' 그러니, 물어볼 가치도 없고. 하도 기가 차서.
가스 중독해서 죽었다가 깨어나서 소견이 났다면 선방에다 연탄불 잔뜩 피워 놓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진을 하다가 한 철 두 철 알뜰히 하면 무엇인가 무슨 공안도 이를 것 같고, 공안을 보면은 환희 막힘이 없고, 자기 나름대로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진공(眞空)의 이치(理致), 공(空) 도리, 공의 이치를—일체(一切)가 다 공(空)하고, 돌이나 나무나 그 나름대로 '내가 돌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것이 공(空)한 것이고, 저 해도 '내가 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 해는 해 그대로 그 자체가 공(空)한 것이다.
부처나 중생(衆生)이 둘이 아니고, 사람과 축생이 둘이 아니고, 악(惡)과 선(善)이 둘이 아니요, 밤과 낮이 둘이 아니요, 일체가 다 둘이 아닌 이것이 바로 공(空)이 아니고 무엇이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일러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입니다"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일러라"
"무(無)"

'무엇이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놈이 공(空)했으니 거기에 무슨 딴 답(答)이 있을 것이냐' 이래 가지고 무슨 공안(公案)이든지 그렇게 이르기로 하면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무엇이 맥힐 것이 있으며, 참구(參究)할 것이 무엇이 더 있느냐?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오면, "참, 공부를 애써서 하다 보면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지고 본인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여. 착각이니,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 현중현 도리를 바로 봐야지 그런 공(空) 도리,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것 가지고서는 도저히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초견성을 했느니, 한 소식을 했느니' 이러한 스스로 그런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앉었고, 꺼뜻하면은 다른 도반이나 신도들한테 자기는 '초견성을 했다'고 이런 소리하고.
이러한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살림을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그런 소견을 가지고 있는 한(限)은 바른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서장(書狀)』을 배우신 분은 다 아시겠지마는, 증시랑(曾侍郞)이 대혜선사(大慧禪師)한테 묻는 편지(便紙)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선지식(善知識)에 참(參)해 가지고 이 참선법(參禪法)을 들었는데, 이십에 결혼을 하고 또 벼슬을 하는 중에 이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를 못하고 그럭저럭 이렇게 늙었습니다.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입지(立志), 뜻을 세우고 기어코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해야겠다고 하는 이 발원(發願)은 실로 그럭저럭한 생각이 아니고, 깨닫지 못하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고인친증처(古人親證處)에 이르러야만 휴헐지지(休歇之地)를, 큰 휴헐지지를 삼을까 하나이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삼을까 하나이다' 이러한, 그 편지 가운데에 이런 마디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차라리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는 깨달음을 삼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증시랑(曾侍郞)은 속가(俗家)에 선비요, 벼슬아치로서 이렇게 철저한 발원(發願)을 했습니다.
하물며 정법(正法)을 믿는 납자(衲子)가, 최상승(最上乘)을 믿는 불자(佛子)로서 정진하다가 잠깐 무슨 소견(所見) 난 거, 공안(公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구경(究竟)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어찌 '초견성'이니, '한소식'이니 하고 '알았다'는 생각을 속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은 사람은 결단코 이러한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삼어서 되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도,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소승사과(小乘四果) 중에 최고의 지위(地位)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더라도 '내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라, 어찌 그것이 참 아라한(阿羅漢)이겠느냐.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가를 하겠느냐.

실지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될 텐데, 하물며 바른 깨달음을 얻지도 못하고 정진하다가 슬쩍 지내가는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일시적(一時的)인 소견을 어찌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감히 이름을 붙일 것이냐 그 말이거든.
우리가 얻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증(證)하지도 못한 것을 '증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하고 남에게 뽐낸다면, 어찌 그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목표로 하고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라 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온통 사기로써 업(業)을 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불법문중에서, 이 최상승(最上乘)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학자(學者)는 결단코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이며, 불조를 속이지 말 것이며, 중생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어떠한 소견이, 설사 자기도 기약하지 못한 가운데에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否定)을 해 버리고 언제나 백지(白紙)의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 알뜰하게 짬지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처음~19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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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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