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게송)산중하사기~ / 이 공부는 되고 안 되고 헌 것을 전혀 따질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 고기 눈깔을 가지고 야광주(夜光珠)로 착각하면 안된다.
〇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화두를 들고 참구를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산중(山中)입니다. 〇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인연이 있어서 사람 몸으로 태어나고,또 이렇게 불법(佛法)을 만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한 생각 돌이켜서 본래 갖추어져 있는 도리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는 환하게 열려있는 것입니다.
〇‘과거에 모든 부처와 조사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다. 똑같은 범부였었지만,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다.’ 〇그런데 착각해서는 아니 될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나오는 그림자를 붙잡고 자기라고 착각을 허는 수가 있습니다. 〇‘도적을 나의 자식으로 착각을 하고, 고기 눈깔을 가지고 야광주(夜光珠)로 착각하는 거와 같다’ 이렇게 고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중(山中)에 하사기(何事奇)요, 석상(石上)에 송백다(松柏多)로구나. 산중(山中)에 무슨 일이 기특한고? 돌 위에는 송백(松柏)이 많구나.
취적기우자(吹笛騎牛子)여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로구나. 젓대를 불며 소를 타고 가는 자여, 동쪽 서쪽으로 임의(任意)대로 자유자재한다.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산중(山中)입니다.
시장 바닥이 되었건, 종로 사거리가 되었건, 농촌이 되었건, 주택지가 되었건, 절 마당이 되었건, 버스 안이 되었건, 전철 안이 되었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참구(參究)를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그 자리가 바로 산중인 것입니다.
첩첩산중 깊은 고을에 있으되 화두를 놓쳐 버리면은 그곳은 시장 바닥이요, 삼도(三途)-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의 삼도의 구렁텅이요.
설사 지옥 속에서라도 화두를 매각(昧却)허지 아니하고 의단이 독로하고 성성(惺惺)하면 바로 지옥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 內院宮)이요, 선방(禪房)이요,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는 것이여.
젓대를 불며 소를 타고서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젓대는 무슨 젓대냐? ‘구멍이 없는 젓대’여. 구멍이 없는 젓대를 불면, 동서남북 어디로 가나 맥힐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어.
오늘은 갑자(甲子)년 가을 산철 결제날입니다. 산(散)철 결제(結制)라는 말이 최근에 생긴 말이어서 매우 생소하게 들릴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원래 결제(結制)라 하면,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서 석 달 뒤인 7월 15일에 해제(解制)를 해. 이것을 하안거(夏安居)라 그리고. 겨울은 음력 10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이듬해 정월 15일에 해제를 하는데, 그 겨울 석 달 동안을 동안거(冬安居)라 그럽니다.
원래 안거(安居)라 하는 것은 인도에서부터 생겨난 것인데, 인도는 일 년 중 비가 많이 와서 장마가 계속되기 때문에, 스님들이 숲속의 나무 밑에서 모두 그런 데서 정진을 허시는데, 장마철에는 그런 숲속에서 정진을 헐 수가 없어서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이런 장자(長者)나 또는 신도들이 지어서 바친 그런 수도원에 모여서 그 비 오는 계절을 지내는 기간입니다.
그것을 안거라 그러는데, 중국·한국·일본은 여름에 비 오고 더울 때 석 달과 겨울에 눈이 오고 매우 추울 때 석 달, 1년에 두 번씩을 안거를 하는데, 근자에는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이 봄 산철 두 달, 가을 산철 두 달,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이 생겼다.
왜 생겼냐 하면, 7월 15일에 여름 해제를 하고 10월 15일 겨울 결제헐 때까지 석 달 동안 마땅히 머물러 있을 만한 곳이 없어. 정진은 계속해서 허고 싶은데, 일정한 데에 자리를 잡고 정진을 헐 만한 데가 마땅치를 못해서, 그 석 달 동안을 이리 가도 편틀 못허고, 저리 가도 편틀 못허고. 그러헌, 그 정진은 하고 싶으나 자리가 마땅치 않은 그 산철 동안을 계속해서 정진을 허도록 허기 위해서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을 허게 되었습니다.
이 산철 결제를 허고 보니, 그 석 달 동안을 장소가 마땅치 안 해서 그 방황을 하던 선객(禪客) 스님들이 그 두 달 동안을 착실히 정진을 허니까 매우 정진에 유익하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용화사 선원이나 봉암사 선원이나 기타 다른 선원에서도 이렇게 산철 결제를 몇 군데 허게 되았습니다.
어떻게 허면은 정진을 간단없이 한결같이 할 수 있을까?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은 꼭 여름 결제 동안만 하고 또 겨울 결제 동안만 하고, 그 나머지는 안 해도 괜찮은 것임사 구태여 산철 결제를 헐 것이 없지만, 결제·해제 상관이 없이 정진은 한결같이 해 나가야 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산철 결제를 허는 것이 퍽 효과적인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10분29초)
방금 조실스님 녹음 법문을 통해서 이 결제 법어를 다 들어 마쳤습니다. 더 이상 헐 말씀이 없지만, 이 자리에는 처음으로 참선을 허기 위해서 일부러 용화사를 찾아온 청신녀(清信女)도 계시고, 또 강원에 다니다가 강원을 졸업하고 또 이제부터 참선을 허고자 하는 그러헌 수좌(首座)도 있고, 처음으로 선방에 나와서 아직은 참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아지 못해서 안타까와하는 그러헌 스님도 있고 해서, 오늘은 이 참선을 해 나가는 아주 요긴한 요점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선(參禪)이라 허는 것은 사람 사람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져 있는, 조금도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에 손색이 없이 완전무결하게 갖추어져 있는 그 도리(道理).
그것이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손을 가지고 오그리면 주먹이 되고, 펴면 손바닥이 되는 거와 같애. 쥐고 싶으면 쥐고, 손을 펴고 싶으며 펴고, 누가 그것이 어려웁다고 헐 것이냐 그말이여. 조금도 힘 들일 것이 없어.
이와 같애서 참선도 원래 내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어서 새로 찾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이지만, 무량겁래(無量劫來)로 '한 생각' 미(迷)한 탓으로 해서, 심(心)·의(意)·식(識)-마음과 뜻과 식이 제멋대로 놀아나 가지고 그 심·의·식, 제멋대로 놀아난 그놈의 장난으로 해서 나의 본분을 망각(忘却)해 버렸다 그말이여.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러헌 도리를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해 버렸기 때문에, 그 망각헌 그 탓으로 해서 육도(六道)를 본의 아니게 돌고 돌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을 지음으로 해서 더욱 치성하게 고초를 받게 되고, 이렇게 허기를 무량겁 동안을 지내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인연이 있어서 사람 몸으로 태어나고, 또 이렇게 불법(佛法)을 만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한 생각 돌이켜서 본래 갖추어져 있는 도리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는 환하게 열려있는 것입니다.
내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라 하나도 힘들 것이 없지마는, 무량겁으로 윤회를 허면서 지은 악업이 솜털 얽히듯이 얽혀 가지고, 내가 내 마음이면서 내 마음대로 못허고, 내가 내 뜻을 내 마음대로 못허고, 내가 내 알음알이를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겨울에 얼음에다 물을 찌트르면 찌클수록 그 얼음 덩어리가 불어나듯이, 우리의 심(心)·의(意)·식(識)은 무량겁 우리의 지은 업에 의해서 얽힌 데 또 얽히고, 얽힌 데 또 얽히고 해 가지고, 헤치고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어찌 해 볼 수 없도록 그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헐라면 정말 쇠로 지어 부슨 쇠뭉텡이와 같이 이를 악물고 죽기로 각오를 하고 대들지 아니하면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해결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근기(根機)가 약하니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내가 말세(末世)에 태어난 업보(業報) 중생으로서 감히 그런 참선을 해서 될 것인가?’ ‘여자로 태어나 가지고 어떻게 그러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견성성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건강이 좋지 못허니 어떻게 가행정진(加行精進)·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나이가 이렇게 늙었으니 어떻게 내가 공부를 헌다고 해봤자 목적을 달성헐 수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경(經)도 보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확철대오를 해서 무량 중생(無量衆生)을 제도(濟度)헐 것인가?’ 이러한 등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자포자기허는 그러헌 자신 없는 마음으로 대들어 봤자, 물어볼 것도 없이 조금 해보다가 무엇이 잘 안되면 스스로 물러서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 공부는 되고 안 되고 헌 것을 전혀 따질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다’고 허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본래 내가 부처인데 그것 찾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인가?’ ‘과거에 모든 부처와 조사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다. 똑같은 범부였었지만,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다.’ 표현이 ‘성품을 보았다’ 또는 ‘부처를 이루었다’ 허지만, ‘본래 내가 부처’라고 허는 사실을 확인한 것뿐인 것입니다.
견성(見性)했다고 하니까, 미간(眉間) 백호(白毫)가 튀겨져 나오고, 몸에서는 방광(放光)을 하고, 육신통(六神通)을 자유자재로 행사하고, 이렇게 굉장히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존재로 생각허기가 쉽지만은,
말할 줄 아는 놈, 들을 줄 아는 놈, 성낼 줄 아는 놈,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 하고, 천 년 이천 년 과거로도 갈 수도 있고, 미래로도 갔다왔다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한 놈,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것입니다.
그런데 착각해서는 아니 될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그 본래면목에서 나오는 그림자를 붙잡고 자기라고 착각을 허는 수가 있습니다.
성내고 욕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허는 것은 그 나의 본래 갖추어져 있는 ‘한 물건’의 한 작용이 될지언정, 그 놈을 바로 나의 본래면목이라고 우리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인식을 하는 것은, ‘도적을 나의 자식으로 착각을 하고, 고기 눈깔을 가지고 야광주(夜光珠)로 착각하는 거와 같다’ 이렇게 고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혀를 통해서 맛보는 놈. 그놈을 여의고 찾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 알면 ‘아! 바로 이놈이 이놈이로구나. 이놈이 그놈인데, 찾을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속단(速斷)을 허게 되면, 이것은 이 최상승법을 잘못 인식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처음~22분17초)
*(게송) ‘산중하사기~’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66 ‘고운(孤雲)의 글자를 모음’ ‘목암(牧庵)’ 게송 참고. *젓대 ; ‘저(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적(笛).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매각(昧却) ; 잊어버리다. (지혜가)어두워지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영산회상(靈山會上) ;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구멍이 없는 젓대 ; 무공적(無孔笛). ①무저선(無底船)·몰저선(沒底船)·무영수(無影樹)·몰현금(沒絃琴)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기원정사(祇園精舍)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정사의 약어(略語). 중인도 코살라국(國)의 수도 사위성(舍衛城:슈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동산에 지은 절. 이는 ‘기타태자의 동산에 수달(須達:給孤獨長者)이 지은 승원’이라는 뜻인데,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란 ‘고독한 이들에게 보시를 많이 한 부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 ; 마가다국(magadha國)의 왕사성(王舍城) 부근에 있던 불교 최초의 사원.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때, 칼란다(kalanda) 장자(長者)가 붓다에게 기증한 죽림 동산에 빔비사라(bimbisāra) 왕이 지어 붓다에게 바친 정사.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청신녀(清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수좌(首座)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도리(道理) ; 이치(理致).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를 꿰뚫고 있는 법칙.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진리. 진리와 결합된 이론이나 증명. 타당한 이치. *심의식(心意識) ; 심(心 citta) · 의(意 manas) · 식(識 vijñāna)의 세 낱말을 합친 복합어. ①초기 불교에서는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동의어로서 인식 주관 또는 인식 작용을 뜻함. ②유식설에서는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의(意)는 말나식(末那識), 식(識)은 육식(六識)을 뜻함.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백호상(白毫相) ; 부처님의 32상(相) 중 하나. 부처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오른쪽으로 말려 있고 여기에서 광명을 발한다고 한다.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②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④타심통(他心通) ⑤숙명통(宿命通) ⑥누진통(漏盡通).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야광주(夜光珠) ; 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구슬. *속단(速斷) ;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판단을 내림.
§(240)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찾는 그놈을 되찾는 것」 /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라도 붙으면 안 된다 /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 해 가야.
〇‘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〇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〇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거와 같애요.
〇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 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송담스님(No.240) - 84년 하안거 결제 및 백일기도 입재 법회에서. (용240)
약 12분.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이 참선인데,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는다」 그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인데, 일상생활에 앉고 서고 눕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도 내고 슬퍼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인데, 이것이 일상생활이거든.그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이 몸뚱이를 끌고 서울도 가고, 서울에서 요리 끌고 오기도 허고, 이 몸뚱이를 시켜서 성도 내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말도 시키기도 하고, 또 밥도 먹으라 그러고, 그 안에서 조정하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는 없는데, 분명히 이 몸뚱이 안에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조종하는 놈이 있다 그말이여.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이뭣고?’ ‘대관절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을 허지만,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허는 이놈이 바로 무엇이냐?」 이거여. 「‘이뭣고’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찾는 놈을 되찾는 것’이거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종일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허라는 것은 아니여.
‘이뭣고?’ 이렇게 허되, 그 속의 뜻은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말이거든. 그러나 실지로 헐 때에는 자꾸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러라는 게 아니여.
또 뭣헌 분은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이 있다」 그렇게 내가 말씀을 했더니, 한 번 할 때에 육백만 번이면 열 번을 허면 육천만 번이고, 또 백 번을 하면 육억 번이다. 그래가지고 내가 백 번이야 그까짓 것 1분 동안에 백 번을 하면 10분 동안이면은 천 번을 할 수가 있고 허니까, 그것을 육백에다 곱하면 이렇게 되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갖다가 수없이 그렇게 하는데, 그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말이거든.
한 번을 하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한 그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으로 하라는 거지. 입으로 그저 횟수를 많이 채우라는 말씀은 아니거든. ‘이뭣고?’
그리고 ‘간단(間斷)없이 하라’ 그 말도,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소리가 끊어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어요.
이 참선이라는 게 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기도 참 어렵고, 또 그것을 방법을 바르게 배우기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웁고 간단한데 실지로 해보면 이 화두(話頭)를 바르게 들 줄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3년씩 또는 10년씩 선방(禪房)에 다니면서도 또 그 공부를 하셔도 그 진짜 화두를 올바르게 들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어 버린다면 견성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성불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생사해탈하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不得已)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부득이 해서 ‘성불(成佛)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사실은 생사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는 것이고, 깨달라야 할 법(法)도 없고, 도(道)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해탈해야 한다’하면, ‘생사해탈’이란 말에 딱 국집(局執)을 하고, ‘견성을 해야 한다’하면 그 견성이라고 허는 말에 꽉 국집을 하고, ‘성불을 해야 한다’하면 그 성불이라는 말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그 국집하는 찰나에 화두를 놓치게 되고 자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여.
‘견성성불해라,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화두를 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자기를 관조(觀照)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말에 떨어지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안에 있는 파리를 문을 닫고서 파리를 내키면 그 파리가 -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가서 붙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붙고, 동쪽 벽의 파리를 내키면 서쪽 벽에, 서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남쪽에 가서 붙고, 이래가지고 그 파리 내키면 반드시 어디 가서 또 붙는다 그말이여.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어디에라도 붙으면 안 되거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만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 해 가야지.무엇이 좋다고 한다고 해서 그 좋다고 하는데 붙으면 안 돼.
이렇게 오늘 갑자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요식에 사부대중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 법문(法門)을 듣고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법문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생각이 떨어진다면, 그건 좋은 생각에 집착했더라도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옳지 못한 생각에 집착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한 마음이 떨어진다면 여기까지 오셔서 법문을 들은 공덕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무슨 법문을 들었어도 그 법문에 국집을 하면 좋은 약을 먹고서도 그 약에 중독(中毒)이 된거와 같애요. 그 약을 먹은 것은 속에 병이 떨어지라고 먹는 것이지, 그 약을 먹고 약에 중독이 되서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그 약을 차라리 안 먹은 것만도 못하거든.
오늘 법요식뿐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경전도 역시 마찬가지고,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설하신 모든 법문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법(法)에 국집하면 - 아주 신심 있는 이는 그 법에 매우 깊이 국집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 국집을 한다면 부처님 법문을 옳게 가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했고 금강경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마는, 법(法)이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이다. 그 배는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강을 건너가지고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이여. 「법에 국집해도 못쓰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 금강경에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기의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아니 되거든.법문을 들을 때일수록 자기의 화두가 더욱 성성(惺惺)하게 잘 들려져 있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판치생모」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정전백수자」하시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을 해야 하거든.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법문을 들어보면 법문이 더욱 더 잘 들리고, 비단 법문 들을 때뿐만이 아니라, 생활을 하면서 - 밥 먹을 때에도 그렇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차를 탈 때에도 그렇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그 화두가 항시 들려져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그렇게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21분46초~33분18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관조(觀照) ;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내키다 ; (사람이 무엇을)공간을 넓히려고 바깥쪽으로 물리어 내다.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오백칠십칠 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백오십~이백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 p53 에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〇교(敎)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허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고,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허면 교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이라 이 말씀이여.
〇‘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또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만한 그런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〇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먼저 찾아야만 된다고 그렇게 강력히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송담스님(참선법C)(No.184) - 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2.10.03)(77분)에서.(용184)
약 19분.
참선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꼭 머리를 깎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건 없건, 누구라도 일어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키면,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을 돌이켜서 보리(菩提)로 돌아오는 길이고,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해탈 언덕으로 건너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방법이 너무 쉬웁고 너무 평범하고 너무 간단해서,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엇을 연구허기를 좋아하고 이론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하는 그런 현대 학문을 한 지성인들은, 그 재미도 없고 만날 해봤자 답답허기만 하고, 무엇이 알아진 것도 아니고 그러니, 차라리 그러헌 참선을 허기보다는, 금강경이나 유마경이나 또는 법화경이나 그러헌 부처님 경전을 읽고 그것을 연구하고 해석을 하고, 교리적으로 연구를 허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고, 알아진 것이 있고, 또 누구 앞에 자신있게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헐 수도 있고, 그러니 대부분 이러헌 지성인들이 교리적으로 이렇게 연구허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선은 3년을 허거나 10년을 해도 해 갈수록 가슴이 답답허고 알 수가 없고 알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무엇이 알아지면 못쓴다고 그러고, 그러니 누구 앞에 3년 동안 내지 10년 동안 참선을 했으면서도 ‘참선이 무엇이냐?’ ‘어떻게 허면 깨달을 수가 있느냐?’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달으며 어떻게 되는 것이냐?’ 누가 물어봐도 ‘아, 나는 잘 모른다고’ 모른다고 대답허기가 참 창피허지 않느냐?
그러니 경(經)을 공부를 하고 외우고 해석하는 교리적으로 공부를 허면, 자기도 차츰 1시간 공부허면 1시간 공부헌만큼 얻은 바가 있고, 한 달을 공부허면 한 달을 공부헌만큼 무엇이 알아진 것이 있고, 누구 앞에 얘기를 허면 사람들이 모다 발심을 해서 불교가 참 좋다고 이렇게 따라와 주고, 그래서 경(經)을 공부를 허는 것이 좋다.
그래 가지고 참선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고 교(敎)만을 갖다가 숭상하는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면 교(敎)와 참선(參禪)은 다른 것이냐?
교(敎)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法門)이고, 참선(參禪)은 부처님께서 나를 깨닫기 위해서 지도하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修行法)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 수행을 바르게 허기 위해서 설하신 부처님 법문이 경전이라.
그러면 ‘경전과 수행해 나가는 수행법인 참선과는 둘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둘로 노나서 ‘이것은 교(敎)고 이것은 선(禪)이다’ ‘선이 더 좋고 교가 더 나쁘다’ ‘교가 더 중요하고 선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를 놓고 분쟁을 하고 비방을 하고 차별을 둔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말씀이여.
교(敎)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허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고, 참선을 올바르게 허면 교(敎)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 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이라 이 말씀이여.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때부터서 달마 스님에 이를 때까지 인도(印度)에 있어서는 무엇이 선종(禪宗)이고 누구는 교종(敎宗)이고 그러헌 파당(派黨)이 없었다 이 말씀이여. 가섭존자나 아난존자나 상나화수 해 가지고 28대 달마 스님에 이르기까지 선사(禪師)이면 동시에 교리에도 다 통달했고 그런 것이지.
일부 어떠헌 선(禪)에는, ‘선(禪)은 가섭존자(迦葉尊者)에 의해서 전해졌고 교(敎)는 아난존자(阿難尊者)에 의해서 전해졌다’ 이렇게 말을 헙니다만은,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고 출가해 가지고 평생 동안 부처님을 시봉을 허면서, 부처님의 법문을 다 듣고서 너무 총력(聰力)이 좋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그 많은 경전을 한 구절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조르르르르 다 외웠습니다.
외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경전을 결집(結集)을 헐 때, 아난존자의 입을 통해서 그 많은 경전이 줄줄줄줄줄... 외웠습니다. 그렇게 아난존자가 한 구절씩 한 구절씩 외우면 5백 명의 아라한(阿羅漢)들이, 대도(大道)를 성취한 성현들-그 아라한들이 ‘과연 틀림이 없이 우리도 그렇게 들었다.’ 이렇게 증명을 험으로써 한 구절씩 한 구절씩 부처님의 그 경전이 결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것이지 아난존자에 의해서 교종(敎宗)이라 하는 그러헌 파(派)가 별도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인 것입니다. 아난존자는 교종의 종주(宗主)가 아니고, 내나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받은 제2대 조사(祖師)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부처님의 수제자(首弟子)인 가섭존자에게 전해졌고 그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그 ‘참나’를 깨닫는 그 정법(正法)의 법등(法燈)을 아난존자에 전했고, 아난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께 전했고,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 스님까지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교(敎)는 아난존자에 의해서 전해졌고 선(禪)은 가섭존자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말은 전혀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은 교(敎)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훌륭한 법이라면, 어째서 ‘경을 보는 것보다는 참선을 하는 것이 좋다’고 용화사에서는 법회 때마다 그런 말씀을 허니 왜 그랬느냐? 용화사에서도 금강경 또는 반야경 또는 법화경, 화엄경 이런 경을 갖다가 경 산림(山林)을 해서 경에 대한 해설도 하고 강의도 하고 허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
이러헌 생각을 허실른지 모르지만, 그 경은 그 분량이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그 팔만대장경이라고 허는 방대한 경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놈을 다 읽고 해설을 헌다해도 다 볼 수가 없는 것이고 더군다나 그것을 낱낱이 다 이해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현재 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경이 한문으로 다 번역이 되어 있어서 한문을 여간 잘하는 사람 아니고서는 읽어도 다 알 수가 없고, 요새 차츰 또 경전이 번역해 나옵니다마는 번역해 놓은 경을 읽어도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읽어도 알 수 없는 경을, 다 또 읽을 수도 없는데 그것을 읽기만 하다가 우리가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직접 알기 어려운 그 경을 읽고 공부해서 대관절 부처님이 어떠헌 말씀을 했으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수행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것인가를 자기의 힘으로 경전을 읽음으로써 알려고 허다가는 죽을 때까지 읽어도 바른 수행법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경을 보면 이렇게 허라고 말씀을 허셨고, 또 저 경을 보면 저렇게 허라고 말씀을 허셨고, 경마다 보면 그 경이 최고라고 말씀을 허셨으니, 대관절 그 경은 다 볼 수는 없고 어느 경 한 권이나 두 권만 봤으면 좋겠는데 경마다 그 경이 제일 좋다고 써졌으니, 어떻게 우리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말씀이여.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 경을 읽어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갈려고 허기보다는, 이미 그러헌 경을 잘 공부를 했거나 또는 올바른 수행법을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가지고 자기도 옳게 수행을 해서 옳은 수행법을 아는 그러헌 선지식(善知識)에게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수행법을 직접 지도받아 가지고 당장 그 날부터서 수행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좋은 방법이라 이것입니다.
그 수행법이 책을 봐 가지고서는 해 나갈 수가 없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을 갈 때에도 처음 가는 길은 자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고, 가다가 두 갈래길 세 갈래길 네 갈래길을 만나면은 그 사람한테 물어서 어디로 가는가를 물어서 가야 허는 것인데, 물어보지 않고 간다든지 또는 그 길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물어봐 가지고 잘 모르는 사람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가다가는 어믄 길로 가게 된다 이 말씀이여.
하물며 마음을 닦는 이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여. 마음으로 닦아 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람이 지은 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공부를 지어나가되 처음에 시작은 모다 같은 방법으로 같이 해 나가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해 나가다 보면 각기 다른 경계(境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어떻게 허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쓰여 있지 않습니다.
천상 믿을 수 있는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이 있어야, 처음에 시작할 때에도 그러한 선지식한테 지도를 받아서 허고, 공부를 해 가는 도중에도 항시 옳게 허는가 잘못해 가는가에 대해서 점검을 받고, 어떠헌 이상한 경계가 나타날 때에도 즉각 가서 그 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드리고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를 지도 받아서, 많이 못쓰게 되기 전에 즉각적으로 바로잡어 나가야만 허송세월(虛送歲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삿된 경계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계에 빠져놓으면 나중에 얼마 안 있다가 다른 선지식으로부터 ‘너의 그 경계가 올바르지 못하다’허는 것을 지적을 받아도 그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경계에 맛을 붙여 가지고 깊이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그러헌 경계에서 빠져 나오기를 대단히 아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공력(功力)을 들여서 얻은 경계인데 또 이 경계가 얼마나 좋은데 어떻게 이 경계를 아니라고 허며 벗어날 수가 있을까? 나는 못 버린다’해 가지고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 말을 곧이듣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이 출현을 해도 그 사람은 제도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공부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바른 스승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 가지고 옳게 시작을 해야만 허고, 중간 중간에도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해서 점검을 받아야 하고 또 어떤 특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나 또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서 인가(印可)를 받아 가지고, 깨달은 뒤의 보림(保任) 수행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직접적으로 지도를 받아야만 부처님과 똑같은 또 조사(祖師)와 똑같은 그러헌 완전한 수행의 목적지에 도달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그 혈맥론(血脈論)에 말씀 허시기를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다’. 이 도법(道法)에 있어서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또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만한 그런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고,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도 말씀을 허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먼저 찾아야만 된다고 그렇게 강력히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31분47초~50분15초)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보리(菩提) ; ‘bodhi’의 음사(音寫). 각(覺)•지(智)•도(道)라고 번역. 모든 집착을 끊은 깨달음의 지혜.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교종(敎宗) ; 경론(經論)의 문자•어구를 이론적으로 풀이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여러 종파를 통틀어 일컬음. *가섭존자(迦葉尊者), 아난존자(阿難尊者), 달마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파당(派黨) ; 주의(主義)나 주장 또는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인 집단. *시봉(侍奉) ; ①제자 ②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일. *총력(聰力) ; 보거나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 *결집(結集) ;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함께 외어 기억하는 형식으로 모아서 정리한 것.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라 번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산림(山林) ; 절에서 불경(佛經)을 강설(講說)하는 모임. 산림(山林)’의 뜻은 ‘최절인아산(摧折人我山)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너다 나다 잘난체하는 아상과 교만의 산을 허물고, 공덕의 숲을 잘 가꾸라”는 뜻이다. *선지식(善知識) ; 불교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 *구전심수(口傳心授) ;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도록 가르침을 이르는 말. *어믄 ; ‘애먼’의 사투리(전라). 애먼:(일의 결과가 다르게 돌아가)억울하게 느껴지는, 엉뚱하게 느껴지는.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공력(功力) ; 애써서 들이는 정성과 힘.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보림 ; 보임(保任)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184) (게송) 심수만경전~ / 윤회의 근본은 ‘한 생각’ /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〇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헌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허시기 위해서 노력을 허고 계시는 것입니다.
〇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면 -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과보(果報)로 일단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지옥고 받은 뒤에는 - 부처님을 비방한 그러헌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그 공덕으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 수가 있다.
**송담스님(참선법C)(No.184) - 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2.10.03)(77분)에서.(용184)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라, 일어나는 곳마다 바로 거기서 능히 그윽해 버린다.
중생은 경계(境界)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점점 생각이 벌어져 가지고 가지가 쳐서 그 생각이 점점 발전을 해 가지고, 그 생각이 얼굴에 표현이 되고 나아가서는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큰일을 저지르게 돼. 그래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슬픔의 구렁에 빠지기도 하고, 노여움의 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물론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색상을 보던지 어떠헌 경계를 닥치면 그 경계에 따라서 생각이 - 저것이 차 소리라든지, 비행기 소리라든지, 또는 어린애 소리라든지, 저건 꽃이다, 붉다 검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헌 경계에 따라서 그러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헌데,
그 일어나는 그 때에 그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능히 경계에 휩싸여 끌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본성(本性)을 인득(認得)해 버린다.일어나는 바로 그 경계를 발판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 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이것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여.
수류인득성! 수류인득성을 해 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기뻐헐 것도 없고 근심헐 것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 그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이 세상에 나왔다가 한평생 살다가 죽어가고, 죽었다가 다시 또 자기의 업(業)에 따라서 어느 곳에 태어나면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허기를 무량 억천만 겁을 그렇게 윤회를 허면서 금생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육도윤회(六途輪廻)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면 「한 생각」 때문에 그런 거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천당에도 올라가고, 지옥에도 떨어지고, 축생도 되고, 또는 사람도 되고, 귀신도 되고 그런 것이여.
그런데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허느냐?
여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헐 수도 있고, 축생이 될 것을 미리 방지헐 수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싶으면 지옥에 가고, 독사가 되고 싶으면 독사가 되고,육도윤회(六途輪廻)를 자유자재로 헐 수가 있는 그러헌 능력을 우리는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여.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해 가지고 원치도 아니한 지옥에도 떨어지고 독사도 되고 귀신도 되고 수라(修羅)도 되고 이러허지,참으로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헐 방법만을 분명히 알아서 실천을 해 나가면 우리는 지옥에 갈 필요가 없어.
천당에도 가고 싶으면 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서 자기도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갖다가 제도헐 수 있는 그러헌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여.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인데,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허느냐? 슬픈 일을 당허든지 또는 속상한 일을 당허든지, 괴로운 일을 당하던지, 또는 기쁜 일을 당하던지, 어디에서 언제 어떠헌 일을 당하더라도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허는 것입니다.
금방 녹음법문을 통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 바로 가장 빨리 어떠헌 근기(根機)라 하더라도,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또는 성질이 급해서 성을 잘 내건,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부처님과 차등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생각만 두 번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어떠헌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동시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헌다면 거기에서 육도윤회는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그 죄 많은 사람이 참선을 헌들 어떻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허며 그 뭐 「이뭣고?」 좀 했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그러헌 무서운 많은 죄를 지었는데 지옥에 안 떨어질 수가 있는가? 이러헌 생각을 먹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도업(道業)을 닦아서 이루는 것을 포기허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불보살(佛菩薩)께서는 그러헌 죄 많은 사람을 위해서, 업(業)이 두터운 중생을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을 하셔서 그 많은 법을 설허셨고,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허신 그 부처님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식으로 부처님으로 출현허시는 부처님뿐만이 아니고, 온 법계(法界)에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형형색색으로 부처님과 보살님과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그러헌 성현들이 수없이 천백 억 화신(化身)을 나투면서 우리의 중생 앞에 출현을 해 계시는 것입니다.
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헌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허시기 위해서 노력을 허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 업이 두터운 우리 보잘 것 없는 중생도 아들과 딸을 많이 두면, 공부 잘하고 착하고 좋은 아들은 마음으로 흐믓허고 기쁘고 그렇지만, 그 공부를 잘 못헌다든지, 몸이 어디가 불구자라 한다든지, 마음이 바르지를 못해서 못된 일을 많이 헌다던지 허는 그러헌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는 밤잠을 못 주무시는 것입니다. 몇백 배, 몇천 배 그 자식에게 더 마음이 더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바로 잡아줄까? 어떻게 이 병신을 갖다가 이 바로 잡아줄 수가 있을까? 자나깨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헌 뜨거운 사랑과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미루어보면 불보살과 성현들께서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허면 이 중생을 제도하고 바른길로 이끌고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허게 해 줄 수가 있을까?얼마나 그 생각을 뜨겁게 가지고 계실 것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헌 종교에서는 자기만을 믿어야지 자기를 배반하고 믿지 않는 중생은, 자기를 비방하거나 자기를 배반하는 그러헌 사람은 3대까지 그 벌을 주어서 멸종을 시킨다고 허는 그러헌 외도(外道)의 경을 내가 봤습니다마는 우리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보복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 보고도 보복을 허지 말어라. 보복으로써 원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허면 또 다시 다음 기회에 상대방이 나에게 또 보복을 허게 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또 보복을 허고 해서 점점 점점 미움과 원망과 싸움은 더 커져서 나중에는 온 세계가 싸움의 세계가 되아서 지옥(地獄)으로 변헐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원수와 싸움을 없앨라면은 보복을 허지 말고, 자비로써 바른 마음으로써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어떠헌 방법을 쓰면은 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자비심을 가짐으로써 용서함으로써 싸움은 없어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허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허신 부처님께서 당신을 믿지 아니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안 믿는다고 해서 우리를 지옥의 불구덩이에다 집어넣거나,더군다나 직접 부처님을 비방하고 욕헌 사람을 지옥에다 밀어넣지 아니헐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자손까지 3대까지 멸종을 시킨다고 허는 그러헌 일은 우리 부처님께는 꿈에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면 - 그러면 아무리 불법을 비방허고 삼보(三寶)를 비방해도, 그러면 지옥에도 안 가고 상관이 없구나. 인자는 내가 마음놓고 불법을 좀 비방을 해야겠다. 그러헌 생각을 먹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마는, 불법을 비방하면 지옥에 가기는 갑니다.
부처님이 그 불법을 비방하는 중생이 미워서 부처님이 지옥에다 갖다가 밀어넣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지옥에 갈 짓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업(業)에 의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쁜 짓을 헌 것이 아니고 ‘부처님을 비방했다’한 그 인연(因緣)으로, 그래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비방함으로써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헌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부처님을 비방하는 그 과보(果報)로 일단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지옥고 받은 뒤에는 - 부처님을 비방한 그러헌 형식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그 공덕으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 수가 있다.
그러니 부처님과 만약에 좋은 인연, 불법을 믿고 불법을 찬양하고, 많은 사람에게 불법의 인연을 맺어줄라고 노력을 헌, 그러헌 좋은 인연을 맺는 사람이라면,과거에 지은 죄로 지옥에 갈 만한 죄업을 지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지옥고를 면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자기공부를 철저히 해서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허겠다’고 허는 그런 철저한 신심으로 노력을 헌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대도를 성취허게 될 것은 의심헐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51초)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음역어는 ‘갈마(羯磨)’이다. *구렁 ; ①헤어나기 어려운 나쁜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땅이 움푹하게 팬 곳.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육도윤회(六途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천당(天堂) ; ①극락세계(極樂世界)인 정토(淨土). ②하늘 위에 있는 궁전. *지옥(地獄 땅 지/감옥 옥) ; ①고통이 가득찬 세계. 현세에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사후 그 보답을 받는 곳. ②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수라(修羅) ; 아수라(阿修羅)의 준말. 늘 싸움만을 일삼는 귀신들의 무리.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이 무엇고(이뭣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화두를 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敵)•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어울리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敵),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화신(化身) ;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십바라밀(十波羅蜜)의 하나. 보살(菩薩)이 중생을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쓰는 묘한 수단을 말한다.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외도(外道바깥 외/길 도) ; 불교 이외의(外) 다른 교(道). *비방(誹謗) ; 남을 해치려고 흠을 들추어내어 비난하여 말함.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의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말.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과보(果報)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과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〇화두를 들어서 자꾸 화두를 참구(參究)를 허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지게 되고, 마음 길이 끊어져야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여. 다못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참구해 나가. 거기에서 분별심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분별심이 끊어져. 마음 길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〇원만구족(圓滿具足)한 원각(圓覺)을 이루고자 하면, 자비와 지혜와 행원과 이사에 융통(融通)해야 해.
〇화합하는 마음은 어디서 생기느냐? 각자 자기의 소임을 충실히 허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해 나가면, 일부러 화합을 헐려고 마음을 낼 것도 없이 저절로 화합이 되는 것이여.
〇(산철 동안에도) 꼭 결제 중에 하는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정진이 중간에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어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철 여름결제에 연결이 된다 그말이여.그 석 달 동안을 애써서 해 가지고 산철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버리면, 다음 여름 결제 시작하면 다시 또 공부가 새판잽이가 되는 거여. 그렇게 되면은 앞으로 10년, 20년, 일생을 선방을 다닌다 해도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여.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는 것이고, 조사관을 타파해. 참선의 목적은 조사관을 타파해야 하는 거여.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露絕)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마음 길! 화두를 들어서 자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지게 되고, 마음 길이 끊어져야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여.
의리선(義理禪)! 의리로 공안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마음 길이 끊어지기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사구(死句)다, 죽은 참선이다' 그런 거여. 확철대오 할 수 있는 참선이 아니고, 점점 중생의 사량분별을 치성하게 만들어 가지고 참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점점 멀어지는 공부이기 때문에 의리선이나 사구선(死句禪)을 하지 말아라 이거거든.
활구참선(活句參禪)! 일체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가는 짓이 끊어지는, 다못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참구해 나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만을 잡드리 해 나가야 돼.거기에서 분별심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분별심이 끊어져. 마음 길을 끊을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수행을 해 나가는데, 이치(理致)에 치우쳐서 닦아 나가면 적적한 데에 맥혀, 꽉 체하게 되는 것이고. 적적한 데에 처박히게 되는 것이고.또 지(智). 치우쳐서 지혜만을 닦아 나가면, 자비심이 없어져 버리고. 또 치우쳐서 자비만을 닦아나가. 그저 다른 사람만을 위하고 어떻게 허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이렇게 치우치게 자비만을 닦아 나가면, 염습(染習)! 습기에 물들어 가는 염습만을 문득 더 증장시키게 되는 것이여. 다맛 원(願)만을 발하고, 자꾸 발원(發願)만을 해 나가면은 유위(有爲)의 정(情)이 일어난다.
아무리 이치가 좋다고 해도 이치만에 치우치고, 아무리 지(智)가 좋다 해도 지혜만을 치우치고, 아무리 자비가 좋다 해도 자비만에 치우치고, 아무리 발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밤낮 발원만을 하고 - 그래서 이치와 지(智)와 자비와 발원, 이런 것들을 다 겸해서 다 갖추어서 해 나가야 그래야 허물이 없어. 이사(理事)가 융통하고 행원(行願)이 서로 겸해서 자비와 지혜를 겸해서 닦아 나가야, 그래야 정말 대도를 성취한다. 화엄론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래서 이렇게 결제 때가 되면은 방(榜)을 짜 가지고 전 대중이 각기 한 가지 내지 두 가지 이상 그런 소임을 맡아 가지고,그래가지고 그 자기의 소임을 정성껏 다 완수하면서 그 가운데에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돼.
아무 것도 안 하고, 손발 하나 까딱 안 하고, 오직 앉아서 좌(坐)에만 국집(局執)해 가지고, 뭐 울력 조금 있으면 파르르르 하니 속으로 진심(瞋心)을 내고, 짜증을 내고, 옆에서 누가 빠스락만 해도 그러고,남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딸삭 하기를 싫어하고, 그렇게 인색을 허고, 그래 가지고서는 설사 어떤 소견이 나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드라도 그것은 벽지불(辟支佛) 밖에는 되지를 못하는 것이여.
정말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원각(圓覺)을 이루고자 하면 자비와 지혜와 행원과 이사에 융통(融通)해야 해.
각기 자기의 소임을 맡아서 각자 정성껏 하지 아니하면, 그 선방은 밤낮 문제점이 일어나 가지고 여러 사람이 정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 선방에는 주지나 원장이 있어야 하고, 총무와 재무와 교무가 있어야 하고, 또 원주(園主)·별좌(別座)와 채공(菜供)·공양주(供養主)가 있어야 하고, 다각(茶角)이 있어야 하고,또 선방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소임을 맡아 가지고 전체 대중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거든. 화합이 되어야!
화합(和合)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내 마음과 저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돼. 서로서로 존경하고, 서로서로 아끼고, 서로서로 받드는 마음이 그것이 한마음이 되어서 그래서 조금도 신경을 쓸 것이 없어.그러니 거기에 무슨 시비가 일어나며, 누구를 이뻐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승가(僧伽)라 하는 것이여.승가는 인도 발음으로 상카(saṃgha)라 그러는데, 그 상카라 하는 것은 화합이라는 뜻이거든.
수행을 해 나가는데 이십 명, 삼십 명 내지 많은 대중은 중국에서는 오백 명, 칠백 명 대중도 있고, 큰 총림(叢林)은 천오백 명까지도 이렇게 지내는데, 그 많은 대중이 구십 일간을 아무 탈없이 지내게 되는 것은 오직 그 화합하는 마음이여. 화합하는 마음은 어디서 생기느냐? 각자 자기의 소임을 충실히 하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해 나가면, 일부러 화합을 헐려고 마음을 낼 것도 없이 저절로 화합이 되는 것이여.
물과 물을 타면은 바로 하나가 되어 버려, 한 가지 되고. 물과 우유를 타도 이렇게 섞어지는데, 물과 기름은 아무리 타 가지고 저어도 섞어진 것 같은데, 한참 있으면 기름은 물위로 떠버리고, 물은 가라앉아 버린다.
우리가 목적이 같고, 해 나가는 생활이 같고, 우리의 생각이 같고, 그래서 육화(六和)의 원칙! 육화의 원칙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순응하면은 저절로 물과 물이 섞인 듯, 물과 우유가 섞인 것처럼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그렇게 될 때에 석 달 안거가 무장무애(無障無礙)하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하는 마당에 왜 이 이런 말씀을 허냐 하면은 해제(解制)가 바로 결제(結制)거든. 오늘 해제니까, 벌써 걸망짐 모두 다 싸놓고 어디로 가리라 하는 것을 미리 다 며칠 전부터서 장만해 둔 것을 내가 환히 다 알고 있지마는, 해제가 결제거든.
해제인줄 알고 걸망 짊어지고 나가면은 봄바람에 기분 참 좋은 것은 사실이나, 행여나 화두 하나를 놓쳐버리면은 그것이 어찌 훌륭한 납자(衲子)라 할 수가 있겠느냐.
해제해서 터억 걸망을 지고 나가는 바로 첫걸음부터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잡두리를 해 나가야 정말 지난 석 달 동안 올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이고, 걸망 짊어지고 팔도강산을 좁다하고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하고 막 여기저기 싸다니면서, 희희닥거리고 화두는 놓쳐버린다면 그 사람은 석 달 동안 껍데기로만 참선을 했지 속으로는 진짜 참선을 아니한 사람이다.이력서를 내보일 것도 없고, 벌써 허는 행동이 바로 언제나 자기의 이력서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어디 산철 결제 하는 데 가서 있으면은 그런 데 가서 정진을 해도 좋고, 그런 데가 없으면은 인연 따라서 지내되,어디에 가서 어디를 걸어가거나 어느 절에 가서 머물거나, 무엇을 하던지 간에 - 은사스님 절에 가서 일을 거들거나, 어디 다른 친구 절에 가서 거들거나,
무엇을 하건 간에, 어디를 가건 간에,꼭 결제 중에 하는 거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정진이 중간에 중단되지 아니하고, 여일하게 되아 가도록 잘 잡드리를 해야 다음 철 여름 결제에 연결이 된다 그말이여.
그 석 달 동안을 애써서 해 가지고 산철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버리면, 다음 여름 결제 시작하면 다시 또 공부가 새판잽이가 되는 거여. 그렇게 되면은 앞으로 10년, 20년, 일생을 선방을 다닌다 해도 도업(道業)을 성취를 못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28분44초~41분54초)
§(152) 참선(參禪)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이요 자격 / 거울법문 / 다못 바보처럼 「이뭣고?」 이렇게 해야 / 참선•불법(佛法)의 목적은 깨닫는데 있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〇참선(參禪)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이요 자격입니다.지식이 있건 없건 그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쁘고 헌 것도 상관이 없고, 죄를 많이 짓고 안 짓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안 허고 헌 것도 전혀 상관이 없어.
〇참선하는데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 들어가는 거 - 경전에 있는 말씀, 어디서 들은 법문의 말씀, 그러헌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져 들어가는 거,설사 무슨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알음알이지, 깨달음은 아닌 것입니다. 참선의 목적, 불법(佛法)의 목적은 깨닫는데 있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예요.
**송담스님(No.152) (참선법B) - 1981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1.10.04)에서. (용152)
약 21분.
내가 나를 찾는데 - ‘내’라는 게 뭣이냐 허면은, 눈으로 무엇을 보고서 ‘아! 저것이 주장자다. 저것이 마이크다. 저것이 사람이다.’ 그렇게 아는 놈이 있거든.
‘저 산은 푸르다.’ 푸른 줄 아는 놈. 그것이 바로 나의 ‘나’여.또 소리를 듣고 ‘저게 어린애 목소리다’하고 아는 놈.그놈을 여의고 내가 없어. 대관절 거기에서 나를 찾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그때가 바로 나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 바로 그 찰나(刹那)가 나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나를 찾는 기회요. 나를 깨닫는 기회다 그말이야.
그놈을 여의고 내가 없고, 그놈을 여의고 부처도 없고 성품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
눈으로 무엇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선을 할 수가 있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줄 안 사람은 누구나 참선을 헐 수가 있고, 코로 무슨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은 누구도 참선을 헐 수가 있는 것이어서,
참선(參禪)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능력이요 자격입니다.
지식이 있건 없건 그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쁘고 헌 것도 상관이 없고, 죄를 많이 짓고 안 짓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안 허고 헌 것도 전혀 상관이 없어.
눈앞에 모든 물건을 보는 것은 자기가 거울을 하나 놓고 그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얼굴을 보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쁘고 무식허다 하드라도 거울로 떠억 자기 얼굴을 보고서 『대관절 저 사람이 누군고?』 하고 의심헐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거울이라는 것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이 자기 남편이 중국에 갔다 오는 길에 거울을 하나 선사를 했는데, 그 거울을 그 부인이 보고서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면서 ‘중국에 가서 여러 달 있다 오더니 예쁜 각시를 하나 얻어 가지고 왔다’고 대성통곡을 헌다 그말이여.
그래 시어머니가 『아! 대관절 왜 그렇게 우냐? 좋으면 좋게 좋지. 아무리 좋다고 남편이 오랜만에 돌아와서 좋다고 그렇게 통곡까지 할 수가 있느냐?』 며느리가 『아니오, 어머니. 좋아서가 무엇입니까? 중국에 갔다 와서, 나는 잘 갔다 온 줄 알았더니 계집을 하나 뀌어 차고 왔다.』고 그러거든. 그래서 『무슨 계집이 어디가 있느냐?』 『여기 보세요.』 거울을 드리니까, 시어머니가 그 거울을 보더니 『아이구, 어디서 예쁜 각시 커녕은 늙은 년을 어디서 데리고 왔다.』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보듯이, 하늘을 보아도-그 하늘에 뜬 구름을 보면서 그 구름을 통해서 자기를 볼 줄 알아야 하거든. 먼 산에 푸른 산을 보아도 그 푸른 산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자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로 돌아 올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버스를 보고도 그 버스를 통해서 자기로 돌아와야 하고, 어떤 놀고 있는 어린애를 보고도 자기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 어머니 되신 분들은 어린애를 보고는 자기 어린애를 금방 생각할 줄 아실 것입니다.
그렇듯이 그 어린애를 보건, 푸른 산을 보건, 흰 구름을 보건, 버스를 보건 무엇을 보든지 간에 그 본 찰나에 자기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깨달라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부처를 깨달라야 하는 것이다.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기 위한 공부가 바로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뭣고?」 무엇을 보던지 간에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 가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마찬가지여.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아들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디서 어린애 우는 소리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를 듣는 찰나에 죽은 아들을 생각허겠죠.
그와 같이 어떠헌 소리를 들으면 퍼뜩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어렵다 하겠습니까?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이고 잠에서 일어나면 항시 개방되어 있는 것이 귓구멍인데 들으라고 안 해도 언제나 소리는 들려오고 있고, 눈을 떴다하면 언제라도 노란 것 아니면 파란 것, 파란 것 아니면 검은 것, 사람 아니면 짐승, 물건, 집, 장님이 아닌 동안에는 언제나 눈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후각이 이상이 생기지 아니한 사람은 언젠가 무슨 냄새가 들어오던지 들어올 것이고, 무슨 음식을 먹을 때 그 맛을 볼 것이고, 짜고 싱겁고 구수한 것을 알 것이고,
눈도 감고 귀도 막고 코도 막고 입을 막았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생각이 날 것입니다.
지나간 생각, 현재 닥치고 있는 생각, 앞으로 다가올 생각, 사람 생각 아니면 재산 생각 아니면 명예와 권리에 대한 생각, 무엇인가 생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두 번째 다음 생각으로 옮겨가기 전에 「이뭣고?」 「‘이뭣고?’헌 이놈이 뭣고?」 이렇게 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고, 찾는 그놈을 다시 되찾고.
아까 조실스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뭣고?」 저 푸른 산을 볼 때에 「저 산을 보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그 다음에는 금방 「이 ‘이뭣고?’헌 이놈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허는 것입니다.
분별심(分別心), 사량심(思量心), 과거에 책을 보고 알았건, 귀로 들어서 알았건, 눈으로 봐서 알았건, 누구한테 배워서 알았건, 생각해서 알았건, 일체 지식이나 상식 다 이 공부허는 데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 보고 듣고 알고 헌 그러헌 것들을 여기에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놔두고 다못 바보처럼 「이뭣고?」 이렇게 허는 것입니다.
이 참선하는데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 들어가는 거-경전에 있는 말씀, 어디서 들은 법문의 말씀, 그러헌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져 들어가는 거,
설사 무슨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알음알이지, 깨달음은 아닌 것입니다.
참선의 목적, 불법(佛法)의 목적은 깨닫는데 있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참선하는 데에는 ‘무슨 경책(經冊)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하냐?’ 절대로 그렇지를 않고, ‘머리가 좋아야만 하는 것이냐?’ 절대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코가 없으면 똥을 된장으로 알고 집어먹을 만큼 미련헌 것이 오히려 이 참선을 허는 데에는 훨씬 빨리 깨달을 수 있는 면이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떤 조사는 『지옥에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갈랴고 해도 하나도 무서워헐 줄도 모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셔서 아미타불이 오셔서 극락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하나도 좋아헐 줄도 모르고 이러헌 바보가 있다면 당장 내가 인가(印可)를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도인(道人)도 계십니다.
소란 놈이 목이 마를 때 주인이 맑은 시냇가로 끌어다 대주면 소는 의심 없이 그 물을 꿀꺽꿀꺽 마시기만 허면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이 농약이 안 섞여 있을까? 누가 이 물에다가 독약이나 안탔을까? 이 물에는 균이 없을까? 이 물을 마시면 설사를 안 헐까?’ 이러헌 등등 머리가 영리하고 지식이 있는 척하고 이리저리 따지고 재고 그러기 보다는 주인을 믿고 주인이 끌어다가 대주면 여지없이 의심 없이 꿀꺽꿀꺽 마시는 그러헌 순한 소처럼,
『바른 자세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2~3초 정지헌 뒤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해라』하면,
『아무 의심 없이 「이뭣고?」 그렇게만 허면, 무량겁 업이 다 녹아지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도 거기에서 다 항복을 하고, 「이뭣고?」 한마디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功德)과 같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해 나가면 금생에 결정코 ‘참나’를 깨달라서 대도(大道) 견성(見性)을 헌다』 그렇게 말을 들으면,
여지없이 확- 믿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차를 탈 때나 일을 할 때나 한 생각 한 생각 그렇게 순진하게 착실하게 간절하게 공부를 지어간다면 결단코 견성을 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영리헌 것, 참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세지총명(世智聰明), 세속적인 지혜가 영리하고 총명한 사람은 그 사람 도 닦기가 힘들다 그랬습니다. 세상에서는 영리허고 똑똑헌 것을 대단히 참 취하지만 도 닦는 데는 약삭빠르고 영리하고 똑똑한 거 그거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믄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은 도를 닦지 않고 바보·천치(天癡)들만 모여서 참선을 해야겠구나. 나는 바보·천치가 아니고 영리허니까 참선은 해봤자 적성에 안 맞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리해도 영리헌 데에 빠지지 아니하면 그것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아무리 경책을 많이 읽었어도 경책을 읽은 그것에 집착함이 없으면 아무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 아무리 좋은 것도 집착(執着)하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깨달음을 얻어가지고서도 그 깨달음에 집착을 허면 참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보살도(菩薩道)를 증득(證得)한 보살이 「나는 보살도를 증득했다」한 생각을 갖게 되면 이미 보살이 아니다. 나한과(羅漢果)를 증득한 성현이 「나는 나한과를 증득했다」고 허는 생각을 가지면 이미 나한(羅漢)이 아니다.』하는 말씀이 금강경(金剛經)에 있습니다.
그러헌 깨달음을 얻은 성현(聖賢)도 ‘내가 성현이 되았다’고 허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그밖에 무엇에 우리가 집착을 헐 것이 있겠습니까?
얼굴이 조끔 남보다 이쁘게 생겼다고 그것을 집착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잘 생긴 얼굴도 1mm에 십분의 일도 못 될 만큼 얇은 껍데기만 벗겨 놓으면 보기가 흉할 것입니다.
아무리 신체가 건강한 사람도 숨 한 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10분 못가서 내장이 버글버글 썩어 들어가고,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마찬가지여. 아무리 권리와 명예가 많은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또한 마찬가지요.
우리는 아무것에도 그것을 내가 가졌다고 해서 으시대고 뽐내고 남을 업신여기고 그럴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군자는 참으로 이 불법을 올바르게 믿는 보살은 돈이 많을수록에 겸손(謙遜)하고, 지식이 많을수록에 겸손하고, 권리와 명예가 많을수록에 겸손하고, 힘이 셀수록에 겸손을 하는 법인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하나를 가지면 자연히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가졌다, 권리가 있다, 명예가 있다, 지식이 있다’하고 목에다 힘을 주고 뒤로 자지바지해 가지고 남을 업신여기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은 싫어허는 것입니다. 미워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잘못 되기를 고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힘이 세면 셀수록 좋고,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 뭐 하등(何等)의 나쁘다 할 것이 없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언제나 「이뭣고?」를 앞세우고 살아간다면 거기에서 업장(業障)은 소멸이 되고 복(福)과 지혜(智慧)가 증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헌 그렇게도 간단하고 그렇게도 쉬웁고, 누구도 할 수 있는 이 법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20분50초~41분17초)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대성통곡(大聲痛哭) ; 큰 소리로 몹시 슬프게 욺. *자성불(自性佛) ; ‘자성(自性)이 즉 부처’라는 뜻.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 무엇고(이뭣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Amitabha Buddha(無量光佛-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Amitayus Buddha(無量壽佛-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 줄여서 미타(彌陀).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 ; 많은 수의 악마의 군세(軍勢)를 뜻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 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좋은 과보를 받을 선행(善行).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천치(天癡, 天痴) ; ①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선천적으로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하여 어리석고 못난 사람. *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보살도(菩薩道) ; ①보살의 수행. 보살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 깨달음에 이르는 도. ②대승불교.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나한과(羅漢果) ; 아라한(阿羅漢)의 경지. *나한(羅漢) ; 아라한(阿羅漢)의 준말.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敵)•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어울리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敵),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577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현(聖賢) ; 성인과 현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 *으시대다 ; 어울리지 아니하게 우쭐거리며 뽐내다. *업신여기다 ; (사람이 대상을)교만한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다. *겸손(謙遜 겸손할 겸,겸손할 손) ;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 *하등(何等) ; (주로 ‘하등의’ 꼴로 쓰여;뒤에 오는 ‘없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호응하여) ‘아무런’, ‘아무’ 또는 ‘얼마만큼’의 뜻을 나타내는 말.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152) (게송)‘견색비간색~’ / 참선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이기 때문에 대단히 쉬운 것이다.
〇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참선은 대단히 쉬운 것이다. 왜 쉬우냐? 저 먼 데에 있는 것을 찾는 것도 아니요. 저 높고 깊은 데에 있는 것 찾는 것도 아니요. 무슨 산 속이나 바다 속이나 그런 데에서 찾는 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쉬운 것이다.
〇‘앞으로 좀 내가 무슨 참선에 대한 책, 불경(佛經)에 대한 번역해 놓은 책이라도 좀 읽어보리라.’ 그러헌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런 책을 읽고 나서 참선을 헐랴고 허는 생각을 쉬어버리시고,읽기 전에 먼저 참선의 바른 법을 알아 가지고 당장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는 공부 먼저 시작을 허시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52) (참선법B)-1981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1.10.04)에서. (용152)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색(色)을 보되 색(色)이 아니다. 색을 관계치 않는다.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라.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도(道)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무슨 색상(色相)을 보면 ‘하! 저 주장자(拄杖子)가 빛깔이 노랗구나.’ ‘주장자가 굉장히 무겁게 생겼다.’ ‘저 주장자에는 용의 모양이 조각이 되어 있구나.’ 한 주장자를 보고도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한량없는 생각이 거기서 번져 나간다 그말이여.
‘저 주장자는 무슨 나무로 깎아졌을까?’ ‘저 주장자를 깎은 나무는 어디 산에서 비어 왔을까?’ ‘몇 해나 자란 나무일까?’ ‘누가 조각을 했을까?’ 이렇게 해서 한 색상을 봄으로 해서 그것이 계기가 되아 가지고 온갖 생각이 거기서 벌어진다 그말이여.
그런데 도를 닦는 사람은 그러헌 색상을 보되 색상이 아니여. 색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말이여.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라. 어떠헌 소리를 듣되 소리가 아니다.
도(道)를 닦지 아니헌 사람은 문 열고 닫는 소리를 들으면, ‘아! 저 문은 철로 만든 문이로구나. 도롱태가 고장이 나서 소리가 요란히 나는구나. 저 문은 누가 만들았을까? 언제 만들았을까? 들어오는 사람은 누굴까? 왜 들어 올 때 가만히 들어오지 않고 저렇게 요란스럽게 들어올까?’ 이러헌 식으로 해서 하나의 소리를 듣고서 그것으로 인해서 온갖 분별심과 번뇌심과 망상심이 한도 끝도 없이 퍼 일어나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는 가운데에 성을 내기도 하고, 기분을 상하기도 하고, 공연히 지나간 일·얼토당토않은 일이 생각이 나서 속이 뒤집어지기도 하고, 신경질을 내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조용한 시간을 갖지를 못하고,노상 눈을 통해서 마음의 풍파(風波)가 일어나고, 귀를 통해서 마음의 풍파가 일어나고, 한 생각·한 소리·한 색상을 볼 때마다 마음 속이 요동이 되고 난리가 일어난다 그말이여.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렇고 달마다 그렇고 해마다 그래서,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러헌 생활이 계속이 되고 그 결과로써 가는 곳은 지옥 아니면 축생 뱃속으로 들어가고, 이리해서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고해의 윤회가 한이 없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라. 무슨 색상을 보건, 무슨 소리를 듣건 의심이 없는 곳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법왕(法王)이 있는 곳에 도달한 것이다.
방금 우리는 조실(祖室) 스님께서 활구참선법, 참선허는 법에 대해서 매우 간절(懇切)하게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법문을 해 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확성기를 새로 바꿔서 그전에 보다는 좀 잘 들린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콘크리트 건물은 지어서 얼마 안된 동안에는 울린다고 그럽니다.조금 불편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이해를 하시고, 상태가 좀 안 좋더라도 그럴수록에 더욱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서 법문을 잘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선법(參禪法), 이 용화사는 참선법을 핵심으로 해서 항시 전강 조실스님께서 설해 주시던 녹음 법문을 다같이 이렇게 듣고, 또 산승(山僧)도 그러헌 조실스님의 뜻을 받들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올바르게 해서 하루빨리 이 바른 공부길을 잡아서 ‘참나’를 깨닫게 할 것인가' 오직 여기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참선은 대단히 쉬운 것이다. 왜 쉬우냐?
저 먼 데에 있는 것을 찾는 것도 아니요. 저 높고 깊은 데에 있는 것 찾는 것도 아니요. 무슨 산 속이나 바다 속이나 그런 데에서 찾는 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쉬운 것이다.
자기라니?자기가 무엇이여?자기가 어디가 있어? ‘내가 나를 찾는다’고 그러니, 내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으며, 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내’라 하면 이 부모로부터 받어난 이 육신(肉身)을 보통 다 나라고 생각하고,이놈을 잘 멕일랴고 그러고, 또 잘 입힐랴고 그러고, 깨끗이 씻고 이쁘게 꾸밀랴고 그러고, 아픈 데가 있으면 병을 치료헐랴고 그러고, 누가 때리면 안 맞을려고 그러고, 이 육신이 자기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그 놈을 그렇게 아끼고 보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내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이 몸뚱이는 ‘참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가 아니면 나라고 하는 ‘참나’도 의지헐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 안에 있는 참나는 이 육신을 주재하면서 육신을 운전하면서 한 생 동안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육체와 우리의 마음자리를 따로 갈라놓고 볼 수가 없는 것이지만, 편의상 쉬운 방편(方便)을 빌려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육체, 생각 - 이 육식(六識), 육근(六根) 여섯 가지 문(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항시 출입을 허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있지만 ‘내’라 하는 놈이 없다면, 아무리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고. 그 증거를 한번 보자면, 뒤에서 무슨 이야기 허는 말을 아주 거기다 전 정신을 집중을 해서 뒤에서 말허고 있는 말을 듣고 있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앞에 있는 것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책을 펴서 눈앞에다 떠억 들고 있어도 보는 데에 정신을 집중을 해야 책의 글자가 읽어지지,눈을 뜨고 눈앞에다 책을 갖다가 떠억 펴어 놨어도, 귀를 옆에 방에서 얘기허는 소리에다가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그 책의 글자가 하나도 읽어지지를 않습니다.
이 조그마한 가까운 예를 생각해 보더라도,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따로 있다고 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귀 자체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듣는 주인공이 있다고 허는 것을 우리는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눈을 통해서 어떠헌 색상을 보되 보는 데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보는 데에 집착을 허지 아니하고, 보는 데에 생각이 끌려가지 아니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벌써 눈을 통해서 보는 밖의 어떠헌 경계(境界)에 나의 정신 나의 의식이 끌려가게 되면, 나는 집을 비워 놓고 외출을 허는 거와 마찬가지여.이웃집, 저 가까운 집, 먼 집으로 밤낮 나들이만 다니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귀를 통해서 어떠헌 소리를 들을 때에도, 밤낮 듣는 그 경계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살면 그것도 역시 내 집은 비워 놓고 밤낮 남의 집으로만 돌아댕긴 거와 마찬가지여.
코를 통해서 냄새 맡은 것도 그렇고, 혀를 통해서 맛 볼 때에도 그렇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감촉할 때에도 그렇고, 생각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의식을 헐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진경계(六塵境界)에 항시 끄달려서 사는 사람은 일 년에 단 하루도 자기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고 밤낮 밖으로만 쏘아 다니는 가정주부와 같애서 그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겨우 잘 때나 자기 집에 들어오고, 눈만 떴다 하면 밖으로 돌아치면 그거 어떻게 되겠느냐 그말이여. 심지어 잘 때에는 꿈을 통해서 또 밖으로 쏴 다닌다 그말이여.
그래서 우리 참선을 허지 아니한 중생은 이렇게 해서 내 집 살림은 엉망이 되아 가지고,그놈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육진경계에 끄달려서 돌아댕기느라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면서 온갖 죄업(罪業)만 퍼지어서 빚만 잔뜩 지어놓고는, 죽어 갈 때에는 노잣돈 한푼 없이 빚 문서만 짊어지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으로 끌려가서 뒈지게 뚜들겨 맞기만 허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허셔서 중생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출가허셔 가지고 갖은 고행을 허시다가 마침내 바른 수행법을 체득을 허셔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셔서 그 깨달은 법을 49년 동안에 걸쳐서 고구정녕하게 중생들에게 그 길을 일러 주신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 참선을 한다. 최상승법이라 하니까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책 한권, 경(經)도 별로 읽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잘 모릅니다. 참! 더군다나 참선을 어떻게 제가 허겠습니까?』 이렇게 미리 겁을 집어먹고 참선을 허기를 꺼려하고,
『불교 초보자가 읽을 만한 무슨 좋은 책이 없겠느냐?』 『무슨 경전을 읽으면 좋겠느냐?』 이렇게 문의들을 허십니다마는, 불교 초보자가 읽을 만한 무슨 책을 많이 읽고, 무슨 경을 또 많이 읽고, 그래야만 참선을 잘 허게 되냐 허면 그것도 아니고,
또 요새 참선에 관한 여러 종류의 책이 모다 나왔습니다마는,그러헌 책을 읽어야만 - ‘그래도 참선에 대해서 무엇인가 좀 이해를 하고 좀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해야지 아무 것도 몰라 갖고 어떻게 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시지만,절대로 이 책 저 책 읽어봤댔자 책마다 다 말이 다르고, 또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무슨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많이 읽고 알아야만 되는 것이라고 허는 생각을 가지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책 저런 책 모다 그런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에 이 참선을 바로 해 가는데 좋지 못한 영향을 받을 염려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 책 저 책을 많이 읽으신 분은 그 책에 읽은 내용을 깨끗이 다 놔 버리고 잊어버리시고,아직 그런 책을 읽지 않고 ‘앞으로 좀 내가 무슨 참선에 대한 책, 불경(佛經)에 대한 번역해 놓은 책이라도 좀 읽어보리라.’ 그러헌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런 책을 읽고 나서 참선을 헐랴고 허는 생각을 쉬어버리시고,
읽기 전에, 먼저 참선의 바른 법을 알아 가지고 당장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는 공부 먼저 시작을 허시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처음~20분49초)
*(게송)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 ;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 야부 스님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얼토당토않다 ; (일이나 말 따위가)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법왕(法王) : [범] dharmara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육진(六塵)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과 같음.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진(塵)이라 함.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과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노잣돈(路資돈) ; ①먼 길을 오가는 데 드는 돈. ②죽은 사람이 저승길에 편히 가라고 상여 등에 꽂아 주는 돈.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확철대오(廓徹大悟) ; 큰 깨달음. 내가 나를 깨달음.